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삼국시대,통일신라,고려시대,조선시대,오늘날의 한복모습

고구려,삼국시대,통일신라,고려시대,조선시대,오늘날의 한복모습

작성일 2007.03.10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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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5학년 인데요...

지금 토요휴업일 활동지가 있어서 풀어야하는데...

부탁드릴게요.

 

※문제:옛날과 오늘날 한복의 모습을 조사해 보고 조상들의 의상과 우리들의 의상을 비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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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                                                                                                                                    │

│(고분벽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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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 │                                                                                                                                    │

├─────┼─────────────────────────────────┤

│통일 신라 │                                                                                                                                    │

│     시대      │                                                                                                                                    │

├─────┼─────────────────────────────────┤

│고려 시대 │                                                                                                                                    │

├─────┼─────────────────────────────────┤

│조선 시대 │                                                                                                                                    │

├─────┼─────────────────────────────────┤

│ 오 늘 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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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문제가 이런식이예요....

부탁할게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이거 보고 숙제하삼 ㅋㅋㅋㅋ  점수은  해주삼

  저는 청파초등학교 5-7반 15번 조영인임니당

고구려시대

고구려 고분 벽화를 통해 바지, 저고리, 치마, 두루마기의 의복형태를 볼 수 있다. 남녀 모두 선을 장식한 긴 저고리에 바지를 입고 허리띠를 맨 활동적이고 기능적인 형태였으며 치마는 여성전용 의례복으로 색동, 주름치마도 입었다.

통일신라

통일신라시대에는 당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예복인 활옷, 원삼, 당의 등을 이 무렵부터 입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복식제도를 3기의 변천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고려 초기중기에는 우리 고유의 복식에 당제와 송제의 복식이 영향을 준 시기이며, 고려 후기에는 원과의 국혼 관계를 통해 몽고복식과 풍속이 유행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명의 복식의 영향을 받았는데, 관복은 중국에 비하여 2등 체강 원칙을 적용하여 왕복은 중국의 친왕례를 따르고 왕비의 관복은 송의 명부복이자 명의 명부복인 적의였다.
고려시대의 우리 나라 고유의 복식은 삼국시대 이래 큰 변화 없이 민서계급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으며, 국왕도 연거시에는 우리 고유 복식을 착용하였다.

조선시대
남자는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저고리의 기본형이 서민복으로 이어져 왔다. 저고리는 길이가 길고 여유있는 형태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작고 짧은 저고리에 풍성한 치마, 웅장한 머리모양 등 전통 한복미가 나타났다. 신분과 권력에 따른 복식이 특색있게 발달하는 등 많은 변화를 겪은 복식 발전기이다.

조선시대는 신분제도가 엄격하여 복식의 계층분화를 더욱 강화하였는데, 이와 같은 신분복식은 왕복, 백관복, 서리복과 상층지배 계급의 부녀인 명부복(命婦服)으로 집약되었고, 신분이 낮은 서민층은 상고시대부터 내려온 고유복식의 기본 구조인 바지·저고리와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이들 복식은 법제와 관습에 의하여 규제되었다.


개화기

개화기 이후엔 기본형태는 유지하면서 저고리 길이에 변화가 많았으며 고름대신 브로우치를 달거나 통치마를 입기도 했다.
개화기 들어 한복은 두 갈래 길을 걷고 있다.
하나는 예복화되어 특별한 날에만 입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생활한복으로서 우리 옷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한복은 전통과 현대로 나뉘어져 다양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

현대

8·15 해방 후의 한복변화는 해방직후는 저고리의 형태가 30년대와 별 차이는 없었으나 화장 길이가 짧아지고 배래 선이 곡선으로 변화되었다.
1950년대는 6·25동란으로 사회가 불안정하여 한복의 형태는 별로 변하지 않았으며, 1960년대에는 일상복으로 활동하기 편하도록 변형된 일명 개량한복(생활한복)이 있었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1970년대 들어오면서 한복은 명절복이나 파티복, 무대복으로 입혀지게 되었는데, 한복에 화려한 장식을 하였으며 치마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페티코트를 입었다.
1980년대, 1990년대를 지나면서 한복의 이러한 실루엣은 변화하지 않고 있으며, 짧은 저고리·긴치마의 기본형을 벗어나 한복의 여러 가지 디자인요소를 접목시킨 생활한복은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명절 날의 예복으로도 대신하고 있는 추세이다.

http://kcn99.nalove.cc/%C7%D4%B9%CC/han3-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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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시대

우리나라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과 그 북족에 부여, 동북쪽에 예맥, 남쪽에 진이들 부족국가는 한사군이 설치되자 북쪽에 옥저 동예등이 나타났으며 남쪽에는 삼한이 이루어졌다.고조선은 단군광검에 의하여 기원전 2333년 에 세워졌다 단군 조선때의 복식에 관해서는 에 머리에 개수아는 법을 가르쳤다 라고 기록된것으로 보아 우리 고유의 복식이 이미 이때부터 형성된것으로 보인다. 또한 위만 조선이 조선에 입국할때 추결만이복 하였다고 기록한것으로 미루어 우리나라의 복식은 한족과는 달리 북방호족 계통임을 알려 준다.

