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과 지리산에 대하여

백두산과 지리산에 대하여

작성일 2008.09.04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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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3학년인데요

백두산에 대해 조사를 했어요.

그래서 백두산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게 있어요.

백두산에 대해서 알려주시구요

그리고 지리산에도 대해서 알려주시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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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頭大幹의 시발, 압록, 두만, 송화의 발원, 民族의 靈山 


           백두산(白頭山)



● 개 요                                                                        

백두산은 대대로 우리민족이 정신적 근거로 삼았던 민족의 영산이다. 단군조선을 비롯하여 부여, 고구려, 발해가 백두산을 배경으로 삼아 일어났다. 또한 우리민족 외에도 금(金), 청(淸)등 여진족이 세운 나라도 이 백두산을 배경으로 일어난 나라들이다.


백두산은 18개의 산봉우리가 기라성(綺羅星)처럼 둘러섰고 그 가운데 최고 수심 312.7m, 평균 수심이 이백여미터나 되며 그 둘레가 11.3Km나되는 화산호를 안고 있다.


이 화산호는 사방으로 꼭 막혀 갇혀있는데 북쪽 한곳 해발 2,200m에 달문(達門)을 조금 열고 물을 흘려보내 지근 거리에 69m 높이의 장엄한 장백폭포를 만들고, 노천온천을 솟게 한다.


이 신비로운 형상은 그 먼 옛날 사람들에게도 무척이나 신기했던지 그 이름을 '천지(天池)'라 했다. '하늘이 만든 못'이라는 뜻이다. 천지를 달문담(達門潭)이라고도 불렀고, 중국에서는 용왕담(龍王潭)이라고도 불렀다.


백두산은 우리 한반도 산경(山經)의 시발이다. 백두산은 백두대간(白頭大幹), 장백정간(長白正幹), 열세개의 정맥(正脈) 그리고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맥(岐脈)을 통하여 한반도 방방곡곡에 백두정기(白頭精氣)를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백두대간의 맨 끝, 지리산을 일명 두류산(頭流山: 백두산에서 흘러온 산)이라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얻은 이름이다.


백두산 천지와 영봉들



백두산 영봉들의 배치 개념도와 백두산 영봉 일람표


 

● 지세소고(地勢小考)                                                

백두산은 압록, 두만, 송화 세 강의 발원이다. 백두산 천지는 이기적으로 백두산에 내린 물을 가둬 놓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달문을 통해 흘려 보낸 물이 송화강이 되는 외에도 가볍고 구멍 투성이의 화산석을 통해 사방팔방으로 스며 맑은 물을 더 맑게 걸러 바깥 쪽 군데군데에서 용출시켜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의 본류 또는 지류가 된다.


백두산 가는 길의 휴게소에서 구한 길림성지도를 훑어보더라도 송화강쪽에 다섯 개의 백하(白河), 세 개의 송강하(松江河), 조자하(槽子河), 제자하(梯子河), 만강(漫江), 금강(錦江)등 이름 있는 하천만 해도 열 두개나 된다. 또 중국 쪽에서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은 일도도하(一道淘河)로부터 십구도도하(十九道淘河)까지 열아홉 개나 되니 가히 천지가 베푸는 그 폭을 짐작할 수 있다.


백두산은 남쪽 한반도와 북쪽 만주지방에 전혀 다른 형상의 지세를 꾸민다. 남악북야(南岳北野)다.


