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민속놀이에는 무엇이 있나요?

우리나라 민속놀이에는 무엇이 있나요?

작성일 2010.02.04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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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우리나라의 민속놀이의 종류.

질문2. 민속놀이의 하는 방법, 특징

질문3, 민속놀이의 유래

질문 3번은 중요하지 않지만 답변 해줄 수 있으면 하는것이...

되도록 빨리부탁.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전통사회는 농업을 본위로 하는 사회였고 자연을 통제하는 기술체계가 아직 적응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농한기와 농번기가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논농사를 두고 볼 때, 음력 2월 중순부터 농사준비를 시작하면 4월에는 모심기를 마치고 첫 김을 맬 때까지 한 열흘을 쉰다. 휴식이 끝나면 김매기를 시작하고 7월 초순 무렵에 마지막 김매기를 마치면 추수할 때까지 한 달 정도를 또 쉰다. 이때가 ‘호미씻이’ 또는 ‘풋굿’이라는 축제가 벌어지는 시기이다.
추석을 지나 중구(重九) 무렵까지 벼를 수확하면, 탈곡과 도정 작업을 하고 이모작의 경우 보리 파종까지 마치면 시월 말이다. 이때부터 석 달은 이른바 동삼(冬三)으로 농한기이다. 이렇게 보면 생업력 상으로 쉬는 시간만 해도 넉 달 반이나 된다. 여기에다 설, 대보름, 영등날, 초파일, 단오, 유두, 백중, 추석, 중구, 시월고사와 묘사, 동지 등의 명절휴가를 합치면 무려 여섯 달 가까운 시간을 힘겨운 농업 노동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지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간들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은 물론 아니다. 채전(菜田)을 가꾸거나 농산물을 가공하고, 가사도구나 농사용구를 만들며, 퇴비를 마련하고 땔감을 장만하는 등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이때 집중적으로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일들은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전통사회의 민중들은 이런 일들을 ‘여가 삼아 하는 소일거리’ 정도로 생각하였지 힘든 노동으로 보지 않았다. 일과 여가의 혼효현상(混淆現象)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듯 노동과 여가의 경계가 모호한 것은 힘든 농사와 잡역노동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모를 심을 때나 김을 맬 때는 어김없이 풍물과 노래가 함께 함으로써 노동의 고단함을 놀이의 즐거움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수행하였고, 무거운 짐을 옮기는 목도질이나 땅을 다지는 망깨질에도 항상 선후창 형식의 민요가 동행함으로써 곧잘 일판을 놀이판으로 전환시키곤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전통사회에서 일과 여가(민속놀이)는, 양과 질 양면에서 매우 균형 잡힌 상태로 상응하면서 인간다운 삶의 질을 보장하는 바탕으로 작용하였다.

 

간단히 풀이하면 농번기를 지난 휴식기간에 여가시간활용과 삶의 질 향상. 공동체 의식의 고취등을 위해 시작한 작은 놀이놀이들이 시간을 지나면서 전통놀이화 된 것입니다.^^

 

 

 

널뛰기








긴 널빤지의 중간을 괴어 놓고, 양쪽 끝에 한 사람씩 올라서서 번갈아 구르며 공중으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놀이. 음력 정초(正初)를 비롯하여 5월 단오, 8월 한가위 등 큰 명절에 많이 했으며, 주로 여성들이 즐겨 놀던 놀이이다. 도구가 간단하고 좁은 공간에서도 쉽게 할 수 있어, 전국에서 즐겨하던 놀이이다. 가까운 일본 오끼나와현[沖繩縣] 류큐[琉球]에 전승되는 판무(板舞)도 이 놀이와 유사하다.

기산풍속도첩-널뛰기






널뛰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문헌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시원(始原)에 대한 전설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온다.
속설에 의하면 감옥에 갇힌 남편을 보기 위해 여성들이 담 밖에서 널뛰기를 하여 감옥 안을 넘겨다보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집안에 하루 종일 갇혀 있다시피 하는 여성들이 담 밖의 세상을 보기 위해 널뛰기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놀이의 형태에 따라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되고, 더 근원적으로 들어가면 널뛰기는 ‘디딜방아’의 원리와 같음을 알 수 있다. 이 디딜방아는 고구려 이전부터 있었던 것인데, 널뛰기가 디딜방아의 발전된 형태라면 널뛰기의 유래는 삼국시대 이전으로 추론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문헌에 나오는 기록을 살펴보면,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誌)》<세시 원일조>에 “항간에서 부녀자들이 흰 널조각을 짚단 위에 가로로 걸쳐놓고 양쪽 끝에 갈라서서 굴러 뛰는데, 그 높이가 몇 자씩 올라간다. 그때 패물 울리는 소리가 쟁쟁하고, 지쳐서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낙을 삼으니, 이를 초판희(超板戱)라고 한다. 생각건대 주황의 《유구국기략》에 그곳 ‘부녀들이 널빤지 위에서 춤을 추는데, 이를 판무(板舞)라고 한다.‘고 했는데 이것과 비슷하다. 조선 초에 유구(琉球)가 입조(入朝)할 때 어떤 이가 그것을 사모해서 본받은 것인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널뛰기를 하려면 널빤지와 널 받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뛰는 방법은 단순히 뛰는 방법에서부터 다양한 기교를 부리는 방법까지 다양한데, 놀이도구와 뛰는 방법에 대해 나누어 살펴보자.

1) 놀이도구


① 널빤지 ― 널빤지는 탄력성이 있고 견고한 나무로 하되, 일반적으로 중간이 두껍고 양끝이 좀 얇은 것이 좋다. 보통 길이는 5~6m, 너비 35~40cm, 두께 5cm 정도가 적당하다.
② 널 받침 ― 널 받침이란 널빤지 가운데를 괴어 놓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 ‘고이개’라고도 한다. 보통 짚 묶음 또는 흙을 담은 가마니 같은 것으로 하며, 높이는 30cm 정도로 하는 것이 적당하다. 받침이 낮으면 널이 닿은 양쪽 땅이 파이기도 한다.

2) 널뛰기 방법과 동작

① 널뛰기 방법 ― 널빤지 양쪽에 한 사람씩 올라서서 처음에는 천천히 뛰기 시작한다. 널빤지 가운데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올라앉아 널빤지를 널 받침 위에 고정시키는 작용을 하도록 한다. 만약 두 사람의 몸무게가 차이 나면 가벼운 쪽으로 널빤지를 길게 하는데, 이때 ‘밥을 더 많이 갖는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두 사람이 마주서서 번갈아 뛰면,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탄력에 의해 몸은 점점 공중으로 높이 치솟게 된다. 이 놀이는 힘이 들어 오래 뛸 수 없기 때문에 번갈아 쉬었다가 뛴다.
② 널뛰기의 동작 ― 다양한 동작이 있는데 뛰어올랐을 때 두 다리를 곧추펴고 뛰는 것을 ‘곧추뛰기’라고 하고, 두 다리를 앞뒤로 벌려 뛰는 것을 ‘가위발뛰기’라고 한다.




