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세계를 설명헤주세요(내공20)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세계를 설명헤주세요(내공20)

작성일 2009.06.19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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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1.연대기

2.일생

3. 작품세계

 

 

 
 

르네상스 가장 위대한 화가.

세계 최초의 해부학자.

인류 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인물중 하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의 특성은 극단적으로ㅡ

다방면으로ㅡ

재능을 가졌다는 점이다.

미술,음악,건축,군사공학,도시계획,비행기계의 고안을 포함한 다양한 발명과 함께

해부,요리,식물학,의상 및 무대디자인,해학등

수많은 분야에서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다.

예술가로서의 업적은 물론이고

과학이라는 용어가 없었던 시대에 여러 자연과학 분야에 걸친 관찰과 실험을 하고 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그의 미술작품들은 과학적인 그의 생각과 매우 밀접하게 결부되어있다.

 

1. 레오나르도다빈치의 연대기
      Leonardo da Vinci (1452 ~ 1519)

1452년 4월 15일 이탈리아 피렌체 서쪽 빈치 마을에서 출생. 부친 피에로는 피렌체의 공증인이며, 레오나르도는 서자로 태어나 조부의 집에서 자랐다.

1453년 비잔티움 무너짐.

1469년 마키아 벨리 출생 / 피에르 드 메디치 사망. 로렌초와 기울리아노가 피렌체를 선도.

1472년(20세) 피렌체의 화가 조합에 등록.

1473년(21세) 코페르니쿠스 출생 / 레오나르도 화가 조합에 받아들여짐.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된 풍경 소묘화에 「8월5일」기입.

1475년 미켈란 젤로 출생

1476년(24세) 피스토이아 대성당의 제단화가 스승인 베로키오에게 의뢰되었는데, 레오나르도는 클레디와 합작 <受胎 告知>를 그림.

1480년(28세) 마젤란 출생 스승 베로키오가 3년에 걸쳐 계속해 온 피렌체 본당 은제단의 부조 <세레 요한의 참수>제작에 협력. 또한 <콜레오니 騎馬像> 구상도를 만들어 베로키오에게 제공.

1481년(29세) 3월, 스코페트의 성 도나트 수도원 주제 단호를 의뢰받음(동방박사들의 경배). 이 그림이 <3王來朝>인데 완성시키지 않음

1482년(30세) 밀라노의 섭정 스포루차의 초청을 받아 처음으로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로 감. <스포루차公 騎馬像>제작에 관한 협의.

1483년(31세) 4월25일, 밀라노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의 신심회 예배당 제단화 <岩窟의 聖母>를 의뢰받음. 라파엘로, 루터 출생.

1487년(35세) 8월8일, 9월30일 두 번에 걸쳐 밀라노 대성당의 설계료를 지불받음. 1488년 티티안 출생.

1489년(37세) 4월과 5월에 그림 데상에 인체해부학을 연구한 흔적이 보임

1490년(38세) 6월8일, 파비아 대성당의 설게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파비아에 들르도록 로드비코 공의 명을 받음 레오나르도, 자신의 공방 만들다.

1492년 콜럼버스 제1회 항해에 나섬. 바하마 제도 발견.

1493년(41세) 레오나르도의 생모 카테리나, 밀라노에 옴. 11월 30일, 독일 황테 맥시밀리안과 비앙카 마리아 스포루차의 결혼식 날 레오나르도의 <스포루차 騎馬像>이 성내 광장에 공개됨.

1495년(43세) 이 해부터 <최후의 만찬>제작에 본격적으로 착수. 스포루차성의 작은 방 장식을 제자들과 함께 함. 생모 카테리나 사망. 이 장례비 메모가 남아 있음.

1497년(45세) <최후의 만찬>거의 완성. 파치올리의 「神聖 比例」저술에 협력.

1498년(46세) 파치올리의 「神聖 比例」 로드비코에의 헌사가운데, <최후의 만찬>이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레오나르도의 재능이 걸출하다는 등이 기록되어 있음.

1499년(47세) 프랑스 루이 12세 베네치아, 피렌체와 동맹, 밀라노를 침공. 이때 스포루차 기마상 모형이 파괴됨. 연말경 밀라노를 떠나 피렌체로 향발.

1500년(48세) 피렌체로 가는 길에 만토바에 들러 이사벨라데스테의 초상화 고(稿)를 그림. 3월에는 베네치아에 체류했고 8월이 되기 전에 피렌체에 도착.

1501년(49세)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의 세르비티가에서 일행과 함께 거주. <성 안나> 畵稿를 그림. 또한 소품 <紡車의 성모>제작. 과학연구에도 몰두.

1502년(50세) 제잘레 보르지아, 로마냐 공이 됨. 레오나르도는 보르지아의 군사토목기사로 로마냐 지방에 출장, 여러 곳을 순방.

1503년(51세) 3월, 피렌체로 귀환. 7월 24일, 알르노 강 수로 변경 계획서를 제출.

1504년(52세) 1월25일,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설치 장소를 결정하는 위원회에 참석.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10남 2녀를 남기고 사망.

1506년 모나리자 완성

1509년(53세) 6월6일의 일기에 <앙가리의 會戰>을 위한 칼튼이 악천후로 인해 조각났다고 씀. 벽화를 그리는 기술에 실패. 가을에는 완전히 단념.

1506년(54세) 4월27일, <岩窟의 聖母>를 다시 그리기로 약속. 4월30일 부친의 유산 상속인 가운데 레오나르도가 빠졌음. 6월1일 밀라노 향발.

1507년(55세) 5월,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왕의 화가가 됨. 9월 피렌체에 일시 귀환.

1508년(58세) 피렌체의 피에로 마르첼리가에 머물면서 물리, 수학 노트를 하기 시작함. 7월 밀라노로 돌아옴.

1510년(58세) 이때 해부학 연구에 열중, 해부학자들과 자주 접촉

1412년 미켈란 젤로, 시스틴 성당 천장화 완성. 1513년(61세) 밀라노의 비올라가에서 거주. 9월2

일 메르시, 사라이 등과 함께 로마로 향발. 교황 레오 10세가 제공한 바티칸 궁의 별실에서 수학과 과학을 연구.

1514년(62세) 9월, 바르마, 산탄젤로 등지를 여행. 「원의구적법」, 「굴곡면의 기하학」 등 집필.

1515년(63세) 레오나르도는 19일자 일기에서 그의 후원자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결혼을 하기 위해 로마를 떠났다는 것과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기숙. 프랑소와 1세 즉위

1516년(64세) 3월17일, 줄리아노 데 메디치 사망. 로마에서의 후원자를 잃음. 이탈리아를 떠나 앙브와즈로 향함.

1517년(65세) 5월 프랑소와 1세의 별장인 프랑스 앙보와즈 교외 클레성에 체재

1518년(66세) 5월3일~16일까지 앙보와즈에서 열린 축전에 그가 고안한 기계 등을 전시. 또한 프랑스 왕의 여러 건축에 관여.

1519년(67세) 4월 23일, 유언장 작성. 메르시를 유언 집행인으로 지명하고 그의 작품과 수기들을 건네줌. 5월 2일 사망.

 

 

2. 일생

모나리자의 미소 처럼 레오나르도의 일생은 그렇게 주홍빛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그의 노년에 그린 자화상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인생의 역경을 간직한 듯한 그의 잔주름과 무엇에 대한 또렸한 응시가 없는 그의 눈빛처럼 그의 일생은 그렇게 자잘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다빈치는 1452년 이탈리아 "빈치"라는 마을에서 공증인 세르 피에로 다빈치(Ser Piero davinci)와 농부의 딸 카테리나(Caterina)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같은해에 아버지 세르 피에로는 16세의 알비에라 아마도리와 첫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빈치는 다섯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 안토니오의 세금 신고서에 그의 이름이 발견된다. 태어나서 다섯살이 되기전 까지의 어린 그의 존재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레오나르도의 가계는 대대로 공증인의 집안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메모하는 습관이 몸에 배여있었다.

다빈치의 출생도 할아버지 안토니오의 메모속에서 발견된다. 발견된 메모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1945년. 내게 손자 한 명이 태어났다. 내 아들 세르 피에로의 아들로." 하지만 이 단 한줄의 기록으로 레오나르도가 태어난 집과 그가 성장한 장소, 그가 태어날때의 상황이나 그의 출생이 어떻게 받아 들여 졌는지에 대하여는 실마리를 잡을 수 없다. 하지만 후에 레오나르도가 남긴 기록들과 그시대에 관한 폭넓은 연구결과를 토대로 어린시절의 레오나르도에 대하여 짐작해 볼 수 있다.

먼저 레오나르도의 출생에서 부터의 엇갈림은 그의 어린시절을 혼란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했으리라. 할아버지 안토니오의 장남이며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세르 피에로는 이미 공증인의 길에 접어들어 출세하려는 일념에 사로잡혀 피사나 피스토이아, 아니면 피렌체에 가 있을때가 많아서 집에는 거의 붙어 있지 않았다.

레오나르도가 태어나던 해에 첫번째 정식 결혼식을 올린 이 젊은 공증인과의 레오나르도의 어머니 카테리나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사생아의 어머니인 이 농부의 딸과의 관계가 계속 유지 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아직까지 여러가지 베일에 싸여있는 인물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모 카테리나에 관한 것들 이다. 다만 기록이 남아있는 것들은 다빈치를 출산할 당시 스물 두살이었는데 레오나르도가 두 살되던 해 1954년 안토니오 아카타브리가라 불리는 남자와 결혼했다. 아마 태어나서 어머니 품에서 자라던 레오나르도가 이때쯤 할아버지 집안으로 입적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세르 피에로가 결혼전에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던 카테리나는 매우 아름다웠으리라는 짐작이 드는데 아들 레오나르도가 어머니의 미모를 이어받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훗날 어머니를 생각하며 레오나르도가 남긴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초라한 누더기를 걸치고 치장도 전혀 하지 않은 두메 산골의 농사꾼 아가씨들이 멋을 부린 도시의 아가씨들 보다 더 아름답다는 걸 너는 아는가?" 그렇다면 아버지 세르 피에로와 생모 카테리나의 사랑은 어떻 했을까? 각자 결혼을 하고나서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을까?

그때의 시대적 배경과 여러가지 정황으로 이를 추측해 본다. 그시대는 신분이 다른 계급의 결혼이 사회 통념상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던 시기이다. 농부나 소작인의 딸이거나 여인숙의 하녀 였을지도 모를 스물 두살의 여자와 잘나가는 공증인 신분의 청년이 그시대에는 그렇게 일반적인 결혼상대자는 아닌 것 같다.

다빈치가 태어나던해에 세르피에로의 아버지 안토니오는 급하게 이 큰아들의 결혼을 서둘러 열여섯살의 부르주아 아가씨인 알비에라 디 조반니 아마도리와 혼인을 시키게 된다. 또한 레오나르도가 젓을 땔 무렵 그러니까 두살이 되던해에 생모 카테리나는 어느정도 형편이 되는 농사꾼의 집안에 시집을 가게 된다. 이런 시간적인 타이밍이 그냥 우연히 이루어 진 것은 아닌 것 같다. 인위적인 냄새가 다분히 배여 있다. 하지만 그것이 우연인지 인위적인지 인위적이라면 누구의 처사에서 계획된 것이라는 것도 정확히 알 수는없다. 다만 그것이 할아버지 안토니오의 생각이었는지 아버지 세르 피에로의 계획인가에 따라 세르 피에로와 카테리나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자식을 낳지 못하던 의붓 어머니와 어린 레오나르도의 관계는 제법 원할 했던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이 어린 의붓 어머니는 스물 여덟의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첫째부인에 이어 둘째부인에게도 자식이 없자 아버지 세르 피에로는 어린 레오나르도에게 제법 관심을 보여 그에게 알맞은 직업을 찾아 견습생으로 넣음으로써 아버지의 최소한의 의무는 감당해낸 셈이다.

레오나르도는 할아버지,할머니 그리고 막내동생인 프란체스코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특히 프란체스코는 조카 레오나르도보다 고작 여섯살 위여서 가장 친하게 지내던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란체스코는 농토를 가꾸며 즐거워했다. 다빈치와 함께 올리브 수확을 지키고 포도밭을 감독하며 어린 레오나르도는 독립적이며 사색하는 성격의 이 조용한 남자의 본을 뜨게 된다.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이 프란체스코는 풀들의 이름과 효능,비를 몰고오는 구름이며, 동물의 습성,생활에 영향을 주는 미신이 섞인 전설등을 물론 알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프란체스코와 접촉하며 드넓은 벌판을 사랑하고 자연현상 에 대한 호기심을 같게 되었다.

1507년, 프란체스코가 자식도 없이 죽으며 당시 관습과는 달리 이 삼촌이 재산을 물려준 사람은 정식 조카가 아닌 레오나르도 였다. 레오나르도가 14살이 되던해에 아버지 세르 피에로는 열다섯살의 프란체스카와 결혼을 하게된다. 이 프란체스카는 레오나르도보다 겨우 한살 많았다. 레오나르도에게 있어서 그녀는 어머니이기 보다 같이 노는 친구 또래 였다. 그리고 이 둘째 부인은 레오나르도가 스물한살 이 되던해에 스물 두살의 나이로 인생을 접게 된다.

그후로 새로운 두 의붓어머니 마르게리타와 루크레치아를 맞이하게 되는데 의붓어머니가 그 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편지에서 "사랑하는 어머니 귀하"라고 쓰고있다. 그러면 그의 생모에게는 어떻했을까? "거기서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말해다오. 그리고 그 카테리나라는 여자가 무얼 하기를 원하는지 내게 말해다오…"라는 구절이 그의 수첩에 적혀있다. 특히 '그 카테리나란 여자가'라는 경멸조의 문구가 눈에 띈다. 카테리나를 '나의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 고통 스러워서 일까? 이 호칭은 의붓 어머니를 위해 남겨두어서 일까? 아니면 카테리나가 어머니라는 호칭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해서일까? 가끔씩 마을에서 카테리나를 마주칠때면 레오나르도는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밭일을 하는 카테리나 부부와 마을에서 성공한 세르 피에로 부부를 어찌 비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세르피에로와 어떻게든 결혼을 할것이지 왜 농부 아카타브리가를 따라갔느냐고 마음속으로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레오나르도의 유년기는 사생아라는 굴레속에서 지나가게 된다.

프로이트는 레오나르 도의 이런 암울한 어린시절과 그의 천재적인 재능과의 관계를 1910년에 간행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어린 시절의 한 추억]에서 재구성 하려 하였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이러한 가 설이 반드시 정답일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한 위대한 천재의 어린 시절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아야 할것이다.
1469년 피렌체는 이탈리아 상업의 중심지로 되면서 여러가지 상업활동이 왕성하게 번창하는 도시가 된다. 그리고 이 활기찬 도시 피렌체에서 세르 피에로는 시골출신이라도 이제 피렌체의 의젓한 대표자가 된다. 그리고 이듬해에 레오나르도 가족은 희망의 도시 피렌체로 이사를 하게 된다. - 1470년 세르피에로가 작성한 세금신고서 에서 레오나르도 이름 발견됨. 이때 레오나르도 나이 열 일곱 살이다.- 그리고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의 도제로 입문하게 된다.

아버지,의붓아버지 아카타브리가.프란체스코 삼촌,조부 이들 네남자는 제각기 소년 레오나르도에게 만은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이다. 그리고 여기 청년기의 레오나르도에게 중대 한 영향력을 미치게될 한 사람이 추가된다. 이 사람이 바로 아드레아 디 미켈레 디 프란체스코 테 치오니인데,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라고 불리거나 아주 짧게 베로키로 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 보다 겨우 열일곱살 더 많은 나이인데 레오나르도의 스승이 되어 청년기의 레오나르도에게 정신적인 아버지가 된다.

공방에 도제로 입문하게 되면 여러 제자들은 스승의 지휘아래 실제 업무를 통하여 교육을 받게 된다. 그래서 마을에 어떤 공사가 있으면 어느 공방에서 그 작업을 수주하게 되어 도제들은 스승의 지도아래 여러 작업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공방에서 하는 작업들이 어떤 분야가 없어 보인다. 다시말해 건축,회화,조각,연금술,도색,토목,세공,조소.. 등 공방에서 하지 않는 작업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여러 기술들이 청년 레오나르도에게 다재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이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레오나르도는 건축학,물리학,역학,야금학등 여러분야에 대한 개념을 터득하게 된다. 특히 베로키오의 여러제자중 레오나르도만이 스승의 다양한 재질을 물려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 무렵 피렌체에는 여러가지 각종 행사들이 연일 펼쳐지면서 베로키오 공방은 이 작업들을 도맡아 하게 되어 연일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한창 활발한 시절의 레오나르도는 엄격한 분위기의 시골에서 올라와 이런 화려하고 기쁨에 넘치는 분위기에 황홀해 하며 이제 어엿한 일꾼이 되어 간다. 그렇게 두해가 쏜살처럼 지나가고 레오나르도는 견습을 다 마친후 1972년 그의 나이 스무살에 장인이 된다. 그의 이름은 동창생인 일 페루지노와 보티첼리와 함께 이 시기의 '성 누가 상사의 채무자,채권자의 붉은색 장부' 다시 말해 화가조합 장부에 오른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당장 공방을 열지 않았다. 아직 개인적인 명예를 좇고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베로키오 옆에서 일을 거드는 것으로 만족해 했다. 그리고 그는 계속 실력을 더 연마해 나갔다.

