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의 대하여

문화재의 대하여

작성일 2007.11.18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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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의대하여 합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안녕하세요~!! 제가 글좀 올릴게요^^ 좀길지만 꼼꼼히 읽어보셔서 도움되셨으면 하네요^^

 

 

 

1. 경기도



1) 개성 남대문 (開城南大門)



경기도 개성시 북안동에 있는 개성 내성(內城)의 남문(南門).



아래층은 석축, 위층은 앞면 3칸(12.63m), 옆면 2칸(7.96m)인 목조 단층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1394년(태조 3)에 처음으로 지었고, 여러 차례 수리하다가 1900년(고종 4)에 크게 고쳐 지었으나, 1950년 12월에 불타 버렸고 1954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내성은 1393년에 쌓은 석성(石城)으로 둘레가 24리 40보이고, 남대문, 동대문, 동소문, 북대문, 북소문, 눌리문(訥里門), 진언문(進言門) 등 일곱 개의 문이 있으며, 두 곳에 수구문을 설치하였다.



축대는 길쭉하게 다듬은 네모난 화강석으로 정연하게 쌓았으며 그 복판에는 무지개문을 냈다. 길의 양쪽 밑부분에 댓돌을 놓고 그 위에 부챗돌을 반원형으로 쌓아올렸다. 축대 위에는 숨어서 적을 쏠 수 있게 성가퀴를 돌리고 거기에 여러 가지 형태의 쏘는 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축대 위 네 모서리에는 빗물이 모여서 흘러내릴 수 있는 시설도 해놓았다.



문루의 기둥은 돌기둥 위에 배흘림기둥을 이어 세웠는데, 밑의 돌기둥은 높이가 1m이다. 기둥 사이는 앞면 가운데 칸을 양쪽 칸보다 좀 넓혀 중심 부분을 강조하였고, 네 모서리의 기둥들은 다른 기둥들보다 조금 높게 하였으며 약간 안쪽으로 눕혀 기둥에 큰 안쏠림을 주었다.



이같은 형식은 건물을 안정되게 보이게 하면서도 실제로 건물의 강도를 높여주는 방법으로서, 우리나라 목조건물에 예로부터 써내려온 방법의 하나이다. 기둥 위에는 액방과 평판방을 얹었으며 평판방의 양쪽 끝을 약간 들어올려 건물이 훨씬 날렵해 보인다.



공포는 포식두공으로 첨차를 맞추어 안팎 3포로 짜올렸다. 여기에는 안쪽에 포의 수를 늘려 안도리를 서까래까지 올리는 방식 대신 안쪽의 장여를 겹으로 하고 그 가운데에 화반을 끼우는 방법을 써서 고려 말기 공포의 특징인 검소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문루의 널마루는 가운데 한 칸에만 깔고 내부는 통천장으로 하여 안을 시원하게 하였다. 지붕은 겹처마의 합각지붕으로 용마루·박공마루·추녀마루·지붕면이 모두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었다. 날아갈 듯 가볍게 쳐든 추녀는 몸체에 어울리게 경쾌한 모습으로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뛰어난 건축미를 보여주고 있다. 문루에는 모루단청을 입혀서 은근하면서도 무게감을 주고 있다.





2) 선죽교 (善竹橋)



개성시 선죽동 자남산 동쪽 기슭의 작은 개울에 있는 고려시대의 돌다리. 구명은 선지교라 하였으며, 다리의 동쪽에 한석봉 글씨의 비가 있다.



돌기둥과 노면이 맞닿는 부분에는 시렁돌을 철도의 침목모양 올렸으며, 이 돌은 좌우로 거의 튀어나오지 않았다. 돌기둥 위에 마련된 노면에는 양쪽 가에 길다란 난간돌을 놓았고 그 사이를 여러 줄의 판석으로 깔았다.



노면 위에는 교량의 난간주 구실을 하는 돌기둥들을 3단으로 쌓았다. 맨 아랫돌은 거형단면의 돌로서 일정한 치수의 돌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중간돌 사이에는 각 돌기둥을 이어주는 8각의 돌을 꽂았고 맨 윗돌은 비석의 끝처럼 완만한 화강석을 사용하였다.



이 다리는 고려말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하고 오다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 4, 5인의 철퇴에 맞아 피살된 곳으로 유명하다.이 돌다리에는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 있다 한다.



주위에 두른 석란(石欄)은 1780년(정조 4)에 가설하였고 옆에 비각이 있는데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개가 들어 있다.





3) 영통사 오층탑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오관산 남쪽 기슭 영통사지에 있는 고려 초기의 석탑. 높이 약 6.5m.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 제37호.



화강암으로 축조된 이 석탑은 1단의 기단에 기단면석을 갖춘 5층석탑으로 고려 초기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1단으로 된 석탑의 기단은 고려 초기의 탑인 불일사오층석탑이나 현화사칠층석탑과 유사하게 우주(隅柱)를 모각(模刻)한 면석(面石)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위에 갑석을 갖추고 있다.



석탑의 탑신은 높은 편에 속하며, 이와같은 양식은 8, 9세기에 유행한 통일신라시대 일반 석탑의 탑신석에 비하여서는 낮으며, 고려 중엽 이후에 나타나는 석탑의 탑신석에 비하여서는 높다.



각 탑신석에는 우주를 모각하였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옥개석 역시 경사가 급하여 불일사오층석탑이나 해주오층석탑과 유사하며, 옥개석의 낙수면(落水面) 전각(轉角)이 약간 있을 뿐이다.



특히, 옥개석 받침에 있어서는 1층 탑신석과 2층 탑신석에 속하는 옥개석은 4단을 각출하고 있으며, 3/4/5층의 옥개석에서는 3단을 각출하고 있다. 최상부의 옥개석상에는 상륜부를 설정하였던 부분이 있으나 현재는 유실되어 없다.



전체적으로 보아 탑신석과 옥개석의 비례가 고려 초기의 탑에서 보이는 특징을 갖추고 있고 통일신라의 탑에서 보이는 균형잡히고 정제되어 있는 경쾌한 미적 감각은 없다.



한편, 영통사의 영통사서삼층탑 역시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에 속한다. 높이가 3.7m인 이 석탑은 기단과 탑신 네모서리에 기둥을 두드러지게 새기고 옥개석에는 네줄의 굄선을 주어 단조로운 맛을 제거하고 아름다운 균형과 안정감을 나타내고 있다.





4) 현화사비 (玄化寺碑)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현재의 북한의 행정지명으로는 개성직할시 장풍군 월고리)에 있던 현화사의 창건연기 등을 기록한 고려시대의 사적비. 현종 12년(1021)에 건립하였다.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이다.



비신의 높이는 2.36m, 너비는 1.28m이며, 옥개석·비신·귀부를 모두 갖추고 있다. 귀부의 조각은 생동감이 있으며, 이수의 장식적인 운룡문이나 비신 측면의 운룡문도 조각이 뛰어나다.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의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와 비슷한 양식이다.



비문에는 현종이 양친인 안종과 헌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현화사를 창건하였다는 창건연기와 절의 규모, 연중행사 및 국가에서 베푼 여러 가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뒷면에 추각한 음기에 의하면, 현종이 국가의 번영과 사직의 안녕을 위하여 매년 4월 8일부터 사흘간 밤낮으로 미륵보살회를 베풀고, 양친의 명복을 위해서는 매년 7월 15일부터 사흘간 밤낮으로 미타불회를 열었다고 한다.



또한, 《대반야경 大般若經》 600권, 3본의 《화엄경 華嚴經》, 《금광명경 金光明經》,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등의 인판을 새겨 이 절에 두었으며, 특별히 ‘반야경보(般若經寶)’라 부르며 길이 시방(十方)에 인시(印施)하게 하였다 한다.



비신 상단에 현종의 어필로 “靈鷲山大慈恩玄化寺之碑銘”이라 전하였는데, 이 사실은 《고려사》에 보인다. 비신 앞면은 원비명으로 주저가 짓고 채충순이 썼으며, 뒷면은 채충순이 짓고 썼다. 주저와 채충순에 관해서는 《고려사》 열전에 전하며, 주저는 송나라 온주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한 문인이다.



앞면의 글씨는 자경 2㎝의 구양순체에 기초한 해서로, 매우 정결하다. 뒷면의 글씨는 자경 2㎝ 안팎의 행서로, 구양순의 해서필법을 지니면서 왕희지의 행서를 시도하여 어색한 면도 없지 않으나 개성을 살린 점은 돋보인다.





5) 현화사칠층석탑 (玄化寺七層石塔)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현재의 북한의 행정지명으로는 개성직할시 장풍군 월고리)의 현화사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칠층석탑. 높이 8.64m로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이다.



현화사지에는 이 칠층석탑 외에 당간지주·비·석교 등이 있으며, 석등은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이전하여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화사는 1018년(현종 9)에 창건되었으며, 이 탑은 1020년에 건립되었다.



방형(方形) 평면의 탑이며 1단의 기단부와 7층의 탑신과 상륜부로 되어 있다. 탑의 높이는 8.64m로서 고려석탑 중에서는 큰 편에 속한다. 기단부는 네 모서리와 기단부 각 면의 한가운데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돌 사이에 장방형으로 다듬은 돌들을 벽돌처럼 쌓아 만들었다.



기둥돌 위에는 세 단의 받침을 가진 넓고 편평한 두꺼운 갑석을 놓았다. 기단부를 이렇게 처리한 것은 희귀한 예에 속한다. 기단부의 한 변은 3.9m에 이르고 7층으로 된 탑신은 위로 올라가면서 체감법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주고 있다.



매층의 탑신 밑에는 2단의 굄을 마련하였고 탑신 네 모서리에는 우주(隅柱)를 천각하여 나타냈고 탑신의 각 면에는 연화형 안상(眼象)을 조식하고 이 안상 속에 불상을 정교하게 장식하였다.



불상의 형태는 석가상·사천왕상·나한상들이다. 옥개석들은 전체적으로 얇은 편이고 처마는 깊으며 상하연은 양쪽으로 비교적 심하게 휘어 올라 있다.옥개석 밑에는 2단씩의 낮은 처마받침을 두었다.



정상에는 네모난 노반과 복발(覆鉢)이 있고 그 위에 육각형의 석물을 올렸는데 앙화나 보개로 추정된다. 규모가 크고 전반적으로 수법이 굵직하면서도 세부에 있어서는 정교하며, 탑 전체와 각부의 부분이 조화를 이루는 균형잡힌 걸작이다.









2. 강원도



1) 장안사 (長安寺)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장연리 금강산 장경봉(長慶峯) 아래에 있는 사찰.



신라 법흥왕대에 창건되었다는 설과, 551년(양원왕 7) 고구려의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뒤 773년(혜공왕 9) 율사 진표가 중수하였고, 970년(광종 21) 화재로 불타버린 뒤 12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982년(성종 2) 선사 회정이 함열현 등에서 토지 150결을 보시받아 중건하였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원나라 순제의 왕후 기씨는 고려인으로서, 황제와 태자를 위하여 금 1,000정과 공인들을 보내서 굉변의 감독 아래 퇴락한 당우를 중건하고 새로운 누각을 건립하게 하였는데, 지극한 정성과 뛰어난 솜씨는 금강산뿐 아니라 전국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작품이었다고 한다.



1458년(세조 4) 세조가 행차하여 대웅전을 중수하게 하고 토지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1477년(성종 8) 화재로 전소됨에 따라 1483년 나라에서 금 3,000관과 백미 500석을 받아 일청이 중건하였다. 1537년(중종 32) 다시 불타버리자 1545년(인종 1) 일청이 다시 중건하였다.



그뒤 1728년(영조 4) 묘현이 중창하였고, 1791년(정조 15) 순상 윤사국이 전 5,000관을 내어 중수하였다. 1842년 부원군 조만영이 금 250관을 보시하여 새로 300여칸을 증축하고, 밭 40여석을 시주하였다. 1863년 호조판서 김병기가 주상하여 공명첩 500장을 내리게 하고, 자신의 재산 중 1,200냥을 보시하여 중수하게 하였다.



이 절의 입구에 들어서서 일주문과 운성문을 거쳐 만천교라는 징검다리를 건너면, 숲 사이로 만수정이 있고 그 안에는 ‘금강산장안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안의 오른쪽으로는 대향각, 왼쪽으로는 극락전,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곳에는 본전인 대웅전이 있다.



1945년 이전까지는 6전(殿) 7각(閣) 1문(門)을 가졌으나 그 규모는 옛날에 비하여 축소된 것이고, 부속암자로 장경암(長慶庵), 안양암(安養庵), 지장암(地藏庵), 영원암(靈源庵) 등을 가진 금강산 4대사찰 중의 하나였다.



문화재로는 기황후가 중창할 때 비로자나불을 비롯하여 53불, 1만 5000불 등이 봉안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대법당 왼쪽의 지성전에 봉안된 나한상은 비범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기황후 당시의 것인지 그 후대의 것인지는 단정짓기 곤란하다.



부속암자 중 안양암은 장안사 동북쪽 3㎞ 지점에 있는데 고려 성종 때 회정이 창건한 곳이며, 이후 회도가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이 암자에는 미륵불과 나한상 등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영원암은 신라 때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창건한 것으로 금강산 일원에서도 가장 맑고 고요한 수도처로 이름 높은 곳이다. 부근의 옥초대(沃焦臺)는 영원조사가 일심으로 수도하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고, 그 앞의 반듯한 돌은 영원조사가 공부하던 곳이라고 하여 책상바위라고 이름붙여졌다.





정양사석등 (正陽寺石燈)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장연리(현재 금강군 내강리)에 있는 정양사 약사전 앞의 고려시대 석등. 북한의 보물급 문화재 제34호.



구조는 6각의 복련으로 장식된 지대석을 갖추고, 원형의 간석과 앙련의 6각 화사석 받침대를 구비하고 그위에 화사를 갖추었으며, 화사석 상면의 석등 옥개석 역시 물매가 급격한 6각의 옥개석을 얹고 있다.옥개석 최상단에는 복발(覆鉢)과 보륜(寶輪) 2개를 갖춘 상륜부를 구비하고 있다.



특히, 석등의 간석은 원형이면서 상하간에 고복형(鼓腹形)의원형받침을 구비하고 있고, 간석 중앙에는 고복형의 원형띠를 돌려 상하를 구분하였다.



화사석에 있어서도 고려 석등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모기둥을 세워 조영한 석등이 아니라 工자형의 석주 6개를 조립하여 자연히 화창(火窓) 6개가 나타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또 석등 옥개석도 일반형 석등의 옥개석과는 달리 6각 형태로 경사면을 급하게 처리한 것도 주목된다.



석등은 이 절에 있는 삼층석탑과 같이 고려시대 조성된 이형(異形)의 석등으로서 대석 중앙에 간석받침 원형공이 있으며 지름이 32㎝에 이르고, 간석의 높이는 118㎝에 달하는 고려석등이다.









3. 평안남도



1) 감신총



평안남도 온천군 신영면 신영리에 있는 고구려 벽화고분. 1913년에 조사·발표되었으며 초기에는 대연화총(大蓮華塚)으로 불리었다.



이 벽화고분의 구조는 원형의 봉토에 널길 및 좌우 양쪽에 하나씩 두 개의 감이 있는 장방형 앞방과 방형의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二室墳〕이다. 천장 가구(架構)는 앞방은 궁륭천장이고 널방은 궁륭모줄임천장이다.



벽화는 회칠한 벽면에 그려져 있으나 박락이 심하여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앞방과 널방의 각 벽 모서리에는 기둥과 두공이, 널길에는 기마인물이 그려져 있다.



전실의 동벽에는 시자·시녀, 서벽에는 인물상·산악·신선, 남벽에는 고취·악대·수레·인물상, 북벽에는 주작도·인물상·연꽃무늬, 그리고 서쪽 감벽에 주인공의 생활도, 동쪽 감벽에 장방(帳房)으로 보이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현실의 동벽은 박락되어 알 수 없고 서벽에 소나무·수렵도, 남벽에 주작·구름무늬, 북벽에 불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이 고분을 감신총이라 부르는 것은 감 안의 주인공상을 신상(神像)으로 오판한 데서 그렇게 된 것이며, 주인공의 평상 밑에 보이는 연꽃무늬에 의해 대연화총이라고도 부른다.



이 벽화고분의 축조연대는 주인공의 실내 생활을 왼쪽 벽에 그린 인물풍속도와 감이 전실에 있는 구조 형식에 의하여 4세기 중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주인공 평상 밑의 연화대좌에서 보이는 불교의 영향과 널방벽의 불꽃무늬 등으로 미루어 보아 5세기 전반경의 무덤으로 생각된다.





2) 강서대묘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벽화고분.



강서삼묘 중 가장 큰 벽화고분이다. 고분의 분구는 원형이며, 기저부의 지름은 약 51.6m, 높이는 8.86m이다.



무덤의 구조는 널방 남벽의 중앙에 달린 널길과 평면이 방형인 널방으로 된 외방 무덤이다. 널방 네 벽과 천장은 질이 좋고 잘 다듬어진 큰 화강암 판석 각각 한 장으로 축조하였고, 천장은 2단의 평행 굄돌을 안쪽으로 내밀고 그 위에 2단의 삼각굄돌을 얹고서 덮개돌을 덮은 모줄임천장〔抹角藻井式天障〕이다.



벽화의 내용은 사신도(四神圖) 및 장식무늬이며, 회칠을 하지 않은 잘 다듬어진 널방 돌벽 면에 직접 그렸다.



널방 남벽의 입구 주변에는 인동·당초무늬를 그려 장식하고, 좌우의 좁은 벽에는 주작을 한마리씩 룡, 서벽에는 백호, 북벽에는 현무, 천장 중앙의 덮개돌에는 황룡을 각각 그렸는데, 천장의 황룡은 침수에 의하여 박락(剝落)되어 분명하지 않다.



천장벽화는 천장부를 구성하고 있는 제1단 굄돌 옆면에 인동무늬를 감싸안은 초롱무늬가 에스자형(S字形)으로 이어져 나간 무늬띠를 돌렸으며, 제2단 굄돌 옆면에는 비천(飛天)·비운(飛雲)·신선·산악 등이 그려져 있다.



이 굄돌의 아랫면에는 인동초롱무늬의 중앙에 연꽃무늬가 가미되어 있고, 좌우에 연꽃잎을 그린 특이한 무늬가 그려져 있다. 제2단 굄돌에는 비천을, 제3단인 삼각굄돌 옆면에는 연꽃을 그렸으며, 그 아랫면에는 구석에 연꽃과 인동이 혼합된 무늬를 배치하고, 그 좌우에 마주 대한 봉황을 그렸다. 제4단 굄돌 옆면에는 괴조와 봉황이, 그 아랫면 구석에는 연꽃과 인동이 혼합된 무늬가 그려져 있다.



고분축조 및 벽화 연대에 관하여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초로 추정된다. 벽화는 대체로 철선묘법(鐵線描法)으로 그려졌는데, 사신도는 그 구상이 장대하고 힘차며 필치가 세련되어, 우리나라 고분벽화 중에서 극치를 이루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3) 강서소묘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의 평야 중앙에 있는 고구려 고분. 가까이에는 벽화고분인 강서대묘와 강서중묘를 합쳐서 강서삼묘(江西三墓)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묘의 무덤 입구는 원형이고, 기저부의 지름은 약 40.90m, 높이는 약 6.81m이며, 무덤의 구조는 널방 남벽의 중앙에 달린 널길과 평면이 방형인 널방으로 이루어졌다.



널길의 앞부분은 크게 파괴되었으나 원상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으로 미루어, 그 길이는 약 1.45m로 추정되며, 널방의 크기는 동서 약 3.49m, 남북 약 3.35m, 높이 약 3.03m이다.



천장은 모줄임식인데 3단의 평행 굄돌을 약간씩 안쪽으로 내밀고, 그 위에 1단의 삼각형 굄돌을 얹고서 덮개돌을 덮은 구조이다.



널방의 네 벽과 천장은 질이 좋고 잘 다듬은 화강암 거석으로 축조하였으며, 바닥에는 2매의 큰 돌을 깔았다. 그리고 입구에는 2매의 돌문이 달려 있고 전면에 회칠을 하여 막았다.



대묘·중묘 등과 같이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이기는 하나, 벽화나 장식무늬 등은 하지 않았다. 고구려 고분으로서는 말기에 가까운 시기에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4) 강서약수리벽화고분



평안남도 강서군 약수리에 있는 5세기 무렵의 고구려 벽화고분. 1958년에 발굴되었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널방〔主室〕과, 같은 모양이지만 크기가 약간 작은 앞방〔前室〕으로 이루어졌고, 널방 남벽 약간 동쪽에 몰려 두 방을 연결하는 통로가 만들어져 있다.



앞방 동서 두 벽에는 바닥에서 50㎝쯤 되는 높이에 사방 1m, 깊이 1m 정도의 벽감이 하나씩 있으며, 앞방 남벽에는 약간 동쪽으로 널길〔羨道〕이 통하여 있다.



널방의 천장은 네 벽이 안으로 기울어져 올라가다가 2단의 모줄임〔抹角藻井〕쌓기를 하고 맨 위에 뚜껑돌을 덮은 것으로, 덕흥리벽화고분과 산연화총(散蓮花塚) 등의 천장구조와 같다. 널방은 각 변 길이 5m, 높이 5m이며, 앞방은 각 변과 높이가 모두 널방보다 1m씩 줄어들고 있다.



벽화는 앞방 동벽에는 부엌·방앗간·행렬도, 서벽에는 사냥모습·외양간(말)·측근자들, 남벽에는 외양간(소)·행렬도·문지기, 널방에는 방 네 귀에 기둥을 그리고 두공·창방까지 나타낸 다음, 북벽에는 묘주 내외와 현무, 동·서·남벽에는 각각 청룡·백호·주작을, 천장에는 해·달·별·구름을 그렸다. 그러나 널길과 앞방의 두 벽감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다.



묘주 내외의 그림이 앞방에서 널방으로 옮겨지고 사신도(四神圖)가 확대되어 중기양식으로 가까워지고 있으나, 묘주 내외는 아직 전기의 정좌(正坐) 형식이고 사신도도 낡고 보잘 것 없으며 묘실 형식이 옛 양식인 점으로 미루어, 전기의 말기에 해당하는 고분으로 추정된다.





5) 강서중묘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벽화고분.



고분의 분구는 원형이고, 무덤의 구조는 널방 남벽의 중앙에 달린 2단의 널길과 평면이 방형인 널방으로 된 외방무덤이다. 널방의 네 벽은 각각 큰 화강암 판석 한장으로 축조하였고, 천장은 2단의 평행 굄돌을 내밀어 얹어놓고 그 위에 한장의 덮개돌을 덮은 평행 굄천장이다.



벽화의 내용은 사신도 및 장식무늬이며 잘 다듬은 돌벽면에 직접 그렸다. 널방의 벽화는 남벽 입구 좌우에 한쌍의 주작을 그렸고, 동벽에는 청룡, 서벽에는 백호, 북벽에는 현무를 세련된 필치로 그렸다.



천장에는 제1단 평행 굄돌 옆면에 인동무늬를, 제2단 평행 굄돌 옆면에는 인동·당초무늬를 그렸으며, 그 아래로 향한 면은 괴운무늬로 장식하였다. 천장의 뚜껑돌 중앙에는 연꽃무늬, 남북에는 봉황, 동쪽에는 일상(日象), 서쪽에는 월상(月象)을 배치하였으며, 모서리에는 연꽃무늬와 인동무늬를 그렸다. 일상은 원 속에 세발까마귀를 그려 나타냈고, 월상은 원 속에 두꺼비를 그려놓았다.



특히, 이 고분의 벽화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의 특징적인 한 면을 엿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건축적 성격을 전혀 띠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한 측면에는 커다란 두 개의 흐름이 있는데, 그 하나는 건축적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회화적 표현이다. 건축적 표현은 묘실의 네 벽 모서리에 기둥·두공·소로·도리 등을 그려 널방 내부를 목조건물의 실내와 같이 장식하는 것이다. 강서중묘에는 이러한 건축적 표현이 전혀 없어 벽화의 시대적 흐름을 헤아릴 수 있게 해준다.



고분 축조연대는 6세기 중엽 또는 7세기 초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강서대묘보다는 화법이 고졸하여 연대가 앞서는 것으로 생각된다.





6) 대동문 (大同門)



북한의 행정구역상 지금의 평양특별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는 평양성 내성(內城)의 동문(東門).



석축 위에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을 갖춘 조선 중기 성문이다. 전체높이 19m, 석축높이 6.5m이고, 문루는 앞면 3칸(15.9m), 옆면 3칸(10.34m)이다.



6세기 중엽에 세워졌으며, 조선 중기인 1576년(선조 9)에 이르러 그 자리에 지금의 성문이 새로 건립되었다. 1635년(인조 13)에 석축의 무지개문을 고쳤다.



축대는 화강석을 다듬어 정교하게 쌓았고 그 복판에 무지개문길을 냈다. 평면상 네 모서리를 바깥쪽으로 점차 넓혀 힘을 잘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축대 위에 세운 2층 문루는 1층 가운데칸에만 1.5m 높이의 널마루를 깔았다.



기둥은 모두 흘림기둥 형식으로 하였다. 네 모서리의 기둥은 다른 것에 비하여 좀 굵고 높게 하면서도 안으로 약간 기울게 세웠는데, 이것은 건물의 균형을 바로잡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다. 1층 기둥은 2층 기둥보다 더 굵고 높게 하였다. 1층 바깥기둥은 안기둥 중턱에 댄 퇴보〔退樑〕에 물리고 안기둥은 2층 대들보보다 중보를 직접 받아주게 하였으며, 2층 바깥기둥은 1층 퇴보 위에 세우고 대들보와 물리게 하여, 건물 안은 구조상 층을 분리시키지 않고 통칸으로 처리하였다.



