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인도의 고대문명 설명

중국과 인도의 고대문명 설명

작성일 2002.12.09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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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 문명의 발생

  1) 황하 문명과 은나라
    ① 황하 유역의 생활
       ·지리적 특징 : 황토 지대
       ·생활 -+- 농작물 재배, 목축, 토기 사용
                 +- 촌락 생활 ⇒ 도시 국가로 발전
                 +- 청동기 사용
    ② 은나라의 성장
      ·정치 : 제정 일치 사회, 제사 중시, 점으로 주요 국사 결정
      ·생활 : 농사에 달력 이용, 청동제 무기와 제사 도구 사용
      ·문자 생활 : 갑골 문자 ⇒ 漢字의 기원

  2) 주나라의 봉건제도
    ① 주나라의 발전 : 기원전 11세기 경 은 멸망
    ② 정치적 내용 : 봉건제도 실시
       ·내용 : 왕족이나 공신을 제후로 삼아 지방 통치
       ·특징 :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종가와 분가 관계 ⇒ 왕권 안정에 기여
    ③ 주의 동천 : 기원전 8세기 초 유목 민족 침입 (지금의 낙양에 도읍 - 동주 시대)

 

1. 중국의 전설 시대와 역사 시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중국 전설에 의하면 인류의 문화는 三皇五帝로부터 시작되었다로 한다. 삼황은, 백성에게 화식법을 알려 주었다는 수인, 목축법을 가르켜 준 복희, 농업과 의약을 가르쳐 준 신농의 세 임금을 말한다. 이것은 인류 생활의 발달 과정을 의인화 한 것으로 보인다.
  오제는 황제, 전욱, 제고, 요, 순을 일컫는데, 황제는 국가를 세우고 관제를 정하고 문자를 만들었다고 하며, 요와 순은 덕이 높아 도덕 정치의 이상 시대를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2. 봉건 제도
 봉건이란 말은 封土 建國을 줄인 말이다. 이는 춘추 좌씨전주희공 24년 조에, "친척을 봉건하여 주 왕실의 울타리로 삼는다."고 한 내용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봉건 제도는 혈연적인 종법 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종법이란 주대의 동족 집단(종족)을 통할하는 사회 규범이었다.이에 의하면 종가와 분가의 구별이 있고, 제사는 종가를 우선으로 하는 혈연적 서열에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종법 제도가 정치 제도에 반영되어 봉건 제도로 나타난 것이다. 왕이 일족이나 공신을 제후로 봉하여 토지와 백성을 주어 세습적으로 지배하게 하고, 제후는 왕에 대하여 공납과 군역을 부담함으로써 지배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토지의 분봉이나 군역의 부담에 있어서는 서양 중세의 봉건 제도와 비슷하다. 그러나 주의 봉건제도가 혈연을 바탕으로 하였고 서양의 봉건 제도는 자유로운 계약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2) 인도 문명의 발생

  1) 인더스 문명
    ① 도시 문명 발생 : 인더스 강 유역의 하라파, 모헨조다로
    ② 생활  -+- 도시 시설의 발달
                  +- 도시 주변 ⇒ 곡식 재배, 가축 사육
                  +- 청동기 사용, 그림 문자 사용
                  +- 서아시아 지역과의 교역 활발

  2) 아리아 인의 정착
    ① 아리아 인의 남하 : 펀자브 지방 침입(BC1000년경), 인도인의 주류
    ② 사회 생활
       ·초기 : 자연 현상 숭배,  
       ·갠지스강 진출 이후 : 농경 생활 전념, 도시국가 건설, 카스트제도
    ③ 카스트 제도 : 엄격한 계급 제도
                   +-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 오늘날 인도 발전에 장애
     ④ 브라만교 : 브라만의 권력 확대에 따라 성립
                ⇒ 특권의 유지를 위해 점차 형식만을 중시하게 됨

  3) 불교의 성립
     ① 배경 -+- 카스트 제도 ⇒ 신분과 직업의 고정화
                  +- 브라만 교   ⇒ 형식화, 타락화
                  +- 왕권 강화, 평민의 지식 수준 향상 ⇒ 새로운 종교의 발생
     ② 불교 성립 - 고타마 싯다르타(석가모니)
                       ·브라만 교의 차별주의 반대, 자비와 평등 강조

 

1. 카스트제도
     카스트 제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카스트 내혼제로서 다른 카스트와의 혼인은 금지된다. 둘째, 직업의 세습이다. 혈통과 직업이 굳게 묶여 아들은 부친의 직업을 이어 받는다. 셋째, 다른 카스트와의 접촉을 싫어하는 배타성이다. 그들은 동일 카스트 구성원끼리만 공동 생활을 하며, 식사도 그들끼리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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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중국과 인도의 고대와 중세(BC300-1500)

 

[6-1]고대중국 [4대문명지도]

1] 진나라(BC221-BC207, 14년간)

중국의 '7웅' 시대는 한, 위, 조, 제, 연, 초, 진으로 7웅 중 진나라가 원교근공(먼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는 것) 정책을 펴 한의 장악을 시작으로 10년(BC230~221) 만에 전부 장악하여 최초로 통일왕국을 이루었는데 이 사람의 이름은 정(政, 영정 또는 조나라에서 태어나 조정)이다.

13세에 등극하여 어머니가 섭정하여 승상 여불위와 측근 노애가 전권을 쥐고 흔들었으며, 정이 외지로 나간 틈을 타 노애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정은 반란을 평정하여 노애를 죽이고 태후를 감금하였다.

이듬해에 *여불위를 자결케 하고 대권을 모두 탈취하여 이사와 같은 인재를 등용하였다.

자신이 3황5제(三皇五帝)의 일을 혼자 하였다고 하여 '황제(皇帝)'란 용어를 만들었고, 진나라 황제의 시작이라고 하여 '진시황제(秦始皇帝, (BC 222 ~ BC 210)'라 부르게 되었다.

황제는 왕의 뜻으로 쓰이는 '짐'이나 '폐하'의 용어도 만들었다.

주나라의 봉건제도를 폐하고 군현제를 추진하여 전국을 36개의 군으로 나누고, 군 아래에는 현을 설치하여 군현의 장은 황제가 직접 임명하였으며 BC214년에 남쪽으로 병력을 파견하여 민중, 남해, 계림, 상군 등 4개의 군을 증설하였다.

지방마다 다른 무게, 길이, 화폐의 종류와 값어치를 통일하고 글자나 사상도 통일하려고 하였다.

학자들이 반대함으로 화가 난 황제는 약460명의 학자를 생매장하고, 정치에 방해가 되는 의학, 농업 이외의 책은 빼앗아 불태웠으며, 이것을 '분서갱유'라고 하여 언론탄압의 시초가 되었다.

황제는 수 없이 원정하여 베트남의 북쪽까지 점령하였으며, BC214 북방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흉노족을 몰아내고, 전국시대의 성들을 연결하여 쌓은 것이 '만리장성'이다.

황제의 중앙집권적 전제정치는 역대의 중국왕조의 기초가 되었다.

진나라의 멸망은 황제의 요구가 너무 가혹하였고, 독재적이며 급진적인 개혁과 만리장성 및 아방궁 같은 대공사로 백성이 시달린 것이 원인이 되었다.

황제가 죽은 후 내시의 우두머리 중거부령인 *조고가 2대 황제 호해를 대신해 정권을 지고 악행을 행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통일한지 14년만에 멸망하였다.

그의 무덤은 높이가 75m이고, 둘레가 7.3Km나 된다고 한다. [중국 여행기 참조]

 

*여불위

여불위는 조(趙)나라의 큰 부자로 진시황제는 여불위의 계획된 음모아래 태어났다.

