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건국과정 및 건국설화 2시간안에 해주세요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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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6.03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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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건국과정 및 건국설화   2시간안에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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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건국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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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제의 건국시조



현재 우리의 역사교육에서는 온조가 백제의 건국시조라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하지만 백제의 건국설화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상당히 복잡하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건국설화를 두 가지로 기록하고 있다. 온조를 시조로 하는 온조백제와 온조의 형 비류를 시조로 하는 비류백제설화가 그것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본문에 시려 있는 백제 건국설화를 살펴보자.



백제의 시조를 온조왕인데, 그의 부친은 추모, 또는 주몽이라고 한다.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박해를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당시 졸본부여왕에게는 딸만 셋이 있을 뿐 아들이 없어 걱정스러워하던 차에 주몽의 인물됨이 비범함을 보고 둘째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했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부여왕이 죽었고, 주몽이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였고 둘째아들은 온조였다.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았던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었다. 그러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결국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나니 많은 백성들이 그를 따랐다. 그들은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기 좋은 터를 살폈다. 비류가 바닷가에 터를 잡자고 주장하자 열 명의 신하가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고려해보건대 이 하남(河南)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가 띠를 둘렀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악에 의거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습니다. 이러한 천연적인 지리의 이점을 가진 곳은 얻기 어려우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비류는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나누어 가지고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터를 잡고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의 보필을 받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비류가 터를 잡은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하게 살 수 없는 곳이었다. 비류가 위례성을 방문해 보니 그곳 도읍이 잘 정비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비류는 이것을 보고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다가 죽으니 그를 따르던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모여들었다.



그 뒤부터 나날이 백성들이 즐겁게 따르므로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부여(夫餘)로 성씨를 삼았다.








2. 온조건국설화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이 부분이 온조를 중심으로 한 백제의 건국설화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을 요약하면, 온조는 고구려 건국시조인 주몽과 졸본부여왕의 둘째왕녀 사이에 태어난 차남이다. 온조는 아버지 주몽의 첫부인에게서 난 아들 유리가 주몽을 찾아와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형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에 정착하고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십제라는 나라를 건국했다. 그 얼마 뒤 형인 비류는 미추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해 버렸으며 온조는 형을 따르던 무리까지 모아서 몸집을 부풀려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고구려 왕위계승 싸움에서의 패배이다. 온조의 아버지인 주몽 역시 정적인 북부여왕자 대소의 박해를 피해 졸본부여로 탈출했다. 주몽은 뛰어난 정치력으로 처가의 권력을 등에 업고 졸본부여의 실세가 된 다음, 장인이 죽자 아예 나라를 통째로 차지해 고구려를 건국했다. 비류와 온조는 다음 왕위는 당연히 자신들 중 한 명이 차지한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난데없이 북부여에서 유이라는 이복형이 나타난다. 이때부터 고구려에서는 치열한 권력투쟁이 전개된다. 승자의 선택은 주몽이 쥐고 있는데, 결국 첫째부인에게서 난 유리의 손을 들어준다. 백제의 건국신화는 이렇게 해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주몽은 왜 유리를 후계자로 선택했을까? 『삼국사기』「고구려본기」대로라면 첫부인 예씨에 대한 애틋한 감정과 약속 때문인 듯하다. 사실 주몽은 대소의 박해를 피해 야밤 도주했고, 당시 그의 아내는 임신중이었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탈출하면서 아내에게 "그대가 남자를 낳거든 그 아이에게 이르되 내가 유물을 칠릉석(七稜石 : 일곱 모가 난 돌) 위 소나무 밑에 감추어 두었으니 능히 이것을 찾는 자가 나의 아들이라고 전해 주오"라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뒤 과연 유리와 첫부인이 징표를 들고 타나났고,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삼는다. 그러나 약속 또는 정 때문에 후계자를 유리로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인의 나라를 받아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아마도 재위기간 내내 토착세력들의 도전을 받았을 것이다. 부여라는 나라는 각기 독자적인 부족세력의 정치연합니다.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의 부족장들이 모여 왕을 세운다. 처가쪽 부족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20년 동안 이들 부족들과 때로는 타협하며 때로는 회유와 강압의 수단으로 통치기반을 닦았을 것이다. 이제 그 기반을 자신의 독자세력으로 대체할 시기가 되었을 때쯤 북부여에서 유리가 왔다. 아니면 주몽이 은밀히 유리를 끌어들였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주몽의 입장에서 보면 토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원래 부족을 끌어들이는 것이 여러 모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시조 동명성왕 19년(기원전 19년)조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4월에 왕자 유리가 부여에서 그 어머니와 더불어 도망하여 왔으므로 왕은 기뻐하여 유리를 태자로 세웠다.



