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문제는 일본 안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로 얽혀 있습니다. 한두마디 답변으로 간단히 설명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관계로, 도움이 될 만한 글을 퍼다 드립니다. 좀 길긴 하지만 읽어 보시면 어느 정도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재일동포사회와 한국계 일본인 2001.1.26 발제문
조 성 렬 (국제문제조사연구소)
1. 머리말: 왜 일본에는 한동안 '코리아타운'이 없었는가
재일교포들은 오랫 동안 일본사회에서 '코리아타운'라는 조그마한 민족공동체 조차 만들고 살 수 없었다. 일본사회에서 코리아타운의 존재는 곧 일본사회에서 '부라쿠민'과 같은 천민집단보다도 낮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재일동포사회에서 '코리아 타운'이 만들어질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재일동포사회의 분열과 대립에 있었다. 조국의 분단으로 인해 재일동포 사회도 민단계와 총련계, 그리고 중립계로 분열되어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타운'을 형성할 수 없었다.
2. 조국의 분단이 낳은 재일 동포사회의 분열과 대립
(1) 민단과 총련의 형성과 대립발전
해방 직전 230만 명에 달했던 재일동포는 해방 이후 현재까지 60만 명을 전후해서 존재해 오고 있다. 재일동포 가운데 90%가 남한출신이며, 남한을 지지하는 민단계가 45만 명, 북한을 지지하는 총련계가 13∼20만 명, 나머지가 중립계이다.
민단과 총련의 차이점은 남북한 어느 정권을 지지하느냐 하는 정치노선 말고도, 지향하는 목표도 서로 다르다. 민단이 일본사회 내에 영주하는 소수민족으로서 사회적 지위향상에 중점을 두는 데 비해, 총련은 재일동포들이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갈 사람들이고 따라서 일본 내 지위향상보다는 조국통일에 어떻게 이바지할 것인가에 보다 많은 힘을 기울이고 현단계에서는 민족교육에 관심을 갖고 있다.
60년대 전후해 활발했던 재일동포 북송사업이나 활발한 민족교육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총련계 민족학교는 수백 교에 달하고 있는 데 비해, 민단계 민족학교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2) 민단과 총련의 세력판도를 바꾸어 놓은 '총련동포 모국방문사업'
총련동포의 모국방문사업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1975년 9월에 1300여명으로 처음 시작되어 1999년말 기준 총 58,000명이 한국의 고향을 방문하였다. 이후 남북관계가 냉각되면서 '모국방문사업'은 총련 와해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총련동포들이 한국을 방문하려면 총련탈퇴와 한국으로의 국적변경, 신원조치 등 까다로운 절차를 밝아야 했다.
1990년대 들어오면서 조선적을 지니고도 고향방문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임시여권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이를 불쾌히 여기는 일부 총련계 동포들이 고향방문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의 영향을 받아 이러한 제한조치가 해제되어 2000년 9월 이들도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3. 재일동포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
(1) 일본정부의 동화정책과 재일동포의 민족정체성 상실
1) 국적취득과 귀화
국적취득과 귀화는 구별되어야 한다. 국적취득(國籍取得)이란 여러 가지 편의를 위해 거주국의 국적을 취득하는 것으로 본래의 민족적 정체성은 유지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귀화(歸化)란 해당국의 문화 등을 흠모하여 그 나라 사람이 되는 것으로 국적을 취득하는 당사자의 주관적이고 적극적인 판단이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러나 일본은 동화정책의 차원에서 제한적으로 국적취득을 허용해 왔다. 동화(同化)란 해당국이 자국의 국적을 취득하는 자로부터 본래의 민족적 정체성을 없애고 해당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동화정책 아래에서 국적취득은 사실상 귀화와 구별하기 어렵게 된다.
