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한복의 시대별 역사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상고시대
우리나라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과 그 북족에 부여, 동북쪽에 예맥, 남쪽에 진이들 부족국가는 한사군이 설치되자 북쪽에 옥저 동예등이 나타났으며 남쪽에는 삼한이 이루어졌다.고조선은 단군광검에 의하여 기원전 2333년 에 세워졌다 단군 조선때의 복식에 관해서는에 머리에 개수아는 법을 가르쳤다 라고 기록된것으로 보아 우리 고유의 복식이 이미 이때부터 형성된것으로 보인다. 또한 위만 조선이 조선에 입국할때 추결만이복 하였다고 기록한것으로 미루어 우리나라의 복식은 한족과는 달리 북방호족 계통임을 알려 준다 부여 해모수가 기원전 59년에 세웠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면 흰옷을 좋아하여 흰천으로 지은 대메포와 바지를 입고 갖신을 신었다고 한다.옥저와 동예는 후에 고구려에 복속하게 되었는데 의복제도는 곡령을 입었으며 남자는 은화장식을 하고 여자는 바지를 입지 않고 준의를 입었다.삼한중 마한 사람들은 무명을 짜고 전잠을 하였으며 상투틀고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변한진한 사람들은 잘발에다가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고깔을 좋아하고 넓은 폭의 곱고 자는 삼베를 잘 짰다고 한다.
단군 조선때의 복식에 관해서는에 머리에 개수아는 법을 가르쳤다 라고 기록된것으로 보아 우리 고유의 복식이 이미 이때부터 형성된것으로 보인다. 또한 위만 조선이 조선에 입국할때 추결만이복 하였다고 기록한것으로 미루어 우리나라의 복식은 한족과는 달리 북방호족 계통임을 알려 준다 부여 해모수가 기원전 59년에 세웠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면 흰옷을 좋아하여 흰천으로 지은 대메포와 바지를 입고 갖신을 신었다고 한다.
삼국시대
고구려의 복식은 평양 부근과 통구평야 지대이다. 먼저 머리에는 남녀 모두 관모를 썼는데, 남자들은 건, 책, 절풍, 입, 변등을 썼고 여자들은 건귁을 썼다.
북방계 유목민있어던 우리 민족은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추위를 피하거나 햇빛을 가리기 위해 '관모'를 썼다. 그러나 기록으로는 '삼국지'의 '부여전'에 금과 은으로 장식한 모자를 썼다고 처음 나온다.
삼국시대에 이르면 여러 가지 관모가 등장한다.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는 책이나 절풍을 비롯한 많은 관모가 나타난다. 또'삼국지'난 '후한서'등에는 '고구려에서 는 대가와 주부는 책을, 소가는 절풍을 썼는데, 그 형태는 고깔 모양이었다'라고 씌여 있다.이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관모는 실용적인 목적외에도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었다. 두루마기는 바지, 저고리 위에 덧입는 겉옷으로, 삼한시대 이래 왕에서부터 평민까지 입었다.
'당서'나 '구당서'의 '동이전'에는 "부인은 머리에 건귁을 썼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은 고구려의 여인들은 건귁이라는 머릿수건을 즐겨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건귁은 계속 이어져 내려와 근세 이후 개성 이북의 여인들이 많이 쓰던 머릿수건이 이것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고구려의 두루마기의 기본형은 곧은 깃에 왼쪽여밈, 좁은 소매였다. 이 두루마기는 저고리인 유가 길어진 것으로, 하층계급의 사람들이 입었다.상류층에서는 둥근 깃에 오른쪽 여밈, 넓은 소매로 된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중국 한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 추위를 막기 위해 입던 두루마기는 점차 의례적인 차림으로 바뀌어 갔다. 저고리는 곧은 깃에 좁은 소매, 왼쪽 여밈으로 되어있고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이가 길었다. 바지는 통이 좁았는데 신분이 높은 사람은 중국식의 통 넓은 바지를 입기도 하였다.
여자들은 짧은 치맛속에 바지를 덧입었다. 치마는 무용총 접견도에 보이는 승복용 치마를 제외하면 모두 여자의 옷이었다. 일반적으로 길이가 길고 허리에서 치맛단에 이르기까지 잔주름이 있으며,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치마 끝에 선을 둘렀다.
