대공황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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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12.03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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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때 독일이 펼친 정책이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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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929년 전 세계적인 대공황독일을 강타했다.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 정부는 재정 긴축과 디플레이션 정책을

추구하며 1932년까지 거의 30%의 실업률을 초래했다.

독일

298개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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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연방공화국

Bundesrepublik Deutschland

표어

독일어: 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

표어 설명

통일과 정의와 자유

Duration: 1 minute and 15 seconds.1:15

독일(독일)

바르벨 바스

스테판 하르바스

성립

분단

357,386 km2 (62 위)

2.416%

CET (UTC+1)

CEST (UTC+2)

2022년 어림

8370만명 (19위)

230.9명/km2 (50위)

2019년 어림값

• 전체

$4조 5555억 (5위)

• 일인당

$54,983 (19위)

GDP(명목)

2019년 어림값

0.936 (5위, 2017년 조사)

종교

가톨릭 16.2%

무종교 60.8%

기타

.de

+49

¹ 2002년 이전은 독일 마르크(DM)

독일연방공화국[a], 약칭 독일[b]중앙유럽에 위치한 국가이다. 인구는 2022년 기준 83,695,430명으로 유럽에서 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자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다. 독일은 북쪽으로 발트해북해와 남쪽으로 알프스 산맥의 사이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덴마크, 동쪽으로 폴란드체코, 남쪽으로 오스트리아스위스, 서쪽으로는 베네룩스 3국[c]프랑스와 접해 있다. 독일의 영토는 357,021km2이며, 기후는 주로 온대 기후를 보인다. 공용어독일어이고, 그 외에 소수 민족들의 언어인 러시아어, 영어, 소르브어, 덴마크어, 프리지아어 등도 쓰인다. 독일의 수도이자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베를린이고, 주요 금융 중심지는 프랑크푸르트, 가장 넓은 도시권은 루르이다.

고대부터 다양한 게르만 부족이 현대 독일의 북부 지역에 거주했으며, 이 지역은 기원전 100년 이전부터 게르마니아라는 이름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962년에 형성된 독일 왕국신성 로마 제국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후 16세기 동안 북독일 지역은 종교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이후에 독일에서는 독일 연방이 결성되었다.

1866년 8월 18일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북독일 연방이 수립되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통해 1871년 독일 제국이 성립되면서 독일은 현대의 국민 국가로의 공식적인 통일이 이루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11월 혁명 이후, 제국은 대통령제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재편되었다. 나치의 집권은 독일의 전체주의 독재, 제2차 세계 대전홀로코스트를 만들어냈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동시에 성립된 연합국 점령지 기간이 끝난 후 독일 전체는 일반적으로 서독이라고 불리는 '독일연방공화국'과, 동독으로 불리는 '독일민주공화국'이라는 제한된 주권을 가진 두 개의 개별 국가로 조직되었다.[d]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은 유럽 경제 공동체(EEC)와 유럽 연합(EU)의 창립 회원국이었고,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은 동구권 국가이자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회원국이었다. 동독에서 공산주의 정부몰락한 이후 독일이 재통일되어 이전 독일의 주들은 1990년 10월 3일 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입하여 독일은 연방 의회 공화국이 되었다.

독일은 강력한 경제를 가진 강대국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이고 명목 GDP로 세계 4위,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세계 5위인 경제를 가지고 있다. 산업, 과학과 기술 분야의 글로벌 강국으로서 세계 3위의 수출국이자 수입국이다. 선진국으로서 사회보장제도, 의료 서비스와 무상 교육을 제공한다. 독일은 국제 연합(UN), 유럽 연합(EU),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유럽 평의회(CoE), G7, G20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회원국이다. 또한 독일은 세 번째로 많은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국명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의 국명도이치 (어원)입니다.

독일 자국 내에서의 표기인 Deutschland(도이칠란트), 원래 diutisciu land(독일의 땅)은 deutsch(Cf. Dutch)에서 유래되었다. 이 Deutsch일반적인 평민들의 언어라틴어, 로망스어군와 그 후대 언어들로부터 구분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인도유럽조어 단어 tewtéh₂(사람들)과 þeudō에서 유래된 게르만조어 단어 þiudiskaz(사람들의)에서 유래되었다.[2]

독일 국외에서 독일의 국명은 세계 각국에서 다양하게 불린다. 대표적으로 영어로 '절머니'(Germany),[e] 프랑스어 '알마뉴'(Allemagne), 폴란드어 '니엠치'(Niemcy), 중국어 '더궈'(德国) 등이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쓰이는 '독일'이라는 한국어 명칭은 일제강점기일본어한자 음차 표기인 '도이쓰'(일본어: 独逸)[f]를 받아들여 이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며,[4] 그 전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덕국'(德國)이라 불렀다. 해방 후에는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없애고 독일어 원발음에 좀 더 가깝게 하기 위해 '도이칠란트'로 표기하기도 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이 표기법이 정착하지 못하였고,[5][g] 현재는 대한민국 주재 대사관에서도 스스로를 '주한 "독일" 대사관'으로 일컫고 있다.[h]

역사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의 역사입니다.

인류 이전의 조상인 '다누비우스 구겐모시'[i]는 1,100만 년 전에 독일에 살았으며, 직립보행하는 가장 초기의 사람과 유인원 중 하나로 이론화되었다.[6] 고대 현 인류는 최소한 60만 년 전에 독일에 존재했다.[7] 최초의 현 인류가 아닌 화석(네안데르탈인)은 독일 네안데르 계곡에서 발견되었다.[8]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악기인 약 4만 2천 년 된 플루트,[9] 약 4만 년 된 사자 인간,[j][10] 약 3만 5천 년 된 홀레 펠스의 비너스[11] 등을 포함하여 유사한 연대의 현 인류의 증거들이 슈베비셰 알프라는 산에서 발견되었다.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네브라 하늘원반은 독일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12]

게르만 부족과 프랑크 제국

이 부분의 본문은 게르만족, 게르마니아, 게르만족의 대이동프랑크 왕국입니다.

4세기 로마 제국의 일부였던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k]의 모형

게르만족북유럽 청동기 시대 혹은 초기 청동기 시대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13][14]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부와 북독일에서 그들은 남쪽, 동쪽, 서쪽으로 확장하여 켈트족, 이란족, 발트족, 슬라브족과 접하게 되었다.[15]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로마 제국은 게르만 부족들이 거주하는 땅을 침략하기 시작하여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에 게르마니아 속주를 만들었다. 서기 9년, 세 개의 로마 군단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아르미니우스에게 패배했다.[16] 이 전투의 결과로 인해 게르마니아를 지배하려는 로마인들의 야망을 단념시켰고, 따라서 이는 유럽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여겨진다.[17] 서기 100년 타키투스가 《게르만족의 기원과 현황》을 썼을 때, 게르만 부족들은 라인강과 다뉴브강(리메스 게르마니쿠스)을 따라 정착하여 현대 독일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바덴뷔르템베르크, 남부 바이에른, 남부 헤센과 서부 라인란트로마의 속주편입되었다.[18][19][20]

260년 경에 게르만족이 로마가 지배하는 땅에 침입했다.[21] 375년 훈족의 침공 이후인 395년부터 로마가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게르만 부족들은 남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곳에 정착한 게르만족들은 프랑크 왕국을 설립하고 작센바이에른을 정복하기 위하여 동쪽으로 이동했으며, 현대 독일의 동부 지역에는 서슬라브족이 거주했다.[18]

동프랑크와 신성 로마 제국

이 부분의 본문은 동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입니다.

1483년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난 마르틴 루터로마 가톨릭교회에 도전하여 종교 개혁개신교를 일으켰다.