2) 재일한국인의 이중성과 '한국계 일본인' 문제
재일동포 1세들은 대부분 식민지 한국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도일(渡日)했거나, 태평양 전쟁 시기 강제로 일본까지 끌려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었지만 그들이 귀국하지 않은 이유는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 한국에는 일자리가 부족했고, 특히 재일교포의 귀국 시 1,000엔 이상을 반입할 수 없도록 미군정이 재산반입을 엄격히 제한했기 때문에 귀국하더라고 생계를 꾸리기 곤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일동포 1세들은 조국이 통일되고 안정되면 곧 귀국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에게 있어 귀화는 곧 '일본에 대한 또 한번의 투항'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일본 국적취득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2, 3세로 내려오면서 재일동포 가운데 일본인들과 결혼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부계 또는 모계 어느 한쪽만 한국인의 피가 섞인 재일동포 2, 3세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재일동포 1세들인 경우 앞에서 말한 이유에서 '일본국적취득'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또한 한국인-일본인의 결혼에 의한 2세에 대해 "半쪽발이"라 하여 받아들이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 모계가 한국인일 경우는 일본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지만, 부계가 한국인일 경우는 재일동포사회에서도 일본사회(1985년까지)에서도 모두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3) 일본국적법의 귀화요건 완화와 재일동포의 일본 귀화 추세
일본정부는 1985년 「국적법」을 개정하여 종전에 부계 혈통 중심주의에서 부모 양계 혈통주의로 개정하고부터 재일교포의 일본국적 취득이 쉬워졌다. 여기에다 재일 한국인 1세에 비하여 2,3세대 이후에는 민족의식이나 역사의식이 희박해져 가고 있어 귀화자가 늘고 있다.
최근에는 이전보다도 일본 국적의 취득이 더욱 쉽도록 「국적법」의 개정을 추진 중이다. 현행 「국적법」(5년 이상 일본거주, 만 20세 이상, 품행선량 등 요건)에 따라 실시되는 귀화 절차는 매우 엄격하며, 허가가 나올 때까지 보통 1년 이상이 걸리지만, 개정안에서는 서류심사와 본인 확인만으로 귀화를 허용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 국적 취득의 완화 움직임은 현재 일본 국회에 계류 중인 「외국인 참정법」과 연관되어 있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국적법」의 개정이 영주외국인의 지방참정권 부여에 극구 반대해 온 자민당 내 보수파 의원들에 의해 적극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서 "지방선거권 부여를 이것으로 대체하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2) 재일동포의 일본사회내 지위향상 문제
1)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 향상운동
1970년대에 있었던 재일동포 2세들의 공영주택 입주자격과 연금가입을 요구하는 생활권 투쟁, 1980년대에 있었던 지문제도 철폐를 요구하는 인권운동, 그리고 1990년대에 들어서 추진하고 있는 일본학교에 있어서의 민족학급 설치를 요구하는 민족교육 운동 등을 들 수 있다.
1994년부터 민단은 적극적으로 지방참정권을 입법화하려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1999년말에 성립된 자민-공명-보수 연립3당의 재일동포가 대부분인 외국인 영주자에게 지방참정권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자민당내 보수파의 강력한 반발로 아직 입법화가 되지 못하고 지연되고 있는 형편이다. 만약 지방참정권이 재일동포에게 부여된다면 재일동포사회는 또한 번의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2) 민단의 지방참정권 입법운동과 총련의 반대
민단은 1994년부터 재일동포 참정권 입법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자, 총련은 "민단 지도부들이 주동이 되어 추진하고 이는 일본인으로의 동화책동이자 민족말살책으로 일본내정에 재일동포들을 끌어들여 이간질시키는 행위"라고 강력히 비난해 왔다. 총련 측은 재일동포 참정권 입법 저지활동을 매년 중요 활동과제로 선정하고 일본 정계 및 기관지 등을 통해 반대활동을 집요하게 전개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과는 달리 총련 측이 참정권에 반대하는 실제 이유는 조직원들의 일본 국내정치에 대한 관심증대로 조직활동이 위축되고 자금이 정계로 흘러갈 것 등을 우려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4. 남북관계의 개선과 재일동포사회의 변화
(1) 남북관계 개선과 재일동포사회의 화해와 협력 분위기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재일동포사회, 민단과 총련의 관계에도 변화가 초래되었다.
그 동안 민단에 통해 신청해야만 '대한민국 임시비자'를 발급했던 '총련 모국방문사업'이, 우리 정부가 적십자사의 초청형식으로 '범정부 차원'에서 직접 총련측에 임시비자를 발급해 주는 방식으로 획기적 변화를 하였다. 이것은 우선 우리 정부의 '총련동포 포용정책'에다가 민단측이 창구단일화 주장을 철회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총련측도 '방문증'에 집착하지 않고 '임시비자'를 수용하고 민단 사업 중단을 요구하지 않았다.
