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매생각" 줄거리 좀 알려주세요~

"외할매생각" 줄거리 좀 알려주세요~

작성일 2005.05.29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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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시간에 수필읽기중 '외할매생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ㅠ

 

   그거 줄거리좀 써주세요 ㅠㅠ 제발 부탁이에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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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이 되셨길.


외할매 생각


이상석


구름이 낮게 깔리고 빗방울이 후둑후둑 창을 때리는 날 교실은 더욱 아늑해진다. 넋을 놓고 창 밖의 빗줄기에 눈을 준 아이들 모습은 참 예쁘다. 책을 펼생각은 앉고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바라보는 모습도 예쁘다. 나의 마음은 애들보다 먼저 감상에 젖어 있다. 이런 날 책을 들고 밑줄을 그어 가며 문단이 어떻게 나뉘고, 문장 성분이 어떻고, 품사가 어떻고 하기엔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도 선생이랍시고,

“아들아, 공부해야지. 책 펴자.”

하면 아이들은 어림없다는 투다.

“선생님, 얘기해 주세요……예?”

“귀신 얘기해 주세요. 집에도 못 가게요.”

“야는 야! 귀신 얘기가 뭐고, 시시하게. 저…… 선생님 있잖아요. 그 뭐랄까. 우리들의 심금을 울려 주는 그런 거…… 첫사랑 얘기라든가……”

“맞다! 선생님. 첫사랑 얘기해 주세요. 첫사랑! 야, 모두 박수……!”

교실은 금방 생기를 띠고 아이들은 자기들의 온화한 감정을 결코 딱딱한 수업으로 뺏길 수 없다는 자세다.

“사실은 나도 공부하긴 싫다. 오늘 같은 날은 안 그래도 첫사랑 생각이 나누만……”

교실은 까르르 웃음이 넘치고, 이제 귀를 쫑긋 세워 내 입만 뚫어지게 쳐다본다.

나는 해마다 아이들에게 꼭 외할머니 얘길 들려준다. 수업보다 이것이 더욱 필요하리란 생각에서다. 더욱이 할머니, 할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잃고 살아가는 도시 아이들에게는 더욱 필요한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들, 김이 좀 새겠지만 나의 첫사랑은 우리 외할매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도 우리 외할매거든. 나는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거나, 봄빛이 화사한 날이거나, 겨울 저녁 쓸쓸한 노을이 질 때도 할매 생각이 나더라.”

외할매는 젊은 나이에 홀로 되셔서 딸 하나를 데리고 사셨다. 외할아버지는 늘 집을 비우시고 상해로 만주로 떠돌아다니셨다는 것밖에 모른다. 오직 하나 남아 있는 모습은 파고다 공원에서 백범 김구를 모시고 여러 분이 함께 찍은 사진 한 장뿐이다. 외할머니는 죽으나 사나 베틀에 매여 있었다. 바람처럼 다녀가는 남편이 무엇을 하는지 알려고도 않으시고 딸 하나와 시어머니 봉양에 앞니가 몽그라지도록1) 베만 짜셨다 한다. 할머니는 그때의 가난이나 고생은 잘 이야기해 주지 않으셨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서 그랬을까. 고생한 기억은 쉬 잊혀져서 그랬을까. 딸을 시집보낼 때 샀던 큰상에는 어느 구석에 무얼 넣고, 또 무얼 넣고, 고기는 어찌해서 넣고, 엿 당세기는 어땠고, 하나 빠짐없이 지금 막 다시 싸듯 또르르 꿰고 있어서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젊었을 때 얘기는 억세게 배가 고팠다는 것밖에 말 안 하셨다.

딸의 혼사가 정해지고 얼마 안 있어 외할아버지는 대구 어느 곳에서 숨을 거두셨고, 굳은 몸으로 집에 들리셨다가 땅으로 돌아가셨다. 계실 때도 집안 살림에 도움을 주지 않으신 분이었지만 돌아가신 뒤는 집안이 더욱 곤궁해졌으리라. 그래도 억척이신 외할머니는 대구 옷 도매상에서 내의 따위를 떼어다가 장날이면 전을 벌였고, 변함없이 베를 짜는 것으로 웬만큼은 살림을 꾸릴 수 있었다.

딸을 시집보내고 홀로 계시던 외할머니는 외손자를 낳았다는 소식에 좋아서, 좋아서 부엌에 갔다가 방에 갔다가, 빨래거리를 쥐었다 놓았다 정신이 없더란다. 젖을 떼고 제법 이 말 저 말로 어른들의 귀여운 노리개가 될 때부터 나는 외할매 손에서 자랐다.

