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들 헬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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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8.09.05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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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에대해조사하고잇습니다

 

처음에 목차를 만들엇는데

 

1. 이중섭의 생애

 

2. 이중섭의 업적

 

3. 이중섭의 작품

 

4. 이 4번을 어떤걸해야할지 모르겟요 A4용지 1쪽 분량에 맞는거면 좋고 적어도 됨

 

최대한빨리 알려주세요 11시전까지임 ㅠㅠ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 이중섭의 생애

 

1916년 4월 10일 평남 평원군 송천리에서 이희주와 안악 이씨사이의 막내로 태어나다.
1920년- 5세가 되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때부터 그림그리기를 시작하였다.
1923년- 마을의 서당을 다니다가 8세에 외가가 있는 평양으로 가서 종로보통학교에 입학. 선구적 유화가인 김찬영의 아들이며 뒤에 화가가 된 김병기와 초등과정을 같이 지내며 그 집에 가서 김찬영이 쓰던 화구와 미술서적을 접하게 되었다.
1929년- 14세 초등과정을 졸업하고, 평북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 중등 과정 내내 소를 즐겨 그려서 학생들과 하숙생 사이에서 소에 미쳤다는 평을 받았다.
1931년- 16세 미술과 영어 과목의 교사로 부임한 유화가 임용련과 그의 부인 백남순에게 미술에 대 한 재능과 열의가 인정되 어 집중적인 지도를 받게 되었다. 식민 당국의 우리말 말살 정책에 반발해 한글 자모로 된 그림을 그린다. 이후 내내 한글 풀어쓰기로 이름 쓰기를 실천한다.
1935년- 20세에 몇몇 동급생과 공모하여 일본회사의 보험금을 타서 낡은 학교를 재건하겠다는 의도로 불을 지름. 졸업기념 사진첩에 일제에 항거하는 그림을 그려 물의가 일었고 사진 첩은 취소 되었다. 졸업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서 사립 테이 고쿠 미술학교에 입학.연말에 다친뒤 프랑스어 공부에 몰두.
1936년- 21세 사립 예술대학인 분카 가쿠잉으로 옮김. 이규상등이 동기, 김병기와 오산의 선배인 문학수 그리고 유영국이 상급생이었다고 함. 피카소와 루오에 심취하여 이들의 그림 을 모방하여 교수가 힐난한데 항의하기도 함. 실제로 학교 에서는 배운 것이 없고, 상급생인 문학수를 통해서 알게된 화가 쓰다 세이슈에게 오가면서 배운것이 자신을 만들었다고 회고하기도 함. 쓰다에게서 사숙하던 송혜수를 알게됨
1938년- 23세 5월 일본인 미술가들이 창립한 단체 自由美術家協會의 2번째 공모전에 응모하여 입선 하고, 협회상을 받았으며, 문학수와 함께 일본의 여러 평지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는다. 조선인 출품자는 김환기, 박생광, 유영구, 주현이다. 이 무렵 같은 과의 후배인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사랑에 빠졌다.
1940년- 5월에 공모전에 <누운 여자>, <소의 머리>, <서있는 소>, <작품1>, <작품2>를 출품하다. 10월 경성에서 열린 제4회 공모전에 <서있는 소>, <망월>, <소 의 머리>, <산의 풍경> 을 내어 길진섭, 김환기, 진환으로부터 찬사를 받다. 연말에 원산 에 머물면서 마사코에게 그림으로만 된 엽서를 보내기 시작.
1941년- 26세 3월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활동하던 조선인 유화가 김종찬, 김학준, 문학수, 이쾌대, 진환, 최재덕과 조선신미 술가협회를 결성하고, 5월에 창립전을 가짐. 이 무렵 이쾌대의 형과 그를 통해 알게 된 미술사학자 고유섭의 가르침과 형의 우리 문화재 수집 활동에 영향을 받아 휴가차 귀가 하면 개성 박물관에 다니면서 스케치에 몰두 4월 5번째 공모전에 <망월>과 <소의 여인>을 출품. 회우로 추대됨.
1942년- 6번째 공모전에 회우로서 <소와 아이>, <소묘>, <목동>,<지일 (遲日)>들을 출품하다. 이 무렵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대이 상향'이라는 뜻의 "대향"으로 고치다.
1943년- 28세 3월 7번째 공모전에 이대향이라는 이름으로 <소묘1>에서 <소묘6>과 <망월>, <소와 소 녀>, <여인>을 출품. 이 해 말 평양 체신회관에서 평양출신의 화가들인 김병기, 문학수, 윤중식, 이호궁, 황염수와 6인전에 참가. 이 후 그림을 그리 면서 징병이나 정용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에서 일하기도 함. 연필화 <소년>, <세 사람>은 이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1945년- 30세 4월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조선으로 와 5월 결혼함.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 다. 최재덕과 지금의 미도파 백화점에 복숭아나무에 매달린 아이들이 등장하는 벽화를 그림.
