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역사와 시작, 또는 카메라의 역사와 시작에 대해 알려주세요!!(내...

사진의 역사와 시작, 또는 카메라의 역사와 시작에 대해 알려주세요!!(내...

작성일 2004.09.08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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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또는 사진의 역사와 시작된 계기 등을 알려주세요(내공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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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사진의 역사


사진의 출현

이른바 <사진술(photography)>이 발명되기 전에도 사진기의 원형에 해당하는 장치는 이미 존재했었다. 10∼11세기에 아라비아의 학자 이븐 알하이담은, 일식(日食) 관측에 사용한 <핀홀(pin-hall)> 이용장치를 광학에 대한 연구보고서에서 명확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고안한 것이라고는 씌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장치는 그 이전부터 잘 알려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쓴 메모에도 <카메라오브스쿠라(camera obscura)>라는 이름이 종종 사용되고 있어, 이것이 실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같은 이탈리아의 자연철학자 G.B. 델라 포르타의 《자연마술(自然魔術, 1558)》에서는 구체적으로 카메라오브스쿠라의 회화에 대한 응용을 추진·장려하고 있다. 카메라오브스쿠라란 <어두운 방>이라는 뜻의 라틴어로, 닫혀진 어두운 방(상자)의 측면에 작은 구멍을 뚫고, 이 구멍을 통해서 맞은 편 측면에 외부의 화상을 그려내는 장치를 말한다. 뒤에 작은 구멍(핀홀) 대신 볼록렌즈를 붙이고, 상이 찍히는 측면을 불투명유리로 해서 여기에 종이를 대고, 상을 따라서 연필로 덧그려서 베끼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18∼19세기가 되면서 카메라오브스쿠라 또는 이와 유사한 장치는 회화의 보조수단으로서 점차로 보급되어 화가의 상비 도구가 되었다. 한편 시대의 변화에 따라 카메라오브스쿠라의 광상(光像)을 연필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고착시키는 방법이 요구되면서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 銀板寫眞)이 발명되었다. 이것의 발명자인 L.J.M. 다게르는 본래 화가이며 오페라 배경 등의 디오라마의 작가였다. 그의 그림은 그 시대에 맞게 지극히 객관적·자연주의적인 작풍이었고 또 디오라마도 사실성이 높은 정교한 것으로,이러한 다게르가 사진술의 발명에 뜻을 둔 것은 그 예술적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은 처음부터 오늘날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용도를 목표로 개발된 것은 아니며, 여러 사람들이 처음 본 사진의 화상으로부터 그 특징을 하나하나 발견해 가면서 응용의 길을 넓혀온 것이다. 예를 들어 처음 사진을 본 사람들이 사진에 찍혀진 포도(鋪道)·포석(鋪石)의 수와 형태가 실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에 경탄하였다는 이야기와, 한 사람의 초상을 찍는 것이나 두 사람 이상 몇 사람의 것을 찍는 것이나 같은 시간에 할 수 있다는 초기 영업사진가의 선전문구는 후에 사진의 용도가 다방면으로 넓어져가는 전단계의 에피소드로서 매우 상징적이다. 최초의 실용적인 사진술로서 다게레오타입이 공표된 것은 1839년 8월 프랑스학사원에서 개최된 아카데미 데시앙스(과학아카데미)와 아카데미 데 보자르(미술아카데미)의 합동회의에서였으며, 이 밖에도 많은 연구가들(J.N. 니에프스·W.H.F. 탈보트·H. 바야르·T. 웨지우드·J.F.W. 