너댓 살 때 일이 기억난다. 장날이면 할매는 일찍부터 받아 둔 빗물에 머리를 감고 아주깨(아주까리) 기름을 발라 참빗으로 긴 머리채를 한 올도 빠짐없이 정성껏 빗어 내린다. 몇 번이고 긴 머리채를 노끈으로 불끈 묶고, 묶은 끈을 오그당한 이빨로 악문 채 쪽을 져 비녀를 찌른다. 그러고 나면 햇빛에 반짝거리는 머릿결을 난 꼭 한 번씩 쓰다듬어 보았다.

“아이구, 내 강생이. 오늘은 할매하고 장에 가재이. 햇살 달거든 읍내 가재이.”

아, 그 겨울. 햇살이 들판에 가득한데 서리가 녹아 곱꼽해진 땅을 밟고 나는 할매를 따라나섰다. 까치의 날렵한 날개짓도 힘찼고, 벼 그루터기만 남은 논에서 썰매를 지치는 아이들도 신났고, 누런 코를 빼물고 신명나게 동트레(굴렁쇠)를 돌리고 노는 애들도 즐거웠다. 시오리가 넘는 읍내 길을 할매는 장보퉁이를 이고 걸으셨다.

장터 귀서리에 전을 펴면 어느덧 해는 중천에 있고, 색색깔 내의들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 내의는 색색 줄무늬가 쪼록쪼록하고 어른들 나이론 잠옷도 줄무늬였다. 나는 꼭 햇살이 빚어 낸 무지개가 어른거리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그 포근한 햇살이 가득한 옷 위에 누워 뒤굴뒤굴 굴러 버린다.

“아이고, 이 북살할 놈. 팔 옷에다가 이래 누우마 우짜노.”

“할매. 한 번만 더 구불고 안 구부께.”

할매는 손자가 살가워서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아이고, 내 강생이. 옥골 선풍이다. 이 귀때기는 영판 저거 외할배구나.”

장터를 돌아다니며 보는 풍경은 온통 잔치요 놀라움이었다. 무엇 하나 멈추어 있는 것이 없었다. 온 읍내가 살아서 펄떡거린다. 이글거리는 국밥집 가마솥, 건어물을 파는 아저씨의 걸걸한 목소리, 담뱃대‧은장도‧집게칼‧망건‧안경 주머니 같은 것을 파는 할아버지 모습, 대장간에서 쇠를 치는 깡마른 아저씨의 불끈거리는 팔뚝, 그리고 온통 왁자한 사람 사람들 소리가 그렇게 신명날 수가 없었다.

해가 뉘엿해지면 장보퉁이를 챙겨 큰 것은 짐꾼에게 맡기고 작은 것은 할매가 인다. 나는 오늘도 딱지를 샀다. 꺼먼 복면에 어깨에 칼을 빗겨 찬 그림이 있는 딱지다. 내가 방금 복면한 사나이가 된 듯 어깨가 들썩인다. 할매는 간갈치 한 손, 김 한 톳을 사서 든다. 장터를 빠져 나오면 햇살은 간 곳 없고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들판에는 썰렁한 바람이 가득하다. 그만 서글퍼진다. 생각난다. 들판과 하늘 사이의 아득한 공간은 회색빛 바람 속에 저물어 갔다. 지금도 저물어 가는 들판을 보면 나는 슬프다. 언 땅을 밟고 가노라면 고무신은 삐죽삐죽 벗겨지고, 같이 가던 장꾼들도 이러저리 흩어지고 나면 해는 꼴깍 저물어 효자 비각이 으시시해진다.

“할매, 춥다. 업어도.”

“내 강생이가 얼매나 춥겠노. 온냐, 업혀라.”

장보퉁이를 이고도 나를 업은 채 할매는 잘도 걸으셨다.

“석아, 할매 팔이 아파 우짜꼬.”

“할매, 쪼깨마 가다가 내리께.”

포근한 할매 등에서 조속조속 졸다가 깜뿍 잠이 들었다 깨면 어느덧 동네 어귀에 들어서곤 했다.

깜깜한 방에 호롱불을 켜고, 군불을 지피고, 오랜만에 맛보는 갈치 반찬으로 늦은 시간 할매와 나는 머리 맞대고 저녁을 먹는다. 밥을 먹다가 문득 할매의 골패인 얼굴을 보면 왠지 서글퍼지곤 했다. 할매가 돌아누운 채 잠이 들면 그 막막한 어둠과 집안 구석구석 배인 허무의 냄새(그때의 냄새를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에 눈물이 났다.

