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시,자연시 시인들좀 알수있을까요

순수시,자연시 시인들좀 알수있을까요

작성일 2013.10.21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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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시,자연시를 찾아읽고픈데 수업시간에 배운시인들 다 잊어버려서 ㅠ 과거활돔하셨던시인이나 지금 활동하시는분들, 대표적인 시인분들 등등 시인분들 몽땅!!! 알려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순수시로 김영랑, 벅용철 시인이 있으며 자연시로 정지용, 김달진 시인이 있습니다.

 

순수시는 경향시에 반(反)하여 외적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언어의 미적 기능만을 두드러지게 만든 시입니다.

자연시는 특히 동양의 자연시는 풍경 묘사와 시인의 정서가 조화를 이루며, 자아와 대상을 일체로 만든 시입니다. 

(서양의 자연시 Nature poetry는  대체로 모방의 대상, 정복의 대상, 문명의 대타적 개념으로 이해되는 시)

 

 

몽땅...

아래 많은 시를 적을텐데 몽땅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순수시와 자연시를 쓴 시인들의 시와 시인 약력 등을 적어보겠습니다.

 

 

 

물소리 - 김영랑

바람따라 가지오고 멀어지는 물소리
아주 바람같이 쉬는 적도 있었으면
흐름도 가득 찰랑 흐르다가
더러는 그림같이 머물렀다 흘러보지
밤도 산골 쓸쓸하이
이 한밤 쉬어가지
어느 뉘 꿈에 든 셈 소리 없든 못할소냐
새벽 잠결에 언뜻 들리어
내 무건 머리 선뜻 씻기우느니
황금소반에 구슬이 굴렀다
오 그립고 향미론 소리야
물아 거기 좀 멈췄으라
나는 그윽히 저 창공의 銀河萬年을 헤아려보노니
 

수풀 아래 작은 샘 - 김영랑

수풀 아래 작은 샘
언제나 흰구름 떠가는 높은 하늘만 내어다보는
수풀 속의 작은 샘
넓은 하늘의 수만 별을 그대로 총총 가슴에 박은 작은 샘
두레박을 쏟아져 동이 가를 깨지는 찬란한 떼별의 흩는 소리
얼켜져 잠긴 구름 손결이
온 별나라 휘흔들어버리어도 맑은 샘
해도 저물녁 그대 종종걸음 훤듯 다녀갈 뿐 샘은 외로워도
그밤 또 그대 날과 샘과 셋이 도른도른
무슨 그리 향그런 이야기 날을 세웠나
샘은 애끈한 젊은 꿈 이제도 그저 지녔으리
이밤 내 혼자 나려가볼꺼나 나려가볼꺼나


사랑은 하늘 - 김영랑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맹세는 가볍기 흰구름쪽
그 구름 사라진다 서럽지는 않으나
그 하늘 큰 조화 못 믿지는 않으나


숲향기 - 김영랑

숲향기 숨길을 가로막았소
발끝에 구슬이 깨이어지고
달따라 들길을 걸어다니다
하룻밤 여름을 세워버렸소


거문고 - 김영랑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번 바뀌었는데
내 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둘 곳 몸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놓고 울들 못한다
 

춘향(春香) - 김영랑

큰 칼 쓰고 옥(獄)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 옛날 성학사(成學士) 박팽년(朴彭年)이
오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서름이 사무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南江)의 외론 혼(魂)은 불리어 나왔느니
논개(論介)!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貞節)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獄死)한단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卞學徒)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 내렸다
버들잎이 창살에 선뜻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三更)을 세오다가 그는 고만 단장(斷腸)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南原) 고을도 깨어지고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두견(杜鵑) - 김영랑

울어 피를 뱉고 뱉은 피 도로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에 지친 작은 새,
너는 너른 세상에 설움을 피로 새기러 오고,
네 눈물은 수천(數千) 세월을 끊임없이 흐려 놓았다.
여기는 먼 남(南)쪽 땅 너 쫓겨 숨음직한 외딴 곳,
달빛 너무도 황홀하여 호젓한 이 새벽을
송기한 네 울음 천(千) 길 바다 밑 고기를 놀래이고,
하늘가 어린 별들 버르르 떨리겠구나.

몇 해라 이 삼경(三更)에 빙빙 도는 눈물을
씻지는 못하고 고인 그대로 흘리웠느니,
서럽고 외롭고 여윈 이 몸은
퍼붓는 네 술잔에 그만 지늘꼈느니,
무섬증 드는 이 새벽까지 울리는 저승의 노래.
저기 성(城) 밑을 돌아나가는 죽음의 자랑 찬 소리여,
달빛 오히려 마음 어둘 저 흰 등 흐느껴 가신다.
오래 시들어 파리한 마음마저 가고지워라.

비탄의 넋이 붉은 마음만 낱낱 시들피느니
짙은 붐 옥 속 춘향이 아니 죽었을라듸야
옛날 왕궁(王宮)을 나신 나이 어린 임금이
산골에 홀로 우시다 너를 따라 가시었느니
고금도(古今島) 마주 보이는 남쪽 바닷가 한 많은 귀향길
천리 망아지 얼렁 소리 쇤 듯 멈추고
선비 여윈 얼굴 푸른 물에 띄웠을 제
네 한된 울음 죽음을 호려 불렀으리라.

너 아니 울어도 이 세상 서럽고 쓰린 것을
이른 봄 수풀이 초록빛 들어 풀 내음새 그윽하고
가는 댓잎에 초승달 매달려 애틋한 밝은 어둠을
너 몹시 안타까워 포실거리며 훗훗 목메었느니
아니 울고는 하마 지고 없으리, 오! 불행의 넋이여,
우거진 진달래 와직 지우는 이 삼경의 네 울음
희미한 줄 산(山)이 살풋 물러서고
조그만 시골이 흥청 깨어진다.


북 - 김영랑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진머리 휘몰아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마저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면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長短)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닥타 - 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 같이 익어 가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지


미움이란 말 - 김영랑

미움이란 말 속에
보기 싫은 아픔 미움이란 말 속에
하잔한 뉘침
그러나 그 말씀 씹히고 씹힐 때
한 꺼풀 넘치어 흐르는 눈물


오월(五月) - 김영랑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진다.
바람은 넘실 천(千) 이랑 만(萬)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빛 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 버리련?


지반추억(地畔追億) - 김영랑

깊은 겨울 햇빛이 따사한 날
큰 못가의 하마 잊었던 두던길을 사뿐
거닐어가다 무심코 주저앉다
구을다 남어 한 곳에 쏘복히 쌓인 낙엽
그 위에 주저앉다
살르 빠시식 어쩌면 내가 이리 짖궂은고
내 몸 푸를 내가 느끼거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앉어지다?
못물은 치위에도 달른다 얼지도 않는 날세
낙엽이 수없이 묻힌 검은 뻘 흙이랑 더러
들어나는 물부피도 많이 줄었다
흐르질 않더라도 가는 물결이 금 지거늘
이 못물 왜 이럴고 이게 바로 그 죽음의 물일가
그저 고요하다 뻘흙속엔 지렁이 하나도
꿈틀거리지않어? 뽀글하지도 않어 그저
고요하다 그 물 위에 떨어지는 마른 잎
하나도 없어?
햇빛이 따사롭기야 나는 서어하나마 인생을 느꼈는데.
여나문해? 그때는 봄날이러라 바로 이 못가이러라
그이와 단 둘이 흰 모시 진설 두르고 푸르른
이끼도 행여 밟을세라 돌 위에 앉고
부풀은 봄물결 위에 떠노는 백조를 희롱하여
아즉 청춘을 서로 좋아하였었거니
아! 나는 이지음 서어하나마 인생을
느끼는데.


발짓 - 김영랑

건아한 낮의 소란소리 풍겼는듸 금시 퇴락하는 양
묵은 벽지의 내음 그윽하고
저쯤에사 걸려 있을 희멀끔한 달
한자락 펴진 구름도 못 말어놓은 바람이어니
포근히 옮겨 딛는 밤의 검은 발짓만 고되인
넋을 짓밟누나
아! 몇날을 더 몇날을
뛰어본다리 날아본다리
허잔한 풍경을 안고 고요히 선다.


