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절 나오는 책 이름좀 알려주세요

이 구절 나오는 책 이름좀 알려주세요

작성일 2008.03.30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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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보다는 평화가 얼마나 더 거룩한가

-나도 따라 울었다.이별은 슬픈 것이니까.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그러나 졸업식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그래, 실컷 젊을을 낭비하려무나.넘칠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낭바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건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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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현대문학 200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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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주신 구절을 모두 검색해 본 결과 공통적으로 박완서 소설가 님의 < 그 남자네 집 > 본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남자네 집 _박완서


1

아파트에 살던 후배가 땅집으로 이사 간다고 하길래 덮어놓고 잘했다고 말해주긴 했지만 정작 어디다 집을 샀는지 동네 이름은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무심한 것도 일종의 버릇인가 보다. 내 노쇠 현상의 특징은 이름이나 숫자에 대한 현저한 기억력 감퇴라는 걸 깨닫게 되면서부터 그런 것들은 아예 건성으로 들어 버릇한 게 굳어진 듯싶다. 그 대신 어떻게 생긴 집이며 마당은 있는지 방은 몇 개고 전망은 어떤지에 대해서는 꽤 꼬치꼬치 알고 싶어했다. 사실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는데.

나도 수년 전 오랜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단독으로 이사를 했다. 땅집에 누운 첫날밤 도대체 뭘 찾아 먹으려고 여기까지 왔나, 내가 저지른 일이 하도 한심하고 딱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름다운 전망, 상쾌한 공기, 조용한 환경, 적당한 고독 그런 것들은 오랫동안 내가 꿈꾸던 것이 아니던가. 그 밖에 뭘 더 바랐을까. 온갖 편리한 기능이 구비되고 투자 가치까지 보장된 아파트에 살면서 줄창 이게 아닌데 싶었다면 이게 아닌 저것은 뭐였을까. 나만의 비밀스럽고 고유한 추억이 점점 안 중요해지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리는 텅 빈 느낌이 아파트 탓이 아니듯이 땅집은 그런 것을 저절로 품고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단독 주택일수록 아파트의 구조와 기능을 그대로 본떠 불편한 점이 조금도 없을 것 같지만 건물을 관리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집주인에게 달렸다. 수도꼭지 하나 갈아 낄 능력이 없는 위인이라는 사실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실은 이사 온 첫날밤의 불안 중 그게 가장 공포스러웠다. 마침 봄이었다. 다음날 아침 마당에 내려서자 예서 제서 흙을 뚫고 솟아오르는 여리고 예쁜 싹들이 보였고, 그것들이 이 세상 빛을 보길 참 잘했다고 저희끼리 좋아라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면서 내 안에서도 땅집에 이사 오길 잘했다는 화답이 샘솟는 느낌이 왔다. 예기치 않은 기쁨이요 위안이었다. 후배는 나보다 이십 년은 아래다. 실리와 편리를 둘 다 희생하고 얻은 게 기껏 분꽃이나 채송화 나부랭이라 해도 하나도 손해본 것 같지 않은 나이가 되려면 아직아직 멀었다. 그런 조심스러운 의구심 때문에 도대체 당신은 뭘 찾아 먹으러 그 좋은 아파트 놔두고 땅집에 가려는 거야? 라는 난폭한 질문을 예비해놓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건 말건 후배는 예정대로 이사를 했고 낯선 동네의 새로운 풍경을 얘기해주었다. 주로 점잖은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오래된 주택가라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을 줄 알았는데 대학이 가까워 그런지 온종일 창밖만 내다보고 있어도 그 활기 때문에 심심한 줄 모른다고 했다. 대학 이름을 물었더니 성신여대라고 했다.

