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에대한 모든것 내공 20

윤동주에대한 모든것 내공 20

작성일 2008.07.19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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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쓸일이 있어서,...

 

윤동주에 대한 모든것을 가르쳐 주세요,.,

 

예를 들자면 그가 쓴 시, 연보 , 문학사상 등등,,

 

내공 20 이고요

 

정리해서 해즈세여

 

백과사전 복사 ㅈㅅ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edu9508 님의 오픈백과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11&dir_id=110103&eid=oILKkRAkLUECi+tYuDuLPJPVlcjbWKi5&qb=wLG1v8HW

 

 

 

 '이육사, 윤동주의 작품 세계와 생애  

 

[작품 세계]

 

1. 이육사의 작품 세계

1) '광야, 절정, 꽃' 등은  시인의 특징인 남성적인 어조를 통한 강인함이 돋보이는 작품들로, 식민지하의 절박한 현실 상황에 대한 초극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통점은 의지적이고 지사적인 저항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광야'는 절망적인 현실에도 굴하지 않는 굳은 의지와 신념. 조국 광복에의 소망과 신념,  민족의 새로운 역사 창조에 대한 염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광막한 공간과 아득한 시간을 배경으로 강인한 지사적 의지를 노래하고 있으며. 화자는 이곳에 서서 태초를 포함한 역사를 생각하고, 미래의 찬란한 역사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3) '꽃'의 주제는 참된 삶(조국 광복)에 대한 신념과 의지입니다. 불모의 땅에서 끈질긴 목숨을 유지하며 ‘개화를 통해 삶의 의지를 실현하여 삶의 비약적 상승과 희망을 노래한 것으로 미래 지향적이라는 점에서 '광야'와 유사합니다.

4) '절정'은 꽃 과 '광야'에서 초극 의지를 보여준 것과는 다르게 한계점을 인식하고 현실의 비극적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쫓기는 자의 극한 상황, 식민지 통치하의 시대 상황을 통해서 급박한 현실적인 상황을 제시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겠다는 육사의 지사로서의 진지한 정신 세계를 밝히면서 자신을 안으로 다지고 있는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5) 이상의 작품들에는 일제 강점하의 절박한 현실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으려는 강인하고 의지를 극복하겠다는 의지의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육사를 일컬어 '예언자적 시인, 절명지의 꽃'이라고 하는 이유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은 이러한 작품 세계를 통해 알 수 있는 '나라와 민족 사랑'에 대한 지사적인 면모와 애국 정신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밝은 미래를 그리며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긍정적이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굳건하게 키워 내는 점 또한 혼탁한 현대를 현명하게 살아나갈 수 있는 바람직한 정신적 자세이리라 됩니다.

 

 

2. 윤동주의  작품 세계

1) '서시'는 1941년 11월 20일 이란 창작 일자가 알 수 있는 시로,  유고시집 서문에 있는 이 시는 전체적인 그의 항심을 표현한 시로 일본에서도 활발히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입니다. 1941년은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나라에 수탈과 압박을 심화시킨 때입니다. 전쟁의 참상은 우리나라에까지 뻗쳐와 식민지 국가의 설움이 극에 달한 상태였죠. 이 시기엔 변절했던 문인들이 많습니다. 붓을 꺾고 절필했던 문인들도 있지만 일제에 동조하는 글로 전쟁에 참여하도록 부추기는 글을 쓰는 많은 문인들을 보며 강한 애국심을 가진 문인들은 참으로 참담했을 겁니다.

 윤동주는 이 시기에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때로 도대체 어떻게 하면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을까 많이 생각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나온 시가 '서시'입니다. 어두운 밤하늘의 별처럼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에서 더욱 밝게 빛나는 별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정신 세계를 다시 한번 결심하고 반성하는 자세로 성찰하는 것이죠. 강한 의지와 자기 고백적 성찰로 이루어내고 있습니다. 말로만 내세우는 것보다 조용한 자기 성찰을 통해 어려운 현실에서 항심을 잃지 않겠다는 시인의 의지가 오히려 돋보이는 시입니다. 게다가 이 시에서는 도덕적인 양심과 시인의 소명의식을 조용히 언급하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별이 되고픈 소망을 조용히 얘기하고 있죠. 이런 지은이의 고백적 성찰은 오히려 그의 결심을 더욱 확고히 하고 애국의 마음을 그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별 헤는 밤'에서는 가을 하늘의 초롱초롱한 별들은 헤아리며, 과거의 아음다운 추억과 상념에 잠기면서 밝고 희망찬 미래를 향한 의지와 신념을 밝히고 있습니다.

3) '참회록'은 시인의 후기 계열에 속하는 작품 경향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과거-현재-미래'의 삶 전반에 걸친 참회의 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 '별'은 '운석'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내면적 고통이 심했는지는 시 '병원'을 통해 고백하고 있는 듯합니다. 

