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주세요.

고려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주세요.

작성일 2007.03.28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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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시험이여서

    급해서요~ 

        빨리좀알려주세요.

                    

 

 

 

 

                     ※추신:자세히알려주세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과정 
(1) 후고구려의 궁예는 이름을 태봉으로 바꾸고 시대의 주인이 되고자 하였으나 가혹한
     정치로 백성들의 민심을 잃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덕이 높고 지혜로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2) 태봉(후고구려)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고구려를 이어받는 뜻에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도읍지를 철원에서 개경으로 옮겼다.
(3) 후백제의 견훤은 통일을 이루기 위해 신라를 계속 공격하였고 고려와도 충돌하였으나
     왕위 계승 문제로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갇혀 있다 고려에 투항하였다. 견훤은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였다.
(4) 고려는 항복한 견훤을 극진히 대접하자 신라의 경순왕도 스스로 고려에 항복하여
     신라를 합병하고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어 셋으로 나뉘었던 민족
     을
다시 통일하였다.


  
고려의 발전

1. 달라진 고려의 사회 모습 
(1) 백성들이 편하게 있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태조 왕건의 뜻에 따라 고려 사회는
     신라와는 여러 면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2) 학식과 능력에 따라 관리를 뽑는 과거 제도가 실시되어 귀족이 아니어도 누구나 과거를통해 관리가 있었다.
(3) 신라 때보다 세금이 크게 줄어들었고 백성들의 생활을 보호하는 기관도 생겼다.
(4) 지방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관리가 지방에까지 파견되어 왕명이 전해졌고, 지방의 호족은 향리가 되어 지방관을 도왔다.
(5) 고장마다 학교가 세워져 유학의 정신이 널리 보급되었다.
2. 문벌 귀족 사회의 형성 
(1) 고려의 사회는 지방 호족의 중앙 관료화와 문벌 형성을 기초로 문벌 귀족 사회가 성립되었다.
(2) 귀족 사회를 이끈 중심 세력인 문벌 귀족에는 가지 유형이 있었다. 첫째, 중앙 집권화정책에 의해 지방 호족 세력이 중앙 관리로 진출한 경우이고, 둘째, 개국 공신들이 정치를 주도하면서 주요 세력을 이룬 경우이며 셋째, 유교 정치 이념 답변확정으로 신라 들이 과거를 통해 정치 세력으로 들어온 경우이다.

(3) 고려 사회에서는 지방 호족과 유교적 들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하게 되어
     신라에서와 같은 진골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 보다 개방적인 사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려의 무역 활동

1. 고려의 무역 활동 
(1) 예성강의 하류에 있었던 벽란도는 수도인 개경에 가깝고 비교적 물이 깊어 배가 자유로이 드나들 있어서 무역항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2) 개경에서도 수백 명의 송나라 상인들이 거주하면서 무역 활동을 하였다.
(3) 고려는 요나라(거란), 금나라(여진)와는 육로를 이용해서, , 아라비아, 동남 아시아,
     본과는
바닷길을 통해 교역하였다.
(4) 아라비아는 동양과 서양의 중간 지역에 자리잡고 있어서 동서 문화 교류에 공헌을 하였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송나라를 거쳐 고려까지 왔는데 이들의 왕래와 소개에 의해
려라는
이름이 서방 세계까지 알려져 외국에서는 우리 나라를 코리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5) 고려의 무역품

 

수출품

수입품

송나라

  , , 나전 칠기, 화문석, 종이

  비단, 약재, 서적, 악기

요나라(거란)

  곡식, 문방구, 구리 ,

  털가죽,

금나라(여진)

  곡식, 철제, 농기구, 무기, 포목

  은, 모피,

아라비아

  고려라는 이름이 알려짐

  수은, 향료, 산호


 

1. 고려의 대외 관계

(1) 고려가 송과 정식으로 국교를 맞은 것은 광종 때부터이다. 이후 약 300년 간 문물 교류를 통해 친선이 이루어졌다. 고려는 송나라로부터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송나라와 가까이 지내려 하였으며, 송나라는 고려의 힘을 빌려 만주 지방의 거란족과 여진족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2) 고려가 거란족과 여진족을 멀리한 까닭

①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거란족과 여진족이 살고 있던 땅)을 되찾기 위하여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북진 정책으로 거란, 여진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② 거란, 여진 두 민족은 문화적으로 야만의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특히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이기 때문에 배척하였다.

③ 북방 민족들은 살기 좋은 고려 땅을 탐내어 남쪽으로 진출하려고 하였으며 잦은 침략

    을 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2.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다.

(1) 916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통일하여 요나라를 세우고 세력을 넓혀 고려를 침입하였다.

(2) 1차 침입 : 993년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자 하였으나, 고려는 서희는 당당하게 소손녕을 찾아가서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 땅이니 돌아가라고 하였다. 소손녕은 청천강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고려의 영토를 인

 정하고 물러갔다.

(3) 2차 침입 : 1009년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고려의 강조 장군은 크게 패하고 전사하였으며 현종이 거란에 가기로 하고 끝냈다.

(4) 3차 침입 : 거란의 장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오자 고려군은 곳곳에서

 그들을 잘 막아 싸웠다. 이에 소배압은 사잇길로 개경으로 진격했으나 강민첨의  군사에게 패하여 후퇴하게 되었다. 귀주에서 길목을 지키던 강감찬은 그들을 맞아  싸워 거의 전멸시켜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

 

 

   몽고의 침입과 고려의 항쟁  

 

1. 몽고의 침입 과정  

(1) 고종 임금 시대에 몽고에 쫓긴 거란족이 고려에 침입하여 평양 부근에 몰려 있었다. 이때 고려와 몽고는 이들을 함께 소탕하였다. 이 일을 빌미로 몽고는 고려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였고 두 나라는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2) 몽고의 침입 : 고려에서 공물을 받아가던 몽고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 근처에서 피살되자  책임문제를 둘러싸고 국교가 단절되고 이후 6차례나 고려를 침입하였다.

 

 

2. 삼별초의 항쟁  

(1) 삼별초란 원래 도적을 지키기 위하여 만든 특별 부대와 몽고군에 잡혀갔다가 탈출한 병사들을 합쳐 만든 부대였다.

(2) 몽고군의 침략에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항쟁하던 고려 정부가 마침내 강화도를 포기

 하고 개경으로 돌아가려 하자 삼별초는 굴욕적인 항복이라고 주장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하였다.

(3)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긴 삼별초는 세력을 키워 백성들과 힘을 합쳐 몽고군에 대항

 하였다. 그러나 몽고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제주도로 자리를 옮겨 저항하였지만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4) 몽고군의 침략에 대한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인의 꿋꿋한  기상을 보여준 민족 정신의 본보기가 되었다.

3. 공민왕의 자주 운동

(1) 고려가 몽고에 굴복하자 몽고는 더 많은 재물과 사람을 빼앗았고 심지어 북쪽 땅까지 빼앗았으며 여러 몽고 풍습을 따르게 하였다.

(2) 공민왕은 ‘몽고에 빼앗긴 땅을 찾자’, ‘몽고말을 쓰지 말고 풍습도 따르지 말라’고 하여

 자주 의식을 굳게 하였다. 그리하여 몽고 것을 버리고 고려의 풍습을 되살리는 일에

 앞장서서 몽고식 제도를 다시 고려식으로 고치고 몽고가 빼앗아간 땅을 되찾아 원래

  주민에게 돌려주었으며, 몽고에 빼앗긴 북쪽 영토도 모두 되찾았다.

   고려의 문화 유산  

 

1. 불교의 나라  

(1) 신라 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려에서는 불교가 발달하였는데 초기의 불교는 국가와 귀족의  보호, 장려로 크게 융성하였다.

(2) 태조는 불교 행사인 연등회, 팔관회의 개최를 당부하여 불교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였고  개경에 10대 사찰을 건립하는 등 불교 숭상 정책을 폈다. 광종 때에도 승과 제도를 두어  급제자에게 법계를 수여하는 한편 왕사ㆍ국사 제도를 두어 왕실의 고문 역할을 맡기는 등 승려를 우대하였다.