1/2층 공포는 모두 3포식으로 안팎의 포작수(包作數)가 다 같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보통 성문 건축의 공포 포작수는 위층이 아래층보다 많아지며 바깥보다 안의 것을 넓게 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대동문의 공포는 포식두공의 조선 초기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이 문의 3포식 공포는 구조적으로는 바깥 5포, 안 7포에 맞먹는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합각지붕은 마루선들과 지붕면이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을 이루고 있어 매우 아름답다. 위층 지붕 곡선은 아래층 지붕 곡선보다 좀 더 굽었으며, 처마의 깊이는 보통 경우와는 달리 1층보다 낮은 2층에서 더 깊어 지붕에 경쾌감을 주고 있다.



기둥에는 붉은색을 칠하고 두공, 대들보액방, 서까래, 평판방 등에는 여러 가지 무늬와 색상을 배합한 은근한 단청을 입혔다.



한편, 대동문에는 세 개의 현판이 있는데, 하나는 무지개문 머릿돌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문루 1층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쓴 활달한 필치의 초서 현판이, 그리고 문루 2층에는 평안감사 박엽(朴燁)이 쓴 방정한 해서 현판이 걸려 있다. 문루에는 ‘읍호루’라는 현판도 붙어 있는데, 읍호는 문루에서 손을 내밀어 대동강의 맑은 물을 떠올린다는 뜻으로 주변경치와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은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통하는 문으로서 평양성의 성문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성문이었다. 문밖의 덕바위 아래쪽에는 옛 나루터가 있는데 고구려 때부터 조선 말기까지 배타는 사람들로 흥청거렸다고 한다. 대동문 건너편이 ‘선교’라고 불리게 된 것도 이곳에 배다리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구려의 건축물을 이어 발전시킨 조선 전기 건축의 형식과 구조를 보여주는 건물로서 장엄함과 아름다움, 경쾌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어 성문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7) 대안덕흥리벽화고분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에 위치하고 있는 고구려의 벽화고분.



1976년에 발견, 조사된 이 고분의 봉토는 방대형(方臺形)이며, 널방의 구조는 앞방의 남벽에 달린 널길과 가로로 긴 장방형의 앞방, 앞방과 널방을 잇는 좁은 통로, 네모난 널방으로 이루어진 굴식 돌방이다.



널방의 네벽은 가공한 돌을 쌓아 축조하였으며, 천장가구는 널길은 평천장이고, 앞방은 2단의 평행굄 궁륭식 천장이며 널방은 5단의 평행굄 궁륭식 천장이다. 그리고 앞방의 북벽 바닥에는 네모난 단이 있고 널방바닥에는 큰 판석으로 짜고 회칠한 널받침이 마련되어 있다.



이 벽화고분에는 풍부한 내용의 벽화와 600여 자에 달하는 묵서(墨書)가 있다. 벽화는 회칠한 널방의 벽면에 흑색·적색·황색·녹색·갈색 등의 안료로 그려졌다.



널길의 벽화는 박락이 심하여 분명하지 않으나, 동벽에는 입구를 향하여 걷고 있는 2, 3인의 인물상과 창을 쥔 수문장이 그려져 있다. 서벽의 북쪽에는 동자를 데리고 있는 인물상이 있고, 남쪽에는 수문장이 2개의 창을 쥐고 서 있다. 그리고 동서벽의 남단에는 벽화의 설명문이 쓰여 있다.



앞방에는 주인공이 생전에 일을 보던 광경과 천상 세계에 대한 내용이 그려져 있고, 북벽의 통로 입구 윗벽에는 황색을 칠한 네모난 구획 안에 14행 154자를 종서로 쓴 묘지명이 있다. 이 묘지명에 의하여 주인공은 영락 18년(408) 12월 25일에 안장되었음을 알 수 있고, 나아가서 이 고분의 축조연대를 알게 되었다. 통로의 동서벽에는 거가행진도(車駕行進圖)가 그려져 있다.



널방의 북벽에는 주인공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서벽에는 마술·궁술 등 무예를 겨루는 그림이, 남벽에는 마굿간·외양간이, 동벽에는 불교행사에 관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밖에 여러가지 모양의 장식무늬가 배치되어 벽화와 더불어 현실을 화려하게 하였다.



앞방 북벽 천장에 남아 있는 명문의 내용을 보면, 그 주인공은 하북성일대인 유주(幽州)에서 자사(刺史)를 지낸 뒤 고구려로 들어와서 408년에 이 무덤에 안장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절대연대가 명문으로 남아 있어 5세기 초 고구려 고분의 구조나 벽화양식을 알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고분으로 평가된다.





8) 동명왕릉 (東明王陵)



평안남도 평양시 역포구역 무진리 왕릉동(옛 중화군 진파리)에 위치한 고구려 동명왕의 무덤. 전부터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의 능으로 전하여 왔는데, 1974년 발굴, 조사되었다.



2단의 돌기단 위에 사각추형으로 흙을 쌓아 올린 돌기단흙무덤인데 기단돌의 높이가 150㎝이고, 그 밑의 기초돌 높이가 15㎝, 그리고 현재 남은 봉토의 높이가 650㎝이므로 총 높이는 815㎝이다. 그러나 원래는 기단도 2단 이상이고 봉토 또한 1m 정도 더 높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기단돌과 기초돌은 대부분 커다란 석회암을 다듬은 것인데, 네 모서리의 돌이 크며 그 중에서도 서북쪽 모서리의 기초돌과 기단돌이 가장 크다(기초돌 231×220×90㎝, 기단돌 433×203×65㎝). 한편, 봉토는 밑부분이 막돌과 모래흙을 섞은 것이고, 윗부분은 붉은 진흙으로 다져 쌓았다.



이와같이 이 무덤은 고구려 무덤 형식인 돌무지무덤과 봉토돌방무덤의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있어서, 돌무지무덤이 봉토돌방무덤으로 바뀌는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위에 묘역시설을 가지고 있는데, 첫 기단돌의 높이와 같은 지면에 사방 약 5m의 너비로 크기와 모양이 고른 강자갈을 가지런히 깔았다. 내부구조는 석회암과 화강암을 다듬어서 널길〔羨道〕·앞방〔前室〕·널방〔主室〕의 세 부분으로 축조한 돌방으로 되어 있다.



무덤은 9° 가량 서쪽으로 기운 남향인데, 북쪽에 동서 421㎝, 남북 418㎝, 높이 388㎝의 널방이 있고, 그 앞에 길이 300㎝, 너비 169㎝, 높이 187㎝의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앞방이 있으며, 앞방 중앙에 길이 235㎝ 정도의 널길이 달려 있다.



각 방의 사이에는 돌문을 달았는데, 널방과 앞방 사이의 것은 높이 186㎝, 너비 85㎝, 두께 14㎝ 크기의 두 쪽으로 되어 있으며, 그 이마돌은 길이 435㎝, 너비 145㎝, 두께 55㎝나 된다. 앞방은 바닥에 큰 돌을 깔았는데 널방보다는 4㎝ 낮으며, 벽은 150×60㎝ 정도 크기의 다듬은 돌을 2단, 3단으로 쌓았다.



동서 양쪽벽 밑부분의 바닥과 같은 높이에 감이 있다. 널방은 정방형 평면에 꺾임천장인데, 44개의 석재로 쌓고 그 사이는 석회로 메꾸었다. 벽체는 2단으로 쌓았는데, 밑단의 돌이 길이 416∼425㎝, 높이 182∼188㎝로 매우 커서 벽 하나가 한장의 돌로 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네 벽은 안으로 5, 6° 정도 경사지게 쌓았다.



바닥에는 두께 17㎝와 25㎝ 되는 두장의 큰 화강암 판돌을 깔았고, 그 밑에는 105㎝ 깊이까지 5층으로 삼화토와 숯층을 엇바꾸어 쌓아 배수장치를 하였다. 천장은 5계단으로 돌을 쌓아 올리고, 꼭대기를 큰 판돌로 덮었다. 천장의 경사도는 대체로 30∼40°이다.



벽화가 비교적 잘 남은 동쪽 벽의 일부와 천장을 근거로 추정할 때, 널방에는 고구려벽화무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풍속화나 사신도가 아닌 직경 12㎝의 연화문(蓮花文)을 벽면과 천장에 가로 세로 일정한 간격(4.2㎝)으로 약 640개(추정 복원) 정도 그렸다.



유물은 이미 도굴되었는데, 남은 것은 여러 개의 금 또는 금동수식, 금관못·은관못을 비롯한 꽃무늬금동장식품과 머리핀 등이다.



기타 사항으로 이 고분의 앞뒤에는 얼마간 떨어져서 딸린무덤〔陪塚〕이 있으며, 특히 앞쪽 120m 되는 곳에서는 고구려 시대의 절터(정릉사지)가 드러났다. 이상의 규모와 축조상 특이점, 벽화의 내용 등을 근거로 추정해 볼 때, 5세기 초에 옮겨 만든 동명왕의 능인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9) 보통문 (普通門)



평안남도 평양시 보통문동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성문.



현존하는 성문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서 6세기 중엽에 처음 세워졌으며, 현재의 건물은 여러 차례 보수해 오다가 1473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 문은 화강암을 다듬어 쌓은 축대와 그 위에 세운 2층 문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축대 가운데에는 높이 4.55m, 너비 4.4m의 홍예가 있고 문길 앞쪽에는 앞뒤에 쇳조각을 입힌 튼튼한 널문을 달았다. 문루는 2층건물로 두공이 있는 기둥 위에 2층의 합각지붕을 올렸다.



바깥 기둥들은 1층의 지붕에 이어지고 내부의 네개의 기둥은 1층에서 2층까지 관통하여 세웠으며, 바깥기둥과 안기둥 사이에 연결된 보〔樑〕 위에는 짧은 2층기둥이 놓여 있다. 두공은 1/2층 안팎이 모두 3포(三包)로 되어 있고 두공첨차(頭工詹遮)의 간격은 다르게 되어 있는데 바깥쪽은 안쪽보다 더 크게 하였다.



이 문은 다른 성문들에 비하여 전체높이가 조금 낮고 1층 면적에 비하여 2층면적이 상대적으로 좁게 되어 있다. 옆면에서 1층 양쪽 바깥기둥의 밑단과 마루도리를 연결하는 삼각형, 그리고 앞면에서 축대바닥 양쪽과 문루의 용마루중심을 연결하는 삼각형은 거의 정삼각형에 가깝게 되어 있어 장중하고도 안정된 느낌을 줄 뿐 아니라, 고구려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10) 쌍영총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면 안성리에 위치한 고구려의 벽화고분.



분구는 간신히 원형을 나타내고 있으며, 널방의 구조는 전실의 남벽 중앙에 달린 널길(길이 2.72m), 방형의 앞방(동서 2.35m, 남북 2.72m), 앞방과 널방 사이의 통로, 방형에 가까운 널방(동서 2.77m, 남북 2.85m)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二室墳〕이다.



특히 통로의 좌우에는 8각 돌기둥이 하나씩 세워져 있으므로 이 벽화고분을 쌍영총이라고 이름지었다. 천장 가구는 전실·현실 모두 평행3각굄 천장이다.



벽화의 내용은 인물풍속도 및 사신도이며, 그 배치 상태는 동벽에 수레 2대, 갑옷을 입은 개마무사(鎧馬武士) 1명, 기마무사 2명, 남녀입상 약 30명 등과 북을 치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널길의 서벽에는 수레, 기마인물과 남녀 등 30여명 및 북을 치는 인물, 창을 쥐고 춤추는 인물 등이 그려져 있으며, 천장은 구름무늬로 장식하였다.



널길에서 앞방으로 들어가는 좌우 두 벽에는 장사상을 그렸고, 앞방의 벽화는 동·서벽에 청룡과 백호를 그리고 남벽에는 인물 입상을 그린 것 같으나 분명하지 않고, 네 벽에는 기둥과 두공을 그렸다.



천장의 제1단 굄돌에는 당초문, 제2단 굄돌에는 봉황과 구름무늬, 제3단 굄돌에는 당초문, 3각 굄돌에는 괴상한 무늬, 그리고 천장의 뚜껑돌〔蓋石〕에는 연화문을 배치하였다.



통로의 좌우에 세운 8각돌기둥에는 반룡을 그렸다. 널방의 벽화는 네 벽에 기둥·두공·도리를 그리고, 도리 위에는 ‘ㅅ’형의 솟을을 그렸으며, 천장부의 제1단 굄돌에는 사격자 무늬 속에 동심원이 있는 무늬, 제2단으로부터 위의 굄돌에는 연화문을 배합한 무늬를 그렸다.



북벽에는 화려한 장방(帳房) 안에서 시종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생활하는 주인공 부부의 실내생활도가 그려져 있고, 동벽에는 9명의 인물이 행진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공양도(供養圖)를 보고 있다. 서벽에도 장방이 그려져 있으나 내부는 분명하지 않다.





11) 성총 (星塚)



평안남도 온천군 신령리에 있는 고구려 고분.



전실은 없고 연도와 주실로 되어 있다. 연도가 동쪽으로 치우친 단실묘이며 모줄임천장〔抹角藻井〕으로 되어 있다.



벽화는 인물풍속도 및 사신도를 주제로 하였다. 방 네 귀에 기둥이 있으며, 남벽에는 주작과 측시연화(側視蓮花), 기타벽에도 연화가 보이는데 역시 사신도와 연화가 주제이다. 천장 층급부에는 당초문, 삼각석 바닥에는 별무늬가 그려져 있다. 연문은 아직 고식이고 사신도총으로의 과도기적 형태로 보인다.



연대는 5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12) 수렵총 (狩獵塚)



평안남도 온천군 화도리에 있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의 고구려 벽화고분. 이 지역의 옛 지명은 대복면 매산리였고 이 지명을 따서 매산리사신총(梅山里四神塚)으로 불려왔으나, 현실 서쪽 벽에 그려져 있는 수렵도를 본떠 지금은 수렵총이라 부르고 있다.



분구는 원형이고 묘실의 구조는 동쪽으로 치우쳐 설계된 길이 약 1.15m, 너비 약 1m, 높이 약 1. 32m의 연도(羨道)와 동서길이 3.34m, 남북길이 3.04m, 높이 1.32m의 직사각형의 현실로 된 단실 무덤이다.



천장의 구조는 현실 네 벽 위에 세단의 평행받침대를 설치한 다음 그 위에다 한단의 우삼각(隅三角) 받침을 두고, 한 장의 천장석으로 막은 활모양평행삼각천장이다.



벽화는 회반죽을 두껍게 바른 현실의 네 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는데, 네 벽에는 사신이, 그 사이에 인물풍속도가 그려져 있다. 북벽에는 서편으로 현무가 그려져 있고, 윗부분에는 북두칠성으로 생각되는 별자리를 배치하였으며, 그 동편에는 휘장이 쳐진 방의 평상에 정면을 향해 앉아 있는 4인의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이 인물들 중 동쪽의 1인은 남자 주인공이고 다른 3인은 모두 여자로, 주인공의 처첩으로 생각된다. 휘장이 쳐져 있는 방의 바깥에는 마부가 말을 끌어잡고 있다. 평상에 바로 앉아 있는 3인의 가슴과 허리부터는 지느러미 모양의 것이 나부끼고 있다.



이 인물풍속도는 신전 모양의 건물과 가슴/허리에서 나부끼고 있는 지느러미모양 등으로 보아 신화 속의 인물을 상징하는 신비한 인상을 풍기는 신상(神像)의 초상화로 생각된다. 주인공의 머리 위에는 ‘仙寬’이란 묵서(墨書)도 있다.



동벽 청룡의 중앙 윗부분에는 해를 상징하는 세 발 까마귀〔三足烏〕가 그려져 있고, 후방 윗부분에는 기마인물상이 묘사되어 있다.



서벽 백호의 윗부분에는 사슴을 사냥하는 말 탄 무인을 그린 수렵도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말을 상징하는 두꺼비가 그려져 있다. 이 두꺼비 그림은 다른 고구려 벽화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중앙부의 수렵도, 그 아래의 가늘고 긴 자태로 맹렬히 돌진하는 모습의 백호도, 윗부분의 두꺼비 그림을 배치한 서벽의 벽화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음울한 화면구성으로 신비감마저 띠고 있다.



남벽에는 두 마리의 주작이 서로 맞대고 있다. 이 주작도는 봉황의 모습과 흡사한 면이 있다.



한편 천장부에는 구름문양과 연속되는 당초문 형태의 초문(草文)이 굵은 선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인 색채는 갈색과 칠흙색이 기조를 이루어 조용한 가운데 안정된 색채감을 주고 있다.



그림들이 예스럽고 소박하여 동수묘(冬壽墓)/덕흥리고분(德興里古墳)에서 볼 수 있는 중국식 화법과는 다른 딱딱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는데, 이는 초기 고구려 벽화고분의 화법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수렵총의 연대추정에는 여러 의견들이 있다. 5세기 축조설은 벽화가 지극히 예스럽고 소박하여 불교예술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과, 사신도 가운데 청룡과 봉황처럼 보이는 주작이 후한시대의 동경에 나타나는 사신과 유사하며, 인물도의 부인들의 머리에 장식헝겊이 얹혀 있다는 점 등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5세기로 보는 또 다른 견해는 그 근거로 벽화 내용 중 인물풍속도와 사신도가 함께 있으면서 사신도의 비중이 인물풍속도보다 크다는 점을 들어서, 이 고분은 사신도를 벽화내용으로 하는 고분으로 옮겨가기 직전에 나타난 것으로 본다.



또 이 고분의 인물도의 어깨부분에 날개와 같은 구름 기운이 뻗치고 있다는 점은 한대의 신선화에서도 보이고 있어 그 연대를 올려잡을 수 있는 한 요소가 되고 있지만, 사신의 주벽(主壁) 진출로 보아 이 또한 5세기 전반보다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추정할 수 있다.





13) 연화총



평안남도 강서군 간성리에 위치한 고구려 벽화고분.



고분의 봉토는 원형이며, 묘실의 구조는 앞방 남벽의 중앙에 달린 연도, 동서 양벽 및 북벽 양측에 각각 하나씩 벽감이 있는 가로로 긴 장방형의 전실, 전실에서 현실로 들어가는 통로, 방형의 현실로 이루어졌다.



현실의 네 벽은 안산암재로 쌓아 축조하였으나 입구 및 감실의 주위는 화강암재를 쌓아 축조하였다. 전실 및 현실의 천장은 모두 3각 굄 천장이다.



벽화는 회칠한 벽면과 천장에 흑색·갈색의 물감으로 윤곽을 잡고 그렸는데, 박락이 심하여 극히 일부만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벽화의 배치상태 및 내용을 보면 전실의 각 벽에는 기둥·두공·도리를 그렸으며, 현실로 들어가는 입구 윗벽에는 뱀 같은 것을 그렸으나 훼손이 심하다.



서쪽 감실 안에는 인물상과 남북조식의 천개(天蓋)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는 불꽃무늬가 돋힌 장막이 보인다.동쪽 감 안에는 원래 그림이 그려졌으나 박락이 심하여 알 수가 없다. 천장 각 구의 중심에는 큰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으나 서구의 것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다.



현실의 각 벽에는 기둥·두공·도리 등을 그렸고, 남벽 입구 위에는 굵고 검은 색 띠로 삼각형의 윤곽을 그리고 그 속에 봉황을 그렸으며, 동쪽에는 기린을, 서쪽에는 천인을 배치하였다.



천장의 3각 굄돌 아랫면에는 해를 나타내는 삼족오(三足烏)와 파문(巴文)·봉황 등을 그렸으며, 천장의 중심에는 활짝 핀 연꽃무늬를 그려서 장식하였다. 보다 많은 벽화가 그려졌다고 보이나 박락되어 이것만 남아 있다.





14) 요동성총 (遼東城塚)



평안남도 순천군 북창면 용봉리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고분.



고분의 봉토는 강물에 밀려온 토사의 퇴적으로 인하여 흔적 없이 평탄해졌다. 널방의 구조는 고구려고분의 일반적인 형식과는 다른 특이한 구조이다.묘실은 가늘고 긴 구형의 앞방 남벽 좌우에 짧은 두개의 실모양으로 된 널길이 달리고 관 하나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네개의 널방이 앞방의 뒷벽에 따로 통하게 북쪽으로 길게 놓여 있다.



그리고 앞방의 좌우에는 옆방이 달렸고, 동쪽 옆방의 입구에는 8각 돌기둥이 하나 서 있는 곁간 있는 무덤〔有側室墳〕이다. 천장은 널길·옆방·앞방·널방 모두가 평행굄 천장이다.



벽화는 널방의 각 벽면과 천장에 그려져 있으나 박락이 극심하여 그 전모를 판별하기 어렵다.



전실의 남벽 좌우 연문 사이에는 성곽도가 그려져 있는데, 중앙에 내·외성의 2중 성벽을 가진 주성이 있고 인접하여 남쪽과 동남쪽에 조그만 외성의 형태가 보이게 배치되었으며 내성 내부에는 골기와를 얹은 이층집과 삼층누각이 그려져 있다. 외성 내부에는 서쪽문 좌우에 단층집이 한채씩 있는데, 그 오른쪽 집 밑에 해서로 ‘요동성(遼東城)’이라고 내리쓴 묵서가 있다.이 묵서에 의하여 이 고분을 요동성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서쪽 옆방 벽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데, 주작은 이미 지워졌고 현무는 몸체가 없어졌으며 백호는 하반신만 남아 있다. 청룡은 꼬리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그리고 서쪽벽 중앙에는 장방지붕같이 보이는 그림이 약간 남아 있다.



전실 동북쪽 8각돌기둥이 서 있는 옆 북쪽벽에는 방앗간 그림이 희미하게 남아 있으며 그 곁에 개 한마리가 그려져 있다.





15) 용강대총 (龍岡大塚)



평안남도 용강군 지운면 안성리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고분.



분구는 방대형이고 묘실의 구조는 전실의 남벽 중앙에 달린 연도(길이 0.97m, 너비 1.38m, 높이 1.73m), 긴 장방형의 전실(동서 5.20m, 남북 1.73m, 높이 3.70m), 전실과 현실 사이의 통로 (길이 1.26m, 너비 1.27m, 높이 1.91m), 통로의 좌우 양벽에 있는 감, 방형의 현실(한 변의 길이 3.88m, 높이 4.43m)로 이루어진 이실분이다.



천장가구는 전실은 3구(區)로 나누었는데, 각각 평행3각굄 천장이며 현실도 평행3각굄 천장이다.



벽화의 내용은 인물풍속도이며, 그 배치 상태는 전실의 각 벽 모서리에 두공이 있는 기둥을 그리고 그 위에 장여를 받들고 있는 ‘ㅅ’형 솟을과 동자주(童子柱)를 그렸다.



기둥·도리·솟을·동자주에는 붉은색 바탕에 흑색으로 당초문을 그렸고 장여에는 파상문을 그렸다. 솟을과 동자주 사이에는 연봉을 한 송이씩 배치하고 장여 바로 밑에는 조문(鳥文)을 일렬로 그렸으며 천장부에는 전면에 당초문과 파상문을 그려 장식하였다.



남벽 서쪽에는 누각도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현실의 벽화는 박락이 심하여 잘 알 수 없으나 남벽에는 솟을과 활짝핀 연화문의 일부가 남아 있다.





16) 중화진파리사호분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진파리(지금의 평양시 역포구역 무진리 왕릉동)에 소재한 고구려 벽화고분. 진파리고분군 가운데 현실(玄室)에서 벽화가 발견된 2기의 고구려 벽화고분 중의 하나이다.



다른 하나인 진파리1호분과 묘실 축조형태 및 벽화 제작수법이 유사하며, 육조시대(六朝時代) 중국과의 문화 교류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두 고분벽화에 표현되어 있다. 산기슭 경사지의 높은 곳에 자리하여 나머지 8기의 고분들을 내려다보는 형국을 하고 있다. 1941년 일본인에 의한 개략적인 조사, 발굴이 있었으나, 정식으로 발굴되고 보고서가 간행되기는 1963년에 이르러서이다.



묘실의 방향은 남향이며 남북장방형 현실과 연도(羨道)로 이루어진 단실분이다. 현재 남아 있는 봉분의 지름이 23m, 현실바닥에서 봉분 위까지의 높이가 4.2m이다. 현실의 네 벽은 넓은 판석(板石)으로 축조하였고 그 위에 석회를 발랐으며, 천장은 평행굄 2단, 삼각굄 1단의 평행삼각굄이다.



연도 및 현실벽과 천장에 벽화를 그렸으나 석회의 박락이 심하여 전모를 알기는 어렵다. 벽화 표현에는 묵선(墨線)을 썼고 주색, 황색, 백색, 자색을 주조로 하였으며, 곳곳에 금분(金粉)을 사용하여 밝고 화려한 느낌을 주도록 하였다.



벽화의 주제는 사신(四神)이나 연지(蓮池), 일월성신(日月星辰)이 함께 표현되는 등 아직 전형적인 사신도 벽화단계에 이르지는 않고 있다. 연도 좌우벽에는 연지를 그렸는데, 수목의 나뭇잎 표현에 금분을 쓰고 산호초와 기암괴석 등을 질서정연한 좌우대칭으로 배치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정원조경술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불교의 극락세계에 존재한다는 천상연지(天上蓮池)를 표현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현실벽에는 사신과 일월상(日月像), 천인(天人), 각종 운문(雲文)과 인동연화문(忍冬蓮花文)을 그렸으며, 화려하고 동적인 느낌을 준다. 동벽은 하반부에 청룡을, 상반부에 용을 타고 나는 천인과 서조(瑞鳥)를 표현하였다. 이들의 배경화면에는 한 방향으로 흐르는 각종 운문과 함께 바람에 날리는듯한 인동연화문을 그렸는데, 운동성을 가미한 부드럽고 섬세한 필선이 육조시대 중국의 석각화의 표현법을 연상하게 한다. 중국과의 밀접한 문화예술의 교류 결과로 보인다.



