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통미술품의 우수한점

우리나라 전통미술품의 우수한점

작성일 2012.12.10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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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 미술의 우수한 점

 

 

 

김홍도의 서당

단원 김홍도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궁중의 화원화가로, 한국적이고 운치가 있는 멋진 작품을 그렸는가 하면, 서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소박하고 사실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다. '서당'은 그러한 작품 중에 하나로, 당시 서당에서 공부할 때 일어난 재미있는 광경을 묘사한 풍속화이다.

이 작품의 내용을 보면, 가운데서 한 손으로 눈물을 닦고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마치 훈장이 지시한 사항을 지키지 못해 종아리를 맞은 듯 하다. 이를 보고 어찌 우스운지 다른 생도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있고, 훈장마저 웃음을 참느라고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 나는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생도들의 웃음소리가 작품 가득 넘쳐 나의 귓전에까지 들리는 듯 했다. 훈장의 표정이나 울고 있는 생도의 책에서는 넘겨 질 것 같은 생동감마저 느껴져서 각 인물의 감정과 분위기가 생생하게 전달이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문득 궁중화가였던 그가 왜 소박하고 투박한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렸나 하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궁중화가였던 그가 귀족적이고 화려한 작품보단, 서민들의 소박한 생활상을 더 많이 그렸던 것에 김홍도의 천재성과 예술성을 높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서민들의 생활상을 다양한 모습으로 포착하여 그린, 사실적이고 생생한 그의 풍속화를 보면 조선후기의 생활상이 생생히 다가온다.

그리하여 그의 한국적이고 소박함이 느껴지는 미감을 통해 남긴 '씨름도', '무동', '기와이기' 등의 풍속화는 단지 먹으로 그려 강한 채색도 하지 않았지만 살아 숨쉬고 있어 보이는 이유가, 그의 그러한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서당 이야기로 엮어낸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대표적인 풍속화이다. 대부분 댕기머리를 하고 있는데 갓을 쓴사람은 결혼을 한 기혼자이다. 정면이 아닌 사선구도의 짜임새 있는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 이 작품 역시 배경은 여백으로 처리되었으며, 굵은 선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옷주름등에서 단원 김홍도 특유의 필치를 엿볼 수 있다. 종이에 수묵담채로 표현하였으며, 혜원 신윤복과 비교하여 남성적이며 서민적인 풍속화를 많이 남겼다.

재료- 먹.채색재료.종이,
기법-수묵담채,
주제-서당풍경(일종의 풍속화)

작품명 : 씨름
화가 : 김홍도
제작국가 : 한국(우리나라)
작품설명 : 크기는 27×22.7이고,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에 있다. 그리고 보물527호로 지정되어 있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앉아 씨름을 구경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힘을 겨룬다. 팽팽하게 맞잡은 양손에 긴장감이 흐르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구경꾼들도 눈을 떼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고유 겨루기인 씨름, 그러한 씨름의 역동성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이야기되는 단원(檀園) 김홍도의 「씨름도」의 한 장면이다. 씨름이라는 단어는 ‘시루다’라는 동사에서 왔다고 한다. ‘시루다’는 두 사람이 힘을 겨루는 것을 뜻하는 단어다. 팔씨름, 입씨름 등의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로간에 승부를 겨루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순수하게 서로의 힘을 겨루는 것이다.
크게 장이 서고, 단오나 크게 행사가 벌어지면 그 자리에 빠지지않고 등장한 것이 바로 씨름이다. 지금은 프로 선수들의 스포츠로 자리를 잡았지만, 예전에는 동네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은 모두 씨름에 출전을 했고, 그중의 누군가는 소를 상금으로 타고는 해서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이런 씨름의 풍경은 민중들의 삶을 그린 김홍도의 화폭에도 기록되었다. 단원(檀園) 김홍도의 「씨름도」는 단원의 대표적인 풍속화첩인 「단원풍속도첩」에 속한 잘 알려진 명품 중에 하나다.