강물 - 김영랑

잠 자리 서뤄서 일어났소
꿈이 고웁지 못해 눈을 떳소

벼개에 차단히 눈물은 젖었는듸
흐르다못해 한방울 애끈히 고이었소

꿈에 본 강물이 몹시 보고 싶었소
무럭무럭 김 오르며 내리는 강물

언덕을 혼자서 지니노라니
물오리 갈매기도 끼륵끼륵

강물은 철 철 흘러가면서
아심찬이 그꿈도 떠실고 갔소

꿈이 아닌 생시 가진 설움도
작고 강물은 떠실고 갔소.


5월 아침 - 김영랑

비 개인 5월 아침
혼란스런 꾀꼬리 소리
찬엄(燦嚴)한 햇살 퍼져 오릅내다

이슬비 새벽을 적시울 즈음
두견의 가슴 찢는 소리 피어린 흐느낌
한 그릇 옛날 향훈(香薰)이 어찌
이 맘 홍근 안 젖었으리오마는
이 아침 새 빛에 하늘대는 어린 속잎들
저리 부드러웁고
발목은 포실거리어
접힌 마음 구긴 생각 이제 다 어루만져졌나보오

꾀꼬리는 다시 창공을 흔드오
자랑찬 새 하늘을 사치스레 만드오
사향(麝香) 냄새도 잊어버렸대서야
불혹이 자랑이 아니 되오
아침 꾀꼬리에 안 불리는 혼이야
새벽 두견이 못 잡는 마음이야
한낮이 정밀하단들 또 무얼하오

저 꾀꼬리 무던히 소년인가 보오
새벽 두견이야 오-랜 중년이고
내사 불혹을 자랑턴 사람.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오매 단풍 들것네 -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독(毒)을 차고 - 김영랑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마저 가 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지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풀위에 맺어지는 이슬 - 김영랑

풀위에 맺어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위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벌린다


묘비명 - 김영랑

생전에 이다지 외로운 사람
어이해 뫼 아래 뉘돌 세우오
초조론 길손의 한숨이라도
헤어진 고총에 자주 떠오리
날마다 외롭다 가고 말 사람
그래도 뫼 아래 빗돌 세우리
『외롭건 내 곁에 쉬시다 가라』
한되는 한마디 새기실난가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김영랑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뻔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론도론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의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내 마음을 아실 이 - 김영랑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 방울
푸른 밤 고히 맺는 이슬같은 보람을
보밴듯 감추었다 내여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어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물보면 흐르고 - 김영랑

물 보면 흐르고
별 보면 또렷한
마음이 어이면 늙으뇨

희날에 한숨만
끝없이 떠돌든
시절이 가엾고 멀어라

안쓰런 눈물에 안겨
흩은 닢 쌓인 곳에 빗방울 듣듯
느낌은 후줄근히 흘러 흘러 가건만

그 밤을 홀히 앉으면
무심코 야윈 볼도 만져보느니
시들고 못 피인 꽃 어시 떨어지거라


언덕에 바로 누워 - 김영랑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읍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야 너무도 아슬하야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 때라도 없드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기었네 감기었네
 
*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 준 김영랑 - 이승원

김영랑(1903-1950)의 본명은 김윤식으로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출생하였다. 강진 보통 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휘문 의숙을 다니다가 3.1운동으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이 일로 휘문 의숙을 중퇴한 김영랑은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다시 학업을 중단하고 강진의 자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강진에서 무료한 생활을 하고 있던 영랑에게 송정리의 벗 박용철이 찾아와 시 전문지를 같이 내자고 제안했다. 박용철은 오랜 숙의 끝에 사재를 털어 [시문학] 창간호를 1930년에 발간하게 된다.

1930년은 김영랑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그 해 3월에 간행된 [시문학] 창간호에 13편의 시를 한꺼번에 발표하며 시단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나온 [시문학] 2호에 9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20편이 넘는 작품을 1930년 두 달 동안에 한꺼번에 발표했던 것이다.

김영랑의 시는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카프를 중심으로 쓰여진 경향시는 생경한 사상성과 경직된 목적 의식을 주로 드러냈기 때문에 당시의 시단은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 주는 김영랑의 시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이로써 시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변화하였고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방법적 자각을 가지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경향시 위주였던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시에 대한 인식 변화시켜 김영랑의 시에는 '내 마음'이라는 어휘가 유달리 많이 보이는데 그가 이 말을 많이 사용한 것은 내면의 순결성을 표현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직접 제시하지 않고 대부분 자연의 이미지를 통하여 표현하였다.

그의 초기 시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자연의 정경은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것들이다.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에 제시된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은빛의 강물, [제야]에 제시된 맑은 샘물과 밤의 심상, [가늘한 내음]에 제시된 보랏빛 노을의 고요한 아름다움, [내 마음 아실 이]에 나오는 향맑은 옥돌의 심상 등은 모두 마음의 순결성을 나타내는 예들이다. 이렇게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자연의 정경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순결한 마음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김영랑 서정시의 출발은 바로 이 순결성에 있었다. 이 순결성이 그의 시를 아름다운 해조와 서정주의의 극치로 몰아간 것이다. 그 순결한 마음은 자연의 미묘한 변화와 대응되므로 분명히 파악되지는 않는다. 순결성은 꽃가지의 은은한 그늘이나 봄날의 미미한 아지랑이처럼 모호한 상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영랑은 자연의 맑고 깨끗한 정경을 통해 마음의 순결성을 보여 주었는데, 자연의 정결한 모습에 집중하게 되면 자연히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황홀감을 갖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본래 자연을 통한 순결성의 추구는 현실 세계의 추악함을 인식하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 이때에 자연은 현실과 대립적 위상에 놓이게 된다. 현실은 고통과 비애가 교차되는 장소로 인식되는 반면,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은 이 모든 현실적인 것을 망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의 많은 시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연의 어느 한 순간이 가져다주는 극치의 아름다움은 그의 정신을 몽롱케 할 정도로 황홀감을 안겨 준다. 저녁놀이 물드는 보랏빛 하늘, 밤 깊이 흐르는 물소리와 찬란한 별떨기, 은색으로 황홀히 빛나는 달빛, 맑은 가을날의 고요한 정경, 이 모든 것이 자연미의 한 정점을 보인 것이어서 시인은 그 황홀감에 가슴 설레며 몸둘 바 몰라 한다.

그런데 이 황홀한 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모란이 한번 흐드러지게 피어 그 찬란한 빛을 불태웠다가 천지에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쉽게 소멸하는지 모른다. 자연의 순결성도 현실 세계의 혼탁함 때문에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지 않으며, 자연의 황홀한 아름다움 또한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라면 영랑의 자연 인식은 비극적인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그 비극성이 그의 심혼을 긴장시키고 그의 서정시를 가능케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모란이 사라져 버리고 자신의 마음에 비탄과 상실의 감정이 남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해 놓았다. '뚝뚝'이라는 시어를 통해 모란이 무정히 사라져 버리는 정경을 소리로 나타내는가 하면, '떨어져 누운 꽃잎마져 시들어버리고'라는 시행을 통해 처절한 상실의 순간과 상실 뒤에 오는 형언할 수 없는 비탄의 정서를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삼백예순 날을 계속 울고 지낸다는 과정적 표현을 배치하여 그리움의 정도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한편으로 영랑의 자연에 대한 인식이 시인 자신의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음악적 장단과 호응을 이루며 하나의 정경으로 표현될 때 그것은 오롯한 미의 원광을 두르게 된다. 가령 영랑의 [오월] 같은 시는 봄 들판의 약동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인데 시각적 이미지를 적절히 구사하여 심미감을 높이고 운율의 변화를 통하여 흥겨운 율동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서정적 표현의 한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우리 시의 역사에서 귀중히 간직하고 전수해야 할 표현 상의 백미(白眉)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판단한다.