할매가 혼자 장에 간 날에는 그 허무의 냄시는 참으로 진하게 나를 못살게 굴었다. 아무도 없는 빈 집, 마당 구석 두엄더미를 헤치고 있는 닭 몇 마리, 앙상한 감나무, 먼지 낀 장독대, 휑한 부엌, 마루 끝에 드는 햇살…… 모두가 말이 없다. 텅 비었다. 너무나 조용하다. 슬프다. 가마솥에 앉혀 둔 고구마 몇 뿌리 내어다가 꾹꾹 집어 삼킨다. 목이 막힌다. 침을 모아 목구멍으로 넘긴다. 침 넘어 가는 소리. 지나가는 소달구지 요롱 소리가 조용한 마루를 잠시 흔들었다가는 멀어진다. 할매는 언제 올란공. 집을 나와 동구가 내다뵈는 짚단 속에 파묻혀 할매를 기다린다. 저쪽 하늘에서 멍석을 말 듯 가갈가갈 떼지어 오는 갈가마귀 떼. 그렇게 까맣게 무리지어 오는 갈가마귀를 목고개가 아프도록 바라본다. 눈물이 난다.

“휘우야! 휘우야! 내 좆 물고 가거라-- 이.”

동네 청년들이 들판에서 일을 하다가 누렇고 깡마른 얼굴로 갈가마귀에게 지르는 소리를 나는 뜻도 모르고 그렇게 들었다. 코를 닦아 뻣뻣해진 소매로 눈물로 닦고, 꼬챙이로 땅바닥에 내 이름도 써 보고, 1‧2‧3‧4도 써 보고, 언 손을 호호 불어 녹여도 보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도 할매는 오지 않는다.

‘저 사람이 울 할맨가…….’ 하고 보면 아랫말(마을)로 내려가고 ‘저 사람이 할매제…….’ 싶으면 감골 골짝으로 올라가고. 끝내는 “할매야…….” 소리 한 번 내어 보면 그만 목이 메어 목젖이 따갑게 내려앉곤 했다. 그럴 때 느끼던 그 아픔이 고독이었을까, 허무였을까……. 나는 커서 그것을 막연히 허무의 냄새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좀 들고부터는 할머니가 머잖아 돌아가실 수도 있다 싶은 것이 나에겐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석아, 니는 커서 누하고 살래?”

“할매하고.”

“아이다. 니는 니 각시하고 살아야지. 그때 되마 할매는 저으기 북망산에 가 있을 끼다…… 나무관세음…….”

“할매. 할매 아프마 내가 부산 큰 병원에 델꼬 갈끼다. 내가 배도 사다 주께. 내가 앓아 누웠을 때 깎아 준 배 맛이 얼마나 시원하던지…… 나는 할매하고만 살 거다.”

나는 할매만 살릴 수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상두밭골 공동묘지도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죽으면 절대 안 된다. 안 되고 말고.

할매와 나는 하나가 되어 갔다. 나도 애늙은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할매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할매가 없는 공간은 내게 완전한 정적이요 허무였다. 어쩌면 할매의 모습이 바로 허무였는지 모른다.

국민학교에 들 무렵 할매와 떨어져 부산으로 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할매는 읍내가 내다보이는 고갯마루까지 따라 나왔다. 마루에는 1백 연도 넘은 당산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이 나무 아래. 여름날 장에 갔다 올 때는 할매하고 하염없이 앉아 있었지. 당산나무 아래서 나는 발걸음을 뗄수가 없었다. 데리고 가는 엄마도 울고 바래다주는 할매도 울고 끌려가는 나도 울었다.

“고마 가거라. 차 늦을라.”

할매가 먼저 돌아섰다. 내가 여기를 떠나면 할매는 혼자 남는데…… 할매 혼자 그 빈 집에서 누하고 살꼬. 간혹 소쿠리 장수도 자고 가고 먼 친척 할매도 와서 자고 가긴 하지만 할매 혼자 우째 살겠노……. 돌아다보니 할매는 도로 당상나무께로 와서 우리를 보고 계셨다. 돌아 돌아보며 부산으로 왔다.

할매가 떡 해 이고 우리 집에 오시는 날이 나에겐 가장 기쁜 날이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뒤도 안 보고 달려와서 할매 무릎에 엎어진다.

“할매 이박(이야기)하나 해 주까. 학교서 비았다(배웠다).”

