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을 가르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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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9.04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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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요번주 목요일날 사회시간에 꼭 필요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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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사하겠습니다.*^^*(혹시, 내공이 있을지도...)

여러분! 여러분만 믿겠습니다.

 

 


#고구려에 대한 역사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 고구려의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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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살고 있던 맥족 사회는 기원전 4-3세기 무렵에 철기문화가 보급되자 사회분화가 점차 진전되어 갔다. 같은 혈족에 속한 여러 세대로 구성된 친족집단은 생산과 소비의 기본단위가 되었으며, 사회적 결집에서도 그러하였다. 유력한 친족집단에는 비혈연적 관계의 열세한 사람들이 예속민으로 복속되어 있기도 하였다.

 

2. 나아가 그러한 유력 친족집단을 중심으로 일정한 계곡이나 하천유역의 마을들을 규합한

지역정치집단이 각지에 형성되어 갔다. 이 지역집단 내의 중심이 되는 마을은 자연히 규모가 커져 큰 촌락, 즉 고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방어적 필요에 따라 고을 뒷산에 성을 쌓기도 하였다.

 

3. 그러한 큰 촌락을 지칭해 ‘홀(忽)’, ‘골’, ‘구루(溝婁)’라 하였다. 이 음을 한자로 표기한 데서 고구려의 구려(句麗)라는 명칭이 비롯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그러한 여러 지역집단 중, 크고 중심적인 집단을 지칭해 ‘큰 고을’ 또는 ‘높은 성’이라 불렀던 데서 비롯하였던 것이다.

 

4. 기원전 2세기 말까지에는 고구려라는 명칭의 실체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 맥족사회 전체를 통괄하는 집권력을 지닌 정치조직체로서의 국가를 형성하는 단계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다.도문명과 황하문명 역시 기원전 2500년 경에 등장한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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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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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찍이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옛 고조선 지역은 한사군이 설치되어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압록강 중류일대에서는 훗날 고구려라는 고대 동아시아 강국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정치, 사회적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압록강 중류지역은 좁은 평야를 중심으로 깊은 계곡과 험한 산이 있는데, 서북쪽으로 혼강을 건너 요동지역에 통하고, 동으로는 독로강을 넘어 개마고원과 동해안으로 통해 동서 교통의 중간지가 될 수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서남쪽으로는 황해로 이어지고 남쪽은 대동강과 재령강 유역의 평야지대와 만나고 북쪽에서는 송화강 유역의 대평원지대나 요하 상류의 초원지대로 통할 수 있었다. 고구려인들은 이러한 지리적 조건을 충분히 활용하며 발전해 나갔다.

 

2. 기원전 3세기 중엽에서 기원전 2세기 초 사이에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는 주변의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주민집단이 형성되었으며 이들이 보다 정치적으로 성장하여 ‘예군남려(?君南閭)’?‘구려(句驪)’와 같은 정치세력으로 기록상에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강가나 계곡에 자리잡은 지역집단이었다. 그래서 이들 지역집단을 ‘나(那)’라고 불렀는데 이는 ‘노(奴)’, ‘내(?)’와 음이 통하고 ‘천(川)’, ‘양(?)’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땅(地)이나 내(川), 또는 냇가(川邊)의 평야를 뜻한다. 점차 여러 지역집단들이 생겨나게 되자, 자신들을 다른 집단과 구별해 부를 수 있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조나(藻那), 주나(朱那), 소노(消奴), 관노(?奴), 절노(絶奴), 순노(順奴) 등과 같은 집단의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고 훗날 이들 중 가장 유력한 5개의 나가 5개의 부를 이루면서 고구려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하였다.

 

3. 나집단은 철기 문화에 바탕을 두고 성장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보급된 철제 농기구는 토지이용과 수확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그리하여, 농업생산력이 발전하자 사회경제적으로 계층화가 더욱 진전되어 나갔고, 이를 바탕으로 철제농공구를 집중적으로 소유하는 집단이 생겨나면서 소집단간의 통합도 이루어졌다.그리고 이같은 과정을 거치며 성장한 지역정치집단이 바로 나집단이다.

 

4. 그런데, 기원전 2세기 중엽, 이들이 거주하던 압록강 중류지역에 위만조선과 漢의 영향력이 뻗어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위만조선은 기원전 2세기 초에 진번(?番), 임둔(臨屯) 등을 복속시켜 세력을 키운 후, 기원전 2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주변 집단과 중국의 교통을 통제하고 나섰다. 그러자, 압록강 중류일대의 나집단들은 유력한 집단을 중심으로 모일 수 밖에 없었고 그 중 한나라에 의지하게 된다. 역사서에는 기원전 128년 한에 투항한 예군남려(?君南閭)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이 투항하자 한나라는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고 도로를 개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창해군을 설치하려는 한나라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대신해서 이후에 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나서야 압록강 중류 일대에 현도군(玄?郡)을 설치하였다.

