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조선시대 음악사

우리나라 조선시대 음악사

작성일 2009.08.10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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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음악사 중에서-

우리나라 음악사 중 조선시대전기와

조선시대 후기의 음악의 특징을 조사....

 

*A4용지 2장이상

 

 

 

 

 

내공 많이 많이 드릴게요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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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여기저기서 복사해서 넣은 것입니다. 도움이 되시길~~~

 

조선 시대(1392 - 1910)

우리 나라의 음악

우리 나라 음악의 경우에 삼국 시대 및 고려 시대의 음악과 조선 시대의 음악, 근대의 음악과 현대의 음악이 조금씩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어떤 음악 활동이 이루어졌는지 살펴보자.

① 조선 전기

*박연의 아악 정리와 궁중 의식에 아악을 사용하였다.
*편종과 편경을 만들었다.
*여민락, 보태평 등의 향악이 창작되었다.
*우리의 악보인 '정간보'가 창간되었다.
*음악에 관한 책 '[[악학궤범]]'이 편찬되었다.

② 조선 후기

*향악이 발달하고, 시조와 가곡이 발생하였다.
*줄풍류, 대풍류, 삼현육각 등의 연주가 활발하였다.
*가곡, 시조, 가사 등의 형식이 정립되었다.
*판소리, 잡가, 시나위, 산조 등이 발전하였다.
*민요가 성행하였다 

 

위는 개략적인 조선 전기와 후기의 차이점이였고~~~~

 

1) 조선 초기

태조는 '아악서'와 '전악서'를 설치하고, 약800명의 악사를 두어 음악을 관장, 발전하게 하였으며, 명나라로부터 악기도 수입하였다.

 

2) 세종. 세조 때의 음악

박연에 의하여 아악이 맹사성에 의하여 향악이 정리되었다. 악기 도감을 설치하여 악기를 개조하거나 새로 만들었으며, 편경, 편종을 우리나라 사람들의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 또한 정간보, 오음 악보 등에 의한 기보법이 창안되었고, 아악보가 편찬되었으며, 세종대왕은 정대업, 보태평 등의 많은 악곡을 직접 작곡하였다.

 

 3) 성종 때의 음악

성종24년 '악학궤범'(율의 원리, 악기, 의복, 형체, 무보, 제작법 등을 수록한 책)을 편찬하였으며, 고려 시대의 음악이 많이 개작되었고, 박, 월금, 향비파, 아쟁, 당적, 당피리, 태평소, 장구, 해금 등이 향악에 사용되고 그 연주법도 개량되었다.

 

 4) 조선 후기의 음악

인조 21년 사직과 문묘악이 정해지고, 인조 25년 아악을 다시 쓰게 되었으며, 광해군, 효종, 영조 때, 악학궤범을 복간하고 악기를 다시 만들었다. 종묘악과 고취악, 삼현 육각에 의한 음악이 사용되고, 가곡, 가사, 시조 등의 성악곡이 널리 불리어졌다.  특히 영조 이 후, 서민 계급에서 판소리, 산조, 잡가, 민요 등의 민속악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숙종 때의 판소리 체계화는 큰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전남중등음악

 

참고로 조금 더~~~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음악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까지를 조선 전기 음악, 고종 때까지를 조선 후기 음악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음악의 특징은 신악(新樂)의 창작, 경돌[磬石]에 의한 편경(編磬)·편종(編鐘)의 제작, 거서 생산에 의한 율관(律管)의 제작, 정간보(井間譜)의 창안, 〈악학궤범 樂學軌範〉의 찬정 등을 들 수 있다. 조선 왕조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의 하나로 연등회를 폐지하고, 아악을 재정비하여 아악 발전에 힘썼다. 또 세종 때 율관·편종·편경을 제작했는데, 그 이전에는 중국에서 이들 아악기를 들여 와서 사용했다.

 

1425년(세종 7) 해주에서 율관 제작에 필요한 거서가 생산되면서 중국의 황종음을 기준으로 한 율관의 제작이 이루어졌다. 1426년에는 남양에서 경돌이 발견됨으로써 편종·편경을 제작했다. 그러나 이때 만들어진 율관은 명나라의 황종음보다 높아 세종은 거서 대신 후기법(侯氣法)을 사용한 율관을 몇 차례 시험 제작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중국의 황종율관을 사용했다.

 

정도전은 납씨가(納氏歌)·정동방곡(靖東方曲)·문덕곡(文德曲)·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수명명(受明命)·하황은(賀皇恩) 등의 가사를 지었으나, 이때의 곡조는 고려 후기의 〈청산별곡〉·〈서경별곡〉 등의 향악과 중국계 아악을 그대로 빌어 쓰고 있었다. 세종은 이 곡들만으로는 조선의 건국대업을 칭송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기고 손수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를 지었고, 신악 여민락(與民樂)·치화평(致和平)·취풍형(醉豊亨)·보태평·정대업·창수곡(創守曲)·경근곡(敬勤曲) 등을 창작했다.