 

이 놀이는 우선 체력향상에 도움이 된다. 특히 역동적이기 때문에 전신운동이 되고 또한 신체의 각 기능의 보강운동으로도 적당하다. 그리고 순환기 내부 기능이 향상되며 박자에 맞춰 뛰어야 하기 때문에 리듬감이 형성된다.

김용옥은《태권도 철학의 구성원리》라는 책에서 널뛰기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데, 널뛰기를 해본 사람은 이 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널을 처음 뛰다가 힘이 들어 그만두게 된다. 이는 자유낙하의 중력원리에 의해 그냥 정지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널을 뛰는 양자가 단순한 중력(무게)을 가진 무게로만 존재할 때는 그 물체가 떨어져 진행방향의 전위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너무도 에너지 손실이 크기 때문에 한두 번에 그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널을 뛴다’는 현상은 두 물체의 상하작용으로서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물체와 물체의 상하작용이 아니라, 생명과 생명의 공방원리인 것이다. 떨어지는 사람은 널을 밟는 순간 단순히 자유낙하의 이상을 밟아야 하고, 올라가는 사람은 단순히 그 상대방의 낙하의 힘을 받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중력의 힘을 이용하되 그 떨어지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나의 생명 에너지의 약동에 의하여 튀어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나의 튀어 올라감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것이며 상대방의 떨어짐(밟음)은 그 자발성에 대한 보조작용으로밖에는 기능할 수 없다. 그러나 상대방의 떨어짐(밟음)과 나의 올라감(튐)이 상승작용을 일으킬 때 물리적 함수 이상의 힘을 내어 솟구친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몸의 에너지 보충은 매우 작은 것으로도 큰 힘을 낼 수가 있게 된다. 달인이 되면 별 힘을 안들이고도 높이 솟구치게 된다. 그것은 역시 몸의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유연성·적합성)이며, 그것은 기(氣)의 타이밍의 예술인 것이다. 그리고 높이 치솟아 떨어지는 여인, 그 붉은 치맛자락에 감추어 있는 몸의 모습은 궁둥이가 좀 나오면서 몸 중심이 약간 밑으로 빠진 전형적인 기본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런 자세가 바로 위의 설명을 집약하는 형체이다.

 

 

쥐불놀이







 

정월 첫 쥐날[上子日] 저녁에 쥐를 쫓기 위하여 논둑이나 밭둑에 불을 놓는 놀이. ‘논두렁 태우기’ 또는 ‘쥐불놓기’라고도 한다. 이 놀이가 발전하여 깡통에 불을 담아 돌리며 불을 여기저기 옮겨 붙였는데, 산불을 염려하여 금지한 후로 지금은 거의 사라진 놀이가 되었다. 이 놀이는 각 지방마다 액을 막고 복을 비는 제액초복(堤厄招福)과 풍년을 기원하는 바람이 표출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쥐불의 크고 작음에 따라 그해의 풍흉 또는 그 마을의 길흉을 점치기도 하는데, 불의 기세가 크면 좋다고 하여 각 마을이 서로 다투어가며 불 기세를 크게 한다. 황해도지방에서는 마을 소년들이 두 패로 나뉘어 둑을 경계로 하여 한편에서 불을 놓으면 한편에서는 불을 꺼나가는 놀이를 하였다. 지는 편 마을로 이긴 편 마을의 쥐가 모두 쫓겨가기 때문에, 이긴 편 마을에서는 농작물에 해를 입지 않아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충남 금산의 경우 논둑이나 밭둑을 태우면 한 해의 액을 쫓아낸다고 믿고 있으며, 청양지방에서는 쥐불놀이를 하면 여자의 경우 밥을 할 때 치맛자락을 태우지 않고, 남자는 담뱃불로 옷을 태우지 않으며, 1년 동안 무병하고 손과 발의 무좀이 없어진다고 믿고 있다. 그밖에 여자들이 아주까리 대에다 머리카락을 매달아 불을 붙여 들고 집 주위를 “쥐 짖자.”하고 외치며 돌아다닌다. 이것은 쥐는 눈이 밝기 때문에 항상 밤에만 활동하므로 그 밝은 눈을 불로 지져 쥐의 눈을 멀게 해서 활동하지 못하게 하자는 일종의 주문인 셈이다.

쥐불놀이

새해 들어 첫 쥐날인 상자일(上子日)에 쥐와 관련된 풍속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정월조(正月條)〉에 소개되고 있는데, 콩을 볶으면서 “쥐 주둥이 지진다. 쥐 주둥이 지진다.”고 주문을 외웠다고 하며, 충청도 풍속에 떼를 지어 횃불을 사르는데 이를 ‘훈서화(燻鼠火)’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불깡통놀이는 쥐불놀이와 함께 행해졌던 놀이인데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유래는 6·25전쟁 이후에 생겨났다고 한다. 즉 전쟁 중에 공수된 군수물자 가운데 각종 통조림이 있었는데, 그 깡통을 놀이도구로 이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쥐불놀이와 결합되었다고 한다.
풍년을 기원하고 나쁜 액을 몰아내고자 하는 바람이 마침 쥐날에 쥐가 무서워하는 불과 만나 만들어낸 이 놀이는, 농경사회가 점차 약화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정월 대보름 저녁 이벤트행사의 일환으로 행해지면서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별다른 놀이방법은 없고 보통 몽땅 빗자루나 나무를 묶어 만든 다발에 불을 붙여 들고 마을 근처의 논밭 두렁에 불을 지르며 노는 것이다. 불을 지르며 이웃 마을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면 다툼이 벌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횃불싸움으로까지 번지기도 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2자 정도의 쑥으로 만든 불쏘시개를 가지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불을 놓기도 하고, 근래에는 불깡통을 돌리기도 한다.
불깡통을 만들려면 먼저 빈깡통 표면에 대못으로 수십 개의 구멍을 뚫는다. 구멍을 뚫는 이유는 공기를 잘 통하게 해서 깡통 안에 있는 관솔이나 나뭇가지가 잘 타도록 하기 위함이다. 깡통에 구멍을 뚫고 나면 1m 정도 되는 철사 줄을 깡통의 양쪽에 연결하여 손잡이를 만든다. 이렇게 해서 불깡통이 만들어지면 깡통 안에 나무를 넣고 불을 지핀다. 그리고 한 손으로 줄을 잡고 힘차게 돌리면 깡통에 넣은 연료가 타면서 마치 불덩이가 춤을 추듯 아름다운 불꽃을 연출한다.
아이들은 불깡통을 돌리며 누구의 불이 더 잘 타오르나 경쟁을 하기도 한다. 홰나 짚단 대신에 불깡통을 이용하여 쥐불을 놓으면 쉽고 간편하기 때문에 근래에는 불깡통 돌리기가 더 많이 행해졌다. 그래서 불깡통 돌리기가 쥐불놀이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깡통 돌리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다가 자정이 가까워지면 불깡통에 넣은 나무가 모두 타올라 밑에는 불씨만 남게 된다. 이때 떼를 지어 낮은 동산 위로 올라가 하늘 높이 불깡통을 던지면, 깡통에 남아 있던 수백 개의 불꽃이 떨어지면서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연을 날려보냄으로써 액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이, 불깡통을 마지막에 던져버리는 것도 액을 보내고 복을 맞이하기 위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혼자서 즐길 수 있는 놀이가 있고 여럿이 어울려야 제 맛이 나는 놀이가 있다. 쥐불놀이는 여럿이 어울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불을 놓고 불깡통을 돌리는 가운데 신명이 난다. 공동체 의식은 말로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면서 얻게 되는 것이다. 이 놀이를 통해서 놀이의 신명과 더불어 집단 구성원으로서의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이 길러진다.

