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1.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와 의문
우리는 한민족이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룬시기를 668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일반적인 표현을 빌자면 나당연합군, 그러나 경술국치이후 일본의 이른바 내선일체정책과 같이 국가이름의 후자를 약자로 쓰는것은 비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굳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당'이 아닌 '신당'이 적합하겠지만 굳이 줄임말을 사용할것 없이 '신라당나라연합군'이 적당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백제의 영토와 고구려 영토의 극히 일부분인 대동강이남을 신라영토에 병합한 사건을 삼국통일로 배웠다. 그러나 과연 이에 대해 삼국통일이라는 이름을 붙여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불과 10여년전만 해도 국사교과서의 목차에서 '삼국시대'의 다음부분은 '통일신라시대'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 나온 국정 국사교과서에는 이에 대해 신라와 비록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발해에 대한 언급을 함께하여 '남북국시대'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발해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의 한 부분이며 신라와 동일한 지위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있다. 남북국시대를 다루면서도 대동강 이남의 신라를 여전히 통일신라로 표현하고 있는데 과연 교과서는 신라가 진정으로 삼국을 통일한 것으로 다루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대동강 이북의 발해는 엄연히 국가로서 존재하고 있는데 겨우 한반도의 절반을 병합한 신라를 통일신라라고 표현하는것은 부당한 표현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그러면서 책을 덮으며 이러한 역사적 가정을 해본이들도 많을 것이다.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2. 고구려 강성기의 국제관계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영토확장을 하던시기인 광대토대왕, 장수왕대에는 중국은 남북조로 분열되어 있어서 권력의 공백상태였다. 이러한 권력의 공백상태의 틈을 타 무섭게 성장한 고구려는 북조의 입장에서도 남조의 입장에서도 껄끄러울수 밖에 없는 관계였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고구려는 남조,북조와도 외교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뿐만 아니라(서로 대립되는 국가사이에서 외교관계를 동시에 맺는다는것은 그 국가의 힘이 강하거나 최소한 대등하지 않고는 결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후연(後燕)의 멸망후 세워진 북연(北燕)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으로 인하여 강력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장수왕은 눈을 돌려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기며 이른바 남진정책을 펴면서 백제와 신라를 압박했다. 그리하여 대부분 역사시간에 배웠다시피 알짜배기라는 한강을 유역을 차지하고 백제와 신라가 중국과 직접적인 교류를 하는 것을 막았다.
그런데 역사시간에 흥미를 가지며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라면 이 부분에서 대부분 한가지의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잠시 중국과의 영토싸움에서 숨을 돌리고 걸리적거리는 후환을 제거하려 남쪽으로 방향을 돌린것 까지는 좋은데 왜 백제와 신라를 그냥 내버려 두었을까? 그 당시 고구려의 국력으로 미루어 보자면 백제와 신라를 쳐서 통일을 했어도 무리가 없었을 것 같은데 왜 굳이 백제와 신라를 내버려 두었다가 나중에 신라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되는 비운을 맞이 하게 된것인가? 교과서는 그 이상에 대해 언급을 해주지 않는다.
3. 고구려인의 세계관
역사시간에 배운 고구려 건국설화를 떠올려보자.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몽은 그의 재능을 시기한 동부여의 다른 왕자들의 위협을 피해 도망쳐 남하하다 엄수(淹水)기슭에 이르러 물이 가로막혀 건널수가 없게되자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자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물위에 떠올라 길을 만들어서 무사히 위협을 피할수 있었다는 설화를 배운적이 있을것이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시조 추모왕(鄒牟王:朱蒙)의 뿌리는 원래 북부여(北夫餘)에서 나왔는데,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여랑(河伯女郞)이다. 알[卵]에서 탄생하였는데, 성덕(聖德)이 훌륭하였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즉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이 하늘의 자손이라는 즉 천손(天孫)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중국은 동북공정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민족이며 고구려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을 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그 어디에도 자신들의 시조가 중국땅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없으며 중국을 단지 고구려의 서쪽에 있다는 뜻에서 '서방'이라고 칭하고 있다. 게다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자신들을 황제국(이런 표현이 옳을지는 모르나)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태왕'이나 '대왕'의 의미는 중국 입장에서의 제후의 지위를 의미하는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국의 그 어느 제후도 '태왕'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그러한 점에서 왕조내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던 발해는 백보 양보하여 우리민족의 나라가 아니라 하더라도 중국의 변방제후국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것이다. 어느 변방제후국이 감히 겁도 없이 서슬이 퍼런 황제의 권력앞에서 자신만의 연호를 사용한다는 말인가?
4. 고구려는 왜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는가?
장수왕이 새로 옮긴 수도인 평양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산지로 둘러싸여 그 자체만으로도 요새의 성격을 가진 국내성에 비해 평양성은 이와 정반대로 평야지대이다. 평야지대는 국력이 약하면 함락되기 쉬운 지형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으나 반대로 국력이 강하다면 좀더 신속하게 정보를 받아들이고 교역을 할 수있고 군사를 움직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당시 백제와 신라의 힘이 고구려의 그것에 미치지는 못한다고 하나 이전에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를 했던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록 개로왕이 고구려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여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세력이기에 평양성으로의 천도는 당시로서는 최고는 아니어도 후환을 제거하기 위한 적당한 선택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왜 고구려는 좀 더 힘을 쓰지 않고 삼국을 통일하지 않았을까?