(3) 대각국사 의천은 이러한 불교를 숭상하는 분위기에서 왕자이면서도 승려가 되어 불교

 사상 통합 운동을 폈다. 그는 해동 천태종을 창시하여 교종(화엄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 하였는데 교관 겸수, 즉 이론과 참선을 겸해야 바른 수행의 길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교ㆍ선의 통합을 주장하였다.

(4) 고려에서는 이러한 귀족 생활과 불교 신앙을 배경으로 예술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공예분야가 발달하였다.

 

2. 팔만대장경  

(1) 고려 시대에는 불교의 발달과 더불어 호국 사상의 통일을 위해 세 차례에 걸쳐 대장경을 조판하였다.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판은 몽고 침입 당시에 강화도로 도읍지를 옮기던 중 불교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친다는 소망에서 만들었다.

(2) 팔만대장경은 글자의 모양이 고르고 아름다워 일찍부터 발달한 목판 인쇄술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또 그 규모와 보존 기술도 세계 최고의 솜씨로 인정받고 있다.

(3) 고종 때 시작하여 15년만에 완성한 팔만대장경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 문화 유산’

     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총 매수는 81,137매이다. --------나머지는 길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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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멸망

 

1388년(우왕 14) 고려는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그에게 요동정벌에 나서게 하였는데, 이때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반대하고 위화도에서 군대를 이끌고 개성으로 돌아왔다(위화도 회군). 이어 반대파인 최영 등을 제거한 후 우왕을 폐위시키고 아들 창을 창왕으로 즉위시켜 자기 세력을 키운 끝에, 1392년(공양왕 4) 마침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웠다. 고려는 처음부터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으나 항상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고민하였고, 한때는 전국이 그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러한 북방민족과의 갈등은 이성계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되는 간접적 원인을 제공하였다. 즉 왜구·홍건적 등 잦은 외적의 침입은 무신의 세력을 키워 마침내 고려 멸망의 원인을 만들었던 것이다.

 

 유명한 인문들

개국관련 인물

왕건

견훤

궁예

신숭겸

신검

경순왕

 

쌍기

최승로

서희

강조

강감찬

윤관

본격적인 고려시대

이자겸

묘청

정중부

배중손

최충헌

최우, 최항

 

 

 

 

 

 

고려말기의 인물

이성계

최영

정몽주

정도전

최무선

조준

 

 

고려의 건국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송악(개성)에서 출생하였다.
통일신라말기에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하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자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왕건은 궁예의 명령으로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치러 큰 공을 세웠다. 900년에는 광주(경기), 충주, 청주 및 당성(지금의 화성), 괴양(지금의 괴산) 등의 군현을 쳐서 이를 모두 평정, 그 공으로 아찬이 되었다. 903년 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의 금성군(지금의 나주)을 공격, 이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부근 10여개 군현을 쳐서 빼앗아 나주를 설치,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이해에 양주(지금의 구리)수 김인훈이 위급함을 고하자, 궁예의 명을 받고 달려가 구하여 주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왕건은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다.
이해에 그동안 쌓은 전공으로 알찬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에 올라 시중이 되었다

고려의 건국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고 하였다. 그러나 태조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하여야만 하였다. 환선길, 이흔암 등의 반역사건 등이 그것이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강대한 후백제 견훤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만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어려운 과제에 기민하고 탄력성있게 대처해 나감으로써 난국을 극복하여 나갔다.
태조가 즉위 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국내정책은 민심 안정책이었다.
따라서, 신라 말기 이래 크게 문란하여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의 가혹한 조세를 경감하는 제도적 조처를 취하였다.
취민유도의 표방은 그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신라 말기 이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나갔다.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의 딸과 정약적으로 혼인하였으며, 각 지방의 호족 및 그 자제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태조는 후삼국시대의 지배세력인 궁예나 견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정치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새 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역량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919년 1월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고려의 전성기
제 1기 - 전성기
고려는 먼저 국가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하였다. 신라문화를 계속 이어 받아서 구세력을 회유하기도 하고 과거제를 실시해서 지방 호족세력을 견제하기도 했다. 여하튼 초기의 문화면에서는 당문화를 수용한 신라문화의 연장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 문종때 부터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를 고려문화의 황금시대라 칭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는 무인세력이 주축이었던 고려가 문치주의를 표방하던 송문화를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나타난 결과와 고려초기의 위와 같은 노력의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이 당시의 서는 구법(歐法)의 영향을 받은 비가 많이 세워졌고, 기타 북위(北魏)나 우세남, 류공권등의 영향을 받은 비도 세워 졌다. 구법의 영향을 받은 서체로 세워진 대표적인 비로 법천사(法泉寺)의 지광국사탑비(智光國師塔碑)가 있는데, 이 비는 안 민후의 글씨로 고려초 전성기 문화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랑공대사비(朗空大師碑)를 잘 살펴야 한다. 이 비는 김생의 서를 집각(集刻)한 것인데, 2500여 자의 장문(長文) 으로 김생의 생존으로부터 300년의 시간이 뒤쳐저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동방의 희지(羲之)라는 신품 제 일의 김생 서풍이 이당 시에도 상당히 유행했음을 알 수 있겠다.

고려의 문화재

1.팔만팔만대장경판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3차례에 걸쳐 대장경을 만들었다.

-몽고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들었다.

-글자의 모양이 고르고 아름다우며 그 규모와 보존 기술도 세계최고의 솜씨로 인정받고 있다.

2.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요절은 금속활자로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책으로 서양보다 70여년 앞선 것이다.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3.고려청자

-고려에서 만든 도자기로 은은하면서도 맑은 푸른색이 나는 도자기이다.

고려의 중요인물

최충
시호 문헌 1005년 문과에 장원, 1011년 우습유(고려의 벼슬)가 되었다.1013년 국사수찬관 때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칠대기록 편찬에 참여했다. 1033년 우산기상시 등을 지내고 1037년(정종 3) 참지정사국사수찬관 때 편찬에 참여했다. 1041년 서북로병마판사로 나가 영원 ·평로에 진을 치고, 산성개수를 감독했다.
1047년(문종 1) 문하시중으로서 법률관들에게 율령을 가르쳐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1050년 서북면도병마사 때 농번기의 공역 금지와 국가 재정의 낭비를 막도록 상소하여 시행했고, 동여진의 동태를 파악, 국방을 강화하는 등 업적을 쌓고 1053년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나이가 많다고 사직을 상주하자 만류 조서가 내려지고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의 호와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문하시중상주국치사라는 훈장을 내렸고, 1055년 내사령을 삼은 후 다시 추충찬도좌리 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벼슬에서 물러나 송악산 아래에 사숙을 열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이를 문헌공도라고 했는데, 12공도(公徒) 중의 하나이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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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영천 출생. 1357년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수찬·위위시승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예조정랑 겸 성균박사·성균사예를 역임하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 등을 거쳐 성균사성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 홍사범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으로 이인임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진현관제학·예의판서·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가 되어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에 올라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에 수문하시중·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경영전영사·우문관대제학·익양군충의백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격살되었다.

 

 

다른 에서 퍼온거지만

 

많은 도움 되셨기를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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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를 세운사람은 태조 왕건입니다. 이건 더이상 길게 할수 없죠;;

 

2.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 왕융은 마을에서 엄청난 대부자였습니다. 도선대사가 길을 지나가다가 '기장을 심을 자리에 삼을 심으니 참 딱하다'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왕융은 이의 해답을 알기 위해 도선대사를 초청했고 도선대사는 큰집을 36채 지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큰 인물을 얻을것이라고 하고 떠나버렸습니다.

 

왕융은 당장 36채를 짓고 가난한 사람들을 극진히 도운 결과 '왕건'이 탄생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왕건은 당시 궁예의 수하로 있었을때 한번 죽을뻔한 사건이 있었는데 궁예가 자신을 미륵불이라 칭하여 완전히 미쳤던 시절, 자신의 아내인 왕후가 왕건과 간음을 했다고 왕후를 죽이고, 왕건에게 반란을 일으켰냐고 캐물었습니다.

 

왕건은 당연히 그런일은 하지도 않았지만 이래저래 못하고 가만히 있는상황에 최응이 붓을 떨어뜨려 허리를 굽혀 줍는 척 하면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라고 했습니다.