조선후기화가 김 홍 도의 씨름도

제목 : 씨름도

제작년도 : 18세기 후반

크기 : 세로 27cm, 가로 22.7cm

설명: 김홍도는 조선 후기의 농민이나 수공업자 등 서민들의 생활상과 그들의 생업의 이모저모를 간략하면서도 한국적 해학과 정감이 넘쳐흐르도록 그림에 담았다. 그의 그림을 자세히 관찰하면 군상 속의 각 개인 하나하나의 표정 또한 각기 다르게 표현되었다.

표현 요소와 원리 : 주제는 서민들의 소박한 일상생활을 꾸밈없이 표현하고 있으며, 이러한 주제에 어울리게 거친 듯 하 면 서도 투박한 선을 쓰고 있다. 담고자 하는 핵심을 집약하려는 듯 그의 풍속화는 대체로 배경을 생략하고, 꽉 짜인 원형 구도를 이루며 간략한 필선의 묘미가 잘 나타나 있다.

느껴지는 아름다움과 특징 : 김홍도의 씨름은 씨름하는 두 사람을 화면 가운데에 그려놓고 구경꾼들을 씨름꾼 주위에 원형구도로 배치함으로써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주제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탁월한 공간 구성력을 보여주고 있다.

김흥도의 풍속화 중 주막


마찬가지로 김홍도작품으로 39.7x26.7cm로 보물 527호. 종이 위에 그린 그림으로 김홍도가 여행중, 중년부부가 간이 주막에서 부두막 위의 밥 양푼과 술사발들을 그린 그림. 당시 주막의 풍경을 잘 전해준다고 형해진다. 앞쪽의 풍경에는 역원근법을 적용해 화면 속으로 들어간 듯한 현실감을 살렸다.

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김홍도의 타작도

타작도는 생김새, 동작, 표정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표현해서 유명하다. 이 그림 또한 가을에 벼를 수확한 후 타작을 하는 장면을 표현한 그림이다.

타작도

〈타작도〉는 수확기 농촌의 타작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개상에 볏단을 내리쳐 알곡을 털어 내고 있는 대여섯 명의 소작인들과, 그 뒤편에서 이들을 감독하는 마름이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농부의 표정들이 모두 건강하고 밝은 모습이어서 힘든 노동의 현장이 오히려 여유롭고 유연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타작도〉는 지주의 땅에서 소작하는 농민들과 이들을 감독하는 마름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린 그림이다. 마름이란 순수한 우리말로, 지주로부터 소작지의 관리를 위임받아 일하는 사람을 말한다. 마름은 지주의 토지가 있는 곳에 상주하면서 추수기의 작황을 조사하고 직접 소작인들로부터 소작료를 징수하여 일괄해서 지주에게 상납하는 것을 주된 직무로 하고 있다. 그러한 직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마름은 지주의 입장에 서서 소작인들을 독려하기 마련이고, 소작인들은 피해 의식을 느끼며 싫든 좋든 간에 그의 요구와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소작인과 마름은 현실적으로 볼 때 상호 갈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해도 마름의 요구에 의해 알곡을 지주에게 바치고 나면 겨우 연명할 수 있을 정도의 곡식 밖에 가질 수 없는 소작인들로서는 마름이 놀고먹는 중간 착취자로 비칠 것이 당연하다.
〈타작도〉김홍도가 소작인들이나 마름의 어느 한편의 입장에서 상대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런 현실적 갈등의 관계를 초월하는 해학과 중용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홍도의 무동

설명

크기는 26.8 x 22.7cm이며 지본수묵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보물 527호인 단원풍속도첩 25폭 중 일부이다. 풍악가락이 숨가쁘게 높아감에 따라, 춤추며 돌아가는 소년의 옷자락에서는 사뭇 바람이 이는 듯하고, 피리 부는 말뚝벙거지의 사내는 양 볼이 터질 듯 부풀었으며, 모여앉은 군상들은 자못 열기에 들떠 있다.


