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들의 프로필 조사

위인들의 프로필 조사

작성일 2008.01.27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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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하젠, 성난 말, 에라스무스 다윈, 갈릴레오 갈릴레이, 칭키스칸, 골다메이어, 이다 파이퍼, 제인구달, 제시 오언즈, 몬테수마1세, 움 쿨쑴, 파라오 하트셉수트, 추근,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라덴 아젱 카르티니, 리차드 파인먼, 샐리라이드, 시몬 볼리바르, 템플그랜딘, 베르너 폰 브라운  이위인들의 프로필 조사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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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하젠 [Alhazen]

(아)Ab Ali al-asan ibn al-Haytham.

965경 이라크 바스라~1039 카이로.

아라비아의 수학자·물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2세기에 활동) 이래 최초로 광학이론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한참 뒤인 1270년 라틴어로 번역된 그의 광학논문 〈알하젠의 광학 보전(寶典) 7권 Opticae thesaurus Alhazeni libri vii〉에는 굴절, 반사, 쌍안시, 렌즈로 초점맞추기, 무지개, 포물면경, 구면경, 구면수차, 대기굴절, 지구 지평선 가까이에서 겉보기에 행성의 크기가 두드러지게 크게 보이는 현상 등에 관한 이론들이 실려 있다. 그는 빛이 눈에 보이는 물체로부터 나온다고 말해, 시각을 정확히 설명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성난 말

알 수 없음.

 

 

에라스무스 다윈 [Erasmus Darwin]

1731. 12. 12 영국 노팅엄셔 엘스턴 홀∼1802. 4. 18 더비셔 더비.

영국의 저명한 의사.

박물학자 찰스 다윈과 생물학자 프랜시스 골튼의 할아버지이다.

케임브리지대학교(1750~54)와 에든버러대학교(1754~56)에서 공부한 뒤 노팅엄에서는 전망이 없다고 보고 리치필드에서 의사 개업을 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되어 조지 3세가 그에게 런던에 와서 자신의 주치의를 맡아달라고 제안할 정도로 재능있는 의사로 평판이 났다. 그러나 다윈은 그 제안을 사양하고 리치필드에서 지내면서 조지프 프리스틀리, 장 자크 루소, 새뮤얼 존슨 등 많은 저명인사들과 교분을 맺었다.

더비로 이사하여(1781) 철학학회를 창설하고 뒤이어 리치필드에 진료소를 열었다(1784). 자유사상가이며 급진주의자였던 다윈은 자신의 견해와 학술논문을 종종 운문(韻文)으로 집필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저술로는 〈식물원 The Botanic Garden〉(1794~95)·〈자연의 전당 또는 사회의 기원 The Temple of Nature or the Origin of Society〉(1803)이 있다. 〈동물생리학 또는 생물의 법칙 Zoonomia or the Laws of Organic Life〉(1794~96)에서 그는 종들은 합목적적으로 환경에 적응하여 변화해나간다는 J. B. 라마르크의 진화론과 유사한 진화개념을 전개했다. 다윈은 무엇보다도 18세기 유물론의 입장과 가치관을 대변하는 전환기의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진화에 관한 그의 결론은 단순한 관찰에 불과했고 19세기에 와서 진보한 과학자들(그중 특히 손자인 찰스 다윈)은 그의 주장을 거부했다. 그밖의 주요저작으로는 〈기술학교에서의 여성교육 운영계획 A Plan for the Conduct of Female Education in Boarding Schools〉(1797)과 〈식물학 또는 농업과 원예의 철학 Phytologia, or the Philosophy of Agriculture and Gardening〉(1800) 등이 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 2. 15 피사~1642. 1. 8 피렌체 근처 아르체트리.

이탈리아의 수학자·천문학자·물리학자.

근대과학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특히 중력과 운동에 관한 연구에 실험과 수리해석을 함께 사용하여 일반적으로 근대역학과 실험물리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자연은 수학적 언어로 씌어진다'라는 주장으로 수학적 합리주의를 주창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에 대항했다.

어려서는 피렌체 근방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1581년 피사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했는데, 그해에 피사 대성당에서 등잔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유명한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때는 수학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했고, 그뒤 토스카나 궁정의 수학자 오스틸리오 리치에게서 수학과 과학을 배웠다. 1585년 경제적인 이유로 피렌체로 돌아와서 피렌체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했다. 1586년에는 정수(靜水)저울에 관한 논문으로 널리 알려졌고, 1589년에 고체의 무게중심에 관한 논문으로 피사대학의 수학강사로 임명되었다. 1592년 파도바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운동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고 1604년 낙하물체는 등가속도운동 법칙에 따른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증명했다. 또한 포물선낙하운동 법칙도 발견했는데, 옛날부터 전해 내려왔던 피사 사탑의 실험은 실제로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일찍부터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태양중심체계를 믿고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렸다. 1609년 봄 베네치아에서 망원경 발명의 소식을 접하고 파도바로 돌아와서 3배율 망원경을 만들었으며, 그뒤 곧 32배율로 개량했다. 이 망원경은 새로 고안한 렌즈의 곡률점검법을 사용하여 천체관측에 처음으로 이용될 수 있었고, 곧 전유럽에서 주문이 쇄도했다.

1609년 후반에서 1610년 초반까지 이 망원경으로 그는 천문학에 있어 많은 발견을 했다. 표면은 평평하지 않으며, 은하수는 많은 별들로 이루어져 있고, 목성에 위성이 있다는 사실과, 또 태양흑점, 금성의 위상, 토성의 띠 등도 관측했다. 이런 관측은 〈천계통보 The Starry Messenger〉(1610)로 출판되었으며, 이로 인해 파도바대학의 종신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보다 많은 연구를 위해 토스카나 대공의 과학자문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1611년 로마를 방문한 그는 많은 찬사를 듣고 유럽 최고의 과학자임을 인정받았다. 이에 자신을 얻은 그는 1613년 태양의 흑점이동을 바탕으로 코페르니쿠스가 옳고 프톨레마이오스가 틀렸음을 밝히는 3통의 편지를 출판했는데 뛰어난 설명과 단어 선택으로 그의 생각이 널리 알려져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

지동설에 대한 지지에 위협을 느낀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들은 성경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도미니쿠스 수도회 신부들과 연합하여 그를 비난했으며 급기야 비밀리에 그는 불경죄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이에 놀란 그는 교회가 과학적 사실의 진부에 대해서 관대한 입장을 견지해 줄 것을 탄원했고 많은 종교 지도자들도 그의 입장을 지지했지만, 교리 책임자였던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태도는 완강했다. 추기경의 주된 관심은 오로지 신교와 싸우기 위한 가톨릭 진영의 단결에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이탈도 용납될 수 없었다. 1616년 3월 5일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오류임이 공포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책은 금서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그 전에 추기경은 이 사실을 통보하면서 앞으로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지지하거나 변론해서도 안된다고 경고했다(→ 로마 가톨릭교).

1624년 그는 금지법령을 철회시키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으나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만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새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Ⅷ, Maffeo Barberini)는 두 우주체계를 공정하게 다룬다는 조건으로 허가해주었다. 교황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우주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판단할 수 없다는 식의 결론을 원했고 어떠한 다른 논의를 해서도 안된다고 못박았다. 이에 대한 다짐은 교회 검열관에 의해 서면으로 확인되었다.

피렌체로 돌아와서 대작 〈2개의 주된 우주체계―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에 관한 대화 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tolemaico e copernicaon〉를 저술했다. 1632년 모든 검열을 거친 이 책은 문학과 철학 분야의 걸작으로 전유럽에 널리 퍼졌다.

그러나 교황은 이 책이 제목과는 달리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명백히 옹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예수회에서는 이 책이 루터와 칼뱅의 설교를 합친 것보다 더 나쁘다고까지 주장했다. 화가 난 교황은 기소를 명령했으며, 이와 동시에 그가 1616년에 서약했던 문서가 발견되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위조문서였다고 하지만, 그는 이것 때문에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단행위로 기소된 그는 1633년 2월 노령과 질병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소환되었으나 특별대우로 감옥에 갇히지는 않았다. 4월 12일의 심문에서 그는 1616년 문서를 부인했지만,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부정할 것을 선고받고는 순순히 과거의 잘못을 "맹세코 포기하며, 저주하고 혐오한다"고 선언했다. 그뒤 투옥이 선고되었지만, 교황의 배려로 감형되어 죽을 때까지 피렌체의 집에 자택연금을 당했다.

그는 연금기간 동안에도 연구를 계속하여, 1634년에는 그동안 연구한 역학원리와 초기 실험결과를 〈두 새 과학에 관한 논의와 수학적 논증 Discorsi e dimostrazioni mathematiche intorno a due nuove scienze attenenti alla meccanica〉에 담아 출판했다. 그는 1637년 완전히 눈이 멀 때까지 천체관측을 계속했다. 과학자들과의 서신교환도 그치지 않았고, 1642년 사망할 때까지 제자 비비아니와 토리첼리를 지도했다.

그의 과학적 업적은 크게 천문학역학으로 나눌 수 있다. 천문학에서의 공헌은 망원경 관측에 의해 많은 새로운 발견을 한 데 있다. 또 별의 연주시차를 발견했고 빛의 속도가 유한하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케플러 법칙을 무시하고 원운동을 고수한 점이나 중력을 마술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한 점 등은 그의 한계였다(→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

역학을 과학의 한 분야로 성립시킨 것도 그의 업적이다. 특히 ''과 후에 뉴턴에 의해 공식화된 역학을 수학적으로 해석하여 힘과 운동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암시했던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G. D. de Santillana 글 | 金東源 참조집필

 

 

칭기즈 칸 [成吉思汗, Chinggis Khan]

Chinggis는 Genghis, Chingis, Jenghiz, Jinghis라고도 씀. 본명은 테무진(Temüjin : 또는 Temuchin).

1155 또는 1162/67 몽골 바이칼 호 근처~1227. 8. 18.

몽골의 무사·통치자.

