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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黃昏) / 이육사
내 골방의 커 - 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 다오.
<하략>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 류시화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 감을 두려워한다.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 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폐항(廢港)의 밤 / 이건청
겨울에도 출렁였다.
묶인 배들은 기우뚱거리고
황혼 속에 흔들리는 빈자(貧者)의 손.
앙상한 숲을 바라보며 울었다.
늦기 전에 가리라.
방파제 너머로 몰려와 부서지는 지겨운 시간들.
남은 것들이 하얗게 부서지는
밤바다
아, 묶인 배들은 묶인 채 울고
굵고 튼튼한 끈 위에 눈은 쌓였다.
우리는 알지도 못하면서
기우뚱거릴 뿐, 피를,
잘려 나가는 육신을 견디고 있다.
저 막막한 눈보라 속으로
껌정신을 끌고 갔다.
늦기 전에 가리라.
흰옷을 입은 남자들이 휠체어에 실려
분수가 쏟아지는 마을의 긴 골목을
밤새도록 밀려 가고
이 세대의 폐항(廢港)에
돌아온 배들이 굳게 굳게 묶인다.
묶인 채 기우뚱거리며
눈보라 속에 있다.
무서운 시간 / 윤동주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잎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呼吸)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는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마오.
사랑법 /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者) /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者) /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시간(時間)은 침묵(沈默)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沈默)할 것
그대 살 속의 /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 누워있는 구름 .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 떠나고 싶은 자(者)
홀로 떠나는 모습을 / 잠들고 싶은 자(者)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