“온냐. 내 새끼……”

“할매. 언제 촌에 갈 거고?”

“와? 할매 있으이 귀찮나?”

“아이다. 아이다. 더 많이 있다가 가라꼬.”

학교에서 달려와 보면 할매가 없다. 어디 갔노. 가셨단다. 아, 그때 그 설움이란.

“오늘 안 간다 안 캤나.”

엄마에게 패악을 부리며 이불을 뒤집어 쓰고 하염없이 울었다. 간혹 엄마도 내 옆에 누워 같이 울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내일 수학여행을 간다고 들떠서 집으로 돌아오니 할매가 와 계셨다.

난 수학여행을 포기했다. 사흘을 여행 갔다 오면 할매하고 있을 시간이 그만큼 준다. 방학도 아닌 때 온종일 할매하고 있는 게 얼마나 큰 횡재인데 여행을 가.

방학을 하면 다음날 바로 할매한테 갔다. 떨어진 감을 소금물에 담가 삭혀 두고 난수밭(텃밭, 남새밭)에 옥수수도 심어 두고, 닭 한 마리 고아 먹일 거라고 지나는 장수에게 건삼 몇 뿌리도 사 두고, 미숫가루도 해 두고. 할매는 오직 이 방학을 위해 아마 봄부터 준비를 하셨을 게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는 친구들하고 있기가 좋아서 차츰 할매와 있는 시간이 줄었다. 그러다가도 비가 오거나 찬바람이 부는 날은 할매에게 편지를 썼다. 글 칠흑 같은 밤에 혼자 누워 빗소리 듣고 계실 할매를 생각하면 가슴이 에인다. 컴컴한 뒤란, 아랫채 헛간에 처진 거미줄, 처마에서 떨어지는 하염없는 빗소리, 연기로 까맣게 그을린 정지(부엌) 천장, 실겅(시렁)에 놓인 그릇 몇 개.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면 그것이 모두 눈물이 되었다. 그런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다. 할매는 언제나 답장을 해 주셨다. 난 그 편지를 읽지 못했다. 줄줄이 달아 쓴 내간체 글씨를 읽어 낼 수 없었다. 엄마가 읽어 준다. 또 운다. 외할머니는 참 글을 잘 썼다. 옛 사람들이 쓰는 상투로 된 글귀는 하나도 없다. “셕아 보아라.”로 시작하는 글은 늘 새로웠다. 동네 혼사가 있으면 안사돈끼리 주고받는 사돈지를 할매가 늘 대신 써 주었다. 그런 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 개다리소반에 한지를 올려 두고 내게 먹을 갈라고 하셨다. 그런 할매가 자랑스러웠다.

“할매 함 읽어 바라. 머라 캤는데?”

“우리 딸이 미거하지마는 잘 거다도라 안 캤나.”

내가 군에 가 있을 때다. 훈련병 시절엔 주소를 암호로 쓴다. 내 있던 부대 주소는 ‘지리산 중대 낙타 소대’였다. 물론 맨 먼저 할머니께 편지를 썼다. 답이 왔다.

“아이고, 옥골 선풍 내 손자야. 니가 지리산에 있다 하니 그기 무슨 일고. 낙타를 타고 다닌다니 그런 일도 다 있나……”

이때쯤엔 나도 할머니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온 소대원이 배를 잡고 웃었다. 그래도 할머니한테 편지 받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우리 집은 집안 살림이 펴일 날이 없었다. 내가 제대할 즈음에는 더욱 난감했다. 대여섯 해 전에 고생고생 장만한 코딱지 만한 집도 팔고 다시 전셋집을 떠돌아야 했다. 할머니 연세가 이젠 너무 많은신 데도 집으로 모실 형편은 안 되고, 그래도 함께 있자고 하면 “그 좁은 집에 사위와 있으면 서로가 불편해서 안 된다.”고 할매는 끝내 시골집에 있겠다고 하셨다. 뻔한 사정에 어쩌지도 못하고 엄마만 좀을 볶고 살았을 거다. 내가 졸업을 하고 교편을 잡자 형편이 그나마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결혼도 했다. 그래도 할매를 모시지 못하고 이제나저제나 하고 있었다. 할매 말대로 각시하고 사는 게 마음 아팠다. 여동생도 교편을 잡았다. 아내도 보건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2층 독채를 전세 낼 정도가 되었다. 이제 곧 할머니를 모실 수 있겠구나.

하루는 밤 12시가다 되었는데 고향에 계시는 큰아버지께서 황급히 들어서신다. 그것도 택시를 대절 내어 달려오셨으니……

“석아. 차 타거라. 너희 외조모가 별세하셨지 싶다.”

