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배경》
19세기 말의 조선왕조는 그 출발부터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 함께 안팎으로 직면한 심각한 위기 때문에 말기적 중세에 허덕이고 있었다. 즉, 매관매직, 탐관오리의 횡행을 초래한 관료기강의 문란, 그리고 봉건적 신분체제의 파탄은 잔반계층·서얼·상민·공사노비 등 사회불만계층을 형성하여 이들이 동학농민군세력에 결집되는 원인을 만들었다. 이와같이,정치기강의 문란과 사회적 불안은 한편 민중의 동요를 가져와, 그것은 결과적으로 화적의 횡행과 민란의 재연으로 나타났는데, 삼남일대에서 가장 심하였고 나아가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연결되었다. 아울러 우리나라에도 침략의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그것은 천주교도의 급증과 더불어 조선을 불안 속에 몰아넣었다. 1860년 4월 경주의 몰락양반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근대적 민족종교로 유·불·선은 물론 민간신앙과 천주교를 포용한 당시 사회사상의 합성체였다.동학의 교리에는 개벽과 평등의 반봉건사상과 서학에 반대하고 척왜양을 주장하는 반외세사상이 내포되어 있었다. 때문에 동학은 위정자들로부터 사교로 금압되었고 교조 최제우는 흑세무민과 좌도난정의 죄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동학은 2대교주 최시형의 노력으로 봉건적 압제와 착취 그리고 제국주의의 정치, 경제적 침략에 시달리는 농민대중 속에 광범위하게 침투하여 그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였다. 그리하여 지방분산적이었고 일시적인 농민대중의 저항을 결집시켜 전국적인 혁명으로 성숙시켜갔다.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동학농민운동의 첫번째 시발점은 전라도 고부군에서 일어났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가렴주구에 항거하는 광범한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하여 민란은 일어나게 된다.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로 삼아 군수 조병갑에게 두 차례에 걸쳐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봉준은 동학의 접주자인 동지 20명과 함께 각 마을 집강(執綱)에게 보내는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여 봉기를 맹야함과 동시에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의 집에 도소(都所)를 정하고 4개항을 결의하였다. 이듬해 1894년 2월 10일 전봉준은 김도삼·정익서·최경선 등과 함께 봉기하여 고부관아를 습격하고 불법으로 수탈되었던 수세미를 되찾아 농민에게 돌려주는 동시에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수습하기 위해 정부에서 파견된 이용태의 포악한 보복조치에 분개한 농민들은 다시 궐기하였다. 전봉준은 4월 하순 전라도 각지의 동학접주들에게 포고문을 보내어 보국안민을 위해 봉기할 것을 종용하였다. 각지에서 모인 동학농민군은 백산에 이르러 진을 치고, 5월 11일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크게 무찌른 후 전읍,고창,영광,함평 등을 차례로 함락하고 이어 장성의 홍룡촌에서 정부군을 대파한 후,계속 북진하여 6월 1일 전주성을 함락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청에 원병을 요청하였으며 뒤따라 일본도 텐진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출병하게 된다. 정세가 이에 이르자 농민군은 서울로 쳐들어가서 권귀(權貴)들을 멸한다는 목표를 유보하고 외국군의 철변을 당면과제로 설정, 정부와의 폐정개혁안 12개조의 실시를 조건으로 전주화약을 맺었다. 전주화약 성립 후 농민군은 철수하였고, 정부는 청군과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오히려 궁정을 침입하여 민씨세력을 제거하고, 친일내각을 수립하였다. 한편 청·일전쟁을 유발시켜 승리한 뒤, 그들의 조선침략을 유리하게 할 목적으로 내정개혁을 요구하는 등 제국주의적 침략을 노골화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은 정부군과 합세하여 삼남의 농민군 소탕을 준비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삼례집회를 소집하여 반외세, 반침략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재봉기하였다. 2차봉기에는 남북접이 결합하여 10만에 이르는 농민군을 이루었으나 잘 조직되고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정부군의 합동공세로 1894년 12월 4일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궤멸적인 손상을 입고 패배하여 논산방면까지 후퇴하였다. 그 후 계속 추격을 당하다가 12월 11일 금구와 태인에서 농민군 전체가 최후의 결사전을 전개하였으나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그 후 각지에서는 농민군 소탕작전이 계속되었다. 한편, 이듬해 4월 23일 전봉준은 김덕명, 성두환, 최영남, 손화중 등 동지들과 함께 교수형을 받고 최후를 마쳤다. 고부민란으로부터 1년여에 걸쳐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운동은 결국 실패하였으나, 여기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은 뒤에 항일의병항쟁의 중핵세력이 되었고 그 맥락은 3.1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의 의의와 한계》
1894년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주객관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패배하고 말았으나 역사속에서도 패배한 것은 아니었으며 한국근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첫째, 1894년 농민전쟁은 중세사회의 낡은 체제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둘째는 조선 후기이래 진행되어온 반봉건 농민항쟁의 총결산이자 근대 민중항쟁의 출발점으로서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셋째는 외세의 침략에 대한 극복을 위해 투쟁하였던 반침략 반외세 투쟁의 선구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수많은 농민들의 참여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만 농민전쟁의 패배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외세의 간섭을 들 수 있다. 1차 봉기때는 외세의 개입에 의해 중동에서 중단되었으며, 그 목적 자체가 외세의 축출이었지만 끝내는 그 외세에 의해 진압당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둘째는 개화파가 농민군을 적대세력으로 간주하여 진압에 나선 것이었으며, 셋째는 농민군축의 주체적인 측면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농민군축의 이념상의 미숙성, 통일적인 지휘체계와 조직력의 미흡, 농민군의 전략 전술상의 미숙함, 무기의 열세등이 그것이다. 그 밖에도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1894년의 농민전쟁은 봉건적인 중세사회를 마무리 짓기 위한 총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고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이후 일본에 의한 보호국화가 강제되었을 때 이에 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반일투쟁으로 면면히 이어지면서 반일의병전쟁의 선구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갑오개혁