 

왕건은 시키는대로 잘못했다고 비니 궁예는 정직하다며 상을 내려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왕건이 반정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고 고려가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업적은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했고 북진정책을 상당히 적극적으로 추진했는데요. 그만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3. 고려의 법도는 훈요십조를 중심으로 철저히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형벌은 태, 장, 징역, 귀양, 사형 이렇게 다섯개의 형벌로 나누었으며 죄의 종류는 모반죄, 대역죄, 악역죄, 불효죄, 살인죄, 강도죄, 절도죄 등이 있었으며 그 중 모반죄, 대역죄, 악역죄, 불효죄를 중형에 가깝게 다스렸습니다.

 

관리가 직책을 더럽히면 밭을 몰수하고 징역에 처했습니다.

 

특징이라고 하면 당시 고려는 도선대사의 풍수지리설과 불교를 중심으로 법을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집터를 지을떄도 풍수지리설에 따라서 지었구요...

 

4. 고려의 법도의 좋은점이라고 하면 일단 죄가 비교적 엄한 편이었기 때문에(불효 까지 죄로 다스리는걸 보면 좀 엄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예절이 잘 잡혔다는 점이 특징이구요... 그리고 조선시대 처럼 엄청 신분차별이 심한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양인들도 정승 정도는 아니지만 벼슬길이 비교적 쉽게 열렸습니다.

 

대신 나쁜점이라고 보면 후백제 지역의 사람들은 관리로 안 썼기 때문에(법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반란의 요소가 있었구요. 게다가 불교에 관련된 법도 있었기 때문에 불교의 폐단이 심했습니다. 예를 들어 '공양미를 안 바치면 삼대독자가 죽는다'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해도 당시에는 불교가 거의 신에 가까웠기 때문에 바치는 수밖에 없었구요.

 

나중에 불교 중심으로 인한 법 때문에 고려가 비틀거리는 일도 있었습니다.(자세히는 모릅니다.)

 

5. 백성들에게 끼친영향이라고 한다면 다른 시대떄와도 크게 없었다고 보면 됩니다. 대신 철저히 불교였기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수 있었죠... 일본 같은 경우는 엽기적인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데 그 이유가 특정한 종교가 없기 때문에(신토라는 옛날 일본 천황을 모시는 종교가 있는데 이건 거의 종교라고 할수 없죠.) 사람이 신앙심으로도 의지할떄가 없다 보니 엽기적인 사건이 많이 일어납니다.

 

대신 고려는 그런게 비교적 적었죠...

 

6.고려를 빛낸 사람들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강감찬, 윤관, 김부식, 배중손, 공민왕 정도 되겠구요. 좀 나쁜쪽으로 고려를 빛냈다고 하면.... 무신의난 시대의 무신들과 신돈, 그리고 고려 초기의 호족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7.고려의 전성기 때는 거란의 3차 침입이 끝난 뒤인 덕종~예종 때까지라고 보면 됩니다. 이때 전쟁도 끝난뒤라 백성들의 민심이 흐트러 지지 않았으며 덕종과 특히 문종때는 최전성기를 이루었다고 봐야 합니다.

 

이유인 즉슨 덕종과 정종은 좋은일을 했으나 너무 빨리 죽어 전성기라 할 시간도 없었구요. 문종은 재위 37년 동안 대단한 일을 해줬는데요. 일단은 지금의 3심제도와 비슷하게 재판은 무조건 3번 정도 해야 한다는 법을 제정했습니다. 그래서 억울한 사람이 없었구요.

 

자연재해로 인해 피해를 입을경우 세금 면제를 해주는등 좋은일을 많이 했습니다. 문종때는 국자감이라는 조선시대의 성균관 정도를 세워 교육에 힘썼구요. 일종의 퇴학제도도 만들었습니다.

 

문종은 송나라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켰고 불교발전에도 힘을 썼으며 자신의 아들들을 중이 되기 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의천 대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성기가 될려면 왕 혼자서는 이룰수 없습니다. 밑의 신하들도 뛰어난 신하들이 많았는데요. 그 중에 최충은 70년동안 벼슬길에 올랐고 구재학당을 세워 교육에 힘썼습니다.

 

8. 무역활동이라면 송나라와 거란과의 교역을 자주 했습니다. 가끔씩 아라비아 상인들도 들어왔다고 하는데요...;; 지금 가슴에 털있는 사람들은 아라비아 상인들과의 혼혈일 가능성도 있다는군요...^^:;

 

9. 고려의 문화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문화재라면..

 

1. 고려청자

 

2. 팔만대장경

 

3. 만월대

 

4. 공민왕릉

 

5. 선죽교(좀 좋은 의미로 문화재가 된건 아니죠^^;; 죽었으니...)

 

6. 직지심체요절(현재 프랑스 파리도서관에 있습니다...)

 

10. 이건 잘 모르겠네요...

 

11. 특별히 끼친영향은 없다고 봅니다. 단 언급했지만 불교중심으로 문화재도 만들어졌고 법도 만들어 졌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끼친영향이라면 신앙심을 더 끌어올렸다고 보면 되죠...

 

12.고려는 유난히 전성기가 짧고 수난시기가 많았습니다.

 

의종때 문관만 편애하니 무관들이 완전히 폭발하여 닥치는 대로 문관을 죽여버렸습니다. 이래서 무신시대가 되었구요. 100여년 동안이나 무신들이 나라를 맘대로 주물렀습니다. 왕들은 허수아비였구요.

 

또 목종과 현종떄의 거란 3차 침입도 있었는데요. 이건 강감찬 장군의 힘으로 별 무리 없이 막았다고 보면 됩니다.

 

젤 심했던건 몽고의 침입인데요... 총 4차침입까지 했었습니다. 고려는 이번에는 무리였구요.(몽고의 군대는 당시 세계 최강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프랑스도 일부 점령되었겠습니까...)

 

이리하여 공민왕이 즉위하기 전까지는 몽고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충이라는 단어를 앞에 붙였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충렬왕, 충선왕, 충목왕, 충정왕, 충숙왕, 충혜왕 이 6명의 왕이 있습니다. 공민왕때는 자주개혁을 많이 해서 다행히 충민왕이 되는일은 막았군요...^^;;

 

 

13. 고려의 마지막왕은 공양왕입니다. 이름은 왕 요이구요. 워낙 마음이 약하다 보니 왕의재목으로는 적당치 않았는데 이성계가 마음대로 앉히고 쫓아내버렸죠... 공양왕은 망국의 왕이 되기 싫어 끝까지 거절했으나 결국 힘에 눌려 즉위했구요 3년이 지난 후에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빼앗는것)을 하면서 공양왕은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요. 후에 이성계가 왕씨가문을 멸하기 위해 왕씨는 거의 모두 죽였는데요. 이리하야 공양왕도 사약을 마시고 죽습니다. 참 비운의 왕이죠...

 

14. 고려가 망한이유는 여러 부수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원(몽고)나라와 명나라 때문에 있다고 봅니다.

 

무신시대는 일단 막을 내렸기 때문에 공민왕때 크게 북진정책도 이루면서 발전을 했었는데요. 이성계가 이끄는 친명파 최영이 이끄는 친원파가 있었습니다.

 

최영은 요동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성계는 안된다고 했죠. 우왕은 결국 최영 편을 들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이성계가 우왕과 최영을 쫓아내고 모조리 죽임으로써 이성계는 권력을 잡게 되었고 원래부터 왕이 되고 싶어했던 이성계는 결국 공양왕 까지 쫓아내며 왕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이유가 많이 있었는데요.

 

신하들은 고려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명이나 원에게 잘 보일까? 하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간신들이 상당히 많았구요. 이러다 보니 왕이 뜻을 펼치고 싶어도 따라줄 신하가 없으니 뜻을 제대로 펴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은 점점 굶어 죽어나가고 하니 백성들도 새시대 새나라를 원하게 되었죠.

 

15. 그후의 백성들은 두 파로 갈리게 되는데요. 고려가 망하니 슬퍼하는 쪽과 고려 망한것을 축하하며 새 시대 새나라를 반기는 파였죠. 이후에 조선은 철저한 성리학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솔직히 조선 중후기 까지는 아직도 고려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어 여자들도 자유로운 생활을 하였죠.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철저하게 여자들이 억압당하는 시대는 후기라고 보면 됩니다.

 

그 후의 이야기는 딱히 없습니다... 조선시대가 열린것 뿐...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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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高麗)

중세 반도에 세워진 통일 왕조. 918년부터 1392년까지 474년간 34대에 걸쳐 존속하였다.