백제의 복식 모양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고 본다 . 곧 허리까지 오는 저고리에 바지(또는 치마)를 입었고 필요에 따라 포를 입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양의 직공도에 보이는 백제국사의 옷 모양이, 고구려 백화의 인물상의 옷과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한층 확실시되고 있다. 다만 백제국사의 옷 모양에서 특이한 사실은 바지 끝단에 선이 둘러져 있었고 양복바지와 같이 대님을 매지 않고 그대로 입었다는 점이다. 물론 고구려 백화의 인물상에서도 바지 밑단에 가선을 두르거나 부리를 동여매지 않고 입은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의 예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만큼 고구려와 백제의 의복 차이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백제 사람들의 머리 모양은 기혼녀는 머리를 둘로 나누어 정수리에 얹는 형태였으며, 미혼녀는 머리를 땋아서 뒤로 늘이거나 땋은 머리를 둥그렇게 앉은 뒤 한 가닥은 뒤로 내려뜨려 기혼녀와 구별이 되게끔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자의 머리 모양은 백제 무녕왕릉에서 작채가 출토된 바 있어, 고구려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수계식 상투 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작채란 머리를 모두 위로 끌어 올린 다음 대각선으로 마주 찔러 머리를 고정시키는데 사용되었던 비녀를 말한다.
신라의 복식을 보면, 먼저 관모로는 일반인의 경우 가죽으로 만든 삼각형의 변형모를 많이 썼다. 또한 상류층에서는 금, 은, 옥 등으로 만든 금속제 관모를 예복용으로 썼다.
신라의 의복에서 남자는 허리까지 이르는 저고리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는데, 바짓부리는 묶여져 있었다.
또한 여자는 허리 아래에 이르는 저고리에 발목까지 오는 긴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러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기본적인 옷차림이 고구려인과 같았다는 것을 뜻한다. 기본 복식 위에 입었던 포도 그 형태가 고구려나 백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신라의 신 또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이와 화가 함께 착용되었는데, 이는 주로 여자들이 많이 신었고 화는 남자들이 많이 신었다. 신의 재료도 천,금속제,흙,풀 등의 다양한 재료가 이용되고 있어 삼국 중에서는 가장 화려한 신발 문화를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화는 크게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화가 남녀 모두에게 착용된 고구려와는 달리 신라에서는 남자들만 착용하였으므로 미에 관심이 많은 여자용의 이처럼 다양한 발달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신라의 복식 생활에서 또 하나 특기할 사실은 의료 수공업의 발달이었다. 이는 일찍이 신라에 [가배]라는 방적기술 연마 풍속이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의료 중에서도 특히 많이 생산된 것은 마포였고, 가는 견사를 날실로 하고 굵은 견사를 씨실로 해서 짠 비단의 일종인 모초도 생산되었다.
신라시대(통일신라)
신라의 복식은 관모에는 복두 상의로는 표의 , 반비, 단의 ,내의 배당이 잇었다. 띠에는 보통의 띠와 용대가 있었고 하의로는 고와 상, 발에는 버선,이 화대가 달린 화를 신었으며 표라는 목수건이 있었다. 통일신라는 문화의 전성기로 복식도 발달. 흥덕왕9년에는 계급적 복식질서를 쥬지하기 위해 복식금제명령이 내려짐.우리고유의 관모인 소골,절풍 대신 진골에서 평민에 이르기 까지 일률적으로 복주를 썼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절상건에서 나온것으로 여겨지며 단석산 공양인물도에서 복두의 모습을 볼 수 있다.표의,바지,저고리 :웃옷으로 표의라는 두루마기가 잇는데 남자의 겨우는 포란이라 하였다. 이포란의 형태는 문관은 옆이 막혀있고 무관은 아래가 한자 정도 틔어 잇어 직책에 잘 어울렸다. 표의는 상하구별없이 통요되었으며 평인은 마포나 갈포를 사용하고 4두품이상은 면주로 하였다.저고리는 흥덕왕 복식 금제에 단의라 기록하고 있는데 그뜻은 요즘의 저고리 처럼 길이가 짧아서 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또 내의 는 포를 입엇을때 저고리`를 말하는것과 같다.치마, 반비 배당 : 신라에서 당나라의 복식을 모방하여 상을 입었으나 여자의 치마인 군과는 다른 형태이며 의례용이었던것같다 복식 금제에서는 내상과 표상의 구별이 보이는데 내상은 속치마로 추측된다. 반비는 남녀공용으로 소매가 짧으며 전복이나 답호와 같다.에 보면 배자와 같다고 한다. 배당에도 배자와 같으며 소매가 없다 복식금제에서 보면 6두품에서 4두품까지 여자에게 허용하였던 옷이다.
