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습지좀,,,4/30일저녁까지좀여 ㅠㅠ내공100이에요,,,

사회학습지좀,,,4/30일저녁까지좀여 ㅠㅠ내공100이에요,,,

작성일 2009.04.30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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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고수님들!전 초5학년 인데요,학습지의 빈칸이 많지만 정성껏 채워주세요.정성껏 채워주신분은 내공+100을 드립니다~! ●되도록이면 4.30일 저녁10까지좀여 플리즈님들...●그럼제가 채택한번더해드림

 

2-(2)-3

-도로등 (       ) 시설 정비

지역의 자연환경을 이용하거나 오래 전부터 다른지역에 널리 알려져 있던 생산물을 ( )선정하여 ( )을 연구하고 농민에게 이를 알려서 ( )을 중대시키는 데 힘쓰고 있다.

-(      )을 보전하기 위한 시설 세우기

촌락을 발전시킬수잇는 방법;

새로운 ( )을 활용하자

 -(      )과 같은 시설을 이용하면 (     )에 관계 없이 농사를 지을수있다.

-(          )을 이용하여 (      )를 교환하면새로운 기술을 빨리 익힐수 있다

살기 좋은 마을로 가꾸자 

 -(       ),(         )등을 한군데에 공동으로 세우면 마을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촌락의 (    )를 (          )으로 활용하여 마을 사람들이 새로운정보를 얻도록한다

-도시사람들이 참여할수 있는 (          ), 촌락 사람들이 공동으로 작업할 수있는 시설등을 만들면 촌락의 부족한 (   )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

 촌락의 독특한 자연 환경과 풍습을 세계적으로 개발하여 알리자!

-교통이 편리한 산간지역에 (  ), 종합 휴양시설,쇼핑센터등을만들어 관광수입을 올린다 

-제주도에서는 (   )과 (   )을 접목시킨 체험형 어촌관광수입을 올리고 있다.

교과서 88-90쪽의 '참다래 아저씨,(            )농업인' 농촌과 도시간의 농산물 (    )유통, 어촌체험관광 이야기를 참고하여 실제 사례를 조사하여 봅시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몽촌토성은 1983년부터 총 6차례 발굴조사된 한성백제시대의 토성으로 파악되고 있는 사적(제297호)이다. 몽촌토성, 풍납토성은 백제의 첫 도읍지 위례성의 소재를 밝히고 백제 초기사를 정립할 수 있는 중요한 사적지로 어느 곳이 백제 첫 도읍지인지에 관하여 학계에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문헌상의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백제 초기사 정립은 발굴품의 연대추정, 성격 분석을 통해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발굴작업"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이들의 발굴은 아파트 공사에 임하기전 "긴급발굴"로 시행된 것으로 문화재보호, 사적지보호에 있어 사전발굴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었다.



1) 몽촌토성의 사적지정


◎ 문화재명 : 몽촌토성 (夢村土城)
◎ 분 류 : 성지(성곽)
◎ 수 량 : 441,765㎡
◎ 지 정 일 : 1982. 7. 22
◎ 소 재 지 :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88-4 (올림픽 공원 내)
◎ 시 대 : 백제시대 초기(4∼5세기)
◎ 소 유 자 : 국유 및 사유
◎ 관 리 자 : 송파구

백제왕국 초기 하남 위례성 유적의 일부로 추정되고 있는 몽촌토성은 몽촌역사관과 함께 해자와 목책 등이 잘 보존되어 있어 시민들의 역사학습장으로 애용되고 있다.







2) 몽촌토성의 개요


백제(百濟)가 한강(漢江)유역에서 건국(建國)·발전(發展)했던 때의 대표적(代表的)인 토성(土城)이다. 몽촌토성은 한강지류에 해당하는 이곳의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진흙을 쌓아 성벽을 만들었고, 특히 북벽의 단을 이룬 곳에서는 나무울타리를 세웠으며, 그 외곽에는 해자가 둘러져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성은 북쪽방향으로부터의 침공에 대비한 방어용 성의 성격을 많이 띠고 있는 한성 백제시대의 토성임을 알게 되었다. 성 내부에서는 움집터, 독무덤, 저장 구덩이 등 유구와 함께 백제토기를 비롯하여 무기, 낚시바늘, 돌절구 등 각종 유물이 출토되어 한성백제시대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 몽촌토성의 구조

성안은 낮은 안부(鞍部)를 낀 구릉이 있어서 낮은 지역은 4개의 구역으로 구분되며 동북쪽으로 이어진 구릉에 작은 외성(外城)이 있다고 추측되고 있다. 성(城)의 안팎을 드나드는 통로(通路)는 9개가 있는데 이들이 옛부터 문(門)터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서북쪽은 북동문터로 자연적인 배수(排水)가 되고, 남문(南門)·동문(東門)도 배수(排水)가 되는 곳이다. 성밖으로는 구릉경사의 아래쪽에 외곽을 따라서 해자(垓字)가 파여지고 물이 고여있었던 요새(要塞)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북동쪽을 성내천(城內川)이 휘감아 흘러 자연적(自然的)방어선(防禦線)을 이루고 있다. 성벽(城壁)은 구릉의 낮아진 안부(鞍部)를 판축(版築)으로 다져 올렸는데, 서북쪽과 동벽(東壁)의 외측(外側)에서는 1.8m 간격의 목책주혈(木柵柱穴)이 발견되었으므로, 성벽 위에 목책(木柵)이 시설되었을 가능성이 조사된 바 있다.


◆ 몽촌토성과 풍납토성과의 차이점

북쪽으로 강변(江邊)의 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이 평지강안(平地江岸)에 판축(版築)된 것과는 달리, 이 토성(土城)은 해발 45m내외(內外)의 자연구릉(自然丘陵)을 이용(利用)하여 축조된 것에서 경주(慶州)의 월성(月城)이나 대구(大邱)의 달성(達城)과 같은 초기(初期)의 유형을 가지고 있다.


◆ 발굴성과 및 의의

이 산성(山城)에서는 주거지(住居址)와 저장혈(貯臟穴)·분묘(墳墓)등의 옛 유구(遺構)가 조사되었다. 많은 유물(遺物)들이 수습되었는데 백제(百濟)한성시기(漢城時期)에 해당하는 것들로 판단되었다. 특히 중국(中國)서진(西晋)(265∼316A.D.)의 전문도기편(錢文陶器片)이 찾아져 축조년대(築造年代)의 상한(上限)이 3세기 말경까지 소급될 수 있음도 알려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유물들은 백제(百濟)한성기(漢城期)에 이 토성(土城)이 주요한 거성(居城)의 하나였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중심 년대가 4∼5세기(世紀)였다고 판단되므로, 백제(百濟)가 고구려(高句麗)의 공격(攻擊)으로 웅진성(熊津城)으로 옮아간 서기 475년을 마지막으로 폐성(廢城)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百濟)초기(初期)의 움집과 대형(大形)의 저장혈(貯臟穴)의 발굴은 백제사(百濟史)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많은 유형(類型)의 토기(土器)와 무구류(武具類)도 출토되었다. 이 토성(土城)은 그 위치(位置)·규모(規模)·유물상(遺物狀)등으로 보아 한성시대(漢城時代)백제(百濟)의 군사적(軍事的)·문화적(文化的)중요성이 높은 성터로 판단되고 있으며, 이웃의 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과 함께 백제초기(百濟初期)의 왕도(王都)를 구성하는 여러 성터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 해자

한강지류에 해당하는 이곳의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진흙을 쌓아 성벽을 만들었고, 그 외곽에는 해자가 돌려져 있고, 목책을 두른 것으로 보아 북쪽 방향으로부터의 침공에 대비한 방어용 성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자는 성의 밖으로 물길을 내어 방어선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 목책

우리 나라의 목책은 초기 철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적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쓰여졌다. 단순히 목책만 설치한 목책성이 있고 몽촌토성과 같이 토성벽 위에 목책을 설치한 성이 있다. 몽촌토성의 목책은 1983~1988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결과 목책의 자리가 확인되었는데 생토 암반층에 1.8m간격으로 직경 30~40cm, 길이 30~90cm의 구멍을 파고 큰나무를 막아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사이에 보조기둥을 세웠던 것이다. 목책의 높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m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 목책은 발굴 조사된 원래의 목책기둥 자리를 따라 그 위에 추정 복원한 것이다.