부여 해모수가 기원전 59년에 세웠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면 흰옷을 좋아하여 흰천으로 지은 대메포와 바지를 입고 갖신을 신었다고 한다.옥저와 동예는 후에 고구려에 복속하게 되었는데 의복제도는 곡령을 입었으며 남자는 은화장식을 하고 여자는 바지를 입지 않고 준의를 입었다.삼한중 마한 사람들은 무명을 짜고 전잠을 하였으며 상투틀고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변한진한 사람들은 잘발에다가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고깔을 좋아하고 넓은 폭의 곱고 자는 삼베를 잘 짰다고 한다.


삼국시대

우리나라 상고 복식의 원형은 저고리 바지 치마로 갈라져 있는 북방 호복계통의 옷이다. 삼국시대에 복식은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서 볼수있는 데 머리에는 관모를 썼으며 저고리가 엉덩이까지 내려오고 직선으로 교차시켜 여미는 깃형태의 직령교임식으로 외쪽여밈이다. 또 깃 부리 도련에는 다른 천으로 선을 두르고 바지는 가랑이가 좁은 홀태바지 형이다 그리고 양복바지와 같은 궁고 가랑이가 넓은 광고 잠방이와 같은 바지도 있었다. 치마는 길이가 길고 거단까지 잔주름이 잡혀 있다 두루마기는 무릎을 내려갈 정도로 길고 저고리와 같이 선도 보인다. 신은 주로 화를 신고 이도 병용하여 신었다. 이와 같이 실용적이고 활동적이며, 북방 한대성 기후에 알맞은 옷이다.

책: (안악 3호분 주인도) 주로 고구려인의 대가주부가 썼다.

절풍: (쌍영총 기마상) 변상의 관모 고구려에서 신라까지 이용 깃털꽂은건 귀인용이고 자주색 비단으로 만든 소골이라는 관은 일반 남자들이 썼다.무풍적인 기상과 높은지위의 표상을위해 변형두 함

갓: 7세시경부터 , 폐양립은 원성대양조의 소립 이란 말이 최초의 기록이며 이소립은 순수한 죽제의 갓..

건권 : 하나의 수건과 같은 것으로 남녀가 같이 이용 머리가 흘러 내리는 것을 올리기위해 주로 부인의 관모로 착용

금관: 경주 교동출토의 금관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됨 우리나라 고유의 관모

저고리: 유,다의라구 하였고 신라에서는 위해라구 일컬음 구성상으로 유나 삼으로 표기 , 유는 겹저고리, 삼은 홑저고리를 말한다. 저고리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거의 같고 형태도 남녀가 비슷 색갈문양이 다양하고 왼쪽여민에 통소매 노동착의로 짧은 저고리를 입었다. 소매길이, 선도 문양과 색깔이 다른것을 보면 귀족과 평민의 계급적표시

바지: 고,경의라구 함 신라에서는 가배.가반, 여자의 바지는 고쟁이로 불리게 됨 . 상고시대부터 남녀가 모두 입음 부인들도 기마를 했으므로 편한바지를 입었을것이다.

치마: 상 또는 군으로 표현 , 고구려벽화에는 치맛단에 잔주름이 있고 장식선이 붙어 있음.

두루마기: 솜을 둔 긴옷, 바지저고리 치마저고리위에 입음 방한을 위한 목적으로 모두 입음


신라시대

신라의 복식은 관모에는 복두 상의로는 표의 , 반비, 단의 ,내의 배당이 잇었다. 띠에는 보통의 띠와 용대가 있었고 하의로는 고와 상, 발에는 버선,이 화대가 달린 화를 신었으며 표라는 목수건이 있었다. 통일신라는 문화의 전성기로 복식도 발달. 흥덕왕9년에는 계급적 복식질서를 쥬지하기 위해 복식금제명령이 내려짐.우리고유의 관모인 소골,절풍 대신 진골에서 평민에 이르기 까지 일률적으로 복주를 썼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절상건에서 나온것으로 여겨지며 단석산 공양인물도에서 복두의 모습을 볼 수 있다.표의,바지,저고리 :웃옷으로 표의라는 두루마기가 잇는데 남자의 겨우는 포란이라 하였다. 이포란의 형태는 문관은 옆이 막혀있고 무관은 아래가 한자 정도 틔어 잇어 직책에 잘 어울렸다. 표의는 상하구별없이 통요되었으며 평인은 마포나 갈포를 사용하고 4두품이상은 면주로 하였다.저고리는 흥덕왕 복식 금제에 단의라 기록하고 있는데 그뜻은 요즘의 저고리 처럼 길이가 짧아서 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또 내의 는 포를 입엇을때 저고리`를 말하는것과 같다.치마, 반비 배당 : 신라에서 당나라의 복식을 모방하여 상을 입었으나 여자의 치마인 군과는 다른 형태이며 의례용이었던것같다 복식 금제에서는 내상과 표상의 구별이 보이는데 내상은 속치마로 추측된다.반비는 남녀공용으로 소매가 짧으며 전복이나 답호와 같다. 에 보면 배자와 같다고 한다. 배당에도 배자와 같으며 소매가 없다 복식금제에서 보면 6두품에서 4두품까지 여자에게 허용하였던 옷이다.

관모: 남자의 두발을 보면 소년은 매는 형이고 성인은 상투를 틀었으며 머리에 스는 대표적인것은 복두였다


고려시대

남자복식

백관의 공복을 4가지 색으로 구분하여 제정한것으로 원윤이상은 자삼, 중단경,이상은 담삼,도항경 이상은 비삼, 소주부이상은 녹사밍었다. 이로부터 고려는 22대 강종 원년 1212년까지 거란,송,요,금등의 관복을 다르고 있다.

