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일어난 신비한 일들 여러가지좀 알려주세요

세계에서 일어난 신비한 일들 여러가지좀 알려주세요

작성일 2005.02.21댓글 3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세계에서 일어난 지진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정리가 조금 않되어있음..

★파라오의 저주★

투탄카멘의 황금 마스크
'황금마스크'보단 '파라오의 저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투탄카멘 파라오는 기원전 1343년 이집트 18왕조의 아메노피스 4세(일명 이크나톤)의 제2왕비 키야 사이에서 태어나 10세(기원전 1333년)의 나이에 파라오가 되어 20세에(기원전 1323년)에 사망했다.

왕가의 계곡(Valley of Kings)에 묻힌 채 수 천년 동안 잊혀졌던 투탄카멘은 사망한지 3245년 후인 1922년 10월 26일 영국의 카르나본 경과 고고학자 카터에 의해 거의 완벽한 상태로 발굴됐다.

이집트 파라오의 관에는 일반적으로 '사자의 안녕을 방해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라는 저주의 글이 쓰여있다. 이것이 이른바 파라오의 저주로 비약된 것이다.

파라오 저주의 첫 번째 희생자는 카르나본 경이었다. 미라가 있던 방을 개봉(1924년 2월 17일)한지 대략 6주후인 1924년 4월 5일에 공교롭게 카르나본 경은 투탄카멘의 얼굴에 나 있는 상처와 똑같은 부위를 모기에 물려 세상을 뜨고 말았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카르나본 경이 사망할 당시 카이로의 전등이 이유없이 꺼졌고 영국에 있던 카르나본 경의 테리어 개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죽었었다는 것도 확인 되었다.

카터와 카르나본 경 이후 카터 및 카르나본 경과 관련된사람들이 연이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발굴작업에 참여했던 아서 메이스라는 미국 고고학자가 카나본이 사망한 직후에 다시 사망하고, 미국의 유명한 민간 금융업자의 아들인 조지 J. 굴드도 무덤으로 안내된 다음에 다시 이튿날 고열로 눕고 그날로 죽었다.

조엘 울이라는 영국의 실업가도 무덤을 견학하고 귀국하던 도중에 고열로 죽었다.
투탄카멘의 미이라의 시체를 X선 촬영한 사진기사 아치볼드 더글라스 라이드도 1924년 영국으로 돌아가서 사망했다.

결국 1929년까지 카나본의 부인과 이복형제, 카터의 비서, 그리고 파라오의 후계자라고 우쭐대던 이집트 왕족 형제들을 포함해 관련자 약 30여 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 중에는 자살하거나 살해된 사람들도 있었다.

'파라오의 저주'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69년 투탄카멘의 무덤 발굴 대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아담슨이 영국 텔레비젼 방송에 출연해 "나는 한 순간도 파라오의 저주라는 터무니 없는 전설을 믿어본 적이 없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출연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24시간이 지나기도 전 그의 부인이 죽었고 아들이 등뼈를 다쳤다.

파라오의 저주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을까?

파라오의 저주'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이 시도되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독약에 관한 전문가들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한 설도 있다. 피부에 스며들기만 해도 치명적인 독을 묘지 안의 벽을 칠할 때 사용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파라오 저주에 대한 전설이 조작됐다는 것이다.
실제 투탄카멘 파라오의 무덤발굴과 관련된 사람 1천5백 여명 중 10년 이내에 사망한 사람은 21명 뿐이다.
이들의 죽음도 자연사이거나 발굴과 관계없는 사람들의 죽음, 또는 우연한 죽음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왕가의 계곡 특히 무덤을 최초로 개봉한 카터는 18년을 멀쩡하게 살다가 66세의 나이로 자연사했다.
투탄카멘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는 카르나본 경이 발굴자금의 조달을 위해 런던 타임즈와 기사보도에 대한 독점계약권을 체결하고 돈을 지원 받자 이에 대한 악감정을 가진 다른 언론들이 때마침 죽은 카르나본 경의 죽음을 부풀려 보도하면서 비롯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파라오 관에는 '사자의 안녕을 방해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는 문구가 쓰여 있지만 이와 동시에 '왕의 이름을 알리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라는 글귀도 함께 쓰여 있다. 투탄카멘은 자신의 무덤이 후손들에 의해 영광스럽게 개봉되기를 기다려 왔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버뮤다의 삼각지대★

'마(魔)의 삼각지대'라고 불리는 머뮤다 삼각지대는 미국의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버뮤다, 푸에르토리코를 잇는 3각형 모양의 바다를 말하는 것이다.
대략 북위(北緯) 20도에서 40도까지, 서경(西經) 55도에서 85도에 이르는 4백만㎢의 면적을 차지한다.

예전부터 이 지역을 통과하는 많은 선박과 항공기들이 괴현상을 보거나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기록은 1492년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할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워드 로젠버그는 1973년 U.S. Coast Guard는 지난 세기 동안 8,000건의 조난 신호와 50척 이상의 배와 20대 이상의 비행기가 버뮤다 지역에서 사려졌다고 한다.

이 괴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가설들이 나왔는데,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이론으로는 지구 자기장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지구의 자기장은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라 매 20~25만 년마다 자장이 바뀐다.

현재도 자장의 변화는 계속되고 있는데 그 때문에 자기적인 지진이 갑자기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며 버뮤다 삼각지대가 바로 대표적으로 자장이 불안정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공간이 일시적으로 형성되었다가 사라지므로 대비책을 세울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이론들로는 아틀란티스의 침몰지점, 외계인의 지구인 납치설, 4차원의 세계로 통하는 문, 바닷속의 메탄 가스설(oceanic flatulence: 바닷속의 메탄 가스가 갑자기 위로 솟아나와 배가 침몰하게 되었다는 주장)등이 있다.

버뮤다 삼각지대의 실종 사건을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버뮤다 삼각지대의 미스터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 지역의 교통량은 매우 많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난파당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미국 해안경비대 당국에 따르면 연간 버뮤다 삼각지대 부근에서 구조를 요청해오는 배는 그곳을 항해하는 약 15만 척의 선박 중 1만 척 정도인데 그 중에서 실종되는 배는 극소수라고 한다.

더불어 1975년의 보고에 따르면, 미국 연안에서 소식이 두절된 배는 21척이며, 그 가운데 삼각해역 안에서 사라진 것은 4척이었다. 그리고 76년에는 사라진 28척 중 6척이 그 지역에서 사라졌다.

버뮤다 삼각지대의 실종사건이 한창 절정에 이른 1977년 여름, 미 해군은 소련 함대와 협력하여 '포리모오드 작전'을 공동으로 수행하였다. 목적은 서부 대서양 해역의 자기 이상 유무, 불규칙한 해류와 파랑(波浪)효과, 해중의 음향전파 경로, 돌발적인 자기(磁氣), 태풍 등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조사 결론은 한마디로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였다.

