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의 시경향

신경림의 시경향

작성일 2004.01.08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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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무를 중심으로 해서 .. 신경림의 시경향을 파악해본다면 _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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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집 [농무(農舞)]에 대하여 - 제1회 만해문학상 심사를 마치고

신경림씨의 시집 [농무]는 새 각광을 받는다. 이는 신씨의 시가 모두 걸작이라는 것도 아니요, 그가 위대한 시인이라는 것도 아니다. 그는 시의 리얼리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리얼한 데서 시의 감동을 찾는다. 진실로 리얼한 데는 산문에도 시와 같은 감동이 있다. 그의 시의 감수성이나 언어구사가 그런 데 기조를 두고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민족 정서의 바탕은 농촌에 있었던 것인데, 현대의 물질 문명에 눌려 우리는 그것을 가난으로만 알고 잊어버렸다. 이것을 오늘의 독자들의 감수성에 맞도록 회복하는 것이 한국시가 살아가는 하나의 길이 될 수도 있다. (1974.5)
글 : 김광섭, 신경림 시집 [농무] (창작과 비평사, 1985) p. 113

2. [새로 읽는 그작품] 신경림 시집 `농무'.....글 안도현
## 친근한 언어로 담아낸 `70년대 삶'...현실 그대로 묘사 새 장 ##.

비탈진 달동네 개똥이네집 지붕이 비만 오면 샌다거나 공장에 나가는순이가 얼굴이 헬쓱하다는 이야기조차 마음 놓고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도 없는 일처럼 꾹꾹 덮어 두는 게 제대로 세상을 사는 방식임을 가르치고 또 익히던 시절. 그야말로 가난이 죄라서문학예술마저 그 가난을 드러내기를 주저했고, 오히려 외면하고 말았던시절.

[농무]라는 한 권의 얇은 시집이 조근조근 되셔겨낸 세계는 현실의 사실적 묘사 하나만으로도 크나큰 사건이 될 만했다. 얻어 쓴 조합 빚과 술집 색시의 분 냄새와 담뱃진내 나는 화투판이 소외의 장막을 활짝 걷어젖히고 신선한 시어가 되어 한국문단의 주류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파장])는 화두를 접한 [못난 놈]들이 비로소 소줏잔을 들이키며 당당히 어깨를 흔들수 있게 되었던 것.

열일고여덟 살 무렵 [농무]가 아직 내 책꽂이에 꽂히기 전, 까까머리나는 이른바 고등학생 문단을 들락거리던 나름대로 [잘난] 문학소년이었다. 쥐뿔도 없는 내가 잘난 척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입맛에 맞는 시를 척척 써낼 수 있었기 때문인데, 그 기술을 나에게 전수한 것은 요샛말로 모더니즘이었다. 가증스러울 정도로 치밀하게 언어를 계산하는 데 몰두했으며, 삶의 남루와 슬픔을 함부로 까발리지 않아야한다는 자기 제어 장치도 마련해 두고 있는 터였다. 나는 향기롭기만한 시를 쓰고자 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겨운 풍경들이 내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전에는 나와 어울려 놀았으나, 내가 까마득하게 잊어 버린, 빛바랜 흑백사진속에 담겨 있던 풍경들이 생생하게 다시 인화가 되어 나타났다.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무력하나 약하지 않다}는 시집속의 평범한 좌우명 하나가 실제로 시골 큰집 내 사촌 형의 책상 앞에 붙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 권의 시집 속에 쓸쓸하고 고단한 줄로만 알았던 세계가 그렇게 눈부신 또아리를 틀고 들어앉아 있었다니! 게다가 구태여 말을 비비 꼬지 않더라도 시가 태어날 수 있으며, 한토막의 이야기도 서정을 만나면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새롭게 배웠다.

원래 이 시집은 한 이름없는 출판사에서 시인이 자비로 5백부 한정판을 낸 뒤에 1975년 [창비시선] 제 1권으로 재출간된 것이다. 이십 년이지나도록 시집을 찾는 이들의 손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니 과히 시를쓰고자 하는 문학청년들의 빠뜨릴 수 없는 교과서가 되고 있다 하겠다.

-[조선일보] 발행일 : 97년 09월 23일

3.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신경림씨

신경림(61)씨의 시집 초판이 나온 것은 1973년 초였다. 월간문학사 간행의 3백부 자비출판이었다. 당시만 해도 시집을 자비출판하는 것이야 관례에 속하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월간문학사'. 정식 등록조차 돼 있지 않은 이 무허가 유령 출판사의 정체인즉, 한국문인협회의 기관지인 과 관련돼 있다. 마땅한 출판사를 찾지 못한 시인은 절친한 지기인 소설가 씨가 편집을 맡고 있던 이 잡지의 명의를 잠시 빌리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가 그 뒤 20년 이상 한국 시의 한 흐름을 주도하며 독자들과 후배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리라고는 시인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이 시집은 다음해 시인에게 제1회 만해문학상을 안겨 주었고, 다시 한 해 뒤에는 창작과비평사에서 야심적으로 기획한 `창비시선'의 제1권으로 재출간됐다.

