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한가지만 질문좀 할게요 ㅠ

님아 한가지만 질문좀 할게요 ㅠ

작성일 2009.08.22댓글 1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ㅈㅅ한데요 이집트 미술이 이집트 문명의 문화 인가요?

 

그리고요 피라미드 이런것들이 유물임?

 

분류좀 해주세요 ㅠㅠ

 

경제

사회

문화(종교)

 

및 각종 유물

 

이렇게 조사해야 해서요 ㅠ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이집트 미술 역시 이집트 문명이 남긴 문화입니다.

피라미드 역사 이집트 역사가 남긴 유물입니다.

 

참고로 이집트의 종교 안내 합니다.

 

 

 

 

  이집트의 종교

 

 

 

* 종교의 중요성

 

 종교는 고대 이집트인의 생활에서 거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정도로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예술은 종교적 상징의 표현이 대부분일 정도다. 문학과 철학은 종교적 가르침으로 채워졌고, 고왕국의 통치 형태는 신전 정치였으며, 심지어 제국 시대의 군사적 파라오들조차도 신의 이름으로 통치한다고 공헌할 정도였다. 이집트의 물적 자원은 그 상당량이 정교한 무덤을 만들고, 사제들을 지원하는데 소모되었다.

 

* 초기의 종교 발전

 

 고대 이집트의 종교는 여러 단계를 거쳤다. 소박한 다신교에서 유일신교의 초기 형태로 발전하다가 다시 다신교로 되돌아갔다. 처음에는 각 도시나 지역이 제각기 지방신을 섬긴 것으로 보이며, 그 신들은 각 지방의 수호신이거나 또는 자연적 힘을 의인화한 존재들이었다. 이집트의 통일은 영토의 통합뿐 아니라 이러한 여러 신들의 통합까지도 초래했다. 모든 수호신들은 위대한 태양신 "라" 로 통합되었다. 이 신은 중왕국 시대에 테베 왕조의 지배권 장악과 더불어 흔히 "아몬" , 혹은 " 아몬-라" 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 이름은 테베의 최고신 이름에서 온 것이다. 자연의 생장력을 의인화한 신들은 나일 강의 신인 오시리스 로 통합되었다. 그후 우주를 지배하는 이들 두 신, 즉 아몬과 오시리스가 서로 주도권을 놓고 다투었다. 다른 신들도 인정되었지만 나중에 보듯이 그들은 종속적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 태양 신앙

 

 고왕국 시대에는 라 신 숭배로 구체화된 태양 신앙이 압도적인 신앙 체계가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공인된 종교로서 기능했으며, 주된 기능은 국가와 인민들에게 집단적인 불멸성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파라오는 지상에서 이 신앙의 살아 있는 대리인이었으며, 그의 지배를 통해 신의 지배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라 신은 단순한 수호신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그밖에도 정의, 정직, 진리의 신이자, 우주의 도덕적 질서를 유지하는 신이기도 했다. 라 신은 인민 개개인에게 영적 축복이나 물질적 보상을 주지는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결코 대중을 위한 종교는 아니었다.

 

  -오벨리스크 (obelisk)

  고대 이집트 왕조 때 태양신앙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

   

  방첨탑(方尖塔)이라고도 한다. 하나의 거대한 석재로 만들며 단면은 사각형이고 위로 올라 갈수록 가늘어져 끝은 피라미드꼴이다. 태양신 신앙과 관계가 있고, 고왕국(古王國)시대에 아브시르에 있는 제5왕조의 네우세르라 왕묘의 태양피라미드 신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분묘의 기념비로 건립되었다. 중(中)왕국시대 이후로는, 국왕의 통치 기념제 때에 신전탑문 앞에 한쌍이 건립되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것은 헬리오폴리스(태양의 도시라는뜻)에 있는, 제12왕조의 세누세르 1세가 건립한 것으로 높이 20.7m이다.