4) 윤동주의 시를 '천체미학적' 미 의식을 밝힌 시라 흔히 일컫습니다. 그의 시의 중심 대상은 '하늘, 별, 바람'이라는 뜻이겠죠.  이러한 밑바탕에는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땅(국토)'를 잃은 민족의 설움과 염원이 담긴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별'을 잃지 않으려 진력을 다했던 그의 마음의 별은 이제는 우리 겨레의 마음의 별로 영원히 빛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3. 이육사와 윤동주의 차이점

1) 이육사는 남성적 대결 정신과 강인한 대륙적 풍모를 보이는 대표적인 저항시인입니다. 향토색이 짙은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시풍을 잃지 않은 민족적 저항 시인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고전적 선비 의식과 한시의 영향으로 전통적 요소를 지니면서도 한국시에 남성적, 대륙적인 감성을 불어넣어서 우리 시의 보편적 정서에 정면으로 도전하였을 뿐 아니라, 죽음을 초월한 저항 정신과 시를 통한 진정한 참여를 통해 일제 말 우리 민족의 문학의 전통을 계승해 주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2) 이육사는 실천하는 이었습니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이 이루어지던 시절에 개인의 안일을 생각지 않고 투철한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조국을 위해 일했습니다. 권력의 탄압과 회유 앞에서 굴복한 많은 나약한 들을 보면서 10여 회의 투옥과 북경 감옥에서 생애를 마쳤던 이육사는 우리가 이 역사와 현실을 어떻게 보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30세가 넘어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그 때 이미 옥고를 치른 독립 투사요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시인 이전에 지사요 투사였던 것입니다. 그의 시에는 실천하는 삶을 산 그의 투철한 역사 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남성적인 그의 시에 있습니다. 여성적인 정서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지만 험난한 시대에 굴하지 않고 버티고 서서 호쾌한 목소리로 역사를 노래한, 의지와 기개가 넘치는 대륙풍의 시에 저는 매료되고 그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 2) 백철-

 

2) 윤동주는 식민지 의 정신적, 윤리적 고통을 섬세한 서정과 투명한 시심으로 노래한 저항 시인입니다. 양심의 결백을 추구하는 미학을 바탕으로 도덕적 순결성의 추구와 자기 희생 의지를 주로 노래하였습니다. 지사적 강직성만이 요구되던 풍토 속에서 자신에 대한 진지하고 내면화된 윤리적 성찰과 고백을 통하여 높은 정신과 지사적 위치를 지켰다고 하겠습니다.

 

 

3) 윤동주가 시를 썼던 시대인 1936~43년은 온 인류가 시를 외면한 시대였다. 그가 릴케와 프랑시스 잠을 노래했을 때는 포연이 장미의 향기를 쫓고 나귀등에다 탄환을 운반하던 때였다. 그가 즐겨 바라보던 하늘과 바람과 별의 허공엔 공습 경보가 요란하게 울리던 시절이었다. 인간의 역사 중 사람의 생명이 가장 값싸게 거래되었던 시대였고, 자유, 평등, 박애가 군국주의의 넝마주이 집게에 집혀서 오물 처리장으로 실려가던 때였다. 철학자에게는 복종의 철학이 강요되고, 음악인에겐 군가 작곡이 명령되며, 시인에게는 원고지와 펜으로 탄환을 만들 것을 강요하던 시대였다.
4) 이 시대엔 고향을 애절하게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성립되었고, 친한 벗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것까지도 감시를 받았다. 하물며 창씨 개명도 하지 않은 '순이'에 대한 추억이나 '흰 옷'과 '살구나무'와 '희망의 봄'이야 영락없는 불온이었다.
5) 1940년 전후 - 지구는 군가와 화약냄새로 가득 차서 모든 약소 민족은 겟슬러 총독 아래서의 윌리엄 텔처럼 두 개의 화살을 가지고 사과를 겨누고 있었다. 1876년 이후 유럽열강과 미국은 매년 24만 평방마일의 땅을 얻어왔다. 그 결과 1914년에 이르자 지구상엔 거의 모든 약소 민족이 어느 강대국의 한 식민지로 변하고 말았으며, 이것은 194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문학은 본의든 아니든 식민 종주국의 이익을 옹호하던가 아니면 민족독립운동을 돕던가 둘 중 하나에 봉사하게 된다는 양자 택일의 갈림길에 서야만했다.
6) 한국 문학사는 이 시대를 '암흑기'로 말한다. 시와 소설의 발행고가 가장 낮은 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질적인 면에서도 예술적 여과를 거치지 못했으며,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식민 종주국의 이익에 보탬을 준 것이 많아서, 암흑기란 시대적 명칭은 자연스럽게 사용되어 왔다.
 시인 윤동주는 바로 이런 암흑기의 몇몇 유성 중 뛰어난 시인의 하나이다. 이 시대에 우리는 어학자 이윤재와 시인 이육사 그리고 윤동주를 함흥과 북경과 후쿠오카의 옥중에서 잃었다.
 고문, 영양실조, 동상 그리고 정신적 고뇌 등으로 일관된 하루하루의 옥중생활을 윤동주도 1943년7월, 체포이후 1945년 2월16일, 죽는 날까지 반복했을 것이다. 이 시인의 동생 윤일주의 기록에 따르면 1944년 6월 이후 월 1매의 엽서 쓰기가 허락되었다고 하는데, 아마 이때가 형이 확정된 때로, 그 이전엔 모든 외부와의 연락이나 독서가 금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후 주사를 맞았다고 하는데, 그 내용물은 아직도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으며, 최후의 순간에 큰 소리를 치며 죽었다는 간수의 증언도 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이 모국어의 순수 시인이 우리말로 고함 지르고 죽은 심정이야 이해가 가지만 왜 간수에게 일어로 한마디를 남기지 않았을까!

