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내공150)

영국(내공150)

작성일 2007.09.03댓글 5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안녕하세요..

급히 여쭤볼말이 있습니다

제가 영국 조사를해야하는데 아직 8장이나 더 구해야하는거예요..

영국의 관광지를 한번 해보려 합니다

여러분께서 영국 관광지를 조사해 주시면 안될까요?
내공150입니다

정말 드립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숙제는 니가 알아서 해라등 비방적인 말은 사양하겠습니다'

 

 

영국 관광지를 사진과 설명을 같이해주신다면 내공 150을 드립니다

영국 관광지를 사진만 해주신다면 내공 70을 드립니다

영국 관광지를 설명만 해주신다면 내공 10을 드립니다(가치가 떨어져서;;)

40밖에 안걸어지는데..  더 주는 것을 설명해 주시는 분도 더 드리겠습니다;;

 

다시한번 영국 관광지 사진과 설명을 같이 해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네 1년후어ㅣ 할꺼l요요요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질문자인사 니 얼굴 ㅋㅋ 나 초딩

 

1.노란 벨트

마리 테라즈와 밀월 같은 시간은 피카소의 작품속에서 화려한 색채의 사용으로 발전하는데

이작품에서는 생기 넘치는 마리 테레즈를 통해 작가가 누리는 삶의 긍정적인 요소를 극도로

부각하고있다.

 

이혼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이혼에 동의하지않는 올가와

피곤한 생활과는 판이한 젊은 여자 마리 테라즈를 통해 작가는

단순화된 삶의 정취에 흠벅 빠져있음을 암시하고있다.

마리 테레즈의 의자에앉은 모습은 얼굴과 가슴으로 한층더 간략화 되었고 얼굴의 형상은

조각적인 형태를 넘어 초현실주의 풍에 더 가깝게 표현되었다. 조각적인 몸매와 오똑한 코를

가진 마리테레즈의 코는 유난히 더 부각되어있다. 50세가 넘은 작가는 이 여인의 관능미에

매료되어 작가로서 가장화려한 작품을남긴 시기가 된다. <도록 中>

 

 


2.앉은 여인

1920년이래 이따금 피카소는 남 프랑스의 앙티브 지방들을 들르고 있었다.

 

"나는 예언자라고 자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사실 내가 여기에 와서 놀란 것은 여기에 있는 모든 것이 일찍이

내가 파리에서 그리던 그 모든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곳의 풍경은 일찍이 내것이었다고 말해야겠다."

 

라고 피카소는 말 했다.

 

피카소의 독특한 조각적인 형태를 말하여 지중해적인 인간의 특색 이라고도 한다.

피카소가 그린 여인은 지중해의 여신이며, 푸른 배경, 거침없이 당당한 여성상,

피카소에 있어서는 그림이란 우상에 가깝다.

 

 

 

3.소의 두개골

피카소는 1946년 12월 이렇게 말했다.

 

'밤의 빛의 효과는 매우 매력적이다. 자연 광선보다는 더 좋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서도 밤에 한 번 찾아와 주기 바란다.

대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광선, 내 그림을 둘러싸고, 뒤 벽에 비치는 깊은 그늘,

이 빛을 당신은 내가 거의 밤에 제작하는 정물화에서 발견할 것이다.'

 

전쟁 중에 피카소는 인간이나 두개골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도 그 중의 한 점이다. 또 4월 16일에는 피가 흐르는 두개골,

새하얗게 바랜 염소의 두개골을 흑백의 단순한 구성으로 제작하였다.

흑과 백, 낮에 대한 밤, 폭력에는 결코 굴할 수 없는 피카소의 저변이 있다

 

 

 

 

4.파이프를 든 소년

 

원래 이 작품은 24살의 피카소가 파리의 아틀리에에 자주 놀러오던

루이스라는 꼬마를 그린 습작으로 1905년에 완성한 것이다.