침몰된 선박이 괴현상이 일어나는 장소를 버뮤다 삼각지대라고 불리게 된 원인은 빈센트 가디스가 대중 잡지인 '아고시(Argosy)'의1964년 2월호에 게재된 "죽음의 버뮤다 삼각지대"라는 기사에서 시작 되었다.
이 기사를 참조한 챨스 베리츠는 1974년의 베스트 셀러인 '버뮤다 삼각지대'를 썼다.

이로써 버뮤다 삼각지대는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이 후에 많은 책과 기사와 TV 프로그램이 이 버뮤다 삼각지대를 다루게 된 것이다.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고 이목을 모으는데 이보다 좋은 소재가 있을까

사람들에게 자주 인용되고 있는 여기에 실린 사고들에 관해서 애리조나 주립대학의 로렌스 쿠시는 전면 재검토를 행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고들에 대해 지극히 자연스러운 원인을 상정해볼 수 있었다.
아래에 열거된 사건들 가운데 *표가 붙어 있는 항목은 후일 다른 사람에 의해 이론이 제기 된 것이다.

버뮤다 삼각지대 상공에서 훈련배행 도중 사라진 아벤저 뇌격기 편대
1. 로절리 호(버려진 배)* 1800년, 좌초됐으나 선원은 구조됐다.
2. 메어리 셀레스테 호(버려진 배) 1872년, 아직도 수수께끼다.
3. 애틀랜타 호(소식이 끊긴 배)* 1880년, 심한 폭풍에 의함.
4. 엘렌 오스틴 호(버려진 배)* 1881년, 이야기의 출처가 불분명.
5. 프레이어 호(버려진 배) 1902년, 태평양의 해저지진으로 침몰.
6. 조슈아 슬로검 호(선원이 증발)* 1909년, 질병의 만연 또는 배의 전복.
7. 사이클로푸스 호(해군의 수송선) 1918년, 악천후.
8. 캐럴 A. 디어링 호(버려진 배) 1921년, 아직도 수수께끼다.
9. 라이후쿠마루(소식이 끊긴 화물선) 1925년, 악천후.
10. 고토파쿠시 호(화물선) 1925년, 기록적인 폭풍우.
11. 사다후코 호(괴물에게 잡혀먹혔다는 화물선) 1926년, 엔진 폭발.
12. 존 앤드 메어리 호(버려진 스쿠너) 1932년, 엔진 폭발.
13. 라 다하나 호(바닷속에서 나타난 '유령선') 1940년, 침수로 조정불능.
14. 글로리아 코리타 호(버려진 스쿠너) 1940년, 폭풍우에 의함.
15. 크로테우스 호와 네레우스 호(형제선) 1941년, 어뢰로 침몰.
16. 루비콘 호(버려진 화물선, 개가 살아 있었다) 1944년, 폭풍우에 의함.
17. 제 19비행중대(행방불명이 된 5대의 폭격기)* 1945년, 단순한 항법 실수.
18. 시티 벨 호(버려진 수쿠너)* 1946년, 악천후.
19. 스타 타이거(사라진 여객기) 1948년, 의문의 실종.
20. 엘 스나이더(사라진 조타수) 1948년, 기록적인 돌풍.
21. DC-3(사라진 비행기) 1948년, 조종 실수.
22. 스타 에어리얼(사라진 여객기, 19번과 자매기) 1949년, 미해결.
23. 샌들러 호(사라진 화물선) 1950년, 폭풍우로 인함.
24. 요크 트랜스포트(군사 수송기) 1953, 악천후.
25. 수퍼 컨스텔레이션(미해군기) 1954년, 미해결.
26. 서전 디스릭스 호(해군 화물선) 1954년, 폭풍우.
27. 콘네마라 4세 호(버려진 요트) 1955, 허리케인에 의함.
28. 해군의 정찰폭격기 1956년, 폭발.
29. 레바노크 호(사라진 요트) 1958년, 폭풍우로 인함.
30. KB-50(사라진 공군기)* 1962년, 미해결.
31. 마린 설펴 퀸 호(화물선)* 1963년, 여러 가지 자연적 원인으로.
32. 스노포이(사리진 낚시배) 1963년, 악천후와 화물 과적.
33. 2대의 KC-135(공급 급유기)* 1963년, 공중 충돌.
34. C-119 '플라잉 복서'(공군기) 기술적 결함.
35. 체스 YC122(수송기) 1967년, 기체구조의 결함.
36. 비치크라프트 보난자(경비행기)* 1967년, 엔진 고장.
37. 파이퍼 아파치(경비행기) 1967년, 악천후 또는 엔진 고장.
38. 위체클라프트 호(순양함)* 1967년, 폭풍우로 인함.
39. 스코비온(원자력 잠수함) 1968년, 구조적 결함.
40. 테인마우스 일렉트론(버려진 세계일주 요트) 1969년, 자살.
41. 파이퍼 코만치(경비행기)* 1970년, 비행사 실수로 인한 엔진 고장.
42. 엘 칼리브 호(사라진 화물선) 1971년, 공중납치로 보인다.
43. V.A. 포그호(사라진 유조선)* 1972년. 폭발.

★이스터 섬의 모아이★

모아이
이스터 섬은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의 동쪽 끝에 위치한 조그마한 화산섬으로 넓이가 약 166㎢이고, 칠레(1888년 이후 칠레의 영토가 됨) 앞바다 3800㎞에 위치하고 있다.
남위 27도, 서경 109분에 있고, 아열대의 온화한 기후의 섬이다.

'이스터 섬'의 이름은 이 섬의 발견자인 네덜란드 제독 로헤벤이 1722년 4월 5일, 즉 이스터(부활절) 날에 발견한 것에서 유래한다. 섬사람들은 이스터 섬을 '라파누이(큰섬)' 또는 '테피트오테헤누아(세계의 배꼽)'라고 부르고 있다.

이 조그마한 섬에 유명하게 된 이유는 '모아이(Moai)'라고 불리는 거대한 석상들이 여기저기 서 있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석상들은 다리가 없고 몸통만 있는 위풍당당하면서도 거북스러운 모습에 머리는 어울리지않게 크고 턱은 힘차게 앞으로 뻗고 귀는 괴상할 정도로 길다.

지금까지 이런 거대한 석상들이 약 1000개 가량 발견되었는데 키가 3.5-4.5m에 달하고 무게가 20t쯤 되는 것이 많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무게가 90t이고 키는 10m나 된다.
대부분 서기 400∼1680년 사이에 만들어졌고 11세기경 가장 많이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1722년 처음으로 이곳을 발견한 네덜란드 제독 야코프 로헤벤은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섬에 키가 10m가 넘는 거대한 군인들이 섬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놀랐다.
제독은 침착하게 배를 섬에 접근 시켜 거대한 군인들이 단순한 석상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제독이 상륙한 다음날 여러 가지 색을 몸에 칠한 원주민의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보통 키에 붉은 머리의 백인이었다.

