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돌석장군에 대하여좀알려주세요

신돌석장군에 대하여좀알려주세요

작성일 2008.07.01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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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각에 오른 나그네 문득 갈 길을 잊어, 낙목이 가로누운 단군의 폐허를 탄식하노라.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잠시 추풍 속에 앉아 감회에 젖네[登樓遊子却行路 可歎檀墟落木橫 男子二七成何事 暫倚秋風感慨生].'

 

이 시는 신돌석(申乭石) 장군이 27세 되던 1904년에 고향 근처 평해 월송정(越松亭)에 올라 읊은 시이다. 간악한 일제(日帝)의 강요에 따라 이른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기 한 해 전인 1904년은 또한 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던 해였다. 몇번이고 되풀이해 읽어보면 볼수록 월송정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며 쓰러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한탄하던 젊은 우국지사의 분노와 절망감이 생생히 살아 전해지는 시이다.

 

항일투쟁(抗日鬪爭)에 일생을 바친 의병대장 신돌석은 불과 1백년전 인물이지만 살아서 전설과 신화를 남긴 민족의 영웅이다. 평민 출신의 의병대장으로 널리 알려진 신돌석은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과 더불어 축지법을 쓰며 신출귀몰했다는 유격전(遊擊戰)의 귀재요,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출중한 용력과 기개를 지닌 서민 대중의 영웅이다.

 

그는 겨우 30년간 이 땅에서 살다가 갔고, 그나마 몸을 일으켜 이 땅을 집어삼키려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맞서 싸운 기간은 2년 8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의 불타는 애국, 애민 정신과 불굴의 용기는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남아 있다.

 

신돌석 장군에 대한 사료는 필자가 알려지지 않은 의병대장신공유사(義兵大將申公遺事), 신장군실기(申將軍實記), 신의장전(申義將傳), 그리고 신돌석 장군 활약 당시의 황성신문(皇城新聞) 및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단편적인 기사, 일본 군경의 의병부대 토벌전(討伐戰) 보고서가 있으며 최근에 김희곤(金喜坤) 안동대학교 교수가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이라는 전기를 발표한 바 있다.

 

◆ 역발산기개세의 용력 지녔던 '태백산 호랑이'

 

이런 자료에 따르면 신돌석은 일제의 침략 야욕이 노골화되고 조선왕조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고종(高宗) 재위 15년(서기 1878년) 음력 11월 3일에 경상도 영해도호부 남면 북평리 정신곡, 오늘의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동에서 신석주(申錫柱)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적에 기록된 그의 본명은 신태호(申泰鎬), 자는 순경(舜卿)이라고 전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돌석(乭石)은 아명이었는데, 이 이름도 처음에는 돌선(乭先)이었다고 한다.

 

신돌석은 태어난 날부터 골격이 튼튼했고, 점점 자라면서는 장대한 체구에 걸맞게 용력이 비상했다. 그의 나이 겨우 5~6세 때에는 달아나는 개를 쫓아가 꼬리를 잡고 맨주먹으로 때려죽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그가 어려서부터 살생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는 없고, 아마도 그 개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 광견(狂犬)이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신돌석은 타고난 장사였다. 뒷날 일본군의 보고서에도 "그의 어깨 힘이 매우 강했다."는 대목이 이런 사실을 증명해준다.

 

신돌석 장군은 평민 의병대장이고, 그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글도 배우지 못한 천민 출신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따라서 첫머리에 소개한 시도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비록 행세하는 양반집에서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는 어렸을 때 서당에 다니며 글공부를 했다. 그가 상민의 신분으로 시골 양반들에게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서당에서 양반가의 자제들과 함께 글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가 학문을 권한 덕분이라고 한다.

 

아들이 배운 것은 없이 빼어난 용력만 믿고 힘자랑이나 하다가 자칫 잘못하면 비뚤어진 길로 들어설까봐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돌석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알뜰히 재산을 모아 비록 시골 사람이지만 살림에 여유가 있었으므로 아들을 서당에 보낼 수 있었고, 또 뒷날 아들이 의병을 일으키자 군자금도 대주었던 것이다.