북쪽은 천지를 둘러싼 영봉들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산봉우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동측에 2185m봉, 2058m봉과 서측에 2305m봉, 2222m봉이 지형도에 표기되어 있기는 하지만 천문봉 꼭대기에 서서 북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산이라 할만한 봉우리는 보이지 않고 한없이 내려가는 경사면에 천지가 흘려보낸 물길과 가히 수해(樹海)라 할 수 있는 밀림이 펼쳐질 뿐이다. 몇 리나 내려가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 끝자락에서부터는 또 끝없는 벌판과 구릉이 펼쳐져 산다운 산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에 비하여 백두산 남쪽은 그야말로 산. 산. 산이다. 백두산 장군봉(2,750m)을 떠나 대연지봉(2,360m)과 간백산(2,164m)을 거쳐 소백산(2174m)까지의 백두대간에만 해도 해발 2,000m가 넘는 거봉들이 열 한 개나 줄을 서고, 대연지봉에서 동쪽으로 벋은 소위 장백산맥에도 2,000m가 넘는 봉우리가 세 개나 있으며, 제비봉(2,572m)에서 압록강 서편을 따라 남하한 무명의 산줄기는 압록강 지류에 의하여 단명하지만 여기에도 2,000m 이상 봉우리가 네 개나 있다. 그 외에도 삼기봉(2,740m)동쪽으로 벋은 줄기에 두 개. 백두대간이 대연지봉에 이르기 전 2,383m에서 동쪽으로 벋은 줄기에 두 개 등 백두산 남쪽 지근거리에 2,000m이상의 거봉들이 무려 스물 두개나 기라성처럼 늘어서 있다.


백두산이 꾸며 놓은 주변의 지세는 남악북야(南岳北野)란 말이 아주 적절한 것 같다.


 ● 산명소고(山名小考)                                           


백두산은 산 이름도 무려 여덟 개나 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아방강역고(我邦彊域考)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백두산은 불함(不咸), 개마(蓋馬), 도태(徒太), 백산(白山), 태백(太白), 장백(長白), 백두(白頭), 가이민상견(歌爾民商堅)등으로 불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 남북조시대에 도태, 태백이라 불렀고, 금(金)대에 백산, 장백이라 했고, 고려 광종 10년에 처음으로 백두산이라 불렀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우리는 '백두산(白頭山)'이라 부르고, 중국 쪽에서는 '장백산(長白山)'이라 부른다.


백두산의 이름을 '불함(不咸)'이라 한 것은 '속마음을 감추고 함부로 내 보이지 않는 산'이란 뜻이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최근 중국의 1인자 강택민 주석이 두 번이나 찾았으나 그 얼굴을 들어내지 않았다는 이야기나 어느 무명시인이 여섯 번을 찾았어도 한 번도 그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그럴 줄 알았다'는 푸념 어린 시를 남겼다는 이야기를 듣는 대목에서 이 이름을 다시금 생각케 한다.


'백산(白山)'은 '밝은산' 즉 '밝산'을 한자어로 표기하면서 생긴 이름인데 '높고 큰 밝산'이란 뜻으로 '태백(太白)' 또는 '장백(長白)'이라 부른 것이다. 한자 '長'자는 어른, 長者를 말한다. '개마(蓋馬)'는 '까마득하게 높은 산' 뜻의 한자 표기이며, '도태(徒太)'는 '무리 중에서 우뚝 뛰어난 큰 산' 뜻이다.


'백두(白頭)'는 '흰머리'란 뜻인데 이번에 서백두에 올라보고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여러 개의 봉우리와 산등성이에 적설이 없는 여름에도 마치 눈이 내린 듯 하얗게 덮인 화산재가 마치 하얗게 쉰 흰머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가이민상견(歌爾民商堅)'은 조선 영조 때 학자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지행록(地行錄)에는 '청나라 사람들의 기록에는 이 산을 「장백산은 곧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我隣)」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적고, 역자(譯者)의 해설에 「가이민상견아린이라 함은 여진족의 주어인데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그곳 백성이나 장사꾼이 노래하는 굳센 우리 이웃 산'이란 뜻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정확한 뜻은 여진족의 말을 연구해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여진족 사람들도 백두산을 숭배하고 찬양하는 이름인 것 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 수목소고(樹木小考)--- 자작나무, 전나무, 잎갈나무, 마가목, 사스레나무, 소나무,


만병초 

백두산 길목의 마지막 마을 이도백하(二道白河)부터는 장백폭포 쪽이나 서백두산 쪽을 막론하고 길이 가르는 틈새만 있을 뿐 양 옆은 하늘을 찌르는 쭉쭉 뻗은 원시림의 나무들이 시야를 가린다.