개요

그의 손자 쿠빌라이(忽必烈)가 원(元)을 세운 후 원의 태조(太祖)로 추증되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복왕 가운데 하나이며, 유목민 부족들로 분산되어 있던 몽골을 통일하고 제위(帝位 : 칸)에 올라(1206) 몽골의 영토를 중국에서 아드리아 해까지 확장시켰다.

역사적 배경

야담(野談)으로 가득 차 있는 〈몽골족 비사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1240경)를 제외하고는 몽골 쪽의 자료가 아닌 사료들이 칭기즈 칸이 살았던 시대와 비슷한 시대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유사 이래 유목민과 정착민은 늘 접촉관계를 유지했다. 이 두 사회는 정반대되는 생활양식을 유지했기 때문에 늘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의존적인 처지에 있었다. 북방의 유목민들은 남부지역의 일부 주요산품과 그 지역의 사치품들을 필요로 했다. 유목민들이 이같은 물품을 얻는 방법은 무역·대상(隊商)·무력약탈의 3가지가 있었다. 중국의 정착민들은 유목민들이 사는 스텝 지역의 생산품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유목 야만족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유목민들의 내침을 막아내야만 했다.

스텝 지역 유목민들의 단합과 분열은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라 결정되었다. 유목민들은 세력이 강성할 때 결단력 있는 지도자를 옹립하여 다른 유목민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후 중국의 왕조가 쇠망의 길을 걷고 있으면 그들의 세력을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유목민들이 이같이 세력을 확장하여 남방정착민들의 문화를 수용하게 되면 결국에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유목민들은 원래 기동성이 뛰어나 후방에서 별도의 물자보급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세력확장 이후에는 이 전통적인 우월성을 상실해 끝내는 그들이 복속시킨 중국인들에 의해 동화되고 말았다. 그후 중국에는 다시 강력한 제국이 일어나고 유목민들은 족장들끼리 끊임없이 싸움을 벌여 분열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흥망성쇠는 계속 반복되었다. 몽골 정복의 역사는 이같은 형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긴장을 배경으로 하여 칭기즈 칸의 생애가 검토되어야 한다. 그는 자신이 속한 부족들 내부에 재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고 또 그당시 중국과 기타 정착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정복자의 길로 나선 것이었다.

초기의 투쟁과정

칭기즈 칸의 정확한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며, 그의 본명인 테무진은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패배시킨 적장의 이름을 본뜬 것이라 한다. 테무진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때 손에 피 한 움큼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유년시대는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9세 때 몽골 왕족 보르지긴족의 후예인 아버지 예수게이가 그의 부족과 오랜 불화관계에 있던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되었다. 예수게이가 죽자 부족 사람들은 예수게이와 정적인 타이치우트 일가의 사주를 받아, 예수게이의 미망인 호엘룬과 그 자녀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했다. 이로 인해 테무진의 영세한 가문은 유목민의 일상음식인 양고기와 우유는 전혀 먹지 못하고 풀뿌리와 생선으로 연명하는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다.

테무진과 그의 가족은 비록 보르지긴족들의 배척을 받긴 했지만 왕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대접을 받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기 전에 정혼해준 아내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 북방에 사는 메르키트족은 예수게이가 그들에게 빼앗은 여자인 호엘룬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테무진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메르키트족은 테무진의 아내인 보르테를 강간했다.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족의 왕인 토그릴에게 사정을 말하여 보르테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당시 토그릴은 몽골 지역 안에서 가장 강대한 통치자였다. 테무진은 결혼기념물로 받은 잘의 모피를 토그릴에게 선물했고 답례로 토그릴은 테무진의 흩어진 부족민들을 모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후 토그릴은 테무진에게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고 테무진의 어릴 적 친구인 자무카도 설득시켜 병력을 제공하게 함으로써 그 약속을 지켰다. 테무진 일가의 궁핍과 이웃 부족의 왕이 제공한 대규모 병력은 상반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우나, 〈몽골족 비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권력에의 부상

강력한 동맹세력의 후원을 받은 테무진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메르키트족을 패배시켰다. 또한 장래에 자신을 반역할 기미가 있는 부족은 초토화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배후에 적을 남겨놓는 경우가 절대 없었다. 수년 뒤 중국을 침공하기에 앞서 먼저 등 뒤에서 자신을 찌를 유목민 통치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메르키트족에 이어 주르킨족의 귀족들도 패배시켰다. 왜냐하면 주르킨족의 귀족들은 테무진의 동맹세력이었으나, 테무진이 타타르족 공격에 나선 틈을 이용하여 그의 재산을 약탈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부족의 귀족들을 모두 처형했고 평민들은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그는 강대한 타타르족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전투에서 타타르족을 패배시킨 뒤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자들은 모두 죽이고 단지 아이들만 살려두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커서 자신들의 신분을 잊고 몽골의 충실한 추종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케레이트족의 왕 토그릴과의 동맹관계도 마침내 붕괴되었고 테무진은 그마저도 최고권력을 잡는 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여 제거했다.

테무진은 토그릴을 패배시킨 뒤 케레이트족을 모두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테무진은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옛 정적·귀족 들은 하나도 살려두지 않을 속셈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이들의 군대를 빼앗아 자신의 군대로 삼고, 둘째, 몽골 지역의 분열을 가져온 소속 부족 안에서의 충성심을 분쇄하고, 셋째, 모든 유목민 부족을 통일하여 테무진의 가문에만 충성을 바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1206년 모든 스텝 지역을 통치하는 황제로 추대되었을 때 그는 수천 명에 달하는 피복속 부족의 사람들과 그 지역을 자신의 친·인척, 동료들에게 나누어 관리하게 했다. 그리하여 기존 부족·가문의 조직된 형태를 바꾸어 봉건제도와 유사한 조직을 만들어냈다.

메르키트족을 패배시킨 이래 테무진은 스텝 지역의 최고 실력자가 되려는 목표를 세웠다. 부족의 지도자들은 테무진의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12세기말에 이르자 그들 지도자 가운데 일부는 테무진을 몽골족의 칸(왕)으로 옹립하자고 제의했다. 또한 그 지도자들은 전쟁과 수렵에서 테무진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조건을 보면 테무진에게 믿음직스러운 장수가 되어달라는 것이었지, 그들을 지배하는 군왕(君王)이 되어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뒤 실제로 일부 부족의 지도자는 그를 배신했다. 그당시만 하더라도 테무진은 세력이 미약한 족장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 북부를 통치하고 있던 금(金)나라의 황제는 테무진을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유목민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여 변방의 평화를 유지했던 금은 가끔씩 변방정책을 바꾸어 그들의 동맹세력인 타타르족을 공격했다. 토그릴과 함께 테무진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타타르족의 배후를 공격했다. 나라 황제는 토그릴에게 (王)이라는 칭호를 내렸고 테무진에게는 그보다 낮은 칭호를 내렸다. 실제로 그후 몇 년 동안 금은 테무진의 존재를 전혀 위협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테무진은 스텝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나가는 일에 몰두했기 때문에 중국에게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테무진은 조직적으로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친구이며 오랜 동료였던 자무카가 조직한 여러 세력의 연합은 그에게 패배를 거듭하여 그 존재가 없어졌고, 타타르족은 몰살당했다. 토그릴은 자무카의 설득과 아들의 야망과 질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테무진에게 대항하여 싸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토그릴과 케레이트족은 모두 전멸했다. 서부지역의 나이만족 통치자는 몽골족의 강력한 세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무카와 합동으로 연합세력을 형성했으나, 완전히 패배했고 나이만 왕국은 없어졌다. 한편 변덕이 심한 자무카는 마지막 순간에 나이만족 왕을 배신했다. 이같은 전쟁은 1200년대 초반에 벌어졌고 테무진은 스텝 지역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1206년 오논 강변에서 열린 대회의에서 테무진은 칭기즈 칸('전세계의 군주라는 뜻')으로 추대되었다.

몽골족의 통일

1206년은 몽골 및 세계의 역사에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몽골족은 스텝 지역 밖으로 출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몽골 자체도 새로운 조직으로 재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인해 통일된 몽골족이 존재하게 되었고, 몽골족은 많은 변천과정(봉건적 분열, 부족간의 세력다툼 재연, 식민통치)을 거쳐 오늘날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몽골족의 야망은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해나가는 것이었다. 칭기즈 칸은 세계정복의 원대한 야망을 실현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몽골국은 무엇보다도 전쟁을 치르기 위한 조직으로 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군대는 10진법 체제로 나누어져 엄격한 기강을 유지했고, 보급품과 군비를 갖추었다. 부장(部將)들은 칭기즈 칸의 아들이거나 그에게 절대충성을 바치는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칭기즈 칸은 군사적으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급속하게 변하는 외부환경에 잘 적응했다. 처음에 그의 군대는 사료가 필요 없는 튼튼한 초식동물인 몽골 조랑말을 타는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군대로 다른 유목민들은 패배시킬 수 있었지만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곧 몽골족들은 규모가 큰 성읍도 투석기·쇠뇌·사다리와 끓는 기름 등을 사용하여 함락시킬 수 있었고 흐르는 강물을 다른 데로 돌려놓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착문화를 가진 국가와 접촉하게 되면서 칭기즈 칸은 서서히 공격·파괴·약탈보다 더 멋진 권력의 향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칭기즈 칸에 대항했던 마지막 몽골 부족인 나이만의 한 신하는 그에게 문화의 유용함을 일깨워 주었고, 몽골어를 문자로 정착시키는 일을 도와주었다. 〈몽골족 비사〉에 의하면 1222년말 아무다리야(고대명은 옥수스) 강과 시르다리야(고대명은 작사르테스) 강 지역에서 화레즘 샤 왕조와 전쟁을 벌였을 때, 칭기즈 칸은 이슬람 출신의 측근으로부터 성읍의 의미와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한때 금나라의 신하였던 또다른 측근은 농민과 장인들이 생산해내는 물품은 과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었다. 칭기즈 칸은 당초 중국 북부의 비옥한 전답들을 말의 목초지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시킬 위대한 정복은 아직 수행되지 않은 단계였고 그 주목표로 중국이 떠올랐다. 칭기즈 칸은 중국 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西夏)와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211년 중국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금을 향해 진격했다. 1214년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가 1215년 전쟁을 재개하여 베이징[北京]을 함락시켰다. 그뒤 중국 북부의 완전한 장악은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칭기즈 칸은 중국에서 더 나아가 화레즘 샤의 정벌에 나섰다. 그 전쟁은 칭기즈 칸의 보호를 받고 있던 한 이슬람 대상을 몰살시킨 오트라르 시(市)의 지사(知事) 때문에 촉발되었는데, 화레즘의 왕은 이에 대한 보상을 거부했다. 화레즘 샤와의 전쟁은 조만간 벌어지게 되어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 전쟁을 연기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몽골족은 끔찍한 야만적 행동을 자행하여 이그만족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몽골족은 모든 도시를 휩쓸었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동족들을 몰살시키는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칭기즈 칸이 화레즘 샤를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전을 펼쳐나가는 동안 전답과 화원은 황폐화되었고 관개시설은 파괴되었다. 1223년 마침내 그는 철수했고 1226~27년 서하를 상대로 마지막 전역(戰役)에 나설 때까지 더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1227년 8월 18일에 죽었다.