왕복: 상복,공복,조복,연복,에복이 있다. 상복은 고려도경에 의하면 오사고모를스고 금벽을 수놓은 담황색의소매가 좁은 포를 입었으며 자색 늑건을 띠었다고 기록되어잇다. 여기에 오사고모는 중국천자의 조사절상건은 복두에서 일어난것으로 조선시대의 익선과이 되었다고 한다.
공복으로는 자라공복을 입고 상아홀과 옥대를 갖춘다 조복은 평상복위에 복두를 쓰고 속대를 띠며 연복은 조건에 백저포를 입어 서민과 다를 바 없이 우리 고유 복식을 입었다고 한다. 제복으로는 구류면,구장복은 면복인데 이것은 나라의 제향 ,가례등 특수의식에 입는 법복으로 면류관과 거기에 따르는 복식의 총칭이다. 의복만을 할때 십이면류 십이장문을 수놓은 십이장복이다.
제복의 구성을 보면 면류관,면복,상,백사중단,폐슬,수,혁대,옥패,대대,흰버선,붉은신이다. 그런데 제례인 경우에는 방심곡령을 한다. 또 고려말 공민왕 19년 5월에 명의 복제의 영향으로 자주성을 모색해 보고자 중국황제와 동격의 십이류면,십이지장복을 입었으며, 조복에도 중국천자와 같은색의 원유관에 강사포,홍상 백사 중단 강사폐슬 백가대 방심곡령 홍햐대흰버선,검은신을 제정하고 있다. 고종18년 몽고의 침입을 받아 그영향 권에 들어섬..

백관복: 제복,조복,상복,공보이 있다 제복에서는 칠류면 오장복은 1풍의 6월을 입고 오류면,삼장복은 2품에 대상경 이하 15원 까지 무류면은 3품의 41원 이 입었다.조복과 상복에 대하여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고 공복은 복두를 쓰고 광종대의 사색공복제도에 따르고 있는데 그 색복계급에 잇어 자, 단, 비, 녹의 4색 공복을 이루고 있다.

민서복 : 몽고풍에 비해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소매가 좁아 졌으며 고름을 매게 되었다. 진사는 사대문락건에 조주구를 입고 흑대를 혁리를 신었다. 농민이나 상인은 백저포에 조선, 민장은 조주구에 문라건,흑각대,오혁리였다. 뱃사람은 바지저고리를 입지 아ㅎ고 죽관에 단갈만 입었다고 하는데, 그형태는 잘 안수 없느나 현재의 승복인 동방과 비슷한것으로 짐작된다.불자는 일반사람들이 좋아하는 청적황배흑의 5가지 색을 제외한 잡색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국사는 납기사에 장수편삼과 자상을 입고 오혁대를 띠면 행전과 같은 금발을 치고 방울 달린 영리를 신었다. 두루마기는 유학자들은 조주구위라는 중국식두루마기를 입엇다. 농공상기인들은 두루마기형의 백저포를입고 속대를 띠었다.

여자복식

고려의 여자복식은 통일신라 이래 별로 변함이 없었고 다만 원의 영향을 받안 몽고풍이 궁양을 이루었다.왕비복과 귀부녀복을 중심으로 알아보자

왕비복: 원과의 국혼관계로 원의 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됨으로 궁중관복에 몽고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것은 상류층의 극소수에 지나지 않고 서민사회에서는 예복도 우리의 고유 복식을 입었다. 궁중관복은 고려 말렵 공민왕 19년 5월에 면의 효자황후가 보내온 적의 를 보면 알수 있는데 이것은 칠적관,적의 중단,폐슬 대대 혁대 ,수 .청말,청석으로 이어짐

위부녀복 : 에 보면 고려의 미혼귀녀들은 황의를 많이 입었다고 하며 상류층에서는 멱시 몽고의 영향을 많이 받음.

몽수 : 고려도경에 보면 귀부인들은 머리의 쓰개로서 몽수를 쓰고 다녔는데 그것은 1폭의 길이가 8자나 되는 검은 비단 3폭으로 만들며 이것을 머리위에서 드리워 얼굴만 내놓고 나머지는 땅에 끌리게 하고 다녔다고 한다. 일면 개두라구 함

화관,족두리 :화관은 신라문무왕 당시 당의 복식 제도에서 수입하여 궁양의 관모가 되었고 그후 고려세서도 귀족예급의 예복에 착용하였다.족두리는 고고리라하여 변발에 아름답게 장식하여 예복에 착용하였는데 이것은 중국의 원세조후의 고고관과 비슷하다.

두루마기 : 남자두루마기와 비슷한 형의 백색 두루마기를 입고 허리띠를 맸다. 이띠에는 채색끈에 금방울이나 향낭을 찼는데 이것이 많을 수록 귀인으로 여겼다고 한다.

저고리: 저고리는 차차 짧아져 띠가 없어지고 원의 영향을 받았을대는 아주 짧아진 것을 볼수 있다. 그리고 저고리 길이가 허리위로 올라가게 됨으로 자연히 저고리 의 띠가 없어지고 고름이 생기게 된것으로 보인다.

바지 : 무늬있는 비단으로 만든 통넓은 것을 입었는데 생견으로 안을 받쳐서 옷이 몸에 붙지 않도록 품을 크게 하는 관고를 좋아했다..

