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사가뭔가요?

음악사가뭔가요?

작성일 2003.08.24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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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숙제에 음악사를 쓰라고하는데 ㅡㅡ;;
이게뭔뜻인지...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음악의 역사를 말하는것같네요.

서양의 음악사인지 한국의 음악사인지 애매하네요.


-------------------------------------서양의음악사-----------------------------------------


***시대구분

고대의 음악(선사시대-5세기)

중세의 음악(500-1450)

르네상스의 음악(1450-1600)

바로코의 음악(1600-1750)

고전파의 음악(1750-820)

낭만파의 음악(1820-1900)

국민악파의 음악

근대 및 현대의 음악

### 고대의 음악
음악사에서 고대는 선사 시대로부터 로마 제국이 멸망한 5세기 까지를 일컫는다. 이시대의 음악에 관한 자료는 매우 적지만, 옛 문헌과 동굴.무덤.사원 등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에서 당시에도 음악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있게 한다.

당시 음악으로는 시편에 붙여진 단성의 노래가 많이 불리었고, '리라'와 '아울로스' 등의 악기가사용되었으며, 피타고라스에 의해 음악 이론이 발달되기도 하였다.

###중세의 음악
6세기부터 15세기까지를 중세라 하며, 성가(찬트)의 발전과 다성 음악의 시작, 세속음악의 출현 등이 이 시대 음악의 특징이다.
중세 음악의 주류를 이루었던 크리스트교 음악은 '그레고리오 성가'가 대표적이며, 이러한 성가는 10세기까지 발전했고, 11세기에는 다성 음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양식은 후에, 노트르담 악파나 아르스 노바 음악으로 이어졌다.
또한, 십자군의 원정 등으로 나라 간에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성가 이외의 새로운 형태의 음악인 일반 세속 음악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귀도 다레초는 악보와 계명 창법을 고안하여 음악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 르네상스의 음악
1450년부터 1600년까지를 르네상스 시대라 한다. 르네상스란 서유럽 여러 나라의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일어난, 고대 그리스·로마의 철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의 부흥 운동이다. 이러한 사회적 기운은 음악에서 세속 음악과 다성 음악, 기악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르네상스 음악은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나타나서 영국·이탈리아·독일 등으로 퍼졌다. 그리고 조스캥 데 프레와 라소가 중심이 된 네덜란드 악파와 영국의 작곡가들은 3성부의 다성 음악 작품을 작곡하였고, 네덜란드 악파에 의해 모방 대위법이, 루터에 의해 찬송가 형태가 확립되었다.
또한, 르네상스 초기에 4성부 조직이 확립된 후에 후기로 가면서 5·6·7·8성부의 다성적 기법이 성행하였고, 무반주 합창곡의 작고, 장조와 단조를 중심으로 하는 조성 음악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바로크의 음악
1600년 경부터 1750년까지를 바로크 시대라 한다. 이 시대는 절대 군주의 시대로, 변화와 모험, 이성과 신앙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시기였다.
음악의 중심이 교회로부터 궁정이나 귀족사회로 옮겨지게 되면서 교회 선법은 점차 약회되고, 장조와 단조의 중심적 역할이 뚜렷해졌다. 그리고 다성 음악이 절정에 이르면서 화성 음악이 발달해 갔고, 여러 가지 새로운 모습의 양식이 나타났다.
또한, 이탈리아에서는 그리스 극음악을 부흥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는 그 후 몬테베르디, 프랑스의 륄리, 영국의 퍼셀, 나폴리의 스카를라티 등에 의해 근대 오페라(가극)로 발전하였다.
기악 양식이 발전되면서 현악기나 건반 악기가 발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코렐리·비발디 등의 작곡가들에 의해 합주 협주곡·바로크 소나타·모음곡·푸가 등이 만들어졌다.
특히 바흐의 헨델은 오라토리오·칸타타·협주곡 등에서 불멸의 작품을 남겼다.

###고전 악파의 음악
1750∼1825년까지를 '고전주의 시대'라 한다. 이 시대는 사회적으로 신인문주의가 제창되었고, 사상적으로는 관념론과 이상주의가 대두되었으며, 시민 계급이 해방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위에 모든 예술은 단순 명료하고 간결하며, 인간의 실체와 정신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이상으로 하였다.
음악도 그러한 영향을 받아 여러 면에서 변화를 일으켰다. 대위법 중심의 복잡한 다성음악에서, 간결하고 명쾌한 화성 음악으로 변화하였고, 소나타 형식이 생겨나 교향곡·협주곡·독주 소나타·현악중주곡 등의 새로운 기악 양식이 사용되었다.
가극은 시와 극과 음악이 융합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면서 글루크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가 작곡되어, 극음악이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음악가는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을 들 수 있다. 하이든은 소나타 형식과 악기 편성법을 확립하였고, 모차르트는 소나타 형식을 더욱 발전시키는 한편,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작곡하였으며, 베토벤은 고전파 음악을 최고도로 발전시키고 낭만파 음악에의 길을 열었다.

