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역사를 알고싶어요(내공50)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역사를 알고싶어요(내공50)

작성일 2007.08.21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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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역사 자세히 가르쳐 주세요

이런식으로.

삼국시대

 

 

 

후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이런식으로 자세하게 쓰시면 ㄳ하겠습니다, 긴줄 싸이트라면 더욱더 좋고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삼국시대 ㄱㄱ~

 

고구려

1.건국과 발전

건국-주몽이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에 세움

발전- 삼국중 가장 먼저 나라의 모습을 갖춤.

일찍부터 주벼 지역을 정복하는데에 힘을 쏟음.

소수림왕:불교를 받아드리고, 태학을 세움.



*태학-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3년)에 설치된 국립교육기관.

고구려의 전성기 (5세기)



2.광개토 대왕-요동,요서 지방을 모두 차지하였고, 만주로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신라를 침략한 왜구들을 격퇴하였습니다.


3.장수왕-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서으로 옮기고, 남쪽으로 영토를

넓혔습니다.

광개토 대왕릉비 건립(414년):아버지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새겼습니다

4.중국과의 침략 극복

수나라-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당나라-양만춘 장국의 안시성 싸움.

백제

1.건국과 발전


건국-온조가 한강 유역에 세움.

발전-삼국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음: 넓은 평야를 영토로 가지고 있었고,

황해를 통해 중국과 교류할수 있었기 때문에.



백제의 전성기(4세기)

2.근초고왕-북쪽으로 한강 이북까지, 남쪽으로 마한을 통합하여 남해안까지

영토를 넓혔습니다.

-중국,일본에도 세력을 뻗쳤습니다.

-*유학발달:왕인 아직기 같은 학자들을 일본에 파견하였습니다.

*유학-왕건강화:유교장려,역사책 서기 편찬


-22개의 담로(지방관할지역)를 설치하였습니다.

-가야와 마한을 굴복시킨후,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구려의 남하를 막았습니다.

3.도읍지 변경

위례성(서울):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의 땅을 넘겨 주었습니다.

웅진(공주):고구려의 남하를 막기위해 신라와군사 동매을 맺었습니다.

사비(부여):국력을회복하였습니다.

신라

1.건국과 발전

건국-박혁거세가 경주 지방에 세움.

발전-고구려나 백제보다 발달이 늦고, 전성기고 가장 늦음.

법흥왕:불교를 나라의 종교로 인정한후, 왕권을 강화함.

2.진흥왕-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화랑도를 정비하였습니다.

-영토확장:한강유역 차지, 대가야 편입, 함흥평야 지역 차지등.

-새로 차지한 영토에 기념비를 세워 국력을 과시 하였습니다.

-불교신앙을 통해 호국 정신을 일으켰으며,

신라 최대의 절인 황룡사,법주사등 수많은 절을 세웠습니다.


*삼국의 불교 수용

1.필요성: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2.고구려:소수림 왕 떄에 전진의 왕이 보낸 승려 순도와 아도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전해 받았습니다.

3.백제:침류왕때 동진에서 온 마라난타를 궁중에 두고 불법을 전하였습니다.

4.신라:법흥왕떄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 되었습니다.


*한강의 중요성

1.삼국 모두 최고의 전성기에는 한강 유역을 차지 하였습니다.

2.중구고가의 무역,교통로,정치활동 및 농업의 중심지로서의 조건이

알맞은 곳입니다.

 

 

 

 

후삼국시대

 

후 삼국시대 (後 三國 時代)

 

 후 삼국시대는 고려(高麗)의 왕건(王建)이 936년 통일하기 전까지 50여년간 지속되었다.

 

후 백제 (後 百濟)

 

  가장먼저 세력을 떨친 건 후 백제의 견훤이었다. 신라의 장수였으나, 사벌주를 근거로 세력을 확장한 뒤 892년(진성왕 6) 무진주(武珍州 : 지금의 광주)에서 그의 위세를 떨치면서 도읍을 완산주로 옮기고 후백제왕을 자칭했다.

 

후 고구려 (後 高句麗)

 

 후 고구려를  세운건 왕건이 아닌 궁예다.

