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보그 선언이 뭔가요

사이보그 선언이 뭔가요

작성일 2010.06.05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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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나 헤러웨이가 사이보그 선언을 했는데

 

사이보그 선언이뭔가요?

사이보그 선언에 대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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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를 돕기 위해 번역자의 말도 함께 올립니다.

 

 

 

 

사이보그를 위한 선언문  

              --1980년대에 있어서 과학, 테크놀러지, 그리고 사회주의 페미니즘*)
 
                        
다너 해러웨이
번역: 임옥희

 

역자 해설--사이보그 선언문을 읽기 전에

필자인 다너 해러웨이Donna Haraway가 밝히고 있다시피, 1980년대 미국은 신보수주의로 회귀했다. 사이보그 선언문은 이런 시대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사회주의 페미니즘 진영의 자체 반성이자 그 대응이다(이 글은 원래 1985년, Socialist Review에 실렸다). 이 선언문은 기술복제 시대와는 패러다임을 달리하는 전자복제 시대에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지형도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문제제기에 대한 하나의 대안적 성격을 띠고 있다.
기존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노동'을 중심으로 계급문제를 제기하고, 생산현장과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성차'를 중심으로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를 문제삼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성모순을 계급범주로 환원하려는 맑스주의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볼 때,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성과 계급이라는 두 범주를 서로 병치시킨 이중체계론이라는 비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성모순을 주요모순으로 설정하는 급진적,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즘으로부터의 공격에도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노동의 개념은 기호로 등치되고, 육체는 잉여가 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기존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심각한 패러다임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따라서 노동의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기호의 정치경제학이 지배적인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19세기적인 노동 개념으로 여성의 생산과 재생산을 설명하는 것은 설득력이 희박하다는 반성이 사회주의 페미니즘 내부에서 대두하게 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의 이론적 입지를 좁혔던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사회변화에 따라 전통적인 가족체계도 변화되었다는 점이었다. 이처럼 변화된 상황을 수용하기 위해 해러웨이는 제임슨이 자본주의 발전을 상업적/초기 산업자본주의, 독점자본주의, 다국적자본주의라는 3단계로 구분한 것을 토대로, 이런 생산양식에 상응하는 특정한 가족형태를 정치적 문화적 상호연관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연결시키려 한다. 제임슨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3단계에 해당하는 해러웨이식 가족제도는 가부장적 핵가족/근대 가족/가내경제 가족이다. 가내경제 가족은 어머니가 가족장이 되는 반어법적인 가족구조이다. 빈곤화된 가내경제 가족이 지배적인 양식으로 된 다국적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는, 차이의 정치경제학에 기초해야 한다고 해러웨이는 주장한다.
하지만 해러웨이의 입장은 사회주의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소수입장이다. 사이보그 이미지가 정통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불경죄를 저지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에 의하면 한가지 목소리로 페미니즘을 규정하기 힘들어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이라는 거대담론의 그늘 아래 있는 기존 페미니즘은 생각을 달리하는 페미니즘에게 동일한 입장을 취하도록 강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급, 인종, 성별에 따라 역사적, 문화적으로 정체성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면, 여성이라고 해서 동일한 범주로 묶일 수는 없다. 그런데도 '여성 경험'이라는 원리에 기초한 페미니즘은 다성음적인 여성의 범주를 하나로 끌어안으려고 했다. 이런 비판에 직면하자 백인 중산층 여성이 중심이 된 기존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유색인종, 노동자계급, 3세계 여성의 타자성을 무의식화시켰다고 인정하게 된다.
해러웨이에 의하면 이런 차이의 시대를 대처할 페미니즘의 신화가 사이보그다. 그녀가 주장하는 사이보그는 인간과 기계가 혼융된 비인간의 인간이다. 그것은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동물이 합쳐진 존재이다. 가부장제가 배제시켰던 이런 괴물적인 여성을 현대의 테크놀로지로 합성하면 <블레이드 러너>에 등장하는 복제인간인 사이보그가 탄생하게 된다. 이런 사이보그는 전통적인 인간 개념을 벗어난 이질적 존재이다. 따라서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는 부르주아 휴머니즘이 주장한 통합적인 인간관과 동질적인 육체관의 해체이자 서구 기원신화의 대체이다. 사이보그는 인간/기계, 인간/동물, 물질/비물질 등등의 경계의 일탈이자 경계의 융합이다. 서구의 동일성 논리에 기초한 동질적인 주체가 억압시킨 차이의 복원이 곧 사이보그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이 테크노포비아를 극복하고 과학기술에 의한 이질적인 사이보그를 수용할 때 페미니즘은 저항과 결속의 신화를 창출해낼 수 있을 것으로 해러웨이는 파악한다. 그런 저항과 결속은 하부문화적인 아방가르드 세력의 정치적 연대로 인해 가능해진다. 정치세력으로서의 사이보그는 유색여성, 마녀, 변태, 엔지니어, 레닌주의자, 어머니 등이 결연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여신이 되기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이 글은 선언문이기 때문에 엄격하고 정치한 논리로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그 도발적인 성격으로 인해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물론이거니와 페미니즘 진영에 신선한 충격과 방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85년 당시로서는 불온하고 불경스러웠던 이 글이 1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페미니즘 이론의 한 고전이 되어가고 있다.

 

 

 

 

 

 

 

 

통합회로에서의 여성....

