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와 쇼팽에 대해서 자세히 정리해주세요.

슈베르트와 쇼팽에 대해서 자세히 정리해주세요.

작성일 2009.10.16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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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게되었고

작곡한 곡은 무엇무엇이 있고

곡의 특징들 같은것까지.. 이런것말고도 다른것들도 다 좋으니

아는바있으시면 아는대로 다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으면 더 좋겠네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슈베르트 [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오스트리아 작곡가. 빈 출생. 가곡을 비롯, 관현악곡·실내악·피아노곡 등 우수한 작품을 남겼으며, 독일 낭만파 초기를 대표한다.

생애

1월 31일 교사이며 견실한 가톨릭교도인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와, 슐레지엔지방 출신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의 기초를 배운 뒤, 리히텐탈교구교회의 오르가니스트 M. 홀처에게 사사하였다. 홀처는 슈베르트의 재능을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가르치려 해도 이 아이는 벌써 그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1808년 채용시험에 합격하여 황실왕립신학교의 합창대원이 되었다. 여기에서는 A. 살리에리 등 당시 일류작곡가의 가르침을 받음과 동시에 친구 J. 슈파운이 조직한 학생관현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 뒤에 지휘자를 지냈다. 또 방학 때는 아버지·형들과 현악 4 중주곡을 즐기며 여러 음악체험을 쌓았다. 13년 신학교를 떠나기까지, 이미 도이치번호 82(이하 D로 약칭)의 교향곡 제 1 번, 현악 4 중주곡, 가곡 등을 작곡하였다. 집에 돌아온 슈베르트는 사범학교를 다닌 뒤, 16년까지 아버지의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내성적이어서 교직은 힘들었으나 작곡면에서는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1814년 리히텐탈교회에서 작곡자 지휘 아래 연주된 미사곡 F장조(D105), 가곡 《실을 잣는 그레트헨(D 118)》, 15년에는 가곡 《방랑자의 밤의 노래 Ⅰ(D 224)》 《들장미(D 257)》 《마왕(D 328)》 등이 있다. 슈베르트의 작품에 반한 친구들이 모여, 그의 음악을 즐기는 슈베르티아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8년과 24년 2회에 걸쳐서 J. 에스터하지백작의 집 음악가정교사로서 헝가리의 젤리츠에 초대되었다. 백작의 딸 마리와 칼로리네를 지도하기 위해서였다. 헝가리에 체류하는 동안 연탄용(連彈用)피아노곡 《헝가리의 디베르티멘토(D 815, 작품 54)》를 작곡하였다.

1816년 친구 F. 쇼버로부터 당시 유명한 오페라가수 M. 포글을 소개받았고, 이로 인해 슈베르트는 19년 오페레타 《쌍둥이(D 647)》를 작곡했다. 그러나 다른 극장작품과 같이 이것도 몇 회 공연되었을 뿐 잊혀져 버렸다. 그의 이름은 오히려 21년 《마왕》이 작품 1로 출판되자 가곡작곡가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포글은 이 시기, 슈베르트의 가곡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22년 작곡된 《미완성교향곡(D 759)》은, 보통 교향곡이 4악장인 데 비해 제 2 악장까지밖에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왜 미완성으로 끝났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최근에는 22년 말에 발병한 매독 때문이라고 본다.

23년 병고 가운데 작곡된 가곡집이, 물레방앗간 직인의 슬픈 이야기인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아가씨(D 795, 작품 25)》이다. 그를 괴롭히는 병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명성은 차츰 오스트리아 국외로도 퍼져갔다. 25년에는 베를린에서 당시의 유명한 여성가수 A.M. 하우프트만이 《마왕》을 노래했으며, 슈베르트는 영국 작가 W. 스콧의 시 《호수의 숙녀》를 작곡한 《엘렌의 노래(D 837∼839, 작품 52)》(제 3 곡이 유명한 《아베마리아》에 영어 가사를 붙여 출판했다.

27년 제 5 곡의 《보리수》를 포함한 가곡집 《겨울나그네(D 911, 작품 89)》를 작곡, 28년 3월에는 자작만으로 콘서트를 열어 성공을 거두고, 그 후 교향곡 《그레이트(D 944)》, 현악5중주곡(D 956), 가곡집 《백조의 노래(D 957)》 등의 대작을 완성시켰지만, 그해 11월 19일, 31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유해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빈의 베링묘지 L. 베토벤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작품

슈베르트의 작품은 작품번호가 주어져 있는 것이 아주 적고, 그것도 연대순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에는 O.E. 도이치가 전작품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일련번호인 도이치번호사용(또는 작품번호 병용)이 일반화되어 있다. 도이치의 작품목록에 의하면 슈베르트의 전작품은 998곡이며, 그 중 가곡은 630여 곡이다. 슈베르트는 그 이전에는 민요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은 가곡을 예술가곡 수준까지 높였다.

그 선율과 화성의 아름다운 변화, 반주피아노의 자율성 등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자주 <가곡의 왕>이라 불린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오페라·미사곡·교향곡·실내악·피아노곡 등에도 발휘되어 있어, 모두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각 장르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1) 교회음악

미사곡은 완성한 것이 6곡 있다. 제 5 번A 장조(D 678, 1822)와 제 6 번E 장조(D 950, 1828)가 현재에도 자주 연주된다. 소품이지만, 《독일미사곡(D 872, 1827)》도 소년합창단 등의 연주에 의해 널리 친숙해져 있다.

(2) 무대작품

오페라가 3곡, 오페레타가 5곡, 《로자문데(D 797, 1823)》 외에 미완성곡이 10곡 있다.

(3) 합창·중창곡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슈베르트는 성악 카논, 3중창곡, 4중창곡 외에 규모가 큰 2중합창을 위한 작품 등, 이 악종에서 총 100곡 이상 작곡했다. 작자 생전부터 사랑받은 작품에는 남성 4 중창곡 《작은 마을(D 598, 작품 11의 1, 1817)》 《곤돌라의 뱃사공(D 809, 작품 28, 1824)》, 남성 8 중창과 저음현악기를 위한 《물 위의 정령들의 노래(D 714, 작품 167, 1821)》, 여성 4 중창을 위한 《시편 23번(D 706, 작품 132, 1820)》 등이 있다.