그 시절 레오나르도의 회화작품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소작인 한 명이 시골에 와 있는 레오나르도의 아버지를 찾아와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무화과 나무로 방패를 하나 만들었는데 레오나르도를 시켜 여기에 장식을 해달라고 한 것이다. 세르 피에로에게 그가 잡은 짐승이며 물고기를 주겠노라고 약속을 하여 그 소작인은 혼쾌히 승락을 얻어 내었다. 세르 피에로는 이 방패를 아들에게 맡겼다. 레오나르도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이 작업에 대단한 심열을 기울였던 것 같다. 아마 아버지의 부탁이라 더더욱 그러 했으리라. 방패는 잘못 잘려졌고 뒤틀려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불을 쬐서 이것을 바로잡고 선반공에게 주어 윤을 내고 자기가 조제한 도료로 겉칠을 다시 했다. 그는 여기에 무엇을 그리게 될까? 방패에 그련진 형상은 예날 메두사의 머리처럼 적을 무섭게 해야 한다. 이 원칙에 따라 레오나르도는 그만이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는 방(창고를 개조한 공방)에 "크고작은 도마뱀,귀뚜라미,뱀, 메뚜기,박쥐와 그외 괴상하게 생긴 동물"을 모았다. 그는 무서워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완벽한 괴물을 만들기 위해 이것들을 약간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하던 방식으로 사지를 잘라서 이리저리 꿰어맞췄다. "아가리를 벌려 독을 뱉으며 눈에서는 불길이 솟구치고 콧구멍으로 독김을 뿜으며 컴컴한 바위 틈에서 나오는" 악몽 같은 동물의 모습을 묘사했다. 그가 모아놓은 시체에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악취가 풍겼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그는 참을성 있게 작업을 계속했다. 작업을 마치자 아버지에게 이것을 가지러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세르 피에로가 방문을 두드리자 그는 겉창을 닫아 극적으로 한 줄기 빛이 받침대 위에 잘 보이게 전시해 놓은 방패 위를 비치게 했다. 방으로 들어오던 세르 페에로는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어둠속에 방패가 있는지도 몰랐으며 그림이 그려진 것도 보지 못했다. 자기 눈앞의 것들이 정말 악마의 화신이라고 믿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을질을 쳤다. 레오나르도가 그를 붙잡았다. "바로 이 물건이 이렇게 쓰일 겁니다. 가져가세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한 미술 작품에서 기대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지요" 라고…

1478년 화가로서의 레오나르도에게 정식 주문이 정부로부터 들어온다. 시뇨리아 궁의 성 베르나르도 예배당 제단화 제작의 의뢰가 서면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선금 25피오리노라는 상당한 선금도 받게된다. 하지만 이유는 알수없지만 레오나르도는 이 작업을 마무리 하 지 못하게 된다. 그 이듬해에 레오나르도는 또 하나의 공식적인 작업의뢰를 받게 된다. 그것은 포르투갈 국왕을 위한 장식융단의 밑그림인 [원제를 짓고 낙원에 있는 아담과 이브]이다. 이 작업을 계기로 레오나르도는 아버지 세르 피에르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이제 화가로서의 직업을 인정 받게 된것이다. 그리고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도 이 시기의 작품이다. - 이 작품은 1967년 워싱턴 내셔날 갤러리로 넘겨진 100만 달러를 호가하는 작품이며 미국이 소장하고있는 유일한 레오나르도 밑그림 작품이다. -

1481년3월 레오나르도는 아주 커다란 작업을 착수하게 된다. 피렌체 부근의 스코페토에 있는 산 도나토 수도원의 주제단을 위한 [동방박사의 경배]를 묘사한 큰 제단화였다. 이 그림은 폭이 거의 2.5미터에 달하는 작품이었다. 이 작업을 계기로 레오나르도는 마침내 '대 장르'의 작업에 도전할 기회를 갖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완성에는 이르지 못하게 된다. 후세에 미술사가들은 [성 히에로니무스]의 중단 이상으로 이 작품에 대한 중단을 어리둥절해 한다. 그리고 이 [동방박사의 경배]는 미완인 상태로도 그 세기의 최대의 걸작으로 손꼽는 작품이다.

1482년 초엽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 밀라노에서 이제 삼십대를 맞이한 레오나르도는 다양한 재기를 펼치게 된다. 각종 무기를 고안, 비행기구의 고안, 장수정 고안, 건축구조물을 설계, 인체의 각종기관 연구, 토목 설계, 여러가지 악기 고안 및 제작 그리고 여러가지 잡다한 장치를 고안하고 제작하게 된다. 또한 회화작업도 계속 그의 여러 재기중의 한 분야였다. 이 무렵 레오나르도는 수많은 공상과 구상과 연구로 그의 머리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리라. 진리와 공상은 서로 연계성이 있어 마치 톱니 바퀴처럼 하나의 생각은 또다른 생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자연에 대한 끈임없는 통찰력과 분석력은 그의 머리속에 차곡 차곡 쌓여 가면서 주체할 수 없는 공상들이 그의 머리속을 어지럽게 했으리라. 발 밑을 기어가는 풍뎅이를 보고 장갑차를 구상했을 것이며 눈앞을 아른거리며 떨어지는 민들레 홀씨를 보고 낙하산을 구상했을 것이며 머리위에서 선바람을 일으키며 선회하는 제비를 보고 비행물체를 구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밤이되면 잠들기 전에 낮에 본 사물들을 더 잘 기억하기 위해 이것들을 머리속으로 그려보려고 노력했으리라. 그리고 잠 꼬대처럼 중얼거린다. "새벽부터 공기는 셀 수 없이 많은 이미지로 가득 차 있고 눈은 이것을 끌어들이는 자석으로 쓰인다." 그의 이러한 여러가지 구상들은 오늘날 거의 실용화가 되었다. 어떤 것들은 그의 구상과 똑같이 또 어떤 것들은 그의 구상을 능가하는 것들이다.

1490년대 초 어느덧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레오나르도는 하늘의 비행하는 새에 관하여 자세히 연구하게 된다. 먼저 새의 해부를 통하여 이것들의 뼈와 근육 및 깃털의 구조를 연구한다. 또한 공기의 움직임과 상태를 분석한다. 하늘을 나는 것에 대해서는 레오나르도가 청소년기때부터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던 구상이었다. 그리하여 1498년 첫번째 실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오늘날 낙하산에 해당하는 비행기구였다. 그리고 1505년 초로에 접어든 레오나르도는 비행기구에관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오늘날의 낙하산, 헬리콥터,행글라이더에 해당하는 비행기구 들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레오나르도가 15세기 말에 쓴 인간의 잔인함에 대한 긴 '예언' 중간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면 "오만함 때문에 어떤 이들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기를 바랐으나, 그들의 신체가 너무 무거워서 아래로 끌어내려졌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오만함과 헛된 자부심을 고백한다. 그가 걸었던 희망과 노고를 생각할 때, 실망과 모욕감에 빠져 의기소침해진 그를 상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몇 년 뒤에 피렌체로 돌아와서 그는 다시 비행기구에 더욱 더 열심히 골몰하기 시작했다.

이제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와 피렌체에서 그의 재능을 인정받아 어느정도 명예를 가진 인물이 되어 왕실 작품과 제작하거나 여러 작품의 감수를 맡을 정도의 덕망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이무렵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와 밀라노를 오가며 두 도시의 미술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505년경 레오나르도는 후세 미술평론가에게 수많은 극찬을 받게될 불후의 명작 [모나리자]를 그리게 되는데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는 것은 이 모나리자의 모델에 관한 것들이다. 16세기중반의 건축가이자 작가인 조르즈 바사리의 인용에 의하면 "레오나르도는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를 위해 그의 부인 모나 리자의 초상화를 맡아 4년 동안 노력을 바쳤으나 완성하지 못한 채 내버려 두었다. 그는 당시에 프랑스 왕의 화가였다."고 한다. 이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 부부는 그무렵 비단 무역으로 부유해진 재력가로 알려져있다. 그는 몇몇 공직도 맡게 되었는데 이미 두번이나 홀아비가 되었던 그는 1495년에 리자 디 게라르디나라는 비천한 출신의 아가씨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 조콘도의 부인이 모나리자의 모델이라는 해석이 가장 설들력있게 받아 들여지고 있다. - 이 작품은 이탈리아에서는 [라 조콘다](La Gioconda), 프랑스에서는 [라 조콩드](La Joconde), 영어권 나라에서는 [모나 리자](Mona Lisa)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 하지만 또 어떤이는 이 추측을 반박하고 나선다. 그것은 바사리가 지적한 "완성하지 못한 채 내버려 두었다."라는 부분이다. 루브루 미술관에 소장된 그림은 완전히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초상화를 그렸지만 그것을 레오나르도가 계속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땅히 보수를 받기 위해서 그렸을 터인데 말이다.

현세까지도 모나리자에 관한 의견은 분분하다. 그녀가 "얇은 베일을 쓴 고급 매춘부" 라는 의견도 있으며 또 어떤이들은 모델이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며, 그녀가 레오나르도와 상당한 부분 닮은점에 기인하여 레오나르도 다빈치 자신이라는 의견도 있으며, 레오나르도의 어머니 카테리나를 상상하여 그렸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수많은 추측들은 비밀스레 살포시 머금은 그녀의 미소처럼 앞으로도 여전히 베일에 쌓여 있을 것이다.

 

 

3. 작품세계

 

   제 1장 메디치가가 주름잡던 피렌체에서

<동방박사들의 경배>는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 처음 머물 동안 그가 추구한 것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돌고래를 안은 소동상>은 멋진 미소와 나선형이 주는 역동성을 지녀 베로키오의 걸작중 하나로 간주된다. 수력에 의해 움직이던 이 작품도 한때 레오나르도의 것으로 추정됐었다. 레오나르도의 신화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 제시된 부정확하고 사소한 사례들에도 불구하고, 조르조 바사리가 그의 명저<탁월한 화가와 조각가, 건축가들의 삶>(1550년과 1568년)에서 인용한 증거들은 신뢰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세르 피에로가 젊은 레오나르도를 도와 주었다면 '지식과 문화에 대한 심오한 연구 성과를 거둘 수도 있었을 텐데', '정서가 불안하고 변덕스러운' 그는 이런 공부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산술공부도 별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음악을 더 좋아했다. 특히 베로키오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림고 조각에 손도 대지 않았다.' 이 모든 사실은 레오나르도가 그때 이미 어느 정도 '소묘술'이 있었다는 가설을 입증한다.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1436~1488년으로 추정)는 완벽한 예술가, '금은 세공사', '원근법의 대가, 조각가, 판각사, 화가, 음악가, 이기도 했짐나, 또한 직공장이자 사업주이기도 했다. 그는 큰 건의 계약서에 서명한 뒤, 그것을 여러 협조자들과 함께 제작하거나 그의 제자들을 시켜 완성하게 했다. 전설적이라 할 정도로 명성을 날리던 그의 작업장에서는 1460년대 말과 1470년대에 보티첼리, 페루지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로렌초 디 크레디, 그리고 질적인 면에서 소위 '덜 중요하다'고 일컬어지는 미술가들이 일했다(그중에는 코시모 로셀리와 프란체스코 보티치니가 속해 있었다). 작업장의 미술가들은 한데 힘을 모아 작품을 제작했는데, 그 작품들에 레오나르도가 부분적으로 또는 전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보수는 항상 베로키오의 이름으로 공동 출자자들에게 청구됐다. 이 거장이 1475년~1485년 사이에 로렌초 디크레디와 함께 그린 피스토이아 대성당의 <마돈나 디 피아차>도 그 경우에 해당된다 이 작품은 구성면에서 레오나르도가 여러가지 제의를 한 듯하고 아마 몇 군데는 직접 그렸을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수태고지>의 아랫부분도 마찬가지다. 채 20살이 안된 레오나르도는 한 특별한 이의 감탄을 샀다(전에 페루지노가 그랬던 만큼). 그가 바로 라파엘의 아버지 조반니 산티다. 산티는 그의 저서 <크로나카 리마타>에서 베로키오가 우수한 제자를 양성한 점을 찬양하고 있다.


오른쪽에 그린<수태고지>는 오랫동안 레오나르도의 작품으로 추정되어 왔으나 오늘날에는 오히려 로렌초 디 크레디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왼쪽의 두 성모상에 레오나르도의 개입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제작 기법이 일정하지 않으며 그림 속 풍경과 성모의 얼굴에 시선이 끌리는 <마돈나 드레퓌스>가 레오나르도의 작품일까? 드레스덴에는 로렌초 디 크레디가 그린것으로 간주되는 주름 소묘가 있는데, 그것이 예비 습작인지 이 그림을 답습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카네이션을 든 성모>는 베로키오(꽃병과 머리모양), 로렌초 디 크레디의 작품과 비슷하지만, 작품의 정교함, 주름, 풍경 빛깔의 변화가 레오나르도의 작품이라는 설을 뒷받침한다.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는 세련된 인본주의, 그리고 북부와 동방의 문화가 융합되어 형성된 새로운 관계속에 토스카나의 전통이 점점 풍부해지는 특별한 문화의 용광로 한가운데에 서있게 된다. 거기서 그는 조토와 마사치오처럼 혁명적인 개념, 강렬한 표현을 한 그림들 가운데에서 이상적인 기준을 찾아냈다.

반면 그의 친구 보티첼리에게는, 특히 벽에 해면 자국을 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의 피상성으로 인해 '짧고 간단한 탐구'라는 말로 표현되는 풍경화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정말로 한심한 풍경화를 그린다!" 하지만 레오나르도가 그이 <회화론>에서 벽위의 얼룩들에 대한 관찰 결과를 열정적으로 평가한 구절은 기억할 만하다. 그것들은 레오나르도의 상상력을 자극했는데, "무한한 것들 속에서 의식이 새로운 창작에 눈을 뜨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당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의 모든 부분을 표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는 필경 대단히 근대적이고 호방한 선언이지만, 한편으로는 솜씨의 탁월함과 기술적인 훈련에 대한 강조이기도 했다.


1473년에 제작된 <풍경(좌측)>에서 입체감과 공간감, 안개와 그늘은 강한 활력에 의해 고무되고 있다. 그림의 필치는 현상세계 속으로 침투하려고 애쓰는 예술적, '과학적', 시적, 우주적 탐구의 정신 과정을 표현하고 옮겨 쓴다.


[1473년: 최초의 풍경화]

레오나르도가 청년기에 제작한 것들 가운데 확실한 지표가 되는 첫번째 작품은 <산타 마리아 델라 네베의 풍경>이다. 이 소묘 작품에는 그가 작품을 완성한 1473년 8월 5일이라는 날짜가 자필로 씌여 있다. 이 그림은 '미술사에서 최초로 진정한 풍경화'로 일컬어진다. 실제로 시에나 사람인 암브로조 로렌체티는 그보다 150년 전에 목판에 두 점의 풍경화를 그렸으며, 더구나 풍경화는 극동미술에서 흔히 다루어지던 주제였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풍경화는 그의 고향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이다.

레오나르도는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본능적인 원형으로서 그의 고향을 참조했다. 그리고 그 안에 어떤 성- 아마도 라르치아노 성일 것이다-의 전망, 푸체키오 늪의 시각적인 효과, 몬숨마노의 원추형 '화산'이 빚어내는 지평선상의 실루엣 등을 포함시켰다. 작은 배들에 대한 기억은 그의 붓에서 도망친 듯하다. 그는 나무의 형태와 특징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각적, 개념적 현상들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빛의 가치에 관해 새로운 감수성을 표현했다.

선영의 작용에 의해 빛을 떨게 만듦으로써 풍경화에 밀도와 투명성을 부여한 것이다. 유명한 사건과 정확한 날짜를 기록하면서 레오나르도는 8월의 강설이라는 개념을 암시하고 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예외적인 현상이며, 두 개의 극단적인 대기순환 현상의 통합이다

[ 잃어버린 습작들을 찾아서]

레오나르도는 비록 젊지만 단순히 직업화가는 아니었다. 이 풍경화는 그가 소묘의 기술과 의미에 위대한 독창성을 도입함으로써 스승을, 그리고 같은 작업장에서 그림을 연마하던 대단히 재능 있는 동료들을 능가했고, 피렌체미술의 여러 우수함을 뛰어넘었다.

얼마나 맣은 소묘를 그렸길래 그와 같은 통합능력과 대가의 솜씨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잃어버린 레오나르도' 다시 찾은 레오나르도'라는 주제로 수많은 전시회가 열렸다. 그의 그림 중 상당수는 원본을 찾을 수 없고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문서의 한 부분, 습작, 복제화, 그가 영감을 불어넣은 작품들 뿐이다. 규칙적으로 흥미로운 발견 소식이 발표되고는 있다. 하지만 그가 포르투갈 왕에게 줄 태피스트리를 위해 그린 <아담과 이브>밑 그림의 종적은 언제나 찾을 수 있을지?


조각 쪽에서는 아직도 크게 놀랄 일이 남아 있다. 확실한 출전이 있는 작품이 없고, 양식의 비교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청년 조각가 레오나르도에 관한 자료는 여러가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용병대의 대장부터 성모상까지(때때로 여기에 <꽃다발을 든 부인>같은 베로키오의 걸작들이 첨가된 적도 있다)많은 조각들을 그의 것으로 인정하여 그의 작품목록에 기입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소년예수(좌측)> 베로케오의 작업장에서 만든 작품일까?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만들어진 레오나르도의 작품일까? 수많은 가설이 대립하고 있다.