7) 흔히들 시인 윤동주를 저항의 시인이라 부른다. 원래 저항이란 순수 예술의 한 속성이 된다. 일반적으로 저항의 예술과 순수예술을 이원론 적으로 분리시키는 경향이 최근 우리 문단을 지배하고 있는데, 예술이란 그 순수성 자체가 가장 강력한 저항을 나타낸 것임을 수긍해야 될 것이다.
 예술적 창조란 말할 필요도 없이 개성의 표현이다. 이 '개성'이란 곧 타아와의 조화와 갈등을 동시에 지닌 것으로 이는 바로 모든 '자기 개성'의 반대자에 대한 조화를 위한 저항이 되는 것이며, 이것이 순수 예술의 본질이 된다.
8) 따라서 저항은 고대 원시예술의 시발점부터 순수예술이 지닌 한 속성이 되어 왔다. 즉 자연에 대한 저항을 나타낸 동굴의 벽화로부터 종교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르네상스시대, 이어 권력과 사회에 대한 근대화예술과 비인간화해 가는 과학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는 현대예술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이런 세계사적 보편성으로서의 저항의 문학이 1940년대 암흑기의 한국에서도 독특한 양상으로 나타났으며, 그 중 윤동주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위에서 본 저항문학의 주제에 의한 분류와는 달리 이는 문학인의 기능이나 대사회적 자세로 나누어보면 다음 세 가지의 형태를 보게 된다.
 첫째는 문학인 자신이 단체나 결사 등에 직접 가담하는 경우로, 이때 그 문학인의 작품은 오히려 매우 서정적일 수도 있다.
 둘째는 일시적인 의무나 지원 세력으로 어떤 단체나 운동에 뛰어든 경우가 있다. 
 셋째는 직접운동권에 가담하거나 지원하지는 않으면서도 순수한 문학작품으로 정서적인 저항을 시도하는 예가 있다.
 이런 세 가지 형태의 저항적 자세는 세계 문학사에서 얼마든지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의 짧은 문학사에서도 첫 번째에 해당하는 예로는 이육사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지하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지극히 서정적인 작품을 남긴 좋은 본보기가 된다. 두 번째 경우는 이상화, 한용운이 항일운동에 참여한 것을 들 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바로 윤동주나 김소월 같은 시인으로, 자칫하면 이런 시인에 대한 저항의지를 묵과해 버릴 수도 있을 만큼 그 작품은 깊은 서정과 민족 정서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는 윤동주에게 왜 윤봉길이나 안중근처럼 되지 못하고, 아니 하다 못해 이육사처럼 비밀 결사에라도 참여하지 못했느냐는 추궁은 할 수 없으며, 이런 시가 지닌 진정한 가치를 재음미, 평가하는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9) 왜냐하면 '옥사' 그 자체가 윤동주의 시문학 전체를 대변해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순수한 시가 곧 역사적 저항의지의 표현으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인류사에서 가장 혹독했던 짜르 치하에서 가장 찬란했던 문학이 창조되었듯이, 1940년대의 혹독한 식민 통치 아래서 우리의 순수 저항시는 태어났던 것이다.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저항의 시는 진정한 영혼의 고통을 겪는 사람만이 아는 순수한 고뇌의 절규가 스며 있으며, 그 끝간데 모를 고뇌의 깊이 속에 '순수 저항시'의 참된 가치가 스며있다. 이런 시는 누구를 선동하지는 않으나 감동을 주며, 울리지는 않으나 가슴을 찌르며, 취하지는 않으나 각성제가 된다.
 윤동주의 저항시도 바로 이런 각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원하는 삶의 최소공약수를 빼앗긴 시대를 배경으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혁명이니, 평등이니, 자유니 하는 어마어마한 이상들은 내일의 시인에게 남겨 두고서 그는 오직 하나의 평범한 약소 민족의 생활인으로서 열심히 살고자 했을 뿐이었다.
 이 평범한 꿈-"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며, 별과 어머니와 소녀와 서정 시인을 그리며 살고자 하는 꿈이 허락되지 않았을 때 그는 하는 수 없이 저항시인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 윤동주의 이런 순수한 약소 민족의 서정적인 삶의 추구 자세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가장 쉬운 해답을 우리는 멀리 북간도에서 찾을 수 있다. 1886년, 증조부 때부터 북간도로 이주해 간 윤동주는 짧은 생애 중 모국이라고는 학창 시절 4~5년 정도밖에 있어 보지 못한 영원한 방랑자 였다.  기온의 차이가 극심한 대륙, 근대 이후 배일 사상의 온상지였던 땅, 일본력이 아닌 단군기원을 공공연히 사용하며 헌옷을 입고 추위에 동포들이 떨며 청국인 지주와 일본 군인들에게 이중으로 혹사당하던 원한과 설움과 서정과 꿈과 웅지의 옛 땅 -- '총독부 문서 1912년 청국 국경 부근 관계 사건철'에는 간도로의 조선인 이주 원인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즉 토지가 비옥해서 생활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가는 것, 항일 및 망명 이주, 기독교 연구 전파 등등.
 할아버지 때부터 기독교를 믿었다고 전하는 윤동주는 이런 독특한 환경 속에서 민족 고유의 순수한 정서를 그리워하면서 자랐을 것이며, 특히 문학 청년 시절에 백석의 '사슴'을 통하여 한민족의 서정을 익혔기 때문에 나중 일본에 가서도 민족 정서를 잊을 수 없었으리라.
 이처럼 행동적 저항보다 순수한 민족 정서로서의 저항시인인 윤동주는 시를 통하여