  제18왕조의 투트모세 1세 이후로 제왕(諸王)이 명문(銘文)을 4면에 새긴, 애스원의 화강석제의 오벨리스크를 카르나크의 아몬 신전 앞에 세웠는데 대부분 유럽에 반출되어, 현재는 투트모세 1세(23.2 m, 143 t)와 하트솁수트 여왕(29.6 m, 325 t)의 것이 하나씩 남아 있을 뿐이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 불리는 투트모세 3세의 것은 19세기에 워싱턴 D.C.와  런던으로 각각 가져갔다. 아스완의 채석장에는 길이 41.7 m의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하나 있다.

   

  -헬리오폴리스 (Heliopolis)

  태양신앙의 중심지이며 고대 그리스어로 ‘태양의 폴리스’라는 뜻이다.

고대 이집트 이름은 이우누이며, 성서지명(聖書地名)의 온(On)에 해당한다. 태양신(아툼 및 라)을 우주창조신으로 만드는 헬리오폴리스 신학(神學)은 오시리스 신화까지도 끌어넣어 이집트의 종교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른 대신(大神)은 라(Ra)와 교리(敎理)를 절충함으로써 태양신, 창조  신의 권위를 주장하였고 아크나톤(아멘호테프 4세의 별명)의 아톤신앙의  원천을 이루기도 하였다. 신역(神域)에 봉납한 태양신의 상징 오벨리스크는 1개만 남고 모두 해외로 유출되어 로마, 뉴욕, 런던의 광장에 있다. 또한, 레바논의 고대도시유적 발베크도 헬리오폴리스라고 불렸다.

 

*오시리스 숭배

 

  -오시리스 (Osiris)

오시리스는 그리스식 발음이고, 이집트어로는 우시르(Usire)이다. 오시리스는 땅의 신 게브와 하늘의 신 누트의 아들로 누이동생 이시스와 결혼하였는데, 후에 형의 지위를 노린 아우 세토에게 살해되어 몸이 갈기갈기 찢겨졌다. 이시스는 이 몸조각을 모아 매장하였는데 부활한 오시리스는 저승에 가서 왕이 되었다.

이 신화는 그리스 작가 플루타르코스의 《이시스와 오시리스에 관하여》(XII∼XX)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죽은 신을 애도하고 그 재생을 기원하는 오시리스 신앙은 예로부터 성행하였는데, 제5왕조(BC 2400?)부터는  파라오(왕)도 죽은 후에는 오시리스로 간주되었고, 또 사람이 죽은 후에는 모두 오시리스가 된다고 여겨졌다. 오시리스, 이시스는 로마 등지에서도 신봉되었다.

 

  -오시리스신화

오시리스는 이시스와 근친결혼을 하여 이집트를 28년간 통치하였으나, 동 생인 세트(그리스식 이름으로는 튜폰)에게 살해당하여 시체는 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버려졌다. 상자는 델타를 지나서 지중해로 흘러들어가 시리아 해안의 비블로스에 닿았다. 비탄에 잠긴 이시스는 이 상자를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비블로스에 당도하였다. 오시리스를 담은 상자는 비블로스에 도착한 후 무화과나무가 이를 에워싸 크게 되었다. 비블로스의 왕은 이 나무로 궁전의 기둥을 만들었으나 이시스가 이를 알고 그 상자를 되찾았다. 이 사실을 안 세트는 오시리스의 시체를 14토막으로 토막내어 온 나라에 뿌렸다. 이시스는 다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흩어진 오시리스의 시체를 모아다가, 누이동생 네프티스의 도움을 받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켰다. 그리고 생명을 되살리는 의식(儀式)을 행하였으나 오시리스는 이미 이 세상에서 살 수 없게 되어 있어 사자(死者)의 나라의 왕이 되었다. 남편의 시체와 상관하여 이시스가 낳은 호루스는 세트와 싸워 마침내 이겨 상, 하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좋아하였고, 오시리스 신앙은 농경의례(農耕儀禮)와 결부되어 성행하였다.