성신여대면 돈암동에 있을 텐데? 나는 좀 놀란 소리로 물었다. 맞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 동으로 나누어져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고 후배가 가르쳐준 건 새 이름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쪽 지리에 훤했다. 위치를 자세히 물어보니 성신여대와 성북경찰서 사이였다. 내 처녀 적의 마지막 집도 성신여고와 성북경찰서 사이에 있었다. 나를 시집보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친정집도 딴 동네로 이사를 가버려서 다시는 가볼 기회가 없었다. 기회가 있다고 해도 피했을 것이다. 나는 50년 전 그 동네를 떠났다. 50년은 긴 세월이다. 돈암동은 외진 동네가 아니다. 도심에서 멀지도 않다. 혜화동 고개를 넘어 미아리 길음동 수유리로 통하는 대로를 거치는 일이 50년 동안에 어찌 한두 번만 있었겠는가. 그 길가에 내가 단골로 다니던 동도극장이 없어진 것도 오래전이다. 그게 없어진 걸 안 것은 버스나 전차의 차창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몸을 꼬고 고개가 아프게 뒤돌아보면서 비 내리는 흑백 화면 속의 장 마레와 샤르르 보와이를 안타깝게 배웅했었다. 그럼 후배가 이사 간 건 한옥이란 말인가. 한번 떠난 후 다시는 안 가봤기 때문에 오히려 생생하게 그 동네를 떠올릴 수가 있었다. 얌전하게 쪽 찐 노부인처럼 적당히 품위 있고 적당히 퇴락한 조선 기와집 동네를. 후배는 아니라고, 반 지하와 이층은 세를 놓을 수 있게 지은 최신식 이층집이라고 했다. 그 동네도 한옥은 얼마 남아 있지도 않거니와 남아 있는 한옥도 조선 기와지붕만 겨우 남겨놓고 카페나 패스트푸드점, 의상실 등으로 구조 변경을 한 집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대학이 들어섰으니까 주택가가 대학촌으로 변한 건 당연지사라 하겠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게 그 자리에 그냥 있었던 적이 어디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서운하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후배가 집 구경 오라고 날을 잡아주었다. 집수리와 마당 꾸미는 일 때문에 후배는 나에게 자주 전화 할 일이 생겼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가 묻는 말보다는 그 동네에 대해 이것저것 호기심을 나타내 보인 것을 어서 집들이 하라고 조르는 줄로 알아듣고 부담스럽게 여겼나 보다. 초대한 손님은 나 혼자였고 아직 수리가 깔끔하게 끝난 상태가 아니니 점심은 집 근처에서 사먹고 집에서는 차나 마시자고 했기 때문이다. 그가 성신여대 역까지 마중을 나와주었다. 어디쯤이라고 말만 해주면 찾아갈 수 있다고 말해도 듣지 않고 나와준 건 고마운 일이었다. 그를 따라간 동네는 내 머릿속에 입력된 그 옛날의 돈암동이 아니었다. 가볍고 세련되고 없는 것 없고 활기가 넘치는 전형적인 대학촌이 거기 펼쳐져 있었다. 그 대학의 길지 않은 역사에 비해 활기가 부글부글 넘치지 않고 오히려 자제하려는 품격 같은 게 느껴지는 건, 아주 드물게 눈에 띄는 거긴 하지만 모던하게 꾸민 쇼윈도 위로 고즈넉하게 내려앉은 조선 지붕 때문인 듯도 싶었다. 내 기억은 조선 기와지붕 그거라도 확실하게 거머쥐려고 허둥대고 있었다. 후배가 미리 답사까지 해보고 정했다는 음식점은 해물탕집이었다. 그의 선택은 탁월했다. 기본적인 몇 가지 해물에다 각종 야채와 양념을 기호에 따라 집어넣어가면서 손수 끓여 먹을 수 있는 잡탕은 시원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었다. 값도 적당했다. 값싸고 맛있고 풍성하기까지 하니 최고의 식사였다. 통유리로 된 창가 자리여서 노천 카페 같은 기분이 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요샌 뭐든지,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돈 버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여봐란 듯이 하는 세상이니까. 저만치 산 밑으로 성신여대의 높은 축대가 보였다. 내가 살던 돈암동집 골목을 나오면 꼭 그만한 각도로 그만큼 떨어져서 성신여고를 바라볼 수 있었는데. 그럼 내가 나의 옛 집터에서 점심을 먹었나. 기분이 이상해지려고 했다. 내가 그런 얘기를 했더니 후배는 그럼 자기 집으로 가기 전에 우선 내가 살던 집부터 찾아보자고 했다. 안감내만 찾으면 그 집을 쉽게 찾을 줄 알았다. 성북동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삼선교 돈암교를 거쳐 우리 동네 앞을 흐르던 개천을 우리는 그때 '안감내〔安甘川〕'라고 불렀다. 안감내는 수량이 풍부하고 맑아서 동네 사람들은 큰 빨래만 생기면 그리로 들고 나갔다. 개천과 나란히 난 천변 길은 인도와 차도가 따로 있을 정도로 너른 한길이고 개천 쪽으로는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어 차가 많지 않은 당시에는 다른 동네 사람들까지 일부러 산책을 올 정도로 한적하고 낭만적인 길이었다. 내 머릿속 지도의 한가운데를 대동맥처럼 관통하던 안감내는 찾아지지 않았다. 그게 안 보이는데 무슨 수로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한단 말인가. 안감내가 복개됐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복개됐더라도 개천과 천변 길을 합치면 8차선 넓이의 대로로 남아 있어야 했다. 80년대 초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가서 센 강을 보고 애걔걔 그 유명한 센 강이 겨우 안감내만 하네, 라고 생각할 정도로 내 기억 속의 안감내는 개천치고는 넓은 시냇물이었다. 집만 나서면 개천 건너로 곧바로 성북경찰서의 음흉한 뒷모습과 거기 속한 너른 마당이 바라다보였다. 그만한 거리감 없이 우리 식구가 거기서 허구한 날 그 건물을 바라보며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동네에 그렇게 넓은 이면 도로는 없었다. 복개된 개천 자리 다음으로 표적이 될 만한 건 성북경찰서였다. 그건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찾은 게 아니라 우리가 맴돌던 지점에서 후배가 조오기라고 손가락질해 보여주었다. 그제서야 내가 천주교회와 신선탕 중간 지점에 서 있다는 걸 알았다. 나의 옛집은 바로 신선탕 뒷골목에 있었고 그 남자네 집은 천주교당 뒤쪽에 있었다. 천주교당도 신선탕도 천변 길에 있었다. 교회는 증축을 했는지 개축을 했는지 그 자리에 있으되 외양은 많이 바뀌고 커져 있었지만 목욕탕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이고 이름까지 그대로였다. 세상에 오십 년 전 그 목욕탕이 그대로 남아 있다니, 오십 년이면 목욕탕이 온천이나 사우나나 찜질방으로 변하고도 남을 시간이 아닌가. 나는 그놈의 목욕탕 때문에 그 넓지 않은 이면 도로가 안감내를 복개한 길이라는 걸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 머릿속 지도의 거리는 실재하는 거리가 아니라 다만 확보하고 싶은 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신선탕 뒷골목의 옛 조선 기와집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일대가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서 정확한 집터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후배네 집에 가서 집 구경도 하고 차도 마셨다. 넓지는 않지만 마당도 있었다. 전 주인이 가꾸지 않아 공터처럼 버려져 있어 후배는 아마 거기 반했을 것이다. 지대가 높은 편이어서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 남자네 집은 어디쯤일까. 후배는 내년 봄 마당에다 이것저것 나무들을 심을 계획으로 들떠 있었다. 소나무 후박나무 왕벚꽃 영산홍에서 체리나무 앵두나무 대추나무 등 유실수로 옮겨가다가 작약 모란 창포등 숙근초까지 손바닥만 한 마당을 놓고 한없이 가지 수를 늘려가는 후배를 바라보면서 나는 딴생각을 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자꾸만 그 남자네 집은 남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였다.



2

그 남자네가 안감 천변으로 이사온 것은 우리가 그리로 이사한 지 한 달도 안 되서였을 것이다. 어머니가 철물전에 가는데 따라가서 바케스 쓰레받기 부삽 쥐덫 따위 너절한 것들을 들고 오다가 그 남자네가 이삿짐을 부리는 걸 만났으니까. 이사 오는 집 안주인이 우리 어머니를 보고 반색을 했다. 어머니는 달갑지 않은 얼굴로 마지못해 인사를 받았다. 그 집 안주인은 어머니보다 열 살은 더 들어 보이는 허리가 많이 굽은 노부인이었다. 먼 친척인 듯했다. 설사 촌수로 따져서 항렬이 어머니가 위라고 해도 손윗분인 건 분명한데 그렇게 데면데면하게 대하는 건 어머니답지 않았다. 옆에서 민망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조금씩조금씩 집을 늘려가던 재미로 살던 어머니가 이번에는 당신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가세가 기울어 집을 왕창 줄여 먹게 된 것이다. 전에 살던 동네보다 집 값이 훨씬 싼 동네에다 며느리에 손자까지 본 삼대가 살기에는 턱없이 작은, 어머니 말을 빌리자면 코딱지만 한 집으로 이사를 했으니 어머니가 남부끄러워하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집 안에서는 어머니의 기세가 그 어느 때보다도 등등할 때였다. 대식구가 셋방살이로 나앉지 않고 오막살이나마 집을 지니게 된 것은 어머니 공이 컸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달가워하건 말건 노마님은 희색이 만면해서 우리더러 집 구경하고 가라고 부득부득 안으로 이끌었다. 이사하는 그 북새통에 스스러운 사람한테 집 구경을 시키고 싶어하다니, 사람이 너무 좋아 보이기도 하고 조금은 주책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장정들 여럿이 짐을 안으로 나르고 있었다. 그 중엔 일꾼도 있고 아들도 있고 사위도 있었다. 이삿짐은 그 집의 살림 규모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게 돼 있다. 어머니는 품위 있고 화려한 화류 장롱, 고풍스러운 문갑, 길이 잘 든 사방탁자 등을 보고 기가 꺾였겠지만 나는 대강 묶기만 한 책들이 몇천 권은 될 것 같은 데 질리고 말았다. 노마님의 강권에 못 이겨 기웃거려본 집도 그 동네의 고만고만한 기와집들하고는 규모가 달랐다. 집 앞은 트럭이 몇 대 서 있는데도 차나 사람들의 통행에 불편을 안 줄 정도의 대로인데도 그 집은 대로에서 들어간 골목 안에 있었다. 막다른 골목이라고 볼 수 있었으나 골목이 넓고 골목을 같이 쓰는 이웃 없이 그 집 혼자 쓰는 전용 공간이어서 바깥마당처럼 보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한길에서 그 집을 들여다보면 대문이 보이지 않고 고궁에서나 볼 수 있는 홍예문이 보였다. 홍예문은 사랑마당으로 통하는 문이었고 안채로 통하는 대문은 홍예문이 달린 담장과 기역자로 꺾인 곳에 달려 있었다. 난 왠지 문지방이 돌로 된 위압적인 솟을대문보다는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홍예문에 더 압도당하고 있었다. 추녀를 나란히한 고만고만한 조선 기와집하고는 격이 달라 보였다. 마침 짐을 나르던 청년이 우리 곁에서 머뭇대며 아는 척을 하고 싶어하는 눈치를 보이자 노마님이 우리 막내라고 인사를 시켰다. 서글서글한 미남이었다. 막내를 보는 노마님 얼굴은 흐뭇한 미소로 주름이 가득해졌다. 손자라야 알맞을 것 같은 나이 차이 때문에 노마님이 좀더 주책스러워 보였다. 청년은 평상복에 교모를 쓰고 있어서 나는 냉큼 그가 어느 학교 다닌다는 것부터 알아보았다. 내가 다니는 여고하고 같은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였다. 당시 광화문을 중심으로 신문로 안국동 계동 수송동 일대에는 열 개도 넘는 남녀 중 고등학교가 몰려 있었으니까 그 정도를 무슨 기이한 인연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가 다니는 학교가 우리 학교 애들이 별로로 치는 중간급 정도의 학교라는 것 때문에 열등감을 다소나마 만회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런 일은 그후에도 또 생겼다. 그날은 안팎이 하도 어수선해서 중문간에서 안채를 기웃대다 나오고 말았지만 노마님이 하도 친절하게 집 구경을 시켜주고 싶어하던 게 어머니 마음에 걸려 있었나 보다. 노마님은 어머니보다 예닐곱 살 가량 손위지만 외가 쪽으로 조카뻘 되는 먼 친척이니까 남남처럼 지내도 그만인데 하도 친한 척하니 암만해도 한번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더니 성냥을 한 통 사가지고 다녀온 듯했다. 그 집에 맏이가 중앙청의 고관이고 며느리도 예의범절이 깍듯하더라면서 부러운 듯 심난한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토를 다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면 뭐 하냐? 시집갈 때도 친정 형편이 처지는 데다가 인물도 신랑이 훨씬 잘나고 공부도 많이 했으니 잘 살아낼지 모른다고도 어른들이 걱정해쌓더니만 여태까지도 영감 시집살이가 수월치 않은가 보더라."

