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문인데요ㅜ.ㅜ 급해요~!

역사신문인데요ㅜ.ㅜ 급해요~!

작성일 2007.11.30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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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뇽하세요~!

저는 경산장산초등학교 5학년 1반 진○○입니다~!

저희가 내일인 토요일날!!!!!!!!!!!!!!!!!!!!!!!!!!!!!

그러니까 12월 1일날요~!

역사신문을 만드는데요ㅠ.ㅠ.ㅠ.ㅠ.ㅠ.ㅠ.ㅠ.ㅠ

무슨 내용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희는 사회 5학년이구요!

지금부터 질문해드릴게요 ㅋㅋ

책에 나와잇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

금속 활자는 여러가지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종합 예술품으로서,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보여 주는

과학 문화재 이다.

(중간에 만화)

자랑스러운 우리 조상의 슬기

우리 조상들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 활자를 발명하였다.또, 금속 활자와 더불어 책을 찍을 수 있는 인쇄 잉크와 한지도 만들어 내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과학, 기술이 그만큼 뛰어나며, 학문을 열심히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우리는 조상들이 이러한 슬기를 이어받아 우리의 과학,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이런 식입니다~!

이것 처럼 해서요~! 

1. 단청,기와에서 찾을수있는 색깔과 무늬의 아름다움(이미지도 함께)

2. 연적에서 찾을수 있는 색깔과 무늬의 아름다움(이미지도 함께)

3. 도자기와 한옥의 지붕에 대해서(이미지도 함께)

4. 한복에 대해서(이미지도 함께)

5. 화로,떡살,문갑,연적,지게,책갑,,등잔,청동거울을 어디에 사용하던 것들인가? 어떤점이 아름다운가?

어떤 점이 과학적이고 편리한가?에 대해서 알려주세요.(이미지도 함께)

그리고 죄송하지만 또

6. 조각보,옹기,한지에 대해서 (이미지도 함께)

7. 팔만대장경판, 성덕 대왕 신종, 금속활자, 앙부일구, 석빙고, 자격루, 첨성대, 측우구에 대하여(이미지도 함께)

 

이걸 좀 알려주세요

성의 있게 알려주신 분께만 내공드릴게요

저 원래 내공잘 안거는데 도학력고사 실기평가라서 내공 35겁니다ㅠ.ㅠ

그러면 많지만 잘 부탁드려요~!!!!!!!!!!!!!!!!!!!!!!!!!!

지금까지 읽어주신 지식인 분들 감사드리구요

시간이 들어도 꼭 쫌 부탁드려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 단청,기와에서 찾을수있는 색깔과 무늬의 아름다움(이미지도 함께)

 

출처 : http://www.gangsun.net/htm/picture_02.asp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29351

 

 1) 단청의 의의

‘단청(丹靑)’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붉은색과 푸른색의 대비와 조화에 국한되는 말이다.

명사적 의미에서 ‘단청’이란 각종 안료를 사용하여 건물의 벽과 부재에 도채(圖彩)하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다.

나아가 각종 조각상이나 공예품 등을 채색하는 행위나 서(書),회(繪), 화(畵)의 개념을 망라하는 의미 폭넓게 함축

따라서 예로부터 단청의 대상은 전통적인 목조 건축물은 물론이거니와

 

고분이나 동굴의 벽화, 칠기, 공예품, 조각상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인류는 일찍이 자연환경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목재를 이용하여 주거지를 마련했다.

 

그런데 목재를 가공 조립해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건축물의 수명 연장이 최대의 난관으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건축재로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소나무이다.

 

소나무는 재질의 특성상 내강, 내구, 내곡성의 장점이 있으나, 동시에

 

제재된 목재의 표면이 거칠고 건조 후 열상이 크다는 단점도 지닌다.

 

따라서 고대인들은 쉽게 썩고 갈라지며 왜곡되는 나무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무언가 조치를 강구해야만 했다.

 

그 해결책이 바로 단청이다. 즉 나무의 조악한 면을 감추고 부식을 막기 위해

 

부재에 천연의 채료를 바르는 작업에도 인간 본성인 미의식이 발휘되었다.

 

수명 연장을 위해 부재에 채색을 하면서 아름다움까지 고려해 각종 문양을 장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그 행위에서 건축물의 단청이시작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2) 단청의 목적


(1) 건축물 수명 연장의 목적

 

 - 비바람이나 기후의 변화에 대비한 부재의 풍해, 부식, 건습등을 방지하고 내구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2) 권위와 위풍, 장엄의 목적

 

- 절대 권력의 왕권을 상징하기 위해 궁궐을 단청 장식하거나 종교적 의식을 위한 불교사원,등의 장엄을 위하여.

(3) 재질의 조약함 은폐 목적

 

- 목재의 표면에 나타난 각종 옹이나 흠집 등을 감추고 외관의 미려함을 꾀하기 위하여.

(4) 기념비적 건축물의 전시 목적

 

- 일반적인 것과 구분되는 특수 기념비적인 건축물의 전시와 기록을 위하여

 

 3) 단청의 종류

 

(1) 금단청

 

금단청은 최고 등급의 정엄 양식이다.

 

이 양식의 명칭에 비단 금(錦)자를 붙인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비단에 수를 놓듯이 모든 부재를 복잡한 문양과 화려한 채색으로 장식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금단청 양식에는 금문이 추가로 장식되는데, 이 때문에 ‘금단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금단청의 머리초에는 병머리초, 장구머리초, 겹장구머리초 등 화려한 문양을 적용하고

 

곱팽이에 번엽을 추가하기도 한다. 휘 역시 가장 복잡한 바자휘를 4~6개 사용해 화려함을 극대화 한다.

직휘는 장단직휘를 사용할 수 있으나 대개 금문직휘를 장식하며,

 

부연과 서까래의 뒤끝머리까지 머리초를 도채하는데, 이를 ‘뒷목초’라 부른다.

 

계풍에도 각종 금문을 장식하고, 중심부에 풍혈 또는 안상을 구획해,

 

그 안에 용, 봉황, 학, 신수, 화조, 산수, 사군자, 비천, 인물 등의 별화를 장식한다.

 

또한 문양 전체의 황색 줄을 금박으로 도금해 찬란한 광채의 효과를 극대화 시킨다.

 

포벽에는 각종 부처상을 묘사하는데, 이를 ‘불벽화’라 하며, 화려한 보상화문을 도채하기도 한다.

 

이러한 장엄 양식은 대웅전, 대웅보전, 극락전, 비로전 등 부처님을 모신 사찰의 중심 법당에 적용된다.

 

이미지 : http://www.gangsun.net/htm/product.asp?photogroup=금단청

 

(2) 얼금단청

 

얼금단청의 조형 약식은 최고 등급인 금단청과 모로단청의 절충형이다.


머리초는 모로단청보다 다소 복잡하게 도안해 금단청과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출초한다.

 

휘 장식은 대개 인휘로 구성하는데 , 그 수는 3~5개가 보통이다.

 

중간 계풍에는 출초 없이 즉석으로 간단한 당초문을 그리거나 단색 계열2빛의 금문을 넣기도 한다.

 

포벽에도 출초하지 않고 간단한 당초문을 장식한다.


이러한 단청 양식은 원래부터 확실한 조형 등급으로 분류되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이 양식이 출현하게 된 동기 중 하나는 값비싼 단청 시공비를 절감하려는 의도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부처님을 모시는 사찰의 주요 불전에는 그 성격에 맞게 당연히 최고 등급인 금단청 양식이 장엄되어야 한다.

 

그러나 시공비가 부족해 도저히 금단청을 장엄하지 못할 경우에는 왕왕 이러한 절충 양식이 시행된다.

 

또한 모로단청이 제격이라 할 수 있는 종각, 조사전, 삼성각, 장경각 등에도

 

 좀 더 품격 높은 장엄 효과를 가져오기 위해 얼금 양식을 시공하는 경우가 있다.

 

이미지 : http://www.gangsun.net/htm/product.asp?photogroup=얼금단청

 

(3) 모로단청

 

'머리단청’또는 ‘모로단청’이라고 하는데,

 

이는 목부재의 끝 부분에만 머리초 문양을 장식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즉 ‘모로’란 ‘머리’의 발음이 변이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휘 장식을 포함해 머리초 문양의 적용 범위는 목부재 길이의 약 1/3 정도로 잡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부재가 대량처럼 아주 길거나 짧을 경우에는 적용 범위도 달라진다.

 

부연과 서까래 등에는 처마 끝 부분에만 머리초를 장식한다.

 

창방, 평방, 도리, 대량 등에는 양단에 각각 머리초를 장식하며,

 

중간(계풍)은 뇌록 바탕에 선긋기로 마무리 한다.

 

머리초 문양은 다소 간략하게 도안하고, 휘 장식 역시 2~4개 정도의 간단한 늘휘나 인휘로 구성한다.

 

직휘는 복잡하지 않은 먹직휘나 색직휘 등을 사용하고, 색상의 명도 대비 2빛으로 도채한다.

 

이 양식은 전체적으로 복잡하거나 화려하지 않고 단아한 느낌을 자아낸다.

 

주로 사찰의 누각, 궁궐의 부속 건물, 향교, 서원, 사당, 정자 등에 적용된다

 

이미지 : http://www.gangsun.net/htm/product.asp?photogroup=모로단청

 

 4) 기와 : 개와()라고도 한다.

 

(1) 기와의 역사

 

낙랑시대()에 건물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때에는 평기와[] 처마에 아직 와당()이 발달되지 못하였으나,

 

중국 육조시대()에는 연화()무늬의 원와당이 발달하였다.

 

삼국시대인 고구려·백제·고신라의 기와는 주로 육조시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고구려는 전통성을 살려 소용돌이꼴 무늬에 특색이 있는 다양성을 보였으나

 

백제에서는 간소한 연화무늬로 남조()의 강한 영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고구려·백제의 유적에서 평기와의 처마끝에 지압()무늬(손 끝으로 누른 무늬)가 발견된 것은

 

처마평기와[]가 와당으로서의 원초적 형태를 반영한 것이다.

 

(2) 기와의 형태

 

기와의 형태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암키와(평기와)와 수키와(둥근기와)인데,

 

이 기와를 합쳐서 하나로 만든 것도 있다.

 

일반적으로 지붕은 산자 위에 진흙을 이겨 얇게 편 다음,

 

위·아래로 암키와를 걸치고 좌우의 이음매에 수키와를 덮는다.

 

그리고 처마 위에 비아무림으로 막새를 붙이는데 암키와 끝의 것을 암막새, 수키와 끝의 것을 수막새라고 한다.

 

지붕마루는 기왓골에 맞추어 수키와를 옆으로 세워 막고, 그 위에 수키와를 한 줄로 세워 댄다.

 

전자를 착고(), 후자를 부고()라 하며, 그 위에 마루장을 3∼7겹 덮고 최상부에 수마루장을 덮는다.

 

마루의 양 끝에는 용머리 기와를 세워 장식을 겸한다.

 

근래에 많이 쓰이는 기와는 일본 에도[]시대 평기와와 둥근기와를 하나로 합한 것인데,

 

중량이 가볍고 이기에도 간편하다.

 

(3) 기와의 재료

 

기와의 재료에 따라 찰흙을 반죽하여 구워 만든 토기와,

 

시멘트와 모래를 섞어 만든 시멘트기와,

 

금속판으로 가공 성형한 금속기와도 있다.

 

토기와에는 무유와()와 시유와()가 있는데,

 

무유와 중에서 저온으로 구운 것을 적와()라 하고,

 

완전히 구워지기 전에 솔잎연기로 구운 것을 훈와()라고 하며, 빛은 흑회색이다.

 

시유와는 고온에서 완전히 구워지기 전에 식염을 뿌려 빨갛게 구운 것으로, 흡수율()이 적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29351&dir_id=05020104

 

2. 연적에서 찾을수 있는 색깔과 무늬의 아름다움(이미지도 함께)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112778

 

수적() ·수주()라고도 한다.

그 형태는 다양하다.

 

물이 나오는 부위와 물과 공기가 들어가는 구멍을 두어 쉽게 물을 넣어서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좋은 벼루 머리에 운치 있는 연적을 두어 선비의 고상한 한묵정취()를 돋구었다.

 

중국에서는 자기와 주석 등으로 만들었고 사치가 극에 달하였다.

 

한국에는 고려 때 오리 모양의 청자연적이 남아 있으며 국보 제7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백자로 연적을 만들었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112778&dir_id=09040405

 

3. 도자기와 한옥의 지붕에 대해서(이미지도 함께)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48326

 

일반적으로 도기·자기라고도 한다.

 

도자기에 사용되는 원료는 점토·장석·규석·도석 등의 무기물질이 있으며,

 

이것을 단독 또는 혼합하여 성형한 다음 열을 가하여 경화()시킨 제품을 말한다.

 

도자기에는 자기·석기·도기·토기 등이 있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48326&dir_id=09040405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740893

 

서양식 주택, 즉 양옥에 대비한 말이다.

 

한옥의 가장 큰 특징은 난방을 위한 온돌과 냉방을 위한 마루가 균형있게 결합된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이다.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공존하는 한반도의 더위와 추위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한국의 독특한 주거 형식이다.

한옥의 형태는 지방에 따라 구조가 다르다.

 

북부 지방에서는 외부의 냉기를 막고, 내부의 열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구조로,

 

방을 두 줄로 배열하는 형태의 겹집 구조와 낮은 지붕의 한옥이 발달했다.

 

이에 비하여 남부 지방에서는 바람이 잘 통하도록 방을 한 줄로 배열하는 홑집 구조와 마루 구조가 발달했다.

또한, 한옥은 상류주택과 민가에 따라서도 구조를 달리한다.

 

대가족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상류 계층의 주택은

 

신분과 남녀, 장유()를 구별한 공간 배치구조를 하였다.

 

즉, 집채를 달리하거나 작은 담장을 세워 주거 공간을 상·중·하로 구획했다.

 

상()의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는 양반들이 사용했고,

 

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행랑채는 하()의 공간으로 머슴들이 기거하는 곳이었으며,

 

중문간 행랑채는 중간 계층인 청지기가 거처하는 중()의 공간이었다.

상류주택은 장식적인 면에도 치중하여 주택의 기능면에서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가치에서도

 

뛰어난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은 집을 지을 때도 구조에서부터 재료에 이르기까지 장식적인 면보다는

 

기능적인 면을 더 중시했다. 재료로는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돌과 나무들을 사용했는데,

 

기둥과 서까래·문·대청바닥 등은 나무를 썼고, 벽은 짚과 흙을 섞은 흙벽으로 만들었으며,

 

창에는 역시 천연 나무로 만든 한지를 발랐다. 바닥에는 한지를 깐 뒤 콩기름 등을 발라 윤기를 냈고,

 

방수의 역할도 하게 하였다.

지붕으로는 기와지붕과 초가지붕이 가장 보편적이다.

