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백제,신라에 대해서 내공 15!

고구려,백제,신라에 대해서 내공 15!

작성일 2007.04.06댓글 3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안녕하세여 !

 

초6인 여학생 입니다.

 

제가 사회엔 정말정말 약합니다 ㅠ

 

다른분들은 사회가 쉬울진 모르지만 저한테는 정말 어려운데여.

 

연습장 같은데 적으면 공부에 도움이 돼지 안을까 하는 생각에 ㅠ

(태클 사절 ㅠ)

 

그냥 고구려,백제,신라 만 적을 껀데요..

 

사회책을 안가져와서;ㅁ;

 

제가 참을성이 없어서 지식인에 올립니다 !

예를들어..

 

고구려의 시조는 xxx고 전성기는 이래서 어쩌구저쩌구 불교 어쩌구 저쩌구 등

 

저랑 비슷하거나 똑같은 나이면 훨씬 알아듣기가 쉽지 안을까;;

(너무 복잡하게 말구요 ㅠ)

 

어쨌든 좀 부탁드립니다 ㅠ

 

적을지도 모르지만 내공 15 걸었습니다 !

부탁드리겠습니당..

 

그럼...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저는 초딩5라서 "간"단"히"해드릴께요

먼저고구려의 시조:"고주몽"이라 알려진 동명성왕.

전성기:광개토대왕때에 영토를 많이 넖히시고  가셨죠.

종교:불교

02.백제

시조:동명성왕의 아들 온조

전성기:서동요의 "무왕"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으신데...

무왕은 나라의 재산, 병력등을 없앴고.

전성기는 시조때 "온조왕"때 인것 같습니다.

종교:불교

03.신라

시조:알에서 태어난"박혁거세"(사실 주몽도 알 에서 ㅋㅋ)

전성기:신라는 후기의 몇몇왕들 빼고는 충신이 많아 태평세세였지만,

꼽으라면 "태종 무열왕"때라고 할수있죠.(김춘추)

종교: "불교"=삼국시대에서 가장 늦게 불교를 들여 오지만 불교가 발달함

*신라는 "ㅇㅇ왕"이 아닌 "ㅇㅇ마립간","ㅇㅇ이사금"등으로 불렸습니다!

안 물으셨지만 가야도 해드릴  께요

04.가야

시조:김수로

전성기:가야는 나라가 신라와 합쳐버려서 역사가 조금 밖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많이 부족한 초딩5학년짜리 의 답변이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좀 봐주세여!

*(저는 남자임니다 ~!)*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삼국시대의 고대국가 중 하나. 서기 전후 무렵 성립되어 668년에 멸망하였으며, 한반도(韓半島) 북부와 남만주(南滿洲) 일대를 근거지로 번성하였다.

역사

성립
고구려족(高句麗族)은 만주(滿洲)지방에 살던 부여족(扶餘族)에서 갈라져 나온 민족으로 처음에는 쑹화강[松花江(송화강)] 유역에 살았는데 BC 2세기경부터 남하(南下)하여 동가강유역에서 압록강(鴨綠江) 유역에 걸친 산악지대에 살면서 수렵생활을 하였다. 처음에 고구려족은 현도군의 지배권안에 있었으나, 그 지방이 산악지대이므로 중국의 지배력이 철저하지 못하였다. 민족의식에 눈뜬 이들은 중국에 대하여 꾸준한 저항을 계속하였으며, 부족간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고 강한 부족을 중심으로 한데 뭉쳐 집권국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주몽(高朱蒙;東明聖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桓仁지방)에 고구려를 세운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BC37년으로 되어 있다. AD 3년 주몽의 아들 유리왕 때에 수도를 국내성(國內城;지금의 通溝)지방으로 옮겼고, 제6대 태조왕(太祖王고;재위 53∼146)때부터 차츰 다른 부족들을 정복하여 강토를 넓히고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209년(산상왕 13)에는 환도성(丸都城)을 축조하였다.

외세와의 투쟁
고구려가 일어난 땅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한반도에 침입하는 중도에 위치했으므로 그들과 끊임없이 싸움이 벌어졌다. 특히 고구려가 압록강 하류를 공격하여 중국 본토와 낙랑군(樂浪郡) 사이의 교통을 위협하자 당시 중국의 삼국(三國) 가운데 하나로 북쪽을 차지하고 있던 위(魏)나라는 장수 관구검(毋丘儉)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여 224년(동천왕 18) 수도 환도성을 함락시킨 적이 있었다. 이같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고구려는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313년(미천왕 14)에는 400여년이나 내려 오던 낙랑군과 그 남쪽의 대방군(帶方郡)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중국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어 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재위 391∼413)과 20대 장수왕(長壽王;재위 413∼491)에 이르러 대대적인 정복을 감행하여 북(北)으로는 쑹화강, 서(西)로는 랴오허강[遼河(요하)]을 넘었고, 남(南)으로는 아산(牙山)과 삼척(三陟)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하여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427년 장수왕은 수도를 환도성으로부터 평양(平壤)으로 옮겼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남쪽으로 신라·백제와 맞서고 서쪽으로는 중국을 통일한 수(隋)나라와 겨루게 되었다. 마침내 598년(영양왕 9) 수나라 문제(文帝)는 수륙 30만 군대를 거느리고 랴오허강까지 쳐들어왔으나 고구려의 반격·질병·풍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뒤를 이어 즉위한 양제(煬帝) 역시 군비를 정돈하여 612년(영양왕 23) 113만 군대를 거느리고 랴오허강을 건너 요동성(遼東城:지금의 遼陽)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의 수비가 견고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양제는 따로 30만 군대를 거느리고 압록강 서쪽으로 진출하였다.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은 후퇴를 가장하고 수나라 군대를 유인하여 살수(薩水:지금의 淸川江)에서 일대 반격전을 전개해서 섬멸, 30만중에서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2000여 명이었다. 한편 수군(水軍)은 7만의 병력이 300척의 배로 대동강에 이르러 평양을 공격하였으나, 영양왕의 아우 건무(建武)가 복병(伏兵)으로 이를 무찔렀다. 그 뒤에도 양제는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치려고 군대를 움직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고구려가 중국의 동북방에 강대한 세력으로 군림하여 중국과 대립할 뿐 아니라 북쪽의 돌궐(突厥) 등과 내왕하니 중국으로서는 큰 위협이 되었다. 수나라 다음에 일어난 당(唐)나라도 이같은 고구려를 두고 안심할 수 없어서 태종(太宗)은 644년(보장왕 3) 3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수도 낙양(洛陽)을 출발하여 다음해 봄에 랴오허강 건너 요동성 백암성(白巖城)을 총공격하였으나 60여 일의 공격에도 고구려군은 끝까지 항전하여 태종은 마침내 후퇴하였다. 당나라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高宗)도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고구려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영도하에 국민이 일치단결하였고 군대가 막강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 고종은 신라군과 힘을 합하여 660년 먼저 백제를 공격한 뒤 그 여세를 빌어 이듬해에 평양을 포위·공격하였으나 연개소문이 이끄는 군대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크게 패하고 돌아갔다.

멸망
666년(보장왕 25)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의 세 아들 남생(男生)·남건(男健)·남산(男産)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나라의 형편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667년 이적(李勣)·설인귀(薛仁貴)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 50만, 김인문(金仁問)이 이끄는 신라군 27만이 합세하여 평양을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이듬해인 668년(보장왕 27) 나당(羅唐) 연합군의 맹렬한 공격 앞에 마침내 항복, 보장왕과 중신들은 당나라 군대에 붙잡혀서 장안(長安)으로 갔다. 이때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謹府)를 설치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9도독부와 42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제도