고려시대
고려의 복식제도는 신라시대의 것을 계승하였을뿐만 아니라 당, 송, 원 등의 문화를 다각도로 흡수하였다. 왕복을 비롯하여 백관복에 이르기까지의 관복은 송, 중국화된 원, 그리고 명의 제도를 받아 들였으나, 일반의 복장인 우리 나라의 고유복식은 서민층에 의해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여성복식은 공경대부(公卿大夫)에서 사민(士民)의 처(妻), 기생(妓生)에 이르기까지 큰 차이는 없었다.
충렬왕 이후 원나라의 부용국이 되면서 복식풍습 또한 많이 몽고풍을 따르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질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으며, 공민와 때 원나라가 쇠망하고 한족에 의한 명나라가 다시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몽고풍은 사라져 갔다.
그러나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소매가 좁아진 것은 몽고 복식에서 온 영향이며, 이로 말미암아 띠가 없어지고 대신 고름을 달기도 하였다. 또 여자 화관이 당나라에서 전해 온 것이라고 하면, 족두리는 몽고인의 고고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목면의 전래가 있었고 , 이것이 비단이나 명주를 마음대로 입을 수 없었던 서민의 복식 생활에 커다란 전환기를 마련해 주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복식은 개국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 한편 서민 복식은 엄격한 신분 사회제도에 묶여 직물의 종류, 색깔, 문양등에 이르기까지 앞시대보다 한층심한 규제를 받았다. 특히 조선조 남자 복식은 '포의 문화'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형태의 포제가 발달하였다. 단순히 방한을 위해 착용하였다기보다는 착용자의 신분이나 예의를 갖추기 위한 목적이 강하게 내포되었다. 따라서 포제는 유관자들의 집무복인 관복용과 통상예복용인 편복포로 구분되었는데, 관복은 명나라 제도를 따른 외래적인 복식임에 비해 편복포는 우리 고유의 포제였다.
관복중에 대표적인 단령은 현재까지도 신랑 혼례복으로 사용되고있다. 단령속에 받쳐입는 직령,융복용첩리 소매를 반으로 줄여서 달거나 아주 생략한 전복,두루마기형 장의,겨드랑이에 주름을 잡아주어 기능성을 보완한 액주음포 , 포의 양옆이나 뒷부분에 트임을 주어 기동성을 배려한 중치막,창의,두루막힌 주의,유학자들의 도포,심의,학창의 등 명칭도 다양하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포제의 착용으로 바지,저고리는 낮은 계급의 상민을 제외하고 속옷용으로 전용되었다. 심지어 양반네들은 집안내에서 조차도 바지, 저고리 차림은 용납되지 않았으며 ,아울러 포의 모양에 따라 머리에 쓰는 관모류도 다양하게 착용되었다. 고종(1863-1907년)대에는 복제개혁에 따라 소매가 넓은 옷의 착용이 금지되어 ,점차 두루마기가 대표적인 포제로 남게되었다. 그리고 여자 복식은 치마. 저고리의 기본형이 서민복으로 이어져 왔다. 저고리의 길이가 길고 여유있는 형태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작고 짧은 저고리에 풍성한 치마, 웅장한 머리모양 등 하후상박의 전통 한복미가 나타났다.
---------------------------------------여기까지
여기서부터는 한복의 구성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한복의 기본 구성
저고리
저고리의 구성은 몸체를 이루고 있는 몸판, 깃, 여밈 부분의 섶, 팔 부분의 소매통 등으로 대별된다. 이 중에서 가장 변화의 폭이 심한 곳은 저고리 길이와 도련, 소매의 형태를 들 수 있다. 섶은 저고리의 좌우에 각각 달리는데 기능적으로 양쪽의 앞을 여미는 여분이 되며, 미적으로도 변화의 선으로 형태미를 부여할 수 있다. 깃은 앞몸판에서 뒷몸판까지 연결되어 목둘레를 장식하며 한국 복식의 형태를 인식할 수 있는 특징 중이 하나이다. 옷고름은 기능적으로 의복을 정돈하는 목적으로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갈수록 저고리의 길이는 짧아지고 옷고름은 점차 길어지면서 장식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동정은 저고리의 단정함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조끼
조끼는 저고리 위에 입는 것인데 주머니가 달려 있어 일용품을 넣기에 편리하고 미관상으로도 손색이 없는 옷으로 오늘날 남자복식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만큼 중요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바지
바지는 계속 겉옷으로 착용되어 조선시대에 이르러 양각이 분리된 형태, 앞뒤가 절개된 형태, 사폭(斜幅)으로 구성된 형태를 보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또한 신장을 중심으로 폭을 잡아 제작되기 때문에 체형에 꼭 맞는서양의 바지보다는 여유가 많아 좌식생활에 편리한 구성으로 되어있는 것이특징이다.