진나라 소왕에게는 자초라는 아들이있었으며, 자초는 본래 첩의 아들로 20명이 넘는 아들 중에 중간쯤 되는 그는 왕위 계승에서 멀리 있었다.

자초가 조나라에 불모로 잡혀와 있을 때에 궁색한 자초를 만나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진나라 왕위계승자인 황태자가 급사하여 왕위 계승권은 안국군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안국군은 초나라에서 시집온 본 부인한테서 자식을 두지 못한 점을 이용하여 여불위는 많은 선물공세로 본부인을 감동시켜 자초를 양자로 삼게 하였다.

자초(子楚)라는 이름도 본부인이 양자로 삼으면서 초나라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지어준 것이다.

또 여불위는 자초에게 많은 돈을 주어 조나라 관리들에게 뿌리게 하였으며, 자기의 무희인 여인을 자초의 부인으로 주었다.

진나라의 소왕이 조나라를 포위하므로 조나라는 자초를 죽이려 하자 다시 황금 600근을 뇌물로 주고 자초를 진나라로 도망가게 하였다.

소왕이 죽고 안국군이 왕위에 오르고 1년 후에 죽음으로 자초가 왕위에 올라 장양왕이 되었으며,

여불위를 재상으로 삼았으나 장양왕도 2년 반만에 죽음으로 13세 어린 정이 왕이 되었다.

이가 진시황제(BC 259 ~ 210)이며, 태후위 섭정에서 20세(BC238) 친정하여 왕의 자리에 25년, 황제의 자리에 12년간 있었고, 49세에 병으로 죽었다.

황제의 어머니가 여불위의 무희로 사마 천은 저술한 사기에서 황제는 여불위의 친아들이라고 기록하였다.

모친(선태후)와 여불위의 내통으로 진시황제는 여불위를 강요하여 자결하게 하였다.

여불위의 집에는 1만 명이 넘는 노예가 있었다고 하며, 식객 중에는 유식한 사람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들을 시켜 전국말기의 귀중한 역사자료인 '여씨 춘추'를 편찬하였다.

 

조고(趙高; ? - BC 207)

BC 210년 진시황제 37년 7월 황제는 천하를 평정한 국토를 순행을 하면서 전국에 대한 통치권을 더욱 강화해나갔는데 지금의 산동성 평원현 경내에 이를 때 갑자기 병을 얻어 급히 함양성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지금 하북성 광종현인 사구 경내 대도상에서 숨을 거두기 전 유조(遺詔, 유언)로 장성을 지키는 몽염(? -BC 210)의 군중에서 군대를 감독하던 장자 부소(扶蘇; ? - BC 210)를 함양성으로 불러들여 장례를 주관하고, 대통을 잇게 하라는 뜻을 전달하고 죽었다.

황제가 죽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천하통일에 가장 공이 컸고, 대신들 중 관직이 제일 높은 이사(李斯), 환관 중에 우두머리 중거부령(中車府令)이며, 황제의 옥새(玉璽)를 보관하고 있는 조고, 왕자 중에 가장 황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서열에서는 먼 20살의 성격이 온순하고 정신이 산만하며 결단력이 유약한 18번째 왕자인 호해, 그리고 그들 측근인 시종들이 있었다.

제(齊)나라에서 진나라로 옮겨 3대(몽오→ 몽무→ 몽염과 몽의)에 걸쳐 혁혁한 공을 세운 무장 몽의가 있었지만 진시황이 병들자 선천과 신령께 기원의 제사를 하는 임무를 맡고 대열에서 먼저 떠났다.

이사(李斯)는 황제의 유언을 받아 태자로 내정 되었지만 정식 태자가 아닌 이상 20명이 넘는 왕자 중에 누가 난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황제의 죽음을 잠시 비밀에 붙이자고 제안했다.

이 틈을 이용한 조고의 모략에 의해 호해와 이사를 설득시켜 거짓으로 만들어진 유조를 부소에게 보내어 태자가 되지 못함을 비방과 원망한 불효를 물어 자진하도록 만들었고, 몽염은 부소를 보필하지 못하고 부화뇌동한 불충의 죄를 물어 자결하도록 하여 먼저 그들을 제거하였다.

그들은 또 수레에 바닷고기를 가득실어 비린내와 황제의 시체 썩는 냄새를 구별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함양성에 도착한 3사람은 국상을 공고하며, 위조된 진시황의 유조를 발표하였다.

호해는 장례가 끝나고 황제로 즉위하였고, 조고는 호해를 주색에 빠지게 하여 정사를 돌보지 못하게 하였다. 음모로 승상 이사마저 제거하여 조고는 승상이 되었고, 자신의 죄를 고하지 목하도록 호해를 격리시켜 황제 위에 군림하여 실권을 휘둘렀다.

이사는 뒷간의 마른 쥐와 곡간의 살진 쥐를 보고, 있는 자리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어 승상에까지 되었만 죽을 때 '죽음에 쫓기는 곡간 쥐보다 뒷간 쥐가 더 행복한지 모르겠다.'는 고사가 있다.

조고는 밀고하는 자들에게는 포상하는 방법으로 왕자들과 대신들의 죄상을 고발한 죄인들을 도륙하였으며, 죄인에게는 연좌제를 실시하여 시체는 장안에 쌓였다.

그는 사디즘까지 있어 6대 수레에 4지와 목과 몸통을 묶어 찢어 죽이는 잔혹한 형벌인 거열형을 공주들까지 행하여 즐겼다고 하며, 그는 쾌락을 위해 더욱 악랄해졌다.

그는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황제에게 사슴 1마리를 바치면서 좋은 말이라고 하였고, 황제는 ‘저건 사슴인데 어째서 말이라고 하오?’ 물었으며, 조고는 ‘분명히 말입니다.’이라고 대답하였다.

황제는 대신들에게 물어보자 눈치를 보던 모든 대신들은 말이라고 대답하여 멀쩡한 사람이 병신이 되었으며, 자신에게 귀신이 씌었다고 생각한 황제는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 이야기는 강압에 의하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 것처럼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 또는 위 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른다는 뜻으로 쓰이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서어가 되었다.

호해는 진시황제가 다 하지 못한 아방궁을 더 넓고 화려하게 계속 강화하여 수십만 명의 백성을 노역으로 징발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쌓여 결국 민란이 일어나고, 옛 6국의 귀족후예들의 반란도 시작되어 국운이 다가오는데도 황제 호해는 정사에 참여하지 않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호해 3년, BC 207년 봄 장한이 지휘하는 진나라의 주력군을 거록에서 항우가 대파하자 진나라 장군 장한은 군사 20여만 이끌고 항우에게 투항했다.

유방은 함양으로 가는 중요 요새인 무관을 점령하고 함양성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뒤 늦게 무관이 점령되어 다는 소식을 접한 호해는 조고에게 사태를 수습하라고 재촉하자 조고는 수양딸로 삼은 사위 염락에게 병사를 주어 망이궁에 있는 호해를 자진하게 하였는데 그의 나이는 불과 23세였다.

황제가 죽은 후 조고가 황제로 즉위하려고 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여 대를 물려줄 수 없는 환관이 황제로 오를 수 없다며, 대신들이 목숨 걸고 반대하여 대신 유약하고 무능하여 왕실 중에서 드믈 게 살아남아 있던 호해의 조카이자 진시황제의 장자인 부소의 아들 자영(子?)을 세우려 하였다.

반란군들에게 옛날 7웅 시대의 진나로 남겠다는 뜻으로 황제를 포기하고 진왕(秦王)으로 즉위할 것을 재촉하는 조고를 자영이 사살하고 즉위했다.