당시 피카소는 모델의 위치와 포즈를 그리는 연습에 치중해 있던 시기로

소년이 정면으로 똑바로 앉은 자세만 연습하려던 피카소는

우연히 소년 머리에 이미 반은 시들어 버린 장미꽃으로 왕관을 씌우고

파이프를 손에 들려 주었더니 멋진그림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배경에 꽃다발 무늬까지 그려놓어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쁘띠 루이' 라고 부르던 소년의 신비한 표정과 어른이 되어가는 소년의 묘한 분위기, 아름다운 색감의 장미 시대의 장점과 특성이 발휘된 특 A급 걸작이라고 칭할 만 하다.

그런데, 왜 지금 다시 이 작품이 재평가 받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원래 다작 화가로 알려진 피카소가 이상하게도

1905년 이 시기의 작품 활동이 뜸했으며,

이 시기의 워낙 희귀한데다가 그 해에 그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기 때문에 미술사적인 위치나 가치로 고려해 볼때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2004년 5월 5일 뉴욕 맨하튼의 소더비 경매장을 달아오르게 하며

익명의 수집가에게 9천 3백만 달러에 팔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라는

꼬리표를 받은 점도 간과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소장자가 안목있기로 명성이 높은 휘트니 부부가 소장하고

있었다는 좋은 기록과 함께 1905년 작품의 희소성,

그리고 1996년 뉴욕 근대 미술관(MoMa)에서 딱 한 번 전시되어

작품의 상태가 완벽하다는 점도 이점으로 작용하였다.

 

 

 

 

5.장님의 식사


피카소의 그림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랑 받는 시기에 속하는 때가 바로

'청색 시대(1901-1904년)'다.

 

피카소가 무명이었던 이 시기의 작품들은 그림의 표현과 그림의 실제가

너무 닮아 감상하기 쉽다. 이 시대 유명한 작품 <삶>에서 보듯 그 당시의 그림은

차가운 느낌을 주는 청색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으며

온통 비참과 절망의 하나로 이어져 깊고 어두운 뒷골목의 삶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장님의 식사> 그 당시 그의 작품의 또다른 주제는 '실명(失明)'이었다.

피카소는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해 눈 먼 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깊은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었고 게다가 심한 성병까지 앓고 있었다.


낭만적 파리 생활과는 또 다른 얼굴인 궁핍한 삶의 잔인한 고통과 밑바닥

삶의 근원적 외로움과 소위 민중적 삶의 비참함을 누구보다 몸소 체험하며

그 고통을 짙푸른 청색으로 표현했다.


청색 시대 피카소에게 가장 어려운 시대였지만 어찌 보면 가장 행복한 시기인지도 모른다.

죽마고우 카사게마스를 잃고 괴로워도 했지만 주변의 친구들이 그를 혈육처럼 돌봐 주었다.

특히 시인 막스 자콥은 그 자신도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처지에서도 극도의 빈곤에 빠진 피카소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다 잠을 재워 주고 보살펴 주었다. 그는 피카소 그림에 매료되어

그를 옹호했고 흠모했던 그의 평생 동지였다. 그의 친구 중에는 동료 화가보다 시인 친구가

더 많았고 그들에게서 더 많은 예술적 영향을 받은 것은 특이한 점이다.

 

 

 

6.거울 앞의 소녀

 

이 그림은 색채가 화려하며 고전주의적 조화를

환상과 큐비즘적 공간으로 융합 시키고 있는데,

이 그림으로 인해 1930년대 초는 피카소의 화력에서 가장 성공적인 시기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한 집약의 순간들은 풍성하고 변화무쌍한 실험의 주기들과 번갈아 나타났다.

마술적인 《거울 앞의 소녀》는 곡선적인 큐비즘과 고전적 이상주의에 대한 피카소의

경험전체가 결집된 것이다.