평가

여러 가지 다른 근거들을 종합하여 판단해볼 때, 칭기즈 칸은 다면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뛰어난 체력, 강한 목표의식,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고집이 센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내들이나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조언을 즐겨 들었다. 남을 속이기도 했지만 사소한 일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토그릴이나 자무카와는 달리 충성심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상관을 배신하는 적수들은 칭기즈 칸으로부터 차가운 대접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는 그들의 배신을 이용할 줄도 알았다. 그는 종교적 신앙이 강하여 신이 자신에게 내려준 신성한 사명을 늘 의식했고, 위기의 순간마다 몽골족의 최고신에게 깊은 경배를 올렸다. 이같은 경향은 그의 유년시절에 특히 강했다. 그러나 스텝 지역을 벗어나 외부의 낯선 정착문화와 접촉하게 되면서 그의 성품 가운데 다른 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학살과 약탈에 의해 얻어지는 직접적인 이득 외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고, 때로는 복수의 일념으로 불타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평생 자신에게 충성할 사람들을 주위에 끌어모았다. 그리하여 그의 추종자들 중에는 동료 유목민뿐만 아니라 정착문화 세계에 사는 문화인들도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적응력이 뛰어나고 배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군사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조직, 기강, 기동성, 무자비한 목적의식 등이 근본적인 바탕이 되었다. 특히 피정복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약탈을 자행하는 것이 그가 정기적으로 사용해온 무기였다. 성읍들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그 요구에 응하지 않는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이 일종의 심리전이었다고 이야기되어 왔지만, 그가 사용한 방법은 20세기에 저질러진 학살에 비교될 만큼 잔인했다. 학살정책은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저항의식을 꺾고자 한 것이었지만 학살을 위한 학살도 많이 자행되었다.

칭기즈 칸의 업적은 위대했다. 그는 유목민 부족을 모두 통일했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화레즘 샤나 금 같은 대제국을 정복했다. 또한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의 부족들을 피폐시키지 않았다. 그는 아들인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선임하고, 다른 아들들이 오고타이의 말에 따르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으며, 오고타이에게 강성한 군대와 국가를 물려주었다. 칭기즈 칸이 죽었을 때, 베이징에서부터 카스피 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몽골 제국의 영토로 복속되었고, 그의 부장들은 페르시아와 러시아를 침공했다. 또한 그의 후계자들은 중국, 페르시아, 러시아의 대부분 지역에까지 세력의 판도를 넓혔다. 그들은 칭기즈 칸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그들의 정복지역을 잘 조직된 제국으로 개편하는 일을 실행했다. 칭기즈 칸은 파괴와 약탈을 자행했으나 그가 벌인 정복전은 몽골 제국의 출현을 처음으로 알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몽골 제국은 중세와 현대를 통틀어 가장 영토가 큰 제국이었다.

C. R. Bawden 글

 

 

골다 메이어

(히브리어: ‏גולדה מאיר‎ 듣기  1898년 3월 3일 - 1978년 12월 8일)는 이스라엘을 건국한 정치인 중 하나였다. 노동부 장관, 외무부 장관을 거쳐 1969년 3월 17일부터 1974년 4월 11일까지 네 번째 총리를 역임했다. 메이어는 마거릿 대처 등이 이 별명을 이어받기 전까지 철의 여인이라고 불리었다.[1] 메이어는 이스라엘의 첫 (그리고 유일한) 여성 총리이며, 세계에서 세 번째 여성 총리이다.

어린 시절

메이어는 골다 마보비츠 (러시아어: Голда Мабовиц)로 러시아 제국(현재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의 이름은 Blume Naidtich와 Moshe Mabovitz이다. 메이어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그녀의 아버지가 포그롬이 다가온다는 소문을 들어서 집의 문에 널을 대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녀에게는 의형제가 일곱명 있었지만 어릴 적 다섯 명이 숨졌다고 한다.

1906년 메이어의 가족은 미국밀워키로 이민을 갔다. 그녀의 아버지는 목수로 일했고, 어머니는 식료품 가게를 운영했다. 그녀가 여덟 살 때 가족을 위해 가게를 맡아봐야 했다고 한다. 1906년에서 1912년까지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학생을 위한 Fourth Street School을 재학했다. 입학했을 당시 영어를 구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현재 이 학교는 메이어의 이름을 따서 Golda Meir 학교라고 불린다.

메이어가 14세일 당시 형편이 나빠지자 그녀의 어머니는 학업을 포기하고 결혼하라고 권하자 반항하고 덴버로 가출을 했다. 1913년 밀워키로 돌아왔다.

팔레스타인으로 이주

그녀의 남편 모리스 마이어슨과 함께 1921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고 키부츠에 가입했다. 그녀의 일은 아몬드를 따고 을 돌보고 부엌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남편은 키부츠에서의 생활에 싫증이 나서 1924년에 떠났다.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잠시 텔 아비브에 머물렀다. 점점 둘은 멀어졌으나 이혼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남편은 1951년 숨졌다.

1949년에서 1956년까지 노동 총리로 일했고, 1956년 데이비드 벤구리온 아래에서 공사가 되었다. 벤구리온이 그녀의 이름을 히브리어 이름으로 바꾸라고 요구하자 그녀의 성을 “마이어”(“빛을 만들다”를 의미)로 바꿨다. 1960년대 초 그녀는 림프종이 있다는 걸 발견했으나 1965년에 병이 심하게 악화될 때까지 비밀로 했다. 총리 레비 에쉬콜이 돌연사로 숨지자 1969년 이스라엘의 정당 Alignment은 그녀가 그의 자리를 잇도록 선택했다.

뮌헨 참사

1972년 하계 올림픽 당시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인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인 선수 11명을 사살하자 “우리의 시민들을 구해달라”라고 어필했다. 세계의 반응이 미지근하다고 느끼자 모사드를 조건없이 테러리스트를 죽이도록 허가했다.

욤키푸르 전쟁

전쟁이 시작한 날까지 이스라엘의 첩보 기관은 공격이 임박했는지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하였다. 공격이 시작하기 여섯 시간 전 그녀의 측근들은 전쟁을 시작하지는 않으면서 시리아를 미리 공격하는 게 좋다고 권유했다. 메이어는 유럽은 중동의 석유에 너무 크게 의지하여 무기를 제공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고, 오직 미국만이 이스라엘을 도와줄 수 있다고 믿었다. 선제공격을 할까 망설이다 결국에는 선제공격을 하면 이스라엘이 침략국으로 보일 것을 우려해 결국에는 하지 않기로 했다.

사직

욤키푸르 전쟁 후 이스라엘의 정부는 내부 불일치와 전쟁에 관한 판단에 대한 비난 때문에 혼란이 많았다. 1974년 4월 11일 공식적으로 사임했다. 1978년 12월 8일 예루살렘에서 암으로 숨졌다. 12월 12일 예루살렘에 매장했다.

 

 

