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대해서..빨리빨리!!

신라에대해서..빨리빨리!!

작성일 2006.09.08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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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냐,오빠 신라에 대한 모든것을 알려주세여~~어서요!!!급해여!!!!!!!!!!!!!!!!!!!!!!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저......... 신라는 아니고 통일 신라인데 도음이 될까요?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새로 확대된 사회적 기반과 경제 생활의 안정을 토대로, 각기 개성을 가지면서 발전되어 온 고구려ㆍ백제 양국의 문화를 통합하여 새로운 민족 문화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당 문화를 중심으로 한 외래 문화를 흡수함으로써, 한층 다양하고 세련된 문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학문과 기술의 발달
통일 신라의 학문은 일반적인 한학과 기술 분양인 의학ㆍ병학ㆍ역한ㆍ산학ㆍ율학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중에서도 가장 돋보이게 발전한 것은 유학과 한문학이었다.
신문왕 때에는 국립 대학인 국학이 설립되었다. 여기에 경학 박사와 조교를 두고, 15세기부터 30세기까지의 귀족 자제에게 9년 동안 교육을 시켰다. 교과 과목으로는 경학이 있었고, 공동 필수 과목으로는 ≪논어≫와 ≪효경≫이 있었다.
국학은 경덕왕 때에 태학감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원성왕 때에는 독서삼품과라는 일종의 관리 채용 시험 제도를 마련하고, 독서의 성적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 독서 삼품과의 설치는 종래의 골품 위주의 관리 등용을 피하고, 유학의 성적에 의한 실력 위주의 제도를 시행하기 위한 것이 었지만, 진골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통일초의 대표적인 문장가로는 강수와 설총을 들 수 있다. 태학감 출신인 강수는 외교 문서 작성에 능한, 뛰어난 문장가였고, 설총은 이두를 정리하여 한문학 학습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 한문학도 발달하여 김대문과 같은 문인을 낳았는데, 그는 화랑와 고승들에 관한 ≪화랑세기≫ ≪고승전≫ ≪계림잡전≫ 등의 책과 지리책인 ≪한산기≫등을 저술하여, 그때까지 중국 것을 그대로 모방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우리 문화를 정리하고자 하였다.
통일 신라의 예술은 귀족 생활의 여유와 멋, 당과 서역 미술의 영향 등으로 삼국 시대 미술의 소박한 티를 벗어나 보다 세련된 미의식을 나타내었다.
통일 신라 중기의 예술은 주로 조형 미술이 중심이었으며, 대부분 종교 생활에서 나온 불교 미술이나 사후 세계를 위한 고분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통일 신라 때처럼 종교적인 정열을 미술에 쏟은 때는 일찍이 없었다.
통일 신라 시대에도 궁성이 건축되었으나, 규모와 배치 상태 등은 오늘날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별궁과 임금의 놀이터 등도 만들어졌는데, 안압지는 그 대표적인 유적이다.
안압지는 인공으로 만든 연못으로서, 연못 가운데에 산을 만들어 각종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를 길렀으며, 못의 둑 전체를 돌로 튼튼하게 쌓아 임해전을 지었다. 이것은 임금의 연회 장소인 포석정의 곡선미와 더불어 당시 귀족 건축물의 화려함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당시의 건축물을 대표하는 것으로 서는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다.
불국사는 경덕왕 때에 김대성에 의하여 창건된 건축물이다. 본디 2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큰 절이었으나, 임진 왜란 때에 불타 버리고 석조물과 기단만이 남은 것을 조선 시대와 그 후에 복원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의 뛰어난 공예품으로는 범종과 사리 장치가 있다.
통일 신라의 범종으로는 상원사 종ㆍ성덕대왕 신종(봉덕사 종)등이 있다.
상원사 종은 우리 나라 범종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비천상으로 유명한 성덕대왕 신종은 크고 웅장하면서도 조각이 화려할 뿐만 아니라,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사리 장치로는 감은사지 3층 석탑에서 나온 것이 유명한데, 이것은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것으로서 청동으로 만든 제품이다.
이 박의 공예품으로는 유약을 바른 토기와 여러 가지 무늬가 새겨진 기와와 벽돌,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은 세공품 등이 있다.
그리고 무열왕릉비의 이수와 귀붙이 조각, 성덕대왕릉 둘레돌의 조각은 사실적인 미를 나타내고 있으며, 불국사의 석등ㆍ법주사의 쌍사자 석등도 박력 있고 군형이 잘 잡힌 조각으로 이름높다.
통일기에 와서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 방법이 유행하였고, 고분 양식도 돌무지 덧널무덤에서 굴식 돌방무덤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봉토 주위를 둘레돌로 두르고, 그 둘레돌에 12지 신상을 조각하는 새로운 양식이 생겼다. 이러한 양식은 뒤에 고려ㆍ조선 시대에까지 계승되었으며, 김유신 묘나 성덕대왕릉ㆍ괘릉 등은 이러한 양식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통일 신라 시대에 한문학이 주로 귀족 사회에서 발달한 것과는 달리, 향가는 귀족으로부터 일반에까지 널리 퍼졌다. 이미 통일 전부터 만들어진 향가는 불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크게 발달하였는데, 특히 승려나 화랑들 사이에서 작품이 많이 나오고, 종교적인 색체를 띤 것이 많았다.
대표적인 향가로는 월명사가 지은 가 있고, 그밖에 충담사가 지은 , 화랑도인 득오곡의 가 있다.
또한, 진성 여왕 때의 대구 화상과 각간 위홍이 여왕의 명으로 역대의 향가를 모아 ≪삼대목≫이란 향가집을 편찬하였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통일 신라의 음악은 고구려ㆍ백제 음악과 당의 음악을 받아들이고, 또한 불교 음악인 범패가 전래됨으로써 음악의 종류와 내용이 풍부해졌다. 또 이 시기의 악기에는 가야금ㆍ거문고ㆍ비파의 3현과 대금ㆍ중금ㆍ소금의 3죽이 있었는데, 특히 옥보고는 거문고에 뛰어나 신조 30곡을 지었다 한다.
한편, 서예에서는 김생ㆍ요극일 등이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김생은 신품 4현의 한 사람으로, 고려 시대에 그의 글씨를 모아서 새긴 집자 비문이 오늘날까지 전해 온다.