 

5. 예군남려 집단은 강력한 통치조직을 가진 국가형태가 아니라, 각 지역집단들이 공동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 결성된 연맹체와 같은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요동군에서 동해에 이르는 교통로상에 분포하는 집단들의 연맹체에서 압록강 중류지역의 주민집단은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던 중에 한이 설치하려던 창해군이 계획만으로 끝나게 되자, 압록강 중류일대의 나집단은 안으로 자신들의 통합을 강화시키면서 주변을 복속시키는 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주변 요새지마다 ‘구루(溝?)’나 ‘홀(忽)’이라 불리는 성을 쌓았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이 지역집단을 주변지역 사람들이 ‘구려(句驪)’라 부르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한 예로서, 기원전 107년에 한이 압록강 중류일대에 설치한 현도군의 여러 현 가운데에 고구려현이 있음을 들 수 있다.

 

6. 단일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해 가던 압록강 중류 일대의 이들 ‘구려’ 집단은 현도군의 설치로 한의 직접 지배를 받게된다. 그러자 압록강 중류 일대일대의 나집단들은 다시 유력한 집단을 중심으로 뭉쳐 연맹체를 형성하였고, 한군현과 대항하면서 그 힘을 키워 마침내 이들을 이 지역에서 몰아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압록강 중류일대에는 이전의 예군남려 집단보다 강력하게 결합한 연맹체가 등장하였는데, 그 연맹체는 정치적 수장이 있고 무장력을 갖춘 독자적 정치세력들이 결집한 것이었다.처음 이 연맹체의 중심이 된 것은 소노집단(消奴集?)이었는데, 이들은 농경과 군사 방어에 유리한 환인(桓仁) 일대에 기반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는 내부의 성장을 바탕으로 각 집단들 간에 통합과 복속이 진행되었다. 또한, 일찍이 이 지역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부여계 이주민 집단도 이 시기에 활발하게 이동해 왔고,이들이 토착세력과 연합하면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세력이 주몽집단이다. 그리고, 혼강(渾江)의 졸본(卒本) 지역에 정착해 그곳의 토착세력과 연합하여 세력을 키워나간 주몽집단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마침내 소노집단을 누르고 연맹체의 새로운 중심에 서게 되니 이들이 바로 계루집단(桂婁集?)이다.

 

7. 계루집단은 현도군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환인지역으로부터 국내지역(??地域)으로 천도한 후, 그 지역에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서 자리잡은 후, 다른 정치세력을 통제하는 정책을 펼쳐 나갔다. 그래서, 소노집단과 계루 집단 외에 독로강 아래와 운봉댐 위의 압록강 유역과

그 지류 일대에 있었던 대표적인 정치체들을 자신의 하부단위정치체로 편재하였다.

한편, 당시의 한군현은 이들의 내부 통합을 방해하기 위해 각 지역집단에게 필요한 물자나

작위를 주어 회유하는 정책과 무력을 동원하는 정책을 함께 쓰고 있었다. 그러나, 계루집단은 한군현의 이같은 분리통제책에도 강력하게 대응하여, 정치체들이 한군현과 개별적으로 맺어오던 대외교섭권을 *책구루(?溝?)로 일원화시켰다. 이는, 비로소 이 지역 전체를 아우르며 강력한 힘으로 다스릴 수 있는 정치적 힘, 즉 국가권력이 등장했음을 뜻한다.

그리고, 고구려가 이같이 강력한 통치력을 갖게된 시기는 태조대왕 때 즈음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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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발전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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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체제정비

 

1)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일대의 정치적 지역집단들이 결성한 연맹체 형태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초기 고구려의 통치 집단 내에는 복수의 정치집단이 공존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중 계루부 집단이 다른 세력들을 나부(那部)로 편제하고 이들을 통제하면서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게 되었다.

이 때 각 나부는 그 내부에 우두머리인 제가(諸加)가 자신들의 관리를 거느리며 다스리는

자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왕도 개별 나부 안의 일에 대해서는 통치권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초기 고구려의 정치형태는 왕이 주도하지만 각 나부 대표인 제가들이 함께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공동운영 체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계루부의 장인 왕이 다른 나부들의 역관계를 원할하게 조정하며 풀어나가는 것이 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이같은 나부통치체계는 대무신왕(大武神王) 대에 기초가 마련되었고, 태조왕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2) 그러나, 이같은 공동운영 체계는 점차적으로 계루부의 왕권이 강화되고 나부의 독자성이 약해지는 방향으로 변화해 나갔으며 3세기 말에 이르면 나부가 소멸하면서 실질적인 나부체제는 해체되고 만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고구려의 성장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3) 우선, 중국군현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출발한 고구려로서는, 군현지배를 유지하고자 하는 중국측과 대결하기 위해 정치적 통합을 강화하면서 통치에 기반이 되는 경제적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나부체제가 완성된 이후에도 중국 군현에 대한 투쟁뿐 아니라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복활동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제가들의 군사를 동원하고 전쟁을 운영하며, 전리품을 분배하는 과정들이 반복되면서 자연히 왕의 권한이 강화되고 제가들의 영향력을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4) 다음으로, 이 무렵에 즈음해 철기가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철제농기구가 보급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읍락 내부에 계층분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읍락을 지탱해 주던 공동체 의식이 약해지면서 제가들의 독자적 통치권이 나부 내에서 예전과 같이 발휘될 수 없게 되었다.