성립·발전
신라 말에 송악(松嶽;지금의 開城)의 호족(豪族) 왕건(王建)이 태봉(泰封)의 왕인 궁예(弓裔)의 부하로 있다가, 918년 민심을 잃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워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다. 왕건은 철원(鐵圓;지금의 鐵原)에서 즉위, 고려 태조가 되었는데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 다음 호족세력을 통합, 북진정책과 숭불정책으로 세력을 굳혔다. 935년(태조 18) 신라를 평화적으로 병합하였으며, 다음해에 후백제를 멸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경종 때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토지를 원칙적으로 국가의 지배하에 두고 이를 관료들에게 관계(官階)에 따라 분배하여 줌으로써 관료제도의 기초를 세웠으며, 제6대 성종은 중앙과 지방의 관제를 대폭 개혁하고 학문과 산업을 장려하여 국가의 기반을 굳게 하였다. 11대 문종 때에 이르러 전제(田制)·관제(官制)·병제(兵制) 등 모든 제도가 완비되고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예종·인종 때에 이르러 권력층은 토지를 겸병(兼倂)하기 시작하여 농민들의 몰락을 촉진하였다. 또 인종 때에는 승려 묘청(妙淸)이 수도를 서경(西京;平壤)으로 옮기려고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반란을 일으켰으며(묘청의 난), 1170년(의종 24)에는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 등의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문신 50여 명을 죽이고 의종을 추방하고 명종을 세웠다(정중부의 난). 이로부터 30년 동안 무신들간에 권력쟁탈전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지방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서 나라의 형편이 매우 어지러웠다. 이 무신들간의 싸움은 1196년(명종 26) 최충헌(崔忠獻)의 집권으로 매듭지어져, 이후 최씨 일가의 무단정치(武斷政治)가 우(瑀)·항(沆)·의 4대에 걸쳐 계속되었으나 1258년(고종 45) 왕권이 회복되었다. 고종 다음의 원종은 몽골과 강화하고 1264년(원종 5)에 개성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이때부터 약 80년간 고려는 원(元;몽골)의 지배를 받아 왕실은 원나라에 예속되고, 원나라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겨우 맥을 이어나갔다. 원나라의 세력이 새로 일어난 명(明)에 밀리자 공민왕은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기반을 굳히기 전에 밖으로부터 홍건적(紅巾賊)과 왜구가 쳐들어와서 이를 방어하기 위해 중용된 이성계(李成桂) 등 신흥 무장(武將)들이 세력을 얻게 되었다.

멸망
1388년(우왕 14) 고려는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그에게 요동정벌에 나서게 하였는데, 이때 이성계는 요동정벌(遼東征伐)을 반대하고 위화도(威化島)에서 군대를 이끌고 개성으로 돌아왔다(위화도 회군). 이어 반대파인 최영(崔瑩) 등을 제거한 후 우왕을 폐위시키고 아들 창(昌)을 창왕으로 즉위시켜 자기 세력을 키운 끝에, 1392년(공양왕 4) 마침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웠다. 고려는 처음부터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으나 항상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고민하였고, 한때는 전국이 그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러한 북방민족과의 갈등은 이성계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되는 간접적 원인을 제공하였다. 즉 왜구·홍건적 등 잦은 외적의 침입은 무신의 세력을 키워 마침내 고려 멸망의 원인을 만들었던 것이다.

제도

정치
태조 왕건은 태봉과 신라의 제도를 아울러 사용하였으나 이것은 신라시대의 골품제(骨品制)를 청산하고 왕권이 확립될 때까지의 과도기적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왕권이 확립된 성종에서 문종에 이르는 기간에 당(唐)·송(宋)의 제도를 수입하여 관제를 정비·완성하였다. 중앙 행정의 최고기관으로는 3성 6부가 있었으며, 3성(三省)은 중서(中書;초기에는 內議 또는 內史)·문하(門下)·상서(尙書;성종 때는 尙書都省)인데 이것은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이 중에서 문하성과 중서성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어 합쳐서 중서문하성이라 불렀다. 상서성의 지휘를 받는 6부는 이부(吏部)·병부(兵部)·호부(戶部)·형부(刑部)·예부(禮部)·공부(工部)였다. 이밖에 3성과 거의 같은 자격을 가진 3사(三司)가 있었는데 국가재정을 통할하였다. 또 군국(軍國)의 기밀과 숙위(宿衛)를 맡은 기관을 중추원(中樞院;후에 樞密院이라 고쳤다)이라 하고 그 장관을 판원사(判院事)라 하였다. 중추원은 3성과 더불어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그 고관을 추신(樞臣)이라 했고, 3성의 고관인 재신과 아울러 재추(宰樞)라 불렀다. 이 두 기관을 양부(兩府)라 하였다.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는 군사제도의 정비에도 나타나 중앙에 2군(二軍) 6위(六衛)를 두었는데 2군은 응양군(鷹揚軍)·용호군(龍虎軍), 6위는 좌우위(左古衛)·신호위(神虎衛)·흥위위(興威衛)·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감문위(監門衛)였다. 각 군과 위(衛)의 아래에는 영(領;부대)이 소속되었다. 또 군과 위에는 각각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이 1명씩 있었고, 지휘하는 영의 수에 따라 영마다 장군 1명, 중랑장(中郎將) 2명이 있었고, 그 아래 낭장(郎將)·별장(別將)·산원(散員)·위(尉)·대정(隊正) 등 군관이 배치되었다. 2군 6위의 상장군 8명과 대장군 8명으로 중방(重房)을 구성하였으며 중방은 최고급 장성들의 회의기관이었다. 관계(官階)를 보면 종1품(從一品)에서 종9품(從九品)까지 29계가 있었는데 정4품 이하는 같은 관계에 상하의 두 계단이 있었다. 지방의 관제는 983년(성종 2)에 12목(牧)을 두어 중앙의 관원을 파견한 것이 처음이다. 995년(성종 14)에 경기 이외의 전국을 편의상 10도(道)로 나누고, 아울러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비롯하여 아래로 단련사(團練使)·자사(剌史)·방어사(防禦使) 등을 설치하였다. 현종 이후에는 12주가 개편되어 이루어진 4도호부·8목이 서경(西京;平壞)·동경(東京;慶州)·남경(南京;서울)에 설치되고, 북방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양계(兩界)와 함께 지방행정의 중심이 되어 전국의 군(郡)·현(縣)·진(鎭)을 분담하여 다스렸다. 그 밑으로 특수한 하급 행정구획이던 촌(村)·향(鄕)·소(所)·부곡(部曲)이 있었다. 그리고 교통상의 요지에는 진(津)·역(驛)·관(館)이 있었으며, 군사상의 요지에는 진(鎭)이 설치되었다.