허셜 등)이 거의 같은 시기에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각기 방법은 달랐어도 예술로의 이용을 목적으로 개발되었다는 점에서 같았고, 뒤이은 사진개척자들의 경우도 목표는 언제나 예술표현의 가능성을 향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초기의 사진의 대상은 풍경·정물·초상 등의 회화적 주제가 중심이 되었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사진이 회화예술을 본보기로 해서 출발한 것은 당연했으며, 실제로 사진을 새로운 표현매체로서 이용하는 것에 의욕을 보인 것도 대부분은 화가와 예술애호가들이었다. 한편 화가들 모두가 사진의 등장을 기뻐했던 것은 아니다.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실제의 상이 묘사된다는 것은 옛날부터 많은 화가들도 바라던 일이었지만, 막상 사진술이 실현되자 프랑스의 화가 H.P. 들라로슈가 <오늘을 마지막으로 회화는 죽었다>라고 절규했을 정도로 화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초상화가·미니아튀르화가·실루엣화가·풍경화가·복제화가 등에 있어 사진은 위협적인 라이벌이었으며, 사실 사진의 등장으로 실직한 사람도 많았다. 어떤 독일 신문은 사진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라는 논설을 실어 발명자 다게르를 비난하였고, 파리의 미술가들은 사진의 금지를 요구하며 정부에 진정하였다. J.A.D. 앵그르 같은 화가조차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는데, 그는 사진의 힘은 인정하고 있었으며, 그의 《샘(1856)》도 실은 사진을 근거로 그린 것이라는 사실이 오늘날 밝혀졌다. 사진의 출현은 화가들을 일시적으로나마 혼란에 빠뜨렸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진의 상이 본질적으로 회화와 다르다는 점이 밝혀짐에 따라 반대로 20세기를 향해 회화는 독자적인 방향을 찾아나갔으며, 이것은 동시에 사진이 독자성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였다. 사진을 참고로 이용한 화가로는 G. 쿠르베·P. 세잔·H. 루소·P.R. 피카소 등이 있으며, 특히 적극적으로 사진을 이용했던 화가로는 H.G.E. 드가·H.T. 로트레크가 잘 알려졌다.
예술사진의 계보

처음의 사진에서는 회화의 주제를 본보기로 하는 것이 당연한 듯이 여겨졌다. O.G. 레일랜더의 《인생의 두 갈래 길(1857)》과 같은 우의적·교훈적인 주제의 합성사진이나 H. 로빈슨의 감상적인 장면의 연출사진 등이 이러한 맥락에서 <예술사진>으로서 일반에게 환영받고 높이 평가되었다. 이 사진들은 확실히 기술수준도 높고 연출도 정교해서, 사진의 한 방향을 일찍부터 개척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런 주제는 당시 예술의욕의 퇴폐국면에 호응한 것인데, 이런 회화적 주제의 답변확정은 후에 오랫동안 <예술사진>의 양식으로 고정개념화되어 사진 본래의 표현특성을 발휘한 작품의 등장을 저해하였다. 특히 1890년 무렵부터 1910년 무렵까지는 이 예술사진 또는 회화주의(픽토리얼리즘)의 전성시대였는데, 후에 대상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우수한 사실주의 작품을 많이 남긴 A. 스티글리츠와 E. 스타이컨도 이 회화주의에서 출발하였다. 한편 초기의 예술사진 가운데 합성사진 기법은 나중에 G. 그로스·J. 하트필드·E. 리시츠키·M. 에른스트 등에 의해 포토몽타주와 포토콜라주라는 비합리적이지만 통일적인 공간을 구축한다고 하는 근대예술 속에서 새로운 각광을 받게 되었다. 한편 <이상화된 영상> 또는 전형적으로는 여자나 풍경 등의 <아름다운 것의 표현>으로서의 예술사진의 계보는 아마추어사진가를 중심으로 이어져 현대에 이른다. 이것은 회화예술과 같은 기술적인 숙달이 필요하지 않는 사진의 특성으로, 누구나 비교적 단기간에 사진 전반의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진기술의 습득이나 기기의 조작 그 자체가 결코 무미건조한 것이 아니라 흥미진진한 대상이기도 하고 또 <예술사진>의 양식만 따른다면 쉽게 <예술적>인 표현을 얻을 수 있다는 대중성 때문에 취미로서 일반화되어 보급되었다. 현재 높이 평가되고 있는 몇 점의 예술사진들도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풍토와 맥락 속에서 생겨난 것이며, 이러한 특징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예술사진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서유럽의 <살롱사진>이 해낸 역할은 매우 크다.