"그 노인네가 엄마한테 그런 얘기까지 해요?"

"꼭 얘기를 해야만 아냐? 며느리를 그만큼 음전하게 들이고도 진일을 못 면하는 눈치더라. 남한테 잘 하는 것도 영감님하고 시집 식구들한테 기죽을 못 펴 버릇한 게 아주 굳어버린 게지 뭐. 원 부잣집 마나님이 왜 그러고 사는지, 몽당치마에다 손은 갈퀴 같고."

내 주장이 강한 어머니다운 자기 위안의 방법이었다. 결정적으로 어머니에게 우월감을 안겨드린 것은 나였다. 대학 신입생이 되고 나서 어머니하고 구두를 맞추러 나가다가 그 노부인을 만났다. 어머니는 우리 딸이 서울대학에 들어가서 지금 구두 사주러 나가는 길이라고 자랑을 했다. 그냥 대학에 들어갔다고만 해도 될 텐데 명토까지 박은 것은 서울대학 이상 가는 대학은 없으니까 하는 어머니의 자만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마님의 막내도 대학에 붙었다고 했다. 좋은 대학이었지만 서울대학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으스대는 걸 보고 나는 생전 처음 효도한 것 같은 우쭐하면서도 계면쩍은 기분을 맛보았다.

등교 시간만 되면 원남동에서 안국동까지의 한적하고 아름다운 길은 제복의 남녀 학생으로 넘쳐났다. 만약 그 밀도가 조금이라도 성기어지는 기미가 보인다면 그건 지각할지도 모른다는 신호니까 그때부터라도 뛰는 게 수였다. 우리 학교는 교장 선생님까지 교문에 지키고 있다가 지각생에게 모욕을 주는 것으로 유명한 학교였다. 홍예문 집 막내가 다니는 학교 아이들한테는 특별히 더 신경을 쓴 관계로 등교길에 몇 번 눈길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 애도 나를 알아보았는지 미처 확인할 새도 없이 황급하게 눈길을 피하긴 했지만. 그건 내가 특별히 얌전하거나 내숭스러워서가 아니라 당시의 금기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둘이 똑같이 대학생이 된 걸 알고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젠 마주쳐도 그럴 필요가 없다는 설레는 자유에의 예감이었다. 흰 교복 깃을 안으로 구겨 넣지 않고도 극장에 드나들 수 있다는 사소한 자유만 상상해도 가슴이 터질 듯한 초년생이었으니 그까짓 게 특별한 감정일 리는 없었다.