 

부유한 집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올렸고, 서민들이 거주하는 민가에서는

 

대부분 볏짚으로 이은 초가지붕을 얹었다. 초가지붕은 겨울에는 열을 빼앗기지 않고

 

여름에는 강렬한 태양열을 차단해 주며, 구하기 쉽고 비도 잘 스며들지 않아

 

지붕의 재료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740893&dir_id=04030304

 

 

4. 한복에 대해서(이미지도 함께)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186379

 

당()·원()·명대()의 관복제도를 받아들여 한국 고유의 복식과 조화시키면서 발전시킨 것으로,

 

조선옷이라고도 한다. 직선과 약간의 곡선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우며,

 

특히 여자 옷은 짧은 저고리와 넉넉한 치마가 어울려 옷차림이 단정하고 아담하다.

 

예복과 평상복이 나뉘어 있으며 남녀별 성인과 어린이용, 계절별로 나뉜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186379&dir_id=04030104

 

 

5. 화로,떡살,문갑,연적,지게,책갑,,등잔,청동거울을 어디에 사용하던 것들인가? 어떤점이 아름다운가?

어떤 점이 과학적이고 편리한가?에 대해서 알려주세요.(이미지도 함께)

 

 

 

1) 화로 : 출처 :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42965900

 

숯불담아 놓는 그릇. 주로 불씨보존하거나 난방위하여 쓴다.

 

우리추운 겨울 밤 화로둘러앉아 군밤구워 먹으면서 할머니옛이야기들었다.

 

명례댁이 화젓가락으로 화로숨은 불을 헤집어 방 안어둠조금 밀치며 넋두리늘어놓았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media_id=48769

 

2) 떡살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53034

 

떡의 문양을 찍는 도구.

떡본 또는 떡손·병형()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떡살은 누르는 면에 음각 혹은 양각의 문양이 있어서

 

절편에 찍으면 문양이 아름답게 남는다.

 

사용하는 방법은 적절한 크기로 잘라낸 떡에 물기를 묻혀서 떡살로 도장을 찍듯이 누르면 된다.

 

이렇게 찍은 떡은 어느 정도 굳으면 그 문양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떡살은 재질에 따라 나무떡살과 자기떡살로 나눌 수 있다.

 

단단한 소나무·참나무·감나무·박달나무 등으로 만드는 나무떡살은

 

1자 정도의 긴 나무에 4∼6개의 각기 다른 무늬를 새긴 것이다.

 

사기·백자·오지 같은 것 등으로 만드는 자기떡살은 대개 보통 5∼11㎝ 정도의 둥근 도장 모양으로,

 

손잡이가 달려 있어서 잡고 꼭 누르게 되어 있다.

 

특히 궁중에서 쓰던 사기떡살은 고급스러운 백자()로 만든 것이 많다.

 

떡살의 문양은 주로 부귀()와 수복()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는 길상()무늬를 비롯하여

 

장수와 해로를 뜻하는 십장생()·봉황·국수무늬, 잉어·벌·나비·새·박쥐 등의 동물무늬와 태극무늬,

 

빗살 등의 기하학적 무늬, 만()자 등의 불교적인 무늬와 꽃· 수레바퀴무늬 등 아주 다양하다.

 

특히 떡살의 문양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어서 좋은 일, 궂은 일, 돌, 회갑 등 용도에 따라 다르게 사용했다.

 

단옷날의 수리치절편에는 수레무늬, 잔치떡에는 꽃무늬, 사돈이나 친지에게 보내는 떡에는 길상무늬를 찍었다.

 

특히 선물용으로 보내는 떡은 그 문양에 따라 보내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떡살의 무늬는 일반적으로 가문에 따라 독특한 문양이 정해져 있었다.

 

그 문양은 좀처럼 바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집안에 빌려 주지도 않았다.

 

부득이하게 떡살의 문양을 바꾸어야 할 때에는 문중의 승낙을 받아야 할 만큼

 

집안의 상징적인 무늬로 통용되었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말이 있듯,

 

우리네는 한번 먹고 나면 없어져 버릴 떡 하나라도 보는 즐거움으로 구미를 돋구었다.

 

생활의 사소한 것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치장하기를 즐기던 우리 문화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떡살은,

 

선조들의 격조 있던 음식문화를 대변하고 있다.

 

 

3) 문갑 :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65407

 

가로로 서랍이 여러 개 달리고 문이 달려 있는 것도 있고

 

탁자형()과 서안형()이 있는가 하면, 민짜로 된 상자형 등 다양하다.

 

죽제() 문갑·송제() 문갑·화류 문갑·먹감나무 문갑·자개 문갑 등

 

책() 문갑()이 일반적으로 많고,

 

특별히 화류(:)로 만들어 산호·비취·밀화 등으로 정교하게 조각한 고급품도 있다.

 

보통 나무결이 좋은 오동나무나 괴목나무 같은 것으로 많이 만들며 흑색 또는 자주색의 옻칠을 하기도 한다.

문갑은 보통 창문 아래쪽에 놓아두며 붓통·지통() 기타 가벼운 도자기·화분 등을

 

올려놓아 멋을 부리기도 한다. 외문갑보다는 쌍문갑을 흔히 쓴다.

 

안방과 사랑방용이 있으며,

 

안방용은 그 구조와 외형이 섬세하고 화사한 것이 많은 반면

 

사랑방용은 검소하고 묵직한 것이 많으며 빛깔 역시 너무 화려한 것은 피한다.

 

장식은 주로 놋쇠나 백동을 이용하였다

 

이미지 ;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image&sm=tab_jum&query=%uBB38%uAC11

 

4) 연적 : 아까 위에 썼었죠

 

5) 지게 :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142224

지게는 양다리방아 ·발무자위 등과 더불어 우리 민족이 발명한 가장 우수한 연장의 하나이다.

 

가지가 조금 위로 벋어난 자연목 2개를 위는 좁고 아래는 벌어지도록 세우고

 

사이사이에 3~4개의 세장을 끼우고 탕개로 죄어서 고정시키고 위 아래로 멜빵을 걸어 어깨에 멘다.

 

그리고 등이 닿는 부분에는 짚으로 두툼하게 짠 등태를 달아놓았으며

 

이것을 세울 때에는 끝이 가위다리처럼 벌어진 작대기를 세장에 걸어둔다.

 

지게의 형태나 크기는 곳에 따라,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고 만드는 방법 또한 다양하다.

 

우선 지게 길이는 이것을 지는 사람의 키에 맞추기 마련인데 평야지대의 지게는 산간지대의 것보다 긴 편이다.

 

이에 비해 산간지대는 길이 좁고 가파르며

 

돌부리나 풀 따위에 걸려서 넘어질 위험이 높기 때문에 짧은 지게를 쓴다.

 

또 전북 서반부 일대의 지게는 동발과 동발 사이가 넓고 지게 자체를 지는 사람쪽으로 구부려 놓는 점에서

 

다른 평야 지대의 지게와 차이를 보인다.

 

지게를 만드는 방법에 따라 분류하면

 

제가지지게 ·

옥지게 ·

쪽지게 ·

바지게 ·

두구멍지게 ·

켠지게 ·

거지게 ·

쇠지게 ·

쟁기지게 ·

모지게 ·

부게 ·

물지게 따위가 있다.

 

주로 소나무로 만드는 제가지지게는 ‘가지가 자연히 벋어나간 나무로 짠 지게’라는 뜻으로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지게는 모두 이에 속한다.

 

옥지게는 참나무로 건 지게로서 가지의 중간 부분이 위쪽으로 구부러졌다.

 

옥지게는 이처럼 ‘가지가 굽은 지게’라는 뜻이다.

 

옥지게는 강원도 산간 지대에서 섶나무나 꼴 따위를 나르는 데 쓴다.

 

물매가 워낙 된 곳에서는 사람이 지게를 지고 걸을 수 없는 까닭에

 

동발을 두 손에 쥐고 끌어내리기 위해 가지를 구부린 것이다.

 

가지는 불에 구워가며 조금씩 구부린다.

 

쪽지게에는 예전의 등짐장수들이 이용한 간단히 만든 지게와

 

몸에 구멍을 뚫고 가지를 끼워넣은 것의 2종류가 있으며

 

뒤의 것은 전북 서반부 일대가 본거지이다.

 

이 일대는 평야 지대로서 지게감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일찍부터 이러한 지게를 만들어 썼다.

 

바지게는 주로 강원 영동지방에서 영서지방으로 태백산맥을 넘어

 

해산물을 팔러 다닌 사람이 쓴 지게로 가지가 달리지 않았으며 짐은 지게에 잡아맨다.

 

이들의 작대기 또한 특이하여 위쪽에는 노치를 짓고 아래에는 쇠못을 박아 놓았다.

 

이 쇠못은 겨울철 미끄럼 방지에 효과적이다.

 

두구멍지게는 가지 구멍이 위 아래 2개 있는 지게로서 짐의 종류에 따라 가지를 맞추어 끼운다.

 

켠지게는 지게감 하나를 톱을 이용해서 켜서 둘로 나눈 지게이다.

 

거지게는 동발 부분이 거의 없는 짧은 지게로서 길마 좌우 양쪽에 걸고

 

무거운 돌이나 긴 나무 따위를 마소의 힘을 빌어 나르는 데 쓴다.

 

쇠지게는 쇠로 만든 지게이고 쟁기지게와 모지게는 쟁기나 모를 나르는 데,

 

부게는 해안에서 거둔 어획물을 나르는 데 쓴다.

 

한국의 지게는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쓰시마[]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 이름 그대로 ‘시케이’ 또는 ‘지케이’라 부른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142224&dir_id=04030405

 

6) 책갑 : 출처 - 국어사전

 

넣어 있게 책의 크기맞추어 만든 작은 상자.

 

이미지 :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image&sm=tab_jum&query=%uCC45%uAC11

 

7) 등잔  :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52219

 

재료에 따라

 

목제 ·

토제 ·

와기 ·

대리석 ·

백자 ·

사기 ·

놋 ·

철제 등잔이 있다.

 

여기에 한지 ·솜 ·노끈 따위로 3발 심지를 만들어 기름을 먹여 불을 켠다.

 

1876년경 일본에서 석유와 함께 심지꽂이가 따로 붙은 등잔이 들어왔다.

 

주로 사기로 된 것이었지만 백자 ·놋쇠 ·백동 ·철 ·대리석 등으로 만든 것도 있었다.

 

불을 밝게 하려면 심지 2개를 사용하는데 이것을 쌍심지라고 한다.

 

보통 등잔걸이 ·제등() ·좌등() 등에 올려놓고 사용하나, 등잔에 등대가 붙은 것도 있다.

 

이동하는 도중 기름이 넘쳐 흐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름받이를 밑에 걸어서 넘치는 기름을 받기도 한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52219&dir_id=04030405

 

8) 청동거울 :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284491

동경()이라고도 한다.

 

유럽계통의 손잡이가 있는 것과

 

중국계통의 손잡이가 없는 것이 있다.

 

중국의 거울은 원형 또는 방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만들어진

 

시대적 특색에 따라

 

춘추식() 거울,

전국식() 거울,

한()나라식 거울,

당()나라식 거울,

송() ·원()나라식 거울 등으로 구분된다.

한나라 이전의 청동거울 중에서 진()나라 때의 동기()와 유사한 무늬가 있는

 

청동거울이 1920~30년대에 주목되어 진나라식 거울 또는 선진()거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국식 거울을 주로 하면서 시대적으로는 춘추시대에서 전한() 초기에까지 미치고 있다.

 

분포지역도 진나라에 한정되지 않고 있어 한나라 이전의 옛 청동거울은 춘추식 ·전국식 거울로 구분한다.

① 춘추식 거울은 중국 청동거울 중에서 가장 오래된 형식으로 휘어짐이 없이 평직()하며, 거울깃도 없고 두꺼우며 작은 형으로 꼭지는 반고리식이다. 시기적으로는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 초기에 만들어져 허난성[] 산현[] 상춘링[]에서 소문경() ·금수문경() 등이 출토되었으며, 동기의 괴이한 짐승무늬를 둥근 거울 모양으로 잘라서 끼운 것도 있다.

② 전국식 거울은 진나라식 거울, 선진 거울, 선한() 거울 등으로 불리었던 것으로 전국시대 중기에서 전한 초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엷은 편이며 휘어짐이 없이 평직하고, 세 개의 활 모양의 꼭지가 달려 있다. 무늬는 지문()과 주문()으로 되어 있는데, 지문에는 우상수문() ·구련뇌문() ·능운문() 등이 있고, 주문으로는 동물무늬 ·식물무늬 ·화판()무늬 등의 기하학 무늬가 많다. 청동의 질이 좋고 일반적으로 칠흑색()이다.

③ 한나라식 거울은 중국 청동거울 중에서 가장 양식이 정비된 것으로 전한()식 거울과 후한()식 거울로 나눈다. 전자에는 이룡문경(螭)과 명대경()이 많고, 후자에는 내행화문경() ·사신경() ·신수경() 등이 발달하였다.

④ 당나라식 거울은 중국의 옛 청동거울 중 만듦새가 가장 뛰어난 것으로, 두꺼운 백동질() 거울로 원형 ·방형 외에 팔화형() 등이 있다. 무늬에도 서방적인 해수포도()무늬를 비롯하여 용()이 서린 무늬, 난새와 봉황새무늬, 꽃가지무늬, 계수나무와 달 ·토끼무늬 등 다양하며 제작기법에서도 은첩() ·도금() ·금은을 바른 것, 나전() ·칠보() 등 뛰어난 공예술을 보여주고 있다.

⑤ 송 ·원나라식 거울은 당나라의 청동거울을 고비로 하여 제작기술이 퇴보하고 있어 동질도 나빠지고 무늬에 있어서도 초화()무늬 외에는 한나라식과 당나라식 거울을 모방한 것이 많다. 요() ·금() ·원() 나라의 청동거울도 조방()한 것이지만 연호가 들어 있는 금나라의 사수포도문경(), 원나라의 쌍룡경() 등의 연호경()도 있다. 한국에서는 중국에서도 출토되지 않은 다뉴세문경()이 있는데, 이것은 둘레가 반원형()으로 끈을 끼워 잡게 된 꼭지가 2개 정도 있다.

경주 입실, 평남 대동군에서 출토된 퉁구스계()의 청동거울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낙랑고분을 중심으로 껴묻거리[]로 출토된 청동거울은 여러 가지 무늬와 명문()이 들어 있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284491&dir_id=10020101

 

6. 조각보,옹기,한지에 대해서 (이미지도 함께)

 

1) 조각보 : 출처 - http://www.gallerykids.com/kidstory/story011.htm

 

옛날의 보자기는 물건을 싸두거나 보관하던 생활필수품이었으며

 

또는 어딘가에 물건을 보낼 때 정성스럽게 싸서 보내던 의례용품이었습니다.

