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 에 대해

현대 미술 에 대해

작성일 2012.12.21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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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적인 현대 미술가 피카소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현대미술에 대해

 

 

참고로 피카소의 원래 이름은

Pablo Diego José Francisco de Paula Juan Nepomuceno María de los Remedios Cipriano de la Santísima Trinidad Ruiz y Picasso 입니다. 이름 부르다가 해 저물지 모릅니다.

 

 

청색시대 (The Blue Period, 1901-1904)

청색이 주조를 이루며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 참상과 고독감 표현했던 시기

입니다.

화가들, 특히 성공한 화가들에게도 무명시절이 있었지요.
피카소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는데요...
피카소는 19세때 바르셀로나를 떠나 낯선 파리에서 생활하게 되지만,거처할 곳이 없어 몽마르트 언덕에 사는 친구 막스자콥의 방에 끼어살면서 지내게 됩니다.

당시 세기말의 영향으로 피카소는 이 시기에 페시미즘적이고 고뇌주의적인 분위기에 휩싸여서 그의 그림의 주조가 짙은 푸른색으로나타나는 청색시대(1901-1904)를 맞이합니다.
몽마르트에서의 '청색시대' 동안 피카소는 청색을 주조로 그림을 그리며, 모든 것을 푸르게 느끼면서 밤을 지새우는 생활을 계속하고...
그가 좋아하는 색깔로서의 청색,이 시기 그가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서의 청색, 게다가 그가 입고 다녔던 옷들의 색깔까지도 청색이었다고 하며,그는 청색이야말로 '모든 색들을 다 담고 있는 색깔'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시대의 주요작품>

청색시대의 자화상>1901, 캔버스에 유채

우는 여인 (피카소, 입체파, 1937, 런던 국립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에스파냐내란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한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 Guernica》의 습작에서 시작되었다. 피카소는 이 주제에 매료되어

《게르니카》를 완성한 후에도 여러 점을 제작하였다. 즉, 여인들에게 많은

변화를 주어 작품을 만들었는데, 《잠자는 여인》《춤추는 여인》《독서하는

여인》《거울을 보는 여인》《포옹하는 여인》 등 그 변화는 매우 다양하다.

전쟁의 비극을 통한 여인들의 슬픔을 상징화한 작품으로, 울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분해한 뒤 재조립하는 피카소 특유의 표현법으로 제작되었다.

배경의 검은색 속에서 선명하게 얼굴과 손이 부상하고 있다. 눈물을 그린 것도

사실적인 것을 피하고 추상적이며, 흐르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는 듯이 표현하고

있다. 마치 아동화같이 소박하고도 상징적으로 표현한 피카소의 걸작 중의 하나이다.

스페인 태생의 프랑스 화가인 피카소(Pablo Ruizy Picasso)가 그린그림이다. 전쟁의 비극과 잔학상을 초인적인 예리한 시각과 독자적스타일로 그려낸 세기의 대벽화이다.이 때부터 피카소 특유의 표현주의라 불리는 괴기한 표현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페인 내란중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의 무차별폭격에 분노하여 그린 이 그림은 20세기 회화의 기념비적 작품이다.<참고>라크와 함께 큐비즘을 창시한 피카소는 후반에는 표현주의라는새로운 기법으로 추상화의 극치를 이루었다


<제작배경>

1937년 4월 26일 게르니카는 독일 나치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다. 군사 기지도 주요 도시도 아닌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 독일 나치의 콘도르 비행단이 무차별 폭격을 감행한 것이다. 이 폭격으로 마을 전체 가옥의 80%가 파괴되고 민간인 1500명 정도가 학살된다. 이 사건은 스페인 내전 최대의 비극이었고 최초의 민간인들을 향한 무차별 폭격이었다.
당시 스페인은 식민지 북아프리카 주둔군의 프랑코 장군을 필두로 하는 국가주의자들과 공화파 간의 내란이 진행 중이던 시기였다. 이 내전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대리전의 양상을 띄고 있었다. 국가주의자인 프랑코 장군은 국내의 가톨릭교회, 군부 세력, 지주, 자본가 등과 독일 나치와 이태리의 파시스트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에 대항하는 공화파는 국내로는 도시 노동자, 농업 노동자, 교육 받은 중산층이, 국외로는 유럽각국과 미국의 연합군인 국제여단과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사실 게르니카 폭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터무니 없는 사건이었다. 표면적으로 게르니카 폭격의 명분은 프랑코 장군에 대한 나치의 지원이었다. 그런데 왜 군사 기지도, 주요 도시도 아닌 게르니카 였을까? 그 사실만으로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폭격의 실제 목적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 이었다. 나치는 당시 마을 전체에 자동소총이 1정밖에 없을 정도로 군사 전략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게르니카에 5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이 사실은 폭격의 목적이 다른 데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폭격은 1937년에 감행되었는데 당시 히틀러는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게르니카 폭격은 바로 독일 나치가 자신들의 비행기와 폭탄에 대한 테스트를 위해 감행한 것이었다.


