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에 이어 그이 아들 거련이 413년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으로 즉위한다. 나이 20세였다.
즉위초 그의 활동은 외교에 집중되었다. 당시 중국은 남북조로 분열되어 있었다. 남조의 송과 북조의 북위의 대립을 교묘하게 잘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송을 통해 북위를, 북위를 통해 송을 상호 견제시키면서 시선을 한반도 남쪽으로 돌렸다.
이렇듯 장수왕은 다양한 외교전술을 구사하여 고구려의 북서쪽 국경을 안정시킨 다음 남진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427년(장수왕 15) 평양성 천도를 단행하였다.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의 천도는 남진 정책과 함께 국내성을 기반으로 했던 귀족세력의 힘을 약화시켜 중앙집권의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조처였다. 또한 평양의 농경지대를 확보하고 대동강의 교통지역을 이용한다는 측면도 작용하였다.
475년 9월, 장수왕은 드디어 백제를 공격했다. 그는 사전작업으로서 승려 도림을 백제 개로왕에게 간첩으로 파견하여 정보를 얻고 내부를 교란시킨다. 그런 다음 3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의 도읍인 한성을 포위하였다. 성이 포위되자 백제 개로왕은 아들 상좌평 문주대타자를 급히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한성은 장수왕에게 함락되었고, 개로왕은 탈출하다가 고구려군에 붙잡혀 아차산성 아래서 살해되었다. 백제의 문주태자는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고 문주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때부터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 남진정책에 맞서 실질적인 동맹관계에 들어갔다(나제동맹). 장수왕은 한강 유역을 확보하여 백제와 일본이 중국의 남조에 해상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는 한편, 신라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정책으로 선회했다. 그는 신라의 실직주(삼척으로 추정)을 공격하고 호명성(지금의 청송군 근처) 등 7개의 성을 빼앗았다. 이리하여 장수왕 시절 고구려의 국경은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 남쪽으로는 아산만과 남양만에서 죽령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였다.
장수왕은 491년 98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가 죽자 북위황제는 '강'(康)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강'이라는 시호는 북위가 이민족에서 수여하는 최고위라고 한다. 북위로서도 그만큼 장수왕을 두려워하면서 그의 활동을 높이 샀던 것이다. 장수왕의 무덤은 장군총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의 활동을 적은 비가 충북 중원군 가금면에 있는 중원고구려비이다.
고구려 최대 확장 시기
391년에 왕위에 오른 광개토태왕은 세종대왕과 함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임금님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사람들이 고구려왕들 가운데 가장 많이 기억해준 분은 수나라를 선제공격하고, 수백만 대군을 물리친 영양태왕이었습니다.
고구려의 면적도 612년 수나라와 전쟁을 할 때가 가장 넓었습니다. 그럼에도 광개토태왕을 고구려 역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광개토태왕은 평범한 지역의 강국 고구려를 진정한 동아시아의 대국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축적해둔 국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활동을 펼쳤습니다. 남쪽으로는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고, 백제와 가야를 굴복시켜 조공을 받았으며, 백제의 용병이었던 왜를 거듭 격파하였습니다. 북쪽과 동쪽으로는 숙신과 동부여를 굴복시켜 속국으로 삼았으며, 서쪽으로 현재의 서요하 중상류에 있는 거란족을 정벌하였으며, 모용선비족이 세운 후연을 멸망에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정복활동을 통해 고구려는 넓은 농경지를 확보했고, 엄청난 소와 말을 확보해 농업의 발전과 군대의 질적 향상을 가져왔습니다. 또한 동해와 서해의 지배권을 장악하여 동아시아 바다의 주인공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5세기에 유목세계의 유연, 황하유역의 북위, 양자강유역의 송 등과 함께 동아시아 국제정치를 좌우하는 4강의 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영토가 넓어짐에 따라 함께 인구도 크게 늘었고, 경제, 문화적으로도 큰 발전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고구려 전체를 크게 변모시켰기 때문에 광개토태왕을 고구려 제국의 건설자로 높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