 

 오시리스 숭배는 자연 종교로서 출발했다. 오시리스는 식물의 성장과 나일 강이 가져다 주는 생명력을 상징하는 신이었다. 오시리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자세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집트인의 신앙에 의하면, 오시리스는 아득히 오랜 옛날에 자기 백성에게 농사짓는 법과 그 밖의 실용적인 기술을 가르쳐 주고 법률을 가져다 준 자비로운 지배자였다. 얼마 후 그는 그의 사악한 동생인 세트의 모반에 의해 살해당했고, 그의 시신은 갈갈이 찢겨졌다. 오시리스의 누이 동생이자 부인인 이시스는 그의 시신 조각들을 일일이 찾아내어 그것들을 다시 한데 모은 다음 그를 기적적으로 소생시켰다. 부활한 오시리스 신은 그의 왕국을 되찾고 얼마 동안 자비로운 통치를 하다가 결국에는 지하 세계로 내려가 죽은 자들의 재판관이 되었다. 그의 유복자인 호루스는 장성하여 세트를 살해함으로써 부친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했다.

 

- 오시리스 신화의 중요성

 

이 신화는 본래 자연 신화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은 나일 강이 가을에 마르고 봄에 홍수가 닥치는 것을 상징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오시리스의 전설은 좀더 심오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즉 신들과 연관된 인간적 특성들- 오시리스가 그의 신민을 향해 쏟은 아버지와 같은 심려, 그리고 그의 부인과 아들의 충직한 헌신- 은 평범한 이집트인의 정서에 호소력을 갖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 신들의 삶 속에 투영된 자신들의 고난과 승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이 개인적 영생의 약속을 전해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이다. 신이 죽음과 무덤에 대해 승리를 거둔 만큼 그를 충실하게 따르는 개인들도 영원한 삶을 조장받을 수 있었다. 끝으로 세트에 대한 호루스의 승리는 악에 대한 선의 궁극적 승리를 예시해 주는 것이었다.

 

*이집트인의 내세관

 

 이집트인의 내세관은 중왕국 후기로 들어서면서 원숙하게 발전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인간이 지상에 남긴 시신의 소멸을 방지하기 위한 정교한 준비가 행해져야만 했다. 시신이 미라로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부자들은 자신들의 미라에 음식물과 기타 생필품을 공급하기 위해 막대한 재산을 남겼다. 그러나 종교가 성숙하면서 사후 세계에 대한 이와 같은 소박한 생각은 줄어들게 되었다. 이제 죽은 자는 생전의 그의 행실에 대한 심판을 받기 위해 오시리스 앞에 서게 된다고 믿어졌다. 이러한 심판 체계에 포함된 시험을 통과한 모든 죽은 자들은 물질적 기쁨과 소박한 즐거움이 있는 천상으로 들어간다. 백합과 망우수가 우거진 이곳의 늪지대에서 그들은 기러기와 메추리 사냥에 끝없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또는 그들은 맛 좋은 과일이 끊임없이 열리는 동산 한가운데 집을 지을 수도 있다. 그들은 뱃놀이를 할 수 있는 백합의 호수, 목욕을 할 수 있는 연못, 그리고, 노래하는 새와 온갖 온순한 동물이 살고 있는 그늘진 숲을 발견한다. 반면에 그의 심장이 사악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불운한 희생자들은 철저한 파멸을 당한다.

 

  -미이라(Mummy)

고대 이집트에서의 매장 양식은 죽은 자와 관련된 오시리스 신화, 육체와 영혼 분리를 명확 하게 규명하는 독특한 인간관, 그리고 육체를 보존하기 위한 미이라로 인해 좀 더 구체적으 로 조명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누구  든지 죽은 후 오시리스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시신을 미이라(Mummy)로 보존 처리해야 한다는 장례 풍습은 이집트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되었다. 미이라는 그 종류에 따라서 땅속에 묻히거나 건조되어 보존된 자연적 미이라와 의도적인 절차에 따라 만들어진 인위적 미이라로 양분된다. 시베리아, 유럽, 남미의 고원지대에서 발견되는 자연적 미이라들은 주로 추운 지역에서 냉동된 상태로 보존된 것들이다. 그 외에 탄광, 늪지대 등에서 시신이 묻힌 후 산소가 빠져나가 썩지 않고 보존된 경우도 있고, 사막 지대 의 건조함 때문에 자연적인 미이라가 되는 경우도 있다.