카롤루스는 800년 카롤루스 제국을 세웠으나, 이 제국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분할되었다.[22] 동프랑크 왕국의 동쪽의 후대 왕국은 서쪽으로는 라인강에서 동쪽으로는 엘베강까지, 북쪽으로 북해에서 남쪽 알프스 산맥까지 뻗어 있었다.[22] 그 후 신성 로마 제국이 등장하였고, 오토 왕조 시기(919-1024)에 여러 주요 부족공국들을 통합했다.[23] 996년 오토 3세는 자신이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한 직후 자신의 친척 그레고리오 5세를 교황으로 임명해 그레고리오 5세는 독일계 최초의 로마 교황이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잘리어가 시기(1024-1125)에서 북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를 흡수했지만 이 시기에 서임권 투쟁으로 인해 황제는 권력을 잃었다.[24]

호엔슈타우펜가 시기(1138-1254)에서 독일 왕자들은 남쪽과 동쪽으로의 독일인 정착을 장려하는 동방식민운동을 벌였다.[25] 대부분의 북독일의 도시들은 한자 동맹의 일원으로서 무역의 확장을 통해 번영했다.[26] 인구는 1315~1317년의 대기근으로 인해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뒤따라 1348~1350년 흑사병이 퍼졌다.[27] 1356년에 발표된 금인칙서는 제국의 헌법 구조를 정립하였으며, 7명의 선제후에 의한 황제 선출을 성문화했다.[28]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유럽에 활자 인쇄술을 도입하여 지식의 민주화의 토대를 마련했다.[29] 1517년 마르틴 루터는 개신교 종교 개혁을 선전하였으며, 그의 성경에 대한 해석은 언어의 표준화를 불러 일으켰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복음주의' 신앙(루터교회)을 용인했으나, 동시에 군주의 신앙이 신하들의 신앙이 되어야 함(Cuius regio, eius religio)을 선언했다.[30] 쾰른 전쟁부터 30년 전쟁(1618-1648)에 이르는 종교 분쟁은 독일의 땅을 황폐화시켰고 인구를 크게 줄였다.[31][32]

베스트팔렌 조약은 제국 영지의 통치자들 간의 사이의 종교 전쟁을 종식시켰다.[31] 영지의 대부분 독일어를 사용하는 통치자들은 로마 카톨릭교회루터교회 또는 개혁 신앙을 공식 종교로 선택할 수 있었다.[33] 일련의 '제국 개혁'(약 1495-1555)에 의해 시작된 법률 체제는 상당한 지방 자치권과 강력한 제국 의회를 만들었다.[34] 합스부르크가는 1438년부터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할 때까지 제국의 황제 직위를 가졌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엑스라샤펠 조약에 따라 샤를 6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왕후로 황제가 된 남편 프란츠 1세와 함께 제국을 통치했다.[35][36]

1740년부터 합스부르크 군주국프로이센 왕국 사이의 이원론이 독일의 역사를 지배했다. 1772년, 1793년, 1795년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제국과 함께 폴란드 분할에 동의했다.[37][38]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제국 의회의 최종 회의 기간 동안 대부분의 자유제국도시는 왕조의 영토에 합병되었고, 교회의 땅도 마찬가지로 세속화되고 합병되었다. 끝끝내 1806년 제국은 해체되었다.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독일 내의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39]

독일 연방과 제국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 문제, 독일 연방, 독일의 통일, 독일 제국독일 식민제국입니다.

1815년의 독일 연방.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의 빈 회의39개의 주권 국가들로 구성된 느슨한 동맹인 독일 연방을 수립했다. 오스트리아의 황제를 연방 의장으로 임명한 것은 프로이센의 영향력 증대에 대한 의회의 거부 의사를 반영한 것이다. 복원된 정치 내의 의견 충돌은 부분적으로 자유주의 운동의 부상으로 이어졌고, 이 운동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후작에 의한 새로운 탄압을 받았다.[40][41] 독일의 관세동맹(Zollverein)은 체제가 확립된 후 독일의 경제적 통합을 촉진시켰다.[42] 유럽의 혁명 운동에 영향을 받은 들과 평민들은 독일 문제를 제기하면서 독일의 여러 국가들에서 1848년 혁명을 시작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황제의 칭호를 받고도 권력을 잃었고, 이에 반발한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제안한 왕관과 헌법을 거부했으며, 이는 독일에서 자유주의 운동의 일시적인 중단이었다.[43]

빌헬름 1세는 1862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프로이센의 총리로 임명했다. 비스마르크는 1864년 덴마크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냈으며, 결정적으로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그는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북독일 연방을 수립할 수 있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한 이후, 독일의 군주들은 1871년에 독일 제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프로이센은 새로운 제국 내에서 제국을 지배하는 성격의 구성국이었고, 이로 인해 프로이센의 국왕이 독일의 황제였으며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은 독일의 수도가 되었다.[44][45]

독일의 통일 이후 그륀더차이트 시대에 독일 총리로서의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은 새로운 동맹을 구축하고 전챙을 피하여 강대국 독일의 지위를 확보했다.[45] 그러나 빌헬름 2세 치하에서 독일은 신제국주의적 노선을 취하며 주변국과 마찰을 빚었다.[46] 이 시기 독일은 다민족 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이중 동맹을 구축하였고 1882년 삼국 동맹을 구축하면서 이탈리아를 동맹으로 끌여들었다. 영국, 프랑스와 러시아 3국은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의 이익에 대한 합스부르크의 간섭, 혹은 프랑스에 대한 독일의 간섭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47] 1884년 베를린 회담에서 독일은 동아프리카, 남서아프리카, 토골란드(토고)와 카메룬을 포함한 여러 식민지의 영유권을 주장했다.[48] 나중에 독일은 식민 제국을 확장하여 태평양과 중국의 영토를 얻었다.[49] 1904년부터 1907년까지 남서아프리카(현 나미비아) 식민 정부는 반란에 대한 대응으로 현지 헤레로인과 나마인들을 말살했으며,[50][51] 이것은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이었다.[51]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자를 암살한 사라예보 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를 침공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을 개전할 구실을 제공했다. 약 2백만 명의 독일인이 사망한 4년 간의 전쟁 끝에,[52] 일반적인 휴전이 전쟁을 종식시켰다. 1918년 11월 독일 혁명에서 빌헬름 2세와 집권 제후들은 직위를 포기했으며 독일은 연방공화국을 선포했다. 독일의 새로운 지도부는 1919년 연합국으로부터의 패배를 인정하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독일인들은 이 조약을 굴욕적이라고 생각했고, 역사가들은 이러한 분위기가 아돌프 히틀러의 부상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았다.[53] 독일은 유럽 영토의 약 13%를 잃었고 아프리카와 태평양에 있는 모든 식민지 영토를 승전국에 할양했다.[54]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독일

이 부분의 본문은 바이마르 공화국나치 독일입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인 1942년 독일이 점령한 유럽의 지도. 검은색 부분이 나치가 점령한 곳이다.

1919년 8월 11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은 민주적인 바이마르 헌법에 서명했다.[55] 이어지는 권력 싸움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바이에른에서 권력을 장악했고, 다른 곳의 보수 세력들은 카프 폭동을 일으켜 공화국을 전복하려고 시도했다. 주요 산업 중심지에서의 거리 전투, 벨기에와 프랑스군에 의한 루르 점령에 더해 초인플레이션 기간이 뒤따랐다. 부채 구조 조정 계획과 1924년의 새로운 통화 생성은 예술적 혁신과 자유로운 문화 생활의 시대인 '황금의 20년대'를 열었다.[56][57][58]

1929년 전 세계적인 대공황이 독일을 강타했다.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 정부는 재정 긴축과 디플레이션 정책을 추구하며 1932년까지 거의 30%의 실업률을 초래했다.[59]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은 1932년 특별선거 이후 독일의회에서 가장 큰 정당이 되었고 이내 1933년 1월 30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했다.[60] 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 이후, 새로운 법령은 기본적인 시민권을 폐지했고 최초의 나치 강제 수용소가 열리게 만들었다.[61][62] 1933년 3월 23일, 전권 위임법은 헌법을 무시하고[63] 히틀러에게 무제한적인 입법권을 부여하여 나치 독일의 시작을 알렸다. 히틀러의 정부는 중앙 집권화된 전체주의 국가를 수립하고 국제 연맹에서 탈퇴했으며 재무장을 선언하며 군대를 극적으로 늘렸다.[64] 공공 사업에 중점을 둔 경제 재건을 위한 정부의 후원 프로그램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라이히스아우토반(Reichsautobahn) 정책이었다.[65]