1968년 스위스인 다니켄은 주민들과 밀접한 대화를 나눈 결과 이스터 섬에 있는 거석들의 진상을 알아냈다고 발표했다. 그의 말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외계의 지적 생물체가 거석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니켄은 원주민들이 돌로 된 연장만으로 조각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석의 질이 단단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더욱이 거석의 규모가 너무 크고 많았다.

원주민의 숫자가 많지 않았고, 거석을 옮기기 위해 사용했을 통나무를 만들 숲이 주위에 없었다. 이스터 섬의 천연적인 환경은 이런 거석들을 만들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다니켄의 책은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비슷한 류의 책들이 수 없이 발간됐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외계인의 작품이라는 모아이를 보기 위해 이스터 섬을 방문했다. 초호화 유람선의 일정에 이스터 섬이 단골메뉴로 포함됐다.
그러나 이스터섬을 체계적으로 연구 한 학자들은 외계인이 모아이를 만들었다는 설명은 한마디로 책을 팔기 위한 장사속이라고 일축했다. 모아이는 신비에 가득찬 유물이 아니라 이스터섬 주민들이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 정착한 최초의 이주민은 호트 마트아를 추장으로 하는 단이족 (귀가 작은 민족)이다. 마트아 추장은 한 여자를 두고 사랑때문에 벌어진 장이족(귀가 큰민족)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이곳에 왕국을 세운다.
섬에는 식량이 부족해 고구마를 주식으로 삼았고,닭과 쥐를 길러 식량을 대신했다. 그러나 장이족이 다시 이곳을 침략해 섬 전체를 지배했다. 이들은 단이족이 반란을 일으킬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대규모 건설 작업을 감행했다. 모아이 건설이 그것이다.

장이족은 단이족이 농사 지을 시간을 제외하곤 모아이를 만드는 노동에만 전념케 했다.
하지만 장이족은 사람을 잡아먹는 습관이 있어 단이족의 아이를 곧잘 잡아먹었다. 참다 못한 단이족은 또 다시 전쟁을 일으켰고, 이번에는 장이족이 싸움에 패배했다.
단이족은 권력을 되찾자 장이족이 자행한 탄압의 상징인 모아이를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이 전설이 사실일까? 한번은 싸움터로 알려진 곳의 도랑 밑바닥에서 채취한 재를 탄소연대 측정법으로 조사한 일이 있다. 그결과 전쟁은 1680년을 전후로 일어났다는 점이 밝혀졌다.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42년 전에 해당한다.

모아이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다니켄을 비롯한 일부 탐험가들은 모아이가 모두 철과 같이 강한 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모아이의 재질은 화산석이다. 화산석은 돌 연장으로 거대한 석상을 단시간 내에 조각할 수 있을 정도로 무른 재질을 갖췄다.

조각된 모아이를 지정된 장소에 옮기는 방법도 비교적 간단하다. 정교한 'Y자'형의 나무로 만든 썰매를 이용하면 적은 수의 인원으로 쉽게 거대한 모아이를 옮길 수 있다는 점이 증명됐다.
실험에 따르면 6.5km 정도 떨어진 거리를 한달 안에 옮기는 것이 가능했다. 한편 운반된 모아이는 지렛대를 사용하면 간단하게 세워진다는 결론이 제시됐다.

현지인들을 동원해 실제로 모아이를 세우는 실험을 재현했는데, 놀랍게도12명의 인원으로 18일만에 모아이 하나를 세울 수 있었다. 이스터 섬에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는 점도 과장이었다. 예전에는 산림이 무성했지만 큰 화재로 모두 불타버려 현재와 같이 황폐한 섬이 됐다는 설명이 유력하다.

모아이는 누구를 대상으로 조각한 것일까?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것은 원주민들의 선조로 선왕이나 고관 또는 존경할만한 사람들이 모아이의 모델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의문은 말끔히 풀리지 않는다. 왜 하필이면 이 거대한 석상을 만들었을까?

결국 이스터섬의 표정없는 거석들은 앞으로도 계속 풀리지 않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숨겨진 비밀이 어떻든 섬의 원주민이 수많은 모아이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나스카의 문양★

지구 반대쪽 남미 페루의 나스카 평원은 페루 남부의 태평양 연안과 안데스 산맥 기슭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연중 안데스산맥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한류인 홈불트해류가 흐르는 바다에서 습기를 거의 실어 오지 못하기 때문에 열대림이 무성하게 자라기 마련인 위도에 놓여있으면서도 지난 1만년 동안 거의 비가 오지 않았다.

너무 건조해 매 2년마다 겨우 12.5mm 정도의 비가 내리며 바람도 거의 불지 않는 사막지형이다.
이 나스카 평원에는 벌새, 고래, 원숭이, 거미, 개, 나무, 우주인, 펠리컨 등의 그림이 30개 이상 그리고 소용돌이, 직선, 삼각형, 사다리꼴과 같은 수많은 기묘한 곡선이나 기하학 무늬들이 200개 이상 그려져 있다.

그림 한 개의 크기가 100m에서 300m에 달하는 거대한 것이다.
어떤 것은8km의 직선이 마치 긴 활주로처럼 뻗어 있는 것도 있다. 그림들이 그려진 면적을 모두 합치면 거의 1,300㎢에 달한다.
도대체, 이런 황량한 사막에 누가, 언제, 왜, 어떻게 그린 걸까?

나스카의 토양은 황색의 점토성으로 작은 돌과 화산자갈로 덮혀 있는데 공기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검은색이므로 문양은 돌을 살짝 걷어내고 깊지 않은 골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선명하게 구별된다.
또, 선을 따라 돌을 배치하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치 않는다. 더욱이 이 지역은 매우 건조해서 문양은 오래 보존 될 수 있었다.

이미 16세기 스페인의 연대기 작가인 시에사 데 레온이 '나스카 부근사막에 있는 이상한 부호들'에 흥미를 느꼈지만 과학자들의 본격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1941년부터 였다.

이 신기한 문양들을 처음 조사한 사람은 미국 롱아일랜드 대학의 농업경제학자인 폴 코스크 교수였다. 그는 나스카의 문양이 지면에서는 도저히 그 그림을 알 수 없고, 공중(지상 300m 이상)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또, 거대한 문양들이 정확하게(1km의 길이에서, 평균적으로 옆으로 2m정도 벗어남) 그려졌다는 것이다.

그의 뒤를 이어 독일의 여성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마리아 라이헤 박사가 연구에 몰두했는데 그녀는 나스카인들은 말뚝에 끈을 묶어 직선을 그렸고, 콤파스의 원리 처럼 중심점을 사용하여 곡선이나 원을 그렸다고 주장했다.

실제로도 말뚝을 박았던 흔적과 중심점을 발견하였다. 또한, 그녀는 나즈카의 문양들이 B.C200 ~ A.D600년경(나즈카기)에 건설되었다고 주장하고있다.
도자기와 남아있는 나무들의 방사성 탄소측정결과나 나즈카의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들이 나즈카선과 유사하였기 때문에 이 근처에 나즈카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걸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즈카의 문양들을 건설 하였던 걸로 보았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나즈카 문명이 출현하기 이전에 나즈카의 문양이 건설되었다는 반대 주장도 나왔다.