이 그림에서는 색채 패턴과 선적 리듬이 강렬하지만 무엇보다도 이것은

한 편의 시적인 작품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정신이 팔린 소녀는

단지 좌우가 바뀐 반사 영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비와 예언까지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이 서정적인 작품은 그의 청색시기, 장미빛 시기

그리고 고전적 이상주의 시기의 서정을 부활시키고 있다


《거울 앞의 소녀》는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를 받아들인 피카소의 성숙미가 나타난 작품이다.

 

 

 

 

 

7.통곡하는 여인

세로 60㎝, 가로 49㎝이다. 캔버스에 오일로 그려졌으며,

영국 런던의 테이트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프랑스의 입체파 화가 피카소 작품이다.

 

피카소는 91년간의 생애 중 80여 년을 미술에 바친 대가로서,

회화·조각·소묘·도자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남김으로써

20세기 현대미술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작품은 에스파냐내란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한 피카소의 대표작《게르니카 Guernica》의 습작에서 시작되었다.

피카소는 이 주제에 매료되어 《게르니카》를 완성한 후에도 여러 점을 제작하였다.

즉, 여인들에게 많은 변화를 주어 작품을 만들었는데,

《잠자는 여인》 《춤추는 여인》 《독서하는 여인》 《거울을 보는 여인》 《포옹하는 여인》 등 그 변화는 매우 다양하다.


전쟁의 비극을 통한 여인들의 슬픔을 상징화한 작품으로,

울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분해한 뒤 재조립하는

피카소 특유의 표현법으로 제작되었다. 배경의 검은색 속에서 선명하게

얼굴과 손이 부상하고 있다. 눈물을 그린 것도 사실적인 것을 피하고 추상적이며,

흐르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는 듯이 표현하고 있다.

마치 아동화같이 소박하고도 상징적으로 표현한 피카소의 걸작 중의 하나이다.


이 작품의 모델은 에스파냐내란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절에

만난 피카소의 다섯번째 연인 도라 마르이다.

이 여자는 《게르니카》을 그리는 데 많은 영감을 주기도 했는데,

의문의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8.Portrait de Jacqueline Roque aux mains croises

 

일곱번째 연인이자 마지막 연인은 자클린 로크였다.
1954년 프랑스와즈와 도라 마르가 피카소 곁을 떠나고,
1958년 마리 테레즈마저 떠나 버리자 고독에 몸부림치던 피카소는
1961년 이혼녀였던 자클린 로크와 결혼했다.


피카소보다 마흔 살 연하인 자클린은 매우 헌신적인 동반자여서
피카소는 말년에 최고의 명성을 누리며 작품 활동에만 전념했다.
그녀를 모델로 한 그림은 <옷을 벗고 앉은 여자(1959)> 등 수없이 많다.

 

 

 

 

9.Fransise assise tune robe

 

1941년 파리가 독일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피카소 앞에
그의 여섯 번째 연인인 프랑스와즈 질로가 나타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프랑스와즈는 스물한 살의 자유분방한 처녀였다.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피카소를 만난 그녀는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나와 피카소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녀는 피카소에게 "이상해요,남자 친구나 아버지랑은 말도 안 통하는데
저보다 나이가 세 배나 많은 당신과는 말도 마음도 너무 잘 통해요"라고 고백했다.


피카소와의 사이에서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은 그녀는
여자들 중 유일하게 피카소를 떠났다. 피카소는 자살해 버리겠다며
그녀를 위협했지만 그녀는 "마음대로 하세요,
그게 더 행복할는지도 모르겠네요"라며 응수한 뒤 그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10.Portrait of Dora Maar

파시즘의 광기와 싸우던 무렵인 1936년,
피카소는 생애 다섯 번째 연인인 도라 마르를 만났다.


마리 테레즈의 소녀적인 순종과 풋풋한 육체만으로는
피카소의 바람기를 잠재울 수 없었다.
피카소는 입으로는 "사랑해, 마리. 어제보다도 더,
하지만 내일보다는 덜 너를 영원히 사랑할 거야"라고
달콤한 고백을 하면서도 뒷전에서는 몰래 도라를 사귀고 있었다.
도라는 지적이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였다.