(4) 교향곡

현재 남아 있는 완성곡은 7곡이지만, 미완으로 끝난 제 8 번 《미완성교향곡(D 759, 1822)》은 유명하다. 1828년 완성된 C장조 교향곡(D 944)은 R. 슈만이 말한 <천국적인 길이>를 가져, 《그레이트(Great)》라고도 한다. 또, 이 교향곡은 구(舊)슈베르트전집에서는 제 7 번으로 되었지만, 그 뒤 《미완성교향곡》보다도 뒤에 작곡된 것을 고려하여 제 9 번, 최근에는 《미완성교향곡》을 제 7 번, 이것을 제 8 번으로 부르고 있다. 이 교향곡은 최근 분실했다고 생각되었던 《그문덴가슈타인교향곡(D 849)》과 같은 작품이 아닌가라는 추측이 있다.

(5) 실내악

현악 4 중주곡은 현재 남아 있는 완성작이 13곡 있다. 여기에 미완성 2곡(D 68과 D 703)을 합하여 제15번까지 일련번호가 붙여져 있다. 제13번 a단조 《로자문데(D 804, 작품 29, 1824)》와 제14번 d단조 《죽음과 소녀(D 810, 1824)》는 모두 느린 악장에 변주곡이 사용되었다. 피아노 5 중주곡 《송어(D 667, 작품 114, 1819)》에서도 제 4 악장에 자작의 가곡 《송어》를 주제로 한 변주곡을 사용하고 있다. 현악 5 중주곡(D 956, 1828)은 바이올린·비올라·첼로의 편성이며, 슈베르트의 실내악 중 최고걸작으로 꼽힌다. 그 밖에 피아노 3 중주곡, 선율악기와 피아노를 위한 작품이 몇 개 있다.

(6) 피아노곡

완성한 소나타는 13곡 있다. 그 밖에 리트(가곡) 《방랑자(D 493, 작품 4의 1, 1816)》의 주제를 사용한 환상곡 《방랑자(D 760, 작품 15, 1822)》, 2개의 즉흥곡집 (D 899, 작품 90, 1827;D 935, 작품 142, 1827) 등이 있다. 또, 30곡을 넘는 여러 가지 연탄곡은 W.A. 모차르트의 작품과 함께 아직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7) 가곡

〔생애〕 중에서 언급한 작품 이외에도 아름다운 작품이 매우 많다. 자연의 아름다움, 상쾌함을 노래한 것에 《물 위에서 노래한다(D 774, 작품 72, 1823)》 《봄에(D 882, 작품 101의 1, 1826)》 《세레나데(들어라, 들어라! 종달새를, D 889, 1826)》 《초원의 노래(D 917, 작품 115의 1, 1827)》, 음악에 대한 감사, 음악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에 《음악에 부쳐(D 547, 작품 88의 4, 1817)》, 애심을 노래한 《그대는 나의 안식처(D 776, 작품 59의 3, 1823)》, 세계의 자장가 중에서 가장 애호되고 있는 《자장가(D 498, 작품 98의 2, 1816)》, J.W.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로부터의 3곡 《미뇽(D 321, 1815;D 726과 D 727, 1821)》, 3곡의 《하프연주자의 노래(D 478, 작품 12, 1816·1822)》 등이 있다.

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빈의 리히텐탈에서 출생. 초기 독일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가곡의 왕’으로 불리고 있다. 아버지 프란쯔 테오도르는 모라바의 농가 출신, 어머니 마리아 엘리자베트도 모라바의 직공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 프란쯔 테오도르는 빈으로 와서 교원 양성교육을 받고 리히텐탈에서 국민학교를 경영하였다. 프란츠 페터는 그 넷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어 8세 때부터 아버지와 근처의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부터 바이올린 피아노 성악 오르간을 배우고 1808년 왕실예배당의 소년가수 시험에 합격하여 국립신학교(Staatkonvikt)라는 기숙사에 수용되어 피어리스트 수도회의 규정에 따르는 훈련 및 일반교육과 일류 교사로부터의 음악교육을 받았다. 특히 살리에리가 그의 음악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작곡 및 그 밖의 것을 가르쳤다.

재학 중에는 학생 오케스트라에 참가하여 모짜르트 하이든 등 의 서곡. 교향곡을 익히고, 예배에서는 미햐엘 하이든 폭스 에베를린 등의 곡을 노래 불렀다. 정 지휘자 부재중에는 지휘봉을 드는 일도 있었고 또 저명한 극장의 오페라를 들을 기회도 많았으며, 여러 가지로 재능을 키울 기회도 많았을 뿐 아니라 평생 변함없는 우정을 나눈 요제프 시파운을 사귀게도 되었다. 1813년에 변성기가 와서 콘빅트를 떠났으나 때때로 이곳으로 와서 작곡 등의 레슨을 받았다. 재학 중에 이미 상당한 작품을 완성하였는데 그 중의 어떤 것은 습작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이었다.

1년간의 교원양성 과정을 마치고 아버지 학교의 조수로 일하면서 대작에 착수하여 제1교향곡 D장조를 완성하였고 이어서 오페라 <악마의 별장>에 착수하여 1814년 5월 14일에 완성하였으나 살리에리의 지도에 따라 개작하여 10월에 완성하였다. 6월에는 F장조의 미사곡을 완성하였고 10월에 리히텐탈의 <14개의 구난성인 (救難聖人)교회에서 초연하여 호평을 받아 프란쯔 페터의 이름이 빈 시민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이때 소프라노 독창을 한 이웃 상인의 딸 테레제 그로프는 슈베르트가 평생을 수 없던 애모(愛慕)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 해 10월에 작곡한 <실을 잣는 그레트헨>은 그의 가곡의 장래의 방향을 나타내는 작품이다. 1815년 18세 때는 생애 중에서도 드문 다작(多作)의 해로서, <들장미> <마왕> <끊임없는 사랑> 등의 명작을 포함하는 약 145개의 가곡, G장조의 미사곡, 제2교향곡 Bb장조, 오페라는 미완성의 것을 포함하여 4곡, 그 밖의 것이 작곡되었다. 외적인 생활은 단조롭고 그 때까지도 조교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시파운의 소개로 괴팍한 문학청년 마이어호퍼와 알게 되었다.