`창비시선'의 무녀리로서 는 좁게는 이 기획의 성격을, 넓게는 민족문학 진영의 시가 나아갈 방향을 어느정도 규정해 주었다. 가 지니는 그같은 규정력은 평론가 유종호씨에 의해 `선행 시편의 추문화'라는 개념으로 정리된 바 있다. 이 시집의 어떤 점이 앞선 시들을 한갓 추문(醜聞)으로 만든 것일까?

김수영이나 신동엽과 같은 예외가 없지는 않았지만, 60년대까지의 한국시를 지배한 것은 현실에서 벗어나 언어를 번롱(飜弄)하는 모더니즘의 그릇된 작풍이었다. 다수 대중이 몸담고 살아가는 현실로부터 떠난 시는 당연히 그 현실의 주인인 대중들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고, 시와 현실, 시와 대중 사이의 괴리는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시집 의 새로움은 내용에 있어서 60년대 농촌의 곤핍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점, 그리고 형식에 있어서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어휘와 문장을 동원했다는 점으로 크게 구별된다.

(전략)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 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하략) --- 일부

신경림씨는 1956년 에 `갈대' 등이 추천돼 시단에 나왔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조용히 울고 있었다.”로 시작해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로 끝나는 `갈대'를 비롯한 그의 초기작은 앞에서 든 시집 의 전반적인 기조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시인이 등단 이듬해 초까지 시를 발표하다가는 홀연 낙향한 뒤, `겨울밤'을 발표하는 65년 말까지 10년 가까이 침묵을 지켰다는 사정이 자리잡고 있다.

“그때까지 내가 썼던 시들에 대해 회의도 생겼고, `불온한' 독서회에 가담해 있던 차에 조봉암의 진보당 사건이 미칠 파장이 두렵기도 해서 고향으로 내려갔다. 농사도 지어 보고 광산이나 공사장 일도 하고 장사도 하다 보니 10년이 훌쩍 지나가더라.”

에 그려진 농민적 삶의 세목은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중반까지 시인이 고향인 충북 충주를 비롯해 문경·평창·영월·춘천 등지를 떠돌며 보고 겪은 일들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농사는 안 되고 세상은 갈수록 힘겨운 씨름 상대로 변해가는데 농민들과 날품 인부들은 술에나 취하고 광태(狂態)를 연출하는 것으로 현실을 잊고자 한다. 울분과 절망에 휘둘리던 농민들은 문득 짐을 꾸려 서울을 향한다. 하지만, 그들을 맞은 서울은 서울이 아니었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죽어 버리자고 복어알을 구해 온/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애비 없는 애기를 밴 처녀는/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산 일번지')

시집 의 또다른 축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역사적 격동이 민초들에게 가한 시련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이 모두/싫어졌다”는“대학을 나온 사촌형”, “울분 속에서 짧은 젊음을 보낸” 죽은 당숙,“네 아버지가 죽던 꼴을 잊었느냐”고 주정을 하는 또다른 당숙 등이 그 시련을 대변한다.

시집 의 무대는 시인의 고향인 충주시 노은면 연화리 장터와 보련골, 그리고 충주시 일대다. 13대 선조 때부터 들어와 살았다는 보련골은 이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보련산(764m) 아래의 아주 신씨 집성촌이다. 산과 계곡, 적당한 크기의 들을 두루 갖춘 아름다운 고장은 구한 말부터 광산이 개발되면서 광산촌이 됐다. 시인의 탄생지인 입장(立場)은 광산 개발에 따라 시장의 필요성이 대두하자 큰길가에 세워진 마을이다. 이 크지 않은 면소재지에도 처음으로 4층짜리 연립주택이 세워져 `노은 빌라 분양 개시'를 알리는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낀다. 보련산의 그 많던 탄광은 오래 전에 폐광돼 보련골은 전형적인 농촌의 면모를 되찾았다. 평화롭고 풍요로운 그 정경의 어디에서도 30년 전의 울부짖음은 들을 수 없다.

보련산 너머 남한강변의 는 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시인의 또다른 대표시인 `목계장터'의 무대가 된 곳이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방물장수가 앉아 쉬곤 했던 주막은 속절없는 세월에 쫓겨 간 곳이 없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를 대신해서는 매점의 산뜻한 파라솔이 성하(盛夏)의 햇볕을 피해 그늘을 찾아든 길손들을 맞이한다. 폐쇄된 나루 아래쪽에는 지난 73년에 세운 목계교가 시의 이야기를 과거로, 과거로 밀어내고만 있다.
[한겨레신문] 1996. 8. 9