맑고 깨끗한 자연의 정경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순결한 마음의 세계 표현

김영랑의 시에서 인생과 사회에 대한 발언이 중심을 이룬 작품은 아주 적다. 현실에 대한 반응을 보인 예로는 [거문고]라든가, [독을 차고], [우감(偶感)], [춘향] 등의 작품을 들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점 때문에 현실주의적 시각을 가진 사람은 김영랑의 시가 우리에게 어떤 효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앞에서 말한 [오월]처럼 자연의 정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일관한 작품은 그런 지적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인생과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만 우리의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는 관련이 없는 듯한 자연에 대한 상상도 우리의 감정을 풍요롭게 하며, 새로운 비유와 표현의 구사도 언어사용의 폭을 넓힘으로써 실제의 삶을 윤택하게 가꾸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자연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아름다운 언어와 절묘한 기법으로 표현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김영랑의 시는 그 나름의 충분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 김영랑

본명은 윤식(允植). 전남 강진 출생.
부유한 지주의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랐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 3·1운동 때에는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학원에 입학하여 중학부와 영문과를 거치는 동안 C.G.로세티, J.키츠 등의 시를 탐독하여 서정의 세계를 넓혔다.
1930년 박용철(朴龍喆)·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참가하여 동지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쓸쓸한 뫼 앞에〉 〈제야(除夜)〉 등의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서정시를 계속 발표.
1935년에는 첫째 시집인 《영랑시집(永郞詩集)》을 간행하였다.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한 그의 시는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金起林)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저항 자세를 보여주었고, 8·15광복 후에는 민족운동에 참가하는 등 자신의 시의 세계와는 달리 행동파적 일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였다. 6·25전쟁 때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은신하다가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다.

 
싸늘한 이마 - 박용철

큰 어둠 가운데 홀로 밝은 불 켜고 앉아 있으면 모두 빼앗기는 듯한 외로움
한 포기 산꽃이라도 있으면 얼마나한 위로이랴

모두 빼앗기는 듯 눈덮개 고이 나리면 환한 온몸은 새파란 불 붙어 있는 인광
까만 귀또리 하나라도 있으면 얼마나한 기쁨이랴

파란 불에 몸을 사르면 싸늘한 이마 맑게 트이어 기어가는 신경의 간지러움
기리는 별이라도 맘에 있다면 얼마나한 즐검이랴
 
 
기다리는 때 - 박용철

솔사이를 어른어른
올라오는 그의 얼굴
얼핏 내려다본 나의 마음
…… …… …… ……
살짜기 등지고 앉어서
반이운 꽃을 어여뻐 하는체
피여나는 꽃을 어여삐 하는체
뒤에 들리는 발자취만
…… …… 기다리네
…… …… …… ……
…… …… 와 멈추는 발자취
귀뒤에 들리는 숨소리
무슨 장난을 하려는 듯
…… …… …… ……
자석에 끌리는 바늘같이
햇발따라 송이같이
틀었든 내얼굴
하염없이 돌아가니……
오 나의 해……별……달
…… …… 나의 사랑!


비 - 박용철

비가 조록조록 세염없이 나려와서···
쉬일 줄도 모르고 일도 없이 나려와서···
나무를 지붕을 고만히 세워놓고 축여준다···
올라가는 기차소리도 가즉히 들리나니···
비에 흠출히 젖은 기차모양은 애처롭겠지···
내 마음에서도 심상치 않은 놈이 흔들려 나온다···

비가 조록조록 세염없이 흘러나려서···
나는 비에 흠출 젖은 닭같이 네게로 달려가련다···
물 건너는 한줄기 배암같이 곧장 기어가련다···
검고 붉은 제비는 매끄름히 날아가는 것을···
나의 마음은 반득이는 잎사귀보다 더 한들리어···
밝은 불 켜놓은 그대의 방을 무연히 싸고돈단다···

나는 누를 향해 쓰길래 이런 하소를 하고 있단가···
이러한 날엔 어는 강물 큰애기 하나 빠져도 자취도 아니남을라···
전에나 뒤에나 빗방울이 물낱을 튀길 뿐이지···
누가 울어보낸 물 아니고 섧기야 무어 설으리마는···
저기 가는 나그네는 누구이길래 발자취에 물이 괸다니···
마음 있는 듯 없는 듯 공연한 비는 조록조록 한결같이 나리네···


바람부는 날 - 박용철

오늘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새없이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것을 여위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단 말인가.

풀잎에 나뭇가지에 들 길에 마을에
가을날 잎들이 발갛게 쏠리듯이
나는 오늘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인가.

아! 지금 바람이 저렇게 못 견디게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또 내가 내게 없는 모든것을 깨닫고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인가.


고향 - 박용철

고향은 찾어 무얼 하리
일가 흩어지고 집 흐너진 데
저녁 까마귀 가을 풀에 울고
마을 앞 시내로 옛 자리 바뀌었을라.

어린 때 꿈을 엄마 무덤 위에
남겨두고 떠도는 구름 따라
멈추는 듯 불려온 지 여남은 해
고향은 이제 찾어 무얼 하리.

하늘가에 새 기쁨을 그리어보랴
남겨둔 무엇일래 못 잊히우랴
모진 바람아 마음껏 불어쳐라
흩어진 꽃잎 쉬임 어디 찾는다냐.

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생 각
-아득한 꿈엔 달려가는 길이언만-
서로의 굳은 뜻을 남께 앗긴
옛 사랑의 생각 같은 쓰린 심사여라.


이대로 가랴마는 - 박용철

설만들 이대로 가기야 하랴마는
이대로 간단들 못 간다 하랴마는

바람도 없이 고이 떨어지는 꽃잎같이
파란 하늘에 사라져 버리는 구름쪽같이

조그만 피로 지금 수떠리는 피가 멈추고
가는 숨길이 여기서 끝맺는다면-

아- 얇은 빛 들어오는 영창아래서
차마 흐르지 못하는 눈물이 온 가슴에 젖어나리네.


희망과 절망은 - 박용철

어느 해와 달에 끄을림이뇨
내 가슴에 밀려드는 밀물 밀물

둥시한 수면은 기름같이 솟아올라
두어마리 갈매기 어긋저 서로 날고

돛폭은 바람가득 먹음어
막리길 떠날 차비한다

그러나 이순간을 스치는 한쪽 구름
가슴 폭 내려앉고 깃발은 꺾어지며

험한 바위 도로 다 제 얼굴 나타내고
검정 뻘은 죽엄의 손짓조차 없다

남은 웅덩이에 파닥거리는 고기들
기다림도 없이 몸을 내던진 해초들

우연은 머리칼처럼 헝클어지도 않았거니
너는 무슨 낙시를 오히려 드리우노

희망과 절망의 두 등처기 사이를
시게추같이 건네질하는 마음씨야

시의 날랜 날개로도 따를 수 없는
걸음빠른 술레잡기야 이 어리석음이야


연애 - 박용철

어젯날이 채 가지도 않아
또 새로운 날이 부챗살을 피는 나라 오-로-라

언덕에는 꽃이 가득히 피고
새들은 수없이 가지에서 노래한다


어느 밤 - 박용철

저녁때 개구리 울더니
마침내 밤을 타서 비가 나리네

여름이 와도 오히려 쓸쓸한 우리집 뜰 우에
소리도 그윽하게 비가 나리네

그러나 이것은 또 어인 일가 어데선지
한 마리 벌레소리 이따금 들리노나

지금은 아니 우는 개구리같이
내 마음 그지없이 그윽하여라 고적하여라


시집가는 시악시의 말 - 박용철

나는 이제 가네.
눈물 한 줄도 아니 흘리고 떠나가려네.

어머니 치마로 눈을 가리지 마셔요.
너희들도 다 잘 있거라.
새벽빛이 아직도 희미해서 얼굴들이 눈에 서투르오,
다시 한 번 눈이라도 익혀둡시다.
공연히 수선거리지들 말아요.
남의 마음이 흔들리기 쉬운 줄도 모르고,

황토 붉은 산아 푸른 잔디밭아 다 잘 있거라.
잔 자갈 시냇물도 잘 놀고 지나거라.
--가면 아주 가나, 잔 사정 작별은 내 이리 하게!
봉선화야 너는 거년까지 내 손가락에 물들이었지?

순이야, 금이야, 남이야, 빛나던 철의 동무들아,
이제는 동무라는 말조차 써볼 데가 없겠고나,
너희들 땋-늘인 머리를 어디 좀 만져보자.

붉은 댕기 울 너머로 번득이는 자랑스러움,
거리낄 데 하나 업이 굴러가던 너희들 웃음,
이것이 어느새 남의 일같이 이야기될 줄이야!
손 하나 타지 않고 산골에 맑은 흰 나리 꽃송이같이,
매인 데 굽힐 데 없이 자라나던 큰 아기 시절을
내 이제 뒤으로 머리 돌려 아까워할 줄이야!

눈물은 내서 무엇하니,
가고야 마는 것을! 가면 아주 가랴마는,
남는 너희나 그대로 있어줘다고, 내 다시 볼 때까지.