[상상의 동물]

유실된 레오나르도의 젊은 시절의 작품들 가운데에는 무하과나무 방패 위해 그린 작품<용>이 있다. 독이 든 입김으로 주변의 대기에 불을 붙이는 '소름끼치고 무시무시한 이 작은 괴물'그림은 빈치의 한 농부가 레오나르도의 아버지에게 부탁한 그림으로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을 완성한 것을 계기로 레오나르도는 불가사의한 상상의 예술세계를 경험한다. '괴물'을 창조해 내기 위해 그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기준에 따라 동물의 요소를 다양하게 결함시켜 나간다. 그러면서 극적이 분위기 속에서 어떤 심리적인 조작을 통해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초현실적인 기법에 의지하는 방법을 이론화한다.

[아래]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를 표현한 부조 작품은 갑주의 세부묘사에서 레오나르도가 그린 전사의 소묘와 많은 공통점을 보여준다. 관례적으로 베로키오, 델라 로비아, 또는 프란체스코 디 시모네의 것으로 간주되는 이 부조 작품은 간혹 레오나르도의 작품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살아있는 옷 주름]

모델, 특히 그가 입은 옷의 주름에 대한 연구는 르네상스 시대에 피렌체 작업장들에서 널리 실행됐고, 기교주의자들과 함께 놀라운 발전을 거두게 된다. 레오나르도는 대단한 결의를 갖고 이 일에 몰두, 아카데미풍의 훈련에서 탈피해 회색 캔버스 위에 붓으로 그린 일련의 단색 소묘 시리즈에서 추상의 힘과 '진실'의 능력을 드높였다. 이 뛰어난 솜씨는 바사리의 탄복을 샀다.

<회화론>4부의 제목은 '인물을 감싸는 직물과 그 주름'이다. 그는 거기에 '직물은 반드시 사람의 형상이 드러나도록 배치되어야 한다'고 적어 두었다. 이 연구에 대한 반향은 그의 장년기의 작품들에도 일맥상통하게 흐르지만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그린 청년기의 회화와 소묘에도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는 해부모형도 만들었다.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는 회화와 다른 미술 작업뿐 아니라 기술적 체험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화가와 기술자]

레오나르도가 로마에서 포물선 면경을 가지고 용접하는 방법을 연구하던 시기에 기록한 메모에서, 그는 그로부터 45년 전에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둥근 천장의 채광광위에 거대한 구리 구를 접합한 방법을 상기하고 있다. 이 구는 1468년 베로키오가 주문을 받아 1472년 5월 27~28일에 설치한 것이다. 이때 그는 대성당 공사를 위해 브루넬레스키가 구상한 장치들에 관한 소묘를 수 없이 그렸다. 이 기록은 레오나르도가 브루넬레스키가 작동시킨 다양한 장치들을 이때 이미 알고 있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극장의 무대장치를 위한 기계, 또는 그가 발명 특허를 얻은 '물 위를 나는 수레'가 그것이다. 이 수레는 수로를 통해 피렌체까지 대리석을 수송할 계획이었지만, 엠폴리 근처 아르노강에서 그만 모래톱에 주저앉아 버렸다.



[피렌체의 세례당을 증축하기 위해]

돔은 피렌체라는 도시 공간의 새로운 기하학적, 사회정치적 수렴점이며, 돔의 맞은편에 있는 세례당은 완벽함의 표본으로 간주된다.


레오나르도는 브루넬레스키의 둥근 천장공사의 마지막 작업을 지켜보았다. 그는 브루넬레스키의 작품을 알고 있었고, 그의 다른 대규모 계획, 특히 1428년 피렌체인들이 일으킨 전쟁동안 루카를 침수시키기 위해 강줄기를 우회시킨일에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두개의 그림은 각기 다른 두 시기의 성당 채광창발판의 모습을 보여준다. 세례당을 위한 투시도를 작성한 적이 있는 브루넬레스키는 르네상스에도 동일한 것을 구상했다.원형으로 된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이 그것인데, 미완성인 이 성당은 레오나르도에게 영향을 끼친다. 바사리는 지금은 모두 유실된 레오나르도의 청년기의 건축 모형과 소묘 가운데 전망을 탁 트이게 하기 위해 다각형 주춧돌위에 세례당을 증축하는 내용의 설계도가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빈틈없음을 무기로 피렌체를 다스리던 사람들을 굴복시킨 설계도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설득력이 있었다. 비록 집에 가서 생각해 보면 모두들 그 계획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레오나르도의 카리스마적인 설득력은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의 '정당함'은 특히 시각에 호소하는 소묘의 힘에 의해 잘 표현되었다. 이미 1455년 볼로냐에서 아리스토텔레 피오라반티는 산타마리아 델 템피오 종탑을 13m이동시키면서 그러한 계획이 실현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레오나르도의 작업방식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두 걸작]

베로키오가 그의 작업장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완성한 <수태고지>와 <그리스도의 세례>는 레오나르도의 작품세계형성기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콰트로첸토, 즉 15세기 풍 회화의 걸작들이며, 작업장에서 이루어진 예술적 작업방식, 다시 말해 아이코노그래피(성상학)계획, 예비 소묘부터 최초의 터치와 수많은 화가들의 '전문적'인 개입까지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견본들이다.

레오나르도는 최초로 템페라 물감(물에 녹인 안료를 수액, 아교, 계란 흰자에 이긴 물감)대신 유화 물감을 사용한 사람의 하나였다. 그래서 그가 다른 사람이 그리기 시작한 그림에 개입했을 때에는 불연속성이 눈에 띈다.<수태고지>와 같은 작품은 청년 레오나르도의 한계와 야심을 그대로 드러내며, 가장 다양하고 회화적인 동시에 조형적이고 음악적인 체험을 혁신적인 방법으로 결합시켰다. 통일된 전체를 형성하는 것도 아니고 '그림 장치'라는 독특한 조직안에 통합되지도 않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힘을 모아 그린 이 예외적인 작품에서 레오나르도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67년 <수태고지>가 우피치 미술관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이것이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작품인 줄 알았다. 예비 소묘와 최초의 판본은 레오나르도 혼자 그린 것이 아니고, 베로키오의 다른 제자들의 손도 갔다. 열성적인 협조자의 작품인 오른쪽 우시부분의 건축물을 보면, 천사의 머리와 성모의 머리, 옷과 풍경에 레오나르도가 개입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471년 부터 1476년 사이에 제작되어 1515년 피렌체의 산살비 성당에서 베로키오의 작품으로 기록된<그리스도의 세례>는 작업장 제작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1510년부터 왼쪽의 천사는 레오나르도가 그린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대해 바사리는 이렇게 얘기한다. "뛰어난 제자의 실력을 보고 일개 어린아이가 그림에 대해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는 데 모욕감을 느낀 베로키오는붓에 손도 대려 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의 손이 간 츤적은 풍경(1473년 8월 5일자 친필 소묘와 안토니오 폴라이올로의 작품들과 비슷해 보인다)과 몇몇 부분에서도 인정되고 있다.

게다가 최소한 한 명의 숙달된 협력자가 얼굴을 그렸고 그보다는 조금 떨어지는 도 다른 협력자가 배경을 그린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두 천사의 얼굴, 오른쪽 천사의 양손처리의 엄청난 차이를 그리고 울퉁불퉁한 바위의 엄격함과 물고 땅의 유동성 사이의 놀라운 대조를 식별할 수 있다 이것은 세례의 요소로서 물이 주는 상징성과 함께 이 그림이 우주의 집대성이기를 바란 지질학적 몽상을 드러낸다.

[상징적인 초상화]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 체류하던 초기에 그린 유일한 초상화는 지네브라 벤치의 것이다. 주인공의 신원은 역사 자료에 따라, 그리고 그림뒤에 그려진, 부인할 수 없는 상징적인 존재인 조간주나무 덕에 확인할 수 있었다. 메디치가 은행의 운영을 맡아 유명해진 벤치 가문과 레오나르도는 긴밀한 우정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이 작은 그림안에는 다양한 기법, 양식 그리고 구상이 조화를 이루며 융합하고 있다. 템페라 물감은 유화 물감과 섞이고, 초상화의 사실성을 추구하기 위한 간결함은 부동성과 결합하고, 금속성 광택을 내는 추상적인 머리 형태의 활력은 어둡거나 점차로 소멸하는 실루엣들을 담은 풍경의 활려과 함께 작용하고 있다. 독특한 특성 때문에 이 작품은 만장일치로 레오나르도의 것으로 추정됐다.

베로키오와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레오나르도는 등을 보이고 있지만 몸통을 틀어 화면을 화면의 중심을 향한 천사의 자세철멈 훌륭한 회화적 해결책을 제안햇다. 울퉁불퉁하게 드러나는 세례자 요한의 골격 구조는 섬세하게 다듬어진 그리스도의 골격 구조와 대조된다. 조각처럼 힘차게 표현된 주름, 비록 불완전하게 화면에 끼여들고 있지만 '어지러운'효과를 내는 풍경도 주목할 만하다.




<지네브라 벤치>는 그녀의 '보기 드문 미소 때문에 시에서 찬양의 대상이 되었다. 이상화하지 않고 실물 그대로 포착한 이 정적인 얼굴에서는 그 미소를 찾아볼 수 없다. 투명한 광택과 손가락을 사용한 터치에서 그림의 결이 느껴진다. 이것은 어깨에 두른 단추 달린 베일에서도 느껴지는데, 이런 베일은 베로키오의 조각<꽃다발을 든 여인>에서도 나온다. 이면의 카르투슈에는 '덕성의 장식품으로서의 미'를 찬양한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여기서 노간주나무 가지는 월계수와 종려나무 가지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들은 문장의 상징으로서 박물학자다운 관찰인 동시에 화가가 공동 출자자에 대한 존경심도 표현하고, 그의 미학적인 강령도 표현하고자 하는 우의 에서 나온것이다.


[ 남색혐의 소송]

1472년부터 레오나르도는 독립적인 직업 화가 자격으로 콤파냐 디 산 루카에 가입한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해서 베로키오의 작업장에서 하는 일에 동참했다. 1476년의 것으로 기록된 두 개의 문서는 '레오나르도 드 세르 피에르 다 빈치는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와 함께 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17살 청년에 대한 남색혐의에 관한 소송장인데, 여기에는 레오나르도와 어떤 금은세공사, 남자의 윗저고리를 만드는 재단사, 그리고 베로키오의 공동출자자인 유명한 토르나부오니 가문 출신인 '리오나르도'라고 하는 사람이 연루돼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결국 석방됐다. 이 기록은 많은 의문을 제기한다.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와 작업만 했을까? 아니면 함께 살기도 했을까? 상세하지만 익명으로 쓰여진 이 기소장을 그의 동성연애에 대한 증거라 할 수 있을까?

레오나르도가 태어난 해에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는 피렌체에서 돌을 던져 한 양모 직공을 죽인 혐으로 기소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피렌체의 가장 유력한 가문들이 총애하는 화가의 하나가 되는 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화가 중에 그만 이런 나쁜 평판을 들었던 것은 아니다.'나이와 애정행각 면에서' 레오나르도와 비슷한 페루지노는 '돈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나쁜 계약이라도 체결했을 것'이라고 바사리는 말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1470년 '파울로 레오나르도 데 빈치 다 피오렌체'라는 사람이 ' 불량한 생활'로 추방됐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볼로냐의 영주 조반니 벤티볼리오가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 청년이 감옥에서 6개월을 보낸 후에 상감 미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런 일치들과 레오나르도에 관한 수많은 주석들-해부학적 관찰부터 익살스러운 구절에 이르는 -때문에 가장 모순되는 가설들이 동시에 판치고 있다. 수천 편의 원고에서 발췌한 몇몇 부분 원고들처럼, 잡다한 요소들에서 출발하여 사적인 성격의 메모들까지 속속들이 뒤지는 것만으로 진지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이것들은 레오나르도가 다양한 원전에서 본 간단한 인용문들을 베껴 쓴 것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제 2 장 1478년:설계도와 우연의 일치

1478년은 레오나르도의 삶과 작품에서 중요한 해이다. 그는 처음으로 공적인 주문을 받았다. 이어 로렌초 일 마그니피코의 형인 율리아노 데 메디치가 죽는 파치가의 주술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레오나르도는 로렌초를 위해 산 마르코 정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가 장차 밀라노에서 그의 메세나(문화예술 옹호자)가 될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만난 것도 그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스포르차는 로렌초에게 예를 표하기 위해 그의 유배지피사에서 피렌체 까지 왔다.

같은 해에 레오나르도는 '두명의 성모 마리아'를 구상한다. 그것은 종이 한 장의 양면에 두 명의 성모 마리아의 부분들이 무기, 공사장의 도구, 다른 기계장치들과 뒤섞여 있는 구상이었다. 물론 두 개의 옆얼굴도 빠지지 않았다. 하나는 고전주의적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방박사들의 경배>의 습작들과 관계 있는 것이었다. 역시 같은 해 피스토이아에서 대벽화 <마돈나 디 피아차>를 위한 작업이 재개됐고, 베로키오는 포르테게리 주교의 묘비설계도 공모에서 피에로 델 폴라이올로를 누르고 당선됐다. 1월 10일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시의회의 궁 안에 있는 산 베르나르도 소 성당의 벽화를 맡아 달라는 주문을 따냈다. 이때도 역시 폴라이올로에게 피해를 입혔다. 그 일은 1477년 12월 24일 그가 이미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른 주문과 마찬가지로 이 주문도 레오나르도가 시의회의 공증인이었던 아버지 세르 피에로의 후원으로 따낸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자신이 피렌체의 중요한 가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는 이 작품을 시작했지만 곧 포기하고 말았다. 그가 밀라노로 떠난 뒤 이 일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가 맡았다. 그러나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1485년 필리피노 리피에 의해 레오나르도의 '소묘대로' 완성됐다.

사실 우리는 그가 산 베르나르도의 장식벽을 위해 구상한 그림에 관해서는 확실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동안 그가 <예수의 탄생>과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위해 엄청난 습작과, <아기 예수와 함께 있는 성모>라는 주제를 다양하게 변화시킨 연작들을 구상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그는 작업장의 그림에서 '진실'추구에 기초한 근본적으로 새롭고 개인적인 탐구로 나아갔다.

[영화적 소묘]

360도 방위의 '영화적'소묘에 대한 구상은 3차원적 재현과 표현의 다양성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지속적인 탐구 주제 중 하나였다. 시선은 사물주위에서 돌면서 사물위로 올라가거나 그에 가까워지며, 사물의 뒷면도 알고 있고, 극히 짧은 노출의 뒤풀이를 통해 이동한다. 기쁨과 열정이 가득한 청년기의 소묘들을 보면, 다양한 각도와 자세에서 파악한 손, 여자의 상반신, 아이의 팔다리를 습작한것이 분명한 이 소묘들은 여러 성모화와 <동방박사들의 경배>에 의거한 것들이다. 그 다음에는 말, 해부학, 건축, 기계에 관한 습작들이 이어진다. 그는 <최후의 만찬>과 <레다>의 여러가지 몸짓에서 그것들을 발전시켰다. 레다는 처음에는 무릎을 꿇은 자세였다가 차츰 백조 옆에 서 있는 자세로 변한다.

레오나르도의 몇몇 소묘들은 다양한 자세를 취한 한 인물, 특히 정면과 측면을 보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조각과 소묘의 이런 관점들은 그의 <회화론>에 드러나 있는데, 여기서 그는 '녹로에서 단지를 만드는 방식을 가지고 회전의 '무한한 면'을 보여주면서 도자기 제조법과의 유사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면서 소묘하기' 레오나르도의 첫번째 피렌체 체류는 하나의 특별한 발생론에 의해 끝난다. 그것은 그의 인문주의가 표현된 진정한 '회화에 대한 선언'이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는 복잡한 아이코노그래피라는 하나의 장치를 사용한 것으로 철저히 자율적이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구상한 최초의 그림이다. 배경들은 멀리 지평선상으로 드넓은 전망, 그리고 심리적인 태도와 상징을 제시하며 열린다. 그 속에서 애수 섞인 명상은 이성과 비이성을 뒤섰고, 역사의 연속성에 대한 자각은 재생에 대한 자각과 결합한다.

 

이 '장치 그림'의 요소들은 톱니바퀴, 나사못, 용수철이 아니라 얼굴, 몸짓, 기하학, 기분, 생명 에너지, '육체와 정신의 움직임', 태도, 감정이다. 아기 예수의 생명력이 이 우주발생론의 한가운데에서 작용하여 성모와 3명의 동방박사가 형성하는 피라미드형 회전에 이른다. 주위에서는 왕, 목동, 천사, 기사들이 주의 공현을 감싸는 넉넉한 동작으로 움직인다. 공현, 다시 말해 계시, 나타남은 경배이상으로 그림의 진정한 동력이 된다. 유려한 소묘기법과 명암법은 전체를 대단한 강도로 부각시키고 그림에 '완전한 역학'을 부여하고 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는 1481년 3월 스코페토의 산 도나토 수도원이 레오나르도에게 주문한 것이다. 이 수도원 역시 그의 아버지가 공증인으로 있었다. 화가는 석 달 안으로 그림을 완성시키기로 계약을 맺어놓고도 또 다른 작품<성 제롬>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끝내지 않고 밀라노로 떠나버렸다. 이것이 1482년에 그가 그의 그림에 쏟을 수 있었던 최대한의 성의였을까?