1935년 히틀러 정권은 베르사유 조약을 어기고 유대인과 기타 소수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뉘른베르크법을 도입했다.[66] 또한 독일은 1935년 자르의 통제권을 다시 획득했고,[67] 1936년 라인란트를 재무장시켰으며,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같은 해 뮌헨 협정을 통해 주데텐란트를 합병하였다. 1939년 3월 협정을 위반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점령하였다.[68] 수정의 밤(Kristallnacht)에 히틀러 정권은 시나고그를 불태우고 유대인 기업을 파괴하며 유대인들을 대량으로 체포했다.[69]

1939년 8월, 히틀러 정부는 동유럽을 소련과 독일의 세력권으로 나누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했다.[70]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며[71]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72] 1940년 봄,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프랑스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프랑스 정부가 휴전 협정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영국 본토 항공을 통해 독일군의 공습을 격퇴했다. 1941년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소련을 침공하였다. 1942년까지 독일과 그 동맹국들은 유럽의 대부분북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하고 북아프리카를 연합국에게 다시 빼앗기고, 1943년 연합국이 이탈리아에 상륙한 이후 독일군은 반복되는 군사적 패배를 겪었다. 1944년 소련은 동유럽을 점령했고, 서방 연합국은 프랑스에 상륙하여 독일의 마지막 반격을 이겨내고 독일에 입성했다. 베를린 공방전 도중 히틀러가 자살한 후, 독일은 1945년 5월 8일 항복 문서에 서명하여 유럽[72][73]과 독일에서의 제2차 세계 대전을 종식시켰다.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나치 관료들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전쟁범죄로 재판을 받았다.[74][75]

나중에 홀로코스트로 알려지게 되는 나치 독일 정부의 정책은 독일 내의 소수 민족들을 유럽 전역의 강제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에 억류하는 것과 같이 소수 민족을 박해했다. 총 1,700만 명이 조직적으로 살해당했는데, 여기에는 유대인 600만 명, 롬인 최소 13만 명, 27만 5천 명의 장애인, 수천 명의 여호와의 증인, 동성애자 수천 명, 정치와 종교적인 반대자 수십만 명이 포함된다.[76] 독일 점령지에서 독일의 정책으로 인해 폴란드인 약 270만 명,[77] 우크라이나인 130만 명, 벨라루스인 100만 명, 소련의 전쟁 포로 350만 명이 사망했다.[78][74] 독일군의 사상자는 530만 명으로 추산되며,[79] 독일의 민간인 약 90만 명이 사망했다.[80] 약 1,200만 명의 독일인들이 동유럽 전역에서 추방되었고 독일은 전쟁 전 영토의 약 4분의 1을 잃었다.[81]

동독과 서독

이 부분의 본문은 분단 시대의 독일, 연합군 점령하 독일, 서독동독입니다.

1947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의 점령지프랑스가 합병한 자르 보호령을 포함하는 지도. 오데르-나이세선의 동쪽 영토는 포츠담 회담에 따라 폴란드와 소련에 양도되었다.[82]

나치 독일이 항복한 후 연합군베를린과 남은 독일의 영토를 4개의 점령 지역으로 분할했다. 프랑스, 영국, 미국이 통제하는 서부 지역은 1949년 5월 23일 독일 연방공화국(독일어: Bundesrepublik Deutschland, 서독)이 형성되면서 하나로 합쳐졌고, 1949년 10월 7일 소련이 점령한 지역은 독일 민주공화국(독일어: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동독)으로 재편되었다. 이 국가들은 비공식적으로 '서독'과 '동독'으로 불렸다.[83] 동독은 동베를린을 수도로, 서독은 을 임시 수도로 선택하여 두 국가 분할은 일시적인 것임을 강조했다.[84]

서독은 '사회적 시장경제'를 가진 연방 의회 공화국으로 설립되었고, 1948년부터 서독은 미국의 마셜 플랜에 따라 재건을 위한 원조를 받는 주요한 국가가 되었다.[85] 콘라트 아데나워는 1949년 독일의 첫 연방총리로 선출되었으며, 독일은 1950년대 초부터 장기적인 경제 성장(Wirtschaftswunder)을 누렸다.[86] 서독은 1955년에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했고 유럽 경제 공동체(EEC)의 창립국이었다.[87] 1957년 1월 1일, 자르는 서독에 가입하여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88]

동독은 소련으로부터 점령군과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통해 정치적, 군사적으로 통제받는 동구권 국가였다. 동독이 자신이 민주주의 국가임을 주장했지만 모든 정치적 권력은 비밀 정보 기관인 국가보안부의 지원을 받는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부(폴리트뷰로)에 의해서만 행사되었다.[89] 동독의 선전이 동독의 사회 프로그램의 혜택과 서독의 침략 위협에 근거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동독의 시민들은 자유와 번영을 위해 서독을 찾았다.[90] 1961년에 세워진 베를린 장벽은 동독 시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았고 나중에 이 장벽은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91]

동독과 서독 사이의 긴장감은 1960년대 후반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 정책(Ostpolitik)에 의해 완화되었다.[92] 1989년 헝가리는 철의 장막을 해제하고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하기로 결정했고, 이로 인해 수천 명의 동독의 시민들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기적인 대중 시위들이 점점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던 동독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동독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로 동독 당국은 국경 제한을 완화했지만, 실제로는 독일이 완전한 주권을 되찾은 2+4 조약으로 분수령이 되는 개혁 과정이 과속화되었다. 이로 인해 1990년 10월 3일 구 동독의 재건된 5개의 주가 독일 연방공화국에 가입하면서 독일의 재통일이 허용되었다.[93]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공산주의의 몰락, 소련의 붕괴, 독일의 재통일과 전환점(Die Wende)의 상징이 되었다.[94]

통일 독일과 유럽 연합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의 재통일재통일 이후 독일의 역사입니다.

1989년 붕괴된 베를린 장벽브란덴부르크 문(사진)은 냉전 종식의 첫 번째 발전 중 하나였으며 이는 최종적으로 소련의 해체로 이어졌다.

통일 독일은 서독의 확장된 연장선으로 여겨지며 각종 국제 조직의 회원 자격들을 유지했다.[95] 1994년 '베를린-본 법'에 의거하여 베를린은 다시 독일의 수도가 되었으며, 본은 일부 연방 부처를 유지하는 연방 도시(Bundesstadt)라는 독특한 지위를 얻었다.[96] 정보 이전은 1999년에 완료되었고, 동독 경제의 현대화는 2019년까지 지속되었다.[97][98]

통일 이후 독일은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2007년 리스본 조약에 서명하고[99] 유로존을 공동 설립하는 등 유럽 연합(EU)에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00] 독일은 발칸 반도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평화유지군을 파견했고, 탈레반 축출 이후 아프가니스탄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NATO의 노력의 일부로 독일군을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했다.[101][102]

2005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앙겔라 메르켈은 최초의 독일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2009년 독일 정부는 500억€(유로) 규모의 경기 부양 계획을 승인했다.[103] 21세기 초 독일의 주요 정치 프로젝트 중에는 유럽 통합의 진전, 지속 가능한 에너지 공급을 위한 에너지 전환(Energiewende), 균형 잡힌 예산을 위한 부채 억제, 출산율 증가 정책(출생주의), 인더스트리 4.0으로 요약되는 독일 경제의 전환을 위한 첨단전략 등이 있다.[104] 2015년 유럽 난민 위기 동안, 독일은 백만 명 이상의 난민과 이주민을 받아들였다.[105]

자연 환경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의 지리입니다.

독일의 지형도.

독일의 면적은 357,021km2로, 육지 면적 349,223km2와 내수면 면적 7,798km2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럽에서 7번째로 영토가 넓은 국가이다.[106] 독일은 북쪽으로 덴마크, 동쪽으로 폴란드체코, 남동쪽으로 오스트리아와 남서쪽으로 스위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북서쪽으로 네덜란드와 맞닿아 있다. 독일은 북서쪽으로 북해를, 북동쪽으로 발트해와 마주하고 있다.