사회·경제
국초에는 구세력을 포섭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식읍(食邑)·사전(賜田)을 주어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게 하는 한편, 문무 관료들에게는 공로와 성품에 따라 역분전(役分田)을 주었다. 새로운 국가가 차츰 확고한 체제를 갖추어 감에 따라 관품제도도 확립되었고, 이에 따라 976년(경종 1) 처음으로 전시과(田柴科)가 정해져서 관료들은 관계(官階)에 따라 전지(田地)와 시지(柴地;땔나무와 숯을 얻는 땅)를 받았다. 998년(목종 1)에는 문무백관과 일반 군인의 전시과를 개정하여 18과(科)를 두었는데 제1과(정1품)는 3성의 장관에 주는 것으로 전지 100결(結)·시지 70결, 제8과(종9품)는 말단관료·병졸들에게 주는 것으로 전지 20결이었고, 관계에 오르지 못한 자(말직자;閑人)에게는 일률로 17결을 주었다. 그 뒤 덕종과 문종 때에 이를 개정하였다. 토지는 국가의 소유이므로 이것을 받은 자는 수익권(收益權)을 가질 뿐 매매하거나 죽은 뒤에 자손에게 상속시킬 수는 없었다. 이 밖에 1049년(문종 3)에 공음전시과(功蔭田柴枓)를 제정하여 공로있는 문무신에게 최고 전지 25결·시지 15결, 최하 전지 15결·시지 5결을 주어 자손이나 조카·사위 등에게 상속시켰다. 또 병역의 의무가 있는 남자는 20세가 되면 전지 20결을 주었다. 국가 기관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중앙의 각 관서와 지방의 주·군·현·관(館)·역(驛)에 이르기까지 토지를 배당하였는데 이를 공해전시라 하였다. 그러나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 이후 정권이 무인들의 손에 들어감에 따라 공전제도는 크게 어지러워져 말기에는 거의 전부가 사전(私田)이었다. 한편 농민과 예민(隸民)들은 이 땅을 경작하여 전조(田租;地代)·세공(歲貢)·기타 잡세를 바치고 부역을 했다. 전조는 일종의 현물세로 국가재정의 기본이 되었으며, 또한 각 지방의 특산물을 나라에 바치는 공부(貢賦)라는 것이 있었다. 부역(賦役)은 요역이라고도 불렀는데, 남자 16세가 되면 <정(丁)>이라 하여 나라의 역사에 종사할 의무가 생기고 60세가 되면 <노(老)>라 하여 면제되었다. 화폐제도는 996년(성종 15) 건원중보(乾元重寶)라는 철전(鐵錢)을 만들어, 한국 주전(鑄錢)의 시초를 이루었는데, 1102년(숙종 7)에 다시 해동통보(海東通寶)와 아울러 은병 (銀甁;은 600g으로 주전)도 사용하였다. 고려의 주전에는 해동통보 외에 해동중보(海東重寶)·삼한통보(三韓通寶)·삼한중보(三韓重寶)·동국통보(東國通寶)·동국중보(東國重寶) 등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1331년(충혜왕 1)에는 소은병(小銀甁)을 새로 만들었고 1391년(공양왕 2)에 교역의 불편을 덜기 위해 저화(楮貨;지폐)를 인쇄하였으나 유통되지 못하였다.

문화

교육
태조 때부터 교육기관으로 개경학(開京學)·서경학(西京學)이 있기는 했으나 본격적으로 정비된 것은 성종 때부터였다. 고려는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았으므로 유교교육을 받은 관리양성이 필요하였다. 992년(성종 11) 개성에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였으며, 국자감에는 국자학(國子學)·대학(大學)·사문학(四門學)·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의 6개 부문을 두었는데 이것을 경사육학(京師六學)이라고 하였다. 국자학은 3품 이상의 자제, 대학은 5품 이상의 자제, 사문학은 7품 이상의 자제와 우수한 서인(庶人)을 대상으로 했다. 3학에는 각각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품행이 단정한 박사(博士)와 조교(助敎)를 두어 가르치게 했다. 8품 이하 관료들의 자제와 서인이 들어가는 율학·서학·산학에는 박사만 두었다. 1109년(예종 4) 국자감에 무학(武學)을 두었다가 인종 때에 폐지하였다. 성종은 12목(牧)에 경학박사(經學博士)와 의학박사(醫學博士) 각 1명씩을 보내어 가르치게 하였고, 인종 때에는 각 주에 주학(州學)을 세우게 하였는데 이들 관학 외에 사학(私學)도 많이 있었다. 또한 958년(광종 9)에 후주(後周) 사람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진사(進士)·명경(明經)의 2과가 중심을 이루었으며, 공양왕 때에 무과가 설치되었다.

국사편찬
국초부터 시정(時政)을 기록하는 기관으로 사관(史館)을 두었는데, 뒤에 춘추관(春秋館)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황주량(黃周亮)·왕가도(王可道) 등이 사료를 수집·정리하여 태조부터 목종에 이르는 《칠대사적(七代事跡)》 36권을 1032년(덕종 1)에 편찬하였는데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실록의 편찬과 아울러 다른 사서(史書)의 편찬에도 힘썼는데 제11대 문종 때 박인량(朴寅亮)은 《고금록(古今錄)》 10권을 편찬하였으며, 또 일찍이 작자·연대 미상인 《편년통재(編年通載)》라는 역사책도 편찬되었다. 예종은 《편년통재》를 보고 홍관(洪灌)에게 명하여 상고시대부터의 국사를 편찬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편년통재속편(編年通載續篇)》이다. 1145년(인종 23)에는 김부식(金富軾) 등이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을 완성하였으며, 의종 때에는 김관의(金寬毅)가 《편년통록(編年通錄)》과 《삼대종록(三代宗錄)》을 엮었다. 충렬왕 때에는 특히 여러가지 사서가 나왔는데,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임익(任翊)의 《선원록(璿源錄)》, 원부(元傅) 등의 《고금록(古今錄)》,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 정가신(鄭可臣)의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 민지(閔漬)의 《세대편년요록(世代編年要錄)》 및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 등이다. 그러나 이들 사서는 대개 없어지고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몇 가지뿐이다.

예술
고려의 예술은 호화로운 궁정생활·귀족생활과 불교에 의해 크게 발전하였다. 전체적으로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양식에 독특한 창의를 가미하였는데, 도자기와 그림은 송(宋)·원(元)나라의 영향을 받았다. 고려는 화가 양성을 위하여 도화원(圖畵院)을 설치하였으며, 대표적인 화가로 정득공(鄭得恭)·이영(李寧)·이광필(李光弼)·고유방(高惟訪)·안치민(安置民)·공민왕(恭愍王)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그림으로 남아 있는 것은 소수이며, 이영의 《예성강도(禮成江圖)》와 공민왕의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음산대렵도(陰山大獵圖)》와 《안향(安珦)의 초상》, 사원벽화로는 부석사조사당(浮石寺祖師堂) 벽화의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이 있다. 도자기는 고려예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데 초기에는 송나라 도자기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종·인종 때에 크게 발전하여 비색청자(翡色靑磁)의 독창적인 작품들을 만들었다. 특히 중기 이후의 상감청자(象嵌靑磁)는 정묘하고 아담한 모양을 가미하여 자기예술의 극치를 이루었다. 서예는 왕희지(王羲之)체와 구양순(歐陽詢)체가 문신귀족들에게 환영을 받았는데 문종 때의 유신(柳伸)과 인종 때의 승려 탄연(坦然), 고종 때의 최우(崔瑀)가 명필로서 신라의 김생(金生)과 함께 신품사현(神品四賢)이라 일컬어졌다. 건축은 초기에는 귀족적이고 불교적이었으나 후기에는 고려의 독특한 기상을 나타내고 있다. 대부분 목조건축으로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불타버리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조사당(祖師堂), 덕산(德山) 수덕사(修德寺)의 대웅전(大雄殿) 등이다. 이 중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한국 목조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장중한 구조와 화려한 균형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 밖에 불교예술을 나타내는 것으로 불상과 탑을 들 수 있다. 불상은 신라시대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나 대표적인 것으로는 논산(論山)의 관촉사(灌燭寺) 미륵보살입상(彌勒菩薩立像)으로 거대하지만 균형이 잡히지 않아 예술적 가치는 적다. 탑은 처음에는 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하였으나 차츰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 방탑(方塔) 외에 6각탑·8각탑이 생겼고, 경천사(敬天寺)의 10층석탑과 같이 라마예술의 영향을 받은 원나라 양식도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은 예천(醴泉) 개심사(開心寺;지금은 폐사)의 5층탑, 현화사(玄化寺)의 7층탑, 흥국사탑(興國寺塔) 등이 있다.