 

  제 3장 스포르차 가문의 시대에 밀라노에서

1482년 레오나르도는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로 갔다. 로렌초 데 메디치의 부탁으로 루도비코 일 모로에게 말의 두개골 형상을 한 귀한 악기인 은제 칠현금을 선사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나이 서른에 위대한 로렌초의 의중을 따르는 예술 대사 역할을 맡은 것이다. 로렌초는 그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이롭게 만들기 위해 메디치가가 피렌체에서 누리던 문화적 영향력에 의지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으 이번 출발은 그 이유가 한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밀라노로 향했다.

[밀라노, 이탈리아의 아테네]

1481년 보티첼리, 페루지노, 피에로 데 코지모, 기를란다요 등 피렌체 회화의 거장들은 교황 식스투스4세로 부터 바티칸에 와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그 명단에 레오나르도는 없었다. 당시 그가 남긴 메모는 일말의 비관주의가 엿보인다. 신 플라톤 학파가 주름잡던 피렌체 인본주의의 학문적 풍토는 화가의 야심에 제동을 걸었다. 레오나르도는 아리스토텔레스학파와 실용주의가 득세하던 롬바르디아에서 실험에 더 유리한 곳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밀라노 공국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시샘을 유발하던 분열된 이탈리아 내에서도 특히 부유하고 근대적이며 산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문화적으로는 국제적인 고딕양식부터 새로운 르네상스에 이르는 유산을 혼합시켰다. 물론 이도시에는 구상미술 분야의 수준 높은 인물은 없었지만, 루도비코는 밀라노를 '이탈리아의 아테네'로 만들고 거기에 '파르나스산'(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로와 뮤즈가 살았다는 곳)을 만들어 피렌체, 만토바, 페라라, 우르비노와 경쟁하게 하고, 자신의 가문이 메디치, 곤차게, 에스테, 몬테펠트레 가문과 동등해지기를 원했다.


루도비코의 궁정에서 레오나르도는 대가들에게만 수여하는 '피렌체의 아펠레스'(그리스 태생의 고대 최고 화가)라는 신화적인 칭호를 받는다. 그는 작품을 끝낼 때마다 보수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정기적인 임금을 받기를 원했다. 그것은 그의 실험을 위해 이상적인 조건이었을 것이다. 비록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궁정의 화려한 '장식품'과 폭넓게 활기를 불어넣는 속박받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1482년 밀라노는 페라라 편에서 전쟁에 끼어든다. 이때 상업, 무기 제작과 함께 군사 기술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모든 것은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의 영주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보탬이 된다. 그는 한 박식한 친구를 시켜 자기 이름으로 이 편지를 쓰게 했는데, 이 편지의 요점은 10가지 였다. 먼저 9개의 요점에서 그는 군사 기술자로서의 자질을 강조하며 화평기에는 건축과 수력학에 힘쓰고, 그림과 조각 작품들을 제작하겠노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루도비코의 아버지인 프렌체스코 스포르차의 묘비 설계안을 찬양했다. 레오나르도가 제공하고자 한 것은, 공작도 알고 있었던 그의 미술을 뛰어넘는 또 다른 '직업 의식', 창의력, 실용적인 지식, 기술자로서의 실행, 꿈의 기계들이었다.

[수수께끼와 조화]

레오나르도가 이 편지를 루도비코에게 보냈는지 보내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음악가 아탈란테 미리오로티와 함께 밀라노로 간것은 확실하다. 일설에 의하면 그 자신이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칠현금 연주가, 능란한 해석가, 음악의 대가, 악기와 몽환적인 공연의 창안자로서 밀라노와 프랑스 조정의 감탄을 샀다고 한다. 우리는 그가 남긴 고문서에서 자동 북, 건반, 비올라, 파이프오르간, 플루트, 백파이프와 같은 바람을 이용한 악기, 심지어 극자의 음향효과를 위한 자동장치와 수력장치에 대한 연구도 발견했다. 그가 만든 곡은 알려진 것이 없으며, 메모들은 재치있는 수수께끼, 첫번째 밀라노 체류기에 대한 알 수 없는 그림인 경우가 많다.

변함없는 것 중 하나-이것은 레오나르도의 큰 주제 중 하나이다-는 조화였다. 이때 조화는 음악과 물의 음향효과를 만들어내는 조화이기도 하지만 미적 탐구, 요소들간의 균형, 시간의 측정, 우주론의 원칙 같은 조화이기도 했다. 만일 그에게 '회화학'이 신성한 학문이라면 음악은 그의 '누이'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비교론>에서 "그림은 음악을 이기고 음악을 지배한다. 그림은 불행한 음악이 그렇듯 만들자 마자 사라지는 법이 절대 없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는 눈에 '영혼의 창'이라는 특권을 주었다. 다른 감각보다 시각을 중시한 것이다. 그의 생각은 영원히 이어지는 씨실이고 유사한 것들의 대위법이다. 음악은 그에게 뇌의 학문이고 세련되고 인위적이지만 원시적이기도 한 예술이었다. 때로 그는 이상한 수수께끼를 가지고 음악을 기술할 때도 있었다. '바람은 동물의 가죽을 통과하면서 모든 인간을 소스라치게 만든다.'는 말은 '춤추게 만드는 백파이프', 시대를 뛰어넘은 원시세계의 음악이란 뜻이다. 하지만 특히 음악은 항상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한다.

[그림도 '보이지 않는 것의 표현'이 된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제작하여 세상에 알려진 첫 작품은<암굴의 성모>이다. 이것은 구성이 대단히 복잡하고 미학적 개념의 모범처럼 보이는 '형이상학적'그림이다. 그는 이에 대해 직감을 갖고 있었지만 피렌체 체류기 동안에는 충분히 표현하지 않았다. <동방박사들의 경배>가 미완성 상태였기 때문이다. <암굴의 성모>는 롬바르디아의 레오나르도파'기법'의 원형이 된다. 이 기법이란, 장면을 어둠 속에 잠기게 함으로써 빛 속에서 갑자기 드러나는 요소들에게 진정한 드러남의 힘을 부여하고, 인물, 후광, '부차적인 빛'의 반사광을 정신의 발산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이다.


<암굴의 성모>는 25년 동안 레오나르도와 그의 공동 출자자들, 즉 밀라노의 산 프란체스코 그란데의 '무염시태회' 구성원들간의 분쟁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새로운 고문서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부분적으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이 작품은 최초의 그림이 사라진 뒤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수많은 이권 다툼의 표적이 됐다. 그는 연기와 회의적인 이의 제기를 하고, 판결과 선고를 받고 나서, 그것을 나중에 모사할 수 있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그림을 끝내기로 합의했다.(두번째 판본은 지금 런던에 있다). 1483년 4월 25일 레오나르도는 7개월간 안에 작품을 끝내기로 계약했다. 그러나 그는 1508년 10월 23일에야 완료를 입증하는 증명서에 서명할 수 있었다.

그림은 레오나르도의 큰 주제들, 수많은 비밀과 암시로 가득한 신비한 기호들을 특별히 종합해 놓고 무한한 상징적, 신학적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대지의 몸 속에서 축축하고 꽃이 많이 피어있는 동굴은 모태인 동시에 지식의 동굴이기도 하다. 이것은 신비론적인 서정성과 불가사이의 어조를 띈 형이상학적이고 비교적인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다. 바위 동굴과 먼 곳으로 사라지는, 접근이 불가능한 산들은 끝나지 않는 시간과 공간안에서 지질학적인 우주를 표현한다.

그것들은 순전히 정신적이고 신성한 사건의 은밀한 무대를 형성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몸짓들은 마치 생성중인 인류의 역사 가운데 바로 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일순 멈춰 있다. 1483년 계약에서 예상한 것(성모가 아기 예수와 함께 두 천사와 두 예언자 사이에 있고 성 요한은 없는)과 일치하지 않는 아이코노그래피는 레오나르도의 이교적인 의도를 보여준다.


성모의 브로치는 그림의 형태 발생에 관해 특별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브로치는 일종의 소우주, 컴컴한 거울처럼 굴절된 빛과 깊은 어둠이 깃들인 눈을 구성하고 있다. 성모의 얼굴은 여러 개의 대각선이 수렴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지만, 모든 구성의 중심에 있는 것은 브로치와 거기 달린 20알의 진주이다.

[레오나르도가 소유한 최초의 밀라노 작업장]

레오나르도는 화가로서 두각을 나타냈고, 협력자, 제자들과 함께 작업장을 열었다. 그들 가운데 암브로조 데프레디스, 볼트라피오, 살라이, 마르코 도조노, 나폴레타노라고 불리는 프란체스코 갈리, '기계 기술자' 줄리오 테데스코가 있었다.


그들은 레오나르도의 작업장에서 <젖먹이는 성모>라고도 불리는 <리타의 마돈나>같은 작품을 제작했는데, 이 작품은 요약된 구성과 상징체계-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젖과 방울새-때문에 주목할 만한데도 거장의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레오나르도가 직접그린 원본이 있었을까? 작업장에서 제작한 이 그림은 1485년~1487년 사이, 또는 그보다 나중에 그려졌을 것이다. 몇 가지 세부적인 것들이 런던에 있는 <암굴의 성모>에서 다시 그대로 발견되지 않는가? 이 그림을 구상한 것은 레오나르도가 틀림없다. 통일된 개념과 세련된 기법으로 그린 이 그림은 그의 밀라노 작업장 제품의 대표작이다.


[초상화의 개혁]

1485년~1490년 사이에 제작된 작품 두 점, <악사>와 <흰 담비를 안은 여인>은 레오나르도가 초상화 부문에 도입한 근본적인 개혁을 증명하고 있다. <악사>는 <지네브라 벤치>의 '빛나는' 곱슬머리에서부터 <성 제롬>의 조각 같은 해부학 구조에 이르기 까지 참조사항들의 진정한 합주이다. 이 참조사항들은 새로운 심리적 강도에 의해 강화됐고, 그것은 <흰담비를 안은 여인>에서 극에 달했다. 이때 롬바르디아적인 특성, 북유럽의 영향, 막간의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가수가 '동작과 호흡'을 억제하는 순간을 암시한 초상화의 생명력에 주목하기 바란다. 이것은 레오나르도가 개입한 것이 확실하며 밑그림과 기법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데프레디스 같은 조수에게 부수적인 협조만 얻었을 뿐이다.


우리는 18세기말, 이탈리아에서 온 이 작품이 차르토리스키 컬렉션에 포함되어 폴란드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흰 담비를 안은 여인>에 관한 신빙성있는 정보라곤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복원한 흔적이 있는데도 이 초상화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모나리자>보다 훨씬 큰 매력을 발휘한다. 구성의 리듬, 흰담비와 반대 방향에서 나선을 그리며 공간을 회전하는 여인의 실루엣은 전적으로 새로운 초상화 기법이었다.

[ 교양없는 인간, 과학의 예술가]

밀라노에 도착한 지 5년 되던 해에 레오나르도는 이론적이고 실용적인 지식, 예술적이고 기술적인 지식을 정비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필요불가결하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기계의 예술가에서 과학의 예술가로의 변신이 시작됐다. 그는 다양한 크기의 수첩에 온갖 종류의 메모를 모으는 일을 시도했고, 체계적인 논설문을 작성하기로 했다.

그가 당면한 첫번째 문제는 '문학'과 고전 자료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경험과 예술의 실천에서 지식을 얻는 '교양 없는 인가'으로 칭하고 '어리석은 자들'인 박사들과 논쟁했다. 어리석지만 잘난체하고 오만한 그들은 그가 독학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그를 비난했다. 그가 사적인 메모에 남긴 이 격렬하고 집요한 분노의 발작들을 보면 두 가지 중요한 전기적 요소를 읽을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책에서 얻을 수 있는 명료하고 수사학적인 교양을 섭취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는 것이다. 그의 명석함은 예술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직접적이고 창조적인 지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는 것을 즐겨 주장했다. 그는 문화적 위계 질서, 자유로운 예술과 '기계 예술' 더 나쁘게는 '노예예술' 간의 구별, 경험의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아카데미적 박학함을 맹렬히 혐오했다. 하지만 그는 '학문은 지휘관이고 실천은 병졸'이라는 것, 즉 진정한 학문 없는 실천은 나침반없는 선원과 같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에게 그림은 하나의 학문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레오나르도는 '이론을 추구하는 현실적인 인간'이었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자신이 그 이상 나아가기를 갈망하고, 포착할 수 없는 것을 붙잡고 싶어하는 예술가라는 것을 보여줬다. 그는 예술에 대한 커다란 꿈을 키워ㅅ고 그것을 유토피아 안에 투사했다. 그는 이상국가의 비행기구들, 기술적이고 건축적인 상상의 세계의 모범을 미리 보여준 예술가였다.

[비행술과 잠수함에 대한 꿈]


이카루스의 꿈은 레오나르도를 매혹시켰다. 그는 비행방법과 기술을 연구하여 일생의 여러 시기에 그에 관한 사본을 적어도 9건은 남겼다. 젊은 시절, 즉 1487년~1490년 사이에 피렌체에서 처음 연구하기 시작한 이후 그는 운고 B에 전설적인 비행기구를 그리고, 그것가 새의 날갯짓의 유사관계를 정립했다. 그는 점차 비행술, 특히 연접장치 문제에 역학, 물리학, 해부학의 개념들을 적용했다. 그러면서 기류, 기하학적 동체. '수학 법칙에 의해 작용하는 기구'로 해부된 새의 중심, 저항, 변동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공기역학에 몰두했다. 솔개와 코르톤이라는 맹금류도 관찰했다. 하지만 이것은 '박쥐 외에 다른 모델은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비행은 그에게 기계적 유토피아의 절정, 신의 경지에 오른 기술자가 숭고하고 경이로운 것을 창조하는 꿈을 상징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형이상학적인 욕망이기도 했고, 무한한 공간에 대한 공상, '유한한 인간이 장엄한 지리'를 개척하는 데 따르는 꿈 같은 기쁨이기도 했다.

하늘을 정복하는 꿈은 깊은 물 속에서 마음대로 움직이거나 수면을 걷는 꿈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레오나르도는 공중을 날아다닐 수 있는 기계에 대한 욕망이 극단적인 자유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라면 해수면 아래에서 움직일 수 있는 기구를 소유하는 것은 특히 전쟁과 파괴라는 음흉한 구상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잠수함은 '당신이 아는 도구를 가지고 선박을 침몰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배'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비밀이 존재한다! 그 비밀은 종이에 그린 습작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 상당히 주목할 만하지만 별로 실용적이지 못한 소묘를 보면 잠수용 도구도 눈에 띄는데, 이것은 바닷속에서 상대방을 공격할 때 배의 밑바닥과 다른 장치들을 뚫기 위한 나사송곳들이다. 레오나르도는 공증인 앞에서 이 '기구에 대한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비밀을 발설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는 이 기구를 발견함으로써 자신이 큰 부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야만적인 광기' ]

레오나르도는 전쟁은 '야만적인 광기'이지만 어떤 '필요성'에 따라 응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살생 무기를 연구하고, 그가 발명한 것들을 전쟁 지도자에게 제공했다. 그러면서도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살상 무기, 바닷속 깊은 곳에서부터 음흉하게 공격을 가하는 무기, 독화살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드러냈다.

전투 장면은 그에게 감동과 시각 효과를 연출하는 이상적인 무대장치를 연상시켰다. 그의 소묘들은 대단히 선정적인 힘을 지닌 '미의 깃발들'이다. 역사상 이 작품 이전 또는 이후의 어떤 표현에서도 이에 견줄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커다란 박격포 폭탄들(그는 이것을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라고 정의했다)을 가지고 불꽃들이 별처럼 빛나는 하늘을 그렸다.

연극의 한 장면에 쓰려고 만든 것처럼 보이는, 전쟁을 소재로 한 그의 습작들은 점점 더 큰 미적 정확성을 획득해 갔다.

['건축과 의사' ]

건축학과 도시계획 분야에서 레오나르도는 '전위적'예술가이기도 했지만, 정치체제나 공동 출자자들에게는 맞서지 않았다. 또한 그는 항상 현실과 맞서 싸우면서 좋은 기회를 포착하려고 노력했지만, 좋은 기회는 제한된 것일때가 많았다. 마구간에서부터 신전에 이르기까지, 난공불락의 요새에서부터 설교를 하기 위해 마련된 무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소묘들은 광대한 계획중에서 합리적인 부분들이었다.


1487년, 밀라노 대성당 채광탑의 목재 모형이 레오나르도의 설계에 따라 만들어졌다. 이에 대해 그는 건축은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다고 썼다. 그래서 만일 어떤 건물에 이상이 생기면'건축의 의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러한 구상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레오나르도의 계획은 독창적이었다. 실제로 그는 너무나 전통적인 구상과 혼란스러운 구상, 추상적인 기하학적 개념 사이의 상호작용, 구조적 요소, 나아가 '음악적 조화의 도표'와 인간 해부학(두개골의 둥근 지붕 등) 사이의 유사함을 결합했다.