이다 파이퍼

http://tong.nate.com/amy9410/132484


"아들들은 그때까지 상식과 신중함의 화신이자 모범 주부였던 어머니가 마흔이 훌
쩍 넘은 나이에 돈이나 동행도 없이 지구 구석구석을 돌아보겠다니 기절 초풍할
노릇이었다. 이다의 머리는 이미 희끗희끗했고 체력도 20여년간 고된 가사 노동에
시달려 바닥나 있었다. 그렇게 보란듯이 돌아다니는 일은 정신 병원에 있는 여자들
이나 할 만한 일이었다....."
필자가 최근 감명깊게 읽은 책 중의 하나인 '여자 모험가들'(기린원) 에 소개된
이다 파이퍼 (1797-1858)의 이야기다.
이다는 오스트리아 빈의 부유한 상인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당시 잘나가던 변호
사인 파이퍼 박사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고 매우 평범한 주부로 살아간다.
그러나 이다의 꿈은 '세계 여행'이었다. 낭만주의 시대의 유럽에서 여자의 몸으로
세계 여행을 한다는 것은, 지금으로 치자면 화성왕복여행 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이었
다.
이다는 결혼해서 가정주부와 어머니의 역할을 충실히 해 낸다. 그러나 파이퍼 박사
가 정부의 부정사건에 연류되면서 고난이 닥쳐왔다. 가세가 점점 기울어 먹고 살기
힘들어지자, 나날이 가난과 싸우는 일상으로 점철되었다.
이다는 서른이 훌쩍 넘은 어느날, 아이들과 생전 처음으로 바닷가에 놀러가게 되었
다. 이때 그는 수평선 너머 먼 곳에서 떠다니는 범선들을 보면서, 더러운 식기와 구
멍난 양말 사이에 사는 것 말고도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느닷없이 깨닫고 희
열에 가까운 충격을 느낀다.
이때, 이다는 뜻을 세운다.
'세계를 여행하면서 살겠다'고.....
고통스러운 생활을 버텨내던 이다는,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에 갈 때 쯤 되자, 드디
어 첫 여행을 떠난다.
이때가 이다의 나이 45세 때였다!
1842년 3월 2일 그녀는 마침내 아이와 남편과 가정을 뒤로 하고 홀로 떠났다.
이때부터 그녀는 그녀의 생을 마칠때까지 16년 동안 세계를 돌아다닌다. 모리셔
스, 마다가스카르, 인도네시아, 아메리카. 스칸디나비아, 인디아, 아이슬란드 등등....
백인 선교사들이 들어가 실제로 잡혀 먹기도 했던 보르네오의 악명 높은 식인종들
도, 이 늙고 조그만 체구의 할머니는 어쩌지 못했다.
이다는 식인종 마을에 가기 전에 그곳 말을 몇개 배운 뒤, 식인종들이 다가오면
"나같은 할머니 먹어서 뭐하게? 내 살은 질기고 맛도 없어!"라고 말했다.
그럼 식인종들은 파안대소하며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의 오지는 이다 파이퍼의 발길 아래 차례로 열렸다.
그 어떤 용감한 백인 탐험가도 가지 못했던 곳을 이다는 처음으로 가곤 했다.
그럼, 이다는 돈많은 여행자 였을까?
결코 아니다. 그녀는 조그만 가방과 꾸러미 하나만 가지고 여행을 했다.
첫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빈 여인의 성지 여행'이란 책을 써서 약간의 명성을 얻
게 된 이후, 학자들이나 명사들에게서 추천서를 잔뜩 얻어서 여행을 가곤 했다.
그 추천서란 이를 테면 이런 것 들이었다.
'*** 호의 선장님께, 이 편지를 가지고 가는 여성은 이다 파이퍼란 분으로, 댁의
배로 어디어디까지 여행을 하려 합니다. 이 분은 매우 용감한 여성 여행가이며 오스
트리아에서 유명한 분이므로 당신의 배를 이용할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마다가스카르의 프랑스 정부 상무관에게.
이 편지를 지닌 분은 이다 파이퍼란 분으로.....그곳에 머무는 동안 편의를 봐 주
시기 바랍니다.....'
'****호텔 지배인에게,
이번에 이다 파이퍼님이 그곳에서 300 마일 떨어진 오지를 여행할 계획이오니, 호
텔에 묵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다는 거의 무일푼으로 여행을 했다.
잠자리가 없으면 노숙을 했고, 먹을게 떨어지면 며칠 씩 굶었다.
그러면서 여행을 계속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가장 포악하다고 말하는 식인종
부락에 들어서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남자들이 모두 겁을 집어먹고 도망가 버리
면, 그녀는 혈혈 단신으로 그곳을 향했다. 그녀에겐,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인간도
말이 통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여행을 통해, 그녀는 5권의 책을 냈으며, 남편인 파이퍼 박사나 두 아들보다 더 명
성을 얻게 되었다.
물론 그녀의 여행기는 편견과 독설로 가득 차 있었고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려는 시
각도 부족했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은 남성의 소속물로 여겨지며 정숙한 주부를 최
고의 여인상으로 여겼던 1800년대 유럽에서, 돛을 단 범선으로 세계를 여행할 수 있
었던 여인은, 그것도 돈도 없이 지구의 곳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던 여인은 이다 파
이퍼 한 사람 뿐이었다.
그녀는 서른 살이 넘어서 처음 뜻을 세웠고, 40대 중반이 되어서 그 뜻을 처음으
로 실행에 옮겼다. 당시 그녀의 여행에 대해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그
녀의 아들들 조차 비웃어 댔다. 그녀가 지인들의 말을 듣고 뜻을 꺾었다면, 그녀는
지금껏 이름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이도 너무 많았고, 돈도 거의 없었으며,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도와주기 보다는
비난하길 좋아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기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세기를
뛰어 넘은 오늘날, 그녀의 일대기를 읽고 많은 사람들이 역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서른 즈음에, 늦었다고 생각하는가?

출처 : Tong - 춘희님의 라틴댄스 Talk!!통

 

제인 구달(Jane Goodall)
침팬지들의 어머니,
영국 출신의 제인구달(1934)은 1960년부터 현재까지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곰비 국립공원에서 야생 침팬지들과 함께 지내며 야생 영장류들의 생태를 연구해오고 있다. 침팬지도 저마다의 개성이 있다는 것, 침팬지도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 등 기존 학계를 뒤엎는 수많은 연구결과를 발표해 오고 있으며, 더불어, 사람들이 환경, 동물, 지역사회에 사랑과 관심을 갖길 바라는 마음에서 “루츠앤슈츠(Roots & Shoots)”라는 이름의 환경보호운동을 펼치고 있다. (www.janegoodall.org)
오늘날, 세계적인 침팬지 연구가이자 환경운동가, 제인 구달. 1960년, 과학연구에 관한 그 어떤 훈련도 받지 않았던, 심지어는 대학교육조차도 받지 않았던 26살의 한 여인이, 혈혈단신으로 아프리카 오지에 들어가 침팬지 연구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모두가 3달도 채 못 되서 되돌아올 것이라 입을 모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탄자니아의 곰비 국립공원에서 침팬지 연구를 계속해오고 있으며, 위대한 학문적 업적들을 물론이요, 두 발로 직접 뛰어다니며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파하고 있다. 아마도 짐작하겠지만, 동물이 너무 좋아서, 또 동물에 대해 너무 알고 싶어서,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 부족한 실력으로나마 동물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제인 구달은 절대적 icon이자, 기쁨이자, 희망이다. 비록, 그녀처럼 용감하게 아프리카 오지로 뛰어들어 현장 연구를 하고있진 못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는 그녀의 삶과 그녀의 열정, 침팬지, 더 나아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향한 그녀의 애정, 그녀의 모든 것들이 감사할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준 선물이라며 종 하나를 꺼내 울렸다.
“짤랑짤랑, 짤랑짤랑”
너무나 맑고 영롱한 그 종소리에 청중들이 낮은 탄성을 냈다. 그러자, 그녀는,
“이 종은 누군가가 밟은 지뢰가 터지면서 나온 파편 조각으로 만들어진 종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은 존재하는 법입니다”

웅변가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도, 강한 제스츄어도 없었지만, 그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감명깊은 강연이었다.

다음은, 그녀가 싸인과 함께 책에 써준 말이다
Together we can change the world !!

그녀에게 다시 한 번 더 감사의 말씀을 전하면서. 항상 건강하세요

출처 : http://www.animalpark.pe.kr/animalrights/janegoodall/janegoodall.htm

 

 

제시 오언즈

1936년 베를린 올림픽대회 육상 4종목 금메달
  • 경력 :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회 100m, 200m, 멀리뛰기, 400m 릴레이에서 우승

 

 

몬테수마1세

요약
고대 멕시코의 황제(재위 1436~1464).
국적 멕시코
활동분야 정치
본문
아스테크 왕국의 제5대 왕으로 인근 부족들을 정복하여 영토를 멕시코만(灣)까지 확대하여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건설하였다. 간척 ·치수 사업 등을 전개하였으며, 내정을 확립하고 법전을 정비하여 아스테크 왕국의 기초를 쌓았다.
출처 : http://ks.hmall.com/pf/top/qa_detail?eid=06V38

 

 

움 쿨쑴(Um-Khulthum)

아랍음악의 연주 양상

연주회의 양상은 텔레비전이 출현한 오늘날까지도 전통적인 양상이 남아있다. 이집트의 유명한 가수 움 쿨쑴(Um-Khulthum)의 독창회를 예로 들겠다. 가수가 먼저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두 부분으로 구성된 기악적 서곡을 연주한다. 첫 부분은 우드나 까눈으로 기악 독주곡을 연주한다. 이렇게 독주곡을 연주하는 동안 청중은 앞으로 들을 음악의 마캄을 예감하고 마음을 정돈한다. 이 독주 부분은 서양음악에 익숙한 사람이 들어도 아주 편안한 음악이다.
다음에는 탁트, 즉 관현악이 이어진다. 이 관현악은 유니즌 또는 옥타브 병행 진행으로 연주한다. 그래서 서양 화성음악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단조로움에 꽤 충격을 받는다. 관현악은 우드·까눈·네이·슈바베(shubbabeh, 피리 종류)·산투르·바이올린으로 편성한다. 최근 어떤 마캄에서는 아코디언·피아노·기타를 함께 편성하기도 한다. 타악기는 다프·두르바케 그리고 나카라도 가끔 등장한다. 사실 피아노는 다시 아랍 음정으로 조율하지 않는다면, 아랍음악 연주에는 적절한 악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피아노는 1/4음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레바논 작곡가인 튜휙 수카르(Tewfig Sukkar)는 피아노 곡으로 히자즈-카르 마캄을 이용한 적이 있다. 그는 연주 전에 피아노 조율을 이 선법에 맞도록 1/4음과 3/4음으로 조율하고 연주하였다.
다음에는 가수가 나와 '야 레일'(ya leil)의 주제로 즉흥 연주를 한다. 야 레일은 '오 밤이여'(o!, night)라는 뜻이다. 즉흥 연주의 가사는 오직 '야 레일'만 사용한다. 이것은 '낮 동안의 걱정에서 헤어나 편안히 쉬도록' 기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이 때 가수는 자기의 음악성과 기교를 보인다. 이후 본 곡이 나온다. 본 곡은 카시다(qasidah)·무와샤(muwashah)·둘랍(dullab)·다와르(dawr)로 구성된다.