초상사진의 계보

사진의 역사에서 초상사진은 그 초기단계부터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자신의 초상을 화가에게 그리게 하여 그것을 얻는다는 일은, 오랫동안 사람들(특히 상류계급의 사람들)의 강한 사회적 성격을 드러낸 욕구의 하나였다. 이를 위해 화가를 장기간 고용해야 했으며, 이러한 일은 14∼15세기 이후에는 귀족과 부호 등 권력자가 아니면 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초상화는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기도 하였으며 대중에게는 인연이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진이 발명되자 초상화에 대한 대중의 동경을 충족시키면서 비교적 값이 싸고 또 일시에 많은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초상사진은 순식간에 사진가의 주요 사업이 되었다. 프랑스의 A.A.E. 디스데리는 동시에 8장에서 12장의 사진이 찍히는 <명함판사진>을 고안했으며, 1장에 보통 50∼100프랑씩 하는 초상사진을 20프랑에 촬영하였다. 또한 친구·가족의 초상사진의 교환·수집이 성행하게 되어 가족앨범도 나타났다. 그러나 초상사진의 수요증대는 한편으로 미숙한 직업사진가를 양산해서 사진의 질을 저하시켰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초기에 우수한 초상사진을 남긴 사진가도 있었다. J.M. 캐머런은 1863년 48세의 나이로 사진을 시작하였지만 교우관계가 넓어 시인 A. 테니슨·R. 브라우닝과 과학자 C.R. 다윈 등 많은 저명인사들의 초상사진을 남겼다. 캐머런의 사진은 오늘날 말하는 이른바 클로즈업 수법이 사용된 선구이기도 하며 또한 <인물의 내면성>을 포착한 것으로도 높이 평가되는데, 이것은 캐머런이 사용한 칼로타입(calotype, 또는 talbotype)이라는 사진술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 방법은 W.H.F. 탈보트가 고안한 것으로, 종이 위에 감광재료를 바르고 촬영하여 현상한 뒤, 다시 같은 감광지에 프린트하는 것인데 몇 장이고 같은 사진을 복제할 수 있었다. 현대의 사진법과 같은 이 네거-포지법은 1장의 사진밖에 만들 수 없었으며 당시 주류를 이루었던 은판사진보다는 나았지만, 종이를 통해서 프린트하기 때문에 미세한 묘사가 불가능하였다. 반면에 생생한 묘사를 부드럽게 할 수 있어서 예술적인 기품을 높일 수 있다고 하여 즐겨 사용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 당시의 사진은 감광도가 낮고 장시간의 노출이 필요했으므로 피사체도 장시간 표정을 굳히고 같은 자세를 계속 취해야만 했다. 한편 이것이 오히려 위엄 있는 사진을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캐머런 외에 D.O. 힐과 R. 애덤슨도 칼로타입을 사용했으며, 우수한 예술적 자질에 덧붙여진 이러한 촬영조건은 그들의 초상사진의 스타일을 결정지었으며, 사진(필름)의 감광도가 높아지기까지는 이러한 스타일이 일반적 경향으로서 계속되었다. 이 밖에도 초기의 저명한 초상사진가로는 미국의 M.B. 브래디, 프랑스의 나다르(본명은 G.F. 투르나숑) 등이 있다. 브래디는 많은 명사들을 촬영하고 그 사진집을 출판하였는데, 1861년에는 3만 장이 넘는 초상을 촬영했다고 한다. 나다르도 파리의 스튜디오를 방문한 명사들의 우수한 초상을 촬영했으며, 이 밖에도 기구(氣球) 위에서 공중사진을 촬영하는 등 여러 가지 촬영을 시도하였다. 또 같은 시기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작자 L. 캐럴(본명은 C.L. 도지슨)은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사진을 많이 남겼다. 이와 같이 초상은 당시 사진의 주요 표현주제였다. 대중의 요구에 부응한 대량의 초상사진은 사회사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사진 그 자체에 친근감을 가지도록 했으며, 회화와는 다른 사진의 특성에 대한 지식 보급에 이바지하였다. 뒤에 전문가가 아닌 사람도 쉽게 촬영할 수 있는 이스트먼 코닥사의 사진시스템과 건판, 롤필름 등이 보급되자, 누구든지 사진을 촬영할 수 있게 되어 영업적인 초상사진의 수요 자체는 감소했다. 그러나 사진은 한층 생활 가까이에 있는 것이 되었고, 사진화상의 일상생활로의 침투도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또 필름의 감광도가 한층 높아져서 스냅촬영이 쉬워지자, 순간적인 표정 또는 모습이 촬영되어 사람들이 육안으로 잡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인간상을 사진 위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시각체험은 현재 생각되는 것보다도 훨씬 큰 영향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초상사진>은 기념사진·가족사진 등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기록사진>으로 융합되어 갔지만, 