###낭만파의 음악

1. 전기 낭만파
19세기에 이르자 유럽에는 근대 국가들이 세워지면서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산업 혁명이 일어났다. 또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이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자유로운 사상과 감정에 눈 뜨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보편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 이지와 사고보다는 상상에 의한 것, 개인의 자유로운 감정과 사상 등에 관심을 가졌고, 이러한 경향은 음악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가곡에서는 슈베르트에 의해 시와 음악이 밀접하게 결부된 '리트(lied)라는 새로운 표현 형식이 확립되었고, 고전적 형식에 벗어나 즉흥곡·랩소디·무언가 등의 자유로운 형식에 의한 기악 소곡이 작곡되었다.

또한, 음악이 문학과 회화 등의 다른 예술과 결합하게 됨으로써, 이를 소재로 한 서정적이고 환상적이며, 사실적인 교향시가 많이 작곡되는 등 표제 음악이 발전하였다.

이 시대의 대표적 음악가로는 독일 오페라의 거장 베버(1786∼1826), 예술 가곡과 즉흥곡으로 서정성이 흐르는 낭만 정신을 이끌어 온 슈베르트(1797∼1828), 무언가의 창시자 멘델스존(1809∼1847), 독일 낭만주의를 절정에 이르게 한 슈만(1810∼1856), 피아노의 시인 쇼팽(1810∼1849) 등이 있다.

2. 후기 낭만파
19세기 후반에 이르자 낭만파 음악은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면서 더욱 다채로워져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시대의 전반적인 특징은 대규모의 악곡이 많이 작곡되었고, 가극·화성법·관현악법 등이 급속하게 발달하는 한편, 자유로운 표현에 의한 악곡이 작곡되었다.

이탈리아의 베르디(1813∼1901)와 푸치니(1858∼1924), 프랑스의 비제(1838∼1875)등은 사실주의와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한 작품을 작곡하여 낭만파 오페라는 절정을 이루었고, 독일의 바그너 (1813∼ 1883) 에 의해 음악에 극·미술 등이 종합된 악극이 창시되었다.

또 말러(1860∼1911)·브루크너(1824∼1896)·R .슈트라우스(18641∼1949) 등에 의해 교향시와 교향곡은 더욱 새로운 경지로 발달하였다.

브람스(1833∼1897)는 지나친 표제적 경향을 피하여 고전적 형식을 계승함으로써 신고전팡의 음악을 낳았으며, 생상스(1835∼1921)는 프랑스의 독자적인 음악 문화를 쌓으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차이코프스키는 국민 악파 음악의 특징인 민족적인 색채가 짙은 음악을 작곡하면서도 보편적이고 세계성을 띤 음악을 작곡하여, 풍부하고 다양한 색채의 음향을 창출하였다.

이 시기 음악에서는 보다 풍부한 음향과 색채가 추구되어, 각 악기의 음색을 살린 다양한 악기 편성이 시도되었고, 반음계 진행과 안어울림 화음이 많이 쓰이는 등의 새로운 작곡 기법이 사용되었다. 즉 무조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금관 악기가 현대식으로 개량되어 플루트·트럼펫·코넷· 등의 악기에 밸브가 부착되었으며, 연주 기술은 고도의 기교를 요하게 되었다.

###국민 악파의 음악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동유럽 여러 나라와 북유럽 제국에서는 프랑스 혁명에 의해 조성된 자유·평등의 전신과 민족 해방을 목표로 한는 국민주의 운동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음악에도 나타나 국민 악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독일·프랑스·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절정을 이루고 있던 낭만파 음악에 대항하여 , 러시아·헝가리·보헤미아 등지의 작곡가들이 중심이 된 '음악 재창조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당시 예술가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작품 소재의 소중한 근원이라 생각하였다. 작곡가들은 자기 나라의 민요나 전승 음악의 선율·리듬 등을 재편성한 작품과 자기 나라의 신화·전설·역사·자연·풍속 등을 소재로 하여 극음악을 작곡하였다.

