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춤에 대하여

탈춤에 대하여

작성일 2008.10.28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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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 초3인데요

학교에서

탈춤의 대해 써오래요..

그래서

이렇게 써주심녀 감사하겠습니다.

1.탈춤의 특징:

2.추는방법:

3.추는까닭:

으로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의할점

내공 냠냠 , 님이 알아서하세요 , 숙제는 자기 힘으로 해야지 , 욕설, 비방 그런건 하지 말아주세요.

이왕이면 오늘 이내로...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여러가지의 답변들을 모아봤어요^^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쓰시길 ^^

 

dudthd97님의 답변"re: 탈춤에 대해서..."

 

1) 탈놀음굿 : 경상북도 안동군의 하회와 병산, 영양군의 주곡 그리고 동해안 지방에 서주로 연행되었다. 몇 년마다 부정기적으로 열리는 별신굿의 일부로서 연행되는 것이 특이하다.

2) 관노탈놀이 : 강릉지방에서 단오제 행사의 일부로 연행되었다. 탈놀음굿과 마찬가지로 굿에서 연극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탈춤으로서 굿과 극의 중간 형태에 속하는 탈춤이라고 할 수 있다.

3) 사자놀음 : 함경남도 북청군 청해면 토성리 산하 여러 마을에서 민속놀이로서 연행되었다. 벽사진경이나 축사연상의 의식무적 성격이 강하게 남아있지만 연극적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탈춤의 범주화할 수 있다. 사자놀이와 함께 관원놀음이 연희되기도 하였다.

4) 덧뵈기 : 전문 예인 집단인 남사당패가전국의 농촌과 어촌을 떠돌아다니며 공연하던 여섯가지 레파토리 가운데 다섯 번째로 연행되었다.

5) 산대놀이 : 서울과 경기도 지방의 산대놀이로서 녹번, 아현, 노량진, 퇴계원, 사직골에서 본산대놀이로 시작되어 양주와 송파에 별산대놀이로 전파되었다.

6) 해서 탈춤 : 봉산, 해주, 강령, 은율, 황주(黃州), 안악(安岳), 재령(載寧),신천 (信川), 장연(長淵), 송화(松禾), 기린(麒麟), 신원(新阮), 서흥(瑞興), 신막(新幕), 평산(平山 ), 옹진(甕津),송림(松林), 추화(秋花), 금산(金山), 연백(延白)등 사실상 곡산, 신계, 수안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연행되었다. 1950년대 중반에 서흥 탈춤이 북한 학계에서 처음 채록되었다.

7) 강원도 탈춤 : 고성에서 연행된 탈춤 말고도 최근 북한 학계에서 그 대본이 채록된 통천 탈춤이 보고되었다.

8) 오광대 : 낙동강을 경계선으로 하여 동쪽 지방, 경상우도(慶尙右道)에서 전승된 탈춤으로 합천군의 율지, 의령군의 신반, 통령, 고성, 사천군의 가산, 진주, 마산(馬山), 산청(山靑), 김해군의 가락(駕洛), 창원군의 진동(鎭東), 거제(巨濟)등의 지역에서 연행되었다. 최근에는 진양군의 도동(현재의 진주시 대화동), 사천군의 서포면 서구리와 남구리, 그리고 거제군의 둔산면 학산리 등지에서 탈춤이 연행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9) 들놀음 : 낙동강을 중심으로 서쪽지방, 즉 경상좌도에서 전승된 탈춤으로 수영, 동래, 부산진, 등의 지역에서 연행되었다. 단순히 탈춤만을 가리키는 오광대와는 달리 들놀음은 앞고사, 길놀이, 덧뵈기, 춤놀이, 뒷고사 등이 탈춤과 함께 연희되는 종합적 민속놀이라고 할 수 있다.


1. 봉산탈춤

1. 봉산탈춤의 유래

봉산탈춤은 서해일대(황해도)에 분포된 탈춤중의 하나로서 사리원, 봉산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안악, 재령, 신천, 은율 동쪽으로 신원, 서흥, 평산 해안지대로는 해주, 강령, 송림, 연백 등에서 추어 오고 5일장이 서던 거의 모든 장터에서 탈꾼을 초빙하여 1년에 한 번씩 놀았다고 한다.

봉산탈춤이 탈춤의 대표격으로 된 것은 19세기말 20세기초 이래의 일이며 특히 일제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라고 한다. 탈춤의 중흥자로는 약 200년 전의 봉산의 이속안초목을 일러오며 그가 전난 어느 섬으로 유배 되었다가 돌아온 후 나무탈을 종이탈로 바꾸는 개혁을 했으며 안초목과 같은 이속들이 담당했다고 한다. 이 놀이는 연중행사의 하나로 오월 단오날 밤 모닥불을 피워놓고 새벽까지 연희되었으며, 5월 단오날 노는 것은 조선시대 말 이래의 일이고 전에는 4월 초파일에 놀았다고 한다. 관가의 경사, 중국 사신의 영접 때에도 행해졌다. 양주 별산대놀이에 들어있지 않은 사자춤 과장은 약 80년 전에 봉산탈춤에 들어 왔다고 한다. 봉산탈춤은 196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다.

2. 봉산탈춤의 특징

 연출형식은 3현(가야금, 거문고, 아쟁), 6각(용두, 해금, 북, 장고, 피리, 젓대, 징, 꽹과리 포함)으로 연주되는 염불, 타령, 굿거리 곡에 맞추어 춤이 주가 되고 이에 몸짓과 동작, 재담과 노래가 따르며 연기, 음악, 무용이 합하여 한국적 뮤지컬이라고 할 수 있다.

춤사위 분석은 양주 별산대놀이처럼 자세하지는 못하나 외사위, 겹사위, 양사위, 만사위, 깨끼춤, 말뚝이 두어춤, 미얄의 궁둥이춤, 팔목중의 뭇동춤, 까치걸음 등이 있으며 불림에 따라 장단을 청하고 춤을 춘다.

가면은 요철 굴곡이 심하며 '목탈'이라고 하여 혹이 크고 눈방울이 크며 비사실적인 귀면형 가면이다.

의상은 무당의 옷을 징발해서인지 목중의 원색 더그리는 몹시 화려하다. 더그리는 붉은 원동(좌청, 좌홍)에 초록색 소매를 달고 행전을 치어 옷대님을 메고 춤을 춘다.

연희자는 모두 남자였고 그것도 지방 이속들이었으므로 사회적은 그렇게 천시되지는 않았다. 1910년대에 들어오면서 기생조합이 생긴 후로 남자 대신 기생이, 여자역은 여자가 해 왔으며 가면대신 얼굴 자랑으로 가면을 착용하지 않게도 되었다고 한다.

봉산탈춤은 산대도감 계통극의 하나로서 거의 동일한 주류를 가지고 있다. 벽사의 의식무, 파계승에 대한 풍자, 양반 계급에 대한 풍자, 일부처첩의 삼각관계와 서민생활의 곤궁(困窮)상을 보여주며 서민들의 등장을 통하여 무속과 불교신앙, 권선징악의 테두리 안에서 호색과 현실 풍자의 익살과 웃음을 통하여 하나의 극으로 표현하고 있다.

봉산탈춤은 신앙적 내지 종교적 의의 보다는 오락적 요소가 우세하며 탈춤놀이를 하면 마을에 병이 없고 풍년이 든다고 믿어왔고 탈을 문에다 걸어두면 마귀가 침범하지 못한다는 습속이 있어왔다.

봉산탈춤의 소요비용은 따로 입장료를 받지않고 읍민 중에 유지와 상인들이 염출하였다. 탈판 둘레에 2층 다락을 만들어 부담을 시키는 대신 이 특별 관람석 사용권을 상인에게 주어 음식을 사 먹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주기도 하였다. 다락석에 초대되지 않은 사람들은 탈판 둘레에 있는 자리에서 무료로 관람하였다.

3. 봉산탈춤의 구성

• 길놀이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길놀이를 하는데 악공의 주악을 선두로 사자, 말뚝이, 취발이, 포도부장, 소무, 양반, 영감, 상좌, 노장, 남강노인의 순서로 열을 지어 읍내를 한바퀴 도는 것이다. 길놀이를 끝내고 공연장에 이르면 모두 어울려서 춤을 한바탕 추고 나서 '상좌춤' 과장인 제1 과장으로 본격적인 탈놀이를 시작한다. 

• 제1과장 / 사장좌춤

탈춤놀이의 시작을 알리고 놀이판을 정화시키는 의미의 연기자와 관객의 안녕 을 빌어주기 위하여 동서남북 사방신에게 절을 올리는 의식무이다.

• 제2과장 / 목중춤

제2과장은 제1경 '목중춤'과 제2경 '법고놀이'로 이루어져 있다. '목중춤'은 여덟 목중이 주로 사설과 춤으로 각자 자기 소개를 하며, '법고놀이'는 목중 1․2가 법고를 가지고 재담을 한다. 근래에는 법고놀이가 없어졌다

• 제3과장 / 사당과장

제3과장은 7명의 거사들이 화려하게 치장한 사당을 업고 등장하여 홀아비거사가 사당을 희롱 하다 쫓겨나며, 7명의 거사들은 놀량가를 합창하며 질탕하게 논다

• 제4과장 / 노장과장

제1경 '노장춤'과 제2경 '신장수춤', 제3경 '취발이춤'으로 나누어진다. '노장춤'은 생불이라는 칭송을 받던 노장이 소무에게 유혹되어 파계하는 대목으로, 파계승에 대한 풍자를 보여준다. '신장수춤'은 노장이 소무의 신을 외상으로 사자, 신발값을 받으려고 신장수가 원숭이를 보냈다가 장작전으로 오라는 노장의 편지에 장작찜을 당할까봐 급히 퇴장한다. 현실적인 인물이 된 노장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취발이춤'은 취발이가 노장과 대결하여 노장을 물리치고 소무와 사랑을 나눈 뒤 아이를 얻고서 자문자답으로 아이를 어르고 글을 가르치고 신세타령 을 하는 내용이다.  