시파운은 슈베르트가 그때까지 만든 괴테의 시곡(詩曲)을 정서시켜서 정중한 편지와 함께 괴테에게 보냈지만 그의 흥미를 끌지 못하고 편지를 제외한 악보는 반송되어 왔다. 조교사의 일에 싫증이 난 그는 라이바하의 교원양성학교의 음악교사의 자리를 얻으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16년 5월 청년 쇼버의 권고로 그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되어 작곡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었으나 아직도 조교사의 일을 계속한 듯하다. 12월 쇼버의 어머니가 빈으로 나와 넓은 집에서 살게 되었으므로 슈베르트는 교직을 물러나서 그 집안의 신세를 지면서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얻었다.

1816년의 작곡은 제4교향곡 c단조 <비극적>, 가곡 <마부 크로노스에게> <만령절(萬靈節)의 연도(連禱)> <자장가> <유랑하는 사람>,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에서의 <수금(竪琴) 연주자의 노래> 등이 있다. 쇼버의 동생이 외국에서 돌아왔으므로 슈베르트는 그러한 좋은 생활도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아버지의 집에서 교원생활을 다시 하게 되었다. 부친의 학교는 이젠 확장되었기 때문에 그 교무와 사무가 많아져서 슈베르트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자 쇼버 등의 소개로 교양이 있는 배우이자 성악가인 포글(Michael Vogl 1768∼ 1840)과 사귀게 되어 그가 출입하는 상류 중류 가정의 사교집회에서 슈베르트가 반주하는 자작(自作)의 가곡이 포글의 노래로 소개되고 명성이 높아지는 행운을 맛보게 되었다. 이때에 롯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등을 듣고서 배우는 바가 있었다. 가곡 작곡의 기술은 더욱 더 향상하고 <죽음과 소녀> <음악에> <가니메드> < 타르타루스의 무리> 등이 작곡되고, a단조를 비롯한 4곡의 피아노 소나타도 완성하였다.

1818년은 그가 21세 되는 해이다. 이해 초에 과거부터 교우관계가 있었던 작곡가 안제름 휘텐브레너의 동생이자 관리이던 하인리히와 교제하기 시작하였다. 이 사람은 슈베르트의 재능을 깊이 존경하여 힘이 미치는 한 이 천재를 세상이 인정하게 하고 물질상의 손해를 입지 않도록 슈베르트가 죽은 후에까지도 계속 돌봐 준 사람이었다. 5월 1일 슈베르트의 서곡의 하나 하나가 유료 공개연주회의 프로그램에 실려 기악 작곡가로서의 명성도 떨치게 되었다.

7월부터는 에스테르하지 백작가의 음악 가정교사로 채용되어 그 두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위해 헝가리에 있는 그 사람의 대농원의 저택으로 갔다. 여기에서 그는 몇 개의 가곡과 피아노 연탄곡을 만들기도 하면서 심신의 건강을 모두 회복하였다. 이 두 딸 중에서 카롤리네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은 아주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9월 빈으로 돌아와서 부터는 부친 학교에서의 교편생활은 그만두고 마이어호퍼와 동거하면서 오페레타 <쌍둥이>에 착수하였다. 이 해에는 가곡의 작품이 적다. 1819 년에는 롯시니의 오페라가 빈 시민의 마음을 사로잡아 베토벤과 같은 작곡가조차 별로 주목받지 못하였으므로 앞서의 경(經) 오페라의 공연에 대한 노력은 포글의 동분 서주에도 불구하고 당장에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슈베르트는 오페라 작곡열에 들떠서 마이어호퍼의 가사에 작곡을 하기 시작하였으나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어서 음악이 있는 극 <마법의 수금(竪琴)을 위한 음악을 완성하였다. 그 서곡은 1827년에 이르기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종교적 음악극 <라자로의 소생>은 미완성이지만 그 대부분은 극히 뛰어나 있다. 가곡으로서는 <프로메테우스>라는 명작이 있다. 이 해 그는 또 괴테에게 그의 시를 가사로 한 가곡 악보를 헌정하였으나 회답 편지도 받지 못하였다.

이해에는 콘빅트 시대의 학우 젠의 정치범죄에 억울하 게 연루되어 경찰서에 유치된 일도 있다. 그래서 그 후에도 그는 정부 교회 등에 대한 불만을 어떤 형태로든 간에 나타내어 울분을 푼 일도 있다. 1820년은 슈베르트에게 있어서는 기쁜 해였다. 4월에는 e단조의 서곡이 그라쯔에서 공개연주 되고 6월 14일에는 <쌍둥이>가 포글의 주연으로 쾰른트나트아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그러나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아서 7회로 중단하고 말았다. <마법의 수금>도 이 해에 공연되었다.

이러한 일들보다 더 기뻤던 일은 <마왕>이 친구들의 예약으로 출판할 공산이 섰다는 점이다. 이듬해 4월에 발행되었는데 상당액의 이익이 생겼으므로 <실을 잣는 그레트헨>도 발행되고 이어서 몇 개의 다른 곡들도 출판되었다. 그러나 창작은 적어서 <봄의 신앙>과 남성 8중창, 저음현 반주의 <물위의 정령의 노래>의 제1고(稿)가 주된 것이었다. 후자는 이듬해 1821년 가필하여 공연되었다. 다음해도 가곡의 수는 결코 많지 않으나 <인간의 한계> <줄라이카의 노래> 중 의 2곡, <미뇽의 노래> 2곡 등의 뛰어난 작품이 있다.

오페라 작곡열은 조금도 식지 않아서 쇼버의 가사에 의한 <알폰소와 에스트렐라>에 착수하였으나 연내에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이 해에 화가 쿠펠뷔저와의 교제가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그의 주변에는 많은 예술가나 그 애호자가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보다 조금 뒤에 화가 폰 쉬빈트도 슈베르트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 중의 하나가되었다. 이 두 사람 의 화가에 의하여 슈베르트의 초상이나 그의 생활 장면 등이 그림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었다.