역사는 과거의 사실에 불과하나 현재와 미래의 입장에서는 그 의미가 달라질수 있고 다른 의도로 이용될수 있다는것은 어쩔수 없는 역사의 특징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묘청은 그저 고려라는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지 아니한채 권력을 잡기위해 나라의 분란만을 일으킨 역적이라고 생각한다.(나중에 고려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쓰게된다면 그때 자세히 이야기 하고 싶다.) 그러나 지하에 계신 신채호선생께서 들으시면 버럭화를 내시겠지만 우리는 신채호 선생님의 영향으로 묘청의 칭제건원은 대단히 자주적인 역사적 사건이며 김부식은 천하에 죽일놈으로 배워왔다.
우리는 현재의 관점에서 삼국통일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삼국통일을 대단한 사건인것처럼 인식하고 있다면 비약일까?
당시 삼국시대의 사람들이 통일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각국의 사신이 왕래를 하는데 통역을 썼다는 기록이 없는것을 보아 같은 민족이며 같은 언어를 사용했으리라고 짐작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당시 사람들에게 통일이라는 과업이 지금 우리가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것처럼 당연한것이었다고 추정하는것은 무리가 있다. 지금 우리가 인식하는 통일의 당위성은 남북국시대 이래로 중간의 후삼국시기를 제외하고는 왕조는 바뀌었어도 항상 통일된 왕조가 존재해왔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것은 아닐까? 물론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있었다고는 하나 이를 조선과 같은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볼만한 근거는 없으며 삼국시대 이전에 통일된 왕조가 존재한적도 없다. 따라서 통일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중대과업이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도 없는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고구려 사람들은 천손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즉 자신들을 천하의 중심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자신들이 천하의 중심이라 믿던 중국은 조선으로 부터도 당연히 조공을 받았지만 결코 내정에 대해 시시콜콜 간섭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조선의 잦은 조공을 부담스러워 할 정도 였다. 잦은 외침에 시달리던 송나라도 자신들이 오랑캐라 부르던 나라들에게 돈을 쥐어주며 공손히(?)요구 했던것은 오직 하나, 군신관계든 부자관계든 형제관계든 천하의 질서에서 자신들의 지위의 우월성을 인정할 것, 바로 그 뿐이었다.
자신이 만든 질서에만 따른다면 굳이 힘들게 잡아 먹을 이유도 없을뿐만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그 질서에 복종하지 않는 나라에게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는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조폭이 혼자만 있으면 그저 성질 드러운 놈 그 이상 이하도 아니며 별다른 힘이 있는것도 아니다. 하지만 조무라기들이 보스를 앞세우고 그 세를 과시하며 따를때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시라소니가 아무리 개인적으로 최강이었던 싸움꾼이라 하더라도 동대문파 이정재가 졸개들을 풀어서 린치를 가하면 천하의 시라소니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역사시간에 배웠다시피 433년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는다. (일반적으로 나제동맹이라고도 하나 아까 이야기한것과 같은 의도로 백제신라동맹이라는 표현이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백신동맹,신백동맹이라는 용어는 생소하므로 그보다는 백제신라동맹이 적당하다 생각한다.) 물론 백제와 신라 개개의 국력은 고구려의 그것만은 못하나 북으로는 중국과 투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군대의 일부를 돌려 백제와 신라를 친다는것은 성공을 장담할 수 만은 모험이었을 것이다. 또한 백제와 신라는 지형적으로도 소백산맥에 가로막혀 있기 동시에 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군사를 나누어야 했을것이다. 만약 백제와 신라중 한곳을 치더라도 이가 없으면 잇몸이 시린법, 가만히 한쪽이 당하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을리는 없었을 것이다. 분명히 고구려로써는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광개토대왕릉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신라는 왜구로부터 침략을 받아 위급한 상황이었고 고구려는 왜구를 물리친다는 명목으로 신라에 상당한 대군을 파견해 왜구를 물리치고 뿐만 아니라 백제까지 쳤다. 이에 신라는 이전보다더 고구려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지위에 놓인다. 당시 고구려의 영향은 광개토왕이 명문이 새겨진 호우총에서 발견된 호우명그릇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자신들이 천하의 중심이며 황제국과 같은 지위에 있다고 여기던 고구려인들은 굳이 통일이라는 수단을 통해 국력을 낭비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우월성을 인정하며 조공을 바치게 하며 한편으로는 신라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면서 백제를 견제하는 간접적인 방법이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이며 더욱 효과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들만의 천하관을 내보이는데도 적당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즉 고구려는 삼국을 통일하지 못한것이 아니라 '굳이 삼국을 통일할 필요성을 못 느낀고 안한것'이라 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5. 마치며
우리는 언제나 현재의 상황과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려고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 노래를 부르며 통일을 바라고, 국가의 최고법인 헌법에서 조차도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한다'며 통일을 당연한 국가적인 과업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즉 우리는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으로 만들어진 관점에 따라 삼국통일에 대해 바라본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과거로부터 전해져오는 대화는 잘 들어보지 않은채 우리 현재의 이야기만 과거에게 끊임없이 말해왔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