궁예는 신라에 왕자 출신이나, 태어날때부터

기이하게 태어나 쫓겨난 인물이었기 때문에

나라를 건국할때부터 신라에 대해 적대적인

인물이었다. 이후 영토를 계속 확장하여 신라보다도 큰 영토를 가지게 되었으나, 성격이 점점

포악해지고, 괴팍해지자, 신하들은 그 보단 온화한 왕건이 적임자라 판단하여 왕건을 추대하였다.이로써 후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후백제~~`

견훤은 본시 상주(尙州) 지방의 농민 출신으로, 군에 들어가 서남해 방면에서 전공을 세우고 비장(裨將)이 되었다. 이때 신라는 국정이 문란하여 각지에 도둑이 창궐하였는데, 견훤은 기회를 포착하여 군사를 일으켜 무진주(武珍州:光州)에 쳐들어가 이를 점령하였다.

그는 계속 완산주까지 점령, 백성들에게 백제 의자왕의 숙원을 풀어준다고 선언하고 892년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견훤은 건국하면서 중국의 오(吳)·월(越)과 통교를 하는 한편 영토를 확장하였고 신라의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경순왕(敬順王)을 세우고, 왕건(王建)이 세운 고려와도 여러 차례 싸웠다.

견훤에게는 배다른 아들이 많아 부자·형제 사이에 불화와 반목이 그치지 않았는데, 견훤은 넷째아들 금강(金剛)을 유독 사랑하여 장차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신검(神劍) 등 다른 아들들은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가두고 금강을 죽인 다음, 신검이 왕위에 올랐다.

3개월 후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은 고려로 망명, 태조와 협력하여 10만의 대군으로 후백제를 총공격했다. 격전 끝에 후백제는 고려에 굴복, 건국한 지 45년 만에 멸망하였다

 

후고구려

 

궁예는 892년 북원(:)의 적괴 양길()의 부하가 되어 그의 신임을 얻고 강원도 각지를 공략하는 한편 수년간 자기의 세력을 부식()하고 임진강() 일대를 공취하여 차차 독자적 기반을 닦아 898년에는 송악군(:)에 웅거하여 자립의 기초를 세웠다. 이 무렵 왕건(:고려 태조)이 궁예의 휘하로 들어왔으므로 그에게 철원태수()의 벼슬을 주고 북원의 양길에게 대항하게 하여 그 땅을 빼앗고 901년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당시 궁예는 신라에 의하여 망한 고구려를 대신하여 복수한다고 호언하며 서북지방의 인심을 모으려 하였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라 하였으며 신라의 관제를 참작하여 관제를 정하고 국가의 체제를 갖추었다. 이듬해 국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성책()이라 개원()하였다가 911년 국호를 태봉이라 고치는 한편 연호를 수덕만세()라 개원, 914년 다시 정개()라고 고쳤다. 궁예는 철원을 중심으로 하여 강원 ·경기 ·황해의 대부분과 평안 ·충청의 일부를 점령함으로써 신라나 견훤()의 후백제보다도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태봉은 계속 신라의 북쪽을 침범하는 한편 왕건으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서남해 방면으로부터 후백제를 침공하게 하여 진도() ·고이도성()을 격파하고 금성(:)을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국토가 넓어짐에 궁예는 대규모의 궁궐을 건축하고, 오행사상()을 믿어 신라의 금덕()에 이기고자 자기를 수덕()으로 하였으며, 또한 스스로를 미륵보살()이라 칭하며 일상의 기거동작을 부처와 같이 위용을 갖추게 하였다. 원래 성격이 괴상한 궁예는 점차 전제적인 군주로 변하여 호화스런 생활을 하면서 잔인성을 나타내어 간언()하는 자를 박살()하고 드디어는 그 부인 강씨()까지도 잔학하게 죽여 폭군으로 타락하였다. 민심이 날로 이탈하고 측근자들은 전전긍긍하게 되어 마침내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부장 4인이 의논하여 민중의 신망을 얻은 왕건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 궁예를 쫓아내니 그는 부양(:)에서 백성들에게 살해당하였다. 궁예는 원래 승려 출신으로 정권을 잡은 뒤에도 모든 기거동작을 불교식으로 하여 그가 남긴 석등롱()이나, 팔관회()를 개최한 일 등은 뒤에 고려에도 영향을 끼쳤다.