출처 : http://blog.naver.com/sonya201/70010228051

 

 

파라오 하트셉수트

100여년 전 이집트 룩소르의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된 미라의 신원이 여성 파라오인 하트셉수트로 확인됐다고 자히 하와스 이집트 고유물최고위원회 위원장이 밝혔습니다.
하와스 위원장은 여왕의 명문이 새겨진 상자 안에서 발견된 부러진 이가 미라의 빠진 어금니 자리와 일치했다며 이 미라가 하트셉수트임을 100% 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와스 위원장은 하트셉수트 미라의 발견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견의 하나라며 이 미라가 여러 의문점과 미궁에 싸인 그녀의 사인을 규명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현재까지 미라의 분석결과 뚱뚱한 하트셉수트는 당뇨병을 앓았으며 50대에 간암을 앓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대 이집트 왕국 제18왕조의 5대 파라오인 하트셉수트는 '파라오'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유일한 여성 군주입니다.

출처 : http://kdaq.empas.com/qna/view.html?n=5744952&sq=%C7%CF%C6%AE%BC%C1%BC%F6%C6%AE

 

 

추근 [秋瑾]

(병)Qiu Jin (웨)Ch'iu Chin.

1877. 11. 15~1907. 7. 15.

근대 중국의 민주혁명가.

별칭은 감호여협(鑑湖女俠). 자는 쉬인칭[璿卿], 호는 징슝[競雄]. 저장 성[浙江省] 산음(山陰:지금의 사오싱[紹興]) 사람으로 시(詩)와 사(詞)에 뛰어났다. 1904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공애회(共愛會)·십인회(十人會)·홍문천지회(洪門天地會) 등에 참가하면서 혁명활동을 했고, 1905년초 중국으로 돌아와 광복회에 가입했다. 7월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여 저장 성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1905년 11월 일본정부가 청조의 요청으로 '청국(淸國)학생단속규칙'을 공포하자 1906년초 항의하여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1907년 1월 상하이[上海]에서 〈중국여보 中國女報〉를 창간하고 여권신장과 혁명을 부르짖었다. 후에 사오싱으로 가서 대통(大通) 사범학당을 운영했다. 또한 광복회와 연락을 맺고 광복군을 조직하여 서석린(徐錫麟)과 함께 저장 성과 안후이 성[安徽省]에서의 거사를 준비했다. 1907년 7월 6일 서석린이 안칭[安慶]에서 체포되어 봉기는 실패하고 말았다. 추근도 7월 13일에 체포되어 15일 사오싱의 쉬안팅커우[軒亭口]에서 처형되었다. 작품으로 〈추근집 秋瑾集〉이 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一 世, Elizabeth Ⅰ]

별칭은 The Virgin Queen, Queen Bess.

1533. 9. 7 잉글랜드 런던 근처 그리니치~1603. 3. 24 서리 리치먼드.

잉글랜드의 여왕(1558~1603 재위).

개요

이른바 엘리자베스 시대라고 불리는 그의 통치기에 잉글랜드는 정치와 상업 및 예술 분야에서 유럽 열강의 지위로 발돋음했다. 그의 작은 왕국은 심각한 내분에 시달렸지만, 현명하고 용감하며 당당한 엘리자베스는 국민들의 충성심을 북돋워서 외적과 맞서 나라를 통합하는 데 이바지했다.

어린시절

엘리자베스의 어린시절은 불우했다. 그는 튜더 왕가의 헨리 8세와 그의 2번째 아내인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헨리의 첫 아내인 아라곤의 캐서린은 스페인 왕의 딸로, 메리라는 딸 하나밖에 낳지 못했기 때문에 헨리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이때 헨리는 캐서린과의 이혼을 강행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과도 결별했다. 새왕비 앤 불린이 아들을 낳아주기를 바라는 헨리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왕비가 딸 엘리자베스를 낳자, 크게 실망한 헨리는 엘리자베스가 3번째 생일을 맞기 전에 왕비에게 간통과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참수했다. 뿐만 아니라 헨리의 부추김을 받은 의회는 헨리와 앤 불린의 결혼이 처음부터 무효였으며, 따라서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라고 선언했다. 젖먹이 때부터 햇필드의 별궁에서 외롭게 자란 어린 소녀에게 이런 사건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6세 때 이미 40세가 된 사람처럼 의젓했다고 한다.

1537년에 헨리의 3번째 아내인 제인 시모어가 아들을 낳음에 따라 엘리자베스의 존재는 더욱 약해졌지만, 홀대받지는 않았다. 왕위계승서열 3번째인 엘리자베스는 로저 애스컴을 비롯한 훌륭한 가정교사들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고전과 역사, 수사학 및 윤리 철학을 배웠으며, 그리스어와 라틴어 이외에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는데, 이런 외국어 능력은 나중에 그의 외교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영리하고 진지한 그녀는 신학도 공부하여 형성기에 있던 성공회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에드워드 6세와 메리 여왕 시대의 지위

1547년에 아버지 헨리가 죽고 10세밖에 안 된 이복동생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르자, 엘리자베스의 지위는 더욱 위태로워졌다. 헨리의 6번째이자 마지막 왕비인 캐서린 파는 헨리가 죽자마자 해군 사령관 토머스 시모어와 결혼했는데, 야심만만한 그는 자신의 형이자 에드워드 6세의 섭정인 에드워드 시모어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캐서린 파가 죽은 직후인 1549년 1월에 토머스 시모어는 반역죄로 체포되었고,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하여 혐의를 잡으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여러 번 심문을 받았는데, 굴욕적이고 위험한 박해 속에서도 놀랄 만큼 신중하고 냉정한 자세를 보였다. 시모어가 참수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1553년에 프로테스탄트인 에드워드 6세가 죽자, 열렬한 가톨릭교도인 메리가 즉위했다. 메리 여왕은 강제로라도 잉글랜드를 가톨릭으로 복귀시키려고 했다. 여왕이 가톨릭교도인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와 결혼한 것도 프로테스탄트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반란과 탄압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엘리자베스의 목숨은 매우 위태로워졌다. 표면상 가톨릭 계율에 순종하는 척했지만, 어차피 정부를 뒤엎고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회복하려는 음모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1554년 1월에 토머스 와이엇 경이 반란을 일으킨 뒤, 엘리자베스는 체포되어 런던 탑에 갇혔지만, 어머니와 같은 운명은 간신히 모면했다. 온갖 심문으로도 엘리자베스의 반역을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자, 2개월 뒤 그녀는 런던 탑에서 풀려나 1년 동안 우드스톡에 연금되었다. 메리의 통치기간 동안 엘리자베스는 줄곧 온갖 박해를 받으며, 자신의 결백과 언니에 대한 충성 및 가톨릭 신앙을 다짐해야만 했다.

즉위

1558년 11월 17일에 메리가 죽자, 엘리자베스는 거국적인 환영을 받으며 왕위에 올랐다. 그녀의 런던 입성과 화려한 대관식은 대중적 지지기반을 다지는 데 더없이 좋은 행사였다. 예컨대 군중 속에서 한 소녀가 메리 시대에는 금지되었던 영역판 성서를 바치자, 여왕은 그 책에 입맞추고 높이 들어올린 다음 가슴에 끌어안았다.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의 수도원장과 수도사들이 그녀를 환영하기 위해 대낮에 촛불을 들고 나오자, 여왕은 "그 횃불을 치워라! 그것 없이도 우리는 잘 볼 수 있으니까"라는 말로 그들을 가볍게 물리쳤다. 이리하여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를 단호하게 종교 개혁 쪽으로 돌려세웠다는 것을 천하에 알렸다.

여왕은 즉위하자마자 정부를 구성하고 포고문을 공포하기 시작했다. 추밀원의 규모를 줄인 것은 추밀원에 있는 일부 가톨릭교도를 숙청하고 추밀원을 좀더 효율적인 자문기구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충실한 행정 및 사법의 연속성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과 변화에 대한 욕구 사이에서 신중하게 균형을 유지했다. 그녀는 또한 윌리엄 세실과 니콜라스 베이컨, 프랜시스 월싱엄 및 니콜라스 스록모턴을 비롯하여 경험이 풍부하고 믿을 만한 조언자들을 주위에 모았다. 엘리자베스는 즉위한 날 아침에 윌리엄 세실을 수석국무장관으로 임명했고, 세실은 그후 40년 동안 현명하고 노련하게 여왕을 보필했다.

가부장적 세계의 여성 통치자

여자는 기질적으로나 지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나라를 다스리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런 믿음은 관습과 교육으로 더욱 굳어졌다. 남자는 이성적 존재인 반면, 여자는 충동과 열정에 지배되기 쉬운 동물이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였다. 신사는 유창한 언변과 전쟁 기술을 배웠지만, 숙녀에게는 입 다물고 바느질이나 하라고 강요했다. 상류계층의 남자들이 남을 지배하려는 의지를 갖는 것은 훌륭하고 당연한 일이었지만, 여자의 경우에는 위험하거나 기괴하게 보였다. 이러한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왕실 법률가들은 '왕의 두 육체'라는 신비주의적인 법 이론을 만들어냈다. 여왕이 즉위한 순간,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여왕의 '타고난 육체'는 영원히 죽지 않는 '정치적 육체'와 결혼한 셈이라는 것이 이 이론의 요점이다. 따라서 이 이론에 따르면, 군주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나라의 안정과 영광을 조금도 위태롭게 하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명목만이 아닌 실질적인 군주로서 나라를 다스릴 작정이며, 어느 개인이나 파벌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을 우선하겠다는 것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다. 이복 언니가 여성 통치의 모범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여성의 문화적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본보기가 되어야 했다. 게다가 잉글랜드 통치자의 권한에는 한계가 있었다. 군주는 국가의 수반이었지만, 잉글랜드는 상비군도 없고 효율적인 경찰력도 없으며 고도로 발달한 관료제도도 없는 가난하고 허약한 나라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재원을 얻기 위해, 여왕은 까다로운 의회를 상대로 협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여왕은 왕의 지배권과 애정문제를 융합시킨 통치 전략을 개발했다.

