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외국의 기타리스트중에 최고로 손꼽히는 사람은 누가 있나요?

우리나라와 외국의 기타리스트중에 최고로 손꼽히는 사람은 누가 있나요?

작성일 2009.06.23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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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타협회를 참고 하시구요. 이유는  여기는 한국이지 조심스럽네요.

 

 

외국은  정리 해드리죠.

 

기타리스트

 

돈 루이스 밀란[Don Luis Milan]

 레오나르드 슐츠[Neonard Schulz]

 루이스 데 나르바에즈[Luis de Narvaez ]

 

알론소 무다라[Alonso Mudarra]

 다울랜드 버드[1563-1626]

 가스파르 산스[Gaspar Sanz]

 

로베르트 데 비제[Robert de Visee]

 헨리 퍼셀[Henry Purcell]

 도메니코 스카를랏티[Domenico Scarlatti]

 

바하의 류트음악

 루이지 보케리니[Luigi Boccherini]

 페르디난도 카룰리[Ferdinando Carulli]

 

페르난도 소르[Fernando Sor 1778-1839]

 마우로 쥴리아니 [Mauro Giuliani]

 안톤 디아벨리 [Anton Diabelly]

 

니콜로 파가니니 [Nicolo Paganini]

 디오니시오 아구아도 [Dioniso  Aguado]

 마테오 카르카시 [Matteo Carcassi]

 

프란츠 슈베르트 [Franz Schubert]

 프란체스코 타레가[Francisco Tarrega]

 이삭 알베니즈 [Issac Albeniz]

 

에릭 사티 [Erik Satie]

 엔리크 그라나도스 [Enrique Granados]

 마뉴엘 데 팔라 [Manuel de Falla]

 

미구엘 리오벳 [Miguel Liobet]

 마누엘 폰세 [Manuel Maria Ponce]

 어구스틴 바리오스 [A.B.Mangore]

 

에밀리오 퓨홀 [Emilio Pujol]

 빌라 로보스 [Villa - Lobos]

 안드레아스 세고비아 [Andres Segovia]

 

호아퀸 로드리고 [ Joaquin Rodrigo]

 마리아 루이사 아니도 [Maria Lusia Anido]

 루이제 발커 [Luise Walker]

 

로메로 일가 [Los Romeros]

 이다프레스티&알렉산드르 라고야

(Ida Presti & Alexandre Lagoya)

 나르시소 예페스 [Narciso Yepes]

 

리오 브라우어 [Leo Brouwer]

 줄리언 브림 [Julian Bream]

 존 윌리암스 [John Williams]

 

데이빗 러셀 [David Russel]

 가즈히토 야마시다

 마누엘 바루에코 [Manuel Barrueco]

 

크리스토퍼 파크닝

 괴란 쇨셔

 안토니오 라우로 [Antonio Lauro]

 

안토니오 비발디 [Antonio Vivaldi]

 모레노 토로바 [Federico Moreno Torroba]

 버지니아 루케 [Virginia Luche]

 

엘리엇 피스크 [Eliot Fisk]

  페르난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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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론소 무다라

Alonso Mudarra (1510경 - 1570경)

16세기 초 세빌리아에서 태어난 비엘라(Vihuela)주자이며 작곡가였던 그는 친왕령(親王領)의 공작가(公爵家)에서 성장하며 음악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세빌리아 사원(寺院)의 역승(役僧)으로 1556년 순시관(巡視官)에 임명되고 1566년에는 악장(樂長)이 되어 1568년에 사원의 오르간 건설에 참가하였다. 1546년 비엘라를 위한 세개의 곡집을 출판했는데 이 곡집에는 Cancion, Pavana, Galliard, Romanesca, Fantasia, Soneto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그중의 가곡은 민요사(民謠史)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그는 성직에 있으면서 종교음악, 궁정음악, 민중음악을 흡수하여 자신의 음악속에 반영시켜 오직 예술과 신(神)앞에 음악을 바친사람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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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즈히토 야마시타

(Kazuhito Yamashita)  

1961년 일본에서 출생한 야마시타는 8세부터 기타수업을 시작하여 1974년 일본 나가사키, 시고구 및 도쿄에서 그의 첫 리사이틀을 가졌다. 나르시소 예페스에게 사사했으며 1977년 제이 토마스와 안드레 세고비아에게 기타강습을 받았고 그 해 일본 기타인 연합회가 주최한 콩쿠르에서 1등을 했고, 곧이어 이태리와 프랑스에서 가진 국제 기타 콩쿠르에서 연거푸 1등상을 수상하였다. 1979년 야마시타는 도쿄 필하모니와 콘서트 및 음반녹음으로 데뷰했으며, 일본 주요도시 순회공연에 뒤이어 파리에서의 데뷰 연주회를 가졌다.다음해 네덜란드에서의 순회공연때 암스텔담 콘세르트 헤보우 관현악단과 협연하여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1982년 그는 다시 일련의 연주회를 갖기위해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1984년 터론토 기타 페스티벌에 우승 함으로써 독일, 비엔나 및 런던을 포함한 유럽순회공연을 가질 기회를 얻었고 거기에서 음악평론계 및 언론계로부터 그의 음악적인 예술성 및 다양한 표현력에 대해 놀랄만한 찬사를 받았다.

현재 BMG레코드 전속 기타리스트로 기타로 표현하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곡들을 편곡, 탁월한 테크닉으로 연주해내 찬사를 받았으며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고, 왕성한 레코딩, 연주활동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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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소 예페스

Narciso Yepes (1927)

 1927년 남부 스페인에서 태어났다.4살에 기타를 가지게 된 예페스는기타과에 입학하게되는데 그는 여기에서 발터 기제킹(Walter Gieseking)과 게오르그 에네스코(Georges Enesco)에게 리듬과 다양한 음색을 배우고  작곡과의 Asendo 교수를 만나 훗날 세계적인 기타리스트로서 기초를 닦게 된다.Asencio교수는 기타가 피아노와 같이 스페일이 균형과 속도감을 가질 수 없다면 기

타라는 악기가 불완전한 악기가 될 수 밖에 없음을 예페스에게 인식시켰다고 하는데, 이 때문인지 예페스의 기량은 피아노와 견줄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게 된다.이러한 그를 세계적인 명성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든 하나의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1952년 르네 클레망 감독의 영화 "금지된 장난"의 테마 음악을 맡게 된 것 이다. 우리에게 클래식 기타 음악의 대명사로 알려진 "사랑의 로망스"의 연주는 그에게 커다란 명성을 안겨 준다.

예페스는 6현 기타 대신에 자신이 개량한 10현 기타를 사용한다. 이 악기는 낮은 E-Bb-Ab-Cb의 4줄을 첨가하여 만든 기타로 저음을 보강하고, 6현 기타가 가지는 정교함과 탄력성은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사각의 손톱모양을 가지고 있어서 강하고 맑은 음의 탄현을 한다.예레스는 악보에 충실한 연주로도 유명하며 레퍼토리나 레코딩 또한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다양하다. 800여 년 전의 타블라추어나 기타의 전신인 류트나 기턴 등의 희귀한 악보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해 주듯이 그의 연주는 우리나라에서 구하기가 쉬운 편으로 그의 HIT20이라는 음반은 클래식 기타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음반이기도 하다. 그이 연주는 정확함과 자연스러움을 갖추었다고 평가되고 있는데 깔끔하고 선명한 음색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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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구스틴 바리오스

AGUSTIN BARRIOS (1885 ~1944)

1885년 5월 5일 파라구아이 산 후안 바우티스타 데 라스 미시온네스에서 태어나 1944년 8월 7일 엘살바도르에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위대한 기타 연주가이자 작곡가이다.

1900년 국립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으며 1910년 경 남미.중남미 각지로 연주여행을 계속하였던 그는 1916년 브라질에 가서 15년간을 지내기도 하였다. 1922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예노스아이레스에서 처음으로 A. Segovia를 만났다.

A.Segovia는 이때 Barrios에게 기타 음악해석에 따른 조언을 요구했는데 이 때Segovia는 Barrios의 기타주법(양손의 독특한 Touch)을 자신의 기술로 만들었다. 유명한 스페인의 기타 제작가 Santos Hernandes는 그의 회고록에서 "Segovia는 처음으로 남미에 돌아왔을때 완전히 그 태크닉을 체득하였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Mangore라고 하는 이름은 파라구아이의 대삼림(大森林) 속에 살고 있는 대추장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서 Nitsuga Mangore(Nitsuga를 거꾸로 읽으면 Agustin이 된다)로 만들었다. Barrios는 기타 작곡가.철학자.신학자.시인이었고 또 여러나라 말에 통달하였다.

그는 바하를 열심으로 연구하였지만 시종 민족성의 토대 위에 그의 음악을 승화시켰다. 그의 음악에 있어서 중요한 공적은 아메리카 대륙의 민족학교 에스쿠엘라 마고레아나(Esucela Mangoreana)를 창설하고 스페인 기타계의 움직임에 대하여 남미의

민족색이 넘쳐 흐르는 곡을 예술적으로 높여가는 운동을 볼 수 있었다는 공헌이 있다.

Barrios의 기타음악에 대해 작품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Segovia 뿐만 아니라 H. Villa-Lobos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Barrios의 작품 "사랑의 고백(Congession)을 듣고 그 영향을 받아 Villa-Lobos는 전주곡 1번(e minor)을 썼고 "향수의 초로(Choro da Saudade)를 듣고 [Choro Tipico #1]을 작곡했다. 또 미구엘 쵸베는 Barrios에 대하여 "Barrios는 'Estudio de

Concierto'에서 기타 역사상 100년 후에나 겨우 보편적으로 될것을 빨리 해결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에 있어서 위대한 악성으로 존경받고 있는데 기타 연주의 초인적이 그것에 대하여 깊은 교양과 숭고한 인간적 정신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존 윌리엄즈의 연주 레코딩이 있기는 하지만 A.segovia는 그때 이후 그에 대한 경원하는 마음에서인지 그의 작품은 일체 연주된 판이 없다.[La catedral]과 [Ras Abejas] 는 그의 좋은 작품으로 색체나 음향의 전달성은 끊임없이 흐르는 무궁동기법의 빠른 텀포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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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암스

John Williams (1941) 

 

오스트레일리아 태생의 존 윌리암스는 4살때부터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한 신동이었다. 아버지 밑에서 처음 10년간 공부한 그는, 1952년 런던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음악 세계에 있어 일대 전환이 된 계기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Accademia Musicale Chigiana di Sieria에 입학, 5년간 장학금을 받으며 저 유명한 기타의 마법사 세고비아와 함께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어린 존윌리암스가 학생들 중 처음으로 독주회를 완벽히 개최, 전례없는 영예와 찬사를 한껏 받게 된 것은 거장의 앞날을 말해주는 하나의 신호탄이었다. 1958년, 런던 위그모어 홀에서데뷔한 그는 완벽한 테크닉과 그만의 철학적 세계로 음악을 구도,대단한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으며, 1962년 소련과 파리,, 마드리드에서의 잇단 연주회는 존 윌리암스를 세계적 거장으로 올려놓는 시금석이 되었다. 1963년에 일본과 미국에로의 진출이후 그의 명성이 나날이 높아져 전세계 어느 곳에든지 그의 음악이 흘러 나오게 되었다.또한 영화 '디어 헌터'의 음악을 맡으면서 그의 제2의 음악세계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줄리안브림, 파코 페냐, 이작 펄만, 배니 케설, 클레오 레인, 안드레 프레빈 등과 함께 연주 활동을 벌이며 그의 영역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안드레 프레빈과 같은 작곡가는 존 윌리암스 연주에 깊은 매력을 느껴 그를 위해 기타 협주곡을 작곡하기도 했다.최근, 패트릭 고어, 레오 브루어, 토루 타케미츠와 같은 많은작곡가들은 존과 더불어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곡을 많이 작곡하고 있다.  또한 줄리안 브림과의 듀엣 앨범 Together는 20세기 후반 영국에서의 기타의 황금시대를 열기도 하였다.