1946년- 2월 조선예술동맹의 회원부원이됨.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 가 되었으나 금새 사직.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음. 원산문 학가동맹 소속의 구상등이 펴낸 공동시집"응향(凝香)"의 표지 에 어린이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리다. 이로 인하여 이듬해 이 책에 실린 시들이 복고적이고 반동적이라 하여 북조선문학 가동맹의 규탄을 받을 때 같이 거론되기도 함. 이 무렵 화가 김민구, 이호궁, 한 묵등이 자주 들렀고, 화가 지망생 김영환, 김종식 등이 찾아와 그림 품평을 받기 시작함.
1947년- 32세 6월 친구 오정환의 시집 "나 사는 곳"의 속표지를 그림. 평양에서 열린 8.15기념전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내다. 이를 본 소련인 평론가의 호의 어린 평가를 받음. 아들 태현 태어남.
1949년- 34세 봄 태성 태어남. 원산 시외인 송도원으로 이사함. 소를 하루 종일 관찰하다 소 주인에 게 고발당함. 원산에서 열린 전시회에 함께 출품한 것이 인연이 되어 화가 박수근과 사귐. 부인이 일본인이라는 점 때문에 친일파라는 지목을 받다.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자주 술을 마심.
1950년- 6월 전쟁이 본격화되기 전에 가장인 형이 행방불명되다. 10월에 원산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됨. 12월 초 미군이 원자폭탄을 투하한다는 위협에 부인과 두 아들, 장손인 조카 영진을 데리고 부산으로 감.
1951년- 36세 부산에서 제주까지 배편을 제공해 준 선주가 사느 서귀포 까지 여러날을 걸어서 도착하여 그 집에서 두 달간 머물다. <피난민의 첫 눈>은 이때의 체험을 그린것임. 이곳에서 그린 그림으로는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이다.
1952년- 37세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가입. 부인과 아이들이 영양부족으로 병이 드는 등 곤란이 계속되었으므로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 갔다가 곧 일본인 송환선을 타고 친정으로 감.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엽서가 시작됨. 박고석, 손응성, 한묵과 기조동인을 결성하고 전람회를 염.
1953년- 38세 부인이 남편의 생활과 제작비를 위해서 일본을 왕래하는 선원인 오산의 후배에게 일본서적을 외상으로 보내고 이익의 일부를 이중섭에게 주기로 했으나 어김으로써 거액의 빛을 지게 됨. 3월 제3회 신사실파전에 2점의 <굴뚝>을 출품. 유영국, 장욱진의 그림과 함꼐 수상하다고 하여 계엄기관의 조사를 받다. 8월 오랫동안 고대하고 기다리던 끝에 일시 체류 허가를 얻어 일본으로 갔다가 곧 돌아옴. 이것이 가족과 마지막 만남이 되다. 유강렬의 제의를 받아 통영으로 가서 안정을 얻게 되어 풍경화 등을 제작하고 다방에서 개인전을 열다. <흰 소>, <황소>는 이 때의 작품임.
1954년- 39세 봄에 함께 공모전에 함께 출품한 인연이 있는 화가 박광생 의 초대로 진주에 머물면서 제작하고 이를 다방에서 전시. 서울로 가서 6.25 4주년을 기념하여 경복궁 미술관에서 열린 대한 미술미협전에 <달과 까마귀>외 2점을 내 호평을 받음.
1955년- 40세 1월 18일부터 서울 미도파 갤러리에서 개인전 개최. 유화 40여점. 은지화를 비롯한 그림을 비롯한 소묘 50여점을 내다. 전시는 호평을 받았으나 당국은 은지화를 춘화라고 하여 철거하도록 했으며 그림값을 떼이기도 하고 술로 지내다가 빈털털이가 됨으로써 자학과 기진맥진에 빠짐. 5월에 미국공 보원에서 개인전을 가짐. 저조한 실적, 영양 부족으로 인해 극도로 쇠약해 성가병원 정신과에 보내져 1달여 입원. 거식증 등의 증상으로 정신병자라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반박하기 위하여 연필로 자화상을 그리다. 곧 서울로 가 이종사촌의 집에 머물다가 다시 정신병원으로 다시 보내졌다. 퇴원하여 화가 한묵과 정릉에서 하숙. 이 때 간장염에 금물인 술을 계속마셔 화달이 심해짐.
1956년- 41세 영양 부족과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다시 음식을 거부하기 시작. 대구전을 관장한 미국인 맥타가트에 의하여 미국 모던 아트 뮤지엄에 기증된 은지화3점이 소장되기로 결정되다. 9월 6일 지켜보는 사람없이 홀로 숨을 거두다. 3일 뒤 이를 알고 망우리 고동묘지에 묻다.
1957년- 이중섭을 따르던 차근호가 새긴 묘비가 세워지다.
1960년- 부산 로터리 다방에서 최초의 유작전이 열리다.
1972년- 서울 현대 화랑에서 15주기를 기념하는 유작전과 작품집이 마련되다.
1973년- 이중섭의 평전이 연재를 거쳐 출판되다.
1978년- 정부에 의해 건국 훈장이 수여됨.
1979년- 젊은 시절 애인에게 그려 보낸 엽서, 그림과 일본의 가족 에게 맡겼던 은지 그린을 중심으로 한 전시가 서울, 대구, 부산에서 열리다.
1980년- 이중섭이 아내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번역되어 출판
1986년- 30주기를 기려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열림.
1997년- 제주도 서귀포시가 이중섭이 살던집을 복원하여 개관하다.

