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 고갱, 뭉크, 파블로피카소의 출생년도와삶 ,작품성향과작품의 흐름...

로댕, 고갱, 뭉크, 파블로피카소의 출생년도와삶 ,작품성향과작품의 흐름...

작성일 2008.07.23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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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방학숙제때문에 그런데요

로댕 고갱 뭉크 파블로 피카소의 출생년도와 삶, 작품성향과 작품의 흐름좀 알려주세요

아 그리고 막 섞어서 말씀해주시지 마시고요 ①출생년도와 삶, ②작품성향과 작품의 흐름 이렇게 두가지로

나눠서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내용좀 많으면 무조건 채택요 ^^

부탁드림요 __;;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로댕 [1840.11.12~1917.11.17]

 

-주요 핵심 내용 : 프랑스의 조각가. 근대조각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가 추구한 웅대한 예술성과 기량은 조각에 생명과 감정을 불어넣어, 예술의 자율성을 부여했다.

 

1. 출생 년도와 삶 :

 

댕은 1840년 11월 12일 파리의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장 밥티스트 로댕은 노르망디의 농촌에서 파리로 이주, 경시청의 하급 형사로 지냈으며, 어머니 마리는 프랑스의 전형적인 농촌 여성으로 언제나 조용히 숨어서 친절을 베푸는 형이었다. 로댕은 이러한 부모에게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인내와 독립심을 물려 받게 되었고 그리고 로댕의 성품은 완고하고 고지식했으며, 불굴의 정열과 뜨거운 야망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생활에 있어서는 근검정신이 투철했던 부모의 영향을 받아 철저한 구두쇠정신을 발휘, 다른 사람들로부터 '노랭이'라는 욕을 먹을 정도로 항상 절제된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는 초등학교시절부터 그림그리기를 매우 좋아했으나, 집이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하여 비싼 미술학교에는 다닐 수가 없었고 수업료가 대체로 싼 소묘와 수학을 가르치는 직업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가구설계를 위한 제도술을 지도하는 이 학교에서 로댕은 사실파의 대가인
칼포 르콕 드 보아보드랑, 그리고 화가 벨록 같은 훌륭한 교사들에게 수업을 받았다. 이무렵 로댕은 루브르미술관이나 국립도서관 판화부 등을 드나들며 고대작품을 모사(模寫)하는데 주력하였고 또한 페티테콜이라는 이 학교에서 모델링하는 법도 배우게 된다. 후에 로댕은 "난생 처음으로 나는 예술가들의 점토를 보았다."고 술회하면서, "그 즉시 나는 이 사람들과 같이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라고 말하였다.

 17세까지 로댕은 상급미술학교인
<그랑데콜> <에콜 드 보자르>에 3번이나 응시했으나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20세 성년이 된 로댕은 아버지로부터 독립, 먹고살기 위해 생활전선에 직접 뛰어 들게 되는데 그 당시에는 건축미술이 유행하여 그는 건축물 장식가의 제자로 입문하여 건축조각, 석고뜨기작업 등 닥치는대로 일을 하였다.

 22세 되는 해 그는 심리적인 충격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사랑했던 누이
마리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젊은 로댕에게 누이 마리는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이해심 많은 로댕은 누구보다 여동생을 끔찍히도 사랑했고, 항상 애정을 가지고 잘 보살펴 주었다. 이런 누이가 사망하자 로댕은 삶의 고뇌에 빠지게 된다. 절망끝에 그는 그 일을 잊고자 수도원으로 들어가 반년가까이 수련사로 지내게 된다. 이때 로댕에게 새로운 길을 개척해준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수도원장인 Eymard였고 그의 심정적인 배려와 관심으로 로댕은 계속 조각에 다시 정열을 쏟을 수 있었고, 조각가로서의 천직의 길을 걸을 수가 있었다.

 생계를 위해 장식적인 작업을 계속했던 로댕은 1864년
<코가 깨진 남자의 얼굴>을 제작, 살롱전에 출품했으나 사실적인 묘사가 그 당시 심사위원들의 비위를 건들어 낙선하게 된다. 낙선 후 그는 부모의 간청으로 로즈 뵈레를 만나 함께 생활하면서 아들 오귀스트-외젠느 뵈레를 낳게 되는데 그의 가정에 대한 무관심과 부인과 아들에 대한 냄담함으로 인해 9년만에 로즈 뵈레와 떨어져 살게 되고, 또한 그 후에 만나 사랑하던 클라델여사와도 헤어지게 된다. 클라델은 후에 수녀원에 들어가 외로운 일생을 마친다.

 1870년 보불전쟁이 일어나자 로댕은 국민 방위군에 입대하여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얼마후 근시로 인해 곧바로 퇴역, 휴전후 벨기에 브뤼셀에서 다양한 공공건축의 장식일을 한다. 이곳에서 약 7년간 장식일을 하면서 로댕은 다른 일거리를 찾아 유럽각지를 떠돌아 다니며 여행을 한다. 그 중 1875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로댕에게 있어서 그의 그 후 예술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1878년 파리로 돌아온 그는 브뤼셀에서 제작한
<청동시대>를 살롱전에 출품하나, 이 작품이 지닌 박진감과 사실적인 묘사로 인해 살아있는 모델에서 직접 석고형을 떠서 제작한 사기성이 농후한 작품이라는 근거없는 비판과 비난을 받으면서 세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그 후 <청동시대>는 로댕예술의 출발점이며, 사실적 표현의 완성이라고 평가받게 된다. 1880년 <청동시대>가 재평가되면서 살롱전에서 3위의 상을 받자 프랑스정부에서 이를 구매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파리 장식미술관에서 기념비적인 문 제작 의뢰가 들어온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지옥의 문>이다. 이후 로댕은 명성의 중핵을 이루는 <생각하는 사람>, <칼레의 시민>, <발자크상> 등과 같이 다채롭고 자유분방한 그 만의 기질이 담겨 있는 작품들을 정력적으로 제작한다.