엘리자베스를 잉글랜드 왕국과 결혼한 '처녀 여왕'(Virgin Queen)으로 예찬하는 분위기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점진적으로 형성되었지만, 그 뿌리는 1555년에 이미 엿볼 수 있다. 당시 메리 여왕은 여동생을 확고한 가톨릭교도인 사보이 공과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매사에 조심스럽고 냉정한 엘리자베스는 눈물을 쏟으며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엘리자베스는 다른 신랑감도 모두 거부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되자 적당한 남편을 구하는 문제가 당장 심각한 고려 대상이 되었고, 여왕의 신랑감은 중대한 국가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여왕의 결혼에는 왕조의 이해 관계가 걸려 있었다. 여왕이 자녀를 낳지 않고 죽으면, 튜더 왕조는 단절될 터였다. 여왕의 가장 가까운 친척은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였다. 메리는 헨리 8세의 누이인 마거릿의 손녀이며 가톨릭교도로서, 프랑스를 비롯한 강력한 가톨릭 국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들은 메리가 잉글랜드 여왕이 될지도 모른다는 악몽 같은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엘리자베스가 프로테스탄트 후계자를 낳아 주기를 원했다.

여왕의 결혼은 후계 문제만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대외문제에서도 중요했다. 고립되고 군사적으로 허약한 잉글랜드는 유리한 결혼으로 강력한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 스웨덴의 에리크 14세, 나중에 프랑스 왕이 된 앙주 공작 앙리,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를 비롯한 여러 후보자들이 구혼자로 나섰다. 엘리자베스로서는 이들 가운데 1명을 골라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결혼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는 위험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구혼자들을 서로 경쟁시켜 교묘히 실속을 차리면서 몇 개월씩, 때로는 몇 년씩 결혼 협상을 계속했다. 한때는 거의 청혼을 받아들일 것 같은 태도를 보이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영원히 처녀성을 지키겠다는 맹세 쪽으로 돌아서곤 했다.

구혼자로 나선 인물은 잉글랜드 안에도 있었다. 가장 끈질긴 구혼자는 여왕의 총애를 받은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였다. 1560년 9월에 레스터의 아내가 의심쩍은 상황에서 죽자, 레스터는 당장이라도 여왕과 결혼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왕은 계속 그에게 다정한 태도를 보여 사람들의 입담에 오르내리면서도, 끝내 결정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레스터와 결혼하기를 망설인 것은 정치적 이유에서였다. 레스터는 궁정에 적이 많았고, 평판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가 결혼하지 않기로 작정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권력을 남편과 나누어 갖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왕은 장관들의 솔직한 조언과 충고를 장려하고 존중했지만, 자신의 궁극적인 권한은 가장 신뢰하는 장관한테도 양보하지 않았다. 여왕이 청하지도 않았는데 주제넘게 조언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었다. 1579년에 존 스터브스가 가톨릭교도인 알랑송 공작과 여왕의 결혼설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책자를 발표하자, 여왕은 그 소책자의 저자와 출판인을 체포하여 오른손을 잘라버렸다.

여왕은 측근조차도 속아넘어갈 만큼 연기를 잘했기 때문에, 궁정의 음모와 불안이 병적으로 고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도 여왕은 그런 불안을 진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고 이용함으로써 파벌을 조종하는 데 능숙한 솜씨를 보였다. 이러한 솜씨는 결혼 협상에서도 발휘되었고, 그의 통치의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

초기에는 의회와 여왕의 사이가 지극히 원만했으나, 이윽고 결혼과 후계문제로 조성된 긴장 속에서 차츰 서로 사이가 벌어졌으며 의회가 열릴 때마다 하원과 여왕 사이에는 복잡하고 신랄한 협상이 벌어졌다. 급진적인 의원들은 광범위한 공공 정책 분야를 토론 범주에 포함시키고 싶어했지만, 여왕의 대변인들은 정부 법안에 대한 자유 토론을 제한하려고 애썼다. 엘리자베스는 완고함과 상냥함을 겸비한 보기드문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이 2가지는 모두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연기였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정치 언어를 사랑의 언어로 바꾸고, 자신을 왕국의 부인이나 어머니로 비유하곤 했다. 여왕은 의회 대표들을 다룰 때에도 구혼자나 궁정 신하들을 다룰 때처럼, 여성이라는 사실을 중대한 장애가 아니라 뚜렷한 이점으로 바꾸곤 했다.

종교문제와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운명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를 프로테스탄트 쪽으로 돌려놓았다. 1559년에 의회에서 통과된 수장령(首長令)은 헨리 8세의 반교황적 법령을 되살렸으며, 여왕을 성공회의 수장으로 선언했다. 엘리자베스 정부는 이런 구조적 개혁과 교회 예배에 대한 개혁을 신중하고도 꾸준하게 추진했다. 많은 귀족과 젠트리들은 대다수 평민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지켰지만 정부와 교회의 중요한 자리는 모두 프로테스탄트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과격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런 조치조차 지나치게 소심하고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교회의 성직체계와 교회 재판소를 철저히 개혁하고, 기도서와 교회 의식에 남아 있는 가톨릭의 요소를 말끔히 씻어내며, 성공회 기피자를 적극적으로 색출하여 탄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여왕은 이런 요구를 모두 거부했다. 개혁은 충분히 이루어졌고, 더이상 소동을 일으키면 사회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귀족을 자극하며 기존 권력에 대한 충성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백성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신념을 꼬치꼬치 캐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영국국교회).

엘리자베스의 종교적 타협은 프로테스탄트의 불만 때문만이 아니라 가톨릭교도의 저항과 반대에 의해서도 위협을 받았다. 이 반대는 처음에는 비교적 수동적으로 보였지만, 1560년대말과 1570년대초에 일어난 일련의 위기는 그것이 얼마나 심각하고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1569년에 완강하게 가톨릭 신앙을 고수한 잉글랜드 북부지역에서 봉건 귀족과 그 추종자들이 일으킨 반란은 무력으로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1571년에 여왕의 첩자들은 '리돌피 음모'라는 국제적인 여왕 암살 음모를 적발했다. 이 2가지 위협은 모두 1568년에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나 잉글랜드로 망명한 메리 여왕과 연결되어 있었다. 가톨릭 교회가 진정한 잉글랜드 여왕으로 간주한 메리는 손님이라기보다 볼모 같은 존재였지만, 엘리자베스에게 중대한 정치적·외교적 문제를 제기했으며, 이 문제는 메리의 끊임없는 야망과 모사적 성향 때문에 더욱 심각해졌다.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잉글랜드에서 내보내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지만, 메리를 처형하라는 의회와 조언자들의 충고도 완강히 거부했다. 그래서 메리는 불길하고 사악하면서도 불쌍한 볼모로 남아 있었다.

종교적 긴장과 정치적 음모 및 폭력의 증가는 잉글랜드 내부의 관심사만이 아니었다. 1570년에 로마 교황 피우스 5세는 엘리자베스를 파문하고, 여왕의 백성은 여왕에 대한 충성서약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그결과 잉글랜드 가톨릭교도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1572년에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 대학살 사건이 일어나자, 잉글랜드 가톨릭교도에 대한 의혹은 더욱 강해졌다. 유럽 대륙에서 훈련받고 잉글랜드로 다시 잠입한 잉글랜드 예수회의 대담하고 은밀한 선교활동은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고, 성공회 기피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강력해졌다. 엘리자베스는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구 교도들 사이의 분쟁에 개입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특히 네덜란드에서 스페인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반란군을 지원하라는 압력이 거셌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개입을 망설였다. 설령 프로테스탄트의 이름으로 일어난 반란일지라도 반란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고, 게다가 여왕은 돈 쓰기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한참 동안을 망설이다가 약간의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1585년에는 소규모 원정군을 네덜란드에 파견하는 데 동의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1580년에 포고령을 발표하여 비열한 이단자를 제거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라고 선언한 뒤, 엘리자베스 암살 기도가 더욱 우려되었다. 1584년에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인 오라녜 공 빌렘이 암살당했다. 엘리자베스는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지배계층은 강한 불안을 느꼈다. 잇따르는 음모, 예수회에 대한 박해, 외국이 잉글랜드를 침략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도는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추밀원은 엘리자베스가 암살당할 경우 암살자들만이 아니라 그 암살로 이익을 얻는 왕위요구자도 죽이겠다고 맹세했다. 이것은 분명 메리를 겨냥한 맹세였다. 프랜시스 월싱엄 경이 이끄는 정부 첩자들은 그때쯤 이미 메리가 여왕 암살음모에 깊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월싱엄의 부하들이 1586년에 또다른 엘리자베스 암살음모인 배빙턴 음모를 적발했을 때, 메리 여왕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메리의 밀서가 당국에 넘어가, 메리가 배빙턴 음모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메리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의회는 즉시 처형을 요구했다. 엘리자베스는 3개월 동안 망설인 끝에야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다. 1587년 2월 8일, 메리가 참수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엘리자베스는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여왕은 메리의 아들인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은 메리를 처형할 의도가 조금도 없었으며 사형 집행 영장을 전달한 사람을 투옥했다고 말했다. 엘리자베스의 이 말을 믿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유럽 대륙의 가톨릭교도들은 여왕을 맹렬히 비난했고, 프로테스탄트들은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던 한 여인의 죽음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오랫동안 엘리자베스는 프랑스 및 스페인과 복잡한 외교 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1580년대 중엽에 이르자, 스페인과의 무력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이 차츰 분명해졌다. 스페인 왕 펠리페 2세가 함대를 모으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런던에 전해졌다. 펠리페 2세는 이 함대를 이끌고 네덜란드로 가서 파르마 공작이 이끄는 스페인군과 합류한 다음, 잉글랜드를 침공할 작정이라는 소식이었다. 늘 인색하기만 했던 여왕도 이번에는 충분한 자금을 들여 기동력이 뛰어나고 충분한 무장을 갖춘 함대를 갖추는 데 동의했다. 1588년 7월에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잉글랜드 해역에 도착하자, 여왕의 배들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해전의 하나에서 적군을 무찔렀다(→ 드레이크). 패퇴한 스페인 함대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심한 폭풍우에 휘말려 거의 모두 파괴되었다.