 존 윌리암스는 음악의 최우선을 대중과 더불어 공감할 수 있는 것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같은 열정이 결실을 맺어, 저 유명한 런던 로니 스코트 재즈 클럽에서 연주회를 가진최초의 고전 음악가가 되었다. 이에 고무되어 그는 1979년 급기야 5인조 그륩 'SKY'를 결성, 확고부동한 명성을 쌓게 된다.그들의 연주 실황은 레코드와 TV를 통해 유명세를 더하게 되고 특히,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그 인기가 가히 폭팔적이었다. 또한 최근에는 현대 음악에 관심을 두기 시작,새로운 그륩 'Attaccs'를 결성하였다. 존 윌리암스는 SONY CLASSICAL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아티스트로 20살 때부터 정식 계약, 오늘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연주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대부분이 레코딩되어 끊임없는 호평을 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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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로보스

Villa-Lobos (Rio de Janeiro 1887.3.5~Rio de Janeiro 1959.11.17)

  중남미에서 출생한 최대의 작곡가로써 브라질에서 명성을 떨친 문인. 역사가이며 아마튜어 음악가였던 부친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는데 어린 시절 첼로와 클라리넷을 공부하였을 뿐 아니라 피아노를 비롯하여 각종 현악기, 특히 브라질 기타의 연주에 능숙했다.1887년 3월 5일 리오데지네이로에서 출생하여 이미15세 때는 오케스트라의 첼로 주자가 되었다.  1905년 부터 민요 채집을 시작하였고 작곡 공부도 했으며 1907년 내셔널 콘서바토리 음악원에서 본격적인 학문을 훈련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사적으로 그 연구를 계속했다. 1912년 스스로 네번째의 가장 대규모적인 브라질 대륙 깊숙한지방의 풍속과 음악의 조사를 착수하여 브라질 음악의 특이한 성격을 깨닫고 1915년 이후 작품에 강한 향토적 개성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는 기타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서 기타 반주를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할 수 있는가를 지방 민요 가수들로 부터 배웠다. 그러므로 그가 나중에 첼로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기타를 위한 수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콘서바토리에서 배웠었다. 10대(代) 시절부터 기타를 들고 거리의 방랑 음악가들과 함께 어울리기도 했던 적이 있는 그는 동부 브라질을 답사한 이후 20대(代)부터 모든 분야에 걸쳐 작품을 열심히 발표하기 시작하여 브라질 악계의 주목을 끌었다. 1923년 36세때 처음으로 유럽에 건너가 파리에서 유학.런던, 빈, 베를린 등을 방문 구미각지(歐美各地)를 돌며 활동(자작지휘등)을 계속하였는데 브라질 시절 못지 않게 그의 명성은 각국에 알려졌다.한편 그는 조국의 음악 환경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있는 힘을 기울여 "빌라-로보스 관현악단"의 창립과 브라질에 있어서 바하의 대작 초연 등 각지의 관현악단 합창단의 지휘자로 있었으며 학교용의 민요 수집을 완성했다. 해가 거듭함에 따라 그는 국제적 존재가 되어서 브라질 뿐만 아니라 신대륙음악 수준을 높힌 작곡가로서 우러러 보게 되었다. 빌라-로보스는 평범하지 않는 다산(多産)의 작곡가였다. 그의 작곡의 수는 넘버링의 방식여하에 따라서 800편에서 2000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의 가장 개인적인 혁신은 악기의 앙상블에 의해서 주로 야외에서 연주되어지고 브라질과 인디안의 민속음악의 요소들을 넣은 갖가지로 얻어진 소품들을 쵸로의 예술적 음악의 영역속에 소개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자신의 작품들은 바하로부터 인상파에 걸친 유럽0슭퓽?기교와 브라질 민속음악의 요소와의 융해로 특징지워진다. 기타곡은 그의 위대한 작품 리스트 중에서는 미미하게 보이나 언제나 유닉크한 미(美)를 높여 현대 기타음악의 귀중한 레파트와로써 애주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기타곡중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1908~1912년에 지은 "Suite populaire bresilienne" 와 1920의 Choro no.1 1929년 파리에서 작곡한 "12 Etudes"라는 작품. 1940년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쓴 "5 Preludes"로써 이 작품들은 연주자로 부터 최고수준의 기교적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의 다른 작곡가에 비하여 기타의 성능을 독특하게 살려서 연주자와 청취자 양편에서 모두 풍부한 음악적 아름다움을 마련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와 친교가 깊은 탁월한 연주가 세고비아는 연습곡집을 스카를랏티와 쇼팽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양손의 연주기법을 발전시키기 위해 정말 중요하고 더불어 연주곡으로서도 지속적인 심미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보내온 빌라-로보스의 기타를 위한 협주곡의 초연에도 힘썼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폰세의 여성적 작품에 대조되는 남성적인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항상 굵은 선과 가냘픈 두개의 선이 조직되어서 열정과 감미로움을 주는 그의 곡상은 엄밀한 규칙이라기 보다는 즉홍적인 남미의 리듬과 함께 그의 작품의 특징으로 이루고 있다. 또한 2개의 조성으로 한개의 작품이 짜여지거나 남성적인 면과 여성적인 면을 교차시키는 3부 형식과 같은 곡을 보여주고 있다. 전주곡 다섯개는개개의 특성이 뚜렷한 곡이고 그 표현하는 기법이 다양해서 그 어떤 기타곡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받게 되는 곡이라 할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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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노 토로바

Federico Moreno Torroba(1891)

부친은 유명한 오르간주자로 그의 지도하에 음악생활을 시작한 Torroba는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마드리드 왕립 콘세르바토리오에서 수학했다. 알베니스, 그라나도스, 팔랴, 튜리나 등 스페인의 많은 작곡가들이 프랑스에 유학하여 대성하였으나 토로바만은 젊은 시절 프랑스에 가지 않았다 한다. 그는 스페인에 머물러 작곡에 열중하였는데 처음 오케스타라곡을 많이 써 스페인 독특한 오페레타, 즉 [사루스에라]같은 작품은 많은 관심을 끌었으며 [뒷골목 처녀] [가라바의 여자와 몬테가르메로] 등이 그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타를 갖고 있었으나 1920년에 처음 세고비아의 연주를 듣고 세고비아를 위하여 곡을 쓰기 시작하였다. 세고비아 자신도 토로바를 자기에게 협력해주며 레파토리를 넓혀준 최초의 작곡가였다고 말하고 있다. 토로바의 곡에는 Sonata, Concerto와 같은 형식악도 있으나 그와 같은 어려운 곡보다는 스페인 무곡과 민요를 주제로한 것중에 보다 좋은 작품이 있다. 그는 맹인 작곡가 로드리고와 함께 만든 2막 오페레타 [푸른 악마(Elduend Azul)]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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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 타레가

Francisco Tarrega Eixea (1852 ~1919)

기타는 악기사상 가장 오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가진 발현악기이며 비엘라(Vihuela)→류트(Lute)→기타(Guitar)의 과정을 거치면서 개량, 보급되어 16세기경부터 기타음악은 시인 에스피넬(V.Espinel), 의사 아마트(J.C.Amat)에 의하여 발전되었고, 코르베타(F.Corbetta), 산즈(G.Sanz), 드.비제(R.de Visee)등으로 더욱 찬란한 전고전시대를 형성하였으나 바이올린 등 궁현악기의 발달로말미암아 기타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모레티(Moretti), 아구아도(D.Aguado)등에 의하여 기타음악이 재현되면서 소르(F.Sor) 쥴리아니(M.Giuliani), 카룰리(F.Carulli), 카르카시(M. Carcassi)등이 계속 출현하여 기타음악은 제1기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황금기이후 19세기로 접어들면서 피아노의 발달과 오케스트라의 확대, 바그너에 의한 오페라의 부흥으로 기타음악은 역사상 가장 쇠퇴현상이 일어나면서 기타는 단지 노래와 춤을 위한 반주나 일반 대중들의 오락악기로서 다루어져 왔다. 예컨대 슈베르트는 피아노가 흔치 않았던 시절에는 가곡의 반주로 피아노 대신 기타를 대용으 쓰곤 했던 것이다. 그 후 많은 관심있는 음악가들이 기타의 연주법의 개발에 우선적으로 주목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타는 대규모 연주홀에 부적합하다는 근본적인 단점을 갖고 있었으며 기타 음악의 작곡도 그 기술적인 화려한 면에 늘 묶여 깊이 있는 곡이 나오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이때 스페인에서는 현대 기타음악의 시조이며 기타의 로만시대를 장식한 거봉이며 기타의 [사라사테]라는 절찬을 받은 프란체스카 타레가(Francisco Tarrega Eixea)가 1852년 11월29일 스페인의 바렌시아주 카스텔론의 빌라레알에서 한 가난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타레가는 8세 때 맹인 기타리스트인 마누엘 곤잘레스(M.Gonzales)에게 최초로 기타지도를 받고 이어 훌린안 아르카스(Fulian Arcas), 토마스 다마스(T.Damas)에게 사사하였다. 타레가는 한 후원인의 도움으로 바렌시아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그가 사망한 후에는 브리아나로 가서 기타교수 생활로 가난하게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던 중 브리아나의 재벌을 만나 마드리드 국립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었고 1875년에는 콩쿨에서 1등을 획득했으며 피아노, 바이얼린족곡에서도 우수한 성적을얻었다. 그 후 타레가는 기타리스트로서 마드리드에 데뷰이래 스페인은 물론 런던, 파리, 스위스 등을 연주 여행 했으며, 기타의 "사라사테"라는 절찬을 받았다. 그는 기타에 관한 일관된 애정을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피아노를 공부한그가 기타에전념하게 된 것은 마드리드 음악원에 입학하고 부터였다. 기타의 어떤 모습도 타레가가 이 악기로부터 회의를 품도록 만들지 못했다.마드리드 국립음악원을 졸업한 타레가는 그곳 알함브라극장에서 기타연주회를 성공적으로 가졌으며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등 전국 주요도시의 순회 연주회에서 타레가 특유의 신선하고 독특한 연주를 하여 절찬을 받았다. 1881년에는 파리, 런던등지에서연주, 귀국후에는 스페인 전역에 걸쳐 연주여행을 가졌고 결혼하여서는 바르셀로나에 정주하였다. 타레가는 겸손, 온화, 학구적인 성격으로 그는 화려한 스테이지에서 멀리하는 한편기타 예술의 탐구를 위한 엄격한 수도자의 생활을 하였다. 타레가가 이룬 많은 업적 가운데 일부는 기타로 하여금 그 소리가 더욱 맑게 울려 퍼지도록 한 것과 기타의 울림에 풍부한 색채감을 준것, 그리하여 복잡한 악곡들로 기타로 연주할 수 있게 한 것 등이다. 이 모든 업적은 기타의 주법 개발과 기타의 디자인 혁신으로 인해 가능했다. 타레가는 음색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타레가가 기타를 위해 손을 댄 작품으로는 기타자체를 위한 오리지널 작품과 모차르트, 하이든, 슈베르트, 베버 그리고 바그너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편곡작품이 있다. 이 위대한 기타 음악가의 작품에서 우리는 대단한 개성과 스페인의 철저한 향토성을 감지하게 된다. 그는 투리나(Turina), 토로바(Torroba), 팔라(Falla), 빌라로보스(VillaLobos)로 이어지는 스페인 음악의 첫주자였다. 단순하고 명상적인 <전주곡>은 Lagrima(눈물)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마주르카의 두 제목은 여자의 이름을 나타내는데 그 특징은 틀림없이 음악에 비추어져 있는듯 싶다. "13개의 전주곡", "알람브라의 회상", "아라비아 기상곡" 등 작곡, 편곡을 합해 300곡이상의 걸작이 있다. 타레가는 젊었을 때부터 지병인 안질로 계속 번민해왔다가 중풍이 발작하여 1919년까지 고생하던 끝에 그해 12월 5일 바르셀로나에서 서거하였다. 타레가는 생애의 반을 손톱을 사용한 주법으로 연주했으나 자신의 손톱에 결함이 생겨손톱없이 연주할 수 있는 방법을 수개월간 연구끝에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 연주회까지 손톱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타레가의 직계문하이며 유일한 생존자 에밀리오 푸홀(E.Pujol 1886~ 스페인)은 타레가가 손톱없이 연주하게 된 원인은 타레가 자신의 손톱에 결함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살이외의 불필요한 물질을 사용하여 탄주하는 것보다 신경과 직결될 수 있는 살을 사용함으로서 감정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현대의 기타리스트중에서 타레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며 타레가가 존재하지 않았던들 지금의 기타는 진로가 어떻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타레 가는 종래의 기타연주나 작곡에서 철저한 개혁을 하였으며 아구아도 주법을 떠나 기타연주 기법의 백지상태에서 기타가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극한까지 연구 , 개척하였다. 왼손의 운지법, 오른손의 탄주법, 또는 음색, 음량의 풍부한 변화와 화음의 확충등, 수 많은 업적은 우수한 문하생들에게 계승되어 20세기 기타 르네상스를 낳게 하였다. 현재 타레가의 유해는 출생지인 카스텔론에 안장되어 있으며 프라아나에는 타레가 일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상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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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소르

Ferrnando Sor (1778-1839)