1930년대 후반 피카소가 그린 수많은 초상화들 속에서는 두 개의 얼굴,
두 개의 존재가 서로 대치되거나 중첩되어 나타난다.
마리 테레즈와 도라 마르의 이미지가 겹쳐진 때문 이었다.


피카소 스스로 말하였듯 ‘천진하지만 무식한 테레즈’와
‘지적이며 신비한 도라 마르’에게 양다리 걸침으로써
두 여인의 쟁탈전을 오히려 느긋하게 즐기는 변태적 행위를 연출한 것이다.

 

 

 

11.Femme lisant -Olga

세 번째 연인 올가 코흘로바는 발레리나였다.


주위에서는 올가가 유부녀이니 자제하라고 말렸다.
하지만 피카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1918년 정식으로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3년 뒤에는 첫아들 파울로가 태어났다. 올가는 피카소의 모델을 서면서
자기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올가로 인해 피카소의 그림은 잠시 고전주의로 회귀했으며,
그는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큐비즘을 배반한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올가의 초상은 피카소의 작품으로 믿기지 않을 만큼 고전주의 미학에 충실하고 있다.
귀족 출신인 에바는 그러나 지나치게 상류 사회의 생활에 집착해 피카소를 피곤하게 했다.
피카소는 차츰 에바로부터, 자신을 둘러싼 속박으로 부터 벗어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12.늙은 기타리스트

피카소의 초기 작품들은 우수 어린 청색이 지배하고 있어

흔히 청색 시대라 불린다. 1901년부터 1905년의 시기이다.

 

1902년 가을을 파리에서 보낸 피카소는 고향인 바르셀로나로 다시 돌아가

1904년 봄까지 머물렀다. 그의 청색 작품은 그때 집중적으로 그렸다.


주제로는 불구자나 거지를 다룬 것이 많은데,

거리에 나앉은 불쌍한 늙은 기타리스트도 그 중하나이다.

이 작품은 느낌에 있어서 매우 스페인적인데,

그러한 요소는 피카소가 바르셀로나에서 노넬(1872~1911)이라는

급진적인 사회 고발의 화가와 접촉한 데서 온 것이다.


노넬은 양식화된 사실 수법으로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스페인 농민의 참상을 거듭 그리고 있었다.

 

 

 

 

13.우는 여인


세로 60㎝, 가로 49㎝이다. 캔버스에 오일로 그려졌으며, 영

국 런던의 테이트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에스파냐내란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한

피카소의 대표작《게르니카 Guernica》의 습작에서 시작되었다.

피카소는 이 주제에 매료되어 《게르니카》를 완성한 후에도 여러 점을 제작하였다.

즉, 여인들에게 많은 변화를 주어 작품을 만들었는데,

《잠자는 여인》 《춤추는 여인》 《독서하는 여인》 《거울을 보는 여인》 《포옹하는 여인》 등 그 변화는 매우 다양하다.

전쟁의 비극을 통한 여인들의 슬픔을 상징화한 작품으로,

울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분해한 뒤 재조립하는

피카소 특유의 표현법으로 제작되었다. 배경의 검은색 속에서 선명하게

얼굴과 손이 부상하고 있다. 눈물을 그린 것도 사실적인 것을 피하고 추상적이며,

흐르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는 듯이 표현하고 있다.

마치 아동화같이 소박하고도 상징적으로 표현한 피카소의 걸작 중의 하나이다.

이 작품의 모델은 에스파냐내란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절에 만난 피카소의 다섯번째 연인 도라 마르이다. 이 여자는 《게르니카》을 그리는 데 많은 영감을 주기도 했는데, 의문의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14.한국에서의 학살


 

소련은 공산당원 피카소를 선전, 선동에 효과적으로 활용했습니다.