미이라의 제작 과정은 고대 이집트의 단편적인 문서들과 특히 서기전 5세기 헤로도투스의 기록을 통하여 구체적인 과정들이 알려졌다. 먼저 "이부(ibw)" 즉 "정결의 장소"라 불리는 천막에서 시신을 천연 탄산소다(natron) 물로 씻은 다음, "아름다움의 집"이라는 의미의 " 페르 네페르(per nefer)"  천막에서 본격적인 미이라 작업이 진행된다. 시신에서부터 뇌와 내장들을 제거한 다음 간, 허파, 위장, 창자 등은 특별히 제작된 네 개의 케노푸스 단지(canopic jars)에 담아서 미이라와 함께 보존한다. 내장 중에서 심장을 시신으로부터 제거하지 않는 이유는 이 곳에 인간의 모든 정신이 담겼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시신은 70일간 천연 탄산소다에 덮어두어서 수분을 완전히 제거한 다음 아마포로 전신을 감싸게 된다.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 미이라는 이집트의 초기 왕조시대(서기전2920-2575)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고왕국 시대(서기전 2575-2134)인 제 4왕조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신에서 내장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고 탄산소다를 내장들을 보존하는데 사용하였다. 중왕국 시대(서기전 2040-1650) 부터는 시신 자체를 보존하는데 탄산소다를 사용하였고 시신이 마르게 되면 아마포로 감싸고, 향수와 송진을 그 위에 부었다. 신왕국 시대(서기 전 1550-1070)에 들어와 미이라 제작 기술이 절정을 이루었으며 지금까지 발견된 왕들의 미이라가 대부분 이 시대의 것이라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오시리스숭배와 내세관의 대중화

 

 이집트의 역사가 발달하여 장례 의식, 특히 미이라 제작이 왕족 및 귀족들에게만 국한되던 것이 일반인들에게까지 퍼져나가면서 소위 "내세관의 대중화(Democratization of the After Life)"가 이루어졌다. 즉 누구든지 죽은 다음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미이라로 만들고 내세 여행에 필요한 장례 문서 및 부장품들을 갖추기만 하면 그 당사자의 영혼은 신들과 함께 영 생을 누리게 된다는 신앙이 확산되게 된 것이다. 또한 미이라 제작 기술과 전문인들의 양성으로 누구든지 죽은 후에 저승에서의 영생이 가능하게 되었다.

장례 문서들의 발전을 통해 볼 때 고왕국 시대의 피라미드 문서가 왕족들의 영생을 위한 것이었지만 중왕국 시대의 관문서는 내세관이 중산층에까지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나아가 신왕국 시대에는 왕족들에게는 무덤 벽화와 기록을 통하여 내세로의 안내가 이루어졌다면 파피루스에 기록된 죽은 자의 책을 통하여 일반인들도 영생을 얻는 계기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장례 의식에 따른 내세관에 기초한 고대 이집트의 죽은 자의 종교는 왕궁이나 신전에서만 국한된 특권층으로부터 출발하였지만 시대적 변화에 따라 차츰 대중에게 퍼져나가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러 한 내세관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계기가 바로 오시리스 신화이며, 이와 관련된 매 장 양식의 보전과 전승을 통하여 고대 이집트 종교의 특성 중의 하나인 오시리스교의 전통 을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윤리적 종교의 등장

 

 이집트의 종교 발전은 중왕국 말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태양 신앙과 오시리스 숭배는 이 무렵에 두 신앙의 최선의 국면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통합되었다. 살아 있는 자들의 신이며 현세에서 선의 옹호자인 아몬의 직분은, 인간에게 영생을 가져다 주고 죽은 자를 심판하는 오시리스의 기능과 거의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받았다. 이제 종교는 명백히 윤리적인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정의를 행하고자 하는 그들의 염원을 거듭해서 고백했는데, 이는 그러한 행위가 위대한 태양신을 기쁘게 하기 때문이었다.