정치
고구려는 본디 소노(消奴)·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의 5부족으로 형성되어 처음에는 소노부에서 부족연맹의 장(長)인 왕이 나왔으나 후에는 계루부가 이를 대신하였다. 이 5부족은 항상 고구려의 중심세력이 되었는데 중앙집권제가 확립되고 부족제도가 무너짐에 따라 이들의 집단제도는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다. 각 부족의 장을 대가(大加)라 하고 그 밑에 사자(使者)·조의(早衣)·선인(先人) 등의 벼슬을 두었는데, 이것은 옛날 중국의 경대부(卿大夫)가 거느리던 가신(家臣)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부족의 장이 아니라도 왕족의 경우는 일가의 적통장자(嫡統長子)가 대가의 자격을 가졌는데, 이것을 고추가(古雛加)라고 불렀다. 이 밖에 전에 왕위를 차지했던 소노부의 대가와, 대대로 왕실과 혼인한 절노부의 대가도 고추가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고추가는 백제의 길사(吉師), 신라의 거서간(居西干)과 같이 <귀인(貴人)>이라는 뜻이다. 중앙에서 임금의 지시를 받아 국정을 담당한 총리적인 벼슬이 대로(對盧)와 패자(沛者)였는데, 대로 밑에 주부(主簿)·우태(優台)·승(丞)이 있고 그 밑에 사자 이하 선인까지 있다. 그리고 대로 위에 상가(相加)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왕가의 직속 신하가 아니라 각 부의 대가 중에서 뽑힌 일종의 대변자(代辯者)였다.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는 관직의 서열이 정비되어 국가의 기밀·법령제정·징발·관작(官爵)을 취급하는 고위관리로서 대대로(大對盧)·태대형(太大兄;莫離支)·울절(鬱折)·태대사자(太大使者)·조의두대형(鳥衣頭大兄)을 두었고 그 밑에 대사자(大使者)·대형(大兄)·발위사자(拔位使者)·상위사자(上位使者)·소형(小兄)·제헝(諸兄)·과절(過節)·부절(不節)·선인(先人 또는 仙人)을 두었다. 또 왕족이나 이에 준한 가문의 대가(大加)에게 주던 고추가는 관직명(官職名)이 되어 외빈(外賓)을 접대했는데 태대사자의 품관이 이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대막리지(大莫離支)는 대대로(大對盧),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는 태대대로의 별칭(別稱) 이었다.

행정
초기 5부족의 집단체제가 그대로 행정구역체제로 발전하여 동·서·남·북·중(내)의 5부로 나뉘었다. 즉 계루부는 내부(內部 또는 黃部), 소노부는 서부(西部 또는 右部), 절노부는 북부(北部 또는 後部), 순노부는 동부(東部 또는 左部), 관노부는 남부(南部 또는 前部)라 하였고 이들이 사는 행정구역을 통틀어서 내평(內評)이라 하였다. 지방도 5부(部)로 나누었고 부 밑에 성(城)이 있었다. 부의 장관을 욕살(褥薩), 성의 장관을 처려근지(處閭近支) 또는 도사(道使)라 하였는데, 각각 관료와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고구려는 국민개병주의(國民皆兵主義)로 문무(文武)의 관리가 구분되지 않았으며 군대에는 대모달(大模達;중국의 衛將軍 같은 것)·말객(末客;중국의 郎將 같은 것) 등의 직위가 있다. 평양 이외의 국내성(지금의 通溝)·한성(漢城;지금의 載寧)을 별경(別京)으로 삼았다.

사회·경제
왕족과 5부의 장(長)인 대가(大加) 그 일가 친척, 그 밑에서 일을 보는 관료들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은 군사·정치·교육·제사 등을 담당하였고 농경에는 종사하지 않았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지배하는 권력계급으로, 지위에 따라 의관(衣冠)도 달랐다. 농민·노예 등을 하호(下戶)라 하였는데 이들은 직접 육체노동을 하는 피지배층이었다. 부족사회의 특징은 고구려 말까지 이어져 가부장적(家父長的) 지배체제가 유지되었고,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대가(大加)의 회합인 제가(諸加)의 회의도 말엽까지 계속 이어졌다. 법이 매우 엄하여 반역자에게는 군중이 모인 가운데 우선 화형(火刑)을 가한 다음에 목을 베며, 재산을 몰수하고 처자를 종으로 삼았다. 전쟁에 진 자와 사람을 죽인 자, 강도 등도 사형에 처했다. 도둑질을 한 자는 12배의 배상을 물어야 했고, 우마(牛馬)를 죽인 자는 종으로 삼았다. 기본산업은 농업이고, 어업이 그 다음이었다. 토지는 개념상으로 국가에 소속되었으나, 실제로는 왕자와 귀족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이들은 토지와 아울러 농민도 지배하였다. 수공업이 발달하여 금속기구·목기(木器)·토기·혁구(革具) 등을 만들었고, 직조(織造)기술도 발달하여 세포(細布)는 화폐의 구실도 하였다. 또 고구려는 낙랑군을 정복하여 그곳의 발달된 기술을 배웠고, 철이 많이 나는 평곽(平郭;지금의 鞍山 부근)을 점령함으로써 철공업(鐵工業)이 발달되어 나라가 강성해지는 원동력이 되었다. 상업은 주로 물물교환이었고 이웃나라들과도 모피(毛皮)·철구(鐵具)·세포(細布) 등의 교역이 있었다. 세금에는 2개의 종류가 있었는데, 사람에게 부과하는 것을 세(稅)라 하여 포(布)와 곡(穀)으로 받았고, 매호(每戶)에 부과하는 것을 조(租)라 하여 곡식으로만 받았다. 세는 1명에 포 5필 또는 곡 5섬이었고, 조는 3등급으로 나누어 1등은 1섬, 2등은 7말, 3등은 5말이었다.

문화

교육
중국과의 지리적 관계로 건국 전부터 한문이 사용된 것으로 짐작되나 372년(소수림왕 2)에 비로소 중국식 태학(太學)을 세웠고, 이해에 전진(前秦)의 임금 부견(符堅)이 불상(佛像)·불경(佛經)·승려(僧侶)를 보내옴으로써 불교가 들어왔으며 다음해에 율령(律令)을 제정하였다. 태학에서는 중국의 고전과 아울러 무술도 가르쳤다. 이 문무일치의 교육은 후기에 들어와서 더욱 보급되어 전국 각지에 경당이라고 하는 사립학교를 세워 미혼남자들을 모아 고전과 궁술(弓術)을 가르쳤다. 태학에는 귀족의 자제들이 들어갔고 경당에는 평민의 자제들이 들어 갔다.

국사편찬
한학이 퍼짐에 따라 국사(國史)도 편찬하게 되었는데, 기록에 나타난 것을 보면 연대와 편찬자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유기(留記)》라는 100권의 국사책이 일찍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600년(영양왕 11)에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에게 이것을 추려 《신집(新集)》 5권을 만들게 하였으나, 《유기》와 《신집》은 오늘날 모두 전하지 않는다.


미술
고구려의 미술은 고분(古墳)에 남아 있는 벽화(壁畵)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용총(舞踊塚)·각저총(角抵塚) 등 초기의 그림은 표현에 있어 기법이 서툴렀으나, 화상리(花上里) 감신총(龕神塚) 등 중기의 그림은 섬세한 사실(寫實)의 필치로 당시의 풍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신총(四神塚) 등 후기 벽화는 강한 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웅대하고 건실한 기풍을 나타내고, 사실을 초월하여 사의(寫意)의 경지에 들어섰다. 또한 강서고분에 그려진 사신도(四神圖)는 고구려시대 최고의 걸작으로 색의 조화가 뛰어나며, 쌍영총에서 발굴된 기마상(騎馬像)·남녀입상(男女立像) 등은 당시의 풍속을 알려준다. 고분의 구조나 규모로 볼 때 건축기술 또한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풍속
고구려인들은 검소하고 무(武)를 숭상하여 말타기·활쏘기에 능하였다. 궁궐·관청·절 등과 귀족의 집들은 기와를 덮고 일반 민가는 초가였으며 온돌을 사용하였다. 남자들은 모자를 썼는데, 특히 관료들의 모자는 소골(蘇骨)이라 하여 깃을 꽂고 금은으로 장식하였다.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주름잡힌 치마를 입었고 저고리는 무릎까지 내려왔다. 상류층에서는 바둑·투호(投壺)·축국(蹴鞠) 등 중국식 놀이를 하였고, 평민들은 춤·노래·씨름·석진(石戰)을 즐겼다. 장례식은 성대히 치러졌으며 여러 가지 부장물(副葬物)을 관 속에 넣는 후장(厚葬)의 풍족이 있었다. 또 10월에는 동맹(同盟)이라 하여 고대사회에 널리 유행하던 추기(秋期) 부족공동체의 대제전(大祭殿)인 국중(國中)대회를 열었다.