독일의 해발고도는 남쪽의 고도가 높은 알프스 산맥(가장 높은 점: 추크슈피체산의 2,962m)에서 고도가 낮은 북서쪽의 북해 해안과 북동쪽의 발트해까지 다양하다. 독일 중부에 숲이 우거진 고지대와 북부의 저지대(가장 낮은 점: '빌슈테르마르슈, 노이엔도르프-작센반데', 해발 3.54m[107])에는 라인강, 다뉴브강, 엘베강 등의 주요한 여러 강이 가로지른다. 독일의 주요한 천연 자원들에는 철광석, 석탄, 칼륨, 목재, 갈탄, 우라늄, 구리, 천연 가스, 소금과 니켈 등이 있다.[106]

기후

독일은 북쪽과 서쪽의 해양성 기후부터 대륙성 기후에 이르는 다양한 종류의 온대 기후를 가지고 있다. 겨울에는 일반적으로 강수량이 많지 않은 흐린 날씨로 남쪽의 알프스의 추운 날씨부터 서늘한 날씨가 있으며, 여름에는 덥고 건조한 날씨부터 시원하고 비가 오는 날씨까지 다양하다. 북부 지역은 북해에서 습한 공기를 받아 기온을 낮추고 강수량을 증가시키는 편서풍이 우세하다. 반대로, 남동부 지역은 더 극단적인 일교차를 보인다.[108]

2019년 2월부터 2020년까지 독일의 월평균 기온은 2020년 1월 최저 온도 3.3 °C (37.9 °F)에서 2019년 6월 최고 온도 19.8 °C (67.6 °F)까지 다양했다.[109] 월 평균 강수량은 2019년 2월 4월 제곱미터당 30리터에서 2020년 2월 제곱미터당 125리터까지 다양했다.[110] 월 평균 일조시간은 2019년 11월 45시간에서 2019년 6월 300시간까지 다양했다.[111]

생물

독일 바이에른주에 위치한 베르히테스가덴 국립공원(Berchtesgaden National Park).

독일의 영토는 대서양 혼합림, 발트 혼합림, 중앙유럽 혼합림, 알프스 혼합림과 서유럽 활엽수림 등으로 5개의 생태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112] 2016년 기준으로 독일 국토의 51%는 농업 지역으로, 30%는 숲으로, 14%는 주거지와 기반 시설들을 포함한 도시로 덮여 있다.[113]

독일에 있는 식물과 동물은 일반적으로 중앙유럽에 흔히 분포한 것들이다. 독일 국립산림목록에 따르면 숲의 60%는 대부분 가문비나무속소나무속으로 이루어진 침엽수로 덮여 있으며, 나머지 40%는 대부분 너도밤나무속, 참나무속과 기타 낙엽성 나무들이 차지한다.[114] 또한 독일에는 많은 종류의 양치류, , 균계이끼류 생물들이 있다. 독일의 야생동물로는 노루, 멧돼지, 무플런, 여우, 오소리, 토끼와 소수의 비버가 있다.[115] 푸른색 수레국화는 과거에 독일의 국화이기도 했다.[116]

독일의 국립공원은 모두 16개[l]이다. 이에 더해 17개의 생물보전지역,[118] 105개의 자연 공원[119]과 400개 이상의 동물원이 위치한다.[120] 1844년부터 운영된 베를린 동물원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종의 동물을 가지고 있다.[121]

정치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의 내각제입니다.

독일은 의원내각제대의 민주제를 답변확정한 연방공화국이다. 연방공화국의 입법권독일 연방의회(Bundestag)와 독일 연방상원(Bundesrat)으로 구성된 의회가 가지고 있다. 연방의회는 직접 선거를 통해 혼합형 비례대표제를 실시하고, 연방상원은 16개 연방주 정부에 의해 임명되며 각각의 연방주를 대표한다.[106] 독일의 정치 체제는 독일 기본법(Grundgesetz)으로도 불리는 1949년 제정된 헌법에 명시된 틀에 따라 운영된다. 기본법 개정안은 일반적으로 연방의회와 연방상원 모두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이루어지며, 인간의 존엄성, 권력 분립, 연방공화국의 구조와 법치주의를 보장하는 조항을 통해 기본법의 원칙은 영원히 유효하다.[122]

현재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국가원수로서 국가를 대표하는 책임과 권한을 부여받는다. 대통령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서만 소집되는 연방총회(Bundesversammlung)에 의해 선출된다.[106] 연방공화국의 두 번째로 높은 지위에 있는 공무원은 연방의회 의장(Bundestagspräsident)으로, 연방의회에서 선출되며 연방의회의 각종 회의를 감독하는 책임을 갖는다.[123] 세 번째로 높은 지위에 있는 공무원이자 정부수반총리로, 연방의회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보유한 정당이나 연립정당에 의해 선출되어 임명된다.[106] 현재 올라프 숄츠 총리는 정부수반으로서 연방내각을 통해 행정권을 행사한다.[106]

1949년 이후 정당 체제는 기독교민주연합(CDU)과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장악한 채로 유지되었으며, 지금까지의 모든 총리는 이 두 정당의 하나에 속해 있었다. 그럼에도 소규모 정당인 자유민주당(FDP)과 동맹 90/녹색당(GRÜNE) 등은 연립정부의 하급 구성 파트너로서 정부에 속했다. 반면 2007년 이후에 연방의회에서 주요한 세력으로 자리잡은 민주사회주의 정당인 좌파당은 정부에 속한 적이 한 번도 없다. 2017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는 우익 포퓰리즘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독일 연방의회에서 처음으로 의석을 얻어낼 만큼 많은 표를 얻었다.[124][125]

행정 구역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의 주, 독일의 연방제독일의 행정 구역입니다.

독일은 연방제 국가이며 전체적으로 16개의 연방주(Länder)로 구성되어 있다.[126] 각 연방주는 각각 자체 헌법을 가지고 있으며,[127] 연방주 내의 조직과 관련해 주로 자율적인 권한을 갖는다.[126] 2017년 독일은 401개의 (Kreise)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군은 294개의 지역군(Landkreis, 농촌 지역)과 107개의 군급시(Kreisfreie Stadt, 도시 지역)로 이루어져 있다.[128]

주도

면적 (km2)[129]

인구 (2018)[130]

GDP (10억 , 2015)[131]

1인당 GDP (, 2015)[131]

35,751

11,069,533

461

42,800

70,550

13,076,721

550

43,100

892

3,644,826

125

35,700

29,654

2,511,917

66

26,500

420

682,986

32

47,600

755

1,841,179

110

61,800

21,115

6,265,809

264

43,100

23,214

1,609,675

40

25,000

47,593

7,982,448

259

32,900

34,113

17,932,651

646

36,500

19,854

4,084,844

132

32,800

2,569

990,509

35

35,400

18,416

4,077,937

113

27,800

20,452

2,208,321

57

25,200

15,802

2,896,712

86

31,200

16,202

2,143,145

57

26,400

독일 전체

357,386

83,019,213

3025

37,100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의 법독일의 사법부입니다.

독일은 게르만법을 참조하고 주로 로마법에 기반을 둔 시민법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132] 연방헌법재판소(Bundesverfassungsgericht)는 사법심사 권한을 갖고 헌법 문제를 담당하는 독일의 대법원이다.[133] 독일의 사법체제는 민사와 형사 사건의 경우 최고 항소 법원은 연방사법원(Bundesgerichtshof)이고, 그 외의 사건의 경우에는 연방노동법원, 연방사회법원, 연방재정법원연방행정법원 등의 법원이 맡는다는 형식으로 전문화되어 있다.[134]

형법은 독일 형법(Strafgesetzbuch)으로, 사법의 경우 독일 민법(Bürgerliches Gesetzbuch)으로 연방 차원에서 성문화되어 있다. 독일의 처벌 제도는 범죄자의 재사회화와 공익 보호를 추구한다.[135] 한 명의 전문 판사 앞에서 재판을 받는 경범죄와 심각한 정치범죄를 제외하고, 모든 혐의는 참심원(Schöffen)과 전문 판사가 재판하는 참심제를 통해 재판이 이루어진다.[136][137]

2016년 기준 독일의 인구 10만 명 당 살인율은 1.18명으로 낮은 편이다.[138] 2018년에는 전체 범죄율이 1992년 이후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감소하였다.[139]

독일은 2017년부터 동성결혼을 합법화시켰으며, 성소수자 권리는 일반적으로 국가에게 보호받는다.[140]

외교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의 대외 관계입니다.