(1) 조국만가와 조국 부재의식,

(2) 민족적 피해의식

(3) 민족적 저항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굳이 따진다면 이 세 가지는 다 민족적인 정서의 순수 저항으로, 독립이나 조국에 대한 열망에까지 확대 해석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불어'-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별헤는 밤에'에서-
 위의 인용에서처럼 시인 윤동주는 '시대를 슬퍼한 일도'없고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하늘의 별을 헤일 수 있는 약소 민족의 이방인의 한 민감한 청년으로 살았다. 따라서 그의 시를 너무 도식적으로 해석하여 '흰 옷'은 민족의 저항을 '봄'은 해방을 상징한다는 식의 풀이는 버려야 할 것이다. 이런 단견적인 비평은 자칫하면 우리의 민족이 지닌 보다 근원적인 정서의 저항성을 속류화 시킬 소지가 없지 않다. 따라서 윤동주가 지닌 시 세계에서의 저항의식은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북간도 이주민의 윤택하지 못한 생활 정서를 노래함으로써 우리 민족 정서의 한 영역을 확보해 주었다. 시계도 없는데 애기가 울어서 새벽을 안다는 '애기의 새벽'이나, 장에 가는 엄마를 내다보려고 손가락에 침을 발라 문을 쏘옥쏘옥 뚫는 '햇빛.바람'등은 평범하면서도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소년적 정서를 잘 전해주고 있다. 또 프랑시스 잠의 영향을 많이 받은 당나귀와 시골 풍경의 차분한 묘사는 북간도의 추위를 녹여주는 가작들이다.
 특히 이와 같은 생활적인 서정시 속에서 우리가 높이 평가해야 될 점은 궁극적으로는 허무주의가 아닌, 생에 대한 애정과 긍정적 자세가 스며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소년적인 정서의 탈을 벗고 보다 민족적 정서의 원천적인 시로서의 저항의 세계로 돌입하는 모습이 다음에 나타난다.
 '한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무서운 시간-

 이런 자괴와 겸허속에서 이 시인은 민족의 슬픔을 깊숙이 맛보며 현실과의 대결에서도 항상 자성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그래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쉽게 씌어진 시-
 라고 하면서도,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자세로 '나팔소리 들려올 ' 새벽과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 흘릴 날을 기다리면서 지조 높은 개가 어둠을 짖는 소리를 들으며 짧은 생을 끝냈다.
 이처럼 동주의 시는 간도로 간 조선인의 정서와 식민지 조선인의 서정을 노래한 것으로, 그 저항의식을 나타냈다. 그의 저항시가 가진 특징 중 우리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기독교와 관련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크게 노출시키지 않았다는 점과 복고주의적인 정서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 기독교는 물론 우리나라 민족의 저항세력에 도움을 주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 민족적 전통의 정서와 많은 갈등을 겪어왔는데, 윤동주는 이를 극복하여 종교보다 민족적 정서를 우위에 둔 훌륭한 시인이었다. 또 복고주의 역시 간도로 이민간 사람들 속엔 상당히 간직되었고 당시의 군국주의적 식민지 치하에서도 공공연히 자행되었건만, 이를 극복하며 새 시대의 민족적 정서를 노래해 주었다. 그러기에 윤동주의 시가 오늘의 독자에게도 신선감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10) 그렇다면 윤동주의 시와 그의 저항은 우리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에 서게 될까. 위에서 본 것처럼 그는 저항의 자세 중 순수한 서정적 작품으로 저항을 시도한 이른바 예술적 저항의 시인으로서 한 표본을 이룬다. 이런 계열에 속하는 다른 시인으로는 김소월을 들 수 있는데, 윤동주는 소월에 비하면 보다 진한 저항의 체취가 묻어 나온다. 다만 민족적 공동운명체로서의 정서는 소월이 단연 으뜸이며, 이 점에서는 동주는 그에 뒤진다.
 원래 예술에서의 저항이란 가장 전염력이 강하려면 서정성을 지녀야 되는 것이다. 흔히들 전투적 선동성을 저항문학의 제일로 삼는 예가 있으나, 대중적 내지 민중적 저항의 유발엔 짙은 서정이 더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 코자크 부대가 폴란드를 침략했을 때 쇼팽의 피아노를 박살내어 땔감으로 쓴 것은 가냘픈 그의 음악이, 그 환상적이고 아름다우며, 서정적인 선율이 어느 독립군가보다도, 폴란드 인에게 애국심을 강력히 호소했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오늘의 독자에게 깊은 감동과 호소력을 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의 서정성에 있다는 사실은 오늘의 민중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 설정에 많은 암시를 준다고 하겠다. 

                                                                                                -3)~10); 임헌영-

 

- 끝으로, 작품 소개 몇 편으로 두 분의 시와 생애를 논한다는 건 너무나 지엽적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도 합니다만, 두 분에 대한 일화를 소개할 테니 참조하시길.

 

1) 이육사

 “어머니는 일제치하 때 일경에 너무 많이 시달려 소박을 맞았다고 거짓말을 했답니다. 수감된 아버지에게 넣어 준 새 한복은 피범벅이 돼 나왔다고 했죠.”

이육사(李陸史·1904∼1944·본명 이원록)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육사의 외동 딸인 이옥비(63)씨가 2일 선친의 묘소를 찾았다.

 이날 김종길 고려대 명예교수 등 기념사업회 관계자 등과 함께 육사 생가 뒷산에 있는 묘소를 찾은 이씨는 3살 때 아버지를 여의어 육사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으나 어머니와 삼촌, 지인 등에게서 전해들은 공개되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 놓아 눈길을 끌었다. 그는 독립운동으로 17번이나 투옥된 아버지가 일경의 요시찰 인물이어서 어머니는 늘 감시 대상이었다면서 일경의 감시를 벗어나기 위해 어머니는 한때 소박을 맞았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전했다.