 

 

고려시대

1. 고려의 왕

▶ 475년 간의 고려왕조기에는 태조에서 공양왕까지 34명의 국왕이 배출되었다. 국왕의 평균 재위기간은 13.97년으로, 대략 14년이다.
현재 대통령의 임기가 5년 단임제이고, 현대사에서 가장 오래 대통령직에 있었던 박정희가 18년 재임했던 것을 참고로 할 때, 고려 국왕의 평균 재위기간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다.

▶ 국왕의 호칭에는 조(祖) ·종(宗), 그리고 왕(王)이 있는데, 조와 종은 황제국에서 사용하였고, 왕은 제후국에서 사용하였다. 고려에서는 왕건만이 조로 불렸고, 23명이 종(2대 혜종 - 24대 원종), 10명이 왕(25대 충렬왕 - 34대 공양왕)으로 호칭되었다. 원 간섭기에 들면서 고려는 원의 부마국으로 그 위상이 낮아지면서 조와 종을 사용할 수 없었다. 더욱이 원으로부터 충성을 강요받으면서 신하들에게나 썼던 ‘忠’자를 왕명(王名)으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충렬 ·충선 ·충숙 ·충혜 ·충목 ·충정왕)
원간섭기 이후 고려말에 이르러서도 조와 종은 사용되지 않고 계속하여 왕이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기라는 특수한 정치상황에 의한 것이다.

▶ 고려 왕실의 혼인 관행은 근친혼(近親婚)이었으며, 1명의 왕에 평균 4명의 왕비가 있었다. 고려 국왕의 평균 수명은 44세로, 고려전기 39.3세에서 고려후기에 이르면 49.79세로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있다.




2. 고려의 명칭

▶ 궁예는 901년(신라 효공왕 5)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다. 궁예가 국호를 후고구려라고까지 내세우면서 고구려 계승의식을 강렬하게 내세운 것은 옛날 고구려 지역의 세력들을 모으기 위해서였었다.
그러나 신라 왕족 출신인 궁예에게 있어 고구려 계승의식은 철저하진 못했던 것 같다. 실제로 궁예는 고구려라는 국호를 내건 3년(904 신라 효공왕 8)만에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다시 7년만에 태봉으로 고치고 있다.
이렇게 되자 고구려의 부흥을 위해 몰려들었던 많은 호족들이 등을 돌리게 되었고, 궁예가 몰락하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 궁예를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의 왕이 된 왕건은 다시 국호를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라 정하고 궁예에게서 떠나갔던 옛 고구려 지역의 많은 호족들을 통합할 수 있었다.
왕건의 강한 고구려 계승의식은 자신의 출신기반이 송악이었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고구려의 강한 무적(武的) 성향과 계속된 북방개척정책들에 대한 왕건의 동경에서 나온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로 왕건은 즉위하자마자 북진정책을 표방하였고, 이러한 북진정책은 고려왕조 내내 중요한 대외정책의 방향이 되었다.


3. 고려의 성립

▶ 왕건은 송악지방의 정치적·경제적·군사적 기반 위에서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고려 전기에는 호족통제책, 왕권강화정책, 민심안정책 등의 여러 정책들을 통해 국가기반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무인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나름대로의 성과를 보이면서 안정된 국가를 유지하였다.

▶ 태조는 통일국가를 이룩하였으나 여전히 강성한 호족들 때문에 왕권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호족들을 일정부분은 회유, 일정부분은 통제하면서 자신의 기반안으로 흡수하려 하였다.

▶ 태조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뒤를 이은 혜종과 정종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반란으로 인해 얼마지나지 않아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다시 왕권이 안정된 시기는 광종대이다.
광종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실시, 백관공복의 제정 등을 통해 왕권강화를 모색해 나갔다. 그러나 말년에 호족들의 숙청작업으로 왕권이 실추되기에 이르렀다.


4. 고려의 발전과 전개

▶ 이후 경종의 전시과제도는 고려 토지제도의 근간이 되었고, 성종은 중앙집권화정책으로 중앙관제의 제정과 지방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성종은 지방의 교육정책에도 관심을 보여 유교적 교양을 지닌 인물들을 양성하는데 공헌을 하였다. 고려는 이후 계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는데, 목종대에는 고려 중앙관제가 완성되었고, 현종대에는 중앙관제를 정비하였으며, 문종대에는 경종 때의 전시과를 개정하였다.
고려는 문종대에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정치권력과 경제력의 특권을 갖춘 전통적인 문벌귀족과 지방출신의 신진관료들과의 대립이 증폭되기 시작하였다.