쥐불놀이는 단순한 대보름 놀이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건강한 삶의 지혜가 녹아 있는 미풍양속이라 할 수 있다. 즉 마른풀을 태워서 풀잎에 붙어 있던 해충의 알과 잡균·유충 따위를 태워 없애고, 언 땅에 온기를 주어 새 풀이 잘 돋아나게 하려는 과학적인 사고가 담겨 있다. 따라서 곡물의 병충해를 그만큼 줄일 수 있으니 농사에도 좋을 뿐 아니라 잡균을 태워 죽이니 위생·방역의 측면에서도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윷놀이


 

윷을 던져 엎어지고 젖혀지는 결과를 가지고 말판에 말을 쓰면서 겨루는 놀이. 사람이 많을 때는 두 편 또는 세 편으로 편을 나누어서 논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놀이로, 특히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날까지 행해졌는데, 정초에 그해 농사의 풍흉(豊凶)을 점치기도 하였다. 요즘에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널리 행해진다. 한자로는 척사(擲柶)·사희(柶戱)라고 하기도 한다

 

윷놀이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농사의 풍흉을 점치고, 개인적으로는 한해의 길흉을 점치는 점술도구로 시작되어, 삼국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점차 놀이로 변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윷놀이가 소개되거나 언급된 문헌자료는 무척 많다. 가장 오래된 것은 중국의 《북사(北史)》와 《태평어람(太平御覽)》이다. 이 문헌들은 백제에는 ‘저포(樗蒲)’ ‘악삭(握·)’ 등의 잡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저포는 오늘날의 윷놀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 나라 윷이 아니라, 중국 사람들이 놀던 윷으로 우리 나라의 윷과 비슷한 것이다. 이 자료들을 근거로 할 때, 윷의 기원은 삼국시대 이전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서는 윷놀이가 부여(夫餘)의 관직명인 저가(·加)·구가(狗加)·우가(牛加)·마가(馬加)의 이름을 본떠서 만든 놀이로, 부여 때부터 전해오는 놀이라고 한다. 즉 저가는 돼지로서 윷의 도에 해당하고, 구가는 개로서 윷의 개, 우가는 소로서 윷, 마가는 말로서 모라고 하는데, 대체로 짐승의 크기와 속도를 고려해서 순서를 정한 것 같다.
8세기경의 일본의 옛 노래책인 《만엽집(萬葉集)》을 보면, 일본의 윷놀이는 우리 나라에서 그 방법을 배워 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윷놀이는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고려 말 이색(李穡)의《목은집(牧隱集)》에 윷놀이에 관한 시와 놀이장면, 윷말판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오늘날과 같은 29밭으로 된 윷말판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김문표(金文豹)는《중경지》에서 ‘사도설(柶圖說)’을 펴서, 말판 바깥의 둥근 모양은 하늘을, 안의 모난 것은 땅을 본뜬 것이니 하늘이 땅의 바깥까지 감싸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했다. 나아가 말판을 이루는 점들은 별자리를 뜻하는 것으로, 새벽의 북극성을 중심으로 뭇별들이 둘러싸고 있음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윷말의 움직임을 해에 비유하고 말판의 네 점과 중점을 오행에 견주어 설명하고 있다.
이런 내용은 이규경(李圭景)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사희변증설(柶戱辨證說)‘로 이어져, 윷놀이는 그해 농사를 점치던 농점(農占)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권5 <사희조>에서 윷놀이가 고려의 유속(遺俗)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밖에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제석조>에 윷가락을 던져서 새해의 길흉을 점치는 풍속에 대해 소개하고 있고, 유득공(柳得恭)의《경도잡지(京都雜志)》<원일조>에는 윷가락을 던져 나온 64괘에 따른 풀이까지 실려 있다.
미국인 스튜어트 컬린이 1895년에 쓴 《한국의 놀이》에 “현재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놀이는 윷놀이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기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다고 여겨진다.

 

1) 놀이용구

① 윷 ― 윷의 모양은 지방에 따라 각기 특색이 있으나 크기에 따라 장작윷과 밤윷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ㄱ) 장작윷(장윷·가락윷)







가락으로 되어 있다고 가락윷, 장작개비처럼 되어 있다고 장작윷이라고 한다. 윷은 박달나무·통싸리나무·밤나무·복숭아나무 등으로 만드는데, 보통 밤나무로 가장 많이 만든다. 밤나무는 잘 쪼개지고 속은 희고 겉은 검기 때문에, 어두운 등잔불 밑에서도 잘 구분할 수 있어서 많이 이용되었다.
길이는 15~20cm, 지름 3~5cm 정도의 둥근 나무 2개를 길이로 반쪽을 내어 네 가락을 만든다. 그런 다음 칼이나 낫 등으로 잘 다듬고 기름이나 색깔을 칠하여 모양을 낸다. 다듬을 때 배를 약간 불룩하게 하기 위하여 배의 계선(界線)을 둥글게 깎아낸다. 그래야 윷을 던졌을 때 잘 구르며, 굴러서 엎어질 듯 하다가 젖혀지고 젖혀질 듯 하다가도 엎어지는 변화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로 남자들이 많이 가지고 노는 밤나무윷은 크고 무겁게 만들고, 여자들이 가지고 노는 박달나무윷은 작고 예쁘게 만든다. 장작윷은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ㄴ) 밤윷(좀윷)







엄지손가락 정도 굵기의 나무로 2~3cm 정도 되게 만든 것인데, 밤알만 하다고 하여 밤윷이라고 불렀다. 이 밤윷은 조그만 밥공기 등의 그릇에 담아 내젓다가 바닥에 내던져서 노는 것으로, 남부지방에서 많이 하고 있다.
그밖에 재료에 따라 콩윷·팥윷 등이 있는데, 곡물을 이용한 이런 윷은 북부지방에서 많이 한다.