치마 : 가을과 겨울에는 색이 짙거나 엷은 황색면주치마를 공격대부의 부인에게 사민 유녀에 이르기 까지 특별한 차별없이 입었다.그리고 왕비의 겨울용치마는 홍색에 수를 놓았는데 일반 부녀자들의 치마에는 못하게했다. 이것이 조선조의 스란치마가 될것같고 이로부터 황유홍상이니 녹의 홍상이니하는 조선여자의 복색이 된것으로 짐작된다.

선군 : 속치마의 일종으로 치마폭을 넓게 하기위한것이었으며 조선시대의 무지기치마 같은것이었다.따라 이 선군위에 입는 겉치마는 8폭에 길이가 꽤 길어 서 걸을때 겨드랑이에 끼고 다녔다고 하는데 부귀한 집의 부인은 치마 한벌 만드는 데 옷감을 7~8필이나 드였다고 한다.

저상 : 3폭을한 가랑이로 한다는 것으로 왕에게 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입었다.옷감으로주로 여름에는 모시를 겨울에는 비단을 사용

또한 선이 없어지고 대신 동정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손끝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비록 주채를 들 때라도 붉은 주머니로 손을 가렸는게 이것은 한삼의 용도와 비슷하다.


조선시대

남자복식

조선중기후기의 임진,병자 양란 후에 실학 사상으로 말미암아 복식에도 실용성을 부여하게 되고 단순화 시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고종 21년 갑신정변과 더불어 복제 변경을 단행하였다 개화기에 이르러 우리나라 복식은 고유복식과 양복의 소용돌이 속에서 끈질기게 그전통을 발전시켜 왔다.

왕복 : 제복으로 면복,조복에는 원유관,강사포,상복에는 익선관,곤료오,첩리,답호가 있으며 전쟁시에 전립으에 융복을 입고 한가히 지낼대는 편복을 입었다.

면복: 왕의 제복및 대례복으로 면류관에 곤복으로 구성된다 면류관은 위모관과 더불어 중국 고유의 관모로 주나라에서 유래된것이다. 면류는 황제가 12류 12옥이고 황태자,친왕은 9류 9옥이며 옥의 색채도 5채옥과 3채옥등을 엮었다.

익선관.곤룡포: 익선관에는 왕의 상복으로 평상 집무때입는 옷이다. 세종 26년 3월 에 사은사 유수강이 명나라에서 가져온 왕의 상복을 보면 익선관,곤룡포로 기록되어 있다. 익선과은 복두를 모방하여 만든 관모로 탕건위에 썼다.그리고 명사 에 기록된 곤룔포를 보면 황제는 황색포에 앞뒤와 양어깨에 용문을 직금하엿고 황태자는 색만 다른 홍색포역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친왕례에 따라 세종조에서 조선 말가지 홍색의 곤룡포를 입었으나 고종의 황제가 된후에는 황색포를 입었다.

사인복 : 사인복은 유관자 아닌 반인 계급의 복식을 말한다.,

남삼,심의 : 남삼은 단령에 선을 두른 형태로 상사의 복식으로 삼앗는데 이것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입는 옷이다. 아울러 생원,진사,창방이 입었으며 앵삼과 같은 것으로 옥색길에 검은선을 둘렀다. 심의는 고대 중국 의 천자 ,제후의 평복이었고 사대부에게는 상복,서인에게는 길복이었으며 유자의 법복이었다 그형태는 백포로 만들어 의 4폭,상 12폭을 서로 연하여 둥근 소매,모난깃,굽은 단을 가졌으며 깃,도련,부리에 검은선을 두르고 복건을 썼다. 굽은 단을 가졌으며 깃,도련,부리에 검은 선을 두르고 복건을 썼다. 여기서는 치마폭의 12폭인 것은 1년 12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심의의 재료는 세포(세마포),명주를 썼으나 툭수층은 비단을 사용하였다. 이옷에 매는 띠오 흰색에 검은 선을 2줄 둘렀으며 매는 방법은 동심결로 맨다.

여자복식

조선시대의 여자 의복에는 저고리 치마 속옷 비롯하여 버선신까지 포함한 평상복과 의식이나 혼레때 입던 적의 활옷,원삼, 당의 등 예복이 있다.

저고리: 조선초기 1530년대의 순천 김시의 갈색명주 솜저고리 는 길이가 70cm이며 1580년 청주 한시의 덧저고리 길이가 70cm이며 1580년 청주 한씨의 덧저고리 길이는 81cm나 되었는데 1616년 판것이고 1700년대의 누비 삼회장 저고리는 길이가 42cm 점점 짧아지고 깃도 당코깃으로 변하엿다 1780년 청연군주의 문단 삼회장저고리는 길이가 19.5쎈티이며 조선만 1900년대의 저고리길이가 극도로 짧아진 때는 14.5센티로 거의 진동선 과 일치하게 되고 진동의 길이는 13센티이며 곁마기는 진동선위로 올라가는데 앞도련이 가장 짧아진 부분의 길이는 12센티밖에 안된때도 잇었다.1930년대의 반회장저고리는 길이가 26센티인데 이때부터 현재의 저고리길이와 비슷한 25~26센티 정도의 기이로 정착된 것을 볼수 있다 이들 저고리의 길이가 아주 짧아지는 변천은 임진란 전 조선 초기의 저고리들과 비교하면 그특징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복식흐름의 성향은 전란 후라는 사회적 요인에 의하여 단순화된것이며 형태는 축소되고 계급적으로 평등화되엇으며 제도적으로 자유화되는 혀낭으로 해석할수 있다,

배자 : 장배자,단배자,배자의 세종류가 있다 장배자는 양옆을 꿰매지 않은 요즈음원삼이고 다배자는 뒤의 다으이를 말하며 반비의 짧은 것이 요즈음 볼수 잇는 배자이다.