 아버지가 투옥됐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면회를 갔는데 일경이 “소박맞았다면서 왜 찾아왔느냐”고 하자, 어머니는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어서 소박을 맞아도 위급할 때에는 찾아온다”고 말했다며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또 아버지는 군사훈련단에서 사격을 하면 백발백중이어서 명사수로 통했으며, 잦은 국내외 잠입에 따라 변장술의 대가였다고 아버지의 친구분들이 어머니에게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앞으로 이러한 사실들이 학술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지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육사의 죽음과 관련, 아버지와 함께 베이징(北京) 감옥에 수감됐다가 먼저 출소한 이병희 선생이 아버지의 면회를 자주 갔는데 당시 “기분이 상쾌하다”는 말을 들은 직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숨졌다고 전했다면서 고문이나 고문 후유증이 컸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육사의 옥살이와 관련, 어머니가 감옥에 새 한복을 넣어주었으나 며칠 뒤 이 옷은 피범벅이 돼 나올 정도로 혹독한 옥살이를 했다면서 대나무를 무릎에 끼우는 등의 고문으로 아버지는 몸이 많이 상했고, 폐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어머니가 전했다고 이씨는 밝혔다.

 이씨는 육사의 개인사에 대해 아버지는 깔끔한데다 꼭 마음먹은 것은 해내는 성품으로 특히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면서 서울시내에서 친구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도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친구들이 아무리 전철을 타자고 하더라도 혼자서 걸어가는 성격이었다고 전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 예우와 관련, 대구여고 재학시절 때 ‘80점 이상이면 등록금 면제’라는 혜택을 본 것 이외에는 달리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이 없다면서 아버지의 독립운동 정신을 긍지로 삼았기 때문에 불만이 없었다고 말했다.   -세계일보-

 

2) 윤동주  -'잊지 못할 윤동주(정병욱)'- 참조

 

 

[이육사의 생애와 작품]
* 본명: 이원록
1904 4월 4일 경북 안동에서 출생  
1920 예안 보문의숙에서 수학  
1921 안일양(安一陽)과 결혼  
1925 형 원기, 아우 원유와 함께 대구에서 의혈단에 가입  
1927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  
1933 <신조선>에 초최의 시 <황혼> 발표  
1944 북경 내구동에서 사망  
1946 유고를 정리, 서울출판사에서 첫 시집 <육사시집> 펴냄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육사 시집>    서울출판사  1946
시집 <이육사시문집>    서문당  1977
시집 <광야>    민음사  1977
시집 <이육사,윤동주>   한국현대시문학대계8  지식산업사  1980
시집 <광야에서 부르리라>    문학세계사  1981
시집 <청포도>    명지사  1985
시집 <이육사전집>    새문사  1986
시집 <청포도>    덕우출판사  1986
시집 <청포도>    문지사  1986
시집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융성출판사  1986
시집 <청포도>    민중서각  1987
시집 <청포도>    자유문학사  1987
시집 <청포도>    고려원  1989
시집 <광인의 태양>    문학사상사  1989

 

[윤동주의 생애와 작품]
1917 12월 30일 북간도 명촌동 출생  
1925 명동소학교 입학  
1929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 발간  
1931 대남자(大拉子)의 중국인학교 다님  
1932 용정의 은진중학교 입학  
1935 평양 숭실중학교로 옮김  
1936 숭실중학 폐교후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  
1938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9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  
1942 리쿄오대학(立敎大學) 영문과 입학, 가을에 도오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전학  
1943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  
1945 2월 16일 큐우슈우(九州) 후꾸오까형무소(福岡刑務所)에서 옥사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시집 <별을 헤는 밤>    문화공론사  1977
시집 <이육사, 윤동주>   한국현대시문학대계  지식산업사  1980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81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명지사  1982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83
시집<윤동주 시집>    범우사  1984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동서문화사  1984
시집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열음사  1984
시집 <별과 사랑과 시>    어문각  1985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문지사  1985
시집 <별헤는 밤>    어문각  1985
시집 <윤동주 시집>    마당문고사  1986
시집 <별헤는 밤>    자유문학사  1987
시집 <별헤는 밤>    인문출판사  1987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신라출판사  1987
시집 <별과 사랑의 시>    어문각  1987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덕우출판사  1987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한미  1987
시집 <새벽이 올 때까지>    융성출판사  1987
시집 <자화상>    청목사  1987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민중서적  1987
시집 <윤동주 시집>    범우사  1987
시집 <윤동주 시선>    일신서적공사  1989
시집 <새벽이 올 때 까지>    고려원  1989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오성출판사  1989

 

 

 

kig8392  님의 오픈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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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尹東柱,1917.12.30-1945.2.16)

한국의 시인

1. 짧고 불행한 생애와 시

윤동주의 시는 아름답고도 투명하고 결곧은 결정체들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내재적 의미는, 시가 쓰여진 시기가 일본 강점기가 극에 달하던 시기였던 만큼, 역사적 애환과 맞물려 훨씬 더 중충적이고도 풍부한 모습으로 읽힌다. 그것도 해방을 6개월 앞두고 28세의 빛나는 나이로 일본에서 옥사하며 불행하게 마감한 그의 삶이 시에 더한 빛을 던져 준 것이 되고 말았다.