시가·음악
고려 초기에는 신라시대의 향가 형식이 그대로 남아 있은 듯하다. 그러나 중기로 접어들면서 향가는 차츰 장가(長歌)의 형식으로 발전하여 지식계급에서는 향가에서 변모한 경기체가(景幾體歌)가, 일반 민중 사이에서는 민요가 유행하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것으로는 《동동(動動)》 《서경별곡(西京別曲)》 《쌍화점(雙花店)》 《청산별곡(靑山別曲)》 《처용가(處容歌)》 《만전춘(滿殿春)》 《이상곡(履霜曲)》 《정석가(鄭石歌)》 《사모곡(思母曲)》 《정읍사(井邑詞)》 《가시리》 《정과정곡(鄭瓜亭曲)》 《한림별곡(翰林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 등으로 그 가운데에 한문조의 가사(歌詞)도 있다. 시조는 중기 이후에 나타났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우탁(禹倬)·이조년(李兆年)·이존오(李存吾)·최영(崔瑩)·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방원(李芳遠) 등의 시조이다. 무신의 난 이후의 한문학 경향은 고려 초기의 향가문학이 사라지면서 패관문학(稗官文學)이 대두되어 최씨 무신집권 하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현재까지 전하는 문집(文集)으로 초기의 것은 금석문(金石文)의 일부와 중기의 것으로 대각국사문집이 있을 뿐이다. 중기 후반부터 말기에 이르는 것에는 임춘(林椿)의 《서하집(西河集)》과 진매호(陳梅胡)의 《매호집(梅湖集)》,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이승휴(李承休)의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 김구용(金九容)의 《척약재집》, 정몽주의 《포은집(圃隱集)》, 길재(吉再)의 《야은집(冶隱集)》 등이 있다. 또 고려의 음악을 보면 속악(俗樂)·아악(雅樂)·당악(唐樂)의 3가지가 있었다. 속악은 예전부터 전해 오던 고유의 음악이며, 아악은 궁정·종묘·교사(郊祀)에서 연주되는 정악(正樂)으로 송나라에서 들어온 대성악(大晟樂)이다. 태묘악장(太廟樂章) 등 10편 안팎의 악장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아악은 1370년(공민왕 19)에 명나라 태조가 고려 사신에게 새로 악기를 더 보내어 내용이 풍부해졌으며, 발생지인 중국이나 또 일본에는 전해지지 않고 오직 한국에만 보존되어 있는 동양의 고전적 정악이다. 당악은 전부터 내려오던 중국의 속악으로 가곡에는 《헌선도(獻仙桃)》 《수연장(壽延長)》 등 40여 편이 있다.

풍속
고려는 귀족들과 농·공·상에 종사하는 일반 서민을 중심으로 하여, 그 중간에 서리(胥吏)들, 가장 밑바닥에 천민과 종들이 있는 계급사회였다. 귀족들은 임금을 정점으로 한 문무백관(文武百官)으로 구성되었는데 중앙과 지방을 합하여 약 3000명이었다. 계급의 차별은 매우 엄격하여 의복·그릇에 이르기까지 양반·농민·노예에 차별이 있었다. 백관의 관복(官服)은 광종 때에 송나라 제도를 따랐다가 몽골이 들어온 후로는 몽골의 제도로 바뀌었고, 말기에 원과 명의 세력이 바뀜에 따라 몽골과 명의 제도가 혼용되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돌아온 후로는 명제가 확정되어 근세에 이르렀다. 일반 서민은 대개 흰옷을 입었고, 여자들은 홍(紅)·황(黃) 등 색옷을 입기도 하였다. 처녀는 붉은 댕기, 총각은 검은 댕기를 달았고, 귀족은 가죽신, 서민은 짚신을 신었으며 귀족의 부인은 너울을 썼다. 죄인은 관이나 두건을 쓰지 못했다. 왕실과 귀족들은 금·은그릇과 정밀한 도자기를 썼고, 서민은 조제(粗製)도자기·토기·구리그릇·놋그릇을 썼다. 불교가 성행함에 따라 사람이 죽으면 화장(火葬)하는 풍습이 퍼졌고, 부모상에는 대개 100일 동안 복상(服喪)하였다. 고려 말에는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가 수입되어 3년 동안 복상하는 풍습이 생겼다. 무당이 많았고 산신(山神)을 모신 사당과 서낭당[城隍堂(성황당)] 등이 있었으며, 기타 귀신도 많이 모셨다. 고려의 명절로는 설·정윌보름·한식·상사(上巳;3월 3일)·단오·추석·중양절(重陽節;9월 9일)·동지·팔관회(八關會)가 있었다. 이 밖에 인일(人日;1월 7일)·입춘·2월 연등·3월 삼짇날·사월초파일·유두(6월 15일)·우란분재(盂蘭盆齋;7월 15일)·제석(除夕;섣달 그믐) 등이 있었다. 설에는 차례를 지내고 관청에서도 전후 7일의 휴가를 주었다. 보름에는 다리밟기, 입춘에는 첩자(帖子)를 써붙였고, 한식에는 성묘(省墓)와 그네, 삼짇날에는 들놀이에 쑥떡을 먹었다. 사월초파일에는 연등(燃燈)을 하였으며 우란분재에는 절에 가서 공양을 하였다. 이 가운데서 국가적 경축일은 원정(元正) 즉, 설·동지·팔관·성상절일(聖上節日;임금의 생일)이었다.

종교

불교
유교가 고려의 정치이념이 되었는데 비하여 불교는 정신계의 지도이념이 되어 현실에 큰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왕실·귀족들의 두터운 보호 속에 번성하였는데, 수도 개성을 비롯하여 전국에 많은 사찰이 있었다. 종파로는 오교(五敎)의 교종(敎宗)과 구산(九山)의 선종(禪宗)이 아울러 발전하였다. 교종의 5종파는 화엄(華嚴)·법상(法相)·법성(法性)·열반(涅槃)·계율(戒律)이다. 광종은 일반 과거제도와 아울러 승과(僧科)도 설치하여 승려들을 등용했다. 교종의 과거인 교종선(敎宗選)은 교종의 총본산 삼륜사(三輪寺;개성 소재), 선종의 과거인 선종선은 그 총본산 광명사(廣明寺;개성 소재)에서 실시하였다. 여기에 합격하면, 대선(大選)이라는 첫단계의 법계(法階)를 주었다. 이로부터 대덕(大德;住持의 자격이 있음)·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에 차례로 오르고, 그 이상은 교·선종이 각각 달라서 교종은 수좌(首座)·승통(僧統), 선종은 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로 각각 승진하였다. 특히 덕이 높은 승려에게 왕사(王師)·국사(國師)의 법계를 주었는데 이것은 승통이나 대선사의 위에 위치하였다. 국사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과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다. 의천은 선·교(禪·敎)가 각기 한쪽에 치우치는 폐단을 고쳐 교관겸수(敎觀兼修)를 내세우고 천태종(天台宗)을 창설하였다. 지눌은 9산의 선문(禪門)을 통합하여 조계종(曹溪宗)을 개창하고 돈오점수(頓悟隷修)·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창하여 선문에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보우(普愚)·혜근(惠勤) 등 고승도 나타났으나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파쟁이 심했다. 한편 불교는 민간신앙과도 결합하여 승려들은 무복(巫卜)·풍수·도참(圖讖)을 통해 이것으로 민심을 좌우하었다. 또, 많은 경비를 들여 절을 짓고 불교행사를 마련한 것은 고려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유교
문종 때의 최충(崔沖)은 정치가이자 덕망이 높은 학자로 해동공자(海東孔子)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9재(九齋)를 만들었는데, 수도 개성에는 최충의 9재를 본따 사학(私學)을 만들고 교육에 힘쓴 학자가 11명 있어, 그 제자들과 최충의 제자들을 합하여 12도(徒)라 불렀다. 고려에 처음으로 송나라 정자(程子)·주자(朱子)의 성리학을 들여온 사람은 안향(安珦)이다. 안향은 1289년(충렬왕 15) 왕을 따라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에 갔다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이것을 유교의 정통이라 생각하여 책을 손수 베끼고 주자의 초상을 그려 가지고 돌아와 최초의 성리학자가 되었다. 충선왕은 연경에 만권당(萬卷堂)을 설치하여 양국의 문인들을 교류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유학을 연구하였다. 이어 백이정·이제현(李齊賢)·우탁 등 성리학에 정통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고려 말기에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길재(吉再) 등 뛰어난 학자들이 나타나 한국 성리학의 기반을 세웠다.