3

후배네 집은 아직 수리가 덜 끝난 상태였다. 뒤 베란다에 알루미늄 새시를 달고 간 뒤에 곧 흙차가 마당에 객토를 하러 왔다. 어수선한 김에 그만 일어서려고 했더니 후배가 부득부득 따라나오면서 지하철 정류장까지 배웅을 해주겠다고 했다. 아까 옛집을 찾는답시고 얼마나 길눈이 어둡게 보였던지 지하철 정류장도 못 찾아나갈 대책 없는 위인 취급을 했다. 나는 가다가 둘러볼 데가 있다면서 완곡하게 거절한다는 게 그 남자네 집 얘기를 비치고 말았다. 김 아무개도 이 아무개도 아닌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었던 일은 감추거나 줄여서 말하려고 하면 할수록 상대방의 호기심을 자극하게 돼 있는 것을. 후배는 연애소설에 맛을 들이기 시작한 소녀 같은 얼굴로 내 길잡이가 돼주었다. 나의 옛 집터를 알아놓았으니까 거기서 다시 출발하면 그 남자네 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남자네 집은 천주교당 뒤쪽, 성북경찰서 옆 양회 다리로 통하는 큰 길가에 있었다. 그 집은 한길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긴 해도 대로변에 바깥마당을 끼고 있는 집이었다. 그렇게 대지 넓은 집이 날로 번창하는 대학촌에 아직까지 가정집으로 남아 있길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가정집은 후배가 이사 간 이 층이나 삼 층짜리 양옥집 정도지 조선 기와집은 아니었다. 내 예상을 뒤엎고, 이 시대의 도도한 흐름에서 홀로 초연히 그 남자네 집은 그냥 조선 기와집으로 남아 있었다. 대문이 한길로 면한 그 길가의 다른 집들이 다 사오 층 높이의 빌딩으로 변해버려서 그런지, 한 걸음 물러나 있음으로 더욱 당당해 보이던 집이 푹 꺼져 보였다. 한길을 향해 개방돼 있던 바깥마당에다 철문을 해 달은 게 옛날과 달라진 유일한 변화였다. 철문은 완강하게 닫혀 있었다. 철문 때문에 그 안의 조선 기와집은 좌우의 빌딩들과 나란히 있는 것 같으면서도 접근을 거부하는 은둔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철문은 가슴 높이부터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살로 돼 있는데도 그 안에 나무를 빽빽하게 심어놓아 홍예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은 남겨놓고 나무를 심어도 심었으련만 가지가 하도 무성하게 뻗어 안을 엿볼 수 있는 시각적인 통로조차 없었다. 문득 집에도 영(靈) 같은 게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얼음 조각처럼 가슴을 섬뜩하게 했다. 홍예문 집은 사랑마당은 물론 안마당에도 유난히 나무와 화초가 많았다. 그 집 뒤꼍에는 겨울을 밖에서 날 수 없는 유도화 석류 파초 등을 갈무리할 수 있는 움까지 있었다. 5월에 사랑마당에 활짝 핀 라일락이 담장을 넘어오면 길 가던 사람들이 다들 홍예문 위를 쳐다보고 코를 벌름거리면서 걸음을 멈추거나 늦추었다. 옷이나 몸에 그 향기가 배기를 바라는 듯이. 나는 철문 기둥을 받치고 있는 초석에 올라서서 키를 돋우고 안을 기웃거렸지만 반듯한 조선 기와지붕을 확인한 것밖에는 아무것도 더 알아낼 수 없었다. 조선 기와지붕은 손이 많이 간다. 더군다나 요즈음에는 제대로 된 기와장이 구하기도 어렵다. 예전에도 기와장이 품삯은 미장이의 세 곱절은 됐다. 기술은 안 이어받고 품삯에 대한 풍문이나 믿는 얼치기나 걸리기 십상이다. 도심에서 빌딩 숲 사이에 어쩌다 남아 있는 조선 기와지붕의 그 참담한 퇴락상을 보면 전통 가옥 보존 어쩌구 하는 소리가 얼마나 무책임한 개소리인지 알 것이다. 그 남자네 집은 거의 해마다 손을 봐준 것처럼 기왓골의 선이 가지런하고 윤기가 흘렀다. 돈과 정성이 꽤 드는 까다로운 치다꺼리를 마다 않는 주인이라면 팔리지 않아서 억지로 사는 게 아니라 조선 기와집을 사랑하는 유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 남자네 집이 주인을 잘 만났다는 게 기쁘다 못해 감동스러웠다. 그 남자네가 그 집을 떠난 건 내가 시집간 지 얼마 안 돼서이니 문서상의 소유권이 바뀌어도 열 번도 더 바뀌었을 세월이 흘렀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바깥마당에 너무 빽빽하게 나무를 심어 홍예문을 들여다볼 수 없는 건 암만해도 섭섭했다. 나무는 사철나무처럼 잎이 두껍고 윤이 나는 관목이었지만 사철나무보다는 키가 컸다. 무슨 나무일까 내가 궁금해하자 후배가 보리수라고 했다. 그는 나무 이름에 해박했다. 나무만이 아니라 작은 풀꽃도 이름 모를 꽃으로 대강 보아 넘기지 못하고 꼭 그 이름을 알아내고야 마는 노력에는 집요한 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보리수라면 보리수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보리수하고는 얼토당토않았다. 나는 딱 한 번 보리수를 본 적이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적 힌두교 문화권의 더운 나라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어느 외딴 마을에서 관광버스를 멈추고 잠시 휴식을 취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십여 명의 일행이 약속이나 한 듯이 강렬한 햇볕으로부터 몸을 피해 한곳으로 모인 데도 보리수나무 그늘이었다. 30미터도 더 되는 거대한 나무는 줄기가 울퉁불퉁 꼬이긴 했어도 잔가지 없이 곧장 자라 아득한 높이에서 풍성한 녹음을 우산처럼 펼쳐주고 있었다. 가이드가 보리수라고 그 나무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부처님이 그 아래서 정각을 얻고 성불했다는 보리수하고 동일한 보리수일 리는 없었지만 왜 하필 보리수나무였을까가 충분히 이해될 만큼 그 나무는 자비롭고도 권위가 있어 보였다. 그런 것이 신성이라는 거 아닐까. 그때의 인상이 하도 강렬해서 국내에 보리수나무가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나라는 그런 거목을 키울 기후가 아니다. 그렇다면 뮐러가 노래한 린덴바움? 그렇지만 그 집 바깥마당에서 홍예문을 가로막고 우거져 있는 나무들은 그 그늘 아래서 단꿈을 꾸기에는 너무 옹졸하지 않은가. 그 나무는 내가 품고 있는 보리수나무에 대한 두 개의 상이한 이미지 중 어떤 것하고도 닮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가 툭 던진 보리수라는 이름을 나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집에도 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얼음 조각이 아니라 불씨가 아니었을까.

집에 와서 수목 도감을 찾아보았다. 자연 상태에서 자랄 수 있는 국내의 수목을 총망라한 도감이었는데 보리수도 나와 있었다. 사진을 봐도 그렇고 간단한 설명을 봐도 그렇고 그 나무들이 보리수라고도 아니라고도 못 하게 불충분했다. 그래도 가을이면 지름이 6~8밀리미터 정도의 구형 열매가 붉은색으로 변한다는 설명은 확실하게 머릿속에 챙겨 넣었다. 세종로의 은행나무들이 자기 안에 깊숙이 숨어 있던 노랑 중 최고로 순수한 금빛을 환장을 한 것처럼 한꺼번에 분출하던 날 5호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다 말고 동대문운동장에서 4호선으로 갈아탔다. 교보문고에서 산 책 보따리가 제법 무거웠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성신여대 정거장에서 내렸다. 나는 결코 길눈 같은 건 어둡지 않았다. 곧장 그 남자네 집으로 갔다. 혼자여서 아무것도 은폐할 필요가 없었다. 여전히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수목도감에는 낙엽관목으로 나와 있었으나 그 두텁고 푸른 잎들은 약간 윤기가 퇴색했을 뿐 아직도 심술궂게 나하고 홍예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이파리 사이로 삐죽삐죽한 잔 가장귀엔 서너 개씩 빨간 열매가 달려 있었다. 아마 여름엔 이파리하고 같은 색이어서 눈에 안 띄었나 보다. 이 나무들은 얼마나 있어야 그 밑에서 단꿈을 꿀 만큼 자랄까. 한 50년쯤. 나는 보리수나무가 세월을 거꾸로 먹어 50년 전엔 그 무성한 그늘에서 관옥같이 아름다운 청년이 단꿈을 꾼 것 같은 착란에 빠졌다.