② 윷판과 깔판
말판은 모두 29밭으로 되어 있는데, 크게 나뭇가지처럼 생긴 ‘가지말판’과 ‘방말판’ 두 가지가 있다. 깔판은 푹신하여 윷가락이 구르지 않는 멍석이나 짚방석 같을 것을 사용했다.








2) 윷 던지기








윷가락은 네 개를 나란히 세우거나, 두 가락씩 우물정자형(井)으로 짜서 오른손의 엄지손가락과 손바닥 사이에 쥐고 던진다. 보통 윷가락이 사람들의 앉은키보다 얼마간 높이 올라가게 던져야 하는데, 멋을 부리는 사람들은 윷가락 네 개가 한꺼번에 떨어지지 않고 차례로 떨어지게 던지기도 한다. 윷가락이 둘러앉은 사람들의 범위를 벗어나 떨어지거나 짚방석 밖으로 튀어나갈 때는 ‘낙판(落板)’이라 하여 무효로 하기도 한다.

3) 끗수

윷가락이 엎어지고 젖혀지는데 따른 끗수는 아래와 같다.

도 개 걸 윷 모








윷가락의 상태인 도·개·걸·윷·모에 따라 말을 움직일 수 있는 끗수가 다르다.

4) 놀이방법







두 사람 이상 여러 사람이 편을 나누어 놀 수 있으므로, 사람 수에 제한은 없지만 보통 4~6명 정도가 어울려 논다. 한 편에 보통 4개의 말(넉동)을 갖고 시작하고, 윷을 던져 나오는 끗수만큼 말을 옮겨 어느 한 편에서 먼저 말 넉동(네 동)이 나면 이기게 된다.
세부적인 규칙은 아래와 같다.
① 순서 정하기(쟁두) ― 먼저 어느 편이 먼저 놀기 시작할 것인가를 정하는데, 먼저 윷가락으로 정한다. 즉 각 편의 대표격인 사람 두 명이 나와, 네 가락 중 두 가락씩 나누어 가지고 던져서 숫자가 높은 편이 먼저 시작한다.
② 말 쓰기 ― 윷가락을 던져서 나온 끗수에 따라 말을 옮기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말을 달아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상대방 말을 잡아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업기도 한다. 아무리 윷이나 모가 많이 나와도 말을 잘 쓰지 못하면 지게 되므로, 전체 판의 흐름에서 유리하게 말판을 써야 한다.
③ 업고 가기(굽기·볶기) ― 윷가락을 던져서 만약 처음 말이 도자리에 있는데 다음 차례에 또 도가 나오면, 업어서 함께 이동할 수도 있다. 또 뒤따라가다가 앞서가던 자기편 말과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업고 갈 수 있다. 두 개가 업고 가면 두동사니(두동무니), 세 개가 업고 가면 세동사니, 네 개가 업고 가면 넉동사니라고 한다. 업는 경우가 불리하면 업지 않아도 된다.
④ 잡기 ― 예를 들어 상대편 말이 도자리에 있는데, 윷을 던져서 자기편이 도가 나오면 상대편 말을 잡을 수 있다. 또 자기편 말이 뒤따라가다가 앞서가던 상대편 말과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상대편의 말을 잡게 된다.
⑤ 한 번 더 하기 ― 윷이나 모가 나오면 한 번 더 놀 수 있고, 상대편 말을 잡았을 때도 한 번 더 놀 수 있다.
⑥ 동나기 ― 처음에 달았던 말이 말판을 돌아서 밖으로 나오는 것을 동나기라고 말하는데, 먼저 넉동(네 동)이 나는 편이 이긴다. 동이 빨리 나기 위해서는 길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지름길로 질러가는 방법과 세 개의 먼 길이 있다. 가장 가까운 길은 12번째에 날 수 있고, 다음은 16번째, 다음은 17번째이고, 가장 먼길은 21번을 가야 하기 때문에(팔방돌이한다고 한다), 가까운 길로 말을 몰아가야 한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아 윷놀이가 재미있는 것이다.


 

규칙을 지키며 여럿이 하는 집단놀이이기 때문에 지적·정서적 발달에 도움이 되며, 사회성 발달에 필요한 인간관계의 기술을 배울 수 있다. 특히 말의 끗수에 따라 말을 몇 칸 움직일 것인가를 계산하는 과정에서 수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할 수 있고, 놀이 규칙을 지키면서 놀이하는 과정에서 규칙을 지켜야 하는 준법정신을 기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윷을 던지고 “모냐, 윷이냐”하고 소리치는 가운데, 일상에서 생긴 모든 스트레스를 털어내고 새로운 일에 활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씨름

준비물 - 샅바

필요인원 - 두사람이상.제한없음

방법 - 두 사람이 샅바나 띠를 넓적다리에 걸어 서로 잡고, 일정한 규칙 아래 기량을 겨루어 먼저 땅에 넘어뜨리면 이기는 한국 고유의 운동. 단오를 비롯하여 여러 명절날은 물론, 농한기나 사람이 모이는 장터 등지에서 전국적으로 행해진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두 사람이 샅바나 띠를 넓적다리에 걸어 서로 잡고, 일정한 규칙 아래 기량을 겨루어 먼저 땅에 넘어뜨리면 이기는 한국 고유의 운동. 단오를 비롯하여 여러 명절날은 물론, 농한기나 사람이 모이는 장터 등지에서 전국적으로 행해진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또한 씨름은 원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행해지고 있는 대표적인 힘겨루기 놀이로서, 어른들의 씨름이 있는가 하면 아이들끼리 하는 ‘애기씨름’도 있다.
씨름은 한자로는 각희(角戱)·각저(角·)·각력(角力)·상박(相撲)이라고 부른다. ‘씨름’이라는 말의 어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일부에서 ‘누구씨(성씨)와 힘을 가름한다’는 말에서 ‘씨’자와 ‘름’자를 따서 씨름이라고 했다는 견해가 있으나, 타당한 학설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씨름의 이름에 대한 타당한 학설은 순수한 우리말의 용례에서 찾을 수 있다. 영남지방의 말에 서로 버티고 힘을 겨루는 것을 ‘씨룬다’라고 하며, 서로 버티고 힘을 주고 겨루어보라는 말에 ‘씨루어 봐라‘라는 말이 있다. 또 오랫동안 버티고 있다는 말을 ’되게 씨룬다‘ 또는 ’되게 씨루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씨름이라는 말은 동사 ‘씨룬다’에서 씨룸→씨름으로 명사화된 것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가산풍속도첩 - 씨름