2022년 독일은 바이에른 슐로스 엘마우(Schloss Elmau)에서 G7 회의를 개최했다.

독일은 227개의 해외 외교 사절단을 보유하고 있으며,[141] 이 중에서 190개국 이상의 국가와 대외 관계를 가지고 있다.[142] 또한 독일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G7, G20, 세계은행국제 통화 기금(IMF)의 회원국이다. 독일은 유럽 연합의 창립 이후 유럽 연합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1990년 이후로 프랑스를 포함한 모든 주변국들과 강력한 동맹을 유지해 왔다. 독일은 보다 통합된 유럽의 정치, 경제와 안보 기관의 창설을 촉구한다.[143][144][145] 독일 정부와 미국 정부는 긴밀한 정치적 동맹국이며,[146] 문화적 유대감과 경제적 이해 관계로 인해 형성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대서양주의가 만들어지는 데에 큰 역할을 맡았다.[147] 1990년 이후 독일과 러시아에너지 개발을 중요한 목표로 삼는 '전략적 파트너십'을 구축하기 위해 협력했다. 이 결과로 독일은 자국에서 소비하는 대부분의 천연가스와 원유를 러시아로부터 수입하게 되었다.[148][149]

독일의 경제발전정책은 외교정책의 독립된 영역으로, 이 일은 연방경제협력개발부가 수행한다. 독일 정부는 경제협력의 발전 정책을 국제 사회의 공동의 책임으로 보고 있다.[150] 2019년에 독일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해외 원조를 한 국가가 되었다.[151]

국방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 연방방위군입니다.

독일의 장갑차 TPz 푹스의 모습.

독일의 군대인 독일 연방방위군(Bundeswehr)은 독일 육군(Heer), 독일 해군(Marine), 독일 공군(Luftwaffe), 중앙구호업무군(Zentraler Sanitätsdienst der Bundeswehr), 전력기반군(Streitkräftebasis)과 사이버정보군(Cyber- und Informationsraum)으로 구성되어 있다. 절대적으로 독일의 군사비 지출은 전 세계에서 7번째로 높다.[152] 2018년 독일의 군사비 지출은 495억$로, 국내총생산의 약 1.2%를 차지했으며 이는 NATO의 목표였던 2%보다 훨씬 낮았다.[153][154] 그러나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응하여 올라프 숄츠 총리는 군사비 지출을 NATO의 목표치인 2%를 초과하여 2022년에 일시적으로 1,000억€를 투입할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이는 2021년 국방예산인 530억€의 거의 2배에 달한다.[155][156]

2020년 1월 기준으로 독일 연방방위군은 184,001명의 현역 군인과 80,947명의 예비군을 가지고 있다.[157] 예비군은 군대에 투입될 수 있으며 방어 훈련과 해외 배치에 참여했다.[158] 2011년까지 독일 남성들은 18세부터 의무적으로 군에 복무해야 했으나, 2011년 이후 공식적으로 이를 유예하고 모병제로 전환했다.[159][160] 2001년부터 독일 여성들은 제한 없이 군대에 자원으로 복무할 수 있다.[161]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에 따르면, 독일은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양의 무기를 수출한 국가였다.[162]

평소에 연방방위군은 국방장관의 지휘를 받으며, 방어 상황(전시 상황)에서는 총리가 군 통수권자가 된다.[163] 독일 기본법에서는 연방방위군이 국가 방어의 역할만 맡는다고 성문화되어 있다. 그러나 1994년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 이후 '방어'라는 용어는 독일 국경의 보호뿐만 아니라 위기 대응과 분쟁 예방, 더 광범위하게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독일의 보안을 수호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2017년 독일 연방방위군은 이슬람 국가(IS)에 대한 지원 작전에 약 1,200명, NATO가 주도하는 확고한 지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서 980명, 그리고 코소보에 800명을 포함하여 국제 평화 유지군의 일부로 약 3,600명의 병력이 해외에 주둔하고 있다.[164][165]

경제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의 경제독일의 과학 기술입니다.

유럽 전체의 비즈니스 중심지이자 유럽 중앙은행 건물이 위치한 프랑크푸르트암마인.[166]

2014년 유럽 중앙은행 건물 앞에서 긴축 정책 반대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독일은 고도로 숙련된 노동 인구와 낮은 부패도에 더불어 높은 수준의 혁신을 갖춘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를 가지고 있다.[106][167][168] 독일은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수출국이자 3번째로 큰 수입국이며,[106] 독일의 경제 규모는 유럽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명목 GDP 기준 4번째,[169]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5번째[170]로 크다. 독일의 구매력 평가 기준 국내 총생산을 기준으로 측정한 1인당 국내 총생산은 유럽 연합 27개국 평균의 121%에 달한다.[171] 2017년 기준 국내 총생산에서 서비스 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약 69%, 산업은 31%, 농업은 1%를 차지하고,[106] 유럽 연합 통계국이 발표한 2020년 1월 독일의 실업률은 3.2%로 유럽 연합에서 4번째로 낮다.[172]

독일은 4억 5천만 명 이상의 소비자를 보유하는 유럽 단일 시장에 속해 있다.[173] 독일은 2002년부터 유럽의 공동 통화인 유로를 받아들였고,[174] 국제 통화 기금(IMF)에 따르면 2017년 독일은 유로존 경제의 28%를 차지했다.[175] 유럽 연합의 통화 정책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 본부를 둔 유럽 중앙은행에 의해 결정된다.[176][166]

현대식 자동차의 고향인 독일의 자동차 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고 혁신적인 산업 중 하나로 여겨지며[177] 2021년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생산량 기준으로 6번째로 큰 규모의 자동차 산업을 갖추고 있다. 독일에는 2022년 기준 차량 생산[178]과 판매[179]를 기준으로 세계 2위인 폭스바겐 그룹의 본국이자 2023년 3번째로 큰 자동차 수출국이다.[180]

독일의 10대 수출품은 자동차, 기계류 부품, 화학제품, 전자제품, 전기장치, 의약품, 운송 장비, 금속 재료, 고무와 플라스틱 제품이다.[181]

포춘이 발표하는 매출액 기준 세계 500대 기업의 순위인 포춘 글로벌 500에 속한 기업 중 29개가 독일에 본사를 두고 있다.[182] 독일의 주가 지수인 DAX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30개 독일 기업을 기준으로 측정한다.[183]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브랜드에는 메르세데스-벤츠, BMW, 폭스바겐, 아우디, 지멘스, 알리안츠, 아디다스, 포르쉐, 보쉬, 도이체 텔레콤 등이 있다.[184] 베를린스타트업 기업의 허브이며 유럽 연합에서 벤처 자금을 지원받는 기업들의 주요 시작지점이 되었다.[185] 독일은 미텔슈탄트(Mittelstand)로 불리는 중소기업의 비중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186] 이 중소기업들의 48%는 해당 분야에서 뛰어난 경쟁력은 갖춘 히든 챔피언으로 분류된다.[187]

연구개발은 독일 경제에 필수적인 부분이다.[188] 2018년 독일에서 출판된 과학과 공학 연구 논문 수는 세계 4위를 차지했다.[189] 독일의 대표적인 연구 기관으로는 막스 플랑크 협회, 헬름홀츠 협회, 프라운호퍼 협회, 라이프니츠 협회 등이 있다.[190] 또한 독일은 유럽 우주국에 가장 많은 양의 예산을 담당하고 있으며,[191] 2023년 세계 혁신 지수에서 8위를 차지했다.[192]

교통과 에너지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의 대중교통독일의 에너지입니다.