4

그 남자를 다시 만난 것은 우리집에 아녀자만 남고 나서였다. 나는 아이들과 여자를 동격시하는 아녀자란 말이 싫었지만 차차 동의하게 되었다. 전쟁이 휩쓸고 간 후 집안 꼴이 그렇게 되었다. 남자들은 성북경찰서를 거쳐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전쟁이 난 지 일 년이 넘었는데도 전선은 서울 북쪽 몇십 리 안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고 피난 못 간 서울 사람들은 가난뱅이들뿐이었다. 다들 가난할 때여서 진짜배기 가난뱅이는 오히려 귀했다. 생업에 종사하는 것은 여자들이었다. 우리집만 아니라 이 도시에 남은 것은 아녀자뿐인 것 같았다. 뚝섬서 열무를 떼다가 팔면 반찬 값은 떨어진다고 해서 올케하고 같이 새벽장사에 따라 나선 적이 있다. 안감내를 남쪽으로 남쪽으로 한없이 따라가면 개천이 어디론가 숨었다가 또 나타나곤 하면서 살곶이 다리와 살곶이 벌판이 나온다. 밭 주인은 돈 낸 것만큼 네모 반듯하게 열무 밭을 떼어주면서 캐가도록 했다. 거기까지는 남들 하는 대로 하다가 그 다음부터는 남들 하는 대로 할 수가 없었다. 남들은 더 달라고 아우성인데 우리는 덜 줄 수 없냐고 뒷걸음질을 쳤다. 떼어주는 열무의 양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고 오던 열무를 수없이 땅바닥에 태질하면서 어찌어찌 집에 당도한 건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남들은 열무 장사한 이문으로 쌀 사고 반찬 사다가 저녁밥을 지을 시간이었다. 팔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수없이 태질을 당한 열무는 이미 상품 가치를 상실하고 있었다. 나는 그후 미군 부대에 취직을 했다. 그전부터 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이웃 아줌마가 우리 처지를 딱하게 여겨 소개해주겠다는 걸 어머니가 굶어 죽어도 그 노릇만은 못 시킨다고 펄쩍 뛰어 못 하던 취직 자리였다. 아줌마는 나 같은 대학생은 청소보다 나은 자리도 있을 것처럼 말했는데 그걸 어머니는 양공주 자리가 났다는 것처럼 알아들었나 보다. 열무 장사의 실패는 어머니에게도 충격이었던지 혹은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는지 어머니는 못 이기는 척 설득을 당했고 그후 나는 미군 부대의 꽤 편한 자리에 취직이 되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됐는데도 가난은 날로 남루해졌다. 딸이 미군 부대에서 벌어오는 돈으로 먹고 사는 걸 식구들이 치욕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퇴근하는 전차 안에서 그 남자를 만났다. 남자가 먼저 반색을 했다. 그는 다짜고짜 나를 누나라고 불렀다. 누나라는 말은 묘했다. 마음을 놓이게도 섭섭하게도 했다. 늦은 시간의 전차 안은 텅 비어 있었지만 그 안에서는 서로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는 것 이상의 감정 표현을 하지 못했다. 종점에서 내려서 불빛이 희미한 빵 가게로 들어갔다. 주인이 손수 만든 도넛이나 찐빵 같은 걸 파는 궁기가 더덕더덕한 가게였다. 시척지근한 막걸리 냄새가 진동하는 찐빵을 시켜놓고 나는 제일 먼저 나를 누나로 부른 까닭부터 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같은 해에 대학에 들어갔으니까 동갑일 텐데 자기는 일곱 살에 소학교에 들어갔으니 십중팔구 나보다 한 살 아래일 거라고 했다. 그건 맞는 말이고 그럴듯한 계산법이었다. 그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졸병들이 입는 허술한 군복이 아니라 미군 장교나 입을 것 같은 날이 선 사아지 군복 바지에 반짝거리는 구두에다 안에 털이 달린 파카를 입고 있었다. 비록 미군 부대에 다니지만 미군 장교는 좀 그렇고 국군 장교하고 친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속으로 동경해마지 않던 때였다. 전시에 군복이 잘 어울리는 장교는 권력의 상징이자 백마 탄 기사였다. 그러나 장교가 아니라도 좋았다. 신분이 확실한 젊은 남자라는 것만으로도 웬 떡이냐 싶었다. 찐빵에 손도 대기 전에 그는 주인에게 싸달라고 하더니 나가자고 했다. 괜찮은 포장마차를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럼 처음부터 그리로 가자고 하던지, 그의 경박함이 못마땅했지만 아직도 그는 나의 웬 떡이었음으로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삼선교까지 전차 한 정거장 거리를 그를 따라 되돌아갔다. 천변에 불빛이 보였다. 도깨비불처럼 귀기가 돌게 창백한 불빛은 칸델라 불이었다. 카바이드 냄새가 싫지 않았다. 찐빵집보다 더 허술한 천막집이었는데 이상스럽게도 궁기는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남자는 궁기를 가장 참을 수 없어했다. 궁기를 좋아할 사람은 없지만 그는 좀 유별나서 특정 냄새를 못 참는 것처럼 즉각 생리적인 반응을 나타냈다.그날 나는 그 포장마차에서 처음으로 구공탄 불이라는 걸 보았다. 구멍마다 독한 불꽃이 올라오는 연탄 난로 위 무쇠솥에서 오뎅 국물이 끓고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오뎅집 남자가 그를 무심하게 맞았다. 막사기 대접에다 달걀과 덴뿌라와 무 토막과 두부 튀긴 것과 정체 모를 고기의 힘줄 같은 걸 꿴 꼬챙이를 하나씩 넣고 뜨끈한 국물을 부어주었다. 오뎅 국물도 꼬챙이에 낀 것도 심지어는 달걀까지도 진한 간장 빛이었다. 그러나 맛은 슴슴하고 들척지근했다. 주인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고 무심했다.

"이번 난리에 느네 식구 중엔 다친 사람 없냐? 우린 아녀자만 남았는데……"

나는 그가 묻기 전에 냉큼 그 말부터 했다.

"우린 달랑 모자만 남았는데……"

"정말? 그 큰 집에? 그전엔 몇 식구였는데?"

"일곱 식구, 엄마, 아버지, 큰형 내외하고 조카들 둘."

"말도 안 돼. 아이들까지 다 죽었단 말야. 폭격도 안 맞았으면서……"

"아냐 죽긴 왜 죽어. 넘어갔어. 북쪽으로. 큰형이 좌익이었거든."

"중앙청 고관이라고 우리 엄마가 부러워했는데 그런 사람도 좌익이 될 수 있구나."

"고관은 무슨, 우리 형은 자타가 공인하는 수재였으니까 그 정도의 고관은 그쪽에서도 해먹겠지 뭐."

"그럼, 넌 뭐니? 니 정체는 도대체 뭐냐구?"

나는 핍박 받아야 할 월북자 가족과 그의 번드르르한 군복 차림이 도무지 꿰맞춰지지가 않아 신경질적으로 따져 물었다. 빨갱이 가족이 당해야 할 고통과 수모와 감시라면 나도 이가 갈릴 만큼 알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이 세상에 웬 떡이 어디 있을라구. 께적지근한 낙담으로 똥 밟은 얼굴이 되고 말았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꼬챙이에 낀 힘줄같이 생긴 걸 늙은이처럼 느릿느릿 신중하게 씹기 시작했다. 마치 그 안에 숨어 있는 미소한 고기 맛도 안 놓치겠다는 듯이 그의 턱 운동은 철저하고 집중적이었다. 그러나 하나도 게걸스럽지는 않았다. 다 씹어 삼키고 나서 주인에게 한다는 소리가, "아저씨 접때 먹은 힘줄은 그래도 양키 군화 삶은 정도의 누린내는 나던데 이번 건 영 아냐. 꼬랑내만 조금 나는 게 혹시 마루 밑에서 옛날에 신던 아저씨 구두를 주워다 과낸 거 아뉴?"

"아차, 그런다는 게 그만 우리 어머니 고무신을 훔쳐다 삶아 냈는지도 모르겠네."

두 남자가 낄낄거렸다. 화음이 잘 맞는 웃음 소리였다. 나는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들이 주고받는 수작을 지켜보았다. 뜻밖에 요새 읽은 책 얘기를 했다. 둘이서는 서로 책을 빌려보는 사이인 듯했다. 나는 그들이 나를 의식하고 꼴값을 떠는구나, 하고 같잖게 생각했다. 그가 주인 앞으로 돈을 밀어놓으며 일어섰다. 거스름돈을 주려 하자 어머니 고무신 사드리라고 손을 내저었다.

"장한 우리 상이군인 아저씨, 사골 국물이라도 한번 진하게 내드리는 게 국민 된 도린 줄은 알겠는데 당최 그놈의 마루 밑 밑천이 떨어져야 말이지. 번번이 미안하이."

주인이 하나도 안 미안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우리를 배웅했다. 나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에게 따져 물었다.

"아니, 상이군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렇게 사지가 멀쩡해가지고. 너 그 어수룩한 사람한테 사기 친 거지? 그치 도대체 네 정체가 뭐냐, 말해봐 빨리."