종교

불교
불교가 공식적으로 고구려에 들어온 것은 372년(소수림왕 2) 전진왕 부견이 승려 순도(順道)를 시켜 불경과 불상을 보낸 때였으나, 그 이전에도 어느 정도 유포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순도가 들어온 2년 후인 374년에는 진나라 승려 이도(阿道)가 들어왔고, 그 다음 해에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순도와 아도로 하여금 각각 그곳에서 불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소수림왕 다음인 고국양왕(故國讓王;재위 384∼390) 때에는 어명을 내려 불법을 숭상하라고 권장했고, 광개토왕은 즉위한 다음해인 392년 평양에 9개의 절을 더 세웠으며, 395년에는 진(秦)나라의 승려 담시(曇始)가 경률(經律) 수십부를 가지고 와서 활발히 전도하였다. 576년(평원왕 18)에는 고구려의 승려 의연(義淵)이 위(魏)·제(齊) 2대의 숭통(僧統)으로 이름이 높던 법상(法上)에게 가서 불교사를 배워 왔고, 같은 시대의 승려 낭(朗)은 양(梁)나라에 가서 불법을 공부하였다. 625년(영류왕 8)에 일본으로 건너간 혜관(惠灌)은 일본 삼론종(三論宗)의 개조(開祖)가 되었고, 평원왕 때 담징(曇徵)은 일본 호류사[法隆寺(법륭사)]의 벽화를 그렸을 뿐 아니라 지묵(紙墨)·맷돌 등을 전하였다. 이밖에 영양왕 때 보덕(普德)은 백제로 옮겨가서 열반종을 창시하였으며 혜량(慧亮)은 신라에 가서 그 곳 불교에 공헌함으로써 초대 국통(國統)이 되었다.


삼국시대 고대국가 중의 하나. 서력기원 전후에 성립되어 마한 소국들을 병합하면서 한강유역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고이왕(古爾王;재위 234∼285) 때 고대국가의 기반을 갖추었으나 660년 신라에게 멸망하였다.

역사

성립
백제의 건국설화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2가지가 실려 있다. 하나는 온조왕(溫祚王;재위 BC 18∼AD 28) 중심의 설화로, 온조왕은 고구려 건국자인 동명성왕(東明聖王;재위 BC 37∼BC 19)과 졸본왕녀(卒本王女)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앞서 부여에서 낳은 유리(瑠璃)가 와서 태자가 되자 그의 형 비류(沸流)와 함께 약간의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지금의 仁川)에, 온조는 한강 북쪽 지금의 서울 부근에 있는 위례(慰禮)에 정착하였으나 비루가 죽자 그의 무리들을 통합하였다고 한다. 또 하나는 비류 중심의 설화로, 비류와 온조왕은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 우태(優台)와 소서노(召西奴)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우태가 죽은 뒤 동명성왕이 졸본으로 망명해오자 소서노는 동명성왕에게 개가하여 고구려 건국을 도왔으며, 그 뒤 동명성왕의 원자가 태자가 되자 비류는 온조왕과 그 무리를 이끌고 미추홀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전해지는 2가지의 설화로 미루어 볼 때 백제를 건국한 주체세력은 부여족 계통의 고구려 유민인 것이 분명하다. 온조왕집단은 남하한 뒤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 정착하여 십제(十濟)를 세웠다. 그 뒤 하남위례성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백제로 개칭하였다. 미추홀에 정착한 비류계 세력과 연맹을 형성, 초기에 비류계가 주도권을 가졌다가 후기에 온조왕계로 넘어간 시기는 초고왕(肖占王;재위 166∼214) 때로 짐작되며, 이후 백제의 왕계는 온조왕계의 부여씨(扶餘氏)로 고정되었다. 고이왕 때에 이르면서 연맹체의 영역도 확대되어 한강 유역의 새로운 맹주세력으로 등장하였고, 마한을 결합, 통일의 지도권을 잡았다. 이러한 기반 위에 고이왕은 체제정비에 힘을 기울여 지배체제의 확립을 도모함으로써 고대국가의 토대를 갖추었다.

외세와의 투쟁
고이왕 때 고대국가로서의 기반을 갖춘 백제는 그 뒤 몇 번에 걸친 왕위교체 후 근초고왕(近肖古王;재위 346∼375) 때 와서 초고왕계(肖古王系)의 왕위계승권이 확립되었다. 근초고왕은 왕권을 강화시켜 내적으로 기반을 다진 뒤 대외정복활동을 전개하였다. 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냈으며, 마한의 나머지 땅을 합치고 북으로는 대방군(帶方郡)의 땅을 점령하여 낙랑군을 차지하고 남하하는 고구려세력과 충돌하게 되었다. 371년에는 아들 근구수왕(近仇首王;재위 375∼384)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여 평양성까지 쳐들어가 고국원왕(故國原王;재위 331∼371)을 죽였다. 그뒤 조금 후퇴하여 수곡성(水谷城) 부근에서 고구려와 상대하였다. 당시 전진(前秦)·고구려·신라의 3국연맹에 대항하여 백제는 중국 남조의 동진 및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이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396년(아신왕 5)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재위 391∼413)의 군대에게 대패하여 임진강 유역을 잃었고, 399년에는 신라와 가야에 침입했던 일본군이 고구려군에게 소탕되어 백제의 위치는 매우 불리하게 되었다. 개로왕(蓋鹵王;재위 455∼475) 때에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재위 413∼491)의 압력이 한층 심해져 백제는 중국의 북위(北魏)를 통하여 고구려세력을 견제하려 하였으나 실패, 475년(文周王 즉위년)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이 고구려의 공격으로 함락되고 개로왕도 사로잡혀 죽었다. 따라서 같은해 문주왕(文周王;재위 475∼477)이 즉위하자 서울을 웅진(熊津;지금의 公州)으로 옮기고 국가재건에 힘썼다. 그러나 초기의 정세는 매우 불안정하였고, 문주왕이 피살된 뒤 삼근왕(三斤王;재위 477∼479)을 거쳐 동성왕(東城王;재위 479∼501)이 즉위하였다. 당시 백제는 서해의 제해권이 고구려에 넘어가고, 가야세력이 이탈해 나가는 등 국제적 고립위기에 있었으나, 동성왕이 신라 왕족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신라와의 동맹체제를 보다 돈독히 하고 남제(南齊)와의 교통을 재개하는 등의 노력으로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성왕이 백가의 난으로 피살되자 뒤를 이어 무령왕(武寧王;재위 501∼523)이 즉위하였다. 그는 난을 평정한 뒤 나아가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을 물리치고 국제관계상에서도 백제의 위치를 확립함으로써 정국의 안정을 다져나갔다. 이러한 안정된 기반을 바탕으로 성왕(聖王;재위 523∼554)은 중흥과 왕권강화의 목적에서 538년 사비(지금의 扶餘)로 천도하여 국호를 한때 남부여(南夫餘)라 하였다. 그는 신라와 화친하고 남조(南朝)의 양(梁)나라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나라의 부흥에 힘썼고, 551년에 신라와 연맹하여 한강 하류지역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같이 북상하였던 연맹국인 신라가 군대를 되돌려 백제가 점령한 지역을 빼앗고 말았다. 이에 분격한 성왕은 554년 약속을 어긴 신라군을 관산성(管山城)에서 공격하다가 실패하고 전사하였다.

멸망
관산성 패전 이후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체제에 대해 무왕(武王;재위 600∼641)은 왕권을 회복하고자 신라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기도 하고, 익산(益山) 천도로 귀족세력의 재편성을 계획하였으나 무산, 좌절되었다. 뒤를 이은 의자왕(義慈王:재위 641∼660)은 초기에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를 강화하고, 신라를 공격하는 등 국권확장에 힘썼다. 그러나 후기로 접어들면서 지배층의 분열이 심화되고 무절제해진 의자왕의 탐락과 황음(荒淫), 그에 따른 궁중 내부에서의 부패로 백제의 지배질서는 문란해졌다. 그 결과 660년 3월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백제는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몇 차례의 격전 끝에 사비성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피해 있던 의자왕마저 항복함으로써 31왕, 678년 만에 멸망하였다. 의자왕이 항복한 뒤 흑치상지(黑齒常之)·복신(福身)·도침(道琛) 등에 의한 백제 부흥운동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당(唐)나라에서 설치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에 잠시 통치되다 신라의 판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도

정치
《삼국사기》에 의하면 260년(고이왕 27) 중앙의 초기관제인 6좌평(佐平) 16관등이 마련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근초고왕 때까지는 그 대략이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좌평은 행정부의 장관으로서 내신(內臣)·내두(內頭)·내법(內法)·위사(衛士)·병관(兵官)·조정(朝廷) 좌평을 말하며, 최고귀족회의체를 구성하였다. 16관등제는 솔계관등(率系官等)·덕계관등(德系官等)이 핵심이 되고, 좌군(佐軍)·진무(振武)·극우(剋虞)는 하부구조를 이루었다. 그 뒤 538년(성왕 16) 사비에 천도, 새로이 22부를 마련함으로써 6좌평 16관등 22부제가 정비되었다. 22부는 왕실·궁중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내관(內官) 12부와 중앙의 정무를 맡아보는 외관(外官) 10부로 이루어졌다. 한편 6세기 초까지 지방에는 22담로(擔魯)가 설치되고 여기에 왕족이 임명되어 지방행정을 맡아보았다. 사비시대에는 서울을 5부로, 전국을 5방(方)으로 나누었는데, 각 부는 500명의 군사를 거느린 달솔(達率)이 다스렸으며, 각 방의 중심인 방성(方城)에는 700∼1000명의 군사를 배속시켜 방령(方領)·방좌(方佐)가 이를 통솔하게 하였다. 방 밑에는 많은 군(郡)이 설치되었고 군에는 군장(郡將)이 있어 역시 군사를 거느리고 다스렸으며, 한편 요지에는 성을 쌓아 수비병을 두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에는 5부 37군 200성(또는 250현)이었다고 한다.