인체와 소우주, 대우주의 형태와 관계에 관한 아이디어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형상지>에서 영감을 얻었다. 1490년 레오나르도와 함께 파비아에 있었던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는 건물 소묘들과 건축 요소들은 인체의 비례를 기초로 삼는다는 건축론을 폈다. 원주 하나의 해부적 구조에서 부터 신전의 단면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개념은 레오나르도의 건축 크로키에서 발견된다. 그는 비크루비우스의 견해를 따랐는데, 특히 1490년도 작품으로 추정되는 유명한 베네치아 소묘가 그 예이다. 원-원은 기하학적으로 완전한 것이다-안에 들어간 인체의 중심은 당연히 배꼽, 그리스어로 '옴팔로스'이다.

[도시가 미가 되다]


'새로운 도시'라는 주제는 특히 1484년 부터 1485년 까지 밀라노에 흑사병이 돈 뒤로 사람들의 관심사로 부각된다. 레오나르도가 생각한 이상적인 도시는 왕궁의 고상한 계단에서부터 하수도망까지, 모든 수준에서 합리적인 조직, 자연스러운 활력, 상징적인 의미, 기능적인 요구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추상적인 형태를 연구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안했다. 도로, 하천은 순환을 보장하고 그것은 효율성, 만족, 위생적인 면에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는 체제의 기반을 사회 계급간의 차별이 아니라 각자의 기능에 두었으며, 해부학에서 그런 것처럼 분리된 시각을 갖고 일을 처리했다. 그는 하부구조부터 시작했다.

이런 도시계획 분야의 구상들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는 르네상스기 유토피아적도시들의 전통보다는 미래지향적인 시각들에 더 가까운 단편들을 통해서만 그것들을 알 뿐이다.


하지만 1493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의 복원과 확장을 위한 시안을 구상한다. 밀라노 도시계획 설계도에 매달려 일할 때, 그는 시골에서 왔고 비위생적인 도시에 있으면 불편함을 느끼는 돌의 우화 같은 생태학적인 은유들을 생각해 냈다. "그리하여 고독하고 관조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도시에서, 끝없이 간교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기를 원하게 된다." 1490년대에 레오나르도는 공식적으로 브라만테, 돌체부오노와 함께 있었다. 돌체부오노는 스포르차의 궁정안에서 가장 이름 높은 기술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비제바노에서 피아차 두칼레와 그 주변 건물의 개축에 관심을 갖고 방앗간들과 스포르쳇카의 수력 관련 건조물, 그리고 공장의 농장에 매달렸다. 오랜 전통의 산물이며 롬바르디아에서 현저히 진척된 수력학적 지식은 나빌리나 모렐라처럼 루도비코 일 모로 시대에 실현된 수문체계, 운하와 함께 이미 관개와 토질 개선, 에너지 사용, 하천의 조절 분야에 큰 결실을 안겨준 바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그의 연구를 피에몬트의 이브레아까지 확장했다.

[1489년 4월 2일, <인간의 형상에 관하여>라는 책" ]

이 시기에 레오나르도는 해부학적 지식을 심화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인체의 기능은 물론이거니와 인체 내부의 본질도 이해하고 싶어했다. '영혼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그가 5가지 범주라고 부른 것에 관해서도 의문을 품었다. 여기서 5가지 범주란 정신적 범주, 일시적 범주, 생명의 범주, 감각적 범주, 그리고 '사물의 종류'의 범주를 일컫는 것이었다. 그는 '깊은 원인'을 파고들고 싶었고, 인체의 비밀을 속속들이 파헤치고 싶었다. 그래서 새로운 '발명품'의 토대, 예술로서의 해부학, 그림뿐 아니라 과학적 관찰과도 관련된 해부도를 팽개쳐버렸다. 그는 첫번째 도판들에서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편견들에 밀접하게 의존했고, 동물을 해부한 것을 가지고 인체를 상상해야 할 때도 많았다. 그는 본 것만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발견하리라 예상한 것들도 그렸다.

이렇게 하여 그는 영혼이 '맣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온몸을 통해 전체로 퍼져 있지 않고' 뇌의 한가운데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할 생각이었다. 판단력은 '모든 감각이 향하는 장소'에 있고, 상상력, 지성, '상식'이 있는 곳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는 계급적이고 군사적인 은유법을 통해, 그리고 감각을 지각하는 우두머리에 의해 영혼을 중앙의 뇌실안에서 섬김을 받는 군주로, '신경과 근육'은 대장을 섬기는 병졸들로 정의 했다. 척수에서 동물의 정신은 측면의 관을 통해 감각을 전달하고, 가운데 관을 통해 '생식능력'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미 비길데 없이 아름다웠던 레오나르도의 해부도는 이후 25년 동안 엄청나게 변화한다.

[ 경이로운 무대]

레오나르도는 연극과 축제를 사랑했다. 순간적인 것, 기분풀이, 꼭두각시, 경이로운 것들의 예술인 연극은 ㄱ에게 그의 직감과 그가 발명한 기계들을 확인하고, 문학, 심리학, 무의식적인 동작, 상징학에 대한 새로운 정렬을 표현할 수 있는 엄청난 실험의 장이었다. 1490년 1월 13일 스포르차 가문의 성에서 그는 이사벨레 다라곤과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천국의 축제'를 기계들을 가지고 연출했다.

벨린초니가 쓴 대본은 다소 미사여구가 많고 즉흥적인 작품처럼 보인 반면에, 무대를 위한 기계들의 작용, 천체의 활기, 빛의 효과, 운동, 소리, 노래-레오나르도가 발명한 것들의 결실-는 사람들의 상상력에 강한 인상을 남기며 청중을 사로잡았다.

[결정적인 사건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그는 나폴리 왕 알퐁소 다라곤(루도비코 일 모로의 불행한 형수인 이사벨레의 아버지)의 옥좌를 쟁취할 생각이었다. 메디치가는 피렌체에서 쫓겨났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루도비코의 질녀인 비안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했다. 그는 처음에 프랑스 왕의 원정에서 이득을 얻어낼 생각이었지만, 곧 이탈리아 동맹군의 편을 들어 1495년 포르노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494년 11월, 스포르차 기념물이 녹아 없어질 것을 예상한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노동이 무로 돌아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을 목적으로 준비한 청동(적어도 60톤은 되었다)페라라로 옮겨져 프랑스군과 싸우는 에르콜레데스테를 지원할 대포를 만드는 데 들어갔다.

화가 레오나르도는 수백장의 종이를 메모와 소묘로 채워 나갔다. 그것들은 그의 기술적인 개념들의 발전과정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또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아 수도원의 식당에 걸 프레스코화 <최후의 만찬>도 주문 받았다. 이때부터 레오나르도가 부자가 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바늘을 날카롭게 만드는 기계의 도면을 그리면서 1년에 금화 6만뒤카의 이익을 거둘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끈질기게 라틴어 공부를 계속했다. 라틴어는 언젠가 그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들의 세계에 접근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열쇠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 자신은 그들을 무시할 때도 많았지만.

[ 시간, 씨실, 메커니즘]


레오나르도의 작품과 연구들은 범학문적 교환, 방법론적 유사함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기계를 그리거나 회화의 구성을 스케치하는 것, 인체의 해부학(소우주)이나 지구의 '몸(대우주)'을 모사하는 것은 그에게는 모두 비슷한 과정들이었다. 그는 어떤 틀이나 괘종시계의 가장 복잡한 면을 그릴 때 마치 해부를 하듯이 그것들의 기계장치를 연구했다. 그는 모든 요소를 분해했고, 우주의 특수성을 연구했고, 구조의 정적 역학에서부터 기능의 동적 역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상과 움직임을 관찰했다. 레오나르도는 건축의 소재와 기술, 기본형태, 중요한 자료, 원칙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했고, 그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전통적인 과정을 알려고 했다. '화가' 레오나르도는 과학적 유토피아에 속하며 현실을 넘어선 하나의 신세계, 즉 기술적 상상력에 관한 '시'의 세계를 예고하는 통합 기술에 속하는 새로운 '기계들'을 그렸다.

그런점에서 레오나르도가 결의에 찬 태도로 괘종시계와 방적기 연구에 매달린 것은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다. 그는 이를 위해 수백편의 메모와 스케치를 남겼고, 그것을 근거로 끝없이 반복되는 나선 계단, 제동장치, 추진기, 심지어 추의 구조를 구상했다. 그는 괘종시계, 추와 유사한 장치를 제분기, '바람을 만드는 기계', 릴 장치에 적용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는 뛰어난 그림들을 가지고 항구적인 움직임을 불합리한 것으로 설명했다. "오! 별의 항구적인 움직임을 관찰하는사람아, 당신은 이 탐구에서 얼마나 많은 헛된 공상을 만들어냈는가? 가서 금으로 변한 돌을 찾는 이들 옆에서 당신의 자리를 찾아보시구려'"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가 기술적, 과학적인 견해들을 추구하는 동안 밀라노의 공작으로 공표된 루도비코 일 모로는 산타 마리아델레 그라치아 수도원안에 스포르차 가문을 찬양하기 위한 영묘 설립안의 일환으로 그에게 <최후의 만찬>을 주문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화가에게 '정신적인 것'으로서의 회화에 관한 개념, 광학과 음향효과, 해부학과 역학분야에 관한 다양한 그의 경험들이 훌륭하게 종합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셈이었다. 이 작품은 관상학과 공간의 표현에 관한 예비 연구를 근거로 한 정밀한 계획의 결실이었다.
레오나르도의 작품 가운데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최후의 만찬>은 많은 왕과 황제들로부터 찬사를 듣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루이 12세와 프랑수아 1세부터 나폴레옹 1세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그림이 그려진 벽을 프랑스로 수송하려고 했다. 이 그림은 또한 루벤스와 렘브란트 같은 화가들의 감탄을 샀다.


[얽힘장식의 상징체계]

1498년 46살에 접어든 레오나르도는 스포르차의 성에서 카메리니, 살레타 네그라, 살라 델레 아세의 장식에 매달려 있었다(이것들은 1893년에 재발견되엇다). 그는 거기서 자연과 인위성이 섞인 식물의 얽힘장식이라는 복잡한 체계를재현했는데. 이것은 루도비코 일 모로의 문장이었고 영원한 회귀와 같은 원형들을 참고한 것이었다.

그의 작품 <아카데미아>가 새겨진 도판의 제작 시기는 이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된다.(프랑스에서 레오나르도는 '밀라노 공작에게 소속된 화가들의 우두머리'로 언급된다). 그는 이 도판에서 더욱 추상적인 세계 위에서 이 자연주의적인 기하학을 다시 취했고, 켈트족 미술이나 동양적인 모티프들을 차용함으로써 상징적인 측면들을 강화했다.


[완전무결한 비례]

음악처럼 '우주의 모든 것을 껴안는'수학과 기하학은 레오나르도의 젊은시절부터 그의 작품 속에 무의식적으로 존재해 왔다. 그리고 이것들은 점점 더 그의 사고를 지배하게 된다. 그는 1496년 토스카나사람 루카 파치올리가 밀라노에 왔을 때부터 이들 학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루카 파치올리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미간행 논문들을 표절한 혐으로 고소를 당한 사람이다. 절대적인 것고 보편적인 것에 대한 아이디어에 매료된 레오나르도는 이렇게 선언했다. "수학자가 아닌 자는 누구도 나의 원칙들을 읽을 수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루카어른으로부터 근의 곱셈을 배우노라'는 그의 말에서는 새로 어떤 종교를 믿기 시작한 사람의 열의마저 느껴질 정도다.

그는 부주의로 인해 가장 기초적인 셈을 자주 틀렸지만, 기하학 공부의 성과는 즉시 전격적으로 나타났다. 몇 개월 만에 그는 파치올리를 위해 '완전무결한 비례'를 이루는 다면체를 그렸다. 제네바와 밀라노에서 나온 스포르차 가문의 원고 표절물을 보면 이것은 소용돌이꽃 장식과 결부돼 있고, 레오나르도의 <아카데미아>에 나온 것들과 흡사하다. 이것들은 아마도 3차원적인 견본들을 다시 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 모델들을 위해 1504년 피렌체의 시의회는 그 견본들에 대한 대가를 파치올리에게 지불한다.

 

 

  제 4장 미술과 전쟁

[루도비코 일 모로의 몰락]

1499년 루카 파치올리와의 우정과 <최후의 만찬>이 가져다준 찬사로 힘을 얻은 레오나르도는 스포르차의 기념물을 녹이기를 원하고, 궁정에서 그의 입지를 강화하며, 미술적, 학문적 연구를 심화하려했다. 그보다 1년 전에 루도비코는 밀라노의 포르타베르첼리나 근처에 있는 포도밭을 그에게 주었다.



프랑스왕 루이 7세가 비스콘티 가문의 상속권을 요구하면서 스포르차 가문을 상대로 선전포고하자, 루도비코 일 모로는 독일로 달아나 그의 조카인 막시밀리안 황제에게 보호를 청했다. 당시 레오나르도는 ('움직임과 무게에 관한')역학과 수력학(이사벨라 공작부인의 '욕조를 위한 장치 따위)에 매달렸다.

하지만 그는 피렌체에 돈을 저금하기 위해 많은 신경을 썼다. 그가 파치올리와 함께 밀라노를 떠났을 때 그는 이렇게 기록했는데. 이 말은 겉보기엔 초연하지만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공작은 국가와 재산, 자유를 잃었다. 그리고 그가 계획한 것 중 성공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에는 놀라운 비망록이 들어 있다. 레오나르도가 프랑스 왕의 고문이자 룩셈부르크의 백작인 루이 드 리니와 함께 은밀히 이탈리아 내륙 여행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그와 함께 나폴리로 가기 위해 로마에서 그를 재회할 작정이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뒤집어쓴 이 메모에서도 실마리가 되는 4개의 단어만은 읽기 쉽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여졌다. 이것은 이들을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였을까? 단어는 이 여행의 주된 목적과 관계된 것이다. arroma(로마에),annapoli(나폴리에),ligni(리니), 그리고 ladonagione(기증). 그는 또한 그의 뒤집어 쓰기 방법에 따라 이번에는 이렇게 썼다. "네가 가져올 수 없는 것을 팔아라." 사실 여행의 첫번째 목적지는 이사벨라 데스테의 영토인 만토바였을것이다. 만토바는 그에게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 자진해서 하다]

1500년 초 레오나르도는 '해야 할 일을 자진해서'함으로써 세도가들과 관계를 맺으며 다양하고도 활발한 출세의 장을 열었다. 스포르차의 궁에서 17년을 보낸 뒤 그는 이제 그의 대후원자를 추방하고, 친구이자 비트루비우스의 저서 번역자인 자코포 안드레아 다 페라라를 죽인 프랑스인들에게서 보호자, 친구, 일거리를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위해 터키인의 침공에 대비한 방어체계를 연구했고, 같은 시기에 터키 황제를 위해 보스포루스 해협위에 유럽의 강과 아시아의 강을 잇는 교각 설계도를 그렸다. 베네치아, 그리고 1502 이몰라에서 그는 미래의 메세나, 즉 <모나리자>와 <레다>의 공동 출자자가 될 율리아노 데 메디치와 재회했다. 그는 무력으로 피렌체를 탈환하고자 했다.

레오나르도는 아레초가 피렌체에 대항해반란을 일으키고 있을 때 아마 그의 친구 비텔로초 비텔리(체사레 보르자에게 살해당한다)와 함께 발디키아나에 있었던 듯하다. 그는 처음에 체사레 보르자(아피아니의 자크 4세로부터 로마냐 공국을 빼앗았다)의 '허물없는친구'로서, 보르자가 몰락한 다음에는 같은 아피아니를 섬기는 피렌체의 사절로 피옴비노에 갔다.

[ 다시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가 다시 찾은 피렌체는 더이상 위대한 로렌초의 도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로렌초의 독재를 비난했지만 '황금기'였던 그 시절을 그리워했다. 사보나롤레의 도덕혁명은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격앙된 분위기가 약간은 가라앉은 도시의 화실들에서 그는 동료들과 재회했다. 기를란다요는 변함없이 존경받고 있었지만 보티첼리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20년 전, 레오나르도가 의로받았던 가장 큰 주문 두건(산 베르나르도 소성당의 벽화와 <동방박사들의 경배>)을 물려받은 적이 있는 필리피노 리피는 산티시마아눈치아타를 위한 주문을 그에게 양보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성녀 안나>를 위한 습작을 시작했다. 하지만 끝은 맺지 못한다.

1500년 4월 24일부터 1502년 5월 12일까지 레오나르도는 잠깐씩 로마여행을 할 때를 제외하곤 주로 피렌체에 머물렀다. 로마여행에 관한 것은 티베르 강가의 방앗간과 티볼리에 있는 하드리아누스의 저택에 관한 그으 메모에 언급돼 있다. 로마 여행 뒤, 그는 양식과 주제 면에서 새로운 기준들을 그의 작품에 도입했다. 밀라노 왕궁으 화려한 생활은 옛일이 됐지만, 레오나르도는 계속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에 있는 자신의 구좌에 피렌테 금화를 위탁했다. 이 시기에 그는 고문직 활동을 가장 좋아한 듯하다. 만토바 후자그이 요청으로 그는 빌라 코발리아의 설계도 요약본을 완성했고, 이것이 피렌체의 언덕 위에 위치해야 완벽하다는 것을 지적하기 우해 모형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사람들은 산 미니아토의 종탑 문제, 산 살바토레 아몬테의 안정성 문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의 장소 문제 등, 갖가지 문제에 관해 끊임없이 그의 의견을 청했다. 고문 활동중 가장 낯선 일은 1502년 5월 프란체스코 말라테스타가 로렌초 데 메디치가의 소장품이자 이사벨라 데스테에게 갈 예정이었던 4개의 오래된 꽃병을 입수했을 때 '골동품 전문가'로 활약한 것이었다.