외세와의 투쟁
고려는 개국 이래 중국의 양(梁)·당(唐)·진(晉)·한(漢)·주(周)의 5대조와국교를 맺었는데, 그 뒤 중국을 통일한 송(宋)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것은 신라와 중국과의 관계를 계승한 것으로, 고려도 중국의 문물에 대해서는 모화사상(慕華思想)의 경향이 많았다. 따라서 오랑캐 나라인 요와는 단순한 국교조차 맺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요나라의 성종(聖宗)은 압록강 하류의 여진(女眞)을 정복하고, 993년에는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도 끊기 위해 고려의 영토 서북면에 쳐들어왔다. 이에 고려는 사대의 관계를 송나라로부터 거란(契丹)에 옮겨서 거란 황제의 정령을 받는 대신 압록강 동쪽의 여진이 차지하고 있던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고려와 중국과의 정치적인 관계는 이로써 일대 전환을 보게 되었는데 10여 년 뒤에 고려의 목종이 피살되고 현종이 즉위하자, 요나라 성종은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에 침입하여 서울인 개경(開京)을 함락시키는 한편 대묘(大廟)·궁궐을 불태워 버렸다. 이어 강동육주(江東六州)의 반환을 핑계로 삼아 1019년(현종 10)에 이르기까지 전후 4차에 걸쳐 고려에 침입해 왔으나 끝내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철수하였다. 고려는 태조 때부터 화주(和州;永興)에 변성(邊城)을 두었으며, 성종 이후는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라 하고 변경 밖의 여진을 다스리는 데 힘썼다. 특히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은 함관령(咸關嶺) 안에 있던 여진으로, 여러 추장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고려에 복종하고 물질적인 이익을 얻고자 자주 조공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외적이 되어 때때로 변경에 침범하였다. 숙종조에 이르러 북만주 아집하(阿什河)를 본거지로 하는 생여진(生女眞)의 완안씨(完顔氏)가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 뒤 두만강 하류 유역으로 진출하여 그곳 여진을 이끌고 또다시 남하, 고려 변방의 갈라전(曷懶甸)의 여진을 세력권 내에 넣었다. 그런 후에 정평성(定平城) 밖에서 고려와 충돌하고 2차례에 걸쳐 고려의 군사를 무찔렀다. 이에 고려는 갈라전을 고려의 영토로 하고자 예종 초, 윤관(尹瓘)을 장수로 한 유명한 9성(城)의 싸움을 일으켰다. 그러나 군사를 보낸지 1년 반이 지나도 완안씨의 군사를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게 되자, 그들의 완전복종을 조건으로 성의 포기와 갈라전의 전지역을 완안씨에게 돌려 주고 되돌아왔다. 그 뒤 곧 완안씨의 아구다[阿骨打(아골타)]는 요나라에 모반하고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금(金)이라 정한 뒤, 1116년(예종 11)에 고려에 대하여 형제의 나라로 국교를 맺도록 하였다. 금과의 사대관계는 금나라가 몰락할 때까지 계속되는 한편, 남송(南宋)과의 교섭도 끊어지지 않았다. 13세기 초, 몽골의 태조 칭기즈 칸[成吉思汗(성길사한)]이 금나라 정벌싸움을 일으키자, 거란족은 다시 고려에 침입하여 전후 3년 동안 경상도·충청도·전라도 지방을 제외한 북방 일대를 차지하였다. 고려는 1219년(고종 6) 몽골과 보선만노(蒲鮮萬奴;금나라에 모반한 장군)가 세운 동진국(東眞國)의 군사와 협력하여 그들을 쳐서 멸망시켰으나, 대신 몽골과 형제지간의 국교를 맺게 되었다. 이후 몽골은 해마다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받아 갔으며, 수년 뒤 몽골의 사신이 돌아갈 때 국경지대에서 암살되자 이를 빙자하여 고려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 정벌은 몽골의 태종 초부터 정종·현종조를 거쳐 세조가 즉위할 무렵까지 29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는데 그동안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遷都)하여 저항했으나 원 세조의 회유책으로 결국 몽골에 복종하였다. 1269년(원종 10)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다시 서울을 옮긴 고려는 몽골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1274년(원종 15)과 1281년(충렬왕 7) 2차례에 걸쳐 일본을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원종에서 공민왕 초에 이르기까지 90여 년 동안 고려는 거의 원나라에 예속되다시피 하였다. 고려왕은 원나라에 의해 책봉되는 국왕인 동시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장관격이었다. 충렬왕은 세자로 있을 때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였으며 이때부터 역대의 여러 왕들은 모두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아 두 나라 왕실은 서로 사돈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따라서 원나라가 고려왕의 폐위·복위를 마음대로 하게 되었으며, 때로는 벌을 받아 귀양갔던 왕도 있었다. 충렬왕 이후의 여러 왕들이 죽은 뒤 묘호(廟號)를 부르지 못한 것도 원나라의 간섭 때문이었다. 1368년(공민왕 17) 순제가 연경에서 쫓겨나 막북(漠北)으로 도망치고, 뒤를 이어 명나라 태조가 황제가 되어 이를 고려에 통고해 왔으므로 이듬해 왕은 사신을 보내 태조의 등극을 축하하고 그의 책봉을 받았다. 공민왕이 세상을 떠나고 우왕이 즉위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친원(親元)·친명(親明) 두 파로 분리되어 대립이 심하였는데 1388년(우왕 14)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그들의 영토인 요동에다 예속시키겠다고 통고해 왔으므로, 친원파의 영수 최영(崔瑩)은 명나라 정벌을 계획하고 조민수(曺敏修)·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요동을 치려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압록강에 있는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돌려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세워 친명의 국책을 확립시켰다. 4년 뒤인 1392년 이성계는 공앙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개국하였다. 

 더 있는데 심히 길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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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후삼국 통일 과정 
(1) 후고구려의 궁예는 이름을 태봉으로 바꾸고 시대의 주인이 되고자 하였으나 가혹한
     정치로 백성들의 민심을 잃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덕이 높고 지혜로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2) 태봉(후고구려)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고구려를 이어받는 뜻에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도읍지를 철원에서 개경으로 옮겼다.
(3) 후백제의 견훤은 통일을 이루기 위해 신라를 계속 공격하였고 고려와도 충돌하였으나
     왕위 계승 문제로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갇혀 있다 고려에 투항하였다. 견훤은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였다.
(4) 고려는 항복한 견훤을 극진히 대접하자 신라의 경순왕도 스스로 고려에 항복하여
     신라를 합병하고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어 셋으로 나뉘었던 민족
     을
다시 통일하였다.


  
고려의 발전

1. 달라진 고려의 사회 모습 
(1) 백성들이 편하게 있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태조 왕건의 뜻에 따라 고려 사회는
     신라와는 여러 면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2) 학식과 능력에 따라 관리를 뽑는 과거 제도가 실시되어 귀족이 아니어도 누구나 과거를통해 관리가 있었다.
(3) 신라 때보다 세금이 크게 줄어들었고 백성들의 생활을 보호하는 기관도 생겼다.
(4) 지방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관리가 지방에까지 파견되어 왕명이 전해졌고, 지방의 호족은 향리가 되어 지방관을 도왔다.
(5) 고장마다 학교가 세워져 유학의 정신이 널리 보급되었다.
2. 문벌 귀족 사회의 형성 
(1) 고려의 사회는 지방 호족의 중앙 관료화와 문벌 형성을 기초로 문벌 귀족 사회가 성립되었다.
(2) 귀족 사회를 이끈 중심 세력인 문벌 귀족에는 가지 유형이 있었다. 첫째, 중앙 집권화정책에 의해 지방 호족 세력이 중앙 관리로 진출한 경우이고, 둘째, 개국 공신들이 정치를 주도하면서 주요 세력을 이룬 경우이며 셋째, 유교 정치 이념 답변확정으로 신라 들이 과거를 통해 정치 세력으로 들어온 경우이다.

(3) 고려 사회에서는 지방 호족과 유교적 들이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하게 되어
     신라에서와 같은 진골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 보다 개방적인 사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려의 무역 활동

1. 고려의 무역 활동 
(1) 예성강의 하류에 있었던 벽란도는 수도인 개경에 가깝고 비교적 물이 깊어 배가 자유로이 드나들 있어서 무역항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2) 개경에서도 수백 명의 송나라 상인들이 거주하면서 무역 활동을 하였다.
(3) 고려는 요나라(거란), 금나라(여진)와는 육로를 이용해서, , 아라비아, 동남 아시아,
     본과는
바닷길을 통해 교역하였다.
(4) 아라비아는 동양과 서양의 중간 지역에 자리잡고 있어서 동서 문화 교류에 공헌을 하였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송나라를 거쳐 고려까지 왔는데 이들의 왕래와 소개에 의해
려라는
이름이 서방 세계까지 알려져 외국에서는 우리 나라를 코리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5) 고려의 무역품

 

수출품

수입품

송나라

  , , 나전 칠기, 화문석, 종이

  비단, 약재, 서적, 악기

요나라(거란)

  곡식, 문방구, 구리 ,

  털가죽,

금나라(여진)

  곡식, 철제, 농기구, 무기, 포목

  은, 모피,

아라비아

  고려라는 이름이 알려짐

  수은, 향료, 산호


 

1. 고려의 대외 관계

(1) 고려가 송과 정식으로 국교를 맞은 것은 광종 때부터이다. 이후 약 300년 간 문물 교류를 통해 친선이 이루어졌다. 고려는 송나라로부터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송나라와 가까이 지내려 하였으며, 송나라는 고려의 힘을 빌려 만주 지방의 거란족과 여진족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2) 고려가 거란족과 여진족을 멀리한 까닭

①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거란족과 여진족이 살고 있던 땅)을 되찾기 위하여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북진 정책으로 거란, 여진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② 거란, 여진 두 민족은 문화적으로 야만의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특히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이기 때문에 배척하였다.