그러나 유리가 태자로 책봉되자 비류와 온조는 두려워하여 고구려를 떠난다. 비류와 온조는 왜 두려워했을까? 『삼국사기』「백제본기」는 비류와 온조가 "태자인 유리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자신들을 따르는 무리를 데리고 북만주에서 한반도로의 기나긴 고난의 길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류와 온조측으로서는 유리의 태자책봉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태자 자리를 놓고 고구려 지배층은 유리세력과 비류·온조 지지세력으로 양분되어 유·무형의 충돌을 했을 것이다. 결국 치고권력자인 주몽이 유리세력 편에 가세함으로써 비류와 온조세력은 패배했고, 유리세력의 보복이 두려워 고구려를 떠나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남하했을 것이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는 유리가 태자로 책봉되고 나서 5개월 뒤엔 그해 9월에 주몽이 40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건국시조 박혁거세가 75세, 백제의 건국시조 온조가 65세로 사망한 것이 비해 주몽의 40세는 너무 짧다. 더구나 태자 자리를 놓고 양측이 치열하게 권력투쟁을 벌인 상황에서 왕의 사망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이후에도 왕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외부세력에게 권력을 빼앗긴 토착세력의 반발은 격렬했을 것이다. 토책세력인 비류 및 온조세력과 외부세력인 유리 및 그를 옹호하는 주몽세력간에 다툼이 일어나고 그것이 무력충돌로 발전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와중에서 주몽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고, 또한 유리측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어 비류와 온조세력이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추측할 수 있다.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의 근처가 아니라 아예 머나먼 한반도 중부지역까지 내려온다. 만일 줌오에서 유리에게로의 권력이양이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면 비류와 온조의 머나먼 남하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 때문일 것이고, 권력투쟁에서의 패배의 결과로 본다면 그만큼 유리의 공격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상대 나라의 왕을 서로 죽고 죽이는 백제와 고구려의 원한은 이때부터 싹텄는지도 모른다.



회한을 품고 고구려를 떠난 비류와 온조일행운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서울이 있는 한강 유역에 도착한다. 일행은 한산의 부아악이라는 곳에 올라 주변 지리를 살피며 어느 곳에 정착할지를 논의한다. 형인 비류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해변에 있는 미추홀이라는 곳에 터를 잡는다. 형 비류와는 달리 온조는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한다. 시간이 얼마 흐른 뒤, 미추홀에 살던 비류는 동생이 도읍한 위례성을 방문한다. 동생 온조가 세운 십제라는 국가가 번성하고 있는 모습을 본 비류는 자신의 선택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자 비류를 따랐던 백성들이 모두 미추홀을 떠나 위례성으로 모여든다. 위례성은 비류세력이 합세하자 더욱 번창하였고, 온조는 이를 기쁘게 생각하여 국호를 비로서 백제라고 고친다. 이때부터 온조는 백제의 건국시조로 역사에 등장한다.








3. 비류건국설화



비류중신의 건국설화는 『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왕조 본문 말미에 할주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는 이런 말도 있다. 시조는 비류왕이다. 그 아버지는 우태로,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다. 그의 어머니는 소서노로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그녀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을 가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가 비류이고 둘째가 온조였다. 우태가 죽자 그녀는 졸본으로 돌아와 홀로 살았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전한 건소 2년(기원전 37년) 봄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고구려라 하였다. 이어 주몽은 소서노를 아내로 맞아 왕비로 삼았다. 그가 나라를 세울 때 자못 내조가 있었으므로 주몽은 그녀를 특별히 사랑하여 후하게 대했으며, 비류 등도 친자식처럼 여겼다. 그런데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난 아들 유류(孺留)가 찾아오자 그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가 아우인 온조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도망하여 이곳에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털어서 나라를 세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런데 대왕이 세상을 뜨신 후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우리들은 여기 헛되이 있으면서 몸에 붙은 혹처럼 우울해 하느니보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했다. 드디어 비류는 아우 온조와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그곳에 살게 되었다.