아버지 이 길은 무슨 길이길래,
눈물에 싸여서라도 가고 보내는 마련이래요?
마른 잎은 부는 바람에 불려야만 되나요?
손에 닳고 눈에 익은 모든 것을 버리고
아득한 바다에 몸을 띄워야만 새살림 길인가요?

갈피없는 걱정 쓸데없는 앙탈을 이냥 삼키고,
나는 떠나가네.
싸늘한 두 손으로 얼굴을 싸만지며.


비나리는 날 - 박용철

세엄도 업시 왼하로 나리는 비에
내 맘이 고만 여위어 가나니
앗가운 갈매기들은 다 저저 죽엇겠다


비에 젖은 마음 - 박용철

불도 없는 방안에 쓰러지며
내쉬는 한숨따라 '아 어머니!' 석기는 말
모진 듯 참어오는 그의 모든 설어움이
공교로운 고임새의 문허져 나림같이
이 한말을 따라 한번에 쏟아진다.


절망 - 박용철

나는 이제 절망의 흙속에
파묻혀 엎드린 한 개의 씨
아! 한없는 어둠……
과 고요……
그러나 그러나
천 천 이 천 천 이
나는 고개를 든다.
천천이 천천이
그러나 힘있게 우으로
나는 머리를 밀어 올린다……
나는 숨을 쉬었다. 지구를 나는 뚫었다-
나는 팔을 뻗힌다-
나는 다리를 뻗힌다-
아! 나는 아침해 비친 언덕 우에
두팔 쳐들어 왼몸 훨씬 펴고 서 있는
오! 서 있는 사람이로다.


어디로 - 박용철

내 마음은 어디로 가야 옳으리까
쉬임 없이 궂은 비는 내려오고
지나간 날 괴로움의 쓰린 기억
내게 어둔 구름되어 덮이는데.

바라지 않으리라던 새론 희망
생각지 않으리라던 그대 생각
번개같이 어둠을 깨친다마는
그대는 닿을 길 없이 높은 데 계시오니

아-- 내 마음은 어디로 가야 옳으리까.


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 박용철

1.
온전한 어둠 가운데 사라져버리는
한낱 촛불이여.
이 눈보라 속에 그대 보내고 돌아서 오는
나의 가슴이여.
쓰린 듯 부인 듯 한 데 뿌리는 눈은
들어 안겨서
발 마다 미끄러지기 쉬운 걸음은
자취 남겨서
멀지도 않은 앞이 그저 아득하여라.

2.
밖을 내어다보려고 무척 애쓰는
그대도 설으렷다.
유리창 검은 밖에 제 얼굴만 비쳐 눈물은
그렁그렁하렸다.
내 방에 들면 구석구석이 숨겨진 그 눈은
내게 웃으렷다.
목소리 들리는 듯 성그리는 듯 내 살은
부대끼렷다.
가는 그대, 보내는 나, 그저 아득하여라.

3.
얼어붙은 바다에 쇄빙선 같이 어둠을
헤쳐 나가는 너.
약한 정 후리쳐 떼고 다만 밝음을
찾아가는 그대.
부서진다 놀래랴, 두 줄기 궤도를
타고 달리는 너
죽음이 무서우랴, 힘있게 사는 길을
바로 닫는 그대.
실어가는 너, 실려가는 그대, 그저 아득하여라.

4.
이제 아득한 겨울이면 멀지 못할 봄날을
나는 바라보자.
봄날같이 웃으며 달려들 그의 기차를
나는 기다리자.
'잊는다' 말인들 어찌 차마! 이대로 웃기를
나는 배워보자.
하다가는 험한 길, 헤쳐가는 그의 걸음을
본받아도 보자.
마침내는 그를 따르는... 사람이라도 되어 보리라.


너의 그림자 - 박용철

하이얀 모래
가이없고

구름 위에
노래는 숨었다

아지랭이같이 아른대는
너의 그림자

그리움에
홀로 여위어 간다.


떠나가는 배 - 박용철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이도 못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 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화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나두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간다
 
 
* 박용철

호 용아(龍兒). 1904년 전남 광산 출생.
1930년 김영랑과 함께 《시문학(詩文學)》을 창간. 이 잡지에 '떠나가는 배', '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발표.
1931년 이후로는 비평가로서도 크게 활약하여 《효과주의 비평논강(效果主義批評論綱)》 《조선문학의 과소평가》 《시적 변용(詩的變容)에 대하여》 등을 발표, 계급주의와 민족주의를 동시에 배격하여 임화(林和)와 논전을 벌이기도 했다. 사후 1년 만에 《박용철 전집》(전2권)이 간행되었으며, 2001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이 수여되었다
 
 
향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돌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고향 -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도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말이 높푸르구나.
 
다른 한울 - 정지용

그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았어나
그의 안에서 나의 호흡이 절로 달도다.

물과 성신(聖神)으로 다시 낳은 이후
나의 날은 날로 새로운 태양이로세!

뭇사람과 소란한 세대에서
그가 다맛 내게 하신 일을 진히리라!

미리 가지지 않았던 세상이어니
이제 새삼 기다리지 않으련다.

령혼은 불과 사랑으로! 육신은 한낯 괴로움.
보이는 한울은 나의 무덤을 덮을쁜.

그의 옷자락이 나의 오관(五官)에 사모치지 안었으나
그의 그늘로 나의 다른 한울을 삼으리라.


산에서 온 새 - 정지용

새삼나무 싹 튼 담우에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산엣 새는 파랑치마 입고,
산엣 새는 빨강모자 쓰고,

눈에 아름 아름 보고 지고,
발 벗고 간 누이 보고 지고,

따순 봄날 이른 아침부터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장수산 長壽山1 - 정지용

벌목정정伐木丁丁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고 멩아리 소리 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좃지 않고 묏새도 울지 않어 깊은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판에 여섯번 지고 웃고 올라 간뒤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듸랸다 차고 올연元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속 겨울 한밤내----


그의 반 - 정지용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 안의 고운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이,
바다에서 솟아 올라 나래 떠는 금성,
쪽빛 하늘에 흰꽃을 달은 고산식물,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여삐 스사로 한가러워 -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
때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미여지며
구비 구비 돌아나간 시름의 황혼길 우 -
나 - 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 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


산소 - 정지용

서낭산골 시오리 뒤로 두고
어린 누이 산소를 묻고 왔오.
해마다 봄바람 불어를 오면,
나드리 간 집새 찾어 가라고
남먼히 피는 꽃을 심고 왔오.


춘설 - 정지용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옹숭거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워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 기던 고기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湖 水 - 정지용

1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2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꾸 간지러워


별똥 - 정지용

별똥 떠러진 곳,
마음해 두었다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인젠 다 자랐오.


유리창 -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새처럼 날아갔구나
 

* 정지용과 옥천-조선일보(화첩기행12)

꿈엔들 잊힐리야, 지용의 옥천 구읍.

가슴에 묻어 둔 첫사랑은 다시 만나려 애쓰지 말 것. 사랑만이 아니다. 그리움의 장소도 가급적 가슴에만 담아둘 것.

고향? 찾아가 보면 그리던 고향이 아니다. 해묵은 핏빛 벼슬의 장닭과, 마당의 토란잎 아래 징그럽게 큰 두꺼비. 소리꾼의 구슬픈 만가 가랑가랑 이어지던 동구. 홍시를 단 들판의 감나무가 서리를 맞고 서 있던 곳. 잠시 강에 나가 투망질을 하면 살진 붕어가 한 양동이씩이나 퍼올려지던 곳.

아무리 찾아가고 찾아가 보아도 우리네 그 옛 고향은 이미 현실의 지도 위에는 없다.

정지용 문학을 잉태한 옥천으로 떠나면서도 나는 조마조마했다. 문학 속의 고향을 현실로 찾아가기 위해 신발끈을 매는 순간, 이미 상상의 공간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구나 이 '몽당붓'은 지용 시인의 시에 세 번씩이나 그림을 그려오면서 시는 물론 시인과 그 고향마저도 거의 '육친스럽게'사랑해 버린 처지이다.

'향수'가 박인수와 이동원의 노래로 도회사람의 메마른 가슴들을 적셔 주면서, 시인의 고향만은 어쩐지 거센 산업화 바람에도 불구하고 고스란히 옛 고향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주어온 것이 사실이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옥천으로 가고 있다.