1. 불교의 융성 : 통일 신라에 와서 불교는 귀족으로부터 평민층에까지 널리 확산되어 사회의 지배 이념이 됨
2. 교종의 성립 : 경전 연구를 중심으로하는 교종의 5교가 성립 → 화엄종이 대표적인 종파
3. 고승
① 의상 : 중국에 건너가 불교를 깊이 연구하여 신라 화엄종을 일으킴
② 원효
㈀ 불교의 종합화 : 대립하고 있는 여러 종파를 융합
㈁ 정토종 보급 : 염불만 외우면 죽은 뒤에 극락 세계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정토종의 보급
→ 불교가 평민층에까지 전파
③ 혜초 : 인도를 순례한 후 왕오천축국전을 저술
4. 선종의 성행 : 신라 말기에는 참선을 중요시하는 선종이 성행하여 9 산의 종파가 생김
교종은 전통적인 권위를 내세워 권력과 결탁하였으며, 주러 진골 귀족 사이에서 믿어졌다. 반면,
선종은 신라 사회의 모순에 비판적이었던 지방의 호족들과 연결되었으며, 평민층으로부터도 환영을 받았다.
원효와 불교의 대중화
원효의 불교 대중화 운동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뒤 백여 년 동안 왕들은 불교를 적극 장려하였으며, 많은 승려들이 나와 왕과 귀족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는 일반 백성에게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 때, 일반 백성과 같이 어울리며 부처님의 법을 설명하고 돌아다니면서 불교를 얼리 편 스님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원효이다. 원효(617~686)는 속성이 설씨로서, 6두품 출신으로 보인다. 그는 34 세 때 의상과 함께 당으로 유학하려 하였다. 배를 타기위해 당항성으로 가던 길에 날이 저물어 동굴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엇다.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한 그릇 마셨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 물이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인 것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모든 것은 자기 마음에 있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원효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분이 낮은 농민이나 천민들과 어울려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면서 불법을 전하였다. 또 원효는 요석 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았다. 이후 원효는 승복을 벗어 버리고 "나무아미타불 ! "을 외우고 다녔다. 이 때부터 신라에서는 누구나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였고, 백성들은 고달픈 삶에 위안을 얻게 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숭상되던 불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정신적인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통일신라는 사원건축이나 불상 조성에 국가가 앞장섰던 불교 문화의 전성기였다. 통일신라의 불상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토착적 불교문화를 통합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교류가 활발하던 당과 서역, 인도의 외래 양식을 수용함으로써 독특한 통일신라의 불상 양식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통일신라 불상의 특징을 보면, 먼저 입상에는 여원인(與願印)과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手印)을 보여주는 불상이 많고 약이 들어 있는 함을 든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국보 제 24호인 석불암의 본존불을 들 수 있다. 이 불상은 악마를 물리친다는 항마촉진인의 수인을 하고 있지만, 존명(尊名)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석가모니 부처라는 설, 아미타불(阿彌陀佛)(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를 열고 그곳에서 법(法)을 설한다는 부처를 이른다. )이라는 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연화장(蓮華藏)세계에 살면서 그 몸은 법계(法界)를 두루 차서 광명을 비춘다고 하는 부처이다. )이라는 설, 아촉불(阿贈佛)(불교에서 분노를 가라앉히고 마음의 동요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부처이다. )이라는 설 등 다양하다. 석굴암은 이 본존불을 봉안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둥근 원형 천장과 좌우 대칭적인 불상 배치는 전체적인 구조를 안정되게 하고 있다.
토함산 동쪽 비탈면을 파고 인공으로 굴을 만든 석굴암은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진다. 또한, 석굴암의 본존불은 동해의 문무대왕 수중릉을 향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처의 힘으로 신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적 성격을 보여준다. 결국 석굴암은 신라인의 불교에 대한 신앙적 믿음과 호국정신, 그리고 조형적인 예술성을 갖춘 석조 미술품으로 볼 수 있다.