이러한 국민 악파의 음악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빛을 잃었지만, 오늘날 민족적인 소재를 현대 음악에 사용하려는 경향을 낳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글린카(1804 1857)를 비롯하여 발라키레프(1837 1910)·보로딘(1833 1887)·큐이*1835 1918)·무소르그스키(1839 1881)·림스키코르사코프(1844∼1908) 등의 러시아 5인조가 나타났으며, 체코에서는 스메타나(1824∼1884)와 드보르자크(1841 1904), 노르웨이에서는 그리그(1840∼1911), 핀란드에서는 시벨리우스(1865∼1957) 등이 이 시대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들로 활약하였다. 그밖에 헝가리의 바르토크(1881∼1945), 코다이(1882∼1967) 등이 있다.

###근대 음악
19세기말 정신적으로나 기법적으로 낭만파 음악이 더욱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해지기 시작하면서 음악은 전환기를 맞이 하여고 새로운 음악 시대가 열렸다.

근대 음악은 19세기 마지막 10년과 20세기 상반기의 약 20년, 즉 제1차 세계 대전 종말(1918년)까지 세기의 전환기를 중심으로 한 시기(약 30년간)의 음악이다.

당시의 제1차 세계 대전은 과거의 낡은 유럽의 질서를 전복하여 새로운 현대적인 사회를 낳게 하는 동기가 되었으며, 음악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시대 음악의 특징은 점차로 조성이 없는 음악으로 바뀌어 가는 경향을 들 수 있다.

근대 음악은 그 표현 방법이나 양식이 다양한데, 크게 인상주의 음악·표현주의 음악·원시주의 음악으로 나눌 수 있다.

① 인상주의 음악 : 19세기적인 주관주의에 대한 하나의 반동으로, 미술의 색채와 감각을 음악에 표현한 것이다. 반음계·온음계·교회 선법 등의 도입, 불현화음의 사용, 관현악의 색채적인 용법의 탐구 등을 통해 자연으로부터 받은 순간적인 인상을 그린 음악으로, 드뷔시와 라벨이 그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② 표현주의 음악 : 종래의 조성이나 형식을 타파하고 조성이 없는 음악으로의 변혁을 꾀하면서 내변의 감성을 대담하게 표현한 음악으로, 쇤베르크·베베른 등이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③ 원시주의 음악 : 후기 낭만파의 지나친 세련성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음악으로, 강렬하고 격렬한 ㅣㄹ듬과 음색을 사용하여 원시적이 ㄴ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불새', 바르토크의 '알레그로 바르바로' 등이 원시주의 음악의 좋은 보기이다.



###현대의 음악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인 1918년부터 1930 연대 초까지에 유행하던 신음악 경향, 1930연대에 고개를 든 신고전주의적 경향, 제2차 대전 이후까지의 세 시기를 현대 음악의 시기라고 한다.

제1차 대전 이후, 당시까지의 주관적·서정적·조화적인 음악에 반하는, 극단적이고 비정서적이며, 불협화음적인 음악이 유행되었다. 악곡의 구성이나 악기 편성은 규모가 작아졌고, 악곡의 형식은 종래와 다른 새로운 기법이 나타났다. 이러한 음악을 '신음악'이라고 한다.

신음악의 과도기적인 실험을 기초로 하여 다시 엄격한 구성감과 고전적인 질서로 돌아가려는 신고전주의적 경향이 스트라빈스키와 힌데미트에 의해 1930연대에 시도되었다. 그 후 제 2차 대전과 파시즘으로 말미암아 많은 음악가들이 사망하거나 활동에 제약을 받아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젊은 음악가들이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새로운 음악에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로 인해 현대 음악은 매우 광범위해졌으며,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조 음악과 무조 음악이 뒤섞여 나타났기 때문에 근대 음악의 특징과 작곡가의 구분도 분명한 선을 긋기가 힘들어졌다.

현대 음악은 현대 과학에 의한 음향 기기가 사용됨으로써 새로운 음악이 다양하게 시도되었는데, 자연의 소리를 녹음 편집해서 만드는 구체 음악과 전자파에서 얻은 음향을 변화 합성시킨 전자 음악, 컴퓨터 음악 등이 시도되었다. 대표적인 작곡가로 슈톡 하우젠·케이지 등이 있다.


---------------------------------국악의 음악사--------------------------------------------------

상고시대

우리 나라의 고대 음악도 다른 나라의 경우와 같이 종교 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발전해 왔다. 선사 시대의 음악 문화는 우리 나라에 나타난 기록이 없으므로 중국 문헌의 단편적인 기록들을 통해 이해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여러 문헌은 우리 음악을 기록하고 있는데, 주로 악기 이름과 제천행사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우리 민족을 이족(夷族) 또는 동이족(東夷族)이라 불렀으며, 동이족의 음악을 매 리(離) 주리(侏離)라 하였고, 춤은 지모무(持矛舞)라 불렀다.