• 제5과장 / 사자춤

제5과장은 '사자춤'으로 파계승들을 벌하기 위하여 부처님이 보낸 사자가 내려와 목중을 잡아먹으려고 하다가  목중들이 회개하겠다고 말하자 용서하고 함께 춤을 춘다.

• 제6과장 / 양반과장

양반들 사회에서 일어나는 부정부패 비리와 양반들의 생활을 말뚝이가 등장하 여 해학과 풍자를 고발한다.

• 제7과장 / 미얄과장

제7과장은 '미얄춤'으로 난리중에 헤어졌던 영감과  미얄할미가 서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영감이 데려 온 첩 덜머리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고 미얄은 영감한테 맞아죽게 된다. 이때 남강 노인이 등장하여  무당을 불러 지노귀굿을 해준다. 서민생활의 곤궁상과 일부다처제로 인한 남성의 여성에 대한 횡포를 보여주며, 마지막의 굿은 탈춤의 기원이 굿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연희는 모두 마친다.


 

2. 서울, 경기도의 산대놀이

산대놀이는 서울 및 서울 인근의 경기도에서 전승되던 가면극이다. 원래 애오개, 녹번, 구파발, 사직골 등에 산대놀이가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애오개 또는 녹번리의 산대놀이를 배워 왔다고 하는 양주별산대놀이와 구파발본산대 등에서 배워 왔다는 송파산대놀이가 현재 전승되고 있다. 학자들은 흔히 애오개, 사직골 등에 있었던 원래의 산대놀이를 본산대놀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양주와 송파 등지의 별산대놀이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산대놀이의 춤사위는 부드럽고 우아하며 섬세한 중부 지방의 무용적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데, 춤사위가 매우 분화되었으며 종류도 다양하다. 산대놀이의 가면은 황해도 해서탈춤의 가면이나 경상남도 야류․오광대의 가면과 차이를 보인다.

산대놀이가면은 매우 인간적인 모습이고, 비교적 아기자기하고, 손질이 많이 가해져서 기교적이고 다양하며, 가면의 크기가 대부분 비슷하다. 그러나 야류와 오광대의 가면은 선이 굵고 투박하며, 생김새가 단순하면서도 개성이 강하고, 말뚝이가면은 모두 매우 큰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산대놀이 가면은 해서탈춤과 마찬가지로 중가면이 많이 등장하고 야류․오광대에는 중가면이 현저히 적다.

1. 양주별산대놀이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 전승되어 온 가면극으로서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 지정되었다. 현재 유양리에 전수회관을 두고 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음력 3월 3일, 4월 8일, 5월 5일, 8월 15일, 9월 9일과 기우제 때 놀았다. 그리고 섣달 그믐날 밤에 관아에서 나례를 거행할 때, 가면을 쓰고 동헌과 관아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잡귀를 쫓는 의식에 참가하기도 했다.

원래 양주별산대놀이의 공연장소는 사직골이었다. 사직골에는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당이 있었는데, 당집 앞의 넓은 마당이 놀이판으로 사용되었다. 놀이꾼은 원래 관아의 잡역에 종사하던 하층민이었다. 그래서 반주음악을 위해 관아의 악사청에 소속되었던 악사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산대놀이나 해서탈춤은 삼헌육각, 즉 피리, 젓대, 해금, 장구, 북, 등의 악기로 반주하며, 음악도 전문적인 악사들만이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탈놀이꾼과 악사가 분리되어 있다.

2. 송파산대놀이

원래 구송파에 전승되어 온 가면극으로서,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 근처에 있는 서울 놀이마당에 전수회관을 두고 있다. 송파산대놀이는 19세기 초․중엽에 구파발본산대놀이 등의 영향 아래 성립된 별산대놀이였다.

송파산대놀이의 전승지인 송파나루는 오강의 하나로서, 조선 후기 전국에서 가장 큰 열 다섯 향시의 하나였던 송파장이 서던 곳이다. 이 시장 상인들의 지원에 의해 송파산대놀이가 전승되었다.

놀이꾼은 대부분 시장이나 나루터에서 막일이나 소규모의 가게, 술장사, 뱃일 등을 하던 서민층이었다. 정원 대보름, 4월 8일, 단오, 백중, 추석에 산대놀이를 하였다. 어느 때는 인근의 본산대놀이패를 초빙할 때 함께 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25년 7월 대홍수로 인해 송파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모래사장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현재 가락동 일대로 이주해 살면서 한 두번 산대놀이를 거행했으나, 전승이 단절되었다. 대시 1930년대 초부터 돌말이에서 가면극이 재연되어 태평양전쟁이 나기 전까지 한동안 활발했다. 그 후 일제 시대 말에 단절되었던 돌말이의 산대놀이는 해방 이후 몇 차례 공연되었으나, 다시 전승이 끊겼다가 1960년대에 복원되었다.



3. 하회별신굿탈놀이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서 전해저 내려오는 탈놀이로 중요무형문화제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정월 초이튼날 아침 산주와 광대들이 서낭당에있는 내림대의 당방울을 서낭대에 옮겨달고 당사에 도착하면서 농악을 한바탕 연주하며 시작된다.

첫째마당은 '각시의 무동' 마당으로서 주로 구경꾼들에게 별신굿 행사에 필요한 일종의 기부금인 걸립을 받으며 걸립은 놀이마당 전체에서 행해진다. 둘째 마당은 '주지 놀이'로 액풀이를 하는 마당이고 셋째마당은 백정이 나와 우낭을 파는 것을 보여주며 넷째 마당은 '할미'마당으로 할미광대가 어려운 인생살이를 <베틀가>에 맞추어 부르고 춤을 춘다. 다섯째 마당부터는 이탈놀이의 본격적으로 주제부분이 나타나는 마당으로 '파계승'마당은 대사 없이 진행되며 중이 부네의 오줌누는 모습을 보고 부네와 도망가는 내용이다. 마지막 놀이 마당인 '양반과 선비'마당은 하인인 초랭이가 양반과 선비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을 풍자한다. 광대들은 15일간의 합숙으로 행사를 끝내지만 양반광대와 각시광대가 남아 혼례마당과 신방마당을 치르는데 이는 17세 처녀신을 위로하기 위해 치르는 것으로 풍요의례의 의미도 포함되어있다. 놀이마당에 사용되는 악기는 농아기로 마당과 마당사이에 농악을 울림으로써 각 마당을 구분하였다. 이탈놀이의 가면은 주지(2), 각시,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 등 11개가 전하며 이 가면들은 의례용으로서 신성시되고 있다. 

 

조금 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ltah님의 답변"re: 탈춤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등장인물의 전원 또는 일부가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극(劇), <탈놀음>이라고도 한다. 가면은 원래, 죽은 사람의 영혼이나 자연계의 여러 가지 힘의 매개물로서의 역할을 지니고 있었으나 거기에 머무는 혼(魂)이나 힘이 그 가면을 쓴 인간에게 깃든다는 데서 다른 매개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면의 특징이 있다. 따라서 가면을 쓴 인물이 등장할 때 그 극은 신(神), 악령(惡靈), 사자(死者), 사물의 정(精) 등 일상생활을 초월한 다른 세계의 존재의 출현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으며, 주술(呪術)이나 종교의식과 분화되지 않았던 옛 형태의 연극일수록 가면을 많이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서양〕

 

서양에서는 BC 5세기를 정점으로 하는 고대 그리스극(劇)에서 처음으로 가면이 연극에 사용되었다. 그 이전에 이집트나 크레타섬에서도 가면을 사용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그러한 것들은 종교의식이나 제례(祭禮)의 일부여서, 독립된 가면극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리스 비극(悲劇)은 짐승의 가죽을 쓰고 사티로스를 연기한 사람들이,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를 찬양하기 위한 원무합창(圓舞合唱)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 초기에 신(神)을 표현한 가면은 가죽이나 헝겊에 초목의 즙이나 흙 따위를 칠하여 얼굴을 가장하였으나, 그리스 비극의 발전과 더불어 가면제작기술이 발달함으로써, 고대 그리스극에서는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연극양식이 정착하였다. 고대 로마도 그 전통을 계승하였으나 연극이 제의성(祭儀性)을 잃고 비극이 쇠퇴하면서 토속적이고 풍자를 주로 다루는 희극 <아테라나극(劇)>이 융성하였다. 중세유럽의 종교극과 민속극에도 가면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르네상스시대에 들어와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에서 완숙한 극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이 즉흥희극에서는 연인역할을 하는 남녀 일부를 제외한 주요 등장인물 대부분이 얼굴 전체 또는 상반부를 덮는 가면(두툼한 가죽으로 만들었거나 얇은 나무로 아로새긴 것)을 씀으로써, 늘 변하지 않는 역할과 그의 성격을 나타내었다. 이 가면극은 유럽 전지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연극이 주로 인간사회의 상극(相剋)이나 심리적 갈등을 묘사하게 된 근세부터, 리얼리즘이 예술의 주류가 된 근대에 이르러 그 전통도 상실하게 되었고, 까만 헝겊으로 만들어서 눈만을 감추는 가면이 궁정무용극(宮廷舞踊劇)이나 가장무도회(假裝舞蹈會)에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서, 연극이 일상성의 단순한 묘사를 벗어나 참된 연극성을 회복하고, 가면이 지니는 상징성과 표현양식이 연극의 중요한 요소로 기대되자 고든 크레이그·코포·오닐·브레히트·주네 등의 많은 전위적인 연극인에 의하여 가면의 중요성이 재인식되었으며, 최근에는 오히려 새로운 의미의 뛰어난 현대적 가면극이 상연되는 일이 많다.