▶ 그러다가 1170년 무인란으로 그동안 쌓아왔던 고려의 귀족사회가 붕괴되었다. 물론 무인란의 직접적인 계기는 전통적인 문벌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무인정책에 대한 모순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사태는 역전되어 많은 무인들이 예전에 문벌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가 무려 100년간 계속되었다


5. 고려의 사회, 경제



▶ 신분제도는 어떤 사람의 사회적인 권리나 의무를 출생부터 일정하게 규정하여 두는 것이다. 국가에서는 되도록이면 모든 국민을 여러 신분계층으로 나누고자 하였다. 고려 전기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신분의 계층마다 누리는 사회적 권리와 의무에 각각 차이가 있었다.
고려의 신분구조는 크게 귀족ㆍ양인ㆍ천인의 세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정치적인 입장에서 볼 때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도 나눌 수 있다. 국가는 사회의 조화와 균형을 위해 신분변동을 억제하였으며, 대체로 태어날때의 자신의 신분이 평생을 좌우하기도 하였다.

가족제도
▶ 가족은 혼인과 출생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가족과 가족사이의 결합으로 친족이 형성된다. 고려의 가족은 단혼적인 부부와 미혼자녀들로 이루어진 소가족제도가 기본이었다. 고려의 혼인은 일반적으로 솔서혼(率壻婚)이다. 지금은 결혼을 하면 대개 신랑쪽의 집으로 들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결혼 뒤의 거처가 정해져 있지도 않았다.
상속제도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재산을 상속하였다. 또한 고려는 당의 양자제(養子制)를 본받아 양자ㆍ양녀가 있었고, 노부모의 봉양이나 제사도 반듯이 아들이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딸이나 사위가 맡는 일도 많았다. 이처럼 고려는 아버지쪽이나 어머니쪽 모두 동등한 대우를 받았는데, 이러한 특성을 ‘양측적 친족제’라고 부른다.

토지제도
▶ 토지제도는 전시과체제를 기본으로 하여 지배층을 중심으로 토지가 분배되었다. 전시과는 국가의 관직이나 직역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지위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는 것이다. 919년에는 역분전이 지급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976년(경종1)에 처음으로 전시과가 설정되었다.
이후 이 전시과는 998년에 하나의 체제로 정비되었고, 관직의 고하에 따라 1과에서 18과로 나누어 토지를 지급하였다. 또한 이렇게 달라진 전시과는 1076년에 다시 재편성되었다. 이때에도 18과로 나뉘어 있었지만, 이전보다 토지지급액이 감소하였고 지급대상도 현직관료들에게만 해당되게 제한되었다.

▶ 전시과는 직역에 대한 반대급보로 관리들에게 토지 자체를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 토지에서 일종의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수조권을 주는 것이다. 더구나 관리들이 받게 되는 수조도 그들이 직접 걷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수취하여 나누어 주는 것이므로 국가의 공적지배에 관리들이 편제되어 있는 것이었다.
공음전시는 전시과에 비해 사적인 지배가 강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본래 국가에 공이 있는 관리들에게 지급하는 것이었다. 공음전시는 5품 이상 관리의 자손들에게 지급되었는데, 전시과와는 달리 자손에게 세습되었고, 이는 관인신분의 보호를 위한 것이었다.
이밖에 6품 이하 관리의 자제에게는 한인전을, 자손이 없는 하급관리와 군인 유가족에게는 구분전을 지급하였다. 또한 향리에게는 외역전을, 군인에게는 군인전이 지급되었다.

수취제도
▶ 수취제도는 토지제도와 연결되어 성립되었다. 국가는 국민들로부터 조세ㆍ공부ㆍ역역의 세가지 세금을 수취하였는데, 이것들은 고려의 주요한 재원이 되었다. 조세는 일정한 수취율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유지인 민전의 조세율은 수확의 1/10이고, 전호제 경영을 할 경우 1/2을, 공전에서는 1/4의 조세로 수취하였다. 공부는 지방에서 포나 토산물 등 현물을 납부하는 수취제도이다. 공부는 매년 일정한 공물을 바치는 상공(常貢)과 때에 따라 필요한 만큼을 임시로 공납하는 별공(別貢)이 있었다. 공물은 그 종류와 액수가 주현에 할당되어 있었고, 주현은 이를 각각의 집에 배분하여 수취하였다. 분배 기준은 각각의 집을 9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있게 징수하였다.
역역은 국가가 국민들의 노동력을 수취하는 제도였다. 16세부터 60세까지의 남자는 역을 져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대체로 농민들의 역역은 성곽의 축조, 관아의 영조, 제방의 축조, 도로의 개수 등 토목공사에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6. 고려의 문화