 

5) 마지막으로, 나부체제가 해체된 데에는 이를 목적으로 국왕이 벌인 여러 가지 분열책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국왕은 나부들의 힘이 서로 비슷한 수준에서 유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각 나부의 내부 통치에 간섭하거나 혹은 다른 나부를 지원해 서로를 견제하게 하였다. 또한, 나부 내부의 통합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 내부 세력들을 분리해 조정하기도 하였다.

 

6) 이같은 나부체제 해체 과정에서 나부의 장은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은 왕을 지지하여 그 아래에서 중앙의 관료귀족이 되거나 왕에게 맞서며 중앙정치에서 배제된 채로 지내다 소멸해 가는 두 방향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정비과정을 거치며 마침내 나부통치체제는 해체되고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점차적으로 갖춰져 갔다. 또한, 이러한 지배질서를 확립하는 데에 영토확장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7) 4세기 초에 미천왕은 드디어 낙랑과 대방 등의 한군현을 몰아내고 서안평을 확보하였을 뿐 아니라, 주변 세력과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풀어가면서 이를 기반으로 내부의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미천왕대의 이러한 성과는 나부체제 해체 이후 어느정도 이루어진 중앙집권화를 뒷받침해 줄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지 못한 상태의 것들이었기 때문에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그래서 고국원왕 대에 이르러 잇달아 대외 전쟁에서 크게 실패하고 심지어 왕이 전사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고구려는 크나큰 위기에 부딪히게 되었다.

따라서 확대된 영토와 주민들을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의식의 변화와 제도 마련에 대한 필요성이 시급해졌고 이 요구를 받아들여 실행한 것이 소수림왕이었다.

 

8) 소수림왕은 재위 2년인 372년에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을 세우는 것으로 체제정비에 돌입하였다.

불교의 수용은 전진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의 하나이면서, 전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차원적이고 보편적인 이념으로서 국왕중심의 호국적인 북조 불교를 통해 국가공동체의식을 강화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또한, 중앙집권적 정치운영에 적합한 인재를 키우기 위한 유교적 교육기관으로서 태학(太?)을 설립하였다. 이는, 확대된 영역과 구성원에 대한 통치를 체계적으로 해 나가기 위한 방안이면서 유교사상이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정치이념을 제공해 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꽤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태학이 설립된 다음 해에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면서 본격적인 체제정비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9) 기존의 관습법만으로는 효과적인 통치가 어려움을 깨달은 소수림왕은 중국에서 시작되고 발전한 성문법인 율령을 제정해 반포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적인 국가체계를 갖추어 나가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는 이후 고구려가 눈부시게 발전하며 확대해 나갈 수 있게끔 한 체계적이고 안정된 지배체제 마련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4세기말 이후 고구려의 체제는 소수림왕대에 만들어진 틀의 방향에 따라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정비되어 나갔다.

 

2. 영토확장

 

1)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이후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소수림왕대에 이루어진 체계적인 통치체제의 정비가 뒷받침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 단계에도 고구려는 국가체제를 갖추어 나가는 과정에서 그 영역을 확대해 왔다.

 

2) 그래서, 나부체제가 성립되기 이전에는 선비족의 일부와 두만강 하류의 북옥저 등과 같은 주변의 다른 종족들을 정복하여 지배영역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 때까지는 그 영역 안에서 강력한 지배력을 갖지 못하고 단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도의 상황이었다. 그러던 것이 1세기 중엽에 나부체제가 성립되면서 계루부 왕권은 각 나부의 군사력을 동원해 보다 본격적인 정복활동을 펼치게 된다.

우선, 동해안 방면의 옥저와 동예를 복속시켜 이 지역의 풍부한 해산물을 확보하고 배후기지로 삼았다.그리고, 이전에 복속시킨 다른 종족들에 대한 지배도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군현과 군사적으로 직접 대결하였다. 그래서, 4세기 초 미천왕대에 이르러서는 한군현을 몰아내고 서안평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나부체제 해체 이후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체제의 정비가 소수림왕을 거치면서 체계적으로 진행되자, 안정된 사회적 힘을 기반으로 광개토왕과 장수왕대에는 적극적으로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3) 광개토왕은 서쪽으로 요동을 차지하고 동북의 전진을 복속시켰고, 남으로는 백제를 쳐서 임진강과 한강 어간까지 영토를 확대하였다. 또한, 신라에 들어온 왜의 군대를 낙동강 유역에서 물리치고 신라 지역에 군사를 주둔시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강력한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백제와 신라에게 매우 큰 위협이 되었고 이에 대처하고자 하는 백제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나제동맹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장수왕은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차지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강 이남의 경기도 및 충청도 남북부도 일부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6세기 초반까지 이들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

 

3.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1) 6세기 중반인 양원왕 7년에 신라와 백제 동맹군에게 한강유역을 다시 내어 준 고구려는 581년에 중국에서 통일제국 수(隋) 나라가 출현하면서 이에 대한 새로운 대응방식 마련에 고심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고구려 내부에서도 대대로(大?盧)를 둘러싸고 귀족들이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정세에 적절한 대처방안이 절실한 때였다.