 

◆ 29세에 영릉의진(寧陵義陳) 조직해 항일투쟁(抗日鬪爭) 시작

 

신장군실기(申將軍實記)에 따르면 신돌석 장군이 고향 영덕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은 그의 나이 29세가 되던 1906년 4월 6일이었다. 그런데 의병대장신공유사(義兵大將申公遺事)에는 그가 의병부대를 조직한 날짜가 4월 8일로 되어 있어 이틀의 차이가 난다. 이보다 앞서 그해 1월에 영덕과 이웃한 영양에서 김도현(金道鉉)의 의병부대가 대구진위대의 공격을 받고 와해된 사건이 있었다. 이것이 신돌석이 의병을 모집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자기 집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마을 주막집 앞마당에서 100여명의 청년을 모아 영릉의진(寧陵義陳)이라는 부대 이름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 영릉의진 부대의 지휘부는 창의장명록(倡義將名錄)이란 기록에 따르면 의병진대장에 신돌석(申乭石), 통인에 강업이(姜業伊), 집사에 이목국(李穆國), 장유락(張留洛), 이원이(李元伊), 이경문(李景文), 참모장에 박수찬(朴壽瓚), 도선봉장에 한영육(韓永育), 분진선봉장에 전세호(田世浩)와 이현규(李玄圭), 중군장에 김용욱(金容旭), 포대장에 신태종(申泰鐘), 박병율(朴柄律), 중군대장에 백남수(白南壽), 유격대장에 권두용(權斗用), 도령장에 임경호(林京鎬), 한용수(韓鎔洙), 교련장에 이화진(李華鎭), 이밖에 군령장, 영솔장, 소모장, 수문장 등 장령급만 61명이었다.

 

신돌석의 의병부대인 영릉의진이 처음부터 이렇게 잘 짜여진 조직으로 출발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장령급만 해도 부대원의 절반이나 되었다는 기록을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 그런데 이 가운데 참모장 박수찬은 신돌석의 큰 매형이고, 도령장 한용수는 신돌석의 처남이며, 도선봉장 한영육은 일명 '한 참봉'으로 불린 마을 유지였으며, 중군대장 백남수는 군수 바로 밑인 주사를 지낸 양반 출신이었다. 한편, 포대장이란 직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돌석의 의병부대에 직업적인 포수들이 초기부터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의병항쟁(義兵抗爭)에 참가한 사람 대부분은 신돌석과 같은 평민, 즉 평범한 농민이거나 천민이었다. 나중에 양반 출신도 참가했지만 주력은 농민을 비롯해 천대받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신돌석을 가리켜 평민 의병대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신장군실기에 따르면 자신의 관내인 영덕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영해군수 경광국(慶光國)은 당황하여 여러차례 신돌석 장군을 찾아와 의병을 해산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신장군실기는 그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영해군수 경광국이 여러번 찾아와서 의장(義將)에게 군사적 행동을 금지하라고 하다가 직접 그 논리를 들어보고는 다만 고개를 끄덕거릴 따름이었으며,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신모(申某)의 의기는 누가 감히 그르다 하리요만, 단 독단으로 군사를 마음대로 취급하므로 내 이것을 제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안광이 횃불과 같고, 다리의 힘이 바다라도 뛰어넘을 듯한 용기를 지녔으니 참으로 장군이다."라고 말했다.'

 

◆ 첫 싸움에서 관군의 기습으로 패배

 

평민 의병대장 신돌석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의 용모와 체격을 단편적으로 전해주는 기록이 있다. 신돌석의 부하로 있다가 일본군에게 투항한 이재석(李載錫)의 심문 기록에 따르면 "신돌석의 얼굴은 크고 넓었으며 턱도 넓은 편이었다. 그의 피부는 검었으며, 얼굴에는 마마 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턱수염은 작은 편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재석은 그의 키가 170센티미터라고 진술했다.

 

의병부대의 체제가 갖추어지자 신돌석 장군은 가장 먼저 울진을 공격목표로 삼았다. 당시 울진은 10여년 전부터 수많은 일본인 어부와 잠수부가 자리잡고 신식 어업도구를 사용하여 조선 어민들보다 수십 배나 되는 어획고를 올려 가난한 어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신돌석은 이러한 일본인들의 침략과 수탈의 전진기지를 첫 공격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신돌석은 군사를 거느리고 부족한 군자금을 마련하고 의병을 모으기 위해 내륙인 경북 영양으로 향했다. 100여명에 이르는 의병들의 의복, 무기, 식량을 확보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그런데 신돌석은 돈 많은 양반 부호 출신이 아니라 본래부터 가난한 평민이었다. 아버지와 친척들이 대준 얼마의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따라서 돈을 마련해야만 했고, 그 방법은 부자들의 '애국심'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자진해서 내놓았든 강제로 빼앗았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섰으니 너도 애국심이 있다면 가진 돈의 일부를 바쳐라."고 했을 것이다.