갓저고리: 초구라고도하며 중국 혁철족의 복식에 서 그 원류를 볼수 잇다. 갓저고리와 갓두루마기는 상류층에서 입은거 같고 세종11년 2월 사헌부에서는 초구피를 양반자제에게 허용 하였다.

치마 :우리나라 여자옷의 기본인 치마 저고리 의 형태가 다 같이 단일적이면서 저고리에는 다소 변화를 갖는데 비해 치마에는 별로 변천이 없었고 그길이는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주기로 유행하였다 속치마는 겹겹이 5~6겹입었는데 처음은 짧게 하고 차례로 길게 하여 겉치마를 입은 모습은 비약한 가슴에 비해 둔부는 종을 엎어 놓은 듯하였고 그 위로 긴 치마가 끌릴 때의 미는 생명력을 갖고 유행하엿던 것을 알 수있다,치마입는법은 반가부인은 외로 여미고 서민 계급은 바로 여며 반상을 가렸다. 색에 있어서는 양반 계급은 어려서부터 출가하여 아기를 낳을 때가지 다홍치마를 주로 입고 중년이 되면 남색치마 노년이 되면 옥색회색 계통의 치마를 입었으나 부부가 함께 살아 있으면 아무리 늙었어도 큰일 때에는 남색치마를 입었다. 노비들은 5세가량까지는 별차이 없이 다홍치마를 중년이후에는 감색이나 고동색을 많이 입었다. 옷감에 있어서 양반은 주로 단 사 주 를 입었으며 고동색을 많이 입었다.

두루마기 :두루마기는 갑오경장이후의 표를 말하며 삼국시대에는 포로 불리었는데 그 모습을 고구려 벽화에서 볼수 있고 신라의 표의 백제 국사의 포가 그것이며 고려 조선시대까지도 남녀 비슷한 형태엿다. 두루마기 원류는 구에서 발전한것으로 보이며 그 복식용어는 조선후기로 보는데 몽고의 xurumakci에서 나왔다고 한다.조선시대의 여자 의복에는 저고리 치마 속옷 비롯하여 버선신까지 포함한 평상복과 의식이나 혼레때 입던 적의 활옷,원삼, 당의 등 예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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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BC 2세기 무렵부터 494년까지 북만주지역에 존속하였던 예맥족(濊貊族)의 국가. 북부여라고도 합니다. 〔성립〕 부여는 BC 1세기의 중국 문헌에 등장하므로 이미 그전부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옥저
한국 고대 부족국가의 하나. 그 부족을 일컫기도 한다. 지금의 함경남도 해안지대에서 두만강유역 일대에 걸쳐 위치하였고 함흥지방이 그 중심을 이루었는데, 북쪽은 읍루·부여(夫餘), 남쪽은 동예(東濊)와 접하였습니다. 함흥지방 일대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집단을 동옥저, 두만강유역의 집단을 북옥저(일명 置溝濊)라 하였습니다.

동예
오늘날의 원산(元山)·안변(安邊)일대에서부터 경상북도 영덕(盈德)에 이르는 동해안지역과 강원도 북부지방에 거주하였던 고대 종족.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인구는 2만여 호에 혼인·장례 등의 풍속과 언어가 고구려와 비슷하였다고 합니다.

삼한
삼국시대 이전 한반도 한강유역으로부터 중남부지방에 걸쳐 형성되어 있었던 여러 부족에 대한 통칭.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을 말합니다. 삼한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마한은 한강유역으로부터 충청·전라도에 걸쳐 있었으며, 진한은 경기·강원도 일부, 변한은 낙동강유역 경상도에 비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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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복의 시대별 역사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상고시대

우리나라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과 그 북족에 부여, 동북쪽에 예맥, 남쪽에 진이들 부족국가는 한사군이 설치되자 북쪽에 옥저 동예등이 나타났으며 남쪽에는 삼한이 이루어졌다.고조선은 단군광검에 의하여 기원전 2333년 에 세워졌다 단군 조선때의 복식에 관해서는에 머리에 개수아는 법을 가르쳤다 라고 기록된것으로 보아 우리 고유의 복식이 이미 이때부터 형성된것으로 보인다. 또한 위만 조선이 조선에 입국할때 추결만이복 하였다고 기록한것으로 미루어 우리나라의 복식은 한족과는 달리 북방호족 계통임을 알려 준다 부여 해모수가 기원전 59년에 세웠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면 흰옷을 좋아하여 흰천으로 지은 대메포와 바지를 입고 갖신을 신었다고 한다.옥저와 동예는 후에 고구려에 복속하게 되었는데 의복제도는 곡령을 입었으며 남자는 은화장식을 하고 여자는 바지를 입지 않고 준의를 입었다.삼한중 마한 사람들은 무명을 짜고 전잠을 하였으며 상투틀고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변한진한 사람들은 잘발에다가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고깔을 좋아하고 넓은 폭의 곱고 자는 삼베를 잘 짰다고 한다.
단군 조선때의 복식에 관해서는에 머리에 개수아는 법을 가르쳤다 라고 기록된것으로 보아 우리 고유의 복식이 이미 이때부터 형성된것으로 보인다. 또한 위만 조선이 조선에 입국할때 추결만이복 하였다고 기록한것으로 미루어 우리나라의 복식은 한족과는 달리 북방호족 계통임을 알려 준다 부여 해모수가 기원전 59년에 세웠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면 흰옷을 좋아하여 흰천으로 지은 대메포와 바지를 입고 갖신을 신었다고 한다.