1951년 1월 18일, 피카소는 한국전쟁을 소재로 대작 한 점을 완성한는데

바로 '한국에서의 학살'입니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당시 피카소의 정치적 성향을 감안하면 친소련,

반미국적 작품으로 짐작되나 중세풍의 갑옷을 입은 군인들이 여자와 어린이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그림 자체에는 딱히 반미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제목은 '한국에서의 학살'이지만, 시대를 초월해 모든 전쟁과 폭력에 항거하는

보편성을 담은 것이죠. 이 점에서 과연 피카소는 천재라 할만 합니다.

 

 

 

 

15.회색빛 꽃 여인

60세가 넘는 피카소가 22살의 젊은 여류화가 프랑스와즈 질로를 만난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3년 5월, 그녀의 첫 전시회에서였다.

 

그녀와 같이 살고 싶어하는 피카소의 요구를 받아들여

회화에 대해 열띤 토론을 주고 받는 동료이자 모델로서 10년동안 그들의 밀월은 지속된다.

둘의 결합으로 두 아이 클로드와 팔로마가 태어난다.

그러나 화가와 어머니라는 이중 역할에서 오는 과로와

이미 공인으로서 유명해진 피카소의 요구에 힘들어 하던 그녀는

결국 피카소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1953년 두 아이를 데리고 파리로 돌아오고

이후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다. 프랑스와즈는 스스로 피카소를 떠난 최초의 여인이었다.

 

피카소가 프랑스와즈와 두 아이와 함께 보낸 10년은

전쟁 직후라는 시기적인 면에서도 볼 수 있듯이 되찾은 평화와 행복의 세월들이었다.

프랑스와즈는 이전의 마리 테레즈나 도라마르에 비해 그의 작품에 영감을 불어넣는

모델 차원에서는 다소 강도가 떨어진다.

 

<꽃 여인>으로 불리는 프랑스와즈를 모델로 한 작품은 1946년 집중적으로 제작되는데

같은 해 여름까지 피카소는 프앙스와즈의 존재를 도라 마르에게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예전에 새로운 파트너가 등장할 떄와 마찬가지로 공개적으로 프랑스와즈를

드러내는 작품성향은 드러나지 않고 일종의 비밀스러운 자신만의 기호로 새여인에 대한

애정을 표출하곤 했다.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모델의 아이덴터티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수직으로 위치한 그림에서 프랑스와즈의 몸통은 형체를 거의 상실했다.

두 개의 타원이 여인의 가슴임을 암시하고 얼굴은 나뭇가지 속에 파묻힌 듯

그 윤곽마저 현저히 축소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커다란 나뭇잎이 되어 마치 조각적인 형상을 이루고 있다.

같은 해 그린 <꽃 여인>작품들이 다양한 칼라를 이용한 작품인데 비해

이 작품은 회색으로 처리함으로 새로운 작업에 대한 피카소의 연구가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피카소를 버린 그녀에게 몹시 화가 났던 그는 훗날 그녀에 대해 단순히

<꽃 여인>에 불과하다고 역정서린 비난을 남긴 바 있다.

<위대한 세기 : 피카소 > 도록 中

 

 

 

 

 

16.꿈

 

피카소는 우연히 금발 머리의 젊고 아름다운 한 처녀,

마리 테레즈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그리스 고전 조각에서 볼 수 있는 똑바른 콧날과 푸른 회색 눈을 가진

아주 이상적 미인이었다.

 

테레즈는 피카소가 다가가서 자신을 소개했을 때,

당시 이미 유명한 화가였던 그를 알지 못할 정도로

미술에는 문외한이었으며 대화가 통하는 상대는 못되었던 듯 하다.

그러나 피카소는 그 아름다움에 반하여 6개월 동안 구애하였으며

결국 자신의 집 근처에 비밀리에 거처를 마련하여

그 후 몇 년간 열정적으로 이 여인을 소재로 한 작품을 그렸다.