여왕의 이미지

엘리자베스는 인색했지만, 몸치장에는 아낌없이 돈을 썼다. 공들여 만든 아름다운 옷과 값비싼 보석에 대한 정열에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여왕은 자신의 이미지에 지나치게 민감했다. 그래서 잉글랜드 안팎에 나도는 초상화를 통제하려고 애썼고, 대중 앞에는 항상 화려하고 장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에드먼드 스펜서 같은 시인들과 니콜라스 힐리어드 같은 화가들은 다양한 신화적 모습(순결한 달의 여신 디아나,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 요정 나라의 여왕 글로리아나)으로 여왕을 찬양했다. 엘리자베스의 통치 말년에는 흉년과 지속적인 물가 폭등 및 실업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국민의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여왕의 총신들은 대중의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아일랜드를 정벌하기 위한 일련의 군사적 시도는 엘리자베스의 마지막 총신인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의 항명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로버트 데버루는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파견되었지만, 왕명을 어기고 런던으로 돌아와 반역을 기도했다. 그는 1601년 2월 25일에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엘리자베스의 오랜 통치도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왕은 우울증과 질병에 시달렸고, 점점 쇠약해지는 조짐을 보였다. 1603년 3월 24일 엘리자베스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를 후계자로 지명한 뒤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잉글랜드는 새 국왕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몇 년도 지나기 전에 잉글랜드인들은 '훌륭한 베스 여왕'시대에 향수를 느끼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죽기 오래 전부터 여성의 권위와 왕의 위엄 및 국가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강력한 이미지를 심어 놓았고, 그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있다.

E. Jenkins 글

 

 

라덴 아젱 카르티니

인도네시아의 어머니, 카르티니

라덴 아젱 카르티니(Raden Adjeng kartini). 이는 인도네시아에서 '국모'로 추앙받는 인물.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의 선각자, 여성운동의 선구자, 교육운동가로서 카르티니는 인도네시아를 위해 삶 바친 여러 사람 중에서도 유난히 사랑받는다. 자바 북부 렘방에 있는 묘지에는 지금도 이를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카르티니는 25년이란 아주 짧은 삶을 살았다. 그이의 삶은 오히려 평범한 '여인의 일생'으로 보인다. 그런 사람을 '인도네시아의 어머니'라고 하는 까닭은 무얼까?

카르티니는 1879년 자바 북쪽의 작은 섬 재파라에서 태어났다. 그때는 식민지로 사는 데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 버린 시대다. 그이가 태어났을 때 북부 아체(Aceh)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 몇 년째 네덜란드와 싸우는 중이긴 했으나, 인도네시아인 거의가 민족이란 개념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라는 이름조차 없었다. 그때 정식 이름은 네덜란드 동인도. 인도네시아라는 이름은 1929년에 처음 생겼다.

카르티니의 아버지는 네덜란드가 키워낸 식민지 출신 행정관료였다. 그처럼 식민통치를 목적으로 네덜란드가 키운 식민주 출신 행정관료를 '쁘리야이'라 한다. 훗날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이 된 수카르노도 '쁘리야이'였다. 카르티니는 울창한 숲에 들러싸인 큰 저택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개명한' 아버지 덕분에 네덜란드인 아이들만 다니는 유럽식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카르티니는 점차 민족 의식에 눈뜨고 여성을 속박하는 자바의 전통을 답답하게 여기게 되었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자바의 풍습에 따르면 성인이 된 상류층 여자는 함부로 바깥출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르티니는 여성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싶었다. 네덜란드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면 교육, 특히 여성에 대한 교육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마침내 카르티는 쁘리야이 자녀들을 위한 여학교를 세운다. 1902년 그이의 나이 스물세 살 때다. 이 학교는 서구식 근대 교육을 하되 학생들에게 향토 자바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심어 주는 데 주력했다.

이듬해 카르티니는 렘방의 도지사 조하드닝라트와 결혼하여, 첫 아들을 낳고는 출산 후유증으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겨우 스물다섯 살. 이로써 카르티니의 삶을 마감되었다. 그런데 7년 뒤, 생전에 카르티니가 친구와 동료에게 보낸 104통의 편지를 모은 서한집 《어둠에서 빛으로》가 출간되면서 카르티니는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 5년 동안 쓴 이 편지들에는 카르티니의 생각과 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도네시아는 섬나라다. 만 개가 넘는 섬 가운데 자바, 수마트라, 발리, 티모르 정도가 우리에게 익숙하다. 독립이냐 자치냐를 둘러싼 뜨거운 싸움 끝에 투표로 독립을 이룬 동티모르는 1975년 인도네시아에 편입되었다. 인도네시아의 중심지는 자바다. 자바 섬에 네덜란드 인이 도착한 것은 1595년이었다. 코르넬리스 더 하우트만이 이끄는 네덜란드 탐험대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건너왔다. 그뒤 인도네시아는 약 350년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는다.

그런데 19세기 말, 네덜란드는 식민지 정책을 조금 바꾸었다. 탄압 일변도의 강경책을 거두고 유화정책을 펴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윤리정책'이라 한다. 윤리 정책의 목적은 식민지 원주민 가운데 행정, 문화 각 분야의 전문가를 키워 이들을 통치의 매개로 삼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학교를 세워 서구식 교육을 권장하고 의학, 농업, 목축, 공업 등 각 분야의 직업 교육을 장려했다. 이 서구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민족의식에 눈떠 조국의 식민지 상태를 깨달은 선각자들이 태어났다. 이들은 서구의 여러 사회사상을 배우는 한편, 같은 교육을 받고도 네덜란드 인에 견주어 차별당하는 인도네시아 인의 처지에 분노했다.

카르티니는 한 자루 펜에 의지하여 근대화에 대한 자신의 꿈을 그려 놓았다.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꿈. 학교를 세우는 꿈, 서민들과 사귀고 함께 생활하는 꿈, 자신이 갇혀 있는 공간으로부터 해방되는 꿈.... 그런가 하면 고향 자바의 풍요로운 자연을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하고 고향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다.

편지에 쏟아놓은 카르티니의 사랑과 아픔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카르티니는 차츰 민족의 꿈의 근원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카르티니의 이름을 빌려 민족의 희망과 자신의미래를 말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카르티니는 '인도네시아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19세기는 서유럽에게 진출의 시대다. 식민지를 찾아 앞다퉈 종방진출에 나선 이들의 움직임을 우리는 제국주의라 부른다. 아시아, 아프리카에게는 외세의 침략을 받는 가운데 민조기의식이 뻗어나는 시기다. 인도네시아는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져 '민족'이란 공동체 개념이 거의 없다가, 외세의 침략을 받으면서 운명 공동체로서의 '민족'을 자각하게 되었다.

카르티니는 뻗어나는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의 상징이었다. 순수하고 뜨거운 마음을 간직하고 짧게 살다 간 탓에 더더욱 아름답게 기억되는지도 모른다. 그가 여성의 사회적 지위향상과 계몽에 뜻을 둔 것은 바로 민족의식에 자기 삶을 바친 작은 실천 행위였다.

4월 21일은 카르티니의 생일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이날을 '카르티니의 날'이라 하여 성대한 경축 행사를 벌인다고 한다. 카르티니, 그는 평범하고 짧게 살았으되 죽어서 역사 속에 살아남은 평범치 않은 여성이었다.

출처 : http://blog.naver.com/saellina/30002510057

 

 

리차드 파이만

http://www.reportworld.co.kr/search/result_all.html?srchmenu=&kwd=%B8%AE%C3%B3%B5%E5+%C6%C4%C0%CE%B8%B8

 

 

샐리라이드

1983년 6월 18일 미국, 첫 여성우주인 샐리라이드 태운 유인우주왕복선 챌린저호 발사

출처 : http://blog.daum.net/roadtour/11674775

 

 

시몬 볼리바르

자세한 내용은 http://www.reportshop.co.kr/data/data_view.html?rpID=122311 여기로

목차
  1. 역사의 주변에서 독립을 외치다.

2. 볼리바르의 성장 과정

3. 조국과 결혼한 볼리바르

4. 다시 타자의 역사 속으로

5. 역사의 주체
본문
  1. ꡐ역사ꡑ의 ꡐ주변ꡑ에서 ꡐ독립ꡑ을 외치다.
아메리카 대륙은 1492년 콜럼부스에 의해 ꡐ역사ꡑ 속에 등장하게 된다. 여기서의 ꡐ역사ꡑ는 유럽의 사가들이 기록하는 자신들의 행적에 관한 유럽 중심의 역사로 정의 할 수 있겠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하던 유럽인들의 시각으로는 아메리카는 여전히 미개인들이 사는 광활한 땅, 유럽의 경제적인 풍요를 위한 식민지 일 뿐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갖지 못했다. 미국은 끊임없는 1776년의 독립선언으로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자기들의 역사를 갖는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지만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압재아래 있던 남미 대륙이 독립을 쟁취하고 자기ꡐ역사ꡑ의 주체로 나서게 되는 것은 그보다 조금 늦은 19세기 초에 이르러서이다. 그리고 그 독립투쟁의 과정에 ꡐ시몬 볼리바르ꡑ가 있었다.
2. 볼리바르의 성장 과정
시몬 볼리바르는 1783년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개방적인 도시 카라카스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부모를 여윈 볼리바르는 동생 빈센테, 두 명의 누이와 함께 할아버지와 외삼촌의 돌봄 아래 성장한다.
그는 시몬 로드리게스와 안드레스 베요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특히 루소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로드리게스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 로드리게스는 루소의 <에밀>을 기본으로 하여 로드리게스를 가르치게 되고 이런 스승의 가르침은 볼리바르가 자유와 정의, 기본권 사상 등 유럽의 계몽사상, 시민의식을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가 된다.
볼리바르가 17세가 되던 1799년 그의 할아버지가 죽자 볼리바르는 카를로스 4세가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으로 유학을 떠난다. 부모와 조부로부터 많은 재산을 상속한 볼리바르는 스페인의 귀족사회에 쉽게 적응하였으며 마드리드의 우스타리스의 집에서 머물며 수학하게 된다. 19살에 되던 해 볼리바르는 우스타리스의 조카딸인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하고 그녀와 함께 자신의 고향인 카라카스로 돌아온다.