절벽으로 내던지는 말씀이다. 눈앞이 번쩍하더니 정신이 아뜩하다. 온몸에 빈틈없이 꽂히는 탱자가시. 목이 탁 멕혔다. 혀가 굳었다. 할매 할매……. 차가 부산을 벗어날 즈음에야 정신을 조금 차렸다. 엄마는 온몸이 굳은 채 말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온 정성을 다해 비는 일뿐이었다.

‘하느님, 내가 우리 할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느님은 알 겁니다. 외할매에게 바친 사랑이 하나도 진정 아닌 게 없었습니다. 이제 내가 할머님을 모실 때가 되었는데 이렇게 거두어 가신다면 이건 너무하신 일입니다. 너무나 너무하신 일입니다. 천보 만보 양보해서 임종이라도 지켜보게 해 주이소. 아니, 아니 단 하룻밤이라도 내 옆에 계실 수 있도록 해 주이소. 빕니다. 빕니다. 빕니다.“

손을 모아 쥐고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만 살려 주이소……’

할매는 까무룩한2) 부엌에서 저녁밥을 해 들고 마루로 나오다가 그만 모로 쓰러지신 것이다. 누구 하나 보는 이 없는 집에서 축담에 쓰러져 죽음을 맞으신 것이다. 마침 앞집 신반댁이,

“못골댁이 밥이나 해 묵나 우짜노.”

하고 들어서다가 할머니가 넘어져 계신 것을 보고는,

“아이구, 동네 사람들아. 못골댁이 죽는다. 아이구, 이 삼(사람)들아…….”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고 약국 사람 부르러 가고 수족을 주무르고 해도 입술은 새파래져 갔다는 것이다.

“이 일을 우짜노. 부산 있는 딸네 집에 기별해야 할 낀데. 누가 모르나…….”

“딸네 집은 몰라도 사가가 저 건네 안 있나. 거기라도 기별해라.”

“동식이가 오토바이 타고 좀 갔다 오너라.”

약국에서 약사가 왔지만(이웃에는 병원이 없었다) 눈 한 번 뒤집어 보고 고개 쩔래쩔래 흔들고는 주사 한 대 주고 가 버렸다.

“내가 동식이 기별을 받고 바로 읍에 나와 택시로 왔건만 졸도하신 지가 대여섯 시간 지났으니……. 임종이라도 봐야 할 텐데…….”

택시 안은 깊디깊은 바다 속이다. 자꾸 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다. 차는 달리고 달려서 고향 마을로 들어선다.

할매와 타박타박 걸어서 읍내 장에 가던 길, 할매 등에 업혀 조속조속 졸며 가던 길, 할매와 헤어지며 울며 울며 뒤돌아보던 당산나무……. 덜컹거리던 차가 마을 어귀로 들어설 때는 그냥 거기서 멎었으면 싶었다. 이 일을 우짤꼬. 동네 사람들이 마당 밖에까지 오게오게 모여 서 있다.

“아이고, 못골댁아. 그렇기 귀한 위손자(외손자)온다. 끌끌, 천하에 없는 위손자 온다.”

마당으로 들어섰다. 사람들 사이로 들어서 보니, 아! 이게 웬 일인가. 이게 꿈인가 생신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할머니가, 할머니가 마루에 오도마니 앉아 계시지 않은가. 이불을 내어 싸 덮고,신반댁이 홍시를 숟가락으로 떠 먹이고 있었다.

“할매, 이기 우얀 일고…….”

할매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 숨쉬고 계시지 않은가. 손도 따뜻하고, 눈도 껌뻑거리고, 입도 달삭이지 않은가.

“동네 어르신들, 고맙습니더. 참말로 고맙습니더.”

난 넙죽넙죽 절을 해 대었다. 눈물로 범벅이 되어…….

“쯧쯧,…… 저만한 외손자 없지 그리. 세상에 친손자라도 저럴라? 못골댁이 인자(이제) 한없다. 외손자 왔으이 한없다.”