이 장은 페미니즘, 사회주의, 유물론에  충실한 아이러니컬한 정치적 신화를 구축할 목적으로 쓰인 선언문이다. 아이러니컬한 정치적 신화는 경배와 동일한 것으로 충실하다기보다는 불경으로서 더욱 충실한 것이다. 불경은 사물을 언제나 매우 진지하게 다루도록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포함해서 미국 정치학의 세속화된 종교적, 복음주의적인 전통 내부에서 불경보다 더 나은 입장을 알지 못한다. 불경은 내부의 도덕적인 다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면서도 언제나 공동체에 대한 연대를 고집한다. 불경은 배교가 아니다. 아이러니는 심지어 변증법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큰 전체로 전화되지 않는 모순에 관한 것이며, 서로 양립불가능한 것을 결합시킴으로써 초래되는 긴장에 관한 것이다. 아이러니는 양립불가능한 두 가지 혹은 전부를 동시에 필요로 하는데, 왜냐하면 이 양자는 필요와 동시에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농담이면서 진지한 놀이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수사적 전략임과 동시에 정치적 방법론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에서 더욱 존중되었으면 하는 요소가 바로 아이러니이다. 이런 아이러니컬한 신앙의 핵심에 나의 불경스러움이 있는바, 내 불경죄가 다름 아닌 사이보그 이미지이다.
사이보그는 인공두뇌 유기체이며,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교배이며 사회적 실재임과 동시에 허구의 산물이다. 사회적 실재는 경험된 사회적 관계이며, 우리들한테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구조물이자,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허구이다. 국제적인 여성운동은 여성 경험을 중심으로 구축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이런 핵심적인 집단적 목표를 발굴하고 발견해왔다. 여성의 경험은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유형의 허구이자 사실이다. 해방은 의식과 상상력에 토대한 이해와, 억압과 억압으로 인한 가능성을 구축하는 데 있다. 사이보그는 일종의 허구이면서도 동시에 20세기 후반 들어 여성의 경험으로 간주된 것을 변화시키려는 여성의 산 경험이다. 사이보그는 생사를 건 투쟁이다. 공상과학 소설과 사회적 실재 사이의 경계는 시각적 환상이다.
현대 공상과학 소설은 사이보그로 넘쳐난다. 현대의학 역시 유기체와 기계가 짝지워진 사이보그로 가득차 있다. 사이보그는 동물/기계, 자연/인위의 합성물이다. 사이보그 복제는 유기적인 재생산의 고리를 절단한다. 현대적인 생산은 일을 사이보그로 식민화하고, 테일러리즘의 악몽을 목가로 만드려는 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현대전은 사이보그 잔치마당이며, C3I, 다시 말하자면 지휘-통제-통신-정보(command-control-communication-intelligence)에 의해 암호화된 전쟁이며, 1984년 미국 국방비 예산에서 8,400억 달러를 지출하는 항목이다. 나는 사이보그는 사회적 실재와 육체적 실재를 도표화하는 허구이자, 대단히 유용한 연결장치로서 상상력의 원천이라는 주장을 하고자 한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 신화적 시대에, 우리 모두는 키메라이다. 이때의 키메라는 기계와 유기체가 이론화되고 가공되어진 혼합물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사이보그다. 사이보그는 우리의 존재론이며, 우리의 정치학이다. 사이보그는 상상력과 물질적 실재 양자가 농축된 이미지이며, 이 양자는 역사적 변혁의 가능성을 구조화하고 결합시키는 두 중심축이다. 서구의 학문과 정치적 전통 속에서--인종차별주의적인 남성지배의 자본주의 전통, 진보의 전통, 문화생산을 위해 자연을 착취한 전통, 타자를 거울로 삼아 자아를 재생산한 전통에서--유기체와 기계의 관계는 경계전쟁이다. 경계전쟁에서 지대한 관심사는 생산과 재생산과 상상력의 영역이었다. 이 장(章)은 경계혼란이 주는 즐거움과 그로 인한 경계구성시의 책임감을 논하는 장이다. 또한 이 장은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성차별 없는 세계를 상정하는 유토피아적 전통 안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문화와 이론에 기여하려는 장이다. 이것은 기원 없는 세계일 것이며, 또한 종언 없는 세계일 것이다. 사이보그 육화는 구원의 역사 바깥에 위치한다. 그것은 외디푸스 달력 위에 시간의 자취를 남김으로써 구강중심의 공생적인 유토피아나 후기 외디푸스적인 묵시록에서 초래된 성차의 끔찍한 균열을 치유하려 들지 않는다.
사이보그는 탈성차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산물이다. 사이보그는 양성성, 전외디푸스적인 공생, 소외되지 않은 노동, 혹은 부분들을 더욱 큰 통일성 속으로 통합시키려는 모든 권력을 결국 수용함으로써 유기체적인 전체를 지향하는 그 밖의 모든 유혹과 타협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사이보그는 서구적인 의미에서의 기원 스토리가 없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아이러니이다. 왜냐하면 사이보그는 점점 심화되는 서구의 추상적 개별화의 끔찍한 묵시론적인 방향성텔로스(telos)로부터 그리고 모든 의존으로부터 마침내 분리된 궁극적인 자아이기 때문이다. 서구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볼 때 기원 스토리는 모든 인간이 분리되어 나올 수밖에 없는 남근적 어머니로 대변되는 원초적인 통일성, 충만, 축복과 공포의 신화, 즉, 정신분석학과 맑스주의 양자가 우리한테 가장 강력하게 각인시킨 막강한 쌍둥이 신화인 개인의 발전과 역사의 발전이라는 과업에 기초해 있다. 힐러리 클레인Hilary Klein은 노동과 개별화와 성적인 정체성의 형성이라는 개념으로 볼 때,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이라는 두 가지 이즘은 원초적인 통일성이라는 플롯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 원초적인 통일성으로부터 차이가 산출되며, 그것으로부터 여성/자연의 지배를 증폭시키는 드라마가 형성됨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사이보그는 원초적인 통일성과 서구적 의미에서의 자연과의 동일시 단계를 건너뛴다. 이것은 별들의 전쟁이라는 목적론을 전복시키는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는 불법적인 약속이다.
사이보그는 부분성, 아이러니, 친밀성, 왜곡을 단호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대립으로 구성되지 않기 때문에 사이보그는 부분적으로는 혁명적인 사회관계에 기초한 과학기술적인 정치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자연과 문화는 재규정된다. 자연은 더 이상 문화에 의해 전유되거나 통합되지 않는다. 이항대립과 위계적인 지배를 포함해서 부분으로부터 전체를 형성하려는 관계는 사이보그 세계에서 쟁점이 되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는 달리 사이보그는 복락원을 통해, 말하자면 이성배우자와의 결합을 통해, 완결된 전체, 완전한 도시와 우주 속에서 완전성을 통해 자기를 구원해 줄 아버지를 고대하지 않는다. 사이보그는 유기체적인 가족 모델에 기초한 공동체를 꿈꾸지 않는다. 사이보그는 에덴 동산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사이보그는 진흙으로 빚은 것이 아니므로 한 줌의 먼지로 되돌아가려는 꿈조차 꿀 수 없다. 적을 규정하려는 광적인 강박증에 사로잡힌 시대에, 사이보그가 핵먼지로 되돌아가려는 묵시론을 뒤집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사이보그는 공손하지 않다. 사이보그는 우주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사이보그에게 있어 주요한 골치거리는 그것이 국가사회주의는 물론이고, 군국주의,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서자라는 점이다. 하지만 서자라는 존재조건으로 인해 사이보그는 자신의 기원에 대해 대단히 불충스러울 수 있다. 그들의 아버지는 결국 비본질적인 존재들이 아닌가.
생물학적인 결정론적 이데올로기는 과학적인 문화 전통 내부에서 인간의 동물적 측면이 지닌 의미를 열어놓고 논쟁한 한 가지 입장에 불과하다. 진보적인 정치적 인물 사이에서도 경계 위반을 놓고 논쟁할 소지는 다분하다. 사이보그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위배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신화로 출현한다. 다른 생명체와 인간이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이보그는 불온하고도 즐겁게 짝짓는 신호이다. 결혼 교환의 이런 사이클에서 동물성은 새로운 위상을 차지한다.