자영이 진왕으로 즉위한지 46일 만에 유방이 함양성을 포위하자 성문을 열고 나가 항복했으며, 유방은 궁전 있는 엄청난 보물과 재화, 그리고 3천명이 넘는 미녀가 있어 성안에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항우에게 아직은 상대가 되지 못하는 유방을 장량이 권고하여 함양성을 손도대지 않고 항우에게 물러주고, 함양성을 떠났으며, 그 후 자영은 항우의 군중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막강하던 진나라도 일개의 조고라는 환관 때문에 14년 만에 멸망했으나 그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만리장성 이야기[지도]

인간이 만든 조형물 중에 달에서 보이는 것은 만리장성뿐이라고 하는데 사실일까?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38만4400㎞로 달에서 보이는 지구는 우리가 보는 달보다 지름이 3.7배쯤 큰 둥그런 공으로, 알렌 빈이라는 우주 비행사는 '지구는 대부분 하얗고(구름), 일부는 푸르며(바다), 군데군데 노란 덩어리가 있고(사막), 또 얼마간은 초록색(산야)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구'라고 하였다.

그는 다시 '육안으로는 지구의 어떤 인공구조물도 볼 수 없다'라고 하였다. 과학적으로 계산해보면 이 거리에서 사람이 식별할 수 있는 것은 하얀 바탕에 두께 700m 이상으로 그려놓은 검은 직선 정도라고 하는데 만리장성의 폭은 4-12m을 넘지 않으므로 사실 만리장성은 달은 고사하고 지구로부터 몇 천㎞만 멀어져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만리장성이 보일 정도라면 고속도로, 철도, 운하 같은 인공구조물도 모두 관측할 수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우주여행 초창기에 우주비행사중 누군가 거짓말한 것이 와전된 것으로NASA 사람들은 추측하고 있다.

 

진나라와 차이나 이야기

(진나라이야기)

진나라와 인접한 한나라는 진의 위협으로 편한 날이 없어 한 묘책을 생각하였다.

그것은 진나라로 하여금 운하를 파게 하여 경제와 힘을 낭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운하의 기술자 정국이라는 사람을 첩자로 보냈으며, 운하를 반쯤 파다가 그가 첩자임을 알고 죽이려 하였으나 그는 운하는 큰 이익을 낼 것이라고 설명하고 설득시켜 죽음을 면하여 운하를 완성하였다.

한은 계획 되로 당분간 위협은 면하였으나 운하는 싼시성의 넓은 들을 기름지게 하여 진은 부자나라가 되어 오히려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뒤의 수나라는 운하를 파서 국력을 낭비하여 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진시황제는 형가라는 자객에게 습격을 받았고, 단검을 들은 형가와 긴칼을 차고 있는 황제는 당황하여 칼이 쉽게 빠지질 않아 서로 쫓고 쫓기는 형세가 장시간 계속되었으나 아무도 돕는 자는 없고 다만 시의 하무저만 들고 있던 약봉지를 형가를 향해 던졌을 뿐이었으며, 긴칼을 뽑은 황제는 형가를 8차례 베어 위기를 면하였다.

그런데 신하와 호위병들은 왜 구경만 하였을까? 이유는 신하에게는 무기가 없었고, 호위병은 명령 없이는 전상에 올라 갈 수가 없었으며, 황제는 당황하여 호위병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시황제가 죽은 후에 완성되었다는 아방궁에는 10,000개의 방에 13,000명의 아내가 있었다고 한다.

아방궁을 포함한 이 궁전군은 BC 207년 항우(項羽)가 진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불에 탔는데 불길이 3개월 동안 꺼지지 않고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의 맏아들 호해는 황제가 되기위하여 12명의 동생과 10명의 누이를 죽였다고 한다.

또 진시황은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염원하여 불로장생 연구가인 방사 서복을 동남동녀(童男童女) 500명과 함께 동쪽 한반도로 보내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하였는데 동남동녀 중에는 달성 서씨(徐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나 사실로 확인되지는 못하였다.

그가 불로장생을 위하여 복용한 것은 동충하초(冬蟲夏草)라고 하는데 양귀비와 등소평도 평생을

복용하였다고 하며, 중국에서는 산삼, 녹용과 함께 3대 보약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진기한 버섯인 동충하초가 궁금한 사람은 참조 하기 바란다.

 

(차이나 이야기)

중국의 진나라가 로마시대에 유럽에 알려지면서 진(Ch'in)나라가 중국의 영문표기인 차이나(China)가 되었고, 차이나를 치나(China) 또는 한문표기로 지나(支那)라고도 하는데 중국본토만 지칭하기도 한다.

중국근방의 바다를 지나해라고 하며, 말레이 반도와 동남 아시아, 북동쪽을 남지나해, 중국동쪽에 있는 태평양의 연해를 동지나해라도 한다.

그리고 '본 차이나(bone china)'라고 하는 도자기는 중국의 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본(bone)은 뼈를 말하며, 영국의 대표적인 도자기를 말한다.

 

2] 한나라(BC202-AD220, 422년간)

(1)전한(BC202-AD9)

 

진나라가 멸망할 무렵에 각지에서 영웅이 나왔는데 그 중에 귀족 출신인 항우(장사)와 농민 출신인 유방의 세력이 가장 강하였으며, 유방이 재통일하여 도읍을 장안에 정하고 한나라를 열었다.

엄격히 말하면 진나라 타도의 수훈은 항우임에 틀림없었으나 마지막 승리의 열매를 거둔 것은 전한 왕조를 세운 유방으로 유방과 항우의 싸움은 소설 '초한지'의 무대이기도 하다.

유방에게는 많은 인재가 있었으며, 그가 대업을 이루는데 일등공신은 책사 *장량과 원수 한신이었고, 이 두사람이 없었다면 그는 일개 필부로 생을 마쳤을 것이다.

여기에 문무를 겸비한 승상 소하, 장수로는 번쾌, 영포, 진희 등이었으나 '유방은 환난은 같이 할 사람이지만, 부귀영화는 같이 할 사람이 못 된다.'라는 말처럼 평정 후 대부분 유방의 칼에 죽었다.

한나라 고조(유방)는 흉노족을 공격하였다가 패하고, 많은 돈과 비단 그리고 공주를 바쳤다.

무제시대에는 흉노족의 조공에 참을 수 없어, 흉노족에 패하여 중앙아시아로 밀려 나갔던 투르크 계통인 대월지국과 동맹을 맺어 흉노족을 공격하려고 장건을 사신으로 보냈다.

장건은 도중에 흉노족에 잡혀 10년 후에 도망하여 대월지국에 갔으나 대월지국은 평화를 누리고 있어 동맹에 실패하였다.

BC 126년 13년에 걸친 긴 여행에서 돌아와 여행의 모든 것을 중국에 알리므로 동서 교역이 이루어져 서방의 포도주, 석류, 호피, 악기, 보석 등이 들어오고 중국의 철기나 비단이 그리스나 로마로 가게 되었다.

후세에 이 길을 '*실크로드'라고 하였고, 장건의 여행은 역사에 남을 큰 발자취가 되었다.

무제의 치세는 최대의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제9대 황제 성제(BC 33-7 재위)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으며 술과 여자에 빠져 *조비연과 조합덕을 총애하였다.

후에 한나라는 외척과 환관(내시) 등의 근신들이 국정의 실권을 쥐게되어 궁정정치는 급속히 부패되어 쇠퇴하다가 AD9년에 황제의 친척 왕망이 반란을 일으켜 신이라는 나라를 세우므로 실제로는 한나라는 14대 약 200년만에 멸망하였다.