◆ 수혈주거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정밀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4채의 지상 건물터와 12개의 움집터가 나타났다. 그 중 지면에서 1m정도 파서 만든 수혈주거지에는 주로 말뼈나 철제 무기류가 출토되어, 살림집이 아닌 군대와 관련된 특수용도로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움집들은 해발 25m가 넘는 높은 지대에 위치 하고 있다. 이들은 평면형태와 깊이에 따라 3가지 형식으로 나뉘어진다.
첫번째는, 구릉상의 경사면을 L자 형태로 파서 만든 것이고, 이것이 숫적으로 가장 많다.
두번째는, 수혈의 평면형태가 장방형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며, 당시의 지면으로부터는 1m 정도 파서 만든 것인데, 이런 형태의 움집내에서는 주로 말뼈나 철제 무기류가 출토되어, 일반 살림집이 아니라 군사와 관련된 특수한 용도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세번째 형태의 움집은 평면 육각형의 건물지로, 육각형의 짧은 변이 만나는 지점(동남쪽)에 출입시설을 만들고 있다. 간벽의 길이는 6m 가량되고 짧은 벽은 4m 가량된다. 긴 벽에는 기둥구명이 10개씩 배치되어 있는데 각 기둥구멍의 간격은 50cm 내외이다. 또, 짧은 벽에도 4∼5개의 기둥구멍이 배치되어 있으며, 기둥구멍의 크기는 20∼30cm 가량이 일반적이나 모서리의 경우에는 무게를 많이 받기 때문에 더 커지는 경향이 있다. 움집내부에는 별도의 시설은 보이지 않으나, 움집 북동쪽 모서리에서 온돌모양의 화덕시설이 드러난 것이 있다.
발굴 조사된 4개의 움집터 중에서, 1호는 평면이 장방형인 두번째의 형식이나, 이것이 폐기된 후 2호 주거지가 축조됨으로 인해서 많은 부분이 깎여 나간 상태이다. 3,4호 주거지는 전형적인 육각형 모양의 주거지로 역시 3호 주거지가 폐기된 후 동쪽으로 약간 이동하여 4호 주거지를 축조하였다.


◆ 성곽의 구조와 형식

·성벽(城壁) - 성곽의 성격을 구분짓는 것은 성벽이다. 일정지역을 성벽으로 둘린 위곽(圍郭) 자체는 가장 큰 방어력을 제공하는 주요 시설이다. 특히 우리 나라 성곽은 성벽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크다.

·목책성(木柵城) -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부여, 진한,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시대 초기에는 주로 목책성을 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목책은 내구성이 부족한 반면 단기간에 설치할 수 있는 좋은 방어 시설물로 후 대에도 사용된 방법이다. 특히 토성벽에 함께 설치하여 방어력을 높이는 수단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토성(土城) - 목책성과 더불어 흙으로 성벽을 조성하는 옛 형식이다. 토성은 목책보다는 공력이 많이 들지만 삼국시대는 물론 조선의 도성이었던 한성도 처음에는 토성으로 축조하는 등 상당히 오랜 기간 널리 사용된 재료였다. 산지 토성의 경우 기존 지세를 잘 이용하였는데 특히 급경사 지역은 기존 지형을 깍아 경사에 대비하는 삭토법(削土法)으로 성벽을 만들고 완경사에는 주변의 흙을 쌓아 토단(土壇)을 만들어 둔덕을 조성하는 성토법(盛土法)을 이용하였다. 주요한 성벽에는 토성벽을 조성하기 위해 한켜 한켜씩 얇게 깔아 다져 올리는 판축법(版築法)이 적용되었다

·석성(石城) - 일반적으로 성벽 하면 석성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내구성이 부족한 나무나 흙을 차츰 돌로 개축하여 쌓아 현재 전하는 성은 대부분 석성이기 때문이다. 석성은 산지에서 경사면을 이용하여 성을 쌓고자 하는 곳에 일부 흙 을 파고 성 외벽만 석재로 쌓고 내부는 흙을 단단히 다져 채우는 방법을 주로 이용했는데 이를 내탁법(內托法) 또는 편축법(片築法)이라 한다. 다른 방법으로 주로 평지에서 사용된 경우로 성벽의 안팎면을 나란히 석재를 쌓아 올리고 내부는 석재로 채우는 방식이다. 이는 재료와 공력이 많이 들어가 기 때문에 평지 일부와 성문의 육축부분에 적용된 예가 많다. 이런 방식을 협축법(夾築法)이라 한다.

·테뫼식 산성- 마치 머리에 띠를 두른 것처럼 산 정상부를 둘러 쌓은 산성

·포곡식 산성- 산 정상부와 계곡을 아우르는 형태로 쌓은 산성으로 우리나라 산성의 대표적 형태이다. 남한산성·북한산성 등이 그것으로 물을 얻을 수 있는 관계로 장기항전이 가능하다