 

 

〔동양〕

 

가면이 없어져 버린 서양연극에 비하여 동양은 가면극의 보고(寶庫)이다. 동양의 가면극은 무용적인 색채가 매우 강하여 흔히 가면무나 가면무극(假面舞劇)이라고 불린다. 이 가면무는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일본·인도·네팔·부탄·티베트·몽고·스리랑카·인도네시아 등지에 널리 다양하게 분포했는데, 형태적으로 보면 신화전설을 본떠서 신화예능(神話藝能) 영역에 머무르고 있는 것과 거기에서 연극의 형태로 발전하였거나 그 과정에 있는 것 등 2종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전자에는 인도의 초우, 네팔의 마하카리 파쿵, 티베트계(系)의 도무(跳舞), 인도네시아의 토펜이나 바론 등이, 후자에는 스리랑카의 코람, 한국의 가면극, 일본의 노[能(능)] 따위가 포함될 것이다. 물론, 양자 사이에는 형태적·유기적 교류가 있고, 양자 모두 원칙적으로는 여인금제(女人禁制)의 남성 중심의 가면극이다. 이밖에 부탄의 사원에서는 승려를 중심으로 하는 가면극, 그리고 캄보디아나 타이 등 동남아시아에서는 크메르계(系)의 가면무가 있다. 또한 다양한 가면을 가진 아프리카나 오세아니아에도 당연히 가면의 민속무용이 현존하지만, 종교적 제사 등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으며, 그러한 민속무용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가면극〕

 

한국의 가면극은 삼국시대 이래 중국에서 전래한 산악백희(散樂百戱) 등 지배계층이 주관했던 가면희(假面戱) 등이 토착적인 <탈굿> <탈놀이> 등과 섞이면서 형성되었는데, 이렇게 형성된 가면극은 서민 취향화되어 각 지방에 따라 독특한 스타일로 발전하였다. 한국 가면극의 연출형태는 음악 반주에 춤이 주(主)가 되고 노래가 따르는 가무적 부분과 대사가 따르는 연극적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반주곡조는 염불·타령·굿거리 등의 민속무용의 반주음악과 같다. 또한, 한국 가면극은 야외극으로 상연되어 왔으며, 상연시간은 일정하지 않고, 상연시기도 각 지방에 따라 달랐다. 현존하는 이들 가면극은 파계승, 몰락한 양반, 상민, 무당, 거사(居士), 하인들의 등장을 통하여 특권계급과 형식적 도덕에 대한 일종의 반항과 비판을 연출하는 민중극이다.

 

 

〔기원〕

 

가면극에 관한 사적(史的) 연구는 어느 장르의 경우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는데, 농경의식설(農耕儀式說)·기악설(伎樂說)·산대희설(山臺戱說) 등이 한국 가면극의 유력한 기원설이다. ① 농경의식설:고대(古代) 이래로 농사가 잘 되라고 농민들이 거행하던 농경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서낭굿 등의 부락굿에 잘 나타나며, 농악대의 잡색(雜色)놀이, 하회별신(河回別神)굿놀이, 강릉관노(江陵官奴) 탈놀이는 농민들의 농경행사였기 때문에 민중의 연극으로 자라났다는 설이다. ② 기악설:612년 백제(무왕 13) 미마지(味摩之)가 일본에 전했다는 기악이 오늘날의 양주별산대놀이나 봉산탈춤과 내용이 비슷하여, 기악이 가면극으로 전승되었다는 설이다. ③ 산대희설:산대희에서 산대극이 생겨났고, 그 전파로 가면극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다.

 

 

〔발달〕

 

한국의 가면극은 고구려의 무악, 백제의 기악(伎樂), 신라의 처용무와 오기(五伎) 등 삼국시대 이래의 산악백희와 고려의 산대잡희(山臺雜戱) 등 조선 전기의 각종 가면희가 조선시대 후기의 산대가면극(山臺假面劇)으로 점차 발전·정립되었다.

⑴ 삼국시대의 가면극:한국의 가면극은 9세기 말엽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 5수(首)에 나타나는 5기, 즉 월전(月顚)·대면(大面)·금환(金丸)·속독(束毒)·산예에서 가면을 사용한 흔적을 볼 수 있어 한국의 가면극으로는 최초의 기록임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신라시대에는 그밖에도 검무와 처용무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정확한 문헌과 유물은 없고, 다만 《동경잡기》에서 검무가 가면극이라는 시사를 얻을 수 있고, 처용무 역시 가면을 쓰고 춤을 추었다고 나타나, 가면을 사용했던 것만은 명백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오늘날 검무에 있어서는 가면을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후세에 와서 춤이 남성의 놀음에서 여성의 놀음으로 옮겨간 뒤부터 가면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처용무는 고려·조선을 거쳐 오늘날까지도 가면을 쓰고 춤추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신라 말기의 처용의 전설을 토대로 한 주술적 무용이라고 볼 수 있다.

⑵ 고려시대의 산대잡희:고려시대에는 나례(儺禮)와 산대잡희가 있었는데, 나례는 연중(年中)의 재앙과 병마의 근원인 악귀를 쫓아 내어 즐거운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음력 섣달 그믐날밤에 행하던 의식으로, 조선시대 인조 때까지 행하여졌고, 산대잡희는 조선시대에 계승되어 더욱 성행하였다.

⑶ 조선시대의 산대나례:고려시대의 나례와 산대잡희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인조 때 공의(公儀)로서 폐지될 때까지 행하여졌다.1634년(인조 12) 산대잡희 및 나례가 폐지되자, 이러한 놀음에 종사하던 연희자(演戱者)는 그들의 생계를 위해 재출발해야 했고, 이에 따라 단순한 가면놀음에서 하나의 연극으로 발전해 나가게 되어 산대잡희가 아닌 산대가면극으로서의 산대놀음이 연희되게 된 것이다. 공의가 폐지된 후에도 이들은 가끔 궁중에서 연희하였으며 국가에서 연 2 회 그들에게 계방(契房)의 도인(都印)을 주어, 이것을 가지고 나루터·시장·절 등지에서 돈과 곡물을 받아 생계를 꾸려 나갔다.

 

 

〔분포〕

 

산대가면극의 연희자들은 대다수가 성밖의 아현리에 살았기 때문에 <아현산대>라고 하였다. 지금부터 100년 전 <아현산대>가 지방흥행에 나갔을 때, 그곳 관아의 하층배들이 보고 본받아 배운 <양주산대>는 지금은 몇 사람이 그들의 계승자로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 산대가면극은 양주 이외의 여러 지방에 전파되어 다른 유형의 가면극을 형성하였다. 즉, 동해안 쪽으로 경상북도·강원도 지방 등지에 퍼져서 서낭신제[城隍神祭(성황신제)] 때에 연희하는 <서낭신제 가면극>, 황해도지방에 퍼쳐 있는 <해서 가면극>, 경상남도 해안지방의 <오광대(五廣大)> <야유(野遊)가면극> 등이 그것이다.

 

 

〔종류〕

 

처음 서울을 비롯하여 시작된 산대놀이는 각 지방의 독특한 스타일로 발전하여 경기지방의 <양주별산대놀이>, 황해도지방의 <봉산·강령·해주 탈춤>, 경상남도지방의 <동래·수영의 야유>, 유랑하며 연희하던 <남사당의 덧뵈기>, 함경남도지방의 <북청사자놀음>, 경상북도지방의 <하회별신굿놀이>, 강원도지방의 <강릉관노탈놀이>, 그 밖에 <제주입춘굿>, <양주소놀이굿> 등으로 갈라졌다.

⑴ 북청사자놀음: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 전지역에서 행하여졌으며, 청해면 토성리의 사자놀음은 특히 유명하다. 북청사자놀음은 음력 정월 14일 밤, 달이 뜬 뒤부터 시작되어 15일 새벽까지 논 다음 해산하고, 16일 이후는 초청하는 유지가(有志家)를 돌며 논다. 북청사자놀음은 애원성·마당놀이·사자춤의 3부로 이루어져 있고, 사자춤이 위주가 되며, 가면극으로서는 지나치게 간단하다고 볼 수 있다.

⑵ 하회별신굿놀이:부락제의 기본 유형은 남성 본위로 유교풍의 축문을 읽는 동제(洞祭)와 여성 중심의 무당이 주재하는 도당(都堂)굿, 축문 없이 제주(祭主)가 정성을 드리는 산제(山祭)가 있다. 이 가운데 현재까지 전하는 대표적인 것은 경상북도 안동시(安東市) 풍천면(豊川面) 하회리(河回里)의 동제와 별신굿놀이이다. 하회별신굿은 10년에 1번씩, 또는 임시로 거행되는데 음력 12월말부터 그 준비를 시작한다. 별신굿놀이의 1과장(科場;마당)은 <주지놀음>으로 벽사를 위한 의식무(儀式舞)로서의 사자춤이다. 2과장은 서막적인 과정으로 주지와 삼석놀음이며, 3과장은 파계승놀이로 본격적인 놀이가 시작되는데 4과장 양반·선비 놀이, 5과장 살림살이 과장, 6과장 살생 과장, 7과장 환자(還子)놀이, 8과장 혼례 과장, 9과장 신방(新房) 과장으로 이어진다.

⑶ 산대놀이:양주·송파 산대놀이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것은 <별산대(別山臺)>라 부른다. 양주의 별산대놀이는 경기도지방에 남아 있는 유일한 가면극으로, 음악 반주에 춤이 주가 되며, 덕담과 재담이라 불리는 사설과 노래가 곁들여진다. 산대놀이 춤은 형식미를 갖추고 있고, 춤사위는 어느 탈춤보다 자세하다.