 

<만리장성>

*장량과 한신 그리고 위만조선

장량: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한(韓)나라 소후(昭侯)와 선혜왕(宣惠王) 등의 5대에 걸쳐 승상을 지냈으나 진 (秦)이 한을 멸하자 그는 자객들과 사귀면서 한의 회복을 도모하여 진의 시황제 공격에 실패했다.

실패 후 그는 방황했다고 하다가 하비 지금의 장쑤성 쥐닝현에서 산책을 하다 노인 황석공(黃石公, 황색바위)을 만나는데 노인을 집신을 다리 아래로 던지고 주워와 신기어 달라고 명령하였다.

부당한 명령을 참고 그대로 하였는데 노인은 ‘장래성이 있는 놈이라며, 5일 후 다리로 나오면 책 한권을 주겠다.’라고 약속했고, 5일 후에 가보니 노인이 먼저와 있었다.

‘노인과 약속한 놈이 되레 늦었다’고 호통만 당했으나 사정하여 다시 5일 후에 약속을 받고 아예 밤부터 기다려 받은 책이 ‘태공병법(太公兵法)’이라고 한다.

노인은 책을 준 뒤 ‘자네는 13년 후에 세상을 뒤흔드는 인물이 되어 있을 터이니 그때 다시 만나자, 곡성산 기슭의 황색바위가 나이니라’라고 말한 후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전한다. [여행기 장가계 참조]장가계의 황석채(黃石寨)가 황석공(黃石公)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울타리’라는 뜻의 채(寨)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면 이곳이 황색바위로 있다는 곡성산 기슭인지는 알 수가 없다.

장량의 곡성산 기슭에서 만난 황색바위를 가져와 모시다가 죽을 때 무덤에 같이 매장했다고 하는데 이곳을 여행할 때 금편계곡과 백룡엘리베이터로 가는 길목에서 장량의 무덤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돌 표지판을 본 적이 있다.

사마천이 사기에 황당한 장량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은 겸손, 사람 보는 법, 감정절제, 인내 등이 천하를 경영할 덕목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BC 209년 진나라 에 반대하는 100여명을 모아 유방(劉邦)과 합세하여 주요전략가(책사)가 되어 전국을 통일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지만 항상 몸을 낮추어 유방에게 숙청당하지 않고 일생을 마감한 사람이다.

유방이 중원을 평정한 후 공로에 따라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실시될 때 장량에게 제나라 땅 3만호를 주려 하였으나 장량은 자신이 유방과 만난 곳이 유(留) 땅이므로 유 땅만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는 유 땅의 유후(留侯)에 봉해졌는데 장량은 이미 유방은 유능한 부하일수록 시기하여 숙청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몸을 나춘 것이라고 하며, 유방이 부하들을 숙청할 때 조선으로 도망 온 위만 이 있다.

일설에는 장가계로 들어가 장씨의 시조가 되었는데 그 때문에 장가계라는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장량은 지략과 인재등용과 처신에도 뛰어났는데 인재등용 면에서는 촉나라 승상 제갈공명보다 더 뛰어났기 때문에 제갈공명이 실패한 천하통일이 가능했다고 한다.

제갈공명은 이론에만 능하고 실전한 미숙한 마속을 중요요충지인 가정에 배치하여 패배함으로 모든 군사를 퇴각시켜 북벌에 실패했고, 확실치도 않은 관상만 믿고 ‘반골상’이라 하여 위연을 죽이려고까지 했다.

한신: 처음에 초나라의 항량과 항우(項羽)를 섬겼으나 중용되지 않아 장량의 천거로 한왕(漢王) 유방의 군에 참가하여 한나라 군대를 지휘하여 크게 공을 세워 제왕(齊王)에 이어 초왕(楚王)이 되었다.

한나라 제국의 권력이 확립되자 다른 제왕(諸王)과 함께 밀려나, BC 201년 회음후로 격하되고, BC 196년 진희의 난에 통모했다 하여 참살 당하였는데 그는 지략은 장량보다 한 수 아래로 처신을 잘 못했다.

그는 불우하던 젊은 시절 시비를 걸어오는 시정 무뢰배의 가랑이 밑을 태연히 기어갔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위만: 유방이 황제가 된 후 유능한 부하들을 숙청하기 시작하였을 때 유방의 죽마고우였던 노관의 부하이자 연나라의 세력가였던 위만이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명과 함께 도망 와서 왕검성에 있는 준왕에게 거짓 투항을 하여 서쪽 변경을 지키는 수비대 책임자로 임명까지 받았으나 배은망덕하게도 준왕을 제거하고 단군조선을 계승한 위만조선을 세워 BC 108년에 한나라 한무제에게 멸망 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실크로드(Silk road) [실크로드와 마르코폴로지도] [4대문명과 실크로드지도]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1833-1905)이 처음으로 이 길을 답사하면서 비단길이라고 한데서 연유한다.

중국에서는 비단을 유럽에서는 옥, 보석, 직물, 악기, 술, 여자, 불교, 회교들이 들어왔다.

서구로 가는 길은 3개의 길이 있었다.

1.비단길로 타클라마칸사막 북쪽을 통하는 서북로와 남쪽을 통하는 서역남로가 있고 이 길을

사막로라고도 하며, 안녹산의 난 이후로 당과 서역이 무역이 단절되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2.뱃길(해상 교역로)로 아라비아인이 많이 사용하였다.

이 길을 따라 회교가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과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에 전하여 지게 되었다.

3.스텝루트의 길로 북아시아 유목민이나 몽골족이 사용하는 스텝(초원)지대를 통과하는 길이다.

장건 이전에도 서구교역은 있었다.

이 길을 일명 모피(毛皮)로드라고도 하는데 소련의 사람들은 혹한 때문에 외투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모피가 이 길을 통하여 유통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후에 이 길을 따라 철(기차)의 실크로드가 열렸다.

 

(흉노족과 실크로드의 하서회랑)

하서회랑은 1.200km의 외길로 4.000m가 넘는 흉노족어로 하늘의 뜻을 가진 기린산맥과 끝 쪽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고비사막이 있는 이곳이 영하회족자치구이다.

하서회랑은 건조지대지만 눈 녹은 물로 농사가 가능한 곳으로 이곳을 장악해야 실크로드를 장악할 수 있다.

당시 중국북방을 장악했던 흉노족은 대(大)장군이 선우가 좌현왕과 우현왕을 거느린 제국체제로 있었으며, 기마군이 강하여 월지국이 지배하던 이곳을 장악하여 한 고조로부터 무제까지 조공을 받고 있었다.

 

<한고조 유방>

BC129년 조공을 보내고 화친을 맺어든 한 무제(BC141-87)는 서역에서 구해온 천마로 흉노족과 전쟁을 시작하여 고비사막으로 몰아내고, 세운 하서4군(무위, 장액, 주천, 돈황)을 설치하여 실크로드를 열었다.

시안(서안)에서 출발하는 실크로드의 하서회랑은 로마와 빈번히 교역하여 로마주화가 많이 발견되는 곳이라고 하며, 돈황은 사막의 모래 속에 천년을 유지한 막고분 벽화가 유명하다.

또 무위는 가장 비옥한 오아시스 도시로 흉노족이 차지했다가 무위군이 설치되었고, 5호16국 시대에는 5개 왕조가 이곳을 중심으로 있었다고 한다.

난주(란저우)는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는 관문으로 황하(황허)강 상유에 있으며, 현재도 회족이 많다.

한 무제는 고조선을 장악하고 한사군을 설치하였고, 영하회족자치구에 있었던 고려주는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에서 잡아온 포로를 안주시켰던 곳이라고 한다.