 

이중섭화가는 1916년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군 부농의 (부자농가) 가정에 막내로태어났다. 

 

그는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민족의식에 눈을떴다. 

 

민족의식이 강하신 조만식과 함석헌 선생님들덕분에 더더욱 민족의식에 가까워질수있었다.

 

 이중섭화가는 그림공부에 최선을다했다.

 

이중섭화가가 열성적으로 그림공부에 몰두할수있었던것은 화가이자 미술교사였던 임용련선생님 덕분이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이중섭화가는 일본유학을 가야할지 고민에빠졋다.

 

임용련선생님의 권유와말씀에 이중섭화가는 일본으로건너가  동경제국 미술학교에 입학

했다. 

 

그당시 일본은 서양의 전위미술이 들어왔을뿐만아니라 서양그림을 모방하기까지하였다. 

 

이중섭은 그런곳에 익숙해질수없었다. 참된예술은 태어나 자란곳의 땅냄새가 흠뻑배어 있어야 한다는것이 그의생각이었다.

 

결국 그는 동경제국미술학교를 그만두고 동경문화학원으로  학적을 옮겼다.

 

이학원은 자유분방한 학풍과 개인의 창조적 능력을 장려하는 학원이었다.

 

그는 이학원을 다니던도중 야먀모토 마사코라는 여성을 사랑하게된다.

 

 

그는 1938년 5월, 일본인미술가들이 창립한 단체인 자유미술가 협회의공모전에 응모하여

협회장상을 받았으며 일본의 여러평론가로 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그중 망월이라는 작품이있다.

 

게다가 그는 야마모토 마사코라는 연상의 여인과 결혼하게된다.

 

행복이있으면 불행이있는법.

 

1946년은  그에게 가장슬픈해였다.

 

형의죽음을 알리는 편지와 첫아이가 디프테리아로 죽었으며. 장인어른까지 죽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는 정말자상한 아버지다..

 

천두복숭아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천두복숭아와 아이들이라는 그림을 그린다.

 

죽은아이가 천국에서 천두복숭아를 따먹으며 놀기를 바라며..

 

 

전쟁때문에 그는 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란을갔다.

 

그러나 부산도 위험하다는 소식을듣고 제주도로 다시 피란을떠난다.

 

이때 그는 해와 뛰어노는 아이들, 자연을 소재로삼아 많은작품을 낸다.

 

 

그는 장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아내에게 숨기고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소식을알고 자기고향인 일본으로 아이를 데리고떠난다.

 

그는 홀로남겨진것이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않고 그림을그리고 또그린다.

 

친구의 (삽화를 그려보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담배은박지에 그림을 그리고또그린다.

 

그는 외로움을 버티지못하고

 

거식증이라는 병에걸리고 만다.