[의미심장한 서신들]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에게 이사벨라 초상화의 두번째본을 부탁할 책임을 맡았던 그녀의 대리인들이 쓴 편지는 이 화가의 연구와 회화 작업장에 관해 매우 흥미로운 정보를 알려준다. 여기에는 상세한 내용과 함께 두 작품이 묘사돼 있다. 작은 <성모>와 <성모, 아기예수, 어린 양과 함께 있는 성녀 안나>를 위한 최초의 대형 밑그림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보관된 작품이나 바사리에 의해 묘사된 작품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대리인 중 한사람인 피에트로 다 노벨라라 수도사는 1501년 3월 27일자 이사벨라의 편지에 대한 4월 3일자 답장에서 '레오나르도의 생활은 너무 불안정하고 불확실해서 마치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하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쓰고, '그는 가끔 그의 두 제자가 그리는 초상화에 손을 댄다.'고 덧붙였다. 레오나르도는 '기하학에 매달려 일하느라 붓에 혹사'당했다. 4월 14일자 편지에서 이 수도사는 이사벨라 데스테에게 '그는 수학실험에 매달려 그림을 잊은 나머지 더 이상 붓을 들지 못하지만', 루이 12세의 비서인 플로리몬드 로베르테트를 위해 '작은 그림' <실타레를 든 성모>를 완성하는 대로 후작 부인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로 약속했다고 전하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프랑스 왕과 개인적으로 한 계약과 수학에 대한 열정을 핑계로 시간을 벌고자 했다.(그래봤자 기껏 한달이었다). 이 모든 것이 단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는 점에 주목하면 흥미롭다. 스포르차 기념물을 주조하기 위한 거푸집을 얻기 위해 페라라에서 밀라노의 프랑스 총독에게 보낸 9월 19일자 에르콜레 데스테의 요구서도 역시 신속하게 처리댔다. 9월24일 데스테의 대사는 루앙의 추기경으로부터 호의적인 답장을 받았다. 그런데 추기경은 그에게 루이 12세에게 직접 말해 보라고 충고했다. 파치올리와 함께 피렌체에 있던 레오나르도가 정수론과 기하학 연구에 계속 몰두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린 양과 노는 아기예수>(1501년 작품으로 추정)와 금과 납을 압축하는 압연기를 위한 습작을 그린 종이 위에 그는 사바소르다(파치올리를 잘알던 아랍 출신 에스파냐계 유대인)의 기하학 문서의 라틴어 판본 요약문을 세밀하게 베꼈다. 3년 뒤, 나폴리의 시인이자 고전 연구가인 폼페오 가우리코는 <조각론>에서 레오나르도가 '아르키메데스의 경쟁자 중 가장 유명하다'고 쓰고 있다.
[체사레 보르자를 위한 여행길]

1502년 봄,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에서 프랑스인들과 만토바의 영주들을 위해 일했다. 그해 나이 꼭 쉰이었다. 그는 이듬해 여름에 이도시를 떠났다. 미술과 군사학 분야의 필요성에 따라 체사레 보르자(교황 알렉산드르 6세의 아들)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체사레 보르자는 프랑스 왕이 그에게 허락한 발랑스 공이라는 작위 때문에 '발랑스 사람'으로 불렸다. 체사레는 프랑스인들의 후원 아래 이탈리아 중부에 강력한 국가를 세우는 중이었다. 승리한 루이 12세가 의기양양하게 밀라노에 입성했을 때 그는 그 곁에 있었다. 그때 레오나르도를 알게 된 것이 분명했다. 그는 프랑스 왕이 조정을 장악한 파비아에서 공인된 국왕의 공문서 형태의 명령을 통해 레오나르도를 '대단히 뛰어나고 대단히 귀중하고 친숙한 건축가이자 제분야의 기술자'라고 불렀다. 로마 생트 엘리제의 장관이자 로마냐 군주이며, 피옴비노 영주라 자칭한 발상스 사람 체사레는 레오나르도에게 자신의 영지의 요새도시 연구를 맡기고, 자신의 용병과 기술자들에게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의 새 직무는 프랑스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피렌체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레오나르도의 절친한 친구)와 함께 체사레 보르자의 정복욕을 억제하고 피렌테의 자유를 수호하려고 노력했다.

8월 18일 전까지, 그리고 그날 이후 몇 달 두 (1503년 2월 전)레오나르도는 에밀리아-로마냐, 마르케, 움브리아, 토스카나를 두루 돌아다녔다. 이 여행에 관한 메모들은 가로 7cm, 세로 11cm의 수첩에 기재돼 있다(원고 L). 7월 30일, 그는 우리비노에서 진수대의 굴림대를 그렸다. 그곳에서 그는 또 라우라난 계단, 페르도노 데 브라만테 소성당을 그리고 놀라운 솜씨로 4페이지에 이르는 보루 축조 기록을 남겼다. 이때 그는 나침반을 이용하여 기록에 정확성을 꾀했다. 그 다음에는 페사로의 도서관 문제를 건드리고, 8월 8일에는 리미니 분수에서 분출되는 물의 음악적 조화를 연구했다. 8월 10일과 15일, 체세나에서 그는 전시회를 알리고, 건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기록하면서 성벽에 대한 기록을 일련의 계산과 함께 급히 갈겨썼다. 9월 6일 오후 3시에 그는 체세나티코 교각 연구에 몰두해 있었다....

[예술로서의 지리학]


<이몰라 지도>와 <토스카나, 에밀리아, 로마냐의 물리학적 지도>는 레오나르도가 남긴 기록 중 가장 의미 있는 것이며 영토에 대한 '과학'과 예술간 상호교류의 가장 뛰어난 예이다. 이것들은 지형정찰, 지도 제작법에 대한 연구, 기하학, 우주론, 해부학, 미학적 지식들을 총집약해 놓은 논집이다. 후자는 만다라 같은 밀도를 갖고 있고 미생물처럼 들끓는 생명력에 의해 활기가 넘치는 것처럼보인다. 전자는 정맥, 동맥, 모세관 조직이 어떻게 나눠지고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물리학적 지도>에서 그는 시적 지형학에 무한의 상징학을 섞는 본원적이고 시간을 초월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조감도식 지도 제작법은 정신적, 상징적, 지적, 기능적, 전략적 전망과 지식의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 이 지도들을 보면 마키아벨리가 '백성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군주와 '국가를 구상하는 자들'을 비교한 일이 생각난다.

1503년 10월 24일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는 새 일을 시작했다. 그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에 있는 교황실의 열쇠를 받았다. 이 방을 작업장 삼아 그는 시의회 궁의 벽을 장식할 <앙기아리 전투>의 밑그림을 그린다. 새로 꾸민 대회의실 벽에 그린 이 작품은 사료관에 보관된 문서들과 레오나르도의 비망록, 사료편찬, 전기덕에 유명해졌지만 지금은 소실되고 말았다.



[세상의 학교]

1504년 8월 30일 레오나르도는 엄청난 양의 도구와 물감을 받았다. 이는 주문받은 작품의 웅대함을 말해 주는데, 그 크기가 7x17cm에 달했다. 그는 1440년 교황의 동맹군인 피렌체의 사람들이 니콜로 피치피노가 이끄는 밀라노 사람들과 싸워 승리를 거두는 그림을 그려야 했다. 이는 그가 그 자신, 피렌체, 그리고 그의 경쟁자들에게 던진 결투 신청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미켈란제로가 맞은편 벽에 그릴 <카스치나 전투>의 주문을 땄기 때문이다. 그들을 그림을 위해 미래의 화가들에게 모범이 될 '세상의 학교'를 창조했다.

폭력과 분노의 절정인 '말(馬)의 무리는 이렇게 탄생했다. 낭만적인 전설에 따르면 이미 벽에 그려져 있던 그림의 서두부분이 레오나르도의 실험 도중에 손상됐다고 한다. 그가 그림을 건조시키기 위해 옛 방식으로 불을 붙였는데 물감이 변하면서 방금 탄생한 걸작을 녹였다는 것이다. 또 사람들은 도구들의 형편없는 질을 하소연했다. 사정이 어찌됐던, 기록들을 보면 전투의 중앙부분(<군기를 위한 전투>)은 오랜 세월 동안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었다. 이 그림은 바사리의 프레스코화에 덮여 아직도 16세기의 방에 존재할 것이다.

[군대건축물]

레오나르는 종교 건축을 할 때는 흔쾌히 팔각형을 사용하고 도시계획을 할 때는 방추형 설계를 확장한 반면, 군대 건축을 할 때는 이상적이고 기능적인 형태인 원을 사용해 다른 분야와 구별했다.

하지만 1502년 ~ 1504년까지, 즉 그가 체사레 보르자 곁에 있을때부터 피옴비노로 돌아올 때까지의 기록을 보면, 기이한 피라미드형 건축과 방사형 건축목록도 나타난다. 이것들은 여러 각도로 표현되거나, 정사각형 면과 다각형 면을 가졌거나, 또는 동심원 구조, 절반은 나선형, 절반은 미로형 구조를 갖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침수되기 쉽거나 불이 나기 쉬운 통로, 모반이 일어났을때 대피할 수 있는 비밀계단을 비롯해 다양한 방위체계 설계도를 작성했다. 한 장의 종이 위에 그는 원형의 요새 설계도 외에 달과 광학에 관해서도 필기하고, 풍경화의 원근법에 관한 보티첼리의 생각을 비판하고, 제자살라이의 이름을 3번에 걸쳐 언급하고, 말, 소 같은 짐바리 짐승들이 싣는 짐의 양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1504년 가을, 그는 <앙기아리 전투>의 제작을 다시 중단하고 피옴비노에 갔다. 1504년 11월 20일에는 일을 했고, 오니산티의 날(만성절)에는 '영주에게 이것을 증명해 보였다'고 적고 있다. 그의 첫번째 '조직적'설계도는 기존의 성채와 그가 구상한 망루사이에 '뚜껑 덮인 길'을 뚫고, 새 망루와 그 도시의 '성문'사이에 '우측에 가장자리가 있는 해자'를 파, 성채와 로체타를 잇는 380m의 호를 파는 것이다. 그는 견적서를 작성했다. 망루(높이 20발, 지름 25발)에 585뒤카(옛날 유럽제국에서 사용한 금화), 총금액이 2099뒤카와 1/16이 들 것으로 예상했다. 이 종이엔 회화론과 관련된 메모들('어둠은 빛의 결핍이다.....')과 고양이의 청각, 후각, 시각, 이를테면 그들의 '시각적 능력'에 관한 놀라운 관찰도 함께 적혀 있다.

마드리드의 원고 II에 적힌 건축 관련 메모들은 시에나와 피렌체 기술자들과 그의 흥미로운 관계를 보여준다(안토니오 다 산갈로는 레오나르도와 함께 피옴비노에 있었고, 범선항해에 관한 그의 메모에 관여했다).레오나르도는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에 관한 논문을 연구하고, 여백에 자신의 견해를 기록하거나 그림으로 그리고, 구절들을 베끼고 거기에 주석을 붙이고 소묘한 것들을 그의 피옴비노 다리 설계도에 적용했다. 그런 예로는 정사각형의 망루, 입구를 '두꺼운 벽'으로 감싼 반원형 제방, 해상건축 체계 등이 있다.

[피렌체와 밀라노 사이에서]

1504년 초 몇달 동안 레오나르도는 <앙기아리 전투>에 매달려 일하며 그에 해당하는 보수를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메모를 하기 위해 18권의 '공책'을 샀고 이사벨라 데스테로부터 <아기예수>의 주문을 받았다. 그런데 공작부인을 위해 '뭔가 환심을 살 만한 일을 하겠다'고 나선 건 바로 살라이이다.

레오나르도는 보기보다 더 자주 빈치에 갔다. 그는 언덕들 한가운데 호수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도치아의 방앗간을 연구하고, 몬탈바노 언덕들의 선을 그리고, 피사까지의 거리를 계산했다. 같은 종이 위에 물감을 녹이는 방법을 적고,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기 위해 '돌 기름(석유)'을 조절할 수 있는 램프를 그렸다. 이보다 훨씬 전에는 이미 자연 조명을 조절하기 위해 칸막이를 옮길 수 있는 작업장, 그리고 일과 후 그림을 정리할 때 사용할 기중기를 구상한 바 있었다.

1506년 4월 27일 <암굴의 성모>(1483년에 주문 받았다) 문제의 중재 판결이 내려졌다. 레오나르도와 암브로조 데프레디스는 2년의 유예기간 안에 작품을 끝내야 했다. 당시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에서 <앙기아리 전투>에 완전히 매여 있었다. 그의 삼촌 아마도리(피아졸레의 참사원 알레산드로)는 이사벨라 데스테가 레오나르도에게 주문한 '이 얼굴들'에 관해 그녀와 우정어린 서신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나 1506년 5월 30일 프랑스 정부의 간곡한 요구로 레오나르도는 <앙기아리 전투의 제작을 중단하고 밀라노에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때 그는 계약서까지 써가며 석 달 내로 돌아오마고 약속했지만 약속을 어겼다. 8월 18일 밀라노의 총독이자 왕의 대리관이고 프랑스의 원수인 샤를 드 앙부아즈가 그의 체류를 연장할 것을 요구하는 첫번째 신청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피렌체인과 프랑스인들 간의 외교적인 왕래가 시작됐다. 1507년 1월 14일 블루아궁에 있던 루이 12세는 '그의 손으로 몇 점의 작품을 그리는 데 필요한 시간'을 주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전해 왔다. 그리하여 1월 22일 피렌체 시의회는 레오나르도에게 동의를 표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당신에게 할 말은 이것밖에 없소." 레오나르도는 국제 정치문제를 야기한 것처럼 보였다.

이때부터 그는 토스카나와 롬바르디아 사이를 왕래하게 된다. 3월에는 피렌체, 5월에는 밀라노에 가고, 또다시 피렌체와 빈치에 갔다. 레오나르도를 자신의 유일한 상속자로 세운 삼촌 프란체스코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의 형제들은 유산을 놓고 그와 싸웠다. 원한 섞인 분쟁이 오래도록 이어졌고, 레오나르도는 분쟁을 해결해 줄 강력한 후원자를 찾았다. 샤를 드 앙부아즈는 밀라노에서부터 그의 편에 가담했고, 플로리몬드 로베르테트가 피렌체 시의회에 되도록 빨리,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문제 때문에 그들은 '왕의 화가' 레오나르도가 '그(왕)에게 매우 소중한 그림'을 중단하는 것을 허락했다.

1508년 초 레오나르도는 살라이를 밀라노에 보냈다. "형제들과의 소송은 거의 끝나가고 있으며 내 생각에 부활절에는 여러분에게 크기가 다른 두 점의 성모화를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그림들은 신심 깊은 기독교 신자인 왕과 여러분이 원하는 사람을 위해 시작한 것입니다."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에 그는 그렇게 썼다. 피렌체 체류 기간 중의 두 개의 주제 '성녀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와 '노는 두 아이와 함께 있는 성모'는 이 그림들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있는 프랑스인들을 위해 그린 작품들은 어떤 것일까? 그가 피렌체의 시의회에 보낸 1506년 12월 16일자 편지에서 샤를 드 앙부아즈는 레오나르도를 채 알기도 전부터 그의 '뛰어난 작품들'때문에 그를 '사랑했고' 그가 '회화에서는 유명하지만' 그밖에 그가 가진 다른 재능, 특히 '소묘, 건축, 우리가 필요로 하는 다른 것들'에 대한 재능으로는 유명하지 않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의 습작들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왕에게 선사할 그림은 어떻게 됐을까? 밀라노에서 '중단'됐을까?

[ 레오나르도, 라파엘, 그리고 '근대적 방식']

피렌체 시절에 레오나르도는 '우와함', 그리고 공간과 빛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으로 프라바르톨로메오와 안드레아 델 사르토와 같은 토스카나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하다. 한편 몇몇레오나르도 주제의 해석은 바키아카, 프란치아비조, 부자르디니 등의 것으로 인정됐다. 바사리는 당시 12살밖에 안 된 폰토리모가 그의 제자가 되어 레오나르도에게서 매너리즘(기교주의)의 싹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시에나에서 에스파냐의 발렌시아에 이르기까지 레오나르도의 제자들은 그의 방식과 함께 <앙기아리 전투>에서부터 <노는 두 아이와 함께 있는 성모>와 <실타래를 든 성모>에 이르는 그의 성상화 목록을 전파시켰다. 라파엘은 이 그림들과 레오나르도의 작품들에 지대한 관심을 쏟는다. <레다>또는 <발코니의 여인>에 대한 언급은 없고, 다만 우르비노의 젊은 화가에게 강한 인상을 줄 정도로 전격적인 습작에 대한 언급만 하고 있다. 그는 <모나리자>와 <막달레나 도니>간의 명백한 유사함을 발견했다.