--->즉, '게르니카'는 스페인 반환(1981) 1937년 4월 26일 내전 중인 스페인 바스크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 에 독일 공군기가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는데 피카소의 '게르니카' 는 조국에서 발생한 이 참극을 고발한 작품으로 파리국제박람회 스페인관에 전시됐다

<표현방법>

비극성과 상징성에 찬 복잡한 구성 가운데 전쟁의 무서움, 민중의 분노와 슬픔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상처입은 말, 버티고 선 소는 피카소가 즐겨 다루는 투우의 테마를 연상케 하며, 흰색·검정색·황토색으로 압축한 단색화에 가까운 배색이 처절한 비극성을 높이고 있다. 그리고 여러 각도에서 본 사물을 모두 모아 그림으로 표현했다.극적인 구도와 흑백의 교묘하고 치밀한 대비효과에 의해 죽음의 테마를 응결시켜 20세기의 기념비적 회화로 평가된다


<재료및 기법>

벽화로 구도는 날카로운 불안감과 이질감을 주는 삼각형 구도를 사용했으며
이 작품에는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비극성이 표출되어 있고 광기, 절망, 좌절의 절규로 형상화되어 있으며 큐비즘의 파괴성과 평면화법, 큐비즘 후에 개척한 신고전주의적인 양감 표현과 왜곡, 그리고 그의 미술적 상징성 등 그때까지의 모든 성과의 훌륭한 종합이다.
관련블로그
EBS의 e채녈에서 나오는 피카소 <게르니카>스샷









피카소 그림 감상 (위의 그림의 이름도 알수 있음)

1881년 10월 25일, 에스파냐 안달루시아의 말라가에서는 한 아기가 살기를 거부하고 있다. 아기는 태어나면 울어야만 한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아기는 울음을 터뜨려야 한다. 첫 울음, 그것은 존재 확인 이상의 문제이다. 첫 울음과 더불어 아기는 호흡을 시작한다. 그런데 지금 한 아기가 울기를 거부하고 있다. 산부인과 의사가 아기의 뺨을 때려도 아기는 울지 않는다. 의사는 불안해 한다. 마침내 의사는 시가를 크게 빨아들여서 아기의 얼굴에다 뿜어댄다. 그때서야 아기는 울음을 터뜨린다.

태어나면서부터 살기를 거부했던 그 아기는 아주 오래 살았다. 아기는 1973년까지 살았다. 무려 아흔두 해를 산 것이다. 단지 오래 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도예와 조각 작업도 했다.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 사이 그는 현대 미술의 창시자가 되었다. 아니 그는 현대 미술 자체가 되었다. 파블로 피카소. 그의 이름이다. 어머니의 성을 딴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현대 미술의 거의 모든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1907년,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 반 고흐, 툴루즈 로트레크가 그 언덕에서 살았다. 언덕 위에 배가 서 있다. 배의 이름은 ‘바토-라부아르’, 즉 세탁선이다. 한 건물 안에 30여 개의 아틀리에가 있다. 계단은 삐걱거리고, 수도라고는 하나밖에 없다. 가스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습기로 가득 찬 그 건물에는 일년 내내 고양이 오줌 지린내가 풍긴다. 바토-라부아르, 그것은 이 건물의 보기 흉한 몰골이 ‘세탁부들의 빨래터로 쓰이는 강변에 늘어선 낡은 배들’과 흡사하다 하여 어느 시인이 붙인 이름이다.

문을 들어가자마자 나오는 통로 맨 끝 쪽 아틀리에, 그 곳에서 피카소가 무덤덤하게 자신의 그림을 동료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후에 그와 함께 큐비즘을 발전시켜 나간 조르주 브라크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마치 우리에게 솜뭉치를 먹이고 석유를 마시게 해서 불을 뱉어내게 하려는 것 같군.” 펠릭스 페네옹이나 앙리 마티스, 피카소의 무조건적인 지지자였던 기욤 아폴리네르마저 그의 그림을 비판하고 있었다. 오직 한 친구 칸바일러만이 그 그림의 가치를 알아 보았다. 초대한 친구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그는 그림을 둘둘 말아 화실 한 구석에 처박아 놓았다.