백두산 원시림에 들어서는가 싶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구동성으로 영화 ‘닥터지바고’를 말하게 한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이 깔리고 여인의 하얀 종아리처럼 미끈하게 벋은 자작나무 숲길에 두 연인을 실은 마차가 달리는 풍경! 숲 속의 귀족, 숲속의 가인(佳人), 나무의 여왕 등 온갖 찬사가 붙은 자작나무다.


자작나무가 집단 군무(群舞)로서 시선을 끈다면 독불장군처럼 거구(巨軀)로서 으시대는 나무가 젓나무다. 고개를 쳐들어도 차창으로는 그 끝을 볼 수가 없게 높다. 젓나무는 촘촘한 상록 침엽의 가지 위에 하얀 솜을 얹은 크리스마스 트리 처럼 한 품으로 겨울에 더 뽐내는 나무다.


"여기는 젓나무가 한데 몰려 있다" 싶어서 눈을 부비고 자세히 보면 그것은 전나무가 아니다. 우리 시골에서 많이 보던 낯익은 낙엽송(일본잎갈나무)을 생각케 하는 우리 토종의 잎갈나무(또는 이깔나무)다


키 큰 자작나무와 젓나무, 잎갈나무 덩치들 속에서 숨도 크게 못 쉬는 듯 쪼그리고 앉은 작은 키의 마가목, 신통하게도 작고 새빨간 열매 송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해발 고도가 점점 높아져 수목한계선(해발1800-2000m)에 가까워지면서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자작나무가 더 극성을 부리는 듯 온 산을 하얗게 덮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아래쪽에서 보아온 미끈한 자작나무와는 다른 느낌이 든다. 키도 작거니와 줄기와 가지가 쫌스럽게 오그라지고 구불구불하다. 기온이 낮은 곳이니까 제대로 크지 못했거니 하고 그냥 넘어가지만 사실은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사스레나무다.


우리나라 산이면 으레 주종을 이루는 소나무가 백두산에서는 귀한 편이지만 이따금씩 보이는 소나무는 그 줄기가 붉은 색을 띄고 미끈하게 하늘로 치솟은 미인송(美人松), 적송(赤松)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 민족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소나무다. 연길로 돌아오는 길가에 선 소나무가 ‘미인송’이란 칭호를 얻게 된 전설을 가이드가 들려주었고, 용정 비암산의 일송정 푸른 솔은 없었지만 함께 불렀던 ‘선구자’ 노래 가사에도 소나무가 나온다.


서백두산을 오르는 중에 나무인지 풀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렵게 땅에 딱 달라붙은 활엽 관목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이것이 다른 데서는 보기 힘든 상록의 만병초라는 나무다. 그것도 다른 곳에서는 보기가 더욱 힘든 꽃이 노란 노랑만병초다.


● 역사소고(歷史小考) -백두산정계비와 한-중 국경이 정해진 경위-


숙종 38년(서기 1712년)에 청태조가 오라(烏喇: 현 길림성지역)총관 목극등(穆克登)을 조선에 보내서 백두산 주변의 국경을 분명히 하자고 하여 접반사 박권(朴權), 군관 이의복(李義復), 역관 김응헌(金應 )을 함께 보내어 백두산에 올라 물길을 살펴보고 동남방 약 4Km, 해발 2,200m지점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는데 이것이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다.


이 비문에 이르기를,


'대청(大淸) 오라총관 목극등은 변방의 경계를 조사하라는 천자의 명을 받들어 여기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요, 동쪽은 토문강이다. 그러므로 분수령에 돌을 새겨 기록하노라. 강희51년 5월 15일. 필 첩식 소이창, 통관 이가, 조선군관 이의복, 조태상. 차사관 허량, 박도상. 통관 김응헌, 김경문' 이라 새겼다.


이 비문에는 조선측의 접반사(接伴使) 박권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데 박권은 고령을 핑계로 백두산에 오르지 않고 군관과 역관만 딸려 보냈기 때문이라니 이 중대한 나라 일을 이렇게 소홀히 취급했던 것이다.