어린 테레즈는 순종적이고 희생적이었다고 전하는데,

이러한 그녀의 특성을 드러내는 듯이 피카소는 독서를 하거나

잠들어 피카소에게 시선을 맡긴 테레즈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이 작품도 그 중 하나인데, 꿈을 꾸는 여인의 모습에서 평온함과 긴장의 이완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얼굴과 몸에서 푸른빛과 연분홍빛을 의도적으로 절반씩 사용한 것은

현실과 꿈이라는 두 세계를 표현하려고 한 의도가 아닐까 한다.

 

피카소가 그린 다른 여인들에 비해 마리 테레즈를 묘사한 작품들은 이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격정적이며 분석적인 다른 인물 표현과는 대조적이다.

한편 여기서도 인체를 해부하듯이 파악하여 표현하는 방식이 일부 엿보이기도 한다.

한 방향에서 바라보는 대상의 모습의 재현보다는 대상의 다양한 모습,

특성들을 한 화면에서 드러내고자 한 의도를 얼굴의 배치나 부분적으로 분리하여

그려낸 것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분석적인 표현보다는 평면적이며

아름다운 채색의 효과가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한 율동미를 느끼게 한다.

 

 

 

 

 

17.광녀


 

 

피카소가 19세 때 바로셀로나의 한 술집에서 첫 전시회를 열고

선보인 150점의 데생 가운데 하나다.

모래사장을 배회하는 넋이 나간 여자를 그린 이 작품은 손바닥만한 크기다.

펜과 잉크로 초라한 여인의 실루엣을 간결하게 그려냈고,

푸른 색의 파스텔을 입혀 바다와 여자의 움푹 패인 눈밑을 표현했다.

청색을 주로 써서 인간 생활의 참상과 고독을 그린 ‘청색시대’(1901~1904년)의

서막을 알리는 작품으로, 후에 그린 청색시대 대표적 인물화 ‘셀레스티나’와 분위기가 흡사하다.

 

 

 

 

 

 

 

18.게르니카


 

게르니카’는 스페인 공화국 정부가 1937년 파리국제박람회의 스페인관에

출품하기 위해 피카소에게 의뢰한 작품.

 

‘게르니카’라는 제목은 1937년 파 시스트의 폭격을 받은 스페인 바스크족

마을 게르니카에서 따온 것이다. 피카소는 게르니카가 독일 공군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자 이를 예술작품으로 표 현해 만행을 폭로했다.


당시 독일의 히틀러는 스페인 프랑코 총통의 파시스트 정권을 돕기 위해

이같은 폭격을 감행했다. 피카소는 게르니카 폭격 현장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고향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그는 파리에서 폭격 기사만 읽고도

‘게르니카’를 그릴 수 있었다.

 

피카소는 에스키스 과정을 빼면 불과 3주만에 이 그림을 완성했다.


왼쪽의 황소와 죽은 어린아이를 안고 통곡하는 어머니,

중앙의 말과 램프를 든 여인,그리고 오른쪽의 불타는 집과 달아나는 여인.

‘게르니카’는 이렇게 세부분으로 크게 나눠볼 수 있다.

폭격의 참상을 흑백의 색조로 강렬하게 표현, 평화에 대한 갈구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황소에 대한 해석이다.

 

검은 색 몸통에 멍청한 표정의 얼굴,치켜 올라간 꼬리의 이 황소는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다.그것은 일단 파시즘에 대한 저항과 희망의 상징으로 읽힌다.

‘게르니카’는 2차대전 당시 미국으로 옮겨진 뒤

“민주화한 조국에 그림을 돌려주라”는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1981년 스페인으로 반환됐다.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의 레이나소피아 아트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게르니카’는 이후 해외반출은 물론 국내이동도 일절 허용되지 않고 있다


피카소 예술의 특징적 요소가 자전적 요소라 했을 때,

이 작품은 자신의 개인적 생활과 더불어 직·간접적으로 그에게 영향을 주는

사회적 사상도 포함된 것이다.


이 작품에는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비극성이 표출되어 있고

광기, 절망, 좌절의 절규로 형상화되어 있으며 큐비즘의 면분할로 이루어져 있다.