1935년경 첫 번째 부인 올가의 초상화(1917년)앞에 선 피카소(왼쪽),
1907년 선보인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본격적인 입체파 운동의 계기가 됐다.


그 그림이 바로 20세기 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다. 243 X 233센티미터의 거대한 화폭 안에 여자 다섯이 그려져 있다. 네 여자는 서 있고, 한 여자는 앉아 있다. 그런데 그 여자들은 익히 보아왔던 그림들 속 여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때까지 화가들의 화폭 속 여인들은 항상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아름답지 않다. 보기 흉하다. 아니 그런 여자의 모습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큰 눈, 정면의 모습에 담긴 옆 모습의 코, 오른쪽 여자들의 모가 난 얼굴, 엄청나게 큰 발, 도무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오른쪽 여자는 난폭하게 쭈그리고 앉아 몸의 등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여자의 얼굴은 정면이다. 그것은 가능한가? 아니다. 불가능하다. 하나의 화폭 안에 어떻게 얼굴 정면과 등이 함께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이 다섯 여자들은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한 화면에 둘 이상의 시점이 동시에 들어간 것이다. 여자들의 육체는 찢어져 있다. 그는 말했다. “비뚤어진 코, 나는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사람들이 코를 보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1907년은 마땅히 젊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과 함께 시작되어야 한다. 바로 그 해에 큐비즘이 시작되었고, 현대 미술도 시작되었다. 그 그림은 현대 회화의 첫걸음을 알리는 기록이다.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자연에 대한 모사라고 생각했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건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 넣는 것이라고 여겼다. 대상을 아주 정확히 화폭 안으로 옮겨야 한다. 오랜 세월 사람들은 이를 위해 노력했다. 사진기가 없던 시절,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옮겨 그려서 그것이 마치 화폭 안에 실재하는 것처럼 그리는 것은 모든 화가의 열망이었다. 거장들의 생각과 손을 거치며, 르네상스 이후 그 열망은 실현되는 듯 했다. 그러나 그 가능성에 대한 굳건한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대체 인간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 보다도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그대로 실재하는 것인가. 때로 우리 눈 앞에서 날아가는 새가 저 멀리 보이는 집보다도 크게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새가 집보다 클 수는 없지 않은가.

대상과 화가 사이에 존재했던 역할 분담에 생긴 이 미세한 균열은 폴 세잔에 와서 구체화 된다. 그는 화가가 맡아 온 오랜 임무를 포기한다. 1904년 그는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자연을 원통, 구와 원추에 의해서 다룬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면 항상 자연을 자신이 그리기 쉽도록 변화시켰다. 그 자연 대상의 기본 형태가 세잔이 보기에 원통과 구와 원추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본 단위들로 그는 자연을 재구성했다. 세잔은 1906년 세상을 떠났고, 그의 그림들은 젊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 가운데 가장 큰 성과물이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다. 눈에 보이는 대상들은 분해되고 수없이 많은 조각들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그 조각들은 하나의 화면 속에서 여러 시점들을 보여주기 위해 재구성된다. 하나의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 입체주의 화가들은 여러 각도의 시각을 하나의 화면 안에 담으려고 했다. ‘하나의 화폭 안에 사물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모두 담고 싶다’는 이러한 열망은 르네상스 이래 근 500년을 지속되어 온 단일 시점에 따른 원근법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큐비즘(입체주의)이란 말은 1908년, 그러니까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그린 다음해에 브라크의 그림들을 보고 마티스가 한 말에서 유래했다. 그때 마티스는 “아, 입방체(cubic)들만으로도 그렇게 그릴 수 있구나”라고 감탄했다. 그리고 1908년 루이 보셀이 “브라크는 형태를 무시하고 장소든 사람이든 집이든 모든 것을 기하학적 도형으로 즉 입방체로 환원했다.”라는 평을 썼을 때 그것은 미술사의 한 용어로 정착되었다.

1900년 피카소는 자신이 단골로 다니던 바르셀로나의 선술집 ‘네 마리 고양이’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 어두운 선술집 벽 위에 그는 데생 150여 점을 전시했다. 그리고 그 해, 친구인 카를로스 카사게마스와 함께 파리로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아홉이었다. 그 다음해 피카소의 친구 카사게마스가 거리의 여인 제르멘 가르가요에게 실연을 당해 그 충격으로 자신의 머리를 권총으로 쏴 자살했다. 친구의 죽음은 그에게 너무도 큰 충격이었고, 그 충격은 그림에 반영되었다.