 

4월 26일 영양에서 울진으로 다시 넘어온 신돌석의 부대는 관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신돌석 의병부대의 공격 정보를 받은 울진군수 윤우영(尹宇榮)이 원주진위대에 지원을 요청해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을 한 것이었다. 워낙 뜻밖의 기습공격이라 신돌석의 부대는 제대로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신돌석은 급히 부하들을 거느리고 청송까지 후퇴했다. 하지만 첫 전투에서 패했다고 기가 죽을 신돌석이 아니었다.

 

◆ 백두대간 오르내리며 영양, 울진 등 공격

 

4월 30일 신돌석의 부대는 영양군 관아를 습격하여 많은 무기를 확보했다. 그해 5월 14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했다.

 

'수백명이 각각 총포(銃砲)를 들고 들이닥쳐 사면으로 방포하고 순교청으로 들어가 군수를 협박하고 행정관리를 포박하였다. 그리고서 군물고(軍物庫)를 부수어 총기(銃器) 22자루, 탄환 20발, 수철환(水鐵丸) 1발을 수거하고, 읍민이 도적 방비를 위해 사사로이 갖고 있던 조총 35정과 화약 2근을 수거하였으며 영해로 향했다.'

 

영양을 공격하여 무장력을 강화한 신돌석은 다시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북상하며 계속해서 양반 부자들의 집에서 군자금을 거두어들였다. 그는 이렇게 모은 군자금 가운데 130냥을 주고 소 한마리를 사서 오랜만에 군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당시 그가 거느린 의병 수는 115명이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5월 8일 마침내 울진에 다다른 신돌석은 일본인 거주지역을 공격하여 여러명의 일본인을 사살하고, 그들로부터 소 열마리 값이 넘는 1천 5백냥의 돈도 빼앗고, 5월 12일에는 본거지인 영해로 돌아왔다. 그리고 5월 25일에는 다시 청송군 진보면에서 우편마차를 습격하여 호송 헌병 등 4명을 살해했다. 그러나 이 우편마차에서 얼마나 많은 현금을 획득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신돌석은 5월 말에 다시 한번 울진을 공격했는데, 이번에는 일본인 거주지역뿐만이 아니라 관아까지 공격하여 무기고를 부수고 수많은 무기를 노획했다. 황성신문은 당시 울진을 공격한 의병의 수가 3백명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신돌석의 영릉의진이 도사(都事)를 지낸 김하규(金夏奎)의 삼척의진(三陟義陳)과 합동작전을 벌였기 때문에 3백명이라고 한 것이다. 신돌석은 울진 공격에 성공하자 여세를 몰아 현재 삼척시 근덕면 장호항을 공격하여 다수의 일본인을 사살하고 그들의 집 40여채를 불태웠으며 조선 어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일본인들의 선박 9척을 격침시켰다.

 

한편 같은 무렵 경북 문경에서는 이강년(李康秊) 장군이 의병들을 거느리고 경북 북부와 충북 남부, 강원도 서남부 등지를 무대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이처럼 의병들의 활동이 갈수록 치열해지자 일제(日帝)의 조선통감부(朝鮮統監府)는 대한제국 정부에 의병 진압을 강요했고, 이에 따라 힘없는 황제 고종(高宗)은 의병항쟁을 중지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하지만 그 뒤에는 간악한 일제의 강압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전국 각지의 의병들은 황제의 조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투쟁을 계속했다. 그러자 일제는 직접 군경을 동원하여 의병 토벌에 나섰다. 이에 따라 대구진위대와 원주진위대의 3백여 병력이 신돌석의 영릉의진을 진압하기 위해 남북에서 협공을 가했다.

 

신장군실기는 그해 6월에 신돌석이 원주진위대 병사들을 물리친 전설적인 무용담을 이렇게 전한다.