 

음식을 입에 댈수도없는 병..

 

그는 1956년 9월6일 쓸쓸히 홀로죽음을 맞이한다.

 

 

2. 이중섭의 업적

 

민족의식이 담긴 작품을 이세대까지 전해준 일제강점기때의 화가이다.

1937년 일본의 전위적 미술단체의 자유미협전에 출품하여 태양상을 받았다.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 개최

1952년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단에 입단

1950년  원산 신미술가협회 결성후 회장취임

1946년  북조선 미술동맹 가입, 원산사범학교 미술교사로 재직

1942년  미술창작 작가협회전에 '소와 어린이' 출품

1941년  미술창작 작가협회 결성

1920년  그림그리기 시작

 

 

3. 이중섭의 작품

[ 망월 (1940) ]
달을 보라고 외치며 잠자는 사람을 깨우려는 새는 무엇을 의미할까? 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가에 한 여인이 염소에 기대에 누워있고, 새 들 중 한 마리가 오른 쪽에 있는 달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네요. 이 여인을 깨우려는 것 같죠? 동경 유학시절에 그린 그림으로 일본인화가들이 창립한 단체의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입니다. 당시 이중섭은 일본에서 활발한 작품 및 전시 활동을 보였습니다.

 

 


[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1951) ]
피난 중에 잠시 머물렀던 제주도 서귀포에서의 풍경을 화폭에 담은 것입니다. 매우 적막하고 조금은 쓸쓸해 보이며, 그의 여느 그림과는 사뭇 필치나 화법이 다릅니다. 아마도 아내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하러 나가고, 그는 아이들과 하루를 보내면서 그림을 그렸기에, 여러 화법들을 시험해 보면서도 편치 않은 작가의 마음이 색조와 필치로 나타난 듯 합니다.

 

 

[ 두 어린이와 복숭아 (1953) ]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첫 아들이 죽자, 이중섭은 아이의 관 속에 혼자서는 외로울 테니 이거라도 가지고 놀라며 천도복숭아가 그려진 몇 장의 그림을 넣어주었다고 해요. 이중섭은 아들이 자신이 넣어준 복숭아 그림을 가지고 놀고 있는 모습을 마음 속으로 그리면서 이 그림을 그린 듯 합니다. 복숭아는 극락의 열매라고도 하죠.

 

 

[ 달밤 (1953) ]
구름에 쌓인 달을 발가벗은 한 아이가 누워서 바라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위에 그려진 달과 구름은 전통적인 소재이면서도 그 표현 또한 전통적인 문양의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이중섭 특유의 넉넉한 미소의 아이가 달밤과 너무나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있습니다.

 

 

[ 물고기와 노는 두 아이 (1953) ]
아이들과 아내를 일본에 보내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중섭은 아이들의 그림을 가장 많이 그렸습니다. 새나 동물 등 자연과 동화되어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그것은 아버지로서의 자녀들에 대한 바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듯 그는 결코 화려하거나 허망한 꿈을 꾸지 않았는 데, 끝내 그 꿈을 볼 수 없었다는 게 너무나 가슴 아프네요.

 

 


[ 달과 까마귀 (1954) ]
이중섭은 까마귀를 반가운 존재로 그렸습니다. 달을 배경으로 모여드는 까마귀들은 서로를 반기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서로를 의지하며 아껴주는 모습들이죠. 이런 가족과도 같은 모습은 그가 바라는 꿈이었습니다. 이런 까마귀들처럼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던 거죠. 그 바람을 깔끔하게 그려내었습니다.

 

 

 


[ 황소 (1954) ]
대표작인 소들에 대한 그림을 그리던 이 시기에 이중섭은 경남 통영에서 작품 제작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가 그의 예술적 역량이 총결집되는 때입니다. 맑은 눈의 잘생기 소를 보면서 그는 많은 습작을 했고, 조선 땅 특유의 소를 정확하고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 오랫동안 연구를 했죠. 힘찬 소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그림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 기상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 흰소 (1954) ]
그가 청소년 시절부터 관찰하였던 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생명력이 넘치고 강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소를 그려내었습니다. 거친 콧김이라도 뿜는 듯한 소의 콧잔등에서 힘있게 쭉 뻗은 꼬리의 끝까지, 그리고 당당하게 선 네 발과 근육의 표현까지 흰 선과 검은 선의 필치는 강한 바람처럼 화폭에 가득 넘치고 있습니다. 정말 그는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조선의 제일가는 소를 그려내었습니다.