4. 이희중님의 농무해설

신경림 시인은, `농무'란 원래 없는 말인데 이 시를 쓰면서 지어낸 것이라 했다. `농무'란 농악을 할 때 추는 춤을 가리키는 것일텐데, 말은 시인이 지어낸 것이지만 그 몸짓은 이미 있던 것이다. 이 시에는 1960년대의 농촌 모습이 잘 담겨 있다. 사실 그 모습은 여러 정황을 볼 때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놀이의 분위기가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그 놀이는 즐거움으로 충만한 것이 아니다. 놀이와 춤이 분풀이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농부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무슨 약식 공연을 했던 모양이다. 공연은 끝났고, 학교 앞 소주집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에게 허탈감이 밀려왔고, 그들 모두 장거리에서 다시 춤판을 만드는 과정이 찬찬히 그려지고 있다. 아이들과 처녀애들만이 춤판을 구경하고 있을 뿐이지만 보름달 아래 농부들은 임꺽정의 주인공들처럼 신명을 낸다. 술자리에서 장거리의 춤으로 이어지는 춤판의 과정 묘사에 끼어드는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라는 구절이나,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라는 구절은 농촌의 현실과 농부들의 심정을 잘 전해 준다. 그래서 현실의 불우한 조건을 넘어선 흥겨운 축제를 표방하고 있는 이 시의 표면적 주제는, 뒷면에 숨겨진 당대의 사회·정치적 현실을 다분히 문학적인 방식으로 고발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고발의 방식은 문학을 압도하지 않으며, 독자들에게 충분히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시상의 진전과 더불어 나아가다 보면, 우리도 어느새 시 속의 농무와 함께 `한 다리 들고 날라리를 불'고,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게 된다. 그리고 그 공감과 참여가 현실을 잊고 얄팍한 위로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의 착잡함을 이겨내는 민중의 생명력을 확인하는 일에 귀결됨을 깨닫기란 어렵지 않다.
이 시는 좋은 민중시, 농촌시의 전범으로 손색이 없다. 장르의 특성상 시는 사실주의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편이 아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아예 부정할 수 없다면 그 방도는 신경림이 개척한 시의 영역과 매우 가까이 있을 것이다. [해설: 이희중]


5. 양승국, 양승준 현대시의 애해와 감상 400
이 시는 산업화의 거센 물결로 인해 급속도로 와해되어 가던 1970년대 초반의 농촌을 배경으로 농민들의 한과 고뇌를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농촌의 절망과 농민의 울분을 고발, 토로하고 있으면서도, 그 울분이 선동적이거나 전투적인 느낌으로 발전되지 않는다. 그것은 '날라리를 불'고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드'는 '신명'으로 끝나는 작품 구조에 의해서 교묘한 역설과 시적 운치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울분과 절망을 정반대의 '신명'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농민들의 처절한 몸짓을 통해 그들의 아픔이 역설적으로 고양되는 효과를 얻게 된다.
연 구분이 없는 20행 단연시 구조의 이 시는 내용상 4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단락은 1∼6행으로 농무가 끝난 뒤 농민들이 '소줏집'에서 답답하고 고달픈 심정을 술로 달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로 시작되는 1행은, 농무가 두렛일의 흥겨움보다는 농민들의 자조적인 한탄과 원한의 몸짓임을 나타내기 위한 예고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농무가 끝난 뒤의 '텅 빈 운동장'이 주는 공허감은 이젠 더 이상 농무에 신명을 느낄 수 없는 농민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자, 이런 현실에 대한 공연자의 안타까움과 공허함을 표한한 것이다. 그러므로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한' 그들은 텅 빈 마음과 고달픈 삶을 그저 술로 달랠 뿐이다.
2단락은 7∼10행으로 농악패에 대한 농민들의 냉담한 반응을 통해 예전과 달라진 농촌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이 옛날의 풍습대로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 보아도, 신명나게 놀아 주던 어른들 대신, '조무래기들'만 악을 쓰며 따라붙거나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 철없이 킬킬대는' 처녀애들뿐이다.
11∼16행의 3단락은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를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나온 그들이 자신의 울분을 춤으로 삭이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춤을 추는 그들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거나 '서림이처럼 해해대'며 즐거워하지만, 결국은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하며 자신들의 삶을 자학하거나 체념하고 만다. 임꺽정과 서림은 민중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이들을 구체적으로 거명한 까닭은 농민들의 한과 슬픔이 다만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과 함께 해 온 역사적인 것임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 배려로 볼 수 있다.
4단락은 17∼20행으로 자신의 한과 고뇌를 신명난 춤을 통해 극복하는 모습이다.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이르렀을 때, 농민들의 현실에 대한 분노는 '살의'가 느껴질 정도로 극에 달하지만, 오히려 '날라리를 불고' 덩실덩실 '어깨를 흔드'는 신명으로 바뀜으로써 그들의 비애가 그만큼 심화되어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농민들이 추는 춤은 그들이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현실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 강한 몸짓이며, 자신들의 고뇌와 한의 뜨거운 발산임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생활 터전을 지키려는 농민들의 안타까운 몸부림을 농촌의 일상 언어를 통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농민들의 정취와 정감을 물씬 느끼게 해 주는 한편, 농민들의 격한 감정을 직접적인 서술로 표출하면서도 농무의 동작이나 농악기의 소리로 적절히 제어함으로써 탄탄한 서정성을 아울러 갖추고 있다. 가난과 절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농민과 소외된 농촌을 상기시켜 주는 뛰어난 문학성으로 말미암아 이 시는 제1회 만해 문학상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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