 

2) 먼저, 고구려는 사신을 여러번 파견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병기를 수리하고 곡식을 비축하여 혹시 있을지 모를 수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3) 그러나, 남북조 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을 통일한 수는 국제질서를 수 중심의 것으로 재편하고자 하였으며 이것이 고구려의 독자성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이 당시 고구려의 내정은 연씨가 집권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주전론(主?論)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양국의 대립이 계속되던 중 영양왕 9년에 고구려가 수의 요서지방을 선제공격하여 수에 대한 정면대결의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고구려와 수나라는 4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이게 된다.

 

4) 고구려의 요서지방 선제공격 이후, 수 문제와 양제 대에 걸쳐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이에 맞서 고구려는 살수대첩의 예와 같이 훌륭하게 수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고구려는 적극적으로 수나라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소극적으로 방어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때 고구려가 사용한 주 전술은 침입한 적을 성(城) 중심으로 격퇴하는 수성전(守城?)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이것이 이후의 대당전쟁에서도 일관되게 이용되었다.

 

4.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1) 중국을 통일 시킨 이후 대내적 안정을 이루지 못한 채 국제질서를 수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했던 수는, 과도한 토목공사와 고구려전으로 백성들의 고통이 심해지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멸망하였다. 수에 이어 당(唐)을 세운 고조(高祖) 이연은 고구려와의 전쟁보다는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은근히 압박을 가하며 당 내부의 민심을 수습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역시, 당과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당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양왕 말기부터 축조하기 시작했던 천리장성이 16년 만인 영류왕 14년에 완성되었고, 수와의 전쟁 중에 신라와 당의 관계가 가까워지면서 차츰 양국은 외교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수나라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연개소문도 고구려의 독자성이 유지되는 한 당과의 전쟁은 피해보려는 외교적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나라의 전쟁이 시작되는데 이는 당의 침략에서 비롯되었다.

 

2) 그리하여 당태종이 이끄는 대군이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였는데, 초기 전쟁에서는 사력을 다한 안시성 항전으로 고구려가 당군을 방어하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이후에도 당은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략해 왔고, 20여년간에 걸친 전쟁의 결과로

668년에 멸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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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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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에는 모두 28명의 왕이 재위하였다.

고구려를 세운 인물은 부여에서 이주한 주몽으로서 토착세력과 연합하면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계루부를 중심으로 집권력을 확립시키면서 강력한 일원적 정치제도를 정비해 나간 것은 태조왕에 이르러서이다.

또한, 태조왕 이후로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영역을 확대시켜 동해안과 두만강 유역까지 진출을 시도하였고 서쪽으로는 한군현과 대결하였다. 또한, 대외적인 팽창과 함께 사회가 분화되고 왕위의 부자계승도 확립되었다.

 

2. 4세기에 들어, 미천왕은 낙랑군과 대방군을 무찔렀으며 소수림왕대에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태학을 세우며 불교를 공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명설화를 바탕으로 고구려의 건국설화인 주몽설화를 정립해 왕실의 존엄성과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때에 이룩된 통치체제를 토대로 고구려는 대외적인 팽창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3. 그러나, 6세기 이후 양원왕의 즉위를 둘러싼 귀족들의 대립을 시작으로 귀족연립적인 정권이 등장하였고, 수나라가 중국대륙을 통일하면서부터 고구려와 중국의 통일왕조간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오래도록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연개소문의 사후 벌어진 내분까지 겹치면서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멸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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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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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제도

 

1) 고구려 초기의 정치체제는 계루부를 중심으로 한 연나부(椽那部), 관나부(貫那部), 비류나부(沸流那部), 환나부(桓那部)의 5부체제(나부체제)였다.

태조왕 이래 점차 왕권이 강화되어 가기는 했지만 4세기 이전까지는 각 부가 여전히 상당한 독자성을 지닌 채 결합되어 있었다. 소수림왕대인 4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앙집권체제 정비를 위한 대대적인 정치 개혁이 단행되었다.

중앙집권체제의 구축은 중앙통치조직이라 할 수 있는 관등과 관직, 지방통치제도 및 군사제도를 통해살펴볼 수 있다.

3세기까지 5부체제 하에서는 왕뿐만 아니라 각 부의 대가들도 관리를 둘 수 있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오면서 점차 왕을 정점으로 한 일원적인 관등제가 구축되어갔다.

이는 형류(兄類)와 사자류(使者類)의 관등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점차 국가의 필요에 의해 세분화되었다.

 

2) 4세기 이후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되어가면서 지방통치제도도 개편되어갔다.

5부체제의 해체 이후 이들 지역은 성ㆍ곡으로, 하위 소집단들은 촌으로 각각 편제되었다.

이러한 지방행정단위는 광개토왕릉비의 정복기사나 수묘인 관련 기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수묘인이 차출된 구민(舊民)지역 14곳 중 성이 7곳, 곡이 2곳이었고 신래한예(新來韓穢) 지역은 총 36곳 중 31곳이 성이었다. 또한 396년 광개토왕이 백제를 정벌하여 58성 700촌을 획득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성의 규모에 따라 차이는 있었겠지만 대략 1성에 10여개의 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방행정단위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나 기록이 없어 구체적인 사항은 알 수 없다. 다만 모두루 묘지명에 수사(守事)라는 관명이 기재되어 있어 수사가 성ㆍ곡에 파견된 지방관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북부여 수사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수사는 북부여 일대의 다수의 성ㆍ곡을

관장하고 있었다.