통일신라는 우리 나라 불교미술의 전성기로서 삼국통일 이후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면서 불교문화는 더욱 융성하였다. 고구려, 백제의 조각전통을 흡수한 통일신라는 당으로부터 새로운 문화를 활발하게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서역 및 인도미술과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접촉과 교섭을 통해 국제적인 안목을 지니기 시작했으며, 그 바탕 위에 앞 시대의 조형원리를 더욱 발전시켜 세련되고 사실적이면서 이상적 아름다움을 지향한 불교조각의 세계를 개척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보다 심화되면서 여러 종파가 나타났고, 이런 환경과 조건 아래 새로운 조형의 기준과 방법을 정립함은 물론 기술의 진보를 가져왔다. 그 결과 8세기에 이르면 삼국시대 불상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났던 정면성과 인습에 얽매인 추상적 표현, 과도한 상징성이 점차 사라지면서 균형과 조화에 바탕을 둔 이상적인 미를 구현할 수 있었다.
통일 초기 조각의 경향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신라에 귀속된 백제 유민들이 제작한 을 포함하여 사천왕사지 출토 채유 소조 사천왕상(採油塑造四天王像>, 감은사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에 조각된 사천왕상, 월지(안압지)에서 출토된 금동 삼존불, 황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금제 여래입상(국보80호)과 금제 여래좌상(국보79호) 등을 들 수 있다. 계유명 전씨 아미타삼존상을 백제조각으로 친다 하더라도 군위 석굴의 삼존불을 비롯하여 사천왕사지의 소조사천왕상, 감은사지 석탑에서 나온 사리함의 사천왕상, 황복사지 금제 불상, 월지에서 발견된 삼존상은 성덕왕18년(719) 집사성 시랑인 김지성(金志成)의 발원으로 만들었다는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입상(국보81호)과 아미타여래입상(국보82호), 그리고 경주 남산에 조각된 여러 불상들은 경덕왕대에 조성된 석굴암의 형성과정과 양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구려 백제를 통합한 통일신라.
통일신라의 대해
7c 나당(신라와 당)연합군에 의해 1. 백제의 의자왕때 향략에 빠져 멸망(660)
2.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사후 자식들의 내분으로 멸망.(668)
통일신라는 신라의 상대 중대 하대중 중대에 해당된다.
중대인 통일신라는 무열왕(김춘추)과 그직계자손들을 통해 왕위가 계승된시기. 삼국통일을 이루어낸 직후의 신라의 전성기
**중앙 정치 조직
통일후 왕권의 전제화 과정에서 정치족직의 정비도 이루어져 신문왕때 공장부와 예작부 를 설치함으로써 6전 조직이 완비. 중앙관청중 최고 관청은 집사부로 왕명으로 실제 정무, 특히 국가 기밀 업무를 총괄했고 그 장관이 시중이었다. 통일후의 신라는 왕권이 전제화하는시기이므로 집사부와 시중의 위상이 놓았다. 전제화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유교정치 이념을 도입해 국학을 설립한 점이다.
귀족세력을 억압하고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유학에 대한 건식이 뛰어난 6두품 집단이 국왕과 손을 잡고 귀족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지방행정조직과 군사조직.
통일신라의 기본적인 골경이 완성되는 신문왕때에 9주5소경의 지방제도가 완비.(9주의 편성은 민족융합책의 하나) 9주의 장관으로는 총관(나중에는 도독)이 파견되었고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해 외사정이 파견되었다.중앙의 14개 관청 중에는 사정부라는 감찰기관이 있었는데 그의 지방 파견관리를 지방을 의미하는 외(外)를 붙여 외사정이라 불렀다.관리의 비행을 규찰하는 오늘날의 감사원이 하는 활동을 했다.
통일신라는 중앙집권을 효율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호족(지방세력가)을 서울에 불러 인질로 삼는 "상수리제도"와 천민집단인 향부곡제도를 강화했다.
통일신라의 지방군은 10정으로 구성되었다. 9주에 1정씩 재치하고 국경의 대부분 지역이 포함된 한주에는 1정을 추가했다. 중앙군으로는 9서당이 있었다. 9서당에 신라+고구려+백제인도 포함시킨것은 민족 융합을 위한 신라의 노력으로 이해됩니다.
**토지제도
귀족들의 녹읍을 폐지하고 대신 관료전을 지급.녹읍에는 그 토지에 대한 조세 공납 노동력의 모든 수취권이 귀족에 위임되었으나 관료전은 조세와 공물에 대한 수취권만 부여됩니다. 중대 절정기인 성덕왕때에는 정전이라는 민전을 농민에게 지급함으로써 귀족의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해 국가의 농민 지배를 강화하고 간접적으로 귀족세력을 견제하는 이중의 목적달성을 도모했던것입니다.
경덕왕때는 귀족들의 반발로 녹읍이 부활되었습니다.왕권의 약화를 말합니다.(하대)
하대에는 진골귀족의 무능력과 내분은 골품제 사회의 존재의미를 없애 버려 사회통제를 불가능하게 했으며 그 결과 새로운 역사 조도세력의 등장을 가능케 합니다. 그들이 바로 호족이며 지방의 행정 군사 재정권을 장악하고 기존의 권위를 부정하는 선종과 국토의 지방 중심재편성을 주장하는 풍수지리설은 이들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또한 진골에게 배척되어 반시라적 경향을 보이던 6두품세력과도 정치적으로 결합해 유교정치이념을 정착시킵니다. 그리하여 후삼국이 성립됩니다.
단군
김대성(金大城):700~774
정몽주(鄭夢周):1337~1392
최치원(崔致遠):857~?
태조 이성계:조선의 첫번째 임금,조선의 시조왕
강감찬,견훤,계백,고선지,고종,공민왕,곽재우,광개토대왕,광해군,궁예,권율,근초고왕,김구,김규식,김기수,김대건,김대성,김덕령,김만중,김병언,김부식,김돈중,경대승,김상옥,정중부,김소월,김수로왕,김시민,김시습,김영랑,김옥균,김유신,김정호,김정희,김종서,김좌진,김천일,김홍도,김홍집,나운규,나철,남궁억,남이,논개,단군,담징,대조영,동명왕,맹사성,명성황후,묘청,무령왕,무학대사,문무왕,문익점,민영환,박문수,박연,박영효,박은식,박은로,박정희,박제가,박제상,박지원,박혁거세,방정환,배중손,백결 선생,법흥왕,사명대사,서경덕,서산 대사,서재필,서희,선덕여왕,선조,설총,성삼문,성종,세조,세종 대왕,손병희,숙종,신립,신사임당,신숙주,신재효,신채호,안익태,안증군,안창호,안향,연개소문,영조,온달,온조,왕건,왕인 등등