1820년경부터 그의 창작력은 상당한 쇠퇴를 보이는데 이것은 1818년경에 걸린 성병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1822년에 베토벤을 방문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 것은 후에 유명한 음악 평론가가 된 로흘리쯔가 아내와 친구에게 쓴 편지를 근거로 하여 나온 소리이지만, 이 편지는 어떤 고의적인 의도에 의한 위조임이 밝혀졌다. 또 이 로흘리쯔는 모짜르트가 자신의 창작태도를 자세하게 기술한 편지를 위조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해는 전해나 그 전해보다 수확이 많았던 해였다.

3년 전에 착 수한 Ab장조의 미사곡이 완성되었는데 이 악보에서는 자세한 정정 가필을 상당히 발견할 수가 있는데 이는 슈베르트로선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C장조의 판 타지라는 제목의 피아노를 위한 대곡(大曲)이 완성되었다. 이 곡의 제2악장에 가곡 <유랑하는 사람>의 선율이 사용되고 있어서 <방랑자 환상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대작보다도 더 유명한 것은 b단조의 2악장의 교향곡으로서, 제3악장의 스케 치와 그 첫 부분의 스코어가 되어 있을 뿐이므로 <미완성>이라 불리고 있다.

이곡이 미완성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행해지고 있으나, 아마 작곡자가 애초부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완성시켜야겠다는 의욕을 갖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으면 그냥 무심코 잊어버리고 만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원래 슈베르트는 대작을 쓰는 일에 능숙하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오페라는 부분적으로는 아름답지만은 전체로서는 허술한 데가 있어서 인상이 약해지는 감이 있다. 교향곡도 끊임없이 전체를 생각하면서 주제를 조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므로 이런 식으로 두뇌를 쓰는 일은 슈베르트로서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대개 사람이란 자기의 약점이나 결점은 잊어버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구상이 막히면 이를 계기로 하여 작곡을 중지하고 곧 잊어버리고 마는 일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미완성>의 경우에 대하여 생각하면 제1 제2의 두 악장 모두가 3박자로서 여기에 이어질 스케르쪼가 또한 3박자이므로 여기에서 작곡이 막혀 버리지 않았는가 추측할 수 있다. 이 곡은 다음해 그가 시타이어의 음악협회의 명예회원으로 추천되어 이에 대한 감사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작품으로서 이 협회에 보내졌다. 받은 쪽에서는 곧 제3악장 이하가 도착하리라 생각하고 당장에 연주를 하지 않고 있던 중에 세월이 지나 버려 1865년 에 발견될 때까지 슈베르트의 친구이며 시타이어의 음악협회의 위원이던 안젤름 휘 텐브레너의 책상 서랍에서 잠자고 있었다.

1823년은 수확이 많은 해였다. 극적 작품으로는 징시필 <반역자들>이 4월에, 오페라 <피에라브라스>가 10월에, 음악이 있는 로만스극 <로자문데>는 가을에 완성하 였다. <로자문데>만은 1823년 12월 20일에 테아터안 데어 빈에서 공연되었으나 2일 흥행만으로 그치고 말았다. 다른 2개의 공연을 작곡자 자신은 생전에 듣지 못했다. 가곡으로서는 작곡한 날짜가 분명한 <물위에서 노래한다> <그대는 나의 안식처>의 두 명작에다가 9월에 완성한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연작 20곡이 있다. 이 연작은 1824년에 출판되었다.

>피아노곡으로서는 <34개의 감상적인 왈츠> <악흥(樂興) 의 때> <12개의 독일 무곡> 등이 있다. 게다가 이해부터는 슈베르트를 둘러싸고 그의 새 작품을 듣는 모임이 여기저기의 가정에서 개최되게 되었다. 이것을 슈베르티아데라 하였다. 시타이어와 그라쯔의 음악협회는 그를 명예회원으로 추천했고, 전자에게는 b단조 <미완성>교향곡을 보냈다. 10월 25일 베버의 <오이리안테>가 빈에서 공연되어 이 기회에 슈베르트는 그 작곡자와 면담하였는데, 이때 평을 해 달라는 청을 받고 솔직하게 혹평을 하였으나 베버는 화를 조금도 내지 않고 오히려 나중에 <알폰소와 에스트렐라>를 공연시키려고 무진 애를 써 주었으나 끝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 해와 그 다음해가 아마도 슈베르트의 짧은 생애 중에서도 가장인생의 보람을 느꼈던 세월일 것이다. 게다가12월에는 당시 여류성악가의 제1인자였던 안나 밀더가 베를린에서 편지를 보내어 슈베르트의 가곡에 감동하였다고 말하고, 아울러 그의 오페라를 베를린에 공연할 마음은 없느냐고 물어왔다. 곧 <알폰소와 에스트렐라>의 스코어를 보냈으나 25년 봄에 공연될 전망은 없다는 회답이었다. 또 24년에는 다시 에스테르하지 백작가의 가정교사로서 헝가리에 가서 여름을 보내며 몇 개의 피아노 연탄곡과 독주곡을 작곡하였다.

오페라에서는 계속 실패였으나 1825년 2개의 피아노 소나타 A장조, op. 42와 D장조, op. 53은 모두 호평을 받았고 특히 전자는 곧 출판되어 북독일 스위스의 음악애호가들을 기쁘게 했다. 이 해 처음으로 그는 친구인 화가 쉬빈트의 이웃으로 이사하여 그들의 친분도 더욱 두터워지고 또 슈베르티아데도 큰 성황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지병이 재발하여 생활을 어둡게 하였다. 5월 20일 포글과 함께 시타이어로 갔는데 그 도중에 가시타인의 온천장에 체재하면서 가시타인 교향곡을 작곡하였다고 전하여지고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전혀 없고, 현지로서는 1828년에 완성한 C장조의대형 교향곡의 일부 초고가 여기에서 쓰여졌다고 인정되고 있는 정도이지만 이것도 정설은 아니다.