◆ 흙문화로서의 몽촌토성

고구려의 성곽은 초기부터 돌을 쌓아 만든 석성이 많지만 백제의 성곽은 흙을 쌓아 만든 토성(土城)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물론, 5세기경에 이르면 백제에서도 석성을 쌓기 시작하지만, 그 이전에 축조된 성곽은 거의 대부분 토성이었다.
토성을 만드는 방법은 다양한데 그 다양한 방법을 단순화시켜 두 가지로 나누면 흙을 쌓아 만드는 방법覆土法과 흙을 깎아 만드는 방법削土法으로 정리된다. 흙을 쌓아 만드는 방법은 보통 평지에서 많이 이용되었는데, 판축(版築)이라 하여 흙을 10∼50cm의 일정한 두께로 깐 다음 발과 각종 도구를 이용하여 다짐으로써 단단하게 만드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흙을 깎아 만드는 방법은 산성을 만들 때 많이 이용되었는데, 산의 경사면 중 일정 부분을 돌아가면서 '考'자(字) 모양으로 깎아낸 다음 그 흙을 위로 퍼올려 절벽의 높이를 더하는 방법이 많이 사용하였다. 이렇게 만든 토성은 석성에 비해 성벽이 가파르지 못하여 방위상 다소 불안할 뿐더러 튼튼하지도 못하여 자주 보수해야 하는 약점이 있지만, 적은 인력으로 단시간에 완성할 수 있으며, 석공(石工)처럼 전문적인 기술자를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제성이 매우 뛰어난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토성은 중국에서 흔히 사용된 방위용 건축물이었으며 따라서 백제의 토성은 아마도 중국 토성의 영향일 개연성이 높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풍납리토성이라 한다. 풍납리토성은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토성으로, 원래는 전체 둘레 3.5km의 방형 내지 타원형 평지성이었으나, 홍수와 도로·주택 건축공사로 인해 대부분이 파괴되어 지금의 동벽과 북벽의 극히 일부분만 남아있다. 성벽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은 약 26m에 달하며, 성벽 기저부의 폭은 약 30m정도로서 백제 최대의 토성이라 하겠는데, 내부에서는 과거 일제시기에 청동제 초두와 금반지, 유리구슬 등이 우연히 발견되기도 하였다. 초두는 마치 국자처럼 생긴 냄비에 세 개의 발이 달린 그릇으로, 음식을 조리하거나 술·약 등을 데우는 데 사용한 듯하다. 풍납리토성지의 동남쪽 인근, 곧 지금의 올림픽공원 내에는 몽촌토성이 있다. 지금은 도시개발로 인해 주변 환경과 지세(地勢)가 많이 달라졌지만, 원래 몽촌토성이 있는 곳은 남한산(南漢山)과 연결된 저산성 구릉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따라서 몽촌토성은 원래 산성에 가까운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자연구릉의 능선을 성벽의 일부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평면 형태는 무어라 형용하기 어렵지만, 울퉁불퉁한 마름모에 가깝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성벽의 길이는 2,285m이며, 내부의 면적은 67,000평이라 한다. 몇차례의 발굴을 통해 몽촌토성 안에서는 각종 건물지와 연못, 망대 등의 유적이 확인되었고, 토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수습되었으나, 토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라든가 성격을 분명하게 알려줄 만한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조사를 통해 몽촌토성이 4∼5세기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백제의 전기 도성과 매우 밀접히 관련된다는 사실 정도는 확인할 수 있다.
상당수의 학자들이 이곳을 백제의 왕성이었던 곳으로 보고 있다.



3) 몽촌토성의 발굴조사


◆ 발굴의 계기

1980년대에 들면서 주변 일대가 88서울올림픽 체육시설 건립지로서 확정됨에 따라 이 성의 성격파악과 아울러 유적공원으로 복원키로 결정하고, 고증자료를 얻기 위해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1983~1988년까지 5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얻어진 자료를 토대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정비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총 6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 발굴당시의 학계흐름

풍납토성 최대의 비극이 이곳 발굴을 독점한 특정 학맥이 없었다는 것이라면, 그 두 번째 비극은 한국고대사학계 태두(이병도)와 한국고고학계 대부(김원룡)라는 두 사람의‘풍납토성=사성’이라는 주장이 학설을 뛰어넘어 어느 누구도 감히 부정을 하지 못할 만큼 권력화했던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 권력화의 단적인 보기는 몽촌토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몽촌토성이 문화유적으로 등장한 것은 1916년에 이뤄진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보고에 의해서였다. 그 후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80년대 초 88올림픽대회 개최지로 서울이 확정되고 이곳을 포함한 주변 일대를 올림픽공원으로 조성하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몽촌토성이 백제 왕성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는 이성산성이 기대했던 백제의 흔적 대신 신라 유물을 대거 쏟아내면서 하남위례성 후보군에서 탈락해버리자 백제왕성 제1후보로 몽촌토성의 콧대가 더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몽촌토성은 83년 이후 87년까지 서울대박물관이 주도한 6차례의 연차 발굴과 이에 따른 정비 복원이 이뤄진 뒤부터 97년 풍납토성이 발굴되기까지 10년 넘게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기 힘들만큼 유일한 백제 왕성 후보였다. 여기에 김원룡 교수의 입김이 작용했으리라는 의혹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김교수는 이미 67년에 몽촌토성이 백제 왕성이라는 주장을 편 바 있고, 몽촌토성 발굴 작업에도 주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몽촌토성은 유례가 없는 대규모 발굴 작업에도 불구하고 백제 왕성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쏟아내지 못했다. 더구나 출토된 목탄과 목재에 대한 탄소연대측정 결과로도 3세기 이전으로는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 관련학계의 지배적인 견해다. 이런 결과는 설사 이곳이 하남위례성이라고 해도 3세기 이후에나 그런 구실을 했을 뿐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어찌된 셈인지 88올림픽개최를 즈음해 너도나도 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가장 아이러니컬한 대목은 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이라고 주장한 학자들도 하나같이 그렇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점이다. 89년에 나온 몽촌토성 마지막 보고서 서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간의 조사성과에 의하여 몽촌토성의 역사적 성격의 일단이 드러나면서 이 성을 한성시대의 중심적인 거성(居城) 또는 도성(都城)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궁궐지나 관청지 등의 내부 시설이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고 있어 몽촌토성의 성격 규명에 장애가 되고 있다.”
이것만 보아도‘몽촌토성=백제왕성’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무책임한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이 보고서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몽촌이 왕성이라는 고고학적 증거는 그 때까지 단 한군데도 없었다. 정황으로 보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고고학적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몽촌토성의 성격규명에 장애가 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는 몽촌이 꼭 백제왕성이어야 한다는 발굴단의 의지를 내보임과 동시에 이곳이 그렇다는 선입견 혹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스스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 신동아 2000년 7월 <김태식 기자>



4) 백제의 첫도읍지 위례성 논쟁


◆ 백제 한성시대 왕성터의 미발굴

백제는 보통 한성·웅진·사비시대 등 3시기 시대구분을 한다. 이는 백제의 도읍과 그 성곽의 위치와 변천에 따른 구분법으로 각각 지금의 서울·공주·부여 에 해당한다. 웅진과 사비는 왕성의 터가 비교적 분명히 남아 있는데 바로 공주의 공산성과 부여의 부소산성이 그것이다. 그러나 앞선 시기 수백년 동안 도읍이었던 한성에 대해서는 그 대략적인 위치조차 아직 공인되지 못한 실정이다. 다만 1980년대에 들어와 몽촌토성과 이성산성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면서 많은 연구자들이 서울시 송파구 일대와 하남시 춘궁리 일대에 다시금 주목되면서 한강 하류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 삼국사기의 하남땅

오랜 세월동안 한반도 고대문화의 터전이었던 한강유역에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한 시기는 B.C. 1세기말 쯤이었다. 고구려의 주몽세력에서 분파하여 남쪽으로 이주해온 온조와 비류가 한강 이남 50여개의 마한세력을 통합하여 백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는 한강 유역의 비옥한 땅과 군사적 요충지를 선택해 위례성을 쌓고 이를 거점으로 성읍국가를 형성하여 그 세력을 확장해 갔다. 일찍이 고구려의 고대국가 형성과정에서 경험했던 정복기술과 선진적인 철기문화, 기마병의 기동성이 바탕되었을 것이다. B.C. 18년부터 A.D. 475년 웅진(공주)로 천도할 때까지 약 500년 동안 백제는 한강 유역에 터전을 잡고 그들의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였던 곳이다. 곧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곳 하남 땅은 북쪽으로 한수를 띠고, 동쪽은 높은 산을 의지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기름진 옥토를 바라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있다(北 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南阻大海)"는 곳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몽촌토성을 백제의 왕성, 혹은 도성으로 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몽촌토성과 약 700여m 정도 떨어진 풍납리 토성도 일찍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아온 성이다.
백제의 초기 도읍지가 대략 풍납리토성과 몽촌토성 부근이라는 데에는 대부분의 연구자가 공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들 성터가 곧 하남위례성(河南慰禮 城)인지 한성(漢城)인지에 대해서는 제 각각의 주장을 하고 있다.