 

3) 한편, 금석문 자료를 통해 7세기의 관직의 체계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최상위 관등인 대대로(大對盧)로부터 태대형(太大兄)ㆍ주부(注簿)ㆍ태대사자(太大使者)ㆍ위두대형(位頭大兄)ㆍ대사자(大使者)ㆍ대형(大兄)ㆍ발위사자(拔位使者)ㆍ상위사자(上位使者)ㆍ소형(小兄)ㆍ제형(諸兄)ㆍ선인(先人)ㆍ자위(自位)에 이르는 13관등이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대로는 귀족회의체 의장으로 국정을 총괄하였고 정원은 1명, 임기는 3년이었다. 태대형은 막리지라고도 하였는데 국정을 관장하며 특히 군사권을 장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관등에 관해서는 잘 알 수 없지만 제 5위의 위두대형 이상의 관등이 행정권ㆍ인사권ㆍ군사권의 행사를 독점한 것으로 보이며 귀족연합체의 구성원이었을 것이다.

 

4) 관등제의 운영을 보면 일정한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는 관등이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무관을 보면 최고위 무관직인 대모달(大模達)에는 위두대형 이상의 관등이, 말객(末客)에는 대형 이상의 관등이, 당주(幢主)에는 소형 이상의 관등이 임명되었다. 대체로 위두대형ㆍ대형ㆍ소형ㆍ선인 등이 각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는 하한선으로 보인다. 관등제의 체계적인 운영에 따라 관제(冠制)에도 구분이 있었다. 지배층은 절풍(折風)을 썼으며, 관인(官人)들은 새의 깃을 꽂아 구분하였다. 관등의 높낮이에 따라 관의 색도 달랐는데 왕은 백라관을 쓰고 대신은 청라관을, 하급 관리는 강라관을 썼다.

 

5) 안장왕(安藏王) 이후 고구려왕권은 귀족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다.

따라서 귀족들이 정치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귀족연립정권이 성립되었다.

따라서 최고 귀족들의 회의체인 귀족회의가 가장 중심적인 기구로 등장하였다.

귀족회의체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일들을 논의하고 결정하였다.

즉 대대로를 선임하고 때로는 왕위계승문제에도 관여하기도 하였다.

대대로는 귀족회의의 의장으로 임기가 약 3년간이었다.

그러나 유력한 자는 임기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때로는 대대로 자리를 놓고 귀족들 사이에 무력충돌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 과정을 통하여 귀족들 사이에 세력의 재편이 일어나기도 하였는데 왕은 전혀 이 과정에 개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중요한 존재로 막리지가 있다. 막리지는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제2위 관등인 태대형과 같거나 태대형이 취임하는 관직으로 보인다. 대대로ㆍ태대형ㆍ울절ㆍ태대사자ㆍ위두대형 등의 관등이 권력을 장악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이 귀족회의체의 구성원이었을 것이다.

 

6) 그런데 보장왕대에는 연개소문의 권력은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이전의 대대로의 선임을 통한 귀족연립정권의 성격에서 연개소문의 무단적 정치행태로 나아갔다. 결국 귀족연립정권의 운영방식은 설자리를 잃었다. 따라서 권력의 중심부에서 소외된 귀족들이 늘고 결국 당의 침입 속에서 중앙귀족과 지방세력이 이탈하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지방행정조직은 6세기 이후에 새롭게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도성제(都城制)로는 3경제(三京制)가 있었다. 3경은 평양성(平壤城)ㆍ국내성(國內城)ㆍ한성(漢城)을 말하는데

다시 5부로 편제되었다. 수도의 행정구역은 내평(內評)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5부에는 욕살(褥薩)을 두어 통치하게 하였다. 3경에는 주로 지배층들이 거주하였고 물론 평민들도 거주하였다.이와 함께 지방은 외평(外評)으로 불렸는데 5부로 나눈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에는 약 176성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이 성들이 지방행정조직의 단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실상을 구체적으로 알기 힘들며 3단계의 지방관 체계를 볼 때 지방행적조직역시

크게 3단계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최고의 지방관인 욕살은 지방 통치의 중심지인 대성(大城)에 파견된 것으로 보이는데

지방의 5부를 관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욕살은 중앙의 명령을 받아 하위의 행정단위에 전달하고 통솔하였다. 욕살 아래에는 처려근지(處閭近支)가 있는데 여러 작은 성(城)을 거느린 것으로 보인다.최하위의 지방관은 가라달(可邏達)과 누초(婁肖)였다.

가라달은 욕살과 처려근지의 직할지의 막료로 보이며 누초는 최하위 단위인 소성(小城)에

파견된 지방관으로 보인다.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5부의 욕살은 처려근지가 다스리는 10성을 거느리고,처려근지는 누초가 파견된 2~3개의 소성을 다스리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방관은 행정조직 뿐만 아니라 군사지휘관의 역할도 함께 한 것으로 보인다.