이 해의 가곡의 명작은 영국의 시인 윌터 스콧트의 <호수 위의 미인> 가운데에 엘렌이 부르는 노래 <아베 마리아>의 독어역 작곡이다. 이밖에 빈에서 인기가 있었던 여류 성악가 조피 물러를 위한 <미뇽의 노래> 4곡도 만들어졌다. 아직도 일정한 직업이 없는 것은 그 자신뿐 아니라 친구들의 걱정거리였다. 작곡은 차츰차츰 출판되기는 하였지만 거기에서 얻어지는 수입은 충분하지 못하고, 게다가 출판업자와의 교섭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아 그것이 또한 불쾌의 씨가 되었다.

1826년, 오스트리아 황제의 궁정예배당의 부악장의 자리가 비어 있어서 그는 열심히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 해에도 피아노의 명작, G장조 소나타, op. 78이 작곡되었다. 이것은 보통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가곡 <들어라, 들어라, 종달새를>이 교외의 야외 맥주집에서 담소하는 사이에 작곡되었다. 동생 페르디난트가 1845년에 무반주 남성합창곡으로 편곡한 이래 그런 형태로 널리 알려져 있는 <독일 미사>는 이 해부터 27년에 걸쳐서 만들어 진 것으로서 원곡은 혼성 4부합창, 관악기 및 오르간반주가 붙어 있다. op. 99의 상 쾌한 Bb장조의 피아노 트리오는 1827년의 작품이지만 작곡 날짜는 분명치 않다. op. 142의 즉흥곡도 이 해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 보다도 중요한 작품은 <겨울 나그 네> 연작 가곡이다. 2월에 앞부분의 반과 10월에는 그 나머지가 작곡되어 모두 곧 출판되기는 하였지만 출판 당시에는 그렇게 호평만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이 해의 3월 베토벤의 건강이 두드러지게 악화하여 외출도 못하게 되었는데 신틀러가 슈베르트의 가곡과 피아노곡을 그에게 보였을 때 이 거장은 커다란 흥미를 보였다고 한다. 휘텐브레너 형제는 과거부터 슈베르트가 베토벤을 신처럼 존경하고 있던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3월 19일에 이 소심한 사나이를 데리고 문병하러 갔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이 거장에게 한 마디의 말도 하지 못하고 머뭇머뭇 자리에서 일어서 버렸다고 한다. 이 거장은 26일에 세상을 떠났고 29일의 성대한 장례식 때에는 슈베 르트는 관 옆에서 횃불을 들고 장례식 행렬을 따라갔다. 9월에는 피아니스트인 옝거와 함께 그라즈에 여행하여 각지의 음악 애호가에게 환영을 받음으로써 자칫하면 그를 짓누르려는 절망감에서 한때나마 벗어날 수가 있었다.

1828년 1월 28일 밤 쉬파운의 저택에서 성대한 슈베르티아데가 개최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최후의 모임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3월 26일에는 오래 전부터 열망하고 있던 자기 작품만의 연주회가 개최되었고 친구들의 동분서주로 예상치 못할 정도의 많은 수입이 있었다. 이런 기쁜 일에 자극 받았음인지 그 달에는 C장조의 대교향곡, 6월에는 Eb장조의 대미사곡이 완성되었으나 그는 이것도 귀로 들을 수는 없었다.

그 이전부터 그는 문학애호가들의 독서회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는데, 이 해에는 하이네와 렐시타프의 시(詩)를 보게 되었고 곧 이것을 곡으로 옮겼다. 이것이 그가 죽은 후에 편집된 <백조의 노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창작욕에 불타 있었으므로 여름에는 잠깐 바덴에 갔을 뿐 빈을 떠나지 않았고 9월에는 현악5중주곡 C장조를 완성하였다. 가을에는 동생 페르디난트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음료수에서 티푸스균이 들어가 두 사람의 의사의 성의에 넘치는 치료도 보람없이 11월 19일 오후 3시, 31세 10개월의 짧은 생애를 마치고 영원히 잠들었다.

장례식은 11월 21일 마르가레텐의 성 요제프교회에서 거행되고 유해는 유 언에 따라 벨링크 묘지의 베토벤의 무덤 가까운 곳에 매장되었다. 1830년 여름이 무덤에 흉상(胸像)이 놓여졌다. 1888년, 현재는 빈 시에 편입된 지멜링크의 중앙묘지로 이장(移葬) 되었고, 이때 이 흉상은 슈베르트의 생가(生家)로 옮겨졌다.

오스트리아 사람 중에는 키가 작은 사람이 많았는데 슈베르트도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게다가 몸이 앞으로 굽은 자세로 지독한 근시였으며 안색도 좋지 않았으 므로 풍채가 나지 않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말솜씨도 몹시 서툴러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상대에게 이해시킬 수가 없었다. 친구나 가족에게 대해서는 아주 상냥하고 마음을 터놓고 사귀었지만 낯선 사람에게 대해서는 소심한 나머지 실례가 되는 언동을 많이 하였다. 특히 여성에게 그러하였다.

슈베르트는 선배인 고전주의 시대의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악곡의 모든 장르에 손을 대고 있다. 이 점은 로맨티시즘 시대의 작곡가가 일정한 악곡에 한하여 작곡한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는 가곡 작곡가로서 예술적 수준에 있어서나 역사적 의의에 있어서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다만 그 자신 특히 만년에는 가곡 작곡 을 제이의적(第二義的)으로밖에 생각지 않은 듯하다.

소년 청년 시대의 가곡에는 레치타티보풍의 데클라마티온이 많고 그것도 아리오소와 원활하게 맺어져 있지 않다는 점 등 약점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아직도 빈 시민 사이에는 이탈리아 음악을 애호하는 경향이 뿌리깊게 남아 있다는 것과 독일 리트의 형식이나 기법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말하자면 시행착오의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시행(試行)의 상태에서 슈베르트를 구해낸 것은 고전주의 시대가 끝나갈 무렵의 독일 민간음악의 예술음악으로의 승화와 독일 시단(詩壇)의 화려한 향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가곡 작곡자로서의 그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풍의 칸타타에 근원을 갖는 통작형식과 민요에서 기원하는 복절형식의 융합은 <보리수> 등의 명작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며, 변화된 복절형식이라 불려야 할 것이겠지만, 이것을 손에 넣음으로써 그는 독일 리트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에다가 무겁지 않으면서 의미가 깊은 반주, 가사의 감정적 내용에 대응하는 조바꿈 등이 슈만 브람스 말러의 예술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그 에게는 독창가곡 이외에도 다수의 중창가곡이 있다. 이들은 시대의 유행에 따랐다는 요소가 강하지만 그 중의 많은 것은 독창가곡과 경향을 같이하고 있다. 교향곡 작가로서 그는 하이든 모짜르트의 양식에서 출발하여 베토벤의 모범을 따라서 작곡을 해나갔지만 그가 도달한 곳은 베토벤의 구축성 기념비성이 아니라 말러나 브루크너의 유동성 서정성이었다. 따라서 그에게서는 주제 조작의 교묘함을 기할 수는 없다.