◆ 하남위례성과 하북위례성 가설

'위례'의 의미가 현재 ①울타리를 뜻하는 우리말의 '우리', ②阿利·郁里와 마찬 가지의 '漢江' ③王을 뜻하는 於羅瑕의 '어라'(王·大) 등 3가지의 해석이 있다. 그 가운데 위례성을 王城·大城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이병선의 견해가 가장 그럴듯 해 보인다. 이에 따르면 하남위례성은 '한강 남쪽의 왕성·대성'이라는 뜻 이 되는 셈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하남위례성과 한성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하남위례성과 한성은 같은 뜻을 지닌 말이 된다. 즉 '하남위례성=대성(왕성)= 한성'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각각 주장하는 바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아마도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사에 대한 시각 차이에 있을 것이다. 백제본기 온조왕대에 왕성, 혹은 도성으로서 위례성이라는 성의 이름이 나오면서 또 한성이라는 명칭도 나오기 때문이다.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조에 의하면 백제의 시조인 온조는 하남위례성에서 건국했다고 한다. 이 하남위례성은 한강 남쪽의 위례성이라는 뜻으로 본다면 이 하남위례성의 위치가 어디인가는 중요한 것이다.
하남위례성에 근거하여 하북위례성을 상정하였고 '위례성=하북위례성'이라는 전제 아래 '하북위례성=건국지'이며 '하남위남성=천도지'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강인구의 백제 초기 도성 문제 신고에 의해 '위례성=하남위례성'이라는 전제 아래 백제는 처음부터 한강 이남지역에서 건국하였다는 가설을 세우기에 이른다. 또한 한수(漢水=한강)는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지칭하는 것인지도 불분명할뿐더러, 하남위례성을 기준삼을때 하북위례성이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한강을 하류로부터 소급할 경우 팔당호를 기점으로 서서히 남한강과 북한강이 나뉘어지는 셈이니 더욱 어렵게 된다.


◆ 서울정도 600년과 하남위례성의 한성설

하남위례성이 한성과 같다면 중요한 사실을 추출해 낼 수 있다. 우리는 지난 1994년 서울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하는 대단위 행사를 치렀다. 조선이 건국하여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사실에 근거하여 600년이 기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백제의 한성시대 500년을 무시한 몰역사적 사건에 다름 아니다. 백제의 한성 도읍을 소급하여 당연하게도 서울 정도 600년이 아니라 곧 서울 정도 2000년이 되었어야 한다. 이러한 600년과 2000년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5) 몽촌토성(夢村土城)과 풍납토성


◆ 장광식의 중국 고대의 도시 7가지 특징론

① 도시는 반드시 하천변의 평지에 위치한다.
② 성벽을 가진다.
③ 성벽은 판축법을 쓴다.
④ 도시의 형태는 대부분 장방형 내지 방형이다.
⑤ 도시의 방향 및 신전이나 왕궁의 위치는 방위와 밀접히 관련되며, 특히 남북의 축이 강조된다.
⑥ 토단 위에는 정치적·의식적으로 중요한 건축물이 세워진다 .
⑦ 도시는 몇 개의 구역으로 구분된다.


◆ 성주탁의 백제 초기 도성 5가지 조건론

① 웅진성이나 사비성처럼 모두 북쪽에 강을 끼고 있는 낮은 구릉 위에 있으며 앞으로 넓은 들판에 도성을 건설할 수 있는 지형.
② 구릉 위에 방비벽을 설치할 수 있어야 한다.
③ 성벽의 구조는 판축(版築)기법을 이용한다.
④ 남북의 길이가 동서의 길이보다 긴 것이 보통이며 남북의 자오선을 중요시한다.
⑤ 도성은 몇 개의 구역으로 구분된다는 것이고 그 외에 도성 부근에 그 시대에 해당되는 고분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 김기섭

① 왕성은 하천변의 낮은 구릉에 위치한다.
② 성벽은 판축법(版築法)을 사용한 토축(土築)을 기본으로 한다.
③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 하기 때문에 성의 평면형태와 내부건축물의 위치와 방향은 비교적 덜 중시된다.
④ 왕성내에서는 건축물을 세울 수 있는 토대(土臺) 등이 있다.
⑤ 성내에는 상당 수의 저장시설, 망루, 수공업공장과 식수원이 확보되어야 한다.
⑥ 도성은 왕성(王城, 내성)과 거민성(居民城) 등 2개 이상의 성에 대한 합칭일 수 있다.
⑦ 도성 주위에는 산성이 있어 도성방위체계를 형성한다.
⑧ 도성 가까이에는 반드시 같은 시대의 고분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조건에 맞는 성을 하남지역에서 찾아보면 한성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으로 압축된다 할 수 있다. 그래서 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이라는 견해는 갈수록 설득력을 얻어가는 모양이다. 정영호, 성주탁, 최몽룡·권오영, 김기섭, 노중국 등의 연구자들이 이에 동의를 하고 있으니 이제 학계의 인정을 받아가는 형편이다.

백제의 한성시대에 도성지로 추정되는 몽촌토성은 과거 일제시기였던 1917년에 일인들에 의해 조사되어 이리산성(二里山城)으로 이름 붙여진 채 1980년대 초까지 아무런 조사도 없이 방치되어 왔던 곳이다. 이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조사는 이 일대를 유적공원으로 정화·복원하겠다는 계획에 의해서이다. 이에 따라 1983년 이후 연차적으로 발굴 조사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또한 88서울올림픽을 의식한 다분히 정치적이며 전시 행정적인 조치이기도 했다.

발굴조사에 의하여 밝혀진 몽촌토성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몽촌토성은 한강의 남쪽 넓은 들판의 군데군데 있는 낮은 구릉지대의 하나로 평지에서 가장 높은 위치의 상대적 높이가 30m에 못 미친다. 그럼에도 방 이동, 석촌동, 성내동 일대의 몇몇 낮은 구릉들보다는 약간 높은 곳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한강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입지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구릉은 북-서-남-동으로 높낮이가 있는 구릉으로 이어지고, 동쪽의 중앙에 서 낮아져서 다시 낮은 구릉이 근접하여 존재한다.

남한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낮은 구릉성 산지의 말단부를 이용하여 만든 판축토성이다. 몽촌토성은 성의 둘레가 약 2.7km, 높이 6∼7m로 한강의 지류인 성내 천 남쪽에 접하여 있다. 이 성은 대부분 자연지형을 이용하고 일부 필요에 따라 흙을 쌓거나 경사면을 급하게 깍는 등 인공을 가하였기 때문에 그 형태가 불규칙하다. 즉 기본적으로 남한산에서 뻗어 내려온 표고 44.m의 비교적 낮은 야산 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 구릉을 방벽으로 하고, 구릉이 낮거나 끊긴 부분에는 판 축공법을 이용하여 쌓은 성인 셈이다.