⑷ 봉산탈춤:황해도에 분포되어 있는 가면극은 모두 탈춤이라 부르고, 그 중 규모·내용면에서 손꼽을 만한 것은 봉산의 탈춤이며, 황주·서흥·평산 등지의 탈춤도 그 규모가 상당히 성대하였다. 이 지역의 탈춤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의 주요 읍들이 탈춤을 뒷바라지할 만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고, 지역적으로 조선시대 영사행사(迎使行事)에 자주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황해도지방의 탈춤은 봉산탈춤과 해주탈춤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봉산탈춤은 춤이 주가 되고 몸짓·동작·재담·노래가 따르는 가면무극으로 가무적 부분과 연극적 부분으로 구성된다. 봉산탈춤은 7과장으로 구성되며, 목중·노장·양반 및 미얄의 독립된 4개의 놀이에 사당춤·사자춤·원숭이 놀이가 곁들여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⑸ 강릉관노탈놀이:강원도 강릉에서 지내는 놀이로, 가면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내용이 빈약하여 엄격히 가면극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무언극으로 진행되며, 4과장으로 구성된다.

⑹ 오광대:경상남도 내륙과 해안선 일대를 망라하여 분포된 가면극으로, 낙동강변 초계(草溪) 밤마리[東旨(동지)]에서 발생했다고 전해진다. 초계 밤마리 오광대를 비롯하여 통영·고성 오광대, 진주·마산 오광대가 전해지고 있고, 수영·동래·부산진 등지에서는 초계 밤마리 오광대를 야유(野遊)라 부른다. 오광대는 춤이 주가 되고 재담과 노래와 동작이 연희되는 탈춤의 일종이며, 양반에 대한 풍자가 한국 가면극 중 가장 심하다. 연희 시기도 처음에는 정월 보름을 중심으로 행하여졌으나, 나중에는 3월과 4월초, 9월의 단풍놀이철로 바뀌어 오락적 성격을 띠어 갔다.

⑺ 동래·수영의 야유:초계 밤마리 오광대에 근원을 둔 것으로 들놀음을 의미하여 야유라 부르며, 지신밟기 등과 관련이 있다.

⑻ 남사당덧뵈기:조선시대 후기 이래 1920년경까지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서민들을 상대로 연희한 유랑예인(流浪藝人)의 무리를 남사당이라고 하는데, 이들의 주요 특기는 풍물[農樂(농악)]·버나(대접돌리기)·살판(땅재주)·어름(줄타기)·덧뵈기[假面舞劇(가면무극)]·덜미(꼭두각시놀음) 등으로 가무백희의 전통을 전승한 것들이다. 남사당덧뵈기는 다른 산대놀이에 비해 날카로운 풍자를 보여 주며, 짜임새가 뛰어나 춤보다 재담·동작이 주를 이루고, 과장은 4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마을의 넓은 뜰이나 마당에서 연희되며, 직설적 재담은 재미에만 그치지 않고 사회극으로서의 일면도 보여 준다.

 

 

〔주제〕

 

한국 가면극의 기본사상은 현실주의와 비판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기본 내용은 양반에 대한 반항, 남녀의 갈등, 파계승에 대한 풍자, 벽사의 의식무, 서민생활의 실상을 다루고 있고, 모든 과장이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각 과장이 독립되어 있어 하나의 주제로 연결되는 연속성이 결여되어 있다. 각 지방의 가면극마다 주제성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파계승과 몰락한 양반, 무당, 사당패, 거사와 기타 서민들의 등장을 통하여 권선징악의 테두리에서 현실폭로와 비판 등을 풍자·웃음으로써 보여주고 있다.

 

dudthd97님의 답변"re: 탈춤에 대해서...... 점수 겁니다!!! ㅋㅋㅋ"

1. 탈의 종류와 특징

 

탈은 크게 신앙가면과 예능가면으로 나눌 수 있다. 신앙가면이란 일정한 장소에 가면을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거나, 얼굴에 쓰고 악귀를 쫓아내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예능가면이란 무용할 때나 연극할 때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신앙가면에는 일정한 장소에 모시고 고사만을 지내는 신성가면과 악귀를 쫓기 위해 얼굴에 쓰는 구나(驅儺)가면이 있다. 이 신성가면에는 광대시가면, 창귀시가면, 소미시가면, 놋도리가면, 장군가면이 있고, 구나가면에는 방상시가면과 사자가면이 있다. 예능가면에는 무용가면, 연극가면이 있다. 이 무용가면에는 처용가면이 있고, 연극가면에는 산대가면극, 해서가면극, 야류, 오광대가면극, 서낭신제가면극 등에 쓰이는 탈이 있다.

탈은 대부분 움직일 수 없으나, 방상시가면의 눈알과 봉산사자가면의 눈알, 북청사자가면의 입, 산대가면극의 눈끔적이가면의 양쪽 눈, 마산오광대가면극의 턱까불가면의 턱을 비롯하여 동래야류의 양반탈의 턱, 수영야류의 수양반(首兩班)탈의 턱, 하회가면극의 선비, 양반, 중, 백정 탈의 턱, 그리고 해서가면극의 황주양반탈의 턱은 움직이도록 되어 있어 표정 변화가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 탈은 한국적인 표정과 용모가 잘 나타나있을 뿐만 아니라 그 역(役)에 따른 인물의 개성도 잘 표현되어 있는데, 특히 하회가면의 선비, 양반, 각시, , 백정 등에 나타난 조각수법은 우리나라 나무 탈 중 걸작에 속한다.

거의 모든 탈에는 탈보가 붙어 있다. 가면은 대부분 사람 얼굴의 모양이지만 신의 형상을 한 것도 있다. 방상시가면, 처용가면,오방신장(五方神將) 가면, 산대가면극에 있어서 연잎(蓮葉) 가면과 눈끔적이 탈이 그것이다. 이 밖에도 영노와 같은 상상속의 동물탈과 실제 동물의 탈도 있다. 즉, 산대가면극, 해서가면극의 원숭이, 오광대가면극의 사자, 범, 담비 등과 같은 탈이 그것이다. 그리고 양반가면은 언청이, 코비뚤이, 사팔뜨기 등 불구자인 것이 많은데, 이는 양반에 대한 반감이 탈에 반영된 것이다.

 

bill0925님의 답변" 아,네^3^"

1.탈춤의 정의

탈춤이란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의 연기자가 탈로 얼굴이나 머리 전체를 가리고 본래의 얼굴과 다른 인물이나 동물 또는 초자연적 존재 등으로 분장하여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종합 예술적 연극이라고 할 수 있으며 탈을 쓰고 추는 춤이란 뜻에서 춤에 큰 비중을 둔 명칭이다.

 

2.탈춤의 종류

1. 서울을 중심으로한 중부지방의 탈춤

: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2. 황해도를 중심으로 한 북부지방의 탈춤

: 강령탈춤, 봉산탈춤, 은율탈춤

3.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남부지방의 탈춤

: 통영오광대놀이, 고성오광대 놀이, 수영들놀음, 동래들놀음

4. 이 밖의 탈춤

: 안동 하외별신굿, 강릉 관노놀음

위의 12가지 탈춤은 주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저는 봉산탈춤의 내용을 써드리겠습니다.

 

3.봉산탈춤의 내용

제1마당 사상좌춤 : 상좌 넷이 나와 춤을 추어 연희자와 관객의 안녕과 복을 빌며 사방신에게 절을 올린다.
제2마당 팔목중춤 : 팔목중은 음주가무를 즐기며, 풍유 소리에 맞추어 한 사람씩 춤기량을 겨룬다.
제3마당 사당춤 : 사당과 거사가 나와 서도소리를 부른다.
제4마당 노장춤 : 소무가 불도를 닦고 있던 노장스님을 꾀어 파계시킨다.
제5마당 : 부처님이 팔목중과 노장의 파계를 벌하려고 사자를 보낸다. 이에 목중이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빈다. 사자는 이를 용서하고 춤을 춘다.
봉산탈은 입체적이며, 의상이 화려하고, 춤사위가 활기차고 씩씩하여 대륙적인 맛이있다. 춤사위는 팔목춤의 외사위, 곱(겹)사위, 양사위, 민사위, 취발이의 깨끼춤(깨끼리춤), 말뚝이의 두어춤(양반들을 돼지우리속에 몰아 넣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미얄궁둥이춤, 까치걸음, 팔목중의 못동춤 등이 있다.

4.탈춤의 대상

당연히 서민들이 양반을 비꼬는 내용이 나온다. 또 양반사회의

비판이던지 그런 양반에 대해서 비판을 한다.

 

5.탈춤의 뜻

탈(가면)을 쓰고 추는 춤에서 "탈춤" 이란 이름이 나왔다고 합니다.

 

   "탈춤"이란 해서지방의 가면극을 이야기 하며

 

   본래의 이름은 "가면극" 이라고 해야 옳지만 70년대 활발히 일어난

 

   대학가의 탈춤부흥운동과 함께 일반적 통칭이 되었기에

 

   탈춤이라 부른다고 하네요.

 

   선자들의 탈춤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천체 기원설, 처용가무설,

 

   기악설, 풍물굿에 등장하는 잡색놀이설, 산대도감설등 다양하지만 그 중

 

   천체 기원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추정된다고 하네요.

 

   인간이 지구상에 생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탈은 등장하기 시작하죠.