윤동주는 생전에 문단에 발표를 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한 적이 없는 무명의 문학청년이었다. 용정 광명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카톨릭소년」에 동시 몇 편을 발표했고, 조선일보와 연희전문의 문과에서 발행한「문우」에 시 몇 편이 실려 있을 뿐이다. 해방후 1947년 경향일보 2월 3일자에 시인 정지용이 생애를 덧붙여 쓴시「쉽게 씨워진 시-고 윤동주」가 실려 처음으로 널리 알려지지 시작했다.

그외 대부분의 시는 해방 후에 간행된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1.30)에 실려서야 비로서 세상에 알려졌다. 일제 암흑기 속에서 예민한 감수성을 시로 풀어 놓았던 윤동주는 시적 성취의 높이만큼이나 극적이었던 삶을 시와 맞바꾼 것일까?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의 기독교 신앙이 두터운 가정에서 태어났다. 8세에 기독교 학교인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고, 13세(1930)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새명동」이라는 등사판 잡지를 몇 호 펴냈다. 14세에 대랍자의 중국인 관립학교에 다니다가 용정으로 이사해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초한대」와「삶과 죽음」,「내일은 없다」라는 시 세편이 17세(1934년)에 쓰여진 최초의 시이지만, 이미 습작기의 작품 수준을 웃도는 것을 보아 그 이전에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나 남아 있는 시는 없다. 18세(1935년)에 전학해 간 평양 숭실중학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참가하는데 학교가 폐교의 위기에 처하기 전에 자퇴하고 만다.

이 때문에 용정에 돌아온 윤동주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해서 졸업을 하는데, 문학을 반대하는 부친과 맞서 단식을 하고 가출까지 하면서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여 비로소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시는 계속 썼지만 발표하지 않았고 연희전문을 졸업하던 24세(1941년)에 자선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려 했으나 상황의 악화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25세(194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입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옮겼는데, 1943년 7월에 귀향하려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재판에 회부된 윤동주는 2년형을 선고 받았다. 해방을 여섯달 남겨 놓은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이름모를 주사'를 맞고 있다가 비통하게도 세상을 떠나고 만다.

당시 '규슈(九州)제국대 생체 해부 사건'과 관련지어 전쟁시에 부족한 혈장 대용으로 식염수를 사용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생체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윤동주의 죽음도 이 생체 실험의 희생물이라는 의혹에 싸여 있다.

2. 제기된 문제들

윤동주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 들어서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그 이전에는 1954년에 발표된 고석규의「윤동주의 정신적 소묘」뿐이었다. 1970년대 김윤식.김현이 펴낸「한국문학사」에서 윤동주의 작품을 대표적인 저항시로 꼽은 이래로 그의 시를 두고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논란이 되어 온 것은 그가 과연 저항 시인인가에 대해 제기된 의문이었다.

그를 저항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직접적인 원인은 그가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젊은 나이에 옥사한 사실에 둘 수 있다. 윤동주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직접 비판하고 나서거나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지만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부끄러움에 대한 강박 관념을 보여 주는 시어들, 사색과 실존 의식에 우러나오는 저항의식 또는 실향의식 까지를 사회적 또는 정신사적 맥락에서 일제 암흑기에 저항하는 태도로 논의해 왔다.

특히 김용직은 그를 보다 적극적인 항일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의 시를 저항시,민족시로 분류하려는 논의 외에 전통적인 서정시의 계열에서 순수 서정시로 파악하려는 견해들이 있다. 오세영은 윤동주의 옥사사건을 추상적으로 미화시키면 의도적 오류가 발생될 수 있다는 점,식민지 치하에 36년간이나 있으면서도 떳떳하게 항거한 자랑스러운 저항 시인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 윤동주 유고 시집이 간행된 이래로 한국의 특수한 시대적 상황과 사회구조가 저항 시인을 요청해 온 점 등을 지적했다.

둘째는 윤동주의 문학사적인 위치에 대한 문제이다. 생전에 문단과 전혀 관련하지 않았던 그의 시집이 1941년에 발간됨으로써 시작 시기와 독자층이 시대적으로 엇물려 윤동주의 독자층은 잠재적이라는 것이다. 시는 태어난 그 시기로부터 바로 생명력을 얻으므로 윤동주의 시를 우리시사의 암흑기에 두는 데는 커다란 이견이 없다.

셋째는 윤동주가 20세에서 23세에 집중적으로 쓴 동시 수십 편이 관심을 모았는데 이를 두고 퇴행 현상으로 볼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퇴행 현상으로 보지 않는 김윤식의 견해도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시인의 시에서 드러나는 기독교적인 경향에 대한 해석의 논란이 있었다. 윤동주의 시편들에는 비교적 모호한 구석이 많은데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두고 이해할 때 많은 해석상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3. 작품의 경향과 특성

1)초기 시와 동시에서의 현실과 이상의 거리

윤동주의 작품 활동은 1936년 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카톨릭 소년」지에「병아리」(11월호),「빗자루」(12월호)를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미 알려져 있듯이 1934년에「초한대」,「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1935년에「거리에서」,「창공」등의 초기 시편들이 먼저 씌어졌다. 그의 초기 시들은 그 수준이 미숙하고 관념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젊은 시인 윤동주가 그 시대를 현실적으로 인식한 고뇌의 편린들을 만날 수 있다.

초한대」에서 '어둠'과 맞서며 깨끗한 제물의 향내를 맡는 의지나 「삶과 죽음」에서 죽음을 삶 속에 수용하는 자를 위인으로 두는 시적 사유는 윤동주가 마감한 삶의 방향성을 시적 출발기에서 이미 예감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윤동주는 1936년대 후반기부터 1938년까지 집중적으로 동시를 썼다.「병아리
」,「햇비」,「무얼 먹구 사나」,「굴뚝」,「아침」, 「애기의 새벽」,「해바라기 얼굴」,「산울림」등의 동시들을 대하면 구체적이면서 쉽고 진솔한 시어로 짜여져 있어 순수하고 맑은 동심의 세계를 읽을 수 있다.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혼자 들었다,
산울림.