성의 크기는 남북 최장 730m, 동서 최장 540m, 동서 평균 400m으로 전체적으 로 마름모꼴의 형태를 띄고 있다. 성벽의 길이는 정상부를 기준으로 서북벽 617m, 동북벽 650m, 서남벽 418m, 동남벽 600m로 총 2285m에 달한다. 총면적은 정상부를 기준으로 약 6만 7천 평이나 성의 외벽 하단을 기준으로 하 면 약 9만 3천 평에 달하여 토성 내의 지형적인 요인을 고려해도 대략 8천∼1만 명 정도의 인구 수용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성의 형태는 자연구릉을 최대한 이용했기 때문에 굴곡이 심한 타원 형이다. 성 외벽에는 구릉의 경사 및 단을 만들고 부분적으로 목책시설의 흔적이 보인 다. 성 주위에는 경주 月城과 같이 해자(垓字)로 둘러싸이도록 했고 성문은 동· 남·북의 세 곳에 만들었다. 그러나 성 내부의 도로망과 외부와 연결을 위한 암 문이 몇 개 더 있을 것으로 보인다.

토성의 위치와 지형적인 면을 종합해 보면 삼성동 토성과 0.75km, 이성산성과 4.8km씩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중앙적인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비교적 낮은 구릉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한강 일대를 모두 내려다 볼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는다. 즉 토성으로부터 북으로 암사동을 지나 강변의 토막리와 서쪽으로 잠실을 지나 삼성동까지 조명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 지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또한 동북쪽 외곽에는 외성이 약 270m의 직선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북측의 외 곽경사면과 외성지의 정상부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나타났고 동 측의 외곽경사면에는 생토를 깍아내어 경사를 급하게 만들고 해자(垓子)를 설치 하였던 점으로 보아 북쪽으로부터의 침략을 대비한 기지구실을 담당하였던 것으 로 생각된다. 이 성을 중심으로 한강 북쪽에 아차산성(阿且山城)과 풍납동토성, 서쪽에 삼성동토성, 남쪽에 이성산성(二聖山城)등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제시대 고분군이 있는 가락동과 암사동이 있다. 성을 축조할 당시 지표면에서 주로 회 백색 연질토기 등 삼국시대 전기유물이 출토될 뿐 삼국시대 후기나 고려시대의 것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토성은 백제시대 초기의 건국지로 알려져 있는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되고 있어 주목되는 성지이다.

현재 성을 이루는 구릉은 네 곳이 끊겨 있기 때문에 당시 성으로 통하는 문이 4개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이들이 문지(門址)인지의 여부는 불확실한 상 태이다. 성내부는 중앙의 작은 구릉을 제외하면 비교적 경사가 심하지 않은 상태이며 곳곳에는 높은 대지가 형성되어 있어 많은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토기류의 분석에 의하여 이곳은 3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주민이 있었고 그 뒤 통일신라나 고려때에는 거의 거주가 없었던 듯하며 조선시대에 와서 다시 입주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중기의 웅진성(공주 공산성)이나 후기의 사비성(부여 부소산성)도 북방의 침략군을 경계하여 강 남쪽에 토성을 구축한 것과 꼭같은 지형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는 토성이다. 또한 몽촌토성의 사용 시기는 대략 3세기 말∼5세기 말경으로 추정하는게 보통 이지만, 3세기 말은 아마도 최대한의 상한이며, 실제 성으로서 기능을 한 것은 4 세기에 들어와서 일 것이다.

김기섭은 몽촌토성을 하남위례성으로 볼 뿐 아니라 풍납리토성과 연결시켜 한 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풍납리토성은 거민성(居民城)으로 정치·경제·문화 등 각 분야에서 평상시의 활동에 중심이 되는 성으로 곧 대성(大城)=북성(北城)이었으며, 몽촌토성은 유사시를 대비한 성으로 군사적 목적이 강조된 왕성(王城)=남 성(南城)이었다고 본다. 곧 한성을 풍납리토성과 몽촌토성을 포함한 그 일대의 범칭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6) 수수께끼의 백제 초기사 = 위례성은 두 개의 성 =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국내외 문헌으로 미루어 보건대 백제의 첫 도읍은 두 개의 성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은 그 유력한 후보지이다. 수수께끼에 싸인 백제 초기사. 그 실마리는 최초의 도읍 위례성의 위치를 밝히는 데서부터 풀어가야 할 것이다.

고구려군에 대패하고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남하(475년)하기 이전 백제의 중심지가 현재의 한강 하류 지역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백제 건국집단이 이 지역에 도착한 시점과 정확한 지점, 웅진으로 내려가기 이전의 도성이나 왕궁의 위치 등은 불분명하다. 초기 백제사가 미궁에 빠져 있는 것처럼 중심지의 위치 또한 오리무중인 것이다.

한국 고대사 연구의 공통적 어려움이기는 하지만 백제사의 경우 관련 문헌자료의 양이 너무도 적고, 그나마 사료적 가치를 의심받는 부분이 적지 않아 고고학적 연구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백제사의 시작이 언제이고, 그 중심지가 어디인지 규명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논의는 불가능할 것이다. 위례성의 위치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문헌에 따른 위례성

 백제 최초의 도성, 즉 위례성의 위치를 밝히는 작업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에 대한 검토에서 시작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위례성에서 한산으로 천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리지에는 한산이 한성으로 바뀌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위례성 →한산 →북한산(성)의 차례로 천도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각각의 위치는 직산, 광주, 양주로 비정(比定)된다. 그 결과 위례성을 지금의 직산 일대로 보는 설이 『삼국유사』 이후 조선시대까지 대세를 이루었다.

이런 주장에 반대해 한강 유역을 주목했던 사람이 다산 정약용이다. 그는 위례성을 하북과 하남으로 양분하여 파악하고, 하북위례성(삼각산 동쪽 기슭) →하남위례성(광주) →한성(한양)의 차례로 천도했을 것으로 보았다. 이 견해는 현재의 고대사 연구자에게는 많은 영향을 미쳐, 백제 건국집단이 한강을 남하하기 이전 한동안 한강 이북에 정착했음을 인정하는 견해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위례성의 위치 문제는 한층 더 복잡해지는 셈이다.

 하지만 서울 강북지역이 조선시대 이후 지금까지 600여년 동안 도성으로 기능해 온데다 특히 해방 이후 극심하게 개발되었기 때문에 백제 초기의 유적을 확인하는 작업은 무망한 일이 되어 버렸다. 다만 일제 식민지시대 중랑천 일대에서 작은 토성이 다수 확인됨에 따라 이 일대가 하북위례성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제기되었을 뿐이다.

백제의 본격적인 도성과 왕성이 현재의 한강 이남에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구체적인 사실은 아직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서는 백제 개로왕대 고구려의 침공을 받는 상황을 서술하면서 "고구려의 거련(장수왕)이 왕도 한성을 포위하고…… 북성을 공격하여 7일만에 함락시키고 이동해서 남성을 공격했다"고 적고 있다. 같은 사건에 대해 『일본서기』에서는 "고구려 대군이 대성을 공격하여, 일곱 낮밤 만에 왕성이 함락되고 마침내 위례를 잃었다"고 했다. 『삼국사기』의 한성과 북성, 남성이 각각 무엇을 가리키는지, 『일본서기』의 대성, 왕성, 위례와는 어떻게 대응되는지 궁금증을 더하는 부분이다. 일단 한성과 대성은 동일한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그 안에 남성과 북성이라는 두 개의 성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렇듯 백제 도성과 관련해 국내외 사서에서 보이는 명칭은 위례성, 한산, 한성, 왕성, 대성 등으로 다양하지만, 관련 사료의 내용이 단편적인지라 해결의 열쇠는 역시 고고학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서울시 송파구 일대에 많은 수의 고분과 성지가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며, 지금도 그 일부가 남아 있다. 1916년 석촌동과 가락동 일대에서 봉토분 23기와 적석총 66기가 확인되었으며, 풍납토성에서는 1925년 대홍수로 중국제 자루솥 2점과 금환(金環) 등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이 일대가 백제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은 일찍부터 제기된 셈이다. 1980년대 들어 석촌동 고분군과 몽촌토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 왕족의 무덤으로 판명되었으며, 몽촌토성은 하남위례성이라는 견해가 유력해졌다.