 로댕은 18세기 이래 오랫동안 건축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던 조각에 새로운 생명의 숨결과 감정을 불어넣어 예술에의 자율성을 부여한 일대의 위대한 업적과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회화의 인상파와 더불어 근대 조각에도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게 된다.  특히 극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발자크상>은 전통적인 조각에 대한 사람들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었고, 20세기 조형언어의 길을 활짝 열어놓은 계기가 되었다.

 로댕은 1917년 자신의 작품 전부를 프랑스 정부에 기증한 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대표적인 조각작품과 수채화, 뎃생 등과 그가 생전에 사모았던 인상파 그림들과 그리고 그의 연인이자 제자였던
카미유 클로델의 일부 작품들은 현재 파리 로댕박물관에 상설 전시중이고, 그외의 작품들과 복제작품들은 미국, 일본, 한국 등 세계 여러 나라 등에서 구매, 전시되고 있다

 

2. 작품 성향과 작품의 흐름 :

 

"진정 치열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비록 당신의 입장이 기성관념과 상반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당신이 느낀 것을 나타내는 데 주저하지 마십시오.
처음에는 사람들이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런지도 모릅니다. 얼마 안 가서 여러 친구들이 당신에게로 올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 진실한 것은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진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댕 어록> 중에서

  19세기 프랑스의 역사는 프랑스 대혁명의 큰 파도와 나폴레옹 시대의 영향으로 정치적인 대변혁을 격게 되면서 낡은 귀족 계급은 서서히 정치 무대에서 사라지기 시작하였고, 그 자리를 새로운 경제적인 부유층인 시민계층과 제조업자 및 은행가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오귀스트 르네 로댕은 1840년에 태어나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해인 1917년에 사망하였는데 그는 그 당시의 저명한 예술가들 중의 한 사람으로, 후세의 사람들에게는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위대한 인물이었던 미켈란젤로 이후로 서양 조각계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 조각가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생각하는 사람>은 로댕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가장 유명한 작품인데 이는 근대 조각을 여는 출입문 구실을 했다고 생각되며, 그리고 이 작품으로 근대 조각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볼 수 있다.

 로댕의 작품을 감상하게 되면 외부 세계와 사물에 대한 뚜렷한 경지를 꿰뚫어 보는 그의 표현 시각과 비구상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사물의 본질을 명확하게 이해하려는 작가의 확고한 의식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 양식은 고전적(古典的)인 동시에 낭만적(浪漫的)이었으며,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및 예술 사상에 있어서도 혼란기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또한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회화에 있어 신(神) 본위의 중심 사상에서 벗어나 새로이 자신들의 의식을 추구하려는 대부분의 작가들에게도 명확한 방향 제시와 더불어 작품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조각에 있어서도 자연과 고전에 충실하고 느낀 바를 그대로 표현하려는 그의 작업 의지와 아울러 당시의 예술 관례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대가답게 전통적 형식주의(形式主義)의 굴레를 일거에 타파해 버린 그의 예술 의지는 손과 눈을 견제하고 형식적인 의식으로만 작업하려는 그 당시의 모든 조각가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받아 들여져 왔다.

  Claude Monet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이 회화에 살아 있는 광선과 새로운 방향을 가져다 주었듯이 근대 조각의 길잡이가 된 사람은 바로 오귀스트 르네 로댕이었다. 그의 죽음은 세계대전 중인 세상 사람들의 주목은 끌지 못했으나, 그가 남긴 예술적 업적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 막대한 예술적 힘을 가진 예술가요, 영원한 추진력을 가진 문화적 개척자인 그는 20세기를 막 열고 근대를 마감하는 그 시기에 하나의 커다란 이정표가 되었으며, 현대를 살아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예술의 영원성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메시지를 남겨 주었다.

 "가장 위대한 낭만주의 조각가","위대한 고전주의 시대의 마지막 조각가","위대한 현대 조각가의 시조(始祖)"로 불리고 있는 오귀스트 르네 로댕...... 그의 뛰어난 예술혼(藝術魂)은 요즘에도 사람들은 잊지 않고 있다.

 

폴 고갱[1848.6.7~1903.5.8]

 

 

1. 출생년도와 삶  :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빛의 흐름을 인상의 색으로 표현하는 인상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흐름으로 신인상주의가 태동하게 되었고,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에 의한 화면표현으로 감정 표현과 작가의 개성이 결여되자 작가의 개성과 내면 표현을 강조하는 흐름으로 인상주의의 색과 현상적 집착에 대한 반발으로 후기 인상주의가 태동하게 되었다.
1865년 견습선원이 되어 상선을 탔으나 1871년 어머니가 죽자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거래점의 점원이 되어 점원생활을 하였으며 덴마크 출생 메트 소피 가드와 결혼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졌다.  이 무렵부터 회화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여 특히 인상파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고, 1876년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였다.
피사로를 사귀게 된 것을 계기로 1880년 제5회 인상파전 후로는 단골 멤버가 되었으며, 1882년 피사로의 소개로 세잔, 기요맹 등과 친교를 맺어 화가가 될 결심을 굳혔다.
증권거래점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였으나 생활이 어려워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한때는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처자식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왔다.
1886년 6월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여 종래의 인상화풍을 버리고 차차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게 된다.
그해 11월 파리로 돌아와 고흐, 로트레크 등을 알게 되었으며, 특히 고흐와는 깊이 사귀었으며 그 둘에 관계한 일화들도 꽤 많이 전해지고 있다.
고흐와 고갱은 두 사람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성격이어서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을 계기로 비극적인 작별로 끝났다.  고갱은 말년에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나는데, 타히티에서도 빈곤과 고독에 시달리고 병마에 시달려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고, 원주민을 옹호하여 현지의 백인 관헌과 충돌도 일으켰으나,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1901년 마르키즈제도의 히바오아섬으로 자리를 옮겼을 무렵 매독과 영양실조로 회복 가망성이 거의 없었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2. 작품성향과 작품의 흐름 :

 

고갱은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로 주로 원주민의 생활상, 종교 등과 같은 비현실, 초현실적인 세계를 소재를 주로 사용하였고, 원주민의 생명력과 토속 샤머니즘 등에 관심을 두고 인간의 본능과 심리 등을 표현하였다.
고갱의 특징은 현실과 비현실을 종합적으로 화면에 구성하고, 상직적, 종교적, 초현실적인 장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주로 형태의 단순화와 윤곽을 강조하며, 강렬한 원색을 사용한다.
인상주의의 분할법을 극복하고 평면적 색면에 의한 장식성을 추구하는데 후에 종합주의, 상징주의, 야수파에 영향을 준다.