서벽에는 좌반부 벽화만 일부 남아 있으며, 하반부에는 백화를, 상반부에는 천인과 월상을 배치하였다.계수나무가 그려진 서벽의 월상으로 보아 애초에는 동벽에도 일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상과 월상을 묘실벽 상반부에 배치한 벽화분으로는 매산리사신총과 대안리1호분이 있다. 현실 입구인 까닭에 좌우로 나뉜 남벽에는 상반부에 한쌍의 주작을, 하반부에 소나무인듯한 수목을 묘사하였으나 퇴색으로 인하여 매우 희미하다.



북벽 역시 동서벽과 같이 상반부에는 구름과 연꽃 사이로 하늘을 나는 천인을 그렸으나 하반부는 박락이 심하여 알아보기 어렵다.현무가 그려져야 될 자리이나 보고서에 따르면 남은 흔적은 용에 가깝다고 한다.



천장부에는 각종 별자리와 인동에 싸인 연꽃을 그렸다. 천장 1층 받침에는 인동과 금색연화식(金色蓮花飾)을 번갈아 그려 장식하였고, 2층 받침에는 녹색과 백색을 같은 간격으로 반복 채색하여 일종의 병풍효과를 내고 있다. 각 삼각석 밑면에는 연화문을 하나씩 그려 넣었는데, 연화문 둘레에는 힘차게 회전하는 인동문으로 감싸 생동감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천장에는 북두칠성을 비롯한 28개의 별자리를 묘사하였는데, 별들은 모두 금분으로 나타내었다. 이와같이, 금분으로 별을 형상한 예로는 덕화리2호분 천장도가 있다.



이 진파리4호분은 현실이 장방형이며, 내부에 석회를 바른 뒤 그 위에 벽화를 그린 점, 현실벽에 사신 외에 천인과 연꽃을 함께 표현한 점, 천장에 각종 별자리를 그리고, 북벽 현무의 표현이 애매한 점 등으로 보아, 강서대묘나 중묘와 같은 전형적인 사신도 묘로 이행하기 전의 과도기 단계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묘실축조 및 벽화제작시기가 7세기까지 내려오지는 않으며, 늦어도 6세기 중기나 말기인듯하다. 현실벽화 가운데 천장의 성신도와 연도의 연지도는 당대 고구려의 천문지식 수준과 정원조경술의 발달이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음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17) 중화진파리일호분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진파리(지금의 평양시 역포구역 무진리 왕릉동)에 위치한 고구려 시대의 벽화고분. 진파리고분군에 속하며 근처에 전동명왕릉(傳東明王陵)이 있다. 1941년 일본인에 의한 발굴조사 시 진파리4호분과 함께 벽화 고분임이 밝혀졌고, 1963년 정식발굴, 보고되었다.



1941년 조사 당시 묘실 내부에서 관모(冠帽)형태의 금동투조금구(金銅透彫金具)가 출토되었다. 중심에 원에 둘러싸인 삼족오(三足烏)와 원둘레에 세마리의 용과 화염문을 투조한 금구로 묘 주인이 높은 신분이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벽화의 모사화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고분은 봉분의 지름이 약 30여m, 현실바닥에서의 높이가 5m 가량이며, 장방형 현실과 연도로 구성된 단실분으로 묘실방향은 남향이며 납작한 판석(板石)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천장구조는 2단의 평행굄 위에 1단의 삼각굄을 얹은 평행삼각굄이다.



묘실 내부에 석회를 바른 뒤 그 위에 벽화를 그렸으며, 벽화의 주제는 사신(四神)이다. 벽화는 연도(羨道) 좌우벽과 현실벽 및 천장에 걸쳐 그려졌는데, 묵선(墨線)을 주로 하고 몰골법(沒骨法)도 사용하는 등 다양한 필법을 쓰고 있다. 색채는 주색, 황색, 녹색, 자색을 주조로 하였으며, 대상의 표현에 선의 강약과 색의 농담을 적절히 조절하여 그에 알맞은 효과를 의도하는 세련된 회화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연도 좌우벽에는 쌍영총 및 통구사신총과 같은 계열의 수문역사(守門力士)를 그렸는데, 연화반(蓮花盤) 위에 서 있고 광배(光背)가 머리 뒤에 표현된 것으로 보아 사천왕(四天王)의 일부를 묘사한 듯하다.



현실 동벽에는 북쪽을 향하여 웅비하는 청룡을 묘사하고 배경에는 진파리4호분 벽화에서와 같이 같은 방향으로 강하게 흐르는 구름, 휘날리는 인동연화, 구름을 타고 나는 서조 (瑞鳥) 등을 그렸다. 그러나 진파리4호분 류의 천인(天人)은 보이지 않으며, 구름 및 인동연화의 운동성이 보다 강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서벽의 백호 역시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포효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남벽에는 현실입구 좌우로 한쌍의 주작을 묘사하였다. 두 마리 주작 모두 꼬리가 위를 향하여 뻗어 있는데,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북벽 가운데에는 현무를 배치하였으며, 하나로 얽힌 뱀과 거북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동서벽의 청룡과 백호에 비하여 고졸한 느낌을 준다.현무의 좌우에는 암산과 커다란 소나무를 그렸고, 위로는 흐르는 구름과 휘날리는 인동연화 및 화염,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용 등을 묘사하였다.



천장부에는 운문과 인동연화문을 번갈아 그려 장식하였으며, 천장에는 네 귀퉁이에 인동연화를, 중심부에 일월상(日月像)을 그려넣었다.일상은 원 안의 삼족오로 나타낸 것에 비하여 월상은 원 안에 계수나무와 옥토끼, 두꺼비를 모두 그려넣어 일반적인 월상과 차이를 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묘사된 월상 중 특이한 표현으로 월상에 대한 관념의 복합으로 말미암은 듯하다.



진파리1호분은 묘실의 구조, 벽화의 기본구성방식, 벽화에 보이는 육조양식적(六朝樣式的) 요소 등이 진파리4호분과 같으나 필선이 보다 세련되고 벽화 중의 수목 및 산악표현과 같은 새로운 요소, 현실벽에서 사신이 차지하는 비중의 증대 등으로 미루어 진파리4호분보다 늦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축조시기는 6세기 말경으로 추정된다. 진파리4호분과 함께 고구려와 중국의 문화교류내용 및 전형적인 고구려 사신도묘의 성립과정을 밝히는 데 도움을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18) 천왕지신총 (天王地神塚)



평안남도 순천군 북창면 북창리 송계마을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고분.



봉토는 방대형이며 구조는 전실의 남벽 중앙에 달린 연도, 긴 장방형의 전실, 전실과 현실 사이의 통로, 방형의 현실로 된 두칸무덤이다.



천장 가구는 전실은 셋으로 구분되는데 좌측 천장은 평행굄 천장이고 중앙은 꺾음천장이며 우측은 3각굄 천장이다. 현실의 천장은 8각굄 천장이다.



이 벽화고분은 요동성총과 함께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축조양식을 보여주는 고분인데, 바로 천장 가구의 구조에 연유한다. 특히, 현실의 천장 가구법에서 주목되는 것은 천장부 최하단 3각굄돌이 벽에서부터 나오는 활기에 의하여 떠받쳐지고 그 위는 천장부 제1단에 그림으로 솟을모양을 그렸으며 이 그림 솟을 위에는 실물 솟을을 벽에서부터 나오게 하여 제2단 아랫단을 떠받게 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천장 정부의 3각굄부분은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늑골을 십자형으로 교차시켜 뚜껑돌을 떠받게 하고 있다. 현실 안에 번잡한 기둥을 한 대도 세우지 않고 넓고 높은 공간을 차지하는 궁륭천장을 만들었다는 것은 놀라운 건축기술이다.



벽화의 내용은 인물풍속도 및 사신도이며 회칠한 벽면에 그려져 있다. 현실의 벽화 중 북벽에는 주인공 부부의 실내생활도와 현무를 그렸고, 안쪽으로 휘어든 천장에는 왼손에 너비가 좁고 긴 깃발을 쥐고 봉황 비슷한 서조 (瑞鳥)에 올라탄 인물상과 쌍인두사신(雙人頭蛇身)의 괴이한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그림 위에는 ‘천왕(天王)’·‘지신(地神)’이라고 쓴 묵서가 있다.이 벽화고분을 천왕지신총이라고 하는 것은 이 그림에 연유한다.



그리고 각 벽에는 점선으로 된 구갑무늬 속에 연꽃을 그려넣은 무늬로 전면을 채웠고, 또 천장에는 수수조(獸首鳥)·사슴·뱀·신선·봉황·기린 등과 해·달·별 등을 그렸다.









4. 평안북도



1) 보현사팔각십삼층탑 (普賢寺八角十三層塔)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현면 향암리 소재 보현사 대웅전 앞에 있는 고려 말기의 다층 석탑.



높이 7.78m. 화강석을 섬세하게 다듬어 쌓았으며 형식과 양식면에서 고려 말기 석탑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탑의 일층 기단은 3층으로 쌓았으며, 이층 기단 윗면에는 복련(覆蓮)이 새겨져 있다. 8각으로 된 기단 한 변의 길이는 12m이고 탑신은 높이가 6.58m나 되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높이와 넓이를 차례로 줄여서 탑이 높으면서도 안정되고 아담해 보인다. 탑신 모서리마다 가늘게 우주(隅柱)를 모각하였고, 각 면에는 테를 둘러 아담한 느낌을 준다.



옥개석(屋蓋石)의 처마는 윗선과 아랫선을 모두 양끝에서 가볍게 반전하여 경쾌한 느낌이 들며, 8각으로 된 각층 옥개석의 추녀 끝에 풍경이 달려있다.



풍경과 상륜부는 6·25사변 때 파괴되었으나 최근에 다시 만들어 붙였다. 일명 석가탑이라고도 한다.





2) 영변남문 (寧邊南門)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에 있는 남문. 일명 ‘철옹성남문’또는 ‘만노문’이라고 한다. 북한의 보물급 문화재 제16호.



영변남문은 영변읍성인 철옹성을 쌓으면서 처음 세우고 그뒤 여러 차례 손질하였는데 현재의 건물은 1789년(정조 13)에 다시 세운 문이다.



이 문은 남쪽으로 안주·평양지방으로 통하는 중요한 문이며, 성벽에서 성 안쪽으로 약 40m 가량 들여다 세워 이곳이 옹성을 대신하게 한 구조를 하고 있다.



남문의 축대는 잡석으로 높이 약 8m 되게 축성하였고, 그 복판에는 높이 4.5m의 아치문을 냈다. 특히, 축대 위에는 장중하고 웅건한 2층 문루를 세웠는데 대동문과 유사한 점이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두공은 외5포작, 내7포작이며, 제공은 꽃가지형으로 되어 있다. 문루 앞면의 기둥은 높은 돌기둥 위에 목주(木柱)를 이어 세운 기둥이며, 지붕은 합각지붕을 얹고 있다. 문루상의 단청은 문루건축에 일반적으로 쓰였던 모로단청(毛老丹靑)이다.



이 문의 구조는 평양의 보통문 및 대동문과 유사한데, 1층 평면에서 정면과 측면의 비례는 대동문과 동일하며, 1층 면적과 2층 면적의 비례는 보통문과 일치한다. 또한 건물의 기둥 높이는 대동문보다는 낮고 보통문보다는 높다.



전반적으로 볼 때 남문의 형태는 균형이 잘 조화된 건물로서 현재 북한에 남아 있는 문루 건축 중에서는 가장 우수한 문루에 속한다.





3) 의주남문 (義州南門)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에 소재한, 조선시대에 개축한 의주성의 남문. 정면 3칸, 측면 3칸. 북한의 보물급 문화재 제10호. 일명 ‘장변루’ 혹은 ‘내훈루’라고도 한다.



문 북쪽에는 의주성의 장대이며 관서팔경의 하나인 통군정(統軍亭)이 있다. 남문을 언제 처음 건립하였는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으며 현재의 남문은 1613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특히, 의주남문은 국경도시로서의 서북방면의 관문 구실을 하였으며, 성문의 형태는 너비 4.2m, 높이 4m의 아치형 성문으로 그 위에다가 2층의 문루를 세웠다. 두공은 1층과 2층 모두 3포작으로 되어 있고, 문루의 가운데칸은 양옆의 측칸에 비하여 넓으며, 2층에는 널마루를 깔았다.



한, 1359년 홍건적의 침입을 막았던 의주 백성들의 항쟁 이야기가 깃들여 있기도 한 성문으로서, 다른 곳에 유존하여 내려오는 성문들과 더불어 비교적 높고 웅장한 느낌을 주는 성문이다.





4) 통군정 (統軍亭)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정(樓亭). 정면 4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북한의 보물급 문화재 제11호.



의주읍성에서 제일 높은 압록강 기슭 삼각산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다. 의주읍성의 북쪽 장대로서 서북 방위의 거점이었던 의주성의 군사지휘처로 쓰였다.



통군정에 올라서면 이끼 푸른 의주성의 옛 성벽이 눈앞에 보이고 아래로는 압록강의 푸른 물 가운데에 점점이 떠 있는 여러 섬들이 굽어보인다. 서쪽으로는 멀리 신의주·용암포 일대가 바라보이며, 남쪽으로는 ‘의주금강’으로 불리는 석숭산과 백마산 일대의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와 예로부터 관서팔경의 하나로 꼽혔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990년(성종 9)에 편찬된 〈임사홍기 任士洪記〉에 기록된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처음 세운 것이 분명하나, 1538년(중종 33)에 이를 다시 건립하고 1823년(순조 23)에 수리하였다.



평면이 정방형에 가깝고 바닥에는 앞부분 절반에만 단을 주어 널마루를 깔았다. 바닥 주춧돌 윗면에서 아랫마루까지의 높이는 71㎝, 아랫마루에서 윗마루까지의 높이는 33㎝로서 앞은 높고 뒤는 낮게 하였다. 7도리(七道里)의 너비에 통천장으로, 모든 부재들에 조각장식을 붙여 내부를 시원하고 화려하게 하였다.



특히 이 건물에서는 목재를 적게 쓰면서도 건물의 입체적 강도를 높이기 위하여 대들보를 겹으로 하고 동자주(童子柱) 대신 제공(諸貢)으로 틀어올렸다. 평양의 연광정, 강계의 인풍루, 안주의 백상루와 함께 우리나라 누각건물을 대표하는 유적의 하나로서 6·25 때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 복구되었다.









5. 함경남도



1) 석왕사 (釋王寺)



함경남도 안변군 문산면 설봉산에 있는 사찰. 31본산 제도가 실시되던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하나였다.



이 절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기 전에 무학대사의 해몽을 듣고 왕이 될 것을 기도하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석왕사의 창건이 이성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데 대해 이능화는 다만 숭불호법을 부회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로는 1377년(우왕 3)에 이성계가 정몽주·이화 등과 함께 청주(淸州:지금의 北淸郡)에 갔을 때 해양(海陽:지금의 吉州郡) 광적사가 병화로 폐허가 되었지만 대장경 1부와 불상 및 법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김남운(金南運)을 보내어서 이들을 보완한 뒤 석왕사에 봉안하고 오랫동안 임금을 축수하고 나라의 복을 빌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젊은 시절에 석왕사에서 가까운 설봉산 귀주사에서 독서를 하고 지낸 사실과 이성계와 무학에 얽힌 설화 등으로 미루어 석왕사의 창건은 이성계와 매우 관련이 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성계가 석왕사로 대장경을 옮긴 1377년 이전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서산대사의 〈설봉산석왕사기〉에 의하면, 이성계는 등극하기 전에 왕업을 이루기 위한 기도처로서 응진전(應眞殿)을 세워 오백나한재를 개설하였고, 이때에 천진당·진헐당·인지료·용비루 등을 지었다.



또 왕이 된 뒤에 거찰을 이룩하였으며, 1401년(태종 1)에는 이곳에 와서 동구에는 소나무를, 뜰에는 배나무를 심었다. 그뒤 왕명에 의하여 이곳의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하였고 좋은 배를 임금에게 바치게 하였다.





1732년(영조 7)에는 대웅전과 영월루, 흥복루, 범종루, 용비루, 조계문 등을 개수하였다. 31본산 시대에는 대웅전, 응진전, 팔상전, 명부전, 해장전, 극락전, 석왕사, 인지료, 신한각, 운한각, 천서각, 만춘각, 백련당, 진헐당, 심검당, 군당, 보명전, 연빈관 등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며, 48개의 말사(末寺)를 관장하고 있었다.





2) 진흥왕순수비 (마운령비)



신라 진흥왕이 척경(拓境)과 순행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 중의 하나. 함경남도 이원군 마운령에 있다.



건립연대는 568년이며, 비석의 재료는 질 좋은 흑색의 화강암이다. 비석의 높이는 165.1㎝, 너비는 44.2㎝, 두께는 30. 3㎝이다





비면에 새긴 글자는 양면으로 새겼는데, 표면은 모두 10행으로 한행 26자이며, 뒷면은 모두 8행으로 한행 25자이다. 해서체로 음각하였다.



비문의 구성을 보면, 앞면은 제기(제1·2행)와 기사(제3행∼제10행)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고, 뒷면에는 수가인명열기(제1∼8행)가 있어 전체적으로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이 비는 진흥왕이 이원지방을 순행한 뒤 군신이 더불어 경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 비문에는 ‘제왕건호’니 ‘짐’이니 ‘순수’니 하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어서 당시 신라의 자존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비는 비문의 판독이 거의 완전하며 황초령비와 같은 해에 세워졌고 또 황초령비에 보이는 수가인명이 이 비에도 보이고 있어서 황초령비의 마멸된 글자를 판독하고 보충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황초령비나 마운령비는 고려조 윤관이 9성역 때 또는 조선 초기의 북방개척시에 옮겨 세웠다고 하는 몇몇 학자의 이치설(移置說)은 추론에 불과하며, 도리어 두 비의 원위치는 바로 발견 당시에 있었던 곳으로서 신라의 영토가 동북으로 이원지방까지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3) 진흥왕순수비 (황초령비)



신라 진흥왕이 척경(拓境)과 순행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 함경남도 함흥군 황초령에 있었으나 1852년(철종 3) 관찰사 윤정현(尹定鉉)에 의하여 황초령 아래의 진흥리로 옮겨졌다.





이 비는 진흥왕이 함흥지역을 순수하고 나서 군신이 모여 경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건립연대는 568년이며, 비석의 재료는 견치하고 질이 좋은 화강암을 물갈이한 것이다. 비석의 높이는 151.5㎝ 내외, 너비는 46.9㎝, 두께는 48.5∼24.5㎝이다.



비면에 새긴 글자는 모두 12행이며 한행은 36자이다. 글자의 크기는 2.4㎝이다. 해서체이며 음각하였다. 비문의 구성은 제기(제1행)·기사(제2행∼제7행 15자)·수가인명열기(제7행 17자∼제12행)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황초령비와 마운령비가 소재한 함흥지방과 이원지방이 신라 영토로 편입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그러나 이 두 비의 발견으로 568년 이전에 이 지역이 신라의 영역이 된 것은 분명하게 되었다. 아마 그 시기는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유역을 빼앗은 553년부터 568년 사이의 어느 때가 아닐까 한다.



이 시기에 신라가 함경남도까지 북상할 수 있었던 것은 동해안을 따라가는 해로의 용이함과 진흥왕대의 신라의 정복적 팽창력과 당시의 고구려가 귀족 사이의 내분과 돌궐족의 남하압력으로 위기에 처하여 있었던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서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6. 함경북도



1) 경성남문 (鏡城南門)



함경북도 경성에 있는 경성읍성(鏡城邑城)의 남문. 석축(石築) 위에 지은 2층누각의 조선 중기의 성문이다.



규모는 축대가 길이 16.5m, 너비 11m, 높이 7m이고, 문루는 1층이 앞면 5칸(13.5m), 옆면 3칸(8.05m)이며, 2층이 앞면 4칸, 옆면 2칸이다.



성읍성을 쌓은 해인 1107년에 세웠으며, 1433년에 크게 고쳤다. 1616∼1672년 사이에 성을 더 크게 고쳐 쌓으면서 이 문도 다시 세웠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으며 1756년에 고쳐 세웠으나 1950년에 파괴되었다. 지금 건물은 전쟁이 끝난 뒤에 보수한 것이다.



전체의 구성은 돌로 쌓은 대(臺)와 그 위에 세운 2층 문루(門樓)로 이루어져 있다. 축대는 돌을 다듬어 정연하게 쌓았다. 바깥벽은 성벽과 같이 굽도리부분에서 안으로 조금씩 올려 쌓다가 중허리에 이르러 직선으로 쌓았고, 그 윗부분은 다시 밖으로 내밀어 쌓았다.



축대의 복판에는 너비 2.7m, 길이 7.4m, 높이 약 3m의 무지개문을 냈다. 무지개문은 축대 바깥면에서 2.7m 안에 들여놓아 그 양 옆벽이 옹성(壅城)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축대 구조상 특이한 점의 하나이다.



좌우 벽은 잘 다듬은 댓돌로 쌓고 그 천장부분은 벽돌을 무지개 모양으로 쌓아올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1756년 이 문을 보수할 때 돌을 벽돌로 바꾸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문에는 큰 쌍닫이널짝문이 달려 있었고 문짝은 두터운 널에 쇳조각을 붙여 튼튼하게 만든 것이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축대 위에는 성가퀴를 돌리고 그곳에 활을 쏘는 구멍을 뚫어놓았는데, 평평한 구멍과 경사진 구멍을 교차시켜 멀리 있는 적이나 가까이에 침투한 적을 마음대로 쏠 수 있게 하였다.



축대 위에 세운 문루는 익공식 두공을 올리고 겹처마를 한 합각지붕을 이은 2층 건물로서, 2층의 평면은 1층보다 사방 한 칸씩 줄였다. 보통 문루들에서는 1층 면적에 대한 2층 면적의 비율이 0.51:0.75인 데 비하여 여기서는 0.38로 하였다.



기둥은 아래를 위보다 좀 굵게 한 흘림기둥을 쓰고, 네 모서리의 기둥은 다른 기둥들보다 조금 높이면서 안쪽으로 기울여 세웠다. 이것은 건물 전체의 균형을 바로잡고 안정되게 보이게 하면서도 강도를 높인 훌륭한 방법이다.



건물 안 가운데는 4개의 통기둥을 세워 2층 지붕을 직접 떠받들게 함으로써 건물 안을 시원하게 하였다. 두공은 위층을 4익공, 아래층을 3익공으로 하였으며, 문루에 익공식 두공을 쓰고 그 단수를 4익공으로 높인 것은 극히 드문 것으로 문루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함께 갖추려 한 것 같다.



아래 위층의 액방(額房) 위에는 화반을 놓았으며 가운데칸에는 3개씩, 좌우칸에는 1개씩 놓았다. 지붕의 마루들과 지붕면에는 완만한 곡선을 주고 문루에는 아름다운 모루단청을, 기둥에는 붉은색을 칠하였다.



이 문은 우리나라 북방의 요충이던 경성읍성의 성문들 가운데서도 제일 중요한 성문이었으며, 북쪽으로 동북 국경지방과 남쪽으로 함흥 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켜선 평지의 성인 경성읍성의 문으로서, 군사전략상 중요하며 교통이 매우 편리한 곳에 있다.









7. 황해도



1) 동수묘 (안악삼호분)



황해남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에 위치한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 안악삼호분이라고도 한다.



1949년에 처음으로 발견된 이 무덤은 현무암과 석회암의 큰 판석(板石)으로 짜여진 돌방무덤〔石室墓〕으로, 남쪽인 앞으로부터 널길〔羨道〕, 연실(羨室), 앞방〔前室〕, 뒷방〔後室:主室〕으로 형성되며, 앞방은 좌우에 조그만 옆방〔側室〕이 하나씩 달려 있어 좌우 너비가 커지고 있다.



한편, 앞방과 뒷방은 4개의 팔각돌기둥으로 구분되어 서로 투시할 수 있고, 주실 즉 뒷방은 동벽과 뒷벽의 안쪽에 판석벽과 돌기둥을 각각 세워 회랑부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각 방의 천장은 네 귀에 각각 삼각형 돌을 얹어 천장 공간을 좁히기를 두번 반복하고 그 위에 뚜껑돌을 얹는 모줄임천장〔抹角藻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랜 모줄임천장인 것이다.



벽화는 널길벽에 위병, 앞방의 동쪽 옆방에 부엌, 도살실(屠殺室), 우사(牛舍), 차고(車庫) 등, 서쪽 옆방에 주인공 내외의 좌상(坐像), 앞방 남벽에 무악의장도(舞樂儀仗圖)와 묵서묘지(墨書墓誌), 뒷방 동벽, 서벽에 각각 무악도(舞樂圖), 회랑벽에 대행렬도(大行列圖)가 그려져 있다.



결국 벽화 내용은 무악대(舞樂隊)와 장송대(葬送隊)에 둘러싸인 주실 앞에 주인 내외의 초상도를 모신 혼전(魂殿)과 하인들이 있는 부엌, 우사, 마구고(馬具庫) 등을 두고 맨 앞은 위병이 지키는 설계이며, 이것은 왕, 귀족, 대관(大官)들의 생전 주택을 재현시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벽화는 벽의 면적 81㎡, 천장의 면적 58㎡나 되는 넓은 널방에 가득차게 그려져 있다. 또한, 이 동수묘에서는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六日 □□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 □昌黎玄?帶方太守都 鄕侯幽州遼東平郭 都鄕敬上里冬壽字 □年六十九?官



이 명문에서 보인 ‘永和十三年’은 동진의 연호로서 서기 357년이며, 낙랑 옛 땅의 중국계 주민들이 해상교통을 통하여 강남의 동진과 연락을 가지고 동진의 연호를 쓰고 있음을 말하여주고 있다.