19세기초 고전파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카탈로니아 출신의 작곡가 겸 기티리스트였던 페르난도 소르를 들 수 있는데, 그의 작품은 그 시대의 다른 작곡가의 작품보다 오늘날 널리 연주되고 있다. 그는 본명이 호세 마카리오 페르난도 소르스 이 소르스 (Jose Macario Fernanado Sors y Sors)이며 1778년 2월 14일 (1880년 2월 17일생이라는 설도 있음)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출생하였다. 소르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초까지 활약한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이며 이태리의 쥴리아니 (M.Giuliani)와 함께 고전파의 쌍벽을 이룬 존재였다. 5세 때부터 작곡을 할만큼 신동으로 주위의 주목을 받을 만큼 천부적인 음악의 재질을 타고 났으나 그이 부친은 그가 군인이나 문관이 될 것을 기대했었다. 부친이 사망한 후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 소르는 카탈로니아의 몬토세라토 수도원 부속학교에서 바이얼린, 첼로, 화성학, 대위법 등을 공부하여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당시 유럽에서는 이태리 가극이 전성을 이루었고 오페라에 감명을 받은 소르는 최초로 [칼립소섬의 텔레마코]라는 오페라를 작곡하여 1797년 8월 25일 바르셀로나의 프린시플 극장에서 상영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는 20대 초반에, 고야의 후원자이기도 하였던 알바 공작부인의 가족으로 살았다. 그 뒤에는 당시 막강한 메디나셀리공작의 후원을 받게되었으며 오페라, 교향곡, 오라트리오, 3개의 현악4중주, 여왕봉 찬가, 피아노 또는 기타반주의 스페인 가곡등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편안했던 이같은 생활은 요셉 보나파르트가 스페인에서 괴뢰 정부를 세움으로써 끝나고 말았다. 소르는 그 당시 고야를 포함한 많은 스페인 들과 함께 프랑스 해방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지원으로 스페인의 왕위가 부활되자 현명한 소르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 망명하여 예술가로서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런데, 소르는 이 망명으로 인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더하게 되었다. 파리에서는 그의 오페라 "신데렐라 Cendrillon"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어, 1823년에서 1830년까지 무려 104회나 공연되었다. 그의 기타 연주도 런던과 파리에서 계속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로 인하여 기타의 대중적인 인기가 다시 살아났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그가 기타에 전념하게 된 것은 케루비니의 격려와 모렛티의 기타연주를 듣고 나서부터라고 하는데, 파리와 런던 등 유럽 각지를 돌면서 순회 연주회를 가져 절찬을 받았으며, 또한 기타 음악 교사와 발레음악 작곡가로서도 명성을 얻게 되었다. 1817년 소르는 영국으로 건너가 마침 기타음악의 개화기였던 런던은 소르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는 기타연주에 열광적으로 호응하였다. 또한 소르는 Op.1 6개의 위악곡을 1819년 출판하였으며 기타를 위한 작품활동은 물론 오페라 작곡과 상을 계속하여 호평을 받았다. 런던시대의 소르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가장 화려한 명성을 떨치는 시기였으나 경제적으로는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1823년 파리에서 신작 발레 [신데렐라]를 상연한 후 당시 연주가들이 동경하던 러시아의 여행에서 7현 기타를 사용하던 그곳에서 6현 기타의 묘기를 보여 절찬을 받았다. 페데르부르그 (레닌그라드)에서는 국왕 알렉산더 1세의 장례를 위한 장송 행진곡을 작곡하였으며 모스크바에서는 니콜라스 1세의 즉위축하를 위한 발레 [엘큐르와 옴파레]를 작곡 상연하였다.  

 그후 파리에서 런던, 다시 파리로 돌아와 많은 콘서트에서의 활약과 오페라의 작곡을 계속하여 그의 위대한 재능과 빛나는 업적을 남겼으며 만년에는 빈곤과 병고, 사랑하는 딸의 죽음 등으로 비참하고 불행한 생활끝에 1839년 7월 13일에 사망하였다.

소르는 '주제와 변주'형태를 좋아해서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수많은 노래를 주제로 변주곡들을 만들어냈는데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주제에 의한 변주곡도 그 유명한 예이다. <말보로우>변주곡에서 그는 고전적 전통에 의한 작법을 쓰면서 후기 고전주의와 초기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들의 스타일을 혼용하고 있다. 소르가 영국에 거주하는 동안 쥴리아니와 예술적 대립, 즉 소르의 우아하면서도 밝은 대위법적 악풍과 쥴리아니의 호화스러우면서도 직선적인 악풍으로 청중들까지도 두 파트로 분리 시켰다. 소르는 아구아도(D.Aguado 1784~1849 스페인)와 깊은 우정을 나누면서 한때는 수년간 동거도 하였으며 서로의 예술을 깊이 연구하였다. 아구아도의 손톱을 사용한 주법에 반하여 소르이 손톱 없이 하는 연주로 상반된 주법을 사용하였으며 서로 존경하며 우의를 두텁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소르는 두사람을 위한 연주회용 2중주곡인 [두 친구]를 작곡하였으며 이곡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계적 기타리스트들에 의하여 자주 연주되고 있는 명곡이다. 그의 많은 교육적인 작품은 기타의 연주 수준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쓰여졌으며, 매우 흥미롭게 쓰여진 그의 교본은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영어로 번역되었다. 그는 교본에서 기타의 기술적인 면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손톱의 사용이 편하다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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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란죌셔

(Goran Sollscher)

괴란 죌셔는 1955년 스웨덴 출신의 기타리스트이다. 그는 1978년 열린 20회 파리 국제 기타 콩쿠르에서 직접 고안한 11현 기타를 가지고 자유곡으로 바흐의 'Prelude-Fuga-Allegro, BWV 998"를 연주하여 20회 파리 콩쿠르를 석권하였는데, 그가 연주한 이 곡은 청중을 완전히 압도하는 연주로 기교와 음악성 모두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여 많은 기타 팬들은 그의 바흐연주에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된다.그의 연주는 대개 그가 고안한 11현 기타로 연주되다. 이것은 그가 파리콩크르에서 우승한이래 많은 사람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11현 기타는 스웨덴의 기타 제작자인 게오르그 볼링이 제작한 것으로 기본 조현법에 있어서부터 다른 다현 기타와 틀리다고 하는데 그것은 보통 기타 보다 3도 높게 조현되며 7번-11번현은 반음계로 진행되어 조율된다고 한다. 그리고 연주는 7번 현까지는 실제적으로 줄을 눌러 연주하는 반면 그 위의 줄들의 개방현만으로 연주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의 11현 기타는 왼손의 부담을 줄이고 양질의 저음을 얻을 수 있는 이점외에도 르네상스 류트나 바로크 류트를 위한 작품도 별다른 수정없이 연주를 할 수 잇다고 한다. 그러나그의 연주가 11현 기타에만 한정되는 것만이 아니고 6현 기타를 사용하여서도마찬가지로 뛰어난 연주를 보여 준다. 현재 괴란 죌셔는 독일 등 지에서 아주 뛰어난 연주가로 평가 받고 있다. 그의 음악은 고전적인 곡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근래에 '기타로 연주한 비틀즈'라는 음반을 내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는데 최근의 마누엘 바루에코와 함께 비틀즈를 클래식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음악의 지평선을 확장시키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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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스 세고비아

(Andres Segovia,1893) 

많은 기타리스트의 이름 중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안드레스 세고비아는 1893년 2월 17일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태어나서 1987년 마드리드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기타의 선율을 좋아했고 10세부터 독학으로 기타를 공부하여 기타를 시작한 지 4년만인 14세에 그라나다에서 데뷔하고,  1916년 마드리드의 아테네오 극장에서 정식 데뷔한 이래 1918년 중남미 순회,1924년 파리 데뷔 등 구미의 여러 나라로 연주여행을 하면서 기타 음악의 보급에 힘썼다.

그는 기타의 약점인 작은 소리를 극복하기 위하여 손톱과 살을 적절히 사용하는 주법을 개발하였고, 후에 많은 기타리스트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의 업적은 연주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많은 현대 작곡자들에게 자극을 주어, 많은 기타곡을 작곡하게 하였으며, 이는 현재 기타 레퍼토리 중에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세고비아 자신도기타를 위한 작품으로 "5 Anecdotes", "Estudio sin Luz"등의 작품을 클래식 기타의 레퍼토리로 확장시켜 기타의 연주회용 독주 악기로서의 우수성을 널리알렸다. 세고비아는 원곡을 살리면서 기타의 분위기와 이에 맞도록 재구성하는데 능했다. 그 중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D장조 중 샤콘느의 편곡은 백미로 꼽히는데, 세고비아 자신도 자신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에 하나가 샤콘느를 편곡하여 초연하였을 때라고 회고한 바 있다. 20세기 기타리스트 중에 세고비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세고비아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이는 현재 유명한 연주자들이 거의 세고비아에게 배운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 증명해 준다. 세고비아의 연주는 상당히 주관적이어서 개성이 강하고 낭만적이며 소리는 대체적으로 무겁다. 그의 음색은 보통 굵고 풍부하여, 잦은 비브라토의 사용으로 소리에 윤기를 띠기도 한다. 또한 그는 알아이레 주법을 사용할때는 살끝으로 줄과의 잡음을 최소화하며, 아포얀도에서는 살과 손톱을 동시에 탄현에 이용하여 부드러운 소리를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레코드는 1952년부터 1972년까지의 SP녹음이 일본 MCA와 미국 MCA에 의하여 CD 16개분의 전집으로 나와 있는데, 이 중 1957년까지의 연주는 Mono로 연주된 것이다. 이외에도 몇장의 음반이 EMI레이블로 소개되었다. 모두 그의 섬세하면서도 낭만적인 소리의 깊은 호소력을 실감할 수 있게 해준다.

크라이슬러는 "세계에는 참으로 위대한 현악주자가 두명있는데 ... 이들은 카잘스와 세고비아이다."라고 말했다. 세고비아가 한말 중에 가장 인상깊은 것은 '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보다 감동을 주는 것이 더 좋다'

세고비아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금세기 또 한 사람의 유명 음악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기타소리는 작지만 멀리까지 울린다고 했던 스트라빈스키의 말은 맞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세고비아 본인에게 꼭 맞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어떤 악기 하나에서 어떤 연주가 한 사람이 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루어낸 것이다.

현대의 연주회 악기로서의 기타는 세고비아가 개발해내기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었다. 그리고 매번 새로운 연주회마다 열성적인 젊은 기타리스트들의 새로운 이름이 등장하게 된 것도 연주가로서, 편곡자로서, 또 교사로서 그가 이룬 뛰어난 업적들의 덕택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특히 바하 편곡자였고 잘 알려지지 않은 기타음악을 발굴해 내는 탐험가였으며 당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그를 위해 곡을 쓰게 함으로서 기타리스트들의 연주레퍼토리를 막강하게 한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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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슈베르트

Franz Schubert (1797-1828)

1797년 1월 31일 오스트리아 "윈"에서 출생, 1828년 11월 19일 31세의 일기로 "윈"에서 작고한 도위치 로만파 초기의 대 작곡가 이다. 처음에 바이올린을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형에게 배웠으며 성악, 올겐, 콘트라 베이스 등을 당시 교회의 합창 대장 이었던 리히텐다르에게 배웠다. 1816년경 슈베르트는 시인이며, 기타 연주에 우수 했던 케르나로 부터 기타에 대한 최초의 감명을받았다. 그가 기타를 좋아 하게된 이유로는 그 자신은 물론 친구의 대부분이 피아노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작곡의 대부분도 기타로 했던 것이다. 슈베르트는 생활이 빈곤하여 방랑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는 항상 책과 노트와 기타이외 가구라고는 별로 없었다. 그의 작품중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아집 처녀"를 비롯하여, 가곡의 대부분의 반주는 기타 반주로 썼다. 또한 슈베르트는 현악기 제작가 슈우타우와 궁주(弓奏) 기타를 고안 제작하여, 1824년에 "A단조 소나타"를 작곡 하였다. 이 곡을 일명 "알페지오네 소나타"라고 부른다. 또한 슈베르트의 유일한 실내악 작품인 "기타, 플루트, 비올라, 첼로를 위한 4중주 G장조"는 그의 유일한 실내악 작품으로 전 5장으로 된 일품이다.그가 사용한 기타는 전부 3개이며 그 중 1개는 슈베르트 박물관에, 1개는 "윈"의 후란코 바르가 또 1개는 "리하르트 슈미트"의 소장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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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니코 스칼라티

Domenico Scarlatti (1685~1757)

J.S.Bach와 동시대 작곡가로 나폴리 오페라계의 중심 인물인 알렉산드로 스칼라티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에 의해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을 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유럽음악의 중심부로 특히 나폴리, 베네치아, 로마가 중심지였다. 유럽 각국의 오페라극장 은 이탈리아 가수와 지휘자가 독점하고 있었고 궁정은 이탈리아 연주와 교사가 독점하고 있었다.