보자기 중에서도 조각보는 옛날 일반서민들이 쓰다남은 조각천을 이어서 촘촘이 바느질하여 만든 것으로

 

조상들의 생활의 지혜를 엿볼 수 있으며 세련된면서도

 

색색이 조화를 이뤄낸 예술적 기량을 동시에 느낄수 있습니다.

 

또한 조각보는 서민들이 한땀한땀 바느질에 공을 들여 제작하면서 복(福 )을 짓는 행위로 생각하기도 했으며

 

이렇게 만들어진 조각보안에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싸두고 보관하거나

 

또는 예의를 갖추어야하는 사람이나 신앙의 대상에게 정성스럽게 보내기도 했답니다.

현대에 이르러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는 조각보의 구성미는

 

서구의 몬드리안이나 클레등의 회화작품들과도 간혹 비교되기도 하는데,

 

이들의 작품들이 색의질서와 조화등을 충분히 고려하여 제작된데 비해

 

백여년 앞서 제작된 우리나라 조각보의 색채구성은 보다 자유롭고 순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조각보는 우리조상들의 실용성과 더불어 뛰어난 배색능력과

 

특별히 맞추어 계산하지 않고도 조각조각 조화를 이뤄낼 줄 아는

 

탁월한 미적감각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 우리규방문화, 현암사/ 한국의 미, 국립중앙박물관)

옷보 19세기, 67x67 cm

팔랑개비가 흔들거리는 듯 율동감이 느껴지는 견사로 만든 이 옷보는 마름질 하고 남은 천 조각들을 하나하나 이음질 해서 만들었다는 것이 한눈에도 금방 알 수 있게 한다. 2개의 삼각형을 이어 사각형의 일정한 구성을 유지하면서도 그 크기에 있어서는 하나도 같은 게 없을 만큼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옷보 19세기

은은한 무늬가 깔린 연한 파스텔톤의 견사를 장방형의 크고 작은 조각들로 이어붙여 완벽한 현대적 조형성을 추구하였다. 특히 빨강, 파랑, 초록 등의 강한 원색을 조화롭게 구성한 대담함과 함께, 가운데 손잡이를 비롯, 직사각형의 끝면이 만나는 네 귀퉁이 마다 포인트를 장식한 작은 매듭들의 앙증스런 모습이 옛 여인들의 놀라운 조형성과 미학적 감각을 짐작케 한다

상보 19세기, 52x52 cm

속이 비칠 듯한 얇은 견사로 만든 이 상보는 흰색을 바탕으로 청.홍 대비의 직선을 사각으로 돌렸으며, 그 안에는 연두색 등 엷은 동색 계통의 대칭으로 조화를 이루었다. 특히 가운데 포인트가 되는 강렬한 빨강색의 한 줄이 시선을 끈다.

예물보 19세기, 62x62 cm

전체적으로 회색톤의, 마치 스님의 옷을 연상시키는 이 모시 옷보는 엷고 짙은 회색의 조각들을 세로와 가로로 서로 엇갈려 모던한 분위기로 구성하였으며, 가운데를 중심으로 누런색의 조각을 집중 연결함으로써 지루함과 단순함을 피하였다. 특히 조각이 연결되는 선들을 일정한 굵기의 흰 테두리를 설정하여, 면분할의 선명함을 돋보여주었다.

 

2) 옹기 : 출처 - http://pottery97.com.ne.kr/

 

(1) 옹기란?

 

자연적 소박함이 묻어있는 옹기는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총칭하는 말로써

 

'瓮' 또는 '饔'이라고 쓰며, 외국어 표기는 'onggi'로 하고 있다.


질그릇은 진흙으로만 만들어 구워 잿물을 입히지 않은 그릇이며,

 

오지그릇은 질그릇에 잿물을 입혀 다시 구운 윤이 나고 단단한 그릇이다.


질그릇은 유약을 입히지 않아 기공이 메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공기의 유통이 좋아 곡식을 담아 두어도 벌레가 생기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질그릇은 저장 용기로 발달되었다.


반면, 오지그릇은 질그릇과는 달리 유약을 입혀 다시 구워내어 내화력이 강하고 흡수성이 적기 때문에

 

취사용구, 운반용구, 수납용구로 이용되었다.


옹기는 다른 용기와 비교해서 내용물이 쉽게 변색되지 않고 인체에 무해하며,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커다란 우수성을 갖고있다.

 

(2) 옹기의 역사

 

우리나라의 토기는 신석기 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기원 전 4000년 내지 5000년 전에 만들어낸 빗살무늬 토기가 있으며

 

이후 점차 발달하여 더 단단한 무문토기와 홍도, 흑도, 채도로 발달하였다.

 

이중에서 흑도는 중국 회도의 영향으로 크게 발전하게 되면서

 

내화도가 높은 흙을 찾아내어 물레로 제작하여 섭씨10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릇을 와질 토기라 한다.

와질토기는 서기 전 1세기로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4세기에는 경도가 매우 높은 토기로 발전했는데 이를 석기라 한다.

 

석기는 5,6세기경 신라와 가야에서 가장 우수한 것을 만들었으며 섭씨 1200도의 높은 온도로 환원소성한 것이다.

또한 삼국시대이후 환원소성한 토기가 주류를 이루지만 산화소성도 연면히 이어졌으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적색토기가 만들어졌고 고려시대에는 조금 더 단단해진 적색토기가 만들어졌고

 

고려시대에는 조금 더 단단해지니 적색토기가 만들어졌으며 조선시대에는 오지그릇이 만들어졌다.

결국 옹기는 흑도로부터 연원을 찾아 흑도가 고화도로 구운 치밀의 토기로 발전하고

 

치밀의 토기 중 한 갈래는 청자와 백자로 이어지며 또 한 갈래는 옹기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3) 용기의 특이성

 

- 자연환원성 : 그릇 중에서 천연에 가장 가까운 용기인 옹기는 인체에 무해, 무독하며 조심스럽게 사용하면 수십년 내지 수천년동안 활용가치를 지니고 있는 그릇이다. 그러나 유약이 시유된 상태에서 온전한 그릇으로 있을 때는 별문제 없으나 금이 가거나 파손, 파괴되었을 경우는 자연으로의 토화현상(土化現像)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며, 습기있는 땅속에 묻히거나 노출상태에서는 풍화작용에 의해 본래의 모습을 잃고 원래의 자연상태인 흙으로 돌아간다. 전국 각지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양의 옹기를 굽고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파편들이 묻혀있거나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이유가 바로 자연환원성(自然還元性)인 토화현상을 말해 주는 것이다.
재료인 태토는 산지에서 직접 채취하여 사용하므로 파손된 조각들은 근본적으로 같은 재질인 현지의 자연 흙과 동화, 환원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유약의 재료로 쓰이는 약토와 재는 더욱 토화현상을 가속화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 통기성 : 옛날부터 옹기를 이야기 할때 흔히 "숨을 쉰다"고 하였다. 언제부터인지 확실치 않지만 약토와 재를 섞어 유약을 만들어 입혀 구우면 표면이 매끄러우면서도 물이 새는것을 막아 준다. 옹기의 기본재료가 되는 태토에는 근본적으로 작은 모래 알갱이가 수없이 함유되어 있고 유약 또한 부엽토의 일종인 약토와 재로써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산화번조 제작기법을 감안한다면 소성시 점토질과 모래 알갱이가 고열에 의해 이완되어서 그릇전체의 표면에 미세한 숨구멍이 생긴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문양을 넣는 과정에서 이미 시유된 잿물을 손가락이나 나무조각으로 긁어 내어 미적표현은 물론 숨구멍을 트여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발효식품을 중심으로 음식문화가 전개된 우리의 생활양식은 집집마다 장독대를 갖추고 살고 있다. 장독대는 주로 간장, 된장, 고추장, 젓갈 등 우리가 부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여러가지 식품들을 저장, 보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 방부성 : 진흙은 불을 먹으면 굳어지고 그 중에서도 구울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경화성과 내화성이 있다. 찰흙으로 만들어진 날그릇을 가마굴에 넣고 1200℃ 이상의 고열을 가하게 되면 다량의 탄소 알갱이들이 그릇 기벽에 부착되어 미세한 숨구멍을 만든다. 이 숨구멍에 의해 음식물은 서서히 변화되며 음식물에 물리적인 부작용을 끼치지 않는다. 연료로 사용되는 나무가 가마속에서 연소될 때 생기는 탄소와 연기는 이미 그 안에 들어 있는 옹기들을 휘감아 싸고 감돌아서 검댕이가 입혀지는데 이것은 곧 옹기그릇 자체에 방부성 물질로 옷이 입혀졌음을 뜻한다. 또한 옹기의 내외벽에 시유되는 잿물은 식물성 재를 사용하는데 잿물속의 재의 기능도 동일한 작용을 한다고 보았을 때 그 방부 효과는 더욱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음식물의 장기 저장을 위한 필요성도 있으나 다음해 농사를 짓기 위한 종자 보관을 위해서도 옹기는 가장 적합한 용기로 절대적 가치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견고성 : 사람의 지혜와 생활이 발전함에 따라 빗살무늬토기에서 민무늬토기로 이어지면서 오늘날 옹기의 근원이 되는 실용적인 자연유약을 시유한 견고한 도기가 출현한다. 내화성이 있는 찰흙으로 만든 그릇을 고온에서 굽게 되면 쇠소리가 날 정도로 단단해진다. 이러한 견고한 도기는 이미 초기 철기시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어지고 자기에 비유할 바는 못되나 생활도구로써 사용하는데는 아무런 불편과 지장이 없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용기들은 그 나름대로의 내구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그 특성과 기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옹기는 놓는 장소와 사용 용도에 따라 외부의 물리적인 작용에 급변하지 않고 자연현상에도 강한 이점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강한 햇빛과 비바람에 노출된 장독대나 발효식품을 저장용기로 장시간 사용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다.

 

- 경제성 : 옹기의 가마는 뺄불통, 조대불통, 설창, 칸(뫼통)등 여러 종류가 있으나 이들 모두 어떻게 하면 적은 연료로써 많은 양의 옹기를 구워낼수 있을까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경제용어로써 수확체멸(收穫體滅)의 법칙이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자기를 구울 때는 생각도 해 볼 수 없는 일들이 옹기의 경우에는 빈번히 일어나는데 잿물을 바른 기물과 기물사이를 거의 맞닿을 정도로 재운다던가 하나의 항아리 속에 여러 개의 작은 항 아리를 넣는 것이 그러하다. 가마를 신축할 때에도 주위의 땔감나무 분포도를 확인하고 태 토의 질과 양을 알아 본 다음 차기 가마 이동계획을 수립함으로써 제작비 절감효과를 유도 한다. 그리고 기물을 재운다던가 불을 지피는 사람을 불대장이라 부르는데 불 대장은 축적 된 오랫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재우는 기물의 수와 양을 조절하고 불의 강도를 조절하면서 제작비 절감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다. 뿐만 아니라 태토, 유약 등은 자연으로부터 저렴한 노동에 의해서 얻어지고, 땔감나무 또한 비교적 싼값으로 잡목, 폐목, 나무뿌리, 솔잎 등을 손쉽게 구하여 사용할 수 있어서 옹기 제작의 원가 절감에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 조형미 : 우리의 식생활에서 저장용기로서의 기능은 물론이고 주생활에도 그 활용의 범위가 매우 컷던 도자기가 바로 옹기인데, 옹기는 평범한 주위환경과 잘 어울려 황토색 흙담장 같은 친근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형태가 보여주고 있는 자연스러운 곡선은 가장 인간적인 조형미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옹기는 귀족적인 화려함보다는 서민적인 상징성을 담고 있다. 억지로 멋을 부리거나 조작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필요성에서 나오게 된것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자연스러움은 옹기에 풍요로움과 후덕한 느낌을 주며, 둔탁한 기형은 순박하고 꾸미지 않는 순수한 미를 느끼게 한다. 이처럼 있는듯 없는듯 하면서도 그 할 일을 다하여 온 옹기야말로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고루 겸비한 가장 한국적인 미의식을 담고 있는 도기라 할 수 있다.

 

이미지 :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image&sm=tab_jum&query=%uC639%uAE30


 

3) 한지 :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186751

 

보통 조선종이라고도 한다.

 

닥나무[]나 삼지닥나무[] 껍질을 원료로 하여 뜬다.

 

이들 나무를 다발로 묶어 물을 부은 가마솥에 세우고 가마니로

 

둘러싼 뒤 불을 때어 껍질이 흐물흐물 벗겨질 정도로 삶은 다음 껍질을 벗겨 말린다.

 

말린 껍질을 다시 물에 불려 발로 밟은 다음 하얀 내피() 부분만 가려내고,

 

이것에 양잿물을 섞어 3시간 이상 삶아 압축기로 물을 짜낸다.

 

여기에 닥풀뿌리를 으깨어 짜낸 끈적끈적한 물을 넣고 잘 혼합하여 고루 풀리게 한 다음,

 

발[]로 종이물[]을 걸러서 뜬다. 한지 치수는 수요자의 주문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으나

 

0.6×2.4m의 것이 주종을 이룬다.

 

주산지()는 전라남도 장성군 일대이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은 한말 지소()를 두었던 장성읍 상오() 마을이다.

 

한지는 용도에 따라 그 질과 호칭이 다르다.

 

예를 들면, 문에 바르면 창호지, 족보·불경·고서의 영인()에 쓰이면 복사지, 사군자나 화조()를 치면

 

화선지(), 연하장·청첩장 등으로 쓰이는 솜털이 일고 이끼가 박힌 것은 태지()라고 한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186751&dir_id=13010201

 

 

7. 팔만대장경판, 성덕 대왕 신종, 금속활자, 앙부일구, 석빙고, 자격루, 첨성대, 측우구에 대하여(이미지도 함께)

 

1) 팔만대장경판 : 출처 - 문화재청

 

종    목 국보  제32호
명     칭 해인사대장경판(海印寺大藏經板)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목판각류/ 판목류
수량/면적 81,258매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0 해인사
시     대 고려시대
소 유 자 해인사
관 리 자 해인사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해인사대장경판의판고


해인사대장경판


해인사대장경판


해인사대장경판


해인사대장경판


해인사대장경판


해인사대장경판

 

2) 성덕대왕신종 : 출처 - 문화재청

 

종    목 국보  제29호
명     칭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분     류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수량/면적 1구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소 유 자 국립경주박물관
관 리 자 국립경주박물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실측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는 문화재로 앞으로도 잘 보존해야 할 것이다.

 


성덕대왕신종


천인상

종신구선대(鐘身口線帶)


용뉴(龍紐)와음통(音筒)

 

 

3) 금속활자 :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27605

 

주자()라고도 한다.

 

고려·조선 시대의 금속활자는 구리·철·납 등 여러 가지 금속이 사용되었으나,

 

현대의 금속활자는 납을 주로 하는 합금()이다.

 

형태는 사각 기둥으로 자면()에 글자가 뒤집어져서 튀어나게 새겨져 있다.