◆ 고분군에 근접한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유력

한산성 혹은 한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이성산성에 대해서는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뜻밖의 결과가 나타났다. 성 내부에 백제 유물은 거의 보이지 않고 신라 유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이성산성은 백제 전기 도성의 후보 명단에서 제외되게 되었다. 사실 이성산성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평지성과 산성을 조합시킨 고구려 도성체제의 특징에 있다. 백제의 후기 수도인 웅진성과 사비성 역시 산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굴조사 결과 이러한 추측이 빗나갔음을 알게 되었다. 이밖에 현재 남아 있지는 않지만 삼성동과 암사동에도 백제 토성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위치나 규모가 도성에는 부적합하므로 역시 후보에서 제외된다.

그렇다면 가장 유력한 후보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으로 압축된다. 1km 이내의 거리에 있는 두 성은 백제 왕족의 공동묘지라 할 수 있는 석촌동 고분군과 매우 가깝다. 고구려의 오녀산성?하고성자와 고력묘자고분군의 관계, 국내성?환도산성과 통구고분군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며 낙랑토성과 낙랑고분군, 신라의 월성과 대릉원 모두 동일한 양상을 띠고 있다. 왕족이나 최고 지배층의 무덤은 왕성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두 성 모두 백제의 왕성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지배층의 거주 입증하는 다양한 유물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은 양자 모두 토성이란 점은 같지만 다른 점도 있다. 풍납토성의 평면은 장방형이며 강에 연접해 있는데 비해 몽촌토성은 자연구릉을 최대한 이용해서 축성한 까닭에 평면이 일정치 않다. 굳이 비유하자면 마름모형에 가깝다. 규모면에서는 풍납토성이 앞서며, 축성에 소요되었을 노동력 또한 마찬가지이다.



 풍납토성은 1964년 간단한 시굴조사 이후 변변한 발굴조사 한번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몽촌토성은 서울올림픽 준비과정에서 몇 차례의 발굴조사가 진행, 성의 대략적 성격이 밝혀졌다. 아쉬운 점은 성 내부의 낮은 평지보다 고지대에 조사가 집중되었다는 것인데 이 때문인지 본격적인 궁궐터는 발견되지 않고 약간의 수혈주거지와 저장시설 등만 발견되었다. 하지만 막대한 양의 토기?철기류와 함께 뼈로 만든 갑옷, 기와, 금동제품, 중국제 도자기와 벼루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와와 벼루는 일반 가옥이 아닌 궁궐이나 관청, 사원 등 공공건물이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또 당시의 최고 사치품이었을 중국제 도자기가 심심찮게 출토되는 점은 이 성이 지배집단의 거처였음을 입증한다. 게다가 중국 서진의 동전 무늬가 찍힌 도기가 출토됨으로써 성의 상한 연대가 3세기 후반까지 올라감을 알 수 있다.

풍납토성은 그동안 『삼국사기』에 나오는 사성(蛇城)에 비정되었지만, 관련 정보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굴조사 이후 계속 방치하다시피 하여 성 내부가 파괴됨으로써 심도있는 검토는 애당초 불가능했다. 심지어 외국 학계의 일각에서는 이 성을 대방군(帶方郡 ; 한사군 중 낙랑군의 남부에 설치되었다고 전하는 군현)의 통치와 연결지으려는 시도가 제기되었다.
하지만 작년 초 아파트 건축과정에서 지하 4m 지점부터 백제 문화층이 남아 있음이 확인, 긴급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매우 제한된 면적만을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세 줄로 돌아가는 환호(環濠 ; 해자)가 확인되었으며, 수혈주거지와 다량의 토기류와 더불어 막새기와를 비롯한 기와류가 발견됨으로써 몽촌토성에 버금가는 주요성이었음이 밝혀졌다.

특히 삼중 환호는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것으로, 본격적인 성토 축성 이전에는 환호가 주된 방어시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풍납토성에 주민집단이 거주했던 시기가 상당히 올라간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실제로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토기 중에는 몽촌토성의 토기류보다 앞선 시기의 것이 상당수에 이른다.


◆ 백제 초기사 연구의 새로운 전기 기대

 하지만 풍납토성의 성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관련 자료와 정보가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풍납토성이 몽촌토성 못지않게 혹은 보다 더 중요한 성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현 상황에서 왕성의 위치를 분명히 밝힐 수는 없지만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중 하나가 그에 해당하거나 혹은 양자 모두 해당할 수도 있다. 개로왕대의 상황을 기술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내용을 고려할 때, 두 성은 북성과 남성으로 지칭되면서 하나의 도성체제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 최초의 도성인 하남위례성에 대한 연구는 사실 이제부터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서울 강남의 백제 유적들이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간혹 이루어진 조사도 매우 불충분했던데 대한 반성을 통해 앞으로는 개발에 앞서 면밀한 조사가 진행될 기운이 싹트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고 기존 자료를 재음미함으로써 위례성의 위치 문제는 물론, 백제 초기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지견이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7) 풍납토성인가 몽촌토성인가 아니면 제3의 장소인가


최근 들어 국내 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의 가장 큰 이슈는 백제 초기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河南 慰禮城)의 정확한 위치에 관한 것이다. 그 논의의 향방에 따라 백제사를 다시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위례성의 후보로 거론된 곳은 경기 하남 춘궁리, 충남 천안 위례산성, 서울 송파구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등. 그 논의는 조선시대에 시작됐다. 그러나 1980년대 전반까지는 문헌조사와 기초적인 지표조사에 그쳤다. 1980년대 중반 몽촌토성 발굴과 97년 풍납토성 본격 발굴을 계기로 본격적인 논의가 불붙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가능성이 높다고 지목된 곳은 하남 춘궁리로 조선시대 정약용이 백제 초기 도성으로 지목한 이래 늘 주목을 받았었다. 그러나 80년대말 발굴 결과, 백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위례산성은 이름 덕분에 관심을 끌었지만 통일신라 성으로 확인됐다. 남은 것은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 풍납토성 축조 3세기경 확인

몽촌토성은 1983∼88년 발굴 결과, 4세기 전후 지배층과 밀접한 백제 유물이 대량 출토됐고 연못 도로 등 왕궁에 준하는 구조가 드러나 유력한 백제 왕궁터로 떠올랐다. 그러나 풍납토성 발굴로 백제 초기 도읍지 논란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5세기에 이르는 백제 토기 조각과 집터 등이 발굴됐고 토성은 늦어도 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엔 중국 고위관료를 가리키는 ‘대부(大夫)’라는 용어가 새겨진 토기 조각과 대규모 공공 건물터도 발견됐다. 이 건물터는 왕궁터의 한 부분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로선 몽촌토성보다 풍납토성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성의 축조시기 및 출토유물 연대에 있어 풍납토성이 몽촌토성을 앞서고 있고 규모 역시 최대(폭 40m, 높이 9m 이상, 둘레 3.5㎞)라는 점, ‘대부’가 새겨진 토기조각 등이 출토된 점등이 이같은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 한다.