음악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음악 이름의 글자로 보아 춤은 창을 들고 추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농경 사회 이전 수렵 사회에서 추었던 춤으로 이해 할 수 있다. 또 구이(九夷)의 음악과 춤을 하(夏)나라 왕 앞에서 연주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B.C. 2000년경의 우리 음악이 우수했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민속을 소개한 문헌의 글은 매우 상세하게 쓰여져 있다. 부여에는 매년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고, 고구려는 10월에 동맹이라는 행사를 열었으며, 동예는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다.

우리 나라 음악에 대하여 씌어진 가장 오래된 문헌은 중국의 진수가 지은 '삼국지'이다. 그 중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부여에는 영고, 고구려에는 동맹, 동예에는 무천이란 제천 행사가 있어, 온 국민이 한데 모여 며칠 밤낮을 춤과 노래를 즐기며,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빌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이미 노래나 춤과 악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현악기인 '슬'이라는 악기가 진한과 변한에 있었다고 한다. 영고 동맹 무천은 모두 추수가 끝난 후 하늘에 감사하는 국가적인 하늘제사로써,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 제사한 후 며칠 계속하여 술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고 즐겼다. 또 남쪽의 마한에서도 5월 씨뿌리기를 끝내는 때와 10월 추수하고 난 후 자연에 제사하고 연일 음식과 술을 먹고 노래와 춤으로 즐겼다.

부여 고구려 동예가 언어 풍속이 같고 마한 진한 변한도 북쪽지방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영고 동맹 무천과 마한의 행사는 그것의 제천 의식과 온 국민이 즐거움을 함께 한다는 뜻으로 보아 같은 풍속이며, 이러한 풍속이 선사 시대 우리 민족의 공통된 습속이었을 것이다. 특히 진한에는 '슬'이라는 현악기가 쓰였다고 하는데, 이 악기는 우리말로 '고' 라는 악기일 것이며 가야고의 원형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어느 민족이나 언어와 함께 고유한 음악이 있다. 이 음악은 종교와 더불어 생성 발전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음악이 독립하여 연주하지 못하고 문학 음악 춤이 혼연일체되어 연주된 선사 시대에는 음악이 종교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제사도 음악으로서 의식을 집행했으며 제사가 끝난 후 즐거운 놀이에도 음악과 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제사는 일종의 굿이므로 이러한 굿과 놀이는 현재 5월의 강릉 별신굿과 10월의 각 지방의 도당굿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풍속으로 보더라도 5월 단오를 수릿날이라 하여 수릿떡을 만들어 먹고 노래와 춤으로 즐기며, 10월(음력)을 상달(上月)이라 하여 초생달 아래에서 집집마다 신에게 고사를 드리고 선조 무덤에 제사하는 옛 풍속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

이전시대의 음악을 계승 발전시킨 삼국시대는 고구려와 신라, 백제, 가야가 제각기 고유한 국가체제와 문화를 형성하였던 3세기 경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668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고구려에서는 거문고가 가야에서는 가야금이 창안되어 이 시대의 음악사를 주도했다. 또, 문화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이 시대는 중국, 서역의 음악이 전래되었고, 삼국의 음악이 중국, 일본에 진출하는 등 전례없는 국제교류시대가 전개되었다.

고구려의 음악문화는 고구려 고분의 벽화와 『삼국사기(三國史記)』『일본서기(日本書記)』『수서(隋書)』등의 문헌자료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악기 거문고는 『삼국사기』악지에 의하면 진(晉)나라에서 보내온 중국의 칠현금을 왕산악(王山岳)이 악기의 외형은 그대로 두고 구조를 개조하여 새악기를 만든 후, 이 악기를 위한 일백곡을 지어 연주를 하니 갑자기 '검은 학'이 내려와 춤을 추므로 '현학금(玄鶴琴)'이라 이름 붙였는데 훗날 '학'자가 빠지고 '현금(玄琴)', 즉 거문고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유래로 연주되기 시작한 거문고는 독주 악기로, 또는 춤 반주 악기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현재까지 우리 음악사에 중요한 맥을 이루며 전승되고 있다. 또 중국 문헌인 『수서(隋書)』동이전에, 고구려에서는 오현금·피리·횡취(橫吹)·소(簫)·고(鼓) 등이 연주되었다고 전하는데, 일본에 전해진 군후, 횡적, 막목, 춤의 편성과는 달리 중국 전래의 외래악기가 포함된 것으로 고구려 음악의 전혀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이 밖에 서역에서 들어온 관악기 피리가 편성에 추가되므로써 풍부한 음향을 가진 새로운 고구려 음악이 연주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서』와 『구당서(舊唐書)』등에는 중국 수(隋)와 당(唐)나라 때 중국 궁중에서 연주되던 각나라의 음악을 7부기(七部 伎)·9부기·10부기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고구려악이 포함되어 있어 이는 국제적인 음악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라 할 수 있다.