이 활자 몸체의 길이는 나라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한국은 2.3875cm, 미국은 2.489cm, 독일은 2.357cm , 러시아는 2.514cm로 되어 있다.

 

크기(호·포인트)에 따라 가로·세로의 치수도 다르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27605&dir_id=0311040205

 

4) 앙부일구 : 출처 - 문화재청

 

종    목 보물  제845호
명     칭 앙부일구(仰釜日晷)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계측교역기술용구/ 도량형
수량/면적 2기
지 정 일 1985.08.09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57 국립고궁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국립고궁박물관

 

앙부일구는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만들었던 해시계로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이 솥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둥근 지구 모양을 표현한 것이고 작은 크기로도 시각선, 계절선을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큰 것은 시계의 지름이 35.2㎝, 높이가 14㎝이고,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며, 작은 것은 시계의 지름이 24.3㎝이며 18세기 전반에 제작되었다. 오목한 시계판에 세로선 7줄과 가로선 13줄을 그었는데 세로선은 시각선이고 가로선은 계절선이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그림자가 시각선에 비추어 시간을 알 수 있다. 또 절기마다 태양에 고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계절선에 나타나는 그림자 길이가 다른 것을 보고 24절기를 알 수 있다. 특히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12지신 그림으로 그려서 시간을 알게 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하다. 또한 이것은 대궐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종로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동시계였다는 점에도 의의가 크다.

덕수궁 궁중 유물 전시관에 전시된 2개의 해시계는 작고 오목한 가마솥 모양에 네발이 있는 우아한 모습을 가진 것으로 작풍과 제작기법이 같다. 청동으로 몸통을 만든 뒤, 검은 칠을 하고 글자와 선을 은상감으로 새겨 예술품으로도 손색이 없으며 정확한 수평을 잡기 위한 십자형의 다리가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해시계이며, 과학 문화재로서도 가치가 큰 유물이다.


앙부일구


앙부일구


앙부일구


앙부일구

 


앙부일구

 

 

5) 석빙고 : 출처 - 문화재청

 

(1) 현풍 석빙고

 

종    목 보물  제673호
명     칭 현풍석빙고(玄風石氷庫)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80.09.16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상리 638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달성군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으며, 출입구가 개울을 등진 능선쪽에 마련된 남향구조이다. 돌의 재질은 모두 화강암으로 외부에서 보면 고분처럼 보인다. 입구는 길쭉한 돌을 다듬어 사각의 문틀을 만든 후 외부공기를 막기 위해 돌로 뒷벽을 채웠다. 외부는 돌을 쌓고 점토로 다져서 흙을 쌓아 올렸다. 잘 다듬어진 돌로 벽과 천장을 쌓았는데 천장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4개 틀어올리고 그 사이사이에 길고 큰 돌을 얹어 아치형을 이루게 하였다. 천장에는 통풍을 위한 환기구가 두 군데 설치되었고 빗물에 대비한 뚜껑이 있다. 바닥은 평평한 돌을 깔고 중앙에 배수구를 두었다.

당시에는 얼음창고가 마을마다 설치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가 작은 현풍고을에 이러한 석빙고가 만들어진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82년 석빙고 주위의 보수작업 때 축조년대를 알려주는 건성비(建城碑)가 발견됨으로써 조선 영조 6년(1730)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현풍석빙고


현풍석빙고


환기구

 

(2) 청도석빙고

 

종    목 보물  제323호
명     칭 청도석빙고(淸道石氷庫)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청도군  화양면 동천리 285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청도군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땅을 파고 만들어둔 창고이다.

양쪽 벽을 이어주던 반원아치 형태의 홍예(虹霓)가 4군데 남아있을 뿐 천장은 완전히 무너져 불완전한 상태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우리나라 석빙고 가운데 경주석빙고(보물 제66호) 다음으로 큰 규모이고 쌓은 연대도 오래된 것이다.

동·서로 뻗은 긴 구조로, 서쪽에 문을 두었으며 계단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경사진 바닥이 보인다. 가운데에는 물이 빠지는 길을 두고 동쪽에 구멍을 만들어, 석빙고 밖의 작은 개울로 물이 빠지도록 하였다. 환기 구멍을 뚫어 놓았던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재는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다.

석빙고의 입구 왼쪽에는 석비(石碑)가 서 있는데, 앞면에는 공사에 동원된 인원수·쓰인 자료·비용 등을 기록해 놓았고, 뒷면에는 비를 세운 날짜와 함께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그 중에 ‘계사(癸巳)년’이라는 기록이 있어 조선 숙종 39년(1713)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청도석빙고


청도석빙고


청도석빙고


청도석빙고


청도석빙고

 

 

(3) 경주석빙고

 

종    목 보물  제66호
명     칭 경주석빙고(慶州石氷庫)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449-1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경주시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이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 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조선 영조 14년(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주석빙고


입구


명문


환기구

 

(4) 창녕석빙고

 

종    목 보물  제310호
명     칭 창녕석빙고(昌寧石氷庫)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88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창녕군

 

창녕군 교육청 앞의 개울 건너편에 언덕처럼 보이는 것이 이 석빙고이다.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해 두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로, 주로 강이나 개울 주변에 만들어진다.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과 직각이 되도록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으며, 입구를 남쪽으로 내어 얼음을 쉽게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입구 안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밑바닥은 경사졌고 북쪽 구석에는 물이 빠지도록 배수구멍을 두었으며, 바닥은 네모나고 평평하다. 내부는 잘 다듬어진 돌을 쌓아 양옆에서 틀어올린 4개의 무지개모양 띠를 중간중간에 두었다. 각 띠사이는 긴 돌을 가로로 걸쳐놓아 천장을 마무리하였다. 또한 천장의 곳곳에는 환기구멍을 두어 바깥공기를 드나들게 하였다.

이 석빙고는 입구에 서 있는 비석의 기록을 통해 조선 영조 18년(1742) 당시 이곳의 현감이었던 신후서(申侯曙)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알수 있다. 각 부 양식 또한 조선 후기의 모습이 잘 담겨져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창녕석빙고


석빙고 내부


창녕석빙고

 

(5) 영산석빙고

 

종    목 사적  제169호
명     칭 영산석빙고(靈山石氷庫)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3,769㎡
지 정 일 1969.02.28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영산면 교리 산10-2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창녕군

 

화강석으로 쌓은 조선 중기의 얼음창고이다.

정확한 축조시기는 알 수 없으나 『여지도서』와 조선 후기의 읍지에 따르면 현감 윤치일이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들어가는 입구가 높고 뒤로 갈수록 낮은, 전체적으로 둥근 모양으로 되어 있다. 내부는 거칠게 다듬은 큰 돌로 쌓은 네모진 형태이다.

창고가 있는 곳에서 바라다보면 빙고 뒤쪽 끝으로 개울이 있는데 지금은 개울에 물이 말랐지만, 이는 상류에 제방을 쌓았기 때문이며 옛날에는 수량이 풍부했다고 한다.

다른 석빙고에 비해 약간 작은 규모이나, 쌓은 수법은 같다.


영산석빙고


영산석빙고전경


석빙고천정


석빙고내부

 

(6) 안동석빙고

 

종    목 보물  제305호
명     칭 안동석빙고(安東石氷庫)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성곡동 산225-1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안동시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 특히 이 석빙고는 낙동강에서 많이 잡히는 은어를 국왕에게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 영조 13년(1737)에 지어졌다. 형태는 동·서로 흐르는 낙동강 기슭의 넓은 땅에 강줄기를 향하여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으며, 입구는 특이하게 북쪽에 옆으로 내었다.

안으로 계단을 따라 들어가면 밑바닥은 경사져 있으며, 중앙에는 물이 강으로 흘러가도록 만든 배수로가 있다. 천장은 길고 크게 다듬은 돌들을 무지개모양으로 틀어올린 4개의 홍예(虹霓)를 세워 무게를 지탱하도록 하고, 각 홍예 사이는 긴 돌들을 가로로 채워 마무리하였다. 천장의 곳곳에는 환기구멍을 두었는데, 이는 안의 기온을 조절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바깥까지 연결하였다.

전체적으로 규모는 큰 편은 아니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특히 석빙고는 그 위치가 매우 중요한데,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여 지금은 본래의 위치보다 높은 곳으로 옮겨왔다. 이전에는 바로 옆에 강이 흘러서 얼음을 운반하기가 아주 쉬웠을 것으로 보인다.


석빙고 내부


입구

 

(7) 철원 얼음창고

 

종     목 등록문화재 제24호
명     칭 철원 얼음창고
등 록 일 2002.05.31
소 재 지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외촌리 603-1
소 유 자 재정경제부
관 리 자 철원군수
설     명 네모난 콘크리트 박스형태(12m×10m)를 하고 있으며 얼음을 보관하였던 당시의 벽체(두께 15㎝)구조를 볼 수 있음. 실례가 많이 남아 있지 않는 것으로서 당시 얼음의 필요성과 상업의 번창함을 알 수 있으며, 고대의 석빙고, 근대의 얼음창고, 현재의 냉동고에 이르기까지의 변화상을 알 수 있음.

 

 

 

6) 자격루 : 출처 - 문화재청

 

종    목 국보  제229호
명     칭 보루각자격루(報漏閣自擊漏)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천문지리기구/ 천문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85.08.09
소 재 지 서울 중구  정동 5-1 궁중유물전시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궁중유물전시관
관 리 자 문화재청

 

물시계는 물의 증가량 또는 감소량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장치로서,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표준 시계로 사용하였다. 조선 세종 16년(1434) 장영실에 의해 정해진 시간에 종과 징·북이 저절로 울리도록 한 물시계가 처음 제작되었으나, 오래 사용되지는 못하였고, 중종 31년(1536)에 다시 제작한 자격루의 일부가 현재 남아 있다.

물시계의 원리를 보면, 맨 위에 있는 큰 물그릇에 넉넉히 물을 부어주면 그 물이 아래의 작은 그릇을 거쳐, 제일 아래쪽 길고 높은 물받이 통에 흘러든다.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점점 올라가 미리 정해진 눈금에 닿으며, 그곳에 장치해 놓은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의 쇠 구슬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준다. 이 쇠구슬은 다른 쇠구슬을 굴려주고 그것들이 차례로 미리 꾸며놓은 여러 공이를 건드려 종과 징·북을 울리기도 하고, 또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 나타나 시각을 알려주는 팻말을 들어 보이기도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물시계는 쇠구슬이 굴러 조화를 이루던 부분이 없어진 채, 물통 부분들만 남아 있다.

청동으로 된 큰 물그릇은 지름 93.5㎝, 높이 70.0㎝이며, 작은 물그릇은 지름 46.0㎝, 높이 40.5㎝이다. 작은 물그릇이 놓였던 돌 받침대는 지금 창경궁 명정전 뒤에 2개가 남아 있다.

현재 중국 광동에 남아 있는 명나라의 물시계보다 조금 늦게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규모가 크고 만듦새가 훌륭하여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보루각자격루


문파수호와수파수호


수수통부분문양

 

 

7) 첨성대 : 출처 - 문화재청

 

종    목 국보  제31호
명     칭 경주첨성대(慶州瞻星臺)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천문지리기구/ 천문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시     대 신라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경주시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이다. 내물왕릉과 가깝게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는 9.17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나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경주첨성대

 

 

8) 측우기 : 출처 - 문화재청

 

(1) 창덕궁 측우기

 

종    목 보물  제844호
명     칭 창덕궁측우대(昌德宮測雨臺)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계측교역기술용구/ 도량형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85.08.09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57 국립고궁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시대에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를 올려 놓았던 대석(臺石)이다. 높이 30.3㎝, 가로 45.3, 세로 45.5㎝의 대리석으로 만든 이 측우대는 정조 6년(1782) 6월부터 7월 사이에 계속되는 가뭄에 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뜻을 하늘에 알리고 비를 기다리는 의식적인 의의를 담고 있다. 측우기는 한국전쟁 때 없어지고 현재 측우대만 덕수궁 궁중 유물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대석의 4면에 새겨진 글에는 측우기의 제작 경위와 그 뜻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하고 있어 조선 기상학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측우기와 측우대는 영조 때 전국적인 정비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중앙이나 지방에서 제작되었다. 남아 있는 유물은 1782년에 제작한 측우대와 1811년의 측우대, 그리고 1837년의 측우기가 있다.


창덕궁측우대


명문

 

(2) 관상감 측우기

 

종    목 보물  제843호
명     칭 관상감측우대(觀象監測雨臺)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계측교역기술용구/ 도량형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85.08.09
소 재 지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460-18 기상청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기상청

 

조선시대 측우기를 올려 놓고 강우량을 측정하던 것으로 지금은 대석(臺石)만 남아 있다.

측우기는 세종 23년(1441) 세계 최초로 발명되어 이듬해 전국적으로 강우량 측정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그 전에 땅 속에 스며든 비의 양은 잴 수 없던 비합리적 방법에서 벗어난 15세기의 획기적 발명품이었다. 철로 만든 원통형 의 측우기는 돌 위에 올려 놓고 사용했는데 높이 87.6㎝, 세로 59.7㎝, 가로 94.5㎝의 직육면체의 화강암으로, 가운데에 직경 16.5㎝, 깊이 4.7㎝로 구멍을 뚫어 세웠다.

비록 측우기는 전쟁 등으로 유실되어 사라졌지만 이 대석은 측우기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세종 때의 것으로 서울 매동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것을 지금은 국립 중앙기상대(현재 기상청)에 옮겨 놓았다.


관상감측우대


관상감측우대

 

(3) 금영측우기

 

종    목 보물  제561호
명     칭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천문지리기구/ 천문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71.12.21
소 재 지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460-18 기상청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기상청
관 리 자 기상청

 

빗물을 그릇에 받아 강우량을 재는 측우기는 조선 세종 23년(1441)에 만들어진 후 여러 차례 다시 만들어졌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헌종 3년(1837)에 만들어진 측우기가 유일하다.

높이 31.5㎝, 지름 15.3㎝의 이 측우기는 원통형의 표면 3곳에 대나무처럼 도드라진 마디가 눈에 띤다. 동그란 통은 빗물을 받는 그릇으로 여기에 주척이라 부르는 자가 있어 측우기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쟀다. 중앙의 두 마디 사이에는 6줄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원래 충청남도 공주에 있던 것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다시 반환된 문화재이다. 공주 박물관에는 이 측우기를 받쳤던 것으로 전해지는 정사각형의 받침돌이 남아 있다.

 


금영측우기

금영측우기


명문


금영측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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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요

주소에 치면 나와요

저친구도 그렇게 해서 나왔다는군요

한번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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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청의 의의

‘단청(丹靑)’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붉은색과 푸른색의 대비와 조화에 국한되는 말이다.

명사적 의미에서 ‘단청’이란 각종 안료를 사용하여 건물의 벽과 부재에 도채(圖彩)하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다.