 

두 사람이 힘을 겨루는 투기 운동이 시작된 것은 인류의 탄생과 때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무기가 발명되기 이전의 인간은 맹수(猛獸)나 기타 종족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오로지 자기의 힘과 체력으로 싸워서 이겨야만 했다. 그러므로 씨름은 원시시대에는 자기보호를 위한 생활의 수단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점차 오늘날과 같은 놀이로 발전한다. 따라서 씨름은 그 기원을 원시시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전세계적으로 다양한 씨름이 존재한다.
우리 나라의 씨름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만주(滿洲) 퉁화성[通化省] 지안현[輯安縣] 퉁거우[通溝]의 환도성(丸都城)에서 발견된 각저총(角抵塚)에 씨름하는 벽화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때 이미 씨름이 널리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또 고려시대에는 《고려사(高麗史)》권36에 “충혜왕(忠惠王) 원년(1339년)에 왕이 나랏일을 총신들에게 맡기고 매일 궁중에서 잡무에 종사하는 소동들과 씨름을 하여 위와 아래가 없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도 씨름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씨름은 널리 보급된다. 《세종실록(世宗實錄)》권31에 두 사신이 목멱산(木覓山;지금의 남산)에 올라 역사들에게 씨름을 시키라고 하였고, 세종(世宗) 13년(1431)에 왕이 경회루에 앉아 씨름을 하게 한 뒤 차등으로 상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명종실록(明宗實錄)》권26과 《현종실록(顯宗實錄)》권7 등에 씨름에 관한 내용이 나오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5월 단오조>에 금산지방(지금의 김천) 풍속으로 단옷날에 수천 명이 씨름을 구경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씨름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임란(壬亂)과 호란(胡亂)을 겪은 후 무예수련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국가에서 장려하는 무예의 일과로 공식화되었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보면 현종(顯宗) 때 무예청(武藝廳)에서 각저를 무과시험 종목에 포함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씨름이 공식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씨름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군인의 무예로서보다 민속놀이로 발전해 왔다고 하겠다.
특히 우리 나라의 전통씨름 방식을 보면 개인의 힘과 재능을 겨루는데 그치지 않고, 마을단위의 대동놀이적 성격도 갖고 있다. 즉 마을 단위의 대동놀이에서 벌어지는 씨름판은 씨름하는 사람들만의 겨루기가 아니라, 마을을 대표해서 개인의 명예와 마을의 명예를 함께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이기면 마을 전체가 이기는 것이고 지면 모두가 애통해했다.
근대에 와서 1912년 최초로 씨름대회가 서울 단성사극장에서 열렸고, 1915년에는 서울 광무대극장 주관으로 이틀 동안 씨름대회가 열렸다. 그 후로 연례행사로 극장에서 씨름대회가 열렸으나, 어떤 조직적인 씨름대회라기보다 다분히 흥행성을 띤 대회였다. 그러다가 조선씨름협회가 생기고, 1927년 전국적인 씨름대회가 열리는 등 조직적인 모습을 띠다가 일제의 압력으로 1942년부터 열리지 못하였다. 해방이 되고 1947년 제7회 씨름대회가 개최된 이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1972년 씨름이 텔레비전에 중계되면서 본격적인 스포츠로 변화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날에는 씨름의 대전방식이 맞붙기(토너먼트), 돌려붙기(리그) 등 오늘날 통용되는 방식과 구별되는 ‘지워내기’란 형식이 있었다. 지워내기는 이긴 사람이 계속해서 상대편 선수와 싸워 나가는 대전방식이다. 즉 아이에서부터 어른으로, 하수에서 고수까지 순차적으로 경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연령과 체급, 그리고 실력차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동적으로 조절된다. 이런 지워내기 형식 때문에 씨름을 대동놀이로 파악되기도 한다.
또한 줄을 허리에 매는 ‘줄씨름’이 있고, 줄을 허리에 매고 다리에 매는 씨름이 있다. 오늘날 씨름은 후자에 속한다.
허리에 매고 다리에 매는 씨름에는 왼씨름과 오른씨름으로 구분한다. 지역적으로 보면 왼씨름은 주로 함경·황해·평안·강원·충청도에서 했고, 오른씨름은 경기·전라도 등지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이런 지역 특색이 1972년 씨름협회에 의해 ‘왼씨름’으로 통일되면서, 오늘날에는 왼씨름이 일반화되었다. 다음은 왼씨름을 기준으로 놀이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샅바 고리 매는 법







씨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샅바이다. 샅바 고리를 먼저 맨 다음 다리에 걸어 샅바를 매게 되는데, 아래 그림과 같다.

① 긴 띠를 자기의 오른쪽 다리 대퇴부 상단둘레보다 5cm쯤 더 여유를 두고 한바퀴 돌린 후, 긴 띠를 위로 올려놓는다.
② 완성 후 짧은 띠가 8~10cm 정도 되도록 겹쳐서 접는다.
③ 긴 띠를 밑에서 둥글게 만든 후, 안쪽 방향으로 잡아 뽑는다.
④ 긴 띠를 위에서 아래로 둥글게 만든 후 끼워 넣고, 고리가 될 바깥쪽 방향으로 잡아당기면 그림과 같은 샅바 고리가 만들어진다.

2) 샅바 매는 법








① 샅바 고리를 오른쪽 대퇴부 상단에 끼운다.
② 긴 띠를 등 뒤로 돌려 복부를 지나게 하여, 다리 샅바 고리에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끼운다.
③ 긴 띠를 안쪽 샅바 고리와 긴 띠의 교차점 밑 부분을 경유하여 둥글게 한 후 위로 뽑아 올린다.
④ 뽑아 올린 긴 띠를 둥글게 된 부위에 위에서 아래로 끼워 넣고, 당겨 샅바 길이가 17cm 이내로 풀어지지 않게 한다.
⑤ 묶고 남은 띠는 복부쪽 샅바에 적당히 끼워 넣는다.

