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 ㅡ김종삼ㅡ
들로 가신 엄마 생각
책을 펼치면
책장 그대로
푸른 보리밭
이 많은 이랑의
어디 만큼에
호미 들고 계실까
우리 엄마는
글자의 이랑을
눈길로 타면서
엄마가 김을 매듯
책을 읽으면
싱싱한 보리 숲
글줄 사이로
땀 젖은 흙냄새
엄마 목소리
▦ 운문사 비밀의 숲 -성영희-
나, 다시 태어난다면,
운문사 극락교 너머 비밀의 숲에
이름 없는 한 포기 풀꽃으로 살고 싶네.
구름도 쉬어가는 이목소 맑은 물
갈봄 없이 내려와 얼굴을 씻는 소나무 곁에
정갈한 수건 한 장 두 손으로 받들고
비구니 꽃으로 늙어가도 좋겠네.
이른 아침,
호거산 병풍을 펴는 예불소리에 눈뜨고
깊은 밤, 구름문 열고 산책 나온 달빛,
그 하얀 발자국 소리를 베고 잠이 들겠네.
문살을 스치는 바람에도 일어나 합장하고
오백년 소나무가 땅을 향해 경배하는 겸손을 배우겠네.
그대, 마음이 슬프거나,
어지럽다면 함께 가지 않겠나.
호거산 줄기 속 연꽃처럼 피어난
운문사 극락교 너머 비밀의 숲으로,
목탁 속 같은 이 골짜기
몸속을 울리고 나오는 독경 소리들
비스듬히 열린 장지문에 저녁햇살로 살면
또 어떠하겠나,
우리, 가슴을 열면 하늘문도 열리는 것을.....
▦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심순덕-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