쾰른-프랑크푸르트암마인 고속철도 노선의 최대 300km/h의 속도로 운행하는 ICE 3의 모습.

중앙 유럽에 위치한 독일은 유럽 대륙의 교통 허브로,[193] 도로망이 유럽에서 가장 밀집되어 있다.[194] 독일에서 고속도로(Autobahn)는 일부 차량에 대해 일반적으로 연방적으로 규정하는 속도 제한이 없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195] 인터시티익스프레스(ICE) 열차 노선은 최대 300km/h(190 mph)의 속도로 독일의 주요 도시를 포함해 주변국들의 목적지까지 연결되어 있다.[196] 독일에서 가장 큰 공항은 프랑크푸르트암마인 공항뮌헨 공항이며,[197] 함부르크 항구는 세계에서 20번째로 큰 화물 항구이다.[198]

2019년에 독일은 세계에서 7번째로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국가였다.[199] 독일의 모든 원자력 발전소는 2023년에 단계적으로 폐쇄되었다.[200] 독일은 전체 전력 수요를 40%의 재생 가능 에너지를 사용해 충족하여 태양광해상풍력발전의 '선두주자'로 여겨졌다.[201][202] 독일은 생물다양성, 저배출, 수자원 보호를 촉진하는 파리 협정 등의 여러 조약을 준수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 있다.[203][204][205] 독일의 가정 내 재활용률은 약 65%로 세계 최고 수준이며,[206] 2018년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은 유럽 연합에서 9번째로 높았으나, 현재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207][208] 독일에서 에너지 전환(Energiewende)은 에너지 효율성과 재생 가능 에너지 등을 포함하여 이는 '지속 가능한 경제'로의 전환으로 인정받고 있다.[209][202]

관광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의 관광입니다.

바이에른에 위치한 노이슈반슈타인성의 모습.

독일은 2017년 3,740만 명이 방문하여 세계에서 9번째로 방문객이 많은 국가가 되었다.[210] 국내, 해외의 여행과 관광을 합하면 독일 국내 총생산에 직접적으로 1,053억가 넘는 기여를 하며, 관광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들어지는 일자리는 약 420만 개가 넘는다.[211]

독일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인기 있는 랜드마크로는 쾰른 대성당, 브란덴부르크 문, 국가의회 의사당, 드레스덴 성모교회, 하이델베르크성, 바르트부르크성, 상수시궁 등이 있다.[212] 프라이부르크 근처 유로파파크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많은 방문객이 찾는 테마파크 놀이공원이다.[213]

사회

인구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의 인구독일인입니다.

독일 브란덴부르크주 콧부스에 위치한 거리 표지판. 저지 소르브어독일어 두 개의 언어가 쓰여 있다.

2011년 독일의 인구 조사에서 독일의 인구는 8,020만 명이었으며,[214] 2022년 조사에서 8,37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215] 독일은 유럽 연합 내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유럽 전체에서는 러시아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으며, 전 세계에서는 19번째로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 독일의 인구 밀도는 km² 당 227명(mi² 당 590명)이다. 합계출산율은 1.57명[m]으로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대체출산율인 2.1명보다 낮아 세계에서 출산율이 낮은 편에 속한다.[106] 1970년대부터 독일의 사망률출생률을 넘어선 채로 유지되었으나, 201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출생률과 이주율이 증가하고 있다. 독일의 중위 연령은 47.4세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중위 연령이 높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106]

독일에서는 소수 민족들이 수세기 동안 각자의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소수 민족을 크게 4가지로 분류한다.[216] 최북단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에 사는 소수의 덴마크인,[216] 작센주브란벤부르크주가 위치한 루사티아 지역에 사는 슬라브 소르브인들, 전국 도처에 흩어져 있는 롬인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의 서부 해안과 니더작센주 북서부에 집중되어 있는 프리슬란트인들로 크게 나누어진다.[216]

독일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이민지이다.[217] 2015년 유럽 난민 위기 이후 유엔 경제사회국은 독일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국제 이민자들을 수용하는 국가임을 발표했으며, 이는 전체 국제 이민자 2억 4,400만 명 중 약 5%인 1,200만 명에 해당한다.[218] 이러한 이민자들의 이주로 인해 독일의 인구는 크게 증가했다. 그 예시 중 하나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인해 2023년 4월 기준 독일에서 우크라이나 출신 이민자들이 106만 명이 기록되었다.[219] 2019년 독일은 인구 중 이민자 비율이 13.1%로 유럽 연합 국가 중 7위를 차지했으며,[220] 2022년 조사에서는 전체 인구의 28.7%인 2,380만 명이 가정에 이민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221]

독일은 대도시가 많이 위치해 있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11개의 대도시권이 있다. 이 중 가장 큰 도시는 베를린이고, 면적이 가장 넓은 도시권은 루르이다.[222]

종교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의 종교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쾰른 대성당의 모습.

기독교는 서기 300년에 현대 독일 지역에 소개되었고, 8-9세기 카롤루스 시기완전히 정착했다. 16세기 초 마르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 개혁 이후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교회를 떠나 루터교회칼뱅주의 등의 개신교로 개종했다.[223]

201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는 독일에서 가장 큰 종교이며, 응답자의 66.8%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답했고 이 중 3.8%는 자신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말했다.[224] 전체 인구 중 31.7%가 독일 개신교회[n]자유 교회(Evangelische Freikirchen)의 교도들을 포함한 개신교 신자라고 응답했으며, 31.2%는 자신을 로마 카톨릭교회 신자라고 응답했고 1.3%만이 동방 정교회 신자라고 답했다. 2016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독일의 인구에서 가톨릭 교회 신자들과 개신교 신자들이 각각 28.5%와 27.5%를 차지했다.[225][226] 독일에서 이슬람교는 두 번째로 큰 종교이다.[227]

2011년 인구 조사에서 응답자 중 1.9%(152만 명)만이 자신의 종교가 이슬람교라고 응답했지만, 이슬람교와 유대교 등 독일에서 소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 수치는 신뢰하기 어렵다고 여겨진다.[228]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튀르키예 출신의 수니파알레비파이지만, 시아파, 아흐마드파 등의 소수 종파들도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제외한 나머지 종교들은 독일 인구의 1% 미만을 차지한다.[227]

2018년 연구에 따르면 독일 인구의 38%가 어떤 종교 조직이나 종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229] 최대 인구의 3분의 1은 여전히 자신이 종교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국가 무신론주의가 시행되기 전에 독일의 무종교인 사람들은 주로 구 동독 지역과 개신교를 믿던 주요 대도시에서 살았다.[230][231]

언어

독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공식적인 언어독일어이다. 독일어유럽 연합에서 사용되는 23개의 공식적인 언어 중 하나이며, 유럽 위원회에서 사용되는 3개의 언어 중 하나이다.[232] 독일에서 유래된 소수 언어는 덴마크어, 저지 독일어, 소르브어, 이디시어, 프리지아어 등이 있다. 이민자에 의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튀르키예어, 쿠르드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등이 있다. 67%의 독일인독일어를 제외한 한 가지 이상의 외국어를 할 수 있고 27%는 독일어를 제외한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할 수 있다고 한다.[232]

교육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의 교육입니다.

독일의 교육의 감독 책임은 기본적으로 각 주에 있으며 연방정부의 역할은 크지 않다. 만3~5세 사이의 어린이는 선택 과정인 키타에서 유치원 교육을 받는다. 이후의 10년에서 13년의 교육은 의무적이다. 독일의 6세에서 10세까지의 초등학교 다음 과정으론 숀더슐레, 하우프트슐레, 게샴슐레, 레알슐레, 김나지움 등이 있다. 먼저 하우프트슐레는 5년제인데 졸업을 하면 바로 직업전문학교로 가게 된다. 레알슐레는 6년제인데 졸업하면 직업 전문학교를 갈 수도 있고 중등 2단계로 바로 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김나지움은 9년제이고 대학교로 진학할 수 있다. 김나지움은 5-10학년은 중등1단계, 11-13학년은 중등 2단계로 구분되어 있다. 김나지움 2단계까지 마치면 독일의 모든 대학교를 갈 수 있는 아비투어 시험을 치를 수 있다. 독일에선 초등학교를 4학년 때 졸업할 수 있다. 어떤 초등학교는 6학년에 졸업을 하는 학교도 있다.