당시 천민으로 취급받던 대장장이·풍각장이, 마부나 머슴들의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흥겨움을 이처럼 해학적으로 다룬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단원은 당시 신윤복(申潤福)과 함께 풍속화에 있어서 독보적인 경지를 개척한 화가로,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단원 특유의 필법을 구사하여

느낀 점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속한 단연 최고의 작품은 이 무동, 춤추는 소년이다. 화면구성, 필력, 풍속화적 성격, 음악적 요소 어는 것 하나 빠짐없이 이 작품을 걸작으로 만들고 있다.

간단하게 그려낸 듯한 그림치고는 그 값어치가 너무도 큰데, 실상 간단한 이 그림이 그려지기까지 김홍도가 거친 수련의 과정이라든가 생각의 발전 등이 범상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수년의 발전상들이 이 작은 그림 한편에 담긴 것이다.

당시의 음악 풍속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그림이면서도 이 풍속화첩의 다른 그림들과 다르게 유달리도 좋은 붓질을 가지고 있다.무엇보다도 무동이 백미다. 무동을 그린 붓질은 강하고 힘이 있다. 그러면서도 옷자락은 자유롭게 휘날리고 있고 굳센 흐름에 어느 하나 막힘이 없고 무거움도 없고 그야말로 활기차고 쾌활하다.

무동의 발부터 손끝까지 김홍도가 이 무동 하나를 그리기 위해 얼마나 수련했을까 싶을 정도로 정형이 없는 풍속도의 무동이 너무도 완벽하게 아름답다.

출처;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3&dirId=130102&docId=154506857&qb=6rmA7ZmN64+E&enc=utf8&section=kin&rank=38&search_sort=0&spq=0

김홍도에 대해

단원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 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 산수, 신선, 불화,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妙品)에 해당되어 옛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또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을 잘 그려내어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 규방, 농부, 누에 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문, 거친 산, 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틀리는 것이 없으니 옛적에는 이런 솜씨는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었던 강세황의 글이다.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우다

김홍도는 1745년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고 아버지는 김석무(金錫武)이다. 증조할아버지가 만호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을 보면 본래 무반이었던 듯하나 김홍도가 태어날 무렵에는 중인 집안이었다.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고는 해도 그림과 아무 연관 없는 집에서 태어난 중인 소년이 당대의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강세황이라는 훌륭한 스승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뛰어난 문인화가이자 명문사대부인 강세황에게 어떤 연유로 그림을 배울 수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김홍도는 “젖니를 갈 때부터”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강세황은 마흔 살 무렵으로 벼슬 없이 경기도 안산에 있는 처가에 살고 있었다. 이를 근거로 김홍도가 안산 출신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스무 살 무렵 이미 당대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김홍도는 스무 살 이전에 이미 도화서 화원이 되어 있었던 듯하다. 1765년 영조가 71세가 되어 여든의 나이를 바라보는 망팔(望八)에 이른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고 이를 위해 병풍을 만들었는데, 당시 스물한 살에 불과한 김홍도가 그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갓 스물을 넘긴 나이로 임금의 큰 잔치 그림을 홀로 그렸다는 것은 당대 최고의 실력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1773년 스물아홉의 김홍도는 영조의 어진과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리며 그의 그림 인생에 중요한 인연을 또 한 사람 만난다. 뒷날 정조가 되는 왕세손은 당시 김홍도의 솜씨가 썩 마음에 들었다. 뒷날 “김홍도는 그림에 공교로운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이다. 30년 전에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때부터 무릇 화사(畵事)에 속한 일은 김홍도로 하여금 주관하게 했다.”는 글을 남긴 바 있듯이 이후 정조는 김홍도가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후원자가 된다.

영조의 초상화를 그린 김홍도는 그 공을 인정받아 이듬해 사포서(司圃署)의 감목관(監牧官)이라는 벼슬에 올랐다. 마침 두 달 뒤 스승 강세황이 사포서의 별제로 발령을 받아 사제지간이 함께 근무했다. 이때의 일에 대해 강세황은 이렇게 회상했다.

“일찍이 군과 더불어 사포서의 동료가 되었을 때, 매번 일이 있으면 군이 나의 노쇠함을 딱하게 여겨 바로 힘든 일을 대신했으니, 이는 내가 더욱 잊을 수 없는 바이다.”