 

 

2. 군사제도

 

1) 고구려의 군사제도는 중앙과 지방의 군사제도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중앙의 군사조직으로 5부를 들 수 있다. 각 부에는 일정한 수의 군사가 배치되어

중앙군으로써 수도 방위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좀 자세히 보면 각 부에는 1천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말객(末客)이 이를 지휘하고 이들 5부의 중앙군을 대모달(大模達)이 총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지방의 군사조직은 지방의 행정구역과 동일하게 편제되었다.

고구려가 성단위로 군사전략을 썼던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2) 고구려의 가장 대표적인 군사제도는 수렵행사였다.

수렵행사는 왕의 군사적인 능력도 높이고 군사훈련도 겸했다.

평양 천도 후에는 봄ㆍ가을로 정례화시켰다. 수렵행사를 통하여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기도 하였다. 한편 경당(?堂)도 중요한 미성년자의 군사훈련장이었다.

한편 본격적인 군사훈련은 열병과 행렬을 들 수 있다.

고구려군은 육군과 수군으로 나뉘며 육군은 다시 보병과 기병으로 나눌 수 있다.

수군 역시 육군 못지 않게 상당히 강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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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경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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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제

 

1. 조세제도

 

국가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농민생활의 안정이었다. 그들은 국가에 세금을 내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주된 담당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농민들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평민의 세금과 노동력의 제공에 대해서는 매우 간략한 자료만이 전해진다.

후대의 기록인 『수서(隋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인세(人稅)로는 베 5필에 곡식 5석(石)을 내고, 유인(遊人)은 3년마다 1번 세금을 내는데

10인이 가는 베 1필을 함께 낸다. 한 가구마다 1석의 세금을 내며, 그보다 못한 가구는 7두(斗)를, 더 못한 가구는 5두를 낸다” 고구려의 조세는 사람과 가구 단위로 부과되었으며 가구에 부과된 세금의 정도는 가구의 경제적 형편이 고려되었다.

한편 유목이나 반농반목생활을 하는 유인에게는 생활특성에 맞게 세금을 부과하였다.

한편 백제나 신라와 마찬가지로 평민들에게는 국가에 일정기간, 혹은 특별한 기간에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부역(賦役)과 군역의 의무가 있었다.

부역에서 주로 한 일은 궁궐, 도로, 제방, 성곽의 건설과 수리(修理)에 관련된 것이었다.

 

2. 산 업

1) 고구려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었다. 그러나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대표적인 밭농사 작물로 좁쌀과 콩을 들 수 있다.

논농사는 요동지역을 비롯한 일부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중국측의 기록처럼 먹을 것은 그리 풍족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2세기부터 농업에 소를 이용하고 3세기 중엽경부터 철제 농기구의 사용이 확산되면서

생산성이 증가되었다.

그 결과 농민층은 부농과 고용농으로 분화가 진행되었다. 한편 목축도 이루어졌다.

특히 말은 당시 고구려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축으로 좋은 말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밖에도 소, 돼지, 양, 개, 닭 등을 길렀다.

 

2) 농업뿐만 아니라 각종 수공업과 광업도 발달하였다.

특히 광업은 국가의 큰 관심대상이었다.

광업의 생산품 중 철제무기나 농기구 등은 매우 중요했던 것으로 보이며 국가나 귀족은

철광석 산지의 확보에서부터 유통에 이르는 과정에서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한편 고구려 초기부터 부족한 물자를 얻기 위한 상업이 발달하였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시장도 발달하였고 외국과의 교역도 증가하였다.

중국과의 공식적인 무역은 태조대왕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주로 말, 황금, 백은, 각궁(角弓), 단궁(短弓), 천리마, 생태피, 골계피, 초피(貂皮) 등을 수출하고 비단, 의류, 물소, 수레장식을 수입하였다. 중국 이외에도 북방의 여러나라와도 교역을 하였다.

 

 

 

[2] 사회

 

1. 신분제도

 

1) 신라의 골품제와 같은 구체적인 신분제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고구려에도 이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단편적인 자료에 의거해 고구려의 신분구조를 짐작해 보면 크게는

지배층, 평민, 노비의 3등급으로 나눌 수 있다.

고구려의 신분구조에 대해서는 연구자들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대개 4-5등급으로 나누고 있다. 이는 연구자들에 따라 중ㆍ하급 지배층, 호민(豪民)을 하나의 독립된 등급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원래 5부의 족장층으로 중앙집권화가 진행되면서 수도로 올라와 중앙귀족으로 전신하였다.

평민은 조ㆍ용ㆍ조의 의무를 지닌 피지배계층으로 1인당 포 5필, 곡 5석을 냈을 뿐만 아니라 각종 부역에도 동원되었다.

 

2) 『삼국사기』 봉상왕 9년조(300)를 보면 부역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데

이를 통해 노동력 징발기준이 15세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광개토왕대의 기록을 보면 전 주민에 대한 군사동원체제가 갖추어져 평민들이 군역에도 동원되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각종 의무는 평민 가운데서도 남정(男丁)을 대상으로 하였을 것이다.