 

◆ 신출귀몰의 유격작전으로 관군과 일본군 괴롭혀

 

'6월에 원주 병정 40~50명을 돌연히 만났는데 일행이 총검(銃劍)을 무더기로 세우고 술을 나누고 있을 때 장군은 앉아서 한 손으로 그 묶어놓은 총검을 터럭 다루듯 가볍게 하며, 또 옛날 제갈량(諸葛亮)이 남정(南征)할 때 옹개(甕介)를 잡았다가 놓아준 것 같은 지략을 쓰니, 원주 병정이 모두 두려워저 굴복하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토벌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영릉의진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비록 무장력은 열세였지만 의병들은 지리에 밝고 또 산을 귀신같이 잘 타는 농민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신돌석은 이번에는 자신의 고향이며 근거지인 영해부를 공격했다. 의병대장신공유사와 신의장전 등은 6월 26일에 신돌석의 부대가 영해로 진격하여 읍을 삼면에서 포위한 뒤 서문을 부수고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자 성문을 닫아걸고 수비하던 병정들이 견디지 못하고 남문으로 달아났는데 사상자가 많았다고 했다. 또한 영릉의진의 선봉장 이현규가 서문을 부수고 불을 지르니 신돌석 장군이 이르기를, "성안의 백성들이야 무슨 죄가 있는가? 다만 불의한 무리만 처단하면 된다."면서 방화를 말렸다고 전한다.

 

영해읍성을 점령한 신돌석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방을 붙이고 주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영해군수가 세가지 죄가 있으니 첫째는 의병을 효유한다면서 대의에 항거한 것이요, 둘째는 군대를 청하여 의병진을 토벌하려 한 것이며, 셋째는 왜학(倭學)을 설치하여 인민을 무도한 길로 빠지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거의(擧義)하여 이를 토벌하노니 그 죄를 받아라.'

 

여기서 왜학이란 일본의 주도로 도입한 이른바 신식 학문을 가리킨다. 당시 영해부사 경광국은 이 일로 인해 그해 10월에 면직되었다. 영해를 친 영릉의진은 7월 3일에는 영덕읍성을 공격하여 군수를 끌어내어 징벌하고 무기고를 부수어 많은 무기를 획득한 뒤 물러갔다. 이에 영덕군수는 상부에 군대를 보내 의병을 진압해줄 것을 요청했고 신돌석 부대는 7월부터 9월까지 깊고 험한 산중에 은거하며 휴식을 취했다.

 

영릉의진이 활동을 재개한 것은 9월 18일이었다. 그날 영양관아를 들이치고, 이어서 다음달에는 영해부를 재차 습격했으며, 11월 4일에는 다시 영양을 공격했다. 영양과 영해를 오가며 의병항쟁을 펼쳤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신돌석의 고향 마을은 울진에서 남하한 토벌군의 보복에 의해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 토벌군의 화풀이로 폐허가 된 고향 마을

 

의병을 일으킨 첫해 1906년이 저물어가는 12월에 신돌석은 73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겨울을 나기 위해 내륙 깊숙한 청송으로 향하다가 이듬해 1월에 대구진위대와 조우하여 여러차례 교전을 벌였다. 이어서 울진을 다시 공격했고, 영덕, 영해, 평해 등지에서도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대규모 전투는 없이 이따금 유격전 형태로 싸우면서 대부분은 백암온천 가까운 울진 백암산과 검마산 일대에서 휴식과 훈련으로 추운 겨울을 보냈다.

 

4월부터 다시 본격적인 의병항쟁에 나선 신돌석 장군의 영릉의진은 5월 11일에 영덕에서 새로운 의병을 모집해 병력을 보충하고, 8월까지 영양, 청송, 영덕, 평해, 영해 등지를 넘나들며 일본 군경 및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런데 영릉의진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명인 후군장 백남수가 8월 초에 일본 헌병대에 체포당해 큰 타격을 입었다.

 