 

*조비연

조비연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가장 날씬한 여인이었다고 하며, '날으는 제비'라는 뜻으로 본 이름 조의주(趙宜主)보다 조비연(趙飛燕)이 더 유명하고, 뛰어난 몸매에 춤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 그녀는 성황제(漢成帝)의 총애를 받아 황후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다.

한번은 황제가 호수에서 선상연(船上宴)을 베풀었는데 갑자기 강풍이 불자 춤을 추던 비연이 휘청

물로 떨어지려하자 황제가 급히 그녀의 한쪽 발목을 붙잡았는데 그녀는 그 상태에서도 춤추기를

그치지 않아서 비연은 임금의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추었다는 비연작장중무(飛燕作掌中舞)라는

고사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하였다.

임금의 총애를 받은 비연은 세상에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하나 그 세월은 겨우 10년으로 황제가 죽자 비연은 탄핵의 대상이 되었으며, 평인으로 걸식을 하다가 자살로 그 생을 끝맺고 말았다고 한다.

(2)후한(AD25-AD220)

신나라는 주나라의 이상적인 나라를 그리며 급격한 개혁을 하려다 호족의 반항으로 겨우 15년만에 망하였고, AD25년에 반란을 평정한 사람은 한나라 후예인 유수로 한나라 왕조를 부활시켜 황제가 되었으며, 그가 광무제로 이 나라를 후한이라고 하였고,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유교를 국교로 한 것이 중국이 유교의 이념으로 내려오는 원인이 되었다.

후한 말기에는 외척과 환관이 다시 득세하여 혼란과 불안을 빚어 화북지방에 노략질을 일삼던

*황건적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것을 진압한 조조의 아들 조비가 후한을 AD220년에 멸망시켰다.

이 때부터 '삼국지'의 이야기처럼 삼국시대가 된다.

*황건의 난

머리에 누런 수건을 썼기 때문에 황건적이라 불렀으며, 장각이라는 사람이 죄과에 대한 반성과 참회가 질병을 치유하여 태평세대가 도래한다고 설파하여 만든 종교가 태평교이다.

하급관리와 빈민의 마음을 사로잡아 화북, 화남, 강남지역에 퍼졌다.

후한의 제위에 오른다고 예언하면서 군사조직을 갖추어 봉기를 하려는 것이 사전에 발각되어

조정은 진압에 나섰다.

장각이 죽어 주력은 쇠퇴하였으나 각지의 농민 군이 계속 봉기하여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였다.

(3)문화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였고, 환관출신 채윤이 종이를 발명하여 후세에

중국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제지법은 비단길을 따라 서구로 갔고, 비단길로 불교가 들어왔다.

3] 삼국시대(220-280, 60년간) [삼국시대지도]

후한 말엽에 국력이 쇠하자 지방호족의 큰 세력이 나타났는데 그 중에 조조, 유비, 손권이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후한을 멸망시키고 화북에 위(AD225-265)나라를 세웠다.

유비는 양쯔강 상류 운남에 촉나라(AD221-263)를 세웠으며, 유비, 관우, 장비는 '결의 3형제'를 맺었다.

손권이 양쯔강 남부인 강남에 오나라(AD222-280)를 세운 것이 삼국지에서 본 삼국이다.

가장 세력이 강한 위나라가 촉을 멸망시키고, 위나라는 사마염에 나라를 빼앗긴 것은 AD265년이다.

(1)서진(AD265-316)

사마염은 오나라 까지 굴복시키고 낙양에 도읍 하였는데 그가 서진의 무제이다.

무제 사마염은 귀족의 특권을 옹호하여 정치를 안정시켜 나갔다.

즉위 초에는 검소한 생활로 모범을 보였으나 점점 사치와 방탕에 빠지자 귀족들도 다투어 사치와

부를 마치 무슨 경쟁이라도 벌이듯 과시하였다.

석숭은 무역을 하여 막대한 돈을 벌었다고 하는데 석숭과 왕개(왕제)는 경쟁적으로 사치를 과시하였다.

예를 들면 석숭이 촛불을 가지고 밥짓는다고 하면, 왕개는 사람 젖으로 기른 돼지고기로써 요리하였다. 왕개가 구부러진 노송의 공이 구멍 속에 30년 간 빚은 와송주(술)를 마신다 하면, 석숭은 대나무 통속에 50년 간 묵었다는 죽통주를 마셨다는 식이었다.

무제는 왕자들에게 각 고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그가 죽고 어리석은 혜제가 등극하자 각 고을의 아들이 난을 일으켰으며, 이것을 '8 왕의 난'이라고 한다.

 

<삼국시대 촉나라의 유비>

(2)동진(317-419)

316년 서진의 혼란한 틈을 타서 흉노가 침공하렸고, 사마예는 강남으로 피신하여 난징에 도읍 한 것을 동진이라 하며, 384년 한반도 백제에 불교를 전하였다.

강남(화남)에는 오- 동진-송-제-양-진, 6조가 생겼다가 사라지면서 독특한 6조문화를 형성하였다.

(3)남조의 6조 문화

특색 있는 귀족문화를 형성하였고, 시인 도연명, 화백 고개지, 글씨에 황희지 등이 불후의 명작을

남겼으며, 굽타 형식인 불교의 석굴사원, 석불이 만들어졌다.

남조는 유교사상보다는 노장사상인 무위자연을 소중히 여겼다.

*달마대사는 설법을 통하여 깨달음 얻는 것보다 정반대인 좌선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는 사상을 가르친 새로운 불교를 강조하였다.

*달마대사

중국 불교 선종(禪宗)의 창시자로 달마는 보리달마(菩提達磨)의 약칭으로 그는 남인도 향지국(香至國)

셋째 왕자로 태어나 대승불교의 승려가 되어 선에 통달하였다고 한다.

520년경 중국에 들어와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간 면벽좌선(面壁坐禪)으로 이(理)를 깨달았다고 한다.

일설에는 페르시아의 왕자라고 한다.

중국 무술의 영화에서는 달마대사를 무술인의 원조격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 그러하였는지는 의문이 된다.

(4)북조(AD304-439, 5호16국, 130년간)

AD304년에 흉노 추장 유연이 8왕의 난에 편승하여 한이라는 나라를 재건하여 316년 서진을 남쪽으로 몰아냈으며, 304년 '저' 계의 이웅이 사천에서 나라를 세웠다.

이렇게 5호가 16국을 세운 것을 '5호(胡)16국(國)'이라 하는데 5호의 호(胡)는 야만이라는 뜻이다.

5호는 1.흉노 2.갈(흉노의 별종) 3. 선비(터키계라는 설) 4.저(티베트 계) 5.강(티베트 계)이다.

이들이 13개의 나라를 세우고, 한족이 3개의 나라를 세워 모두 16개국이나 실제로는 더 많았다고 한다.

이들 이민족이 중국을 최초로 지배한 형태이다. [지도]

호족국들은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사대부 예우하여 우호적이었으며 불교발전에도 기여하였다.

호족들은 야만적 행동을 삼가 하였고, 후세는 한족에 동화하거나 노예가 된 자도 많았다.

흉노족이 AD350-390년 사이에 자연의 재해(추위와 가뭄)로 갑자기 중국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유럽으로간 흉노족이라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로마 멸망의 원인이 된 셈이다.[훈족 참조]

4] 수나라(581-618, 37년간)

양견은 중국 북쪽(북조)에 있는 북주라는 나라의 사위가 되었고, 그의 딸은 명제의 왕비가 되었다.

양견은 반대세력을 누르고 581년 명제에게 왕위를 받아 수왕이라고 한데서 수나라가 되었다.

수왕을 문제 또는 고조라고도 하는데, 587년 남조의 진을 멸망시키고 장안에 도읍하여

삼국시대의 위나라가 망한지 317년만에 남북을 통일하였다.