고구려의 최하층은 노비로 광개토왕릉비에 수묘인을 노비처럼 매매하지 말라는 기록이 있어 물건과 같이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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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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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인들은 검소하고 무(武)를 숭상하여 말타기ㆍ활쏘기에 능하였다.

궁궐ㆍ관청ㆍ절 등과 귀족의 집들은ㆍ기와를 덮고 일반 민가는 초가였으며 온돌을 사용하였다. 남자들은 모자를 썼는데, 특히 관료들의 모자는 소골(蘇骨)이라 하여 깃을 꽂고 금은으로 장식하였다.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주름잡힌 치마를 입었고 저고리는 무릎까지 내려왔다. 상류층에서는 바둑ㆍ투호ㆍ축국(蹴鞠) 등 중국식 놀이를 하였고, 평민들은 춤ㆍ노래ㆍ씨름ㆍ석진을 즐겼다. 장례식은 성대히 치러졌으며 여러 가지 부장물(副葬物)을 관속에 넣는 후장(厚葬)의 풍족이 있었다. 또 10월에는 동맹(同盟)이라 하여 고대사회에 널리 유행하던 추기(秋期) 부족공동체의 대제전(大祭殿)인 국중대회를 열었다.

 

2. 한편, 고구려에서는 율령이 반포된 이후로는 율령을 중심으로 법이 집행되었으나

그 이전에는 관습법에 의존하였다.

고구려의 율령은 국가에 대한 충성이 강조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법은 응보율(應報律)적인 성격으로 매우 엄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결혼은 부모나 친척들이 상대방의 부모나 친척들과 약속하는 일종의 중매가 주류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결혼풍습으로 서옥제(壻屋制)가 있었는데

서옥은 신부의 집 근처에 지은 사위가 거처할 집을 뜻한다.

신랑은 결혼과 동시에 자신의 집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낳은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

서옥에서 사는 것이다. 초기에는 결혼할 당시 신랑은 신부의 집에 혼납금(婚納金) 등을 지불해야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혼납금의 풍속은 사라지고결혼의 대가로 경제적 이득을 얻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한편 가족 내에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는 동천왕(東川王)대를 기점으로 사라진다.

 

3. 고구려의 장례로는 후장풍습(厚葬風習)이 있었다. 결혼하면서 장례에 쓸 옷을 준비하였고 장례는 매우 후하게 지냈는데 무덤은 돌을 이용하여 쌓았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3년간 집안에 관을 놓아 두었다가 길일(吉日)을 택하여 묻었다.

그리고 무덤 앞에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고구려인들은 죽은 조상이 자신들을 돌봐줄 것이라고 믿었고 죽어서도 현실세계가 계속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후장풍습으로 이어졌고 후대에는 고분벽화를 만들게 한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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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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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와 중국 왕조

 

1) 고구려는 동천왕(東天王)때 압록강 입구 서안평을 공격하여 중국 본토와 낙랑군(樂浪郡)과의 통로를 차단하였다. 그러자, 동천왕(東天王) 19년에 위나라의 모구검이 병사를 이끌고 고구려(高句麗)를 침입하였다. 환도성(국내성)이 함락(?落)되었고 왕기가 재 침입(侵入)을 했을 때 왕이 동해안으로 피난을 가는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위가 망하고 진이 통일했을 때 중국은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틈을 타고 고구려는 요동(遼東) 에 대한 공격과 낙랑군을 축출(逐出)하였다.(미천왕4년)

 

2) 고국원왕(故?原王)때 고구려는 위기를 맞이하는데 재위 12년에 연나라 모용황이 침입하여 선왕의 시체를 파헤치고 왕의 생모(生母)와 남녀 5만포로가 잡혀가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3세기말~4세기초에 중국은 서진 내부에서 일어난 왕들 간의 정권 쟁탈전으로 서진이 멸망하고 5호16국과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가 되어 고구려에게는 유리한 입장이 전개되어 가고 있다. 이 무렵 고구려와 밀접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중국 대륙의 전진이 동진(東晋)과 패권을 다투다가 실패하고 그 영향으로 후진에 의하여 전진이 멸망하게 된다.

전연(前燕)의 모용수가 화북 지방의 후연과 대립하고 고구려와 후연 간에 현도성과 요동성(遼東城) 지배권으로 대립이 심화된다. 이시기에 전진의 부견왕이 백만 대군을 육성(育成)하여 중원을 통일하려했고 또 고구려까지 침략 위협을 받고 있을 무렵 광개토대왕이 왕에 오르게 되었다.

 

3) 광개토대왕은 수 십 년 동안 침략했던 북연의 침입을 평정하고 북연왕이 원래 같은 고양(高揚)고씨 후예라 하여 침략했던 일을 무마시키고 북연과 형제(兄弟) 관계(?係)를 맺었다.

광개토대왕은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는데 요동군을 몰아내고 숙군성(?軍城)을 개척하기 위해 힘썼다. 광개토대왕의 북진정책(北進政策)으로 고구려는 현도군 영토를 확보하고 북으로는 숙신ㆍ부여를 쳐서 송화강 유역일대를 장악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또 광개토대왕 때는 북조(北朝)와 치열한 투쟁을 하면서도 남조(南朝)와 교섭을 계속하여 원교근공(遠交近攻)정책을 하였다. 북방의 유목민족(遊牧民族)과는 친교를 하고 중국(中?)을 견제(牽制)하는 정책이었다.