8월 20일 신돌석은 약 3백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영양군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쫓아버리고 내친 김에 관아까지 불태웠다. 한편, 그 이튿날에는 의병 일부를 나누어 영덕을 공격하여 일본인들을 쫓아버린뒤, 다시 부대를 합쳐 울진, 삼척 쪽으로 북상했다. 그리하여 9월 7일에는 다시 삼척 장호항의 일본인들을 공격했으며, 9월 13일에는 평해와 백암산을 거쳐 깊숙한 산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틀 뒤인 9월 15일에 영양 동북쪽에서 일본군과 마주쳐 격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영릉의진은 적군을 격퇴시키지는 못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큰 손실도 없이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산중으로 후퇴했다. 일본군이 아무리 우수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해도 쉽사리 제압하거나 추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영덕, 영해, 평해 등 신돌석 부대의 주요 활동거점은 세금도 걷히지 않았고, 정부와 일본군의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않았으며, 따라서 신돌석이 지배하는 영릉의진의 '해방구'라 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그해 11월에 관동 창의대장 이인영(李麟榮)이 전국 각지의 의병대장에게 "의병부대를 통합하여 서울로 진격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보내 이에 호응한 의병대장들이 12월에 경기도 양주에서 회동하여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결성하고 이인영을 창의총대장으로 하고, 각 도별 창의대장을 천거했다. 즉 교남 창의대장에 신돌석(申乭石), 호서 창의대장에 이강년(李康秊), 전라 창의대장에 문태수(文泰洙), 진동 창의대장에 허위(許蔿), 관동 창의대장에 민긍호(閔肯鎬), 관서 창의대장에 방인관(方仁寬), 관북 창의대장에 정봉준(鄭鳳俊) 등이었다. 대부분의 독립운동(獨立運動) 관련 사료에는 이때 신돌석 장군이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신분 차별을 당해 허위의 아장(亞將)인 박정빈(朴正斌)으로 교체된 것으로 나와 있는데, 김희곤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때 신돌석은 영양 일월산에서 북상하지 못해 처음부터 이들과 합류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그 무렵에 신돌석 장군이 강원도 양구에 출현하여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역시 일본군을 교란시키려는 허위 정보이거나 다른 의병대장이 신출귀몰하여 용맹을 떨치는 신돌석의 위명(威名)을 빌린 것으로 추측된다.

 

신돌석은 11월에는 봉화와 순흥까지 활동 반경을 넓혀 이강년의 의병부대와 합세하여 관아를 공격했으나, 12월로 접어들어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시작되자 다시 백두대간의 험준한 산중으로 후퇴하여 은신했다. 당시 일본군 측 자료에 따르면 신돌석 의병부대의 규모는 병력이 약 3백명, 무장한 총기(銃器)는 신식 소총 5~6정, 화승총 250~260정으로 나타났다.

 

◆ 이강년의 부대와 합동작전도 펼쳐

 

해가 바뀌어 1908년, 신돌석은 양력 1월 1일에 부하들을 거느리고 영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지역 일본군의 세력이 강했으므로 정면승부를 피하고 군사를 나누어 유격전을 펼쳤는데, 일본군 측의 기록에 따르면 60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냈다. 1월 10일 하루 동안에 당한 일이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의병을 일으킨 이후 가장 큰 손실이었다. 신돌석은 나머지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시 깊은 산중으로 은신했다.

 

그렇다고 해서 의기가 꺾일 신돌석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용감한 의병들을 거느리고 태백산, 소백산, 일월산, 백암산 등 백두대간의 험악한 준령을 누비며 번개처럼 일본 군경을 치고 사라지는 신출귀몰의 게릴라작전을 펼쳤다. 그래서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도 붙었고, '신돌석 장군은 축지법을 쓴다'는 살아 있는 전설도 생겨난 것이다. 또 일본 군경도 신출귀몰하는 신돌석을 이태가 넘도록 쫓아다녔지만 죽이지도 못하고 잡지도 못하자 폭도사편집자료(暴徒史編輯資料)라는 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기도 했다.

 

'화적의 수괴가 되어 항시 수십의 부하를 두고 교묘히 체포를 벗어나 포악을 일삼고 폭도로 화하여 혹은 독립하고 혹은 다른 집단과 연합하여 영양, 영덕 지방을 근거로 하여 본도 북부는 거의 횡행하지 아니한 곳이 없다. 그는 경찰대, 수비대, 헌병대에 의하여 토벌당한 일이 수십 차례였으나 실로 출몰이 자재하여 용이하게 체포되지 않고 지금도 오히려 영양지방에 출몰하여 표도(剽盜)를 일삼으며 수십의 부하를 두고 있다.'

 

그러자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신돌석 장군 생포작전에 나섰다. 일본군은 사방에 밀정들을 풀어 마침내 세살 난 아들 만이(萬夷)를 데리고 현재 영양군 석보면에 숨어 있던 그의 부인 한재여(漢載如)를 찾아냈다. 신돌석 장군의 부인을 안동으로 끌고 간 일본군은 부인을 여관에 모시고 극진하게 대접하며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한 뒤 한달만에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를 들려서 풀어주었다.