뭉크

 

1. 출생년도와 삶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뭉크의 최초의 전시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고 난 후, 베를린 화가 연합은 1892년 그를 초청해 베를린 전시회를 열고자 했다. 그 단체는 지금까지 살아 있는 화가의 개인 전시회를 열었던 전례가 없었고, 모더니즘에 맞서는 어떠한 양식도 수용하지 않았었기에 그 초청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낙선자 전시회가 개최된 지 30년만에, 그리고 파리에서 최초의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린지 20년 만에 빌헬름 2세가 통치하는 독일제국의 수도에서 보수적인 의무 미술 강령에 대하여 반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뭉크는 그 초대에 응하여 11월 초부터 빌헬름슈트라세에 있는 건축 회관에서 작품 55점을 전시했다. 그때까지 그의 작품을 경험하지 못했던 베를린 미술계에서는 곧바로 파문이 일었다. 보수적인 신문들을 거칠게 그를 비항했고, 며칠 뒤에 그 전시회는 막을 내리면서 뭉크는 '미술처럼 순수한 분야가 그러한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그다지 진보적이지 않은 잡지도 '실력 없는 화가가 아닌 현대적인 화가가 매장되었다'고 토로했다.
뭉크의 그림들은 '하수구 미술'이라는 황제의 교시에 제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후 뭉크는 사람들의 입에오르내리며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쾨른과 뒤셀도르크에서의 전시회에 이어 프리드리히슈트라세에서 12월 말부터 다시 한 번 똑같은 그림들을 전시했다.
뭉크는 1892년 무렵 독일에서 스칸디나비아 출신 작가들과 어울리면서 앞으로 뭉크가 창작할 「생명의 프리즈」에 대한 막연한 생각들이 구체화되었다. 뭉크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자아의 심리적인 몰락을 연구하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생명의 프리즈」라는 명칭은 1900년 이후에 비로소 나타나는데 뭉크의 대작이며, 30년이 넘게 그가 집중했던 진행형의 작업이었다. 작품의 기본 주제는 1983년 초에 쓴 편지의 "사랑과 죽음을 다룬 그림들에 대한 연구들이 나를 몰두하게 한다"라는 문구 속에 나와 있다. 그 결과들인 초기 6점의 그림들은 1893년 베를린에서 전시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절규>이다. 그림 속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다리 위에 두 명의 남자가 태연하게 걸어가고 있다. 전경에는 날카롭고도 강렬한 모습으로 관찰자에게 다가온 세 번째 형상이 서 있다. 성별을 알 수 없는 그는 정면을 향하고 있고, 경직돼 있으며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모든 것을 꿰뚫는 외침을 위해 입을 벌리고 있다. 이 인물은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 배경을 이루는 피오르드식 풍경은 하나의 '정신의 지대'로서 그 형상의 내면적 삶을 반영한다. 하늘은 핏빛으로 빨갛게 채색되었다. 물 위에 떠 있는 배들, 그리고 교회의 탑과 같이 잔잔한 요소들은 뒤쪽에 배치되어 있다.
<절규>의 채색은 자연주의에 입각한다. 뭉크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철저하게 '색채의 신빙성'을 고수하였다. 피처럼 붉은 빛의 저녁 하늘이 비치는 검푸른 물은 가을 기운이 나는 빛과 날씨 현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모든 것이 전경에 있는 인물의 얼굴 표정과 자세처럼 표현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그러지고 고조되어 있다. 배경의 줄무늬 채색은 종종 음파를 가시화 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 힘과 에너지가 물성화한 하늘의 소리 없는 아우성과 비교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죽은 자의 두개골에서 나오는 그 절규가 소리를 지녔는지, 외부로 향하는 극도의 내면적인 두려움이 그 절규의 소리를 멈추게 했는지에 대한 의문점이 생겨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인체 내부를 연구하고 시체를 해부했던 것처럼, 나는 영혼을 해부하려고 한다. 당시 시체 해부가 죄악시되었기 때문에, 그는 암호화하여 기술하여야만 했다. 오늘안 내가 해부하고자 하는 것은 해부를 거의 비도덕적이고 경박한 것으로 간주하는 정신적인 현상들이다."

 

2. 작품성향과 작품의 흐름.

 

뭉크는 판화를 회화 못지않게 중시하였으며 회화만큼 판화 작품을 많이 제작하였다. 유화에서의 테마를 판화로 옮기기도 하였으며, 제목을 바꾸기도 하고, 석판이나 목판으로 변화시켜 표현하였다. 뭉크는 판화의 기법적인 면에 여러 가지 혁신을 가져다 주었는데, 동일한 작품 속에 몇 가지 기법의 판종을 병용하기도 하고, 합성 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혁신을 실행하였다. 1895년부터 1897년까지 파리에 머무는 동안 판화에 대한 기술을 크게 연마하였는데, 이 작품도 이 때 제작되어진 석판화로서 부드러운 모필(毛筆)에 의한 풍요로운 곡선은 장식적인 윤곽을 지니는 한편, 동세에 의한 조형적 화면 구성은 긴장된 가운데 현대인의 불안한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여 주고 있다. 유화에서와 같이 동일한 구도를 답변확정하였는데 석판화에서는 더 한층 힘있게 표현되어지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 Picasso, Pablo (1881~1973)

 

1. 출생년도와 삶 :

 

스페인의 한 도시 말라가의 하얀 저택에서 피카소가 태어난 때는 1881년 10월25일...

아버지는 시골 미술학교 선생님이자 비둘기를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린 화가였다.

피카소는 말을 배우기도 전에 그림을 그릴 줄 알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용한 단어가 "연필"이였다.

10세 때 이미 아버지를 능가하는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피카소는 14세 어린 나이로 바르셀로나 론자 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 후 16세까지 스페인 미술학교의 모든 콩쿠르를 거의 다 휩쓸어 버려 더 이상 치러야 할 시험이 없었던 피카소는 이렇게 외쳤다. "나는 결코 어린아이다운 데생을 하지 않았다. 난 12살에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림을 그렸다."