삼십 대에 김홍도는 “그림을 구하는 자가 날마다 무리를 지으니 비단이 더미를 이루고 찾아오는 사람이 문을 가득 메워 잠자고 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었다.”는 말이 전할 만큼 그림으로 높은 이름을 얻고 있었다.

이 무렵 김홍도는 [신선도], [군선도], [선동취적], [생황을 부는 신선] 등의 신선도와 [서원아집도], [평생도] 등의 인물화, 그리고 [서당], [씨름], [타작], [우물가] 등의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그 가운데서도 풍속화는 인물의 생동감 있는 묘사와 각 장면의 극적인 구성이 보는 이들을 매료시켰다. 그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일하는 백성들이다. 대장간에서 연장을 만들거나 집을 짓는 장인들, 밭을 갈고 꼴을 베는 사람, 물을 긷고 빨래하는 사람, 장사하는 상인들의 모습 등 서민들의 정서와 삶에 밀착된 그림들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정조의 총애를 받고 현감의 자리에 오르기도

김홍도는 서른일곱 살이던 1781년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그 상으로 경상도 안동의 안기찰방 벼슬을 받았다. 그에 대해 강세황은 “나라에서 기술자(중인)를 등용한 것이 본시 여간해서 없던 일이며 단원은 서민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비록 종6품의 말직이기는 했지만, 화원으로서 누리기 어려운 영광이었다.

벼슬살이를 하고 돌아온 40대의 김홍도는 화조화, 기록화 등을 주로 그렸다. 1788년에는 정조의 명으로 김응환과 함께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 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렸고, 그 이듬해 사신을 따라 중국 베이징에 갔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모시며 현륭원을 건설할 때 현륭원의 원찰인 용주사의 후불탱화 제작에 참여해, 조선 후기 불화의 명작 중 하나를 남기기도 했다. 입체감을 나타내는 음영을 넣어 독특하게 표현한 이 불화들은 기존의 화풍을 뛰어넘어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1791년, 다시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에 참여해 그 상으로 충청도 연풍 현감에 제수되었다. 중인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책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만 3년 뒤 “남의 중매나 일삼으면서 백성을 학대했다.”는 충청 위유사 홍대협의 보고로 파직됐다. 백성들 중매를 해주던 인간적 관리였으나 행정적으로 유능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현감 자리를 내주고 평민으로 돌아온 김홍도는 자유롭게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에 전념해 산수, 화조, 인물화 등에서 명작들을 쏟아냈다. 50대에 이른 김홍도의 그림들은 보다 원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대담한 생략과 거침없는 붓길이 대가다운 자신감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시기의 대표작들은 [해산선학도], [마산청앵도], [세마도] 들이다.



아름다운 풍채가 신선 같았다

이렇듯 많은 그림을 그렸고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의 삶은 어려웠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지필묵이 부족했을 정도로 가난했던 적도 있지만, 생활에 크게 구애받는 성격은 아니었다. 조희룡의 [호산외사]는 이런 김홍도의 모습을 잘 전해주는 유명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집이 가난하여 더러는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파는데 아주 기이한 것이었다. 돈이 없어 그것을 살 수 없었는데 때마침 돈 3천을 보내주는 자가 있었다. 그림을 요구하는 돈이었다. 이에 그중에서 2천을 떼내어 매화를 사고, 8백으로 술 두어 말을 사다가는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梅花飮)을 마련하고, 나머지 2백으로 쌀과 땔나무를 사니 하루의 계책도 못 되었다.”

낭만적인 예술가였지 생활력 있는 가장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전하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김홍도는 매우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 생김생김이 빼어나게 맑으며 훤칠하니 키가 커서 과연 속세 가운데의 사람이 아니다.”라는 증언도 있고,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이 크고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신선과 같다고 하였다.”는 말도 전한다. 미술뿐 아니라 음악도 즐겨 꽃 피고 달 밝은 저녁이면 거문고 한두 곡을 연주하며 스스로 즐겼고, 즉석에서 한시를 남길 정도로 문학적 소양도 갖고 있었다.