그는 느리게 조근조근 말했다. 삼선교에서 안감 천변, 목욕탕, 뒷골목, 우리집까지 오는 동안의 그의 이야기는 끝났다. 딱 고 길이에 분량을 맞춘 것처럼. 그 거리는 얼마 안 됐다. 따라서 그의 이야기도 간결하게 요약된 것이었다.

여름에 인민군이 들어오고도 어떻게 된 게 그의 형은 숙청 대상이 안 되고 계속해서 안정된 신분은 유지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양다리밖에 없으니까 양다리 이상은 걸칠 수가 없다는 건 자명한 이치, 석 달 만에 인민군이 후퇴할 때 그도 따라서 북으로 가버렸다. 처음엔 처자식과 노부모를 남겨놓은 단신 월북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또 한 번 뒤집혀 겨울에 인민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했을 때 형이 가족을 데려가려고 나타났다. 처자식은 두말 없이 따라나섰겠지만 부모는 달랐다. 왜냐하면 인민군이 후퇴하고 서울이 수복된 동안에 막내가 국군으로 징집됐기 때문이다. 막내가 국군이 되었기 때문에 그동안 그 집 식구들이 월북자 가족으로 받아야 할 핍박을 많이 줄여준 건 사실이지만 노부모에게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딜레마였다. 결국 노부부는 헤어지는 쪽을 택했다. 아버지는 큰아들네 식구를 따라 북으로 가고 어머니는 남아서 군인 나간 막내아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 연유로 그 남자가 넓적다리에 부상을 입고 명예 제대하여 집으로 돌아와보니 그 큰 집에 늙은 어머니 혼자 달랑 남아 있었다. 그동안에 파파 할머니가 돼버린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무슨 효도를 보려고 자기를 기다렸느냐고 드립다 구박만 했다. 저 노모만 없었으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그 생각만 하면 숨이 막힐 것 같아서 요새도 맨날맨날 구박만 한다고 했다. 한번 뒤집혔던 세상이 원상으로 복귀해서 미처 숨 돌릴 새 없이 다시 뒤집혔다가 또 한 번 뒤집히는 엎치락뒤치락 틈바구니에서 우리집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고 그 남자네 집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국가라는 큰 몸뚱이가 그런 자반 뒤집기를 하는데 성하게 남아날 수 있는 백성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여 우리는 서로 조금도 동정 같은 거 하지 않았다. 우리가 받은 고통은 김치하고 밥처럼 평균치의 밥상이었으니까. 만약 아무도 죽지도 않고 찢어지지도 않고 온전한 가족이 있다면 우리는 그 얌체 꼴을 참을 수 없어 그 집 외동아들이라도 유괴할 것을 모의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날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창백하게 일렁이던 카바이드 불빛, 불손한 것도 같고 우울한 것도 같은 섬세한 표정, 두툼한 파카를 통해서도 충분히 느껴지는 단단한 몸매, 나는 내 몸에 위험한 바람이 들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피차 동정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닮은 불운을 관통하는 운명의 울림 같은 걸 감지한 건 아니었을까. 나는 마치 길 가다 강풍을 만나 치마가 활짝 부풀어오른 계집애처럼 붕 떠오르고 싶은 갈망과 얼른 치마를 다독거리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 장작을 아끼기 위해 우리 식구들은 다들 안방에 모여 자고 있었다. 깊이 잠든 살아남은 식구들, 두 과부와 두 어린것들의 평화로운 숨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더는 나빠질 수 없는 밑바닥에 도착한 안도감과 평화는 같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보다는 평화가 얼마나 더 거룩한가. 나는 내 안에서 회오리치는 위험에의 갈망과 이렇게 맞섰다.

그 남자는 거의 매일같이 부대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미군 부대의 잡역부들은 일자무식으로부터 대학을 나온 사람까지 다양했지만 다들 어딘지 켕기는 데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병역 기피자가 많았다. 정식으로 허락된 건 아니지만 군복을 입을 수 있고 꼬부랑글씨로 된 신분증이 나오니까 요령만 좋으면 큰소리쳐가면서 검문을 피할 수 있었다. 찌들고 떳떳치 못한 사람들은 군복이 썩 잘 어울리고 건강하고 거침없어 보이는 미남자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해했다. 동생뻘 되는 친척이라는 소리는 안 했으면 좋았을 것을. 아무도 안 믿었다. 사지가 멀쩡한 상이군인이라는 신분은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우린 그런 것들을 즐겼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행복감을 상승시켰다. 남이 쳐다보고 부러워하지 않는 비단옷과 보석이 무의미하듯이 남이 샘 내지 않는 애인은 있으나마나 하지 않을까. 그가 멋있어 보일수록 나도 예뻐지고 싶었다. 나는 내 몸에 물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는 나를 구슬 같다고 했다. 애인한테보다는 막내 여동생한테나 어울릴 찬사였다. 성에 차지 않았지만 나도 곧 그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구슬 같은 눈동자, 구슬 같은 눈물, 구슬 같은 이슬, 구슬 같은 물결…… 어디다 그걸 붙여도 그 말은 빛났다.