민단과 총련간에도 대화가 시작되어 작년 8월 총련 부의장 등 간부 3인이 민단 본부를 방문하고, 민단 간부가 재차 총련본부를 방문하여 양단체의 화합과 교류를 위해 민단 부단장과 총련 부의장을 책임자로 하는 '중앙본부간 협의기구 설치'에 합의하였다. 현재 두 단체간의 대화는 중앙본부 외에 지역본부 차원에서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2) 일본내 소수민족으로 자리잡아 가는 재일동포
재일동포가 3,4세로 이어짐에 따라 '민족정체성'의 유지가 재일동포사회의 커다란 문제로 되고 있다. 매년 10,000명 전후의 귀화자가 2001년에 개정될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국적법」아래에서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민단의 경우는 이미 1993년 '거류민단'이라는 명칭을 '민단'으로 바꾸는 등 재일동포사회의 의미를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갈 '거류민(居留民)'이 아니라 영원히 일본사회에 뿌리내리고 살아갈 '정주민(定住民)'으로 재규정하였다. 1994년부터 민단이 지방참정권의 입법화를 적극 추진하게 된 것이나, 일본국적 취득자에 대해서도 회원의 자격을 부여키로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직 총련은 '귀국'을 포기하고 있지 않지만 최근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총련 책임부의장 허만호가 지방본부 국제·책임분야책임자회의에서 재일동포 지방참정권 문제와 관련하여 향후 활동방침을 피력하면서 앞으로는 굳이 반대활동을 전개하기보다는 민단이 전개하는 참정권 획득활동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그대로 놓아둘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태도변경은 남북공동선언 이후 화해무드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민단이 동포 지위향상의 일환으로 추진중인 사안을 반대할 명분이 사라진 데다가, 총련 내에서도 동포 권익확대를 위해 참정권 획득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된 데 따른 것이다.
(3) 조국이 재일동포에게 해줄 일: 선거권 제한의 단계적 철폐
우리 정부는 이중국적자로서의 재외국민은 물론 한국국적을 갖고 있는 재외국민(대표적인 것이 재일동포)에 대해서조차 재외선거를 허용하지 않으며, 그들이 한국에 입국하여 체류하고 있을 경우에도 선거권 행사를 인정치 않고 있다. 적어도 참정권에 관한 한 재외국민을 국민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1999년 8월 「재외동포법」이 국회를 통과되어 같은 해 12월부터 시행되었지만, 재이국민의 선거권 행사는 여전히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정부안에는 재외국민이 90일 이상 국내에 거주할 경우 거주 당시 국내에서 실시되는 각종 공직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되었으나 국회 심의과정에서 삭제되었다.
현재 우리정부와 민단은 일본정부에 대해 영주 재일동포에 대한 지방참정권 부여를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일정 조건을 갖춘 재일동포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과제이다.
(4) 한민족네트워크화와 '한국계 일본인'
지금도 많은 재일동포들은 일본사회에서 차별을 덜 받고 살아가기 위해 본명을 감춘 채 일본식 통명(通名)을 사용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일본으로 귀화를 희망하는 사람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현행 일본 국적법상 귀화요건으로 부모 어느 한 쪽이 일본인 혈통을 받은 자여야 한다는 점에서 일본국적을 취득한 재일동포는 대체로 한-일 혼혈인 셈이다.
그러나 최근 재일동포의 귀화 추세를 보면, 이미 일본국적을 취득한 한국계와 재일동포가 결혼하여 당사자가 일본국적을 취하거나 또는 자식대에 일본국적을 취하는 경우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경우는 사실상 한국인의 민족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한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일본인들과 결혼하는 한국인이 크게 늘고 있다. 이들의 경우는 일본인과 결혼했으면서도 여전히 한국국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녀들은 한국 또는 일본국적을 취득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국적을 취득한 한국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일민족'의 신념에 가득차 있어서 그런지 100% 한국혈통이 아니면 한국인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설사 100% 한국혈통이라도 우리말을 모를 경우에도 굉장히 배타적이다. 한국어를 잘 못하는 재일동포나 부모 어느 한쪽이 일본계인 자녀들을 같은 동포로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런 실정이니 일본국적을 취득한 한국인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일민족'의 신화에 입각한 배타주의는 '기민(棄民)정책'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한민족네트워크를 구축한다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한민족'이 모두 우리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도 아닐 것이고 순수한 한국계 혈통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광의의 '한민족'이란 어느 정도 혈통적으로나 언어적, 문화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스스로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는 경우를 모두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93년 민단의 규약을 개정하여 한국국적의 재외국민 뿐만 아니라, 일본국적을 취득한 한국계 일본인도 회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재일동포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한민족네트워크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한 조치하고 할 수 있다. 폭넓은 한민족 네트워크의 구축이야말로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한민족의 미래를 담보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