1968년 천문학자 제럴드 S. 호킨스는 컴퓨터로 나스카의 문양이 천제와 관계되는지 연구를 시도했는데 나스카 문양과 천체와의 연관성을 찾는데는 실패했다.
그는 나스카에 있는 93개의 그림들과 45개의 별에 관해 측정한 자료들을 컴퓨터에 입력시킨 다음 나스카 선들의 배열과 BC 5000년 이후 해와 달과 별이 차지했던 위치 사이에 일치하는 것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 대답은 실망적인 것이었다. 일치가 되는 배열도 몇개있었으나 우연의 일치에 불과했다.
컴퓨터는 나스카 문양의 선들이 달력을 이루고 있다는 통계적 증거를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저명한 문화연구가인 Johan Reinhard는 나즈카의 많은 선들이 종교적인 성지를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나즈카인들은 산을 숭배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안데스 산에는 많은 신들(그들은 독수리나 콘돌의 형상을 했음)이 거주하고있으면서 날씨와 물과 곡식을 풍성하게 조절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덧붙여 신들의 우두머리인 비로체(Viracocha)는 산, 물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했다.

영국의 소설가이며 모험가인 토니 모리슨은 나스카의 바퀴 문양과 안데스 지역에서 보여지는 바퀴의 형태가 거의 유사하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그곳에서의 인디언들은 아직도 고대 잉카의 전통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가족만의 독자적인 문양을 자신들의 영토 안에 그려서 다른 가족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가족일수록 더욱 더 큰 문양을 만드는데 나스카 문양도 바로 가족 집단간의 차별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과시용으로 만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나스카의 문양에 대한 수많은 추측이 제기되는 가운데 세인의 관심을 가장 크게 끈 사람은 이스터 섬의 모아이가 외계인에 의해 만들었다고 주장한 스위스인 다니켄(Daniken) 이다.
다니켄에 따르면 외계인은 고원에 도착해 두개의 활주로를 건설했다. 외계인들이 고원을 떠난 후 원주민들은 사라진 신(외계인)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랬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자 원주민들은 새로 문양을 만들었다. 외계인에 대한 신앙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1968년 이런 내용을 담은 책 '신들의 전차'는 놀랍게도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켰다. 10년 사이에 3천 5백만부가 팔리는 초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이론은 몇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우주선착륙장으로 쓰일만큼 땅이 충분히 단단하지 않았고, 두번째로 우주 비행장으로서 쓰이기에는 폭이 너무 좁았다.
세번째로 다니켄은 동물모양의 지리문자(Geoglyph)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니켄의 이론은 과거 우주 조종사였던 짐 우드맨의 관심을 끌었다. 1973년 나스카에 도착한 우드맨은 나스카의 문양을 보고 이 그림은 하늘에서 내려다보지 않고서는 그렇게 거대한 그림을 정밀하게 표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늘을 날 수 있는 생명체만이 만들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던 중 나스카의 문양 근처의 도굴된 무덤에서 발견된 직물(1 평방인치 당 섬유수 : 205x110줄)을 현미경으로 조사한 결과 현재 사용되고 있는 낙하산(160x90줄) 소재보다 섬세하게 짜여졌으며, 열기구에 쓰여지는 소재보다 뛰어난 기밀성(氣密性)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또한, 도기에는 기구나 연으로 보이는 깃발의 끈을 늘어뜨리며 비행하는 물체의 그림이 수없이 그려져 있었다. 더욱이 나스카의 천에는 날고 있는 남자의 그림이 무수히 그려져 있었다.
현재 중남미의 오지에 사는 원주민들 사이에는 종교적인 의식을 거행할 때 작은 열기구나 연을 하늘로 띄우는 풍습을 가지고 있다.

최종적인 단서가 된 것은 '불에 탄 구멍'의 존재였다. 지름이 최대 10m나 되는 구멍에 검은돌들이 놓여 있었는데, 이들을 분석한 결과 극심한 열에 의해 검게 변한 것임이 확인됐다.

1975년 11월 우드맨은 나스카 인들이 기구를 만드는 데 사용했으리라 짐작되는 도구와 당시의 기술만을 사용하여 기구를 만들어 실험하였다. 열기구의 형태는 나스카의 직물과 도자기에 그려져 있는 사면체 그림을 본땄는데 피라미드를 엎어놓은 모습과 도 같았다.

며칠동안 나무를 태워 기구를 부풀리고, 기구가 다 부풀자 기구를 고정시킨 밧줄을 풀렀다. 기구는 몇 초만에 120m나 올라가 14분을 비행했다.
이 실험으로 나스카인들이 어떻게 거대한 문양을 그릴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어느 정도 풀렸다.

그러나, 나스카 문양에 대한 모든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다. 나스카 문양이 의미 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것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확실한 근거와 이론은 아직도 밝혀지고 있지 않다.

★사라진 아틀란티스 대륙★

아틀란티스 대륙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335년경 플라톤의 저서중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라는 철학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플라톤은 을 집필하는데 있어, 소크라테스와 친구들의 대화를 기록하는 형식이라서 어느 것이 플라톤의 것이며, 어느 것이 소크라테스의 것인지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유명한 그리스의 정치가 솔론은 이집트의 고도(古都) 사이스의 사제로부터 아틀란티스 대륙 이야기를 듣고 그리스 인 크리티아스에게 들려주었다.
이 크리티아스와 이름이 같은 그의 손자가 소크라테스의 친구이며, 바로 플라톤의 에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9,000년 전에 아주 강력한 고대 국가가 있었다. 이 나라는 모든 면에서 완전한 이상 국가였다.
아주 예전에, '헤라클레스의 기둥'(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지금의 지브롤터 해협 동쪽 끝에 솟아있는 두 개의 바위를 말한다) 뒤편에 큰 섬이 있었다.
이 큰 섬을 아트란티스 대륙이라고 불렀는데 이 섬을 지배하던 나라는 동서로 리비아에서 이집트 접경 지역까지, 북쪽으로는 유럽의 티레니아(이타리아 중북부)까지 통치하는 강력한 국가였다.
이 국가는 그리스와 이집트의 해협에 위치한 지역도 점령하였다. 그러자 그리스에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그리스 전체를 총괄하는 동맹군을 만들었다. 그러나 동맹군 간의 이해가 서로 엇갈려 모두들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그리스 혼자만 싸워 승리자가 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후에 엄청난 지진과 해일이 일어나, 단 하루의 밤과 낮 사이에, 그리스의 전사 모두가 땅 속에 묻혔고 아틀란티스 대륙 역시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직도 사라진 섬과 유적들이 수면 바로 아래에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배가 항해하기 불가능하다. 그것은 침몰한 섬이 남긴 많은 이토(泥土)가 배의 항해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그리스 정치가 솔론이 사이스의 사제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그러면 아틀란티스 대륙은 역사상 실제로 존재하였던 대륙인가? 존재했다면 그 위치는 어디인가?