그 해, 그러니까 1901년부터 4년 간 피카소는 청색만을 소유했다. 청색은 하늘의 색이다. 그러나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의 색이 아니다. 그것은 절망의 색이다.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카사게마스가 무심코, 아주 무심코 올려다보았을 하늘의 색이다. 청색은 단순히 그의 캔버스에 칠해지는 색이 아니다. 청색은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었다. 그 시절, 그는 옷까지도 청색을 입었다. 피카소는 청색은 모든 색을 다 담고 있는 색깔이라고 말하곤 했다. 피카소는 그 색으로 늙은 뚜쟁이, 알콜 중독자, 누더기를 걸친 걸인, 장님, 그리고 죽은 친구 카사게마스를 그렸다. 그들은 모두 지독히도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이 시기를 ‘피카소의 청색시대’라 부른다.


이른바 '피카소의 청색시대'라 일컫는 시절인 1902년도
작품

1904년 피카소는 몽마르트 세탁선에 정착했다. 거기서 그는 페르낭드 올리비에라는 여자를 만났다. 그 해 여름 피카소는 소나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고양이를 발견하고 아틀리에로 데려 왔다. 막 아틀리에로 들어가려 할 때 그는 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다. 피카소는 길을 막고 웃으면서 그 여인에게 고양이를 선물로 주었다. 두 사람은 곧 친해졌고 얼마 후 페르낭드는 그의 아틀리에서 살게 되었다. 그 후로 피카소의 그림에서 더 이상 청색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색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을 버린 것이다. 그는 행복했다. 하루하루 끼니와 땔감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그 둘은 행복했다. 페르낭드의 쾌활함 덕분에 그의 화폭은 점점 밝아져 갔다. 피카소의 그림은 이제 장밋빛 그림이 된다. 이 무렵 그의 그림에는 곡예사들이 자주 등장했다.

1907년 피카소는 파리 트로카데로에 있는 인류사 박물관에서 아프리카인들의 조각품과 가면들을 보았다. 그는 그 원시 예술품들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마술적인 분위기, 강력한 상징성, 원시적인 감각, 공포감, 그 감동을 껴안고 그는 아틀리에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해 늦여름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완성했다. 큐비즘의 탐구는 그 후 브라크와의 교류로 더욱 확장되며, 그 기법은 20년대까지 단속적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그가 그린 큐비즘 최고의 걸작인 <가면을 쓴 악사 세 명> 두 점은 1921년에 그려졌다. 1937년 에스파냐 정부가 피카소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파리 만국 박람회 에스파냐관에 걸릴 그림이었다. 그 해 5월 1일 <스 스와르>지가 에스파냐 내전 중 일어난 학살 사진 석 장을 게재했다. 4월 26일, 프랑코의 명령을 받은 독일 폭격기들이 게르니카라는 작은 마을을 무참히 공격한 장면을 담은 사진이다. 폭격은 네 시간이나 계속되었고, 그 폭격으로 1654명이 사망하고 889명이 다쳤다. 모든 전쟁이 그러하듯, 피해자의 대부분은 노인, 여자, 어린아이들이었다.


흑백을 사용하여 전쟁의 참혹상을 그린 <게르니카>


이 사진을 보고 스케치를 시작한 피카소는6월 4일, <게르니카>라는 대작을 완성했다. 죽은 아이들과 불길에 휩싸인 집, 깨진 동물의 머리 등을 그려 전쟁의 참혹상을 고발했다. 그런데 그는 이 그림에서 유독 붉은색을 쓰지 않았다. 참혹함을 강조하기 위해 오히려 검정, 흰색, 회색만을 썼다. 흑백의 대조만이 강조되는 거대한 화폭에는 폭탄도 전투기도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피카소의 그림은 전쟁의 참혹상을 처절하게 보여주었고 지도상에서 사라진 마을 게르니카를 사람들에게 증언해 주었다.

1940년 여름, 파리가 독일에 함락되었다. 모든 전시회가 금지되었다. 그런데도 피카소는 그림을 그렸다. 나치 치하의 암울함을 잊기 위해 그는 그림만을 그렸다. 많은 예술가가 변절을 하거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떠나도 그는 파리에 틀어박혀 그림만을 그린 것이다. 이 시기에 피카소는 주로 정물을 그렸다. 어느 날 한 나치 장교가 그를 찾아왔다. 장교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게르니카> 사진을 보고 물었다. “이것을 당신이 그렸소?” 그는 대답했다. “아니요, 그걸 그리게 한 사람은 바로 당신들이오.”