 

   삼라만상 나름으로 가각의 신의 지배를 받는다고 믿었던 정령신앙을 바탕으로

 

   신을 위하며 달래어서 인간에게 복을 바라고 신을 물리치기 위한

 

   주술적 방법으로 탈이 등장하였고, 여기에 춤이 보태어져서

 

   주술적 의미를 더했다고 하네요.

 

학교에 가서 칭찬받길...ㅋ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여러가지의 답변들을 모아봤어요^^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쓰시길 ^^

 

dudthd97님의 답변"re: 탈춤에 대해서..."

 

1) 탈놀음굿 : 경상북도 안동군의 하회와 병산, 영양군의 주곡 그리고 동해안 지방에 서주로 연행되었다. 몇 년마다 부정기적으로 열리는 별신굿의 일부로서 연행되는 것이 특이하다.

2) 관노탈놀이 : 강릉지방에서 단오제 행사의 일부로 연행되었다. 탈놀음굿과 마찬가지로 굿에서 연극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탈춤으로서 굿과 극의 중간 형태에 속하는 탈춤이라고 할 수 있다.

3) 사자놀음 : 함경남도 북청군 청해면 토성리 산하 여러 마을에서 민속놀이로서 연행되었다. 벽사진경이나 축사연상의 의식무적 성격이 강하게 남아있지만 연극적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탈춤의 범주화할 수 있다. 사자놀이와 함께 관원놀음이 연희되기도 하였다.

4) 덧뵈기 : 전문 예인 집단인 남사당패가전국의 농촌과 어촌을 떠돌아다니며 공연하던 여섯가지 레파토리 가운데 다섯 번째로 연행되었다.

5) 산대놀이 : 서울과 경기도 지방의 산대놀이로서 녹번, 아현, 노량진, 퇴계원, 사직골에서 본산대놀이로 시작되어 양주와 송파에 별산대놀이로 전파되었다.

6) 해서 탈춤 : 봉산, 해주, 강령, 은율, 황주(黃州), 안악(安岳), 재령(載寧),신천 (信川), 장연(長淵), 송화(松禾), 기린(麒麟), 신원(新阮), 서흥(瑞興), 신막(新幕), 평산(平山 ), 옹진(甕津),송림(松林), 추화(秋花), 금산(金山), 연백(延白)등 사실상 곡산, 신계, 수안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연행되었다. 1950년대 중반에 서흥 탈춤이 북한 학계에서 처음 채록되었다.

7) 강원도 탈춤 : 고성에서 연행된 탈춤 말고도 최근 북한 학계에서 그 대본이 채록된 통천 탈춤이 보고되었다.

8) 오광대 : 낙동강을 경계선으로 하여 동쪽 지방, 경상우도(慶尙右道)에서 전승된 탈춤으로 합천군의 율지, 의령군의 신반, 통령, 고성, 사천군의 가산, 진주, 마산(馬山), 산청(山靑), 김해군의 가락(駕洛), 창원군의 진동(鎭東), 거제(巨濟)등의 지역에서 연행되었다. 최근에는 진양군의 도동(현재의 진주시 대화동), 사천군의 서포면 서구리와 남구리, 그리고 거제군의 둔산면 학산리 등지에서 탈춤이 연행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9) 들놀음 : 낙동강을 중심으로 서쪽지방, 즉 경상좌도에서 전승된 탈춤으로 수영, 동래, 부산진, 등의 지역에서 연행되었다. 단순히 탈춤만을 가리키는 오광대와는 달리 들놀음은 앞고사, 길놀이, 덧뵈기, 춤놀이, 뒷고사 등이 탈춤과 함께 연희되는 종합적 민속놀이라고 할 수 있다.


1. 봉산탈춤

1. 봉산탈춤의 유래

봉산탈춤은 서해일대(황해도)에 분포된 탈춤중의 하나로서 사리원, 봉산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안악, 재령, 신천, 은율 동쪽으로 신원, 서흥, 평산 해안지대로는 해주, 강령, 송림, 연백 등에서 추어 오고 5일장이 서던 거의 모든 장터에서 탈꾼을 초빙하여 1년에 한 번씩 놀았다고 한다.

봉산탈춤이 탈춤의 대표격으로 된 것은 19세기말 20세기초 이래의 일이며 특히 일제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라고 한다. 탈춤의 중흥자로는 약 200년 전의 봉산의 이속안초목을 일러오며 그가 전난 어느 섬으로 유배 되었다가 돌아온 후 나무탈을 종이탈로 바꾸는 개혁을 했으며 안초목과 같은 이속들이 담당했다고 한다. 이 놀이는 연중행사의 하나로 오월 단오날 밤 모닥불을 피워놓고 새벽까지 연희되었으며, 5월 단오날 노는 것은 조선시대 말 이래의 일이고 전에는 4월 초파일에 놀았다고 한다. 관가의 경사, 중국 사신의 영접 때에도 행해졌다. 양주 별산대놀이에 들어있지 않은 사자춤 과장은 약 80년 전에 봉산탈춤에 들어 왔다고 한다. 봉산탈춤은 196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다.

2. 봉산탈춤의 특징

 연출형식은 3현(가야금, 거문고, 아쟁), 6각(용두, 해금, 북, 장고, 피리, 젓대, 징, 꽹과리 포함)으로 연주되는 염불, 타령, 굿거리 곡에 맞추어 춤이 주가 되고 이에 몸짓과 동작, 재담과 노래가 따르며 연기, 음악, 무용이 합하여 한국적 뮤지컬이라고 할 수 있다.

춤사위 분석은 양주 별산대놀이처럼 자세하지는 못하나 외사위, 겹사위, 양사위, 만사위, 깨끼춤, 말뚝이 두어춤, 미얄의 궁둥이춤, 팔목중의 뭇동춤, 까치걸음 등이 있으며 불림에 따라 장단을 청하고 춤을 춘다.

가면은 요철 굴곡이 심하며 '목탈'이라고 하여 혹이 크고 눈방울이 크며 비사실적인 귀면형 가면이다.

의상은 무당의 옷을 징발해서인지 목중의 원색 더그리는 몹시 화려하다. 더그리는 붉은 원동(좌청, 좌홍)에 초록색 소매를 달고 행전을 치어 옷대님을 메고 춤을 춘다.

연희자는 모두 남자였고 그것도 지방 이속들이었으므로 사회적은 그렇게 천시되지는 않았다. 1910년대에 들어오면서 기생조합이 생긴 후로 남자 대신 기생이, 여자역은 여자가 해 왔으며 가면대신 얼굴 자랑으로 가면을 착용하지 않게도 되었다고 한다.

봉산탈춤은 산대도감 계통극의 하나로서 거의 동일한 주류를 가지고 있다. 벽사의 의식무, 파계승에 대한 풍자, 양반 계급에 대한 풍자, 일부처첩의 삼각관계와 서민생활의 곤궁(困窮)상을 보여주며 서민들의 등장을 통하여 무속과 불교신앙, 권선징악의 테두리 안에서 호색과 현실 풍자의 익살과 웃음을 통하여 하나의 극으로 표현하고 있다.

봉산탈춤은 신앙적 내지 종교적 의의 보다는 오락적 요소가 우세하며 탈춤놀이를 하면 마을에 병이 없고 풍년이 든다고 믿어왔고 탈을 문에다 걸어두면 마귀가 침범하지 못한다는 습속이 있어왔다.

봉산탈춤의 소요비용은 따로 입장료를 받지않고 읍민 중에 유지와 상인들이 염출하였다. 탈판 둘레에 2층 다락을 만들어 부담을 시키는 대신 이 특별 관람석 사용권을 상인에게 주어 음식을 사 먹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주기도 하였다. 다락석에 초대되지 않은 사람들은 탈판 둘레에 있는 자리에서 무료로 관람하였다.

3. 봉산탈춤의 구성

• 길놀이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길놀이를 하는데 악공의 주악을 선두로 사자, 말뚝이, 취발이, 포도부장, 소무, 양반, 영감, 상좌, 노장, 남강노인의 순서로 열을 지어 읍내를 한바퀴 도는 것이다. 길놀이를 끝내고 공연장에 이르면 모두 어울려서 춤을 한바탕 추고 나서 '상좌춤' 과장인 제1 과장으로 본격적인 탈놀이를 시작한다. 

• 제1과장 / 사장좌춤

탈춤놀이의 시작을 알리고 놀이판을 정화시키는 의미의 연기자와 관객의 안녕 을 빌어주기 위하여 동서남북 사방신에게 절을 올리는 의식무이다.

• 제2과장 / 목중춤

제2과장은 제1경 '목중춤'과 제2경 '법고놀이'로 이루어져 있다. '목중춤'은 여덟 목중이 주로 사설과 춤으로 각자 자기 소개를 하며, '법고놀이'는 목중 1․2가 법고를 가지고 재담을 한다. 근래에는 법고놀이가 없어졌다

• 제3과장 / 사당과장

제3과장은 7명의 거사들이 화려하게 치장한 사당을 업고 등장하여 홀아비거사가 사당을 희롱 하다 쫓겨나며, 7명의 거사들은 놀량가를 합창하며 질탕하게 논다

• 제4과장 / 노장과장

제1경 '노장춤'과 제2경 '신장수춤', 제3경 '취발이춤'으로 나누어진다. '노장춤'은 생불이라는 칭송을 받던 노장이 소무에게 유혹되어 파계하는 대목으로, 파계승에 대한 풍자를 보여준다. '신장수춤'은 노장이 소무의 신을 외상으로 사자, 신발값을 받으려고 신장수가 원숭이를 보냈다가 장작전으로 오라는 노장의 편지에 장작찜을 당할까봐 급히 퇴장한다. 현실적인 인물이 된 노장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취발이춤'은 취발이가 노장과 대결하여 노장을 물리치고 소무와 사랑을 나눈 뒤 아이를 얻고서 자문자답으로 아이를 어르고 글을 가르치고 신세타령 을 하는 내용이다.  