백제의 음악문화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인 시기는 늦으나 5세기~6세기 사이에 중국 남송과 북위 등에 고구려악 못지 않게 소개되기도 하였다. 삼국 중에서 일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측되는 백제음악은 고구려 음악과 같이 군후·막목·횡적·춤의 편성으로 되어 있다. 특히 미마지(味摩之)가 오(吳)나라에서 배운 기악무(伎樂舞)를 일본에 전한, 이 기악의 가면은 일본 여러 절에 지금까지 보관되고 있다. 이기악은 산대도감(山臺都監) 놀이 및 봉산 탈춤과 같은 가면무라고 한다. 동이전에 의하면, 백제 국내에서는 고(鼓)·각(角)·공후·쟁·우·지·적(笛) 등 일곱가지 악기가 사용되었다. 이들 악기는 중국 남조의 청악(淸樂)과 유사하다. 한편, 백제의 가요로 유명한 정읍사(井邑詞)가 있고, 곡목만 전해지는 방등산·무등산·지리산 등이 있다.

신라의 음악문화는 삼국 중 중국과의 국제교류가 가장 저조했다. 가야국의 성열현(省熱縣) 사람인 우륵(于勒)은 가야금을 위해 12곡의 가야금곡을 지어 가야금 시대를 열었다. 우륵이 지은 12곡의 가야금 곡의 제목은 대부분 현재 경상남북도의 여러 지명(地名)과, 이밖에 탈놀이 중의 사자춤과 관련이 있을 듯한 라는 곡명, 구슬던지기 놀이의 일종인 라는 곡명으로 되어 있어 우륵이 향토색 짙은 각 지역의 음악 및 민간에 전승되는 놀이 등을 주제로 가야금곡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6세기 경에 신라에 수용된 가야금은 신라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당시 신라악은 대부분 가야금과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편성이다. 통일 전의 ·· 등 고악(古樂)은 가야금을 수용한 이후, 곡이 세련되고 아정한 음악으로 바뀌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또한 신라 음악사를 보면, 조상제사, 연희 등에 소용되는 음악을 위해 둔 것으로 해석되는 '음성서(音聲署)'라는 국가음악기관을 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통일신라시대

이 시대의 음악문화는 불교음악이 본격적으로 전래 되었으며, 궁중에서는 삼현삼죽(가야금·거문고·비파·대금·중금·소금)이 주축을 이루는 향악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신라고유의 향토음악 향악은 삼현삼죽과 박판(拍板)·대고(大鼓)·가(歌)·무(舞)로 이루어져 훨씬 다양하고 화려해졌다. 이는 서역의 악기 향비파, 당나라의 악기 박판·대고 등을 복합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상류사회 지식계층에는 거문고를 중심으로 한 금가(琴歌)의 문화가 맥을 이루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금가인 류의 음악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민간에서는 고대의 제천의식을 수반했던 국중대회의 전통이 팔관회(八關會)로 이어지기도 했다. 또한 이 시대의 특징으로 범패를 들 수 있다. 이는 불교의 의식음악으로 830년 신라의 진감선사가 당나라에서 배워 옥천사에서 가르쳐 불교음악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신라의 향가는 진성여왕 2년(888)때 위홍과 대구화상이 편찬한 삼대목이란 향가집은 전해지지 않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처용가, 헌화가, 서동요 등 10여곡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음악사는 의종말년(1170)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 고려조는 불교를 숭상하여 불교적인 행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고, 전통적인 무격의식과 관련되어 면면히 이어온 것도 있다.

전기는 향가와 화랑의 전통, 팔관회와 연등회 등 통일신라의 유풍이 강하게 전승되는 한편, 중국으로 부터 아악이 전래되어 향악, 당악, 아악의 전통이 정립되었다. 종묘 사직 등 국가의 중요한 제사에 사용된 중국 고대의 의식음악인 아악은 금·석·사·죽·포·토·혁·목의 팔음(八音)악기를 당상악(堂上樂;登歌)과 당하악(堂下樂;架)으로 구분 배치하여 율려(律呂)에 맞게 교대연주하는 독특한 음악이다. 뿐만아니라 여기에 악장과 춤이 반드시 따르는 악, 가, 무 총체의 음악으로서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가장 이상적인 음악으로 인식되어 왔다.