1884년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급진 개혁파가 일으킨 정변으로 일본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근대적인 혁신 정부를 세우려는 목적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실패 하였다. 임오군란때 청나라의 도움으로 정권을 다시 잡은 민씨 세력은 친청 사대 경향을 띄게되고, 청나라는 이때부터 조선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게 된다. 이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개혁파가 주측이 되어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근대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근대국가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의존하여 서양 문물을 서서히 받는다는 온건 개화파와 손을 잡고 이들의 주장에 반대 하였다. 이에 급진 개혁파는 하루속히 근대화를 이룩하여 열강과 대등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정변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때마침 청·프전쟁에서 패한 청나라의 어수선한 틈을 이용하여 일본과 모의하여 정변을 일으켜 혁신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우정총국이 1884년 11월 18일에 업무 개시가 시작되고 축하연을 계기로 급진 개혁파는 정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몰아내고 고종을 경우궁으로 모신뒤 새 내각을 조직하였다. 문벌타파, 평등, 재정의 일원화, 지조법 등의 개정, 경찰제 실시, 행정기구 개편 등 14개조로 된 개혁안을 선포하였으나 청나라의 간섭으로 사흘만에 실패하고 그 중심 인물들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갑신정변은 오히려 조선내에 청나라의 세력만 강화 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은 일본간에 정변의 영향으로 한성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청나라와 일본간에 텐진조약이 체결되어 다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 틈바구니에 놓이게 되었다. 목적은 근대적이었으나 민중의 지지를 받지 않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과 외세에 기대어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 점이 전근대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자발적인 근대화 운동이었다는 점에 뜻이 있다.
독립협회의 활동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친러내각이 성립되어 일본의 세력은 일단 견제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자주성은 크게 손상되었고 열강의 이권침탈은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재필 등은 자유 민주주의적 개혁사상을 민중에게 보급하고 국민의 힘으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간했다. 독립협회는 근대 개혁사상을 지닌 진보적 들이 지도부를 이루고 열강의 침탈과 지배층의 수탈에 불만을 품은 도시 시민층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독립협회는 강연회와 토론회의 개최, 신문과 잡지의 발간 등을 통하여 민중에게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 사상을 고취하였다. 이로써 독립협회는 민중속에 뿌리를 내려 광범한 사회계층의 지지를 받았고 민중에 기반을 둔 시민단체로 발전하였다. 또한 자주국권운동, 자유민권운동, 국민참정권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만민공동회와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 6조를 결의함으로써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를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민의식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구식 입헌군주제의 실현을 목표로 하였기에 보수세력의 지지를 얻지 못하엿다. 보수세력은 황국협회를 이용하여 독립협회를 탄압하였고 이로인해 독립협회는 3년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대한제국의 개혁정치
대한제국의 성립이 1897년이니 그 이후에 일어난 광무개혁이 대한제국의 개혁정치입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1860년대)는 그 전이죠. 광무개혁은은 일종의 헌법으로 제정한 대한국 국제에서 대한 제국이 전제 정치 국가이며, 황제권의 무한함을 강조하고, 동수권,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외교권 등을 모두 황제의 것으로 규정하여 전제 군주체제를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옛날로 돌아가자는 말이죠. 경제면에서는 양전 사업과 상공업 진흥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양전 사업에서는 과거의 폐단의 하나인 전정을 개혁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죠. 이 양전 사업으로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라 할 수 있는 지계가 발급되기도 했습니다. 상공업 진흥책이 실시되어, 섬유, 철도, 운수, 광업, 금융분야에서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되었습니다. 이러하니 실업교육이 필요했고, 근대 산업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외국에 유학생이 파견되었으며, 각종의 실업학교와 기술 교육 기관도 설립되었습니다. 그외에도 교통, 통신, 전기, 의료,등 각분야에 걸친 근대적 시설이 확충되었습니다. 그러나 광무개혁은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집권층의 보수적성향, 그리고 열강의 간섭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