오늘날도 초상사진은 어떤 개인의 동일형을 알아볼 수 있는 시각물이나 그 존재 자체를 나타내는 시각물로서 사용됨으로써 의미를 잃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매일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사진의 대부분은 얼굴사진을 포함한 인물사진이 차지하고, 결혼식 등에서 촬영하는 인물 중심의 기념사진, 가까운 사이에서 행해지는 초상사진 교환, 또 역사적으로는 브로마이드에서 시작해서 오늘날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서 범람하고 있는 예술인·유명인사의 초상 등은 여러 특별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나 크게 묶어 초상사진의 계보에 들어간다.
기록사진의 계보

사진의 가장 기본적인 성질은 기록기능이다. 이것은 초기부터 주목되었던 사진의 본질이며, 언제나 사진에 대한 논의의 중심이 되었다. 초기에는 단순한 기록사진을 사진의 기록이라는 기능만을 드러낸 조야하고 질낮은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있었으며, 사진가의 해석과 조작이 표출되어야만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진가는 사진의 기록성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표현·전달만을 목적으로 이것을 있는 그대로 이용했다. 예를 들면 1855년에 영국의 R. 펜턴이 세계 최초의 종군사진가로서 크림전쟁을 촬영했는데, 이것을 본떠 그린 목판인쇄의 그림이 신문에 실렸다. 당시에는 사진인쇄가 아직 개발되지 않았으므로, 잠시 동안은 <사진을 기초해서 그렸다>는 주석으로 사진과 마찬가지의 신빙성을 얻고 있었다. 또 여행가와 탐험가가 이국이나 벽지를 촬영해서 공표하면, 보는 사람은 미지의 세계를 알게 되는 즐거움을 마치 실제처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들 사진의 기록으로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가까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초상사진가인 브래디는 A. 가드너 등과 함께 남북전쟁을 촬영하였고, 그 때문에 재산을 탕진했다고도 한다. 또 20세기 초 파리에서는 E. 아트제가 파리의 서민생활과 풍속을 촬영하였는데 이것도 한 시대의 다큐멘테이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기록사진 또는 사진에 의해 기록으로 남기려는 노력은, 사진이 <예술>이긴 하지만 기록성에 근거해서 그 특질을 발휘하는 것이며, 또 기록성 자체의 힘으로 성립된 사진도 세계를 아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서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견해가 일찍부터 싹트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 예로서 후에 영화의 발명과도 관련된 1887년 E.J. 마이브리지가 찍은 유명한 사진 《갤럽하는 말의 연속사진》을 들 수 있는데, 당시 사람들에게는 말이 질주하는 모습을 분석적으로 본다는 것은 경이롭고도 감동적인 시각체험이었다. 이 호기심을 채워준 것이 기록사진의 최초의 동기였으며, 풍경사진도 이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볼 때 이 사진들이 예술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며, 기록과 확인이라는 목적과 함께 이러한 심적 작용도 기록사진의 성립, 발전의 큰 요인을 형성했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이렇게 해서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또는 정보전달의 장에서 하나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 기록하는 것으로서의 사진은 대량복제수단인 인쇄라는 매체와 연결됨으로써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그래프잡지의 출현이었다. 1936년 창간된 미국의 《라이프》지를 대표로 하는 세계적인 그래프저널리즘의 성황은, 의욕에 찬 많은 사진가에게 활동의 장을 제공함과 동시에 포토에세이·조사진(組寫眞)이라는 사진저널리즘의 독특한 새로운 수법·스타일을 확립시켰다. R. 캐퍼·M. 버크 화이트·W. 스미스·H. 카르티에 브레송 등의 사진가들은 이러한 환경에서 나타났다. 제 2 차세계대전 후의 그래프저널리즘은 기본적으로는 전쟁 전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잠시 정체현상을 보였을 뿐이었다. 그동안에도 밝은 렌즈의 개발, 필름 감광도의 향상, 스트로보라이트의 개발 등 전쟁 전부터 축적되어 온 여러 가지 사진기재의 개발및 그 성능의 향상에 의해 사진이 기록할 수 있는 범위는 비약적으로 확대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종류의 인쇄매체를 통해서 보다 새로운 시각체험을 계속 제공하였다. 1950년대의 텔레비전의 등장에 의해 이른바 그래프잡지 자체는 시각매체로서의 특권적인 지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진 자체는 오히려 잡지매체를 포함한 여러 가지 매체 속으로 침투해서 그 기록성 또는 묘사성이 광고·보도·연구 및 각종 기념·기록 등 여러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전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광고사진의 발전은 눈부신 것이었다.