사회·경제
지배신분층의 중심은 왕실이었으며,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를 성립시켜가는 과정에서 각 지역 토착세력의 족장들은 점차 중앙의 귀족으로 전환하여 갔다. 이들은 지배군(支配群)을 형성하여 국가의 정치를 맡아보고 국토방위에 앞장을 섰다. 일반 평민들은 귀족의 사전(賜田)이나 국가의 대여지(貸與地)를 경작하고 조(租)·용(庸)·조(調)를 부담하였으며, 부역과 병역의 의무가 있었다. 이들 평민 밑에는 노예가 있었는데, 노예는 주로 전쟁포로·형벌·구매·약탈·채무 등으로 생겼다. 이 중에서도 전쟁포로가 노예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형벌은 매우 가혹하여 살인자·반역자는 물론 전쟁터에서 퇴군(退軍)한 자도 참형에 처하였으며, 여자를 범간(犯姦)한 자는 그 여자 남편의 노예가 되었고, 도둑질한 자는 유형에 처하는 동시에 훔친 물건값의 2배를 배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살인자가 노예 3명으로 형벌을 모면하는 제도도 있었다. 토지제도는 국유제를 원칙으로 하였으나, 부분적으로는 국유제를 전제로 한 촌락공유제도 병행하였다. 당시 왕은 최대의 지주였으며 공신에게 식읍(食邑)·사전 등을 주었다. 일반 백성들은 국가에서 땅을 받아 경작하는 대신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부담하였다. 조세형태는 물납(物納)으로서 전조(田租)로는 포(布)·견사(絹絲)·마(麻)·미곡 등을 그 해의 풍흉에 따라 차등을 두어 냈다. 이 외에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던 호조(戶調)도 시행하였으며, 또한 부역도 지게 하였다. 백제의 주요 산업은 농업이었다. 조·피·수수·콩·보리·팥 등은 선사시대부터 심어온 것이지만 벼농사는 비교적 늦게 시작되어, 33년(다루왕 6) 무렵 벼농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물자의 유통이 자유롭지 못하던 당시의 농업경제에서 수공업은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어느 정도 발달했고, 직조술·염색술·금속공업도 발달하였다. 교환수단으로는 귀금속이 등장하여 대외무역에 쓰이고 퇴장화폐(退藏貨幣)의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이나 일반적으로는 곡물과 천이 화폐의 구실을 하였다. 이를 중심으로 상업도 발달하여 시장을 관리하는 도시부(都市部)라는 관청까지 설치되었다.

문화

학문
고대국가 형성 이후 백제는 귀족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도덕으로서 유교를 중시하였다. 유교의 확대·보급으로 국사도 편찬되었는데, 근초고왕 때 박사(博士)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편찬한 것이 그 시초이다. 한자의 사용과 더불어 한문학도 발달하여, 초기부터 교육기관에 시(詩)·서(書)·역(易)·예기(禮記)·춘추(春秋)의 오경박사를 두어 교육을 맡아보게 하였고, 기타 각종의 전문(專門)에 관한 박사가 있었다. 그 중에는 일본에 초빙되어 가서 그들의 문화에 공헌한 사람도 적지 않다. 무녕왕 때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고안무(高安茂) 등을 일본에 보냈고, 다음의 성왕 때에는 오경박사 유귀(柳貴)와 의박사(醫博士)·역박사(易博士)·역박사(曆博士) 등을 보냈으며, 그 후에도 이러한 전문가를 교대로 파견하여 일본의 상대문명을 계발, 지도하였다. 541년(성왕 19)에는 중국 양(梁)나라에서 모시박사(毛詩博士)와 열반(涅槃) 등의 경의(經義)를 청구한 것을 보면 백제 학술의 수준이 상당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 국민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일에 열중하였지만 경사(經史)를 읽어서 문장에 능한 자도 많았다.

종교
384년(침류왕 1)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으로부터 들어오자 왕이 그를 예경(禮敬)함으로써 불교가 시작되었으며, 후에 계율종(戒律宗)·삼륜종(三輪宗)·성실종(成實宗)의 3종파가 생기고, 한산불사(漢山佛寺)·왕흥사(王興寺)·미륵사(彌勒寺)·수덕사(修德寺)·경복사(景福寺) 등 유명한 절이 건축되었다. 백제의 불교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도장(道藏)은 일본에 건너가 성실종의 개조(開祖)가 되었고, 혜총(惠聰)·도침 등의 고승이 연이어 일본에 건너가 일본 불교와 문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 밖에도 겸익(謙益)은 인도에 유학하고 돌아와 《율부(律部)》 72권을 옮겼다. 한편 백제에서는 도교가 어떠하였는지 확실한 기록이 없으나 최근에 발견된 <산경전(山景塼)>이라는 백제 때의 벽돌에 도사와 비슷한 인물이 그려져 있는 것은 신선사상 내지 도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의자왕 때의 작품인 《사택지적비문(砂宅智積碑文)》에는 세련된 문장의 노장사상이 나타나 있다.

삼국시대 고대국가 중의 하나. 서력기원 전후에 성립되어 마한 소국들을 병합하면서 한강유역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고이왕(古爾王;재위 234∼285) 때 고대국가의 기반을 갖추었으나 660년 신라에게 멸망하였다.

역사

성립
백제의 건국설화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2가지가 실려 있다. 하나는 온조왕(溫祚王;재위 BC 18∼AD 28) 중심의 설화로, 온조왕은 고구려 건국자인 동명성왕(東明聖王;재위 BC 37∼BC 19)과 졸본왕녀(卒本王女)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앞서 부여에서 낳은 유리(瑠璃)가 와서 태자가 되자 그의 형 비류(沸流)와 함께 약간의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지금의 仁川)에, 온조는 한강 북쪽 지금의 서울 부근에 있는 위례(慰禮)에 정착하였으나 비루가 죽자 그의 무리들을 통합하였다고 한다. 또 하나는 비류 중심의 설화로, 비류와 온조왕은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 우태(優台)와 소서노(召西奴)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우태가 죽은 뒤 동명성왕이 졸본으로 망명해오자 소서노는 동명성왕에게 개가하여 고구려 건국을 도왔으며, 그 뒤 동명성왕의 원자가 태자가 되자 비류는 온조왕과 그 무리를 이끌고 미추홀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전해지는 2가지의 설화로 미루어 볼 때 백제를 건국한 주체세력은 부여족 계통의 고구려 유민인 것이 분명하다. 온조왕집단은 남하한 뒤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 정착하여 십제(十濟)를 세웠다. 그 뒤 하남위례성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백제로 개칭하였다. 미추홀에 정착한 비류계 세력과 연맹을 형성, 초기에 비류계가 주도권을 가졌다가 후기에 온조왕계로 넘어간 시기는 초고왕(肖占王;재위 166∼214) 때로 짐작되며, 이후 백제의 왕계는 온조왕계의 부여씨(扶餘氏)로 고정되었다. 고이왕 때에 이르면서 연맹체의 영역도 확대되어 한강 유역의 새로운 맹주세력으로 등장하였고, 마한을 결합, 통일의 지도권을 잡았다. 이러한 기반 위에 고이왕은 체제정비에 힘을 기울여 지배체제의 확립을 도모함으로써 고대국가의 토대를 갖추었다.