그의 8중주, 5중주는 교향곡의 준비로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순수한 실내악으로 다룰 수는 없다. 그의 명작인 2개의현악4중주곡,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1828 년의 G장조의 현악4중주곡, 피아노3중주 Bb장조, 피아노5중주 <송어>는 각각 개성을 갖고 있다. d단조 <죽음과 소녀>의 제1악장은 그로서는 드물게도 교묘한 주제 조작이 행하여져 있으며 a단조의 현악4중주 메뉴엣과 G장조의 제1악장은 일품이다. 억지로라도 한마디로 그의 실내악의 특징을 표현한다면 이처럼 풍토를 잘 나타낸 음악은 달리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피아노 소나타는 그가 신처럼 존경한 베토벤의 만년의 스타일에, 슈만 비슷한 젊음, 게다가 그에게 독특한 서정성의 혼합이라 생각되지만, 원래 베토벤과 같은 구축성이 강한 단계를 거치고 난 자유로움이 아니기 때문에 이완된 부분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방랑자 환상곡>의 어떤 부분은 완전히 슈만적이며 또 연주 기교면에서는 리스트 에 가깝다.

<악흥의 때> <즉흥곡>은 멘델스존이나 슈만의 소곡 연작의 직접적인 선구(先驅)이며, 19세기 후반에 무수히 만들어진 서정소곡 또는 살롱 피스의 출발점이 되었다. 피아노 연탄곡과 중(합)창곡도 마찬가지로 당시의 유행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대형의 교회음악은 그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이 성악적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오케스트라의 표현력을 중시한 교회음악과 상당히 거리가 먼, 그에게 독특한 스타일을 갖고 있다. 그의 2대 미사곡이 모두 크레도의 전례문의 일부를 빠뜨리고 있는 사실은 연구자들로 하여금 갖가지 추측을 낳게 하고 있으며, 그가 교회를 부정하였다는 설도 있었으나 이것은 지나친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는 가톨릭적 전통이 뿌리깊고 게다가 그런 분위기가 풍부한 빈에서 자랐으므로 교회적 종교심이 몸에 배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의 동생 페르디난트가 사제(司祭)가 된 것도 이에 관련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는 평생 오페라 작곡열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대본이 좋고 나쁜 것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작곡하였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음악도 아깝게도 알맞은 장소에 놓여지지 못하고 클라이맥스로의 진전과정이 없기 때문에 죽어 버리고 만 것이다. 오페라라는 점에서는 슈베르트도 그 재능을 낭비한 셈이다.

이상과 같이 생각해 나간다면, 슈베르트를 로맨티시즘 시대의 작곡가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그는 자기 음악에 대한 태도가 하이든이나 모짜르트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자각하지 못하였다. 이점에 있어서는 베토벤이나 베버나 슈만과 달리 모짜르트 등에게 가까운 점이 있다. 또 그의 음악적 재능이 풍부하다는 점에서도 모짜르트와 비슷한 데가 있다. 슈베르트의 작곡이 빠른 점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그러나 슈베르트가 작곡을 빨리하고 쉽게 한다는 것은 모짜르트의 그 것과는 다소 다르다. 적당한 표현은 아니지만 모짜르트의 작곡이 빠르고 쉽다는 것은 아주 깊은 하의식(下意識) 또는 잠재의식에 뒷받침되어 있어서 악상이 일단 악보로 옮겨지면 극히 확실한 존재가 된다. 그렇지만 슈베르트의 경우에는 일과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이것이 슈베르트의 음악이 때로는 어딘지 모르게 안정성이 없는 듯한 느낌을 주는 원인이 될 것이다. 그렇다 손치더라도 그의 음악의 아름다움은 다른 작곡가에게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

 

 

 

 

 

쇼팽 [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1849]</ㅔ>

폴란드 작곡가·피아니스트. 바르샤바 출생. 주요 작품의 대부분이 피아노곡인데, 개성적이며 참신한 기법은 서정성을 기조로 웅장함·기품·멜랑콜리 등 다채로운 성격을 겸비하여 <피아노의 시인>으로 칭송받는다. 아버지 니콜라스는 16세 때 폴란드로 이주해 온 프랑스인이며 어머니 유스티나는 폴란드의 몰락한 귀족 출신이다. 양친을 비롯한 가족 모두가 음악을 애호하였는데, 쇼팽은 4∼5세부터 누이 루드비카에게 피아노의 초보를 배웠으며, 1816년부터는 A.W. 지브니에게 배웠다.

7∼8세 무렵부터 작곡에 흥미를 느껴 민속무곡이나 론도 등 피아노곡을 작곡했는데 17년에 작곡한 폴로네즈는 작곡 뒤 곧 출판되어 가장 초기 작품으로서 전해진다. 18년 2월 24일, 최초의 공개연주회를 열어 대성공을 거두었고 <모차르트의 후계자>라 불리며 귀족사회의 총아가 되었다. 이윽고 스승 지브니를 능가하여 바르샤바음악원의 원장 J. 엘스너의 지도를 받았고 26년에는 바르샤바음악원에 입학하였다.