• 제5과장 / 사자춤

제5과장은 '사자춤'으로 파계승들을 벌하기 위하여 부처님이 보낸 사자가 내려와 목중을 잡아먹으려고 하다가  목중들이 회개하겠다고 말하자 용서하고 함께 춤을 춘다.

• 제6과장 / 양반과장

양반들 사회에서 일어나는 부정부패 비리와 양반들의 생활을 말뚝이가 등장하 여 해학과 풍자를 고발한다.

• 제7과장 / 미얄과장

제7과장은 '미얄춤'으로 난리중에 헤어졌던 영감과  미얄할미가 서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영감이 데려 온 첩 덜머리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고 미얄은 영감한테 맞아죽게 된다. 이때 남강 노인이 등장하여  무당을 불러 지노귀굿을 해준다. 서민생활의 곤궁상과 일부다처제로 인한 남성의 여성에 대한 횡포를 보여주며, 마지막의 굿은 탈춤의 기원이 굿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연희는 모두 마친다.


 

2. 서울, 경기도의 산대놀이

산대놀이는 서울 및 서울 인근의 경기도에서 전승되던 가면극이다. 원래 애오개, 녹번, 구파발, 사직골 등에 산대놀이가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애오개 또는 녹번리의 산대놀이를 배워 왔다고 하는 양주별산대놀이와 구파발본산대 등에서 배워 왔다는 송파산대놀이가 현재 전승되고 있다. 학자들은 흔히 애오개, 사직골 등에 있었던 원래의 산대놀이를 본산대놀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양주와 송파 등지의 별산대놀이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산대놀이의 춤사위는 부드럽고 우아하며 섬세한 중부 지방의 무용적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데, 춤사위가 매우 분화되었으며 종류도 다양하다. 산대놀이의 가면은 황해도 해서탈춤의 가면이나 경상남도 야류․오광대의 가면과 차이를 보인다.

산대놀이가면은 매우 인간적인 모습이고, 비교적 아기자기하고, 손질이 많이 가해져서 기교적이고 다양하며, 가면의 크기가 대부분 비슷하다. 그러나 야류와 오광대의 가면은 선이 굵고 투박하며, 생김새가 단순하면서도 개성이 강하고, 말뚝이가면은 모두 매우 큰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산대놀이 가면은 해서탈춤과 마찬가지로 중가면이 많이 등장하고 야류․오광대에는 중가면이 현저히 적다.

1. 양주별산대놀이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 전승되어 온 가면극으로서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 지정되었다. 현재 유양리에 전수회관을 두고 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음력 3월 3일, 4월 8일, 5월 5일, 8월 15일, 9월 9일과 기우제 때 놀았다. 그리고 섣달 그믐날 밤에 관아에서 나례를 거행할 때, 가면을 쓰고 동헌과 관아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잡귀를 쫓는 의식에 참가하기도 했다.

원래 양주별산대놀이의 공연장소는 사직골이었다. 사직골에는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당이 있었는데, 당집 앞의 넓은 마당이 놀이판으로 사용되었다. 놀이꾼은 원래 관아의 잡역에 종사하던 하층민이었다. 그래서 반주음악을 위해 관아의 악사청에 소속되었던 악사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산대놀이나 해서탈춤은 삼헌육각, 즉 피리, 젓대, 해금, 장구, 북, 등의 악기로 반주하며, 음악도 전문적인 악사들만이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탈놀이꾼과 악사가 분리되어 있다.

2. 송파산대놀이

원래 구송파에 전승되어 온 가면극으로서,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 근처에 있는 서울 놀이마당에 전수회관을 두고 있다. 송파산대놀이는 19세기 초․중엽에 구파발본산대놀이 등의 영향 아래 성립된 별산대놀이였다.

송파산대놀이의 전승지인 송파나루는 오강의 하나로서, 조선 후기 전국에서 가장 큰 열 다섯 향시의 하나였던 송파장이 서던 곳이다. 이 시장 상인들의 지원에 의해 송파산대놀이가 전승되었다.

놀이꾼은 대부분 시장이나 나루터에서 막일이나 소규모의 가게, 술장사, 뱃일 등을 하던 서민층이었다. 정원 대보름, 4월 8일, 단오, 백중, 추석에 산대놀이를 하였다. 어느 때는 인근의 본산대놀이패를 초빙할 때 함께 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25년 7월 대홍수로 인해 송파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모래사장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현재 가락동 일대로 이주해 살면서 한 두번 산대놀이를 거행했으나, 전승이 단절되었다. 대시 1930년대 초부터 돌말이에서 가면극이 재연되어 태평양전쟁이 나기 전까지 한동안 활발했다. 그 후 일제 시대 말에 단절되었던 돌말이의 산대놀이는 해방 이후 몇 차례 공연되었으나, 다시 전승이 끊겼다가 1960년대에 복원되었다.



3. 하회별신굿탈놀이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서 전해저 내려오는 탈놀이로 중요무형문화제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정월 초이튼날 아침 산주와 광대들이 서낭당에있는 내림대의 당방울을 서낭대에 옮겨달고 당사에 도착하면서 농악을 한바탕 연주하며 시작된다.

첫째마당은 '각시의 무동' 마당으로서 주로 구경꾼들에게 별신굿 행사에 필요한 일종의 기부금인 걸립을 받으며 걸립은 놀이마당 전체에서 행해진다. 둘째 마당은 '주지 놀이'로 액풀이를 하는 마당이고 셋째마당은 백정이 나와 우낭을 파는 것을 보여주며 넷째 마당은 '할미'마당으로 할미광대가 어려운 인생살이를 <베틀가>에 맞추어 부르고 춤을 춘다. 다섯째 마당부터는 이탈놀이의 본격적으로 주제부분이 나타나는 마당으로 '파계승'마당은 대사 없이 진행되며 중이 부네의 오줌누는 모습을 보고 부네와 도망가는 내용이다. 마지막 놀이 마당인 '양반과 선비'마당은 하인인 초랭이가 양반과 선비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을 풍자한다. 광대들은 15일간의 합숙으로 행사를 끝내지만 양반광대와 각시광대가 남아 혼례마당과 신방마당을 치르는데 이는 17세 처녀신을 위로하기 위해 치르는 것으로 풍요의례의 의미도 포함되어있다. 놀이마당에 사용되는 악기는 농아기로 마당과 마당사이에 농악을 울림으로써 각 마당을 구분하였다. 이탈놀이의 가면은 주지(2), 각시,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 등 11개가 전하며 이 가면들은 의례용으로서 신성시되고 있다. 

 

조금 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ltah님의 답변"re: 탈춤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등장인물의 전원 또는 일부가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극(劇), <탈놀음>이라고도 한다. 가면은 원래, 죽은 사람의 영혼이나 자연계의 여러 가지 힘의 매개물로서의 역할을 지니고 있었으나 거기에 머무는 혼(魂)이나 힘이 그 가면을 쓴 인간에게 깃든다는 데서 다른 매개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면의 특징이 있다. 따라서 가면을 쓴 인물이 등장할 때 그 극은 신(神), 악령(惡靈), 사자(死者), 사물의 정(精) 등 일상생활을 초월한 다른 세계의 존재의 출현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으며, 주술(呪術)이나 종교의식과 분화되지 않았던 옛 형태의 연극일수록 가면을 많이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서양〕

 

서양에서는 BC 5세기를 정점으로 하는 고대 그리스극(劇)에서 처음으로 가면이 연극에 사용되었다. 그 이전에 이집트나 크레타섬에서도 가면을 사용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그러한 것들은 종교의식이나 제례(祭禮)의 일부여서, 독립된 가면극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리스 비극(悲劇)은 짐승의 가죽을 쓰고 사티로스를 연기한 사람들이,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를 찬양하기 위한 원무합창(圓舞合唱)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 초기에 신(神)을 표현한 가면은 가죽이나 헝겊에 초목의 즙이나 흙 따위를 칠하여 얼굴을 가장하였으나, 그리스 비극의 발전과 더불어 가면제작기술이 발달함으로써, 고대 그리스극에서는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연극양식이 정착하였다. 고대 로마도 그 전통을 계승하였으나 연극이 제의성(祭儀性)을 잃고 비극이 쇠퇴하면서 토속적이고 풍자를 주로 다루는 희극 <아테라나극(劇)>이 융성하였다. 중세유럽의 종교극과 민속극에도 가면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르네상스시대에 들어와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에서 완숙한 극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이 즉흥희극에서는 연인역할을 하는 남녀 일부를 제외한 주요 등장인물 대부분이 얼굴 전체 또는 상반부를 덮는 가면(두툼한 가죽으로 만들었거나 얇은 나무로 아로새긴 것)을 씀으로써, 늘 변하지 않는 역할과 그의 성격을 나타내었다. 이 가면극은 유럽 전지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연극이 주로 인간사회의 상극(相剋)이나 심리적 갈등을 묘사하게 된 근세부터, 리얼리즘이 예술의 주류가 된 근대에 이르러 그 전통도 상실하게 되었고, 까만 헝겊으로 만들어서 눈만을 감추는 가면이 궁정무용극(宮廷舞踊劇)이나 가장무도회(假裝舞蹈會)에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서, 연극이 일상성의 단순한 묘사를 벗어나 참된 연극성을 회복하고, 가면이 지니는 상징성과 표현양식이 연극의 중요한 요소로 기대되자 고든 크레이그·코포·오닐·브레히트·주네 등의 많은 전위적인 연극인에 의하여 가면의 중요성이 재인식되었으며, 최근에는 오히려 새로운 의미의 뛰어난 현대적 가면극이 상연되는 일이 많다.