시인이 차마 꿈에도 못잊겠다고 했던 그 곳으로 가면서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왜 그리도 지용의 시를 좋아하는 것일까.

너나없이 정신적 고향상실 증후군에 빠져 있어서는 아닐까.이 천박한 무한질주의 속도감에 편승해 있는 우리는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고 '얼룩백이 황소의 게으른 울음'이 그립고 '하늘의 성근별'이 그립다.

지용시의 맑은 고독과 정적, 바람소리 물소리에 위로받고 싶다. 특히 환쟁이인 나는 지용의 시에서 그림과 색채를 본다.무심히 아무 시편을 들춰도 거기 그림이 있다. 기름기 번들거리는 유채 아닌 가슴으로 번져 오는 수묵의 세계, 고요한 수평이다.

…무가 순돋아 파릇하고/…삼동이 하이얗다/(인동차·인동다)
…목화송이 같은 한 떨기 지난해 흰구름이 새로 미끄러지고…/(호랑나비).

옥천에 닿는다.

충청의 소금강으로 불리던 물의 고장(수향). 금강 줄기인 군서천, 보청천에는 강바닥 자갈 보이는 맑은 물에서만 산다는 어름치가 살았다는 곳. 조선의 반가 같은 푸른 기와의 옥천 역사가 저만치 보인다.저 역에서 시인은 경성으로 가는 밤기차를 타곤 했을까. 역 앞과 '지용로'에는 며칠 후(5월15, 16일)면 열릴 열한 번째 지용제의 플래카드가 펄럭인다. 백일장과 사물놀이 등으로 지용제는 옥천의 가장 큰 축제가 되었다.

오랜 세월 금지된 이름이었고 부를 수 없던 노래였던 지용과 그 시들은 이로써 지난 세월의 한을 얼마간 보상받을 수 있을지.

6·25 나던 그 해 '모임에 잠깐 얼굴만 보이시라'는 청년들 권유를 받고, 입던 모시적삼 그대로 따라 나섰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 지용. 청록파의 스승이자 불과 스물두 살에 '향수'를 썼던 천재 시인은 이처럼 어이없게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전쟁중 서대문 형무소에서 평양감옥으로 이감 후 폭사당했다는 등의 그의 최후에 대한 흉흉한 소문은 이지러진 역사가 개인의 운명을 어떻게 상처 내고 파괴해 버렸는가를 보여 준다.

비에 씻긴 학교 운동장에 사금파리가 햇살을 되쏘고 있다. 저 하얀 운동장을
'소년 지용'이 걸어오는 것만 같다.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배꼽 드러낸
채 풀섶을 달렸을 아이들은 자라 이제는 도회의 회색 빌딩 숲 사이로 고단한 삶들이 쏘아 놓은 화살들을 찾아 헤매고 있을까. 그가 다녔던 죽향초등학교를 돌아 찾아간 생가는 대문이 자물로 채워져 있다. 영화속의 세트처럼 생경한 집 뒤로 웬 가요 연습실 간판의 붉은 벽돌이 시야를 막는다.집 앞 실개천은, 재앙이다, 시멘트로 발라져 있다. 넓은 벌판도, 얼룩백이 황소의 금빛 울음도 없다. 그래도… 나는 실망치 않기로 한다.

'향수'는 이미 지도 위의 특정 공간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에 상상의 공간으로 남아 있는 것이기에.

읍내로 나와 관성회관 옆 시비 곁에 앉아 있자니 성큼 어둠이 내린다. 하늘에는 어느새 '성근별'. 초여름 옥천의 바람에는 향기가 묻어있다. 비로소 지용시의 구도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김병종·서울대미대 교수>.
 
 
정지용

1902년 충북 옥천 생.
휘문고보와 일본 동지사대학 영문과 졸.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그는 소설의 이태준과 함께 격조높은 시어와 빼어난 감성으로 우리 시단의 중심을 이루었으나 후에 월북시인으로 38년 동안이나 작품이 공개되지 못했다. 1988년 해금과 함께 「정지용 전집」이 간행되고 「지용회」와 「지용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사행소곡 회한집 - 김달진
- 망미인해천일방, 동파

어디고 반드시 계오시라 믿었기에
어렴풋 꿈속에 그리던 모습,
어둔 방 촛불인 듯 내 앞에 앉으신 양
아, 이제 뵈는 모습 바로 그 모습이네.

푸른 나뭇잎 나뭇잎 사이로
말간 가을 하늘 우러러보면
어디서 오는 가느란 바람이기에
꽃잎처럼 흔들리는 임의 그 모습

아, 내 마음 어떻게 두어야 하리까?
너무나 작고 더러운 존재오라.
영혼의 속속들이 눈부시는 빛 앞에
화살 맞은 비둘긴 양 날개만 파득일 뿐

사람이 되고 안 되고사
오로지 임에게 매이었고,
마주앉아 말 주고받는 인연
오백생 깊음이 느껴 자랑스럽네.

들 밖 어둔 길을 밤 늦어 돌아오면
허렁허렁 술기운 반은 취하고,
먼 남쪽 하늘가 흐르는 별빛 아래
산 넘어, 물 건너 몇백 리인고?

가다가 문득 문득
가슴 하나 얼컥 안기는 그리움,
해바라기 숨길처럼 확확 달아
가을 석양 들길에 먼 이 선다.

애닯고 애닯은 이 사모를
혼자 고이 지닌 채 이 생을 마치오리까?
임아, 진정 아닌 척 그대로 가야 하리까?
살아 한 번 그 가슴에 하소할 길이 없이

창밖에 궂은 밤비 소리 들으면
풀숲에 숨어 있는 한 마리 벌레가 되어
울지도 못하는 외로운 가슴,
홈초롬 이슬발에 얼어 세우랴.

어렴풋 잠결에 꾀꼬리 소리
놀란 듯 허겁지겁 창을 여나니,
꿈에 뵈던 임의 소식 아니언만
알뜰히 살뜰히 아쉬움이라.

동무와 떠들다 문득 입다물고,
잔 들어 흥겨웁다 문득 먼 이 앉아봄은
어디서 오는 뚜렷한 모습이기
눈썹 끝에 아롱아롱 한숨발에 어리는고?

그대를 바라볼 제면 내 가슴 문득 트이는 바다라
그대 한 마리 흰 갈매기 되어 자무락질하나니,
그대 날아난 뒤 내 가슴 문득 거칠은 벌판
한종일 낙엽을 부는 바람만 울어울어

오랜 도시의 빛나는 전설처럼
오랜 도시의 빛나는 전설처럼,
내 마음의 황혼에 피어난 꽃 한 송이
가만한 향훈에 젖어드는 설움이라.

너는 한 송이 백합, 아담히 피어
들며 나며 바라보는 내 마음에 무심히 피어
등 뒤 유리창에 저녁볕 고이 타는데
어느 하늘 꿈속에서 이 밤을 세우려노?

가도가도 어둔 밤 찬하늘 아래
오직 하나 등불, 너 생각 의지하여
두 손길 호호 불며 이 길을 가오리다.
이 길을 가오리다, 언제까지 가오리까?

아무리 애닯게 불러봐도
들어줄 이 없는 설운 노래는,
밤 늦어 돌아오는 눈바람에
혼자 가슴에 삼켜 고이는 눈물.

오직 까만 까만 밤빛
까만 밤빛 속에 오직 하나 빛나는 얼굴,
하룻밤이라니 열두 시간인가?
만 겁에도 깊은 그리운 설움.

이 세상 모든 그리움 다 모아,
이 세상 모든 슬픔 다 모아,
이 세상 모든 행복, 아름다움 다 모아,
그대 무슨 인연 내 앞에 나타났던고?

오직 하나 내 기쁨 그대 하나뿐,
깊은 바다 속에 빛나는 진주처럼
어둔 밤 발끝마다 반짝이는 모습,
오직 하나 내 기쁨 그대 하나뿐.

머리 숙인 그대 모습 탐탐이 바래다가
깊은 한숨발에 눈을 돌리면
창밖에 나직한 한 겨울 하늘
아, 우리는 얼음장 밑에 사는 두 마리 물고기.

신비한 못에 잠긴 별인 듯 빛나는 눈동자,
높은 갈망에 가늘이 떠는 앵두 입술,
담쑥 안으면 향기론 키쓰,
'영원히 담긴 리나'의 황홀이여.