1. 생활상

촌락 - 농민들은 보통 촌락이라는 말단 행정구역에 편입되어 있었다. 신라의 촌락은 대체로 혈연을 중심으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최근 일본에서 발견된 민정문서를 보면 남녀별, 연령별의 인구와 소,말,뽕나무,호두나무, 잣나무 등의 수를 3년에 한번씩 통계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촌락에는 나라에서 소유하는 몇 종류의 토지가 있고, 촌주에게 지급되는 토지가 있어, 농민들은 공동으로 그 땅을 경작하여 일부를 조로 나라에 바치고 나머지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국가에서는 농민에게 가능한 모든것을 거두려했고, 농민들이 기르는 가축이나 과실나무에 대해서도 일정한 세를 내게했다.
이때 촌락이외에 향, 부곡이라 불리는 천민 집단 거주지역이 있었다. 이 지역은 전쟁포로나 죄인,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모아둔 곳이다. 이들은 국가나 귀족을 위해 농업이나 목축,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귀족 - 귀족은 수도 금성을 중심으로 저택과 별장을 가기고 사치와 향락 생활을 즐겼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녹읍과 사전을 받아 많은 토지를 가지고 가축을 사육하는 한편, 고리업까지 손을 대어 재산을 늘렸다.
그리하여 '재상의 집에는 공물이 끊이지 않고, 노비가 3,000명이요, 집에서 기르는 사병과 소와 말, 돼지가 또 그만큼이다.'라고 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2. 문화
통일신라는 확대된 사회적 기반과 경제 생활의 안정을 토대로 걱가 개성을 가지면서 발전되어 온 백제, 고구려의 문화를 통합하여 하나의 민족문화를 확립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발달된 당 문화를 중심으로 한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이에 더함으로써 한층 다양하고 세련된 문화를 발전시켰다.
통일기에 들어서면서 문학이나 과학, 에술의 각 분야에 걸쳐 지배층 문화만 발달 한 것이 아니라 민간문화의 수준도 한층 높아졌다. 이는 귀족종교로 머물러 있던 불교가 일반 민간에까지 널리 퍼져 그들의 모든 생활에 문화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3. 대외관계