▶ 고려는 불교가 성하여 불교국가라고도 할 수 있다. 유교가 고려의 정치이념이 되어있었는데 반해 불교는 정신세계의 지도이념이 되었고, 현실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불교는 고려의 문화ㆍ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와같이 불교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왕실ㆍ귀족들의 두터운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불교가 국가나 개인의 현세생활에 행복과 이익을 준다고 믿고 열심히 숭상하였다. 고려의 불교가 현세구복적이고 호국적인 성격을 띤 것은 이 때문이다. 고려의 이러한 숭불정책은 이미 태조대부터 실시되고 있었다. 태조는 훈요십조 중 1조에서 “고려는 부처님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불교를 진흥시켜 선종과 교종의 사원을 창건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개경에 법왕사, 왕륜사, 흥국사 등 10개의 사찰을 지었다.
또한 불법이 국가를 비보한다는 관념으로 사원이 건립되었고 이와 더불어 각종 불교행사의 실시도 있었다. 고려에서는 정월보름달에 연등회가, 11월 15일에 팔관회가 가장 커다란 불교행사였다. 그것은 가무와 음주로 함께 즐기며, 제불과 천지신명에 제사하여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예술의 발달
▶ 고려는 귀족사회의 발달로 호화로운 예술문화가 발달하였다. 귀족들은 그들의 사치생활을 충족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예술작품을 만들어 즐겼으므로 예술면에서는 상당한 발달을 가져왔다. 귀족 취향의 예술품은 독특한 무늬를 넣어 만든 상감청자와 서화, 음악 등이 있다. 또한 고려청자와 금속공예 등도 호화롭고 정교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해 건축과 조각에서는 이전시기보다 퇴보한 감이 있다. 고려 후기의 예술은 전기에 비해 다소 쇠퇴한 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풍의 변화와 원나라 예술의 영향으로 조형미술의 형태와 양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역사학의 발달
▶ 고려는 이미 전기부터 유학이 발달함에 따라 유교적인 역사서술체가 정립되었다. 그것은 편년체인 실록편찬에서 기전체인 정사체로 완결되었다.
현종때 거란의 침입으로 많은 역사기록들이 불타버려 1145년(인종23)에 김부식에 의해 편찬된 『삼국사기』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이다. 이밖에 고종때 승려 각훈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해동고승전』과 같은 왕때 이규보가 지은 『동명왕편』, 일연의 『삼국유사』그리고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가 있다.
한편 후기에 이르면 유교적인 신흥사대부의 대두로 『삼국사기』의 전통을 이은 유교사관이 보다 발달하였다. 충렬왕때 원부를 대표로 관찬한 『고금록』과 정가신이 지은 『천추금경록』, 충숙왕때 민지가 지은 『본조편년강목』, 공민왕때 이제현이 엮은 『사략』등에 유교의 합리주의사관이 반영되고, 거기에 정통과 대의명분을 존중하는 성리학적 사관이 나타난다.


7. 고려의 대외관계


▶ 고려시대는 유달리 다른 민족의 침입이 잦았다. 그 당시의 대륙정세가 불안정하여 계속해서 그 파장이 고려에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대체로 고려시기에는 북방의 유목ㆍ수렵민족인 거란과 여진, 그리고 몽고 등이 차례로 일어나 중원의 한민족을 압박하고 대륙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북방민족의 등장은 동아시아의 국제적인 역학관계에도 영향을 주었으므로 고려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 고려는 건국 이후 오대로부터 송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대왕조에 대해 친선관계를 유지하였으며, 특히 송나라와는 문화와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반해 북방민족인 거란이나 여진, 그리고 몽고는 야만시하고 대립정책을 펴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북방민족이 크게 일어나 중원에 진출하게 되어서는 전통적인 외교정책을 대폭 수정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이들의 압력에 그때그때 지배층이 누구냐에 따라 항시적으로 변하였고, 여전히 이들을 외교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거란이 압박을 해왔을 때에는 건국 초기에 굳건한 자주적 의식을 바탕으로 항쟁을 계속하여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후 12세기에 들어서서는 정치가 혼란하게 되자 여진과 강화를 맺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13세기 몽고가 침입했을때 최씨무인정권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항쟁의 굳은 결의를 고수하고 강화도로 천도하여 항전을 계속하였다.