나 혼자 어디로 가는 이 밤길인가?
살뜰한 그대를 떠나가야 하는 이 길인가?
이제 바로 그대 함께 거닐던 길을
가끔 멈춰서서 둘러보아야 깊은 어둠뿐.

별처럼 영롱한 가슴속 그리움
한 겹 수줍음에 떨고 있었기,
달 없는 밤 오리 들길을
끝내 한마디 말없이 걸어온 두 마음.

기다리다 못 만나고 돌아오는 길
일부러 둘러 돌아온 외로운 길,
그의 지붕은 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다.
조각 초생 달빛이 서려 있었다.

불꽃 같은 애정의 눈동자 앞에
내 혼이 오로지 행복에 탈 때,
나는 그대로 자취 없이 사라지고 싶어
구름처럼 안개처럼 사라지고 싶어

혼자서 걸어오는 길이오라.
이라도 흰 눈송이 폭폭 내리고
유난히 푸근한 첫봄 밤이 아까워
가끔 서보는 들길은 일찍 함께 거닐던 길.

영겁에서 영겁으로 흐르는 사랑의 속삭임,
영겁에서 영겁으로 흐르는 사랑의 입맞춤,
맑은 밤하늘 수많은 성좌를 바라보면
그대와 나는 동해 바닷가 두 개 모래알인가?

이리도 갑자기 풀린 다수한 봄날은
어딘가 그대 얼굴 보일 듯하여,
시름없이 거리거리를 헤매보는 한나절
어딘가 그대 얼굴 보일 듯하여.

그대 아무래도 건널 수 없는 은하 저편이라면
내 차라리 하나 싸늘한 운석 되어,
영원한 망각으로 어느 깊은 숲속에 떨어지고 싶어라.
끝내 바라만 보는 은하 이편의 괴롬이라면

이리도 다는 그리운 숨길 누르고 눌러두어
언제고 이 가슴 탁 터지는 그날이 오면
빨간 심장 화살처럼 어디로 날아가련고?
임의 가슴은 이미 겨누어 가리킨 과녁이오라.

아, 얼마나 달고 향기로운 봄볕이뇨?
하늘은 하나 커다란 꽃일산이라.
향아 너 달려오라, 달려오라,
우리 이 꽃일산 아래 나란히 서보자.

아무도 바라보는 이 없는
먼 사막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피지도 못한 우리 사랑의 꽃봉오리는
어느 영겁의 어둠 속에 반짝일런가?

나시고 자라신 곳 어디메쯤이온고?
어둠 속에 빛나는 등불들도 다정하여
오똑오똑 걸음마 아가야, 색동저고리야, 피어나는 함박꽃아,
아, 먼 남쪽 하늘에 하나 별이여, 안타까움이여.
(밤 역을 지나며)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바람 마시며,
알뜰한 사모 속에 산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니 느긋하며 든든하온가마는
눈뜨니 한 겹 현실, 천만 리 머오이다.

임은 떠나시고 나는 임을 보내나니,
떠나는 마당 고별의 미소는 얼마나 슬프기에
그대, 뱃전에 서 있는 그대는
끝내 하얀 마스크를 벗을 줄 모르느뇨?

고동 울어 임은 떠나가노니,
흔드는 손길 눈 끝에 멀어가고
모르는 척 산모롱을 돌아나가는 배
하얀 갈매기만 날아라, 날아라.

뜰 위에 삽살이 졸음에 겹고,
흰 나비 한 마리 지붕을 넘고,
어인 모습 수심처럼 가슴에 떠올라,
앵두꽃 은은한 그늘에 낮이 몹시 기옵니다.

파란 보리밭 위로 바람이 지나가면
아름아름 떠오르는 모습,
매화꽃 향기로운 황혼의 길거리에
추억처럼 흘러가는 고운 그림자.

고요한 사원의 깊은 밤을
혼자 일어 뜰 앞에 나서나니,
어스름 조각달 기울어가는데
임이여, 이 침정이 못내 향기롭습니다.

푸른 그늘 숲길을 혼자 돌아들면
두세 마리 청개구리 애끊는 소리에
하얀 클로버 꽃밭을 밟고 서나니,
머리 위에 내려깔리는 아연빛 하늘.

짧은 밤 고달픈 잠이 모른 듯 깨어
창에 든 새벽달빛 어렴풋 바라보고,
멀리 뻐꾸기 소리 꿈속인 양 듣다가
다시 모른 듯 잠이 들었다.

오직 하나 알뜰한 상이 있어
가슴속 깊이 보배로이 지녔기에,
여섯 문 꼭꼭 닫고 녹장 내리고
오로지 태우는 그리움의 촛불 하나.

게으른 흠대 물소리에 흰 날은 길어
한나절 송홧가루 뜰에 날리고,
먼 산 그늘에 뻐꾸기 우는 날을
늙은 승은 창 앞에서 졸고 있었다.

저녁볕 아래 타는 열무우 꽃밭길을
혼자 게으른 발길 돌아나오면,
멀리 기어내리는 산그늘 속에
아른아른 어리는 애틋한 그리움.

이렇게 몸이 찌붓거리는 날을
멀리 앞바다에 비 묻어들고,
보리누름 추위가 못내 슬퍼져
아, 나는 한 이틀 앓고 싶어라.

하늘에 저러이 빛나는 별,
옥수수잎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혼자 깊은 여름밤을 마루에 앉았나니
이제 막 두 번째 감 떨어지는 소리 났다.

아무리 부딪쳐보아도
움찍 않는 싸늘한 바위의 마음이기
부서져버리는 산산이 하얗게 사라져버리는
저 물결이 되고 싶어라, 저 물결이

멀리 하늘 끝 외로운 섬가로
흐르는 구름이 근심스러워,
바닷가 산기슭 돌아오는 황혼이여.
구슬픈 해숙 소리에 등을 밀리며.

보던 책 덮고 나직히 창을 나와
긴 여름날을 사랑하고 앉았으면,
나무 잎새 잎새 눈부시듯 빛나고
먼 하늘 끝으로 흰구름 돌아간다.

한밤내 창밖에 궂은 빗소리
깊은 시름 한숨발에 살찌는 꿈길이여.
핼쑥히 차거운 반딧불인 양
가슴속에 피어나는 애틋한 불빛.

가벼운 구름 그림자 산허리에 조을고
뒤뜰에 은실을 뽑는 매미 소리.
어딘가 숨어 흐르는 바람길 있어
가슴에 속삭이는 듯 귀기울여 보나니.

먼 하늘 끝으로 하늘 끝으로
한 가닥 사무치는 애틋한 길이 있어,
구름이면 구름을 따라, 바람이면 바람을 따라, 향시
눈앞에.
어인 그림자 아슬아슬 돌아오나니.

푸른 달빛 고요히 조는 빈뜰 안에
이슬인 양 영롱히 깔리는 뭇벌레 소리
가슴속에 얼컥 안기는 가을 생각
부질없는 세상일에 사랑만이 참되느뇨?

얄푸른 안개 가벼이 서린 꿈길 위에
아침 햇살 고이 퍼지는 가난한 선창가,
사공은 아직 보이지 않고,
까마귀 두 마리 빈 배 안에서 무언가 쪼고 있다.

바람이 불면 바람에 그리웁고
비 내리면 빗소리에 우니나니,
창창한 세월 굽이굽이 물결 위에
아으, 어이료만이요 억만 시름!

어둠이 깃드는 텅 빈 교무실에
내 어이 홀로 화로 앞에 앉았느뇨?
식어가는 숯불 다독다독거리며
뒷산에서 내리는 송뢰를 듣고 있다.

봄인 양 따뜻한 늦가을 한나절을
햇볕 하도 탐스러워 마루 끝에 나앉으면
어디서 정구공 소리 한결 한가함이여,
담머리에 활짝 핀 코스모스에 바람이 잔다.

보일 듯 잡힐 듯 허득거리며
골목길 돌아돌아 따라온 그림자,
어느 모를 어둠 속에 사라져버렸거니,
내 이 찬 거리에 엉거주춤 섰을밖에
 
  
* 목단 - 김달진

옅은 제 그늘에 한잎 두잎 지쳐 누운 목단꽃 조각
빛이 너무 붉어 여름 한나절이 애잔케 깊었노니

꿈결처럼 아스라한 먼 산 아지랑이
뻐꾸기 소리 빈 골을 울려오는 게으른 창 앞

보던 책 덮고 팔짱끼며 고요히 눈감아보니
마음은 햇빛 아래 조으는 노란 장미꽃에 비최일 듯 환하다.
 