뒤에 안 얘기지만 동식이 그 사람이 큰댁으로 연락하러 간 뒤 동네가 왁자하자 어울댁(동식이란 사람이 어울댁 큰 아들이었다) 사랑에 와 있던 바깥손님이 뭐냐고 물었단다. 우리 동네 불쌍한 노인이 오늘 밤 명 끊는가 보오. 고혈압으로 자빠졌다는데……. 어허 그 안 됐다. 바깥사람이면 내가 침이라도 찔러볼 텐데……. 안사람이면 어떻소. 한 번 찔러 보지요. 할머니의 머리와 인중을 대침으로 땄단다. 피가 나더란다. 됐소. 살겠소. 사람을 영 죽을 뻔했구만. 얼마 안 있어 새파랗던 입술이 돌아오고 눈도 떴단다. 기적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그 노인을 찾아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아침 일찍 떠나버리셨단다. 그 분은 누구셨을까.

다음 날 앰뷸런스를 불러 할머니를 모시고 부산으로 왔다. 살림살이라야 별 것도 없었지만 동네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주어 버리고 생전에 아끼던 고리짝 한 짝 챙겨서 아주 그 집을 떠나왔다. 모시려면 이렇게 쉽게 모실 것을 이래저래 재다가 이 꼴을 당하고야 말았구나.

엄마는 또 하염없는 눈물이다. 할매의 한 쪽 손발은 완전히 굳어 버렸다. 중풍이었다. 말도 잘 못 알아 들으셨다. 답답하여 앙가슴에 돌이 들어앉았다. 그 맑은 정신으로 “아이구, 내 새끼. 옥골 선풍 내 새끼.”하는 말을 듣고 싶었다.

경북 영천 읍내에 중풍에 용한 의원이 있다고 했다. 일요일 새벽 아무도 없는 목욕탕에 가서 일부러 찬물로만 목욕을 했다.

‘하느님예, 제가 지금 목욕 재계합니다. 오로지 우리 외할매 살릴 일념으로 오늘 약을 지으러 갑니다. 약 효험 있도록 도와 주이소.’

버스를 타고도 옆자리에 눈 한 번 안 돌리고 똑바로 곧추 앉아 눈을 감았다. 몸과 마음이 행여 더럽혀질까 조심조심 영천으로 갔다. 한의원도 아닌 약재상 비슷한 곳이었다. 그래도 방 안엔 약장 서랍이 가득했다. 노인에게 정성으로 절을 올렸다. 저희 외조모가 이러이러해서 누워 계십니다. 목욕재계하고 찾아왔습니다. 외조모를 좀 살려 주이소. 그 어른은 신통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요새 젊은이가 아니구만요. 내 약 지어 드리리다.”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이렇게 지극한 효손을 본 것만도 약값 했다고 했다.

“황계를 넣어서 달여 드리시오.”

닭집에 가서도 정갈히 잡아 달라고 했다. 약할 닭은 피가 튀면 안된다고 아낙은 남편에게 몇 번이나 일러 주었다.

“엄마, 약을 짓기는 내가 지었지만, 달이기는 엄마가 달여라. 지극 정성으로 달여 보자.”

엄마도 약탕관 새로 사고 화로에 참숯도 샀다. 약을 드신지 한 달이 지났을까. 또 한번 기적이 얼어났다. 서서히 풀려 가던 수족이 이제 변소 출입 정도는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농담도 곧잘 받아 주시게 된 것이다.

이리저리 돈을 변통하여 우리도 우리 집을 가지게 되었다. 할머니가 마음 놓고 계실 방이 마련되었다. 방 세 칸 짜리 아파트도 우리에겐 호강이다. 다 자는 밤 나 혼자 거실에 나와 앉아 행복에 겨웠다.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 저 방에 자고 외할매 저 방에 건강하게 계시고 아내와 아이들 저 방에 있고 나는 여기 이렇게 너른 거실에 척 하니 앉았으니 이 이상 뭘 바라겠노. 축복이다. 축복이다.

일요일이면 해운대도 가고 동물원도 가고 할매 손을 잡고 훨훨 나는 기분으로 데이트를 했다.

“할마시 요새는 팔에 힘이 얼매나 있노 보자.”

“북살할 놈, 할매를 보고 할마시라 칸다요……. 온냐, 이놈. 팔씨름 함 해 보자.”

이미 기력을 잃은 할매 팔목을 잡으며 가슴 메이기도 했다. 할매와 나는 더 없는 좋은 친구로 살았다. 그것이 3년 동안이었다.

끝내 할머닌 다시 쓰러졌다. 말문을 닫은 사흘 동안 행여 한 번이라도 날 알아보실까 잠시도 손을 놓지 않고 지냈다. 입가가 마르면 물수건으로 입술을 닦아 드리며 그 오그당한 이빨을 다시 보았다. 얼굴에 주름 한 올, 손톱 밑에 때 하나까지도 남김없이 쓰다듬어 가슴에 새겼다. 살뜰히 살뜰히 할매와 이별을 준비했다. 더 이상 기적을 바랄 순 없었다. 오히려 이런 이별을 할 수 있게 해 준 신에게 감사했다. 할매는 허공에 대고 자꾸 머리카락 줍는 시늉을 했다. 무슨 헛것이 보였을까. 끝내 나와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하고 나를 떠나 조용히 숨결을 푸셨다. 5월 24일 아침이었다.