동수묘의 주인공인 동수는 326년(미천왕 27)에 랴오둥에서 고구려로 귀투한 무장이며, 357년(고국원왕 27)에 죽어서 안악 유순리에 묻힌 것이다.(최근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이 무덤의 주인공을 고국원왕이라 보고 있다)



동수묘의 구조는 여러 점에서 당대의 중국묘 형식을 본받고 있다. 즉, 남북일렬로 여러 방을 배열하는 것이나 앞방 좌우에 옆방을 설치하는 것은 한대의 벽돌무덤의 기본 설계 방법이며, 또 옆으로 넓어진 앞방에 사각형의 주실을 달아 T자형 평면을 만드는 것은 낙랑의 덧널무덤이나 벽돌무덤에서 흔히 보는 형식이다.



또, 큰 판석으로 묘실을 짜는 것은 랴오둥반도의 한대 묘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동수묘에서 처음 보이는 고구려 고분의 특색처럼 되어 있는 모줄임천장도 산둥성 기남의 후한대 돌무덤에 나타나 있고 팔각형 돌기둥도 이 기남묘에 있거니와 기둥 꼭대기에 두공을 얹어 천장석을 받들게 하고 있는 점이 똑같다.



모줄임천장은 원래 근동지방에서 일어난 수법이며, 그것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3세기에는 이미 중국 본토로 들어와 있던 것이다. 고분벽화 자체도 한대에서 시행한 것이며, 특히 동수묘와 같은 고구려의 전기 고분벽화에서 묘주들이 휘장을 친 방 안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랴오둥지방의 고분들과 같다.



결국, 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고구려의 벽화고분인 동수묘는 랴오둥지방에서 넘어온 동수의 무덤이며, 그것은 중국의 한, 위진대의 벽화고분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고구려 영토 안에 세워진 최초의 중국계 벽화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묘실평면, 모줄임천장, 돌기둥, 벽화내용 등 여러 면에서 그뒤 고구려 벽화고분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것이며, 고구려 벽화고분의 발생 과정에서 중국 벽화고분과 고구려 벽화고분을 연결하는 과도기적 존재라 할 수 있다.





2) 성불사 (成佛寺)



황해도 황주군 주남면 정방리 정방산에 있는 사찰. 31본산 시대에는 황해도 9개군의 사찰을 관장하였던 본산이었다.



신라 말기에 도선이 창건하였고, 1374년(공민왕 23)에 나옹이 중창하였다. 나옹은 건물의 중창 뿐 아니라 다수의 석물을 새로 조성하였는데, 성불사를 비롯한 산내암자에 15기의 석탑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대규모의 중창 기록은 없으며, 1569년(선조 2) 설숭(雪崇)이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진되었다.



1632년(인조 10)에 외적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정방산에 성을 쌓은 이후부터 이 절은 해서지방의 종찰이 되었다.



숙종 때에는 이 절에 장육탱화를 모시고 400근짜리 대종을 조성하였으며, 1751년(영조 27)에는 찬훈(贊訓)이 중수하였다. 1924년에는 주지 이보담이 3차 중수하였는데, 그 때 명부전, 향로전, 청풍루, 극락전, 응진전, 승방 등을 수리하였다.



성불사의 본사와 말사에는 휴정의 법손이 주지가 되게끔 지정되어 있다. 31본산 시대에는 산내말사인 안국사, 원통사, 상원암을 비롯하여 산외말사로서 황주군의 10개 사찰, 봉산군의 5개 사찰, 서흥군의 2개 사찰, 수안군의 4개 사찰, 곡산군의 6개 사찰, 평산군의 3개 사찰, 연백군의 1개 사찰, 금천군의 1개 사찰, 신계군의 1개 사찰 등 총 36개소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었다.



성불사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4.22m의 성불사오층탑이 있는데,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은 상하 2개의 부분으로 된 기단 위에 돌을 4각형으로 다듬어 5층으로 쌓았으며, 층마다의 지붕돌에는 각각 3단의 굄을 새겨서 굄과 네 귀가 가볍게 들리도록 처마를 꾸몄다.





3) 심원사 (心源寺)



황해도 황주군 구락면 덕양리 여계산에 있는 사찰. 31본산 시대에는 성불사 (成佛寺)의 수석 말사이었다.



신라말에 국사 도선이 창건하였으며, 고려말에는 절이 많이 퇴락하였으나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이색이 황폐된 절과 부근의 지세가 군사적으로 요새지인 점을 착안하여 절을 중건하고 성을 쌓게 하였다. 그러나 큰 가뭄이 계속되어 완공하지 못한 채 중단하였다.



조선 숙종 때 이색의 12대손인 이여택(李汝澤)이 황주목사가 되어 이 절을 살펴보니 이색 이후에 네 차례나 중수되었으나 여전히 퇴락한 상태로 남아 있었으므로 이색의 뜻을 상기하여 승려들과 함께 희사금을 모아서 수년 후에 본전 및 부속건물을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들은 대부분 이때에 중건된 300여년 전의 건물이다.



그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있는 보광전(普光殿)은 1939년에 보물로 지정되었고, 광복 후에 국보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다포계 팔작지붕의 건물로, 기둥은 배흘림을 두었다. 귀공포 위에는 원숭이 모양의 조각을 세워 추녀를 받치고 있어서 특이한데, 강화도 전등사의 대웅전에도 이러한 장식이 있다. 1374년(공민왕 23)에 지어진 이 건물은 동시대에 지어진 석왕사 호지문, 응진전 및 개성 남대문, 평양 보통문 등과 양식적으로 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절 부근에는 돌로 쌓은 남점행성이 있었으며, 여계산에는 여계산성도 있었다. 그밖에도 이 부근에는 강선대(降仙臺)와 묵대사영필(默大師靈筆) 등이 있다.





4) 안악일호분



안악일호분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상산리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고분.



고분의 봉토는 많이 깎여 내렸으나, 방대형의 본래 모습은 어느 정도 지니고 있으며 묘실의 구조는 연도와 방형의 현실로 이루어진 외방무덤〔單室墳〕이다.



현실의 네 벽은 석회암·화강암 등의 한면이 평탄한 크고 작은 편석을 진흙과 석회를 섞어서 정연하게 쌓아올렸으나 네면의 벽선은 약간 만곡이며 그 위에는 면회를 단정하게 발랐다.



천장은 벽면과 평행하는 3단의 평행굄으로 좁혀올리고 다시 2단의 3각굄으로 공간을 좁혀 그 꼭대기 한복판을 한장의 판석으로 덮은 평행 3각굄 천장이다.



연도는 현실 남벽에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고 연도와 현실 사이에는 좌우로 열리게 된 두장의 돌문이 있다. 그리고 연도입구는 면에 한장의 큰 판석을 세우고 그 위에 잡석을 쌓아서 막았다.



벽화의 내용은 인물풍속도이나 박락이 심하여 그 전모를 알기 어려운데 네 벽과 천장 전부에 그림을 그렸다. 벽화의 배치상태를 보면 현실 네 모서리에는 두공·기둥을 그려서 목조건물같이 보이게 하였다.



북벽에는 전면에 걸쳐 전각도(殿閣圖)가 그려져 있다. 전각도는 2층 전각을 중심으로 주위에 지붕 이은 담을 두르고 골기와 지붕을 가진 큰 대문이 있다.



현실 서벽에는 상부에 수렵도가 있고, 하부에는 7명의 서있는 여인상이 그려져 있다. 동벽에는 윗부분에 붉은 깃발을 든 의장행렬이 있고, 아랫부분에는 3대의 우교차가 그려져 있는데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다.



남벽에는 동벽에서 계속되는 행렬도의 일부가 그려져 있는데 윗부분에는 기수 4명이 서쪽을 향하여 전진하고, 아랫부분에는 말탄 인물이 흐릿하게 보인다. 천장에는 인동무늬, 불꽃무늬, 연꽃무늬, 두겹고사리무늬, 구름무늬, 톱날무늬, 보륜무늬 등 다양한 무늬와 가공의 동물, 천인, 서금(瑞禽), 서수(瑞獸), 해, 달, 별 등을 그려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5) 안악이호분



안악이호분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상산리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고분.



고분의 봉토는 방대형이며 묘실의 구조는 연도와 방형의 현실 및 현실 동벽에 감이 하나 있는 외간무덤이다.



현실의 네 벽은 석회암·화강암 등의 판석으로 축조하고 두껍게 면회를 발라 정리하였다. 천장은 벽면과 평행하는 2단의 평행굄 위에 3단의 3각 굄을 올려 좁히고 꼭대기 중심에 한장의 덮개돌을 덮은 평행3각굄 천장이다. 현실 남벽의 동쪽에 약간 치우쳐 있는 연도와 현실 입구 사이에는 좌우 양쪽으로 열리는 돌문이 있다.



벽화의 내용은 인물풍속도이나 박락이 심하여 그 전모를 알 수 없다. 벽화는 연도·현실의 네 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다. 그 배치 상태를 보면 현실 네 모서리에는 구름무늬 단청을 한 포기둥을 세워서 그 윗도리를 표시한 횡대를 받치게 하였다. 연도의 좌우 벽에는 각각 한 명의 문지기를 그렸고 그 앞쪽에는 무인행렬도를 그렸다.



현실 북벽 중앙에는 화려한 장막을 걷어올린 장방(帳房) 안의 좌상에 한 여인이 호젓하게 앉아 있는 상이 그려져 있고 장방 밖의 왼쪽에는 6명의 시녀상이, 오른쪽에는 측근 문관으로 보이는 3명의 남자상이 그려져 있다. 현실 서벽의 윗단에는 여인과 아동군상이 그려져 있다.



동벽은 박락이 심하여 남쪽 윗부분에 그려진 2명의 비천상과 3명의 산연화도(散蓮花圖)가 남아 있을 뿐이다. 남벽의 현문 윗벽에는 동벽의 것과 같은 비천 2명과 현문을 중심으로 좌우벽에는 각각 1명의 문지기를 그렸다.



현실의 천장에는 평행굄 제1단 북벽 측면에 붉은빛 바탕에 먹으로 반규무늬를 그리고 다른 세 면에는 연잎당초무늬를 그렸다. 다음 평행굄 제2단 측면에는 보륜을 마름모꼴 격자로 꿰고 그 속에 연꽃을 배치한 무늬, 연꽃당초무늬, 기이한 구름무늬 등으로 장식하였으며, 천장 중앙에는 커다란 연꽃대과무늬를 그렸다.





6) 해주다라니석당



황해도 해주시(현재의 북한의 행정지명은 해주시 해청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당. 높이4. 64m.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 북한에 있는 4개 중의 하나이며 평안북도 용천군 성동리의 다라니석당과 쌍벽을 이루는 귀중한 유물이다.



지대석과 하대석을 구비하고 있으며, 석당을 받치고 있는 상대석은 중판복엽의 앙련이 장식된 연화좌에 낮은 6각의 1단 받침을 구비하고, 그 위에 한개의 돌로 6면을 이룬 석당을 구비하고 있다.



석당의 6면 전체에는 ‘대불정다라니경(大佛頂陀羅尼經)’을 음각하였다. 석당의 상층부에는 3중의 개석을 얹고 있는데 개석의 형태는 3개가 동일하게 옥개받침 4단을 구비한 6각이며, 개석 상면에는 동일하게 각 면의 선각마다 귀꽃을 장식하고 귀마루를 뚜렷이 나타내어, 목조건물에서 보이는 듯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최하단의 옥개석과 두번째의 옥개석 사이에는 6면에 좌상의 화불(化佛)을 양각 장식한 것이 성동리다라니석당과 다르며, 또한 두번째 옥개석과 최상단의 옥개석 사이에는 복발(覆鉢)을 구비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최상단의 옥개석 상부에는 상륜부를 조성하였던 흔적은 있으나 현재는 유실되어 없는 실정이다.



이와같은 석당은 중국에서 당말 오대경에 유행하였던 경당으로 고려시대에 이런 유풍을 받아들여 북한지역에 유행하였던 것 중의 하나이다.





7) 해주오층석탑 (海州五層石塔)



황해도 해주시(북한의 행정구역상 해주시 옥계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오층석탑. 높이 4.63m.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이다.



화강암으로 된 5층석탑으로, 기단부가 탑신부와 상륜부로 이루어졌다. 기단은 2층기단에 하대중석과 하대갑석을 한개의 돌로 구성하고 그 상면에 1단의 낮은 받침을 조성하고, 상대중석을 갖추었다.



상대중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주를 각 면에 모각하였으며, 중석 상면의 상대갑석상에 2단의 굄을 마련하여 탑신을 받치게 하였다. 각 탑신에도 우주를 모각하였다. 또한, 각층 탑신은 전체가 하나의 돌로 조성되어 있다.



각 옥개석은 5단의 옥개석받침을 갖추고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면서 전각부는 약간 반전되게 처리하고 있어 경쾌하다. 현재 상륜부에는 4각의 노반(露盤)과 연꽃형태의 보주를 갖추고 있다.



전체적인 석탑의 형태는 고려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초층부터 상층부에 이르는 석탑의 체감법도 정제되게 처리하였다. 이 석탑 부근에는 석빙고·천왕비 등의 유적도 남아 있다.
 
좋게 쓰셨으면 좋겠네요^^. 제가 아는데로 쓴건데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이것만으로도 좋게 쓰셨으면 좋겠네요 1시간정도면 다 보실수있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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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능허대지 - 연수구 옥련동 194-54 (기념물 제8호)

옛날에 중국으로 가려면 대륙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서해안에서 뱃길을 이용했었다. 더구나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축을 벌이던 삼국시대에 백제는 육로를 통하지 않고 대륙으로 가는 길이 필요했다.

 

능허대지는 백제가 중국 동진과 통교를 시작한 근초고왕 27년부터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개로왕 21년(475)까지 사신들이 중국을 왕래할 때 출발했던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당시 삼국으로 나뉘었던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중국도 남북조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고구려와 적대관계에 있던 백제는 육로를 포기하고 뱃길을 이용해서 남조로 들어갔다.

 

능허대에서 가까운 한나루는 중국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목에 있는 항이었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은 능허대에서 머물다가 배를 탔고, 따라서 능허대는 사신들을 배웅하는 장소였던 셈이다. 당시에는 멀어져가는 배를 한참동안 바라보아도 고개가 아프지 않을 만큼 적당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아파트와 유원지로 개발돼 도심 한가운데 자리잡게 되었다.

옛날의 자취는 전망대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며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재 능허대지는 송도 앞바다를 매립하면서 당시의 장소를 기리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 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이곳에는 작은 정자와 연못이 있으며 연못에는 인공폭포와 분수대 그리고 잉어 등이 있어 시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2.원인재 - 문화재자료 제5호 , 연수구 연수동 2동 584

 

원인재는 인천이씨 중시조인 이허겸의 재실이다. 팔작지붕 형식인 이 건물의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32대 손이 쓴 [원인재기]와 33대 손이 쓴 원인재상량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조 7년(1807) 또는 고종 4년(1835)인 것으로 추측된다.

 

원인재는 신연수역과 원인재 역을 잇는 길 중간에 있다. 인천이씨 중시조 이허겸을 모신 재실로, 원인재 옆에는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린 언덕 한가운데에 시조 이허겸의 묘소가 있다.

원인재가 위치한 연수동 548번지 일대는 과거에 간치도라 불렸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까치섬’이다. 이곳을 칭하던 또 다른 명칭으로는 ‘연화부수지’가 있는데, 이 말은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을 말한다. 실제로 시조 이허겸의 묘소가 자리한 언덕은 송도 갯벌이 연수구가 개발되기 전만 하더라도 물이 들어오던 곳으로, 마치 작은 섬이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시조 이허겸 묘가 1천여 년이 넘도록 이 자리를 고수해 온 것에 반해, 원인재 자리는 여기가 아니었다. 현 인천여고 부근에 있던 것을 연수택지개발공사로 철거당하게 되자 인천이씨 대종회가 나서서 이곳 묘소 자리로 옮긴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천시로부터 자연녹지로 지정된 토지 일부를 불하 받아 부지를 조성했고, 지방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인정돼 인천시문화재 자료 제 5호로 지정되면서 지방문화재 복원에 필요한 자금도 얼마간 지원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허겸을 시조로 모시는 인천이씨의 본래 선대는 가야국 김수로 왕의 둘째 아들로 전해진다. 이후 고려조가 들어서면서 인천이씨는 본격적으로 권력과 영화를 누리게 된다. 인천이 7대 어향이라고 불렸던 것도 인천이씨 일가에서 왕의 내외향이 나온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허겸묘 - 비지정 지방유형문화재 , 연수구 연수2동 286-10

이허겸은 인천이씨의 중시조이다. 문학산 아래 간치도(看雉島) 신좌(辛坐)의 자리에 있다. 간치도는 까치섬이라고 부르는데 밀물 때 멀리서 보면 마치 연꽃이 물위에 살포시 떠있는 모습이라해서 연화(蓮花)부수지(바다 가운데 섬)라고 부른다.

이곳은 명당 중의 명당으로 풍수지리로 살펴보면 연화부수형, 또는 해중복구형(海中伏龜形:바다 한가운데 거북이 엎드린 형국)을 이루고 있어 석물(石物)을 세우면 그 무게를 못 견뎌 바다로 가라앉아 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돌사람이나 돌사자와 같은 석물이 세워져 있지 않다.

 

인천 이씨는 이곳에 조상의 묘를 쓴 뒤부터 불이 일어나듯 번성하여 고려시대 최고의 가문으로 번성하게 된다. 손자 이자연은 재상이 되고 문종, 선종, 순종, 헌종, 숙종, 예종, 인종의 왕비를 배출하거나 외가집(7대어향)이 되어 큰 권력을 누렸다.

 

이 묘는 약 1070여 년 동안 수호 유지되어온 고려시대 담장묘 형식의 무덤이다. 본래는 바다 가운데 섬(부수지)이었는데 주변이 간척사업으로 농토가 되었고 1990년대 택지개발 사업으로 산소 보존의 위태로움도 겪었으나 문중의 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원인재 복원공사를 하면서 증축하여 묘의 둘레는 약15m이며, 높이는 2m이다. 주변에 있는 소나무가 붉은 기운을 띠고 있다.

 

3.각국조계석 - 문화재자료 제 4호 , 연수구 옥련동 525 (인천시립박물관)

조계(租界)란 일정한 지역범위 안에 외국인 전용 거주지역을 정하여 그 곳의 지방행정권을 그들 외국인에게 위임한 지역을 말한다.

조계는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일본조계(중앙동, 관동 일대)를 시작으로 1884년 청국지계(선린동 일대), 각국 조계(송학동, 송월동, 북성동)등 3개 조계가 설정되었다. 이 중 각국 조계는 우리나라와 미국?영국?청국?일본?독일(독일은 1885년에 가입함) 대표 사이에 체결된 ?인천제물포 각국조계장정?에 따라 송학동?송월동?만석동 일대 약 14만 평 규모로 설정되었다.

현재 시립박물관 야외에 전시(본래는 중구 내동 인천상공회 입구에 있었음)되어 있는 각국 조계석은 조계의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을 하였던 것이다.

 

4.학익지석묘 - 기념물 제 34호 , 연수구 옥련동 525 (인천시립박물관)

지석묘(고인돌)는 선사시대 돌무덤의 하나이면서 거석문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적이다.

지석묘는 형태에 따라 북방식?남방식?개석식으로 나누어지는데 일반적으로 매장시설이 지상에 있는 것을 북방식이라 하고 매장시설이 지하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남방식이라 하며 남방식 중에 받침돌이 없는 것을 개석식이라 한다. 학익지석묘는 이중 북방식에 속하며, 1927년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내부에서 빗살무늬 토기 파편, 돌화살촉, 돌칼 등이 출토되었고 출토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다.

학익지석묘는 본래 인천구치소(구 소년교도소) 내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시립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옮겨 전시하고 있다.

 

5.김재로 영정- 유형문화재 제10호 , 연수구 옥련동 525 (인천시립박물관)

김재로(1682~1759)의 자는 중례 호는 청사이다. 1710년 충당대시 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세자시강원설서(세자를 가르치는 일)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가 내외의 주요관직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으나 1740년 영의정에 오른 이후 1758년 관직을 떠날 때까지 네 차례에 걸쳐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현재 시립박물관에는 한국본과 중국본 영정 2점이 보관되어 있는데 51세 때 모습을 그린 한국본은 국수 변상벽?한종유가 공동제작한 것으로 전신사조의 경지를 보여주면서 18세기 중엽 공신상에서 볼 수 있는 좌안팔분면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6.정우량 영정- 유형문화재 제9호 , 연수구 동춘동 325

정우량(1692~1754)의 자는 자휘 호는 학남(鶴南)이다. 조선 경종 3년(172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대사성?좌승지,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을 지냈다. 특히 영조 4년(1728)에는 왕의 교지를 지어 한글로 번역해 각도에 보내기도 하였으며, 개성 계성 사비와 연수구 연수동에 그가 지은 신도비가 있다.

현재 동춘동 후손이 보관하고 있는 그의 초상화는 측면을 향하고 있는 얼굴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정면을 향한 좌우대칭구도를 이루고 있으면서 복식?윤곽?옷의 주름 등을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다. 채색 방법은 수용성 물감을 아교액과 조합하여 진한 색채로 사실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7.목조보살좌상 - 유형문화재 제14호 , 연수구 옥련동 525 (인천시립박물관)

이 불상(佛像)은 왼손이 훼손되어 수인(手印:손모양)은 알 수 없으나 조각기법과 모습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 조선시대 때 제작된 보살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승유억불정책을 일관함으로써, 왕실이나 시민들 사이에 불사나 예불은 계속되어 불상의 조성이 필요하였음에도, 국가정책이나 사회문화로 꽃피지 못하고 개인의 복을 염원하는 데 그쳤다. 따라서 불교가 융성했던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조성된 세밀하고 화려하며 예술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불상양식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이 보살상에는 화려하거나 세밀함은 찾아보기 어려우나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미간에는 백호가 있으며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또한 다소 두꺼운 느낌을 주면서도 어깨에서 무릎까지 흘러내린 통견의도 좌우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세기가 부족하고 투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불상양식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으로 이 보살상이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8.목조여래좌상 - 유형문화재 제13호 , 연수구 옥련동 525 (인천시립박물관)

여래상은 석가여래상의 준말로 불교 창시자인 석가모니를 형상화한 것이다.

인천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여래상은 좌상(坐像)으로, 손이 훼손되어 손의 모양은 확인할 수 없으나 선정인(가부좌일 때 취하는 것으로 왼쪽 손바닥을 위로해서 배꼽 높이에 놓고 오른손을 펴서 손바닥을 위로 해 겹쳐놓되 두 엄지손가락을 서로 대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세부양식을 살펴보면 머리는 나발(소라)모양이고 상호는 원만하며 양미간과 코?입술 등은 잘 다듬어져 있을 뿐 아니라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삼도가 뚜렷하다. 또한 법의는 통견으로 좌우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등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고려시대 불상양식을 반영한 조선 초기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9.관음좌상 - 유형문화재 제5호 , 연수구 옥련동 525 (인천시립박물관)

불상(佛像)이란 넓은 의미로는 부처님의 형상을 새기거나 그린, 모든 불교(佛敎) 조각을 통칭하지만 일반적으로 머리에 쓴 보관(寶冠)과 그 깨달은 진리를 상징하는 손의 모양(수인手印 또는 인상印象) 그리고 소지한 물건의 종류에 따라 불?보살?천?나한?조사 등으로 구분된다. 유형문화재 제 5호인 이 불상은 보살 중에서도 관음보살에 속하며 제작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형태로 보아 중국 명 또는 청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머리에는 구슬로 장식된 보관(寶冠)을 쓰고 가슴에는 화려한 구슬 목걸이를 하고 있으며,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천의는 지면까지 흐르고 있다. 오른쪽 어깨에서 시작된 천의 자락은 가슴을 거쳐 무릎 위 손목을 덮고 양련형(연꽃잎이 위로 향한 것) 대좌 위까지 이르고 있다.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은 오른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오른손을 편안히 올려 놓았으며, 왼손은 지면을 짚고 있어 전반적으로 평온한 느낌을 준다.

 

10.송대철제범종 - 유형문화재 제4호 , 연수구 옥련동 525 (인천시립박물관)

범종은 사찰에서 때를 알리거나 행사 시 대중을 모을 때 또는 불사의례에 사용되던 것으로 불상?불화?탑과 더불어 불교 미술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이 종은 명문이 마모되어 정확한 주조 연대를 확인할 수 없으나 형태?의장등을 고려해 볼 때 송나라 초기에 당의 양식을 반영해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쌍용이 조각되어 있는 용유는 오랜 세월이 흘러 다소 마모되기는 하였지만 웅장한 분위기를 주고 있으며, 종신의 윗부분에는 화려한 장식문이 장식되어 있고 중간과 하단에는 가사문대가 양주되어 있으며 가사문대 내에는 ?풍조우순 중신천추?를 비롯한 대소문자의 명문이 가득 새겨져 있다. 하대는 팔능파상형을 이루고 있으며 하대와 종신 사이에는 용을 조각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단순하면서도 화려하고 웅장하면서도 안정된 느낌을 준다.