후대에도 이 비문의 핵심인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서위압록 동위토문 고어분수령상 륵석위기)' 중에서 '東爲土門(동위토문)'은 토문강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되어 왔다. 즉 토문강(土門江)을 조선측은 송화강의 원류인 오도백하(五道白河)라 해석 했고, 청나라측은 두만강(豆滿江)이라고 해석했다.


고종17년(서기1880) 청나라는 돌연 '토문(土門)'은 '두만강(豆滿江)을 뜻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였고, 융희3년(서기1909년)에 만주 침략의 야욕을 품은 일본이 북경에서 청과 회담하고 두만강이 한-청국경이라고 임의로 협정을 체결함으로서 두만강 북쪽 간도 전역이 만주로 넘어가는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그 후 만주사변 때 이 비는 일본에 의하여 슬그머니 제거되었다 한다.


 ▶ 2005년 8월 26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토문강 =/= 두만강' 中공식문서 발견'


64년 中.朝 국경의정서에 '별개로 구분'

  '토문강(土門江)'이 '두만강'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별도의 강이라고 기록한 중국 정부의 공식 문서가 처음 발견되었다. 1712년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에서 조선과 청의 국경으로 정한 '토문강'에 대해 중국은 '두만강과 같은 강'이라고 줄곧 주장해 왔다.


  박선영(朴宣 삼수변에令) 포항공대 교수는 25일 "1964년 북한과 중국 사이에 맺어진 '중조(中朝) 변계의정서'를 이번에 찾았다"고 밝혔다. 1962년 10월 12일 김일성-저우언라이(周恩來)가 서명한 '조-중 변계조약'에 따라 국경을 확정한 이 비밀문서에는 중국측 천이(陳毅)와 북한측 박성철(朴成哲)의 이름이 들어있다.


  의정서는 당시 새로 설정된 압록강에서 두반강까지의 북한-중국 국경을 설명하며 ▲제9호와 10호 국경비를 연결하는 국경선 사이로 흑석구(黑石溝)가 지나가고 ▲그 위치는 9호비 동쪽 1229m 지점이며 ▲'흑석구'는 곧 '토문강'이라 명시하고 있다.


  본지 확인결과 흑석구는 현재 중국측 지도에 묵석구(墨石溝)로 표기돼 있으며, 백두산 부근에서 시작돼 북한-중국 국경을 지나 송화강의 지류인 오도백하(五道白河)와 만난다. 유석재기자


  ▶ 토문江은 두만강 아니다

  2005년 8월 26일자 동아 일보에 게재된 "토문江은 두만강 아니다. 60년대 中문서 확인. 포항공대 박영선교수---'간도는 중국땅' 억지 드러나"(추가)


  백두산정계비에 조선과 청의 경계선으로 언급된 토문(土門)강이 그간 중국이 주장해 온 대로 두만강이 아니라 쑹화(松花)강 지류임을 중국 정부가 인정한 1960년대 공식 외교 문서가 확인됐다.


  포항공대 박선영(朴宣怜-중국 근현대사) 교수는 "북한과 중국이 1964년 3월 공동으로 작성한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 의정서 사본에서 토문강과 두반강이 분명히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25일 밝혔다.


  조중변계조약은 1962년 북한과 중국이 비밀리에 체결한 것으로 알려진 국경조약. 이 조약엔 토문강 내용이 들어 있지 않았으나 2년 뒤인 1964년 조약의 내용을 자세히 밝히는 의정서를 작성하면서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등의 국경에 관한 내용을 추가했다.