③ 북방 민족들은 살기 좋은 고려 땅을 탐내어 남쪽으로 진출하려고 하였으며 잦은 침략

    을 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2.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다.

(1) 916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통일하여 요나라를 세우고 세력을 넓혀 고려를 침입하였다.

(2) 1차 침입 : 993년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자 하였으나, 고려는 서희는 당당하게 소손녕을 찾아가서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 땅이니 돌아가라고 하였다. 소손녕은 청천강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고려의 영토를 인

 정하고 물러갔다.

(3) 2차 침입 : 1009년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고려의 강조 장군은 크게 패하고 전사하였으며 현종이 거란에 가기로 하고 끝냈다.

(4) 3차 침입 : 거란의 장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오자 고려군은 곳곳에서

 그들을 잘 막아 싸웠다. 이에 소배압은 사잇길로 개경으로 진격했으나 강민첨의  군사에게 패하여 후퇴하게 되었다. 귀주에서 길목을 지키던 강감찬은 그들을 맞아  싸워 거의 전멸시켜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

 

 

   몽고의 침입과 고려의 항쟁  

 

1. 몽고의 침입 과정  

(1) 고종 임금 시대에 몽고에 쫓긴 거란족이 고려에 침입하여 평양 부근에 몰려 있었다. 이때 고려와 몽고는 이들을 함께 소탕하였다. 이 일을 빌미로 몽고는 고려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였고 두 나라는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2) 몽고의 침입 : 고려에서 공물을 받아가던 몽고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 근처에서 피살되자  책임문제를 둘러싸고 국교가 단절되고 이후 6차례나 고려를 침입하였다.

 

 

2. 삼별초의 항쟁  

(1) 삼별초란 원래 도적을 지키기 위하여 만든 특별 부대와 몽고군에 잡혀갔다가 탈출한 병사들을 합쳐 만든 부대였다.

(2) 몽고군의 침략에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항쟁하던 고려 정부가 마침내 강화도를 포기

 하고 개경으로 돌아가려 하자 삼별초는 굴욕적인 항복이라고 주장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하였다.

(3)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긴 삼별초는 세력을 키워 백성들과 힘을 합쳐 몽고군에 대항

 하였다. 그러나 몽고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제주도로 자리를 옮겨 저항하였지만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4) 몽고군의 침략에 대한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인의 꿋꿋한  기상을 보여준 민족 정신의 본보기가 되었다.

3. 공민왕의 자주 운동

(1) 고려가 몽고에 굴복하자 몽고는 더 많은 재물과 사람을 빼앗았고 심지어 북쪽 땅까지 빼앗았으며 여러 몽고 풍습을 따르게 하였다.

(2) 공민왕은 ‘몽고에 빼앗긴 땅을 찾자’, ‘몽고말을 쓰지 말고 풍습도 따르지 말라’고 하여

 자주 의식을 굳게 하였다. 그리하여 몽고 것을 버리고 고려의 풍습을 되살리는 일에

 앞장서서 몽고식 제도를 다시 고려식으로 고치고 몽고가 빼앗아간 땅을 되찾아 원래

  주민에게 돌려주었으며, 몽고에 빼앗긴 북쪽 영토도 모두 되찾았다.

   고려의 문화 유산  

 

1. 불교의 나라  

(1) 신라 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려에서는 불교가 발달하였는데 초기의 불교는 국가와 귀족의  보호, 장려로 크게 융성하였다.

(2) 태조는 불교 행사인 연등회, 팔관회의 개최를 당부하여 불교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였고  개경에 10대 사찰을 건립하는 등 불교 숭상 정책을 폈다. 광종 때에도 승과 제도를 두어  급제자에게 법계를 수여하는 한편 왕사ㆍ국사 제도를 두어 왕실의 고문 역할을 맡기는 등 승려를 우대하였다.

(3) 대각국사 의천은 이러한 불교를 숭상하는 분위기에서 왕자이면서도 승려가 되어 불교

 사상 통합 운동을 폈다. 그는 해동 천태종을 창시하여 교종(화엄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 하였는데 교관 겸수, 즉 이론과 참선을 겸해야 바른 수행의 길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교ㆍ선의 통합을 주장하였다.

(4) 고려에서는 이러한 귀족 생활과 불교 신앙을 배경으로 예술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공예분야가 발달하였다.

 

2. 팔만대장경  

(1) 고려 시대에는 불교의 발달과 더불어 호국 사상의 통일을 위해 세 차례에 걸쳐 대장경을 조판하였다.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판은 몽고 침입 당시에 강화도로 도읍지를 옮기던 중 불교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친다는 소망에서 만들었다.

(2) 팔만대장경은 글자의 모양이 고르고 아름다워 일찍부터 발달한 목판 인쇄술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또 그 규모와 보존 기술도 세계 최고의 솜씨로 인정받고 있다.

(3) 고종 때 시작하여 15년만에 완성한 팔만대장경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 문화 유산’

     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총 매수는 81,137매이다.

더 남앗는데 너무 많아서...

ㅈㅅ 이정도 박에 못해드려서

고려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주세요.

... ※추신:자세히알려주세요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과정 (1) 후고구려의 궁예는 이름을 태봉으로 바꾸고 새 시대의 주인이 되고자 하였으나 가혹한 정치로 백성들의 민심을...

여성의 삶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주세요

... 고려시대의 신분제도와 여성의 삶에 대하여 알려 주세요!!!!! 고려시대의 신분제도 귀족-고려 당시에는 귀족들의 힘이 강성하여 왕족 못지않게 살았다. 귀족의 사는 집은 매우...

고려 선죽교에 대하여 (자세히)_

고려 선죽교에 대하여 자세히알려주세요_ 사진두 첨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공 팍팍 드려요^^_ 참고로 전 4학년이구요,, 왠만하면 낼 까지 해주세여_ 님의 질문에...

고려의 문화재에 대하여 알려 주세요.

고려의 문화재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주세요. 내공냠냠같은 글은 무조건 신고합니다. 질문자의 질문에 맞지 않는 글은 무조건 신고합니다. 귀신 따위의 글은 밎지도 않고, 그런...

강화역사관,광성보에 대하여 알려주세요~^^

... 광성보에 대하여 정리해 오라고 하셨어요. 내일까지 숙제인데,어지해야 될지 모르것네요. 자세히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당!! 빨리 빨리 답변 부탁드려요~!!! 1)고려궁...

고려의문화재에 대하여 알려주세요,,

급해요,,빨리 최대한빨리 해주세요,, 고려의 문화재에 대하여 에요,,시간,,한시간정도...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글자도 자세히 보이지 않아서 전체문장을 알 수 없는 것이...

고려 청자의 대하여

고려청자의 대하여 자세히 알려주세요. 가능하면 8시까지 부탁드립니다. 전에 제가 적어논 글을 옮겨 볼게요. 필요한 내용은 발췌해서 활용하세요.... 1. 고려청자와 송나라...

고려청자에 대하여 알려주세요!!!

... 것을 자세히 조사해서 글을 써 보자' 라는 숙제가 있어요.. 전 고려청자에 대해 쓰려고 하는데... 도저히 모르겠어요... 그러니 좀 알려주세요!!! 문화 유산의 이름- 고려 청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내공100!!!)

고려시대의 도교(선교)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발표해야되는데.. 자세히... 풍수상 개성은 주위가 산으로 조밀하게 둘러싸인 장풍(藏風)의 국면인데 대하여 평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