스칼라티도 국내에서는 물론 34세 때에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궁정 쳄발로 주자, 44세 때에는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음악교사로 있었다. 쳄발로 주자로는 유럽에서 제1인자로 오르간과 쳄발로 연주에 능했던 Handel과 한때 경합을 겨루었다. 쳄발로 음악을 젊은시절부터 쓰기 시작하여 545곡의 소나타를 작곡했다. 이 소나타 형식은 후에 모짜르트의 소나타에 많이 사용되었고 이탈리아 소나타라고 하는 하나의 형식을 낳았다. Segovia에 의해 그의 소나타가 새로운 생명을 부여 받음으로써 그의 545곡의 소나타가 기타계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이 곡은 기타곡으로는 참으로 잘 어울리는 곡으로써 리드미컬하면서 밝은 느낌의 곡으로 연주에 있어서도 큰 무리가 없는 곡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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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사티

Erik Satie(1866 ~1925프랑스)

근대 프랑스 음악의 지도자격인 E.샤티는 1866년 5월 17일 융플래르에서 해운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어머니가 별세한 후 1878년 12세때에 파리로 이주하여 그해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다. 그는 학교의 아카데믹한 교육과는 잘 어울리지 않아 도중에 그만두고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였다. 1887년 최초의 피아노곡집을 출판했으며, 1890년에는 調表와 마디줄을 폐지한 3곡의 [그노시엔(Gnossiennes)]을 작곡, 점차 특수한 악풍으로 파리에 알려지게 되었다. 1890년 그는 드뷔시와 알게되어 그에게서 얼마간의 영향을 받았다. 그후 작곡을 계속하면서 1905년 댕디가 주관하는 스콜라 칸타룸에 입학하여 루셀에게서 대위법을 배웠으며, 1909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911년 라벨의 주선으로 독립음악협회에서 "사티의 밤"을 개최한후 점차 유명하여졌다. 그는 점점 기묘한 제목을 붙인 피아노 小品들을 多作하였는데, 1911년에 [말의 옷차림으로(En Hibit de Cheval)],[엉성한 진짜 전주곡(개를 위하여; Veritables prelues Flasques-pour un chien)],[바싹마른 태아(Embryons Dessches)],[한세기와 순간(Heures Seculaires et Instantanees)]등 유우머러스한 반면 서정미와 고전적인 맛이 넘치는 곡들을 썼다. 1915년 그는 낭만주의 게르마니즘을 배격하고 간단명료한 객관주의 미학을 주장하였다. 프랑스의 6인조는 그의 가치를 발견한 이후 그를 정신적인 아버지라고 불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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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파르 산스

Gaspar Sanz(1640 ~1710)

Robert de Vise(프랑스, 1650경 - 1725경), Fransico Corbeta(이태리, 1612경 ~1681), Sanz를 일컬어 전고전시대 (前古典時代)를 장식한 기타의 3대 거장이라 부른다.

Sanz는 스레인의 가란다에서 태어나 살아망가 대학에서 신학학위를 얻고 이태리에 건너가 레리오 고리스다에게 기타를 배웠는데 그 당시 이태리는 기타음악의 전성시대였다. Sanz는 나폴리 음악교회의 오르간주자인 크리스토 바루.갈리산에게 오르간 연주법과 음악이론을 배웠으며 귀국 후에는 3권의 5현 기타책을 출판하였다. 제1권은 1674년 [기타의 理論과 奏法]에 곡집을 첨가한책으로 출판되었다. 그중에 e단조의 조곡이 몇해전 파리 국제기타 콩쿨의 과제곡으로 나타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Sanz의 곡은 de Vise의 곡과 같은 5현 기타용으로 되어있어서 현대기타의 제6현은 사실 사용하지 않아야 하지만 E. Pujol( 스페인 태생 Vihella주자이며 기타리스트. 비엘라, 류트음악을 기타곡으로 옮기는데 공헌하였고 세계적 기타의 역사가로 권위를 갖고 있다.)의 편곡은 현대기타의 레파뜨와로서 제6현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 훌륭한 것이며 세계 기타리스트의 애주곡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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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로 일가

Los Romeros (1918)

  로메로 일가를 기타계에 있어서가장 유명하고도 위대한 기타 가족이라는데 이의를 제게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 가족은 아버지 셀레도니오 로메로를 비롯하여,장남인 셀린, 차남인 페페, 막내인 앙헬과 앙헬의 아들인 리토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정상급 연주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사중주, 트리오 듀엣, 솔로 등의 여러 형태로 댜양한 활동을 보여 주고 있는데 특히 그의 가족은 로스 로메로스(Los Romeros)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1957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이민을 한후 그들의 미국에서의 첫 공개 무대출연은 1961년이었고 그로부터 매년 100회에 가까운 연주를 하여 왔다그들은 셀레도니오를 비롯하여 셀린, 페페, 앙헬로 구성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플라멩고만을 연주하였으나 현재에는바하와 비발디로부터 집시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그들의 즉흥 연주는 그 누구도 따를수 없는 솜씨로 인정되고 있다. 그들의 앙상블은 완벽함을 보여 주는 동시에 개개인의 기량 역시 여느 연주자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로드리고가 1967년에 '4대의 기타를 위한 안달루시아 협주곡'을 작곡, 헌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들의 연주 곡목은 스페인의 현대 작곡가인 로드리고(Joaquin Rodrigo)는 그들을 위하여 「4개의 기타를 위한 협주곡」을 작곡하여 주기도 하였다.  로메로 일가의 아버지인 셀레도니오 로메로는 작곡도 뛰어나서, 페페나 앙헬이 자주 연주하는 '말라게냐', '탱고 안젤리타', '안달루시아 조곡' 등은 그의 작품이다.  첫째인 셀린 로메로는 로스 로메로에서 가족을 서로 융화시키고 이끌어 가는데 능하고, 둘째인 페페와 셋째 앙헬은 연주력이 뛰어나다, 특히 페페 로메로의 연주는 이미 클래식 기타의 대가로 손꼽힐 정도의 기량을 가지고 있다. 페페 로메로는 아버지와 함께 세빌리아의 로페 데 베가(Lope de Vega)극장에서 데뷰하였다. 그 후 1960년부터 현재까지 미국과 유럽등을 연주여행하고 있고, 현재는 남 캘리포니아 대학 기타 주임교수로 있다. 또 로드리고는 페페를 위하여 '축제 협주곡'을 작곡하여 페페 로메로가 초연하기도 했다. 페페의 연주는 상당히 쉽게 구할 수 있는데, 그는 '플렌트 주법'이라는 주법을 사용하여, 강력하고 명쾌한 연주에 다이나믹하고 경쾌한 음색의 아포얀도를 구사한다. 앙헬 로메로는 바로크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새대 음악에 대한 해석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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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퀸 로드리고

JOAQUIN RODRIGO (1902) 

기타아를 위한 <아란훼스 협주곡>를 내놓아 세계에 이름을 떨친 화퀸 로드리고는 1902년 바렌시아 근처인 사훈토에서 태어난 스페인 음악가이다. 3살 적 장님이 된 그는, 어려서부터 바렌시아 음악원의 후란시스코 안티오크에게 작곡법을 배웠다.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유럽여러나라를 여행한 직후 작곡한 그의 첫 데뷰곡인 교향적 스케치<홍굴라레스>는 1924년 바렌시아 교향악단이 초연해 호평을 받았다.1927년 파리로 간 로드리고는, 뒤카에게 작곡법을 배우고, 화야와 친해졌으며, 음악의 필수 동반자인 터키 피아니스트 캄히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후 모리스 엠마뉴엘과 앙드레 삐로에게 음악학을 계속 공부한 뒤, 1939년 스페인으로 돌아와 <아란훼스 협주곡>을 작곡, 사인스 델 라 마사에게 헌정.초연해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로드리고는 기타아를 연주할 줄은 몰랐지만, 이 악기의 독특한 작곡기법으로 <즐거운 소나타>와<스페인 소나타>등을 작곡했고, 매우 포플러한 <토니딜라와 환딩고> 2중주곡과 노래와 함께 연주하는 <휠리아스>.<카나리아스>.<3¡Æⓒøac>등이 유명하다. 더우기 로드리고의 기타아 협주곡들은 현대 세계에서 최고 정상급으로 꼽히고 있는데, 그 까닭은 음량이 적은 기타아일지라도 특성을 잃지 않고 오케스트라아와 멋진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의 작곡기법은 스페인 특유의 리듬과 민요와 카덴짜를 바탕으로 하지만, 프랑스 인상주의에 기우는 형틀과 신고전적인 화성과 가락, 그리고 현대 불협화음을 사용함으로써 18세기 이래 스페인 국민음악과 선배들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국제성을 띄워 풍융한 음악으로 빛을 발하며 치달았다. 1954년에 작곡된<어느 귀 신사를 위한 환타시아>는 세고비아에게 헌정.연주된 곡이지만, 17세기 선배대가 가스파르 산스를 위해 쓴 작품으로도 보고 있다. 한편 성음에서 내놓은<축제 협주곡>도 유명하며, 기타아와 바이올린을 위한<여름 협주곡> 그리고 첼로를 위한<경쾌한 풍의 협주곡>도 잘 알려진 곡들이다.

<기도와 춤>은 1962년 프랑스국영방송국 음악콩쿨에 11등을 한 곡으로, 원래 화야를 존경해 작곡한 찬가인데 알릴리오 디아스에게 헌정.연주함으로써 인기를 현대기법의 명곡이다. 무조의3/4박자 하모닉스주법의 전주로 시작해 장식음과 아르페지오 (분산화음)와 트레몰로주법이 번갈아 교체되는 매우 신비롭고 명상적인 곡이다. <저기 목동들이 가네>와 <산타아고 데 콤포스텔라 길을 따라>는 <3¡Æⓒøac>가운데 2곡이다. 먼저 <저기 목동들이 가네>는 크리스마스 캐롤곡상으로, 같은 음높이로 되풀이 되는 오스티나토 베이스주법과 인상적이고 몽롱한 조성은 로드리고의 작곡 특징을 엿 볼수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걸음따라>는 스페인 북서지방에 위치한 옛도시의 희미한 추억과 반항을 음미하여 얻어진 작품이다. 이 도시는 한 때 라 코르냐주의 수도였고, 현재는 카토릭 주교관구와 대학교가 있으며, 세고비아의 여름 기타아 학교로 유명한 도시이다. 또한 중세 시절엔 사도 성 야곱의 무덤이 있다고 믿어, 예루살렘과 더불어 제일의 성지순례지로 이름을 떨쳤다.

<3¡Æⓒøac>은 <환당고>와 ,<파스칼리아>와 사파이테아도로 이루어진 곡인데, 1954년 <어느 귀신사를 위한 환상곡> 작곡 몇주 전에 완성된 작품들이다. 첫번째 <환당고>는 18세기경으로 부터 스페인 남부 안다루시아 지방의 후라멩꼬 민요와 춤곡으로, 3박자와 6박자를 지녔다. 이곡은 등불 킬 무렵에 많이 불려지고, 느린 춤곡에 때로는 발라드풍의 노래도 곁들여지는경우도 있으며 가끔 끝부분에 가서 치달아 격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 환딩고는 3곡의 소품가운데 가장 유명해 자주단독으로 연주하는데, 중간 트리오 부분을 제외하고는 보통 테마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세빌랴나스>영향을 받은듯 매우 복잡한 악기와 춤곡멜로디 스타일을 지녀 18세기 마드리드 특유의 경쾌함과 화려함을 지녔다. 두번째 <파시칼리아스>는 샤콘느와 비슷하게 느린 3박자의 춤곡이다. 마지막<사바테아도>는 스페인 남쪽 안다루시아의 3박자를 지닌 춤곡이다. <헤레스의들판>도 스페인 헤레스의 정경묘사곡으로, 로드리고 독특한 기법으로 풍토내음이 물신 나는곡이다. <옛사라반다>는 스페인의 유명했던 비웰리스트 루이스 밀란은 <엘 마에스트로>를 출판해 비웰라를 위해<환타시아>. <사랑노래>. <소네트>. <로망스>등 그 무렵 스페인 왕조의 우아함을 연상케 하는 곡을 많이 작곡했으며, 까스띠아에 신사를 위한 학교도 세운 멋장이였다. <즐거운 소나타>는 로드리고가 즐겨 작곡했던 3악장 형식으로 <스페인 소나타>와 같이 기타아로 된 명곡이다. 이 곡은 날카로운 불협화음으로 매우 유모스러운 도메니코 스카를랏타 음악을 다시 부르는 듯 하나, 궁극적으로 볼 때 최근의 근대 클래식 소나타 형식을 구하고 있다. 또한 로드리고는 여러 악기-피아도,바이올린.첼로등-로 바꾸어 많은 소나타를 작곡했다.