  박교수는 "의정서에 기록된 국경 팻말의 위치를 살펴보면 이 팻말들이 헤이스허(黑石河)를 지나가는 것으로 되어 있고 이 지명 옆에 토문강이라고 병기되어 있는데 이것은 헤이스허가 바로 토문강임을 인정한 것"이라면서 "지도상으로 보면 헤이스허는 쑹화강의 지류임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1712년(숙종 38년) 조선과 청이 세운 백두산정계비에는 '서쪽으로 압록, 동쪽으로 토문을 경계로 삼는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토문강이 쑹화강 지류라면 과거 간도로 불리던 만주지역은 물론 연해주 일부에 대해 한국의 영토로 귀속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박교수는 "중국 스스로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르다는 것을 외교문서에서 인정했다는 사실은 300년 가까이 지속되어 온 간도분쟁을 푸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이광표 기자


  ▶ 백두산 정계비에 적힌 그 강… 토문강 찾았다’

  2005년 2월 10일 조선일보 발행 月刊山 백두산특별취재팀의‘백두산 정계비에 적힌 그 강… 토문강 찾았다’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조선·청의 국경… 두만강과 별개의 강으로 드러나---', '백두산 부근 북 영토서 시작, 중 송화강 본류로 흘러---', '간도지역 영유권은 한반도에" 우리측 주장 확인---', 등의 흥분된 부제가 붙어있다. 그 내용을 전재한다.


  간도(間島)의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국경 분쟁을 일으켰던 토문강(土門江)의 실체를 본지 취재팀이 확인했다. 토문강은 현재도 백두산 천지 부근 북한 땅에서 발원해 동북쪽으로 흐르며, 천지로부터 동쪽으로 18㎞ 떨어진 ‘17호 국경비’에서 중국·북한 국경과 만난 뒤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송화강(松花江)과 합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토문강이 중국측의 주장처럼 현재의 두만강이 아니라, 별도로 존재하는 강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토문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해 동북쪽으로 흐르는 토문강은 오도백하(五道白河)의 지류다. 나중에 송화강·흑룡강과 합류한다. 토문강과 두만강은 서로 다른 강이다.


                               토문강의 위치 요도



토문강이 두만강과 별도로 실재하는 강이라면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 설정에 대해 ‘동쪽으로 토문을 경계로 한다’는 1712년(숙종 38년) 백두산 정계비의 문구는 그 의미를 다시 따져봐야 한다. 현재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는 토문강 동쪽 동간도(東間島) 지역의 영유권은 한반도 쪽에 있다는 우리의 전통적 주장이 재확인 되기 때문이다. 1909년 일제가 조선을 대신해서 청나라와 체결해 간도 땅을 넘겨준 ‘간도협약’이 국제법상 무효라는 주장도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의하면,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천지 동남쪽의 분수령은 토문강의 강원(江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토문강의 흐름도 일정하지 않았다. 청나라측은 국경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토퇴·석퇴를 쌓을 것을 조선측에 주문했다. 바로 이 토퇴·석퇴가 이어져 있던 강이 바로 토문강이었다. 1885년과 1887년 조선과 청의 국경회담 결과 양측이 작성한 지도에서 토퇴·석퇴가 있었던 강은 현재의 중국 지도에는 ‘오도백하(五道白河)’로 표시돼 있다. 간도협약 직후인 1909년 일제 통감부가 작성한 지도 역시 오도백하를 ‘토문강’으로 명기하고 있다.


  육락현(陸洛現) 간도되찾기운동본부 대표는 “많은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토퇴·석퇴가 있는 토문강 발원지는 현재 북한 영토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토문강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어떤 지점에서 땅 밑으로 복류하고 다시 땅 위로 흘러 북쪽으로 방향을 바꾼다’는 기록과 들어맞는 것은 ‘17호 국경비’ 옆의 하천이다. 신형식(申瀅植) 간도학회 회장은 “토문강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바로 그 하천”이라고 말했다.


▶ 백두산 정계비와 토문강(2006.9.9. 조선일보 이덕일 舍廊)


  청나라 강희제(康熙帝)는 1709년 프랑스 선교사 레지 등에게 만주를 비롯해 전 중국 땅을 실측케 했다.

  이 때 측정 결과가 42장으로 구성된 당빌 신부의 '새 중국 지도'인데, 여기서 조-청(朝-淸) 국경은 압록-두만강 북쪽 수 백리로 표시된다.


  강희제가 1712년 오랄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을 보낸 것은 이 때의 측량 결과대로 조-청 국경을 확정하라는 뜻이었다.