 

 

템플그랜딘

http://www.bandiandlunis.co.kr/search/detail_end.php?author=템플그랜딘

 

 

 

베르너 폰 브라운

대학교 베를린공과대학교
  • 경력 :
1977년 6월 16일 사망
1972년 NASA 에서 은퇴, 페어차일드 인더스트리의 부사장
1969년 아폴로 11호에의한 인류의 달착륙을 성공시키는데 공헌
1958년 미국 최초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 발사 성공
1955년 미국으로 귀화
1952년 헌츠빌의 미육군미사일개발부대 지도
1950년 미국 육군병기공장의 유도탄 연구 기술부 부장으로 장거리 로켓 연구
1944년 A-4가 V-2로 명명, 영국 본토 공격을 위해 네덜란드에 발사
1942년 장거리 탄도미사일 A-4 완성
1936년 장거리 탄도미사일 A-4의 설계주임으로 활약
1934년 베를린공과대학에서 액체로켓에 관한 연구로 학위수여
1932년 베를린공과대학 재학 중 독일 육군 문관으로 채용, 페네뮌데에서 로켓병기 V2호 개발하는 팀을 이끔
1930년 베를린공과대학 재학 중 VfR에서 오베르트의 연구를 도움
1929년 VfR(Verein fur Raumschiffahrt)에 가입
1212년 3월 23일 독일 비스지츠에서 귀족인 마그누스 남작과 부인 에마 폰 브라운 사이에서 출생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윤봉길(尹奉吉) :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

    1931년 겨울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1932년 4월 29일 상하이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의 임무를 맡게된다.

    윤봉길은 오른손에는 일장기, 왼손에는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

    삼엄한 경계망을 뚫으면서 훙커우 공원 안으로 들어가 폭탄을 던져

    많은 일본관리들을 사망시키거나 부상당하게 한뒤,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총살 당했다.

    중국의 대총통 장제스가 조선에 관심을 갖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유관순(柳寬順) : 1902년 11월 17일~1920년 10월 12일

    충청남도 천안에서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고,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에 참가한 뒤,

    고향으로 내려가 아우내장터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지휘했다.

    일본 헌병대는 가족을 죽이고 유관순을 체포하였다..

    1920년 서대문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방광 파열로 인해 사망하였다.

     

    안창호(安昌浩) : 1878년 11월 9일 ~ 1938년 3월 10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안흥국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1895년 교육을 통해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구세학당에 입학하여 서구문물과 접하게 되었다.

    1907년 안창호는 대한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는 계몽활동외에도,

    1904년 공립협회를 창립하였고

    1908년 대성학교평양에 설립하였으며,

    1909년 서북학회를 창립하는 등 민족교육활동을 하였다.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1938년 60세에 병을 앓아 사망하였다.

     

    이봉창(李奉昌) : 1900년 8월 10일 ~ 1932년 10월 10일

    1931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일본 천황 히로히토 암살 계획을 세웠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수류탄 2개를 던졌다.

    근위병 1명이 다쳤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비밀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고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김좌진(金佐鎭) : 1889년 12월 16일~1930년 1월 24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다.

    놀라운 전술과 전략으로 청산리 전투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으며,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

     * 청산리전투 :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별 피해가 없었으나, 일본군은 약 1000명을 사살한 아주 큰 승리를 하였다.

     

    김홍집(金弘集) : 1842년~1896년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다.

    1880년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와서,

    서양 근대의 기술적 성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일본의 문물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신사유람단의 일본 파견을 상주하게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정권을 도맡아 여러가지 개혁을 진행햇다.

     

    이상설(李相卨) : 1870년 12월 7일~1917년 3월 2일

    1907년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되었다.

    헤이그 특사들의 임무가 실패로 돌아가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힘을 썻다.

     

    이준(李儁) : 1859년 1월 21일 ~ 1907년 7월 14일

    1907년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되어 외교활동중 사망한 구한말의 외교관이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이 일본에 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폭로하려 했던 계획은

    영일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로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준은 헤이그의 숙소에서 울분을 못 이겨 앓다가 사망하였다.

     

    박영효(朴泳孝) : 1861년~1939년 9월 21일

    조선 말기 급진 개화파의 주요 인물이다.

    1870년대 중반, 형 박영교를 따라 재동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개화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1882년제물포조약에 따른 사과 사절로 일본에 다녀왔다.

    이때 그가 대한민국의 국기 태극기의 원형이 되는 깃발 도안을 처음 그려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서재필(徐載弼) : 1864년 1월 4일~1951년 1월 5일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을 순한글과 영어로 발간하였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에서 띄어쓰기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독립신문을 통해 서재필은 독립된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내부적으로는 교육 확대 및 산업 발전을 강조하였고,

    그를 위해 의무 교육 도입, 서양 과학 기술의 도입,

    식생활과 위생의 개선에 대한 여러 가지 안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중립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일 이외에도, 서재필은 목요일마다 배재학당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쳤고,

    독립협회를 조직한 뒤, 독립문을 건설했다.

     

    민영환(閔泳煥) : 1861년 7월 2일~1905년 11월

    1905년 11월 30일 을사조약의 체결을 개탄하며,

    '대한 이천만 동포에게 남기는 글'을 국민들에게 유음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홍범도(洪範圖) : 1868년~1943년

    1910년 한일 병합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청산리 대첩에서 김좌진을 지원하였다.

     

    어윤중(魚允中) : 1848년~1896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청나라·러시아 등과 국경을 정하는 데 노력했다.

    1894년 김홍집 내각의 탁지부대신이 되어 온건개화파로서 활약하였다.

     

    홍영식(洪英植) : 1855년~1884년

    1881년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김옥균, 박정양 등과 함께 일본을 시찰했다.

    1882년에는 김옥균·박영효·서광범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하였다.

    1883년 미국의 사신에 대한 답변으로 보빙사가 파견될때 민영익,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에 파견되었다.

    1884년 3월 27일 우정총국을 창설하게 되었고, 우정국총판에 임명되었으며,

    1884년 개화파 주도로 갑신정변이 단행되었으나 청나라의 주둔으로 실패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1884년 11월 1일 부친 홍순목과 형 홍만식은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다. 11월 1일 부친 홍순목의 명령에 의해 일가 20여명은 독약을 받고 집단 자살하고,

    그도 마지막으로 자택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결로 생을 마감하였다.

     

    김옥균(金玉均) : 1851년 1월 23일 ~ 1894년 3월 28일

    1881년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박정양, 홍영식등과 함께 일본을 시찰했고,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굳혔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하였다.

    1883년 김옥균은 고종을 설득하여 서재필과 그의 동생 서재창을 비롯한 17명의 청년들을

    일본으로 보내 근대식 군사기술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1884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군인 양성을 위한 300만 원의 차관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하였으며

    갑신정변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했고,

    김옥균은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한 후

    1894년 3월 28일 본국 정부에서 보낸 홍종우에게 권총으로 살해되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진환이 나 민석인데...

    하트셉수트는 이집트 첫 여왕이야

    자기 동생이 너무 어려 여왕이 된거지

    점수좀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샐리라이드.

     여성첫우주비행사 .

    이다파이퍼

    오스트리아의 모험가(?)

    베르너 폰브라운 물리학자

    나 동윤이임 ㅋㅋㅋ 진환이 안뇽?

    위인들의 프로필 조사

    학교조사로 위인들의 프로필 조사를 해가는데요. 알하젠, 성난 말, 에라스무스 다윈, 갈릴레오 갈릴레이, 칭키스칸, 골다메이어, 이다 파이퍼, 제인구달, 제시 오언즈...

    100명의 위인들 노래에 나온 위인조사!!

    안녕하세요,,,,, 제가 방학숙제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나온 위인들조사 해야 되서요,,,,ㅜ.ㅜ 100의 위인들이 한일이나,,,,프로필,,등등으로 답변해주세욥>ㅂ< 1절...

    강원도 홍천의 위인에 대해

    우리고장(강원도 홍천)의 위인에 대해 조사해오기가 있었는데여.. 제발 빨리좀... 2.이영표 프로필 ▲포지션= MF ▲출생= 1977년 4월 23일. 강원도 홍천 ▲체격= 176▲ 66...

    유명한 과학자 프로필 10개만요...

    유명한 과학자 프로필 10개만 조사해 주세요.크기는 전부 합쳐서 a4용지 1페이지... 역대 위인들이 안장되어 있는 파리 팡테옹 신전으로 이장되었다. 이휘소 1935년 서울에서...

    방학숙제로 할려고....

    제가 방학숙제로 위인들의 대해 조사를 할 건데요..... 위인들의 이름과 사진을...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프로필박스 부분에 있는 연결주소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위인인 선생님 유명한 선생님

    ... 사람을 조사하라고 하시네욧 위인이나 유명한 선생님 알려 주세요 그 사람에 대한 프로필 같은것도 좀 써주신다면 감사내공도 드릴께요 ^ ^ 맨델 추천 유명하신 선생님이예요

    내일까지 격언을 조사해야 하는데...

    ... 내일은위인 궁금한건 다 풀어야 속이 후련해지죠.. 눈돌아가게 많아요~ 완전짱이거든요! 한번직접 눈으로 확인해보세요,~ 프로필에 보시면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주소를...

    트위터 고소가 될까요?

    ... 저희 책은 역사 속 여성 위인들을 주제로 한 책이온데... [변호사 프로필보기] # 사무실 문의 전화: 050-7725-2919... (특수,강력,조사,형사,공판,항고,부동산)로 재직하면서 쌓은...

    계백장군의 프로필을.....

    저희 학교가 가정학습으로 위인조사를 내 줬거든요,,, 그 중에서도 삼국시대의 위인을 내줬는데. 전 계백장군을 하려는데 아무리 지식인을 찾아도 검색을 해 봐도 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