한국사진사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해병대의 전투기록, 역관, 해외사찰 사신 등을 통하여 사진에 대한 개념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한국사진사는 1880년대부터 시작된다. 84년 지운영(池運永)이 사진관을 세웠고, 95년 김규진(金圭鎭)이 천연당사진관을 세웠으며, 이들의 사진도입에 의하여 초상사진시대가 시작되었다. 1884년에 지운영은 고종의 초상사진을 찍었으며, 황철도 초상사진을 많이 남겼으나 이들의 사진은 대체로 가속이나 그즈음 유명인사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사진기재의 값이 비쌌고, 사회적 관습 등으로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95년 실시된 단발령으로 초상사진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나 1900년대 초 천연당사진관의 고객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 초상사진의 수요증가에 의해 영업사진관과 사진사가 나타나게 되었다. 1911년 최창근(崔昌根)이 YMCA사진학교를 개설하여 36년 재정난으로 폐교될 때까지 많은 사진사를 양성하였다. 한편 경성사진사협회가 구성되어 예술사진이 시작되었고, 신낙균(申樂均)에 의해 회화의 영향을 받은 예술사진이 주창되었다. 고무인화법·브롬오일 등의 인화법을 사용하여 회화적 분위기의 영상을 창출해 낸 예술사진은 사진의 가치를 회화와 동일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다양한 소재를 활용하여 아름다운 화면을 구성하려는 예술사진이 시도되었는데 1928년의 정해창(鄭海昌)의 예술사진전람회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로부터 아마추어사진가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백양사우회 등의 사진클럽이 조직되었다. 이들 사진클럽은 8·15광복 이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와 한국사진작가협회로 재편성되었다가 5·16 이후 한국사진작가협회로 통합되었다. 한편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이 창간되면서 보도사진이 시작되었고, 8·15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예술사진에서 벗어나 사실주의 사진의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48년 열린 임석재(林奭濟)와 이경모(李坰謨)의 광산과 부두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사진전은 사실주의 사진의 한 예이며, 이경모의 여수·순천반란사건 도큐먼트는 다큐멘터리사진의 시초가 되었다. 50년대에는 한국사진이 해외사진전에 출품되면서 한국사진의 국제화가 이루어졌으며 60년 4·19 보도사진은 시대의 기록자요 목격자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도 했다. 또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사진부문, 동아국제살롱 등 공모전들이 사진발전에 기여했다. 60·70년대의 산업화와 80년대의 컬러사진으로서의 전환은 상업사진의 발달을 가져왔고, 상업사진을 통해 프로사진작가들이 출현하였다. 한편 대학에 사진학과가 설치되고, 영상·사진예술 등 사진전문잡지도 발행되어 사진발달을 촉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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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카메라의 역사를 말하기 전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카메라 자체의 역사다. 현대 카메라의 근원으로 대부분 라틴어로 ‘어두운 방’이라는 뜻을 가진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를 꼽는데, 이는 어릴 적 과학시간에 해봤던 바늘구멍 사진기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사진을 남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림을 더욱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졌다.
