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운동이 개혁 하고자한 내용(내공20)

동학 농민 운동이 개혁 하고자한 내용(내공20)

작성일 2004.05.27댓글 3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동학 농민 운동이 개혁 하고자한 내용 내공20있습니다
5월27일 목요일 11시 까지 입니다
부탁 드리겠습니다 오늘 하루 입니다


#동학 농민 운동 #동학 농민 운동 전개 과정 #동학 농민 운동 요약 #동학 농민 봉기 #동학 농민 운동 의의 #동학 농민 혁명 기념일 #동학 농민 운동 폐정 개혁안 #동학 농민 운동 원인 #동학 농민 혁명 기념관 #동학 농민 운동 무기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창도시대(創道時代)
제1세 교조이신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천도교에서 부르는 존칭) 최제우(崔濟愚)는 순조 24년(1824) 10월 28일 경주 가정리(稼亭里)(현재의 경상북도 월성군 견곡면 가정리)에서 탄생하였는데 자는 성묵(性默)이오 호는 수운재(水雲齋)였다. 원조(遠祖)는 신라말에 유명했던 최치원(崔致遠)이며, 7대조 최진립(崔震立)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많은 공을 세웠고 병자호란 때에는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 남한산성을 구하러 가다가 용인군 험천에서 청국(淸國)군대와 마주 싸워 장렬히 전사(戰死)한 위국충신(爲國忠臣)이었으며, 부친 최옥(崔**)은 호를 근암(近菴)이라 하였는데 도학(道學)이 높아 경상도 일대의 선비로서는 모르는 이가 별로 없었다. 근암공(近菴公) 최옥(崔**)의 만득자(晩得子)로 태어난 수운대신사는 인물이 출중하였는데 불행히도 조실부모(早失父母)하였다. 대신사는 재질이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백가시서(百家詩書)를 불과 몇년만에 무불능통(無不能通)하였고 점점 자람에 따라 세상에 대한 경륜(經綸)과 인생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항상 말하기를 「군불군(君不君) 신불신(臣不臣) 부불부(父不父) 자불자(子不子)」라 하였고 또 「일세상 저인물이 도탄 중 아닐넌가 함지사지 출생들아 보국안민 어찌할고」라고 하시면서 세상을 개탄하는 동시에 세상을 건질 결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유서(儒書)와 불서(佛書)를 연구하여 보고 새로 들어온 서학(西學)도 연구하여 보았다. 그러나 뜻에 맞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에 모든 과거를 부인하고 새로운 도리를 찾기 위하여 주유천하(周遊天下)의 길을 떠났다. 팔도강산을 다 밟으면서 인심풍속을 살펴보기도 하고 혹은 활쏘기와 말타기도 하여 보고 혹은 장사와 음양복술도 하여 보았지만 필경은 하나도 세상을 건질 도리가 아니라고 단정한 후 말하기를 「방방곡곡 찾아들어 인심풍속 살펴보니 여차여차 우여차라」,「각자위심(各自爲心)하는 말이 내 옳고 네 그르지 시비분분 하는 말이 일일시시 그 뿐일세」,「우습다 세상사람 불고천명(不顧天命) 아닐넌가」 등등 노래로 나타내면서 세상의 그릇된 원인과 진리의 있는 바를 찾기에 힘썼다. 이제 대신사께서 처하신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국내의 정세를 잠깐 살펴보면 그때는 조선말엽의 쇠퇴기라 외척(外戚)의 세도정치와 당쟁으로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지방에는 탐관오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양반토호(兩班土豪)의 횡포로 민생은 도탄에 들었다. 