둘째로 동물-인간(유기체)과 기계 사이의 경계 구분은 명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이보그 출현 이전의 기계는 유령에 홀릴 수도 있었다. 기계에는 언제나 유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계/인간이라는 이분법은 취향에 따라 역사 아니면 정신이라고 불리우는 변증법적인 후손에 의해 해결된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의 대화를 조직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기계는 스스로 운동하거나, 자기 의도를 가지거나 하는 자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기계는 인간의 꿈을 성취시켜 주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꿈을 조롱했다. 기계는 인간이 아니었으며, 자신의 주인도 아니었다. 다만 남성중심적인 재생산의 꿈을 희화화한 것이었다. 그외에 달리 생각하는 것은 편집증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렇게 확신할 수 없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유기체와 기계를 구분하는 데 사용되었던 구분들, 즉 자연적인 것/인위적인 것, 마음/육체, 자가발전하는 것/외부에서 고안해주는 것, 그밖에도 무수히 많은 구분들 사이의 차이가 너무 애매해져 버렸다. 우리의 기계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생명력을 갖고 있고 우리 자신은 놀랄 정도로 무기력하다.
기술결정론은 세계를 기록하고 읽어내는 놀이에 우리가 참가함으로써 규약화된 텍스트로서의 기계와 유기체를 재개념화할 때 열리는 이데올로기적인 공간에 불과하다. 모든 것을 텍스트화하는 후기구조주의와 포스모더니즘 이론은 맑스주의자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었는데, 왜냐하면 이들 이론은 자신이 임의적으로 읽어낸 독법의 놀이가 근거하고 있는 실생활에서의 지배와 권력 관계를 마음 편히 무시하기 때문이다. 나의 사이보그 신화나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략이 무수한 유기체적인 전체(예를 들면, 시, 원시문화, 생물학적인 유기체 등등)를 전복시키고 있음은 분명하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자연으로 간주되는 것--통찰의 원천이자 순수의 약속--의 확실성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 해석의 초월적인 권위는 상실되며 그와 더불어 서구 인식론의 토대가 된 존재론적인 권위 역시 상실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대안이 냉소주의나 불신일 수는 없다. 말하자면 "기계"를 매개로 "인간"을 파괴하는 기술결정론의 설명이나 혹은 "텍스트"라는 것을 매개로 "의미있는 정치적 행동"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추상적인 해석이 그 대안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누가 사이보그가 될 것인가는 급진적인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침팬지와 인공물은 양자가 모두 정치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해서 정치적이지 못하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세번째 구별은 두번째 구별의 부분집합이다. 내가 보기에 물리적인 것과 비물리적인 것 사이의 구별은 몹시 부정확하다. 양자론과 비결정성 원리의 귀결에 관해 쓴 대중 물리학 책은 그 대중적인 과학적 성격으로 볼 때, 미국 백인 이성애중심주의의 급격한 변화의 징표로 간주될 만한 할로퀸 로맨스와 마찬가지다. 이 책들은 판단착오지만 주제의식만큼은 타당하다. 현대의 기계는 그 근본에서부터 극소전자 장치들이다. 이런 기계들은 도처에 존재하면서도 보이지 않는다. 현대의 기계류는 최근에 부상한 시건방진 신이며 아버지 하느님의 편재성과 영혼성을 조롱한다. 실리콘 칩은 글쓰기를 위한 표면이다. 실리콘 칩은 극소의 소음, 즉 핵 눈금표의 최종적인 방해요소에 의해서만 교란이 일어나는 분자단위로 새겨진다. 글쓰기, 권력, 테크놀러지 등은 서구문명의 기원 스토리에서 오래된 파트너들이지만 극소화의 세계는 메커니즘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변모시킨다. 극소화는 권력에 관한 것이다. 작은 것은 아름답다기보다는 크루즈 미사일이나 마찬가지로 무엇보다도 위험하다. 1950년대의 텔레비전 세트나 1970년대의 뉴스 카메라와 오늘날 선전하고 있는 텔레비전 리스트밴드와 손바닥만한 비디오 카메라를 비교해보라. 오늘날 최고의 기계는 태양빛으로 만들어진다. 이런 기계들은 밝고 깨끗하다. 왜냐하면 그런 기계들은 신호, 전자파, 혹은 스펙트럼의 한 단위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런 기계들은 특히 이동가능하며 기동성이 크다. 사이보그는 에테르이자 근원적인 것이다.
사이보그의 편재성과 비가시성은 선샤인 벨트 기계들이 왜 그처럼 치명적인가에 대한 이유가 된다. 사이보그는 물질적인 것으로 보이기 힘든 만큼이나 정치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힘들다. 사이보그는 의식에 관한 것이거나 혹은 시뮬레이션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유럽 횡단 픽업 트럭이 이동하는 것처럼 떠도는 기표이다. 새로운 기계는 이처럼 깨끗하고 밝다. 사이보그 엔지니어들은 후기 산업사회에서의 불온한 꿈과 연상된 새로운 과학적 혁명을 매개로 하는 태양 숭배자들이다. 이 깨끗한 기계들이 야기시키는 질병들은 면역체계에 있어서의 항원의 변화이자 스트레스 경험의 변화나 다를 바 없다. 동양 여성의 민활한 손가락, 인형의 집을 가지고 있는 앵글로 색슨계 빅토리아조 꼬마 소녀의 오랜 환상, 작은 것에 매료되도록 강요된 여성의 관심사 등은 이 세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획득하게 된다. 사이보그 앨리스가 이 새로운 차원들을 설명할 수도 있다.
사이보그 신화는 진보세력에게 필요한 정치적 작업의 한 부분으로서 탐구해야 할 경계의 위배이자 강렬한 융합이며 위험한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대다수 미국 사회주의자와 페미니스트들은 고도의 테크놀러지와 과학적인 문화와 연관된 물리적인 인공물과 사회적 실천과 상징조작에 있어 정신/육체, 동물/기계, 관념론/유물론이라는 이분법을 심화시켰다는 것이 나의 첫번째 전제이다. {일차원적 인간}에서부터 {자연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진보세력이 발전시킨 분석자료들은 필요한 테크닉의 지배를 고집하면서도 우리의 저항을 통합시키려면 상상력의 산물인 유기체적인 육체를 기억하도록 고집해왔다. 나의 또다른 전제는 지배의 전세계적인 추세에 대응하기 위해 민중의 결속이 지금보다 더 절박한 시기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사이보그 세계는 철저한 통제의 쇠창살이 될 수도 있고, 방어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수행되는 별들의 전쟁의 최종적인 묵시록이 될 수도 있으며, 남성본위의 난장판 전쟁에서 여성의 육체가 전유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사이보그의 세계는 인간이 동물과 기계와 친척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며, 파편화된 자기정체성과 모순적인 관점이 영구히 지속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사회적, 육체적 실재에 관한 것일 수 있다. 정치적 투쟁은 이 양자의 관점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관점은 다른 기득권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런 지배와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유일한 비전은 이중적인 비전이나 머리가 여럿 달린 괴물보다 더욱 나쁜 환상이다. 사이보그 결합은 괴물적인 것이고 불법적인 것이다.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서 저항과 재결속의 신화 이상으로 더 절실한 희망은 없다. 사이보그 사회의 일종인 리버모어 액션 그룹(Livermore Action Group: LAG)은 기계적 묵시론의 연장들을 가장 맹렬하게 구현하고 토해내는 실험실을 현실적으로 변화시키려고 골몰하며, 마녀, 엔지니어, 노인들, 변태, 기독교인, 어머니들, 국가를 충분히 무장해제시킬 수 있는 레닌주의자들을 실질적으로 결합시켜줄 정치적인 형태를 건설하는 데 참여하고 있는 이런 집단을 상정해보고 싶다.