카메라 옵스큐라와 달리 처음부터 화상을 고정시킬 목적, 즉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제작된 최초의 카메라는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 카메라다. 다게레오타입 카메라는 2개의 나무상자가 포개어져 있고 앞에 렌즈가 달려 있어 상자 뒤쪽에서 다크 슬라이드(끼워넣는 상자)를 밀어 넣어 초점을 조절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후 동시다발적으로 혹은 조금의 차이를 두고 칼로타입, 스테레오 카메라(이안식 입체카메라), 리플렉스 카메라 등으로 조금씩 다양하게 발전하게 된다.
1900년대에 들어서 오늘날 카메라의 토대가 된 제품이 선을 보이게 됐는데, 그 첫 번째가 1925년 독일인 O. 바르낙이 설계한 35mm 필름을 사용하는 ‘라이카’다. 이 라이카는 지금까지 이어져 현재 M6형까지 발매되고 있다. 또 하나는 1929년 발매된 프랑게하이데케사(현재 롤라이사)의 롤라이플렉스다. 2안리플렉스 시대를 연 기종이지만 현재는 소량만이 생산되고 있다. 또한 차이스콘사의 스프링 카메라군(群)도 한 시대를 이뤘으며, 이 카메라들이 현재의 소형 카메라의 기초를 구축했다.



필름을 사용하지 않는 디지털 카메라의 상품화는 1981년 소니사에 의해 제작된 아날로그 방식의 스틸 비디오 카메라에서 비롯됐다. 마비카(Magnetic Video Camera)라는 상표로 선보인 이 스틸비디오 카메라는 필름 대신 플로피 디스크를 이용해 영상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비디오 테이프 레코더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초기의 디지털 카메라는 이렇듯 아날로그 방식으로 시작했다.
디지털 카메라는 사진의 현상과 인화라는 절대 시간을 필요로 하는 필름 카메라의 조건 때문에 시간 단축이 생명인 언론사들을 중심으로 그 필요성이 요구됐다. 그래서 디지털 카메라는 발명 초기부터 언론매체를 근간으로 뿌리내리려고 했으며, 실제로 세계적인 관심과 이목을 모았지만 조악한 화질 때문에 다른 인쇄매체에 비해 지질이나 인쇄 성능까지 뒤떨어진던 신문에 전자 사진을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했다.
아날로그 방식이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된 것은 1990년 다이캠(Dycam)의 출시부터다. 32개의 화상을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 칩을 적재한 다이캠은 376x240의 해상도로 TV 화면만큼도 못했던 마비카보다는 눈에 띄게 개선된 화질을 자랑했지만 애석하게도 흑백 사진만을 촬영할 수 있었다.
다이캠 이후, 도시바에서 12개의 40만 픽셀 컬러 이미지를 저장할 수 있는 MC200 카메라를 발표했으며, 코닥사는 니콘의 F-3 또는 캐논의 EOS 카메라의 바디를 이용해 뒷 부분에 전자 메모리 장치를 장착한 전문가용 디지털 카메라 DCS 시리즈를 개발했다.
현재, 디지털 카메라는 크기, 디자인, 화질, 제조사, 기능에 따라 수십, 수백 가지의 종류가 나오고 있다. 여기에 필름 카메라로는 절대 실현 불가능한 다양한 기능(디지털 카메라의 기능을 다 익힌다는 것이 아날로그 세대에게는 형벌에 가까울 만큼)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요즈음엔 웬만한 디지털 카메라 성능을 가진 핸드폰 카메라까지 선을 보이며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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