외세와의 투쟁
고이왕 때 고대국가로서의 기반을 갖춘 백제는 그 뒤 몇 번에 걸친 왕위교체 후 근초고왕(近肖古王;재위 346∼375) 때 와서 초고왕계(肖古王系)의 왕위계승권이 확립되었다. 근초고왕은 왕권을 강화시켜 내적으로 기반을 다진 뒤 대외정복활동을 전개하였다. 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냈으며, 마한의 나머지 땅을 합치고 북으로는 대방군(帶方郡)의 땅을 점령하여 낙랑군을 차지하고 남하하는 고구려세력과 충돌하게 되었다. 371년에는 아들 근구수왕(近仇首王;재위 375∼384)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여 평양성까지 쳐들어가 고국원왕(故國原王;재위 331∼371)을 죽였다. 그뒤 조금 후퇴하여 수곡성(水谷城) 부근에서 고구려와 상대하였다. 당시 전진(前秦)·고구려·신라의 3국연맹에 대항하여 백제는 중국 남조의 동진 및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이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396년(아신왕 5)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재위 391∼413)의 군대에게 대패하여 임진강 유역을 잃었고, 399년에는 신라와 가야에 침입했던 일본군이 고구려군에게 소탕되어 백제의 위치는 매우 불리하게 되었다. 개로왕(蓋鹵王;재위 455∼475) 때에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재위 413∼491)의 압력이 한층 심해져 백제는 중국의 북위(北魏)를 통하여 고구려세력을 견제하려 하였으나 실패, 475년(文周王 즉위년)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이 고구려의 공격으로 함락되고 개로왕도 사로잡혀 죽었다. 따라서 같은해 문주왕(文周王;재위 475∼477)이 즉위하자 서울을 웅진(熊津;지금의 公州)으로 옮기고 국가재건에 힘썼다. 그러나 초기의 정세는 매우 불안정하였고, 문주왕이 피살된 뒤 삼근왕(三斤王;재위 477∼479)을 거쳐 동성왕(東城王;재위 479∼501)이 즉위하였다. 당시 백제는 서해의 제해권이 고구려에 넘어가고, 가야세력이 이탈해 나가는 등 국제적 고립위기에 있었으나, 동성왕이 신라 왕족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신라와의 동맹체제를 보다 돈독히 하고 남제(南齊)와의 교통을 재개하는 등의 노력으로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성왕이 백가의 난으로 피살되자 뒤를 이어 무령왕(武寧王;재위 501∼523)이 즉위하였다. 그는 난을 평정한 뒤 나아가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을 물리치고 국제관계상에서도 백제의 위치를 확립함으로써 정국의 안정을 다져나갔다. 이러한 안정된 기반을 바탕으로 성왕(聖王;재위 523∼554)은 중흥과 왕권강화의 목적에서 538년 사비(지금의 扶餘)로 천도하여 국호를 한때 남부여(南夫餘)라 하였다. 그는 신라와 화친하고 남조(南朝)의 양(梁)나라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나라의 부흥에 힘썼고, 551년에 신라와 연맹하여 한강 하류지역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같이 북상하였던 연맹국인 신라가 군대를 되돌려 백제가 점령한 지역을 빼앗고 말았다. 이에 분격한 성왕은 554년 약속을 어긴 신라군을 관산성(管山城)에서 공격하다가 실패하고 전사하였다.

멸망
관산성 패전 이후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체제에 대해 무왕(武王;재위 600∼641)은 왕권을 회복하고자 신라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기도 하고, 익산(益山) 천도로 귀족세력의 재편성을 계획하였으나 무산, 좌절되었다. 뒤를 이은 의자왕(義慈王:재위 641∼660)은 초기에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를 강화하고, 신라를 공격하는 등 국권확장에 힘썼다. 그러나 후기로 접어들면서 지배층의 분열이 심화되고 무절제해진 의자왕의 탐락과 황음(荒淫), 그에 따른 궁중 내부에서의 부패로 백제의 지배질서는 문란해졌다. 그 결과 660년 3월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백제는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몇 차례의 격전 끝에 사비성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피해 있던 의자왕마저 항복함으로써 31왕, 678년 만에 멸망하였다. 의자왕이 항복한 뒤 흑치상지(黑齒常之)·복신(福身)·도침(道琛) 등에 의한 백제 부흥운동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당(唐)나라에서 설치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에 잠시 통치되다 신라의 판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도

정치
《삼국사기》에 의하면 260년(고이왕 27) 중앙의 초기관제인 6좌평(佐平) 16관등이 마련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근초고왕 때까지는 그 대략이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좌평은 행정부의 장관으로서 내신(內臣)·내두(內頭)·내법(內法)·위사(衛士)·병관(兵官)·조정(朝廷) 좌평을 말하며, 최고귀족회의체를 구성하였다. 16관등제는 솔계관등(率系官等)·덕계관등(德系官等)이 핵심이 되고, 좌군(佐軍)·진무(振武)·극우(剋虞)는 하부구조를 이루었다. 그 뒤 538년(성왕 16) 사비에 천도, 새로이 22부를 마련함으로써 6좌평 16관등 22부제가 정비되었다. 22부는 왕실·궁중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내관(內官) 12부와 중앙의 정무를 맡아보는 외관(外官) 10부로 이루어졌다. 한편 6세기 초까지 지방에는 22담로(擔魯)가 설치되고 여기에 왕족이 임명되어 지방행정을 맡아보았다. 사비시대에는 서울을 5부로, 전국을 5방(方)으로 나누었는데, 각 부는 500명의 군사를 거느린 달솔(達率)이 다스렸으며, 각 방의 중심인 방성(方城)에는 700∼1000명의 군사를 배속시켜 방령(方領)·방좌(方佐)가 이를 통솔하게 하였다. 방 밑에는 많은 군(郡)이 설치되었고 군에는 군장(郡將)이 있어 역시 군사를 거느리고 다스렸으며, 한편 요지에는 성을 쌓아 수비병을 두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에는 5부 37군 200성(또는 250현)이었다고 한다.

사회·경제
지배신분층의 중심은 왕실이었으며,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를 성립시켜가는 과정에서 각 지역 토착세력의 족장들은 점차 중앙의 귀족으로 전환하여 갔다. 이들은 지배군(支配群)을 형성하여 국가의 정치를 맡아보고 국토방위에 앞장을 섰다. 일반 평민들은 귀족의 사전(賜田)이나 국가의 대여지(貸與地)를 경작하고 조(租)·용(庸)·조(調)를 부담하였으며, 부역과 병역의 의무가 있었다. 이들 평민 밑에는 노예가 있었는데, 노예는 주로 전쟁포로·형벌·구매·약탈·채무 등으로 생겼다. 이 중에서도 전쟁포로가 노예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형벌은 매우 가혹하여 살인자·반역자는 물론 전쟁터에서 퇴군(退軍)한 자도 참형에 처하였으며, 여자를 범간(犯姦)한 자는 그 여자 남편의 노예가 되었고, 도둑질한 자는 유형에 처하는 동시에 훔친 물건값의 2배를 배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살인자가 노예 3명으로 형벌을 모면하는 제도도 있었다. 토지제도는 국유제를 원칙으로 하였으나, 부분적으로는 국유제를 전제로 한 촌락공유제도 병행하였다. 당시 왕은 최대의 지주였으며 공신에게 식읍(食邑)·사전 등을 주었다. 일반 백성들은 국가에서 땅을 받아 경작하는 대신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부담하였다. 조세형태는 물납(物納)으로서 전조(田租)로는 포(布)·견사(絹絲)·마(麻)·미곡 등을 그 해의 풍흉에 따라 차등을 두어 냈다. 이 외에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던 호조(戶調)도 시행하였으며, 또한 부역도 지게 하였다. 백제의 주요 산업은 농업이었다. 조·피·수수·콩·보리·팥 등은 선사시대부터 심어온 것이지만 벼농사는 비교적 늦게 시작되어, 33년(다루왕 6) 무렵 벼농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물자의 유통이 자유롭지 못하던 당시의 농업경제에서 수공업은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어느 정도 발달했고, 직조술·염색술·금속공업도 발달하였다. 교환수단으로는 귀금속이 등장하여 대외무역에 쓰이고 퇴장화폐(退藏貨幣)의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이나 일반적으로는 곡물과 천이 화폐의 구실을 하였다. 이를 중심으로 상업도 발달하여 시장을 관리하는 도시부(都市部)라는 관청까지 설치되었다.