1900년 19세의 피카소는 바르셀로나 뒷골목에 있는 '검은 고양이'라는 선술집에서 첫 번째 전시회는 갖는다. 150여 점의 데생들은 대부분 시인, 작곡가 등 예술가 친구들의 모습을 스케치한 작품이었다.

그해 피카소는 천재 예술가들의 집합소인 파리로 간다. 피카소에게 있어 파리는 성공의 기회가 있는 곳이었고 파리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은 성공의 지름길이기도 했다. 파리에서 처음 몇 달 동안은 그 곳의 모든 박물관을 빠짐없이 순례했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앞에서 넋을 잃었으면 드가, 툴루즈 로트렉, 고갱, 반 고흐의 그림들에 대해서는 정열적인 탐색을 하였다. 특히 툴루즈 로트렉의 기이한 그림에 가장 관심이 많았다. (로트렉은 초기 근대 판화부분을 개척한 거장 중의 하나다. 프랑스 무도회장과 무희들의 모습을 소재로 한 여러 인상적인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전세계의 관람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1890년대 당시로서는 새로운 기술인 칼라 석판 인쇄술 분야를 개척함으로써, 풍자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거리 광고의 표현형식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의 친구가 지적한 것처럼,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대담한 구성과 눈부시게 화려한 색상은 마치 뭔가에 얻어맞은 듯한 강렬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가 제작한 포스터는 매일 광고를 바꾸는 파리의 여러 댄스홀의 광고에 쓰였기 때문에 고작 하루씩 정도밖에 벽에 걸리지 못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몇몇 작품들은 매우 소중한 세기말의 작품들로 여겨지고 있다.비록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판화작가로써 활동했지만, 350점이나 되는 많은 작품을 남겼고, 이중에서 많은 작품들이 판화 예술의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당시 남들은 야만적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던 페니키아와 이집트의 예술에도 크게 매혹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풍운의 꿈을 안고 파리에 동행했던 절친한 친구 카사게마스는 실연으로 권총 자살을 하게된다. 이 소식은 피카소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시기에 그는 온통 푸른색으로만 세상을 본다.

청색은 비참과 절망에 조화되는 차가운 색이다. (청색시대 : 1901~ 1904 )

로맨틱한 파리생활의 또 다른 얼굴에는 잔인한 고통, 정신이상이 될 것 같은 현실이 있었다. 질병과 추위, 배고픔을 체험한 피카소는 밑바닥 삶의 근원적 외로움을 짙푸른 청색을 통해 나타낸다.

그런데 왜?

현대 도시에서 버림받은 비참한 사람들을 소재로 한 청색시대의 그림들이 다른 작품들은 제치고 부자들에게 그토록 인기가 있었을까?


1904년 23세의 피카소는 파리에 완전히 정착하게 되는데, 이 곳은 지독히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탁선이라고 불리는 빈민굴이었다. 세탁선은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의 집합소로써 르느와르, 브라크, 막스 자콥, 모딜리아니 등이 살았던 곳이다. 또한 삼류가수, 목수, 약장수, 건달 등 다양한 계층의 이웃들이 있었다. 피카소는 평생을 상상할 수 없을 무질서 속에서 살았다. 정돈은 곳 머리를 굳게 한다고 생각했다. 무질서는 풍부한 아이디어와 창조력을 키우게 하는 토양이었기에 무질서는 곧 질서였다.


그 시기에 피카소는 조각가와의 결혼에 실패한 후 혼자 세탁선에 살고있던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게된다. 페르낭드는 "피카소를 처음 보았을 때 작고 까무잡잡했지만 눈빛은 너무도 강열했고 무척 불안스런 태도였지만 도무지 저항할 수 없었다" 고 했다.

그녀의 등장과 질병의 호전으로 불안과 초조는 가시고 자기 미술에 대해 점차 장밋빛 자신감을 얻는다. 피카소와 같이 살게 된 페르낭드는 그를 위해 갈게는 며칠 동안 꼼짝 않고 모델을 서 주기도 했다. 이들은 사랑했으나 너무도 가난해서 외출할 때 신을 구두 한 켤레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피카소는 밥은 굶더라도 서커스 구경은 거의 매일 가다시피 했다. 또한 광대나 여성곡마사와 친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이 시기를 장밋빛 시대 (1904~1906)라고 하는데 장밋빛 시대에는 황토색과 연한 장밋빛을 많이 사용했다. 그림에는 곡예사나 그 가족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히 이색적인 구경거리보다는 그들의 일상생활에 훨씬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시기의 작품에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소재로 다루었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책임을 사회의 잘못보다는 개인의 무능이나 운명으로 보았기 때문에 비참하기보다는 신비스런 기운이 더 강했다. 그러기에 부유층에게 현실의 부조리를 잊게 해 주고 색다른 위안의 세계를 던져 줄 수 있었다.

1906년 25세의 피카소는 회화와 데생뿐만 아니라 조각과 판화에서도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이 당시 미술품 상인 볼라르가 2000프랑을 주고 '장미빛 시대'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그림을 사들였다. 이 일은 미술로 억만장자가 된 피카소 삶의 서막에 불과했다.


20세기미술의 최고의 혁명이자 피카소를 세계적인 화가의 위치에 올려놓게 되는 '큐비즘'의 출발점이 바로 흑인미술이었다. 원시적이고 본질적인 감각들을 '직선적'으로 표현한, 흑인 조각품과 탈에 깊은 충격을 받는다. 그는 계시처럼 다가왔던 흑인미술에서 지극히 단순한 기하학적 상징성과 순순한 감각을 발견했던 것이다. 즉, 입은 장방형, 눈은 원주, 코를 표현하는 구멍 등의 새로운 조형세계로의 문을 본 것이다. '큐비즘'의 혁명적인 시각은 그 이후의 미술과 영화, 건축을 포함한 모든 예술장르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큐비즘'의 선구자로서 피카소의 전설적인 명성을 얻게 하는 작품이 바로 아비뇽의 처녀들이었다.