나아가 각종 조각상이나 공예품 등을 채색하는 행위나 서(書),회(繪), 화(畵)의 개념을 망라하는 의미 폭넓게 함축

따라서 예로부터 단청의 대상은 전통적인 목조 건축물은 물론이거니와

 

고분이나 동굴의 벽화, 칠기, 공예품, 조각상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인류는 일찍이 자연환경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목재를 이용하여 주거지를 마련했다.

 

그런데 목재를 가공 조립해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건축물의 수명 연장이 최대의 난관으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건축재로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소나무이다.

 

소나무는 재질의 특성상 내강, 내구, 내곡성의 장점이 있으나, 동시에

 

제재된 목재의 표면이 거칠고 건조 후 열상이 크다는 단점도 지닌다.

 

따라서 고대인들은 쉽게 썩고 갈라지며 왜곡되는 나무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무언가 조치를 강구해야만 했다.

 

그 해결책이 바로 단청이다. 즉 나무의 조악한 면을 감추고 부식을 막기 위해

 

부재에 천연의 채료를 바르는 작업에도 인간 본성인 미의식이 발휘되었다.

 

수명 연장을 위해 부재에 채색을 하면서 아름다움까지 고려해 각종 문양을 장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그 행위에서 건축물의 단청이시작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2) 단청의 목적


(1) 건축물 수명 연장의 목적

 

 - 비바람이나 기후의 변화에 대비한 부재의 풍해, 부식, 건습등을 방지하고 내구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2) 권위와 위풍, 장엄의 목적

 

- 절대 권력의 왕권을 상징하기 위해 궁궐을 단청 장식하거나 종교적 의식을 위한 불교사원,등의 장엄을 위하여.

(3) 재질의 조약함 은폐 목적

 

- 목재의 표면에 나타난 각종 옹이나 흠집 등을 감추고 외관의 미려함을 꾀하기 위하여.

(4) 기념비적 건축물의 전시 목적

 

- 일반적인 것과 구분되는 특수 기념비적인 건축물의 전시와 기록을 위하여

 

 3) 단청의 종류

 

(1) 금단청

 

금단청은 최고 등급의 정엄 양식이다.

 

이 양식의 명칭에 비단 금(錦)자를 붙인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비단에 수를 놓듯이 모든 부재를 복잡한 문양과 화려한 채색으로 장식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금단청 양식에는 금문이 추가로 장식되는데, 이 때문에 ‘금단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금단청의 머리초에는 병머리초, 장구머리초, 겹장구머리초 등 화려한 문양을 적용하고

 

곱팽이에 번엽을 추가하기도 한다. 휘 역시 가장 복잡한 바자휘를 4~6개 사용해 화려함을 극대화 한다.

직휘는 장단직휘를 사용할 수 있으나 대개 금문직휘를 장식하며,

 

부연과 서까래의 뒤끝머리까지 머리초를 도채하는데, 이를 ‘뒷목초’라 부른다.

 

계풍에도 각종 금문을 장식하고, 중심부에 풍혈 또는 안상을 구획해,

 

그 안에 용, 봉황, 학, 신수, 화조, 산수, 사군자, 비천, 인물 등의 별화를 장식한다.

 

또한 문양 전체의 황색 줄을 금박으로 도금해 찬란한 광채의 효과를 극대화 시킨다.

 

포벽에는 각종 부처상을 묘사하는데, 이를 ‘불벽화’라 하며, 화려한 보상화문을 도채하기도 한다.

 

이러한 장엄 양식은 대웅전, 대웅보전, 극락전, 비로전 등 부처님을 모신 사찰의 중심 법당에 적용된다.

 

이미지 : http://www.gangsun.net/htm/product.asp?photogroup=금단청

 

(2) 얼금단청

 

얼금단청의 조형 약식은 최고 등급인 금단청과 모로단청의 절충형이다.


머리초는 모로단청보다 다소 복잡하게 도안해 금단청과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출초한다.

 

휘 장식은 대개 인휘로 구성하는데 , 그 수는 3~5개가 보통이다.

 

중간 계풍에는 출초 없이 즉석으로 간단한 당초문을 그리거나 단색 계열2빛의 금문을 넣기도 한다.

 

포벽에도 출초하지 않고 간단한 당초문을 장식한다.


이러한 단청 양식은 원래부터 확실한 조형 등급으로 분류되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이 양식이 출현하게 된 동기 중 하나는 값비싼 단청 시공비를 절감하려는 의도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부처님을 모시는 사찰의 주요 불전에는 그 성격에 맞게 당연히 최고 등급인 금단청 양식이 장엄되어야 한다.

 

그러나 시공비가 부족해 도저히 금단청을 장엄하지 못할 경우에는 왕왕 이러한 절충 양식이 시행된다.

 

또한 모로단청이 제격이라 할 수 있는 종각, 조사전, 삼성각, 장경각 등에도

 

 좀 더 품격 높은 장엄 효과를 가져오기 위해 얼금 양식을 시공하는 경우가 있다.

 

이미지 : http://www.gangsun.net/htm/product.asp?photogroup=얼금단청

 

(3) 모로단청

 

'머리단청’또는 ‘모로단청’이라고 하는데,

 

이는 목부재의 끝 부분에만 머리초 문양을 장식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즉 ‘모로’란 ‘머리’의 발음이 변이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휘 장식을 포함해 머리초 문양의 적용 범위는 목부재 길이의 약 1/3 정도로 잡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부재가 대량처럼 아주 길거나 짧을 경우에는 적용 범위도 달라진다.

 

부연과 서까래 등에는 처마 끝 부분에만 머리초를 장식한다.

 

창방, 평방, 도리, 대량 등에는 양단에 각각 머리초를 장식하며,

 

중간(계풍)은 뇌록 바탕에 선긋기로 마무리 한다.

 

머리초 문양은 다소 간략하게 도안하고, 휘 장식 역시 2~4개 정도의 간단한 늘휘나 인휘로 구성한다.

 

직휘는 복잡하지 않은 먹직휘나 색직휘 등을 사용하고, 색상의 명도 대비 2빛으로 도채한다.

 

이 양식은 전체적으로 복잡하거나 화려하지 않고 단아한 느낌을 자아낸다.

 

주로 사찰의 누각, 궁궐의 부속 건물, 향교, 서원, 사당, 정자 등에 적용된다

 

이미지 : http://www.gangsun.net/htm/product.asp?photogroup=모로단청

 

 4) 기와 : 개와()라고도 한다.

 

(1) 기와의 역사

 

낙랑시대()에 건물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때에는 평기와[] 처마에 아직 와당()이 발달되지 못하였으나,

 

중국 육조시대()에는 연화()무늬의 원와당이 발달하였다.

 

삼국시대인 고구려·백제·고신라의 기와는 주로 육조시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고구려는 전통성을 살려 소용돌이꼴 무늬에 특색이 있는 다양성을 보였으나

 

백제에서는 간소한 연화무늬로 남조()의 강한 영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고구려·백제의 유적에서 평기와의 처마끝에 지압()무늬(손 끝으로 누른 무늬)가 발견된 것은

 

처마평기와[]가 와당으로서의 원초적 형태를 반영한 것이다.

 

(2) 기와의 형태

 

기와의 형태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암키와(평기와)와 수키와(둥근기와)인데,

 

이 기와를 합쳐서 하나로 만든 것도 있다.

 

일반적으로 지붕은 산자 위에 진흙을 이겨 얇게 편 다음,

 

위·아래로 암키와를 걸치고 좌우의 이음매에 수키와를 덮는다.

 

그리고 처마 위에 비아무림으로 막새를 붙이는데 암키와 끝의 것을 암막새, 수키와 끝의 것을 수막새라고 한다.

 

지붕마루는 기왓골에 맞추어 수키와를 옆으로 세워 막고, 그 위에 수키와를 한 줄로 세워 댄다.

 

전자를 착고(), 후자를 부고()라 하며, 그 위에 마루장을 3∼7겹 덮고 최상부에 수마루장을 덮는다.

 

마루의 양 끝에는 용머리 기와를 세워 장식을 겸한다.

 

근래에 많이 쓰이는 기와는 일본 에도[]시대 평기와와 둥근기와를 하나로 합한 것인데,

 

중량이 가볍고 이기에도 간편하다.

 

(3) 기와의 재료

 

기와의 재료에 따라 찰흙을 반죽하여 구워 만든 토기와,

 

시멘트와 모래를 섞어 만든 시멘트기와,

 

금속판으로 가공 성형한 금속기와도 있다.

 

토기와에는 무유와()와 시유와()가 있는데,

 

무유와 중에서 저온으로 구운 것을 적와()라 하고,

 

완전히 구워지기 전에 솔잎연기로 구운 것을 훈와()라고 하며, 빛은 흑회색이다.

 

시유와는 고온에서 완전히 구워지기 전에 식염을 뿌려 빨갛게 구운 것으로, 흡수율()이 적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29351&dir_id=05020104

 

2. 연적에서 찾을수 있는 색깔과 무늬의 아름다움(이미지도 함께)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112778

 

수적() ·수주()라고도 한다.

그 형태는 다양하다.

 

물이 나오는 부위와 물과 공기가 들어가는 구멍을 두어 쉽게 물을 넣어서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좋은 벼루 머리에 운치 있는 연적을 두어 선비의 고상한 한묵정취()를 돋구었다.

 

중국에서는 자기와 주석 등으로 만들었고 사치가 극에 달하였다.

 

한국에는 고려 때 오리 모양의 청자연적이 남아 있으며 국보 제7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백자로 연적을 만들었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112778&dir_id=09040405

 

3. 도자기와 한옥의 지붕에 대해서(이미지도 함께)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48326

 

일반적으로 도기·자기라고도 한다.

 

도자기에 사용되는 원료는 점토·장석·규석·도석 등의 무기물질이 있으며,

 

이것을 단독 또는 혼합하여 성형한 다음 열을 가하여 경화()시킨 제품을 말한다.

 

도자기에는 자기·석기·도기·토기 등이 있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48326&dir_id=09040405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740893

 

서양식 주택, 즉 양옥에 대비한 말이다.

 

한옥의 가장 큰 특징은 난방을 위한 온돌과 냉방을 위한 마루가 균형있게 결합된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이다.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공존하는 한반도의 더위와 추위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한국의 독특한 주거 형식이다.

한옥의 형태는 지방에 따라 구조가 다르다.

 

북부 지방에서는 외부의 냉기를 막고, 내부의 열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구조로,

 

방을 두 줄로 배열하는 형태의 겹집 구조와 낮은 지붕의 한옥이 발달했다.

 

이에 비하여 남부 지방에서는 바람이 잘 통하도록 방을 한 줄로 배열하는 홑집 구조와 마루 구조가 발달했다.

또한, 한옥은 상류주택과 민가에 따라서도 구조를 달리한다.

 

대가족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상류 계층의 주택은

 

신분과 남녀, 장유()를 구별한 공간 배치구조를 하였다.

 

즉, 집채를 달리하거나 작은 담장을 세워 주거 공간을 상·중·하로 구획했다.

 

상()의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는 양반들이 사용했고,

 

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행랑채는 하()의 공간으로 머슴들이 기거하는 곳이었으며,

 

중문간 행랑채는 중간 계층인 청지기가 거처하는 중()의 공간이었다.

상류주택은 장식적인 면에도 치중하여 주택의 기능면에서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가치에서도

 

뛰어난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은 집을 지을 때도 구조에서부터 재료에 이르기까지 장식적인 면보다는

 

기능적인 면을 더 중시했다. 재료로는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돌과 나무들을 사용했는데,

 

기둥과 서까래·문·대청바닥 등은 나무를 썼고, 벽은 짚과 흙을 섞은 흙벽으로 만들었으며,

 

창에는 역시 천연 나무로 만든 한지를 발랐다. 바닥에는 한지를 깐 뒤 콩기름 등을 발라 윤기를 냈고,

 

방수의 역할도 하게 하였다.

지붕으로는 기와지붕과 초가지붕이 가장 보편적이다.

 

부유한 집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올렸고, 서민들이 거주하는 민가에서는

 

대부분 볏짚으로 이은 초가지붕을 얹었다. 초가지붕은 겨울에는 열을 빼앗기지 않고

 

여름에는 강렬한 태양열을 차단해 주며, 구하기 쉽고 비도 잘 스며들지 않아

 

지붕의 재료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740893&dir_id=04030304

 

 

4. 한복에 대해서(이미지도 함께)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186379

 

당()·원()·명대()의 관복제도를 받아들여 한국 고유의 복식과 조화시키면서 발전시킨 것으로,

 

조선옷이라고도 한다. 직선과 약간의 곡선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우며,

 

특히 여자 옷은 짧은 저고리와 넉넉한 치마가 어울려 옷차림이 단정하고 아담하다.

 

예복과 평상복이 나뉘어 있으며 남녀별 성인과 어린이용, 계절별로 나뉜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186379&dir_id=04030104

 

 

5. 화로,떡살,문갑,연적,지게,책갑,,등잔,청동거울을 어디에 사용하던 것들인가? 어떤점이 아름다운가?

어떤 점이 과학적이고 편리한가?에 대해서 알려주세요.(이미지도 함께)

 

 

 

1) 화로 : 출처 :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42965900

 

숯불담아 놓는 그릇. 주로 불씨보존하거나 난방위하여 쓴다.

 

우리추운 겨울 밤 화로둘러앉아 군밤구워 먹으면서 할머니옛이야기들었다.

 

명례댁이 화젓가락으로 화로숨은 불을 헤집어 방 안어둠조금 밀치며 넋두리늘어놓았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media_id=48769

 

2) 떡살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53034

 

떡의 문양을 찍는 도구.

떡본 또는 떡손·병형()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떡살은 누르는 면에 음각 혹은 양각의 문양이 있어서

 

절편에 찍으면 문양이 아름답게 남는다.

 

사용하는 방법은 적절한 크기로 잘라낸 떡에 물기를 묻혀서 떡살로 도장을 찍듯이 누르면 된다.

 

이렇게 찍은 떡은 어느 정도 굳으면 그 문양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떡살은 재질에 따라 나무떡살과 자기떡살로 나눌 수 있다.

 

단단한 소나무·참나무·감나무·박달나무 등으로 만드는 나무떡살은

 

1자 정도의 긴 나무에 4∼6개의 각기 다른 무늬를 새긴 것이다.

 

사기·백자·오지 같은 것 등으로 만드는 자기떡살은 대개 보통 5∼11㎝ 정도의 둥근 도장 모양으로,

 

손잡이가 달려 있어서 잡고 꼭 누르게 되어 있다.

 

특히 궁중에서 쓰던 사기떡살은 고급스러운 백자()로 만든 것이 많다.

 

떡살의 문양은 주로 부귀()와 수복()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는 길상()무늬를 비롯하여

 

장수와 해로를 뜻하는 십장생()·봉황·국수무늬, 잉어·벌·나비·새·박쥐 등의 동물무늬와 태극무늬,

 

빗살 등의 기하학적 무늬, 만()자 등의 불교적인 무늬와 꽃· 수레바퀴무늬 등 아주 다양하다.