 

의병대장신공유사(義兵大將申公遺事)에 따르면 이때 동갑내기 아내를 만난 신 장군이 노한 목소리로 "倭놈들에게 끌려가 어찌 죽지 않고 돌아왔소? 게다가 倭놈들의 편지까지 가지고 오다니!" 하고는 편지를 읽지도 않고 화롯불속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는 가족이 자신 때문에 고초를 당하거나 이용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모와 처자를 좀처럼 찾아낼 수 없는 깊숙한 산골마을에 숨겼다고 한다.

 

◆ "倭놈들에게 어찌 죽지 않고 돌아왔소?"

 

혹한이 물러가고 날이 풀리자 신돌석은 그해 4월부터 5월까지 영해 인근에서 군자금과 의병을 모으며 전열을 정비한 뒤, 5월부터 다시 일본군과 전투를 재개했다. 당시 신돌석 부대는 백두대간 동쪽 줄기를 남북으로 오르내리며 그해 8월까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다가 이후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 증강과 더불어 이른바 '귀순법(歸順法)'이 발표됨에 따라 활약상이 급격히 위축된다. 이는 비단 영릉의진에만 해당되는 경우가 아니었다.

 

귀순자면죄조칙(歸順者免罪詔勅)이란 의병 활동을 했더라도 투항하면 모든 죄를 없는 것으로 해주겠다는 면죄부를 주는 것이었다. 간교한 일제(日帝)는 귀순법이라는 유화책과는 별도로 일본 군경을 조선인으로 변장시킨 특수부대를 편성 운용했으며, 부일(附日) 조선인 밀정들을 이용한 의병 색출에도 혈안이 되었으니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본래부터 유격전의 특징이 민중을 물로 여기고, 유격부대는 그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 병법의 원리가 아닌가?

 

이러한 불리한 여건 속에서 신돌석의 부대에서도 투항자가 속출함에 따라 영릉의진의 위세는 갈수록 약화되어갔다. 그리하여 1908년 9월 말경 일본군 측의 기록에 따르면 신돌석이 거느린 의병의 수가 불과 20명으로 급격히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많으면 3백여명, 적어도 1백여명 안팎의 의병이 20명도 안남았으니 신돌석 장군에게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신돌석의 휘하에는 온정 출신 한영육(韓永育)과 안동 출신 유기길(柳起吉), 영양 출신 이오촌(李梧村)과 문미동(文米洞) 등 4명의 부장(副將)을 비롯하여 겨우 20명 안팎의 의병이 남아 있었다. 그나마 이재석에 이어 영릉의진의 중추부를 이루던 이오촌과 교련장 이화진이 10월 25일에 투항함으로써 신돌석의 의병부대는 와해의 위기에 내몰렸다. 당시 일본 헌병대의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신돌석이 세력에 쇠퇴하여 가까운 부하 4명을 설득하고 해산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런 정황을 살펴보건대 어쩌면 신돌석 장군이 뒷날을 기약하고 일시적으로 의병을 해산했는지도 모른다.

 

또 그 무렵 신돌석이 가까운 사람에게 만주로 건너갈 생각을 털어놓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 신돌석 장군을 살해한 범인의 이름은 무엇인가?

 

최후의 달인 1908년 12월, 신돌석은 12월 9일에 부하 10명을 거느리고 고향 마을에서 가까운 영해군 남면 대곡동에 나타났다가 그 이튿날 영해군 묘곡면 대동에 잠복했다. 아마 그 무렵 신돌석이 만주로 탈출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러 다녔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튿날인 밤 9시경에 신돌석은 부하 1명만 데리고 영해군 묘곡면과 이웃한 영덕군 북면 지품면 눌곡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이튿날인 12월 12일 오전 1시께 자상계(字上溪)라고 불리는 눌곡 상계 골짜기에서 김씨(金氏) 형제에 의해 살해되었다. 참으로 '태백산 호랑이'답지 않게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그런데 신돌석 장군을 살해한 김씨 형제는 도대체 누구이며, 이들이 신 장군을 죽인 이유는 무엇일까?