 

* 종교의 타락

 

 제국이 수립되자마자 이집트인의 종교는 심각한 타락을 겪게 되었다. 종교에서 윤리적 중요성은 파괴되고 미신과 주술이 득세했다. 주된 원인은 힉소스인을 몰아내기 위해 오랜 동안 격렬한 전쟁을 치르면서 비합리적인 태도가 몸에 익숙해지고, 그에 따리 지성을 경시하게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사제들의 세력이 증대되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대중의 두려움을 이용했다. 그들은 죽은 자의 심장이 그의 본성을 폭로하지 않게 해 준다는 주술적 부적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한 제문을 판매했는데,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적힌 이 제문을 무덤에 함께 묻으면 죽은 자들이 천상계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문을 모아 놓은 것이  "사자의 서"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자의 서는 이집트인의 경전으로 인식하지만, 중왕국 이후에는 사자의 부장품, 즉 제문들을 모아 놓은 것일 뿐이다.

 

  -사자의 서 死者-書 (Book of the Dead)

파피루스, 가죽 등에 성각문자(聖刻文字:히에로글리프), 신관문자(神官文字:  히에라틱문자), 민중문자(民衆文字:데모틱문자) 등으로 적어, 제18왕조 이후에 매장되었다. 사자(死者)는 사후의 세계에서 여러 가지 사건에 부딪친다고 하는데, 그 경우에 외는 주문(呪文)이나, 신(神)들에 대한 서약에 대하  여 적혀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내세관(來世觀)을 아는 데에 귀중한 사료(史料)가 되지만, 그 중에서도 사자의 심판을 취급한 대목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 기원은 매우 오래되어, 이와 비슷한 문장은 고(古)왕국 시대의 피라미드텍스트나, 중(中)왕국시대의 코핀 텍스트 등에서 볼  수 있다.

 

* 아케나톤의 종교혁명

 

 이렇듯 사제들에 의해 종교가 주술적 체계로 전락하자 마침내 거대한 종교 혁명이 초래되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는 신왕국 시대 제18왕조의 왕인 아멘호텝 4세였다. 그는 가장 극악한 종교 타락을 시정하고자 시도했다가 실패를 맛보자, 그 후로는 아예 그 종교 체계를 절명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사제들을 신전에서 몰아내고, 전통적 신들의 이름을 공공 기념물들에서 삭제해 버렸으며, "아톤" (태양의 옛 명칭)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신을 섬기도록 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아멘호텝에서 아케나톤으로 바꾸고, 또  그의 부인 네페르티티도 네페르-네프루-아톤으로 바꾸었다. 아케나톤은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려는 생각에서 수도를 새로 엘- 아마르나 에 건설하고 이 도시를 새로운 신에게 바쳤다.

 

  -아톤 (Aton)

아톤 숭배는 아크나톤(아멘호테프 4세)의 종교개혁에 의하여 기존의 국가 신 아몬을 대신하여 적극 추진되었는데, 얼마 안 가서 아톤 신앙으로 정착되었다. 아톤 신앙의 중심지는 현재의 텔엘아마르나로, 그곳에 있는 한 묘능(墓陵)에서 발견된 '아톤찬가(讚歌)'는 그 격조가 높기로 유명하다.