신라는 당과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유학생과 유학승을 파견하는 등 그들의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였다. 또 일본과의 교류도 점점 늘어났다.
신라의 당, 일본과의 무역은 처음에 공무역이 성했는데 점차 민간무역도 늘어났다. 신라는 당에 저포, 인삼, 금은세공품 등을 수출하고 당으로부터 비단, 책, 관복, 약재 등을 수입하였다.
당시 신라인의 당나라 무역은 대단히 성하여, 장쑤성과 산둥반도에 신라방이 생기고, 신라소라는 감독기관이 있었으며, 신라원이라는 절도 있었다. 한편 신라에는 일본으로부터 많은 유학생들이 와 있었다.
이들에 의래 신라의 율령제도가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고대국가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또 의상, 윈효 등 많은 고승들의 불교 서적이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불교발전에 많을 영향을 주었다
통일 신라문화
민족 문화의 기틀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새로 확대된 사회적 기반과 경제 생활의 안정을 토대로, 각기 개성을 가지면서 발전되어 온 고구려ㆍ백제 양국의 문화를 통합하여 새로운 민족 문화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당 문화를 중심으로 한 외래 문화를 흡수함으로써, 한층 다양하고 세련된 문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학문과 기술의 발달
통일 신라의 학문은 일반적인 한학과 기술 분양인 의학ㆍ병학ㆍ역한ㆍ산학ㆍ율학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중에서도 가장 돋보이게 발전한 것은 유학과 한문학이었다.
신문왕 때에는 국립 대학인 국학이 설립되었다. 여기에 경학 박사와 조교를 두고, 15세기부터 30세기까지의 귀족 자제에게 9년 동안 교육을 시켰다. 교과 과목으로는 경학이 있었고, 공동 필수 과목으로는 ≪논어≫와 ≪효경≫이 있었다.
국학은 경덕왕 때에 태학감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원성왕 때에는 독서삼품과라는 일종의 관리 채용 시험 제도를 마련하고, 독서의 성적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 독서 삼품과의 설치는 종래의 골품 위주의 관리 등용을 피하고, 유학의 성적에 의한 실력 위주의 제도를 시행하기 위한 것이 었지만, 진골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통일초의 대표적인 문장가로는 강수와 설총을 들 수 있다. 태학감 출신인 강수는 외교 문서 작성에 능한, 뛰어난 문장가였고, 설총은 이두를 정리하여 한문학 학습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 한문학도 발달하여 김대문과 같은 문인을 낳았는데, 그는 화랑와 고승들에 관한 ≪화랑세기≫ ≪고승전≫ ≪계림잡전≫ 등의 책과 지리책인 ≪한산기≫등을 저술하여, 그때까지 중국 것을 그대로 모방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우리 문화를 정리하고자 하였다.
통일 신라의 예술은 귀족 생활의 여유와 멋, 당과 서역 미술의 영향 등으로 삼국 시대 미술의 소박한 티를 벗어나 보다 세련된 미의식을 나타내었다.
통일 신라 중기의 예술은 주로 조형 미술이 중심이었으며, 대부분 종교 생활에서 나온 불교 미술이나 사후 세계를 위한 고분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통일 신라 때처럼 종교적인 정열을 미술에 쏟은 때는 일찍이 없었다.
통일 신라 시대에도 궁성이 건축되었으나, 규모와 배치 상태 등은 오늘날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별궁과 임금의 놀이터 등도 만들어졌는데, 안압지는 그 대표적인 유적이다.
안압지는 인공으로 만든 연못으로서, 연못 가운데에 산을 만들어 각종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를 길렀으며, 못의 둑 전체를 돌로 튼튼하게 쌓아 임해전을 지었다. 이것은 임금의 연회 장소인 포석정의 곡선미와 더불어 당시 귀족 건축물의 화려함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당시의 건축물을 대표하는 것으로 서는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다.
불국사는 경덕왕 때에 김대성에 의하여 창건된 건축물이다. 본디 2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큰 절이었으나, 임진 왜란 때에 불타 버리고 석조물과 기단만이 남은 것을 조선 시대와 그 후에 복원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의 뛰어난 공예품으로는 범종과 사리 장치가 있다.
통일 신라의 범종으로는 상원사 종ㆍ성덕대왕 신종(봉덕사 종)등이 있다.
상원사 종은 우리 나라 범종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비천상으로 유명한 성덕대왕 신종은 크고 웅장하면서도 조각이 화려할 뿐만 아니라,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사리 장치로는 감은사지 3층 석탑에서 나온 것이 유명한데, 이것은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것으로서 청동으로 만든 제품이다.
이 박의 공예품으로는 유약을 바른 토기와 여러 가지 무늬가 새겨진 기와와 벽돌, 고분에서 출토되는 금은 세공품 등이 있다.
그리고 무열왕릉비의 이수와 귀붙이 조각, 성덕대왕릉 둘레돌의 조각은 사실적인 미를 나타내고 있으며, 불국사의 석등ㆍ법주사의 쌍사자 석등도 박력 있고 군형이 잘 잡힌 조각으로 이름높다.
통일기에 와서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 방법이 유행하였고, 고분 양식도 돌무지 덧널무덤에서 굴식 돌방무덤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봉토 주위를 둘레돌로 두르고, 그 둘레돌에 12지 신상을 조각하는 새로운 양식이 생겼다. 이러한 양식은 뒤에 고려ㆍ조선 시대에까지 계승되었으며, 김유신 묘나 성덕대왕릉ㆍ괘릉 등은 이러한 양식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통일 신라 시대에 한문학이 주로 귀족 사회에서 발달한 것과는 달리, 향가는 귀족으로부터 일반에까지 널리 퍼졌다. 이미 통일 전부터 만들어진 향가는 불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크게 발달하였는데, 특히 승려나 화랑들 사이에서 작품이 많이 나오고, 종교적인 색체를 띤 것이 많았다.
대표적인 향가로는 월명사가 지은 가 있고, 그밖에 충담사가 지은 , 화랑도인 득오곡의 가 있다.
또한, 진성 여왕 때의 대구 화상과 각간 위홍이 여왕의 명으로 역대의 향가를 모아 ≪삼대목≫이란 향가집을 편찬하였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통일 신라의 음악은 고구려ㆍ백제 음악과 당의 음악을 받아들이고, 또한 불교 음악인 범패가 전래됨으로써 음악의 종류와 내용이 풍부해졌다. 또 이 시기의 악기에는 가야금ㆍ거문고ㆍ비파의 3현과 대금ㆍ중금ㆍ소금의 3죽이 있었는데, 특히 옥보고는 거문고에 뛰어나 신조 30곡을 지었다 한다.
한편, 서예에서는 김생ㆍ요극일 등이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김생은 신품 4현의 한 사람으로, 고려 시대에 그의 글씨를 모아서 새긴 집자 비문이 오늘날까지 전해 온다.