플라톤 이후 아틀란티스 대륙은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수 많은 사람들이 아틀란티스 대륙의 존재와 위치에 대해 다양한 주장을 했고, 이에 관한 책도 무려 5,000권이 넘는다.
아틀란티스 대륙은 대서양이나 지중해에 있다는 주장이 대부분이지만 태평양 한가운데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플라톤은 아틀란티스가 대서양 한복판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많은 탐험가들이 대서양을 진지하게 탐사했었고,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자, 이곳은 아틀란티스라고 보는 사람도 많았다.

아틀란티스 대륙을 전설이나 플라톤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이상향으로만 생각하던 사람들은 1871년 독일의 슐레이만의 트로이 유적 발견과, 1901년 아디 에반스가 크레타 섬에서 미노아 문명을 발견함으로써 더욱 관심이 고조되었다.

19세기 말 정치가이면서 학자인 이그나티스 도넬리는 50줄의 나이에 (1882)과 (1883)를 출간했는데 이 책들은 1963년까지 50회 이상 재판(再版)됐다.

그는 아틀란티스가 '심한 지진과 홍수로 인해 하룻밤 사이에 없어졌다'라는 플라톤의 이야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전세계에 퍼져있는 홍수전설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였다.
그는 아틀란티스 대륙이 기원전 9800년(플라톤이 말한 연대)보다 이전에 대서양 한가운데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매우 진보된 금속 문명, 문자의 발명, 나침반의 발견, 항해술의 발전, 화약, 종이 등 모든 분야가 거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각 대륙에 퍼져있는 피라미드, 미라의 보존기술, 태양력, 그리고 대홍수의 전설 등을 예시 했다. 즉 아트란티스 대륙이 대홍수로 가라앉은 후 두 문화권이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제각기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넬리의 가설은 해저의 팽창이나 대륙이동설, 혹은 다른 분야의 과학의 진보에 의해서 대부분 부정되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두 대륙이 하나(아틀란티스)에서 출발했다면 고대 문명에서 사용되었던 바퀴와 가축들이 왜 신대륙에는 사용되지 않았냐는 것이다.

1909년 K.T 프로스트는 타임지에 '아틀란티스의 파괴는 고대 지중해를 석권하였던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과 인근에 있는 산토리 섬의 화산 대폭발(기원전 15세기경)과 관련되어 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1969년 J.V.라스도 같은 맥락의 '재발견된 아틀란티스'라는 제목으로 다시 언급했다. 그들은 솔론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로 간주하고 철저히 분석했다.

또한, 이집트인들은 청동기 시대에도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자료를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이스의 사제가 솔론에게 해준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이야기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주장도 크레타 섬이 아틀란트스 대륙이라면 그리스 인들이 보아서 '서쪽에 있었던 섬'이 아니기 때문에 비판이 제기 되었다.

그 후, 프로스트 가설를 강력히 지지하는 증거가 나왔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산토리 섬의 화산은 기원전 15세기경 폭발하였는데 그때 함께 일어난 해일이 엄청났기 때문에 미노아 문명의 중심지인 크레타 섬은 물론, 훨씬 남쪽에 위치한 이집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1967년부터 마리나토스는 산토리니 섬을 발굴하여 1m 두께의 화산재 아래에서 고대 문명의 도시가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산토리니의 재난이 있기 전에 크레타는 매우 번영하였던 섬나라로 지중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짐작할 때, 다음과 같은 추측을 할 수 있다.

산토리니 화산이 터지기 전은 기원전 1600 ~ 1500년 전후가 되는데 그 당시 이집트에는 고대 문명이 발달했을 때이므로, 크레타와 이집트는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산토리니 화산이 터져, 그 영향은 이집트까지 미쳤고, 그 후에 크레타 사람들의 왕래가 끊어지자, 산토리니 섬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이집트 인들 사이에 전해 오다가 솔론이 알 게 되어 플라톤까지 이어지고, 플라톤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위해 책으로 남긴 것이 아닐까? 더구나 산토리니 섬의 멸망과정과 발굴된 후의 모습은 플라톤이 묘사한 내용과 매우 비슷하다.

이제 아틀란티스의 비밀이 밝혀진 듯 하였으나 1977년 필힐러와 시링크라는 두 독일 과학자는 화산의 분출물을 세심하게 조사하여 산토리 섬의 폭발은 크레타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은 화산이 폭발한 후 거의 100년이 지난 기원전 1380년까지도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로 내세웠다.

아틀란티스 대륙의 존재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플라톤의 에 기록된 9,000년 전이라는 것이다. 먼저 플라톤은 자기가 태어나기 전 9000년 전이라고 했는데, 산토리니 화산 폭발은 1600 ~ 1500년에 있었다는 점이다.
또 플라톤은 아틀란티스가 대서양에 있었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위치가 너무 틀린 것이 아닐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새로운 가설이 나왔는데 당시 이집트 인들은 해양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아틀란티스의 위치를 잘못 알았으며, 플라톤이 말한 9000년 전이라는 것은 실제로 900년을 잘못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고 하면, 플라톤이 말한 아틀란티스는 산토리니 섬과 크레타 섬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오늘날 고고학계에서는 아틀란티스 대륙이 가공의 대륙으로 간주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청동기 시대의 크레타에서 번성한 미노아 문명의 영화를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마야문명★

마야문명은 현재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주에서 과테말라, 유카탄 반도의 전역과 온두라스 일부에 퍼져있으며, 과테말라 북부 페텐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한 고대 문명이다.
마야문명은 자연적인 지형에 의해 세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것은 광대한 열대림으로 덮힌 페텐 지구, 우수마신타 분지의 파시온 강 지구, 유카탄 저지대 지구이다.

다른 문명들과는 달리 인간이 살기에 아주 부적합한 열대 밀림에 도시를 세우고, 중앙집권의 단일 지도 체재가 아닌 수많은 부족의 집합으로써 도시 국가 형태를 이루고 있던 마야문명은 천문, 역법, 수학, 미술 공예 등이 놀랄 만큼 과학적이고 정교하였으며, 일종의 상형 문자인 신성 문자를 사용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마야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화전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촌락이 올멕의 영향 하에 문명화로의 첫걸음을 내딛는 시기로, 기원전 300년까지를 형성기(形成期)라고 한다.
그 후로 3세기까지를 전고전기(前古典期)라 하는데, 서기 68년경에 이미 마야인은 지금의 온두라스에 우와하쿠콘이라는 도시를 세우고 약 120년간 그곳에 살았다. 엘미라도르 유적 등에서는 대규모 신전 건축이 세워졌다.

그들은 3세기 후반에 페텐 지방에 강대한 도시국가를 형성하였다. 이 때부터 987년까지를 고전기(古典期)라 부르는데 특히 티칼로 도읍을 옮기면서 전성기를 맞아 그곳에서 5세기 초까지 거주했다.
그 후 마야인은 도읍을 건립했다가 버리고 또 건립했다가 버리는 일을 되풀이했다.
8세기경부터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9세기말 멸망한다.