3) 샅바 잡는 요령

① 서로 마주보고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는다.
② 자기의 오른쪽 어깨와 상대 오른쪽 어깨를 밀착시키고, 자기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쪽 허리샅바를 재봉선을 넘지 않게 잡는다.
③ 자기 왼손으로 상대 오른쪽 다리샅바를 안쪽으로 끼워 밖으로 잡는다.

4) 준비자세

① 샅바를 잡고 일어서서 자기가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좋은 자세로 다리를 적당히 벌린다.
② 무릎은 적당히 곧게 펴고, 서로 오른쪽 다리를 뒤로 물리지 못하게 하고 왼쪽 다리를 세워 서서히 일어난다.
③ 서로 완전히 일어섰을 경우, 어깨는 서로 맞대고 등은 수평이 되게 한다.

5) 여러 가지 기술

씨름의 기술은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손(팔)기술 ― 앞무릎치기, 앞무릎치기 되치기(잡채기), 비켜 앞무릎치기, 연속 앞무릎치기, 뒷무릎치기, 뒷무릎치기 되치기(밧다리), 오금당기기, 옆무릎치기, 손목잡아 짚기, 앞무릎짚어 오금당기기, 발목당기기, 오금당겨 안다리치기 외
② 발(다리)기술 ― 밧다리치기, 밧다리후리기, 안다리걸기, 안다리되치기(빗장걸이), 안다리걸어 돌리기, 호미걸이, 덧걸이, 밧다리배지기 외
③ 들(허리)기술 ― 들배지기, 엉덩배지기, 돌림배지기, 이중배지기, 들어 주저앉히기, 들어잡채기, 들어 앞무릎치기, 밀어치기
④ 혼성(종합)기술 ― 잡채기, 차돌리기, 등쳐밧다리, 등쳐돌리기, 정면뒤집기, 팔걸어 뒤집기, 목말아 뒤집기 외

이중에 많이 사용하는 몇 가지만 자세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앞무릎치기 ― 상대방의 중심이 앞으로 쏠리거나 자기에게 의지하는 자세로 서 있을 때 실시한다.







* 뒷무릎치기 ― 상대의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보다 앞쪽으로 나와 있을 때 실시한다.







* 오금당기기 ― 상대의 오른쪽 다리가 자기의 앞으로 많이 나왔을 때 주로 공격하는 기술이다.







* 안다리걸기 ― 상대의 왼쪽 다리가 자기의 오른쪽 다리 가까이 있거나, 자세가 낮은 사람이 자세가 높은 상대에게 주로 사용하는 공격기술이다.







* 밧다리걸기 ― 상대의 오른쪽 다리가 자기의 오른쪽 다리나 몸통 가까이 있을 때 주로 사용하고 다리가 길고 키가 큰 사람이 주로 사용하는 공격기술이다.







* 호미걸이 ― 상대의 다리가 자기 앞쪽으로 많이 나와 있을 때나 상대의 중심이 상대의 뒤로 치우쳐 있을 때 사용한다.







* 들배지기 ― 상대방을 들어서 넘기는 기술로. 들기 기술의 기본동작이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사람이 키가 작고 덩치가 작은 사람에게 주로 사용한다.







* 엉덩배지기 ― 상대를 들지 않고 넘기는 방법으로 주로 들 수가 없을 때 사용하는 기술이다.




* 돌림배지기 ― 상대를 들지 않고 넘기는 배지기 기술이다.

 

 

 

차전놀이


 

음력 정월 보름에 행해지는 민속놀이의 하나. 차전(車戰) 놀이는 외바퀴수레(춘천지방)나 동채(안동지방)에 사람을 태우고 수레를 밀어내거나 동채를 땅에 끌어내리거나 부수는 것을 겨루는 놀이이다. 춘천과 가평에서는 ‘수레싸움’, 안동에서는 ‘동채싸움’이라고 하였다.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24호로 지정된 안동 차전놀이가 대표적이다.

 


차전의 기원을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대동놀이들과 마찬가지로 몇 가지 기원전설이 전승되고 있는데, 이 기원전설과 연관된 기록자료들이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
기원전설은 다양하지만 모두 견훤(甄萱)과 왕건(王建)·삼태사(三太師)와 연관된 이야기이다. 이는 당시 기록과 일정 부분 일치하여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권12 <신라본기(新羅本紀)>에 “고려 태조(太祖) 왕건은 930년 고창군(안동군) 병산에서 후백제왕 견훤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때 고을 사람 권행(權幸)·김선평(金宣平)·장길(張吉)(고려 건국 후 삼태사로 봉해짐) 등은 여러 개의 수레를 만들어 타고 싸워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병산전투가 끝난 후 이 지방 주민들은 용감한 세 사람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새해를 맞으면서 동채싸움을 즐기기 시작한 데서, 차전놀이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전놀이가 단지 위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다양성의 첫 번째는 전설의 내용대로 병산전투의 승전 기념잔치에서 처음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다. 두 번째는 원래 지게를 포함하여 수레·가마 등의 나무기구를 이용하는 놀이가 전승되던 중, 병산전투의 승전 기념잔치에서 행해짐으로써 보다 강한 전승력을 갖고 세시행사로 정착되었을 가능성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병산전투와 무관하게 오래 전부터 행해지다가 누군가에 의해 병산전투와 관련된 전설이 덧붙여지게 되었다는 가능성이다.
어느 것이 사실일 것인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무리하게 기록된 자료에 꿰어 맞추기보다 정월 대보름이라는 새해맞이 축제의 공간에서 마을사람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대동놀이로서 오랜 세월 지속되어 왔고, 기록 및 전설자료들은 ‘강강술래’나 ‘월월이청청’과 같이 전승력을 확보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정월상원조(正月上元條)>에는 안동이 아닌 춘천에서 행해지던 차전이 기록되어 있다. “춘천지방에서는 차전을 하는 풍습이 있다. 외바퀴수레를 만들어 마을별로 편을 짜서 서로 앞으로 밀고 나가면서 싸우는 것으로, 차전에서 패하여 쫓겨가는 편에는 그 해에 흉년이 든다고 한다. 가평 풍습도 이와 같다.”
그밖의 기록으로는 안동지방의 풍속을 기록한 《화산지》에 “차전은 석전(石戰)과 같은데 동차가 서로 부딪쳐 싸워 먼저 부서지는 편이 지게 된다.”라고 16~17세기 행해지던 안동에서의 차전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임만휘(林萬彙)가 지은《만문유고》에는 차전에 관한 시가 전해져 18~19세기의 차전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벼락치듯 빠른 놀림 이길 틈을 엿보며 / 엎치락뒤치락 좋은 날 좋은 시비/
나갈 때나 물러설 때 하해의 파도인 듯 / 솟구쳐 오를 때는 새매가 나르는 듯 /
한바탕 버마재비 짓에 바람 끝이 뒤따르고 / 겹겹의 사람 숲엔 달빛이 비추이네 /
서북편이 이겼는가 개선소리 놀랍구나 / 골골의 장정들이 춤을 추며 돌아가네.“