 

4) 장수왕(長?王)때도 역시 광개토대왕(?開土大王)때 내세웠던 정책을 계속 이어졌는데 북조를 통일한 북위(北魏)ㆍ동위(東魏)ㆍ북제(北?)ㆍ북주(北洲)등과 통교하고 바다를 통해 남조의 동진(東晋)ㆍ송(宋)ㆍ제(?)와도 차례로 친선 교류하여 이른바 양면 외교정책을 펴서 중국을 견제(牽制)하였고 북방(北方) 민족(民族)으로부터의 위협을 예방하였다. 그리고, 이같은 다각적 외교는 고구려와 중국 왕조들과의 관계에서 기본 노선이 되었으며 이로써, 고구려는 남북조의 분열을 잘 이용해 국제질서 안에서 안정된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 수ㆍ당과 같은 통일왕조가 성립되면서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는 대결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2. 고구려와 백제ㆍ신라

 

1) 고구려(高句麗)의 고국원왕(故?原王)은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평양까지 침입(侵入)한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이 때부터 고구려와 백제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그리고,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의 소수림왕, 고국양왕은 적극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가 이를 잘 막아내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에 접근하여 두 나라는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나가게 된다. 그러던 중, 백제는 왜와 가야와 연합군을 결성해 신라를 침범하였다. 그러자, 신라왕의 구원 요청을 받은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해 신라를 구원하고 신라 영토 안에 고구려 군대를 주둔시키고 신라의 국내정치에 까지 간섭하였다.

 

2) 한편, 이 무렵 백제 사회에서는 지배 세력 간의 갈등으로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광개토대왕은 즉위 이후로 줄곧 백제에 대해 공세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리하여 백제 수도 한성에 들어가 아신왕(阿莘王)의 항복을 받고 돌아오는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구려의 압력에 불안해진 백제는 고구려에 맞서기 위해 왜ㆍ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나 실패하고 만다.

백제에 대한 공략에 온 힘을 기울이던 고구려는 장수왕 대에 평양천도를 시행하여 본격적인 남진정책을 펴 나갔다. 그러자, 백제와 신라는 서로 우호관계를 맺고 고구려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나제 동맹을 계기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변화하기 시작하여 대립의 양상을 띠다가 마침내는 극도로 악화되고 만다.

그리하여 5세기 후반에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공격하면서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장수왕이 이끈 3만명의 군사가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점령하였으며, 고구려에게 한성을 잃은 백제는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게 된다.

 

3) 장수왕에게 큰 타격을 입은 백제와 신라의 우호관계는 군사적으로 보다 강화되어 갔으며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충청북도 중북부의 내륙지방을 중심으로 계속되어 갔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의 계속된 공격과 이즈음 신라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고구려의 남진정책도 더 이상의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만다. 그러던 중, 신라와 백제 연합군의 공격으로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잃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한강유역을 빼앗긴 이후 복잡하게 전개되는 중국 대륙의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고구려는 더 이상 한반도 남쪽 지역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였다.

나라 안팎의 위기를 수습한 이후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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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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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제를 무너뜨린 신라와 당은 곧바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서둘러, 이듬해 당의수륙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하고 신라도 군사와 군량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당군은 연개소문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참패하여 철수하고, 신라군도 혹독한 추위와 고구려군의 저항에 막혀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고구려는 수.당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쟁이 오래 계속되면서 국력이 소모되어 나라가 차차 기울어 갔다.

밖으로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 있던 돌궐과 말갈족이 당에 복속하게 되어 요동 방위선이 약화되었다.

 

2. 이러한 때 연개소문이 죽자 정권을 둘러싸고 지배층 사이어 분열이 일어나 국력이 더욱 약화되었다.연개소문이 죽자 정권을 연개소문이 죽은 후 장남 남생이 뒤에 이어 대막지리로 정권을 잡았는데, 동생들인 남건과 남산이 힘을 모아 남생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이에 남생은 옛 서울인 국내성으로 달아나 당라에 구원을 청하였으며,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12성을 들어 신라에 투항하였다.신라와 당군은 이러한 틈을 타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이세적이 이끈 당군은 요동 방면의 여러성을 함락시킨 후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포위하고, 김인문이 이끈 신라군도 평양성에서 당군에 합세하였다.

 

3.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고구려는 평양성을 굳게 지키면서 1년간이나 항거하였지만

끝내 성이 함락되어 668년에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669년 평양성이 함락된 후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2만 명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669년에는 고구려인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새하기 위하여 고구려인 약 2만 8천여호를 당나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러한 당나라의 움직임에 대해 고구려 유민들은 강력한 저항에 나섰다.

 

4. 669년 검모잠 일파의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이어 안시성 등지에서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고구려 유민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했다.

사비성 탈환에 성공하지 670년 신라 장군 설오유와 고구려 장군 고염무가 이끄는 연합군이

공동작전을 수행했다는 기록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고구려의 부흥운동은 671년 안시성의 함락, 673년 호로하에서의 패배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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