◆ 사실입증땐 백제사 다시 써야

하지만 결정적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다. 풍납토성을 발굴 중인 권오영 한신대교수는“백제에서는 대부라는 관직명의 존재가 확인된 바 없어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고 신중론을 편다. 사학자 이도학씨는“두 토성이 모두 백제의 왕궁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왕은 몽촌토성에 살았고 풍납토성은 일종의 별궁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어쨌든 풍납토성에 대한 발굴결과는 초기백제 한성시대(기원전 18년∼ 서기 475년) 연구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풍납토성이 위례성임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된다면 삼국사기에 근거해 ‘백제가 4세기 이후에야 고대국가로 자리잡았다’는 종전의 학설은 수정될 수밖에 없다. 풍납토성의 규모로 보아 백제가 3세기에 이미 고대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췄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학계의 눈이 풍납토성에 쏠리고 최근 문화재위원회가 토성 내부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주택조합의 허가신청에 제동을 건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동아일보 2000년 2월 16일


◆ 풍납토성은 백제의 왕궁이었다

풍납동에서의 그날은 조사가 답보상태에 머물던 때였다. 조사를 시작할 때의 예상으로는 네모꼴, 원형, 육각형 등의 집자리가 대종을 이룰 것으로 판단하였지만 막상 조사가 진행되고보니 백제 사람들의 쓰레기장만 잔뜩 확인될 뿐 집자리의 조사는 지지부진하였다.
조사단을 더욱 곤혹스럽게 한 것은 9호라고 명명한 한 구덩이였다. 길이가 13m에 달하는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게 엄청나게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그 성격은 오리무중이었다. 집자리도 폐기장도 아니고, 창고도 아니어서 지금까지 비슷한 예도 본 적이 없는 이상한 유구였다. 노출시켜 사진 찍고 실측한 지 닷새쯤 묵힌 토기 몇 점을 수습하기로 하였다. 필자는 구덩이 밖에서 도면을 들고, 끄집어낸 토기와 도면 속의 그림을 하나하나 연결시키고 있었고, 조사원 한 사람은 구덩이 안에서, 한 사람은 밖에서 유물을 수습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구덩이 안의 조사원이 갑자기 소리쳤다. {명문이 있어요.} 나는 믿지 않았다.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는데 누군가 작업 중 호미로 토기에 상처를 냈다고 생각했다. 조사원은 다시 외쳤다. {대부예요, 대부!}

5세기의 백제토기로 보이는 단지의 겉면에 대부라는 두 글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뒤집혀 놓여 있는 바람에 매일 보면서도 무심히 넘겼던 바로 그 토기조각이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우선 백제 전기(백제가 서울지역에 위치하였을 때) 최초의 문자자료라는 점이 떠올랐다. 비록 일본 이소노가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가 있으나 그 진위문제나 연대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삼국사기나 외국 사서를 통틀어서 백제에 대부라는 관직이 있었던 기록은 전무하다. 그렇다면 기록에 누락되었던 백제의 관직 하나가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일까? 혹시 중국인은 아닐까? 아니면 중국에서 귀화한 사람일까? 대부라는 관직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기는 분명히 백제토기였다. 중국과 교류하던 사람일까? 아니면 소수의 고위 관리들을 통틀어서 대부라고 불렀을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 다음은 {이 유물이 왜 여기서 나왔을까}하는 데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1600년전 어떤 대부가 자신의 토기 한 점을 이 구덩이에 던져 깨뜨렸다. 그는 중앙의 고위 관리였다. 따라서 풍납토성에 관청이나 고위 관리의 가옥이 있었던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관청이나 고관의 가옥은 왕성 안에 설치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풍납토성은 백제의 왕성인 셈이다.

지난 9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풍납토성의 성벽 절개조사 성과가 공개되면서 수백년간 백가쟁명식으로 진행되던 백제 전기의 왕성 위치 논쟁은 풍납토성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누가 보더라도 수십만 명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쌓은 풍납토성에 무게가 실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발견된 대부명 토기는 풍납토성이 백제의 왕성이었음을 결정적으로 증명해주었다.

그렇다면 그 대부는 왜 여기에 토기를 던져 넣었을까? 글자가 발견된 지 며칠 후 이번에는 말의 아래턱뼈가 통째로 발견되었다. 제사의 희생으로 사용한 동물이었다. 문제가 풀리기 시작했다. 이 구덩이는 왕성안에 설치된 제사용 구덩이로서 고관이 주관하였거나 참여한 이 제사에서는 말을 희생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단 두 글자에 불과한 대부와 아랫턱에 불과한 말뼈는 이 유적을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하지만 백제 전기의 정치구조와 제사형태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연이어 조사구역 이곳 저곳에서 중국과 가야의 물건들이 출토되기 시작했다. 외국의 물산과 사람들이 오가며 교류하던 백제 왕성의 변화한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그려진다. 국제교류의 실상을 밝히는 작업도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풍납동은 결코 한번에 다 말해주지는 않았다. 풀린 문제 만큼 또다른 숙제를 안겨주었으니 말이다.

(권오영·한신대 교수·국사학) -조선일보 1999년 12월 4일



8) 몽촌토성 제친 풍납토성


98년 10월20일 국립중앙박물관은 ‘고고유물로 본 한국고대국가의 형성’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시회를 개최했다. 이 특별전은 부산시립박물관과 국립전주박물관으로 옮겨가며 다음해 3월21일까지 계속됐다.

특별전을 개최할 경우 행사 주최자는 반드시 전시 물품에 대한 풍부한 원색 사진자료를 담은 도록이라는 것을 발간하게 된다. 철기문명 시작과 이를 통한 고대국가 형성을 탐구한다는 뜻에서 마련된 이 특별전 또한 도록이 나왔다.

이 도록은 제3장 3절에서 ‘백제의 형성’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도록에서는 “(백제) 토성으로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는데 풍납토성의 경우는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시기 및 성격이 분명하지 않다”면서 “몽촌토성은 1983년에서 1989년에 걸쳐 연차적인 전면조사가 실시되어 한성기의 도성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고 밝히고 있다.

이로 보아 이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풍납토성보다는 몽촌토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이 특별전에 출품된 백제 유물 중 몽촌토성 출토품이 풍납토성 것보다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이로부터 꼭 1년 뒤인 99년 9월20일 국립중앙박물관을 시작으로 2000년 2월6일까지 국립부여박물관과 국립대구박물관을 옮겨가며 치른 특별전‘백제’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제작한 특별전 도록은 풍납토성 출토 유물로 가득차 있다. 흙을 구워 만든 십각형 초석을 비롯해 풍납토성 주거지 발굴 전경, 무늬없는 전돌, 아궁이틀, 일종의 상·하수도관인 도관, 돌절구, 어망추, 숫돌을 비롯해 풍납토성 출토 유물들이 도록을 온통 도배하다시피 했다. 몽촌토성은 풍납토성에 밀려 바로 뒤에 나온다. 말하자면 풍납토성이 몽촌토성의 자리를 꿰차기에 이른 것이다.

두 도록을 비교해 보면 불과 1년 전만 해도 여전히 백제 왕성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던 몽촌토성을 밀어내고, 풍납토성이 드디어 백제의 가장 중요한 성곽으로 올라섰음을 잘 알 수 있다. 두 도록 발간 사이의 그 1년 동안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풍납토성을 다시 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 주인공은 역사고고학자인 이형구 교수(선문대)였다. 70년대에 대만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80년대 초부터 96년까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석촌동·가락동 고분군을 비롯한 한강유역 일대 초기백제 유적 보존운동을 벌여 왔다. 이런 활동 중 하나가 1996∼1997년에 있었던 풍납토성 실측조사 사업이었다.