치마
치마는 저고리의 아래에 입는 여성의 하의로 형태는 치마의 몸체와 허리띠, 끈으로 간단하게 구성돼 있다. 치마의 폭은 평면의 천을 이용하여 그대로 쓰지만 상부에 주름을 잘게 잡아 허리띠의 속으로 집어넣는다. 입을 때는 앞에서 둘러 입고 뒤에서 한 쪽으로 여며지게 하여 끈으로 묶으며 치마의 폭은 그대로 풍성하게 둥근 분위기를나타낸다. 특히 치마의 형태는 잘게 잡혀진 주름이 아래로 수직적인 분위기를 주며허리띠의 색을 흰 것으로 하여 치마색을 돋보이게 한다.
두루마기
두루마기는 추위를 막기 위한 방한용으로 착용하였으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예를 갖추기 위한 의례복으로 그 착용 범위가 넓어진다.벽화의 두루마기는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깃, 소매, 부리, 도련의 선을 두르고 저고리의 맺음과 중복되지 않도록 두루마기의 띠는 뒤중심, 혹은 옆허리 주변에서 매도록 하여 기능적인 구조의 지혜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두루마기는 고려시대의 백저포(白苧袍)로 이어져 왕실과 귀족, 관료 및 평민의 평상복으로 착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보편적으로 착용한 겉옷으로서그 가짓수도 매우 다양하여 왕과 신하의 제복을 비롯하여 조복(朝服), 상복(喪服) 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직령포,단령포, 창의, 중치막, 천릭 등과 같은 각종의 두루마기 형태로 발달하였다
한복의 기본 색채
기본 배색과 옷감(소재)
한복이 어울리는 배색의 예를 들어 보면,남색치마에는 옥색, 미색, 흰색, 다홍 저고리가 제 격이며 흑자주치마에는 분홍, 미색, 옥색, 노란색, 회색저고리가 안정 감을 준다. 다홍치마는 은은한 연두색이나 흰색 또는 남색 저고리가 어울 리고 북청색 치마에는 옥색, 연두색, 분홍 저고리가 친근감을 준다. 보라색 치마에는 같은 연보라색 저고리가, 물비취색 치마에는 흰색, 짙은 수박색 치마에는 흰색, 미색, 연두색 저고리가 좋다. 가지색 치마는 연보라색, 옥색, 노랑색 저고리가, 흰색 치마에는 연분홍 또는 옥색이나 미색 저고리가 좋다.
여자의 경우 저고리는 노란 색 연두색 또는 옥색이 주가 되어 왔다. 옛문현에 의하면 노란색이란 송화색으로서 명도가 낮은 가라앉은 색이며, 연두색은 두록색으로 나와 있어 녹두색을 말한다. 옥색은 연옥색으로 깨끗하고 청아한 색이다.
치마는 홍색치마난 남색 치마가 주가 되어 왔는데, 홍색은 짙은 다홍색으로 매우 침착하고 가라않은 색조이며, 남색은 대단히 화려하고 청아한 색이다. 또 자색이 있었는데, 이색은 주로 치마색이나 회장색으로 사용되어 왔다. 자색은 젊은 사람은 꽂자주색을, 중년이 되면 짙은 자주색, 노년에 접어들면 검정자주색을 사용하여 왔다.
그런데 요즈음은 자기의 취미, 개성, 유행에 따라 여러 가지로 자우롭게 맞춰서 입는다. 이에 있어 유의할 점은 짙은 색으로 한옷은 다소 마르게 보이므로 뚱뚱한 사람에게는 좋으나 마른 사람에게는 더욱 말라 보이고 작아보인다는 점, 엷은 색은 옷의 외곽선이 흐리기 때문에 다소 풍신해 보이므로 마른 사람에게 어울린다는 점, 무늬는 키가 큰 사람이나 마른 사람에게는 가로줄무늬가 좋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우리 한복은 짙은 색 치마에 엷은 색 저고리이면 누구에게나 잘 어울릴 수 있는 옷이다.
옷감은 옛날에는 사, 나, 능, 단 등의 비단류를 사용하였고, 평상복은 지체에 따라 달랐겠으나 면직류, 저마직류, 견직류, 모직류 등이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쓰이고있었으며, 상복에는 마직류(베)와 면직류(광목,옥양목)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은 합성섬유 기타 각종 섬유가 쏟아져 나오 우리의 의료를 충족시키고 있다. 배색에 있어 신분관념이 엄격했던 옛날에는 나라에서 정한 금색이 있어 이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되었다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밑에 사이트로 들어가보세요
☞참조 사이트 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