회·갈색으로 강하게 부각되는 흑·백의 명백한 대비는 암울하고 극적인 대조를

한증 고조시킨다.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는 말의 비명, 불타는 집 속의 여인의 공포,

부러진 칼을 쥔채 죽어가는 전사의 고통, 왼편의 통곡하는 여인 등은

흑백과 회색조로 제한된 엄격한 색채로 인해 더욱 죽음과 공포를 연상케 한다.

 

 

 

 

 

19.큐비즘 (입체파)

 

 

최초로 입체파 회화를 그렸던 스페인 출신의 화가 피카소는,

선사시대로 관심을 돌렸던 최초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것은 그의 기질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아이디어들로 가득찬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그보다

앞선 작가들의 작품에 계속적으로 의존하여 왔었다.

그러나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원시미술에 대한 그의 관심은

우연 이상의 것이었다.

피카소 자신도 그렇게 느꼈음이 틀림없겠지만,

그는 사람들이 유럽 역사상 당대의 시점에서 아프리카 미술의

미개성과 생경함이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느끼도록 하였다.

 

피카소는 전통 화가로 출발했기 때문에 데상에 대한

정상적인 훈련을 받았으며, 그가 전통적인 데상을 방기한다

할지라도 그는 주제를 완전히 소화할 수 있는 손의 수법을 익히고 있었다.

브라크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처음 보았을 때 몹시 놀랐다.

브라크는 자신의 실험에 만족스러워 하지 않았으나,

이제 그는 <레스타크의 집들>에 보이는 나무의 대각선 조차도

세잔느가 사용했던 고안(考案)이었다.

그러므로 브라크와 피카소는 무엇인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두 사람 다 전통적인 원근화법과 삼차원적 환영(幻影)을

 버리고 이를 훨씬 더 얕은 회화적 공간으로 대체시켰다.

그들은 화면 위의 인물이나 대상들을 마치 캔버스 표면 위로

불쑥 밀어 올린 듯 앞으로 튀어나오도록 하였다.


또한 단단한 형태들의 집합이 배열되어 새로운 구성이 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피카소는 직선적이고 때로는 무모하기조차

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브라크 는 보다 예민한 입장이었다.

그런 까닭에 비평가들은 이들이 미술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실의 실험물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1907년부터 1909년에 이르는 큐비즘의 제 1 단계 동안에 보여준 것은,

피카소와 브라크가 아직도 세잔느의 많은 영향 아래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들은 보다 뚜렷이 그들 자신의 양식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얼핏 보기에 정물화 같은 풍경화를 그렸다.

 

깊이를 주는 모든 일루전을 제거한 채, 경치를 이루는 요소들을 앞으로 당겨서

마치 상자 안에 물건들을 마구 쌓아 놓은 것처럼 그림의 전후관계를 어지럽혀 놓았다.

이것이 과도기적 단계의 큐비즘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면 곧 실망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주체들을 거의 사라지게 해 버린 예술가들의 기법에 매혹될 것이다.

 

 

 

 

 

20.장미빛 시대

장미빛시대 (1904-1906)

거트루드 스타인은 1904년 피카소가 파리에 다시 왔을때

그는 모든 스페인의 슬픔과 현실을 잊고 프랑스의 감성의 환락속에서

 살면서 자신을 즐겼다고 '피카소,1939'란 작은 책자에 기록했다

1904년 몽마르트르에 정주하면서부터는 색조가 청색에서 복숭아색으로

바뀌는 동시에(도색시대 혹은 장미빛시대라고 한다)포름으로는

과거의 에스파냐 예술, 카탈루냐 지방의 중세조각, E.그레코, L.F.J.고야 등이

지닌 독특한 단순화와 엄격성이 가미되어 갔다.

테마는 작품《공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광대》《곡예사가족》
등에서처럼 곡예사들을 묘사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어릿광대나 곡예사는 무대 위의 모습이 아니고 그 생활의 이면을 파헤친 애수였다.