문화

학문
고대국가 형성 이후 백제는 귀족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도덕으로서 유교를 중시하였다. 유교의 확대·보급으로 국사도 편찬되었는데, 근초고왕 때 박사(博士)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편찬한 것이 그 시초이다. 한자의 사용과 더불어 한문학도 발달하여, 초기부터 교육기관에 시(詩)·서(書)·역(易)·예기(禮記)·춘추(春秋)의 오경박사를 두어 교육을 맡아보게 하였고, 기타 각종의 전문(專門)에 관한 박사가 있었다. 그 중에는 일본에 초빙되어 가서 그들의 문화에 공헌한 사람도 적지 않다. 무녕왕 때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고안무(高安茂) 등을 일본에 보냈고, 다음의 성왕 때에는 오경박사 유귀(柳貴)와 의박사(醫博士)·역박사(易博士)·역박사(曆博士) 등을 보냈으며, 그 후에도 이러한 전문가를 교대로 파견하여 일본의 상대문명을 계발, 지도하였다. 541년(성왕 19)에는 중국 양(梁)나라에서 모시박사(毛詩博士)와 열반(涅槃) 등의 경의(經義)를 청구한 것을 보면 백제 학술의 수준이 상당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 국민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일에 열중하였지만 경사(經史)를 읽어서 문장에 능한 자도 많았다.

종교
384년(침류왕 1)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으로부터 들어오자 왕이 그를 예경(禮敬)함으로써 불교가 시작되었으며, 후에 계율종(戒律宗)·삼륜종(三輪宗)·성실종(成實宗)의 3종파가 생기고, 한산불사(漢山佛寺)·왕흥사(王興寺)·미륵사(彌勒寺)·수덕사(修德寺)·경복사(景福寺) 등 유명한 절이 건축되었다. 백제의 불교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도장(道藏)은 일본에 건너가 성실종의 개조(開祖)가 되었고, 혜총(惠聰)·도침 등의 고승이 연이어 일본에 건너가 일본 불교와 문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 밖에도 겸익(謙益)은 인도에 유학하고 돌아와 《율부(律部)》 72권을 옮겼다. 한편 백제에서는 도교가 어떠하였는지 확실한 기록이 없으나 최근에 발견된 <산경전(山景塼)>이라는 백제 때의 벽돌에 도사와 비슷한 인물이 그려져 있는 것은 신선사상 내지 도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의자왕 때의 작품인 《사택지적비문(砂宅智積碑文)》에는 세련된 문장의 노장사상이 나타나 있다. 
 
삼국시대 고대국가의 하나. BC 57년부터 AD 935년까지 56대 992년 동안 존속하였으며, 7세기 중엽에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여 대동강∼원산만 이남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단일민족통일국가를 세웠다. 신라라는 국호는 역사서에 따라 사로(斯盧)·사라(斯羅)·서나(徐那)·서나벌(徐那伐)·서야(徐耶)·서야벌(徐耶伐)·서라(徐羅)·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 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 뜻은 동방의 나라, 새로운 나라, 또는 성스러운 곳이라는 <수풀>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503년(지증왕 4)에 그 중에서 신라로 확정하였다. 《삼국사기》 찬자에 의하면 이 신라의 <신>은 덕업일신(德業日新)에서, <라>는 망라사방(網羅四方)에서 각기 취하였다고 한다.

역사

성립
시조 설화에 의하면, 시조는 BC 1세기 무렵의 박혁거세(朴赫居世)로서 그는 경주평야에 자리잡고 있던 6부족의 우두머리들에 의해 추대되었다고 한다. 신라 초기의 왕들은 박(朴)·석(昔)·김(金)의 3성(姓) 가운데에서 추대되었는데, 이들은 6부족 중 특히 우세하고, 또 서로 밀접한 혈연적 관계를 가진 3개촌의 부족들이었다. 신라는 4세기 중엽 부근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차례로 통합하면서 연맹왕국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내물왕(奈勿王;재위 356∼402) 때부터 왕호로서 마립간(麻立干)을 썼으며, 종래의 박·석·김 3성에 의한 왕위의 교립(交立)이 없어지고 김씨가 왕위를 독점 세습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안으로 정치체제를 변혁하고 왕의 칭호를 개정하는 등 발전을 꾀하는 한편, 밖으로는 고구려·전진(前秦)·일본 등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신라는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고구려의 지원을 받았는데, 광개토왕릉(廣開土王陵)의 비문(碑文)에 의하면 신라왕의 요청으로 400년에 고구려 병사 5만 명이 신라의 국경지대로 출동하여 신라를 괴롭히던 백제군을 크게 격파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고구려의 군사원조는 신라의 자주적인 발전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했으며, 특히 427년(고구려 장수왕 15) 고구려가 평양(平壤)으로 천도하면서 남하정책을 꾀하자 신라는 백제와 동맹관계를 맺었다.

발전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갖추어 대내외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시작한 것은 6세기 초부터였다. 법홍왕(法興王;재위 514∼540) 때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불교를 공인하고, 연호를 건원(建元)으로 하는 등 통치체제를 갖추었다. 다음의 진흥왕(眞興王;재위 540∼576) 때에는 이와 같은 기반 위에서 대외발전이 추진되었다. 532년(법흥왕 19) 김해(金海)에 있던 금관가야(金官伽倻)를 병합한데 이어 562년(진흥왕 23)에는 고령(高靈)의 대가야(大伽倻)를 공략·멸망시킴으로써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백제와 연합해서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탈취하였는데, 처음에는 한강 상류지역의 죽령(竹嶺) 이북과 고현(高峴;지금의 鐵嶺) 이남의 10군을 점령했으나, 553년에는 백제군이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한강유역 전부를 독차지하였다. 이같은 진흥왕의 정복사업은 창녕(昌寧)·북한산(北漢山)·황초령(黃草嶺)·마운령(磨雲嶺)에 있는 4개의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와 단양(丹陽)에 있는 적성비(赤城碑)가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진평왕 후반기 고구려·백제 두 나라의 침략이 강화되고 선덕여왕이 즉위한 뒤 한층 가열되자 신라는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당(唐)나라에 대한 외교를 강화하였다. 당나라의 무력에 힘입어 660년(무열왕 7)에 백제를, 668년(문무왕 8)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 삼국통일 뒤 왕권은 더욱 강화되어, 신문왕(神文王;재위 681∼692) 때에는 강력한 전제왕권이 구축되었다. 신문왕은 상대등(上大等)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했을 뿐 아니라 통일에 따른 중앙·지방의 여러 행정·군사 조직을 완비하였다. 그리하여 성덕왕(聖德王;재위 702∼737) 때에는 전제왕권하에 극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쇠퇴와 멸망
혜공왕(惠恭王;재위 765∼780) 이후는 전제왕권의 몰락기로서, 왕위쟁탈을 중심으로 한 난리가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진성여왕(眞聖女王;재위 887∼897)에 이르러서는 전국적인 동란을 맞게 되었다. 중앙의 문란한 정치가 지방에까지 번져 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결과 국경지방의 백성들이 중국·일본 등지로 몰래 도망하는 예가 많아졌고, 일부는 해적이 되기도 하였다. 마지막의 약 50년간은 중앙정부의 부패에 따라 지방의 호족세력이 다시 대두되어 후삼국시대가 전개되었다. 신라의 세력은 지금의 경상도지방에 국한되고 전라도 방면은 견훤(甄萱)이 차지하여 후백제를 세웠으며, 강원도 북부와 경기도·황해도·평안도 지방은 궁예(弓裔)가 차지하여 후고구려를 세워 다시 3국 정립(鼎立)의 형세가 되었다. 918년 궁예를 쓰러뜨리고 고려 태조에 즉위한 왕건(王建)이 한동안 신라와의 친선정책을 꾀함으로써 신라는 그 수명을 다소간 연장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후백제에 대해 절대우위의 위치에 놓이게 되자 경순왕(敬順王;재위 927∼935)은 935년 11월 고려에 자진 항복하여 신라는 멸망하였다.

제도

정치
중앙의 통치조직은 법흥왕 때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여 516∼517년 무렵에는 병부(兵部)가 설치되었으며, 531년에는 귀족회의인 화백회의(和白會議)의 의장으로서 상대등제도가 답변확정되었다. 그 뒤 544년(진흥왕 5)에는 관리의 규찰을 맡은 사정부(司正府)가 만들어졌고, 565년에는 국가의 재정을 맡은 품주(稟主)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행정기구 발달에 있어 획기적 시기는 진평왕 때였다. 581년에는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 583년에는 선박과 항해를 담당하는 선부(船府)가 각각 창설되었으며, 586년에는 의례·교육을 담당하는 예부(禮部) 등이 잇따라 창설되어 관제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진덕여왕 때에는 당나라의 정치제도를 모방한 대규모의 정치개혁이 단행되었다. 즉 651년에 종래의 품주를 개편, 국왕 직속의 최고관부로서 집사부(執事部)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신라의 관제가 크게 변화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집사부는 귀족연합적인 전통보다는 왕권의 지배를 받는 행정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당나라제도의 채용은 통일 이후에 더욱 성행하여 경덕왕(景德王;재위 742∼765) 때에 이르러서는 여러 제도가 모두 갖추어졌다. 중앙에 집사성(景德王;집사부가 개칭됨)·병부·창부(倉部)·예부·승부(乘部)·사정부·예작부(例作府)·선부·영객부(領容府)·위화부(位和府)·좌우이방부(左右理方府)·경성주작전(京城周作典) 등 많은 관청이 마련되었다.