한편, 유카탄 반도 북부 저지대에는 5세기부터 도시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150년 후 문예부흥이 일어나고 유카탄의 마야문명은 8~9세기에 전성기를 누린다. 9세기말부터 유카탄이 멸망한 15세기까지를 후고전기(後古典期)라 한다. 에스파냐 인이 들어왔을 무렵(1510년)에는 이전의 화려했던 문명은 밀림 속에 함께 매몰되어 있었다.

마야문명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문명보다도 신비롭고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다.

첫째, 마야인들은 다른 어떤 문명과도 견줄 수 있는 뛰어난 문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이 살기 부적합한 밀림 속에 도시를 건설했냐는 것이다.

이들이 도시를 세운 열대 우림 지역은 풀과 나무가 무성한 밀림으로 덮여있고 표범, 멧돼지, 독사, 독도마뱀, 독거미 등이 우글거린다. 또한 축축한 습기와 더위로 전염병이 유행하기 쉽다.
고대 4대 문명의 발상지들이 강을 끼고 온대기후에 속해 기후가 좋고 비옥한 토지에서 발생했던 것과는 달리 마야문명은 무더운 밀림 속에서 이룩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마야인들이 세운 거대한 석조 건축물의 비밀이다. 그들이 세운 건축물은 인근 어느 민족보다도 뛰어났고 규모도 컸다.

페텐의 밀림 속에 있는 티칼은 신대륙 최대의 유적이며 마야 최고의 대도시이다. 그곳에는 신전, 궁전, 승원(僧院) 등 석조 건축물이 무려 1㎢ 당 약 200개의 비율로 3,000개 이상이나 된다.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하면서도 마야인들은 도시와 밀림을 연결하는 포장도로도 만들지 않았다.
또한, 수레바퀴의 사용법을 알고 있었음(무덤 속에서 바퀴 달린 장난감 출토)에도 불구하고 바퀴를 사용하지 않고 그들이 직접 그 많은 자재를 운반했다.

셋째, 다른 고대문명보다 훨씬 앞선 역법, 천문학, 수학이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도 사용되지 않았고 근세기에 들어와서 사용한 0(Zero)의 숫자를 마야인은 일찍이 실용화한 점이다.

카툰이란 단위로 시간을 측정했던 마야인들은 3세기경부터 이미 0 을 포함한 20 진법 숫자 체계를 갖고 계산했다. 0 의 사용은 인도보다는 3 백년, 아라비아 상인보다는 7 백년 정도 앞선 것이다.

마야의 천문학은 매우 발달하여 그들은 1년이 365.2420 일이라고 밝혔다. 오늘날 정확한 과학조사로 밝혀진 날짜는 365.2422 일이니 불과 17.28초의 차이다. 그들의 수치계산이 얼마나 정확했던가를 잘 알 수 있다.

또한, 마야인들은 금성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어 584일 주기의 금성력(金星曆)까지 만들었는데, 그들은 태양력의 8년 동안에 금성력이 꼭 0.4일 어긋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넷째, 찬란한 마야문명을 꽃피었던 마야인은 9세기 이후 갑자기 사라졌다. 고전기의 마야의 도시는 이카튼(7,200일)의 종료 때마다 기념비를 남겼는데, 790년에는 19개의 밀림도시의 모습이 사라졌고 810년에는 12개 도시로 줄었으며 830년에는 불과 3개의 도시만이 남았다.

전쟁이 일어난 흔적도 없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흔적도 없다. 그들은 문명의 후계자도 남기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설 하나 남겨놓지 않고 사라졌다.

왜 마야문명이 멸망했는가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우선 내부적인 요인으로 소수 지배계층에 대한 피지배계층의 반란을 들 수 있고 ,외부요인으로는 북쪽의 아즈테카 같은 강력한 종족의 침입을 들 수 있다.
다른 관점에서의 멸망의 원인으로는 지역적인 기후조건(열대 밀림지역), 토양의 생산성 부족, 문명 진보의 거부를 들 수 있다.


결국, 마야문명은 멸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으로 귀결 된다.
척박한 기후와 화전에 의한 토질 악화, 탐욕스러운 유럽의 정복자들과 전염병, 바로 이런 몇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멸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까지 살아 있는 마야인의 후예는 약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하지만 그들은 고대 자신들의 선조가 이룩했던 찬란한 마야문명과는 완전히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

'엘도라도'란 스페인어로 '금가루를 칠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 근처에 살고 있는 인디언(칩차족) 마을의 추장을 지칭하는 말로써, 그들은 1년에 한 번씩 추장의 몸에 금가루를 바르고, 뗏목에 황금 보물을 싣고, 그들이 섬기는 호수(구아타비타) 속의 신을 찾아 호수 한 가운데에서 보물을 물속에 던지고, 호수 물로 추장 몸의 금가루를 씻어내는 풍습이 있었다.

16세기 페루와 멕시코를 정복한 스페인인들은 이 신비스런 이야기를 듣고 이 추장을 엘도라도(=황금인간)라 불렀다. 그런데 이야기가 와전되어 엘도라도가 '황금의 도시'로 변했다.
일반적으로 엘도라도는 황금의 도시, 황금의 땅, 신비의 땅, 행운의 땅으로 여겨진다.

1536년 케사다는 전설의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를 찾아 500명의 군인과 85마리의 말, 수 명의 신부들을 이끌고 콜롬비아 보고타 고원의 칩차족 마을에 도착했다.
케사다와 그 일행은 마을을 약탈하고 원주민들을 고문하여 신비로운 풍습에 대한 이야기와 구아타비타 호수의 위치를 알아내었다.
해발 2,700m에 있는 구아타비타 호수엔 인디언들의 촌락만 있고 황금인간은 없었다. 호수 속에 잠긴 황금을 건질 방법이 없었던 케사다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580년 보고타 출신의 스페인인 세풀베다는 호수의 준설허가를 받고 8,000명의 인디언을 동원하여 호수의 벽에 배수로를 만들고 물을 빼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많은 어려움 끝에 배수로는 완성되고 물이 쏟아져 나가 수심이 20m나 낮아져 몇 가지 에메랄드와 황금이 발견 되었다. 그러나 안전시설이 완벽하지 못하여 배수로는 무너지고 황금은 다시 호수에 잠기게 되었다.

이 구아타비타 호수에서 보물을 건지려 했던 사람은 많았지만, 뜻을 이룬 사람은 아직 없다.
엘도라도의 꿈을 찾아 계속적으로 호수를 발굴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지만 1965년 콜롬비아 정부는 최종적으로 쿠아타비타 호를 천연 보호 지역으로 설정하고 구아타비타 호를 대상으로 한 모든 채굴을 원천적으로 금지시켰다.

1969년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서 몇 시간 거리에 있는 산 속에서 두 농부가 개를 찾으려다가 작은 동굴을 발견했다.