이러한 차전이 고려시대 이래로 줄곧 행해지다가 일제강점기에 중·일전쟁으로 중단되었고, 지금은 다행히 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정월 대보름에 주로 하는 이 놀이는, 놀이방법과 놀이도구가 지역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1) 춘천의 외바퀴 수레싸움

① 춘천에서는 수레싸움을 했다. 물론 마을 대항의 집단 대동놀이였는데, 먼저 두 마을의 원로들이 만나 놀이할 날짜와 시간, 장소를 정한 다음 놀이가 시작되었다. 놀이에는 마을의 청장년들이 모두 참가하였고, 마을사람이 모두 나와 응원도 하고 거들기도 하였다.
② 각 마을에서는 외바퀴수레를 만들어, 그것을 서로 앞으로 밀고 나가면서 상대편의 수레를 밀어낸다. 힘이 모자라 수레가 밀리는 편이 지게 되고, 이긴 쪽에서는 상대편 수레를 부숴버림으로써 승부가 나게 된다. 지게 되면 그해에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치열한 접전이 벌어져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③ 그밖에 춘천에서는 ‘초헌(舌軒) 태우기’ 놀이도 하였다. 음력 정월 보름이 되면 청년들이 초헌(조선시대 종2품 이상 관리들이 타고 다닌 외바퀴수레)을 만들어 동네를 지나가는 사람을 한참 끌고 다니다가, 그 사람의 절을 받은 다음에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것은 차전을 할 때에 적을 포로로 잡아 항복을 받던 것이 놀이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2) 안동의 동채싸움

① 추수가 끝나고 동·서부 유지들이 만나 새해 차전을 할 것을 결정하면, 각 마을에선 준비위원을 구성한다. 먼저 차전에 사용할 나무를 구하기 위해 사람을 뽑고 그 사람은 산에 가서 적당한 나무에 표시를 해두고 온다. 음력 정월 초순에 다시 목수와 인부가 함께 가서 표시한 나무를 베어오는데, 베기 전에 반드시 산신께 고사를 지내고 벤다.
② 베어온 나무로 동채를 만드는데, 원로의 지휘를 받아 목수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긴 나무의 윗머리를 엇갈리게 하여 여러 겹 밧줄로 든든하게 비끄러매서 만든다. 그 다음 비끄러맨 부분 밑의 중간에 1미터 정도 너비의 판자를 건너대고 그 위에 볏짚으로 짠 멍석 깔개를 깔았다. 이것은 편싸움을 지휘할 대장이 올라설 자리가 된다. 동채의 크기는 상황에 따라 크기가 조금씩 다른데 대체로 그림과 같다.
③ 놀이는 보통 오후 1시경에 시작하는데, 정한 시간이 되면 가장 혈기왕성한 청장년들이 동채를 메고 미리 정해놓은 넓은 들판으로 나아간다. 이때 싸움 장소 주위에는 동부·서부 양부의 수만 군중이 운집하여 인산인해를 이룬다.
④ 대열의 앞장에는 힘이 센 젊은이들이 팔짱을 끼고 대형을 지어 전진하였는데, 이들을 ‘머리꾼’이라고 한다. 머리꾼은 적진을 뚫고 들어가면서 자기편의 동채와 대장을 상대편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는 역할을 한다. 동채를 멘 사람들을 ‘수레꾼’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앞채꾼’과 ‘뒤채꾼’이 있었다. 수레꾼들은 앞뒤에서 동채를 메고 대장의 지휘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거나 물러서기를 되풀이한다. 대장은 동채 위에 올라서서 왼손에는 동채머리에 맨 끈을 쥐고 오른손으로 지휘를 하면서 상대편을 공격하였다. 지휘할 때 구령을 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신호를 보낸다. 보통 ‘앞으로’ 하면 전진이고, ‘뒤로‘ 하면 후진이며, 뒤에서 ’좌우로 흔들면‘ 회전하라는 신호가 된다.
⑤ 머리꾼과 수레꾼들은 상대편을 정면 또는 측면으로 밀거나 뒤로 물러서기를 하는데, 이들 옆에 ‘놀이꾼’도 가담한다. 이들은 형세를 보아 머리꾼이나 동채꾼으로 가담한다. 이때 동채 앞머리에 선 머리꾼들은 상대편 진지를 뚫고 들어가 상대편의 지휘자를 끌어내리든가 상대편의 동채를 눕히는 돌격대의 역할을 한다.
⑥ 이 놀이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다. 대장은 손으로 대오(隊伍)를 지휘할 뿐 상대편의 동채머리를 붙잡지 못한다. 머리꾼들은 팔짱을 끼고 상대편을 밀고 나갈 수 있으나, 상대편 머리꾼이나 동채꾼에게 손질·발질을 못한다. 그러므로 머리꾼들은 절대로 팔짱을 풀면 안 된다. 그러나 실제 놀이상황이 되면 이와 같은 규제는 지켜지지 않고, 격투가 벌어져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하는데, 일제는 이를 빌미로 놀이를 탄압하기도 하였다.
⑦ 동채가 땅에 닿거나 동채를 빼앗겼을 때는 지게 되는데, 옛날에는 상대편 동채를 부숴야 이기도록 했다고도 한다. 싸움에서 이기면 그해 풍년이 든다고 여겨 모두 최선을 다했고, 응원하는 사람도 서로 “동부 이겨라” “서부 이겨라”를 목청을 외쳤다. 이때 시집은 서부이고 친정은 동부인 부인의 경우, 동부를 응원하는 관습이 있어 차전의 승부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긴 편은 머릿수건과 신발을 하늘 높이 던지면서 환호를 했고, 하루 종일 노래와 춤을 즐기며 놀았다고 한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상대를 공격하고 방어하는 대동놀이는 진취적인 기상뿐 아니라 공동체에서 자신의 역할을 가장 잘 일깨워준다. 힘든 줄도 모르고 소리 지르고 힘을 쓰는 가운데 신명이 고조되고 저절로 운명 공동체의 성원으로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놀이는 농경사회에서는 마을 단위의 공동체 정신을 일깨웠다면, 오늘날에는 학교 또는 학급 단위의 공동체 정신을 일깨우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차전에 얽힌 전설에 대하여 1967년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無形文化財調査報告書)》에서 임동권(任東權)은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옛날 후백제의 왕 견훤은 지렁이였다. 지렁이가 사람이 되어서 안동에 왔다. 안동 사람들은 이 지렁이를 몰아내기 위해서 소금 배를 풀어 낙동강 물을 짜게 만들고, 안동 읍민이 모두 나와 팔짱을 끼고 어깨로 지렁이를 밀어 강물에 떨어뜨렸다. 그랬더니 지렁이는 짠물에 들어가 죽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로 안동 사람들은 지렁이를 떠밀 때처럼 떼지어 차전놀이를 하였으니, 놀이를 할 때는 손을 쓰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어깨로 서로 밀어낸다고 한다.”