분열된 정체성

하나의 형용사만으로 혹은 모든 상황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명사만으로 자신의 페미니즘을 규정하기가 점차 힘들어지는 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명칭을 부여하게 되면 그외의 것은 배제된다는 의식 또한 절실해진다. 정체성이란 모순적이고 부분적이며 전략적인 것처럼 보인다.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서야 정체성이 사회적, 역사적인 구성물이라는 인식을 획득한 때문에, 성별, 인종, 계급 등이 본질적인 통일성에 대한 믿음의 토대를 제공할 수 없다. 여성을 자연스럽게 결속시키는 여성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여성적으로 "되어간다"는 어떤 상태마저도 없다. 여성으로 된다는 것은 성적인 과학적 담론과 다른 사회적인 실천과의 경쟁 속에서 형성되는 고도로 복합적인 범주이기 때문이다. 성별, 인종 혹은 계급의식은 가부장제, 식민주의, 자본주의라는 모순적인 사회적 실체를 통한 끔찍한 경험으로 인해 우리한테 강제적으로 부과된 것이다. 이럴 경우 내가 사용하는 수사 중에서 "우리"로 간주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라고 일컬어지는 그처럼 강력한 정치적 신화에 발판을 제공해주는 정체성은 무엇인가? 우리라는 집단성 속으로 소집될 수 있는 동기는 무엇인가?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도 모든 잘못된 경계선을 따라 분리된 고통스러운 파편화(여성들 사이의 파편화는 말할 것도 없고)는 여성을 배타적으로 만들었으며, 서로에게 여성 지배의 발판을 확보하려는 핑계거리를 제공해왔다. 나의 경우, 나의--백인 전문직 중산층 여성이자 진보적인 중년 북미 이라는 유사한 역사적 지역성을 공유하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정치적 정체성의 위기의 원천은 지역이다. 미국의 좌파와 페미니즘의 대다수에게 있어 최근의 역사는 끊임없이 분열하면서 새로운 본질적 통일성을 추구함으로써 초래된 이런 위기에 대한 반응의 역사다. 하지만 정체성이 아니라 친화성과 제휴를 통해 또다른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인식 역시 증대하고 있다.
유색여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새로운 정치적 목소리를 형성하는 특수한 역사적 순간을 염두에 둔, 첼라 샌도벌Chela Sandoval은 "대항의식"이라는, 희망에 찬 정치적 정체성 모델을 이론화했다. 대항의식은 인종, 성, 계급이라는 고정된 사회적 범주에 속하지 않는 구성원들의 입장에서 권력의 그물망을 읽어내려는 기술로부터 태어났다. '유색여성'이라는 명칭은 그것을 통합해 들이려는 사람들한테는 처음부터 수상쩍게 보인 명칭일 뿐만 아니라 서구 전통에서 볼 때 남성임을 드러내는 모든 징표를 체계적으로 붕괴시키려는 역사의식이기도 하다. 서구전통에서 남성은 타자성, 차이, 특수성을 바탕으로 삼아 포스트모던한 정체성의 군주를 구성해낸다. 이처럼 포스트모던한 정체성은 대단히 정치적이다. 샌도벌의 대항의식은 모순적인 위상과 이질적인 달력에 관한 것이지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에 관한 것이 아니다.
샌도벌은 유색여성이 누구인지 식별하는 어떤 본질적인 판단기준도 설정하지 않는다. 의식적인 부정을 차용함으로써 집단의 정의가 내려질 수 있었음에 그녀는 주목한다. 예를 들자면, 멕시코계 미국인 노동자나 혹은 미국 흑인여성은 여성으로서, 혹은 흑인여성으로서, 혹은 멕시코계 미국인 노동자로서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바탕에서부터 부정적인 정체성의 폭포로 이루어진 그런 여성은 중요한 혁명을 성취했다고 주장하는 "여성과 흑인들"이라는 "특권화된"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범주로부터도 배제되었다. '여성'이란 범주는 모든 비백인 여성을 부정했다. '흑인'은 모든 흑인여성을 부정했을 뿐아니라 모든 비흑인을 부정했다. 그들한테 미국 유색여성으로서의 역사적 정체성을 긍정했던 미국 여성들 가운데서도 단일한 '여성'으로 묶일 수 있는 범주는 어디에도 없으며 오직 차이의 대양만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이런 정체성은 자연스러운 동일시로 말미암은 행동을 부정하는 자의식적으로 구성된 공간으로부터 출현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오직 의식적인 연합과 친화력 그리고 정치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한다. 몇몇 미국 백인 여성운동의 조류에서의 '여성'과는 달리 이들에게는 자연스런 모태가 없다. 아니면 이런 정체성은 대항의식의 세력화를 통해서만 이용가능하다는 것이 적어도 샌도벌의 주장이다.
샌도벌은 세계적 추세인 반식민주의 담론에 기초해서 강력한 페미니스트 구성체가 출현한 것으로 주장한다. 말하자면 서구와 서구가 창출한 최고의 산물--동물도, 야만인도, 여성도 아닌 존재, 즉 남성 혹은 역사라고 불리는 우주의 주인--을 해체하는 담론에서부터 페미니스트를 위한 강력한 구성체가 출현했다는 주장이다. 오리엔탈리즘이 정치적으로, 기호학적으로 해체됨에 따라, 페미니스트의 정체성을 포함해서 서구의 정체성 역시 불안정하게 된다. 샌도벌에 의하면 '유색여성'은 기존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이 주장한 제국주의적이고 총체적인 혁명적 주체가 탈식민화 과정에서 드러나는 무질서한 다성음의 출현에 대응하지 못한 결함을 되풀이하지 않을 효과적인 통일체 건설의 기회가 된다.
케이티 킹Katie King은 동일시의 한계를 강조하면서 동일시의 정치적/시학적 역학을 문화적 페미니즘의 생성적 핵심인 "시"의 한부분으로 통합해 들였다. 킹은 페미니스트 실천에서 각기 다른 계기와 대화로부터 출현한 현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드러나는 집요한 경향은 자신의 정치적 경향만이 전체 운동의 목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페미니즘 운동을 분류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분류법은 페미니스트 역사를 장기간에 걸쳐 일관성 있는 유형들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투쟁처럼 보이도록 변형시킨다. 급진적 페미니즘, 자유주의적 페미니즘,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으로 부르는 유형적인 단위들이 특히 그런 경향을 드러낸다. 문자 그대로 말하자면 이런 유형들은 대체로 명확한 존재론이나 인식론을 구축함으로써 그밖의 다른 페미니즘을 통합해 들이거나 아니면 주변화시키고 있다. 페미니즘의 분류법은 공식적인 여성의 경험에서 일탈하는 것을 감찰하기 위한 인식론을 산출한다. 물론 유색여성과 같은 '여성의 문화'는 의식적으로 친화력을 유도하는 메커니즘에 의해 창출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시, 음악, 아카데믹한 실천의 다른 형태들의 제의형식이 두드러졌다. 미국 여성운동에서 인종과 문화의 정치학은 상호 밀접하게 짜여있다. 킹과 샌도벌의 공통된 업적은 전유, 통합, 분류식 동일시 논리에 의존하지 않고서 시적/정치적 통일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연구한 점이다.
지배를 통한 통일이나 혹은 통합을 통한 통일에 대항하는 이론적, 실천적 투쟁은 가부장제, 식민주의, 휴머니즘, 실증주의, 본질주의, 과학주의, 그밖의 모든 이즘들에 대한 정당성을, 아이러니컬하게도 침해할 뿐만 아니라 유기체적 관점과 자연스런 관점에 대한 모든 주장을 또한 잠식한다. 급진적 그리고 사회주의적/맑스주의적 페미니즘은 그들 자신과 우리 자신의 인식론적 전략을 훼손시켰다. 하지만 모든 인식론이 효과적인 친화력을 구축하는 데 과연 실패한 것인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있다.
고통스럽게도 우리는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육체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다. 기원의 순수성을 상실함과 동시에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역시 없어지게 된다. 우리의 정치학은 소박한 순수성으로 인한 죄의식에의 탐닉에서도 벗어난다. 하지만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위한 또다른 정치적 신화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 것인가? 어떤 종류의 정치적 신화가 부분적이면서도, 모순적이고, 모순적이면서도 영구적으로 열려져 있는 개인적, 집단적 주체구성을 포용할 수 있고,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충실하면서도 여전히 효과적일 수 있을 것인가?
역사상 인종, 계급, 성, 성욕의 지배에 대항하기 위한 정치적 연대가 지금처럼 절실하고 또한 가능한 시기도 없었다. 우리라는 범주 역시 이런 지배로부터 결백한 것은 아니다. 유로아메리칸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를 포함한 백인 여성은 '여성'의 범주가 순수한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의식은 모든 기존 범주의 지형을 변화시킨다. 사이보그 페미니즘은 '우리'라는 범주의 자연스런 모태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맑스주의 페미니즘/사회주의 페미니즘과 급진적 페미니즘은 여성과 여성의 사회적 삶에 대한 의식의 범주를 주어진 것이면서도 동시에 변형되는 것으로 보았다. 맑스주의 사회주의는 계급구조를 밝혀줄 임금노동 분석에 근거해 있다. 임노동의 결과, 노동자는 자기 생산물로부터 괴리됨에 따라 조직적인 노동소외 현상이 초래되었다. 따라서 맑시언 사회주의에서 '노동'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있어 필수적인 특권적 범주가 된다. 노동은 주체의 지식을 가능케 해주는 존재론적인 범주이며 따라서 굴종과 소외에 대한 지식을 가능케 해주는 존재론적인 범주이기도 하다.
맑스주의의 충실한 동지인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이런 맑스주의의 기본적인 분석적 전략과 연합함으로써 한걸음 더 전진했다. 맑스주의 페미니스트들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 양자가 성취한 중요한 업적은 노동 범주를 확장시켜 여성이 하는 일을 그런 범주가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심지어 임금관계가 자본주의적인 가부장제 아래서 포괄적인 노동 관점에 속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들은 여성의 가사노동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볼 때 재생산과 모성으로서의 여성의 양육행위가 맑시언 노동 개념과 유사하다는 유사성의 권위를 내세워 이를 이론화했다. 이때 '여성'의 통일성은 노동의 존재론적 구조에 토대한 인식론에 의존해 있다. 맑스주의/사회주의 페미니즘은 통일성을 자연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보이는 맑시언 휴머니즘의 유산은 서구적인 자아개념과 더불어 여전히 문제적이다.
캐더린 맥키넌(Catherine MacKinnon)식의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행동에 토대한 서구적 정체성 이론의 전유, 통합, 총체화시키는 경향에 대한 희화화이다. 맥키넌의 해석에 따르면, 급진적 페미니즘이라고 일컫는 최근의 여성 정치학에서의 다양한 계기와 대화들을 전부 동화시키려는 것은 정치적으로 볼 때 잘못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론이 주장하는 목적론적인 논리는 인식론과 존재론이 정치적 차이를 어떻게 무화시키고 있는지를 드러내 보여준다. 맥키넌 이론의 한 가지 효과는 급진적 페미니즘이라는 다성음적인 분야의 역사를 다시 쓰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 주요한 효과는 경험의 이론과 여성의 정체성을 생산하는 것인데, 이것은 모든 혁명적인 관점에 대한 일종의 묵시록이다. 맑스주의/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의식은 성취되는 것이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이론은 철저한 환원론의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휴머니즘적인 혁명적 주체가 만들어질 때 야기되는 난제들을 제거해 버린다.
맥키넌은 페미니즘이 맑스주의와는 다른 분석전략을 답변확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계급구조를 우선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성/성차의 구조, 그로 인한 생성적인 관계, 남성의 구성과 여성의 성적 전유 등을 오히려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맥키넌의 존재론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비주체와 비존재를 구성하고자 한다. 자아의 노동이 아니라 다른 사람(남성)의 욕망이 '여성'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여성의 경험'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의식이론을 발전시킨다.
급진적 페미니즘에서 성적 전유가 (맑스주의 페미니즘에서의) 노동의 인식론적 위상을 점하고 있다는 것은 잘못이다. 노동의 인식론적 위상으로부터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분석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소외가 아니라 성적 대상화는 성/성차의 구조의 결과이다. 지식의 영역에서 볼 때 성적대상화의 결과는 환상이며 추상화이다. 하지만 여성은 자신이 생산한 산물로부터 단순히 소외된 정도가 아니라 깊은 의미에서 볼 때, 아예 주체, 심지어는 잠재적인 주체로도 존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성적인 전유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타자의 욕망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노동자가 자기 노동산물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됨으로써 소외된다는 것과 같은 개념이 아니다.
(여성의) 경험에 대한 맥키넌의 급진적인 이론은 극단적으로 총체화시키는 이론이다. 그녀의 이론은 다른 여성의 정치적인 연설이나 행동의 권위를 주변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런 권위를 말살하려는 것이다. 정체성에 관한 한 어떤 맑시언 이론도 여성의 통일성에 확고하게 토대한 적이 없다는 그녀의 주장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페미니스트의 목적에 합당한 서구의 혁명적인 주체가 지닌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면서도 그녀는 오히려 경험이라는 훨씬 권위적인 원리를 발전시킨 셈이다. 사회주의/맑시언 관점한테 보내는 나의 불평은 이들 이론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반식민주의 담론과 실천에서 볼 수 있는 다성음적이고, 동화시킬 수 없는 철저한 차이를 지워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달리 본질상 여성은 비존재라는 장치를 통해 모든 차이를 의도적으로 무화시켜 버린 맥키넌의 이론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여타의 분류법이나 마찬가지로 역사를 재각인하는 나의 분류법에 따르면, 급진적 페미니즘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라면 노동형태로 간주할 모든 여성의 활동을 어쨌거나 성적인 것으로 간주해서 수용해 들인다. 재생산을 보는 관점에서도 이 두 유파는 서로 다른 어조를 띤다. 즉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재생산을 노동에 근거한 것으로 파악하는 반면, 급진적 페미니즘은 성에 근거한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양대 이론 모두 지배의 결과와 사회적, 개인적 현실에 대한 무지를 "허위의식"이라고 부른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다른 저자들의 주장에서 찾을 수 있는 문제점이나 공헌을 따지기에 앞서, 맑스주의자나 급진적 페미니스트 관점을 가진 자들 중 어느 누구도 부분적인 설명을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이 양자는 언제나 총체성으로 구성되었다. 서구의 설명은 그처럼 총체성을 요구해왔다. 그런 판국에 서구의 저자가 다른 저자들을 통합해 들이지 않을 방도가 어디 있었겠는가? 각자는 단순한 열거 혹은 첨가를 통해 지배의 기본적인 범주를 확장시킴으로써 다른 지배의 형식들을 수용해 들이려고 했다. 백인 급진주의자들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인종문제에 관한 당혹스런 침묵은 대단히 파괴적인 정치적 결과를 초래한다. 역사와 다성음은 계보학을 확립하려는 정치적 분류법 속으로 증발한다. 통합된 혹은 총체화할 수 있는 범주로서의 '여성'과 사회집단으로서의 '여성'이라는 범주를 구성하려고 하는 이론에서 인종을 위한 구조적인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보기에 이런 희화화된 구조는 다음과 같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계급구조/임노동/소외
노동, (노동과 비견되는) 재생산, (노동의 확장으로서의) 섹스, (노동에 덧붙여) 인종
급진적 페미니즘
성의 구조/성적인 전유/대상화
섹스, (섹스에 비견되는) 노동, (섹스의 확장으로서의) 재생산, (섹스에 덧붙여) 인종