삼국시대


고구려의 복식은 평양 부근과 통구평야 지대이다. 먼저 머리에는 남녀 모두 관모를 썼는데, 남자들은 건, 책, 절풍, 입, 변등을 썼고 여자들은 건귁을 썼다.
북방계 유목민있어던 우리 민족은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추위를 피하거나 햇빛을 가리기 위해 '관모'를 썼다. 그러나 기록으로는 '삼국지'의 '부여전'에 금과 은으로 장식한 모자를 썼다고 처음 나온다.
삼국시대에 이르면 여러 가지 관모가 등장한다.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는 책이나 절풍을 비롯한 많은 관모가 나타난다. 또'삼국지'난 '후한서'등에는 '고구려에서 는 대가와 주부는 책을, 소가는 절풍을 썼는데, 그 형태는 고깔 모양이었다'라고 씌여 있다.이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관모는 실용적인 목적외에도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었다. 두루마기는 바지, 저고리 위에 덧입는 겉옷으로, 삼한시대 이래 왕에서부터 평민까지 입었다.

'당서'나 '구당서'의 '동이전'에는 "부인은 머리에 건귁을 썼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은 고구려의 여인들은 건귁이라는 머릿수건을 즐겨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건귁은 계속 이어져 내려와 근세 이후 개성 이북의 여인들이 많이 쓰던 머릿수건이 이것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고구려의 두루마기의 기본형은 곧은 깃에 왼쪽여밈, 좁은 소매였다. 이 두루마기는 저고리인 유가 길어진 것으로, 하층계급의 사람들이 입었다.상류층에서는 둥근 깃에 오른쪽 여밈, 넓은 소매로 된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중국 한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 추위를 막기 위해 입던 두루마기는 점차 의례적인 차림으로 바뀌어 갔다. 저고리는 곧은 깃에 좁은 소매, 왼쪽 여밈으로 되어있고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이가 길었다. 바지는 통이 좁았는데 신분이 높은 사람은 중국식의 통 넓은 바지를 입기도 하였다.
여자들은 짧은 치맛속에 바지를 덧입었다. 치마는 무용총 접견도에 보이는 승복용 치마를 제외하면 모두 여자의 옷이었다. 일반적으로 길이가 길고 허리에서 치맛단에 이르기까지 잔주름이 있으며,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치마 끝에 선을 둘렀다.


백제의 복식 모양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고 본다 . 곧 허리까지 오는 저고리에 바지(또는 치마)를 입었고 필요에 따라 포를 입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양의 직공도에 보이는 백제국사의 옷 모양이, 고구려 백화의 인물상의 옷과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한층 확실시되고 있다. 다만 백제국사의 옷 모양에서 특이한 사실은 바지 끝단에 선이 둘러져 있었고 양복바지와 같이 대님을 매지 않고 그대로 입었다는 점이다. 물론 고구려 백화의 인물상에서도 바지 밑단에 가선을 두르거나 부리를 동여매지 않고 입은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의 예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만큼 고구려와 백제의 의복 차이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백제 사람들의 머리 모양은 기혼녀는 머리를 둘로 나누어 정수리에 얹는 형태였으며, 미혼녀는 머리를 땋아서 뒤로 늘이거나 땋은 머리를 둥그렇게 앉은 뒤 한 가닥은 뒤로 내려뜨려 기혼녀와 구별이 되게끔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자의 머리 모양은 백제 무녕왕릉에서 작채가 출토된 바 있어, 고구려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수계식 상투 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작채란 머리를 모두 위로 끌어 올린 다음 대각선으로 마주 찔러 머리를 고정시키는데 사용되었던 비녀를 말한다.


신라의 복식을 보면, 먼저 관모로는 일반인의 경우 가죽으로 만든 삼각형의 변형모를 많이 썼다. 또한 상류층에서는 금, 은, 옥 등으로 만든 금속제 관모를 예복용으로 썼다.
신라의 의복에서 남자는 허리까지 이르는 저고리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는데, 바짓부리는 묶여져 있었다.
또한 여자는 허리 아래에 이르는 저고리에 발목까지 오는 긴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러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기본적인 옷차림이 고구려인과 같았다는 것을 뜻한다. 기본 복식 위에 입었던 포도 그 형태가 고구려나 백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신라의 신 또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이와 화가 함께 착용되었는데, 이는 주로 여자들이 많이 신었고 화는 남자들이 많이 신었다. 신의 재료도 천,금속제,흙,풀 등의 다양한 재료가 이용되고 있어 삼국 중에서는 가장 화려한 신발 문화를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화는 크게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화가 남녀 모두에게 착용된 고구려와는 달리 신라에서는 남자들만 착용하였으므로 미에 관심이 많은 여자용의 이처럼 다양한 발달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신라의 복식 생활에서 또 하나 특기할 사실은 의료 수공업의 발달이었다. 이는 일찍이 신라에 [가배]라는 방적기술 연마 풍속이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의료 중에서도 특히 많이 생산된 것은 마포였고, 가는 견사를 날실로 하고 굵은 견사를 씨실로 해서 짠 비단의 일종인 모초도 생산되었다.