이시대의 작품은 P.세잔의 영향을 받아 형체관을 살려나갔으며,

점점 단순화되고 있다. 장미색은 우호적이고, 멋지고, 친절하고,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의 색이다.

피카소는 이 시기에 여러 친구를 만나고,

그의 최초의 연인이 된 페르낭도 올리비에를 만났으며,

잉크와 크레용, 오일, 마분지, 파스텔 등을 캔버스에 되는대로 적용해 보는 등

생활과 회화기법에서 많은 변화를 추고하고 있습니다.


작품 구성에 있어서 인간적인 요소들에 동기화되던 청색시대와는 달리

장미시대에 이르러 그는 조형적인 고려에 의해 작품을 구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제 25세가 된 피카소가 사물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지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회의와 희망이 교차하던 청색시대를 벗어나

보다 긍정적인 인생과, 평온한 심리 상태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21.청색시대

청색시대의 대표작 '솔레르씨의 가족'

청색시대 (The Blue Period, 1901-1904)

가난과 추위, 화가로서의 불안정한 처지 때문에

우수에 찬 바르셀로나와 파리를 오가면서 그린 작품들을

소위 <청색시대>의 그림이라고 부른다.

그림의 색조가 거의 단색인 청색일 뿐만 아니라 주제나 정서도 우울하고 슬프다.

화가들, 특히 성공한 화가들에게도 무명시절이 있었다.
피카소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피카소는 19세때 바르셀로나를 떠나 낯선 파리에서 생활하게 되지만,

거처할 곳이 없어 몽마르트 언덕에 사는 친구 막스자콥의 방에 끼어살면서 지내게 된다.


당시 세기말의 영향으로 피카소는 이 시기에 페시미즘적이고

고뇌주의적인 분위기에 휩싸여서 그의 그림의 주조가

짙은 푸른색으로나타나는 청색시대(1901-1904)를 맞이 한다.


몽마르트에서의 '청색시대' 동안 피카소는 청색을 주조로 그림을 그리며,

모든 것을 푸르게 느끼면서 밤을 지새우는 생활을 계속하고...


그가 좋아하는 색깔로서의 청색, 이 시기 그가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서의 청색,

게다가 그가 입고 다녔던 옷들의 색깔까지도 청색이었다고 하며,

그는 청색이야말로 '모든 색들을 다 담고 있는 색깔'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출처 : 냠냠

영국(내공150)

... 같이해주신다면 내공 150을 드립니다 영국 관광지를 사진만 해주신다면 내공 70을 드립니다 영국 관광지를 설명만 해주신다면 내공 10을 드립니다(가치가 떨어져서;;)...

축구화 구매 적절한가요? ) 내공 150

영국 여행중인데, 한국가서 신을 축구화를 구매하는게... 쉽지않아서 영국은 축구화 시장도 넓을거고 하니까 나이키 ag 축구화가 매장에 더 많이 풀리나요? 영국여행중...

자연환경좀 알려주세요 내공 150

영국이랑 프랑스 인문환경과 자연환경좀 알려주세요 영국 (United Kingdom): 인문환경: 다문화성: 영국은 다양한 문화와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다문화 사회를...

영국에 대해서 내공 150

... 돼요 영국에 기르는것 과 Jamaica 에서 기르는 것좀 알켜 주세요 (감자, 과일/사과 이런 것들) 최대한 많이 써주세요 넘 급해요 이것 써주시먼 내공 100 드릴 께요 3일 안에...

영국 대학에 대해 내공 150

... 대학교를 보니 영국 전경대??(정치경제 학교라 정경대인것같은데 오타 인것같고요)그리고 포츠머스 대학 졸업이라 하시는데 둘다 졸업이가능한건가요?? 실력은...

영국의 통화(내공150!!!!!)

1Gbp당 몇 원이 드는지 알려주세요ㅠㅠ GBP는 British pound를 나타내는 것으로.... 1 GBP = 1파운드 = 원화로는 현재 환율로 약 1,558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