김홍도가 정확히 몇 년에 사망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1805년 12월에 쓴 편지가 전하고, 이후 행적과 작품이 일절 전하지 않아 예순두 살이던 1806년 사망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현재 300점 정도의 작품이 전한다.



안녕하세요^^

단원 김홍도의 작품 안내입니다.

기와이기, 주막, 새참, 무동, 씨름, 쟁기질, 서당, 대장간, 점보기, 윷놀이, 그림 감상, 타작, 편자 박기, 활쏘기, 담배 썰기, 자리 짜기, 신행, 행상, 나룻배, 우물가, 길쌈, 고기잡이, 노상과안(路上過眼), 장터길, 빨래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단원 김홍도(1745~ ?)가 그린 [단원풍속도첩] 속 스물다섯 점의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이미지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서민들의 노동, 놀이, 남녀 사이에 오고 가는 은근한 감정 등 삶의 여러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조금 더 상세하게 보자면, 그림의 소재는 농업, 상업, 어업 등 일상에서의 노동부터 노동 후의 휴식, 서민들의 놀이와 고상한 취미생활까지, 그 주인공은 젖먹이 아기부터 노인까지, 서민부터 양반까지다. 그려진 소재와 대상이 다채롭고 생생하여 조선시대의 한 때, 어떤 곳에 다녀온 기분이다. 이렇게 다양한 삶의 모습을 하나의 화첩에 모아 그린 예는 풍속화가 유행했던 조선 후기에서도 많지 않다.






[대장간], 조선 18세기. 단원 김홍도의 그림 소재는 다채롭고 생생하여
마치 조선시대에 다녀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스케치풍의 그림: 최소화된 묘사와 채색

가로, 세로 30여 센티미터 정도의 종이에 그려진 [단원풍속도첩]의 그림들은 아주 간단하고 간결하다. 거장의 대표작이라는 포장을 풀고 그림만 다시 살펴보면, 이 그림은 분명히 아주 공들여 그린 그림은 아니다. 공들여 그린 공필(工筆)도 아니며 화려한 채색이 입혀진 것도 아니다. 기법적인 부분에서 보자면 이 그림은 그림의 소재와 같이 격식을 갖추지 않고 편안하게 그려진 그림이다. 배경을 생략하고 그리고자 하는 소재만 집중하여 그렸다. 농사일을 끝내고 새참을 먹는데 논밭은 보이지 않고, 동네에서 씨름판이 벌어졌는데 근처에 나무 한 그루가 없다. 색도 거의 쓰지 않았는데, 엷은 먹색을 중심으로 하여 역시 매우 엷은 푸른색과 갈색조로만 채색을 하고 그 이외의 색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신부를 맞으러 가는 신랑의 신행길에서 조차 예쁜 색을 쓰지 않았다. 화가는 보통사람들의 매일 매일의 일상을 그린 이 그림들에 가장 어울리는 기법으로 최소화된 묘사와 채색이라는 방식을 선택했다. 덜 그리고 덜 칠함으로써 소재 자체를 돋보이게 했다.






단원 김홍도는 보통 사람들의 매일 매일의 일상을 그린 이 그림들에 가장 어울리는 기법으로
최소화된 묘사와 채색이라는 방식을 선택했다. 작품 [새참]과 [씨름].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다채로운 구도 : 원형 구도

다양한 장면만큼이나 화가가 화면을 구성한 방법, 즉 구도도 여러 가지다. [단원풍속도첩]에서 눈에 띄는 구도는 원형구도이다. [무동], [씨름], [서당], [그림 감상]이 원형의 구도로 그려진 그림이다. 조선시대의 그림에서 둥글게 모여 앉은 사람들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화면 전체가 원형구도를 이루고 있는 그림은 드물다. [그림 감상]과 [서당], [무동]은 주인공들을 단순하게 원형으로 배치시켰다면 [씨름]은 풍속도첩 중 가장 많은 인물을 등장시키며 인물의 배치와 방향을 다양화하여 변화 있는 원형구도를 구축하였다.