거기서 순금으로 만든 조그만 뗏목 모형이 나왔는데, 뗏목 위에는 순금으로 만든 추장이 서 있고, 노잡이 여덟 명이 감히 추장을 바라보지 못하고 등을 돌린 채 노를 젓는 모습이었다.
이 출토품의 추장이 엘도라도라고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엘도라도라는 말에는 '황금의 도시'라는 뜻 말고도 '황금 인간'이라는 뜻이 있다.
그렇다면 엘도라도란 황금 도시가 아니라 이 뗏목 위의 추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과연 엘도라도가 진짜 황금 도시인지 또는 금가루를 바른 옛 칩차족의 추장을 가리키는 말인지, 아직껏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이다.
분명한 것은 아직도 사람들이 엘도라도를 찾으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1. 영국의 Leeds에 사는 26세의 점원 Walter Hallas는 평소 너무도 치과 가기를
무서워한 나머지 충치가 아파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동료에게 자신의 턱을
치기해서 그 아픈 이빨의 뽑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동료가 턱을 치는 충격에 넘어진 Hallas는 뇌진탕으로
즉사했다... -_-;

2. 아일랜드 시골에서 공장을 운영하던 George Schwartz는 자신의 공장이 한쪽
벽만 제외하고 완전히 파괴될 정도의 폭파사고에도 불구하고, 폭파 당시 무너지지 않은 바로 그 벽 옆에 서 있었던 관계로 약간의 찰과상만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다. 병원에서 몇일간 간단한 치료를 받고 퇴원, 공장 잔해에서 자신의 서류를챙기던 그는 그 남아 있던 한쪽 벽이 갑자기 무너져 깔려 죽었다... -_-;;

3. 1983년, 뉴욕의 Carson부인은 평소 지병인 심장병으로 사망판정을 받고,
관속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조문객들이 보는 가운데 관 두껑을 열고 벌떡 일어났다. 다시 살아 난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딸이 그걸 보고 심장병 으로
즉사... -_-;;;

4. 1977년, 뉴욕에서 한 남자가 차에 치였으나 별 부상을 입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그걸 본 목격자가 그러지 말고 다친 척하고 차 앞에 쓰러져
있다가 나중에 보험금을 타라고 귀뜸을 해주자 그는 차 앞에 다시 엎드렸는데
바로 그 순간 차가 다시 출발했다. 물론 죽었다... -_-;;

5. 1993년, 달라스에서 높이가 너무 낮은 터널이나 육교의 위험성을 알려
일반인들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킬 목적으로 홍보 영화를 촬영 중이던 Mike
Stewart는 자신의 타고 촬영하던 트럭이 높이가 너무 낮은 육교 밑을 지나가다는 것을 모르고 계속 촬영하다 육교에 걸려 죽었다... -_-;

6. 이태리 피사에 사는 Romolo Ribolla는 오랫동안 직업을 구하지 못해 장기 실업 상태에 있던 자신의 처지를 비관 권총을 머리에 대고 자살을 기도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그의 아내가 1시간에 걸친 설득 끝에 간신히 그를 안정시키고
총을 내려 놓게 만들었는데 울음을 터뜨리며 총을 마루 바닥에 내려 놓는 순간
발사되어 애꿎은 아내가 총에 맞았다. 부인 사망...

7. 벨기에의 Antwerp에서 도둑질을 하던 좀도둑이 주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을 피해 뒷문으로 다급히 빠져나간 다음 발목을 붙잡는 경찰을 뿌리치고
3미터 넘는 담을 간신히 넘어갔다.
옷을 털고 일어나 보니 시립 형무소였다고 함...

8. 1976년, 22세의 아일랜드 청년 Bob Finnegan은 Belfast에서 도로를 건너다가
달려오던 택시에 부딪혀 택시 지붕 위로 붕 떠서 한참을 날아간 후 떨어졌다,
택시는 뺑소니를 쳤고... 그가 기절한 채로 도로위에 누워있는 동안 또 한대의
차가 달려와 그를 치었고 그는 노견으로 굴러 밀려났다. 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을 때 이번에는 봉고가 달려들어 주변에 서 있던 사람 셋을 들이받고 또한번 Bob Finnegan까지 치고 달아났다.
저 멀리서 네번째 자동차가 달려오자 이번에는 사람들이 모두 피했고
오직 한사람만 치었는데 바로 Bob Finnegan이었다...
단 2분사이에 4번의 교통사고를 당한 Bob Finnegan은 팔, 다리가 부러지고,
두개골이 함몰되고, 골반이 내려앉았고... 기타 등등... 그래도 죽지는
않았다함.......-_-;;;;;;;

9. 헝가리 시골을 오토바이로 여행하고 있던 Critso Falatti는 기찻길 건널목에서 차단기가 내려와 건널목에서 섰다.
열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동안 염소 한마리를 끌고 한 농부가 그의 뒤에 섰다.
그 농부가 염소줄을 내려온 차단기에 걸고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이번에는 마차가 그의 옆에 섰고 바로 뒤에는 스포츠카가 섰다.
잠시후... 기차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순간, 놀란 말이 Falatti의 팔을 물어버렸다. Falatti는 화가 나서 말의 마빡을 주먹으로 내려쳤고. 그러자
말주인이 마차에서 내려와 그와 싸우게 되었고 주인이 싸우는 것에 더욱 놀란
말이 갑자기 뒤로 달리는 바람에 뒤에 서있는 스포츠카를 마차로 들이받아
스포츠카 뚜껑을 날려버렸다.
이에 스포츠카 운전사도 내려서 싸움에 끼어들었고 잠자코 있던 농부가 이들을
말리는 사이 차단기가 올라가 염소가 졸지에 교수형 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헝가리 보험사고 사상 가장 복잡한 사고였다함....-_-;;;;;;

10. 독일 소도시 Guetersloh을 짙은 안개 속에 운전하던 두 운전자가 교통사고를 당해 둘 다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 그들의 차는 흠집 하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나중에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이들이 진술한 바에 따르면 하도 안개가 짙어 중앙선 조차 잘 보이지 않자 둘다 운전석 창밖으로 목을 내놓고 달리다가 맞은편에서 목 내놓고 달려오던 상대방 마빡을 서로 박치기 한
것이었다고.....o.O;;;;
차는 전혀 부딪히지 않고..
세계 유일의 마빡 정면 충돌사고였다함..

11. 1979년 영국에서 나이 18세에서 29세의 청년 일곱명이 각각 3-4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사건이 있었다.
서로 일면식도 없이 전혀 모르던 사이였던 이 일곱명의 젊은 인생을 망친 사건의 발단은, 이들 중 한명이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먹고 있던 감자칩을 던진 것이 옆에 서있던 남자에게 우연히 맞은 데서 부터였다고... 일부러 던진 것이네 아니네.. 하다가 싸우고
옆에서 말리고, 말리다 싸우고, 또 그걸 말리다 싸우고, 또또 그걸 구경하다
싸우고...
나중에는 30명 초대형 집단 난투극이 됐다함..