<헤네랄리훼 곁에>는 스페인의 여러 풍경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아름다움을 묘사한 곡이다. 훼네랄리훼는 알함브라궁전과 같이 연결된 신비스러운 정원으로, 누구나가 다 스페인에서 제일의 명승지로 꼽고 있다. 향기롭고 살랑거리는 듯한 미풍과 멀리서 들리는 은은한 교회 종소리와 함께 정원의 꽃들은 주위를 막아주는 상록수들 덕으로 그들의 편안한 안식처에서 너울거리며 춤추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안락하고 정취가 깃든 분위속에서 기타아는 한껏 그 본연의 넋을 울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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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퍼셀

Henry Purcell(1659 - 1695)

 

17세기 후반에 단음악을 사용한 오페라가 나타났는데 그것을 완성시킨 사람은 영국사상 최대의 음악가이며 오페라의 대가인 퍼셀이다. 그는 36세의 젊은 나이로 생애를 마쳤는데 그 이후 영국 극음악의 장래는 희망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바로크 중기(中期)에 있어서 영국최대의 작곡가로서 본격적인 대위법적인 기법에 영국과 프랑스 음악의 영향을 받아 영국음악에 동화시킨 천재적인 이 음악가의 특성은 자유분방함에 있으며 아름다움과 영국풍의 성격이 풍부하게 발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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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오 퓨홀

Emilio Pujol (1886)

1886년 스페인의 그라나딜라에서 출생한 푸홀은, 현대 기타아음악의 시조인 타레가의 직계문하인중 유일한 생존자로서, 그리고 권위있는 가타아 음악역사가로서 독보적존재이다. 어려서부터 반두리아를 배우고,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4살때 그가 소속한 합주단이 파리에서 연주하였을때, 소년 푸홀의 뛰어난 솜씨가 프랑스 대통령의 관심을 끌었고, 이것을 계기로 타레가의 문하생으로 기타공부를 하게 되었다. 1912년 런던 베히스타인홀 연주회의 대성공을 깃전으로 하여, 14년의 영국 연주와 19년의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의 연주회 등, 세계적인 대가로서의 풍모를 과시 하였다. 22년 파리로 이주한 후 베를린과 로텔단의 연주는 특기할만 하다. 47년 리스본 국립음악학교 교수를 거쳐서, 이탈리아 기지 음악원에서 기타아 음악사를 담당하였으며, 현재 모교인 바르셀로나 음악원의 교수로 있다.(기지음악원 기타아과는 65년 기지 백작 사망후 폐쇄되었음) 푸홀은 타레가의 영향을 받아 오른손 손톱을 사용하지 않는점이 현대의 다른 기타리스트들과 다르다. 그리고 푸홀의 최대 업적은 전고전과 그 이전의 기타아 음악의 연구와 현대에의 부활에 있다. 작고한 부인 마틸드 게르바스는 플라멩코 주법의 명수로서, 팔랴의 오페라 "꿈없는 인생"중에서 "스페인 무곡"과 무용 조곡 "삼각모자"중의 "실내의 춤"이 부부 2중주의 레코드로 나와있다. 푸홀의 레코드중에는 비엘라의 연주로 된것도 있는데, 이것은 마리아 시드의 노래, 루이스 밀란과 펜사드르 등의 16세기 스페인 가곡의 반주음악이다. 작품으로는 "로맨스", "세실리아", "요람의 노래" 등이 유명하며, 밀란, 무다라, 나르바에스, 산스, 비제, 바흐 등 고전을 비롯하여 알베니즈, 그라나도스, 팔랴 등 근대 작곡가의 작품에 이르는 폭넓은 편곡 작품과 "타레가의 주법에 의한  합리적 기타아교본" 등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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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프레스티&알렉산드르 라고야

(Ida Presti & Alexandre Lagoya)

1924년 프랑스 출생. 6세때부친에게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여 10세때 파리에서 첫 리사이틀을 가져 천재 소녀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녀가 13세 되던해 (1938년)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죽고 어머니와 3살된 여동생을 돌보면서 생활을 꾸려 나가야만 했다. 그후 전쟁과 힘든 고난의 순간들을 겪었던 그녀는 그때를 결코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1943년 그녀가 19세때 Henry Rigaud와 결혼한후 1년뒤에 딸 Elisabeth를 낳았다. 그 시기에 그녀의 어머니는 두번째 결혼을하여 Gina를 낳아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의 남프랑스에 살았으며 가끔 정부기관을 위한 연주회를 준비하였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정기적인 연습은 하지 못하였으나 종종 새벽 2-3시까지 짚시 친구들과 기타를 치며 어울렸다. 또한,프레스티는 아주 맑고 고운 목소리와 초고음 소프라노의 음성을 지녔기에 그후 파리의 Gaveau홀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노래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악보없는 즉흥연주를 좋아하였으며 유명한 기타리스트 Alexandre Lagoya가 Sor의 연습곡중 하나를 특별하게 만든 곡의 세번째 멜로디를 즉흥적으로 멋지게 연주하여 라고야를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그후 알렉산더 라고야는 그녀에게 청혼을 하였으며 이중주 파트너가 되었다. 그들은 한때 솔로 연주를 뒤로하고 이중주 연주로 높은 활기를 보였으며 그 당시 그녀는   '형기리 여인', 변덕스런 연습곡' 등많은곡을 작곡하였다. 세계 제 2차 대전후 그녀 나이 20세때에는 놀랍게도 그녀를 `여성 모짜르트`라고 칭하였으며 프랑스,이태리,폴란드,독일,마르코,인도네시아 그리고 영국등지로 연주여행하였다. 그녀의 아랑훼즈 협주곡은 라디오 방송에서 즐겨 애용했다. 그녀는 화려한 독주자로 활동하던 30대 초반에 알렉산더 라고야와의 사이에 두번째 딸 Sylvain을 낳았다.

알렉산더 라고야와의 이중주는 역사적인 큰업적을 남겨 오늘날 '아사드 형제'등 많은 이중주단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녀의 교수법은 매우 열정적이었다. 마치 흐르는 샘과 같은 풍부한 상상력과 표현력을 배우는 학생들로부터 표출할 수 있도록 각자 알맞은 운지와 각 음절마다에 음악적 실험과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는 43세의 여생 가운데 33년 동안이나 전문 기타리스트로 지냈으며 그녀의 작곡, 작품들도 녹음,취입되었다. 우리는 그녀의 음악을 통해 기타음악 애호가가 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는 기필코 그녀를 위한 두번째 장례식을 치뤄야 할 것이다.  라고야는 이집트 출신의 기타리스트로서, 세고비아의 제자이다. 프랑스의 여류 기타리스트인 프레스티의 남편이기도한 라고야는 부부 듀엣 연주로 전설적인 명성을 떨쳤으며, 니스 음악원 기타과를 주관하며 많은 후진도 길러냈다. 1967년 4월 미국 연주여행 중에 프레스티가 급사한 후 지금까지 솔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세고비아의 애제자인 만큼 기교적으로 나무랄데가 없으며 지중해적인 명쾌성과 솔직함이 특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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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파크닝

(Christopher Parkening) 

 크리스토퍼 파크닝은 미국 출신의기타리스트로서 14살부터 기타를 시작했다.  그는 남가주 대학에서 첼리스트 피아티  고르스키로부터 음악의 해석에 대하여 배웠고 캘리포니아와  스페인 마스터 클래스에서 세고비아에게 배우기도 했다.

매년 약 90회의 음악회를 열고 있고,현재 미네소타 음대 기타과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기품이 느껴지는 연주를 한다. 놀라운 기량으로 종교적인 바탕을 가지고 연주하는 그는 BACH의 종교 곡에서 특히 좋은 해석을 보여준다. 그의 연주는  전반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와 잔잔한 비브라토 , 정감 있으면서도 절제하는 음색이 일품인데, 세고비아와 음악의 해석이나 음색 등에서 비슷한 면을 보이지만, 세고비아 보다는 약간 가벼운 음색을 가지고 있다. 음반중에서 'A Bach celebreation' 이나 'Parkening plays Bach'등을 들으면 바흐 등의 바로크 시대곡 뿜만 아니라 타레가나 망고레 같은 낭만적인 정서가 있는 곳도 완벽에 가깝게 연주하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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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로 파가니니

Nicolo Paganini (1782-1840)

10세기가 될 때까지 기타라는 악기는 적어도 스페인 바깥에서는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낸 좀 희귀한 악기에 속했다. 스페인에서 기타는 이미 16세기경에 국민적인 악기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밖의 나라에서는 보다 미묘하고 색채적인 류트에 밀려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가 어려웠다. 스페인에서도 르네상스및 바로크 시대를 살았던 이름 높은 음악가들은 기타보다 비후엘라(Vihuela)라는, 기타와 흡사하게 생겼지만 현을 더 많이 갖고 있는 악기를 선호했다. 비후엘라는 기타보다 민속악기라는 측면이 조금 더 강했다. 그리고 17세기경 프랑스의 루이 14세 치하에서 기타 음악이 유행했던 것은 다분히 일시적이고 소박한 이유에서 연원한다. 즉 귀부인들이 연가를 반주하거나 그 어떤 개인적인 감정을 털어 놓는 일에 기타를 좋은 반주악기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밖의 현악기들은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서야 일반의 관심을 끌 수가 있었다. 그런 시기에도 스페인과 이탈리아 에서는 기타 연주의 거장들이 속속 탄생했다. 어떤 악기에 대한 대중적인 흥미의 많고 적음은 그 악기를 위한 음악이 얼마나 많이 작곡되었나에 달려 있으며, 동시에 그 악기의 연주법이 조직적 체계를 이루고 있는지에 달려있다. 이를테면 만돌린의 예를 들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만도리도 아주 널리 퍼진 아마튜어 악기였다. 이 악기는 기타의 사촌쯤으로 여겨졌는데 위대한 니콜로 파가니니(Nicclolo Paganini)가 자기 아버지로부터 직접 배운 악기기도 했다. 파가니니의 집에 있는 악기로는 이 만돌린이 유일한 것이었다. 1795년, 파르마(Parma)로 간 파가니니는 알렉산드로 폴라에게 바이얼린을 교습 받는 가운데 기타라는 악기를발견했다. 바이얼린 교사 롤라는 학생들을 반주하는데 이 기타를 자주 사용했는데 나중에 파가니니도 그런 방법을 애용하게 되었다. 파가니니가 일찌감치 만돌린이란 악기에 눈을 떴기 때문에 나중에 기타를 본격적으로 다뤄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는 추론은 타당한 것이다. 파가니니는 결국 바이얼린의 대가(Guilio Regondi)나 루이지 레냐니(Luigi Lignani)등과 더불어 기타 연주에 있어서도 손꼽히는 전문가가 되었다. 정확히 말해 파가니니의 전 작품 중 65%의 작품에서 우리는 기타가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의외로 기타 독주를 위한 작품은 극히 적다. 파가니니는 기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기타를 사랑한다. 기타가 갖고 있는 화성 때문에... 어디로든 여행할 때 기타는 떨어질 수 없는 나의 벗이 된다. 작곡을 할 때 어떤 환상이나 악흥이 떠오르지 않으면 나는 기타를 손에 든다. 기타는 바이얼린이 해 줄 수 없는 어떤 화음을 내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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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리크 그라나도스  

Enrique Granados y Campina (1867 ~1916, 스페인)

  근대 스페인의 걸출한 음악가로서 알베니스와 함께 스페인 근대파 음악가들의 선두에서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는 당대의 명피아니스트였으며 마넹, 티보, 카잘스, 생상스 등과도 활발한 연주활동을 하였으며, 피아노 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여 "아카데미 그라나도스"라 칭하여 교사로서 교육의 선두에서 활동하였다. 그가 정작 작곡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18세기 스페인 화가 Goya의 그림에 의한 가그 [고예스카스(Goyescas)]로서 이다. 이것은 그가 같은 이름으로 되었는 피아노 곡집에서 소재를 얻어 만든 것인데, 1912년 피아노 모음곡 [고예스카스]를 써거 1914년에 파리에서 발표하여 크게 성공한 후 1916년 뉴욕의 메트로 폴리탄에서 이 작품을 상연하였는데 연주를 마치고 되돌아 오던 중 1916년 3월 24일 영국 해협에서 독일 잠수함의 포격 받는 바람에 그가 탄 세색스호가 침몰되어 1916년 3월 24일 부처가 함께 바다 밑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의 가장 대표작은 피아노를 위한 전4권 12곡의 [스페인 무곡집]으로 그중에 No.2, No.4, No.10을 기타로 편곡 소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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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로 쥴리아니

 Mauro Giuliani (1780 ~1840) 

고전파 음악의 또 다른 대표적인 음악가로는 이탈리아 출신의 마우로 쥴리아니(Maro Giuliani 1781-1828)가 있는데, 그는 바이얼린의 N. Paganini(1782 - 1840), 피아노 연주의 F. Liszt(1811 - 1886)에 필적하는 명성을 지닌 기타 연주의 대가였으며 F.Sor와는 3살의 차이가 있었지만 런던 음악계에서는 동시대의 라이벌이었다. 그는 1781년 보로니아에서 출생하여 1829년에 작고한 이탈리아의 기타리스트로서 스페인의 소르와 더불어 당시 가장 위대한 연주가 였다. 어려서부터 바이올린, 플루트, 기타아 등을공부 하였으며, 20살때에 이탈리아 제일의 기타리스트로 군림하였다.