거기에 악역(惡疫)의 유행과 홍수 기근까지 겹쳐 민심이 극도로 소란하여 각지에 민요(民擾)와 민란(民亂)이 일어났으며 백성들 가운데는 살길을 찾아 외래의 세력에 의지하고자 천주교에 들며 혹은 정감록 등 참서(讖書)에 의하여 십승지지(十勝之地)와 진인(眞人)의 출현을 기대하는 등 어지러웠다. 한편 밖으로는 중국이 아편전쟁(阿片戰爭)으로 영국에게 패하여 향항(香港)을 베어주고 오항(五港)을 열었으며, 그 후 중국은 국내적으로 태평천국난(太平天國亂)에 시달리는데다가 영불연합군(英佛聯合軍)이 북경을 침공하여 북경조약(北京條約)을 맺고, 러시아(露西亞)는 애혼조약(愛琿條約)에 의하여 흑룡강 이북지역를 점령한 후 다시 남진(南進)하여 연해주(沿海州)를 취하는 등 서양세력이 물밀듯 동양으로 침입하였다. 그 뿐 아니라 우리나라 근해에도 이양선(異樣船)이 자주 출몰하여 인심을 자극하였으며 동으로는 일본이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대신사는 크게 걱정하여 「보국안민이 계장안출(計將安出)고」하면서 민심의 귀추와 시운시변(時運時變)을 살피기에 힘썼다. 대신사는 10여년 동안 주유천하(周遊天下)의 길에서 돌아와 울산유곡호암동(蔚山裕谷狐岩洞)에 주거를 정하니 그때 나이 31세였다. 이곳에서 때로는 명산대천(名山大川)을 탐승(探勝)하고 집에 들면 침사명상(**思冥想)으로 우주의 묘취(妙趣)와 인생의 진체(眞諦)를 직관(直觀)함으로써 위안을 삼았다. 32세에 「을묘천서(乙卯天書)」를 받고 33세에 양산통도사 내원암(梁山通度寺 內院菴)에 들어가 49일기도를 하다가 숙부환원(叔父還元)으로 47일만에 하산하였으며 34세에 다시 천성산(千聖山) 적멸굴(寂滅窟)에 들어가 49일기도를 무사히 마쳤다. 36세 되는 10월에 대신사는 처자를 거느리고 고향인 경주 가정리로 돌아와 구미산(龜尾山) 밑에 있는 용담정(龍潭亭)에 들게 되었다. 용담정은 선부(先父)인 근암공(近菴公)이 거처하며 자여질(子與侄)를 가르치던 곳으로 기암괴석과 산수의 경치가 아름답고 운치있는 곳이었다. 대신사는 이곳에 돌아온 후 「도기장존사불입(道氣長存邪不入) 세간중인부동귀(世間衆人不同歸)」라는 일구시(一句詩)를 써붙이고 내가 이곳에서 도(道)를 깨닫지 못하면 다시 세상에 나가지 않으리라는 「불출산외(不出山外)」의 중한 맹세를 하였다. 대신사가 37세 되던 철종 11년(1860) 4월 5일이었다. 이날은 대신사가 종교적 체험에 의하여 천도(天道)의 진리를 대각(大覺)한 날이다. 다시 말하면 대신사는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이라는 천인일체(天人一體)의 경애(境涯)에 들어가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몸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사상(侍天主思想)과 아울러 「사람이 이에 한울」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종지(宗旨)를 대각(大覺)한 것이다.[註1] 인내천(人乃天)은 종래 신과 사람을 대립시켜 신만 알고 사람을 몰라보며 신을 높일 줄은 알되 사람은 천시하는 그러한 폐단으로부터 탈피하여 본질에 있어서 신의 표현이 인간이며 인간의 근본이 신이라는 신인일체(神人一體)의 새로운 종교관으로서 대신사께서는 경전(經典)가운데 「나는 도시 믿지말고 한울님만 믿었어라 네몸이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 하단말가」 또는 「사람의 수족동정 이는 역시 귀신이오 선악간 마음용사 이는 역시 기운이오. 말하고 웃는 것은 이는 역시 조화로세」 등등 인내천(人乃天)의 원리를 말하였을 뿐 아니라 집에서 부리던 여종을 해방하여 한 사람은 양딸로 삼고 또 한 사람은 며느리로 삼는 등[註2]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평등에 대하여 사인여천(事人如天)을 몸소 실천하여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신사는 참으로 사람은 도성덕립(道成德立)이 되며 세상은 「한울나라」가 되게하기 위하여 수연(修煉)의 요목(要目)을 정하는 동시에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지상천국(地上天國) 건설이라는 목표를 향하여 무궁(無窮)히 전진함과 아울러 성(誠), 경(敬), 신(信)을 실천도덕으로 삼았던 것이다. 