이밖에 X자 구도 대각선 구도, 사다리꼴 구도 등 다양한 구도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배치했다. 이러한 다양한 구도는 주제에 따라 감상자의 시선을 화면의 중심으로 수렴하기도 하고, 화면 밖으로 확산시키기도 하며 생동감 있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원형 구도로 배치되어 생동감을 자아낸다. 작품 [서당]과 [그림 감상].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속의 해학성 : 다양한 인물 군상

그림들을 보면 자연스레 웃음을 짓게 된다. 아무 그림이나 하나 골라서 봐도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지금의 기분은 물론이고 그 사람의 성격마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타작>에서는 벼를 털고, 묶고, 지고 가는 작업이 한창이다. 화면 위에는 갓을 쓴 이가 비스듬히 누워 이들의 노동을 지켜보고 있다. 수확의 기쁨인지 함께 일하는 중의 신바람인지 일을 하면서도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 다만 앞섶을 풀어헤치고 볏단을 태질하려 들어올린 남자는 영 일이 하기 싫은 눈치다. 의욕도 없고 귀찮아하는 표정인데 옷매무새마저도 제일 풀어져 있다. 웃옷을 벗은 이와 앉아서 볏단을 묶는 이는 호탕해 보이며 비질을 하는 중년의 남자는 꼼꼼해 보인다.






[타작]과 [우물가]. 등장 인물들의 살아있는 듯 한 표정과 행동으로 그림 속에 이야기를 배치해 놓았다.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우물가에선 세 여인과 한 남자가 마주쳤다. 아니,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마주치고 두 여인이 배경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젊고 아리따운 새댁에게 물을 청해서 마시고 있는 남자는 털이 숭숭 난 가슴팍을 풀어헤치고 있다. 영 민망한 장면이라 젊은 여인은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있는데, 멀찍이 선 할머니는 이 장면이 못마땅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반면 화면 앞쪽의 너그러워 보이는 중년 여성은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눈감아주고 있다. 일상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우물가의 모습을 이렇게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그려내고 있다.





치밀하게 구성되고 배치된 명작: [무동] 감상

소리와 춤으로 한참 흥이 난 마당이다. 북, 장구, 피리, 대금, 해금 연주자들이 둥그렇게 앉아 연주하는 가운데 무동이 두 팔을 신나게 휘저으며 춤을 추고 있다. 인물들은 각자의 춤과 연주에 몰두하며, 또는 앞 연주자나 무동을 주시하며 흥겨운 한 판을 벌이고 있다 무동은 화첩 중에서 가장 활달한 선으로 그려진 인물이며 가장 역동적인 동감動感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비교적 차분하게 그려진, 다른 사람들을 그린 필선과 비교해보면 무동을 그린 필선은 확실히 구분된다. 진한 먹으로 그려 춤추는 사람의 흥을 한껏 강조하였다. 옷의 색깔 또한 선명한 초록으로 생기를 더했다. 이들은 둥글게 모여 앉고 선 가운데, 서로 소리와 움직임과 시선을 주고받으며 멋진 마당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원형구도는 춤과 음악이 한데 어우러지고 있는 순간을 효과적으로 구성해내는 장치로 사용되고 있다. 무심한 듯 간단하게 그린 그림 같지만 구도와 인물의 자세와 방향, 표정을 치밀하게 구사하여 명품을 만들어냈다.






[무동]. 원형구도는 춤과 음악이 한데 어우러지고 있는 순간을
효과적으로 구성해내는 장치로 사용되고 있다.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의 작품(유명한것)5가지

1. 김홍도 <벼타작> 농부들이 볏단을 통나무에 내려치며 타작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일 하는 농부들의 역동적인 동작과 얼굴 표정에서 고된 노동의 피로감보다는 함께 노동요를 부 르며 일하는 신명이 느껴진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옆에서 갓을 비껴쓰고 담뱃대를 물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양반의 모습은 그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풍경이 었을 것이다.