그가 기타연주가의 대가로서 유럽전역에 걸친 연주여행을 처음 갖게된 것은 1800년경이었고 1807년에는 비엔나에 정주하였다. 비엔나에서 그는 슈베르트, 베토벤, 웨버, 훔멜과 같은 당대의 대작곡가들과 사귈 수 있었다. 안톤 디아벨리와는 특별한 친분을 가지고 함께 연주 여행을 다니기도 하였다. 베토벤은 자기작품 몇가지를 쥴리아니를 위해 편곡하여 1813년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 초연(初演)시 바이얼린이나 플륫 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악기로 반주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그곡들은 확실히 발표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823년 런던으로 건너가 연주했는데 거기서 그는 매우 유명해져서 런던에서 새로 발간된 한 기타연주 관계지는 그의 이름을 따라 [쥴리아니아드(Guilianiad)]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현재 아마 가장 많이 알려진 쥴리아니의 연주용 작품이라면 기타와 현악을 위한 협주곡 A장조 Op.30으로 이곡은 그가 작곡한 네개의 협주곡 중의 하나이다. Op.15"화려한 소나타" Op.71"3개의 소나티네" Op.69.70"가타아 콘체르트" 등의 걸작을 비롯하여 플루트, 바이올린의 작품, 그리고 기타아와 피아노를 위한 작품등 300여 곡이 있다. 그는 수백곡의 피아노 작품을 작곡했지만 거의다 없어지고 현재는 디아베리 왈츠를 주제로한 베토벤의 <33¡Æⓒøac>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작품 특성은 고전파의 정통적인 형식에 비엔나풍이 더해진 매우 맑고 유연성을 지니고 있다.그의 Sonata Op.15, C장조 Allegro 제1악장과 대서곡(大序曲) A장조에 있어서는 피아노 소나타와 유사한 소나타 법칙을 기초로 하여 작곡된 훌.스케일.피스(Full Scale Piece)가 그 특징으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쥴리아니의 고도로 발달된 기교를 필요로 하는 것인데 다이나믹(강약법)에 대한 구조적 감각의 세련도를 요구하고 있다. 대서곡(大序曲)은 단조로 엮어지는 짧고 느린 서주가 있는 뒤, 장조의 소나타 악장이 전적으로 전개되는 곳이다. C장조 부분의 Allegro는 슈벨트적인 음형으로 속삭이듯하며 바로 진행된다.

소르는 주로 파리와 런던에서 인기를 얻었는데, 반하여, 쥴리아니는 1806년에서 1819년까지 비연주회 평과 다른 음악가들 간의 교우 관계와 그의 생애에 대하여 광범위하고 흥미롭게 연구하여 학위를 받았다. 그 논문 제목은 "클래식 기타의 탄생과 마우로 쥴리아니의 생애와 그의 작품에 나타난 당시 비인의 기타계"이다. 쥴리아니는 소르보다 더욱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는데, 소르의 작품 번호가 70번에 이르고 있는 데 반하여 출판된 쥴리아니의 작품은 151번에 이르고 있다. 쥴리아니의 성격은 다소 낙천적 이었다고 생각되며, 그는 소르와 마찬가지로 가난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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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뉴엘 데 팔라

[Manuel de Falla 1876-1946] 

1876년 스페인의 카디스에서 출생하여, 1946년 아르헨티나에서 사망한 작곡가이다. 최초에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마드리드에서 페드렐에게 작곡을, 트라고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20세기 스페인 음악을 대표하는 스페인 최대의 작곡가인 그는 1910년대의 {사랑은 마술사}와 {삼각모자}등으로 각광 받기 시작하였으며 인상주의적인 수법으로 {스페인 정원의 밤}을 써서 크게 성공했고 인상파로 부터 신고전주의로 방향을 바꿨던 그는 스페인 국민주의의 원조인 페드렐에게 사사받으며 스페인 음악을 부흥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불러 일으키어 스페인 민족음악을 그대로 소재로 삼지않고 그것을 소화시켜 분위기를 더 높게 승화시켰던 세계적인 작곡가이며 피아노 연주자로서도 이름이 있던 인물이다. 중요한 작품으로는 오페라 "무상한 인생", 바레 음악인 "삼각 모자", "사랑의 마술사" 등이 있으며, 기타의 작품으로는 "드빗시"의 죽음에 바치는 "오메나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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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울랜드 버드 (1563-1626)

다울랜드는 영국은 물론 그 당시 유럽전역에서 류트연주의 최고 명인으로 이름을 떨쳤었다. 특히 그럴만한 까닭으로는 1579년 경에 외국으로 친성방문을 떠나는 사절단을 따라서 함께 여러나라를 방문하며 그의 류트음악을 들려주었던 문화 사절의 역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다울랜드는 오랜 여행후,84년에 귀국하여 88년에는 옥스퍼드대학에서 음악학사가 되는 영예까지 받았었다. 다시 음악의 순례를 떠났던 그는 94년에서 95년사이에는 베네치아와 피렌체에 머물렀었으며, 98년에는 덴마크의 왕 크리치스인 4세를 섬기는 류트 주자로서 8년의 세월을 보냈었다. 1606년에 런던에 돌아와서는 왕실부속류트주자의 지위에 머물렀다. 다울랜드는 문호 세익스피어와 동시대인으로서, 영국 엘리자베드 왕조의 찬란한 문화시대의 교양을 지닌 예술인이었다. 감미로운 선율과 울림이 큰 화성의 류트반주에 의한 가곡을 노래하는 가수로서도 명성이 높았던 그는 4권의 가곡집(순례의 위안) 외에도 80여곡의 노래로 가곡예술의 발전에 징검다리를 놓았다.(흘러내리는 나의 눈물)이라는 당시에 높은 인기를 얻었던 가곡을 기악합주용으로 편곡한 (눈물의 파반)은 학문적인 관점에서 고음악재현이 활발해진 오늘말 자주 연주되는 음악의 하나가 되고 있다.

'파이퍼 선장의 갈리아드'와 '엘리자베드 여왕의 갈리아드'는 그 당시의 센티먼트와 유머를 담은 곡으로 ,갈리아드는 16세기 행하여졌던 3박자의 경쾌한 춤곡이다.(존 랭턴경의 파반)은 느린 2박자춤곡의 우아함을 지닌 선율로서, 파반의 유래와 변천은 조금 복잡하다. 공작을 흉내내서, 위엄있는 모습으로 느리게 추어지는 이 무곡을 스페인의 기원으로 생각되고 있다. 종종 빠른 3박자의 갈리아드와 짝을 이루어 연주되는 경우가 있다. '탈리턴의 부활'과 '클립턴 부인의 정신'은 궁중음악 풍의 우아함을 담고 있다. 버드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도 역시 엘리자베드시대 왕조의 최대의 음악가였다. 탈리스에게 수학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탈리스와 함께 궁정예배당의 오르간 주자로 활동하는 한편 역시 탈리스와 함께 악보 출판에도 활발한 노력을 보여주었다. 영국 교회를 위해서 찬송가를 많이 썼던 버드이지만, 자신은 카톨릭 신자로서 카톨릭을 위한 미사곡도 많이 남기고 있다. 수록된 류트음악은, 버지널(16세기에 영국에서 유행되었던 쳄발로의 일종)의 특성을 류트 음악으로 옮기고 있었으며 또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영국 마드리갈의 개척자의 한 사람인 버드의 감각이 순수하게 담겨져 있다. '파반'과 '갈리아드'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류트음악내용을 들려주며, '나의 군주 윌로우비의 귀향'은 환영의 기쁨을 담은 밝은 선율로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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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디아벨리

Amton Diabelly (1781)

디아벨리라면 출판사 이름이나 피아니스트로 흔히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타곡도 많이 손을 댄 작곡가이다. 1781년 9월 6일 잘쯔부르크(Salzburg) 근교 마테시(Mattesee)에서 태어나 1858년에 작고한 그는 소년시절 미카엘 베른(Michaelbeurn) 수도원의 성가대에서 음악을 배운 후, 잘쯔부르크대성당에가 계속했다. 신부가 되는 것을 원했던 부모뜻을 따라 뮌헨의 라틴어학교에서 공부를 한 후 라히헨하슬라하(Reichenhaslach)수도원에 들어갔다. 미카엘·하이든(Michael Haydn)과 친해져 그에게 작곡 공부 및 여러 거취문제를 상의했다. 1803년 바바리아 수도원을 나와 속세로 탈속애 비엔나에 갔다. 비엔나에서는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에게 배우고 베토벤, 슈베르트 등과도 사귀었다. 피아노와 기타렛슨으로 생활을 하던중 카피(Cappi)를 만나 1818년 출판사를 설립, 1824년에는 독립해 단단한 기반을 닦았을 뿐만 아니라 돈도 많이 벌었다.

1807년 같은 나이 또래의 음악친구 쥴리아니를 만나 음악적인 친분뿐만 아니라 따뜻하고 뗄레야 뗄수 없는 긴밀한 우정을 나누었다. 그 무렵 기타는 왕궁의 높으신 어르신내들 앞에서만 연주를 많이 했고 대중들 사이에서는 반주구실 밖에 못했다. 쥴리아니가 새로 소개한 테르쯔(terz)기타와 피아노와의 2중주곡을 디아벨리는 작곡해, 대중들 앞에서 직접 연주함으로써 보급에 힘썼다. 쥴리아니의 <작품 30, 36, 37 협주곡> 연주 및 디아벨리 출판사에서 스코어 출판도 이 무렵이었고, 불우했던 기타리스트 들을 도움은 물론 출판도 많이 해주었다.

베토벤은 1823년 디아벨리의 왈츠를 주제로 하여 33의 피아노 변주곡을 작곡 하였다. 작품은 피아노곡 이외에 소나타, 기타와 피아노를 위한 2중주등 다수의 기타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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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도 카룰리

Ferdinando Craulli (1770-1841) 

나폴리에서 태어난 페르디난도 카룰리 Ferdinando Craulli (1770-1841)는 완전히 독학하여 연주가로서 이름을 날린 음악가이다. 그는 38세 되던 해 파리에 거주하였으며그 곳에서 많은 학생들과 사람들이 그의 비루투오스적인 자질을 보고 그를 따랐다. 그가 쓴 교본은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되었으며 모두 합쳐 350권이 넘는 출판물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그는 소르나 쥴리아니와 같은 수준의 음악가는 결코 아니지만 음악가로서의 성공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보통 수준의 아마추어가 즐겨 칠 수 있는 단순한 작품을 써서 당시의 대표적인 출판사에 의하여 쉽게 출판되었다.

카룰리의 작품에는 수 많은 독주용 소품 외에, 독주 소나타, 이중주 소나타, 수 많은 주제와 변주곡, 작은 오케스트라와의 협주곡과 "군대가 진군을 시작하다 The Troops Begin to Embark", "사나운 폭풍우 The Storm Rages" 등의 진기한 이름이 붙은 표제 음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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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 카르카시

Matteo Carcassi(1792-1853)

카룰리의 독보적인 지위는, 이탈리아 태생의 젊은이 마테오 카르카시 Matteo Carcassi (1792-1853)가 파리에 옴으로써 도전을 받게 되었다. 카르카시는 그 당시 이미 각지를 여행하면서 연주하는 비루투오스로 널리 이름이 나 있었으며, 출판사를 가지고 있던 메송니에 Meissonier와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인하여 그의 작품은 쉽게 파리 사람들에게 소개 되었다. 카르카시의 작품은 카룰리의 작품과 같이 단순하게 쓰여졌을 뿐 아니라, 카룰리의 작품보다 강한 선율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기타의 하이 포지션을 유용하게 이용하고 있다. 그는 또한 [윌리엄 텔 William Tell], [프라 디아볼로 Fra Diavolo] 등 당시 유행하고 있던 오페라 중에서 대표적인 멜로디를 편곡한 환상곡을 즐겨 출판하였다. 그밖에 당시에 이들보다 재능이 뒤떨어지는 두 명의 기타리스트가 출판계로 뛰어들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비인에서, 피아노와 기타 교사로 널리 알려진 안톤 디아벨리 Anton Diabelli(1781-1858)는 1818년, 피터 카피 Peter Cappi와 함께 카피.디아벨리 회사를 설립하였으며, 1824년에는 이 회사를 사들여 혼자 경영하였다. 그 후에 그는 슈베르트의 작품을 출판하면서 상류 음악계로 뛰어들었다. 그가 매우 유명하게 된 동기는, 그의 작품인 왈츠가 베토벤에 의하여 33개의 변주곡으로 작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수 많은 기타 독주곡은 주로 아마튜어를 위하여 쓰여졌으며, 그의 재능이 좀 더 잘 나타나는 기타 이중주곡이나 작은 실내악곡에 비하여 일반적으로 흥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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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 브라우어

Leo Brouwer (쿠바)

작곡가이자 기타연주가로서 쿠바에서 태어났다. 그는 1950년대부터 꾸준히 새로운 음향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성공된 특이한 작품을 써왔다. 그의 대표적인 곡은 [무용 찬가].[끝없는 나선계단].[특징있는 무곡].[3개의 스케치]등으로서 가장 현대적 수법인 조성의 복합과 탈피를 사용하는 전위물을 창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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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브림

(Julian Bream)

줄리언 브림은 1933년 7월 15일 런던태생의 기타리스트다.  특히 르네상스시대 류트음악에 꾸준한 관심을 보여온 그는 기타와 류트의양면에 걸쳐 대가의 솜씨를 보여준다.  어려서는 그의 아마추어 재즈기타리스트 인 아버지에게 배웠고 11세 때부터 러시아 기타리스트였던 알렉시스 체스나코프로부터 레슨을 받기 시작하여 12세에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주최하는 연주무대에 참가할 정도 로 기량이 향상되었다. 그 뒤 그는 기타리스트 협회장인 페롯에게러시아식 겸 이탈리아식 기타 연주법을 사사받게 된다.