 

특히 떡살의 문양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어서 좋은 일, 궂은 일, 돌, 회갑 등 용도에 따라 다르게 사용했다.

 

단옷날의 수리치절편에는 수레무늬, 잔치떡에는 꽃무늬, 사돈이나 친지에게 보내는 떡에는 길상무늬를 찍었다.

 

특히 선물용으로 보내는 떡은 그 문양에 따라 보내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떡살의 무늬는 일반적으로 가문에 따라 독특한 문양이 정해져 있었다.

 

그 문양은 좀처럼 바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집안에 빌려 주지도 않았다.

 

부득이하게 떡살의 문양을 바꾸어야 할 때에는 문중의 승낙을 받아야 할 만큼

 

집안의 상징적인 무늬로 통용되었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말이 있듯,

 

우리네는 한번 먹고 나면 없어져 버릴 떡 하나라도 보는 즐거움으로 구미를 돋구었다.

 

생활의 사소한 것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치장하기를 즐기던 우리 문화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떡살은,

 

선조들의 격조 있던 음식문화를 대변하고 있다.

 

 

3) 문갑 :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65407

 

가로로 서랍이 여러 개 달리고 문이 달려 있는 것도 있고

 

탁자형()과 서안형()이 있는가 하면, 민짜로 된 상자형 등 다양하다.

 

죽제() 문갑·송제() 문갑·화류 문갑·먹감나무 문갑·자개 문갑 등

 

책() 문갑()이 일반적으로 많고,

 

특별히 화류(:)로 만들어 산호·비취·밀화 등으로 정교하게 조각한 고급품도 있다.

 

보통 나무결이 좋은 오동나무나 괴목나무 같은 것으로 많이 만들며 흑색 또는 자주색의 옻칠을 하기도 한다.

문갑은 보통 창문 아래쪽에 놓아두며 붓통·지통() 기타 가벼운 도자기·화분 등을

 

올려놓아 멋을 부리기도 한다. 외문갑보다는 쌍문갑을 흔히 쓴다.

 

안방과 사랑방용이 있으며,

 

안방용은 그 구조와 외형이 섬세하고 화사한 것이 많은 반면

 

사랑방용은 검소하고 묵직한 것이 많으며 빛깔 역시 너무 화려한 것은 피한다.

 

장식은 주로 놋쇠나 백동을 이용하였다

 

이미지 ;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image&sm=tab_jum&query=%uBB38%uAC11

 

4) 연적 : 아까 위에 썼었죠

 

5) 지게 :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142224

지게는 양다리방아 ·발무자위 등과 더불어 우리 민족이 발명한 가장 우수한 연장의 하나이다.

 

가지가 조금 위로 벋어난 자연목 2개를 위는 좁고 아래는 벌어지도록 세우고

 

사이사이에 3~4개의 세장을 끼우고 탕개로 죄어서 고정시키고 위 아래로 멜빵을 걸어 어깨에 멘다.

 

그리고 등이 닿는 부분에는 짚으로 두툼하게 짠 등태를 달아놓았으며

 

이것을 세울 때에는 끝이 가위다리처럼 벌어진 작대기를 세장에 걸어둔다.

 

지게의 형태나 크기는 곳에 따라,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고 만드는 방법 또한 다양하다.

 

우선 지게 길이는 이것을 지는 사람의 키에 맞추기 마련인데 평야지대의 지게는 산간지대의 것보다 긴 편이다.

 

이에 비해 산간지대는 길이 좁고 가파르며

 

돌부리나 풀 따위에 걸려서 넘어질 위험이 높기 때문에 짧은 지게를 쓴다.

 

또 전북 서반부 일대의 지게는 동발과 동발 사이가 넓고 지게 자체를 지는 사람쪽으로 구부려 놓는 점에서

 

다른 평야 지대의 지게와 차이를 보인다.

 

지게를 만드는 방법에 따라 분류하면

 

제가지지게 ·

옥지게 ·

쪽지게 ·

바지게 ·

두구멍지게 ·

켠지게 ·

거지게 ·

쇠지게 ·

쟁기지게 ·

모지게 ·

부게 ·

물지게 따위가 있다.

 

주로 소나무로 만드는 제가지지게는 ‘가지가 자연히 벋어나간 나무로 짠 지게’라는 뜻으로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지게는 모두 이에 속한다.

 

옥지게는 참나무로 건 지게로서 가지의 중간 부분이 위쪽으로 구부러졌다.

 

옥지게는 이처럼 ‘가지가 굽은 지게’라는 뜻이다.

 

옥지게는 강원도 산간 지대에서 섶나무나 꼴 따위를 나르는 데 쓴다.

 

물매가 워낙 된 곳에서는 사람이 지게를 지고 걸을 수 없는 까닭에

 

동발을 두 손에 쥐고 끌어내리기 위해 가지를 구부린 것이다.

 

가지는 불에 구워가며 조금씩 구부린다.

 

쪽지게에는 예전의 등짐장수들이 이용한 간단히 만든 지게와

 

몸에 구멍을 뚫고 가지를 끼워넣은 것의 2종류가 있으며

 

뒤의 것은 전북 서반부 일대가 본거지이다.

 

이 일대는 평야 지대로서 지게감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일찍부터 이러한 지게를 만들어 썼다.

 

바지게는 주로 강원 영동지방에서 영서지방으로 태백산맥을 넘어

 

해산물을 팔러 다닌 사람이 쓴 지게로 가지가 달리지 않았으며 짐은 지게에 잡아맨다.

 

이들의 작대기 또한 특이하여 위쪽에는 노치를 짓고 아래에는 쇠못을 박아 놓았다.

 

이 쇠못은 겨울철 미끄럼 방지에 효과적이다.

 

두구멍지게는 가지 구멍이 위 아래 2개 있는 지게로서 짐의 종류에 따라 가지를 맞추어 끼운다.

 

켠지게는 지게감 하나를 톱을 이용해서 켜서 둘로 나눈 지게이다.

 

거지게는 동발 부분이 거의 없는 짧은 지게로서 길마 좌우 양쪽에 걸고

 

무거운 돌이나 긴 나무 따위를 마소의 힘을 빌어 나르는 데 쓴다.

 

쇠지게는 쇠로 만든 지게이고 쟁기지게와 모지게는 쟁기나 모를 나르는 데,

 

부게는 해안에서 거둔 어획물을 나르는 데 쓴다.

 

한국의 지게는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쓰시마[]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 이름 그대로 ‘시케이’ 또는 ‘지케이’라 부른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142224&dir_id=04030405

 

6) 책갑 : 출처 - 국어사전

 

넣어 있게 책의 크기맞추어 만든 작은 상자.

 

이미지 :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image&sm=tab_jum&query=%uCC45%uAC11

 

7) 등잔  :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52219

 

재료에 따라

 

목제 ·

토제 ·

와기 ·

대리석 ·

백자 ·

사기 ·

놋 ·

철제 등잔이 있다.

 

여기에 한지 ·솜 ·노끈 따위로 3발 심지를 만들어 기름을 먹여 불을 켠다.

 

1876년경 일본에서 석유와 함께 심지꽂이가 따로 붙은 등잔이 들어왔다.

 

주로 사기로 된 것이었지만 백자 ·놋쇠 ·백동 ·철 ·대리석 등으로 만든 것도 있었다.

 

불을 밝게 하려면 심지 2개를 사용하는데 이것을 쌍심지라고 한다.

 

보통 등잔걸이 ·제등() ·좌등() 등에 올려놓고 사용하나, 등잔에 등대가 붙은 것도 있다.

 

이동하는 도중 기름이 넘쳐 흐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름받이를 밑에 걸어서 넘치는 기름을 받기도 한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52219&dir_id=04030405

 

8) 청동거울 :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284491

동경()이라고도 한다.

 

유럽계통의 손잡이가 있는 것과

 

중국계통의 손잡이가 없는 것이 있다.

 

중국의 거울은 원형 또는 방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만들어진

 

시대적 특색에 따라

 

춘추식() 거울,

전국식() 거울,

한()나라식 거울,

당()나라식 거울,

송() ·원()나라식 거울 등으로 구분된다.

한나라 이전의 청동거울 중에서 진()나라 때의 동기()와 유사한 무늬가 있는

 

청동거울이 1920~30년대에 주목되어 진나라식 거울 또는 선진()거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국식 거울을 주로 하면서 시대적으로는 춘추시대에서 전한() 초기에까지 미치고 있다.

 

분포지역도 진나라에 한정되지 않고 있어 한나라 이전의 옛 청동거울은 춘추식 ·전국식 거울로 구분한다.

① 춘추식 거울은 중국 청동거울 중에서 가장 오래된 형식으로 휘어짐이 없이 평직()하며, 거울깃도 없고 두꺼우며 작은 형으로 꼭지는 반고리식이다. 시기적으로는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 초기에 만들어져 허난성[] 산현[] 상춘링[]에서 소문경() ·금수문경() 등이 출토되었으며, 동기의 괴이한 짐승무늬를 둥근 거울 모양으로 잘라서 끼운 것도 있다.

② 전국식 거울은 진나라식 거울, 선진 거울, 선한() 거울 등으로 불리었던 것으로 전국시대 중기에서 전한 초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엷은 편이며 휘어짐이 없이 평직하고, 세 개의 활 모양의 꼭지가 달려 있다. 무늬는 지문()과 주문()으로 되어 있는데, 지문에는 우상수문() ·구련뇌문() ·능운문() 등이 있고, 주문으로는 동물무늬 ·식물무늬 ·화판()무늬 등의 기하학 무늬가 많다. 청동의 질이 좋고 일반적으로 칠흑색()이다.

③ 한나라식 거울은 중국 청동거울 중에서 가장 양식이 정비된 것으로 전한()식 거울과 후한()식 거울로 나눈다. 전자에는 이룡문경(螭)과 명대경()이 많고, 후자에는 내행화문경() ·사신경() ·신수경() 등이 발달하였다.

④ 당나라식 거울은 중국의 옛 청동거울 중 만듦새가 가장 뛰어난 것으로, 두꺼운 백동질() 거울로 원형 ·방형 외에 팔화형() 등이 있다. 무늬에도 서방적인 해수포도()무늬를 비롯하여 용()이 서린 무늬, 난새와 봉황새무늬, 꽃가지무늬, 계수나무와 달 ·토끼무늬 등 다양하며 제작기법에서도 은첩() ·도금() ·금은을 바른 것, 나전() ·칠보() 등 뛰어난 공예술을 보여주고 있다.

⑤ 송 ·원나라식 거울은 당나라의 청동거울을 고비로 하여 제작기술이 퇴보하고 있어 동질도 나빠지고 무늬에 있어서도 초화()무늬 외에는 한나라식과 당나라식 거울을 모방한 것이 많다. 요() ·금() ·원() 나라의 청동거울도 조방()한 것이지만 연호가 들어 있는 금나라의 사수포도문경(), 원나라의 쌍룡경() 등의 연호경()도 있다. 한국에서는 중국에서도 출토되지 않은 다뉴세문경()이 있는데, 이것은 둘레가 반원형()으로 끈을 끼워 잡게 된 꼭지가 2개 정도 있다.

경주 입실, 평남 대동군에서 출토된 퉁구스계()의 청동거울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낙랑고분을 중심으로 껴묻거리[]로 출토된 청동거울은 여러 가지 무늬와 명문()이 들어 있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284491&dir_id=10020101

 

6. 조각보,옹기,한지에 대해서 (이미지도 함께)

 

1) 조각보 : 출처 - http://www.gallerykids.com/kidstory/story011.htm

 

옛날의 보자기는 물건을 싸두거나 보관하던 생활필수품이었으며

 

또는 어딘가에 물건을 보낼 때 정성스럽게 싸서 보내던 의례용품이었습니다.

보자기 중에서도 조각보는 옛날 일반서민들이 쓰다남은 조각천을 이어서 촘촘이 바느질하여 만든 것으로

 

조상들의 생활의 지혜를 엿볼 수 있으며 세련된면서도

 

색색이 조화를 이뤄낸 예술적 기량을 동시에 느낄수 있습니다.

 

또한 조각보는 서민들이 한땀한땀 바느질에 공을 들여 제작하면서 복(福 )을 짓는 행위로 생각하기도 했으며

 

이렇게 만들어진 조각보안에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싸두고 보관하거나

 

또는 예의를 갖추어야하는 사람이나 신앙의 대상에게 정성스럽게 보내기도 했답니다.

현대에 이르러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는 조각보의 구성미는

 

서구의 몬드리안이나 클레등의 회화작품들과도 간혹 비교되기도 하는데,

 

이들의 작품들이 색의질서와 조화등을 충분히 고려하여 제작된데 비해

 

백여년 앞서 제작된 우리나라 조각보의 색채구성은 보다 자유롭고 순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조각보는 우리조상들의 실용성과 더불어 뛰어난 배색능력과

 

특별히 맞추어 계산하지 않고도 조각조각 조화를 이뤄낼 줄 아는

 

탁월한 미적감각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 우리규방문화, 현암사/ 한국의 미, 국립중앙박물관)

옷보 19세기, 67x67 cm

팔랑개비가 흔들거리는 듯 율동감이 느껴지는 견사로 만든 이 옷보는 마름질 하고 남은 천 조각들을 하나하나 이음질 해서 만들었다는 것이 한눈에도 금방 알 수 있게 한다. 2개의 삼각형을 이어 사각형의 일정한 구성을 유지하면서도 그 크기에 있어서는 하나도 같은 게 없을 만큼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옷보 19세기

은은한 무늬가 깔린 연한 파스텔톤의 견사를 장방형의 크고 작은 조각들로 이어붙여 완벽한 현대적 조형성을 추구하였다. 특히 빨강, 파랑, 초록 등의 강한 원색을 조화롭게 구성한 대담함과 함께, 가운데 손잡이를 비롯, 직사각형의 끝면이 만나는 네 귀퉁이 마다 포인트를 장식한 작은 매듭들의 앙증스런 모습이 옛 여인들의 놀라운 조형성과 미학적 감각을 짐작케 한다

상보 19세기, 52x52 cm

속이 비칠 듯한 얇은 견사로 만든 이 상보는 흰색을 바탕으로 청.홍 대비의 직선을 사각으로 돌렸으며, 그 안에는 연두색 등 엷은 동색 계통의 대칭으로 조화를 이루었다. 특히 가운데 포인트가 되는 강렬한 빨강색의 한 줄이 시선을 끈다.

예물보 19세기, 62x62 cm

전체적으로 회색톤의, 마치 스님의 옷을 연상시키는 이 모시 옷보는 엷고 짙은 회색의 조각들을 세로와 가로로 서로 엇갈려 모던한 분위기로 구성하였으며, 가운데를 중심으로 누런색의 조각을 집중 연결함으로써 지루함과 단순함을 피하였다. 특히 조각이 연결되는 선들을 일정한 굵기의 흰 테두리를 설정하여, 면분할의 선명함을 돋보여주었다.