엘스너의 교육법은 독창성을 주안으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쇼팽의 개성적인 작곡어법의 형성에 매우 유익하였으나, 동시에 생애를 통하여 대위법 등의 기술 습득에 대한 갈망과 규모가 큰 작품의 구성으로 고심하게 되는 원인도 되었다. 2학년 때 작곡한 모차르트 주제에 의한 《라 치 다렘 라 마노의 변주곡》은 뒤에 R. 슈만에 의해 소개되어 쇼팽의 명성을 높인 작품이다. 이 무렵은 유럽악단에의 진출과 자작자연(自作自演)에 의한 음악활동의 포석으로서 협주형식의 피아노작품을 집중적으로 작곡하였는데, 《론도 아라크라코비아크(1828)》 《피아노협주곡 제2번 F단조(1830)》과 《피아노협주곡 제1번 E단조(1830)》 등으로서 K. 체르니 등의 명기주의(名技主義)와 J.N. 훔멜 등의 서정미를 다분히 의식한 기교적이며 화려한 작풍이 특징적이다.

음악원을 졸업하고 더욱 폭넓은 활동을 위하여 빈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바르샤바를 떠났는데, 고국의 반러시아폭동과 독립혁명 실패의 소식에 비분과 절망으로 상심하였다. 그 자신은 고국의 위기에 대해 동지들과 행동을 같이 하지는 않았으나, 이 사건은 젊은 영혼에 결정적인 그림자를 드리워 그의 창작의 근본에 흐르는 비극성과 허무주의의 근원이 되었다. 쇼팽은 예술가로서 살 것을 명확히 자각하고 귀국을 단념, 다시 고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31년 9월 중순에 파리로 이주, 불우한 시대였으나 그의 음악세계로서는 중요한 수년간의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V. 벨리니 등의 음악을 통하여 선율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영감을 얻어 피아노라는 악기로 인간의 목소리와 같은 부드러운 멜로디를 노래하는 표현방법을 연구하여 악센트의 이동과 리듬의 고안, 화성상의 혁신과 음색변화, 3부형식을 발전시켜 독자적인 음악적 발상을 담는 등 개성적인 음악어법을 확립하였다. 당시 파리는 온갖 문학인··예술인의 집회장소가 되어 있었는데 쇼팽도 32년 파리에서 개최된 데뷔연주회에서 성공하여 이들과 교분을 맺었다.

36년에 F. 리스트의 소개로 여류작가 G. 상드를 만났으며, 2년 뒤에는 함께 지내기 시작하여 9년간 계속되었다. 이 사이에 폐결핵을 앓고 있던 쇼팽의 요양을 위해 옮긴 마요르카섬에서 《24개의 전주곡(1839)》을 완성하였다. 그 후에도 건강이 계속 악화되는 가운데 리듬의 세련·복잡화, 형식의 확대, 환상성의 중시 등 창작력은 더욱 원숙해져서 《피아노소나타 제 2 번 B 단조(장송, 1839)》 《환상곡(1841)》 《피아노소나타 제 3 번 B단조(1844)》 《환상폴로네즈(1846)》 《발라드 제 2번 (1839)》 《발라드 제 3 번(1841)》 《발라드 제 4 번(1842)》 등의 걸작을 잇따라 발표하였다. 48년 2월혁명을 피하여 런던과 스코틀랜드를 여행하였는데 안개와 한기 때문에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다시 파리에 돌아와 궁핍과 고독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쇼팽은 피아노의 성능이 급속히 개량되어 발달하던 시대에 창작기의 정점을 맞았으므로 작품은 연주법이나 페달 기법의 확충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특히 에튀드(연습곡)는 고도의 음악적 착상이나 그 성과가 나타나 있어, 연주기술을 연마하기 위한 연습곡임과 동시에, 그가 발견한 피아노 표현의 연주법상의 비결에 여러 가지 형식을 가미한 기념비적인 명곡이 되었다. 선배 작곡가 중에서는 J.S. 바흐·W.A. 모차르트·J. 필드의 녹턴(야상곡)양식 등을 애호, 이에 대한 연구의 성과를 작곡에 도입하였다. 폴란드의 민속무곡인 마주르카나 폴로네즈의 리듬과 정신은 그의 큰 지주가 되어 그것들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명곡을 많이 작곡하였다. 연주하기 쉬운 왈츠나 녹턴, 연주하기가 어려운 에튀드까지 다양하게 있으며, 피아노작품 이외에도 첼로소나타와 가곡이 많이 알려져 있다.

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1849)

'쇼팽'은 1810년 2월 22일 폴란드의 바르샤바 근교 제라조바 노라에서 태어나 1849년 10월 17일 프랑스 파리에서 39세로 세상을 떠난 폴란드의 작곡가이다. 고금을 통해 거의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피아노를 다루었고 또한 피아노음악을 작곡하고 있지만 '쇼팽'처럼 피아노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살려 피아노가 갖은 특색을 효과적으로 작품을 통해 구성한 작곡가는 드물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피아노를 노래시키고 피아노를 통해 시 를 읇은 사람은 바로 '쇼팽'인 것이다. 그를 가리켜 <피아노 시인>이라고 하는 러시아의 피아노의 거장 안톤 루빈시타인의 찬사는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쇼팽'은 프랑스 사람을 아버지로 폴란드 사람을 어머니로 폴란드에서 태어난 혼혈아이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은 프랑스 로렌주 낸시 출신으로 당시 프랑스혁명으로 국내불안을 피해 17세때 단신 바르샤바로 온 사람이다. 처음에는 담배공장 사무원으로 일하다가 그 공장 이 문을 닫게 되자 그 후 바르샤바에서 약 50㎞ 떨어진 제라조바 보라에 있는 스카르벡 백작의 아들 프레데릭의 프랑스어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백작부인의 먼 친척이 되는 폴란드 귀족 출신 유스티나 쿠지자노프스카와 1806년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네아이가 태어 났는데 외아들인 '쇼팽'은 두번째 아이였다. 그러나 이 집안은 '쇼팽'이 태어나던 해 바르샤바로 이사를 하고 말았다. '쇼팽'은 그 혈통이 말해 주듯이 음악에 있어서도 폴란드 민속적인 요소와 프랑스의 세련된 감각이 그의 음악의 바탕이 되고 있고, '쇼팽'이 20세 때 바르샤바를 떠나 주로 파리에서 나머지 반생을 보낸 것을 보면 그의 생애도 폴란드와 프랑스로 20년씩 반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쇼팽'은 스스로 폴란드인이란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조국에 대한 사랑과 긍지는 대단히 강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조국을 떠날 때 가지고 떠난 한줌의 흙은 일생을 통해 간 직했고 조국 폴란드가 국난을 겪을 때 마다 의연금을 보내는 등 한시도 그의 조국을 잊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쇼팽'은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서 여섯 살 때에는 보히미아 태생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지브니라는 사람에게 정식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덟살 때에는 그 해 2월 26일 바르샤바 청중들 앞에 나타나 기로베츠의 협주곡을 연주 데뷔해서 폴란드사람드로부터 제2의 모차르트라고 그 재능을 높이 평가 받기도 했다. 이 무렵 '쇼팽'은 즉흥연주에도 능해서 그의 천재적인 재능으로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는 작곡가로서의 소양을 일찍부터 제시 해준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12세때 바르샤바 음악학교의 창립자이자 교장인 요제프 엘스너에게 화성학과 대위법을 지도 받았다. 그러나 이 교수는 공식적인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그의 독창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그를 자유롭게 방임하는 지도법을 택했다. 이러한 방법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와 쇼팽으로 하여금 피아노 작곡가로서 고금을 통한 독 보적인 존재로 만들어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쇼팽은 피아노의 정식레슨을 받지 않고 주로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쇼팽'은 19살때 이상적인 여성을 발견하고 그녀에 대한 연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상대는 당 시 바르샤바 음악학교 성악과 학생인 콘스타치아 그라도코프스카였다. 그러나 내성적인 '쇼팽' 은 그의 심정을 그녀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f단조>에서 특히 제2악장<아다지오>는 그녀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담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쇼팽'은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진 외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고 1830년 11월1일 그의 나이 20세 때 바르샤바를 떠나 세계여정에올랐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고국을 영원히 떠나는 여정이 될 줄은 그 당시 아무도 몰랐었다. '쇼팽'이 조국 폴란드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 친구들이 보내준 한 줌의 흙을 간직하고 보다 넓은 예술활동의 무대를 찾아 바르샤바를 떠났다.