당악은 악기나 춤에 있어서도 당악기·향악기 및 당악정재·향악정재라는 구분이 생겨나게 된다. 당악정재(唐樂呈才)는 방향·비파·생·당적·피리·장구·박 등이 당악기 반주 및 순한문으로 된 송사(宋詞)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당악의 핵심을 이룬다. 송나라에서 들어온 교방악(敎坊樂)·사악(詞樂)과 원나라의 일부까지를 포괄한 중국의 속악을 통칭한 당악은, 향악과 양립하여 쌍벽을 이뤄 좌우로 구분(양부악(兩部樂); 좌방악(左坊樂) - 당악, 우방악(右坊樂)-향악) 되었다.

고려의 향악은 향악기 및 사뇌·삼국악·양부악의 전통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통일신라의 향악을 계승하였다. 중엽에는 동래에 귀양살이를 하던 중 거문고를 어루만지며(撫琴) 노래하였다는 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금곡(琴曲)이 출현, 이는 우리말 가사를 가진 조선조의 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후기에 들어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유풍이 점차 사라지고, 아악의 전통도 주변 정치상황에 기인하여 문란해졌다. 이 시기 음악문화는 전기에 수입된 아악과 당악이 고려 후기의 혼란기를 통해서 점차 쇠퇴해 가는 일면과 이런 사회상을 반영한 새로운 노래들이 대두된 것이 또한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당악은 쟁과 대고 대신 대쟁과 아쟁, 교방고가 쓰이고 새롭게 퉁소가 사용된다.

고려후기의 향악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별곡(別曲)'의 출현이다. 별곡은 8장으로 된 이나 13장으로 된 의 경우에서와 같이, 여러장으로 된 긴 가사가 1장의 음악으로 반복되는 유절 형식의 장가(長歌)이다. 그외 이 있다. 이러한 고려의 속악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 가사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는 이유에서 잡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 음절은 조선 초기의 궁중음악에 차용됨으로써 그 음악적 내용을 후대에 전하였다. 의종이 무신(武臣)들에 의해 시해(1173)된 사건을 계기로 여러차례의 외침과 장기간의 천도로 악공이 흩어지고 아악기 손실 등 그 전승에 타격을 입어, 1371년, 공민왕이 아악서(雅樂署)를 신설, 아악복구작업을 일으켰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

고려 때와는 달리 불교 대신에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은 예악(禮樂)을 존중하여 이를 정치·교육의 근본 이념으로, 건국 초에 아악서(雅樂署)와 전악서(典樂署)를 설치하면서 조선조의 음악을 관장하기 시작하였다.

1392년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까지 전기의 특색은, 숭유(崇儒)불교억제정책으로 연등회와 같은 불교관련 행사의 폐지, 아악의 일신 그리고 건국 개업을 칭송하는 ··· 등 신악(新樂)의 창작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음악제도 보존을 위해 성종 24년『악학궤범』9권 3책의 형태와 같은 악서가 발간된 것이다. 『악학궤범』은 음악역사 서술을 생략하고, 12율의 결정법, 등가악과 헌가악의 중심음 사용법, 악기 진설법, 춤의 진퇴작변(進退作變), 악기제조법과 조현법 등 음악의 실용성을 광범위하고 상세하게 기술하는 데 치중하였다.

세종에 이르러 박연·남급·정양, 맹사성과 같은 이론가에 힘입어 음악 사업을 활발하게 벌여 아악의 부흥, 향악의 창작, 악보 창안·간행을 하였다. 아악기 제작으로 악기를 자급자족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중요한 악기제작으로 편경(編磬)과 편종(編鐘)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간보(井間譜; 매정간이 시간단위를 표시하는 유량악보) 창안 및 악보출간을 들 수 있는데, ···등의 신악이 이 기보법에 의해 악보화되었다. 이는 다른 기보에 비해 싯가(時價)가 분명한 점이 장점이다.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속악보는 용비어천가를 가사로한 여민락 만·문묘악 그리고 세조실록 악보에 전하고 있는 정대업·보태평 등이다. 성종대에 차츰 당악기는 향악에 편성되는가 하면 악기 개량도 보인다. 이러한 악기들은 박(拍)·월금(月琴)·당비파·장고·해금·아쟁·당적·당피리·태평소 등이다. 향악은 『대악후보』·『시용향악보』·및 『금합자보』에 기보되었고, 특히 직업음악인이 아닌 선비들간에 애탄(愛彈)되었던 금곡 『금합자보』의 첫머리에 실린 평조의 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평조·우조·평조계면조·우조계면조의 과 을 파생하였다.

광해군에서 고종말 (1910)까지의 조선후기는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풍류음악의 발전, 일반 백성들의 생활감정을 표현한 민속음악의 발흥, 아악의 쇠퇴 등을 가장 두드러진 양상으로 꼽을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단절과 복구의 격동을 겪어 연향악 등 그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은 점차 향악적인 색채를 상실하게 되어 향악도 아악도 아닌 독특한 음악으로 변모하여 등가 및 헌가에 향비파·가야금·거문고 등의 향악기들이 편성된 조선 전기와 달리 향악기들은 헌가에서 빠지는 등 차츰 향악의 요소가 배제되었다.