-「산울림」전문

「산울림」과 같이 빼어난 동시를 쓰던 그는 1938년 이후에는 더 이상 동시를 쓰지 않았는데 시적 성취가 높은 후반의 시들과 초기 시들 사이에 이 동시의 세계가 끼여 있어 단절감을 줄 정도이다. 시인의 내면에 어두운 당대 현실과는 순도 높게 대비되는 청순성이 동시를 통해 유감없이 표현되었던 서정성의 한 특징을 보여 준 것으로 이해된다.

현실의 모순과 삶의 어둠을 체감하면서 동시에 유년기의 화해로운 세계를 꿈꾸며 노래했던 여유가 마음에 설 자리는 1938년 이후에는 이미 없어져 버린 것일까?
그런데 동시에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이감과 감탄을 앞세우며 행복한 자아의 모습을 드러내면서도「해바라기 얼굴」,「오줌싸개 지도」와 같이 이 현실적 삶의 불안으 피해 갈 수 없었던 흔적을 시화하고 있다. 이 부분들에서 후기 시세계로 통하는 시적 자아의 내면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있다.

1936년에 쓰여진 시「가슴1」,「가슴 2」에서 답답한 현실에 가슴을 치다가 재만 남는 상황이 절실하게 표현되어 동시의 세계로 담아 낼 수 없는 심정의 한 극단적인 정황이 드러난다. 현실과 이상이 괴리된 상황 속에 처한 시인이 동시 장르와 시 장르 사이를 오가면서 내면적 자아 성찰의 세계로 깊어져 가는 긴장감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

2)정체성에 대한 부끄러운 고백과 내면성찰

1930년대 이후의 시인들에게 식민지하의 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정체성에 대한 절실한 의문에서 놓여날 수 없음을 의미했다. 더구나 북간도에서 평양,용정, 서울,일본도쿄,후쿠오카로, 마지막 유골이 되어 북간도로 떠돌아다닌 윤동주에게 '나'가 뿌리내릴 고향은 어디였을까? 그의 시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심상중의 하나도'고향','향수'이다.

「별헤는 밤」(1941년),「사랑스런 추억」(1942년)에서 시적 자화는 이상과 현실의 지난한 거리를 부끄러움으로 인식하면서 가난한 이웃들,애착이 가는 물건들,동물들,시인들까지 그리움의 대상을 일일이 확인한다. 뿌리 깊은 고향 상실의 비애는「또 다른 고향」(1941년)에서 절정에 이른다. 밤새워 어둠을 짖는 '지조 높은 개'에 쫒기는 '나'는 비참한 고향의 현실을 뛰어넘어 떳떳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이상향,'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을 꿈꾸는 의지를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모순된 현실,삶의 괴로움에 처하는 부끄러운 시적 자아는 사명감과 숙명감을 깨달으며 의지를 보여 주기에 이른다. 대표작「서시」(1941년)를 보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전문
2년 먼저 쓰여진 시「자화상」(1939년)에서는 우물에 비추인 달을 응시하며 자신을 반성적 거리를 두고 관조하고 다시 자연과 조화되는 자아의 모습에서 반성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서시'에 이르면 자연과 우주의 세계를 주관적인 의식 세계를 통해 노래하던 이전의 시세계에서 과거와 결별하고 사명감과 숙명을 깨닫으며 강하고 새로운 자아의 모습을 추구하는 투명하고도 아름다운 의지를 보여준다.

자기 내면으로만 응시하던 시적 자아를 외부 세계로 눈을 넓히고 세계와의 관계를 모색하며 새로운 자아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시의 외부 현실이 역샂거으로 참담했던 시기였던 만큼 '나'는 '민족의 역사' 속에 선'나'의 사명감과 관련된 함의를 가진다."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자아성찰에 따른 지순한 절규는 시「무서운 시간」(1941년)에서 역사의 시간에 귀기울여 극한의 위기감을 예감하게 한다.

거 나를 부른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무서운 시간」전문

역사가 도전해 오는 소리에 온몸으로 반응하는 모습이 극적이다. 비극적 상황으로 내몰린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면서도 "나"가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의 귀로길에서 예민한 자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는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지 못하고 살아왔으며"손들어 표할 하늘"도 "어디에 내 한 몸둘 하늘"도 없는 고단한 현실에 깊이 절망하는 화자이 상황 의식은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삶에 대한 에너지는 남아 호흡을 하면서 절망적인 현실에 대한 경험을 의미화하고 "내 죽는 날"인 최후의 나의 모습까지 예감한다. '일'을 마치지 않은 나는 아직은 살아 있다는 강한 자의식으로 자기 실현의 순간,소명을 다하는 순간을 기다린다.