1944년 파리가 해방 된 후, 피카소는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정치적인 그림들을 그렸다. 한동안 그의 주제는 ‘전쟁과 평화’였다. 1951년에는 <한국에서의 대학살>을, 1954년에는 <전쟁과 평화>를 그렸다. 그가 <한국에서의 대학살>을 그렸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이유였다. 1953년 한 잡지의 표지화로 스탈린의 초상을 그리면서 그는 다시 공산당과 충돌했다. 표지에 실린 스탈린의 얼굴이 너무도 젊었던 것이다. 공산당원들의 비난 중 하나는 이러했다. “오늘 스탈린의 가혹한 죽음이 찾아온 것에 이어 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피카소는 혼란과 몰이해의 씨를 뿌릴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 피카소는 이제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역사를 포기했다. 가장 강한 것은 그림이다. 그는 어느 노트의 마지막 장에 이렇게 썼다. “그림은 나보다 강하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게 만든다.” 그는 대가들을 상대로 버거운 대결을 시도했다. 대가들의 그림이 심하게 변형되어 그의 화폭 안으로 들어왔다. 1957년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그의 화폭에서 변형되었다. 그리고 1960-61년에는 세잔의 <풀밭 위의 점심>이 그의 화폭에서 변형되었다.

80대로 접어들어서도 그림과 도예 작업을 계속했다. 특히 이 시기는 판화의 시기였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실험을 계속했다. 피카소는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판화의 역사가 쌓아온 기존의 규칙들을 무시했다.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던 피카소는 1973년 4월 8일. 프랑스 남부 무쟁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아흔두 해 삶 동안 많은 친구와 여인이 있었다. 그들은 그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카사게마스의 자살은 그의 그림을 청색으로 가득 차게 했고, 페르낭드는 그 청색을 화폭에서 몰아냈다. 러시아의 발레리나 올가는 그의 그림에 한동안 질서와 안정을 부여했다. 도라 마르는 <게르니카>에서 눈물을 흘리는 여인으로 나타났고, 프랑수아 질로는 빛이 가득한 앙티프 시절을 지배한 여인이다. 그의 임종을 지켜 본 부인 자크린은 화가와 모델 연작의 중심을 차지한 인물이다.


칠순을 훌쩍 넘긴 1955년경 영화배우 게리쿠퍼와 함께 익살스러운 선글라스를 끼고(왼쪽),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작품 활동에 여념이 없었던 피카소(1973년2월15일).


1989년 <라팽 아질에서>가 4070만 달러에 팔렸다.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은 한 때 자신의 캔버스를 땔감 삼아 추위를 녹여야 했다.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단 한 점도 사지 않았던 프랑스의 미술관들은 이제 이렇게 말한다. “피카소의 국적은 에스파냐이지만, 그를 키운 토양은 분명 프랑스이다.”

피카소가 없었다면 큐비즘이 있었을까? 에디슨이 없었더라도 전구는 발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큐비즘은 그렇지 않다. 20세기 미술 최대의 혁명, 큐비즘은 피카소의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큐비즘도 없었을 것이고, 현대 미술은 많은 부분이 현재와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피카소 이후 화가들은 남의 마음에 드는 그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릴 권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한 번도 어린아이처럼 서투른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던 그 사내 덕분에.....

피카소를 이해하기 위한 여행의 출발점으로는 <마르지 않는 창작의 샘 피카소>(염명순 지음, 아이세움)가 적당할 것이다. 피카소의 예술 세계와 생애를 훌륭한 화보와 함께 요령 있고 평이하게 정리한 이 책은 비록 어린이용으로 기획된 책이기는 하지만 성인 독자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피카소는 세 여인 사이에서 네 아이를 두었다. 그 중 첫째 아들의 딸인 마리나가 쓴 <나의 할아버지 피카소>(마리나 피카소 지음, 효형출판)를 보면 피카소의 내밀한 가족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마르지 않는 창작의 샘 피카소 나의 할아버지 피카소 세기의 우정과 경쟁 - 마티스와 피카소

1905년 피카소는 앙리 마티스를 처음 만났다. 그 둘은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평생 친구이자 경쟁자로 지냈던 이 둘 사이의 애증 관계에 얽힌 이야기는 <세기의 우정과 경쟁 - 마티스와 피카소>(잭 플램 지음, 예경)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미지 getty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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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현대 미술은 현대철학과 관련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철학과 미술을 연결할 수 있는 좋은 책 있으면 추천해주세요. 님이 질문하신...

현대미술 긍정적 반응

... 감동을 제공하는 긍정적인 미술입니다.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현대미술을 감상하고, 현대미술에 대해 더 많이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