 

11.원대철제범종 - 유형문화재 제3호 , 연수구 옥련동 525 (인천시립박물관)

이 범종은 원나라 성종 3년(1298)에 주조된 것으로 중국종 특유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범종은 일반적으로 용유?종신?하대 등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지는데 이 종의 용유부는 두 마리의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는 동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고, 용유와 종견 사이에는 당초문이 양주되어 있으며, 당초문 사이에는 8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종신이 양주된 대곽 안에는 ?황제만세 중신천추?를 비롯한 대소문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하대의 중구는 팔능파상형으로 넓은 구연부를 이루고 있다. 또한 종신 하단부와 구연부 사이에는 8괘가 배치되어 있는 등 전반적으로 간결하고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범종이 인천에 유입된 경위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제가 부족한 철의 조달을 위해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각지에서 공출하여 부평 조병창에 야적하였으나 전쟁이 끝나면서 그대로 두고 철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2.부평도호부청사(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호)

 


 

원래의 도호부청사는 재북부2리(계산동 898번지)였으며 현재는 계산동 943번지 부평초등학교 내에 옛 청사건물이 변형은 되었으나 일부가 남아 있는데, 이곳에는 계산동은행나무(시지정기념물 11호), 욕은지(시지정 문화재자료 1호), 어사대(시지정문화재자료 제3호)의 흔적이 도호부청사 앞에 남아 있다.

 

부평도호부청사는 숙종 3년(1677)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세워진 내력을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고려시대 의종 4년(1150)에 안남도호부로 고종2년(1215)에 계양도호부로 조선시대 태종 13년(1413)에 부평부가 부평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모든 정황으로 볼 때 부평도호부로 승격이 되면서 청사 건립에 착수하여 약 5년후(태종 18년, 1418)에 완공된 것으로 보여진다. 청사옆에 보호되고 있으며 이때 풍치목으로 심어진 듯한 은행나무의 수령이 약 600여년쯤 되는 것과도 일치한다.

기록에 의하면 객사, 동·서헌, 삼문, 근민당, 좌·우익랑, 동·서책방, 사령청, 향청, 포도청, 훈무당, 부창등 총 23동 23칸으로 당시에는 웅장한 규모였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내아만 남아 있고, 원래는 “ㄱ”자 건물이였으나 1968년 현 위치로 이동하면서 “ㅡ”자건물로 바뀌어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도리집이 되었다.

 

13.부평향교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12호)


 
   

부평향교는 현재의 경인교육대학교에서 북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인종 5년(1127)왕명에 따라 수주(樹州)향교가 계양구 오류동 산4번지에 세워졌는데 당시 전국 56주가 모두 이에 따라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수주의 후칭인 안남도호부가 의종 19년(1165) 계산동(온수골)으로 이전됨에 따라 당시 안남향교도 안남산 남쪽(현재 계산2동 한우리 아파트 부근)에 이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 충선왕 2년(1310) 부평부가 되면서 부평향교로 고쳐 불러왔고 병자호란(1636)을 맞아 문묘 건물이 완전히 소실되었으나 조선 숙종14년(1688)에 현재의 위치에 문묘를 재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평향교에는 명륜당, 재실등 교육시설을 앞에 놓고 그 뒤에 대성전과 동·서무의 문묘시설을 둔 우리나라 향교의 전형적인「전당후묘」의 형식이다. 열성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대성전과 동·서무, 동·서재는 맞배지붕형식으로 되어 있고, 명륜당은 팔작지붕이다. 중국성현5성위와 한국18현을 모신 석전대제는 매년 음력 2월과 10월 초정일에 봉해하고 있다.

 

14.답동성당

 

사 적 : 제287호

규모 및 구조 : 건평307.2평,단층 벽돌조

시 대 : 1933년 착공, 1937년 준공

소 재 지 : 인천광역시 중구 답동 3의 1

지 정 일 : 1981. 9. 25

지정면적 : 8,262.5㎡(2,499.4평)

 

뾰족 돔 얹힌 아름다운 외관!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 빌렘신부가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하면서 답동 언덕에 설립되었다.

1890년 7월 성당 건축 정초식을 갖고 1894년 착공해서 1897년에 고딕식의 단층건물로 세워졌다.

현재 모양의 답동성당은 1933년에 옛 성당건물을 보존하면서 외벽을 벽돌로 쌓아올려 1937년에 완공한 성전으로 로마네스크양식을 띠고있다.

중앙의 탑상부와 양측의 소탑의 상부에 뾰족돔을 얹어 아름다운 외관을 형성하고 있다.

 

15.인천 일본 제일은행지점

 

지정번호 : 인천광역시지정문화재 제7호

위 치 : 인천광역시 중구 중앙동 1가 9

시 대 : 1889년

지 정 일 : 1982. 3. 2

 

1883년 11월 일본의 제일국립은행 부산지점의 인천출장소로 출발했다.

1909년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창립되어 제일은행인천지점이 한국은행인천지점으로 바뀌었다.

언뜻 보기에 옛 중앙청 건물과 닮은 구석이 있는 이 건물은 중앙에 돔을 설치한 석조 단층의 후기 르네상스 양식이다.

해방 후 조달청 인천사무소, 동인천 등기사무소 등 주인이 바뀌면서 증축되거나 개축되면서 건물의 외향이 조금씩 변형되었지만 기본골격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6.(구)인천우체국

지정번호 : 인천광역시지정문화재 제8호

위 치 :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 6가 1

시 대 : 1923. 12. 8

지 정 일 : 1982. 3. 2

 

인천의 우체사(郵遞史)는 우리나라 우정(郵政)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해인 1884년에 우정총국이 설립됐고 그해 11월 17일에 우정총국 인천분국이 개원되었다.

서울보다 먼저 우편업무가 개시되면서 인천우체국은 사실상 우리나라 우정업무의 효시가 된다.

(구)인천우체국은 1923년에 신축되었는데 지난 1982년 인천시유형문화재 제 8호로 지정될 만큼 서양과 동양의 건축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17.용궁사

 

지정번호 : 인천광역시지정문화재 제15호

위 치 :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동667

시 대 : 조선철종5년(1854년)

지 정 일 : 1990. 11. 9

 

용궁사는 영종도 백운산 기슭 평평한 대지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백운사(白雲寺)라 하였다고 전하며 일명 구담사(瞿曇寺) 라고도 한다.

조선조 철종 5년(1854)에 흥선대원군이 중창하여 용궁사라 개칭하고 고종이 등극할 때까지 이 절에서 칩거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영종도 중산 월촌에 사는 윤공이란 어부가 꿈을 꾼뒤 바다에서 작은 옥불을 어망으로 끌어올려 이 절에 봉안하였다고 하며 현재 그 옥불은 없고 모조 옥불을 모시고 있다.

경내의 관음전(觀音殿)은 맞배 지붕, 홑처마 건물로서 옥석(玉石)으로된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으나

일제때 도난당하고 현재는 후불탱화를 배경으로한 관음상이 걸려 있으며 건물 전면에는 해강(海岡)김규진이 쓴 4개의 주련(住聯)이 걸려있다.

경내입구의 대방(大房)정면에는 용궁사(龍宮寺)라는 대원군의 친필현판이 걸려있다.

이밖에 칠성각(七星閣)객사가 있으며 절뒤에는 높이 11m에 달하는 미륵불이 있으며 객사앞에는 수령 1,300여년된 고목 나무가 있다. 부속건물인 칠성각은 1944년, 용황각은 1966년에 각각 건축되었다.

 

18.중구 문화원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17호

위 치 : 중구 송학동 1가 7번지

규 모 : 대지 158평, 지하 1층, 지상 1층, 건물 135평

건축연도 : 1901. 6. 22(1950년도 일부 개축)

지 정 일 : 1993. 7. 6

 

중구문화원은 우리나라 근대 역사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보낸 건물이다.

1901년 6월에 낙성된 이 건물은 인천에 거주하던 미국,독일,러시아,일본인들의 사교장인 제물포구락부로 이어졌다.

당시에는 사교실,도서실,당구장 등이 있었다.

1913년 조계제도가 철폐되면서 일본재향군인회 인천연합회가 들어서며 정방각(情芳閣)이 들어섰고 해방 후에는 미군의 장교클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휴전 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이 설립되면서 1989년 박물관이 연수구 옥련동으로 이전하기까지 시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19.중구 요식업조합(일본58은행 인천지점)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19호

위 치 : 중구 중앙동 2가 19-1

구 조 : 연와조 2층(건평 94.19평)

지 정 일 : 1993. 7. 6

 

(구)58은행은 일본 오사카에 본점을 둔 58은행의 인천지점으로 1892년 7월에 개점했다.

그후 제3은행 등 군소은행과 합병해 야스다은행으로 바뀌었다.

1939년 신축된 이 건물은 광복 후 조흥은행 인천지점,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중구 요식업조합이 입주하고 있는 프렌치 르네상스 양식의 2층 건물로 초기 양식 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외관은 벽돌조 구조물에 석판마감으로 구성됐다. 2층 발코니 형식이 이국풍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20.홍예문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49호

위 치 : 중구 송학동 2가 20번지

시 대 : 1908년

지 정 일 : 2002.12.23

 

원래 홍예문은 윗머리가 무지개 형상을 하고 있는 문을 말하는데 이제는 자유공원에 있는 돌문의 고유명사가 되다시피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중앙동, 관동 등에 일본 거류민들이 급격히 늘자 만석동 방면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뚫은 돌문이다.

1905년에 공사를 시작했는데 예기치 못한 거대한 암석들이 나타나 3년여 걸려 완성했다.

반석위에 세워진 문답게 지은지 100년 세월이 다 되가는데도 지금도 끄덕없다.

인천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시원한 골바람이 불어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21.(구)인천 일본은행 18호 인천지점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50호

위 치 : 중구 중앙동 2가 24-1

시 대 : 1890년

지 정 일 : 2002.12.23

 

18은행은 1890년 준공되어 그해 10월에 개점하였고 중앙동2가 24번지에 있으며 58은행의 바로옆에 위치해 있으며 1954년에는 한국흥업은행으로 사용되었다.

18은행은 일본이 한국의 금융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계획되어 세워진 은행이었다. 18은행뿐 아니라 그 당시에 세워진 일본 은행들 모두가 한국 금융계를 일본 식민지화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7개의 은행을 비롯해 13곳의 보험사의 소유자가 천일은행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의 소유였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1954년에 상공은행과 신탁은행의 합병으로 발족한 한국흥업은행 지점으로 사용된 이후, 1992년까지는 카페 그 후 중고 가구 도매상이 임대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22.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51호

위 치 : 중구 내동 3번지【현 인천성공회】

시 대 : 1956년

지 정 일 : 2002. 12. 23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가 한국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890년 9월부터이다.

고르페 주교는 인천에 한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인 성미가엘교회를 설립하고 선교활동에 들어갔다.

이것이 성공회 인천내동교회이다.

내동교회는 이듬해 10월 교회 이웃에 인천 최초의 서구식 병원인 성(聖) 누가 병원을 세웠다.

당초 교회 건물은 1891년 9월 30일 준공하였으나 한국전쟁 때에 소실되었고 현재 건물은 1956년 6월 23일 준공되었다.

 

23.조병수가옥

 

지정번호 : 인천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 16호

위 치 : 인천 광역시 중구 남북동 868】

시 대 : 1890년대

지 정 일 : 1997. 7.14

 

서해 도서에 있는 중방으로 된 전형적인 중류주택. "ㄱ"자형의 대문채와 안채 두 건물로 형성되어 있으며, 이에 의해 변이 끊어진 "ㅁ"자형으로 되어있다.

안채는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좁은 툇마루를 설치한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2칸의 안방,동쪽에 한 칸의 건넌방을 배치하고 그 앞에 하단 높은 툇마루를 놓았고 뒤에는 퇴를 내어 벽장으로 만들었다.

 

안방 앞에는 정측이 모두 2칸인 넓은 부엌을 달았으며 안방쪽 한칸의 부엌 천장을 낮추어 안방에서 사용하는 다락방으로 꾸몄다.

이와 같은 평면 구성은 전형적인 중부형 주거로서 경기·충청지방에 많은주거형식이다.

 

건넌방은 대청으로의 출입문("亞"자형)과 앞 툇마루쪽에 띠살무늬의 문을 달았다. 안채 대청과 건넌방 마루 끝에는 유리창을 설치 했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1칸 앞으로 툇간 반칸을 달았고 동쪽에는 사랑방 뒤로 양칸 1칸, 도리칸 3칸의 마루를 툇간방 또는 창고가 달렸다.

대문은 동쪽에서 셋째칸에 설치되었고, 그 동쪽 두칸을 사랑방 , 서쪽 한칸을 방, 구 서쪽 두칸과 앞쪽 툇간까지를 창고로 삼았고 대문 서쪽방과 두 칸의 사랑방 앞에 툇마루가 깔렸다.

대문 위중방 윗부분은 회벽처리된 가운데에 팔각형의 격자문창을 설치한것이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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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종 목 국보 제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2008년 2월 10일 방화로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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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기도

1) 개성 남대문 (開城南大門)

경기도 개성시 북안동에 있는 개성 내성(內城)의 남문(南門).

아래층은 석축, 위층은 앞면 3칸(12.63m), 옆면 2칸(7.96m)인 목조 단층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1394년(태조 3)에 처음으로 지었고, 여러 차례 수리하다가 1900년(고종 4)에 크게 고쳐 지었으나, 1950년 12월에 불타 버렸고 1954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내성은 1393년에 쌓은 석성(石城)으로 둘레가 24리 40보이고, 남대문, 동대문, 동소문, 북대문, 북소문, 눌리문(訥里門), 진언문(進言門) 등 일곱 개의 문이 있으며, 두 곳에 수구문을 설치하였다.

축대는 길쭉하게 다듬은 네모난 화강석으로 정연하게 쌓았으며 그 복판에는 무지개문을 냈다. 길의 양쪽 밑부분에 댓돌을 놓고 그 위에 부챗돌을 반원형으로 쌓아올렸다. 축대 위에는 숨어서 적을 쏠 수 있게 성가퀴를 돌리고 거기에 여러 가지 형태의 쏘는 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축대 위 네 모서리에는 빗물이 모여서 흘러내릴 수 있는 시설도 해놓았다.

문루의 기둥은 돌기둥 위에 배흘림기둥을 이어 세웠는데, 밑의 돌기둥은 높이가 1m이다. 기둥 사이는 앞면 가운데 칸을 양쪽 칸보다 좀 넓혀 중심 부분을 강조하였고, 네 모서리의 기둥들은 다른 기둥들보다 조금 높게 하였으며 약간 안쪽으로 눕혀 기둥에 큰 안쏠림을 주었다.

이같은 형식은 건물을 안정되게 보이게 하면서도 실제로 건물의 강도를 높여주는 방법으로서, 우리나라 목조건물에 예로부터 써내려온 방법의 하나이다. 기둥 위에는 액방과 평판방을 얹었으며 평판방의 양쪽 끝을 약간 들어올려 건물이 훨씬 날렵해 보인다.

공포는 포식두공으로 첨차를 맞추어 안팎 3포로 짜올렸다. 여기에는 안쪽에 포의 수를 늘려 안도리를 서까래까지 올리는 방식 대신 안쪽의 장여를 겹으로 하고 그 가운데에 화반을 끼우는 방법을 써서 고려 말기 공포의 특징인 검소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문루의 널마루는 가운데 한 칸에만 깔고 내부는 통천장으로 하여 안을 시원하게 하였다. 지붕은 겹처마의 합각지붕으로 용마루·박공마루·추녀마루·지붕면이 모두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었다. 날아갈 듯 가볍게 쳐든 추녀는 몸체에 어울리게 경쾌한 모습으로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뛰어난 건축미를 보여주고 있다. 문루에는 모루단청을 입혀서 은근하면서도 무게감을 주고 있다.

2) 선죽교 (善竹橋)

개성시 선죽동 자남산 동쪽 기슭의 작은 개울에 있는 고려시대의 돌다리. 구명은 선지교라 하였으며, 다리의 동쪽에 한석봉 글씨의 비가 있다.

돌기둥과 노면이 맞닿는 부분에는 시렁돌을 철도의 침목모양 올렸으며, 이 돌은 좌우로 거의 튀어나오지 않았다. 돌기둥 위에 마련된 노면에는 양쪽 가에 길다란 난간돌을 놓았고 그 사이를 여러 줄의 판석으로 깔았다.

노면 위에는 교량의 난간주 구실을 하는 돌기둥들을 3단으로 쌓았다. 맨 아랫돌은 거형단면의 돌로서 일정한 치수의 돌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중간돌 사이에는 각 돌기둥을 이어주는 8각의 돌을 꽂았고 맨 윗돌은 비석의 끝처럼 완만한 화강석을 사용하였다.

이 다리는 고려말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하고 오다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 4, 5인의 철퇴에 맞아 피살된 곳으로 유명하다.이 돌다리에는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 있다 한다.

주위에 두른 석란(石欄)은 1780년(정조 4)에 가설하였고 옆에 비각이 있는데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개가 들어 있다.

3) 영통사 오층탑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오관산 남쪽 기슭 영통사지에 있는 고려 초기의 석탑. 높이 약 6.5m.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 제37호.

화강암으로 축조된 이 석탑은 1단의 기단에 기단면석을 갖춘 5층석탑으로 고려 초기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1단으로 된 석탑의 기단은 고려 초기의 탑인 불일사오층석탑이나 현화사칠층석탑과 유사하게 우주(隅柱)를 모각(模刻)한 면석(面石)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위에 갑석을 갖추고 있다.

석탑의 탑신은 높은 편에 속하며, 이와같은 양식은 8, 9세기에 유행한 통일신라시대 일반 석탑의 탑신석에 비하여서는 낮으며, 고려 중엽 이후에 나타나는 석탑의 탑신석에 비하여서는 높다.

각 탑신석에는 우주를 모각하였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옥개석 역시 경사가 급하여 불일사오층석탑이나 해주오층석탑과 유사하며, 옥개석의 낙수면(落水面) 전각(轉角)이 약간 있을 뿐이다.

특히, 옥개석 받침에 있어서는 1층 탑신석과 2층 탑신석에 속하는 옥개석은 4단을 각출하고 있으며, 3/4/5층의 옥개석에서는 3단을 각출하고 있다. 최상부의 옥개석상에는 상륜부를 설정하였던 부분이 있으나 현재는 유실되어 없다.

전체적으로 보아 탑신석과 옥개석의 비례가 고려 초기의 탑에서 보이는 특징을 갖추고 있고 통일신라의 탑에서 보이는 균형잡히고 정제되어 있는 경쾌한 미적 감각은 없다.

한편, 영통사의 영통사서삼층탑 역시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에 속한다. 높이가 3.7m인 이 석탑은 기단과 탑신 네모서리에 기둥을 두드러지게 새기고 옥개석에는 네줄의 굄선을 주어 단조로운 맛을 제거하고 아름다운 균형과 안정감을 나타내고 있다.

4) 현화사비 (玄化寺碑)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현재의 북한의 행정지명으로는 개성직할시 장풍군 월고리)에 있던 현화사의 창건연기 등을 기록한 고려시대의 사적비. 현종 12년(1021)에 건립하였다.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이다.

비신의 높이는 2.36m, 너비는 1.28m이며, 옥개석·비신·귀부를 모두 갖추고 있다. 귀부의 조각은 생동감이 있으며, 이수의 장식적인 운룡문이나 비신 측면의 운룡문도 조각이 뛰어나다.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의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와 비슷한 양식이다.

비문에는 현종이 양친인 안종과 헌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현화사를 창건하였다는 창건연기와 절의 규모, 연중행사 및 국가에서 베푼 여러 가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뒷면에 추각한 음기에 의하면, 현종이 국가의 번영과 사직의 안녕을 위하여 매년 4월 8일부터 사흘간 밤낮으로 미륵보살회를 베풀고, 양친의 명복을 위해서는 매년 7월 15일부터 사흘간 밤낮으로 미타불회를 열었다고 한다.

또한, 《대반야경 大般若經》 600권, 3본의 《화엄경 華嚴經》, 《금광명경 金光明經》,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등의 인판을 새겨 이 절에 두었으며, 특별히 ‘반야경보(般若經寶)’라 부르며 길이 시방(十方)에 인시(印施)하게 하였다 한다.

비신 상단에 현종의 어필로 “靈鷲山大慈恩玄化寺之碑銘”이라 전하였는데, 이 사실은 《고려사》에 보인다. 비신 앞면은 원비명으로 주저가 짓고 채충순이 썼으며, 뒷면은 채충순이 짓고 썼다. 주저와 채충순에 관해서는 《고려사》 열전에 전하며, 주저는 송나라 온주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한 문인이다.

앞면의 글씨는 자경 2㎝의 구양순체에 기초한 해서로, 매우 정결하다. 뒷면의 글씨는 자경 2㎝ 안팎의 행서로, 구양순의 해서필법을 지니면서 왕희지의 행서를 시도하여 어색한 면도 없지 않으나 개성을 살린 점은 돋보인다.

5) 현화사칠층석탑 (玄化寺七層石塔)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현재의 북한의 행정지명으로는 개성직할시 장풍군 월고리)의 현화사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칠층석탑. 높이 8.64m로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이다.

현화사지에는 이 칠층석탑 외에 당간지주·비·석교 등이 있으며, 석등은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이전하여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화사는 1018년(현종 9)에 창건되었으며, 이 탑은 1020년에 건립되었다.

방형(方形) 평면의 탑이며 1단의 기단부와 7층의 탑신과 상륜부로 되어 있다. 탑의 높이는 8.64m로서 고려석탑 중에서는 큰 편에 속한다. 기단부는 네 모서리와 기단부 각 면의 한가운데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돌 사이에 장방형으로 다듬은 돌들을 벽돌처럼 쌓아 만들었다.

기둥돌 위에는 세 단의 받침을 가진 넓고 편평한 두꺼운 갑석을 놓았다. 기단부를 이렇게 처리한 것은 희귀한 예에 속한다. 기단부의 한 변은 3.9m에 이르고 7층으로 된 탑신은 위로 올라가면서 체감법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주고 있다.

매층의 탑신 밑에는 2단의 굄을 마련하였고 탑신 네 모서리에는 우주(隅柱)를 천각하여 나타냈고 탑신의 각 면에는 연화형 안상(眼象)을 조식하고 이 안상 속에 불상을 정교하게 장식하였다.

불상의 형태는 석가상·사천왕상·나한상들이다. 옥개석들은 전체적으로 얇은 편이고 처마는 깊으며 상하연은 양쪽으로 비교적 심하게 휘어 올라 있다.옥개석 밑에는 2단씩의 낮은 처마받침을 두었다.

정상에는 네모난 노반과 복발(覆鉢)이 있고 그 위에 육각형의 석물을 올렸는데 앙화나 보개로 추정된다. 규모가 크고 전반적으로 수법이 굵직하면서도 세부에 있어서는 정교하며, 탑 전체와 각부의 부분이 조화를 이루는 균형잡힌 걸작이다.

2. 강원도

1) 장안사 (長安寺)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장연리 금강산 장경봉(長慶峯) 아래에 있는 사찰.

신라 법흥왕대에 창건되었다는 설과, 551년(양원왕 7) 고구려의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뒤 773년(혜공왕 9) 율사 진표가 중수하였고, 970년(광종 21) 화재로 불타버린 뒤 12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982년(성종 2) 선사 회정이 함열현 등에서 토지 150결을 보시받아 중건하였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원나라 순제의 왕후 기씨는 고려인으로서, 황제와 태자를 위하여 금 1,000정과 공인들을 보내서 굉변의 감독 아래 퇴락한 당우를 중건하고 새로운 누각을 건립하게 하였는데, 지극한 정성과 뛰어난 솜씨는 금강산뿐 아니라 전국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작품이었다고 한다.

1458년(세조 4) 세조가 행차하여 대웅전을 중수하게 하고 토지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1477년(성종 8) 화재로 전소됨에 따라 1483년 나라에서 금 3,000관과 백미 500석을 받아 일청이 중건하였다. 1537년(중종 32) 다시 불타버리자 1545년(인종 1) 일청이 다시 중건하였다.

그뒤 1728년(영조 4) 묘현이 중창하였고, 1791년(정조 15) 순상 윤사국이 전 5,000관을 내어 중수하였다. 1842년 부원군 조만영이 금 250관을 보시하여 새로 300여칸을 증축하고, 밭 40여석을 시주하였다. 1863년 호조판서 김병기가 주상하여 공명첩 500장을 내리게 하고, 자신의 재산 중 1,200냥을 보시하여 중수하게 하였다.

이 절의 입구에 들어서서 일주문과 운성문을 거쳐 만천교라는 징검다리를 건너면, 숲 사이로 만수정이 있고 그 안에는 ‘금강산장안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안의 오른쪽으로는 대향각, 왼쪽으로는 극락전,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곳에는 본전인 대웅전이 있다.

1945년 이전까지는 6전(殿) 7각(閣) 1문(門)을 가졌으나 그 규모는 옛날에 비하여 축소된 것이고, 부속암자로 장경암(長慶庵), 안양암(安養庵), 지장암(地藏庵), 영원암(靈源庵) 등을 가진 금강산 4대사찰 중의 하나였다.

문화재로는 기황후가 중창할 때 비로자나불을 비롯하여 53불, 1만 5000불 등이 봉안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대법당 왼쪽의 지성전에 봉안된 나한상은 비범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기황후 당시의 것인지 그 후대의 것인지는 단정짓기 곤란하다.

부속암자 중 안양암은 장안사 동북쪽 3㎞ 지점에 있는데 고려 성종 때 회정이 창건한 곳이며, 이후 회도가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이 암자에는 미륵불과 나한상 등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영원암은 신라 때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창건한 것으로 금강산 일원에서도 가장 맑고 고요한 수도처로 이름 높은 곳이다. 부근의 옥초대(沃焦臺)는 영원조사가 일심으로 수도하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고, 그 앞의 반듯한 돌은 영원조사가 공부하던 곳이라고 하여 책상바위라고 이름붙여졌다.