3)인고의 구도,새 시대의 소망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의 '간'과 예수 그리스도의'십자가'는 윤동주 시에서 아주 중요하고도 의미심장한 상징적 매개물이다. 표면적으로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 시인의 저항 의식은 시「간」(1941년)과 「십자가」(1941년)에 잘 반영되어 있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시름없이

...(중량)...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간」전문
「간」은 전래의 귀토지설의 신화와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결합한 풍자적인 상상력이 놀라운 작품이다. 용궁에서 위기에 처하자 슬기롭게 꾀를 내어 자기의 목숨을 지킨 '토끼"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죄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고서도 끝끝내 인고하는 '프로메테우스'는 시인의 실존적 자존심으 대응물이다. 일제 강점기가 극한 상황에 처하던 당시 생명의 핵심인 '간'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자는 살아 있는 정신을 지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인내하고 자책하는 시인의 저항 의식은 기독교적 속죄양 의식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시「십자가」에서 "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십자가가 허락된다면//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는 숙연한 결단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리며 희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역경을 기억하며 현실적이 괴로움을 견디려는 시적 화자의 결연한 의지와 신념을 보여 준 것이다.

삶의 막바지에 이르면,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시인의 예감으로 역사적 사실에 한발 앞서 식민지 의 새로운 정체성의 한 면모를 시로써 빚어 놓는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를 무얼 바라
나는 다만,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어진 시」전문

「쉽게 씌어진 시」(1942년)에서 죽음과 같은 삶 속에서 부활을 믿으며 "시대처럼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는 미래를 향한 강한 기다림의 염원을 품을 수밖에 없다. 비 내리는 어느 날 밤 조국을 빼앗아 간 일본의 "육첩"하숙방에서 쉽게 시를 쓰는 것을 자조하면서 식민지 으로서의 부끄러움의 정신은 끝내 잃지 않고 있다.

화자가 기다리는 아침에는 기독교의 종말론적인 아침과 우리 민족이 당연히 맞이해야 될 아침이라는 의미가 겹쳐져 있다. 이 시로 연행되어 일본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았다는 것은 이 시가 일본인에게 어떻게 읽혔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며 또한 이 시가 품은 내밀한 뜻과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4. 문학사적 의미와 앞으로의 연구과제

윤동주의 대표작들은『문장』과『인문평론』을 위시한 문예지가 폐간당하고 모국어를 전혀 쓸 수 없었던 시기, 많은 이 검거되고 투옥되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문학활동이 전면적으로 불가능해진 시기에 집중적으로 쓰여졌다. 윤동주 시의 대부분은 해방 직후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된 이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의 시들은 가장 어두운 역사적 시대 속에서 문학적 사명과 신념을 투명한 대속의 자세로 살아 남은 유물이다.

"일제하 마지막 시인인 동시에 해방 후의 시단과 연결되는 맨 처음의 시인이며,일제하와 해방 후를 잇는 기념비적 위치를 차지하는 시인"이라는 문학사적 위치는 아직도 낡지 않은 논의로 머문다. 사망 당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 보관되어 있었다던 의문의 시편들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의 시가 저항시인가의 여부에 대한 논의보다는 시가 가진 본래의 저항성의 본질과 어떠한 형태로 관련성을 갖는지에 대해 보다 진전된 논의들이 이어져야 한다.

윤동주는 일제 말기 암흑기를 살면서 자아 성찰을 통하여 내면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역사 의식을 표현했다. 시대의 무게에 비하면 이렇게 소극적인 태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암흑기 문단사의 별로서 존재한다. 그 이유는 현실의 어둠을 견뎌 내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았고,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참회하고 절망의 극한에 이르러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지속적으로 노래했던 그 신념의 빛 때문이다.

윤동주에대한 모든것 내공 20

... 윤동주에 대한 모든것을 가르쳐 주세요,., 예를 들자면 그가 쓴 시, 연보 , 문학사상 등등,, 내공 20 이고요 정리해서 해즈세여 백과사전 복사 ㅈㅅ요,, edu9508 님의 오픈백과...

윤동주의 서시에 대한 질문!! (내공은 100~)

... 서시중 시어의 함축적 의미 최대한 빨리 답해주시길......... 내공냠냠은 신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윤동주 - 서시 1....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

... 해석해주세요 내공 50 윤동주의 "참회록"은 그의 죽기 전 마지막 작품 중 하나로, 그의 삶과 죽음, 믿음 등에 대한... 호용론은 신이 창조자로서 세계를 창조하였고, 모든 것이...

[내공50]윤동주 삶에 대한 논평

... 삶에 대한 긍정적인 논평을 하려면 어떠한 근거가 있을까요? 윤동주의 삶과 작품 세계 1. 윤동주의 작품 세계 1) '서시'는 1941년 11월 20일 이란 창작 일자가 알 수 있는 시로...

바람과 별과 시>에 대해서... (내공 20)

... 답변 빨리 부탁^^ (잘쓰면 뽀나스 내공드림) 음,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윤동주에 대한 정보는 다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윤동주 (尹東柱/1917.12.30~1945.2.16)...

내공 20 플레이브에 대한 모든것

진짜 정말 제목 그대롭니다 플레이브에 대한 모든거 다 알려주세요ㅠ 그리고 버블 하면 누가 제일 많이오는지도ㅠ 1.플레이브에 대한 모든것 이건 첫글 분님 말대로 나무위키를...

윤동주 서시

... 최대한 빨리요 내공냠냠 신고합니다 작가 : 윤동주 갈래... 이 시에는 '1941년 11윌 20일'이란 창작 일자가 남아... 이런 마음으로 '죽어 가는 모든 것' 즉 '소멸되고 사그라지는...

윤동주의 서시에 사용된 표현법 좀...

... 2연 (현재) 1연 1-2행 부끄럼이 없는 삶에 대한 간절한... 11윌 20일’이란 창작 일자가 남아 있는데 이 때는 윤동주... 이런 마음으로 ‘죽어 가는 모든 것’ 즉 ‘소멸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