방송과 언론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제 5조에 의거,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며 표현, 출판 및 보도의 자유를 인정하고 국가에 의한 검열 제도는 부정한다. 그러나 이 같은 언론의 자유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며, 청소년을 잔인하고 비윤리적인 출판물과 영화로부터 보호하고 개인의 인격과 비밀을 보호해야 할 윤리적 의무를 수반한다.[233] 독일은 미디어에 대한 집중도가 가장 높고, 언론의 다양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나라 중의 하나인데,[234] 430종 이상의 신문과 60종 이상의 주간지, 그리고 2만 종 이상의 잡지가 발간되고 있다.[235]

신문과 잡지

독일의 신문은 전통적으로 사기업에 의해 운영되어 왔으며 신문에 관한 입법은 주 정부 소관사항이다. 유력한 신문으로는 베스트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 빌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쥐트도이체 차이퉁, 디 벨트가 있으며 이 중 베스트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이 최대 구독지의 자리를 지키고 빌트가 최대 판매 부수를 자랑한다. 독일의 신문은 이전의 부정기적인 인쇄 신문이 기술적·내용적 면에서 발전하여 나타난 것으로, 그 중요 요인의 하나로는 특히 자유민주주의 사조의 대두를 들 수 있다. 1848년 독일 혁명으로 신문 발행이 비교적 자유롭게 되자 신문의 종수가 크게 증가하여 1851-60년간에는 그 종수가 482개에 이르게 되었다. 독일의 일간지 중 지방지는 335종, 전국지는 10종이며 전국지 판매량은 160만부에 불과하나 지방지는 1430만부로 강세를 보인다. 주간지는 현재 약 60종 이상이 발간되고 있다. 대표적인 주간지로는 가장 권위있는 시사 주간지로서 함부르크에서 발행되며 독일의 타임즈로도 불리는 슈피겔, 그리고 1993년에 창간되어 여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포쿠스, 제 2차 세계대전서독의 주요 주간지였던 슈테른포커스 등이 있다.[236]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발행되는 신문·잡지수의 다양함, 지방지의 발달, 광고 전문지의 강세, 국제 기사의 비중 강화, 수준 높은 주간지의 발행, 정당지의 약세 등의 특징이 있다.[233]

방송

독일 방송국 설립에 관한 입법은 각 주의 소관 사항이며 독일 방송은 공영 방송민영 방송이 공존하는 이중 체계다. 이전에는 공영 체제로만 운영되었으나 1980년대에 들어서 상업 방송의 필요성이 대두되며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상업적 방송을 허가하는 입법이 1984년 니더작센주에서 통과되었고 민영화 텔레비전라디오 방송사가 인가되었다. 결과적으로 현재는 공영/민영 혼합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공영 방송에 관한 사항은 주 정부의 법률 또는 주 정부간의 국가 조약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으며 방송의 경우 신문보다 시설, 재정에 있어서 엄격한 규제를 받고 있다.[233] 독일의 방송은 연방 정부의 감독 하에 공단(公團)으로 운영되는데, 각 방송 공단은 각각 독자적으로 방송 내용을 편성·방송하고 있다. 독일의 공영 방송사는 9개의 지방 공영 방송사의 연합체인 ARD와 주 정부간의 합의로 설립된 ZDF, 독일의 해외 홍보 공영 방송인 도이체 벨레가 있다. 민영 방송사는 1985년 설립된 Sat.1, 1986년 설립된 RTL 텔레비전, Tele 5, 프로지벤 등이 있다. 위성 방송으로는 3satTagesschau 24가 있으며, 1982년 이래 케이블 텔레비전을 설치하기 시작하여 민간 유선 방송망이 활발히 설치되고 있다.[235] ARD가 2012년에 수행한 조사에 따르면 프로그램별 편성에서 공영 방송의 경우 뉴스를 비롯한 정보 프로그램이 전체 방송시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ARD가 42%, ZDF가 47%를 차지하며, 상업 방송사들은 평균 20% 이하의 편성비율을 보인다.[237] 독일의 라디오 방송1923년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시행하였고,[238] 현재는 500개가 넘는 방송국이 있다. 대표적인 해외 공영 방송인 도이체 벨레에선 전 세계에 30개의 언어로 정보와 뉴스를 방송한다. 전국 공영 방송으로는 도이칠란트라디오에서 뉴스 중심의 도이칠란트푼크(DLF)와 음악 위주의 도이칠란트라디오 쿨투어(DKultur)를 방송하며 각 지방 방송마다 별도의 라디오 채널이 있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공영 방송이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들이 라디오 방송을 즐긴다.[233]

복지

1. 연금보험 법정 연금 보험은 독일 연방의 사회복지제도에서 중요한 기둥의 하나이다. 이것은 취업자가 취업생활 후에도 적절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책이다. 2. 실업보험 기본적으로 모든 근로자는 실업보험에 가입되어 있다. 실업보험의 보험료는 근로자와 사용자가 반반씩 지불한다. 3. 간병보험 1995년 1월 1일부터 실시된 간병보험은 간병이 필요한 경우를 위한 사회보장의 보완책이다. 4. 가족에 대한 혜택 1996년부터 가족은 육아보조금이나 면세할당액 중에서 선택을 할 수 있다. 5. 사회보조금 사회보조금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고, 다른곳에서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지급된다. 독일 연방의 사회보조금법에 따르면 이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은 독일인이건 외국인이건 사회보조금을 청구할 권리가 있다.

문화

독일의 문화는 종교적, 세속적 측면들이 섞여 있으며, 기나긴 유럽 역사 동안 여러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거쳐오며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역사적으로 독일은 ‘시인과 사유자들의 땅’이라고 불렸으며, 독일의 작가들과 철학자들은 서구 사상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다. BBC에서 조사한 국제 연구 조사에 의하면, 2013년과 2014년에 독일은 세계에 가장 긍정적인 효과를 끼치는 국가로 조사되었다. 독일은 옥토버페스트와 크리스마스 리스, 크리스마스 마켓, 글뤼바인, 크리스마스 트리, 스톨렌 등 크리스마스 풍습 등으로 유명하다. 2016년 UNESCO는 41개에 달하는 풍습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였다. 독일은 연방국가답게 공휴일도 주마다 따로 정하는데, 그들 중에서도 10월 3일은 독일 통일의 날로 정해 전국에서 기념하고 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음악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곡가들을 여럿 배출한 바 있다. 제바스티안 바흐, 프리드리히 헨델,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등은 바로크 기에 활동한 유명한 작곡가이며, 세계적인 작곡가 베토벤은 고전기와 낭만기 중간의 음악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낭만기에는 카를 마리아 폰 베버, 펠릭스 멘델스존, 로베르트 슈만, 브람스 등 여러 작곡가들이 활동하였다. 특히 바그너는 오페라 음악에 기여를 하였고,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는 후기 낭만기와 현대 초기에 뛰어난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다. 20세기와 21세기 초에는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과 볼프강 림 등의 작곡가들이 활동하였다.

2013년 기준으로 독일은 유럽에서 2번째 가는 음악 시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계에서는 4위를 차지했다. 20세기와 21세기 독일 대중음악은 주로 팝, 헤비메탈, 펑크, 팝 락, 인디 음악 등이 번성하였으며, 특히 독일의 전자 음악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DJ들과 예술가들, 폴 반 다이크나 파울 칼크브레너 등은 테크노 음악 등으로 세계적으로 진출하고 있다.

예술

이 부분의 본문은 독일의 미술입니다.

독일 예술은 여러 면에서 서양 미술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르네상스기에는 알브레히트 뒤러, 한스 홀바인,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루카스 크라나흐 등의 예술가들이 활동하였으며, 바로크기에는 루벤스, 요한 밥티스트 치머만이, 낭만기에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칼 스피츠베그가, 인상주의에서는 막스 리베르만, 초현실주의에는 막스 에른스트 등의 화가들이 활동하였다. 19세기 들어서는 여러 화가 모임들이 생겨났고, 이로 인하여 뮌헨과 베를린의 화풍에 영향을 미쳤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표현주의에 대항하여 신객관주의가 떠올랐으며,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이후에는 신표현주의가 유행을 탔다.