할머니 속살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다. 정갈히 몸을 닦고 생전에 손수 지어 두었던 명주 수의로 고이 쌌다. 회심곡 염불 소리는 할매의 소리였다. 나를 안아 누여 잠 재우셨듯, 나를 업고 시오리 읍내 길을 걸어오셨듯 이제 할매가 나의 아이가 되어 품에 있었다.

할매야, 울 할매야.

보리가 누렇게 이글거리는 산모롱이를 돌아 초라한 상여가 바람 속에 놓였다. 타오르듯 번쩍이는 보리밭에는 할매 냄새가 물씬물씬했다. 파란 하늘 아래로 점점이 보이는 외갓집 동네가 한층 가까이 다가왔다.

“하관 시간 되었다. 준비해라.”

“그런데 장모님이 시집올 때 갖고 오신 사성3)단자가 빠졌는데 관 위에 놓으면 될지요…….”

“어허, 사성을 손에 쥐고 가야지, 그걸 빠뜨리면 되나. 지금이라도 관을 열어라. 괜찮다. 손에 쥐어 드려야지.”

아…… 나는 또 한번 할매를 볼 수 있었다. 할매가 나를 한 번 더 보시려고 사성을 놓고 떠나셨구나. 바람은 솔잎 사이로 은은히 흐르고 엄마의 울음소리는 아득한데, 할매는 보리밭 같은 명주 수의에 싸여 쏟아지는 오월 햇살 아래 부끄러이 다시 몸을 드러내었다.

“할매, 할매…… 인자는 진짜 마지막인갑다. 할매야, 잘 가재이.”

할매는 포근하고 따뜻했다. 그렇게 느껴졌다.

“석아, 그렇게 엎어지는 게 아니다. 일어나거라.”

청석돌을 파낸 무덤자리에 할매를 묻었다. 아이고 울 할매야. 돌덩이가 목구멍을 가로막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할매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 아니다. 이제 완전히 나에게로 녹아들었다. 할매를 묻고 내려오니 보리도 새롭게 일렁이고 하늘도 더욱 푸르렀다. 무심결에 보리 대궁이 꺽어 삐삐 소리를 내어보았다. 할매는 다 알 것 같았다. 죽으나 사나 내 사랑이란 걸 다 알았다. 할매. 뒤에 오꾸마.

불현 듯 내 몸이 하늘로 훨훨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열두 번도 더 했는데 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 듣고 있던 아이들도 손수건을 꺼내들고 고개를 숙여 버린다. 할머니는 금방 우리와 같이 있게 되는 것이다.

“너희들, 어떻노? 이만하면 내 첫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겠제. 나는 할매한테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배웠다. 내 바탕 정서는 바로 우리 할매가 주신 사랑이지 싶다. 핏줄의 정은 본능이긴 하지만 이 바탕위에 할매와 난 사랑의 탑을 쌓았다. 사람을 사랑할 때 서로가 이 같은 정성을 기울이면 그건 ‘지고 지순한 아름다움’이 되지. 사람이 하는 사랑만큼 아름다운 게 없어……. 그리고 난 너희들을 볼 때마다 우리 할매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이런 시를 썼다.


외할매 생각


할매야

할매만 생각하면 눈물부터 먼저 나노

초라한 상여 뒤따라

보리가 이글이글 누렇게 타오르던 산비탈 지나

소나무 우거진 산모롱이

생전에 못 잊던 손수 지은 낮은 기와집 내려다보이던 곳

마른 땅 파내어 할매를 묻을 때

할매야

그 이별 서러워서 할매 니도 울었제

할매를 묻고 돌아 내려올 때

참 이상케도 보리밭 두렁에 앉아

보리대궁이 꺾어

나는 또 보리 피리 불어 보았데이

온 세상 파란 하늘

할매의 나라 하늘을 보며

눈물도 없이 삘리리

보리피리는 혼자 울었데이


방학이면 감 삭혀두고 난수밭에 강냉이 심어

날 기다리던 할매야

아이구 내 새끼 옥골선풍 내 새끼

엉뎅이 토닥거려 잠재우던 울 할매

자식 많던 그 시절 애오라지 딸 하나 두고

가뭄 든 여름날 물꼬를 지키느라

늑대 우는 들판에 억척같이 밤새우던 할매야

동네 혼사 때면 새벽에 곧추앉아

사돈지(紙) 써 주던 울 할매야


참으로 나는 할매의 사랑으로

이만큼이라도 더운 가슴

지닐 수 있었제

저승꽃 핀 손으로 선생질 잘 하라고

얼굴 싸안아 주던 울 할매야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할매의 삶을 얘기해 준다