북쪽에 성을 축조하여 터키계의 돌궐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돌궐과 내통하며 조공을 바치지 않는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하여 598년 30만 대군으로 진격하였으나 태풍으로 수륙 양군이 자멸하여

전쟁도 해보지 못하고 퇴군하였다.

양제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라 남북(베이징-화중)을 잇는 길이 1400Km 넓이 30m 대운하에

550만 명을 동원하여 250만이 죽었다.

또 부친의 한 맺힌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3차례나 원정하였으나 실패로 반란이 일어나 양제는

양주에 고립되었다.

617년 당을 세운 이연은 장안을 점령하여 양제의 손자 유(정제)를 왕으로세웠으며,

618년 양제가 살해되자 이연은 정제에게 강제로 양위를 받아 수나라는 3대 38년만에 멸망하였다.

멸망의 원인은 양제가 아버지를 살해한 부도덕과 대운하의 작업에 국민을 혹사시킨 것,

그리고 고구려 원정에 무리한 징발은 원정 중에 내란이 일어나 멸망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1)수와 한반도

한반도 삼국과는 형식상 주종관계에 있었으며, 581년 고구려의 평원왕과 신라의 진평왕은 사신을

보내어 왕의 책봉을 받았았다.

백제는 남조의 진나라와 관계가 깊어 진이 망한 후에 책봉을 받았다.

고구려 영양왕(23년) 때에 조공을 바치지 않아 612년 1차 원정은 113만의 대군으로 공격하였으나

을지문덕의 지략에 의한 살수대첩에서 대패하여 4개월만에 철수하였다.

613, 614년 2, 3차 원정에 실패한 것이 내란의 원인이 되어 멸망하였다.

<수나라의 대운하>

 

 

5] 당나라(618-907, 289년간) [중국 주변국 지도]

이연(고조)이 아들 이세민(태종)과 함께 수나라를 멸하고 당나라를 열어 주변을 평정하여 한나라와 같은 대 통일을 하는데에는 이세민의 공로인데 형제들이 이를 시기함으로 그들을 모두 죽이고 왕위를 계승하여 제2대 태종(626-649 재위)이 되어 중국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로 칭송 받는다.

돌궐을 평정하였고, 주변종족에게 조공을 바치게 하여 내치에 힘써 태평성대를 누린 것을 '정관의 치'라고 하는데 태종의 연호가 정관이라 이렇게 부르고, 후세에 군주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는 매우 훌륭한 법률인 '율령격식'을 만들었으며, '균전법'란 제도를 만들어 농토가 없는 농민에게

땅을 주었고, 또 '조, 용, 제'이라는 세금제도를 만들었으며, 징병제도도 마련하여 국력을 부강 시킨 것이 후세에 본보기가 되어 우리나라와 일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엄격한 과거제도로 실력 있는 자를 중용하여 당나라의 300년 터전을 만들었으나 좋은 후계자를 두지 못하였고, 만년의 *고구려원정 실패 등으로 그가 죽은 뒤에는 정권이 동요하게 되었으나 태자로 책봉된 셋째 아들 이치(李治)가 3대 황제로 즉위하여 고종(649-683)이 되었다.

고종은 아버지가 진행하던 정벌정책을 계승하여 AD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사비성의 함락하였으며, AD 668년 고구려의 평양성의 함락시켰고, AD 670년 *토번왕국를 공격했다가 대패하였다.

태종이 죽은 후 비구니로 있던 아버지 첩 무씨를 총애하여 왕후를 폐하고, 무씨를 왕후로 삼았는데 그녀는 말년에 병든 고종을 꼭두각시로 황제로 만들었다.

고종이 죽은 후 친아들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을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워 섭정하다가 AD 690년에 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제 측천무후(생애 625-705 )이다.

여제는 황후 책봉에 반대한 대신과 두 아들 맏손주까지 죽여 국민에게 사랑 받지 못하였으나 정치는 잘하여 존경받았으며, 재위16년 동안 악랄하고 잔혹한 탄압으로 공포의 정치를 하다가 반대파에게 숙청 당하고 중종을 세웠으나, 중종의 왕후 여씨가 중종을 살해하고 실권을 쥐었다.

여씨는 악랄한 것이 측천무후와 같았으며, 반대파가 여씨를 몰아내고 710년 예종을 복위시켰다.

6대 현종(이융, 712-756)은 당을 정상으로 만들었으며 정치를 쇄신하여 내치 안정에 힘써 최성기를 이루어 45년간 태평성대를 누리며 문화를 꽃 피웠다.

그도 말년에 장기집권의 권태로 *양귀비를 총애하여 그의 친척 양국충을 재상으로 삼아 그에게 국사를 위임하였으나 3개의 절도사를 겸하고 있는 안녹산과 양충국의 마찰로 안녹산이 양충국의 제거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는데 이 난을 '*안사의 난'이라 한다.

안녹산은 낙양과 장안을 점령할 때에 양귀비는 살해되었다.

안사(安史)의 난은 9년(755-763년) 동안 계속되어 위구르의 도움으로 평정하였다. [위구르 참조]

그후 중앙집권과 재정이 강화되어 이것이 민중과 지주층에 고통을 주어 변란이 연속으로 일어 났다.

그 중에 반란 지도자 황소(黃巢)의 대란(875-884)은 곡창지대를 황폐화 하였다.

환관파와 재상파가 싸우던 중에 재상파가 끌어들인 황소의 무장인 주온이 장안에 입성하여 소종을 살해하고 애종을 세웠으나, 907년 애종을 폐위하고 후량국의 태조가 될 주온(주전충)이 즉위하므로 당나라는 20대 제왕 때 289년만에 망하였다.

*고구려의 원정(645)

고구려의 대막리지로 있는 연개소문이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러 온 신라의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를 감금하고 신라와 당나라의 교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점령하였다.

이에 당 태종은 보장왕3년 644년에 신라와의 화해를 권고하는 사신 장엄을 구속하는 등 강경하게 나오자 격노한 태종(이세민)은 645년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여 고구려와 말갈 연합군대 15만을 무찌른 뒤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당나라 군대가 60여 일 동안 매일 1.600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안시성보다 높은 토산을 구축하고 성안을 공격하였으나 안시성 성주 양만춘은 토산 공격에 나서 정상을 점령하고 3일 동안 계속된 당나라 군대의 총공세를 물리쳤는데 고구려 군을 지휘한 것은 연개소문이었다.

양만춘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 야사에만 나오며, 명사수인 양만춘의 화살이 태종의 눈을 맞혔다고도 하며, 퇴각하는 이세민에게 송별의 예를 하니 당나라 태종이 그에게 비단 100필을 주면서 성의 방어를 하례하고 왕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도록 격려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도 4차례나 당나라는 고구랴를 침입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토번(吐蕃) 왕국(7세기초-846) [중국 주변국 지도]

토번왕국(왕조, Ancient Tibet)은 티베트왕국이며, 중국의 당, 송 시대에 티베트족이 티베트 고원(지금의 시짱 자치구)에서 일어났고, 티베트인은 '보에'라고 하며, 중국은 '토번'이란 명칭을 14세기까지 사용했다. AD633년 손챈강포 왕이 주위를 통일하고, 라싸에 노예제국가를 세웠으며, 손챈강포(손첸캄포) 왕이 당 이세민의 수양딸 문성(文成) 공주와 혼인하면서 중국의 기술을 도입하여 도량형제도를 통일했으며, 제철 기술을 발전시켰다.