독일의 건축은 카롤링거 양식과 오토 양식 등이 있는데, 이후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도 후대에 점차 전파되었다. 독일 민간 건축의 특징은 목재 프레임 구조를 먼저 지은 후 그 사이에 벽토를 채워넣어 만드는 것이다. 유럽에 산업화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이에 대항하여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고전주의 양식이 잠깐 유행하였다. 1910년대에는 표현주의 건축이 유형을 탔고, 아트 데코와 다른 현대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독일은 세계의 모더니즘 건축의 선도국들 중 하나이기도 하였는데, 20세기 전반에 걸쳐 수많은 모더니즘 건축가들이 독일에서 배출되기도 하였으며 유리로 뒤덮인 초고층건물의 모습을 이때 처음 설계하기도 했다. 독일의 유명한 건축가들에는 고트프리드 뵘, 프라이 오토 등이 있다. 독일의 디자인도 매우 세계적인 수준인데, 베를린 패션위크는 독일 디자인업의 상징 격으로 매 2년마다 한 번씩 열린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철학

독일 문학은 최소 중세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와 볼프람 폰 에셴바흐 같은 작가들이 등장하여 당대에 이름을 날렸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독일인 작가로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프리드리히 실러,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테오도르 폰타네 등이 있다. 또한 그림 형제가 모아 출판한 독일의 민화들은 크게 인기를 끌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도하였다. 그림 형제들은 독일어로 된 지역별 다양한 구전들을 모아 책으로 엮었고, 그 과정에서 독일어를 분석하며 ‘그림 독일어 백과사전’을 함께 출판하기도 하였으며 초본이 1854년에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20세기 독일의 유명한 작가들에는 크게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귄터 그라스, 하인리히 뵐 등이 있다. 이같이 대문호들을 연이어 배출해낸 독일은, 지금까지도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거대한 책 시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프랑크푸르트 북 페어는 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서 전시회들 중 하나이다.

독일은 철학적으로도 매우 발달한 국가들 중 하나이다.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합리주의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임마누엘 칸트는 계몽주의를 이끌었다. 독일 관념론의 대표적인 철학가들에는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빌헬름 요제프 셸링 등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철학을 이어받아 자신만의 이기적, 염세주의적 철학관을 구축하였으며,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주의의 기초를 놓았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식론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깊은 연구를 남겼으며,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문화철학을 연구하였다.

요리

독일의 요리는 지역과 지역마다 다르고, 지역들마다 인접한 이웃 국가들의 식문화와 상당히 유사하다. 남부 지역들, 예를 들어 바바리아와 스와비아는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식문화와 매우 흡사하기도 하다. 또한 해외에서 들어온 음식들, 예를 들어 피자, 초밥, 중화요리, 그리스 요리, 인도 요리, 케밥 등도 매우 인기가 많다.

독일 요리의 주식은 빵으로, 독일 제빵업계는 현재 600여개가 넘는 빵들을 생산하고 있으며 1,200개가 넘는 종류의 파스트리와 롤빵들을 굽고 있다. 독일의 치즈 생산은 유럽 전체 치즈 생산의 22%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거대하다. 2012년 기준, 독일에서 생산된 육류의 99%는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였다고 전해진다. 독일인들은 이렇게 잡은 고기들을 이용하여 1,500여개가 넘는 소시지들을 생산하는데, 유명한 소시지 종류로는 브라트부르스트바이스부르스트 등이 있다. 음료의 경우, 현대에 들어서는 포도주가 점차 인기를 얻고 있지만 국민 전체로 보았을 때에 독일의 국민음료는 바로 맥주이다. 독일인들은 2013년 기준으로 1인당 110리터에 달하는 맥주를 소비하였으며,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의 맥주 소비량을 자랑하고 있다. 워낙 맥주가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국민 음료였기에, 16세기에 독일의 왕 빌헬름 4세는 맥주 순수령을 내려 전국의 맥주 질을 상향시키고자 하기도 했다.

2018년 미슐랭 가이드는 독일에 3스타 레스토랑 11개를 선정하였고, 독일에 있는 별 개수들을 모두 합치면 300개가 넘는다.

스포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Borussia Dortmund)와 샬케(Schalke)간의 분데스리가(Bundesliga) 축구경기

독일은 올림픽, 월드컵축구, 포뮬러원(F1) 같은 세계 3대 스포츠 축제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유일한 국가다. 올림픽에서 항상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축구의 강국으로 브라질, 이탈리아와 더불어 단 3개국밖에 없는 FIFA 월드컵에서 세 번 이상 우승한 국가들 중 하나이며 월드컵의 평균성적이 상당히 좋으며 2014년 FIFA 월드컵에서 우승하며 통산 4차례 우승 국가가 되었다. 포뮬러원에서는 2013년에 제바스티안 페텔이 종합우승을 차지해 4년연속 챔피언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야구의 경우 베이스볼 분데스리가가 성행 하고 있다.

독일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는 축구이다. 독일축구연맹은 700만 명이 넘는 공식 회원들이 있으며, 단일 스포츠 기구로는 전세계에서 최대 규모이다. 독일의 최고 리그인 분데스리가는 모든 전문스포츠리그에서 2번째로 많은 관심을 받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게임 리그이기도 하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은 1954년, 1974년, 1990년, 2014년 FIFA 월드컵에서 승리하였으며, 2017년에는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도 금메달을 따냈다.

독일은 세계 모터 스포츠의 선도 국가로, BMW와 메르세데스와 같은 기업들이 모터스포츠 장비들을 대량으로 생산하며, 포르셰는 르망 24시에서 19번이나 승리하였으며, 아우디는 13번을 승리하였다. 유명한 독일인 드라이버인 미하엘 슈마허는 7번이나 포뮬라 원에서 금메달을 얻어내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드라이버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 외에도 제바스티안 페텔도 포뮬라 원에서 가장 성공적인 드라이버 5인들 가운데에 꼽힌다. 독일은 올림픽에서도 항상 매우 좋은 성적을 보여왔는데, 현재까지 얻은 모든 메달 수를 합하면 전세계 3위에 달하기도 한다. 또한 독일은 1936년 베를린 하계올림픽1936년 동계올림픽을 동시에 개최하며 동일 년도에 동계와 하계 올림픽을 개최한 마지막 국가가 되었다. 뮌헨은 1972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했다.

대공황 독일

대공황독일이 펼친 정책이 뭔가요? 1929년 전 세계적인 대공황독일을 강타했다.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 정부는 재정 긴축과 디플레이션 정책을 추구하며 1932년까지...

세계대공황 독일 러시아

세계대공황독일과 러시아가 이것을 극복하게 위해 무슨 일을 했죠? 옛날에 책에서 봤는데 기억이 안나네요 내공80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에서 원료를 확보하였지만...

독일 대공황

1920년대 세계대공황때 공급과잉으로 디플레이션이 일어난거라는데 독일은 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고 하는거에요??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베르사유 조약 때문에...

미국의 대공황독일은 무슨 정책을...

... 도모하고,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들을 통해 독일대공황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경제적으로 회복하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도움 되시기 바랍니다.

독일 대공황

대공황에 맞서 독일이 일당독재체제를 펼쳤다고 알고있는데 이 체제가 다른나라를 침략하는 것인가요?? 대공황이란 쉽게 말해 일종의 공급과잉 현상입니다. 공급이 넘쳐나니...

독일대공황

독일대공황을시작한 원인,해결하는방법,결과등을 알아야되서요. 부탁드립니다.간략하게해주세요 대공황이 일어난 원인을 두고 경제학자들간에도 여러가지 학설을 내놓고는...

독일대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독일이 1929년 대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제조업이나 군수공업 등 여러 분야가 급속도로 발전했죠. 근데 구체적인 과정이나 사항을 알 수는 없나요? 인조 고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