행정
신라의 행정체제는 그 영토의 확장에 따라 변천되어 갔는데, 지증왕 이후에 주요한 곳에 주(州)를 두고, 그 장관으로 군주(軍主)를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으며, 이 군주 밑에 여러 성주(城主)가 있었다. 삼국시대에 신라의 영토는 낙동강 유역과 동해안지방, 그리고 북으로 한강 유역까지 뻗쳤는데 낙동강 상류의 중심지인 상주(尙州)에 사벌주(沙伐州), 중류지역의 중심지인 창녕에는 비사벌주(比斯伐州)가 설치되었으며, 새로 편입된 한강유역의 통치를 위하여 신주(新州;후에 漢山州, 南川州로 개칭)를 두었고, 강원도 춘천(春川) 방면에 수약주(首若州), 삼척(三陟)·강릉(江陵) 방면에 하서주(河西州) 등이 설치되었다. 삼국을 통일하여 확장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지방조직의 정비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685년(신문왕 5)에는 9주가 마련되어 신라·고구려·백제의 옛 땅에 각기 3개의 주가 설치되었다. 주의 장관은 문무왕 때에 군주에서 총관(摠管)으로, 다시 원성왕 때에는 도독(都督)으로 개칭되었는데 이것은 군사적 성격에서 차츰 행정적인 성격으로 변해간 것을 의미한다. 주 밑에는 군(郡)·현(縣), 그 아래로 하급 행정단위인 촌(村)·향(鄕)·부곡(部曲)이 있었다. 그리고 수도가 남동쪽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그 결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5소경(小京)을 요지에 두었다. 소경에는 장관인 사대등(仕大等) 이하 여러 관직이 있었는데 중앙의 귀족들이 여기에 살며 지방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동시에 지방세력의 통제를 위한 역할도 담당하였다.

군사
신라의 군사제도는 정세의 변천에 따라 여러 번 변화했다. 통일 이전에 부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6정(停)은 통일 후에 크게 변화하여 중앙군으로서 9서당(誓幢), 지방주둔군으로서 10정 및 기타 여러 부대가 편성되었다. 9서당은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백제·말갈 등의 다른 부족까지도 포함하였는데, 이는 반란을 일으킬 위험성이 있는 다른 부족에 대한 근심을 덜고, 나아가 중앙의 직속부대의 병력을 강화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한편 10정은 9주 중 가장 지역이 넓고 국방상의 요지인 한산주에만 2정을 두고 다른 주에는 각각 1정씩을 배치하였다. 이와 같이 전국에 배치된 10정은 국방과 경찰의 임무를 아울러 담당하였다.

사회·경제
신라는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신분제도인 골품제도를 마련하여 통치기반을 구축하였다. 골품제는 개인 혈통의 존비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가옥의 크기·의복의 빛깔, 우마차(牛馬車)의 장식 등 일상생활에까지 특권과 제약이 부여되는 제도로서, 성골(聖骨)·진골(眞骨)·6두품(六頭品)·5두품·4두품 등이 있었다. 성골은 김씨왕족 중에서도 왕이 될 자격을 갖춘 최고의 신분이었다고 하는데 진덕여왕을 끝으로 하여 소멸하였다. 진골도 성골과 마찬가지로 왕족이었으며, 처음에는 왕이 될 자격이 없었으나 성골이 소멸되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진골 아래 6개의 신분 중 6두품·5두품·4두품은 하급귀족으로서 관료가 될 수 있는 신분이었으나, 3두품·2두품·1두품은 그것이 불가능하여 일반 평민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 골품제와 관직관계를 보면 진골은 최고 관등인 이벌찬(伊伐飡)까지 승진할 수 있었으며, 6두품은 득난(得難)이라 하여 진골 다음가는 신분으로 6관등인 아찬(阿飡)까지, 5두품은 10관등인 대나마(大奈麻)까지, 4두품은 12관등인 대사(大舍)까지 승진의 한도가 제한되어 있었다. 한편, 신라의 토지제도는 토지국유제를 전제로 마련되었다. 사원(寺院)에는 사전(寺田)이 지급되었으며, 관리들에게는 녹읍(祿邑)을 주다가 689년(신문왕 9)에는 이를 폐지하고, 그 대신 조곡(租穀)을 주기로 하였으나 뒤에 다시 녹읍이 부활되었다. 삼국시대에 사전(賜田)·녹읍 등을 준 것은 개인에 의한 대토지소유의 계기를 만들었으며, 삼국통일 이후의 토지 및 농업인구의 증가, 생산력의 향상, 잉여생산물의 상품화 등의 사회상황은 대토지소유의 가능성을 한층 더 촉진시켜 토지사유화의 경향을 조장하였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토지를 나누어 주는 대가로 조·용·조(租庸調)의 의무를 부담하도록 했다. 신라의 기본적인 산업은 농업이었다. 주요 농산물로는 보리·조·수수·콩·마 등으로서 쌀은 그리 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가공품으로는 술·기름·꿀·간장·베 등이 있었고, 농촌에서도 어느 정도 농기구를 만들어 썼다. 무덤의 유물에 의하면, 귀족사회에서는 고대로부터 금속공예품이 쓰였으며, 자체 내에서 금·은·철·구리의 공예품이 제작되기는 6세기 초기부터인 듯하다. 그러나 철의 산출은 고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3세기 전부터 낙랑·대방·일본 등지에 수출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509년(지증왕 10)에는 경주(慶州)에 동시(東市)가 열렸고, 7세기 말에는 서시(西市)·남시(南市)가 열릴 정도로 상업이 번창하였다. 삼국통일을 전후해서는 행상(行商)도 나타났으며, 무역은 대외관계가 시작되면서 행해졌는데 문성왕(文聖王;재위 839∼857) 때에는 장보고(張保皐)가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여 한 때 해상권을 독점하였다.

문화

교육
신라시대에는 귀족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도덕으로서 유교를 중요시하였다. 삼국통일 이전에는 유교교육을 담당하는 학교가 정비되지 않았으나, 교육적 기능을 지닌 화랑도(花郎道)가 도덕적 교육에 큰 구실을 담당하였다. 그 뒤 682년(신문왕 2) 유교적 이념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국학(國學)을 설립, 3과(科)로 나누어 유교경전을 교육하였다. 국학은 원래 특권층 자제들에게 출세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기관이었는데, 788년(원성왕 4)에는 이에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라는 제도를 설치하고, 성적을 3등급으로 구분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유교교육기관 이외에 천문루각(天文漏刻)·의학·율령 등 직업화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도 있었다.

국사편찬
한자의 사용과 더불어 545년(진홍왕 6) 《국사(國史)》가 편찬되었다. 이 국사편찬은 당시의 대신이던 이사부(異斯夫)가 상주하여 국왕의 재가를 얻은 뒤에 거칠부(居柒夫) 등에 의해서 국가의 큰 사업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이는 유교적인 정치이상에 입각하여 왕자(王者)의 위업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편찬된 것으로 짐작된다.
 

미술
신라의 미술은 고분과 불사(佛寺)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통일 전의 신라 고분양식으로서는 돌무지덧널무덤·독무덤·돌방무덤 등이 있다. 또 경주 황남동(皇南洞)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와 여러 고분에서 나온 출토품들은 매우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어, 신라미술의 높은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예술작품은 석굴암과 불국사이다. 석굴암은 그 안에 본존불상을 중심으로 보살상·나한상·인왕상 등을 배치하여 불교세계의 이상을 나타내고 있으며, 불국사는 토함산을 배경으로 하여 앞쪽에는 청운교·백운교 등의 돌층계와 범영루 등이 있다.