 

 

〔동양〕

 

가면이 없어져 버린 서양연극에 비하여 동양은 가면극의 보고(寶庫)이다. 동양의 가면극은 무용적인 색채가 매우 강하여 흔히 가면무나 가면무극(假面舞劇)이라고 불린다. 이 가면무는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일본·인도·네팔·부탄·티베트·몽고·스리랑카·인도네시아 등지에 널리 다양하게 분포했는데, 형태적으로 보면 신화전설을 본떠서 신화예능(神話藝能) 영역에 머무르고 있는 것과 거기에서 연극의 형태로 발전하였거나 그 과정에 있는 것 등 2종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전자에는 인도의 초우, 네팔의 마하카리 파쿵, 티베트계(系)의 도무(跳舞), 인도네시아의 토펜이나 바론 등이, 후자에는 스리랑카의 코람, 한국의 가면극, 일본의 노[能(능)] 따위가 포함될 것이다. 물론, 양자 사이에는 형태적·유기적 교류가 있고, 양자 모두 원칙적으로는 여인금제(女人禁制)의 남성 중심의 가면극이다. 이밖에 부탄의 사원에서는 승려를 중심으로 하는 가면극, 그리고 캄보디아나 타이 등 동남아시아에서는 크메르계(系)의 가면무가 있다. 또한 다양한 가면을 가진 아프리카나 오세아니아에도 당연히 가면의 민속무용이 현존하지만, 종교적 제사 등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으며, 그러한 민속무용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가면극〕

 

한국의 가면극은 삼국시대 이래 중국에서 전래한 산악백희(散樂百戱) 등 지배계층이 주관했던 가면희(假面戱) 등이 토착적인 <탈굿> <탈놀이> 등과 섞이면서 형성되었는데, 이렇게 형성된 가면극은 서민 취향화되어 각 지방에 따라 독특한 스타일로 발전하였다. 한국 가면극의 연출형태는 음악 반주에 춤이 주(主)가 되고 노래가 따르는 가무적 부분과 대사가 따르는 연극적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반주곡조는 염불·타령·굿거리 등의 민속무용의 반주음악과 같다. 또한, 한국 가면극은 야외극으로 상연되어 왔으며, 상연시간은 일정하지 않고, 상연시기도 각 지방에 따라 달랐다. 현존하는 이들 가면극은 파계승, 몰락한 양반, 상민, 무당, 거사(居士), 하인들의 등장을 통하여 특권계급과 형식적 도덕에 대한 일종의 반항과 비판을 연출하는 민중극이다.

 

 

〔기원〕

 

가면극에 관한 사적(史的) 연구는 어느 장르의 경우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는데, 농경의식설(農耕儀式說)·기악설(伎樂說)·산대희설(山臺戱說) 등이 한국 가면극의 유력한 기원설이다. ① 농경의식설:고대(古代) 이래로 농사가 잘 되라고 농민들이 거행하던 농경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서낭굿 등의 부락굿에 잘 나타나며, 농악대의 잡색(雜色)놀이, 하회별신(河回別神)굿놀이, 강릉관노(江陵官奴) 탈놀이는 농민들의 농경행사였기 때문에 민중의 연극으로 자라났다는 설이다. ② 기악설:612년 백제(무왕 13) 미마지(味摩之)가 일본에 전했다는 기악이 오늘날의 양주별산대놀이나 봉산탈춤과 내용이 비슷하여, 기악이 가면극으로 전승되었다는 설이다. ③ 산대희설:산대희에서 산대극이 생겨났고, 그 전파로 가면극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다.

 

 

〔발달〕

 

한국의 가면극은 고구려의 무악, 백제의 기악(伎樂), 신라의 처용무와 오기(五伎) 등 삼국시대 이래의 산악백희와 고려의 산대잡희(山臺雜戱) 등 조선 전기의 각종 가면희가 조선시대 후기의 산대가면극(山臺假面劇)으로 점차 발전·정립되었다.

⑴ 삼국시대의 가면극:한국의 가면극은 9세기 말엽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 5수(首)에 나타나는 5기, 즉 월전(月顚)·대면(大面)·금환(金丸)·속독(束毒)·산예에서 가면을 사용한 흔적을 볼 수 있어 한국의 가면극으로는 최초의 기록임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신라시대에는 그밖에도 검무와 처용무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정확한 문헌과 유물은 없고, 다만 《동경잡기》에서 검무가 가면극이라는 시사를 얻을 수 있고, 처용무 역시 가면을 쓰고 춤을 추었다고 나타나, 가면을 사용했던 것만은 명백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오늘날 검무에 있어서는 가면을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후세에 와서 춤이 남성의 놀음에서 여성의 놀음으로 옮겨간 뒤부터 가면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처용무는 고려·조선을 거쳐 오늘날까지도 가면을 쓰고 춤추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신라 말기의 처용의 전설을 토대로 한 주술적 무용이라고 볼 수 있다.

⑵ 고려시대의 산대잡희:고려시대에는 나례(儺禮)와 산대잡희가 있었는데, 나례는 연중(年中)의 재앙과 병마의 근원인 악귀를 쫓아 내어 즐거운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음력 섣달 그믐날밤에 행하던 의식으로, 조선시대 인조 때까지 행하여졌고, 산대잡희는 조선시대에 계승되어 더욱 성행하였다.

⑶ 조선시대의 산대나례:고려시대의 나례와 산대잡희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인조 때 공의(公儀)로서 폐지될 때까지 행하여졌다.1634년(인조 12) 산대잡희 및 나례가 폐지되자, 이러한 놀음에 종사하던 연희자(演戱者)는 그들의 생계를 위해 재출발해야 했고, 이에 따라 단순한 가면놀음에서 하나의 연극으로 발전해 나가게 되어 산대잡희가 아닌 산대가면극으로서의 산대놀음이 연희되게 된 것이다. 공의가 폐지된 후에도 이들은 가끔 궁중에서 연희하였으며 국가에서 연 2 회 그들에게 계방(契房)의 도인(都印)을 주어, 이것을 가지고 나루터·시장·절 등지에서 돈과 곡물을 받아 생계를 꾸려 나갔다.

 

 

〔분포〕

 

산대가면극의 연희자들은 대다수가 성밖의 아현리에 살았기 때문에 <아현산대>라고 하였다. 지금부터 100년 전 <아현산대>가 지방흥행에 나갔을 때, 그곳 관아의 하층배들이 보고 본받아 배운 <양주산대>는 지금은 몇 사람이 그들의 계승자로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 산대가면극은 양주 이외의 여러 지방에 전파되어 다른 유형의 가면극을 형성하였다. 즉, 동해안 쪽으로 경상북도·강원도 지방 등지에 퍼져서 서낭신제[城隍神祭(성황신제)] 때에 연희하는 <서낭신제 가면극>, 황해도지방에 퍼쳐 있는 <해서 가면극>, 경상남도 해안지방의 <오광대(五廣大)> <야유(野遊)가면극> 등이 그것이다.

 

 

〔종류〕

 

처음 서울을 비롯하여 시작된 산대놀이는 각 지방의 독특한 스타일로 발전하여 경기지방의 <양주별산대놀이>, 황해도지방의 <봉산·강령·해주 탈춤>, 경상남도지방의 <동래·수영의 야유>, 유랑하며 연희하던 <남사당의 덧뵈기>, 함경남도지방의 <북청사자놀음>, 경상북도지방의 <하회별신굿놀이>, 강원도지방의 <강릉관노탈놀이>, 그 밖에 <제주입춘굿>, <양주소놀이굿> 등으로 갈라졌다.

⑴ 북청사자놀음: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 전지역에서 행하여졌으며, 청해면 토성리의 사자놀음은 특히 유명하다. 북청사자놀음은 음력 정월 14일 밤, 달이 뜬 뒤부터 시작되어 15일 새벽까지 논 다음 해산하고, 16일 이후는 초청하는 유지가(有志家)를 돌며 논다. 북청사자놀음은 애원성·마당놀이·사자춤의 3부로 이루어져 있고, 사자춤이 위주가 되며, 가면극으로서는 지나치게 간단하다고 볼 수 있다.

⑵ 하회별신굿놀이:부락제의 기본 유형은 남성 본위로 유교풍의 축문을 읽는 동제(洞祭)와 여성 중심의 무당이 주재하는 도당(都堂)굿, 축문 없이 제주(祭主)가 정성을 드리는 산제(山祭)가 있다. 이 가운데 현재까지 전하는 대표적인 것은 경상북도 안동시(安東市) 풍천면(豊川面) 하회리(河回里)의 동제와 별신굿놀이이다. 하회별신굿은 10년에 1번씩, 또는 임시로 거행되는데 음력 12월말부터 그 준비를 시작한다. 별신굿놀이의 1과장(科場;마당)은 <주지놀음>으로 벽사를 위한 의식무(儀式舞)로서의 사자춤이다. 2과장은 서막적인 과정으로 주지와 삼석놀음이며, 3과장은 파계승놀이로 본격적인 놀이가 시작되는데 4과장 양반·선비 놀이, 5과장 살림살이 과장, 6과장 살생 과장, 7과장 환자(還子)놀이, 8과장 혼례 과장, 9과장 신방(新房) 과장으로 이어진다.

⑶ 산대놀이:양주·송파 산대놀이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것은 <별산대(別山臺)>라 부른다. 양주의 별산대놀이는 경기도지방에 남아 있는 유일한 가면극으로, 음악 반주에 춤이 주가 되며, 덕담과 재담이라 불리는 사설과 노래가 곁들여진다. 산대놀이 춤은 형식미를 갖추고 있고, 춤사위는 어느 탈춤보다 자세하다.