  조선은 우참찬 박권(朴權)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李善溥)를 보냈다. 둘은 백두산을 90리쯤 오르다가 목극등이 나이가 많고 길이 험하니 내려가라고 말하자 (박권이) "저와 관찰사가 뒤처질 수 없다는 뜻으로 재삼 굳게 청하였으나 끝내 기꺼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숙종실록' 38년 5월 15일) 라며 내려갔다.


  그래서 역관 김지남(金指남) 경문(慶門) 부자가 대신 따라갔다. 이들 부자가 편찬한 '통문관지(通文館志)'는 "백두산 경계를 정할 때에 공의 부자가 산꼭대기에 올라 손으로 가리켜 구획했는데, 웅대함이 밝고 곧았으므로 목극등이 다투지 못하고 공의 말대로 따랐다" 라고 전한다.


  이 때 세운 백두산 정계비의 '동쪽은 토문강[東爲土門]' 에서 토문은 송화강(松花江) 지류로서, 이에 따르면 현재의 화룡(和龍), 안도(安圖), 연길(延吉)과 그 동쪽은 조선 영토이다.


  한편 중국에서는 두만강의 중국식 표기인 도문강(圖們江)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청나라 가경(嘉慶) 25년(1820)의 상황을 그린 중국 사회과학원의 '중국 역사지도 청(淸) 시기' 편은 송화강 서쪽 휘발하(揮發河)의 지류를 도문하(圖們河)로 표기했다.

  이에 따르면 통화(通化), 환인(桓仁), 집안(集安)까지도 조선령이라고 주장해야 할 판이다.


  최근 중국 국지전략연구기구의 '중국-조선 국경선 분쟁의 발단' 이란 논문은 변경 지식이 부족한 무관(武官) 출신 목극등이 조선 관원에 의지하여 국경선을 잘못 그었다고 주장했다.


  목극등은 레지의 측정결과보다 청에 유리하게 하기 위해 박권을 따라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또한 이 논문은 1992년 (한-중)수교 당시 한국이 백두산 천지와 연변 지구의 귀속문제를 제기했다고 전한다. 1992년 외교부가 김지남 부자라면, 중국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지금의 (한국)외교부는 상국(上國)의 한마디에 벌벌 떨던 박권 같다.


 ● 전설(傳說)                                            


  ▶ 백두산 와호봉(臥虎峰, 2654m)에 얽힌 전설

  한국의 야담과 전설시리즈 2편 김영진 엮음 ‘조선의 암행어사’에 ‘와호봉(臥虎峰)이 된 호랑이’ 라는 전설이 들어있다. 전문을 옮긴다. 와호봉은 백두산 천지 서편 북한과 중국이 설정한 제5호 국경 정계표석에서 남쪽으로 두 번째 봉우리이다.


백두산 와호봉(臥虎峰)과 현 한-중 국경 제5호정계표석



백두산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열 여덟 개 봉우리들 중의 하나인 와호봉(臥虎峰)은 천지의 서남쪽에 솟아있는 해발 2500여 미터가 되는 험한 산봉우리이다. 「누어있는 호랑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봉우리는 그 모양이 정말로 호랑이가 누워 뭔가를 살피는 것처럼 생겼다고 한다.


  옛날, 와호봉 기슭에 자리잡은 어느 마을에서 연희라는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 봄날, 어머니와 둘이서 나물을 캐러 산에 갔던 연희는 광주리에 가득하게 나물을 채우고는 이마에 배어난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잠시 쉬고 있었다. 연희의 눈 앞에는 노란 꽃이 한아름 피어 있었다.

  “엄마, 저 꽃 좀 봐요. 너무나 고와요!”

  연희가 꽃을 꺾으려고 가까이 가 보았더니 빨간 꽃과 하얀 꽃들도 여기저기에 피어 있었다. 연희가 꽃들 사이를 누비며 이 꽃 저 꽃을 꺾고 있는데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 여기에 웬 호랑이 새끼가 있지?”

  검은 줄이 쳐진 노란 새끼호랑이 한 마리가 연희를 올려다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연희가 호랑이 새끼를 안고 가자 어머니가 놀라며 말했다.