1947년 세고비아는 런던 공연을 위해 영국에 와 있었고, 브림은 페롯의 소개로 세고비아를 만나게 되었는데, 세고비아는 그의 연주를 듣고 즉석에서 그에게 적극적인 후원을 할 것을 약속하였고, 브림에게 레슨을 해주게 된다. 브림의 정식데뷔는 세고비아를 만난 해인 1947년 영국 첼튼햄에서 이루어 졌으며, 그의 데뷔는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14세 였던 브림은 1948년 영국 왕립음악원에 입학하여, 기타리스트로서의 피아노와 기타 작곡을 공부했으나, 당시 기타는 천대 받고 있는 악기였기에 그는 거의 독학으로 기타를 배울 수 밖에 없었다. 1950년에는 런던에서 데뷔했는데 이후 전 영국을 통해 이름이 알려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클래식기타의 연주는 대중적이지 않아 브림의 성공적 데뷔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1950년 데뷔 직후 브림은 르네상스 시대의 류트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곧 그분야의 권위가 된 그는 연주회 프로그램에 덜 알려진 옛 음악을 적지않게 삽입시키곤 했다. 엘리자베드 시대 음악에 관한 테너 피터 피어스와의 공동연구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바 있는데 버클리, 므리튼, 헨체, 티페트 등 주요 작곡가들이 그 영향을 받아 류트와 성악을 위한 작품을 썼다. 브림은 1954년 스위스에서의 연주회를 시발로 유럽전역의 연주여행을 시작했다.1956년 브림은 빌라 로보스를 만나는데 이를 계기로 그의 기타 협주곡을 영국에서 처음 연주하기도 했다. 1958년 이후 브림의 시야는 미국 뿐만 아니라 극동 지역까지 크게 넓혀졌다.

줄리안 브림 콘소트(Julian Bream Consort)가 결성된 것은 1959년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Moriey)의 콘소트 레슨교본 1권을 연주하기 위해서 였는데 이 그룹의 성공은 르네상스 시대 콘소트 음악의 대중적 인기를 끌어모으는 부수적 효과까지 거두었다. 이를 지켜본 몇몇 작곡가들은 기타음악의 효용성을 깨닫고 작품을 썼으며 베네트의 쳄버 앙상블을 위한 볍주곡, 브리튼의 녹턴, 윌튼의 다섯개의 바기텔 등이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브림은 기타의 모든 레퍼토리에 대해서 풍부한 지식과 이해를 갖고 있고 그의 화려한 스타일, 밀도 깊은 음색은 그의 연주를 듣는 일을 하나의 감동적인 경험으로 승화시킨다.

1964년 브림은 OBE(Officer of the British Empire서훈의 일종)로 임명고, 1968년 서레이 대학로 부터 박사학위를 수여받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명성은 1976년 BBC TV에서 방송한 'A Life in the Country'의 방영으로 더욱 높아지게 되었고 1976년에는 빌라로보스 골드 메달을 1982년 가을에는 그의 연주생애에 대한 책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스포츠카 광이었던 브림은 84년 여름 티스버그에서 오크가에 있던 자신의 스포츠카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하던 중 급 커브길에서 그만 핸들을 돌릴 틈도 없이 석조 건물을 들이 받고 목숨보다도 소중한 오른팔을 못쓰게 되었다. 수술 후 그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연주자로서의 절정기에 그는 생애에서 가장 큰 시련을 맛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 기교의 많은 퇴보를 가져왔고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하여 기타를 기피하기도 했지만 성공적인 재기로 새로운 레퍼토리를 연주하기도 하고 음악적 해석은 더욱 탁월해졌다는 평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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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 보케리니

Luigi Boccherini (1743-1805)

 

8세기 말,르네상스시대의 종말과 함께 재능있는 아마츄어 귀족음악가들이 활동하는 시대가 시작된다. 전문가들에 의한 연주회는 사라져갔으며, 때문에 초기 실내악은 비교적 단순한 형태를 띄고 있다. 루이지 보케리니(Luigi Boccherini,1743-1805)는 이러한 과도기에 귀족들의 야유회를 위해 4중주곡과 5중주곡을 쓰느라고 그의 작품생활의 대부분을 헌신한 첫 희생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태리의 루카에서 태어난 보케리니는 이미 10대에 첼리스트로써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인 그의 친구 필립포 만프레디와 프랑스 순회공연중, 보케리니는 마드리드로 갔는데 거기서 스페인 대사로부터 왕실의 후원을 받을 것을 권고받았다. 그러나 후원은 쉽게 얻을 수 없었고, 스페인에서의 1년 후에야 이루어졌으며 보케리니가 작곡에 전념할 수 있도록 많은 작품들이 의뢰되었지만, 그 때까지는 이렇다 할 직업이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은 돈 루이스(Don Luis)왕자의 관심을 끌어, 그의 실내악단의 첼리스트겸 작곡가로 임명받았다.

보케리니는 그의 여생을 스페인에서 보냈다. 1769년에서 1785년까지 15년 동안 그는 돈 루이스의 후원을 받았다. 그러나 돈 루이스가 죽자 보케리니는 마드리드로 돌아가 오스나공작 부처의 살롱을 위한 음악 지휘자가 되었다. 그의 실내음악들은 스페인 귀족사회에서는 연주되어지지 않았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하이든의 작품들을 출판했던 출판업자 비에니즈사에 의해 그의 작품이 보급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프러시아의 프에드릭 빌헬름 2세는 보케리니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고, 1786년에는 보케리니를 그의 실내악단 지휘자로 임명하였다. 그의 작품중에서도 가장 원숙하고 뛰어난 그의 말년의 작품을 포함해서 현이나 피아노와 현을 위한 4중주곡과 5중주곡들의 대부분이 프러시아왕을 위해 작곡되었다. 스페인 민속음악은 확실히 어느 정도는 보케리니에게 영향을 끼쳤다. 왕실기타리스트인 파드레 바실리오가 스카를랏티의 팬댕고(3박자의 스페인 무곡)를 멋지게 즉흥연주하는 것을 듣고서 감동한 보케리니는 1788년에 쓴 '두개의 첼로를 위한 5중주 작품 50의 2'의 첫악장 그라베에 팬댕고를 기타와 하프시고드를 위한 것으로 편곡하였다. 1799년에 보케리니는 많은 그의 피아노 5중주곡을 기타 5중주곡으로 직접 편곡하였다.

현악 5중주 E단조는 유쾌하기도 하고 심오하기도 한 작품으로써 현악 4중주의 개척자의 한사람으로 그의 명성을 충분히 뒷받침하는 작품이다. 알레그로 모데라토,아다지오, 미뉴에트, 알레그레토의 4악장으로 되어 있다. 보케리니는 그를 받아준 스페인에서는 크게 인정받지 못 했지만, 유럽에서는 상당히 큰 명성을 얻었다. 1790년 한 독일사전에는 "위대한 이태리 기악 작곡가의 한사람... 그와 견줄만한 사람은 하이든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쓰고 있다. 보케리니와 마찬가지로 하이든 (1732 - 1809)은 그의 실내악 작품으로 해서 재능있는 아마츄어들로 부터 추앙되어졌다. 젊고 노력하는 음악가로써, 또 소나타와 3중주, 4중주 곡들을 작곡하여 그의 명성은 높아갔다.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그는 성 스테판 성가대에서 17세에서 24세까지 8년간을 있으면서 비참한 생활을 근근히 이어갔다. 보케리니는 1789년 12월 27일에 출판업자인 프레엘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섯곡의 기타를 위한 5중주를 완성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 여섯곡의 기타 5중주는 기타리스트인 베나벤테(Marquis Benavente)에게 헌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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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바루에코

(Manuel Barrueco)

마누엘 바루에코는 잘 알려진 클래식 기타 연주자이며, 피바디(Peabody)와 맨한탄 음악 학교의 교수이기도 하다.

바루에코는 1952년 쿠바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집 근처에 음악원이 있어서 쉽게 기타를 접할 수 있었고 같은쿠바 출신의 작곡가 레오 브라우어(LeoBrower)의 도움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67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본격적인 기타 수업을 거쳤는데 피바디음악원을 졸업할 때까지 계속 장학생으로 지냈다고 한다.

1974년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데뷔 후 그는 Concert Artists Guide Award를 수상하는 첫 연주자가 되기도 했다. 또 그의 첫녹음은 1979년 그라모폰지에서 극찬한 바 있다. 그는 현재 많은 레코드를 내고 있는데 그의 레퍼토리는 수세기에 걸친 미국과 유럽, 그리고 아시아의 곡을 재 해석하고 기타로 편곡하고 연주하여 세계적인 기타리스트로서의 그의 입지를 굳히고 있다. 그는 작품에 대한 뛰어난 분석력과 합리적인 이성을 바탕으로 작품의 예술성에 충실한 분석과 편곡, 그리고 합리적인 운지법의 완벽한 연주로 기타 음악의 음악적 가치를 전 세계에 인식시켰다. 레퍼토리 또한 바흐부터 비틀즈의 곡까지 매우 댜양하여, 데이비드 러셀, 훼르단데즈와 더불어 새로운 대가로 떠오르고 있는 연주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 받고 있다. 그는 밝고 강렬하며 섬세한 음색을 가졌다. 이러한 그의 음색은 빠른 순발력으로 탄현하는 주법과 그의 악기인 로버트 록(Robert Rock)이 적절하게 어울려서 나는 소리이다. 그는 또 경제적인 탄현과 음색을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연주는 VOX와 EMI레이블을 통하여 많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의 현대곡에 대한 해석, 특히 브라우어의 곡은 정평이 나 있다. 그의 빌라 로보스의 프렐류드를 들어 보면 그의 연주가 얼마나 깔끔하고 정확한 연주인지 알 수 있다. 또 그는 개인적으로 존 레논을 좋아해서 비틀즈의 음반을 기타로 편곡한 음반도 나와 있고, 93년 내한 공연 때에는 재즈를 연주했는데, 재즈곡을 모은 '섬타임즈'라는 음반도 소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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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알베니즈

I.Albeniz (1860~1909) 

이삭 알베니즈(Isaac Albeniz)는 1860년 카탈로니아의 캄프로돈에서 태어나 1909년피레네 산맥의 캄포 레 바인스에서 세상을 떠난 스페인 작곡가로서 피레네 북부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9C경 스페인 문화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사람인 그는 카탈로니아 태생이면서도 안달루시아를 더 사랑했다.

4살의 나이로 바르셀로나에서 첫 공개 연주회를 가질 정도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이유로 그는 피아노곡을 주로 작곡했지만 기타 선율 또한 그의 귀에 늘 가깝게 들리곤 했다. 그는 피아노곡을 씀에 있어서 기타나 스페인 음악을 특별히 모방하지 않았으나 그 두가지 요소는 그의 작품에서 강하게 느껴지고 있다. 알베니즈의 피아노곡을 기타곡으로 편곡하는 것이 마치 본 음악으로 다시 환원시키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그는 자신을 무어인이라고 자칭했으며 그의 음악예술인 피아노 기술이 성장한 곳도 남부지방이었다. 무어적인 리듬과 음색, 그리고 생동감 있는 그의 작품은 스페인 민족의 특징을 말해준다. <카탈로니아 카프리치오>는 현재 6개의 앨범이 남아있는 <에스파니아 모음곡 Op.165>중의 한 곡이다. Cordoba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도시로 옛날에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서주에서 장엄한 종의 음이 울리고 돌연 빠른 템포의 무곡으로 변한다. 난무하는 Zapateado (자바티아도)와 비약하는 멜로디의 화려한소품이다.  이 곡은 복잡한 정경과 이야기가 있는 분위기가 넘치는 곡으로 결혼식장,세레나데를 노래하는 사람, 기타를 뚱기는 사람, 춤을 추는 사람, 병사의 무리, 밤의 정경,군중, 자스민 향기, 이러한 것들의 소재를 한데 모아 만든 곡으로 연주하는 사람의 감성과 발상의 지식, 터치의 기술, 음악과 무용의 폭넓은 지식을 필요로 하는 곡이다. 이 곡에서 Albeniz는 그의 초기적보다 자유롭고 철저한 작곡개념을 위주로 하는 공식적인 작곡법을 나타내었다. 이 작품의 대단한 화려함은 Debussy와 Ravel의 피아노 음악에서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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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시오 아구아도

 Dioniso Aguado (1784-1849)

 아구아도는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바실리오 신부 Padre Basilio (미구엘 가르치아 ;Miguel Garcia) 에게서 기타를 배웠다.  그는 소르나 쥴리아니와 마찬가지로 기타 기보법의 개량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기타레슨 Escuela de Guitarra"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그의 스승에 대하여 "손으로 익힌 것을 지면상으로 표현할 기회를 갖지못한 불행한 사람들 중의 한명"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1825년 아구아도는 파리를 방문하였는데, 이는 당시 파리에서 한창 존경을 받고 있던 소르를 만나기 위한 것이라고 전하여진다. 그들은 기타의 기술적인 면에서 매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아구아도의 온화한 성격으로 인하여 매우 친하게 되었으며, 이 같은 우정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아구아도는 손톱을 사용하여 안달루시아 지방의 기타리스트들의 연주에서 볼 수 있는 빠른 연주를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반면, 소르는 풍부하고 깊은 음을 내는 데 더욱 역점을 두었으며, 이 점은 선율적인 요소를 흠뻑 지니고 있는 그의 작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파리에서 한 동안 같이 지냈으며, 소르는 이 우정을 기념하기 위하여 Op.41의 "두 친구 Les Deux Amis"를 작곡하였다.