 

그후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많은 음악을 잃어버리고 지금은 여민락·보태평·정대업만이 전한다. 본래 이 세 음악은 모두 회례연(會禮宴)의 악무(樂舞)로 쓰였으나 여민락은 임금의 거둥 음악으로 답변확정되고, 보태평·정대업은 세조 때 종묘제례악으로 답변확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세종 때 기보법인 정간보가 창안되었는데 〈세종실록〉 악보는 1행 32정간, 〈세조실록〉 악보는 1행 16정간으로 되어 있다. 정간보는 매 정간에 시간단위를 표기하는 유량악보(有量樂譜)인데 음길이는 음이 쓰인 정간 뒤에 빈 정간의 많고 적음으로 음길이의 길고 짧음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4음 1구로 된 아악의 기보에는 별 필요가 없었으며 실제 〈세종실록〉 아악보에는 정간보를 사용하지 않았다. 정간보는 불규칙한 시가를 가진 향악보의 기보에 아주 적합한 것이었으며 〈시용향악보 時用鄕樂譜〉,〈대악후보 大樂後譜〉에 쓰였고 〈금합자보 琴合字譜〉에서처럼 합자보를 병용하기도 했다.

 

1493년(성종 24) 성현(成俔)·박곤(朴)·유자광(柳子光)·신말평(申末平)·김복근(金福根) 등은 칙령에 의해 〈악학궤범〉을 편찬했다. 편찬 동기는 각종 의궤(儀軌)와 악보가 해가 지나면서 닳고 잘못 전하는 것이 많아 이를 교정하기 위함이라고 서문에 밝히고 있다. 〈악학궤범〉이 여러 악서와 다른 특징은 음악사 서술을 생략하고 실용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서술했다는 점이다. 12율의 결정법, 등가악·헌가악의 중심음, 악기진설, 정재의 진퇴, 악기제조법, 조현법 등을 구체적으로 다루어, 실제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으로 산실된 악제는 〈악학궤범〉을 기준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지면서 국가의식에 수반되던 음악의 규모가 축소되어, 정악이 완서(緩舒)를 강조하고 무박자화된 반면 가사·가곡·시조 등은 빨라졌으며, 당악과 향악의 구분이 없어지고 향당교주의 형식으로 바뀌었으며, 줄풍류·대풍류 등 사림·중인계층의 음악이 발달했고 음악전반에 있어서 변주곡·파생곡이 생성되었다. 음악규모가 축소된 흔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아악의 경우 〈악학궤범〉에서 62명이었던 등가 악생의 수가 조선 후기에는 20명으로 줄었고, 헌가 악생의 수는 124명에서 22명으로 줄어들었다. 종묘제례악은 〈악학궤범〉에서 36명의 등가 악공의 수가 20명으로, 헌가 악공은 72명에서 22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밖에 전정헌가 악공은 59명에서 40명으로, 전정고취 악공은 50명에서 26명으로, 전부고취 악공은 50명에서 40명으로 줄어들었다.

 

정악 자체의 변화로는 음악의 속도가 완서함을 강조하는 경향이 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현금신증가령 玄琴新證假令〉(1680경)의 여민락은 10장의 음악을 완전하게 담고 있었는데 〈어은보 漁隱譜〉(1779) 이래로 우조 여민락은 7장이 기록되어 있으며, 〈삼죽금보 三竹琴譜〉에서는 1~4장은 20박 1장단이고 4장 이하는 10박으로 되어 있다. 〈송씨이수삼산재본금보 宋氏二水三山齋本琴譜〉의 보허사는 〈한금신보 韓琴新譜〉부터 장별 구분이 생겼고, 20박 1장단이었던 것이 〈유예지 遊藝志〉부터 5~8장은 10박 1장단으로 변화했다.

 

이같은 현상은 정악의 음악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완서함을 강조하는 경향을 고집한 것이다. 반면 영산회상과 같은 음악에는 많은 파생곡과 변주곡이 생겨났다. 영산회상은 〈어은보〉 이후 상영산의 파생곡인 영산회상갑탄·세영산·가락덜이 등이 파생되었다. 이러한 파생곡들은 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했으며 그 이후로도 다양한 재창작을 이루어내는 바탕이 되었다.

 

 본래 당악은 좌방에 속하던 것인데 성종 이후 중국계 아악이 좌방에 소속되면서 당악이 우방의 향악에 포함되었다. 이후로 당악은 점차 향악화되었다. 지금까지 전하는 향악화된 당악곡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보허자·낙양춘뿐이다. 이후 당악은 점차로 쇠퇴하여 겨우 형식만 유지되다가 1910년 이후로는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의 향악만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이밖에 당악의 향악화의 한 경향으로 당악기였던 당적·당비파·아쟁·퉁소 등은 향악기화되었으며 당피리만 〈악학궤범〉 시절 원형을 현재까지 지니고 있다. 가곡도 조선 후기로 갈수록 곡의 수가 줄어드는 대신 많은 변주곡이 생겨났다.