그해 겨울은 내 생애의 구슬 같은 겨울이었다. 안감 냇가 말고 애인들이 갈 수 있는 데는 많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 대학생이 되고 고등학교 때의 금기의 장소에 미처 익숙해지기도 전에 난리가 나고 서울은 폐허가 돼버린 것이다. 그나마 극장이 남아 있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전시의 극장은 난방이 안 됐다. 그는 내 옆에 꿇어앉아 자기 털장갑을 뒤집어서 내 발끝에 씌워주곤 했다. 손가락 장갑을 바닥만 뒤집으면 그 안에 다섯 손가락이 뭉쳐 있게 되고 그걸 발끝에다 신으면 아무리 꽁꽁 언 발가락도 스르르 녹으면서 훈훈해진다. 그는 어떻게 그런 신통한 생각을 해낼 수가 있었을까. 그건 일석이조였다. 언 발가락이 따뜻해졌을 뿐 아니라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 당하고 있다는 만족감까지 맛볼 수 있었으니까. 주로 중앙극장에서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곧잘 명동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종로 거리가 완전히 파괴되고 시민들은 거의 다 피난을 가서 주택가에도 사람 사는 집이 얼마 안 되던 전시에 명동의 은성한 불빛은 비현실적이었다. 우리는 부나비처럼 불빛 안에서 자유를 만끽했다. 근사한 단골 다방도 생기고 비싼 제과점도 알게 되었고 양품점에서 앙증맞고 불필요한 소품을 사는 재미도 알게 되었다. 명동에는 그런 것들 말고도 미군 장교하고 살림을 차린 고급 양부인이 주 고객인 중후하고도 화려한 보석상도 있었다. 드넓은 한구석엔 응접실처럼 꾸며놓은 은은한 코너도 있어서 요염하게 화장을 한 고객들이 서양 배우처럼 세련되게 다리 꼬고 앉아 주인의 아첨을 즐기는 게 밖에서도 훤히 보였다. 서서 구경만 하는 고객은 안 보여서 우리는 감히 그 안에 들어가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대신 내가 쇼윈도에 붙어서서 눈독을 들인 귀금속들은 모조리 장차 내 것이 되었다. 나는 보석보다 그의 허황한 약속이 더 좋았다. 비싼 보석에 눈요기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았건만도 연애는 돈이 많이 드는 짓이었다. 그는 한 푼도 못 버는 백수였고 나는 돈을 벌긴 해도 다섯 식구의 밥줄이었다. 밥줄의 존엄성을 무시할 만큼 우리의 연애질은 외람되지 않았다. 상이군인에게 아직 연금도 없을 때였다. 그의 가장 만만한 돈줄은 늙은 어머니였다. 큰아들과 영감을 따라갈 것이지 무슨 효도를 받으려고 나 같은 걸 기다리고 있었느냐고 노모를 구박하던 그 남자는 툭하면 노모를 못살게 굴었다. 그에게 반찬 없는 밥을 안 먹이는 것만도 노모로서는 습관화된 살던 가락 아니면 유지하기 벅찬 노릇이련만 그는 그걸 과람해할 줄 몰랐다. 용돈에 목말라 노모를 괴롭혔다. 노모가 시장 바닥에 옷가지도 들고 나와 팔고 광주리를 이고 다니면서 푸성귀 장사까지 한다는 걸 나는 어머니를 통해 알았다. 이사 올 때보다 허리가 더 굽어 거의 기역자로 보이는 노인이 무거운 걸 머리에 이어주면 발딱 일어서서 곧바로 걷는 게 너무 신기하다고 했다. 우리집도 툭하면 어머니가 시장 바닥으로 물물 교환을 하러 나갔다. 서울이 텅 빈 것 같아도 동네 시장에 가면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살기에 가까운 생기가 넘치는 그곳에는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았다. 아무나 아무 데나 물건을 펴놓고 팔기도 하고 필요한 걸 사기도 했다. 재래 시장의 가게 주인들도 거의 다 피난을 갔기 때문에 열려 있는 가게는 얼마 없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거친 상행위는 닫힌 가게의 추녀 끝이나 시장통 골목 등 아무 데서나 이루어졌다. 어머니는 그의 노모에게 임을 이어준 얘기를 하고 나서 한동안 씁쓸하고 하염없는 표정을 지었다. 출세한 아들을 둔 부잣집 마나님과 비교해서 자존심 상해하던 어머니답지 않게 마음으로부터 동정심이 우러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의 동정심이 자기 위안일 뿐 그의 노모에게 해당되는 건 아니었다. 허리가 굽어 실제의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이는 그 노인이 아들이 못되게 굴 때마다 마치 늦둥이 재롱 보듯 즐거워하는 걸 여러 번 보았다. 아들에게 주머니를 몽땅 털리고도 합죽한 입 언저리에 여러 겹의 파문 같은 주름을 지으며 웃는 모습을 보면 동정 받아야 할 사람은 우리 어머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남자는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효도를 하고 있었다. 그래 그랬던가, 나는 그 남자가 노모를 가혹하게 착취하는 걸 부추겼다고는 할 수 없어도 말리지도 않았다. 그래도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다고 잔돈푼보다 큰돈에 궁하면 그 남자는 부산까지 원정을 갔다. 그 남자하고 큰형 사이에는 누님이 두 분 있었는데 한 분이 의사였다. 부산으로 피난 가서 큰 병원에 취직해서 계속해서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남자에게는 가장 큰 돈줄이었다. 그 남자에게 의사 누님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노모가 돈을 잘 안 주면 부산 가서 누나한테 달랠 거라고 공갈을 치면 귀한 골동품이라도 내다 팔아 돈을 마련해주곤 했기 때문이다. 속속들이 점잖은 노모는 아들이 시집 간 딸한테 폐가 되는 걸 여간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착한 딸은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보태고 싶어 동생을 부산에 부르곤 했다. 그가 부산 간 날이면 나는 외롭고 쓸쓸해서 이불 속에서 몰래 숨을 죽여 흐느끼곤 했다. 아무리 시장 바닥에 인간들이 악머구리 끓듯 하면 뭐하나, 그가 없는 서울은 빈 거나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남은 남녀는 절대로 헤어져서는 안 된다. 하루만 더 그 무의미, 그 공허감을 견디라 해도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하루하루 절박하고도 열정적으로 그를 기다렸다. 돌아오겠다는 날보다 더 있다 온 적이 없었건만 그는 돌아오던 날마다 벌을 받아야 했다. 일상적인 위안보다 더 큰 위안, 그건 휘황한 장소에서 분수에 넘치는 호화 취미를 즐기는 거였다. 그렇다면 그가 어머니와 누나를 무차별적으로 착취하도록 부추긴 건 내가 아니었다고는 못하겠다. 그렇다고 분수에 넘치는 호사 취미에 대한 나의 욕구가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됐던 건 아니다. 그는 시를 좋아할 뿐 아니라 외우고 있는 시가 많았다. 가로등 없는 골목길 오 리를 십 리, 이십 리로 늘여서 걸으면서, 또는 삼선교의 포장마차 집의 새파랗고도 어둑시근한 카바이드 불빛이 무대 조명처럼 절묘하게 투영된 자리에서 그는 나직하고도 그윽하게 정지용 한하운의 시를 암송하곤 했다. 그는 그 밖에도 많은 시인의 시를 외우고 있었지만 내가 누구의 시라는 걸 알고 들은 건 그 두 시인이 고작이었다. 포장마차 집에서는 딴 손님이 없을 때에만 그런 객쩍은 짓을 했기 때문에 주인 남자도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다 듣고는 분수에 넘치는 사치를 한 것 같다고 고마워했다. 나에겐 그 소리가 박수보다 더 적절한 찬사로 들렸다. 우리에게 시가 사치라면 우리가 누린 물질의 사치는 시가 아니었을까. 그 암울하고 극빈하던 흉흉한 전시를 견디게 한 것은 내핍도 원한도 이념도 아니고 사치였다. 시였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돈 안 드는 사치는 그 남자네 집 사랑채에 있었다. 홍예문이 달린 사랑채는 니은(ㄴ) 자 구조로 돼 있었다. 안채의 기역(ㄱ) 자 구조와 맞물리면 미음(ㅁ) 자가 되지만 맞물리지 않고 넉넉한 공간을 두고 떼어놓았기 때문에 서로 독립적이었다. 사랑채엔 따로 사랑마당이 딸렸을 뿐 아니라 대문을 거치지 않고도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홍예문이 있었다. 사랑마당을 바라볼 수 있는 툇마루가 딸린 큰방은 그의 아버지와 형이 공유하던 서재고, 큰방에서 안채를 향해 꺾어진 작은방은 그의 형이 처자식과 따로 홀로 취미 생활을 즐기던 방이라고 했다. 형의 취미는 음악 감상이었을까. 그 방엔 당시엔 드문 전축이 있었고 빼곡하게 꽂은 음반이 두 벽 천장까지 닿아 있었다. 내 귀는 클래식에 전혀 훈련이 돼 있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나는 은근히 그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을 눈치 챈 그는 나에게 최대한으로 친절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래도 귀에 기별이 안 가고 배기나 보자고 위협이라도 할 듯이 들려준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듣고도 너무 시끄럽다, 어머니 깨시겠어, 라고 소음 취급을 하자 어처구니없어 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아주 단념한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귀에 익은 「들장미」 「라르고」 「보리수」 같은 가곡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는 음반을 조심조심 마치 애무하듯이 다루었다. 그는 전축이 돌아가는 동안 다음에 걸 음반을 골라서 호호 살짝 입김을 불어넣기도 하고 작은 솔로 닦아내기도 했다. 그 솔은 원래는 음반 청소용이 아니라 화장할 때나 쓰는 것일 수도 있었다. 서양 여자의 속눈썹을 연상시키는 정교하고 섬세한 솔이었다. 부드러울 것도 같고 빳빳할 것도 같은 그 솔에 닿으면 전류가 통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음반을 어루만지고 싶어서 그러는지 먼지를 닦으려고 그러는지 분간이 안 되는 그의 골똘하고도 탐미적인 손놀림 때문일 것이다. 그는 또 내가 이름을 알 리 없는 외국 테너의 기름진 미성도 애무하듯이 가만가만 관능적인 허밍을 넣으면서 들었다. 솔이 허밍인지 허밍이 솔인지 잘 구별이 안 됐다. 촉각과 청각이 서로 녹아들면서 아슬아슬한 도취의 순간을 만들어냈다. 그가 가장 자주 틀어준 음반은 「보리수」였다. 그 가사는 우리가 고3 때 배운 독일어 교과서에 나오는 시였다.―암 부룬넨 포어 뎀 토레 다 슈타트 아인 린덴바운, 이히 트러임트 인 자이넴 샤텐 조 만헨 쥐센 트라움―그 가사에다 그가 허밍을 넣는 걸 듣고 있으면 나는 온몸에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 시절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와 있나. 그 시절이 우리에게 정말 있기나 있었을까. 여긴 어딘가. 그건 일종의 위기 의식이었다. 5월이 되자 사랑마당에서 온갖 꽃들이 피어났다. 그렇게 여러 가지 꽃나무가 있는 줄은 몰랐다. 향기 짙은 흰 라일락을 비롯해서 보랏빛 아이리스, 불꽃 같은 영산홍, 간드러지게 요염한 유도화, 홍등가의 등불 같은 석류꽃, 숨가쁜 치자꽃, 그런 것들이 불온한 열정―화냥기처럼 걷잡을 수 없이 분출했다. 이사하고 나서 조성한 정원이어서 그 남자도 이렇게 꽃이 잘 핀 건 처음 본다고 했다. 그런 꽃들을 분출시킨 참을 수 없는 힘은 남아돌아 주춧돌과 문짝까지 흔들어대는 듯 오래된 조선 기와집이 표류하는 배처럼 출렁였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싶을 만큼 아슬아슬한 위기 의식을 느꼈다. 돈 안 드는 사치는 이렇게 위험했다.