 

2) 옹기 : 출처 - http://pottery97.com.ne.kr/

 

(1) 옹기란?

 

자연적 소박함이 묻어있는 옹기는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총칭하는 말로써

 

'瓮' 또는 '饔'이라고 쓰며, 외국어 표기는 'onggi'로 하고 있다.


질그릇은 진흙으로만 만들어 구워 잿물을 입히지 않은 그릇이며,

 

오지그릇은 질그릇에 잿물을 입혀 다시 구운 윤이 나고 단단한 그릇이다.


질그릇은 유약을 입히지 않아 기공이 메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공기의 유통이 좋아 곡식을 담아 두어도 벌레가 생기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질그릇은 저장 용기로 발달되었다.


반면, 오지그릇은 질그릇과는 달리 유약을 입혀 다시 구워내어 내화력이 강하고 흡수성이 적기 때문에

 

취사용구, 운반용구, 수납용구로 이용되었다.


옹기는 다른 용기와 비교해서 내용물이 쉽게 변색되지 않고 인체에 무해하며,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커다란 우수성을 갖고있다.

 

(2) 옹기의 역사

 

우리나라의 토기는 신석기 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기원 전 4000년 내지 5000년 전에 만들어낸 빗살무늬 토기가 있으며

 

이후 점차 발달하여 더 단단한 무문토기와 홍도, 흑도, 채도로 발달하였다.

 

이중에서 흑도는 중국 회도의 영향으로 크게 발전하게 되면서

 

내화도가 높은 흙을 찾아내어 물레로 제작하여 섭씨10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릇을 와질 토기라 한다.

와질토기는 서기 전 1세기로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4세기에는 경도가 매우 높은 토기로 발전했는데 이를 석기라 한다.

 

석기는 5,6세기경 신라와 가야에서 가장 우수한 것을 만들었으며 섭씨 1200도의 높은 온도로 환원소성한 것이다.

또한 삼국시대이후 환원소성한 토기가 주류를 이루지만 산화소성도 연면히 이어졌으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적색토기가 만들어졌고 고려시대에는 조금 더 단단해진 적색토기가 만들어졌고

 

고려시대에는 조금 더 단단해지니 적색토기가 만들어졌으며 조선시대에는 오지그릇이 만들어졌다.

결국 옹기는 흑도로부터 연원을 찾아 흑도가 고화도로 구운 치밀의 토기로 발전하고

 

치밀의 토기 중 한 갈래는 청자와 백자로 이어지며 또 한 갈래는 옹기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3) 용기의 특이성

 

- 자연환원성 : 그릇 중에서 천연에 가장 가까운 용기인 옹기는 인체에 무해, 무독하며 조심스럽게 사용하면 수십년 내지 수천년동안 활용가치를 지니고 있는 그릇이다. 그러나 유약이 시유된 상태에서 온전한 그릇으로 있을 때는 별문제 없으나 금이 가거나 파손, 파괴되었을 경우는 자연으로의 토화현상(土化現像)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며, 습기있는 땅속에 묻히거나 노출상태에서는 풍화작용에 의해 본래의 모습을 잃고 원래의 자연상태인 흙으로 돌아간다. 전국 각지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양의 옹기를 굽고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파편들이 묻혀있거나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이유가 바로 자연환원성(自然還元性)인 토화현상을 말해 주는 것이다.
재료인 태토는 산지에서 직접 채취하여 사용하므로 파손된 조각들은 근본적으로 같은 재질인 현지의 자연 흙과 동화, 환원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유약의 재료로 쓰이는 약토와 재는 더욱 토화현상을 가속화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 통기성 : 옛날부터 옹기를 이야기 할때 흔히 "숨을 쉰다"고 하였다. 언제부터인지 확실치 않지만 약토와 재를 섞어 유약을 만들어 입혀 구우면 표면이 매끄러우면서도 물이 새는것을 막아 준다. 옹기의 기본재료가 되는 태토에는 근본적으로 작은 모래 알갱이가 수없이 함유되어 있고 유약 또한 부엽토의 일종인 약토와 재로써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산화번조 제작기법을 감안한다면 소성시 점토질과 모래 알갱이가 고열에 의해 이완되어서 그릇전체의 표면에 미세한 숨구멍이 생긴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문양을 넣는 과정에서 이미 시유된 잿물을 손가락이나 나무조각으로 긁어 내어 미적표현은 물론 숨구멍을 트여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발효식품을 중심으로 음식문화가 전개된 우리의 생활양식은 집집마다 장독대를 갖추고 살고 있다. 장독대는 주로 간장, 된장, 고추장, 젓갈 등 우리가 부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여러가지 식품들을 저장, 보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 방부성 : 진흙은 불을 먹으면 굳어지고 그 중에서도 구울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경화성과 내화성이 있다. 찰흙으로 만들어진 날그릇을 가마굴에 넣고 1200℃ 이상의 고열을 가하게 되면 다량의 탄소 알갱이들이 그릇 기벽에 부착되어 미세한 숨구멍을 만든다. 이 숨구멍에 의해 음식물은 서서히 변화되며 음식물에 물리적인 부작용을 끼치지 않는다. 연료로 사용되는 나무가 가마속에서 연소될 때 생기는 탄소와 연기는 이미 그 안에 들어 있는 옹기들을 휘감아 싸고 감돌아서 검댕이가 입혀지는데 이것은 곧 옹기그릇 자체에 방부성 물질로 옷이 입혀졌음을 뜻한다. 또한 옹기의 내외벽에 시유되는 잿물은 식물성 재를 사용하는데 잿물속의 재의 기능도 동일한 작용을 한다고 보았을 때 그 방부 효과는 더욱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음식물의 장기 저장을 위한 필요성도 있으나 다음해 농사를 짓기 위한 종자 보관을 위해서도 옹기는 가장 적합한 용기로 절대적 가치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견고성 : 사람의 지혜와 생활이 발전함에 따라 빗살무늬토기에서 민무늬토기로 이어지면서 오늘날 옹기의 근원이 되는 실용적인 자연유약을 시유한 견고한 도기가 출현한다. 내화성이 있는 찰흙으로 만든 그릇을 고온에서 굽게 되면 쇠소리가 날 정도로 단단해진다. 이러한 견고한 도기는 이미 초기 철기시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어지고 자기에 비유할 바는 못되나 생활도구로써 사용하는데는 아무런 불편과 지장이 없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용기들은 그 나름대로의 내구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그 특성과 기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옹기는 놓는 장소와 사용 용도에 따라 외부의 물리적인 작용에 급변하지 않고 자연현상에도 강한 이점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강한 햇빛과 비바람에 노출된 장독대나 발효식품을 저장용기로 장시간 사용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다.

 

- 경제성 : 옹기의 가마는 뺄불통, 조대불통, 설창, 칸(뫼통)등 여러 종류가 있으나 이들 모두 어떻게 하면 적은 연료로써 많은 양의 옹기를 구워낼수 있을까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경제용어로써 수확체멸(收穫體滅)의 법칙이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자기를 구울 때는 생각도 해 볼 수 없는 일들이 옹기의 경우에는 빈번히 일어나는데 잿물을 바른 기물과 기물사이를 거의 맞닿을 정도로 재운다던가 하나의 항아리 속에 여러 개의 작은 항 아리를 넣는 것이 그러하다. 가마를 신축할 때에도 주위의 땔감나무 분포도를 확인하고 태 토의 질과 양을 알아 본 다음 차기 가마 이동계획을 수립함으로써 제작비 절감효과를 유도 한다. 그리고 기물을 재운다던가 불을 지피는 사람을 불대장이라 부르는데 불 대장은 축적 된 오랫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재우는 기물의 수와 양을 조절하고 불의 강도를 조절하면서 제작비 절감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다. 뿐만 아니라 태토, 유약 등은 자연으로부터 저렴한 노동에 의해서 얻어지고, 땔감나무 또한 비교적 싼값으로 잡목, 폐목, 나무뿌리, 솔잎 등을 손쉽게 구하여 사용할 수 있어서 옹기 제작의 원가 절감에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 조형미 : 우리의 식생활에서 저장용기로서의 기능은 물론이고 주생활에도 그 활용의 범위가 매우 컷던 도자기가 바로 옹기인데, 옹기는 평범한 주위환경과 잘 어울려 황토색 흙담장 같은 친근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형태가 보여주고 있는 자연스러운 곡선은 가장 인간적인 조형미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옹기는 귀족적인 화려함보다는 서민적인 상징성을 담고 있다. 억지로 멋을 부리거나 조작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필요성에서 나오게 된것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자연스러움은 옹기에 풍요로움과 후덕한 느낌을 주며, 둔탁한 기형은 순박하고 꾸미지 않는 순수한 미를 느끼게 한다. 이처럼 있는듯 없는듯 하면서도 그 할 일을 다하여 온 옹기야말로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고루 겸비한 가장 한국적인 미의식을 담고 있는 도기라 할 수 있다.

 

이미지 :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image&sm=tab_jum&query=%uC639%uAE30


 

3) 한지 :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186751

 

보통 조선종이라고도 한다.

 

닥나무[]나 삼지닥나무[] 껍질을 원료로 하여 뜬다.

 

이들 나무를 다발로 묶어 물을 부은 가마솥에 세우고 가마니로

 

둘러싼 뒤 불을 때어 껍질이 흐물흐물 벗겨질 정도로 삶은 다음 껍질을 벗겨 말린다.

 

말린 껍질을 다시 물에 불려 발로 밟은 다음 하얀 내피() 부분만 가려내고,

 

이것에 양잿물을 섞어 3시간 이상 삶아 압축기로 물을 짜낸다.

 

여기에 닥풀뿌리를 으깨어 짜낸 끈적끈적한 물을 넣고 잘 혼합하여 고루 풀리게 한 다음,

 

발[]로 종이물[]을 걸러서 뜬다. 한지 치수는 수요자의 주문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으나

 

0.6×2.4m의 것이 주종을 이룬다.

 

주산지()는 전라남도 장성군 일대이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은 한말 지소()를 두었던 장성읍 상오() 마을이다.

 

한지는 용도에 따라 그 질과 호칭이 다르다.

 

예를 들면, 문에 바르면 창호지, 족보·불경·고서의 영인()에 쓰이면 복사지, 사군자나 화조()를 치면

 

화선지(), 연하장·청첩장 등으로 쓰이는 솜털이 일고 이끼가 박힌 것은 태지()라고 한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186751&dir_id=13010201

 

 

7. 팔만대장경판, 성덕 대왕 신종, 금속활자, 앙부일구, 석빙고, 자격루, 첨성대, 측우구에 대하여(이미지도 함께)

 

1) 팔만대장경판 : 출처 - 문화재청

 

종    목 국보  제32호
명     칭 해인사대장경판(海印寺大藏經板)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목판각류/ 판목류
수량/면적 81,258매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0 해인사
시     대 고려시대
소 유 자 해인사
관 리 자 해인사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해인사대장경판의판고


해인사대장경판


해인사대장경판


해인사대장경판


해인사대장경판


해인사대장경판


해인사대장경판

 

2) 성덕대왕신종 : 출처 - 문화재청

 

종    목 국보  제29호
명     칭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분     류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수량/면적 1구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소 유 자 국립경주박물관
관 리 자 국립경주박물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실측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는 문화재로 앞으로도 잘 보존해야 할 것이다.

 


성덕대왕신종


천인상

종신구선대(鐘身口線帶)


용뉴(龍紐)와음통(音筒)

 

 

3) 금속활자 : 출처 - http://100.naver.com/100.nhn?docid=27605

 

주자()라고도 한다.

 

고려·조선 시대의 금속활자는 구리·철·납 등 여러 가지 금속이 사용되었으나,

 

현대의 금속활자는 납을 주로 하는 합금()이다.

 

형태는 사각 기둥으로 자면()에 글자가 뒤집어져서 튀어나게 새겨져 있다.

이 활자 몸체의 길이는 나라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한국은 2.3875cm, 미국은 2.489cm, 독일은 2.357cm , 러시아는 2.514cm로 되어 있다.

 

크기(호·포인트)에 따라 가로·세로의 치수도 다르다

 

이미지 :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_list&docid=27605&dir_id=0311040205

 

4) 앙부일구 : 출처 - 문화재청

 

종    목 보물  제845호
명     칭 앙부일구(仰釜日晷)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계측교역기술용구/ 도량형
수량/면적 2기
지 정 일 1985.08.09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57 국립고궁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국립고궁박물관

 

앙부일구는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만들었던 해시계로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이 솥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둥근 지구 모양을 표현한 것이고 작은 크기로도 시각선, 계절선을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큰 것은 시계의 지름이 35.2㎝, 높이가 14㎝이고,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이며, 작은 것은 시계의 지름이 24.3㎝이며 18세기 전반에 제작되었다. 오목한 시계판에 세로선 7줄과 가로선 13줄을 그었는데 세로선은 시각선이고 가로선은 계절선이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그림자가 시각선에 비추어 시간을 알 수 있다. 또 절기마다 태양에 고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계절선에 나타나는 그림자 길이가 다른 것을 보고 24절기를 알 수 있다. 특히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12지신 그림으로 그려서 시간을 알게 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하다. 또한 이것은 대궐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종로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동시계였다는 점에도 의의가 크다.

덕수궁 궁중 유물 전시관에 전시된 2개의 해시계는 작고 오목한 가마솥 모양에 네발이 있는 우아한 모습을 가진 것으로 작풍과 제작기법이 같다. 청동으로 몸통을 만든 뒤, 검은 칠을 하고 글자와 선을 은상감으로 새겨 예술품으로도 손색이 없으며 정확한 수평을 잡기 위한 십자형의 다리가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해시계이며, 과학 문화재로서도 가치가 큰 유물이다.


앙부일구


앙부일구


앙부일구


앙부일구

 


앙부일구

 

 

5) 석빙고 : 출처 - 문화재청

 

(1) 현풍 석빙고

 

종    목 보물  제673호
명     칭 현풍석빙고(玄風石氷庫)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80.09.16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현풍면 상리 638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달성군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으며, 출입구가 개울을 등진 능선쪽에 마련된 남향구조이다. 돌의 재질은 모두 화강암으로 외부에서 보면 고분처럼 보인다. 입구는 길쭉한 돌을 다듬어 사각의 문틀을 만든 후 외부공기를 막기 위해 돌로 뒷벽을 채웠다. 외부는 돌을 쌓고 점토로 다져서 흙을 쌓아 올렸다. 잘 다듬어진 돌로 벽과 천장을 쌓았는데 천장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4개 틀어올리고 그 사이사이에 길고 큰 돌을 얹어 아치형을 이루게 하였다. 천장에는 통풍을 위한 환기구가 두 군데 설치되었고 빗물에 대비한 뚜껑이 있다. 바닥은 평평한 돌을 깔고 중앙에 배수구를 두었다.