*사전적 정의 : 먼저 세계 7대 불가사의(世界七大不可思議)란 지구 상에서 불가사의한 것으로 여겨지는 7가지 사물(事物)을 총칭하는 말.

@@ 고대7대불가사의(古代-七大不可思議) @@
'로마제정기에 필로(Philo)가 말한 7대 대건축물 및 예술작품《세계의 7개경관(De Septem Orbls Spectaculis)》을 일컫는다.
1. 이집트 쿠푸왕의 피라미드(Pyramid)
2. 바빌론의 세미라미스 공중 정원(Hanging Garden)
3. 에페수스(Ephesus)의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
4. 피디아스의 작품 올림피아의 제우스(Zeus) 신상(神像)
5. Rhodes항구의 크로이소스 거상(巨像) - Colossus
6.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러스 영묘(靈廟) - Mausoleum
7. 알렉산드리아 - 파로스(Pharos) 등대
그러나 위의 7가지 중 오직 피라미드만 현존함으로 인해 새로이 7대불가사의를 지정 해야하는 필요성에 따라 최근에는 아래의 것들을 '현대 7대 불가사의'라고 정의한다.

@@ 현대 7대 불가사의 @@
1. 이집트 쿠푸왕의 피라미드(Pyramid)
BC 2550년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7대 불가사의 가운데 가장 크며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이다. 역사상 최고의 미스테리, 미스테리 하면 떠오르는 것이 이집트의 피라미드라는 사실은 부정할수 없을 것이다.
그 크기, 설계의 치밀함, 주변환경과 조화되어 있고 천문학적 지식을 집대성하고 있는 피라미드는 심오한 우주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건설되어졌고,
평균 2.5톤의 돌을 230만개나 250만개 쌓아올린 엄청난 무게를 4,800년의 기간동안 견디며 장엄함을 드러내며 우뚝 서있다.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토목공사 인부들의 체력보충을 위해 인류역사상 최초로 마늘이 식용되었다는 것이다.

2. 로마 원형극장
원형경기장 〔라틴어〕 Colosseum
유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티투스제(Titus帝;79~81) 재위시에 완성된 로마의 원형 극장(콜로세움, Colosseum)인데 타원형의 긴 지름 188m, 짧은 지름 156m, 높이 48.5m로 아레나(arena;짐승을 가두어 두는 방과 지하에 통로를 설치한 것)는 긴 지름 156m, 짧은 지름 54m였으며 약 5만 명이나 되는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현 로마에 원형그대로의 유적이 있다.

3. 영국 거석 기념물 (Stonehenge)
영국 남부 솔즈베리평야 중앙에 있는 거석기념물. 흔히 스톤헨지로 불린다.
최초의 작은 언덕의 자료를 근거로 탄소 14법에 따라 측정(BC 2145±95)한 결과 북동쪽 1.5㎞의 에이브베리의 스톤 서클이나 남쪽 25㎞ 지점에 있는 스톤헨지 등의 거석기념물(巨石記念物)보다 연대적으로는 조금 앞선 축조물로 추정되고 있으나 축조목적은 분명하지 않다.

4.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
大聖堂 Duomodi Pisa
신앙생활의 상징으로서 번잡을 피한 시의 북쪽 변두리에 세워져 있으며, 오늘날에도 아직 지난날의 분위기가 남아 있다.

5. 중국의 만리장성
중국 본토 북쪽에 축조된 방어용 성벽. 북방기마민족 흉노의 남침을 저지하게 위함.
진시황때 지어짐.장성이 현재의 규모로 된 것은 명(明)나라시대로,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청나라 때에는 군사적 의미를 상실하고 몽골과의 정치적 경계에 불과하게 되었다. 실제로 만리보다 길다.


6. 이스탄불 소피아 성당
Hagia Sophia(The Basilica of St. Sophia) :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성당건축
15세기에 이 사원은 개조되어 터키 공화국 때부터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곳에서는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뛰어난 성모마리아의 모자이크화와 이슬람교의 코란의 금문자, 미나레트 등이 동거하는 신비로운 세계를 맛볼 수 있다

7. 알렉산드리아 - 파로스(Pharos) 등대
BC 250년 무렵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항구 부근의 작은섬 파로스에 세워진 등대로,
높이 솟아 있는 석조건조물의 정상부분에 불을 태우는 장치가 있으며, 렌즈나 거울이 쓰였다고도 한다.

정리는 잘 되어있진않지만 도움이 되시길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저는 괴생물체발견으로 할게용~



 

러시아 남부에 있는 첼랴빈스크라는 작은 도시의 한 하수구에서 괴상한 생물이 발견되었네요

지하에서 건축 공사를 하던 곳에서 한 작업꾼이 점심을 먹다가 하수구에서 괴상한 움직임이 보이는 것을 본후

그가 먹던 빵 조각을 던졌었다.

그랬더니 그 빵조각이 떨어진 곳에서 엄청난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곳에 있던 작업꾼들은 전부 그곳을 집중해서 보게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그것을 잡게 되었는데..

그 생물의 크기가 약 15cm(150에서 15로 정정했어요~)정도 된 크기였다고 한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어떤아이가 음악만 들으면 피아노로 칠 수 있다는 것

 

 

 

 

마우스로 긁으시오.(글자가 나옴)

신비한것들(?) [내공많이드림]

... 남들이잘알지못하는 신비로운 동물(?)을알려주세요 예)... 예)앨프,늑대인간 ..자세하게 많은답변을 설명도... 이세계에 소환된 후 에, 상위마신이 낳은 존재라고...

세계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지진

세계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지진 좀 알려주세요... 이러한 판들은 지구 내부에서 작용하는 여러가지 힘으로... ● 피해를 줄이기 위해 미리 준비해야 할 : 지진에...

이유와 그래서 일어난 좀 알려주세요

... 청· 두나라의 조선쟁탈전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제일 차 세계 대전 후 민족 자결주의에 입각하여 손병희... 이를 계기로 다시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여러 가지 개혁을...

일어난 사례나 단체좀 알려주세요...

기아 빈곤이 일어난 사례나 단체 자세히 좀 알려주세요. 단체가 하는 일까지요 부탁... 위한 여러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다. 또한 세계적인 문화예술인들이 임명되어...

미스테리좀 알려주세요<미신도 가능

... 그러나 피라미드의 비밀을 밝히는 과정은 우주의 신비... 그래서 여러 가지 것들이 피라미드 내에 다시... 제우스는 우주를 지배하는 신이며, 인간 세계를 다스리는...

문화 유산의 뜻 과 종류 좀 알려주세요~

세계 문화 유산의 뜻과 종류좀 알려주세요.... 저 지금 학교 컴퓨터실 이거든요? ㅜ,ㅜ... 수호하는 여러가지 모습의 신들이며, 치마를 입은 금강역사상 또한 불법을 수호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