종교
신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5세기초 눌지마립간 때, 고구려로부터 전해졌으나 당국의 박해로 전파되지 못하다가, 521년 중국 양(梁)나라 무제가 승려 원표(元表)를 보냄으로써 정식으로 진해졌다. 그러나 법흥왕 때 귀족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전파에 실패하였고,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불교가 공인된 것은 527년(법홍왕 14)이었다. 신라의 불교는 고구려를 거쳐 들어온 북방계통과 공인 뒤에 양·진(陳) 등을 통하여 교류된 남방계통의 불교가 비교적 빨리 합류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약 100년간은 백제·일본 등지의 불교와 같이 왕법적(王法的) 색채가 강한 것이 특색이었다. 구법사상(求法史上) 한 시기를 그은 원광(圓光)을 비롯하여 자장(慈藏)은 636년(선덕왕 5) 당나라에 들어가 율종(律宗)을 들여왔다. 원효(元曉)는 경론(經論)을 해석한 책 81부를 지었고 해동종(海東宗;淨土敎)을 열어 민중불교를 일으켰으며, 의상(義湘)은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 밖에 유식론(唯識論)에 원측(圓測)·경홍(憬興)·도증(道證)·대현(大賢), 화엄종에 승전(勝詮), 율종에 진표(眞表) 등이 나타나 불교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신라 말기에는 선종(禪宗)이 성행하였는데 신라의 선종은 7세기 전반에 법랑(法郎)이 처음 전한 것으로, 이를 이어 8세기 후반에는 신행(神行)·도의(道義) 등이 북종선(北宗禪)과 남종선(南宗禪)을 차례로 들여왔다. 이로 말미암아 교외별전(敎外別傳)인 선(禪)의 신앙이 차차 일어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9산(山)이 성립, 5교(敎)와 대립해서 발전하게 되었다. 도교에 관해서는 문헌이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도가(道家) 내지 신선(神仙)사상의 영향은 화랑도에서 추측할 수 있는데 신라 통일 뒤 태평시대에는 도교의 영향도 컸으리라 생각된다
 
 
 
죄송해여 제가 시간이 없어서 그냥 인터넷에서 찾은그대로 올리내요 죄송합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고구려족(高句麗族)은 만주(滿洲)지방에 살던 부여족(扶餘族)에서 갈라져 나온 민족으로 처음에는 쑹화강[松花江(송화강)] 유역에 살았는데 BC 2세기경부터 남하(南下)하여 동가강유역에서 압록강(鴨綠江) 유역에 걸친 산악지대에 살면서 수렵생활을 하였다. 처음에 고구려족은 현도군의 지배권안에 있었으나, 그 지방이 산악지대이므로 중국의 지배력이 철저하지 못하였다. 민족의식에 눈뜬 이들은 중국에 대하여 꾸준한 저항을 계속하였으며, 부족간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고 강한 부족을 중심으로 한데 뭉쳐 집권국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주몽(高朱蒙;東明聖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桓仁지방)에 고구려를 세운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BC37년으로 되어 있다. AD 3년 주몽의 아들 유리왕 때에 수도를 국내성(國內城;지금의 通溝)지방으로 옮겼고, 제6대 태조왕(太祖王고;재위 53∼146)때부터 차츰 다른 부족들을 정복하여 강토를 넓히고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209년(산상왕 13)에는 환도성(丸都城)을 축조하였다.

외세와의 투쟁
고구려가 일어난 땅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한반도에 침입하는 중도에 위치했으므로 그들과 끊임없이 싸움이 벌어졌다. 특히 고구려가 압록강 하류를 공격하여 중국 본토와 낙랑군(樂浪郡) 사이의 교통을 위협하자 당시 중국의 삼국(三國) 가운데 하나로 북쪽을 차지하고 있던 위(魏)나라는 장수 관구검(毋丘儉)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여 224년(동천왕 18) 수도 환도성을 함락시킨 적이 있었다. 이같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고구려는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313년(미천왕 14)에는 400여년이나 내려 오던 낙랑군과 그 남쪽의 대방군(帶方郡)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중국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어 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재위 391∼413)과 20대 장수왕(長壽王;재위 413∼491)에 이르러 대대적인 정복을 감행하여 북(北)으로는 쑹화강, 서(西)로는 랴오허강[遼河(요하)]을 넘었고, 남(南)으로는 아산(牙山)과 삼척(三陟)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하여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427년 장수왕은 수도를 환도성으로부터 평양(平壤)으로 옮겼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남쪽으로 신라·백제와 맞서고 서쪽으로는 중국을 통일한 수(隋)나라와 겨루게 되었다. 마침내 598년(영양왕 9) 수나라 문제(文帝)는 수륙 30만 군대를 거느리고 랴오허강까지 쳐들어왔으나 고구려의 반격·질병·풍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뒤를 이어 즉위한 양제(煬帝) 역시 군비를 정돈하여 612년(영양왕 23) 113만 군대를 거느리고 랴오허강을 건너 요동성(遼東城:지금의 遼陽)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의 수비가 견고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양제는 따로 30만 군대를 거느리고 압록강 서쪽으로 진출하였다.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은 후퇴를 가장하고 수나라 군대를 유인하여 살수(薩水:지금의 淸川江)에서 일대 반격전을 전개해서 섬멸, 30만중에서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2000여 명이었다. 한편 수군(水軍)은 7만의 병력이 300척의 배로 대동강에 이르러 평양을 공격하였으나, 영양왕의 아우 건무(建武)가 복병(伏兵)으로 이를 무찔렀다. 그 뒤에도 양제는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치려고 군대를 움직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고구려가 중국의 동북방에 강대한 세력으로 군림하여 중국과 대립할 뿐 아니라 북쪽의 돌궐(突厥) 등과 내왕하니 중국으로서는 큰 위협이 되었다. 수나라 다음에 일어난 당(唐)나라도 이같은 고구려를 두고 안심할 수 없어서 태종(太宗)은 644년(보장왕 3) 3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수도 낙양(洛陽)을 출발하여 다음해 봄에 랴오허강 건너 요동성 백암성(白巖城)을 총공격하였으나 60여 일의 공격에도 고구려군은 끝까지 항전하여 태종은 마침내 후퇴하였다. 당나라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高宗)도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고구려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영도하에 국민이 일치단결하였고 군대가 막강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 고종은 신라군과 힘을 합하여 660년 먼저 백제를 공격한 뒤 그 여세를 빌어 이듬해에 평양을 포위·공격하였으나 연개소문이 이끄는 군대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크게 패하고 돌아갔다.

고구려,백제,신라에 대해서 내공 15!

... 그냥 고구려,백제,신라 만 적을 껀데요.. 사회책을 안가져와서;ㅁ; 제가 참을성이... (너무 복잡하게 말구요 ㅠ) 어쨌든 좀 부탁드립니다 ㅠ 적을지도 모르지만 내공 15...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해서,,,[내공35]

... 성의껏 써주신 분께 정말 감사하며 갑사내공 드리겠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1.고구려 백제 신라 설화를 한 단어로,, 고구려 동명왕설화, 백제 온조왕 설화, 신라...

고구려백제신라에대해서

고구려,백제,신라 에대해서 알려주세요~! 어느 한것만... 넓은범위에서 알려주세요~ 내공 겁니다! 이정도면 꽤 했죠... (장수왕 15) 만주 퉁거우[通溝] 지방의 국내성(國內城)에서...

고구려,백제,신라에 대해서..

... 제가 고구려,백제,신라에대해 알고싶어요.. 책은... 내공은 걱정마시고요..~~ 1고구려 고구려를 누가세웠는지... 그리고 그의 아들 장수왕에 대해 설명 드릴께요 장수왕의 뜻은...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해서..(내공 40)

...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서로 다투는 이유는? 또 최종 승자는? 2. (1)고구려의 성장과 발전(8줄) (2)백제의 성장과 발전(8줄) (3)신라의 성장과 발전(8줄) 이렇게 알려주세요....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해서 좀 가르쳐...

오늘까지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해서 좀 가르쳐 주세여 내공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지발 부탁합니더~~~ 문화적특징(나라별특징) 삼국의 특징 고구려 문화의 특징; -특징;...

고구려,백제 신라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고구려,백제 신라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이것은 꼭들어가게 해주세요 당나라가... 내공 30드립니다. 빨리 해주세요.. 당나라가 고구려에 침입한 전쟁은 안시성 전투, 평양성 전투...

[국사질문]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해서 ..

... 그 5개의 나라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생성과 소멸의 앞뒤가 머리속에서 정리가 되질... 내공 겁니다 ! 일단은 고구려백제의 뿌리는 부여라고 보시는 편이 낫습니다 우리...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해서 조사하기...

제가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해서 조사해야 하는데, 잘 아 는게 없어서... 부탁드립니다.... 그럼 ㅅㄱ 하세염 내공은 10드립니다... 일단 근초고왕의 업적 <왕권강화> 즉위한 뒤...

고구려,백제,신라 건국 과정[내공15]

간단하고도 실속있게 고구려,백제,신라 건국 과정 알려주세요 내공15 검니다!! 삼국 중 가장 먼저 건국을 한 것은 신라입니다. 시조는 박혁거세 신라는 여섯 부가 살고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