아구아도의 작품은 파리에서 환영을 받았으나, 그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1838년 말경 마드리드로 돌아가 눈을 감을 때까지 그 곳에서 생활하였다.    그는 교육적인 작품 외에 작품 번호 16의 판당고와 같은 스페인 냄새가 풍기는 작품   뿐 아니라 안단테, 왈츠, 미뉴에트 등의 모음집을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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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러셀

[David Russel]

  스페인 메노루카 섬에서 자라면서 6세때에 아버지로부터 처음 기타를 배웠다. 16세 때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로 이주해서 재즈 기타리스트로부터 정식 수업을 받았으며 런던의 왕립음악원에서 헥토르 콰인 교수에게 사사받았다. 그 후 스페인에서 호세 토마스를 만나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1975년 스페인 정부의 보조금으로 호세 토마스에게 사사받는 행운을 안겨다 주었고 각종 주요 국제경연대회에서 수상하는 영광을 얻기도 하였다. 데이빗은 레코딩 발표외에도 에크레스,하이든, 오르티즈, 그라나도스, 파가니니와 드 파야의 선율로 더블 베이스와 기타를 위한 음악을 앨범으로 발표하였다. 또한 영국을 비롯하여 유럽, 미국, 동남아시아, 최근에는 아프리카에서 마스터클래스를 가지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으며 그의 연주를 듣는 청중들과 비평가들로부터 뜨거운 찬사를 받고 있다. 첫 공식 데뷔는 1976년 캐나다, 미국에서 있었으며 기타 애호가클럽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하여 지금인 부인의 고향인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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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피스크

[Eliot Fisk]

엘리엇 피스크는 세고비아의 전통을 계승한 기타리스트로 세계전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편곡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고 있으며 독주회,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및 실내악 분야에서의 활약으로 그 명성을 확고히 하고 있고, 파울라 로빈스, 기돈 크레머, 루치에로 리치, 로스 앙헬레스등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티스트들과 함께 공연을 갖는 것으로 유명하다.

필라델피아 태생인 그는 윌리엄 비올라, 오스카 지길라, 알레리오 디아즈 그리고 세고비아에게 사사받았고 특히 세고비아는 그를 일컬어 "그는 우리시대의 최고의 화려하고 지적이며 재능있는 기타리스트 중의 한사람이다."라고 격찬하 바 있다. 또한 피스크는 예일 음대에서 하프시코드 주자인 랄프 커크 페트릭에게도 사사받은 최우수 졸업자로서 이곳에 처음으로 기타 과를 창단했다.

1976년 뉴욕에서 독주회를 가졌고 1980년 이탈리아 콩쿨에서 일등을 차지했다. 이후 쾰른의 음악대학의 교수로 활동하며 국제적인 기타교육과 연구를 위해 안드레스 세고비아 협회를 설립하여 기타의 저변확대에 큰 공적을 남기고 있는 신세대 연주그룹의 선두주자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플루티스트 파울라 로빈슨과의 듀오로 발표한 앨범 'Mountain Songs"는 그래미상에 노미네이트되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으며 연주활동 외에도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이태리, 스페인 등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 재능있는 기타리스트들을 발굴하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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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의 류트음악

수 천년의 역사를 가진 류트는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널리 사랑받았던 악기이다. 그러나 바하가 태어날 무렵에 이 악기의 인기는 벌써 시들해져 있었고 18세기에 거의 잊혀진 악기로 물러나 있었다. 바하가 류트를 위해 쓴 작품들은 그러므로 이 악기의 운이 다한 후에 그 말미를 장식했던 작품들이라 할 수 있겠다.  

방대한 작품을 남긴 바하는 소수이긴 해도 몇몇 작품에서 류트를 비중있는 악기로 다루고 있다. 그는 [요한 수난곡]에서 베이스 '아리오소'의 반주악기로 류트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 바 있고, 류트를 위한 독주곡으로도 7곡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음악학자들은 그 7개의 작품들을 놓고 처음부터 류트곡이었는가의 여부로 인해 골치를 앓은 것은 사실이다. 류트 독주곡으로 남은 곡 중에는 거트로 만들어지고 류트와 흡사한 음색을 내는 '류트 하프시코드'를 위한 곡들도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4곡은 바하의 자필로 볼 때 애초부터 류트 곡이었음이 확실하다. 바하의 류트곡들은 스타일과 작법에 있어서 그의 건반악기 작품들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류트 곡이라는 것이 확실한 작품조차 악보상의 아무런 변화를 가하지 않고도 건반악기로 연주할 수가 있다. 형식적으로 이들 류트 곡들은 모음곡 프렐류드, 푸가, 즉 바로크의 주요 장르를 포함하고 있다. 오리지날 류트 곡들이 바하가 현악기나 건반악기를 위해 썼던 다른 어떤 곡들의 수준에 비해 부족함이 없듯이, 편곡된 류트 곡들의 수준 또한 그에 대등하거나 더 뛰어나다. 사실 오리지날 작품과 편곡된 작품의 구분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바로크 작품에서 으례껏 중시되는 것은 작곡자 자신의 편곡인가 혹은 다른 사람의 편곡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의 본질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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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루이사 아니도

[Maria Luisa Anido]

 190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금교 모론에서 출생한 아르헨티나의 여류 기타리스트, 유년 시절부너 아버지에게 기타아를 배우고 7살 때에 1년동안 도밍고 프라트에?사사했다. 그밖에 로블레도에게 4개월간 배운 것을 비롯하여 레로우프와 료벳에게도 사사한 바 있다. 18년 11살 때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명기 토레스로 첫 리사이틀을 갖고 절찬을 받은 바 있으며 아니도의 천재는 프라트가 말한 "어제는 나의 제자였으나, 오늘은 나의 동료이고, 내일 나는 그녀의 찬미자가 될 것이다." 라는 격찬으로 잘 설명된다고 하겠다. 29년 료벳의 제 4회 남아메리카 리사이틀에서 2중주를 연주하여 상을 받은 일을 비롯하여, 현재 세계 각국을 여행하는 거장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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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제 발커

[Luise Walker]

 1910년 비엔나 출생, 8세때 기타를 시작하여 13세때 비엔나에서 데뷔하였다. 비엔나 국립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아니도, 프레스티와 더불어 20세기 3대 여류 기타리스트로 불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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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구엘 리오벳

[Miguel Liobet]

타레가의 위대한 계승자로 알려진 리오벳은 1878년 스페인에서 출생한 기타리스트이다. 조각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림 그리는 것으로 자랐고 일찍부터 기타와 친할 기회가 많았다. 바르셀로나의 시립 음악학교에서 첼로의 거장 파블로. 카잘스와 동창이었고 이 때부터 아르카스 문하의 마힌 아레그레에게 기타를 배웠다. 1901년 바렌시아 음악 학교에서 기타리스트로서는 처음으로 연주회를 가졌다. 3년간에 걸쳐 스페인 각지의 연주회에서 명성을 얻은 리오벳은 1904년 파리에 데뷔하여 연주가와 교수로서 성공하였교 벨기에, 영국등지에서도 연주회를 가졌다. 1910년에서 1912년에 걸쳐 남미 연주 여행은 타레가 주법을 전한 큰 역할을 하였으며 남미의 기타음악은 리오벳에 의해 개안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메리카, 유럽등에서 많은 연주회를 가졌으며 1928년에 리오벳 탄생 50주년을 축하하는 축하회를 베를린에서 성대히 거행하였다. 1937년 스페인 내란으로 공격을 받아 그의 일생을 마쳤으며 주로 카탈로니아 지방의 민요나 무곡을 소재로 한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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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폰세

[Manuel Maria Ponce1885-1948]  

 1885멕시코에서 출생한 근대 멕시코의 대표적인 음악가이다. 멕시코 시립음악학교에서 수학하고 1903년 독일과 이태리에서 유학하였다. 멕시코 국민음악학원 교수겸 피아니스트, 그리고 멕시코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활약하였다. 40세 때 프랑스의 폴 듀카에게 사사받았으며 세고비아에게 "기타의 바하"라는 찬사를 들은 바 있으며 만년에는 멕시코 국립음악의 수립에 노력하였다. 1940년 세고비아를 위하여 작곡한 "남의 협주곡"을 비롯하여 "3개의 소나타", "3개의 멕시코 민요"등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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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루이스 밀란

[Don Luis Milan]

1500년 경 스페인에서 출생, 1566년 사망한 기타의 전신인 비우엘라 주자이며 기악 작곡가중 역사상 가장 오래된 사람이다. 2권으로 된 최초의곡집인 "엘 마에로스트"는 1535년에서 바랜시아에서 출판했다. 유명한 파바나"나 환상곡은 "엘 마에로스트"곡집에 있는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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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데 비제

[Robert de Visee]

비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확실한 전기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17세기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이다. 프란시스코 코르베타에게 사사 했으며 코르베타가 영국을 떠난 후 그의 뒤를 이어 받아 루이 14세의 궁정 기타 교수로 있었다. 1682년 루이 14세에게 바치는 많은 무곡을 파리에서 출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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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데 나르바에즈

[Luis de Narvaez]

1510년 경 스페인에서 출생한 소경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실명전에는 마부였지만 변주곡 형식의 선구자였으며 538년에는 7개의 곡집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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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드 슐츠

[Neonard Schultz]

1814년 "비인"에서 출생 1860년 런던에서 작고한 오스트리아의 기타리스트이다. 슐츠의 작품중 Op90 " 12개의 연습곡"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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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라우로

[Antonio Lauro]

베네수엘라 출신의 뛰어난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였던 라우로는  기타 음악 가운데서도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남기고 있는 인물  이다. 그 중에서도 <6¡Æⓒøac>는 비엔나 풍의  왈츠가 아닌 남미 풍의 왈츠라는 측면에서 매우 독특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베네수엘라의 민속 음악에 새로운 빛을 던져준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다. 라우로는 기타를 연주하기 전에 피아노를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연주회장에서 바리오스-망고레의   기타 연주를 듣고는 기타를 연주하기로 마음을 바꿨다고한다.  그후 라우로는 기타를 배우면서 클래식한 음악과 민속적인 음악을  모두 섭렵한 후 이 둘의 절묘한 조화를 추구했다. 그 예가 바로  <6¡Æⓒøac>로 베네수엘라가 민속 무곡을 바탕  으로 하면서 왈츠 리듬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의 왈츠를 기타로 옮겨놓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이 작품을  작곡하게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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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난데스

페르난데스는 1952년 우루과이의 수도인 몬테비데오에서 약사의 아들로 태어났다.그의 양친은 모두 음악 애호가로서, 그 영향으로 그는 7살대부터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는 왜 피아노를 선택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어릴때부터 내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은 무언가 이상하게 느껴져서 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타리스트로서의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던게 아닐까?  어쨌거나 첫 수업부터 유명한 라울 산체스 선생에게  기타를 사사하기 시작한 페르난데스는 그뒤어 기도산토르솔라에게서 음악 전반에  관한 수업을 받으며 자기 자신만의 독자적 음악 표현의 기처롤 쌓기 시작했다. 연주와 이론에 대한 기초를 탄탄히 다진 그는, 그것을 완벽하게 '실천'하기 위하여 아벨 깔레바로 주법을 몸에 익혔다.   이 과정등은 사실상 남미에서의 기타수업에서는 가장 엘리트 코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연주가로서의  데뷔는 1963년 그의 쌍둥이 형과의 이중주로시작했다. 꽤  오랜시간후 1971년 부터 솔로 활동을 개시 했으며 이후  오늘날까지 많은 콩쿨 수상과 레코딩, 연주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내가 가장 애끼는 자료이니 절데 공개 불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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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 김태원

 

최고로 손꼽히는 사람은 누가 있나요?

우리나라- 외국- 으로 구분해서 알려주세요 자세하게... 부터 최고수준의 기교적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의 기타리스트중에서 타레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

우리나라 기타리스트 유명한사람 누가...

... 누가 누가 있나요? 우리나라는 유명한 기타리스트라고 해 봤자, 저처럼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겁니다 아마... (이건 우리나라외국꺼 가리지 않고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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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아서 우리나라 국민들과 정치하는사람들과 더불어서... 발전이 있나 결국엔 자영업자다 뭐다 하는사람들... 넘쳐나봤자 누가 당신들이 더럽게 일하는거 뼈속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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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은 한 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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