‘하늘의 절반’ 우리 아이들

지금 이렇게 까르르 까를 예쁘게 웃고만 있는 아이들도

이 땅을 일구고 지키며

할매의 삶을 이어 갈 크나큰 힘인 것을

이 아이들 스스로 한 세상 꾸려 가는 날까지

내가 받은 할매의 따슨 가슴 물려준란다

언제까지나 이어 올 아이들의 가슴에

울 할매같은 마음들이 차곡차곡 쌓여 갈 때

그것은 할매의 환생이요

사랑의 잔치일 거라


이 땅이 할매의 사랑으로 사득할 것이면

언제쯤 우리 모두

이 강산 누비는 비구름 되고

흙이 되고 풀이 되어도

우리는 언제나 살아 있을 것이제 할매


어떤 애는 시를 칠판에 써 달라고 한다. 베껴 써서 친구들에게도 식구들에게도 얘기해 주겠다고 한다.

다음 날 학교에 오면 어김없이 내 책상 위엔 아이들이 쓴 편지가 몇 통씩 있게 마련이다.

어떤 때에는 아이한테서 시를 전해 받아 읽고 얘기도 들었다며 학부모가 편지를 해 주기도 한다.


이 선생님!

시 [외할매 생각]을 읽다가 그만 울어 버렸습니다. 할머님의 신앙 같은 사랑을 가슴으로 안고 느낄 줄 아는 손자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당연히 그 분들의 일이려니 그분들의 천품이려니 하고만 알고 있겠지요. 시골 가마솥을 데우기 위해 지피던 낙엽가지들 타는, 매케하면서도 구수한 냄새가 저와 딸아이의 마음에 타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땅의 교육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가르치기보다는 사람답지 않게 기르고, 서로 해치며 살아가는 태도를 부추기는 상황속에서 아직도 우리의 선생님들이 이렇게 넓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내 아이들을 자신의 분신처럼 가르친다는 기쁨에 또 한 번 울음이 나옵니다.

5월 중순부터는 단비를 흠빡 맞아 더욱더 반질반질 윤이 나는 미루나무 잎처럼 마음이 푸르고 상쾌했습니다. 그러다가도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일선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소리’를 먼저 들을 줄 알아야 하겠는데 ‘소리’를 듣기는커녕…… 오히려.

그러나 이 선생님!

천직으로 여기시는 교단을, 그리고 이 선생님을 사랑하는 아이들이 선생님을 잃지 않음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기쁜 일이 있을 때나, 가슴이 메어지는 아픔이 있을 때는 엽서나 편지를 쓰고 싶어집니다. 처음이지만 처음 같지 않게 마음을 열어 딸아이의 고운 사랑과 에미의 신뢰하는 마음을 함께 묶어 띄웁니다. 깊게 잠들어 있는 아이의 숨소리는 내일 아침 다시 만날 사랑하는 얼굴들을 꿈꾸겠지요.

보리밭 두렁에 앉아 보리대궁이 꺾어 보리피리 부는 소년. 알롱달롱 채색 내의의 포근함에 얼굴 대어 보는 시골 장터의 작은 소년. 아이의 꿈 속에 할머님의 사랑과 소년의 천진함이 어우러지는가 봅니다.

여호와의 도움이 이 선생님과 가정에, 그리고 학문 위에 늘 함께 하시길 빕니다.


단비 엄마 드림.

"외할매생각" 줄거리 좀 알려주세요~

국어시간에 수필읽기중 '외할매생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ㅠ 그거 줄거리좀 써주세요 ㅠㅠ 제발 부탁이에요 ㅠㅠ #.도움이 되셨길. 외할매 생각 이상석 구름이 낮게 깔리고...

줄거리좀 알려주세요

... 이정록 외할매 생각 - 이상석 2. 방황은 순례와 같은 것이야 고마운 빨래판 - 권혁태 나의 별명. 뻔데기 - 조화성 너는 입만 벌리고 소리 내지 말아라 - 김세환 컨닝 - 이석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