 

 

 

  제 5장 밀라노, 로마, 앙부아즈

1508년 3월 22일까지도 레오나르도 피렌체의 '피에로 디 브라치오 마르텔리의 집에서' 조각가 조반 프란체스코 루스티치와 함께 살았다. 그러면서 루스티치가 세례당에 기증할 세 점의 청동상(<성 세례자 요한의 선교>)을 제작할 때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그는 책을 만들기 위해 메모를 모으기 시작했고, 그것이 훗날 <코덱스 애런델>의 일부를 구성한다. "이것은 무질서한 모음, 수많은 종이의 집적물이 될 것이다. 물론 그것들을 베낄 때는 분류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하이퍼텍스트로서 구상된 원고]

이시기에 그는 한 메모에서 그의 방법, 나아가 두려움, 의심, 불안에 대해 진술했다. "내일은 이 모든 주제에 매달려라, 그것들을 베껴라, 그런 후 어떤 징후의 원형을 기록하고 그것을 피렌체에 남겨놓아라. 그렇게 함으로써 네가 가져가는 것을 잃어버리더라도 네가 발명한 것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9월 12일 밀라노에서 그는 천재학, 광학에 관한 메모, 그림자이론, 지리학, 수력학적 관측, 새의 비행에 관한 견해들을 가지고 원고 F를 시작한다. 그는 여기에 알베르티와 비트루비우스를 참조한 내용을 덧붙인다.


피렌체와 밀라노 간의 이동기에 쓰여진 원고 <코뎃스 레스터>는 레오나르도의 편집 방식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는 흩어져 있는 메모와 견해, 자서전적 추억, 고대와 근대의 원전 인용, 그의 다른 사본을 참조한 것들, 그의 다른 저서나 수첩에서 발췌한 것들을 모았다. 이때 그는 체계적이고 결정적인 새로운 자료집을 만들 작정으로 여러가지 의견들, 재검토, 판결, 토론보고, 새로운 실험들과 함께 이것들을 수집해 나갔다. 그는 가설과 의문 제기를 통해 일을 처리했다. 문장의 흐름을 끊는 회고들, 강조된 것들, 추가된 것들, 삭제된 것들을 보면 이 글과 소묘들이 예외적으로 짧은 순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화가와 광학: "확실성을 낳는 체험이 여기서 밝혀지다" ]

그림 이론과 실천에 관한 레오나르도의 의문제기의 중심에 광학이 있었다. 원고 C름 보면 <앙기아리 전투>를 그리던 시기, 특히 1508년~1509년 사이에 다시 거기에 몰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 '그림은 시각의 10가지 속성, 즉 어둠, 명확, 물체, 색, 형태, 위치, 멀리 떨어짐, 가까이 있음, 움직임, 정지와 밀접한 관계가 놓여 있다.'


눈도 '수학 법칙을 따르는' 기하학 도구로, 그는 직접적인 체험과 전통적인 원전인 갈리아노, 아비첸노, 알 하진, 베이컨, 페샴, 비텔로, 기베르티, 알베르티로부터 다시 연구를 시작함으로써 그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알베르티처럼, 심지어 유효성을 놓고 토론을 벌일 때도 레오나르도는 동공의 중심을 축으로 하는 중앙의 반지름에서부터 시작되는 시각적 피라미드이론을 가장 중시했다. 그는 이런 원근법적이고 피라미드형인 시각을 빛, 색, 소리, 중력 등에 관한 그의 견해들에 적용했다. 원근법의 소실점은 음향강도에서 침묵의 지점과 일치할까?

그의 초기의 연구들을 보면 눈은 물체가 있는 방향으로 '시각적 분출물'을 발사함으로써 볼 수 있다는 고대인들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했다. 그 결과 그는 눈이 광선을 물체에 의해 발사된 미립자로서 받아들인다는 중세의 이론에 찬성했다. 결국 그는 원고 D에서 '시각적 효능은 원근법 화가들의 말처럼 어떤 한 지점으로 귀착되지 않는다.'고, 그리고 원고 F에서 시각적 효능은 '눈의 동공 전체로 확산된다.'고 주장했다.

[ 우주의 역학]

힘, 무게, 움직임, 관성, 평형, 저울의 원리에 대한 분석은 레오나르도에게 우주 역학의 실례들과 비례의 조화를 제공했고, 그는 그것을 음악과 건축, 그리고 그의 관찰 훈련에 적용했다. 정력학과 동력학을 공부하면서 그는 고대 그리스와 중세의 이론들을 재검토했다. 원고 I에서는 '움직임의 원인은 무엇인가? 충격은 무엇이고 충돌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서 자신의 초기의 고전적 원전들을 밝힌다. '먼지 한 톨의 무게'를 예로 든 그는 '저자들을 믿지 말라'는 경고를 되풀이 하면서 '실험은 그들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들을 요구하는 자들을 속인다.'는 결론을 내린다.

1500년 전까지 레오나르도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논하고 알베르 드 작스를 비판하고 잠시 중세 말의 개념들, 이를테면 부리단과 오레슴의 개념들을 답습하고 마를리아니를 접하다가 결국 1508년경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의 사상가들에게 돌아온다. 그는 아마도 고대인들의 가치를 그들의 해설자들에 의해 확산된 모조품과 구분하려고 노력한 것 같다.

[ 지상낙원]

산 바빌라의 샤를 드 앙부아즈를 위한 별장 설계도는 레오나르도에게 '물의 유희'와 경이로운 정원'이라는 주제에 접근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의 분수 같은, 유명한 고대인들의 분수에서 영감을 얻고 시에나의 기술자 타콜라와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의 고문서를 인용했다. 그는 한 설계도에 갖가지 결과, 즉 포도주 냉각기부터 부인의 드레스밑에서 갑자기 솟구치는 작은 물줄기에 이르는 그리고 수력방아로 움직이는 악기부터 천연 향수의 어울림에 이르는 교묘한 발명품들을 묘사했다. 정원은 온갖 종류의 새를 집어넣고 극히 가는 구리철망으로 덮을 예정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프라톨리노에 있는 메디치가 정원의 발명품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레오나르도는 샤를 드 앙부아즈의 별장을 위해 시각을 알려주는 자동장치가 달린 거대한 수력시계도 구상했다.

그는 환상의 정원을 묘사했는데, 여러가지 발명품이 '비너스의 자리'를 위한 설계도 안에서 자연과 인공이 뒤섞여 있다. 비너스의 자리는 키프로스섬을 생각해 설계한 것이다. 그는 '바쿠스 신의 여제관 사티로스(반인반수의 숲의 신), 목신의 이야기, 그리고 야생의 것들'로 장식할 생각을 한 것일까? 1516년 알도브란디니라는 이름의 키프로스 대주교는 그의 로마의 정원을 위해 페린 델 바가에게 같은 것을 요구한다.

[트리불치오의 기념물]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에는 레오나르도가 작성한 '조반니 자코모 다 트레불초의 분묘'의 견적서가 등장한다. 견적서의 비용은 3046뒤카에 달한다. 이 기록 덕에 그보다 20년 앞서 그린 스포르차의 기념물 설계도 중 일련의 습작을 분리할 수 있었다. 이 습작들은 밀라노의 산 나자로에 그의 묘비 건축을 위해 4000뒤카를 할당하라는 크리불치오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1488년부터 루도비코 일 모로의 적수였고 그의 몰락을 조장한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는 프랑스의 원수, 비제바노의 후작, 밀라노의 영주란 작위를 수여받았다. 이 작위는 곧 샤를 드 앙부아즈에게 돌아갔다. (레오나르도는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1508년(또는 1511년)부터 그린 레오나르도의 소묘는 '사슬에 묶인 죄수들'(미켈란젤로가 율리우스 2세에게 바친 기념물과 마찬가지로)과 함께 기둥들을 포함한 설계도 전체를 보여준다. 이것은 비록 축소된 규모지만 스포르차 가문을 위해 구상했던 기마상 아이디어를 다시 다를 수 있는 기회였다.



[3차원의 해부학]


1510년 겨울이 끝나기 전에 레오나르도는 그이 새로운 해부학 연구 시리즈를 마칠 작정이었다. 그것은 1489년의 소묘들과 비교할 때 그의 경향의 전환과 명백한 진전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는 어떤 추론이나 선입관보다는 직접적인 관찰의 정확성을 앞세우면서 하나의 단순한 시각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3차원의 물체 주변을 빙 돌면서 영화를 찍는 것처럼, 인간의 몸을 전진적으로 분해하는 단계를 보여줬는데, 해골의 뼈대를 잘 보여주기 위해 몇몇 부분이나 신체 기관들을 제거하기도 했고, 반대로 인체의 구조와 성분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근육의 피막을 보존하기도 했다.

시각적으로 볼 때, 해부 과정에서 미적인 관심과 '과학'의 극치가 서로 충돌하게 만드는 이 도판들은 놀라우리만치 근대적인 느낌을 준다. 거꾸로 쓴 문자의 단편들은 예술적인 효과를 낳고 있으며, '기괴한 것들'조차 최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화가가 미리 설정한 세 개의 시각적 각도는 여덟 개의 시점이 되고, 논리적이고 연속적이고 율동적이고 거의 '사진역학적인'장치를 구성한다. 하지만 관객이 이 소묘를 볼때, 그의 눈은 '자연스럽게' 기하학의 법칙들을 어기고 가장 이로운 자리를 잡으면서 이상적인 시각을 다시 만든다. 레오나르도의 해부학 연구에 비길 데 없는 구상적인 특징은 그의 모든 이론보다 낫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너의 (구두)묘사가 상세하면 상세할수록 너는 독자의 영혼을 어지럽게 만들것이다."

[ 발텔리나에서 아다의 바프리오까지 ]

레오나르도는 롬바르디아의 영토, 특히 산 크리스토파노와 마르테사나 운하, 이세오 호수, 올리오강, 그리고 아다의 트레초, 트레코르니, 바프리오의 수리를 연구했다. 특히 그는 아다에 있는 멜치 별자의 손님이었는데, 멜치 별장은 그가 증축안을 구상한 곳이다. 그는 베르가모와 브레시아 연안, 다시 말해 발텔리나에서 '이탈리아 국경'까지의 지도를 제작했다. 그는 브리안차 호수의 고저차를 측정하고 밀라노와 프랑스를 연결하는 좀더 용이한 새로운 통신로를 모색했다.

이것은 일례로 람브로강과 코모 호수 덕에 가능했다. 레오나르도는 덮개가 있는 둑과 운하라는 대담한 계획을 구상하고 심지어 아르노강이 우회할 때 얻을 수 있는 이익도 미리 평가했다. 1516년 이후프랑수아 1세는 아다를 배가 다닐 수 있는 강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해 이 계획은 16세기 말에 완성된다. 따라서 이것은 미친짓이 아니었다!
[1513년: 바티칸의 망루에서]

1511년 레오나르도는 스위스 의용병에 의해 발생한 데시오의 화재를 목격한다. 스위스의 의용병들은 이듬해 루도비코 일 모로의 아들 막시밀리안 스포르차에게 밀라노의 정권을 넘겨준다. 프랑스는 1513년에 최종적으로 후퇴한다. 과거에 스포르차 가문과 맺었던 유대관계에도 불구하고 레오나르도는 프랑스 왕을 섬긴 타협자로 간주되었다. 피렌체에서 '카톨릭동맹'은 율리아노 데 메디치(그는 옛날에는 프랑스인들과 친했고 레오나르도의 친구였다)를 권좌에 앉혔다가 1513년 3월 이안 데 메디치 추기경을 레오 10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으로 선출한다. 레오나르도의 동생인 세르 줄리아노 다 빈치는 폰토르모, 안드레아 델 사르토와 같은 화가들과 함께 피렌체가 새 교황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성대한 축제를 연출한다. 1513년 9월 24일, 레오나르도는 프란체스코 멜치, 살라이, 로렌초, '일 판포이아'와 함께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 간다.

12월 부터 그의 새로운 후원자이자 예술고 학문의 전문가인 위대한 율리아노가 바티칸의 망루에 그의 작업장을 마련해 준다. 이로써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인 율리아노는 그의 아버지가 30년 전에 레오나르도에게 주지 못한 기회를 준 듯했다. 그는 그곳에서 성 베드로 성당의 공사장 감독관으로 일하던 음악가 이탈렌테 밀리오로티와 브라만테, 체사레 다 세스토와 같은 친구와 제자들, 그리고 라파엘을 재회한다. 그곳에는 경쟁자인 미켈란젤로도 있었는데, 당시 그는 식스틴성당의 궁륭천장에 <노아의 홍수>를 그리던 중이었다. 레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의 존재를 견디기 힘들어했음이 틀림없다. 그들은 자연현상(상징체계와 심리학이 뒤섞여 있는)을 그림으로 그리고 소묘하는 데 대한 견해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레오나르도는 '폭풍우를 묘사하는 방법' 또는 노아의 홍수를 표현하는 방법에 관한 그의 메모에서 이를 상세히 기술한 바 있다.

[ '고물'과 새것 ]


당시 레오나르도는 고대 문명과 신화에 빠져 들었다. 그는 망루의 <아리안>을 그리고, 춤추는 요정과 고대의 저부조들을 연구하고, 황실의 무너진 기념물을 묘사하고 유명한 보카 델라 베리타를 스케치한다. 이것은 카메오(돌을 새김한 옥석)형태로 '진리'의 태양이라는 가면을 쓴 '거짓말'의 알레고리를 표현한 것이다. 그는 심지어 나일강의 고대 조각을 복원하는 일도 맡았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푸토(큐피드를 나타내는 벌거벗은 소년)는 <레다와 백조>에 등장한 푸토들을 연상시킨다. 그는 또한 과학적, 미적, 기계적 탐구를 계속하며 화폐를 주조하는 기계에 대한 연구를 몰두하고, 나아가 컴퍼스, 몬테마리오에서 발견된 조개 화석에도 흥미를 가졌다. 이 시기는 기술 분야에서 그가 그린 3차원적 소묘들-왕관 형태의 바퀴나, 밧줄을 꼬거나 금속 가공기계 같은 것-이 표현 기법이나 세련도에서 다같이 발전했다. 소묘의 세련도는 그 입체감과 기하학적 형태가 추상에 이를 정도였다.

[기하학적 변형]

1514년 7월 7일 '23시' 레오나르도는 바티칸의 망루에 있던 작업장에서 기하학 유희의 하나를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당시 그는 반달 모양과 그것의 표면, 그리고 원의 구적법을 연구했다. 그러면서 이런 기하학적 문제들과 '금속의 변환'이나 형상을 만들 수 있는 하나의 덩어리(피라미드나 입방체, 또는 밀랍 원기둥)의 변형 개념은 줄곧 그를 열광 시켰다. 이를 테면 풀무의 작용에 의해 수력 에너지로 바뀐 풍력에너지나 연속운동으로 변형된 왕복운동이 그에 해당된다. 그런 원리는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기 위한 기계나 그와는 반대로 렌즈를 닦는 기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그의 기하학 연구 결과를 해부학, 심장판막(반달형태, 3개의 꼭지점)에 적용하고 기하학적변형과 기계적 법칙의 관계를 정립했다. 그는 늘 그의 수학적 '발명'에 열광했다. 반달 안에 그는 이렇게 썼다. "1504년 크리스마스 아침, 이 발명품이 내게 선물처럼 주어졌다." 대축제날 이사벨라 데스테가 자신을 위해 그려 달라고 그에게 간청했는데도 도리어 <앙기아리 전투>를 그리고 아르노강의 우회 도면을 그리면서 아치, 삼각형, 원의 구적법에 몰두해 있는 레오나르도의 모습이 상상이 간다. 그는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에 이렇게 적었다. "원을 정사각형으로 바꾸되, 이때 원의 용적과 같은 용적을 가진 정사각형을 만드는 방법을 다양하게 보여준 다음, 이것을 무한히 계속해 가기 위해 필요한 법칙을 정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데 루도 제오메트리코(기하학의 유희)'라는 제목의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예술-과학의 수학적 실험에 열중한 레오나르도는 환상에 속아넘어간것일까? 물론 그는 그것이 '지성이 상상할 수 있는'한도 내에서의 극소량의 근사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하학의 유희는 그에게는 단순히 심심풀이가 아니라 위대한 추상예술이었던 것이다.


[장난 같은 실험]

동물을 존중한 나머지 채식주의자가 된 레오나르도는 1515년 어느 피렌체인이 율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본보기로 인용된 바 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그의 '괴상한 익살극'에 전념하기 위해로마에 갔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수은을 이용해 살아 있는 도마뱀에게 다른 파충류에게서 떼어낸 비늘을 가지고 날개나 뿔을 만들어줌으로써 괴물로 변형시킨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는 또 한 방에 관객을 모아놓고 철물 제조인들이 쓰는 풀무로 투명하고 무서운 호스를 부풀려서 공간을 다 차지할 정도로 '바람을 잔뜩' 집어넣음으로써 관객들을 방의 네 구석에 모이게 만든 사실도 들려준다. 로마초와 바사리는 또 그가 밀랍으로 극히 정교하고 가벼운 동물 모형을 만들어 바람을 불어 공중으로 날아가게 만드는 멋진 장난도 즐겼다고 얘기하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놀랍고 괴이한 의상, 환상적인 장치, 마술 환등 등도 발명했다. 경이로움과 놀라움의 미학에는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조명과 본능이 어울린다. 단순한 아이들 놀이에서부터 우연한 장난까지, 화가는 가장 단순한 심심파적에서 실험의 토대를 끌어내고 그것을 건축과 과학의 원리로 해석했다. 이를 테면 밀짚을 가지고 비눗방울을 만드는 것, 돌멩이를 던지면 수면을 차고 날아가는 표면에 원을 만드는 것 등....