이미 94년에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임이 확실하다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이교수는 97년 1월1일 신년 연휴에 풍납토성에서 실측조사 작업을 벌이던 중 토성 안쪽 현대아파트 공사장에서 백제 유적과 유물이 파괴된 채 나뒹구는 것을 목격하고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신고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아파트 공사는 즉각 중단되고 공사장 2300여 평에 대한 문화재연구소의 본격 발굴이 이 해 11월까지 계속되게 됐다. 이것이 풍납토성에 대한 첫 본격 발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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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몽촌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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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
서울 송파구 방이동(芳荑洞)에 있는 백제 초기의 토성터.
지정번호 : 사적 제297호
소재지 : 서울 송파구 방이동
시대 : 백제 초기
크기 : 둘레 약 2.7km, 높이 6~7m
종류 : 토성터

본문


사적 제297호. 둘레 약 2.7km, 높이 6~7m. 3세기 초에 축조. 1984 ·85년의 2차례 발굴조사 결과, 목책(木柵)구조와 토성방비용 해자(垓子)로 되어 있는, 지금까지 확인된 바 없는 특수한 토성구조임이 밝혀졌다.

유물은 2기의 합구식(合口式) 옹관을 비롯하여 복원가능한 원통형토기 ·적갈색연질토기 ·회백색연질토기 ·갈색 회유전문도기편(灰釉錢文陶器片) ·토제어망추 ·철기유물 등 500여 점이다. 그중 문살무늬[格子文] ·승문(繩文)을 새긴 두드림무늬[打捺文]토기는 백제 건국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원통형토기는 일본으로 전파된 기대토용(器臺土俑)의 원형으로 보여 고고학적 의의가 크다. 그 외에 중국 서진(西晉)시대의 갈색 회유전문도기 파편도 이 토성의 축조연대가 3세기까지 소급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 이 밖에도 구릉과 구릉 사이의 저지대에서는 5 m 두께의 흙을 차례로 쌓아 만든 판축(板築) ·움집 ·지하저장혈(地下貯藏穴) 흔적도 발견하였다. 지리적 위치 및 견고함으로 미루어 보아, 광주풍납리토성 ·서울삼성동토성 등으로 이루어진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의 주성(主城)으로 추정된다.

출처 : ^-^;;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몽촌토성
서울 송파구 방이동(芳荑洞)에 있는 백제 초기의 토성터.
지정번호 : 사적 제297호
소재지 : 서울 송파구 방이동
시대 : 백제 초기
크기 : 둘레 약 2.7km, 높이 6~7m
종류 : 토성터

본문


사적 제297호. 둘레 약 2.7km, 높이 6~7m. 3세기 초에 축조. 1984 ·85년의 2차례 발굴조사 결과, 목책(木柵)구조와 토성방비용 해자(垓子)로 되어 있는, 지금까지 확인된 바 없는 특수한 토성구조임이 밝혀졌다.

유물은 2기의 합구식(合口式) 옹관을 비롯하여 복원가능한 원통형토기 ·적갈색연질토기 ·회백색연질토기 ·갈색 회유전문도기편(灰釉錢文陶器片) ·토제어망추 ·철기유물 등 500여 점이다. 그중 문살무늬[格子文] ·승문(繩文)을 새긴 두드림무늬[打捺文]토기는 백제 건국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원통형토기는 일본으로 전파된 기대토용(器臺土俑)의 원형으로 보여 고고학적 의의가 크다. 그 외에 중국 서진(西晉)시대의 갈색 회유전문도기 파편도 이 토성의 축조연대가 3세기까지 소급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 이 밖에도 구릉과 구릉 사이의 저지대에서는 5 m 두께의 흙을 차례로 쌓아 만든 판축(板築) ·움집 ·지하저장혈(地下貯藏穴) 흔적도 발견하였다. 지리적 위치 및 견고함으로 미루어 보아, 광주풍납리토성 ·서울삼성동토성 등으로 이루어진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의 주성(主城)으로 추정된다.
 

4/30일저녁까지좀여 ㅠㅠ내공100이에요...

지식인 고수님들!전 초5학년 인데요,학습지의 빈칸이 많지만 정성껏 채워주세요.정성껏 채워주신분은 내공+100을 드립니다~! ●되도록이면 4.30일 저녁10까지좀여 플리즈님들......

요약정리좀..ㅠㅠ(내공 100,체텍...

... ㅠㅠㅠㅠ 그래서 수학,영어는 알겠는데요 4학년 국어,사회,과학 길게 써주세여^^ ㅠㅠ 젤길게 한사람 쳬택에다 내공 100!! 제가 지금 6학년인데 4학년 교과서가 없어서요...

사회 학습지좀.;;(내공 100)

... 물리침 4.( )해전: 마지막 전투. 이순신 장군 전사함.... 적어보기 : 사회 54쪽 지도 ( ) -임진왜란의 영향 피해 1.... 내공 100 겁니다. 채택 제대로 된건 무조건 해드립니다....

ㅠㅠ내공100

중1사회서술형문제좀풀어주세요 아무리생각해도모르겠어요 ㅠㅠ 내공은 <100>으로드릴께요 제발 가르쳐주세요 ㅠ.... (3가지이상) 답: 4.도시화단계에서 정착단계에 이르렀을...

4-2사회좀 제발 내공 대박 100

사회숙제인데요 참고로 제가 경기도 성남시에 사는데 우리... 한데 부탁드릴께요 제발 7시 전까지만 ㅠㅠ 부탁합니다. 내공은 빵빵 100 과거의 성남 오늘날의 성남 집들이...

5학년 사회학습지좀여...ㅠㅠ(내공 100...

... 빠른 답변 부탁드립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 (... 많아요.....) 그래도 내공 100... 4.고려가 송나라에 수출한 물품은 어떤것들이 있었는가? 5.상감, 양각, 음각, 투각 등은...

사회좀..ㅠㅠ 내공마니마니줌 100

... ( ):북아메리카에 있는 나라로 우리나라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있음 4.( ):유럽과... ㅜㅜ 내공100으로 할께요~~ 제발 ㅠㅠ 욕설.심리테스트.이상한글 등등 이것과...

4대 기능 알려주세요 ㅠㅠ (내공 100검)

... 나와요 ㅠㅠ 국가법령정보센터 사회복지사업법을 보시면, 우선 신경써야 할... 직업 및 취업 알선이 필요한 사람 4. 보호와 교육이 필요한 유아ㆍ아동 및 청소년 라고...

4학년 수학좀 알려주세요~ㅠㅠ(내공100)

... 오늘 학교에서 수학 학습지를 나눠 주셨어요 (OX문제... 답( ) 이유:( ) 4.평행사변형은 사다리 꼴이다.답: ( )이유... (제발 답변해주세요~ㅠㅠ) (내공100!) 1.정사각형은...

사회학습지좀 빨리 내공 100!!

... 12쪽이에요 제발 답만이라도요 ㅠㅠ 자기가... -9- 최고 심의 기관 재판 민사 / 개인 사회 질서 행정... 25 / 4 -12- 3. ② 4. ④ 5. - ㉢교육과학기술부 -㉣환경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