신라시대(통일신라)

신라의 복식은 관모에는 복두 상의로는 표의 , 반비, 단의 ,내의 배당이 잇었다. 띠에는 보통의 띠와 용대가 있었고 하의로는 고와 상, 발에는 버선,이 화대가 달린 화를 신었으며 표라는 목수건이 있었다. 통일신라는 문화의 전성기로 복식도 발달. 흥덕왕9년에는 계급적 복식질서를 쥬지하기 위해 복식금제명령이 내려짐.우리고유의 관모인 소골,절풍 대신 진골에서 평민에 이르기 까지 일률적으로 복주를 썼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절상건에서 나온것으로 여겨지며 단석산 공양인물도에서 복두의 모습을 볼 수 있다.표의,바지,저고리 :웃옷으로 표의라는 두루마기가 잇는데 남자의 겨우는 포란이라 하였다. 이포란의 형태는 문관은 옆이 막혀있고 무관은 아래가 한자 정도 틔어 잇어 직책에 잘 어울렸다. 표의는 상하구별없이 통요되었으며 평인은 마포나 갈포를 사용하고 4두품이상은 면주로 하였다.저고리는 흥덕왕 복식 금제에 단의라 기록하고 있는데 그뜻은 요즘의 저고리 처럼 길이가 짧아서 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또 내의 는 포를 입엇을때 저고리`를 말하는것과 같다.치마, 반비 배당 : 신라에서 당나라의 복식을 모방하여 상을 입었으나 여자의 치마인 군과는 다른 형태이며 의례용이었던것같다 복식 금제에서는 내상과 표상의 구별이 보이는데 내상은 속치마로 추측된다. 반비는 남녀공용으로 소매가 짧으며 전복이나 답호와 같다.에 보면 배자와 같다고 한다. 배당에도 배자와 같으며 소매가 없다 복식금제에서 보면 6두품에서 4두품까지 여자에게 허용하였던 옷이다.


 

고려시대


고려의 복식제도는 신라시대의 것을 계승하였을뿐만 아니라 당, 송, 원 등의 문화를 다각도로 흡수하였다. 왕복을 비롯하여 백관복에 이르기까지의 관복은 송, 중국화된 원, 그리고 명의 제도를 받아 들였으나, 일반의 복장인 우리 나라의 고유복식은 서민층에 의해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여성복식은 공경대부(公卿大夫)에서 사민(士民)의 처(妻), 기생(妓生)에 이르기까지 큰 차이는 없었다.
충렬왕 이후 원나라의 부용국이 되면서 복식풍습 또한 많이 몽고풍을 따르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질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으며, 공민와 때 원나라가 쇠망하고 한족에 의한 명나라가 다시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몽고풍은 사라져 갔다.

그러나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소매가 좁아진 것은 몽고 복식에서 온 영향이며, 이로 말미암아 띠가 없어지고 대신 고름을 달기도 하였다. 또 여자 화관이 당나라에서 전해 온 것이라고 하면, 족두리는 몽고인의 고고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목면의 전래가 있었고 , 이것이 비단이나 명주를 마음대로 입을 수 없었던 서민의 복식 생활에 커다란 전환기를 마련해 주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복식은 개국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 한편 서민 복식은 엄격한 신분 사회제도에 묶여 직물의 종류, 색깔, 문양등에 이르기까지 앞시대보다 한층심한 규제를 받았다. 특히 조선조 남자 복식은 '포의 문화'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형태의 포제가 발달하였다. 단순히 방한을 위해 착용하였다기보다는 착용자의 신분이나 예의를 갖추기 위한 목적이 강하게 내포되었다. 따라서 포제는 유관자들의 집무복인 관복용과 통상예복용인 편복포로 구분되었는데, 관복은 명나라 제도를 따른 외래적인 복식임에 비해 편복포는 우리 고유의 포제였다.


관복중에 대표적인 단령은 현재까지도 신랑 혼례복으로 사용되고있다. 단령속에 받쳐입는 직령,융복용첩리 소매를 반으로 줄여서 달거나 아주 생략한 전복,두루마기형 장의,겨드랑이에 주름을 잡아주어 기능성을 보완한 액주음포 , 포의 양옆이나 뒷부분에 트임을 주어 기동성을 배려한 중치막,창의,두루막힌 주의,유학자들의 도포,심의,학창의 등 명칭도 다양하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포제의 착용으로 바지,저고리는 낮은 계급의 상민을 제외하고 속옷용으로 전용되었다. 심지어 양반네들은 집안내에서 조차도 바지, 저고리 차림은 용납되지 않았으며 ,아울러 포의 모양에 따라 머리에 쓰는 관모류도 다양하게 착용되었다. 고종(1863-1907년)대에는 복제개혁에 따라 소매가 넓은 옷의 착용이 금지되어 ,점차 두루마기가 대표적인 포제로 남게되었다. 그리고 여자 복식은 치마. 저고리의 기본형이 서민복으로 이어져 왔다. 저고리의 길이가 길고 여유있는 형태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작고 짧은 저고리에 풍성한 치마, 웅장한 머리모양 등 하후상박의 전통 한복미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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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는 한복의 구성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한복의 기본 구성

 

저고리

저고리의 구성은 몸체를 이루고 있는 몸판, 깃, 여밈 부분의 섶, 팔 부분의 소매통 등으로 대별된다. 이 중에서 가장 변화의 폭이 심한 곳은 저고리 길이와 도련, 소매의 형태를 들 수 있다. 섶은 저고리의 좌우에 각각 달리는데 기능적으로 양쪽의 앞을 여미는 여분이 되며, 미적으로도 변화의 선으로 형태미를 부여할 수 있다. 깃은 앞몸판에서 뒷몸판까지 연결되어 목둘레를 장식하며 한국 복식의 형태를 인식할 수 있는 특징 중이 하나이다. 옷고름은 기능적으로 의복을 정돈하는 목적으로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갈수록 저고리의 길이는 짧아지고 옷고름은 점차 길어지면서 장식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동정은 저고리의 단정함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조끼