 

* 종교의 윤리성 회복

 

 이러한 물리적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련의 새로운 교리가 개혁 파라오에 의해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일정한 한계는 있지만 최초로 유일신교를 가르쳤다. 현존하는 신이라고는 오직 아톤과 아케나톤이 있을 뿐이었다. 과거의 신들과는 달리, 아톤은 인간이나 동물의 형상을 갖지 않았으며 생명을 주는 따뜻한 태양 광선으로 간주되었다. 아케나톤은 스스로를 아톤의 후계자이자 공동 통치자라고 생각했다. 파라오와 그의 부인은 아톤 신에게 예배를 드린 반면, 여타의 사람들은 살아 있는 신인 아케나톤에게 예배를 드려야 했다. 아케나톤은 아톤 신이 세계의 도덕적 질서의 창시자이며, 고결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보상을 베푸는 존재라고 주장함으로써 이집트 종교의 윤리성을 회복시켰다. 그는 새로운 신을 인간성에 유익한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존재로서, 그리고, 그의 모든 피조물을 자비로운 눈길로 굽어보는 하늘의 아버지로 묘사했다. 이러한 신의 일관성, 정직, 자비 등의 개념은 그로부터 600여년 후 히브리의 예언자들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등장했다.

 

* 종교혁명의 실패

 

 종교 혁명에 대한 아케나톤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아톤 종교는 대중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대중은 여전히 과거의 신들에게 헌신적이었기 때문이다.

 새 종교는 그들에게는 너무도 낯설었던 데다가 종전의 종교가 지녔던 매력, 즉 내세에 대한 약속을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아케나톤 이후의 파라오들은 아몬신의 사제들과 결탁함으로써 과거의 신앙을 회복시켰다. 아케나톤의 계승자로서 "투트왕" 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파라오는 그의 이름을 투탕카톤에서 투탕카멘으로 바꾸었고, 수도도 엘- 아마르나에서 옛 수도인 테베로 다시 천도하면서 과거로의 복귀를 주도했다. 그의 무덤 역시 옛 의식과 사후 세계에 대한 집착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였다. 그 후 이집트 종교에서는 의식주의와 주술에 대한 믿음이 커졌다. 사제들은 신들을 속여서 구원을 얻도록 해 준다는 제문과 부적을 팔았다. 그 결과 오시리스 숭배마저도 고매한 도덕성을 대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님아 한가지만 질문좀 할게요 ㅠ

... 해서요 이집트 미술 역시 이집트 문명이 남긴 문화입니다. 피라미드 역사 이집트... 인해 더 구체적으 로 조명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누구 든지 죽은 후 오시리스가...

님아 질문 할게있어요 .

... 홈페이지 링크좀 달아주세요 소설판은 정발이 안 됐고... 알아보기 힘듭니다. 발매일순으로 정렬하시면 구분하기 쉬울...

답변 감사합니다~!(추가 질문좀 할게요...

... 질문드렷던 족자가 재산 즉 돈으로서의 가치는 없는걸까요? 또 한가지.. 지금 첨부한 사진, 데이쇼 천황과... 드물긴 한데요. 이런 경우에는 안씨 집안내에서는 사료적...

참이름님 이름 질문좀 할게요ㅠ

... 항목별로 주요 핵심부위에 한 가지라도 나쁨이 나오면 보통이하로 평가됩니다. 주요 작명기법에서 한가지의 흠은 성명학적으로는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노벨에대해서 질문좀 할게요...^^

... ,이제 노벨에 대해서 질문좀 할게요~ --노벨의 고민 해오기-- *개발과 발전을 위해...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재앙이 되는 기체의 종류와 예 중에서 한가지를 골라서 될수...

피파온라인 커리어 질문좀할게요ㅠ.

저는 지금 레벨40이구 아스날에있는데요ㅠ. 제가 허접이구 잘몰라서ㅠ.... 단 한가지!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돈을벌고 난후 그선수가 있는팀으로 옴겨서 데리고...

질문좀 할게요저.. 노래를 찾고있는데

질문좀 할게요저.. 노래를 찾고있는데요... 애들이 보아노래라고 하는데... 이름을 잘 몰라서 가사 한가지만... 답해주세요 ; 대사를 대충해서;; 내공겁니닷; 까만 밤하늘에밝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