 
그리는 세계 있기에 - 김달진

그리는 세계 있기에 그 세계 위하여
生의 나무의 뿌리로 살자
넓게, 굳세게, 또 깊게
어둠의 고뇌속을 파고 들어
모든 재기와 현명 앞에 하나 어리섞은 침묵으로.....
그 어느 劫外의 하늘 아래 찬란히 피어나는 꽃과
익어가는 열매 멀리 바라보면서......


기다리는 사람 - 김달진

누구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창밖의 달은 저리도 밝고
떨어지는 나무잎은 뜰에 쌓이고
찬 바람은 저리도 스산스럽게 분다.

누구 기다리는 사람도 없지만
앞 뜰의 풀벌레는 저리도 울어댄다.

어둠 속에 갑자기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켜지고
그 빛을 사람이 질러가고
자동차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기다리는 사람들 - 김달진

무슨 약속이기에, 무엇이 온다는 어떤 약속이기에, 기다리며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 기다리고 기다려도 무엇인지 모르고 기다리며 사는 사람. 아침 햇빛 따라 온다던가, 흰 비둘기 타고, 깊은 밤 잠든 사이 어린 바람처럼 골목골목 기웃거리며 꿈길 밟고 온다던가? 먼 산을 우러러, 먼 바다 바라며, 굽이굽이 돌아지나간 길 하얗게 빛나는 길 끝을 바라며 그만 돌아서려 해도 아침 꽃이 서러워, 저녁볕이 안타까워, 어둔 밤 도깝불 인정이 눈물겨워, 한나절 회오리바람 길가에 서서 옷자락 날리다가, 어느새 하루 해 저물어 기다리던 손님, 찾아온 그 손님 누구기에, 무슨 약속이기에, 산비탈 소실길로 멀리 오는 종소리 함께 바쁜 듯 가는 사람, 가는 사람들

이리하여 사람들은 기다리던 손님 모습 영원히 볼 길 없이, 무한한 어둔 밤하늘의 궤도를, 목성처럼 걸어가고,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애인 - 김달진

깊은 밤 뜰 위에 나서
멀리 있는 애인을 생각하다가
나는 여러 억천만 년 사는 별을 보았다.


고사(古寺) - 김달진

밤이 깊어가서
비는 언제 멎어지었다.
꽃 향기 나직히
새어들고 있었다.

모기장 밖으로
잣나무 숲 끝으로
달이 나와 있었다.
구름이 떠 있었다.

풍경 소리에 꿈이 놀란 듯
작약꽃 두어 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의희한 탑 그늘에
천 년 세월이 흘러가고, 흘러오고....

아, 모든 것
속절없었다.
멀리 어디서
뻐꾸기가 울고 있었다.


빗발 속으로 - 김달진

황혼에 여윈 빗발을 바라보고 앉았노니
눈앞에 떠오르는 커다란 환영이 없는가
달콤한 감상, 그리고 애틋한 애수가 없는가
빨간 작약순이 조록 젖었다
무너진 옛담에 이끼 그저 푸르렀다
앞산머리로 설레이는 저문 안개 속에는
떠도는 시름의 아득한 꿈도 없는가.
 

병(病) - 김달진

한 종일 창 밖에는
궂은비가 오고 있었다.
빈 방에 꽃 한송이도 없는
고적을 고적대로 참고 누워 있었다.
'약'이라는 나 어린 계집애 소리에
놀라 깨니 고향 천리, 꿈을 꾸고 있었다.
괴론 꿈을 깨어 땀을 씻고 앉았으면
창경 밖 실버들이 물처럼 흔들렸다.
한동안 뜬 열을 잊고 있었다.
생각은 금강산을 달리고 있었다.
감긴가 몸살인가 몰라도
분명한 오직 衆生病이다.
어둔 방에 시간은 흐르고, 흐르고
아, 모든 것은 이미 덧없었다.
 
겨울밤 - 김달진

냉철한 겨울밤 하늘 아래
어찌하야 네 그림자는 땅에 얼어붙었느뇨
푸른 달빛이 너무 차서
빛나는 댓잎 위에 바람이 잔다.


눈 - 김달진

하이얗게 쌓인 눈 우에
빨간 피 한 방울 떨어뜨려보고 싶다
-- 속속드리 스미어드는 마음이 보고 싶다.
 
 
자유 - 김달진

자유!
너는 그리도 값진 것이드뇨?
너는 생명!
모든 것이 너를 얻어 살고,
너는 광명!
모든 것이 너를 얻고 빛나고,
너는 환희요, 미의 여신!
모든 것이 너에게서 즐겁소 아름답거나,
너는 모든 것의 본연의 모습.
그러나 너는 진정 實되어
거저 오지 않나니,
피를 주고
눈물을 주고,
목숨을 주고...
그러므로
무덤 속에서 솟아나는 생명,
어둠 속에서 비춰오는 광명,
불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


고독한 동무 - 김달진

묵은 책장을 뒤지노라니
여기저기서 기어 나오는 하얀 벌레들
나는 가만히 그들에게 이야기해 봅니다 -
고독과 적막의 슬픈 사상을

그들은 햇빛 아래 빛나는 이 세상 인정이 더욱 쓰리다는 것을 잘 아는

나의 어린 동무들입니다.
 
단장 - 김달진

1
아무 마음 없이
나 홀로 여기까지 걸어 왔구나.
숲 속은 좁은 산길 위에
엷은 저녁 햇방울이 떨어져 있다.

2
몇 날을 두고
아침 산보길에서 만나는 여인이기에
그 이름을 알고 싶었다.

3
기다려 기다려도 비는 오지 않고
쨍쨍 쪼이는 한낮 창 앞에
멀리 어디서 포소리 들려 오더니
건너 산에서 흰 연기 구름 처럼 떠 오른다.

4
밝은 달빛이 가득차 넘치는 넓은 이 마당
별처럼 반짝이는 이 숱한 벌레소리 속에 서면
해질녘가지 그처럼 시끄러이 놀던 애들의
꿈 속에 벌어지는 화려한 놀이판.

5
아침 산 그늘이
모시 적삼에 스미는 썰렁한 기운.
아 이제 대지에는
그 숱한 나뭇잎이 알고 모르고 꽃잎처럼 내리겠구나.


모려(牡蠣)의 꿈 - 김달진

흰 갈매기 새벽을 차며 하늘가로 날을 때,
깊은 숲 속에 빨간 딸기 향기로이 익어갈 때,
먼 수평선 너머로 저녁 별 떨어질 때,
따스한 등불 앞에 사랑이 피어날 때.......

오직 듣는 萬古의 물결소리, 바람 소리,
해와 달 돌아가고
짠 냄새 찌들어든 돌옷 속에-
흑산호처럼 깊어가는 침묵

먼 바다 외딴 섬,
섬가의 바위 위에
한 마리 늙어가는 牡礪,
한 마리 늙어가는 외로운 牡礪여!

쓸쓸하면 쓸쓸한 대로 위대한 孤獨者,
영원을 마시며,
萬古의 별빛 아래
紅寶石처럼 익어가는 생명의 열매,
오직 '나'를 지키어 자라나는 꿈길이여.
너는 孤島의 바다 위에 살고,
너는 우주의 중심에 산다.

- 牡礪:굴조개


목련꽃 - 김달진

봄이 깊었구나
창 밖에 밤비 소리 잦아지고
나는 언제부터선가
잠 못 자는 병이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지난밤 목련꽃 세 송이 중
한 송이 떨어졌다.
이 우주 한 모퉁이에
꽃 한 송이 줄었구나.
 
아카시아꽃 - 김달진

밤 깊어 혼자 돌아오는
교외의 어두운 산기슭 외로운 길
얼컥 안기는 내음새 있다
향긋이 젖은 날카로운 향기 --
다발바달 드리운 아카시아꽃이
石蠟 등불처럼 히뿌엿이 빛난다.


열무우꽃 - 김달진

가끔 바람이 오면
뒤울안 열무 꽃밭 위에는
나비들이 꽃잎처럼 날리고 있었다.

가난한 가족들은
베적삼에 땀을 씻으며
보리밥에 쑥갓쌈을 싸고 있었다.

떨어지는 훼나무 꽃 향기에 취해
늙은 암소는
긴 날을 졸리고 졸리고 있었다.