『북사』와 『수서』에 이르기를 "동명의 후예에 구태(仇台 : 구이로도 읽음)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실하였다. 그가 처음에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우니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가 자신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었다. 그 나라가 드디어 동이의 강국으로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이 건국실화를 간단하게 분석해 보자.



우선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친자식이 아니고 북부여의 왕자인 우태의 자식이라고 했다.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온조시조설에서는 백제의 역사적 정통성이 부여 → 고구려 → 백제로 이어진다. 그러나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친자식이 아니라 부여왕자의 친자식이라고 할 때의 백제건국의 역사적 정통성은 부여에서 곧바고 백제로 이어진다. 즉 백제와 고구려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동등한 위치에 서는 것이다.



사실 백제와 고구려는서로의 정통성을 놓고 치열하게 다퉜다. 고구려의 주몽이 동명성왕을 지칭한 것이나, 백제의 온조왕이 나라를 세우자마자 동명왕 사당을 건립하고 그곳에 참배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의 맥을 잇기 위해 서로 싸웠다. 이것이 건국설화에 투영되고 있는 비류시조설의 진상이다.



다음으로 이 설화에서는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은근히 배은망덕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이미지는 소서노라는 여인을 통해 나타난다. 소서노는 자기 재산을 털어가면서 주몽을 도왔다. 주몽은 소서노라는 여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도 졸본부여의 권력핵심으로 진입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사실은 주몽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친자식이 아닌 비류와 온조를 친자식처럼 돌봤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권력을 거머쥐자 주몽의 마음을 변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친자식인 유리가 북부여에서 자신을 찾아와 고구려로 오자 그를 태자로 삼고 나라를 물려줬다. 왕권을 차지한 유리와 첫째부인 예씨는 노골적으로 소서노와 비류, 온조 형제를 탄압했을 것이다. 소서노 입장에서 보면 은혜를 원수로 갚은 주몽은 배은망덕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는 것이다.



또한 이 건국설화에서는 비류일행이 남하한 경로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있다. 즉 비류일행은 패수와 대수라는 강을 건너 미추홀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당시 패수와 대수가 지금의 어느 강인가는 학자에 따라 다르다. 패수(浿水)는 글자 그대로 조개껍질이 물가에 많이 모여 있는 강이고, 대수(帶水)는 강물이 마치 허리띠처럼 생긴 강이다. 패수란 강의 위치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무제에 의해 고조선이 멸망할 당시의 경계가 바로 패수였기 땜문이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조선열전」에 보면, 한나라 육군은 패수를 건너 왕검성으로 쳐들어온다. 이때가 기원전 108년인데 50년 뒤에 신라가 건국되고 다시 20년의 시차를 두고 고구려와 백제가 건국된다. 아직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패수란 강 이름이 엉뚱한 것으로 바뀌었을 확률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패수란 강의 위치가 오늘의 어디인가에 따라 비류일행의 이동경로가 밝혀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패수는 중국 요서에 있는 대릉하라는 설부터 한반도 황해도에 있는 예성강이라는 설까지 다양하게 주장된다. 여기서는 일단 패수는 청천강, 대수를 대동강이라 추정한다. 그렇다면 비류일행은 동가강을 따라 압록강 하류를 나와서 서해안을 끼고 지금의 평안도와 황해도 해변을 따라 최종적으로는 미추홀에 정착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온조시조설이 그냥 남하했다고 하여 육로이동을 암시한 것가는 차이가 있아. 온조시조설에 따르면 온조일행은 동가강 지류를 타고 압록강에 도착하여경계를 지나 함흥을 거쳐 추가령지구대를 통과하여 소양강 상류에 도착했고, 다시 북간강 수계를 따라 한강 유역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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