 

〈양금신보〉 때는 만대엽·북전·중대엽·감군은 등의 곡이 있었는데, 〈신증금보〉 이후 감군은, 〈어은보〉 이후 만대엽, 〈유예지〉 이후 북전이 없어졌다. 〈삼죽금보〉 이후에는 중대엽도 연주하기 어렵다고 하여 실제 연주에서 제외되었고, 〈양금신보〉에 처음 등장한 삭대엽만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가곡은 점차적으로 느린 만대엽은 사라지고 빠른 곡인 삭대엽만이 남게 되었다. 삭대엽에는 초수대엽·이수대엽·삼수대엽 등 많은 변주곡이 생겨났다. 현재 전창되는 가곡은 하규일의 법제로 평조·계면조에 남창 24곡, 여창 14곡이 전한다.

 

가사는 조선 중기 풍류방의 가객 등에 의해 발달하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 〈삼죽금보〉에 이르러 일반금보에 실리기 시작했다. 가사는 음악보다 사설이 중심이 되는 음악으로 장구·대금의 반주로 노래되었다. 〈삼죽금보〉에 맨 처음 보이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전하는 12가사를 보면 백구사(白鷗詞)·황계사(黃溪詞)·어부사(漁父詞)·춘면곡(春眠曲)·죽지사(竹枝詞)·상사별곡(相思別曲)·길군악·권주가(勸酒歌)·처사가(處士歌)·양양가(襄陽歌)·수양산가(首陽山歌)·매화가(梅花歌) 등이 있다. 시조 시(詩)의 유래는 고려 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시조가 노래로 불린 것은 조선 영조 때부터로 추측된다. 최초의 시조 악보는 〈유예지〉·〈구라철사금자보 歐邏鐵絲琴字譜〉이다. 시조 역시 조선 말기로 갈수록 많은 파생곡과 변주곡이 생겼는데, 〈삼죽금보〉부터는 지름시조가 등장했으며, 그뒤 중허리시조·엇시조·엇엮음시조·사설시조 등 많은 파생곡이 생겼다.

 

조선 후기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민속음악의 생성 및 발전이다. 특히 판소리와 산조는 오늘날까지 한국전통음악의 대표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판소리는 광대 1명이 장구 반주에 맞추어 소리와 아니리로 노래하는 것이다. 19세기 중엽에는 〈춘향가〉·〈심청가〉·〈박타령〉 ·〈토끼타령〉·〈적벽가〉·〈배비장전〉·〈강릉매화타령〉·〈옹고집전〉 ·〈변강쇠타령〉·〈장끼타령〉·〈무숙이타령〉·〈가짜신선타령〉 등 12마당의 판소리 곡이 형성되었다. 그후 곡의 수가 줄어들어 오늘날의 전승 5마당이 정착되었다. 신재효는 〈판소리사설집〉을 정리하여 〈춘향전〉·〈토별가〉·〈심청가〉·〈박타령〉·〈적벽가〉·〈변강쇠가〉 등 6마당을 실었고 1933년 이선유는 〈춘향가〉·〈심청가〉·〈화용도〉·〈수궁가〉·〈박타령〉 등 5마당을 정리하여 〈오가전집〉으로 엮었다.

 

사설은 여러 광대들이 부르면서 새롭게 개작·첨가되어 지금과 같이 방대한 내용이 되었다. 산조는 기악독주곡으로, 주로 남도소리의 시나위·판소리의 가락을 장단이라는 틀에 넣어 연주하는 즉흥성을 띤 음악이다. 19세기말 김창조에 의해 가야금산조가 만들어진 이후로 거문고산조·대금산조·해금산조·아쟁산조·피리산조 등이 만들어졌다. 민요는 농경사회에서 민중들 사이에 자연발생적으로 불려지던 노래를 일컫는다.

 

그러므로 특정한 개인의 창작이라기보다는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온 민중들의 삶의 노래라고 하겠다. 그러기에 민요는 그 노래가 불려지던 시대의 민중들의 삶과 정서를 사회적으로 반영하는 예술음악이라고 여겨진다. 민요의 기본적 형태는 민중들의 생산적인 활동과 관련이 있다. 일하면서 부르는 노동요는 민요의 최초의 형태이며 동시에 모든 민요의 모체라고 할 수 있다.

 

 일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노래를 부르면서 일을 하면 박자에 맞추어 힘을 모을 수 있고 흥겨움에 힘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일의 고통을 잊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노동요는 일의 종류에 따라 농업노동요·어업노동요로 구분할 수 있는 집단노동요와, 주로 여자들이 혼자 일하면서 부르는 개인노동요가 있다. 근래에는 민요를 토속민요와 통속민요로 구분하는데 토속민요는 한 지역에 국한해서 불리는 노동요를 가리키고 통속민요는 직업적인 소리꾼들에 의해 불리는 세련되고 대체로 널리 전파된 민요를 가리킨다.

 

민요는 음악적으로 지역마다의 특성을 갖는다. 각 지방의 방언과 민요가락은 서로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 지방의 독자적인 특징에 따라 경기지방에는 창부타령조, 호남지방에는 육자배기조, 강원도·경상도 지방에는 메나리조, 평안도지방에는 수심가조, 황해도지방에는 산염불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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