1. 불교의 융성 : 통일 신라에 와서 불교는 귀족으로부터 평민층에까지 널리 확산되어 사회의 지배 이념이 됨
2. 교종의 성립 : 경전 연구를 중심으로하는 교종의 5교가 성립 → 화엄종이 대표적인 종파
3. 고승
① 의상 : 중국에 건너가 불교를 깊이 연구하여 신라 화엄종을 일으킴
② 원효
㈀ 불교의 종합화 : 대립하고 있는 여러 종파를 융합
㈁ 정토종 보급 : 염불만 외우면 죽은 뒤에 극락 세계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정토종의 보급
→ 불교가 평민층에까지 전파
③ 혜초 : 인도를 순례한 후 왕오천축국전을 저술
4. 선종의 성행 : 신라 말기에는 참선을 중요시하는 선종이 성행하여 9 산의 종파가 생김
교종은 전통적인 권위를 내세워 권력과 결탁하였으며, 주러 진골 귀족 사이에서 믿어졌다. 반면,
선종은 신라 사회의 모순에 비판적이었던 지방의 호족들과 연결되었으며, 평민층으로부터도 환영을 받았다.
원효와 불교의 대중화
원효의 불교 대중화 운동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뒤 백여 년 동안 왕들은 불교를 적극 장려하였으며, 많은 승려들이 나와 왕과 귀족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는 일반 백성에게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 때, 일반 백성과 같이 어울리며 부처님의 법을 설명하고 돌아다니면서 불교를 얼리 편 스님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원효이다. 원효(617~686)는 속성이 설씨로서, 6두품 출신으로 보인다. 그는 34 세 때 의상과 함께 당으로 유학하려 하였다. 배를 타기위해 당항성으로 가던 길에 날이 저물어 동굴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엇다.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한 그릇 마셨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 물이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인 것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모든 것은 자기 마음에 있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원효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분이 낮은 농민이나 천민들과 어울려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면서 불법을 전하였다. 또 원효는 요석 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았다. 이후 원효는 승복을 벗어 버리고 "나무아미타불 ! "을 외우고 다녔다. 이 때부터 신라에서는 누구나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였고, 백성들은 고달픈 삶에 위안을 얻게 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숭상되던 불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정신적인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통일신라는 사원건축이나 불상 조성에 국가가 앞장섰던 불교 문화의 전성기였다. 통일신라의 불상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토착적 불교문화를 통합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교류가 활발하던 당과 서역, 인도의 외래 양식을 수용함으로써 독특한 통일신라의 불상 양식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통일신라 불상의 특징을 보면, 먼저 입상에는 여원인(與願印)과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手印)을 보여주는 불상이 많고 약이 들어 있는 함을 든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국보 제 24호인 석불암의 본존불을 들 수 있다. 이 불상은 악마를 물리친다는 항마촉진인의 수인을 하고 있지만, 존명(尊名)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석가모니 부처라는 설, 아미타불(阿彌陀佛)(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를 열고 그곳에서 법(法)을 설한다는 부처를 이른다. )이라는 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연화장(蓮華藏)세계에 살면서 그 몸은 법계(法界)를 두루 차서 광명을 비춘다고 하는 부처이다. )이라는 설, 아촉불(阿贈佛)(불교에서 분노를 가라앉히고 마음의 동요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부처이다. )이라는 설 등 다양하다. 석굴암은 이 본존불을 봉안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둥근 원형 천장과 좌우 대칭적인 불상 배치는 전체적인 구조를 안정되게 하고 있다.
토함산 동쪽 비탈면을 파고 인공으로 굴을 만든 석굴암은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진다. 또한, 석굴암의 본존불은 동해의 문무대왕 수중릉을 향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처의 힘으로 신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적 성격을 보여준다. 결국 석굴암은 신라인의 불교에 대한 신앙적 믿음과 호국정신, 그리고 조형적인 예술성을 갖춘 석조 미술품으로 볼 수 있다.