1907년 늦여름 26세의 피카소는 몇 달에 걸쳐 수 백장의 데생과 습작을 거쳐 거대한 작품을 하나를 완성했다. 그 유명한 아비뇽의 처녀들을 처음 공개 하던날 많은 사람들은 경악과 분노에 빠져 말을 잃었다. 대 화가였던 마티스는 격분했고 이 후 입체파의 쌍두마차가 될 브라크는 이렇게 외쳤다. "이거 마치 우리들에게 밧줄을 먹게 하거나 불을 들고 석유를 마시게 하는 것 같다"

친한 친구들조차 분노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단 한사람 현대 회화의 저명한 미술 수집상이 될 칸베릴러만이 칭찬을 하였다.



피카소는 아비뇽의 아가씨를 세상에 내놓은지 2년만인 28세 때부터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나 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사회의 흐름을 본능적으로 깨달아 과감하게 표현한 피카소의 작품은 사람들의 의심 섞인 눈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독일, 미국인들에게 꾸준히 팔려나갔다.


당시 페르낭드와 사귀고 있었던 피카소는 그의 친구인 마르쿠스의 애인 '에바'에게 반하여 열열한 구애를 하게된다. 이 시기의 작품 밑에는 항상 에바에 대한 사랑의 문구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때가 분석적 큐비즘의 시기로써 사물의 외면적인 모방을 하던 종래의 화법을 완전히 파괴하고 기하학적 도형으로 해체하여, 무엇을 그린 것인지 사람들은 분간하기 어려웠다.

마르쿠스는 결국 피카소에게 애인을 빼앗기고 만다. 화 가난 마르쿠스는 피카소를 만화로 풍자하여 분풀이를 했으나 그의 애인을 이미 피카소의 여자가 되었다.


1912년 31세의 피카소는 첫 번째 연인 이였던 페르낭드와 헤어지고 가냘픈 미모의 에바와 함께 살게된다.

이 당시 피카소가 캔버스에 물감과 관계없는 물건들을 사용함으로써 최초의 콜라주작품을 탄생시킨다. 철물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종이, 헝겊, 함석, 밧줄은 물론이고 물감에다가 모래와 톱밥을 섞어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소박한 주제와 일상적인 재료들로 제작된 콜라주는 고상한 가치만이 예술이라고 여기던 부르주아 예술관에 맞지 않았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날 이런 작품들이 보험에 가입된 채 고상함을 찬양하는 작품보다 중요한 곳에 전시되어 있다.

1915년 12월14일 1차 세계대전 이듬해에 젊은 여인 에바 구엘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에바가 죽은 후 무수히 많은 여인들을 사귀었던 피카소는 자신이 무대미술과 의상을 담당했던 퍼레이드라는 공연에서 25세의 러시아 무용수 올가 코클로바에게 흠뻑 빠지게 되어 1918년 7월 12일 36세의 피카소는 아폴리네르, 막스자콥, 쟝콕토가 증인으로 참석한 파리의 한 교회에서 첫아들 파울로를 낳아줄 올가와 결혼식을 한다.

올가와 결혼생활을 하는 시기에 피카소는 입체주의가 아니 감상자의 입맛에 맞는 강렬한 사실주의 작품을 그린 탓에 일부 비평가들은 입체주의를 배신한 기회주의자라는 신랄한 비평을 가하기도 한다. 마흔을 갓 넘은 화가로써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그림이 거래되었으면 점차 거부가 되어갔다.

아들 파울로를 낳은 후 유모, 요리사, 하녀, 운전수까지 둔 한층 더 사치스런 생활이 계속되었다. 올가의 깔끔한 기질과 지나친 상류사회의 생활로 피카소는 속박과 외로움이 더해졌다.

또한 1924년 불기 시작한 초현실주의는 피카소에게 격렬한 분열과 더욱 부채질하면서 이혼을 생각하게 한다. 1927년 46세의 피카소가 만난 마리 테레즈는 17세의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미술에는 문외한이었지만 수영과 등산 등의 운동으로 단련된, 건강미 넘치는 천진한 소녀였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프로포즈를 육개월이나 거절했으나 끝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마리 테레즈의 18번째 생일이자 성년식 이였던 날 이후 피카소는 올가와 살고 있는 자신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 마리 테레즈를 위한 비밀거처를 마련해 준다. 피카소는 그녀의 성적 환상을 주제로 조각, 그림, 판화를 통해 다른 어떤 여인들을 그린 것보다 많은 수의 작품을 남겼다.


올가와 헤어지고 마리 테레즈와 함께 살던 피카소는 1935년에 딸 마야를 낳은 마리테레즈를 소녀같은 순종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품위가 없고 무식하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버리고 지성적인 도라 마알을 만난다.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고 작은 도시 게르니카는 불바다에 휩싸이게 된다. 피카소는 큰 충격을 받고 게르니카를 그리게 된다. 도라는 이 그림의 착상과 주제 뿐만아니라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침식을 같이하며 피카소가 '게르니카'에 열정을 쏟도록 격려했다. 한달 여만에 완성한 '게르니카'는 파시즘의 공포 앞에 의연히 맞선 분노의 외침이며 혁명의 상징이였다. 피카소는 이렇게 외쳤다. "회화는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항하는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전쟁의 도구이다."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랑코와 더불어 다시 한번 전 유럽이 2차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1940년 59세의 피카소는 전재의 공포 속에서도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독일군은 피카소를 타락한 예술가로 보고 비난하였다.

1944년 파리가 해방되자 피카소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비록 총을 들지는 않았지만 나치의 블랙리스트 첫머리에 기재되어 있던 화가였다. 파시즘에 대항한 레지스땅스의 간판인물이 되어 버려 프랑스는 파리 해방 기념의 첫 사업으로 피카소의 작품전을 열게 하였다.


도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던 62세의 피카소는 1943년 어느 날 식당에서 21살의 프랑수와즈 질로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 피카소의 첫아들인 파울로보다 나이가 어렸던 프랑스와즈는 피카소와의 사이에서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는다. 또한 날카로운 지성을 지녔던 바로 전 연인, 도라 마알은 피카소와의 이별로 인해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치료를 받아야 하는 불행한 여인이 되었다.