또다른 맥락에서 프랑스 이론가인 쥴리아 크리스테바는 젊은이 집단과 더불어 여성은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역사적인 집단으로 출현했다고 주장했다. 크리스테바가 지목한 연대가 회의적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지식의 대상으로서 그리고 역사적 주역으로서의 "인종"이 원래부터 존재해왔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제 "계급"이 역사적으로 발생했으며, "동성애"는 극히 최근에 출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남성의 가족이라는 상징적인 체계--그러므로 해서 여성의 본질에 관한 상징적인 체계--가 지구상의 사람들을 묶어주는 전대미문의 그물망이 복합적이고 다양해지는 바로 그 찰나에 분열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선진 자본주의"는 이런 역사적 계기의 구조를 전달하는 데는 부적격이다. 서구적인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의 종말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단수의) 여성이 해체되어 (복수의) 여성들로 분화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여성들 사이의 특수성과 상호모순적인 이해관계를 억압하는 본질주의적인 이론을 산출해내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는 비난으로부터는 적어도 면제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백인 휴머니즘의 논리, 언어, 실천에 무반성적으로 참여해왔고, 우리의 혁명적인 목소리를 확보하기 위해 단일한 지배의 토대를 추구해왔음은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변명의 여지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실패를 의식한 나머지 부분적이고도 진정한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혼란스런 과제를 포기하면서 무한정한 차이의 세계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 어떤 차이는 유쾌한 반면 어떤 차이는 지배의 역사적인 체계 세계의 축들이다. 이제 인식론은 그런 차이를 식별하는 것이다.