 

신돌석 장군의 순국과 관련한 사실들을 밝히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문제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살해범의 이름이 자료마다 다르게 나온다는 점이다. 의병대장신공유사(義兵大將申公遺事), 신장군실기(申將軍實記), 신의장전(申義將傳) 등의 사료에는 한결같이 살해범으로 김상렬(金相烈), 김상태(金相泰), 김상호(金相浩) 3형제를 들고 있다. 그리고 이들 형제와 신돌석의 관계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엇갈린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김상렬이 신돌석 모친의 외종질이란 기록도 있고 또 김상렬의 집안이 신돌석 조부의 외가라는 설도 있다. 김상렬 형제가 황곡 마을 윗마에 살았고, 신돌석은 그 골짜기를 내려오다가 살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 헌병과 경찰 측 보고서는 이 내용과 전혀 다르다. 1908년 12월 14일 대구 헌병대 분대장 가와무라 소위의 보고서에는 신돌석의 부장이었다가 1908년 8월경에 귀순한 영덕군 북면 거주 김도윤(金道潤)과 그의 형 김도룡(金道龍)이 신돌석의 살해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경북 관찰사 박중양(朴重陽)이 내부대신 송병준(宋秉晙)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신돌석을 살해한 자의 이름이 김도용(金道用)으로 되어 있다. 살해범이 신돌석을 살해한 이유도 자료마다 다르게 나와 있다. 의병대장신공유사에 따르면 일본군이 신돌석 장군에게 내건 '현상금 1천근의 금과 1만호의 고을을 준다'는 것에 이들이 넘어가 신 장군을 살해했다는 것이고, 영해 경찰서장 야마모토 경부의 보고서에는 신 장군이 이들 형제에게 다시 의병 대열에 합류할 것을 권유하다가 싸움이 벌어진 끝에 신 장군을 살해했다고 나와 있다. 이들은 힘으로는 당할 수 없으니까 신 장군에게 독한 술을 권한 뒤에 신 장군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되자 쇠몽둥이로 뒤통수를 강타하여 살해했다고 한다.

 

한국 측 자료와 일본 측 자료가 서로 일치되는 내용이 거의 없어 살해범의 정확한 이름이나 신 장군 살해 동기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는 방법이 희박하지만 어쨌든 그날 오후에 신돌석 장군의 시신은 영덕군청으로 옮겨지고 옮겨지고, 옛날 그의 부하들이 그가 틀림없는 신돌석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일본 경찰은 신돌석의 시신 확인이 끝나자 가족에게 인도했다. 영릉의진을 일으킨 지 2년 8개월만에 의병대장 신돌석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 뒷산에 묻혔다. 그때 그의 나이 한창인 31세였다. 이렇게 고향에 묻혔던 신돌석 장군의 시신은 1971년에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자묘역 131호로 이장되었다. 이보다 앞서 그에게는 1962년 2월 1일에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신돌석 장군이 이렇게 아깝게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부인 한씨(韓氏)는 어린 외아들 만이를 데리고 깊은 산골로 피해 숨어살았다. 그러나 신 장군의 유일한 혈육인 만이는 어렸을 때 죽었다. 일설에는 일본 경찰관이 독이 든 과자를 먹여 죽였다고도 하고, 병으로 죽었다고도 하는데 실상은 알 수가 없다. 한씨 부인은 신 장군의 아우 태범(泰範)의 아들인 병욱(秉旭)을 입양하여 장군의 대를 잇게 했고, 6.25동란 중인 1952년에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평민 의병대장 신돌석. 그는 한말 항일 의병대장 가운데서도 특이한 존재였다. 당시 의병을 일으킨 사람 대부분이 양반 출신인데 그는 천대받던 평민 가운데서 의병대장으로 떨쳐 일어나 구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가 의병항쟁을 한 시기는 3년에 불과했지만 그 3년간 그는 단 하루도 편히 쉬지 않고 백두대간 준령을 오르내리며 일제 침략자들과 맞서 용감히 싸웠다. 그리하여 신출귀몰한 '태백산 호랑이'의 신화를 창조하고 전설을 남겼다. 또한 그의 의병부대에는 이른바 양반으로 불린 왕조시대의 지배계급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지원함으로써 또 하나의 새로운 역사를 기록했다.

 

박은식(朴殷植)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이렇게 썼다.

 

'영해에서 봉기한 평민 출신 의병대장 신돌석 의병부대가 일월산과 백암산을 근거지로 의병부대의 규모를 강화하며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 글은 비록 짧지만 신돌석 장군의 활약상을 정확하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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