피카소는 공산당에도 입당하게되어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예술가가 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위대한 인물이라는 명성은 얻었지만 예술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도외시되었다.

1949년 공산당이 평화운동을 상징할 수 있는 포스터를 피카소에게 의뢰한다. 그 포스터 한 중앙에는 한 마리의 비둘기가 앉아 있었다. 이 후 피카소가 그린 비둘기는 전 세계에서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1950년과 1962년, 두 차례에 걸쳐 레닌 평화상을 수상하게된다.


70대의 피카소는 도자기와 도기로 유명한 발로리스 시를 발견하고 흥분하다. 새로운 장르에 손을 댄다는 설레임 때문이였다. 피카소의 마지막 여자 쟈클린은 도자기공장 관리인의 조카로써 공장의 뒷일을 보살피고 있었다. 젊은 이혼녀였던 쟈클린은 피카소를 필사적으로 유혹하여 결혼에 성공한 피카소에게는 헌신적인 여자였다.

1961년 80세의 피카소는 쟈클린과 발로리스 시청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그 날 신문을 온통 장식한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고령에 나이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는 이 전의 대가들의 작품을 재해석하였다. 옛 거장들이 작품을 풍자하고 모방하는 궁극적 목표는 어느 장르이건 같았다. 고전적 규율과 겨루기 그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모방하기, 그 결과 그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피카소는 들라크루아의 <알제의 여인들> 14점, 벨라스케스의 <메닌느가의 사람들> 44점, 마네의 <풀밭위의 식사> 27점 등 과거의 그림을 재해석함으로써 전통과의 대화를 나누었다.

1978년 4월 8일 92세의 나이로 남프랑스 무쟝의 별장에서 사망하였다.

2. 작품 성향과 작품의 흐름.

 

1881년 10월 25일 에스파냐 말라가에서 출생하였다. 14세 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였는데, 이때부터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공부를 시작하였다. 이 무렵 당시 바르셀로나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와 북유럽의 미술운동에서 많은 자극을 받고 특히 A.르누아르, H.툴루즈 로트레크, E.뭉크 등의 화법에 매료되어 이를 습득하는 데 힘썼다.

1897년 마드리드의 왕립미술학교에 들어가 바르셀로나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고 1900년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 다음해 재차 방문하여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제작활동을 하고 있던 젊은 보헤미안의 무리에 투신하였다. 당시의 그의 작품에는 위에 열거한 화가들 외에 P.고갱, V.고흐 등의 영향도 많이 반영되었으나, 점차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소위 ‘청색시대(靑色時代)’로 들어갔으며, 테마는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의 참상과 고독감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1904년 몽마르트르에 정주하면서부터는 색조가 청색에서 도색(桃色)으로 바뀌는 동시에(도색시대) 포름으로는 과거의 에스파냐예술, 카탈루냐지방의 중세조각, E.그레코, L.F.J.고야 등이 지닌 독특한 단순화와 엄격성이 가미되어 갔다. 테마는 작품 《공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 《광대》 《곡예사가족》 등에서처럼 곡예사들을 묘사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어릿광대나 곡예사는 무대 위의 모습이 아니고 그 생활의 이면을 파헤친 애수였다.

1905년 G.아폴리네르와 교유하고 다음해에는 H.마티스와 교유하였다. 그러나 작풍은 P.세잔의 형체관을 살려나가 점점 단순화되고, 1907년의 영원히 기념할 명작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이르러서는 아프리카 흑인 조각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 동시에 형태분석(形態分析)이 비로소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G.브라크와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으로, 그와 함께 입체파운동에 들어가 1909년에는 분석적 입체파, 1912년부터는 종합적 입체파시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이미 20세기 회화의 최대 거장이 되었고, 종합적 입체파수법을 1923년경까지 계속하면서 여러 가지 수법을 순차적으로 전개하였는데, 활동범위도 J.콕토와 알게 되면서 무대장치를 담당하는 등 점점 확대되어 갔다. 즉 1915년 《볼라르상(像)》과 같은 사실적인 초상을 그리고, 1920년부터는 《세 악사》 등 신고전주의를, 다시 1925년에는 제1회 쉬르레알리슴전(展)에 참가하였다.

또 1934년에는 에스파냐를 여행하여 투우도 등을 그렸으며 1936년의 에스파냐내란 때는 인민전선을 지지하고, 다음해 프랑코장군에 대한 적의와 증오를 시와 판화로 나타낸 연작 《프랑코의 꿈과 허언(虛言)》 및 전쟁의 비극과 잔학상을 초인적인 예리한 시각과 독자적 스타일로 그려낸 세기의 대벽화 《게르니카》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통곡하는 여인》도 이 무렵의 작품이며 이때부터 피카소 특유의 표현주의로 불리는 괴기한 표현법이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는 에스파냐에서 지냈으나 다음해 독일군의 파리 침입 직후 파리로 돌아와 레지스탕스 지하운동 투사들과 교유하고, 1944년 종전 후는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주로 남프랑스의 해안에서 생활하면서 그리스신화 등에서 모티프를 취하여 밝고 목가적 분위기마저 자아내는 독특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도기(陶器) 제작과 조각에도 정열을 쏟고 석판화의 제작도 많아 이 영역에서도 새로운 수법을 창조하였다. 그 후 6·25전쟁을 테마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1951), 《전쟁과 평화》(1952) 등의 대작을 제작하여, 현대미술의 리더로서 거장다운 활약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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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 [1840.11.12~1917.11.17] 

요약 

프랑스의 조각가. 근대조각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가 추구한 웅대한 예술성과 기량은 조각에 생명과 감정을 불어넣어, 예술의 자율성을 부여했다.