정양사석등 (正陽寺石燈)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장연리(현재 금강군 내강리)에 있는 정양사 약사전 앞의 고려시대 석등. 북한의 보물급 문화재 제34호.

구조는 6각의 복련으로 장식된 지대석을 갖추고, 원형의 간석과 앙련의 6각 화사석 받침대를 구비하고 그위에 화사를 갖추었으며, 화사석 상면의 석등 옥개석 역시 물매가 급격한 6각의 옥개석을 얹고 있다.옥개석 최상단에는 복발(覆鉢)과 보륜(寶輪) 2개를 갖춘 상륜부를 구비하고 있다.

특히, 석등의 간석은 원형이면서 상하간에 고복형(鼓腹形)의원형받침을 구비하고 있고, 간석 중앙에는 고복형의 원형띠를 돌려 상하를 구분하였다.

화사석에 있어서도 고려 석등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모기둥을 세워 조영한 석등이 아니라 工자형의 석주 6개를 조립하여 자연히 화창(火窓) 6개가 나타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또 석등 옥개석도 일반형 석등의 옥개석과는 달리 6각 형태로 경사면을 급하게 처리한 것도 주목된다.

석등은 이 절에 있는 삼층석탑과 같이 고려시대 조성된 이형(異形)의 석등으로서 대석 중앙에 간석받침 원형공이 있으며 지름이 32㎝에 이르고, 간석의 높이는 118㎝에 달하는 고려석등이다.

3. 평안남도

1) 감신총

평안남도 온천군 신영면 신영리에 있는 고구려 벽화고분. 1913년에 조사·발표되었으며 초기에는 대연화총(大蓮華塚)으로 불리었다.

이 벽화고분의 구조는 원형의 봉토에 널길 및 좌우 양쪽에 하나씩 두 개의 감이 있는 장방형 앞방과 방형의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二室墳〕이다. 천장 가구(架構)는 앞방은 궁륭천장이고 널방은 궁륭모줄임천장이다.

벽화는 회칠한 벽면에 그려져 있으나 박락이 심하여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앞방과 널방의 각 벽 모서리에는 기둥과 두공이, 널길에는 기마인물이 그려져 있다.

전실의 동벽에는 시자·시녀, 서벽에는 인물상·산악·신선, 남벽에는 고취·악대·수레·인물상, 북벽에는 주작도·인물상·연꽃무늬, 그리고 서쪽 감벽에 주인공의 생활도, 동쪽 감벽에 장방(帳房)으로 보이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현실의 동벽은 박락되어 알 수 없고 서벽에 소나무·수렵도, 남벽에 주작·구름무늬, 북벽에 불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이 고분을 감신총이라 부르는 것은 감 안의 주인공상을 신상(神像)으로 오판한 데서 그렇게 된 것이며, 주인공의 평상 밑에 보이는 연꽃무늬에 의해 대연화총이라고도 부른다.

이 벽화고분의 축조연대는 주인공의 실내 생활을 왼쪽 벽에 그린 인물풍속도와 감이 전실에 있는 구조 형식에 의하여 4세기 중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주인공 평상 밑의 연화대좌에서 보이는 불교의 영향과 널방벽의 불꽃무늬 등으로 미루어 보아 5세기 전반경의 무덤으로 생각된다.

2) 강서대묘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벽화고분.

강서삼묘 중 가장 큰 벽화고분이다. 고분의 분구는 원형이며, 기저부의 지름은 약 51.6m, 높이는 8.86m이다.

무덤의 구조는 널방 남벽의 중앙에 달린 널길과 평면이 방형인 널방으로 된 외방 무덤이다. 널방 네 벽과 천장은 질이 좋고 잘 다듬어진 큰 화강암 판석 각각 한 장으로 축조하였고, 천장은 2단의 평행 굄돌을 안쪽으로 내밀고 그 위에 2단의 삼각굄돌을 얹고서 덮개돌을 덮은 모줄임천장〔抹角藻井式天障〕이다.

벽화의 내용은 사신도(四神圖) 및 장식무늬이며, 회칠을 하지 않은 잘 다듬어진 널방 돌벽 면에 직접 그렸다.

널방 남벽의 입구 주변에는 인동·당초무늬를 그려 장식하고, 좌우의 좁은 벽에는 주작을 한마리씩 룡, 서벽에는 백호, 북벽에는 현무, 천장 중앙의 덮개돌에는 황룡을 각각 그렸는데, 천장의 황룡은 침수에 의하여 박락(剝落)되어 분명하지 않다.

천장벽화는 천장부를 구성하고 있는 제1단 굄돌 옆면에 인동무늬를 감싸안은 초롱무늬가 에스자형(S字形)으로 이어져 나간 무늬띠를 돌렸으며, 제2단 굄돌 옆면에는 비천(飛天)·비운(飛雲)·신선·산악 등이 그려져 있다.

이 굄돌의 아랫면에는 인동초롱무늬의 중앙에 연꽃무늬가 가미되어 있고, 좌우에 연꽃잎을 그린 특이한 무늬가 그려져 있다. 제2단 굄돌에는 비천을, 제3단인 삼각굄돌 옆면에는 연꽃을 그렸으며, 그 아랫면에는 구석에 연꽃과 인동이 혼합된 무늬를 배치하고, 그 좌우에 마주 대한 봉황을 그렸다. 제4단 굄돌 옆면에는 괴조와 봉황이, 그 아랫면 구석에는 연꽃과 인동이 혼합된 무늬가 그려져 있다.

고분축조 및 벽화 연대에 관하여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초로 추정된다. 벽화는 대체로 철선묘법(鐵線描法)으로 그려졌는데, 사신도는 그 구상이 장대하고 힘차며 필치가 세련되어, 우리나라 고분벽화 중에서 극치를 이루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3) 강서소묘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의 평야 중앙에 있는 고구려 고분. 가까이에는 벽화고분인 강서대묘와 강서중묘를 합쳐서 강서삼묘(江西三墓)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묘의 무덤 입구는 원형이고, 기저부의 지름은 약 40.90m, 높이는 약 6.81m이며, 무덤의 구조는 널방 남벽의 중앙에 달린 널길과 평면이 방형인 널방으로 이루어졌다.

널길의 앞부분은 크게 파괴되었으나 원상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으로 미루어, 그 길이는 약 1.45m로 추정되며, 널방의 크기는 동서 약 3.49m, 남북 약 3.35m, 높이 약 3.03m이다.

천장은 모줄임식인데 3단의 평행 굄돌을 약간씩 안쪽으로 내밀고, 그 위에 1단의 삼각형 굄돌을 얹고서 덮개돌을 덮은 구조이다.

널방의 네 벽과 천장은 질이 좋고 잘 다듬은 화강암 거석으로 축조하였으며, 바닥에는 2매의 큰 돌을 깔았다. 그리고 입구에는 2매의 돌문이 달려 있고 전면에 회칠을 하여 막았다.

대묘·중묘 등과 같이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이기는 하나, 벽화나 장식무늬 등은 하지 않았다. 고구려 고분으로서는 말기에 가까운 시기에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4) 강서약수리벽화고분

평안남도 강서군 약수리에 있는 5세기 무렵의 고구려 벽화고분. 1958년에 발굴되었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널방〔主室〕과, 같은 모양이지만 크기가 약간 작은 앞방〔前室〕으로 이루어졌고, 널방 남벽 약간 동쪽에 몰려 두 방을 연결하는 통로가 만들어져 있다.

앞방 동서 두 벽에는 바닥에서 50㎝쯤 되는 높이에 사방 1m, 깊이 1m 정도의 벽감이 하나씩 있으며, 앞방 남벽에는 약간 동쪽으로 널길〔羨道〕이 통하여 있다.

널방의 천장은 네 벽이 안으로 기울어져 올라가다가 2단의 모줄임〔抹角藻井〕쌓기를 하고 맨 위에 뚜껑돌을 덮은 것으로, 덕흥리벽화고분과 산연화총(散蓮花塚) 등의 천장구조와 같다. 널방은 각 변 길이 5m, 높이 5m이며, 앞방은 각 변과 높이가 모두 널방보다 1m씩 줄어들고 있다.

벽화는 앞방 동벽에는 부엌·방앗간·행렬도, 서벽에는 사냥모습·외양간(말)·측근자들, 남벽에는 외양간(소)·행렬도·문지기, 널방에는 방 네 귀에 기둥을 그리고 두공·창방까지 나타낸 다음, 북벽에는 묘주 내외와 현무, 동·서·남벽에는 각각 청룡·백호·주작을, 천장에는 해·달·별·구름을 그렸다. 그러나 널길과 앞방의 두 벽감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다.

묘주 내외의 그림이 앞방에서 널방으로 옮겨지고 사신도(四神圖)가 확대되어 중기양식으로 가까워지고 있으나, 묘주 내외는 아직 전기의 정좌(正坐) 형식이고 사신도도 낡고 보잘 것 없으며 묘실 형식이 옛 양식인 점으로 미루어, 전기의 말기에 해당하는 고분으로 추정된다.

5) 강서중묘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벽화고분.

고분의 분구는 원형이고, 무덤의 구조는 널방 남벽의 중앙에 달린 2단의 널길과 평면이 방형인 널방으로 된 외방무덤이다. 널방의 네 벽은 각각 큰 화강암 판석 한장으로 축조하였고, 천장은 2단의 평행 굄돌을 내밀어 얹어놓고 그 위에 한장의 덮개돌을 덮은 평행 굄천장이다.

벽화의 내용은 사신도 및 장식무늬이며 잘 다듬은 돌벽면에 직접 그렸다. 널방의 벽화는 남벽 입구 좌우에 한쌍의 주작을 그렸고, 동벽에는 청룡, 서벽에는 백호, 북벽에는 현무를 세련된 필치로 그렸다.

천장에는 제1단 평행 굄돌 옆면에 인동무늬를, 제2단 평행 굄돌 옆면에는 인동·당초무늬를 그렸으며, 그 아래로 향한 면은 괴운무늬로 장식하였다. 천장의 뚜껑돌 중앙에는 연꽃무늬, 남북에는 봉황, 동쪽에는 일상(日象), 서쪽에는 월상(月象)을 배치하였으며, 모서리에는 연꽃무늬와 인동무늬를 그렸다. 일상은 원 속에 세발까마귀를 그려 나타냈고, 월상은 원 속에 두꺼비를 그려놓았다.

특히, 이 고분의 벽화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의 특징적인 한 면을 엿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건축적 성격을 전혀 띠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한 측면에는 커다란 두 개의 흐름이 있는데, 그 하나는 건축적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회화적 표현이다. 건축적 표현은 묘실의 네 벽 모서리에 기둥·두공·소로·도리 등을 그려 널방 내부를 목조건물의 실내와 같이 장식하는 것이다. 강서중묘에는 이러한 건축적 표현이 전혀 없어 벽화의 시대적 흐름을 헤아릴 수 있게 해준다.

고분 축조연대는 6세기 중엽 또는 7세기 초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강서대묘보다는 화법이 고졸하여 연대가 앞서는 것으로 생각된다.

6) 대동문 (大同門)

북한의 행정구역상 지금의 평양특별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는 평양성 내성(內城)의 동문(東門).

석축 위에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을 갖춘 조선 중기 성문이다. 전체높이 19m, 석축높이 6.5m이고, 문루는 앞면 3칸(15.9m), 옆면 3칸(10.34m)이다.

6세기 중엽에 세워졌으며, 조선 중기인 1576년(선조 9)에 이르러 그 자리에 지금의 성문이 새로 건립되었다. 1635년(인조 13)에 석축의 무지개문을 고쳤다.

축대는 화강석을 다듬어 정교하게 쌓았고 그 복판에 무지개문길을 냈다. 평면상 네 모서리를 바깥쪽으로 점차 넓혀 힘을 잘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축대 위에 세운 2층 문루는 1층 가운데칸에만 1.5m 높이의 널마루를 깔았다.

기둥은 모두 흘림기둥 형식으로 하였다. 네 모서리의 기둥은 다른 것에 비하여 좀 굵고 높게 하면서도 안으로 약간 기울게 세웠는데, 이것은 건물의 균형을 바로잡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다. 1층 기둥은 2층 기둥보다 더 굵고 높게 하였다. 1층 바깥기둥은 안기둥 중턱에 댄 퇴보〔退樑〕에 물리고 안기둥은 2층 대들보보다 중보를 직접 받아주게 하였으며, 2층 바깥기둥은 1층 퇴보 위에 세우고 대들보와 물리게 하여, 건물 안은 구조상 층을 분리시키지 않고 통칸으로 처리하였다.

1/2층 공포는 모두 3포식으로 안팎의 포작수(包作數)가 다 같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보통 성문 건축의 공포 포작수는 위층이 아래층보다 많아지며 바깥보다 안의 것을 넓게 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대동문의 공포는 포식두공의 조선 초기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이 문의 3포식 공포는 구조적으로는 바깥 5포, 안 7포에 맞먹는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합각지붕은 마루선들과 지붕면이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을 이루고 있어 매우 아름답다. 위층 지붕 곡선은 아래층 지붕 곡선보다 좀 더 굽었으며, 처마의 깊이는 보통 경우와는 달리 1층보다 낮은 2층에서 더 깊어 지붕에 경쾌감을 주고 있다.

기둥에는 붉은색을 칠하고 두공, 대들보액방, 서까래, 평판방 등에는 여러 가지 무늬와 색상을 배합한 은근한 단청을 입혔다.

한편, 대동문에는 세 개의 현판이 있는데, 하나는 무지개문 머릿돌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문루 1층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쓴 활달한 필치의 초서 현판이, 그리고 문루 2층에는 평안감사 박엽(朴燁)이 쓴 방정한 해서 현판이 걸려 있다. 문루에는 ‘읍호루’라는 현판도 붙어 있는데, 읍호는 문루에서 손을 내밀어 대동강의 맑은 물을 떠올린다는 뜻으로 주변경치와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은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통하는 문으로서 평양성의 성문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성문이었다. 문밖의 덕바위 아래쪽에는 옛 나루터가 있는데 고구려 때부터 조선 말기까지 배타는 사람들로 흥청거렸다고 한다. 대동문 건너편이 ‘선교’라고 불리게 된 것도 이곳에 배다리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구려의 건축물을 이어 발전시킨 조선 전기 건축의 형식과 구조를 보여주는 건물로서 장엄함과 아름다움, 경쾌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어 성문 건축물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7) 대안덕흥리벽화고분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에 위치하고 있는 고구려의 벽화고분.

1976년에 발견, 조사된 이 고분의 봉토는 방대형(方臺形)이며, 널방의 구조는 앞방의 남벽에 달린 널길과 가로로 긴 장방형의 앞방, 앞방과 널방을 잇는 좁은 통로, 네모난 널방으로 이루어진 굴식 돌방이다.

널방의 네벽은 가공한 돌을 쌓아 축조하였으며, 천장가구는 널길은 평천장이고, 앞방은 2단의 평행굄 궁륭식 천장이며 널방은 5단의 평행굄 궁륭식 천장이다. 그리고 앞방의 북벽 바닥에는 네모난 단이 있고 널방바닥에는 큰 판석으로 짜고 회칠한 널받침이 마련되어 있다.

이 벽화고분에는 풍부한 내용의 벽화와 600여 자에 달하는 묵서(墨書)가 있다. 벽화는 회칠한 널방의 벽면에 흑색·적색·황색·녹색·갈색 등의 안료로 그려졌다.

널길의 벽화는 박락이 심하여 분명하지 않으나, 동벽에는 입구를 향하여 걷고 있는 2, 3인의 인물상과 창을 쥔 수문장이 그려져 있다. 서벽의 북쪽에는 동자를 데리고 있는 인물상이 있고, 남쪽에는 수문장이 2개의 창을 쥐고 서 있다. 그리고 동서벽의 남단에는 벽화의 설명문이 쓰여 있다.

앞방에는 주인공이 생전에 일을 보던 광경과 천상 세계에 대한 내용이 그려져 있고, 북벽의 통로 입구 윗벽에는 황색을 칠한 네모난 구획 안에 14행 154자를 종서로 쓴 묘지명이 있다. 이 묘지명에 의하여 주인공은 영락 18년(408) 12월 25일에 안장되었음을 알 수 있고, 나아가서 이 고분의 축조연대를 알게 되었다. 통로의 동서벽에는 거가행진도(車駕行進圖)가 그려져 있다.

널방의 북벽에는 주인공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서벽에는 마술·궁술 등 무예를 겨루는 그림이, 남벽에는 마굿간·외양간이, 동벽에는 불교행사에 관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밖에 여러가지 모양의 장식무늬가 배치되어 벽화와 더불어 현실을 화려하게 하였다.

앞방 북벽 천장에 남아 있는 명문의 내용을 보면, 그 주인공은 하북성일대인 유주(幽州)에서 자사(刺史)를 지낸 뒤 고구려로 들어와서 408년에 이 무덤에 안장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절대연대가 명문으로 남아 있어 5세기 초 고구려 고분의 구조나 벽화양식을 알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고분으로 평가된다.

8) 동명왕릉 (東明王陵)

평안남도 평양시 역포구역 무진리 왕릉동(옛 중화군 진파리)에 위치한 고구려 동명왕의 무덤. 전부터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의 능으로 전하여 왔는데, 1974년 발굴, 조사되었다.

2단의 돌기단 위에 사각추형으로 흙을 쌓아 올린 돌기단흙무덤인데 기단돌의 높이가 150㎝이고, 그 밑의 기초돌 높이가 15㎝, 그리고 현재 남은 봉토의 높이가 650㎝이므로 총 높이는 815㎝이다. 그러나 원래는 기단도 2단 이상이고 봉토 또한 1m 정도 더 높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기단돌과 기초돌은 대부분 커다란 석회암을 다듬은 것인데, 네 모서리의 돌이 크며 그 중에서도 서북쪽 모서리의 기초돌과 기단돌이 가장 크다(기초돌 231×220×90㎝, 기단돌 433×203×65㎝). 한편, 봉토는 밑부분이 막돌과 모래흙을 섞은 것이고, 윗부분은 붉은 진흙으로 다져 쌓았다.

이와같이 이 무덤은 고구려 무덤 형식인 돌무지무덤과 봉토돌방무덤의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있어서, 돌무지무덤이 봉토돌방무덤으로 바뀌는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위에 묘역시설을 가지고 있는데, 첫 기단돌의 높이와 같은 지면에 사방 약 5m의 너비로 크기와 모양이 고른 강자갈을 가지런히 깔았다. 내부구조는 석회암과 화강암을 다듬어서 널길〔羨道〕·앞방〔前室〕·널방〔主室〕의 세 부분으로 축조한 돌방으로 되어 있다.

무덤은 9° 가량 서쪽으로 기운 남향인데, 북쪽에 동서 421㎝, 남북 418㎝, 높이 388㎝의 널방이 있고, 그 앞에 길이 300㎝, 너비 169㎝, 높이 187㎝의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앞방이 있으며, 앞방 중앙에 길이 235㎝ 정도의 널길이 달려 있다.

각 방의 사이에는 돌문을 달았는데, 널방과 앞방 사이의 것은 높이 186㎝, 너비 85㎝, 두께 14㎝ 크기의 두 쪽으로 되어 있으며, 그 이마돌은 길이 435㎝, 너비 145㎝, 두께 55㎝나 된다. 앞방은 바닥에 큰 돌을 깔았는데 널방보다는 4㎝ 낮으며, 벽은 150×60㎝ 정도 크기의 다듬은 돌을 2단, 3단으로 쌓았다.

동서 양쪽벽 밑부분의 바닥과 같은 높이에 감이 있다. 널방은 정방형 평면에 꺾임천장인데, 44개의 석재로 쌓고 그 사이는 석회로 메꾸었다. 벽체는 2단으로 쌓았는데, 밑단의 돌이 길이 416∼425㎝, 높이 182∼188㎝로 매우 커서 벽 하나가 한장의 돌로 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네 벽은 안으로 5, 6° 정도 경사지게 쌓았다.

바닥에는 두께 17㎝와 25㎝ 되는 두장의 큰 화강암 판돌을 깔았고, 그 밑에는 105㎝ 깊이까지 5층으로 삼화토와 숯층을 엇바꾸어 쌓아 배수장치를 하였다. 천장은 5계단으로 돌을 쌓아 올리고, 꼭대기를 큰 판돌로 덮었다. 천장의 경사도는 대체로 30∼40°이다.

벽화가 비교적 잘 남은 동쪽 벽의 일부와 천장을 근거로 추정할 때, 널방에는 고구려벽화무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풍속화나 사신도가 아닌 직경 12㎝의 연화문(蓮花文)을 벽면과 천장에 가로 세로 일정한 간격(4.2㎝)으로 약 640개(추정 복원) 정도 그렸다.

유물은 이미 도굴되었는데, 남은 것은 여러 개의 금 또는 금동수식, 금관못·은관못을 비롯한 꽃무늬금동장식품과 머리핀 등이다.

기타 사항으로 이 고분의 앞뒤에는 얼마간 떨어져서 딸린무덤〔陪塚〕이 있으며, 특히 앞쪽 120m 되는 곳에서는 고구려 시대의 절터(정릉사지)가 드러났다. 이상의 규모와 축조상 특이점, 벽화의 내용 등을 근거로 추정해 볼 때, 5세기 초에 옮겨 만든 동명왕의 능인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9) 보통문 (普通門)

평안남도 평양시 보통문동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성문.

현존하는 성문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서 6세기 중엽에 처음 세워졌으며, 현재의 건물은 여러 차례 보수해 오다가 1473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 문은 화강암을 다듬어 쌓은 축대와 그 위에 세운 2층 문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축대 가운데에는 높이 4.55m, 너비 4.4m의 홍예가 있고 문길 앞쪽에는 앞뒤에 쇳조각을 입힌 튼튼한 널문을 달았다. 문루는 2층건물로 두공이 있는 기둥 위에 2층의 합각지붕을 올렸다.

바깥 기둥들은 1층의 지붕에 이어지고 내부의 네개의 기둥은 1층에서 2층까지 관통하여 세웠으며, 바깥기둥과 안기둥 사이에 연결된 보〔樑〕 위에는 짧은 2층기둥이 놓여 있다. 두공은 1/2층 안팎이 모두 3포(三包)로 되어 있고 두공첨차(頭工詹遮)의 간격은 다르게 되어 있는데 바깥쪽은 안쪽보다 더 크게 하였다.

이 문은 다른 성문들에 비하여 전체높이가 조금 낮고 1층 면적에 비하여 2층면적이 상대적으로 좁게 되어 있다. 옆면에서 1층 양쪽 바깥기둥의 밑단과 마루도리를 연결하는 삼각형, 그리고 앞면에서 축대바닥 양쪽과 문루의 용마루중심을 연결하는 삼각형은 거의 정삼각형에 가깝게 되어 있어 장중하고도 안정된 느낌을 줄 뿐 아니라, 고구려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10) 쌍영총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면 안성리에 위치한 고구려의 벽화고분.

분구는 간신히 원형을 나타내고 있으며, 널방의 구조는 전실의 남벽 중앙에 달린 널길(길이 2.72m), 방형의 앞방(동서 2.35m, 남북 2.72m), 앞방과 널방 사이의 통로, 방형에 가까운 널방(동서 2.77m, 남북 2.85m)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二室墳〕이다.

특히 통로의 좌우에는 8각 돌기둥이 하나씩 세워져 있으므로 이 벽화고분을 쌍영총이라고 이름지었다. 천장 가구는 전실·현실 모두 평행3각굄 천장이다.

벽화의 내용은 인물풍속도 및 사신도이며, 그 배치 상태는 동벽에 수레 2대, 갑옷을 입은 개마무사(鎧馬武士) 1명, 기마무사 2명, 남녀입상 약 30명 등과 북을 치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널길의 서벽에는 수레, 기마인물과 남녀 등 30여명 및 북을 치는 인물, 창을 쥐고 춤추는 인물 등이 그려져 있으며, 천장은 구름무늬로 장식하였다.

널길에서 앞방으로 들어가는 좌우 두 벽에는 장사상을 그렸고, 앞방의 벽화는 동·서벽에 청룡과 백호를 그리고 남벽에는 인물 입상을 그린 것 같으나 분명하지 않고, 네 벽에는 기둥과 두공을 그렸다.

천장의 제1단 굄돌에는 당초문, 제2단 굄돌에는 봉황과 구름무늬, 제3단 굄돌에는 당초문, 3각 굄돌에는 괴상한 무늬, 그리고 천장의 뚜껑돌〔蓋石〕에는 연화문을 배치하였다.

통로의 좌우에 세운 8각돌기둥에는 반룡을 그렸다. 널방의 벽화는 네 벽에 기둥·두공·도리를 그리고, 도리 위에는 ‘ㅅ’형의 솟을을 그렸으며, 천장부의 제1단 굄돌에는 사격자 무늬 속에 동심원이 있는 무늬, 제2단으로부터 위의 굄돌에는 연화문을 배합한 무늬를 그렸다.

북벽에는 화려한 장방(帳房) 안에서 시종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생활하는 주인공 부부의 실내생활도가 그려져 있고, 동벽에는 9명의 인물이 행진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공양도(供養圖)를 보고 있다. 서벽에도 장방이 그려져 있으나 내부는 분명하지 않다.

11) 성총 (星塚)

평안남도 온천군 신령리에 있는 고구려 고분.

전실은 없고 연도와 주실로 되어 있다. 연도가 동쪽으로 치우친 단실묘이며 모줄임천장〔抹角藻井〕으로 되어 있다.