당시에는 얼음창고가 마을마다 설치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가 작은 현풍고을에 이러한 석빙고가 만들어진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82년 석빙고 주위의 보수작업 때 축조년대를 알려주는 건성비(建城碑)가 발견됨으로써 조선 영조 6년(1730)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현풍석빙고


현풍석빙고


환기구

 

(2) 청도석빙고

 

종    목 보물  제323호
명     칭 청도석빙고(淸道石氷庫)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청도군  화양면 동천리 285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청도군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땅을 파고 만들어둔 창고이다.

양쪽 벽을 이어주던 반원아치 형태의 홍예(虹霓)가 4군데 남아있을 뿐 천장은 완전히 무너져 불완전한 상태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우리나라 석빙고 가운데 경주석빙고(보물 제66호) 다음으로 큰 규모이고 쌓은 연대도 오래된 것이다.

동·서로 뻗은 긴 구조로, 서쪽에 문을 두었으며 계단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경사진 바닥이 보인다. 가운데에는 물이 빠지는 길을 두고 동쪽에 구멍을 만들어, 석빙고 밖의 작은 개울로 물이 빠지도록 하였다. 환기 구멍을 뚫어 놓았던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재는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다.

석빙고의 입구 왼쪽에는 석비(石碑)가 서 있는데, 앞면에는 공사에 동원된 인원수·쓰인 자료·비용 등을 기록해 놓았고, 뒷면에는 비를 세운 날짜와 함께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그 중에 ‘계사(癸巳)년’이라는 기록이 있어 조선 숙종 39년(1713)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청도석빙고


청도석빙고


청도석빙고


청도석빙고


청도석빙고

 

 

(3) 경주석빙고

 

종    목 보물  제66호
명     칭 경주석빙고(慶州石氷庫)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449-1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경주시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이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 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조선 영조 14년(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주석빙고


입구


명문


환기구

 

(4) 창녕석빙고

 

종    목 보물  제310호
명     칭 창녕석빙고(昌寧石氷庫)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88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창녕군

 

창녕군 교육청 앞의 개울 건너편에 언덕처럼 보이는 것이 이 석빙고이다.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해 두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로, 주로 강이나 개울 주변에 만들어진다.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과 직각이 되도록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으며, 입구를 남쪽으로 내어 얼음을 쉽게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입구 안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밑바닥은 경사졌고 북쪽 구석에는 물이 빠지도록 배수구멍을 두었으며, 바닥은 네모나고 평평하다. 내부는 잘 다듬어진 돌을 쌓아 양옆에서 틀어올린 4개의 무지개모양 띠를 중간중간에 두었다. 각 띠사이는 긴 돌을 가로로 걸쳐놓아 천장을 마무리하였다. 또한 천장의 곳곳에는 환기구멍을 두어 바깥공기를 드나들게 하였다.

이 석빙고는 입구에 서 있는 비석의 기록을 통해 조선 영조 18년(1742) 당시 이곳의 현감이었던 신후서(申侯曙)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알수 있다. 각 부 양식 또한 조선 후기의 모습이 잘 담겨져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창녕석빙고


석빙고 내부


창녕석빙고

 

(5) 영산석빙고

 

종    목 사적  제169호
명     칭 영산석빙고(靈山石氷庫)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3,769㎡
지 정 일 1969.02.28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영산면 교리 산10-2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창녕군

 

화강석으로 쌓은 조선 중기의 얼음창고이다.

정확한 축조시기는 알 수 없으나 『여지도서』와 조선 후기의 읍지에 따르면 현감 윤치일이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들어가는 입구가 높고 뒤로 갈수록 낮은, 전체적으로 둥근 모양으로 되어 있다. 내부는 거칠게 다듬은 큰 돌로 쌓은 네모진 형태이다.

창고가 있는 곳에서 바라다보면 빙고 뒤쪽 끝으로 개울이 있는데 지금은 개울에 물이 말랐지만, 이는 상류에 제방을 쌓았기 때문이며 옛날에는 수량이 풍부했다고 한다.

다른 석빙고에 비해 약간 작은 규모이나, 쌓은 수법은 같다.


영산석빙고


영산석빙고전경


석빙고천정


석빙고내부

 

(6) 안동석빙고

 

종    목 보물  제305호
명     칭 안동석빙고(安東石氷庫)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성곡동 산225-1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안동시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이다. 특히 이 석빙고는 낙동강에서 많이 잡히는 은어를 국왕에게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 영조 13년(1737)에 지어졌다. 형태는 동·서로 흐르는 낙동강 기슭의 넓은 땅에 강줄기를 향하여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으며, 입구는 특이하게 북쪽에 옆으로 내었다.

안으로 계단을 따라 들어가면 밑바닥은 경사져 있으며, 중앙에는 물이 강으로 흘러가도록 만든 배수로가 있다. 천장은 길고 크게 다듬은 돌들을 무지개모양으로 틀어올린 4개의 홍예(虹霓)를 세워 무게를 지탱하도록 하고, 각 홍예 사이는 긴 돌들을 가로로 채워 마무리하였다. 천장의 곳곳에는 환기구멍을 두었는데, 이는 안의 기온을 조절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바깥까지 연결하였다.

전체적으로 규모는 큰 편은 아니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특히 석빙고는 그 위치가 매우 중요한데,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여 지금은 본래의 위치보다 높은 곳으로 옮겨왔다. 이전에는 바로 옆에 강이 흘러서 얼음을 운반하기가 아주 쉬웠을 것으로 보인다.


석빙고 내부


입구

 

(7) 철원 얼음창고

 

종     목 등록문화재 제24호
명     칭 철원 얼음창고
등 록 일 2002.05.31
소 재 지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외촌리 603-1
소 유 자 재정경제부
관 리 자 철원군수
설     명 네모난 콘크리트 박스형태(12m×10m)를 하고 있으며 얼음을 보관하였던 당시의 벽체(두께 15㎝)구조를 볼 수 있음. 실례가 많이 남아 있지 않는 것으로서 당시 얼음의 필요성과 상업의 번창함을 알 수 있으며, 고대의 석빙고, 근대의 얼음창고, 현재의 냉동고에 이르기까지의 변화상을 알 수 있음.

 

 

 

6) 자격루 : 출처 - 문화재청

 

종    목 국보  제229호
명     칭 보루각자격루(報漏閣自擊漏)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천문지리기구/ 천문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85.08.09
소 재 지 서울 중구  정동 5-1 궁중유물전시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궁중유물전시관
관 리 자 문화재청

 

물시계는 물의 증가량 또는 감소량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장치로서,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표준 시계로 사용하였다. 조선 세종 16년(1434) 장영실에 의해 정해진 시간에 종과 징·북이 저절로 울리도록 한 물시계가 처음 제작되었으나, 오래 사용되지는 못하였고, 중종 31년(1536)에 다시 제작한 자격루의 일부가 현재 남아 있다.

물시계의 원리를 보면, 맨 위에 있는 큰 물그릇에 넉넉히 물을 부어주면 그 물이 아래의 작은 그릇을 거쳐, 제일 아래쪽 길고 높은 물받이 통에 흘러든다.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점점 올라가 미리 정해진 눈금에 닿으며, 그곳에 장치해 놓은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의 쇠 구슬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준다. 이 쇠구슬은 다른 쇠구슬을 굴려주고 그것들이 차례로 미리 꾸며놓은 여러 공이를 건드려 종과 징·북을 울리기도 하고, 또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 나타나 시각을 알려주는 팻말을 들어 보이기도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물시계는 쇠구슬이 굴러 조화를 이루던 부분이 없어진 채, 물통 부분들만 남아 있다.

청동으로 된 큰 물그릇은 지름 93.5㎝, 높이 70.0㎝이며, 작은 물그릇은 지름 46.0㎝, 높이 40.5㎝이다. 작은 물그릇이 놓였던 돌 받침대는 지금 창경궁 명정전 뒤에 2개가 남아 있다.

현재 중국 광동에 남아 있는 명나라의 물시계보다 조금 늦게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규모가 크고 만듦새가 훌륭하여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보루각자격루


문파수호와수파수호


수수통부분문양

 

 

7) 첨성대 : 출처 - 문화재청

 

종    목 국보  제31호
명     칭 경주첨성대(慶州瞻星臺)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천문지리기구/ 천문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시     대 신라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경주시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이다. 내물왕릉과 가깝게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는 9.17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나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경주첨성대

 

 

8) 측우기 : 출처 - 문화재청

 

(1) 창덕궁 측우기

 

종    목 보물  제844호
명     칭 창덕궁측우대(昌德宮測雨臺)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계측교역기술용구/ 도량형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85.08.09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57 국립고궁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시대에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를 올려 놓았던 대석(臺石)이다. 높이 30.3㎝, 가로 45.3, 세로 45.5㎝의 대리석으로 만든 이 측우대는 정조 6년(1782) 6월부터 7월 사이에 계속되는 가뭄에 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뜻을 하늘에 알리고 비를 기다리는 의식적인 의의를 담고 있다. 측우기는 한국전쟁 때 없어지고 현재 측우대만 덕수궁 궁중 유물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대석의 4면에 새겨진 글에는 측우기의 제작 경위와 그 뜻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하고 있어 조선 기상학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측우기와 측우대는 영조 때 전국적인 정비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중앙이나 지방에서 제작되었다. 남아 있는 유물은 1782년에 제작한 측우대와 1811년의 측우대, 그리고 1837년의 측우기가 있다.


창덕궁측우대


명문

 

(2) 관상감 측우기

 

종    목 보물  제843호
명     칭 관상감측우대(觀象監測雨臺)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계측교역기술용구/ 도량형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85.08.09
소 재 지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460-18 기상청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기상청

 

조선시대 측우기를 올려 놓고 강우량을 측정하던 것으로 지금은 대석(臺石)만 남아 있다.

측우기는 세종 23년(1441) 세계 최초로 발명되어 이듬해 전국적으로 강우량 측정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그 전에 땅 속에 스며든 비의 양은 잴 수 없던 비합리적 방법에서 벗어난 15세기의 획기적 발명품이었다. 철로 만든 원통형 의 측우기는 돌 위에 올려 놓고 사용했는데 높이 87.6㎝, 세로 59.7㎝, 가로 94.5㎝의 직육면체의 화강암으로, 가운데에 직경 16.5㎝, 깊이 4.7㎝로 구멍을 뚫어 세웠다.

비록 측우기는 전쟁 등으로 유실되어 사라졌지만 이 대석은 측우기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세종 때의 것으로 서울 매동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것을 지금은 국립 중앙기상대(현재 기상청)에 옮겨 놓았다.


관상감측우대


관상감측우대

 

(3) 금영측우기

 

종    목 보물  제561호
명     칭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
분     류 유물 / 과학기술/ 천문지리기구/ 천문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71.12.21
소 재 지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460-18 기상청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기상청
관 리 자 기상청

 

빗물을 그릇에 받아 강우량을 재는 측우기는 조선 세종 23년(1441)에 만들어진 후 여러 차례 다시 만들어졌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헌종 3년(1837)에 만들어진 측우기가 유일하다.

높이 31.5㎝, 지름 15.3㎝의 이 측우기는 원통형의 표면 3곳에 대나무처럼 도드라진 마디가 눈에 띤다. 동그란 통은 빗물을 받는 그릇으로 여기에 주척이라 부르는 자가 있어 측우기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쟀다. 중앙의 두 마디 사이에는 6줄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원래 충청남도 공주에 있던 것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다시 반환된 문화재이다. 공주 박물관에는 이 측우기를 받쳤던 것으로 전해지는 정사각형의 받침돌이 남아 있다.

 


금영측우기

금영측우기


명문


금영측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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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청운교백운교

 

 

종 목 국보 제23호

분 류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교통/ 교량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즉, 다리를 통해 깨달음에 다다르고자 하는 ‘희망의 다리’, ‘기쁨과 축복의 다리’로의 표현의지인 것이다. 아래로는 17단의 청운교가 있고 위로는 16단의 백운교가 있는데, 청운교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신라시대의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여지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불국사연화교칠보교

 

 

종 목 국보 제22호

분 류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교통/ 교량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원하신게 아니지만 끼어들어 봅니다. 도움되시길 바랍니다.

 

역사신문인데요ㅜ.ㅜ 급해요~!

... 역사신문을 만드는데요ㅠ.ㅠ.ㅠ.ㅠ.ㅠ.ㅠ.ㅠ.ㅠ 무슨 내용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희는 사회 5학년이구요! 지금부터 질문해드릴게요 ㅋㅋ 책에 나와잇는 내용은...

!!!!!!급해여ㅠ.ㅠ

저.................................................☞☜ 사회역사신문을만들라고하셔서ㅠ. 제가역사퀴즈하고사설을맡았거든요........?..? 근데저희모둠은고구려를하기로햇어요ㅎㅎ...

신문 만들기!!!!!!!!!!!!!!!! (급해여ㅠ.)

... 주, 고려시대 유명왕과 왕비, 고려시대 사람중 유명한 사람, 고려 건국 멸망등등...........................) 내공 냠냠, 욕설등 이상한 글 쓰시는 분들 신고예요~~ 역사신문 11377년...

1학기 사회 고려 역사 신문 만들기 급해요!!

... 금욜날 까지 쌤이 고려 역사 신문 만들기를 해오라 해서... 내용은 1. 왕건, 궁예를... 할 건데요 4번째 기사를 생각 못 했어요 그래서 1번은 고려의 연표와 그에 관한 것......

급해요 제발. ..ㅜㅜㅜ광주학생항일운동!...

역사신문 만들어가야되는데 4컷 만화 그려야되거든요 ?ㅜㅜㅜ... 그때 상황쫌 대충... 어떻게 그려야되는지요 ...ㅜ 급해요 ㅜㅜ 음^^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단지 통학열차에서...

역사 신문 질문

... 뭘 하면 좋을까요ㅜㅜㅜㅜㅜ 진짜진짜 급해요ㅜㅜ 지금 공자와 맹자에 대해 얘기하고, 유교 유적.유물, 가로세로 낱말퍼즐 했는데 하나 뭐 해야 할까요ㅜ 쉬운거로요 OX퀴즈...

역사신문 도와주쇼요ㅠㅠ

안녕하세요 저는 어느 학교에 다니는 애에요 그런데 저희학교가 역사신문을 하는데... 쫌 급해요 내일까지입니다 수행 60입니다 부탁드려요 빨리요 ㅜㅜ 쉽죠 맨 위에다 우리...

5학년 사회 95쪽 (오늘까지 급해요!!)

5학년 사회 95쪽 에 역사 신문 만들기에 제가 팔만대장경하고 해인사 조사해오기로 했거든요? 제발 오늘까지 빨리 올려 주세요ㅜ.ㅜ 내공 70겁니다 제발 빨리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