지배의 정보과학

이와 같은 인식론적, 정치적인 입장을 시도하면서, 나는 가능한 단위들의 그림을 스케치하고 싶다. 즉 사회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로서의 디자인 원칙에 힘입은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 내 그림의 틀은 과학과 테크놀러지와 연관해서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바, 사회관계 재정비의 중요성과 범위에 의해 설정된다. 나는 계급, 인종, 성차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그 변화의 폭과 독창성에 있어서 산업자본주의가 창출했던 그것과 버금가는 정치학을 주장하고자 한다. 우리는 유기체적인 산업사회에서 다형태의 정보체계 사회로 이행한 시대를 살고 있다. 유물론적이면서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인 이런 이분법은 오래되어 익숙해진 위계질서로부터 빠져나와 내가 지배의 정보과학으로 이름붙인 새롭지만 두려운 그물망으로의 이행하는 것인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도표로 표현할 수 있겠다.

재현                         시뮬레이션
부르주아 소설, 리얼리즘      공상과학 소설, 포스트모더니즘
유기체                       생물학적 구성요소
깊이, 완결성                 표면, 경계
열기                         소음
임상적 실천으로서의 생물학   각인으로서의 생물학
생리학                       커뮤니케이션 엔지니어링
소집단                       하위체계
완벽                         최적화
우생학                       인구조절
데카당스 {마의 산}           퇴화, {미래 충격}
위생학                       스트레스 관리
미생물학, 폐결핵             면역학, 에이즈
노동의 유기체적인 분업       인간공학/노동의 인간두뇌학
기능적 전문화                모듈 구성
재생산                       복제
유기체적인 성역할 세분화     최선의 유전적 전략
생물학적 결정론              진화론적 관성, 구속력
커뮤니티 생태학              에코시스템
존재의 인종적 고리           신제국주의 UN 휴머니즘
가정/공장의 과학적 관리      글로벌 공장
가족/시장/공장               순환회로에서의 여성
가족 수당                    비교가치
공적/사적                    사이보그 시민권
자연/문화                    차이의 장
협업                         커뮤니케이션 강화
프로이트                     라캉
성 유전적 엔지니어링
노동                         로보틱스
정신                         인공지능
2차대전                      별들의 전쟁
백인 자본주의 가부장제       지배의 정보과학

이 목록은 여러가지 재미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오른편 항목들이 자연스런 것으로 약호화될 수 없는 것만큼이나 왼편 항목들 역시 자연스런 것으로 약호화될 수 없다. 우리가 이데올로기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신"만 죽은 것이 아니다. "여신" 또한 죽었다. 혹은 신과 여신은 극소전자학이나 바이오테크놀러지 정치학으로 충전된 세계 속에서 재생되었다. 그러므로 성적 재생산 역시 많은 재생산 전략 중 하나의 재생산에 불과하다. 따라서 성적 재생산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유기체나 가족과 같은 자연적인 대상 가운데서 유기체적인 측면을 지닌 성과 성역할 개념을 요구해야 할 타당한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종 문제에 있어,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와 반인종차별주의 이데올로기는 매개변수의 빈도수와 관련하여 정식화되어야 할 것이다. 원시와 문명이라는 대립 개념의 환기는 "비합리적"이다.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에게 통합적인 사회체계의 추구는 "실험적인 인종학"이라는 새로운 실천에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 이데올로기 차원에서도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와 식민주의가 선진과 후진, 근대화의 비율과 억제라는 언어로 바뀌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건 물건이건 분해와 재조립이라는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자연스런 건축물이 체계 디자인을 억제할 수는 없다. 과학적으로 알려진 전체 대상세계는 의사소통 엔지니어링이나 혹은 텍스트 이론상의 문제로 설정될 것임이 분명하다. 양자 모두 사이보그 기호학이다.
게다가 의사소통과학과 현대생물학은 공통의 관심사, 즉 세계를 약호의 문제로 번역하는 것이며, 도구적 통제에 대항하는 모든 저항을 사라지도록 만드는 것이자, 모든 이질성의 분해, 재조립, 투자, 교환에 종속시키는 공통된 언어를 찾는 데 모아질 것이다.
극소전자학은 노동을 로보틱스와 워드프로세싱으로, 섹스를 유전적인 엔지니어링과 재생산 테크놀러지로, 정신을 인공지능과 의사결정 절차로 전환시키는 매개작용을 한다. 새로운 바이오테크놀러지는 인간을 재생산하는 것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재료와 과정을 재디자인하는 데 있어 강력한 엔지니어링 과학인 생물학은 산업화 혁명을 암시한다. 의사소통과학과 생물학은 지식의 자연적이고 기술적인 대상으로 구성되는데, 여기서 기계와 유기체의 차이는 완전히 흐려진다. 일상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의 "다국적" 물질조직과, 문화와 상상력의 생산과 재생산의 상징적인 조직은 동등하게 직조되는 것 같다. 하부/상부, 공적/사적, 유물론적/관념론적 등과 같은 경계를 유지하려는 이미지는 더할 나위없이 취약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과학과 테크놀러지의 사회적인 관계를 통해 그처럼 밀접하게 재구성되는 세계 속에서의 여성의 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 라첼 그로스만Rachel Grossman이 주장하는 통합회로에서의 여성 이미지를 사용해왔다. "과학과 테크놀러지의 사회관계"라는 희안한 완곡법을 사용한 것은 내가 테크놀러지 결정론을 취급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구조화된 관계에 기초한 역사적 체계를 취급하려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하지만 이 어휘는 과학과 테크놀러지가 새로운 권력의 원천을 제공하는 만큼, 분석과 정치적 행동의 새로운 원천 또한 필요로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고도의 과학기술로 인해 가능해진 사회관계에 기초하여 인종, 성, 계급의 일부분이 재배치되었으므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그것과 부응하는 효과적이고 진보적인 정치학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가내경제The Homework Economy