벽화는 인물풍속도 및 사신도를 주제로 하였다. 방 네 귀에 기둥이 있으며, 남벽에는 주작과 측시연화(側視蓮花), 기타벽에도 연화가 보이는데 역시 사신도와 연화가 주제이다. 천장 층급부에는 당초문, 삼각석 바닥에는 별무늬가 그려져 있다. 연문은 아직 고식이고 사신도총으로의 과도기적 형태로 보인다.

연대는 5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12) 수렵총 (狩獵塚)

평안남도 온천군 화도리에 있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의 고구려 벽화고분. 이 지역의 옛 지명은 대복면 매산리였고 이 지명을 따서 매산리사신총(梅山里四神塚)으로 불려왔으나, 현실 서쪽 벽에 그려져 있는 수렵도를 본떠 지금은 수렵총이라 부르고 있다.

분구는 원형이고 묘실의 구조는 동쪽으로 치우쳐 설계된 길이 약 1.15m, 너비 약 1m, 높이 약 1. 32m의 연도(羨道)와 동서길이 3.34m, 남북길이 3.04m, 높이 1.32m의 직사각형의 현실로 된 단실 무덤이다.

천장의 구조는 현실 네 벽 위에 세단의 평행받침대를 설치한 다음 그 위에다 한단의 우삼각(隅三角) 받침을 두고, 한 장의 천장석으로 막은 활모양평행삼각천장이다.

벽화는 회반죽을 두껍게 바른 현실의 네 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는데, 네 벽에는 사신이, 그 사이에 인물풍속도가 그려져 있다. 북벽에는 서편으로 현무가 그려져 있고, 윗부분에는 북두칠성으로 생각되는 별자리를 배치하였으며, 그 동편에는 휘장이 쳐진 방의 평상에 정면을 향해 앉아 있는 4인의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이 인물들 중 동쪽의 1인은 남자 주인공이고 다른 3인은 모두 여자로, 주인공의 처첩으로 생각된다. 휘장이 쳐져 있는 방의 바깥에는 마부가 말을 끌어잡고 있다. 평상에 바로 앉아 있는 3인의 가슴과 허리부터는 지느러미 모양의 것이 나부끼고 있다.

이 인물풍속도는 신전 모양의 건물과 가슴/허리에서 나부끼고 있는 지느러미모양 등으로 보아 신화 속의 인물을 상징하는 신비한 인상을 풍기는 신상(神像)의 초상화로 생각된다. 주인공의 머리 위에는 ‘仙寬’이란 묵서(墨書)도 있다.

동벽 청룡의 중앙 윗부분에는 해를 상징하는 세 발 까마귀〔三足烏〕가 그려져 있고, 후방 윗부분에는 기마인물상이 묘사되어 있다.

서벽 백호의 윗부분에는 사슴을 사냥하는 말 탄 무인을 그린 수렵도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말을 상징하는 두꺼비가 그려져 있다. 이 두꺼비 그림은 다른 고구려 벽화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중앙부의 수렵도, 그 아래의 가늘고 긴 자태로 맹렬히 돌진하는 모습의 백호도, 윗부분의 두꺼비 그림을 배치한 서벽의 벽화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음울한 화면구성으로 신비감마저 띠고 있다.

남벽에는 두 마리의 주작이 서로 맞대고 있다. 이 주작도는 봉황의 모습과 흡사한 면이 있다.

한편 천장부에는 구름문양과 연속되는 당초문 형태의 초문(草文)이 굵은 선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인 색채는 갈색과 칠흙색이 기조를 이루어 조용한 가운데 안정된 색채감을 주고 있다.

그림들이 예스럽고 소박하여 동수묘(冬壽墓)/덕흥리고분(德興里古墳)에서 볼 수 있는 중국식 화법과는 다른 딱딱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는데, 이는 초기 고구려 벽화고분의 화법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수렵총의 연대추정에는 여러 의견들이 있다. 5세기 축조설은 벽화가 지극히 예스럽고 소박하여 불교예술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과, 사신도 가운데 청룡과 봉황처럼 보이는 주작이 후한시대의 동경에 나타나는 사신과 유사하며, 인물도의 부인들의 머리에 장식헝겊이 얹혀 있다는 점 등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5세기로 보는 또 다른 견해는 그 근거로 벽화 내용 중 인물풍속도와 사신도가 함께 있으면서 사신도의 비중이 인물풍속도보다 크다는 점을 들어서, 이 고분은 사신도를 벽화내용으로 하는 고분으로 옮겨가기 직전에 나타난 것으로 본다.

또 이 고분의 인물도의 어깨부분에 날개와 같은 구름 기운이 뻗치고 있다는 점은 한대의 신선화에서도 보이고 있어 그 연대를 올려잡을 수 있는 한 요소가 되고 있지만, 사신의 주벽(主壁) 진출로 보아 이 또한 5세기 전반보다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추정할 수 있다.

13) 연화총

평안남도 강서군 간성리에 위치한 고구려 벽화고분.

고분의 봉토는 원형이며, 묘실의 구조는 앞방 남벽의 중앙에 달린 연도, 동서 양벽 및 북벽 양측에 각각 하나씩 벽감이 있는 가로로 긴 장방형의 전실, 전실에서 현실로 들어가는 통로, 방형의 현실로 이루어졌다.

현실의 네 벽은 안산암재로 쌓아 축조하였으나 입구 및 감실의 주위는 화강암재를 쌓아 축조하였다. 전실 및 현실의 천장은 모두 3각 굄 천장이다.

벽화는 회칠한 벽면과 천장에 흑색·갈색의 물감으로 윤곽을 잡고 그렸는데, 박락이 심하여 극히 일부만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벽화의 배치상태 및 내용을 보면 전실의 각 벽에는 기둥·두공·도리를 그렸으며, 현실로 들어가는 입구 윗벽에는 뱀 같은 것을 그렸으나 훼손이 심하다.

서쪽 감실 안에는 인물상과 남북조식의 천개(天蓋)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는 불꽃무늬가 돋힌 장막이 보인다.동쪽 감 안에는 원래 그림이 그려졌으나 박락이 심하여 알 수가 없다. 천장 각 구의 중심에는 큰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으나 서구의 것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다.

현실의 각 벽에는 기둥·두공·도리 등을 그렸고, 남벽 입구 위에는 굵고 검은 색 띠로 삼각형의 윤곽을 그리고 그 속에 봉황을 그렸으며, 동쪽에는 기린을, 서쪽에는 천인을 배치하였다.

천장의 3각 굄돌 아랫면에는 해를 나타내는 삼족오(三足烏)와 파문(巴文)·봉황 등을 그렸으며, 천장의 중심에는 활짝 핀 연꽃무늬를 그려서 장식하였다. 보다 많은 벽화가 그려졌다고 보이나 박락되어 이것만 남아 있다.

14) 요동성총 (遼東城塚)

평안남도 순천군 북창면 용봉리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고분.

고분의 봉토는 강물에 밀려온 토사의 퇴적으로 인하여 흔적 없이 평탄해졌다. 널방의 구조는 고구려고분의 일반적인 형식과는 다른 특이한 구조이다.묘실은 가늘고 긴 구형의 앞방 남벽 좌우에 짧은 두개의 실모양으로 된 널길이 달리고 관 하나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네개의 널방이 앞방의 뒷벽에 따로 통하게 북쪽으로 길게 놓여 있다.

그리고 앞방의 좌우에는 옆방이 달렸고, 동쪽 옆방의 입구에는 8각 돌기둥이 하나 서 있는 곁간 있는 무덤〔有側室墳〕이다. 천장은 널길·옆방·앞방·널방 모두가 평행굄 천장이다.

벽화는 널방의 각 벽면과 천장에 그려져 있으나 박락이 극심하여 그 전모를 판별하기 어렵다.

전실의 남벽 좌우 연문 사이에는 성곽도가 그려져 있는데, 중앙에 내·외성의 2중 성벽을 가진 주성이 있고 인접하여 남쪽과 동남쪽에 조그만 외성의 형태가 보이게 배치되었으며 내성 내부에는 골기와를 얹은 이층집과 삼층누각이 그려져 있다. 외성 내부에는 서쪽문 좌우에 단층집이 한채씩 있는데, 그 오른쪽 집 밑에 해서로 ‘요동성(遼東城)’이라고 내리쓴 묵서가 있다.이 묵서에 의하여 이 고분을 요동성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서쪽 옆방 벽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데, 주작은 이미 지워졌고 현무는 몸체가 없어졌으며 백호는 하반신만 남아 있다. 청룡은 꼬리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그리고 서쪽벽 중앙에는 장방지붕같이 보이는 그림이 약간 남아 있다.

전실 동북쪽 8각돌기둥이 서 있는 옆 북쪽벽에는 방앗간 그림이 희미하게 남아 있으며 그 곁에 개 한마리가 그려져 있다.

15) 용강대총 (龍岡大塚)

평안남도 용강군 지운면 안성리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고분.

분구는 방대형이고 묘실의 구조는 전실의 남벽 중앙에 달린 연도(길이 0.97m, 너비 1.38m, 높이 1.73m), 긴 장방형의 전실(동서 5.20m, 남북 1.73m, 높이 3.70m), 전실과 현실 사이의 통로 (길이 1.26m, 너비 1.27m, 높이 1.91m), 통로의 좌우 양벽에 있는 감, 방형의 현실(한 변의 길이 3.88m, 높이 4.43m)로 이루어진 이실분이다.

천장가구는 전실은 3구(區)로 나누었는데, 각각 평행3각굄 천장이며 현실도 평행3각굄 천장이다.

벽화의 내용은 인물풍속도이며, 그 배치 상태는 전실의 각 벽 모서리에 두공이 있는 기둥을 그리고 그 위에 장여를 받들고 있는 ‘ㅅ’형 솟을과 동자주(童子柱)를 그렸다.

기둥·도리·솟을·동자주에는 붉은색 바탕에 흑색으로 당초문을 그렸고 장여에는 파상문을 그렸다. 솟을과 동자주 사이에는 연봉을 한 송이씩 배치하고 장여 바로 밑에는 조문(鳥文)을 일렬로 그렸으며 천장부에는 전면에 당초문과 파상문을 그려 장식하였다.

남벽 서쪽에는 누각도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현실의 벽화는 박락이 심하여 잘 알 수 없으나 남벽에는 솟을과 활짝핀 연화문의 일부가 남아 있다.

16) 중화진파리사호분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진파리(지금의 평양시 역포구역 무진리 왕릉동)에 소재한 고구려 벽화고분. 진파리고분군 가운데 현실(玄室)에서 벽화가 발견된 2기의 고구려 벽화고분 중의 하나이다.

다른 하나인 진파리1호분과 묘실 축조형태 및 벽화 제작수법이 유사하며, 육조시대(六朝時代) 중국과의 문화 교류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두 고분벽화에 표현되어 있다. 산기슭 경사지의 높은 곳에 자리하여 나머지 8기의 고분들을 내려다보는 형국을 하고 있다. 1941년 일본인에 의한 개략적인 조사, 발굴이 있었으나, 정식으로 발굴되고 보고서가 간행되기는 1963년에 이르러서이다.

묘실의 방향은 남향이며 남북장방형 현실과 연도(羨道)로 이루어진 단실분이다. 현재 남아 있는 봉분의 지름이 23m, 현실바닥에서 봉분 위까지의 높이가 4.2m이다. 현실의 네 벽은 넓은 판석(板石)으로 축조하였고 그 위에 석회를 발랐으며, 천장은 평행굄 2단, 삼각굄 1단의 평행삼각굄이다.

연도 및 현실벽과 천장에 벽화를 그렸으나 석회의 박락이 심하여 전모를 알기는 어렵다. 벽화 표현에는 묵선(墨線)을 썼고 주색, 황색, 백색, 자색을 주조로 하였으며, 곳곳에 금분(金粉)을 사용하여 밝고 화려한 느낌을 주도록 하였다.

벽화의 주제는 사신(四神)이나 연지(蓮池), 일월성신(日月星辰)이 함께 표현되는 등 아직 전형적인 사신도 벽화단계에 이르지는 않고 있다. 연도 좌우벽에는 연지를 그렸는데, 수목의 나뭇잎 표현에 금분을 쓰고 산호초와 기암괴석 등을 질서정연한 좌우대칭으로 배치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정원조경술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불교의 극락세계에 존재한다는 천상연지(天上蓮池)를 표현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현실벽에는 사신과 일월상(日月像), 천인(天人), 각종 운문(雲文)과 인동연화문(忍冬蓮花文)을 그렸으며, 화려하고 동적인 느낌을 준다. 동벽은 하반부에 청룡을, 상반부에 용을 타고 나는 천인과 서조(瑞鳥)를 표현하였다. 이들의 배경화면에는 한 방향으로 흐르는 각종 운문과 함께 바람에 날리는듯한 인동연화문을 그렸는데, 운동성을 가미한 부드럽고 섬세한 필선이 육조시대 중국의 석각화의 표현법을 연상하게 한다. 중국과의 밀접한 문화예술의 교류 결과로 보인다.

서벽에는 좌반부 벽화만 일부 남아 있으며, 하반부에는 백화를, 상반부에는 천인과 월상을 배치하였다.계수나무가 그려진 서벽의 월상으로 보아 애초에는 동벽에도 일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상과 월상을 묘실벽 상반부에 배치한 벽화분으로는 매산리사신총과 대안리1호분이 있다. 현실 입구인 까닭에 좌우로 나뉜 남벽에는 상반부에 한쌍의 주작을, 하반부에 소나무인듯한 수목을 묘사하였으나 퇴색으로 인하여 매우 희미하다.

북벽 역시 동서벽과 같이 상반부에는 구름과 연꽃 사이로 하늘을 나는 천인을 그렸으나 하반부는 박락이 심하여 알아보기 어렵다.현무가 그려져야 될 자리이나 보고서에 따르면 남은 흔적은 용에 가깝다고 한다.

천장부에는 각종 별자리와 인동에 싸인 연꽃을 그렸다. 천장 1층 받침에는 인동과 금색연화식(金色蓮花飾)을 번갈아 그려 장식하였고, 2층 받침에는 녹색과 백색을 같은 간격으로 반복 채색하여 일종의 병풍효과를 내고 있다. 각 삼각석 밑면에는 연화문을 하나씩 그려 넣었는데, 연화문 둘레에는 힘차게 회전하는 인동문으로 감싸 생동감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천장에는 북두칠성을 비롯한 28개의 별자리를 묘사하였는데, 별들은 모두 금분으로 나타내었다. 이와같이, 금분으로 별을 형상한 예로는 덕화리2호분 천장도가 있다.

이 진파리4호분은 현실이 장방형이며, 내부에 석회를 바른 뒤 그 위에 벽화를 그린 점, 현실벽에 사신 외에 천인과 연꽃을 함께 표현한 점, 천장에 각종 별자리를 그리고, 북벽 현무의 표현이 애매한 점 등으로 보아, 강서대묘나 중묘와 같은 전형적인 사신도 묘로 이행하기 전의 과도기 단계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묘실축조 및 벽화제작시기가 7세기까지 내려오지는 않으며, 늦어도 6세기 중기나 말기인듯하다. 현실벽화 가운데 천장의 성신도와 연도의 연지도는 당대 고구려의 천문지식 수준과 정원조경술의 발달이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음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17) 중화진파리일호분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진파리(지금의 평양시 역포구역 무진리 왕릉동)에 위치한 고구려 시대의 벽화고분. 진파리고분군에 속하며 근처에 전동명왕릉(傳東明王陵)이 있다. 1941년 일본인에 의한 발굴조사 시 진파리4호분과 함께 벽화 고분임이 밝혀졌고, 1963년 정식발굴, 보고되었다.

1941년 조사 당시 묘실 내부에서 관모(冠帽)형태의 금동투조금구(金銅透彫金具)가 출토되었다. 중심에 원에 둘러싸인 삼족오(三足烏)와 원둘레에 세마리의 용과 화염문을 투조한 금구로 묘 주인이 높은 신분이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벽화의 모사화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고분은 봉분의 지름이 약 30여m, 현실바닥에서의 높이가 5m 가량이며, 장방형 현실과 연도로 구성된 단실분으로 묘실방향은 남향이며 납작한 판석(板石)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천장구조는 2단의 평행굄 위에 1단의 삼각굄을 얹은 평행삼각굄이다.

묘실 내부에 석회를 바른 뒤 그 위에 벽화를 그렸으며, 벽화의 주제는 사신(四神)이다. 벽화는 연도(羨道) 좌우벽과 현실벽 및 천장에 걸쳐 그려졌는데, 묵선(墨線)을 주로 하고 몰골법(沒骨法)도 사용하는 등 다양한 필법을 쓰고 있다. 색채는 주색, 황색, 녹색, 자색을 주조로 하였으며, 대상의 표현에 선의 강약과 색의 농담을 적절히 조절하여 그에 알맞은 효과를 의도하는 세련된 회화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연도 좌우벽에는 쌍영총 및 통구사신총과 같은 계열의 수문역사(守門力士)를 그렸는데, 연화반(蓮花盤) 위에 서 있고 광배(光背)가 머리 뒤에 표현된 것으로 보아 사천왕(四天王)의 일부를 묘사한 듯하다.

현실 동벽에는 북쪽을 향하여 웅비하는 청룡을 묘사하고 배경에는 진파리4호분 벽화에서와 같이 같은 방향으로 강하게 흐르는 구름, 휘날리는 인동연화, 구름을 타고 나는 서조 (瑞鳥) 등을 그렸다. 그러나 진파리4호분 류의 천인(天人)은 보이지 않으며, 구름 및 인동연화의 운동성이 보다 강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서벽의 백호 역시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포효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남벽에는 현실입구 좌우로 한쌍의 주작을 묘사하였다. 두 마리 주작 모두 꼬리가 위를 향하여 뻗어 있는데,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북벽 가운데에는 현무를 배치하였으며, 하나로 얽힌 뱀과 거북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동서벽의 청룡과 백호에 비하여 고졸한 느낌을 준다.현무의 좌우에는 암산과 커다란 소나무를 그렸고, 위로는 흐르는 구름과 휘날리는 인동연화 및 화염,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용 등을 묘사하였다.

천장부에는 운문과 인동연화문을 번갈아 그려 장식하였으며, 천장에는 네 귀퉁이에 인동연화를, 중심부에 일월상(日月像)을 그려넣었다.일상은 원 안의 삼족오로 나타낸 것에 비하여 월상은 원 안에 계수나무와 옥토끼, 두꺼비를 모두 그려넣어 일반적인 월상과 차이를 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묘사된 월상 중 특이한 표현으로 월상에 대한 관념의 복합으로 말미암은 듯하다.

진파리1호분은 묘실의 구조, 벽화의 기본구성방식, 벽화에 보이는 육조양식적(六朝樣式的) 요소 등이 진파리4호분과 같으나 필선이 보다 세련되고 벽화 중의 수목 및 산악표현과 같은 새로운 요소, 현실벽에서 사신이 차지하는 비중의 증대 등으로 미루어 진파리4호분보다 늦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축조시기는 6세기 말경으로 추정된다. 진파리4호분과 함께 고구려와 중국의 문화교류내용 및 전형적인 고구려 사신도묘의 성립과정을 밝히는 데 도움을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18) 천왕지신총 (天王地神塚)

평안남도 순천군 북창면 북창리 송계마을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고분.

봉토는 방대형이며 구조는 전실의 남벽 중앙에 달린 연도, 긴 장방형의 전실, 전실과 현실 사이의 통로, 방형의 현실로 된 두칸무덤이다.

천장 가구는 전실은 셋으로 구분되는데 좌측 천장은 평행굄 천장이고 중앙은 꺾음천장이며 우측은 3각굄 천장이다. 현실의 천장은 8각굄 천장이다.

이 벽화고분은 요동성총과 함께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축조양식을 보여주는 고분인데, 바로 천장 가구의 구조에 연유한다. 특히, 현실의 천장 가구법에서 주목되는 것은 천장부 최하단 3각굄돌이 벽에서부터 나오는 활기에 의하여 떠받쳐지고 그 위는 천장부 제1단에 그림으로 솟을모양을 그렸으며 이 그림 솟을 위에는 실물 솟을을 벽에서부터 나오게 하여 제2단 아랫단을 떠받게 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천장 정부의 3각굄부분은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늑골을 십자형으로 교차시켜 뚜껑돌을 떠받게 하고 있다. 현실 안에 번잡한 기둥을 한 대도 세우지 않고 넓고 높은 공간을 차지하는 궁륭천장을 만들었다는 것은 놀라운 건축기술이다.

벽화의 내용은 인물풍속도 및 사신도이며 회칠한 벽면에 그려져 있다. 현실의 벽화 중 북벽에는 주인공 부부의 실내생활도와 현무를 그렸고, 안쪽으로 휘어든 천장에는 왼손에 너비가 좁고 긴 깃발을 쥐고 봉황 비슷한 서조 (瑞鳥)에 올라탄 인물상과 쌍인두사신(雙人頭蛇身)의 괴이한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그림 위에는 ‘천왕(天王)’·‘지신(地神)’이라고 쓴 묵서가 있다.이 벽화고분을 천왕지신총이라고 하는 것은 이 그림에 연유한다.

그리고 각 벽에는 점선으로 된 구갑무늬 속에 연꽃을 그려넣은 무늬로 전면을 채웠고, 또 천장에는 수수조(獸首鳥)·사슴·뱀·신선·봉황·기린 등과 해·달·별 등을 그렸다.

4. 평안북도

1) 보현사팔각십삼층탑 (普賢寺八角十三層塔)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현면 향암리 소재 보현사 대웅전 앞에 있는 고려 말기의 다층 석탑.

높이 7.78m. 화강석을 섬세하게 다듬어 쌓았으며 형식과 양식면에서 고려 말기 석탑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탑의 일층 기단은 3층으로 쌓았으며, 이층 기단 윗면에는 복련(覆蓮)이 새겨져 있다. 8각으로 된 기단 한 변의 길이는 12m이고 탑신은 높이가 6.58m나 되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높이와 넓이를 차례로 줄여서 탑이 높으면서도 안정되고 아담해 보인다. 탑신 모서리마다 가늘게 우주(隅柱)를 모각하였고, 각 면에는 테를 둘러 아담한 느낌을 준다.

옥개석(屋蓋石)의 처마는 윗선과 아랫선을 모두 양끝에서 가볍게 반전하여 경쾌한 느낌이 들며, 8각으로 된 각층 옥개석의 추녀 끝에 풍경이 달려있다.

풍경과 상륜부는 6·25사변 때 파괴되었으나 최근에 다시 만들어 붙였다. 일명 석가탑이라고도 한다.

2) 영변남문 (寧邊南門)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에 있는 남문. 일명 ‘철옹성남문’또는 ‘만노문’이라고 한다. 북한의 보물급 문화재 제16호.

영변남문은 영변읍성인 철옹성을 쌓으면서 처음 세우고 그뒤 여러 차례 손질하였는데 현재의 건물은 1789년(정조 13)에 다시 세운 문이다.

이 문은 남쪽으로 안주·평양지방으로 통하는 중요한 문이며, 성벽에서 성 안쪽으로 약 40m 가량 들여다 세워 이곳이 옹성을 대신하게 한 구조를 하고 있다.

남문의 축대는 잡석으로 높이 약 8m 되게 축성하였고, 그 복판에는 높이 4.5m의 아치문을 냈다. 특히, 축대 위에는 장중하고 웅건한 2층 문루를 세웠는데 대동문과 유사한 점이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두공은 외5포작, 내7포작이며, 제공은 꽃가지형으로 되어 있다. 문루 앞면의 기둥은 높은 돌기둥 위에 목주(木柱)를 이어 세운 기둥이며, 지붕은 합각지붕을 얹고 있다. 문루상의 단청은 문루건축에 일반적으로 쓰였던 모로단청(毛老丹靑)이다.

이 문의 구조는 평양의 보통문 및 대동문과 유사한데, 1층 평면에서 정면과 측면의 비례는 대동문과 동일하며, 1층 면적과 2층 면적의 비례는 보통문과 일치한다. 또한 건물의 기둥 높이는 대동문보다는 낮고 보통문보다는 높다.

전반적으로 볼 때 남문의 형태는 균형이 잘 조화된 건물로서 현재 북한에 남아 있는 문루 건축 중에서는 가장 우수한 문루에 속한다.

3) 의주남문 (義州南門)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에 소재한, 조선시대에 개축한 의주성의 남문. 정면 3칸, 측면 3칸. 북한의 보물급 문화재 제10호. 일명 ‘장변루’ 혹은 ‘내훈루’라고도 한다.

문 북쪽에는 의주성의 장대이며 관서팔경의 하나인 통군정(統軍亭)이 있다. 남문을 언제 처음 건립하였는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으며 현재의 남문은 1613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특히, 의주남문은 국경도시로서의 서북방면의 관문 구실을 하였으며, 성문의 형태는 너비 4.2m, 높이 4m의 아치형 성문으로 그 위에다가 2층의 문루를 세웠다. 두공은 1층과 2층 모두 3포작으로 되어 있고, 문루의 가운데칸은 양옆의 측칸에 비하여 넓으며, 2층에는 널마루를 깔았다.

한, 1359년 홍건적의 침입을 막았던 의주 백성들의 항쟁 이야기가 깃들여 있기도 한 성문으로서, 다른 곳에 유존하여 내려오는 성문들과 더불어 비교적 높고 웅장한 느낌을 주는 성문이다.

4) 통군정 (統軍亭)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정(樓亭). 정면 4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북한의 보물급 문화재 제11호.

의주읍성에서 제일 높은 압록강 기슭 삼각산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다. 의주읍성의 북쪽 장대로서 서북 방위의 거점이었던 의주성의 군사지휘처로 쓰였다.