매미소리 드물어 가고
잠자리 등에 석양이 타면
우리들은 종이등을 손질하고 있었다.

어둔 지붕 위에
하얀 박꽃이
별빛따라 떠오르면

모깃불 연기이는 돌담을 돌아
아낙네들은
앞개울로 앞개울로 몰려가고 있었다.

먼 고향 사람 사람 얼굴들이여
내 고향은 남방 천리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생각이여.

 

씬냉이꽃 - 김달진

사람들 모두
산으로 바다로
新綠철 놀이 간다 야단들인데
나는 혼자 뜰 앞을 거닐다가
그늘 밑의 조그만 씬냉이꽃 보았다.

이 우주
여기에
지금
씬냉이꽃이 피고
나비 날은다.

 


햇볕 - 김달진

미닫이창에 가득히 밀려든 한나절 햇볕
무엇을 잊은 듯 서운하야 눈을 감아본다
한 겹 눈꺼풀 속에도 햇볕을 스미어들어
장미빛 바늘같이 눈 속을 폭폭 찔러
나는 그만 슬픈 귀또리새끼처럼 그늘로 숨고 싶었다.


우후(雨後) - 김달진

비 온 뒤 산에 올랐다가
아무것도 없어
송화 가루 젖은 채 어지러이 깔려 있는 붉은 흙 보고
그저 무심한 양 泛然한 양 시름없이 돌아온다


유월 - 김달진

고요한 이웃집의
하얗게 빛나는 빈 뜰 우에
작은 벚나무 그늘 아래
외론 암탉 한 마리 백주(白晝)와 함께 조을고 있는 것
판자 너머로 가만히 엿보인다.

*

빨간 촉규화(蜀葵花) 한낮에 지친 울타리에
빨래 두세 조각 시름없이 널어두고 시름없이 서 있다가
그저 호젓이
도로 들어가는 젊은 시악시 있다.

*

깊은 숲 속에서 나오니
유월 햇빛이 밝다
열무우 꽃밭 한 귀에 눈부시며 섰다가
열무우꽃과 함께 흐들리우다.


청시(靑枾) - 김달진

유월의 꿈이 빛나는 작은 뜰을
이제 미풍이 지나간 뒤
감나무 가지가 흔들리우고
살찐 암록색(暗綠色) 잎새 속으로
보이는 열매는 아직 푸르다.


비명(碑銘) - 김달진

여기 한 自然兒가
그대로 와서
그대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갔다.

풀은 푸르라
해는 빛나라
자연 그대로.

이승의 나뭇가지에서 우는 새여.
빛나는 바람을 노래하라.


사촌(寺村) - 김달진

뒷절에서 울려오는 경쇠 소리에
七月 한낮은 더욱 길었다.

툇마루에 그늘은 깊었다. 새로 내온 하얀 골자리. 風化된 난간에 기대 앉아 우거진 藤넌출을 우러르고 있었다. 파리 벌 한 마리가 圓을 돌고 있었다.

햇볕 쨍한 좁은 뜰 안에, 아름아름 감길 듯 두 눈이 부시었다. 병아리 두 세 마리 박잎 그늘에 졸고 있었다. 한 떨기 金蓮花― 타는 듯 가련한 한떨기 金蓮花에 환히 비추일 듯 마음이 부시었다.

참한 床一나찬 童貞 女僧이 정성껏 보아온 까만 술상이다. 고사리 나물 호박전, 오이 김치, 두부지짐……. 가지가지 빛나는 하얀 접시들이여, 나는 혼자서 술잔을 기울였다. 山포도 물든 볼그레한 맑은 술을 혼자서 기울였다.

술기운 함께
먼 하늘가로 돌아오는 흰 구름에,
뜰 안에 타는 빨간 金蓮花에,
童貞 女僧의 알뜰한 情에,
있는 듯 없는 듯 가느란 시름에,
나는 혼자
취해 가고 있었다. 취해 가고 있었다.


* 삶 - 김달진

등뒤에 무한한 어둠의 시간
눈앞에 무한한 어둠의 시간
그 중간의 한 토막,
이것이 나의 삶이다.
불을 붙이자
무한한 어둠 속에
나의 삶으로 빛을 밝히자.

사랑 - 김달진

찬 별인 양 반짝이는 눈동자
날 부르는 손길은 쉴 새 없이
나부끼어 나부끼어, 버들잎처럼

광명과 암흑의 숨바꼭질하는 곳,
비애와 환희가 넘나드는 속에서....

오라, 그대, 나의 침실로, 면사포 벗고
창에 어린 푸른 달빛에 이마를 들라.
그대의 미도, 지혜도, 광영도, 축복도
어둔 안개처럼 가슴에 그늘지련다.

*

없다기 너무 分明ㅎ고
있다기 진정 애매한 사랑이매
나의 懶弱은 날로 자라나거니,

감각과 靈이 조화되는 곳,
바람과 향기가 섞여 사는 속에서...

오라, 그대, 나의 침실로, 면사포 벗고
창에 어린 푸른 달빛에 이마를 들라.


* 사랑을랑 - 김달진

모든 것 다 없어져도
사랑을랑 버리지 말자.

찬비 나리는 지리한 날에
두 손발 얼어서 어이 가리.

여기저기 토깝불 이는 밤
빛 함께 떠오는 장미꽃 향기.

우리 사랑을랑 버리지 말고
모든 것 대신해 지니고 가자.
 

체념 - 김달진

봄 안개 자욱히 내린
밤 거리 가등은 서러워 서러워
깊은 설움을 눈물처럼 머금었다.

마음을 앓는 너의 아스라한 눈동자는
빛나는 웃음보다 아름다워라.

몰려가고 오는 사람 구름처럼 흐르고
청춘도 노래도 바람처럼 흐르고

오로지 먼 하늘가로 귀 기울이는 응시
혼자 정렬의 등불을 달굴 뿐

내 너 그림자 앞에 서노니 먼 사람아
우리는 진정 비수에 사는 운명
다채로운 행복을 삼가하오.

견디기보다 큰 괴롬이면
멀리 깊은 산 구름 속에 들어가

몰래 피었다 떨어지는 꽃잎을 주워
싸늘한 입술을 맞추어 보자.
 

샘물 - 김달진

숲 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 속에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 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위에 앉았다.

■ 한적한 숲 속의 샘물을 들여다보는 나의 행위가 1행과 4행에 나타나고 있으며, 2행에서는 물 속에 비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물결 속에는 우주 삼라만상이 다 있음을 말하고 있다. 3행에서는 조그만 샘물을 바다같이 넓은 것으로 본 인상을 이야기하였으며, 5행은 우주 삼라만상을 다 비추는 샘물 한옆에 앉아 있는 나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즉, 샘물의 커다란 순수 속에 내가 동화되어 있는 것이다. 샘물을 생각할 때 우리는 맑고 깨끗함을 연상하게 된다. 특히, 숲 속의 샘물에는 흔하지 않은 순수함이 간직되어 있다. 그런 샘물을 들여다보는 이의 마음은 맑고 깨끗한 순수함을 바라는 마음이다. 조그만 샘물이라도 마음을 정화할 수 있다면 그 무엇보다도 넓고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시의 시상의 흐름은 조그마한 자연의 샘이 하늘과 흰구름과 바람을 포용하며 넓은 바다로 확대되고, 다시 '나'와 그 샘물의 순수함과의 동화를 통하여 우주의 이미지로 변신한다. 그리하여 '나'는 우주의 바다에 뜬 조그만 지구의 섬 위에 앉아 우주와 인생을 관조하는 것이다. 5행으로 된 짧은 시이나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말로 씌어져 시어 하나하나마다 상징적인 뜻을 품고 있다.

 
* 김달진

호 월하(月下). 1907년 경상남도 창원 출생.
1929년『文藝公論』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으며『詩苑』『詩人部落』『竹筍』동인으로 활약했다. 1939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 한때 입산하여 수도생활을 했으며, 일제말 북간도를 찾아가기도 했고, 해방 후 동아일보 문화부에 잠시 근무하였으나 이후 문단에서 잠적했었다. 1960년대 이후 은둔하면서 동국대학교 譯經委員으로 불경 국역사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며 1983년에는 '佛敎精神文化院'에 의해 韓國高僧碩德으로 추대되었다.
시집 <청시(靑枾)> <올빼미의 노래>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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