통일신라는 우리 나라 불교미술의 전성기로서 삼국통일 이후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면서 불교문화는 더욱 융성하였다. 고구려, 백제의 조각전통을 흡수한 통일신라는 당으로부터 새로운 문화를 활발하게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서역 및 인도미술과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접촉과 교섭을 통해 국제적인 안목을 지니기 시작했으며, 그 바탕 위에 앞 시대의 조형원리를 더욱 발전시켜 세련되고 사실적이면서 이상적 아름다움을 지향한 불교조각의 세계를 개척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보다 심화되면서 여러 종파가 나타났고, 이런 환경과 조건 아래 새로운 조형의 기준과 방법을 정립함은 물론 기술의 진보를 가져왔다. 그 결과 8세기에 이르면 삼국시대 불상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났던 정면성과 인습에 얽매인 추상적 표현, 과도한 상징성이 점차 사라지면서 균형과 조화에 바탕을 둔 이상적인 미를 구현할 수 있었다.
통일 초기 조각의 경향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신라에 귀속된 백제 유민들이 제작한 을 포함하여 사천왕사지 출토 채유 소조 사천왕상(採油塑造四天王像>, 감은사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에 조각된 사천왕상, 월지(안압지)에서 출토된 금동 삼존불, 황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금제 여래입상(국보80호)과 금제 여래좌상(국보79호) 등을 들 수 있다. 계유명 전씨 아미타삼존상을 백제조각으로 친다 하더라도 군위 석굴의 삼존불을 비롯하여 사천왕사지의 소조사천왕상, 감은사지 석탑에서 나온 사리함의 사천왕상, 황복사지 금제 불상, 월지에서 발견된 삼존상은 성덕왕18년(719) 집사성 시랑인 김지성(金志成)의 발원으로 만들었다는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입상(국보81호)과 아미타여래입상(국보82호), 그리고 경주 남산에 조각된 여러 불상들은 경덕왕대에 조성된 석굴암의 형성과정과 양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구려 백제를 통합한 통일신라.
통일신라의 대해
7c 나당(신라와 당)연합군에 의해 1. 백제의 의자왕때 향략에 빠져 멸망(660)
2.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사후 자식들의 내분으로 멸망.(668)
통일신라는 신라의 상대 중대 하대중 중대에 해당된다.
중대인 통일신라는 무열왕(김춘추)과 그직계자손들을 통해 왕위가 계승된시기. 삼국통일을 이루어낸 직후의 신라의 전성기
**중앙 정치 조직
통일후 왕권의 전제화 과정에서 정치족직의 정비도 이루어져 신문왕때 공장부와 예작부 를 설치함으로써 6전 조직이 완비. 중앙관청중 최고 관청은 집사부로 왕명으로 실제 정무, 특히 국가 기밀 업무를 총괄했고 그 장관이 시중이었다. 통일후의 신라는 왕권이 전제화하는시기이므로 집사부와 시중의 위상이 놓았다. 전제화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유교정치 이념을 도입해 국학을 설립한 점이다.
귀족세력을 억압하고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유학에 대한 건식이 뛰어난 6두품 집단이 국왕과 손을 잡고 귀족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지방행정조직과 군사조직.
통일신라의 기본적인 골경이 완성되는 신문왕때에 9주5소경의 지방제도가 완비.(9주의 편성은 민족융합책의 하나) 9주의 장관으로는 총관(나중에는 도독)이 파견되었고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해 외사정이 파견되었다.중앙의 14개 관청 중에는 사정부라는 감찰기관이 있었는데 그의 지방 파견관리를 지방을 의미하는 외(外)를 붙여 외사정이라 불렀다.관리의 비행을 규찰하는 오늘날의 감사원이 하는 활동을 했다.
통일신라는 중앙집권을 효율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호족(지방세력가)을 서울에 불러 인질로 삼는 "상수리제도"와 천민집단인 향부곡제도를 강화했다.
통일신라의 지방군은 10정으로 구성되었다. 9주에 1정씩 재치하고 국경의 대부분 지역이 포함된 한주에는 1정을 추가했다. 중앙군으로는 9서당이 있었다. 9서당에 신라+고구려+백제인도 포함시킨것은 민족 융합을 위한 신라의 노력으로 이해됩니다.
**토지제도
귀족들의 녹읍을 폐지하고 대신 관료전을 지급.녹읍에는 그 토지에 대한 조세 공납 노동력의 모든 수취권이 귀족에 위임되었으나 관료전은 조세와 공물에 대한 수취권만 부여됩니다. 중대 절정기인 성덕왕때에는 정전이라는 민전을 농민에게 지급함으로써 귀족의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해 국가의 농민 지배를 강화하고 간접적으로 귀족세력을 견제하는 이중의 목적달성을 도모했던것입니다.
경덕왕때는 귀족들의 반발로 녹읍이 부활되었습니다.왕권의 약화를 말합니다.(하대)
하대에는 진골귀족의 무능력과 내분은 골품제 사회의 존재의미를 없애 버려 사회통제를 불가능하게 했으며 그 결과 새로운 역사 조도세력의 등장을 가능케 합니다. 그들이 바로 호족이며 지방의 행정 군사 재정권을 장악하고 기존의 권위를 부정하는 선종과 국토의 지방 중심재편성을 주장하는 풍수지리설은 이들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또한 진골에게 배척되어 반시라적 경향을 보이던 6두품세력과도 정치적으로 결합해 유교정치이념을 정착시킵니다. 그리하여 후삼국이 성립됩니다.
단군
김대성(金大城):700~774
정몽주(鄭夢周):1337~1392
최치원(崔致遠):857~?
태조 이성계:조선의 첫번째 임금,조선의 시조왕
강감찬,견훤,계백,고선지,고종,공민왕,곽재우,광개토대왕,광해군,궁예,권율,근초고왕,김구,김규식,김기수,김대건,김대성,김덕령,김만중,김병언,김부식,김돈중,경대승,김상옥,정중부,김소월,김수로왕,김시민,김시습,김영랑,김옥균,김유신,김정호,김정희,김종서,김좌진,김천일,김홍도,김홍집,나운규,나철,남궁억,남이,논개,단군,담징,대조영,동명왕,맹사성,명성황후,묘청,무령왕,무학대사,문무왕,문익점,민영환,박문수,박연,박영효,박은식,박은로,박정희,박제가,박제상,박지원,박혁거세,방정환,배중손,백결 선생,법흥왕,사명대사,서경덕,서산 대사,서재필,서희,선덕여왕,선조,설총,성삼문,성종,세조,세종 대왕,손병희,숙종,신립,신사임당,신숙주,신재효,신채호,안익태,안증군,안창호,안향,연개소문,영조,온달,온조,왕건,왕인 등등