통군정에 올라서면 이끼 푸른 의주성의 옛 성벽이 눈앞에 보이고 아래로는 압록강의 푸른 물 가운데에 점점이 떠 있는 여러 섬들이 굽어보인다. 서쪽으로는 멀리 신의주·용암포 일대가 바라보이며, 남쪽으로는 ‘의주금강’으로 불리는 석숭산과 백마산 일대의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와 예로부터 관서팔경의 하나로 꼽혔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990년(성종 9)에 편찬된 〈임사홍기 任士洪記〉에 기록된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처음 세운 것이 분명하나, 1538년(중종 33)에 이를 다시 건립하고 1823년(순조 23)에 수리하였다.

평면이 정방형에 가깝고 바닥에는 앞부분 절반에만 단을 주어 널마루를 깔았다. 바닥 주춧돌 윗면에서 아랫마루까지의 높이는 71㎝, 아랫마루에서 윗마루까지의 높이는 33㎝로서 앞은 높고 뒤는 낮게 하였다. 7도리(七道里)의 너비에 통천장으로, 모든 부재들에 조각장식을 붙여 내부를 시원하고 화려하게 하였다.

특히 이 건물에서는 목재를 적게 쓰면서도 건물의 입체적 강도를 높이기 위하여 대들보를 겹으로 하고 동자주(童子柱) 대신 제공(諸貢)으로 틀어올렸다. 평양의 연광정, 강계의 인풍루, 안주의 백상루와 함께 우리나라 누각건물을 대표하는 유적의 하나로서 6·25 때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 복구되었다.

5. 함경남도

1) 석왕사 (釋王寺)

함경남도 안변군 문산면 설봉산에 있는 사찰. 31본산 제도가 실시되던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하나였다.

이 절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기 전에 무학대사의 해몽을 듣고 왕이 될 것을 기도하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석왕사의 창건이 이성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데 대해 이능화는 다만 숭불호법을 부회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로는 1377년(우왕 3)에 이성계가 정몽주·이화 등과 함께 청주(淸州:지금의 北淸郡)에 갔을 때 해양(海陽:지금의 吉州郡) 광적사가 병화로 폐허가 되었지만 대장경 1부와 불상 및 법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김남운(金南運)을 보내어서 이들을 보완한 뒤 석왕사에 봉안하고 오랫동안 임금을 축수하고 나라의 복을 빌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젊은 시절에 석왕사에서 가까운 설봉산 귀주사에서 독서를 하고 지낸 사실과 이성계와 무학에 얽힌 설화 등으로 미루어 석왕사의 창건은 이성계와 매우 관련이 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성계가 석왕사로 대장경을 옮긴 1377년 이전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서산대사의 〈설봉산석왕사기〉에 의하면, 이성계는 등극하기 전에 왕업을 이루기 위한 기도처로서 응진전(應眞殿)을 세워 오백나한재를 개설하였고, 이때에 천진당·진헐당·인지료·용비루 등을 지었다.

또 왕이 된 뒤에 거찰을 이룩하였으며, 1401년(태종 1)에는 이곳에 와서 동구에는 소나무를, 뜰에는 배나무를 심었다. 그뒤 왕명에 의하여 이곳의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하였고 좋은 배를 임금에게 바치게 하였다.

1732년(영조 7)에는 대웅전과 영월루, 흥복루, 범종루, 용비루, 조계문 등을 개수하였다. 31본산 시대에는 대웅전, 응진전, 팔상전, 명부전, 해장전, 극락전, 석왕사, 인지료, 신한각, 운한각, 천서각, 만춘각, 백련당, 진헐당, 심검당, 군당, 보명전, 연빈관 등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며, 48개의 말사(末寺)를 관장하고 있었다.

2) 진흥왕순수비 (마운령비)

신라 진흥왕이 척경(拓境)과 순행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 중의 하나. 함경남도 이원군 마운령에 있다.

건립연대는 568년이며, 비석의 재료는 질 좋은 흑색의 화강암이다. 비석의 높이는 165.1㎝, 너비는 44.2㎝, 두께는 30. 3㎝이다

비면에 새긴 글자는 양면으로 새겼는데, 표면은 모두 10행으로 한행 26자이며, 뒷면은 모두 8행으로 한행 25자이다. 해서체로 음각하였다.

비문의 구성을 보면, 앞면은 제기(제1·2행)와 기사(제3행∼제10행)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고, 뒷면에는 수가인명열기(제1∼8행)가 있어 전체적으로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이 비는 진흥왕이 이원지방을 순행한 뒤 군신이 더불어 경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 비문에는 ‘제왕건호’니 ‘짐’이니 ‘순수’니 하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어서 당시 신라의 자존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비는 비문의 판독이 거의 완전하며 황초령비와 같은 해에 세워졌고 또 황초령비에 보이는 수가인명이 이 비에도 보이고 있어서 황초령비의 마멸된 글자를 판독하고 보충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황초령비나 마운령비는 고려조 윤관이 9성역 때 또는 조선 초기의 북방개척시에 옮겨 세웠다고 하는 몇몇 학자의 이치설(移置說)은 추론에 불과하며, 도리어 두 비의 원위치는 바로 발견 당시에 있었던 곳으로서 신라의 영토가 동북으로 이원지방까지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3) 진흥왕순수비 (황초령비)

신라 진흥왕이 척경(拓境)과 순행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 함경남도 함흥군 황초령에 있었으나 1852년(철종 3) 관찰사 윤정현(尹定鉉)에 의하여 황초령 아래의 진흥리로 옮겨졌다.

이 비는 진흥왕이 함흥지역을 순수하고 나서 군신이 모여 경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건립연대는 568년이며, 비석의 재료는 견치하고 질이 좋은 화강암을 물갈이한 것이다. 비석의 높이는 151.5㎝ 내외, 너비는 46.9㎝, 두께는 48.5∼24.5㎝이다.

비면에 새긴 글자는 모두 12행이며 한행은 36자이다. 글자의 크기는 2.4㎝이다. 해서체이며 음각하였다. 비문의 구성은 제기(제1행)·기사(제2행∼제7행 15자)·수가인명열기(제7행 17자∼제12행)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황초령비와 마운령비가 소재한 함흥지방과 이원지방이 신라 영토로 편입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그러나 이 두 비의 발견으로 568년 이전에 이 지역이 신라의 영역이 된 것은 분명하게 되었다. 아마 그 시기는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유역을 빼앗은 553년부터 568년 사이의 어느 때가 아닐까 한다.

이 시기에 신라가 함경남도까지 북상할 수 있었던 것은 동해안을 따라가는 해로의 용이함과 진흥왕대의 신라의 정복적 팽창력과 당시의 고구려가 귀족 사이의 내분과 돌궐족의 남하압력으로 위기에 처하여 있었던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서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6. 함경북도

1) 경성남문 (鏡城南門)

함경북도 경성에 있는 경성읍성(鏡城邑城)의 남문. 석축(石築) 위에 지은 2층누각의 조선 중기의 성문이다.

규모는 축대가 길이 16.5m, 너비 11m, 높이 7m이고, 문루는 1층이 앞면 5칸(13.5m), 옆면 3칸(8.05m)이며, 2층이 앞면 4칸, 옆면 2칸이다.

성읍성을 쌓은 해인 1107년에 세웠으며, 1433년에 크게 고쳤다. 1616∼1672년 사이에 성을 더 크게 고쳐 쌓으면서 이 문도 다시 세웠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으며 1756년에 고쳐 세웠으나 1950년에 파괴되었다. 지금 건물은 전쟁이 끝난 뒤에 보수한 것이다.

전체의 구성은 돌로 쌓은 대(臺)와 그 위에 세운 2층 문루(門樓)로 이루어져 있다. 축대는 돌을 다듬어 정연하게 쌓았다. 바깥벽은 성벽과 같이 굽도리부분에서 안으로 조금씩 올려 쌓다가 중허리에 이르러 직선으로 쌓았고, 그 윗부분은 다시 밖으로 내밀어 쌓았다.

축대의 복판에는 너비 2.7m, 길이 7.4m, 높이 약 3m의 무지개문을 냈다. 무지개문은 축대 바깥면에서 2.7m 안에 들여놓아 그 양 옆벽이 옹성(壅城)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축대 구조상 특이한 점의 하나이다.

좌우 벽은 잘 다듬은 댓돌로 쌓고 그 천장부분은 벽돌을 무지개 모양으로 쌓아올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1756년 이 문을 보수할 때 돌을 벽돌로 바꾸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문에는 큰 쌍닫이널짝문이 달려 있었고 문짝은 두터운 널에 쇳조각을 붙여 튼튼하게 만든 것이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축대 위에는 성가퀴를 돌리고 그곳에 활을 쏘는 구멍을 뚫어놓았는데, 평평한 구멍과 경사진 구멍을 교차시켜 멀리 있는 적이나 가까이에 침투한 적을 마음대로 쏠 수 있게 하였다.

축대 위에 세운 문루는 익공식 두공을 올리고 겹처마를 한 합각지붕을 이은 2층 건물로서, 2층의 평면은 1층보다 사방 한 칸씩 줄였다. 보통 문루들에서는 1층 면적에 대한 2층 면적의 비율이 0.51:0.75인 데 비하여 여기서는 0.38로 하였다.

기둥은 아래를 위보다 좀 굵게 한 흘림기둥을 쓰고, 네 모서리의 기둥은 다른 기둥들보다 조금 높이면서 안쪽으로 기울여 세웠다. 이것은 건물 전체의 균형을 바로잡고 안정되게 보이게 하면서도 강도를 높인 훌륭한 방법이다.

건물 안 가운데는 4개의 통기둥을 세워 2층 지붕을 직접 떠받들게 함으로써 건물 안을 시원하게 하였다. 두공은 위층을 4익공, 아래층을 3익공으로 하였으며, 문루에 익공식 두공을 쓰고 그 단수를 4익공으로 높인 것은 극히 드문 것으로 문루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함께 갖추려 한 것 같다.

아래 위층의 액방(額房) 위에는 화반을 놓았으며 가운데칸에는 3개씩, 좌우칸에는 1개씩 놓았다. 지붕의 마루들과 지붕면에는 완만한 곡선을 주고 문루에는 아름다운 모루단청을, 기둥에는 붉은색을 칠하였다.

이 문은 우리나라 북방의 요충이던 경성읍성의 성문들 가운데서도 제일 중요한 성문이었으며, 북쪽으로 동북 국경지방과 남쪽으로 함흥 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켜선 평지의 성인 경성읍성의 문으로서, 군사전략상 중요하며 교통이 매우 편리한 곳에 있다.

7. 황해도

1) 동수묘 (안악삼호분)

황해남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에 위치한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 안악삼호분이라고도 한다.

1949년에 처음으로 발견된 이 무덤은 현무암과 석회암의 큰 판석(板石)으로 짜여진 돌방무덤〔石室墓〕으로, 남쪽인 앞으로부터 널길〔羨道〕, 연실(羨室), 앞방〔前室〕, 뒷방〔後室:主室〕으로 형성되며, 앞방은 좌우에 조그만 옆방〔側室〕이 하나씩 달려 있어 좌우 너비가 커지고 있다.

한편, 앞방과 뒷방은 4개의 팔각돌기둥으로 구분되어 서로 투시할 수 있고, 주실 즉 뒷방은 동벽과 뒷벽의 안쪽에 판석벽과 돌기둥을 각각 세워 회랑부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각 방의 천장은 네 귀에 각각 삼각형 돌을 얹어 천장 공간을 좁히기를 두번 반복하고 그 위에 뚜껑돌을 얹는 모줄임천장〔抹角藻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랜 모줄임천장인 것이다.

벽화는 널길벽에 위병, 앞방의 동쪽 옆방에 부엌, 도살실(屠殺室), 우사(牛舍), 차고(車庫) 등, 서쪽 옆방에 주인공 내외의 좌상(坐像), 앞방 남벽에 무악의장도(舞樂儀仗圖)와 묵서묘지(墨書墓誌), 뒷방 동벽, 서벽에 각각 무악도(舞樂圖), 회랑벽에 대행렬도(大行列圖)가 그려져 있다.

결국 벽화 내용은 무악대(舞樂隊)와 장송대(葬送隊)에 둘러싸인 주실 앞에 주인 내외의 초상도를 모신 혼전(魂殿)과 하인들이 있는 부엌, 우사, 마구고(馬具庫) 등을 두고 맨 앞은 위병이 지키는 설계이며, 이것은 왕, 귀족, 대관(大官)들의 생전 주택을 재현시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벽화는 벽의 면적 81㎡, 천장의 면적 58㎡나 되는 넓은 널방에 가득차게 그려져 있다. 또한, 이 동수묘에서는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六日 □□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 □昌黎玄?帶方太守都 鄕侯幽州遼東平郭 都鄕敬上里冬壽字 □年六十九?官

이 명문에서 보인 ‘永和十三年’은 동진의 연호로서 서기 357년이며, 낙랑 옛 땅의 중국계 주민들이 해상교통을 통하여 강남의 동진과 연락을 가지고 동진의 연호를 쓰고 있음을 말하여주고 있다.

동수묘의 주인공인 동수는 326년(미천왕 27)에 랴오둥에서 고구려로 귀투한 무장이며, 357년(고국원왕 27)에 죽어서 안악 유순리에 묻힌 것이다.(최근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이 무덤의 주인공을 고국원왕이라 보고 있다)

동수묘의 구조는 여러 점에서 당대의 중국묘 형식을 본받고 있다. 즉, 남북일렬로 여러 방을 배열하는 것이나 앞방 좌우에 옆방을 설치하는 것은 한대의 벽돌무덤의 기본 설계 방법이며, 또 옆으로 넓어진 앞방에 사각형의 주실을 달아 T자형 평면을 만드는 것은 낙랑의 덧널무덤이나 벽돌무덤에서 흔히 보는 형식이다.

또, 큰 판석으로 묘실을 짜는 것은 랴오둥반도의 한대 묘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동수묘에서 처음 보이는 고구려 고분의 특색처럼 되어 있는 모줄임천장도 산둥성 기남의 후한대 돌무덤에 나타나 있고 팔각형 돌기둥도 이 기남묘에 있거니와 기둥 꼭대기에 두공을 얹어 천장석을 받들게 하고 있는 점이 똑같다.

모줄임천장은 원래 근동지방에서 일어난 수법이며, 그것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3세기에는 이미 중국 본토로 들어와 있던 것이다. 고분벽화 자체도 한대에서 시행한 것이며, 특히 동수묘와 같은 고구려의 전기 고분벽화에서 묘주들이 휘장을 친 방 안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랴오둥지방의 고분들과 같다.

결국, 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고구려의 벽화고분인 동수묘는 랴오둥지방에서 넘어온 동수의 무덤이며, 그것은 중국의 한, 위진대의 벽화고분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고구려 영토 안에 세워진 최초의 중국계 벽화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묘실평면, 모줄임천장, 돌기둥, 벽화내용 등 여러 면에서 그뒤 고구려 벽화고분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것이며, 고구려 벽화고분의 발생 과정에서 중국 벽화고분과 고구려 벽화고분을 연결하는 과도기적 존재라 할 수 있다.

2) 성불사 (成佛寺)

황해도 황주군 주남면 정방리 정방산에 있는 사찰. 31본산 시대에는 황해도 9개군의 사찰을 관장하였던 본산이었다.

신라 말기에 도선이 창건하였고, 1374년(공민왕 23)에 나옹이 중창하였다. 나옹은 건물의 중창 뿐 아니라 다수의 석물을 새로 조성하였는데, 성불사를 비롯한 산내암자에 15기의 석탑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대규모의 중창 기록은 없으며, 1569년(선조 2) 설숭(雪崇)이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진되었다.

1632년(인조 10)에 외적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정방산에 성을 쌓은 이후부터 이 절은 해서지방의 종찰이 되었다.

숙종 때에는 이 절에 장육탱화를 모시고 400근짜리 대종을 조성하였으며, 1751년(영조 27)에는 찬훈(贊訓)이 중수하였다. 1924년에는 주지 이보담이 3차 중수하였는데, 그 때 명부전, 향로전, 청풍루, 극락전, 응진전, 승방 등을 수리하였다.

성불사의 본사와 말사에는 휴정의 법손이 주지가 되게끔 지정되어 있다. 31본산 시대에는 산내말사인 안국사, 원통사, 상원암을 비롯하여 산외말사로서 황주군의 10개 사찰, 봉산군의 5개 사찰, 서흥군의 2개 사찰, 수안군의 4개 사찰, 곡산군의 6개 사찰, 평산군의 3개 사찰, 연백군의 1개 사찰, 금천군의 1개 사찰, 신계군의 1개 사찰 등 총 36개소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었다.

성불사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4.22m의 성불사오층탑이 있는데,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은 상하 2개의 부분으로 된 기단 위에 돌을 4각형으로 다듬어 5층으로 쌓았으며, 층마다의 지붕돌에는 각각 3단의 굄을 새겨서 굄과 네 귀가 가볍게 들리도록 처마를 꾸몄다.

3) 심원사 (心源寺)

황해도 황주군 구락면 덕양리 여계산에 있는 사찰. 31본산 시대에는 성불사 (成佛寺)의 수석 말사이었다.

신라말에 국사 도선이 창건하였으며, 고려말에는 절이 많이 퇴락하였으나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이색이 황폐된 절과 부근의 지세가 군사적으로 요새지인 점을 착안하여 절을 중건하고 성을 쌓게 하였다. 그러나 큰 가뭄이 계속되어 완공하지 못한 채 중단하였다.

조선 숙종 때 이색의 12대손인 이여택(李汝澤)이 황주목사가 되어 이 절을 살펴보니 이색 이후에 네 차례나 중수되었으나 여전히 퇴락한 상태로 남아 있었으므로 이색의 뜻을 상기하여 승려들과 함께 희사금을 모아서 수년 후에 본전 및 부속건물을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들은 대부분 이때에 중건된 300여년 전의 건물이다.

그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있는 보광전(普光殿)은 1939년에 보물로 지정되었고, 광복 후에 국보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다포계 팔작지붕의 건물로, 기둥은 배흘림을 두었다. 귀공포 위에는 원숭이 모양의 조각을 세워 추녀를 받치고 있어서 특이한데, 강화도 전등사의 대웅전에도 이러한 장식이 있다. 1374년(공민왕 23)에 지어진 이 건물은 동시대에 지어진 석왕사 호지문, 응진전 및 개성 남대문, 평양 보통문 등과 양식적으로 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절 부근에는 돌로 쌓은 남점행성이 있었으며, 여계산에는 여계산성도 있었다. 그밖에도 이 부근에는 강선대(降仙臺)와 묵대사영필(默大師靈筆) 등이 있다.

4) 안악일호분

안악일호분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상산리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고분.

고분의 봉토는 많이 깎여 내렸으나, 방대형의 본래 모습은 어느 정도 지니고 있으며 묘실의 구조는 연도와 방형의 현실로 이루어진 외방무덤〔單室墳〕이다.

현실의 네 벽은 석회암·화강암 등의 한면이 평탄한 크고 작은 편석을 진흙과 석회를 섞어서 정연하게 쌓아올렸으나 네면의 벽선은 약간 만곡이며 그 위에는 면회를 단정하게 발랐다.

천장은 벽면과 평행하는 3단의 평행굄으로 좁혀올리고 다시 2단의 3각굄으로 공간을 좁혀 그 꼭대기 한복판을 한장의 판석으로 덮은 평행 3각굄 천장이다.

연도는 현실 남벽에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고 연도와 현실 사이에는 좌우로 열리게 된 두장의 돌문이 있다. 그리고 연도입구는 면에 한장의 큰 판석을 세우고 그 위에 잡석을 쌓아서 막았다.

벽화의 내용은 인물풍속도이나 박락이 심하여 그 전모를 알기 어려운데 네 벽과 천장 전부에 그림을 그렸다. 벽화의 배치상태를 보면 현실 네 모서리에는 두공·기둥을 그려서 목조건물같이 보이게 하였다.

북벽에는 전면에 걸쳐 전각도(殿閣圖)가 그려져 있다. 전각도는 2층 전각을 중심으로 주위에 지붕 이은 담을 두르고 골기와 지붕을 가진 큰 대문이 있다.

현실 서벽에는 상부에 수렵도가 있고, 하부에는 7명의 서있는 여인상이 그려져 있다. 동벽에는 윗부분에 붉은 깃발을 든 의장행렬이 있고, 아랫부분에는 3대의 우교차가 그려져 있는데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다.

남벽에는 동벽에서 계속되는 행렬도의 일부가 그려져 있는데 윗부분에는 기수 4명이 서쪽을 향하여 전진하고, 아랫부분에는 말탄 인물이 흐릿하게 보인다. 천장에는 인동무늬, 불꽃무늬, 연꽃무늬, 두겹고사리무늬, 구름무늬, 톱날무늬, 보륜무늬 등 다양한 무늬와 가공의 동물, 천인, 서금(瑞禽), 서수(瑞獸), 해, 달, 별 등을 그려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5) 안악이호분

안악이호분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상산리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고분.

고분의 봉토는 방대형이며 묘실의 구조는 연도와 방형의 현실 및 현실 동벽에 감이 하나 있는 외간무덤이다.

현실의 네 벽은 석회암·화강암 등의 판석으로 축조하고 두껍게 면회를 발라 정리하였다. 천장은 벽면과 평행하는 2단의 평행굄 위에 3단의 3각 굄을 올려 좁히고 꼭대기 중심에 한장의 덮개돌을 덮은 평행3각굄 천장이다. 현실 남벽의 동쪽에 약간 치우쳐 있는 연도와 현실 입구 사이에는 좌우 양쪽으로 열리는 돌문이 있다.

벽화의 내용은 인물풍속도이나 박락이 심하여 그 전모를 알 수 없다. 벽화는 연도·현실의 네 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다. 그 배치 상태를 보면 현실 네 모서리에는 구름무늬 단청을 한 포기둥을 세워서 그 윗도리를 표시한 횡대를 받치게 하였다. 연도의 좌우 벽에는 각각 한 명의 문지기를 그렸고 그 앞쪽에는 무인행렬도를 그렸다.

현실 북벽 중앙에는 화려한 장막을 걷어올린 장방(帳房) 안의 좌상에 한 여인이 호젓하게 앉아 있는 상이 그려져 있고 장방 밖의 왼쪽에는 6명의 시녀상이, 오른쪽에는 측근 문관으로 보이는 3명의 남자상이 그려져 있다. 현실 서벽의 윗단에는 여인과 아동군상이 그려져 있다.

동벽은 박락이 심하여 남쪽 윗부분에 그려진 2명의 비천상과 3명의 산연화도(散蓮花圖)가 남아 있을 뿐이다. 남벽의 현문 윗벽에는 동벽의 것과 같은 비천 2명과 현문을 중심으로 좌우벽에는 각각 1명의 문지기를 그렸다.

현실의 천장에는 평행굄 제1단 북벽 측면에 붉은빛 바탕에 먹으로 반규무늬를 그리고 다른 세 면에는 연잎당초무늬를 그렸다. 다음 평행굄 제2단 측면에는 보륜을 마름모꼴 격자로 꿰고 그 속에 연꽃을 배치한 무늬, 연꽃당초무늬, 기이한 구름무늬 등으로 장식하였으며, 천장 중앙에는 커다란 연꽃대과무늬를 그렸다.

6) 해주다라니석당

황해도 해주시(현재의 북한의 행정지명은 해주시 해청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당. 높이4. 64m.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 북한에 있는 4개 중의 하나이며 평안북도 용천군 성동리의 다라니석당과 쌍벽을 이루는 귀중한 유물이다.

지대석과 하대석을 구비하고 있으며, 석당을 받치고 있는 상대석은 중판복엽의 앙련이 장식된 연화좌에 낮은 6각의 1단 받침을 구비하고, 그 위에 한개의 돌로 6면을 이룬 석당을 구비하고 있다.

석당의 6면 전체에는 ‘대불정다라니경(大佛頂陀羅尼經)’을 음각하였다. 석당의 상층부에는 3중의 개석을 얹고 있는데 개석의 형태는 3개가 동일하게 옥개받침 4단을 구비한 6각이며, 개석 상면에는 동일하게 각 면의 선각마다 귀꽃을 장식하고 귀마루를 뚜렷이 나타내어, 목조건물에서 보이는 듯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최하단의 옥개석과 두번째의 옥개석 사이에는 6면에 좌상의 화불(化佛)을 양각 장식한 것이 성동리다라니석당과 다르며, 또한 두번째 옥개석과 최상단의 옥개석 사이에는 복발(覆鉢)을 구비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최상단의 옥개석 상부에는 상륜부를 조성하였던 흔적은 있으나 현재는 유실되어 없는 실정이다.

이와같은 석당은 중국에서 당말 오대경에 유행하였던 경당으로 고려시대에 이런 유풍을 받아들여 북한지역에 유행하였던 것 중의 하나이다.

7) 해주오층석탑 (海州五層石塔)

황해도 해주시(북한의 행정구역상 해주시 옥계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오층석탑. 높이 4.63m.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이다.

화강암으로 된 5층석탑으로, 기단부가 탑신부와 상륜부로 이루어졌다. 기단은 2층기단에 하대중석과 하대갑석을 한개의 돌로 구성하고 그 상면에 1단의 낮은 받침을 조성하고, 상대중석을 갖추었다.

상대중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주를 각 면에 모각하였으며, 중석 상면의 상대갑석상에 2단의 굄을 마련하여 탑신을 받치게 하였다. 각 탑신에도 우주를 모각하였다. 또한, 각층 탑신은 전체가 하나의 돌로 조성되어 있다.

각 옥개석은 5단의 옥개석받침을 갖추고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면서 전각부는 약간 반전되게 처리하고 있어 경쾌하다. 현재 상륜부에는 4각의 노반(露盤)과 연꽃형태의 보주를 갖추고 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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