▶ 그러나 이러한 고려의 대외정책은 당시의 국제적인 변화양상을 파악하고 내린 결과라기보다는 당시 고려 내의 정치가들 사이의 이해관계에 의해 행해진 것이다.
결국 몽고와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 끝에 대몽항쟁은 종식되고 원간섭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8. 고려의 멸망

▶ 1270년 무인정권이 붕괴되고 왕정이 복구되었지만, 고려는 이보다 더 큰 전환을 맞게 되었다. 고려는 원의 도움으로 왕권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원의 간섭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민족의 끈질긴 항쟁에도 불구하고 원은 여러대에 걸쳐 고려의 정치를 좌지우지하였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내세우고 혁신적인 개혁안이 제시하면서 자주적인 국가로서의 고려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 그러나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공민왕이 암살됨으로써 지속되지 못하고 고려는 다시 혼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권문세가와 신흥사대부의 대립으로, 대외적으로는 왜구와 홍건적의 계속되는 침입으로 정국은 더욱 어수선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왜구토벌에 큰 공이 있었던 이성계 일파는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새로운 국가인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ㅈㅅ합니다 제가 조선시대는 바빠서 ...

같은데 뒤져보세요 ㅈ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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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도읍지 삼국시대 재가알고있는거;;;

 고려 = 개경

 통일신라 = 금성

 조선 = 한양

 백제 = 위례성, 웅진성, 사비성

 신라 = 경주 (경주 되기전 3개의 도읍지 가있음.)

 고구려 = 졸본성, 국내성, 평양성

입니다.  

부족 하시다면

다른거 찾으세여 전 이거밖엔 모릅니다....;;;;

 ㄴ ㅐ 공 주 ㅅ ㅔ 엽 ~  그럼 이상

 

 

고려,조선시대 모두 알고싶어요 !! 내공...

... 요즘들어 역사책과 역사를알고싶어서...이렇게 물어봅니당 !! 삼국 시대 1. 100명의 위인들 노래중 김유신이... 아니면 고조선떄 흩어진 민족끼리 모인거예요? 3. 백제의...

삼국시대조선후기의 생활모습...

삼국시대조선 후기의 생활모습과 발전모습좀 오늘 져녁까지 가르켜주세요 내공50걸어요 고구려·백제·신라의 세... 삼국 시대 문화사에 있어 불교의 역사적 기능과 공헌은...

통일신라 , 삼국시대 때 유명한 역사...

조선시대 , 통일신라 , 삼국시대 때 일어난 누구나 다알고있는 유명한 역사 각각 10개씩만 좀 알려주세요 !!!!! 조선시대 1.왕자의 난 2.훈민정음창제 3.연산군폐위 4.임진왜란...

조선시대 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요!(내공...

... 뭐 전쟁 보다는 주로, 정치면에서 알고 싶습니다 전쟁은 유명한거 아니면 때려치구요... 조선시대역사를 알기쉽게 엮은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박영규 저. "한권으로...

조선시대까지의 역사를알고싶네요.

우리나라의 역사 (삼국시대-조선시대)알고싶습니다^^ 삼국시대 - 사실상 열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대가야, 소가야, 금관가야, 고령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우산국, 탐라국...

급) 방학숙제 삼국시대 조선시대 각각50...

저 방학숙제로 역사책읽고 문제내고 답달기 인데 도와주실분 구해요 !! 삼국시대 50문제와 답 조선시대 50문제와 답 이렇게 해주세요!! 내공100입니다 급해요~!! 여기에서...

삼국시대~조선시대 역사연대표

... 방학숙제에 삼국시대~조선시대 까지 역사연대표를... 부탁드려용 내공100걸어요 삼국시대연표 BC 57년... (歲遣船) 50척으로 정함. 1443년 12월 훈민정음(訓民正音)...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각지에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각지에서 일어났던 유명한 민중의 난을 알고 싶어요? 각각의 난들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간단하게 정리해주면 더욱좋고 발생되었던 배경도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