임금의 거동에는 여러 형태의 고취악이 연주되었는데, 이는 전정헌가(殿庭軒架)·전정고취(殿庭鼓吹)·전부고취(前部鼓吹)·후부고취(後部鼓吹)등을 말한다. 행례에 사용되던 음악은 대개 여민락 만·여민락 영·유황곡·정동방곡·낙양춘·보허자 등의 곡을 들 수 있다. 전정헌가와 전정고취가 전·후부고취와 다른점은, 전자는 거문고·가야금 등 놓고 타야 되는 악기와 편종·편경·건고·응고·삭고 등 들고 다니기 어려운 악기로 편성되어 있어 일정한 장소에 위치하여 연주하는 형태이고, 후자는 행악(行樂), 즉 행진할 때 연주되는 음악형태로 주로 어깨에 메고 다닐 수 있거나 들고 다닐 수 있는 악기들이어야 된다.

아정한 음악 또는 담백하고 복잡하지 않은 정악이라는 음악이 있다. 이는 전문음악이 아닌 선비들의 음악이라는 점에서 '금가'와 통한다. 정악의 또다른 뜻으로 그 명칭이 음률로 지칭되었던 예와 같이 노래를 수반하지 않는 기악곡을 가리키며, ·· 등이 이 음률의 대표적인 곡에 든다.

영조 무렵에 고개를 든 판소리(타령 또는 잡가)는 문헌 유진한(柳振漢: 1711~1791)의 만화집(晩華集)에 춘향가 200구(句)가 있고, 송만재(宋晩載:1769~1847)의 판우회에는 12마당이 들어있다. 그 중 현재 춘향가·심청가·흥부가(박타령)·수궁가(토끼타령; 별주부전)·적벽가(화용도)의 다섯마당만 전하고 배비장전 이하의 7곡은 가사 또는 곡을 잃었기 때문에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 판소리는 한 사람의 창자(唱者)와 고수(鼓手)와 함께 긴 이야기를 소리와 몸짓·아니리(말체)로 끌어 가며 청중을 울리고 웃기는 대중음악이다. 소리나 아니리의 여러가지 표현에 맞는 동작을 취하는 것을 발림(科)이라고 한다. 그리고 고수가 북을 치며 "좋지"·"얼씨구" 등 감탄사나 흥을 돋구는 말들을 간간히 하는데, 이것을 추임새라고 하며, 이는 장단을 정확하게 치는 만큼이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판소리 초창기 인물로 우춘대(禹春大)를 비롯하여 권삼득(權三得)·모흥갑(牟興甲)등을 꼽을 수 있고, 그 후에도 박유전(朴裕全)·염계달(廉季達) 등 헤아릴 수 없는 명창들이 많이 있다.

이 판소리 외에도 조선후기의 민속악은 많은 분야가 새로 생겨났다. 즉, 서울지방의 잡가(12잡가), 절간에서 타락한 우바새(男)나 우바이(女)들이 절간으로 혹은 민가로 돌아다니면서 재주를 피우고 소리를 하는 사당패 음악, 남도 무악계의 시나위와 이 시나위에서 파생되어 점차 체계를 잡은 산조(散調) 등이 있다. 그외 별곡과 함께 장가에 속하는 노래로 단가(短歌)인 가곡과 대조를 이루는 가사가 있다. 이는 음악중심인 가곡과 달리 사설이 중심이 되는 노래다. 시절가라고도 하는 시조는 가곡의 사설을 차용하지만 음악의 형식에 있어서 가곡처럼 5장이 아닌 3장으로 되어 있고, 1장의 박자수도 가곡보다 적어서 가곡을 단순화한 것이 바로 시조라 할 수 있다.


근세와 현대

고종31년 갑오경장(甲午更張)이후 제국주의의 간섭과 침략으로 대한제국은 급속도로 붕괴의 과정을 밟게 되고, 이후 한일합방과 일제 식민지시대로 접어들면서 음악문화도 급속한 변화를 겪었다.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던 궁중음악은 왕실의 몰락과 함께 쇠퇴의 길을 걸어야만 했으며 궁중음악에 종사하던 많은 음악인과 궁중연회에 참여하였던 무기(舞伎)들은 생업을 바꾸거나 새로이 생겨난 공연장에서 공연활동을 하였다. 그 결과는 왕실을 위한 의식음악(연향, 조회, 동가(動駕), 군례(軍禮)의 중단, 제례음악의 중지, 궁중음악인의 감소를 가져왔다. 갑오경장 직후만 해도 772명이나 되던 악사들은 차차 문화 말살정책으로 1917년에는 겨우 50여명만이 남게 되었다. 서양음악이 들어왔는가 하면 서양식 군악대가 창설되고 국악은 또다시 수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조선조 음악이 공연예술로 전환되는 시대적 변천과정을 겪으며, 『조선악개요(朝鮮樂槪要)』 『조선아악요람(朝鮮雅樂要覽)』 등 여러가지 악서의 출판, 경종보 대금보 피리보 당적보 해금보 아쟁보 단소보 현금보 등의 악보제작과 오선보로의 채보 음반취입 등의 작업이 이루어져 조선조의 음악전통이 현대로 전승되는 과도기적 사명을 수행하게 된다.