2. 김홍도 <대장간> 조선 후기에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린 풍속화들이 유행 하게 된 데는 관념중심에서 벗어난 현 실중심의 사회 적, 학문적 분위기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러한 변 화들이 기존 체제에 대한 일종의 항거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서민들의 모습을 화폭에 즐 겨 담았던 조 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속화가 김홍도, 신 윤복 같은 이들은 왕실에서 총애를 받던 사람들 이었 으며 나중에는 관직을 받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이러 한 풍속화들이 지배층에 대립적 의 식을 가지고 서민 층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조선 왕조의 근본적인 정치 이념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내세우는 민본주의였으며 현실에 바탕을 둔 인간 중심 의 현세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훌륭한 정 치를 하기 위해서는 일반 백성들의 풍속이나 생활상, 특히 땀흘리며 열심히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을 구체적 으로 잘 살펴야만 했다. 또한 외국 사신들에게 한국의 풍속을 소개하고 이해시키기 위한 외교적 필요성과 국 가적 행사와 의식을 기록적인 그림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고자 한 목적 때문에라 도 사실적인 풍속화를 장 려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이러한 정치 이념과 성향이 현실적 삶을 소재로 한 풍속화를 발전시킨 기반이 되 었던 것이다. 갓 달구어낸 쇳덩이를 망치로 두들기고 낫의 날을 세우기 위해 숫돌에 가는 등의 대장간 풍경 이 사실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실제로는 대장간에는 주변에 이것저것 여러 물건들이 널려 있을 것인데 그 림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의 동작을 부각시키고 주변부 를 생략하여 여백으로 처리하였다.

3. 김홍도 <자리짜기> 방 안에서 돗자리를 짜고 있는 남편과 물레를 돌려 실 을 잣는 아내, 그리고 그 뒷편에 책을 펴놓고 글자를 막 대기로 짚어가며 읽고 있는 떠꺼머리 아들 등 각자 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한 가족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다.

4. 김홍도의 <서당> 서당에서 글공부하는 모습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엮어 낸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대표적인 풍속화이다. 한 아이는 훈장에게 방금 종아리를 맞았는지 대님을 다시 묶으면서 눈물을 닦고 있고 다른 아이들은 킥킥거리며 웃음을 참고 있다. 훈장도 지긋이 웃음을 머금고 있다. 각각 의 인물들의 감정이 실감나게 잘 드러나 있어서 설명을 굳이 듣지 않아도 어떤 상황과 분위 기인지 금 방 알 수 있게 해준다. 정면이 아닌 사선구도의 짜임새 있는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 이 작품 역시 배경은 여백 으로 처리되었으며, 굵은 선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옷 주름등에서 김홍도 특유의 필치를 엿볼 수 있 다.

5. 김홍도의 <무당>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흥겨운 장면을 그린 이 그림에 서는 삼현육각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 는 무동의 춤사 위와 휘날리는 옷자락에서 신명이 느껴진다. 악사들이 나 무동 모두가 흥에 겨 워 흠뻑 젖어들어 있는데 구경 꾼이 없다는 것이 특이하다. 만약 구경꾼이 있었다면 구경꾼의 눈으로 이 그림을 보았을 것인데 구경꾼이 없음으로 인해서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림 속의 악사 나 무동이 되어 그림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된다. 화면 의 중앙을 비워둔 것이 이 그림의 화면구성의 특색이 다. 악사들이 안정감있게 '가'자로 꺾여 배치되어 있고 '가'자 중앙의 대각선 쪽으로 떨어진 곳에 무동을 배치 함으로써 전체적인 균형과 포인트를 아울러 배려하면 서 깊은 공간감을 연출하였다. 무동의 긴 소맷자락과 휘날리는 띠의 옷주름은 특별히 과감한 필치로 강렬하 게 처리되어 있 어 신명나는 춤사위가 잘 표현되고 있 으며 들어올린 발끝에서도 한국 무용 고유의 춤사위가 잘 표현되고 있다. 대금을 부는 악사의 어깨에서 팔에 이르는 선과 얼굴 표정에서 읽을 수 있듯이 악사들도 각기 음악에 흠뻑 젖어든 무아의 경지에서 음악을 연 주하고 있는 듯이 보인 다.