원어명  Auguste Rodin

본명  르네 프랑수아 오귀스트 로댕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조각

출생지  프랑스 파리

주요작품  《지옥의 문》(1880∼1900) 등

본문

정식 명칭은 Rene-Fran??ois-Auguste Rodin. 1840년 11월 12일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근대조각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하급관리의 아들로 14세 때 국립공예실기학교에 입학, 조각가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1857년부터 3년간 국립미술전문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지만 낙방하였다. 1861년에는 아버지가 퇴직하였기 때문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갖가지 부업을 하면서 야간 제작에 몰두하였다. 1862년 누이의 사망에 충격받고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에마르 신부의 설득으로 작업장에 돌아왔다. 1864년 살롱에 처음으로 출품한 《코가 망그러진 사나이》는 그 생생한 사실적인 묘사가 심사위원들에게 거부감을 주어 낙선했다.

이 시기부터 생활을 위한 건축 장식업에 종사하다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가한 후 제대하여 벨기에의 브뤼셀로 떠났다. 이곳에서 약 7년간 건축장식 직공으로 일하면서 유럽 각지와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다. 특히 1875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로댕의 그 후 예술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878년 파리에 돌아와 벨기에 체재 중 제작한 《청동시대(靑銅時代)》를 출품하였다. 이것은 그 작품이 지닌 사실적 박진감으로 인하여, 살아 있는 모델에서 직접 석고형을 뜬 것이 아니냐는 근거없는 비난을 받으면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청동시대》는 로댕예술의 출발점이며, 그의 사실적 표현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걸작이었다.

1880년에 이 작품은 재인식되어 살롱에서 3등상을 받고 국가에서 매입하였다. 이와 동시에 로댕은 미술국 차관 체르케로부터 장식미술관의 현관 장식품 창작을 의뢰받았다. 그의 조각은 이때부터 《청동시대》의 사실적 표현에 만족하지 않고 내면적인 깊이가 가미된 생명력 넘치는 표현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장식미술관을 위한 대작의 모티프를 단테의 《신곡(神曲)》 〈지옥편〉에서 얻은 영감에 두고 거작 《지옥의 문》(1880∼1900)의 제작에 착수하였다. 한편 이러한 사상 속에서 그의 명성의 중핵을 이루는 갖가지 작품, 즉 《생각하는 사람》 《아담과 이브》 《칼레의 시민》(1884) 《발자크상(像)》(1898) 등을 통해 다채롭고 정력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나 중세 프랑스 조각으로부터 많은 자극과 감화를 받았으나, 그가 추구한 웅대한 예술성과 기량은 18세기 이래 오랫동안 건축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던 조각에 생명과 감정을 불어넣어, 예술의 자율성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훌륭하게 성취시켜 회화의 인상파와 더불어 근대조각의 전개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그 이후의 조각계는 직간접으로 모두 로댕을 출발점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망 후 그의 주거 및 전재산은 만년의 작업장이었던 파리의 호텔 비롱에 그의 미술관을 개설한다는 조건으로 국가에 기증되었다. 1916년 국립로댕미술관이 발족되어 조각의 대표작은 물론 데생·수채화 등도 전시되고 있다. 미국의 필라델피아미술관에도 로댕미술관이 부설되어 있다. 로댕의 작품 가운데 《세 그림자》 《이브 흉상》 《영원한 청춘》 등은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갱 [Paul Gauguin, 1848.6.7~1903.5.8] 

요약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이다.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으로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고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그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非)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했다.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프랑스 파리

주요작품  《황색의 그리스도》《타히티의 여인들》

본문 

파리 출생.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이다. 1865년 견습선원이 되어 상선(商船)을 탔으나 1871년 어머니가 죽자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거래점의 점원이 되어 점원생활을 하였다. 1873년에는 덴마크 출생 메트 소피 가드와 결혼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졌다. 이 무렵부터 회화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여 특히 인상파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27∼28세부터는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연구소에 다녔다. 1876년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여 C.피사로(1830∼1903)를 사귀게 된 것을 계기로 1880년 제5회 인상파전 후로는 단골 멤버가 되었다. 1882년 피사로의 소개로 P.세잔, A.기요맹(1841∼1927) 등과 친교를 맺어 화가가 될 결심을 굳혔다. 이듬해인 1883년 35세에 증권거래점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워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한때는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처자식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왔다.

1886년 6월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였다. 거기에서 종래의 인상파풍 외광묘사(外光描寫)를 버리고 차차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여 P.세뤼지에, M.드니, P.보나르 등, 후일 나비파(Nabis 派)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해 11월 파리로 돌아와 고흐, 로트레크 등을 알게 되었으며, 특히 고흐와는 깊이 사귀었다. 1887년 처음으로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섬에 갔다가 이듬해 파리로 왔으며, 이어 고흐와 함께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성격이어서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을 계기로 비극적인 작별로 끝났다. 그 후 다시 퐁타방으로 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을 그리고, 조각·판화·도기(陶器)에도 손대어 보았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하여 마침내 1891년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다. 《네버모어 Nevermore》《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타히티의 여인들》《언제 결혼하니?》 등은 만년의 작품들이다.

타히티에서도 빈곤과 고독에 시달리고 병마에 시달려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고, 원주민을 옹호하여 현지의 백인 관헌과 충돌도 일으켰으나,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1901년 마르키즈제도의 히바오아섬으로 자리를 옮겼을 무렵 매독과 영양실조로 회복 가망성이 거의 없었다. 1903년 환상으로 본 풍경을 그린 《눈 속의 브르타뉴 풍경》을 끝으로 기구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非)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하였다.


뭉크 [Edvard Munch, 1863.12.12~1944.1.23] 

요약

노르웨이의 화가. 불우한 가정환경과 육체가 그의 정신과 작풍에 영향을 끼쳤다. 애수 어린 서정적 성격을 점차 내면화하고, 생(生)과 사(死), 사랑과 관능, 공포와 우수를 강렬한 색채로 표현하는 독자적인 세계를 확립해갔다. 코펜하겐에서 요양한 뒤부터 색채가 밝아지고, 문학적 ·심리적인 정감이 두드러졌다.

국적  노르웨이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노르웨이 뢰텐

주요작품  《생명의 프리즈》 《별이 있는 밤》 《백야(白夜)》

본문 

뢰텐 출생. 아버지는 의사였으나 심한 이상성격자였으며, 일찍이 어머니와 누이를 결핵으로 여의고, 그 자신도 병약하였다. 그와 같은 환경과 육체가 그의 정신과 작풍에 영향을 끼쳤다. 오슬로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1881∼1884), 급진적인 그룹의 영향을 받았는데, 초기작품 《병든 아이》에서 볼 수 있는 삶과 죽음의 응시는, 그 후의 작품에서 일관하고 있다.