"새로운 산업혁명"은 새로운 성욕sexuality과 인종개념뿐아니라 세계적으로 새로운 노동계급을 창출하고 있다. 자본의 급속한 유통과 새롭게 출현하는 국제적인 노동분업은 새로운 집단성의 출현과 맞물리면서 이전에 친숙한 집단의 퇴조와 부단히 교직된다. 이런 전개과정은 성/인종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고도산업사회의 백인남성이 여성보다 오히려 영구적인 직업상실에 훨씬 취약한 것으로 드러난다.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비율로 직업명단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특히 전자수출 분야에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다국적 기업이 3세계 여성노동력을 선호하기 때문에 비롯된 것만도 아니다. 이런 현상은 생산/소비의 사이클과 재생산과 성욕과 문화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을 필요로 한다.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진 실리콘 밸리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경우, 여성들의 생활은 전자산업과 관련된 직종에 고용됨으로써 그런 일을 중심으로 짜여진다. 그들은 전통적인 공동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경제적으로 취약해진다. 실리콘 밸리에서 일하는 민족적, 인종적으로 다양한 여성들은 문화, 가족, 종교, 교육, 언어 등이 서로 갈등하는 소우주를 형성하고 있다.
리차드 고돈Richard Gordon은 이런 새로운 상황을 가내경제homework economy라고 부른다. 고돈에 의하면 가내경제란 전통적으로 여성의 직업으로 간주된 것이 그 특징이며, 문자 그대로 여성들이 행하는 일이다. 그는 가내경제를 재구성하려는 뜻에서 그런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이때의 일은 문자 그대로 여성의 일과 남녀에 상관없이 여성화된 직업 모두를 의미하는 것으로 재정의할 수 있다. 여성화되었다는 것은 극도의 취약성과 예비노동력으로서 언제라도 헤쳐모여할 수 있는 착취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일꾼이 되며 제한된 노동일을 조롱하는 임시 고용직으로 시간을 재배치받게 된다. 가내경제는 대규모 비숙련 노동자들만(사실 노동자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전담하는 것은 아니다. 이전에는 숙련노동에 종사하다가 밀려난 사람들이 담당하기도 한다. 가내경제는 공장, 가정, 시장에 새로운 차원으로 통합되는 것을 지칭하며 이런 재편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은 핵심적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상황에 처해진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한 의미와 여성들 사이에 드러나는 차이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경제적, 과학기술적인 배치는 복지국가 개념의 붕괴와 더불어 여성이 다른 가족구성원뿐만 아니라 자기자신을 부양하기 위해 일상생활을 영위해야할 필요가 심화된 것과 관련이 있다. 빈곤의 여성화가 절박한 초점이 된다. 다양한 여성이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는 원인은 인종, 계급, 성욕과 같은 기능에서 비롯된다. 간신히 가사노동에서 벗어나 말단직원이나 그와 유사한 직업에 다수가 종사하게 된 흑인여성들은 고용문제에 있어 지속적으로 강요된 흑인의 가난을 대체로 암시한다. 산업화되어 가는 3세계의 10대 여성들은 농지를 손에 넣기가 점점 힘들어가는 마당에 그나마 그들 가족이 현금을 손에 쥘 수 있는 유일한 수입원이다. 이런 식의 발전은 성차와 일종의 정신역학과 정치학 분야에서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 분명하다.
제임슨이 자본주의 발전의 3단계(상업적/초기 산업자본주의, 독점자본주의, 다국적자본주의)와 미학적 단계를 매개시켰던 것처럼, 나는 특정한 가족형태와 자본의 형태와 그것의 정치적, 문화적 상호연관을 변증법적으로 연결시켜 보고자 한다. 이런 가족의 이상적인 형태는 세 가지로 도식화된다. 1. 가부장적 핵가족. 이 경우는 공적/사적 영역분리라는 백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19세기 영미 페미니즘에 토대한 것이다. 2. 근대 가족: 복지국가 개념에 의해 가족수당을 제도화한 경우이다. 이성애중심 페미니즘이 개화한 시기이다. 3. 가내경제 가족: 어머니가 가족장이 되는 반어법적인 가족구조이다.
이것은 새로운 과학기술로부터 기인한 세계적인 구조적 실업이 가내경제의 한 형태로 출현하게 된 맥락이다. 로보트공학으로 인해 선진국에서 남성노동은 줄어들고, 제3세계 남성의 직업 역시 악화되면서 노동의 여성화가 심화된다. 흑인여성 노동력이 흑인남성 노동력의 구조적 실업을 만연시키면서 여성노동력 자체마저 자본주의 임금경제내에서 대단히 취약성을 드러내게 만든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새로운 테크놀러지는 기아와 식량생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여성은 세계식량의 50%를 생산해낸다. 그렇다고 해서 식량조달을 위한 여성노동과 책임량이 줄어든 것도 아니고 재생산은 보더 더 복잡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녹색혁명과 바이오테크놀러지는 상호작용을 하면서 노동의 성별 분업과 성별 이주패턴을 달리하게 만든다.
새로운 테크놀러지는 공적 영역의 사영역화로 나아가면서 공적 생활의 근거를 박탈한다. 비디오 게임 등은 개인의 삶을 사적 영역으로 축소시킨다. 새로운 테크놀러지는 성욕과 재생산 영역에서의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킨다. 육체의  해석을 둘러싸고 의료 해석학은 무수한 쟁점을 산출하고 있다. 따라서 고도테크놀러지 사회에서 페미니스트 육체 정치학은 기존의 것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들은 페미니스트 과학의 가능성에 대한 중요한 탐구의 장을 열어준다. 새로운 집단들이 지식과 상상력 생산에서 어떤 구성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집단들이 진보적인 사회적, 정치적 운동과 어떻게 결속할 수 있을 것인가? 여성을 고립화시키는 과학기술 사회에서 여성의 연대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군사과학에 대항하는 페미니스트 과학기술 정치학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인가? 실리콘 밸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나 고도기술을 지향하는 카우보이나 군사과학 분야에 종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매일반이다. 하지만 유색여성을 포함한 이런 개별적인 선호도와 문화적 추세를 점차 증가하고 있는 전문적인 중산층 여성과 연대할 수 있는 진보적 정치학으로 어떻게 묶어낼 것인가?

통합회로에서의 여성

선진산업사회에서 여성의 역사적 위치를 요약해보면, 공적/사적 영역구분에 의해 여성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방향설정이다. 나는 사적인 육체와 공적인 정치학의 경계가 상호침투할 수 있고 공간과 아이덴티티가 혼융되는 네트워트 이미지를 선호하는 편이다. 네트워트는 페미니스트 실천이기도 하지만 다국적 기업의 전략이기도 하다.
지배의 정보학과 통합회로에서 여성의 지위라는 문제로 되돌아가 보자. 가정, 시장, 임금노동현장, 국가, 학교, 병원, 교회에서의 여성의 네트워크가 어떻게 짜여지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공간에서 통합적인 자아의 동일시라는 관점보다는 이산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이다.
가정: 여가장제, 노령화된 여성노동, 무주택자, 이민, 강화된 핵가족, 가내부업 노동, 가정폭력이 심화된다.
시장: 여성의 소비적인 노동, 고도테크놀러지에 버금가는 노동과 상품에서 비공식 시장의 중요성, 경험의 추상성이 강화되고 상품화된다. 추상화와 소외된 노동의 성적 대상화가 진행된다.
임금노동 공간: 성적, 인종적으로 노동분화가 심화된다. 말단직원, 서비스 직종 등의 여성직업에 미치는 새로운 과학기술의 영향력이 증대된다. 노동계급의 국제적인 재구성, 가내부업 경제를 위한 시간 배치가 개발된다. 노동의 주변화와 여성화가 형성된다.
국가: 복지국가의 부식, 감시와 통제와 더불어 탈중앙집권화가 진행된다. 사무실의 자본집중으로 공무원의 직업 감소, 유색인종 여성들의 직업판도의 유동성 시사, 생활과 문화의 사공간화, 서로 다른 사회집단이 그밖의 다른 사회집단의 눈에 띠지 않게 된다.
학교: 모든 차원에 교육이 필요하지만, 인종, 계급, 성별에 따른 선별적인 교육과 고도테크놀러지 자본과의 짝짓기, 학생과 교사들에 대한 민주적인 교육 구조를 저당잡혀 교육개혁을 시도하는 관리계층의 간섭증대, 우민화 교육, 반과학적 신비주의 심화, 과학기술상의 무지, 그외에 고도로 교육받은 고도테크놀러지에 토대한 엘리트 계층의 대두가 문제시된다.
병원: 기계-육체의 관계가 심화된다. 여성의 재생산과 관련해서 통제의 정치학과 대중건강운동에서 이데올로기 역할이 지속된다.
교회: 설교자들은 전자화된 자본과 자동화된 물신적 신의 결합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교회는 종교에 있어서 여성의 의미와 권위에 관한 핵심적인 투쟁의 공간이 된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볼 때, 맑스주의가 주장한 것처럼 지배와 권력관계를 허위의식만으로, 혹은 정치적 인식론과 조작된 허위의식의 대비로만 규명할 수 없다. 게임의 규칙을 변화시키려는 쾌락, 경험, 권력의 미묘한 관계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요구된다. 과학기술과 관련된 사회관계의 경험은 획일화될 수 없는 만큼 편차가 있다. 이런 부분을 제대로 조명하려면, 맑스주의, 정신분석학, 페미니즘, 인류학 등이 제휴할 필요가 있다.
내가 페미니즘의 정치학을 위해 총체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변증법 자체도 모순을 해소하려는 꿈언어이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동물과 기계와 융합함으로써 이성중심의 대문자 인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과학과 테크놀러지에 의해 필수불가결해진 금기와 융합함으로써 페미니스트 과학을 정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이보그: 정치적 정체성의 신화