6. 김홍도의 <길쌈> 베틀에 걸터앉아 베짜는 모습과 실에 풀먹이는 모습을 화면 아래 위로 나누어 구성한 그림이 다. 베짜는 모습 의 그림이 주가 되지만 실에 풀먹이는 모습 또한 배경 이 아니고 또하나의 독 립된 장면이어서 두 가지의 그 림이 아래 위로 함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에 풀먹 이는 모습은 원경으로 작게 처리된 데다가 일하는 사 람이 뒤로 돌아앉아 있어서 두 가지의 그림이 서로 대 립되지 않게 하였다. 실제로는 이렇게 넓은 공간에서 베짜기를 하지 않고 또한 복잡한 구조를 가진 베틀이 그림에 서는 매우 단순하게 처리되었다. 그보다는 베 짜기를 하는 사람과 뒤에서 지켜보는 할머니와 아이들 등 인물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인물을 표현 하는 데 있어서도 할머니와 아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잘 표현함으로써 정감어린 정경을 그려내는 데 더 치 중하였다.

7. 김홍도 <씨름> 김홍도의 대표적인 풍속화 작품으로 씨름판 광경이 생 동감 있게 느껴진 다. 서로 안간힘을 쓰는 씨름꾼들의 자세와 표정이 너무나 생생하다. 씨름꾼들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있는 구경꾼들의 표정에서는 마치 실제로 탄성이 터져나오는 것만 같다. 원형으로 둘러앉은 구 경꾼들의 균형있는 배치로 네모진 화폭의 가장자리를 적절히 처리함으로써 훌륭 한 화면구성을 보이고 있다 .

2.김홍도 작품의 특징 흔히 김홍도는 조선적인, 그것도 가장 조선적인 화가 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그저 그림을 잘 그렸을 뿐만 아 니라, 무엇을 그려도 아주 우리 맛이 우러나게 그렸다 는 것이다. 특히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우리 풍속이나 우리 강산을 그린 작품은 물론이고, 이를테면 중국의 고사인물이나 정형산수 작품에서도 우리의 멋은 마찬 가지로 농익게 우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3.김홍도의 생애 1745년 한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가 안 동 장씨 집안은 대대로 도화서 화원을 배출한 미술가 집안이었기 때문에 김홍도는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에 게 그림을 배웠다. 결혼한 뒤에는 김응환의 소개로 표 암강세황과 교제하였다. 표암은 인물, 화조(꽃과 새), 사군자 모두 능숙한 김홍도를 추천하여 도화서 화원이 되게 했는데, 덕분에 김홍도는 이인문 등의 여러 화가들과 사귀면서 그림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다. 1805년 질병으로 위독 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언제 별세했는지는 알 수 없다.

4. 김홍도의 작품을 보고 느낀소감 그의 작품에 넘나드는 독특한 시정이 있는 바, 이것은 그의 문학적 감수성이 그림에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 다. 그리고 김홍도 작품의 주된 특징의 하나로, 여타 어느 화가들보다도 특히 여백을 절묘하고 넉넉하게 구 사하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 의 여유롭고 느긋한 성품과 연관되는 것이라고 생각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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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들아 제가 급한데 우리나라 전통 미술품에 대해서 간단히 올려주세요 제발요 그리고... 고려청자는 우리나라의 기술로 만들어진 화려하고 우수한 토기이고, 세계에서도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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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미술품을 찾아 감상한 내용을 정리해 보아야 하거든요.....그러니 전통 미술품 좀... 답변 : 우리 나라전통 미술과 설명만 해도 많이 있습니다. 유명한 작품을 소개합니다....

우리나라와 다른나라 미술품??

여러분 제가 수행평가로 우리나라 미술품과 다른나라... 정선은 전통적인 관념주의적 화풍에서 벗어나 경치를... 다도 우수한 그림들은 고려의 화려하고 세련미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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