토번왕조는 AD 670년 안서(安西) 4진(四鎭)을 점령하여 동서 통상의 길목을 막았고, 당 고종은 10만 대군을 설인귀를 총대장으로 침공했으나 대패하여 설인귀는 삭탈관직을 당했고, 연연도대총관(燕然道大摠管)으로 있던 백제의 장군 흑치상지는 이 전쟁에서 500명의 군사로 단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현종의 총애를 받은 양귀비>

안사(安史)의 난이 끝난 AD 763년 치송 데첸 왕 때 장안을 점령하고, 실크로드를 장악하여 가장 강력한 왕조가 되었으며, 당나라에 조공을 받고 불교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중국의 경제적와 문화적 교류를 활발히 하여 당의 군제를 모방하고 법률을 제정했으며, 티베트 문자를 창제하고 불교를 장려했고, 당과 8차례 맹약을 맺으며, 이중 AD 823년에 세운 당번회맹비(唐蕃會盟碑)가 현재 라싸에 있는 다지오 사(大昭寺) 앞에 남아 있다.

불교는 티벳 본교를 신봉하는 귀족들과 마찰로 인해 본교는 AD 837 당 중종의 딸 금성(金城)공주와 혼인한 적덕조찬(赤德組贊)을 암살한 후 랑달마(郞達瑪)를 옹립했으나 AD 842년 불교신자들이 또 다시 랑달마를 살해하여 9대에 걸쳐 200년 동안 존재했던 토번왕조도 와해되었다.

*양귀비(718-756, 본명은 옥환) [여행기 23일 참조]

현종의 왕비가 죽어 왕비를 물색하는 중에 18번째 왕자 수(모)왕 부인이 아름다움을 진언하는 자가 있었다.

16세에 수왕과 결혼하였으나, 현종이 온천궁에 있을 때에 기회가 되어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18세에 수왕의 저택을 떠나 5년 동안 여도사(무녀)가 되어 현종과 밀애를 나누었다.

장기집권에 권태를 느낀 61세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는 27세에 귀비로 정식 책봉되어 왕비와 같은 대우를 받았으며, 그의 3자매는 한국, 괵국, 진국부인으로 봉해지고 친척오빠 양충국이는 재상이 되어 통치를 위임받아 많은 친척은 고관이 되었고, 황족과 통혼하였다.

안사의 난 때에 현종과 도망하여 마외역에 이르러 양씨들에게 불만을 품은 자가 양충국을 살해하였고, 양귀비에게 나라를 이 지경을 만든 책임을 물어 불당에서 목매어 죽게 만들었다.

정사에 기록되기를 '그녀는 절세의 풍만한 미인이며 가무에 능하였고,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총기를 겸비한 여인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백은 그녀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하였고, 백거이는 비극의 애정을 '장한가'로 작곡하여 그녀를 중국의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별궁인 화청궁 옥련탕은 다섯 잎의 옥으로 만든 연꽃 중앙에서 온천물이 솟아오르게 하였고, 탕에는 옥으로 만든 용과 물고기를 띄웠으며, 물에는 용뇌향을 풀었다고 한다.

욕조 둘레에는 금 은 보석을 눈부시도록 박은 금수융단을 둘러놓고 30명의 소년들이 부르는 합창을 들으며 양귀비는 목욕을 하였다.

반란을 일으킨 안녹산이 먼저 옥련탕을 메워버린 것은 주민의 원성이 이 욕탕으로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여름냉방 방법은 지붕 위에 물을 뿌리고 얼음 선풍기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양귀비가 사용한 방법은 아니지만 옛날의 여름냉방 방법으로 인간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방법은

여성을 요나 방석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수단의 여성이 가장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는 2가지 형의 미인으로 나눈다.

하나는 한나라 성제의 황후 조비연의 이름처럼 제비같이 날씬한 미인과 양귀비처럼 살찌고 풍만한미인으로 르네상스시대에도 양귀비와 같은 사람을 미인으로 여겼다.

현재는 조비연과 같이 날씬한 것이 미인인데 미인의 기준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영양이 부족하여 마른 시대는 풍만한 것이 미인이며, 영양이 좋은 현대는 뚱보가 많아 날씬한 것이

미인이고, 눈 큰 동네는 눈 작은 것이 미인이다.

터키나 동유럽 여행 때에 눈 작고 광대 뼈가 나온 우리 나라 여성이 인기가 있는 것을 보고

미인의 기준은 보기 힘든 것이 미인의 기준이라는 것을 실감하였다.

*안녹산(安祿山, 703-757)

안사의 난을 일으킨 안녹산의 '안'이라는 성은 중국식 표기법으로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을 말하고,

'녹산'이라는 이름은 '빛'을 의미하는 이란어 '로우샨'(rowshan)을 중국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란계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는 돌궐계의 무녀이라 그는 잡종 야만인 취급을 받았으나 6개 국어를 말하는 그는 30대에 무관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는 부하에게 잘 관대하여 줌으로 많은 부하들이 그를 잘 따라주었고, 또 파견된 사자들에게 뇌물을 주어 현종과 양귀비의 신임을 받아 국경경비군의 1/3을 장악하였다.

양충국이 재상이 되어 안녹산의 많은 부하에 위협을 느껴 그를 현종과 이간을 획책하였고, 이에 위협을 느낀 안녹산은 난을 일으켰다.

양충국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낙양과 수도 장안을 점령하여 자신이 대연황제라고 칭하였다.

그는 얼마 안되어 시력이 약해지고 악성종기에 시달리게 되었다.

안녹산은 애첩의 소생을 편애함으로 왕위의 계승에 위협을 느낀 2남 경서는 측근을 시켜 잠자는 안녹산을 살해하였지만 안녹산의 사명에 따라 난은 계속되었다.

안녹산은 배가 많이 나와 무름을 덮을 정도의 특이한 몸매라고 하며, 하루는 농으로 현종이 '자네 배에는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물었고, 안녹산이 즉시 '오직 충성심만 들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양귀비의 양아들이었다는 등의 많은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양귀비가 목욕했다는 화청지>

(1)당의 문화

한나라는 고유문화와 남조의 6조 시대에 들어온 외래문화가 혼합되어 특이한 문화를 만들었다.

즉 귀족문화와 국제문화의 성격이다.

장안은 세계 제1의 도시로 인구가 200만이 넘어 다고 하며, 관리들과 부호들은 아름다운 공예와 얇은 옷을 입고 짙은 화장의 여인들과 눈이 파란 이란계 무희들이 따라 주는 서구에서 들어온 포도주로 환락을 즐겼다.

각국에서 모여든 유학생, 상인, 예술가, 군인, 승려, 기술자 등이 제각기 다른 풍습과 습관을 지닌 채 살고 있어 국제 인종 박람회와 같았다고 한다.

의자에 앉는 풍습이 유행하였고, 비파와 가죽신에 농산물 오이가 들어온 것도 이 때라고 한다.

(2)당과 한반도

발해가 한반도 및 만주지역에서 각축을 벌이던 때이다. 당나라가 시작되는 618년의 한반도는

삼국시대로, 고구려 영류왕 1년, 신라는 진평왕 40년, 백제는 무왕19년에 해당된다.

621년 신라는 당에 사신을 보내 제일먼저 국교를 맺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631년 국경을 접한 고구려는 사이가 불편하므로 당을 경계하여 1,000리 장성을 쌓았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한 이유는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의 40개가 넘는 성을 빼앗고, 백제는 나당의

교역로를 차단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신라는 당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수나라가 고구려에 패한 것을 감안하여 신중을 기하였다.

당은 사신을 보내어 신라를 치지 말도록 권유하였으나 연개소문은 사신을 굴에 가둠으로 당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645년 안시성 싸움에서 패하였고,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성공하지 못하였다.