이왕직 아악부(雅樂部)의 전통은 해방 이후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구황궁아악부로 존속하다가 1950년 국립국악원의 창설로 그 맥을 이었다. 조선조 중 상류층에서 애호되던 정악도 왕조의 몰락과 신분제도의 붕괴로 크게 위축되었을 뿐만아니라 새로운 공연형태를 통해 대중에게 파고들기 시작한 민속악에 밀려나는 위기를 맞아, 정악 애호가들이 정악의 융성을 통해 전통문화를 계승코자 1909년에 를 결성하게 된다. 이는 최초의 사설의 음악기구라는 역사적 의의와 전통음악과 양악을 동시에 교육시키는 음악교육기관으로 평가된다.

잡가는 오늘날 12잡가로 알려진 긴 잡가와 빠른 휘모리 잡가가 주류를 이룬다. 12잡가는 , , , , , , , 등이며 휘모리 잡가는 , , , , , 등이 있다. 특히 서울에는 잡가를 잘 부르는 '사계(四契)축 소리꾼'과 선소리를 잘 부르는 '오강(五江)의 소리꾼' 들이 있어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서울 노래의 맥을 이어 주었다.

창극은 판소리의 새로운 변형으로서 현대국악사에 큰 의미를 지닌다. 판소리를 각 등장 인물별로 그 역을 분담하여 분창하는 양식으로 출현하였다. 이는 외래 공연양식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이 시기의 사회변화상을 반영하고 있다. 창극은 최초의 서양식 원형극장인 원각사에서 첫 선을 보였다. 판소리는 창극에 밀려 고유의 음악적 발전은 크게 진전되지 못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결성 이후 판소리 명창들은 대규모 창극공연과 판소리 공연활동을 벌임으로써 남도음악의 전승을 공고히 할 수 있었고 그것이 오늘에 이어지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1960년에 접어 들면서 국악원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활발해져 중앙의 대소 연주를 비롯, 지방순회연주, 국외의 파견 연주, 국가 의식의 연주악, 문묘 종묘 등 연례적인 제악 연주 및 TV 라디오 방송을 통한 각종 연주회를 연 백회이상 실시하여 국악 보급 활동에 전력을 다했다. 국립국악원은 아악이나 창작 국악 뿐만 아니라 민속악(民俗樂)부분, 즉 판소리 산조(散調) 민요(民謠) 민속무용(民俗舞踊)까지도 포괄한 범국악(汎國樂)의 종가(宗家)로 군림해 왔다.

현재 우리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노력들이 다양한 곳에서 벌여지고 있다. 국악인들의 끈질긴 집념과 60년대의 탈춤부흥운동, 70년대의 마당극, 풍물, 마당굿, 대동놀이 등 연희성을 띠는 연행예술운동의 진행으로 우리 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풍물의 대중화는 서양음악에 밀리는 국악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게 되었다. 또한 김덕수 사물놀이패 등 우리음악을 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끊임없이 시도하면서, 우리 국악을 세계속에 독특하고 훌륭한 음악으로 인정받게 하였다. 방송매체에서도 국악의 이론 등 다채로운 공연을 소개하고 있고, 이러한 폭넓은 활동은 현재 국악의 재평가, 정립으로 새로운 시도를 도모하고 있다. 우리 고유의 전통음악 국악을 활성화시키고, 발전시키는 모습은 국악의 해를 맞아 그 열기를 더하고 있다.

음악사가뭔가요?

방학숙제에 음악사를 쓰라고하는데 ㅡㅡ;; 이게뭔뜻인지... 음악의 역사를 말하는것같네요. 서양의 음악사인지 한국의 음악사인지 애매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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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합니다~!☆★☆★ 대취타의 음악사구분좀 알려주세요... 예를 들어 -- 현대음악... 대취타의 음악사 구분 -한국 전통음악중 군악(군대 음악)의 일종입니다. 행진곡이라고 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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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평균율이 훌륭한 이유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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