[그림과 건축, 포도주 양조학과 자동장치]

레오나르도는 자주 바티칸을 비웠다. 1514년 9월 25일 그는 파르마에 있었고, 27일에는 포강 연안에 있었다. 이때는 주교군대의 지휘관이었던 율리아노 데 메디치의 옆에서 공학자 노릇을 하느라 바티칸을 비운 듯하다. 그리고 10월 8일 로마로 돌아와 피렌체의 성 요한 신심회의 수도사로 뽑히나 곧 그만둔다. 루브르의 <성 세례자 요한>은 이 시기에 제작된 것 같다. 그는 또 코스카나 사람 발다사레 투리니 다 페샤를 위해 <아기 예수와 함께 있는 성모>와 <소년>의 초상화도 그렸다.(둘다 모델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는 치비타베키아 다리를 위한 설계도(이는 1515년 5월 19일 이후 조반니 스코티 다 코모 수도사에 의해 적용된다)를 구상했다.

피렌체에서 그는 율리아노의 마구간, 메디치가의 새 궁과 비아라르가와 산로렌초 사이의 지역을 복원하기 위한 설계도를 그린다. 그는 '기계사자'를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프랑수아 1세의 대관식을 위해 그것을 피렌체에서 리용으로 보낸다. 프랑수아 1세는 앞으로 그의 마지막 후원자가 될 사람으로 레오나르도는 그에게 <항해의 비유>를 바친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는 메모에서 어떤 결정적인 사건을 언급했다. "위대한 율리아노 데 메디치는 1515년 1월의 아홉쨌날 여명에 아내(필리베르트)를 맞기 위해 로마를 떠나 사부아로 향했다.

이날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1515년 12월에 그는 새 왕 프랑수아 1세를 알현하기 위해 율리아노와 함께 레오 10세를 모시고 볼로냐에 갔다. 새왕은 필리베르트 드 사부아의 조카였다. 오래 전부터 아팠던 율리아노는 그로부터 얼마 뒤인 1516년 3월 17일에 사망한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 가서 피에솔레에 있는 그의 땅의 소작인에게 최고급 포도주 생산에 필요한 비평과 조언을 청한다. 1516년 3월 13일 그는 다시 로마에 왔다. 이때 그의 신경은 온통 어떤 수학 문제를 푸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8월에는 온 관심이 '담장 밖의 성 바오로' 성당의 크기를 측정하는 데 쏠려 있었다.
['칼보다 입이 사람을 더 많이 죽인다']

1516년 이전에 율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보여주려고 남긴 일련의 상세한 메모들을 보면 레오나르도가 위기와 울분의 시기를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조수 기사로서 그를 돕고 있던 조르조 테데스코를 두고 불평을 토로했다. 또 다른 독일인인 조반니 델리 스페키에 대해서는 더 불만이 많았다. 레오나르도는 이 독일인이 조심성없고 태만하고 심지어 자신을 염탐하고 ('나는 그 때문에 은밀히 행할 수가 없다.') 스위스 경비원들과 함께 식탁에서 두세 시간씩 보내고 고대도시 로마의 폐허 속에서 사냥하느라 며칠을 소비한다고, 요컨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일을 한다고 비난했다. "그는 망루 전체를 거울 장수의 작업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곧 욕구불만과 원한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중상모략을 받고 마술을 부린다는 의심을 산 레오나르도는 더 이상 산토스피리토 병원에 가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다. "(독일인은) 교황에게 나를 중상모략하면서 나의 해부학 작업을 방해했다." 건축과 렌즈에 관한 크로키를 뒤덮인 어떤 종이에 그는 이런 수수께끼 같은 말을 적었다. "메디치가는 나를 만들고 또 나를 파괴했다." 이것은 메디치 가문과 그의 관계의 씁쓸한 결산 보고인가? 아니면 메디치, 즉 그가 '생명의 파괴자'라고 부른 의사들을 두고 한 말장난인가? 레오나르도는 율리아노의 사망 이후 알프스 산맥 너머로 행운을 찾으러 갈 준비를 한다.

[클루의 저택에서, 앙부아즈의 궁에서]

1516년 레오나르도는 앙부아즈에서 환영을 받았다. 이때 그는 멜치와 함께 있었으며 살라이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그는 클루의 저택에서 인생의 말년을 보낸다. 샤를 8세는 1490년 앙부아즈의 왕궁 지척에 있는 이 저택을 구입했다(루이 12세는 이곳을 자신의 궁으로 삼는다). 훗날 프랑수아 1세가 되는 프랑수아 드 발루아는 어머니 루이즈 드 사부아, 누이이자 시집<7일 설화>의 저자인 마르게리트 드 나바르와 함께 유년기를 대부분 이곳에서 보냈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왔을땐 루이 드 리니(레오나르도가 1499년도판 비망록에 인용한 왕의 조카)가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클루의 저택과 앙부아즈의 궁은 레오나르도에게 유배지도 천국의 작은 섬도 아니었고, 다만 만남과 교환이 이루어지는 고위층의 회합 장소일 뿐이었다. 다른 화가들, 이를테면 레오나르도파의 솔라리오를 비롯해 레오나르도가 1508년경 블루아 정원의 운하 개설에 관해 말할때 언급한 수도사 조콘도 같은 이들이 그보다 앞서 이곳을 거쳐갔다.


레오나르도의 고전 언어에 대한 지식과 '철학적' 자질을 야릇하게 언급한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그는 훗날 로소피오렌티노와 함께 프랑수아 1세를 위해 일하게 된다)의 증언은 너무나 놀랍다. "레오나르도는) 라틴 문자와 그리스 문자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는데, 프랑수아 1세는 그의 그런 대단한 미덕에 반해 그의 말을 듣는 것을 커다란 기쁨으로 생각한 나머지 그의 집에서 1년에 며칠식 묵었다."

[우화와 축하]

프랑스에서 레오나르도는 연극 활동을 다시 시작했고 그의 무대장식 중 가장 환상적인 것 몇 가지를 되풀이 했다. 한 예로 그는 프랑수아 1세가 그의 숙모이자 율리아노 데 메디치의 미망인인 필리베르트 공작부인과 함께 아르장탕에 입성(1517년 9월 30일 부터 10월 1일까지)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또 이듬해 6월 17일에 프랑수아 1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클루의 저택에서 열린 천국의 축제 때 '기계 사자'를 다시 만들었다.

반신불수가 됐는데도 그는 클루의 작업장에서 일손을 놓지 않았고, 1518년 5월 프랑수아 1세 아들의 탄생과 로렌초 데 메디치와 왕의 질녀인 마들렌 드 라 투르 도베르뉴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앙부아즈에서 열린 향연에서도 한몫 했다. 개선문에는 왕실 문장인 불도마뱀과 흰 담비, 그리고 레오나르도의 원고 H의 라틴어 명구 'Potius moriquam foedari.'(더럽혀지기보다는 죽음을)가 새겨졌다.

[이상도시]

레오나르도는 '최고의 화가'와 '왕의 기술자 겸 건축가'라는 직함을 함께 갖고 있었다. 당시 그는 신도시 로모란틴의 광대한 설계도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의 기하학적 도면은 로마 성의 도면을 떠오르게 한다. 그가 쓴 대로 '로몰론티노'라는 이름은 카이사르가 사울드레 위에 건설한 '로마 미노르(작은 로마)'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울드레는 전설에서 테베레강과 비교되는 루아르강이 흘러드는 곳이다. 그리고 배경은 황제가 계획한 그대로였다. 레오나르도가 제시한 설계도는 가장 이론적인 것이었다. 중심에 놓인 운하는 양쪽에서 축을 이루고 그로부터 도로, 다리, 건물, 광장이 질서 있게 분할된다. 도시의 전망은 '왕궁'과 함께 높이 솟아 있다. 분수, 부엌, 마구간도 지정됐다. '춤출 수 있는 방들'은 내려앉았을 때 수많은 사망자를 내는것을 보았기 때문에' 1층에 마련했다. 모의 해전과 '선박싸움'을 위해 거대한 못도 구상했다.

작업은 시작됐지만 쇠약해진 레오나르도는 건강 때문에 작업을 하지 못했고, 게다가 곧 도시에 전염병이 돌아 프랑수아 1세는 설계도를 샹보르로 옮길 수 밖에 없게 됐다. 성의 건축에 레오나르도가 공헌한 사실은 1518년도 메모에서도 확인되지만, (거기서 그는 도메니코 바르나베이 다 코르토나라는 대가를 언급하는데, 그는 샹보르의 건축가 중 하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중 계단, 십자가 형태의 방이 딸린 정사각형방들, 거대한 별장처럼 보이는 중앙의 성들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그때는 플로리몬드 로베르테트가 부리에, 그리고 조르조 드 앙부아즈가 가이용에 지은 성들 안에서 레오나르도의 건축적 아이디어를 반영하는 것이 관례였다. 레오나르도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 두사람 모두와 안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 중요한 증언]

앙부아즈에서 레오나르도는 루아르섬에 관심을 갖고 수력장치를 연구했다. 그는 수수께끼 같은 문장을 적었다. "앙부아즈에는 물 없는 왕실의 샘이 하나 있다." 그는 1517년 10월 10일 클루의 저택에서 추기경 루이드 아라공의 방문을 받는다. 추기경의 비서 안토니오 데 베아티스는 <여정>에서 '오른손에 약간의 마비증세가 온' 레오나르도의 건강부터 시작해 흥미로운 관찰 결과를 기록했다. 그는 늙은 대가가 더 이상 '부드러움을 갖고 색을 칠하지 못하고' 그 대신 '데생'과 가르치기만을 계속했다고 적었다. "그는 밀라노 태생의 한 제자를 키웠는데 그는 일을 퍽 잘한다(이는 젊은 시절의 프란체스코 멜치를 가리킨다)." 안토니오는 이어 레오나르도의 원고들의 엄청난 분량과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특히 책으로 엮을 경우를 가정해' 그렇게 생각했다. 아닌게 아니라 화가는 이 원고의 출판을 고려하기 시작했고, 이것의 활판 인쇄와 페이지 단위 조판까지 연구했지만 원고는 결국 간행되지 않았다. 멜치에 의해 이탈리아로 옮겨진 원고들은 그의 아들에 의해 흩어졌다. 토스카나의 대공작이 '저속한 것들'로 규정한 고문들의 말을 듣고 원고를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완벽'한 그림에서 클로루체까지]

레오나르도는 아라공 추기경에게 세 점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위대한 율리아노 데 메디치의 주문으로 실물대로 그린 어떤 피렌체 여인'을 표현한 첫번째 그림이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모나리자>이다. (아니면 적어도 <벌거벗은 모나리자> 또는 <모나 바바>일 것이다). 두번째 그림 <젊은 성 세례자 요한>으로 추정된다. 세번째 그림은 루브르 박물관의 <성녀 안나>가 분명하다. 이것은 미완성이었기 때문에 '완벽'할 수는 없었다. 군상이 잠겨 있는 넓은 풍경일지 모른다. 인물들의 발치에 놓인 돋을 새김이 뛰어난 자갈(혹자는 이것을 태반으로 보았다)은 인위적 수단과 자연아ㅣ 지질학에 동시에 영향을 끼치는 대담한 미적, 회화적 착상들을 증명한다.

바사리는 프랑수아 1세가 '성녀 안나의 밑그림을 칠하고 싶은 욕심에 레오나르도를 프랑스에 초대했을 것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 작품의 연대 추정에 중요한 요소이다. 파울조베는 1523~1527년 사이에 '목판에 그린 성모 마리아와 그의 할머니 안나와 함께 노는 아기 예수를 그린 (레오나르도의)그림이 있었고, 그것을 프랑스 왕 프랑수아가 사서 그의 성당에 걸어놓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뒤에 우리는 왕실컬렉션에서 이 그림의 흔적도 찾지 못하다가 1629년 이 그림을 피에몽의 카잘레 몽페라토에서 발견한 리슐리외 추기경이 루이 13세에게 준 것을 알았다. 1525년 밀라노에서 결환하고 '변사'한 살라이가 남기 재산 중 <성녀 안나>라는 그림이 어떤 <모나리자>와 함께 100에퀴로 평가됐다. 레오나르도의 제자였던 살라이가 스승의 걸작들을 이탈리아로 가져간 것일까? 다른 정보에 따르면 프랑수아 1세가 4000에퀴를 주고 <모나리자>를 구입했다고 한다. 하지만 1519년 4월 23일자 유언에서 레오나르도는 '그의 미술과 작업장과 관련된 모든 도구와 초상화들'을 살라이에게 주지 말고 멜치에게 주라고 적고 있다. 포르트락티(초상화)라는 단어는 그림 전체를 말한 것이 아니었을까?

레오나르도는 1519년 5월 2일 클로루체에서 죽었다. 프랑수아 1세는 셍제르맹앙레이에 있는 그의 성에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바사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믿고 구전되는 바도 그렇다. 레오나르도는 '프랑수아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에 관한 것ㅇ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신화를 낳는 데 기여하고 있지만, 이 예술가를 평범한 도식안에 가둘 수는 없을 것이다. 해석의 방법을 뛰어넘는 독창성, 자유로운 예술과 강한 이미지는 시간을 초월한 현실성을 창조했다. 결국 우리는 그 안에서 각자의 생각을 비춰보고 그의 세계에 관한 자기 자신의 의견을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좀 많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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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 도덕을보시면 예수라는인물에 대해 나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만찬을그렷습니다

 

근데 그 예수의 모델은 지저스크라이스트 즉 예수가 아닌 다른인물이여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경악을 잊지못햇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비치의 작품의 세계는 감입니다 그림의 생동감을살리고 예술의 생각을더욱 강화시켜주는그림이라고할까 ?ㅋ

 

허졉한답변 ㅈ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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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을 그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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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경력기간 경력내역
  ~   수학적 비율의 완성
  ~   원근법과 자연의 과학적 접근
  ~   수학,물리,천문,식물,해부,지리,토목,기계등 과학적연구
  ~   인체해부 묘사는 의학발전에 영향
  ~   주관과 객관의 조화의 고전적 예술의 단계에 도달
  ~   명암에 의한 입체감과 공간의 표현 성공
1517   ~   프랑수아 1세의 초빙으로 건축·운하 공사에 종사하다가 사망
1517   ~   앙부아즈왕성 근교 크루성관에 입주
1516   ~   교황 레오 10세의 아우의 초청으로 로마로 이주
1516   ~   방대한 수기(연구 및 예술론, 인생론 기록) 정리
1506   ~   루이 12세의 궁정화가
1502   ~   체자레보르지아의 군사토목기사
1466   ~   피렌체의 베로키오에게서 도제수업
기타작품
구분 분류 년도 상세내역
미술 1497 최후의 만찬
미술 1506 모나리자
미술 1483 암굴의 성모
미술 동방박사의 예배
미술 성 안나
저서 회화론
복사 한것을 쉽게 알겠지만 그래두...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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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인간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공간 구성과 인물 구성을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화면에 확고한 중심과 질서를 부여하고 장중함을 표현하는데 탁월하였으며, 자연 관찰과 해부학에 바탕을 둔 공기 원근법, 투시원근법, 명암법을 사용하여 이상미를 구현하였다.

마력을 지닌 매혹적인 미소=[모나리자],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종교화[최후의 만찬]

다빈치의 작품세계를 설명헤주세요(내공20)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세계설명헤주시기 바람니다. 최대한 빨리요~~~ 더빠른 분을 체택할수도 있습니다. 경력 경력기간 경력내역 ~ 수학적 비율의 완성 ~ 원근법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작품 감상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사진과 사진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그 작품을 감상후 느낌도 좀 써주셨으면 합니 다. 그림은 많을수록 좋고요, 내공은 80겁니다. 지식in여러분들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해서

... 특징(작품의 표현기법, 화파 및 사조의 특징)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대표작품 설명 그리고 그 대표작품 사진.. 부탁드리고요 내공걸어요! 정성스럽게 답변 부탁드려요...

레오나르도다빈치에대해서

... 되도록이면자세하고길게답변부탁드립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 화가이자 발명가이자 과학자, 수학자, 의학의 선구자였던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회화 작품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과학업적...

... 설명해주세요~~!!! 내공은 많이 걸구요~ 오늘까지면 감사 하겠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 화가이자 발명가이자 과학자, 수학자, 의학의 선구자였던 그는 세계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 내공10 가장 빨리 답변을 올린 사람에게는 내공20을 부탁 드릴 게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 화가이자 발명가이자 과학자, 수학자, 의학의 선구자였던 그는 세계에서 가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관한 기초상식 좀 ^^

... 드립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 화가이자 발명가이자 과학자, 수학자, 의학의 선구자였던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회화 작품인 모나리자와 수많은 예술작품을...

레오나르도 다빈치에대해서

제가 학교에서 화가의 방꾸미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내공있어요) 화가이자 발명가이자 과학자, 수학자, 의학의 선구자였던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회화 작품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에대해서

... 내공 30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 화가이자 발명가이자 과학자, 수학자, 의학의 선구자였던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회화 작품인 모나리자와 수많은 예술작품을...

레오나르도 다빈치

... 쓰거나 내공냠냠하면 신고 바로 들어가요~!^ ^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 화가이자 발명가이자 과학자, 수학자, 의학의 선구자였던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회화 작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