친구인 티투스 보이체코프스키와 더불어 세계 여정에 오른 쇼팽은 처음에 비인에 들렸으나 그 전해에 들려 환영을 받았던 것과는 달리 그를 따뜻하게 맞이할 선배 음악가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 기대에 부풀 었던 그를 실망시켰다. 더욱이 바르샤바혁명이 일어나 폴란드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러시아와 외교적 우호관계를 가지고 있는 오스트리아도 폴란드와 폴란드사람을 적대 시하게 되었다. 친구인 티투스는 조국으로 되돌아 갔고 홀로 남은 그는 고독과 실의의 구렁 텅이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인에 더 이상 머물 필요를 느끼지 않아 '쇼팽'은 런던으로의 여권을 얻어 1831년 7월, 21세때 비인을 떠났다. '쇼팽'은 1831년 9월말에 화려한 문화의 중심지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는 당시 정치적으로 러시아나 오스트리아와는 반대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쇼팽'에게는 자연 호의적으로 대하게 되어 '쇼팽'의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 그리고 영원한 안주의 고장으로 삼게 되었다. 당시 파리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사상적으로나 사회풍조로나 자유를 고가하고 있었고 문화인, , 예술가들이 유럽전역에서 모여 들어 당시 전성을 이룬 낭만주의 사조에 물들 고 있을 때였었다. 그는 멘델스존과 리스트 그밖에 카르크브랜너 등의 음악인들의 따뜻한 도 움을 얻어 활동하게 되었고 우연히 파리에서 만난 옛 친지인 폴란드 귀족 라지뷜공작의 주선으로 로스차일드 남작의 사교 모임에도 드나들게 되어 파리의 사교계를 중심으로 연주와 작 곡에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그의 악단에서의 기반이 확고해지고 사회적인 명성도 높아진 쇼팽은 1836년 겨울 그 나이 26세때 친구인 리스트의 소개로 인기 여류작가였던 죨쥬상드와 알게 되었다. '쇼팽'은 처음에는 그녀에 대한 인상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미 폐결핵을 앓고 있던 쇼팽으로서는 상드와 같은 활동적이고 모성적인 여성의 애정과 간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이 두 사람은 9년간 동거생활을 하게 되었고 쇼팽은 그녀로부터 따뜻한 간호를 받으며 평화로운 생활 속에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그러나 이러한 생활도 길지 못해 1846년 11월 36세때 그는 상드와 영원한 이별을 하고 그 와 동시에 그의 건강도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이때부터 한 곡의 작품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쇼팽'은 생활을 위해 1848년 영국에 건너갔고 옛날 그의 피아노 제자였던 스코틀랜드의 부호의 딸 젠스터링의 초청으로 스코틀랜드 연주여행을 했으나 이것이 건강에 치명상을 주어 다시 파리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건강의 악화로 1849년 10월17일 오전 2시 '쇼팽'은 파리 프랑스 봔둠 자택에서 3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파리 페르 라세즈의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그가 20년전 고국을 떠날 때 가지고 온 폴란드 흙이 유해 위에 뿌려졌고 그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고국의 바르샤바 성 십자교회에 안치 되었다.

그의 작품중에 실내악곡과 가곡등이 약간 있으나 뭐니 해도 피아노 작품이 '쇼팽'의 본질이며 이는단지 피아노를 통한 음악의 시를 엮은 낭만주의 작곡가라는 것을 지나 피아노 그 자체를 음악으로 승화시킨 '쇼팽'의 인생이요 철학이라는데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쇼팽'의 작품중에 폴로네이즈나 마즈르카는 분명히 폴란드적이지만 전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화려한 장식적인 요소나 섬세한 감각은 파리에서 출입한 귀족사회의 취미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음악을 국적불명의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 흐르고 있는 그의 정신과 감정은 어디까지나 폴란드적이며 이것은 외적의 침략을 받은 고 국에의 애국심으로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폴란드적인 체질과 더불어 그의 작품의 특징은 깊은 서정과 풍부한 정서, 여기에 고상한 품위가 큰 매력이 되고 있다.

<주요작품> "즉흥 환상곡 c# minor op.66 [1835] "뱃노래 F# op.60" [1846] "피아노 콘체르토 No,1 e minor" [1380]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폴로네이즈" [1831] "피아노 트리오" [1829] "첼로 소나타" [1846] "군대 폴로네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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