당 고종은 나당을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 멸망시키고 668년 고구려 마저 멸망시켰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복하여 평양성에서 노인을 제외하고 젊은 사람은 중국의 외지로 이주시켰는데 이들 중에 *고선지 아버지 고사계는 서역지방으로 이주되었다.

당은 백제 웅진에 5도독부를, 고구려 평양에는 안동도호부를, 신라에는 계림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지배하려고 하였다.

신라 문무왕은 당과 영토 전쟁을 치르고, 안동도호부를 한반도 북쪽 만주로 쫓아내었다.

699년에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고구려 옛터에 나라를 건국하여 처음에는 진이라고 하였으나 후에

발해라고 하였으며, 이로써 당은 아무소득 없이 옛날 영토로 되돌아갔다.

당의 전제왕국이 고려와 조선에 계승되었으며, 교육은 신라 귀족자제가 최고학부인 국학에 유학하였고, 고려는 국학을 본떠 국자감을 만들어 당의 한반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당이 멸망한 907년는 신라, 후백제, 마진의 시대로 후 삼국 시대에 해당한다.

신라 말기는 혼란으로 892년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세웠고,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 건국하였으나

904년 후고구려를 '대 동방국' 뜻인 마진으로 바꾸었다가 911년 태봉(泰封)으로 또 바꾸었으나

918년 왕건(王建) 한테 정권을 빼앗겼다.

왕건은 고려로 국호를 바꾸고 936년에 통일한 후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까지 474년 동안 존재하였으며, 신라는 BC 57년에 박 혁거세가 나라를 형성하여 AD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스스로 항복하여 천년의 역사를 마감하였다.

*고선지(?~755)

고선지의 어버지 고사계는 서역지방으로 이주하여 군의 장교로 있었으며, 그는 아버지를 따라 일찍이 군

생활에 참여하여 장군으로 복무하며, 많은 공적을 남겼다.

그는 747년 토번(吐蕃: 티벳)과 서역의 소발률국을 토벌한 공적으로 안서부도호의 2인자가 되었다.

1차 원정에서 불름(동로마), 대식(大食: 아라비아) 제호(諸胡) 72개국의 항복을 받았다.

고선지는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한 공으로 귀국하여 특진겸좌금오대장군동정원이 되었다.

751년 당나라와 사라센제국의 두 나라가 석국과 탈라스성을 쟁탈하기 위하여 전쟁을 하였는데

제2차 탈라스전투에서 패하여 포로로 잡힌 고선지의 부하 중에 이름은 알 수 없는 종이 만드는

장인(기술자)이 세계 최초의 섬유질 제지법을 유럽에 전파했다고 한다.

고선지는 많은 공적을 남겼으나 755년 안녹산의 난을 평정하는 도중에 모함을 받아 참수 당하였다.

<완도에 세워진 장보고 해상제패 기념탑>

(신라방)

신라인이 당나라 해안지대인 초주와 산둥반도의 등주 그리고 밀주지방에 집단으로 거주한 것을

신라방(新羅坊)이라고 한다.

주로 상인들로 승려는 많을 때에는 1,000명정도가 있었으며 법화원이라는 신라절도 있었다.

그 중에 신라왕족인 자장법사와 관측이 활동하였다.

자장이 수도하던 자리는 '신라왕자 대'라는 이름이 현재에도 남아있으며 그는 궁정에서 환대 받았다.

혜초가 선유사에서 측천무후의 명을 받아 기우제를 지내던 바위가 현재도 남아있다.

원효와 자장은 당나라로 가다가 원효는 해골에서 깨달음을 얻고 돌아갔다.

자장은 643년 선덕왕의 요청에 따라 귀국했는데 대장경을 비롯한 각종 불교관계 물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석가모니가 신라와 관련이 있음을 과시하고자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는 탑을 도처에

건립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조형물이 645년에 세운 황룡사 9층 목탑과 양산의 통도사이다.

의상대사는 당에서 돌아와 낙산사와 부석사를 지었다.

최치원은 879년 황소의 난 토벌 중에 종사관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았으며, 그는 반란자에게 항복을 권장한 문장을 썼는데 매우 뛰어난 문장이었다고 한다.

신라방에 거주하는 거류민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치적 행정기관인 신라소가 설치되었다.

신라의 장보고가 해상무역을 장악하여 신라방은 더욱 번창하였다.

충남의 당진은 당나라와 거래하던 항구에서 온 이름이다. [혜초와 삼장 참조]

(3)5대 10국(907-979, 70년간)

당나라가 멸망 뒤에 약50년 동안 무장들이 작은 나라를 세워 서로 다투었다.

화북중앙에 5나라가 일어나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이며 지방에는 전촉, 후촉, 남당, 오, 초 등

10개 나라가 일어나 이를 '5대 10국(五代十國)'이라 한다.

6] 요나라(916-1125, 209년간)

요나라는 거란족이 중국을 정복한 소수부족이 세운 왕조 중의 하나이다.

5세기이래 요하(遼河) 상류인 시라무렌(Siramuren) 유역에서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거주하였다.

거란족은 6-9세기에 수와 당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발전하여 당이 쇠약한 틈을 이용하여 916년에 즉위하여 중국식으로 황제라고 칭한 사람은 유목민 거란족의 야율아보기이다.

상경일황부에 도읍하고 서쪽의 위구르를 제압하여, 외몽골, 동투르키스탄을 지배하였고, 발해를 멸망시켜 만주전역을 장악하였다.

2대 태종은 만리장성 이남의 땅을 받아 '요 나라'라고 하였고, 후진을 멸망시키고 계속하여 하남성으로 진출하려다 실패하여 철수하였다.

제6-8대에 전성기였으며, 6대 성종은 송을 공격하여 1004년에 조공을 받고 화의를 맺었다.

서하(탕구르)를 공격하여 중앙아시아에서 페르시아까지 지배하였다.

여진족이 강하여 지면서 1115년에 금나라를 건설하여 1125년에 금은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황제 일족인 야율대석은 서쪽으로 도망가 서요를 세웠다. [서요 참조]

요(거란)와 발해 [돌궐과 발해 참조]

925년 12월말 야율아보기는 중원지방으로 진출하려 하였으며, 배후세력인 발해를 제거하기 위하여 발해를 공격하여 보름만인 그 이듬해 1월 15일에 멸망시켰다.

발해는 귀족간의 권력투쟁이 극심하여 거란를 방어할 수 없었으며, 이로써 15대 왕 230년간 지속된

발해(698-926)의 역사는 끝이 났다.

거란은 발해 땅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거란 황제의 맏아들로 하여금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발해 유민은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며, 이 운동은 약 2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발해유민 중에 수만 명은 고려로 들어왔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의 주류를 이루었고, 주민은 말갈족으로 구성된 나라이다.

그러나 요사이 중국은 발해를 중국역사에 포함시키는 왜곡된 역사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속 일본기(續日本紀)' 기록 속에 일본이 보낸 발해의 외교문서(발해국서-渤海國書)에 전해지는 내용 가운데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였고, 일본도 이를 인정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요(거란)와 고려

993년 고려 성종 12년에 소손녕이 80대군으로 침입 서희의 담판으로 물러갔다.

1009년 고려의 강조가 김치양을 죽이고 7대 목종을 폐위하여 8대 현종을 세웠다.

거란 성종은 1011년 함부로 왕위를 갈라치운 죄를 물어 현종2년에 침입하여 강조를 죽이고 개성을

불태웠는데 이 때에 귀중한 자료가 불타버렸다.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3차 침입하였으나 강감찬의 귀주대첩에서 대패하여 소배압은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겨우 수천 명만 거느리고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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