1889년 한여름을 바닷가의 마을에서 보내고, 신비스러운 밤의 불안을 잡아 《별이 있는 밤》 《백야(白夜)》 등을 그렸다. 1890년 파리로 가서 레옹 보나의 아틀리에에 들어갔으나 파리에서 그를 사로잡은 것은 일본의 목판화(木版畵)와 피사로와 로트레크의 작품이었으며, 고갱과 고흐의 매력이었다. 1892년 가을, 베를린미술협회전에 출품하였는데, 그것들은 초기의 애수 어린 서정적 성격을 더욱 내면화하고, 생(生)과 사(死), 사랑과 관능, 공포와 우수를 강렬한 색채로 표현하고 있어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여기서 뭉크의 독자적인 세계가 확립된 것이다. 게다가 베를린에서의 스트린드베리와의 만남은 그 깊이를 더하게 하였다. 그 후 파리에서는 말라르메 등과 사귀고 입센을 알게 되었으며, 명작 《생명의 프리즈》 연작(聯作)을 완성하고, 1894년부터 판화를 시작하였다. 1908∼1909년에는 신경병으로 코펜하겐에서 요양하였으며, 그 후부터 색채가 밝아지고, 문학적 ·심리적인 정감이 두드러졌다.

1937년 나치스는 독일에 있는 그의 모든 작품을 퇴폐예술이라 하여 몰수해버렸다. 만년에는 은둔생활을 하였다. 한편 판화가로서도 근대의 대작가이며 표현파의 선구자이자, 노르웨이 근대회화의 이재(異才)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 밖의 《봄》 《질투》 《절규》 《다리 위》 《저녁시간》 《죽음의 방 The Death Chamber》 등의 작품이 있다.


피카소 [Pablo Ruiz y Picasso, 1881.10.25~1973.4.8] 

요약 

스페인 태생의 프랑스 화가. 초기에는 르누아르, 툴루즈, 뭉크, 고갱, 고흐 등 거장들의 영향을 받았다. 후에 입체파를 대표하며 20세기 최대의 거장이 되었다. 《게르니카》, 《아비뇽의 아가씨들》등 수많은 역작이 있다.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에스파냐 말라가

주요작품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 《게르니카》(1937)

본문 

1881년 10월 25일 에스파냐 말라가에서 출생하였다. 14세 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였는데, 이때부터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공부를 시작하였다. 이 무렵 당시 바르셀로나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와 북유럽의 미술운동에서 많은 자극을 받고 특히 A.르누아르, H.툴루즈 로트레크, E.뭉크 등의 화법에 매료되어 이를 습득하는 데 힘썼다.

1897년 마드리드의 왕립미술학교에 들어가 바르셀로나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고 1900년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 다음해 재차 방문하여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제작활동을 하고 있던 젊은 보헤미안의 무리에 투신하였다. 당시의 그의 작품에는 위에 열거한 화가들 외에 P.고갱, V.고흐 등의 영향도 많이 반영되었으나, 점차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소위 ‘청색시대(靑色時代)’로 들어갔으며, 테마는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의 참상과 고독감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1904년 몽마르트르에 정주하면서부터는 색조가 청색에서 도색(桃色)으로 바뀌는 동시에(도색시대) 포름으로는 과거의 에스파냐예술, 카탈루냐지방의 중세조각, E.그레코, L.F.J.고야 등이 지닌 독특한 단순화와 엄격성이 가미되어 갔다. 테마는 작품 《공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 《광대》 《곡예사가족》 등에서처럼 곡예사들을 묘사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어릿광대나 곡예사는 무대 위의 모습이 아니고 그 생활의 이면을 파헤친 애수였다.

1905년 G.아폴리네르와 교유하고 다음해에는 H.마티스와 교유하였다. 그러나 작풍은 P.세잔의 형체관을 살려나가 점점 단순화되고, 1907년의 영원히 기념할 명작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이르러서는 아프리카 흑인 조각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 동시에 형태분석(形態分析)이 비로소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G.브라크와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으로, 그와 함께 입체파운동에 들어가 1909년에는 분석적 입체파, 1912년부터는 종합적 입체파시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이미 20세기 회화의 최대 거장이 되었고, 종합적 입체파수법을 1923년경까지 계속하면서 여러 가지 수법을 순차적으로 전개하였는데, 활동범위도 J.콕토와 알게 되면서 무대장치를 담당하는 등 점점 확대되어 갔다. 즉 1915년 《볼라르상(像)》과 같은 사실적인 초상을 그리고, 1920년부터는 《세 악사》 등 신고전주의를, 다시 1925년에는 제1회 쉬르레알리슴전(展)에 참가하였다.

또 1934년에는 에스파냐를 여행하여 투우도 등을 그렸으며 1936년의 에스파냐내란 때는 인민전선을 지지하고, 다음해 프랑코장군에 대한 적의와 증오를 시와 판화로 나타낸 연작 《프랑코의 꿈과 허언(虛言)》 및 전쟁의 비극과 잔학상을 초인적인 예리한 시각과 독자적 스타일로 그려낸 세기의 대벽화 《게르니카》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통곡하는 여인》도 이 무렵의 작품이며 이때부터 피카소 특유의 표현주의로 불리는 괴기한 표현법이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는 에스파냐에서 지냈으나 다음해 독일군의 파리 침입 직후 파리로 돌아와 레지스탕스 지하운동 투사들과 교유하고, 1944년 종전 후는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주로 남프랑스의 해안에서 생활하면서 그리스신화 등에서 모티프를 취하여 밝고 목가적 분위기마저 자아내는 독특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도기(陶器) 제작과 조각에도 정열을 쏟고 석판화의 제작도 많아 이 영역에서도 새로운 수법을 창조하였다. 그 후 6·25전쟁을 테마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1951), 《전쟁과 평화》(1952) 등의 대작을 제작하여, 현대미술의 리더로서 거장다운 활약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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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중학교 이구나....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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