  “아니, 얘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그걸 가지고 왔니?”

  “왜요? 엄마”

  “새끼를 가져가면 어미 호랑이가 찾아와서 해코지를 한단다. 어서 원래 있었던 데다 갖다 놓아라”

  “하지만 이걸 좀 봐요. 젖을 먹지 못해서 빼빼 말랐어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너무 불쌍해요”

  “정말 그러네. 어미가 사냥꾼에게 잡혔나 보구나”

  “엄마, 집에 가져다가 길러요”

  두 모녀는 새끼 호랑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어미의 젖 대신 콩물을 떠 먹이면서 정성스럽게 보살폈다. 연희는 잠을 잘 때도 곁에서 함께 자게 할 정도로 새끼호랑이를 귀여워 했다. 「호돌이」라고 이름도 지어 주었다. 연희가 “호돌아!-” 하고 부르면 얼른 알아듣고 달려오고는 했다.


  작은 새끼 호랑이었던 호돌이가 제법 크게 자랐을 때, 연희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집에는 연희와 호돌이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마을의 부자가 불쑥 연희네 집에 찾아왔다. 그는,

  “네 어머니가 살았을 때 내게 진 빚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아무래도 네가 갚을 수 없을 것 같으니 그 대신 우리 집에 와서 잔심부름이라도 해야겠다” 라고 말하고 휑하니 가버렸다.

  “호돌아, 이젠 우리 둘이서 같이 함께 살 수가 없단다. 내가 커서 살 곳을 만들게 되면 그 때 다시 함께 살자”

  남의집살이를 하게 된 처지여서 호돌이까지 데리고 갈 수 없게 된 연희는 슬퍼하면서 말했다.

  그후, 연희와 호돌이는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만날 수는 있었다. 샘터나, 밭에서.


  세월은 흘러 연희가 어느덧 아름다운 처녀가 되었고, 호돌이는 제법 늠름한 호랑이 티가 나게 되었다. 연희는 같은 마을에 사는 더벅머리 총각을 사랑하게 되었고, 호랑이도 그것을 알았다.

  그런데 어느날 밤. 흑심을 품은 부잣집 주인이 연희의 방에 몰래 들어와 그녀의 몸을 범하려 했다.

  “아앗, 저리 비켜요!”

  깜짝 놀라며 저항하던 연희는 베고 있던 목침으로 그의 뒤통수를 힘껏 내리치고는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잠시도 쉬지 않고 산기슭까지 뛰어 온 연희는 그만 기진맥진하여 쓰러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새벽녘쯤 되었을까?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연희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 보니 호랑이가 옆에 앉아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 연희는 너무나 반갑고 서러워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호랑이는 갑자기 자기 등을 꼬리로 치면서 연희에게 타라는 시늉을 했다. 연희가 의아해 하며 등에 타자 호랑이는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가더니 어떤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연희는 그 동굴에 머물면서 호랑이가 가져 다 준 것을 먹으며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한밤중이 되었을 때 난데없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응?”

  연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그런데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더벅머리 총각이었다.

  “아니, 당신이 어떻게 여기를?” 연희는 너무나 반가워 말을 잇지 못했다.

  “호돌이가 데려다 준 거라오. 밤중에 갑자기 내 방에 뛰어들더니 다짜고짜 나를 등에 태우고 여기로 달려왔다오”

  “아! 그랬군요. 역시 호돌이가 당신을 데려다 주었군요”


  이튿날. 동이 틀 무렵이 되자 호랑이가 다시 동굴로 찾아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옷자락을 물어 당겼다.

  “으응?”

  “호돌이가 왜 이러는 거지?”

  두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밖으로 나오자 호랑이는 또 자기 등에 타라는 듯이 꼬리를 흔들었다.

  두 사람이 등에 타자 호랑이는 천천히 달려가 마을로 내려왔다.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두 눈을 크게 뜨면서 놀랐다.