⑷ 봉산탈춤:황해도에 분포되어 있는 가면극은 모두 탈춤이라 부르고, 그 중 규모·내용면에서 손꼽을 만한 것은 봉산의 탈춤이며, 황주·서흥·평산 등지의 탈춤도 그 규모가 상당히 성대하였다. 이 지역의 탈춤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의 주요 읍들이 탈춤을 뒷바라지할 만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고, 지역적으로 조선시대 영사행사(迎使行事)에 자주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황해도지방의 탈춤은 봉산탈춤과 해주탈춤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봉산탈춤은 춤이 주가 되고 몸짓·동작·재담·노래가 따르는 가면무극으로 가무적 부분과 연극적 부분으로 구성된다. 봉산탈춤은 7과장으로 구성되며, 목중·노장·양반 및 미얄의 독립된 4개의 놀이에 사당춤·사자춤·원숭이 놀이가 곁들여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⑸ 강릉관노탈놀이:강원도 강릉에서 지내는 놀이로, 가면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내용이 빈약하여 엄격히 가면극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무언극으로 진행되며, 4과장으로 구성된다.

⑹ 오광대:경상남도 내륙과 해안선 일대를 망라하여 분포된 가면극으로, 낙동강변 초계(草溪) 밤마리[東旨(동지)]에서 발생했다고 전해진다. 초계 밤마리 오광대를 비롯하여 통영·고성 오광대, 진주·마산 오광대가 전해지고 있고, 수영·동래·부산진 등지에서는 초계 밤마리 오광대를 야유(野遊)라 부른다. 오광대는 춤이 주가 되고 재담과 노래와 동작이 연희되는 탈춤의 일종이며, 양반에 대한 풍자가 한국 가면극 중 가장 심하다. 연희 시기도 처음에는 정월 보름을 중심으로 행하여졌으나, 나중에는 3월과 4월초, 9월의 단풍놀이철로 바뀌어 오락적 성격을 띠어 갔다.

⑺ 동래·수영의 야유:초계 밤마리 오광대에 근원을 둔 것으로 들놀음을 의미하여 야유라 부르며, 지신밟기 등과 관련이 있다.

⑻ 남사당덧뵈기:조선시대 후기 이래 1920년경까지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서민들을 상대로 연희한 유랑예인(流浪藝人)의 무리를 남사당이라고 하는데, 이들의 주요 특기는 풍물[農樂(농악)]·버나(대접돌리기)·살판(땅재주)·어름(줄타기)·덧뵈기[假面舞劇(가면무극)]·덜미(꼭두각시놀음) 등으로 가무백희의 전통을 전승한 것들이다. 남사당덧뵈기는 다른 산대놀이에 비해 날카로운 풍자를 보여 주며, 짜임새가 뛰어나 춤보다 재담·동작이 주를 이루고, 과장은 4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마을의 넓은 뜰이나 마당에서 연희되며, 직설적 재담은 재미에만 그치지 않고 사회극으로서의 일면도 보여 준다.

 

 

〔주제〕

 

한국 가면극의 기본사상은 현실주의와 비판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기본 내용은 양반에 대한 반항, 남녀의 갈등, 파계승에 대한 풍자, 벽사의 의식무, 서민생활의 실상을 다루고 있고, 모든 과장이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각 과장이 독립되어 있어 하나의 주제로 연결되는 연속성이 결여되어 있다. 각 지방의 가면극마다 주제성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파계승과 몰락한 양반, 무당, 사당패, 거사와 기타 서민들의 등장을 통하여 권선징악의 테두리에서 현실폭로와 비판 등을 풍자·웃음으로써 보여주고 있다.

 

dudthd97님의 답변"re: 탈춤에 대해서...... 점수 겁니다!!! ㅋㅋㅋ"

1. 탈의 종류와 특징

 

탈은 크게 신앙가면과 예능가면으로 나눌 수 있다. 신앙가면이란 일정한 장소에 가면을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거나, 얼굴에 쓰고 악귀를 쫓아내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예능가면이란 무용할 때나 연극할 때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신앙가면에는 일정한 장소에 모시고 고사만을 지내는 신성가면과 악귀를 쫓기 위해 얼굴에 쓰는 구나(驅儺)가면이 있다. 이 신성가면에는 광대시가면, 창귀시가면, 소미시가면, 놋도리가면, 장군가면이 있고, 구나가면에는 방상시가면과 사자가면이 있다. 예능가면에는 무용가면, 연극가면이 있다. 이 무용가면에는 처용가면이 있고, 연극가면에는 산대가면극, 해서가면극, 야류, 오광대가면극, 서낭신제가면극 등에 쓰이는 탈이 있다.

탈은 대부분 움직일 수 없으나, 방상시가면의 눈알과 봉산사자가면의 눈알, 북청사자가면의 입, 산대가면극의 눈끔적이가면의 양쪽 눈, 마산오광대가면극의 턱까불가면의 턱을 비롯하여 동래야류의 양반탈의 턱, 수영야류의 수양반(首兩班)탈의 턱, 하회가면극의 선비, 양반, 중, 백정 탈의 턱, 그리고 해서가면극의 황주양반탈의 턱은 움직이도록 되어 있어 표정 변화가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 탈은 한국적인 표정과 용모가 잘 나타나있을 뿐만 아니라 그 역(役)에 따른 인물의 개성도 잘 표현되어 있는데, 특히 하회가면의 선비, 양반, 각시, , 백정 등에 나타난 조각수법은 우리나라 나무 탈 중 걸작에 속한다.

거의 모든 탈에는 탈보가 붙어 있다. 가면은 대부분 사람 얼굴의 모양이지만 신의 형상을 한 것도 있다. 방상시가면, 처용가면,오방신장(五方神將) 가면, 산대가면극에 있어서 연잎(蓮葉) 가면과 눈끔적이 탈이 그것이다. 이 밖에도 영노와 같은 상상속의 동물탈과 실제 동물의 탈도 있다. 즉, 산대가면극, 해서가면극의 원숭이, 오광대가면극의 사자, 범, 담비 등과 같은 탈이 그것이다. 그리고 양반가면은 언청이, 코비뚤이, 사팔뜨기 등 불구자인 것이 많은데, 이는 양반에 대한 반감이 탈에 반영된 것이다.

 

bill0925님의 답변" 아,네^3^"

1.탈춤의 정의

탈춤이란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의 연기자가 탈로 얼굴이나 머리 전체를 가리고 본래의 얼굴과 다른 인물이나 동물 또는 초자연적 존재 등으로 분장하여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종합 예술적 연극이라고 할 수 있으며 탈을 쓰고 추는 춤이란 뜻에서 춤에 큰 비중을 둔 명칭이다.

 

2.탈춤의 종류

1. 서울을 중심으로한 중부지방의 탈춤

: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2. 황해도를 중심으로 한 북부지방의 탈춤

: 강령탈춤, 봉산탈춤, 은율탈춤

3.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남부지방의 탈춤

: 통영오광대놀이, 고성오광대 놀이, 수영들놀음, 동래들놀음

4. 이 밖의 탈춤

: 안동 하외별신굿, 강릉 관노놀음

위의 12가지 탈춤은 주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저는 봉산탈춤의 내용을 써드리겠습니다.

 

3.봉산탈춤의 내용

제1마당 사상좌춤 : 상좌 넷이 나와 춤을 추어 연희자와 관객의 안녕과 복을 빌며 사방신에게 절을 올린다.
제2마당 팔목중춤 : 팔목중은 음주가무를 즐기며, 풍유 소리에 맞추어 한 사람씩 춤기량을 겨룬다.
제3마당 사당춤 : 사당과 거사가 나와 서도소리를 부른다.
제4마당 노장춤 : 소무가 불도를 닦고 있던 노장스님을 꾀어 파계시킨다.
제5마당 : 부처님이 팔목중과 노장의 파계를 벌하려고 사자를 보낸다. 이에 목중이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빈다. 사자는 이를 용서하고 춤을 춘다.
봉산탈은 입체적이며, 의상이 화려하고, 춤사위가 활기차고 씩씩하여 대륙적인 맛이있다. 춤사위는 팔목춤의 외사위, 곱(겹)사위, 양사위, 민사위, 취발이의 깨끼춤(깨끼리춤), 말뚝이의 두어춤(양반들을 돼지우리속에 몰아 넣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미얄궁둥이춤, 까치걸음, 팔목중의 못동춤 등이 있다.

4.탈춤의 대상

당연히 서민들이 양반을 비꼬는 내용이 나온다. 또 양반사회의

비판이던지 그런 양반에 대해서 비판을 한다.

 

5.탈춤의 뜻

탈(가면)을 쓰고 추는 춤에서 "탈춤" 이란 이름이 나왔다고 합니다.

 

   "탈춤"이란 해서지방의 가면극을 이야기 하며

 

   본래의 이름은 "가면극" 이라고 해야 옳지만 70년대 활발히 일어난

 

   대학가의 탈춤부흥운동과 함께 일반적 통칭이 되었기에

 

   탈춤이라 부른다고 하네요.

 

   선자들의 탈춤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천체 기원설, 처용가무설,

 

   기악설, 풍물굿에 등장하는 잡색놀이설, 산대도감설등 다양하지만 그 중

 

   천체 기원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추정된다고 하네요.

 

   인간이 지구상에 생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탈은 등장하기 시작하죠.

 

   삼라만상 나름으로 가각의 신의 지배를 받는다고 믿었던 정령신앙을 바탕으로

 

   신을 위하며 달래어서 인간에게 복을 바라고 신을 물리치기 위한

 

   주술적 방법으로 탈이 등장하였고, 여기에 춤이 보태어져서

 

   주술적 의미를 더했다고 하네요.

 

학교에 가서 칭찬받길...ㅋ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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