1. 생활상

촌락 - 농민들은 보통 촌락이라는 말단 행정구역에 편입되어 있었다. 신라의 촌락은 대체로 혈연을 중심으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최근 일본에서 발견된 민정문서를 보면 남녀별, 연령별의 인구와 소,말,뽕나무,호두나무, 잣나무 등의 수를 3년에 한번씩 통계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촌락에는 나라에서 소유하는 몇 종류의 토지가 있고, 촌주에게 지급되는 토지가 있어, 농민들은 공동으로 그 땅을 경작하여 일부를 조로 나라에 바치고 나머지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국가에서는 농민에게 가능한 모든것을 거두려했고, 농민들이 기르는 가축이나 과실나무에 대해서도 일정한 세를 내게했다.
이때 촌락이외에 향, 부곡이라 불리는 천민 집단 거주지역이 있었다. 이 지역은 전쟁포로나 죄인,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모아둔 곳이다. 이들은 국가나 귀족을 위해 농업이나 목축,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귀족 - 귀족은 수도 금성을 중심으로 저택과 별장을 가기고 사치와 향락 생활을 즐겼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녹읍과 사전을 받아 많은 토지를 가지고 가축을 사육하는 한편, 고리업까지 손을 대어 재산을 늘렸다.
그리하여 '재상의 집에는 공물이 끊이지 않고, 노비가 3,000명이요, 집에서 기르는 사병과 소와 말, 돼지가 또 그만큼이다.'라고 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2. 문화
통일신라는 확대된 사회적 기반과 경제 생활의 안정을 토대로 걱가 개성을 가지면서 발전되어 온 백제, 고구려의 문화를 통합하여 하나의 민족문화를 확립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발달된 당 문화를 중심으로 한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이에 더함으로써 한층 다양하고 세련된 문화를 발전시켰다.
통일기에 들어서면서 문학이나 과학, 에술의 각 분야에 걸쳐 지배층 문화만 발달 한 것이 아니라 민간문화의 수준도 한층 높아졌다. 이는 귀족종교로 머물러 있던 불교가 일반 민간에까지 널리 퍼져 그들의 모든 생활에 문화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3. 대외관계

신라는 당과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유학생과 유학승을 파견하는 등 그들의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였다. 또 일본과의 교류도 점점 늘어났다.
신라의 당, 일본과의 무역은 처음에 공무역이 성했는데 점차 민간무역도 늘어났다. 신라는 당에 저포, 인삼, 금은세공품 등을 수출하고 당으로부터 비단, 책, 관복, 약재 등을 수입하였다.
당시 신라인의 당나라 무역은 대단히 성하여, 장쑤성과 산둥반도에 신라방이 생기고, 신라소라는 감독기관이 있었으며, 신라원이라는 절도 있었다. 한편 신라에는 일본으로부터 많은 유학생들이 와 있었다.
이들에 의래 신라의 율령제도가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고대국가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또 의상, 윈효 등 많은 고승들의 불교 서적이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불교발전에 많을 영향을 주었다

신라에대해서..빨리빨리!!

...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국보 제 24호인 석불암의 본존불을 들 수 있다. 이 불상은 악마를 물리친다는 항마촉진인의 수인을 하고 있지만, 존명(尊名)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신라의 문화에대해서 빨리빨리 자세하게~~

제가 급해서 그러는데 아주 빨리빨리 해서 신라의 문화에 대해서만 아주자세하게 아주 많이 많이 알려주세요~!~!~!~!~ 엄~~~~~~~~청 급합니다!!!!! 1.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 종...

신라의 유물점 갈켜주셈.(빨리빨리해주...

... 저도 조사를 해보니, 신라에 대해서 더 많이 알수 있어서 저도 좋네요^^ 이것은 '신라금' 이라고 하는것입니다. 이것은 '신라주' 이라고 하는것입니다. 이것은 '신라화랑복...

신라에 대해서좀 알려주세요 ㅠ.ㅠ......

6학년 1학기 사회 신라에 대해서 좀 알려주세요 ^^..;; 제가 시간이 없어서 빨리빨리 답.변.좀 부탁드림니다 ㅇ_ㅇ....(되 도 록 빨 좀 부 탁 드 려 요)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나라는...

통일신라 사설

... 통일신라에 대해서 할건데 통일신라에 대한 사설이나 역사 사설 등... 하는데 빨리 빨리 해주세요 저의 질문은? 1.통일신라에 대한 사설이나 역사 사설 잘...

급해여!!!!신라에서 일어난 사건을...

1월30일까지 빨리빨리 써주세여 신라에서 일어난일을 차례대로 정리해서 읽을수... 선생님께서 신라에 대해서 자료를 정리해 오라고 하셨어여 될수록많이 정확하게...

빨리 해야 합니다! 신라의 문화에 대해서!

... 내일까지 신라의 문화에 대해서 조사를 해 와야 되요. 예를 들어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받아 신라만의 특징을 만들었다든가 신라의 문화재는 무엇 무엇이다....

통일신라

통일 신라에 대해서 빨리좀 올려 주세욤~~!! 내공 냠냠 신고함 잡글도 신고 통일신라에 대해 3줄만 써주세요~~!! (사진같은 것은 따로 해주시면 감사해염~~!!) 빨리빨리요 통일...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 대해서 내공 100

... 고구려의 시조 수도 전성기 백제의 시조 수도 전성기 신라의 시조 수도 전성기 가야의 성립 성장 멸망 최대한 빨리빨리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상한 글 이나 주제를 벗어난...

통일신라의 중앙정치 제도-_- . 빨리빨리...

... 통일 신라의 중앙정치 제도에 대해서 써 주셈;>_<; 부탁잇[ㅔㅁ; 통일 신라 ① 중앙 관제의 정비 ㄱ. 왕권의 전제화,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 율·령·격· 식 중시 ㄴ. 집사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