페미니스트 사이보그 신화를 생산하기 위해 페미니스트 공상과학소설에 나타난 유색여성과 괴물적인 자아의 구축에서 우리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오드르 로드Audre Lorde의 표현을 빌자면 유색여성은 사이보그 정체성이다. 그녀는 {아웃사이더 자매}에서 이 점을 잘 표현한다. 미국 외부에서 아웃사이더 자매들은 여성화된 미국노동자들이 자신의 연대와 안정을 위협하는 적으로 간주하는 존재들이다. 미국 내부에서 아웃사이더 자매들은 동일한 산업체 안에서도 분업과 경쟁과 착취를 위해 잠재세력이다. 유색여성은 과학기술에 토대한 산업체에서 선호되는 노동력이자, 세계적인 섹스시장, 노동시장, 재생산의 정치가 일상생활 속으로 다양하게 파고드는 현실의 여성이다. 한국에서 섹스산업에 투여되는 여성들은 고등학생 나이 또래에서 차출된다. 전자산업체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통합회로에 적응하도록 교육받는다.
고전전통이 강한 동양권 문화와는 달리 서구에서 문자해독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색여성에게 문자해독과 의미화 능력의 획득은 목숨을 건 정치투쟁의 산물이었다. 해체론이 글쓰기를 남근이성중심주의라고 비판하지만 유색여성의 글쓰기는 이와는 달리 남근적이거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하고 투명한 글쓰기가 아니다. 그들의 글쓰기는 한때 존재했던 근원으로 되돌아가려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이보그 글쓰기는 언어 이전의 오염되지 않은 순수와 충만의 기원으로서의 글쓰기나 그런 존재론적 글쓰기에 대한 향수가 아니다. 사이보그 글쓰기는 자신들을 타자로 구획짓는 세계에 자신들의 비가시성을 표시하는 도구이다. 다시 듣는 우리의 이야기는 정체성을 이분법으로 고정시킨 신화를 대체하고 뒤집어놓을 수 있는 그런 글쓰기 도구의 기능이다.
그러므로 서구의 기원신화를 대체한 것이 사이보그 신화다. 서구문명의 기원 신화를 전복하는 것이 사이보그 작가의 과제다. 우리는 자족적인 기원신화에 의해 신화화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색인종의 여성언어는 키메라이다. 신세계의 사생아이자 메스티조 원주민 여성인 말린취는 언어를 습득한 코르테즈 여성으로서, 멕시코계 미국 여성의 정체성 구성에 중요한 의미작용을 한다. {전쟁 기간에 사랑하기}에서 체리 모라가Cherrie Moraga는 기원의 언어나 기원설화와 서사가 없으며, 합법적인 문화의 동산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유색여성의 정체성 문제를 주제로 삼았다. 그들에게 언어습득은 정복자의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지만 그런 언어습득으로 인해 생존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모라가의 언어는 동질적인 전체가 아니라 스페인어와 영어의 키메라이다. 정복자의 언어라지만 글쓰기를 통해 유색여성은 보이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표시하게 되고 에로틱하고 능력있는 정체성을 구성하게 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영미 아버지라는 범주에 싸잡혀 넣어갔거나 아니면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문자 이전의 원초적인 어머니로 건너뛸 가능성을 그녀의 언어가 차단한다. 말린취는 금단의 열매를 먹은 이브도 아니고 타락으로 인해 글쓰기가 가능해지지 이전의 자연과 같은 문맹의 여성도 아니다.
남근이성중심의 이데올로기에 대항문화로서의 사이보그는 잡종, 모자이크, 키메라다. 사이보그는 유기체와 기계와의 관계에서 범주의 경계를 해체한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복제인간인 레이첼은 사이보그 문화에 대한 공포,사랑, 혼란을 상징한다. 케이티 킹Katie King의 {여성 남자인 엘릭스의 모험}에서 등장인물은 네 가지 유전자형을 가졌다. 이 네 가지 유전자형이 만난다고 해서 완전한 전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본다 맥킨타이어Vonda McIntyre의 {슈퍼루미널}Superluminal에서 인간이라고 할 만한 인간은 없다. 이 작품은 인간의 위상 자체를 문제삼고 있다. 오르카는 잠수부로서 심해에서도 생존할 수 있고 킬러 고래와도 대화할 수 있으면서도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어한다. 우주비행사가 되려면 심장이식 수술을 받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오르카는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레니아는 광속으로 달리는 우주선에서 날아남기 위해 심장과 그밖의 기관을 대체한다. 라두 드라큘은 외계에서 바이러스 감염에도 살아남는다. 그는 공간지각의 범주를 변화시키는 시간감각을 가지게 된다. 이 모든 등장인물들은 언어의 한계를 탐구하면서 프로티우스처럼 변신한다. {슈퍼루미널}은 사이보그 세계의 모순을 상징한 것이다. 그것은 페미니스트 이론과 공상과학 소설에 등장하는 식민지 담론이 텍스트상 교직됨으로써 <스타 트랙>의 여성판 공상과학소설이 되고 마는 그런 모순이다.
결론적으로 사이보그 이미저리는 두 가지 핵심적인 논쟁점을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보편적이고 총체적인 이론의 생산은 실재를 간과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2. 과학과 테크놀러지가 사회관계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반과학적 형이상학과 테크놀로지의 주술화를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해서 타자와의 부분적인 관계와 다른 영역과의 의사소통시에 일상의 경계를 재구성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은 공통의 언어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강력하고 불경스러운 이질언어heteroglossia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계, 정체성, 범주, 관계, 공간과 스토리를 건설하면서 파괴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신이 되기보다 차라리 사이보그가 되고 싶다.

*) 출전: Donna Haraway, "A Manifesto for Cyborgs: Science, Technology, and Socialist Feminism in 1980s", in Linda J. Nicholson, ed., Femimism/Postmodernism, Routledge, 1992, 190-233쪽을 요약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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