  호랑이는 곧장 부자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집 안은 썰렁했으며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호랑이가 전날 밤에 총각을 동굴까지 업어다 주고 다시 부자집으로 가서 부자를 물어 죽이고 나머지 식구들을 쫓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연희와 더벅머리 총각은 부자집의 재산과 양식을 모두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후, 호랑이는 항상 마을 앞산에 웅크리고 앉아 연희를 지켜주다가 그대로 굳어져 산이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외호봉(臥虎峰)」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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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인사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몇일전에 비슷한 질문이 올라와서 복사해서 올린 답입니다.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은 우리라라에서 두번쨰로 높은 1915m 입니다.

첫째는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 1950m 입니다.

 

지리산은 1967년 12월에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된 산으로서 둘레 300리걸쳐있고

총면적이 438.9평방KM의 넓은산입니다.

 

우리나라 어머니의 산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산이 넓은만큼 감싸고 있는 도(都)와 군(郡)도 3도(경산남도,전라남북도) 5군

(함양군,산청군,하동군,구례군,남원군)에 접해 있습니다.

 

지리산은 1,400M급이상의 봉우리를 20여개나 거느린 산으로서 예전에는 방장산,두류산

남악산,방호산등으로도 불리었습니다.

 

산이 높고 넓으며 깊으니 그 골골마다 계곡 또한 깊고 흐르는 물의 양도 풍부합니다.

천왕봉(1915M)에서 흐르내리는 칠선계곡,대원사계곡을 비롯하여 중산리계곡,법천계곡,

거림계곡,대성리,칠불사에서 내리는 선유동게곡,단풍으로 유명한 피앗곡 계곡,

화엄사계곡,거림골,소(沼)가 많은 뱀사골계곡,광대골,한신계곡등 크고 작은 계곡이 골골마다 비경을 자랑합니다.

 

계곡의 깊으니 폭포또한 많이 있습니다.

칠선계곡의 칠선폭,동선폭,대원사위의 무제치기폭포,문창대옆에 용추폭포,법천골의

법천폭포,거림골의 밀금폭포,쌍계사위에 불일 폭포,뱀사골에 단심폭포,한신계곡에 오련폭포 등이 있습니다.

 

그 계곡에 아름다운 소(沼)도 있습니다.

뱀사골의 병소,병소,간강소,거림골의 안심소,피앗골에 연주담,삼홍소등이 있습니다.

 

민족의 영산이라 불리고 있는만큼 사찰들도 각 명당자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씽계사,칠불사,연곡사,화엄사,천은사,실상사.법계사.내원사,대원사.있으며 도인촌 청학동도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리산은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습니다.

등산로로는 길게는 남원 고기리에서 정령치,만복대로 올라 노고단,=>임갈령=>반야봉,=>세석평전=>장터목,=>천왕봉,=>치밭목=>,대원사로 내려가는 70KM안팍의 대 종주코스을 비롯하여 화엄사에서 노고단으로 올라 천왕봉, 중산리로 내려 가는 종주코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능선을 기점으로 올랐다가 다른길로 하산하는 등산코스가 대충만 조합하여도 20여개의 등산코스를 잡을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1,000M이상의 능선을 산행하여도 곳곳에 샘이 있어 등산객들의 식수 걱정을 들어 줍니다.

 

또 하나 산행을 도와주는 것은 산장일 것입니다.

산행에 지칠때쯤에 위치한 대피소와 산장들이 산행 하는이의 피로를 들어 줍니다.

산장으로는 노고단,뱀사골,연하천,벽소령,장터목,로타리,피앗골산장이 있습니다.

 

 

지리산은 계절마다,가는곳마다 각각의 다른면을 볼수가 있습니다.

 

지리산의 아름다운 10가지를 꼽았는데 그것이 지리산 10경입니다.

 

 

#지리산10경#

 

*노고단 운해

*직전단풍(피앗골 단풍)

*반야낙조 (반야봉의 일몰)

*벽소명월(벽소령의 달) *불일폭포

*세석철쭉

*연하선경(연하봉의 경치)

*천왕봉 일출

*칠선 계곡

*섬진청류(섬징강의 푸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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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면 될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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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두 3학년인데 조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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