휴전이 되고 집에서 결혼을 재촉했다. 나는 선을 보고 조건도 보고 마땅한 남자를 만나 약혼을 하고 청첩장을 찍었다. 마치 학교를 졸업하고 상급 학교로 진학을 하는 것처럼 나에게 그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 남자에게는 청첩장을 건네면서 그 사실을 처음으로 알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나서 별안간 격렬하게 흐느껴 울었다. 그는 그동안 좀 바빴었다. 정부가 환도하고 피난 간 누나들이 돌아오고 서울 집값이 오르면 팔려고 겨우 버티던 집도 복덕방에 내놓는 등 여자한테 신경 쓸 시간 없이 지내는 동안에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5

그 남자네 집 바깥마당의 무성한 나무가 보리수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도망치듯이 그 집 앞을 벗어났다. 그러나 멀리 가지는 못하고 지금은 땅밑을 흐르는 안감 냇가를 중심으로 그 동네를 돌고 또 돌았다. 그 남자의 부음을 들은 지도 십 년 가까이 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나에게 그가 영원히 아름다운 청년인 것처럼 그에게 나도 영원히 구슬 같은 처녀일 것이다. 우리는 그때 플라토닉의 맹목적 신도였다. 우리가 신봉한 플라토닉은 실은 임신의 공포일 따름인 것을. 어디선가 연탄불 냄새가 났다. 휴전이 되고 연탄불은 급속히 확산돼 내 결혼 생활은 연탄불과의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끼쳐오는 냄새는 그런 지겨운 냄새가 아니라 카바이드 냄새도 섞인 그리운 냄새였다. 나는 부유하듯 다리에 힘 빼고 그 냄새에 이끌렸다. 연탄 갈비라고 간판을 붙인 집에선 연탄 화덕을 주룬히 추녀 끝에 내놓고 불이 괄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복고풍이 마침내 연탄불에까지 이른 모양이다. 가게 안은 어둑해 보였다. 옛날 집 대문처럼 해달은 널빤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닥에 비질을 하고 있던 남자가 다섯시가 지나야 저녁 영업을 한다고 알려주었다. 실내 어디에도 카바이드 칸델라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 데나 앉아서 좀 쉬고 싶었지만 청소를 하고 있는 남자의 표정이 하도 시큰둥해 말도 못 붙여보고 돌아 나왔다. 세종로에 있는 것 못지않게 곱게 물든 그 동네 은행나무가 표표히 잎을 떨구고 있었다. 아늑함이 그리웠다. 부드러움도.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커피 집 문을 밀고 들어갔다. 창가에 앉았다. 안에서 본 은행잎 지는 거리는 아름다운 애니메이션 화면처럼 동화적이었다. 그 거리를 오가는 젊은이들의 발랄하고 거침없는 몸짓 때문일 것이다. 그 애들과 나와의 거리가 연령 차가 아니라 엽전과 양놈이라는 종족의 차이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 남자의 그닥 밝지 않은 소식을 간간이 들을 때마다 나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때 왜 그랬을까, 되짚어 곰곰 생각도 해보고 너무 맺고 끊는 듯한 내 성깔이 남의 일처럼 정 떨어지기도 했었다. 얼마 전 TV로 「내셔널 지오그라피」를 보다가 오랫동안 궁금했던 것의 해답을 얻은 것처럼 느꼈는데, 그것도 거기 정말 정답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줄창 답을 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서 보여준 건 새들이 짝을 구하는 방법이었는데, 주로 수컷이 노래로 몸짓으로 깃털로 암컷의 환심을 사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니까 그저 그렇고, 가장 흥미 있었던 것은 자기가 지어놓은 집으로 암컷의 환심을 사려는 새였다. 그런 새가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수컷은 청청한 잎이 달린 단단한 가지를 물어다가 견고하고 네모난 집을 짓고, 드나들 수 있는 홍예문도 내고, 빨갛고 노란 꽃가지를 물어다가 실내 장식까지 하는 것이었다. 암놈은 요기조기 집 구경을 하고 나서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집을 골라잡기만 하면 짝짓기가 이루어진다.

그래, 그때 난 새대가리였구나.

그게 내가 벼락치듯 깨달은 정답이었다. 나는 작아도 좋으니 하자 없이 탄탄하고 안전한 집에서 알콩달콩 새끼 까고 살고 싶었다. 그의 집도 우리집도 사방이 비 새고 금 가 조만간 무너져내릴 집이었다. 도저히 새끼를 깔 수 없는 만신창이의 집,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 새끼를 위해 그런 집은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앉은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여긴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경양식도 같이 파는 찻집은 자리가 꽉 차 주로 쌍쌍인 젊은이들이 내가 앉은 테이블의 빈자리를 잠시 넘보다가 나가버리곤 했다. 주인의 시선이 따가울 수밖에 없었다. 연탄 갈비집도 영업을 시작했을 시간이다. 그 가게 앞을 카바이드와 연탄불 냄새를 그리워하며 천천히 걸어가는 늙은이가 눈에 선하다. 그는 누구일까. 애무할 거라곤 추억밖에 없는 저 처량한 늙은이는.

나는 마지못해 자리를 떴다. 쌍쌍이 붙어 앉아 서로를 진하게 애무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늙은이 하나가 들어가든 나가든 아랑곳없으련만 나는 마치 그들이 그 옛날의 내 외설스러운 순결주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꼭지가 머쓱했다. 온 세상이 저 애들 놀아나라고 깔아놓은 멍석인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나는 젊은이들한테 삐지려는 마음을 겨우 이렇게 다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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