 

 

 

소싸움

소싸움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문헌상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땅에 농경문화가 정착한 시대에 목동들이 망중한을 즐기기 위한 즉흥적인 놀이로 시작하여 차차 그 규모가 확산되어 부락단위 또는 씨족단위로 번져 서로의 명예를 걸고 가세(家勢) 또는 족세(族勢)과시의 장으로 이용되었다. 주로 추석 놀이로서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민족의 협동단합을 제압하기 위하여 이를 폐지시켰으나 그 명맥을 조심스레 이어온 터에 마침내 광복을 맞아 부활되어 그 맥을 이어오다가 70년대 중반부터 고유의 민속놀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지난 90년부터 영남 소싸움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3.1절 기념행사로 자계서원 앞 넓은 서원천변에서 개최되는 소싸움이 해마다 규모가 커지게 되어 이제는 우리 나라 최대 규모의 소싸움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소싸움은 소가 한곳에 모여 풀을 뜯다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힘을 겨루게 되고, 소의 주인도 자기네 소가 이기도록 응원하던 것이 발전하여 사람이 보고 즐기는 소싸움으로 변하게 되었다.
소싸움의 기술
밀치기
머리치기
힘을 다해 밀어붙이는 기본기술로 싸움소의 기초 체력과 특유의 뚝심을 필요로 한다. 뿔로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해딩하는 정면 머리공격으로 소싸움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기술이다.
목치기
옆치기(배치기)
상대소의 목을 공격하는 기술로 고도의 테크닉이 요구된다. 상대소의 옆구리쪽 배를 공격하며, 경기를 마무리하는 결정적인 공격술이다.
뿔걸이
뿔치기
상대방 뿔을 걸어 누르거나 들어올려 상대방 소 목을 꺽는 적극적인 공격방법이다. 뿔을 좌우로 흔들어 상대의 뿔을 치며 공격하여 상대를 제압한다.
들치기
연타
머리를 상대목에 걸어서 공격하며, 싸움소의 노련미와 강한 체력을 엿볼 수 있다. 뿔치기 뒤에 머리치기로 이어지는 연속공격으로 승률이 높은 기술이다.


 

 

 

그네뛰기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이 그네에 올라타고 앞뒤로 왔다갔다하는 놀이. 그네는 동네 마당에 있는 큰 나뭇가지에 두 줄을 매거나, 큰 기둥을 두 개 세우고 그 위에 가로질러서 묶은 통나무에 두 줄을 매어 놀던 놀이도구이다. 이 놀이는 우리 나라 전역에 걸쳐 성행했던 놀이로, 남성들의 씨름과 더불어 여성들이 하던 대표적인 단오놀이다. 굳센 체력, 고도의 긴장감, 기민성 그리고 박진감 등으로 대변되는 이 놀이는 곱상함과는 거리가 먼 발랄한 젊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네뛰기는 지방에 따라 ‘근데’ ‘군데’ ‘근듸’ ‘군의’ ‘그리’ ‘구리’ ‘굴기’ ‘굴리’ ‘훌기’ ‘궁구’ ‘군디’라고도 부르며, 한자어로 추천(鞦韆)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민속놀이에는 무엇이 있나요?

... 우리나라민속놀이의 종류. 질문2. 민속놀이의 하는 방법, 특징 질문3, 민속놀이의...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윷을 던지고 “모냐, 윷이냐”하고 소리치는 가운데...

우리나라 민속놀이무엇무엇이 있나요?

우리나라 민속놀이무엇무엇이 있나요? 알켜주세요.ㅠㅠ 그럼 감사합니다..*^^* 민속놀이 민간에는 예부터 경기·오락·연희·곡예 따위 놀이가 많이 전해오고 있다....

우리나라 민속놀이에는 무엇이있나요?

저는 1학년인데요...저 숙제가우리나라민속놀이조사하는건데요.웬만하면빨리해주세요. 민속놀이 제목만 알려드릴게요.저도 3학년이라서요. *널뛰기 *제기차기 *연날리기...

우리나라 민속놀이 조사

... 그런데 제가 우리나라 민속놀이 조사 연구를 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별로... 저는 이것말고 더 있다고 생각하는데 더 무엇이있을지는... 밑을 보세요 민속놀이 말고...

우리나라 민속놀이 뭐가 있나요???

우리나라 민속놀이 뭐가 있나요????? 알려주세요!!!!! 전해지는 지역,미속놀이의 유래,민속놀이의 특징,사용되는 음악 모두 답변 부탁~^^ 우리 민속놀이중 초등학생등이 함께...

우리나라 민속놀이 ~!

우리나라 민속놀이 좀 알려주셈요 ㄱ- 부탁이에요 ㅎㅎ 개념잇는분만 제발 ㅜㅜ 내공도... 특히 무엇보다도 바람에 대해 몸으로 깨닫게 된다는 점에서 교육적 효과가 뛰어난...

우리나라 민속놀이

우리나라 민속놀이의 종류와 하는 방법 좀 가르쳐 주세요~! 내공 35!!!!! 연날리기 연을... 특히 무엇보다도 바람에 대해 몸으로 깨닫게 된다는 점에서 교육적 효과가 뛰어난...

우리나라민속놀이

우리나라 고유의 민속놀이무엇이 있나요^^ 1.쥐불놀이 정월 대보름의 하루 전날인 열나흗날이 되면 마을의 어린아이들이 논이나 밭두렁에 불을 붙이고 돌아다니며 노는...

우리나라민속놀이에 대해 알여주세요.^ㅁ^

우리나라 민속놀이좀 알려주세요. 숙제에요...(수향평가ㅠ-ㅠ) 급해요!!>ㅁ< 빨리 좋은... 놀이패가 먼저 마당에서 춤을 추면 사자가 뜰로 뛰어들어 안방문을 열고 무엇을...

[내공 30검]우리나라민속 놀이에...

... Q1.우리나라의 계절별 민속놀이에는 무엇무엇이 있나요? Q2.우리나라의 명절별 민속놀이에는 무엇무엇이 있나요? Q3.우리나라의 아이;어른별 민속놀이에는 무엇무엇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