 

 


[ 가족 (1954) ]
전해오는 얘기로는 종이 살 돈이 없어서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으로 긁어 선화를 그려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뜻밖에 새로운 표현방법을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그는 후에 은박지를 이용하여 대작을 그릴 것이니, 남에게 보이지 말라고 아내에게 말했다고 하네요. 가난과 정치적 상황 때문에 일본에 머무르고 있는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 자화상 (1955) ]
6.25 남북 전쟁 직후 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은 평양이 고향이며 건강이 악화되어 있던 이중섭을 간첩, 공산당 내지는 정신 이상자로 몰았습니다. 단지 병을 앓고 있었을 뿐인데 말이죠. 그는 자신이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정신이상자는 자화상을 이렇게 정확히 그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정신병원에 한 달이나 수용되어야 했습니다.

 

 

 

4. 이중섭 그림의 특징.

이중섭 작품세계의 가장 큰 특징은 표현재료의 다양한 실험에 있다. 합판에 유채, 종
이에 연필과 수채, 종이에 잉크 등 표현재료에 구애받지 않는 다양한 시도와 표현 공
간 역시 책표지, 시험지 조각, 장판지, 엽서, 은박지 등 그릴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표현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 담배 속지에 그린 은지화는 그의 독창적이고 실
험적인 노력의 산물로 그의 다양한 표현세계를 대표하는 그림이다.
이중섭은 은지에 날카로운 쇠꼬챙이를 이용해서 그림을 그렸다. 이때는 종이가 뚫어지
지 않을 만큼 윤곽선을 그린다. 은지화는 대부분 가족이나 모여있는 어린이들을 주제
로 한 작품들이 많았는데, 이 그림에서 이중섭의 표현기법을 살펴보면, 일단 전체적으
로 3차원 공간을 무시하고 평면적인 공간이라는 점이다.
인물표현에 있어서 이중섭은 생략과 과장 등을 통해 독창적인 인물상을 그려냈다. 그
의 그림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몸동작들은 대단히 단순화되어 있고, 정상적인 인체비
례가 무시된 것 같지만, 사실은 아주 정확한 비례감을 갖고 있다는 점과 선의 표현에
중점을 두고 그리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이중섭은 선묘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선묘는 대체적으로 자유분방
하고 강렬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중섭의 작품에서 선묘는 형태를 파악하기 위한 윤
곽선이 아니라 선 자체가 구성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서 독특한 생명감을 지니고 있다.
이중섭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보다는 선 자체에서 드러나는 독특한 표현미를 통
해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발산하였던 것이다. 이중섭 작품에서 느껴지는 끊임없는 율
동감과 생동감은 이 선묘의 구사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중섭 작품세계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전통미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특히 은지화는 고
려청자의 상감기법과 제작기법, 장식적인 효과면에서 유사한데, 고려청자의 상감기법
이란, 빚은 도자기의 표현에 문양을 새기고, 그 부분에 다른 빛깔을 나타내는 이물질
을 채워 넣어 문양을 나타내는 기법으로 세계 도자 사상 독보적인 장식기법이다.
또한 엽서 그림에서는 수묵화의 <번지기 기법>을 통해 제작된 작품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외에도 그의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강인한 선묘는 고구려 벽화와 비슷한 분
위기를 자아내는 등 화가 이중섭이 전통미를 재현하기 위해 애썼다는 것을 엿볼 수 있
다.


옷잘입는님들 헬프미~~

옷잘입는님들 헬프미~~ 이 코트가 미해군?코튼데 디자인 별룬가요?ㅠㅡ를 개인적으로 디자인 예쁜것같고 멋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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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잘하는님들 헬프미~~~

다음 식을 곱셈 기호와 나눗셈 기호를 생략하여 나타내어라 a x 9 나누기 (3 x b) (a - b) x 3 x c a x a 나누기 4 - a x (-1) x b 왜 그렇게 나오는지도 알려주세요 내공 30드림...

{수학}건 뭥미 ㅠㅠㅠㅠ 님들아 헬프미)

... 1=42 2=72 3= 2의3×3의2승 4= 2의4승×3의2승 5= 2의5승×3의3승 이게 뭥미 님들아 이건 답이 없는 것 같애요 ㅠㅠ 님들아 제발 플리즈 헬프미~~! 자! 어떤 어린이의 제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