조끼는 저고리 위에 입는 것인데 주머니가 달려 있어 일용품을 넣기에 편리하고 미관상으로도 손색이 없는 옷으로 오늘날 남자복식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만큼 중요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바지

바지는 계속 겉옷으로 착용되어 조선시대에 이르러 양각이 분리된 형태, 앞뒤가 절개된 형태, 사폭(斜幅)으로 구성된 형태를 보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또한 신장을 중심으로 폭을 잡아 제작되기 때문에 체형에 꼭 맞는서양의 바지보다는 여유가 많아 좌식생활에 편리한 구성으로 되어있는 것이특징이다.

치마

치마는 저고리의 아래에 입는 여성의 하의로 형태는 치마의 몸체와 허리띠, 끈으로 간단하게 구성돼 있다. 치마의 폭은 평면의 천을 이용하여 그대로 쓰지만 상부에 주름을 잘게 잡아 허리띠의 속으로 집어넣는다. 입을 때는 앞에서 둘러 입고 뒤에서 한 쪽으로 여며지게 하여 끈으로 묶으며 치마의 폭은 그대로 풍성하게 둥근 분위기를나타낸다. 특히 치마의 형태는 잘게 잡혀진 주름이 아래로 수직적인 분위기를 주며허리띠의 색을 흰 것으로 하여 치마색을 돋보이게 한다.

두루마기

두루마기는 추위를 막기 위한 방한용으로 착용하였으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예를 갖추기 위한 의례복으로 그 착용 범위가 넓어진다.벽화의 두루마기는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깃, 소매, 부리, 도련의 선을 두르고 저고리의 맺음과 중복되지 않도록 두루마기의 띠는 뒤중심, 혹은 옆허리 주변에서 매도록 하여 기능적인 구조의 지혜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두루마기는 고려시대의 백저포(白苧袍)로 이어져 왕실과 귀족, 관료 및 평민의 평상복으로 착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보편적으로 착용한 겉옷으로서그 가짓수도 매우 다양하여 왕과 신하의 제복을 비롯하여 조복(朝服), 상복(喪服) 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직령포,단령포, 창의, 중치막, 천릭 등과 같은 각종의 두루마기 형태로 발달하였다

 

한복의 기본 색채

 

기본 배색과 옷감(소재)

 

한복이 어울리는 배색의 예를 들어 보면,남색치마에는 옥색, 미색, 흰색, 다홍 저고리가 제 격이며 흑자주치마에는 분홍, 미색, 옥색, 노란색, 회색저고리가 안정 감을 준다. 다홍치마는 은은한 연두색이나 흰색 또는 남색 저고리가 어울 리고 북청색 치마에는 옥색, 연두색, 분홍 저고리가 친근감을 준다. 보라색 치마에는 같은 연보라색 저고리가, 물비취색 치마에는 흰색, 짙은 수박색 치마에는 흰색, 미색, 연두색 저고리가 좋다. 가지색 치마는 연보라색, 옥색, 노랑색 저고리가, 흰색 치마에는 연분홍 또는 옥색이나 미색 저고리가 좋다.
  여자의 경우 저고리는 노란 색 연두색 또는 옥색이 주가 되어 왔다. 옛문현에 의하면 노란색이란 송화색으로서 명도가 낮은 가라앉은 색이며, 연두색은 두록색으로 나와 있어 녹두색을 말한다. 옥색은 연옥색으로 깨끗하고 청아한 색이다.
치마는 홍색치마난 남색 치마가 주가 되어 왔는데, 홍색은 짙은 다홍색으로 매우 침착하고 가라않은 색조이며, 남색은 대단히 화려하고 청아한 색이다. 또 자색이 있었는데, 이색은 주로 치마색이나 회장색으로 사용되어 왔다. 자색은 젊은 사람은 꽂자주색을, 중년이 되면 짙은 자주색, 노년에 접어들면 검정자주색을 사용하여 왔다.
그런데 요즈음은 자기의 취미, 개성, 유행에 따라 여러 가지로 자우롭게 맞춰서 입는다. 이에 있어 유의할 점은 짙은 색으로 한옷은 다소 마르게 보이므로 뚱뚱한 사람에게는 좋으나 마른 사람에게는 더욱 말라 보이고 작아보인다는 점, 엷은 색은 옷의 외곽선이 흐리기 때문에 다소 풍신해 보이므로 마른 사람에게 어울린다는 점, 무늬는 키가 큰 사람이나 마른 사람에게는 가로줄무늬가 좋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우리 한복은 짙은 색 치마에 엷은 색 저고리이면 누구에게나 잘 어울릴 수 있는 옷이다.

 

옷감은 옛날에는 사, 나, 능, 단 등의 비단류를 사용하였고, 평상복은 지체에 따라 달랐겠으나 면직류, 저마직류, 견직류, 모직류 등이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쓰이고있었으며, 상복에는 마직류(베)와 면직류(광목,옥양목)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은 합성섬유 기타 각종 섬유가 쏟아져 나오 우리의 의료를 충족시키고 있다. 배색에 있어 신분관념이 엄격했던 옛날에는 나라에서 정한 금색이 있어 이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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