대신사가 득도(得道)한 4월 5일을 「천일기념일(天日紀念日)」이라고 한다. 대신사는 덕(德)을 천하에 펴기 위하여 주문(呪文)을 지으니 주문은 지극히 한울님을 위하는 글로서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의 21자로 되어 있다. 대신사는 다음 해인 신유년(辛酉年)부터 포덕(布德)을 하기 위하여 먼저 부인 박씨에게 도(道)을 전한 후 6월에 문을 활짝 열어놓고 사람을 가르치기 시작하니 사방에서 제자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수도(修道)의 효험으로 글씨를 잘 쓰고 글을 잘 짓는 사람도 생겼으며 갑자기 총명해지는 사람과 오래된 병이 낫는 사람도 있었다. 소문이 날로 원근에 퍼지니 도고일척(道高一尺)에 마고일장(魔高一丈)이라 세상의 비평이 높아가고 관리배(官吏輩)의 지목이 또한 심할 뿐 아니라 향중(鄕中)과 친척들의 음해중상(陰害中傷)도 있었다. 대신사는 지목을 피하여 11월에 전라도 남원으로 가서 은적암(隱寂菴)에서 수도 하는 한편 경전 여러 편을 지었다. 다음 해인 3월에 대신사는 다시 경주로 돌아와 각지를 순회하며 가르치니 제자는 더욱 늘어났다. 9월 29일 윤선달(尹先達)이라는 자가 경주영장(慶州營將)을 충동하여 말하기를 "최선생이라는 사람을 잡아 좌도(左道)로 다스리면 그의 제자 수천이라 반드시 많은 속죄금(贖罪金)을 바칠 것이라"하니 영장(營將)은 그말대로 곧 차사(差使)를 보내어 대신사를 체포하여 왔다. 그러나 대신사는 조금도 굴하는 빛이 없이 "내 천도(天道)로써 사람을 가르치노니 무엇이 불가하리오"하고 광채있는 눈으로 영장(營將)을 직시(直視)하니 영장 또한 바른 말에 감동하여 곧 석방하였다. 이 때 영문(營門) 밖에는 문도(門徒) 700여명이 운집한지라 윤선달은 놀래어 어리론지 숨어버렸다고 한다. [註3] 그 후 포덕(布德)은 날로 늘어 교운(敎運)이 크게 떨치매 대신사는 교문규례(敎門規例)을 확정코자 11월에 접주제(接主制)를 실시하였다. 접주제란 각지에 접소(接所)를 설(設)하고 접소(接所)에 접주(接主)를 두어 관내도인(管內道人)을 통화(統化)하는 제도이니 이법이 천도교제도(天道敎制度)의 처음이었다. 이때 접소(接所)와 접주(接主)는 다음과 같다.[註4] 경주(慶州)에 이내겸(李乃謙) 백사길(白士吉) 강원보(姜元甫) 영덕(盈德)에 오명철(吳明哲) 영해(寧海)에 박하선(朴夏善) 대구(大邱) 청도겸(淸道兼) 경기(京畿)에 김주서(金周瑞) 청하(淸河)에 이민순(李敏淳) 연일(延日)에 김이서(金伊瑞) 안동(安東)에 이무중(李武仲) 단양(丹陽)에 민사엽(閔士燁) 영양(英陽)에 황재민(黃在民) 신영(新寧)에 하치욱(河致旭) 고성(固城)에 성한서(成漢瑞) 울산(蔚山)에 서군효(徐君孝) 영천(永川)에 김원달(金元達) 장기(長**)에 최기중(崔**仲) 이었다. 이와 같이 경상도는 물론이오 멀리 충청.경기도에까지 교세가 발전하였다. 7월 23일에 대신사는 최경상(崔慶翔)으로 북접주인(北接主人)을 정하고, 8월 14일에는 도통(道統)을 최경상에게 전하니 이 분이 천도교의 제2세 교조(敎祖)인 해월신사(海月神師)(천도교에서 부르는 존칭)이며 이 날을 「지일기념일(地日紀念日)」이라고 한다. 해월신사(海月神師)(최시형(崔時亨), 처음 이름은 경상(慶翔))의 자는 경오(敬悟)요, 호는 해월(海月)인데 순조 27년 3월 21일 경주 동촌 황오리에서 탄생하였다.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고생스럽게 자라 35세에 입도(入道)한 후 수도(修道)에 지극하고 포덕(布德)을 많이 하여 「북접주인(北接主人)」을 거쳐 이번에 대신사로부터 도통(道統)을 전해받게 된것이다. 도(道)의 기초가 점점 튼튼해져가고 있을 때 문도(門徒) 한 사람이 경기(京畿)로부터 와서 대신사에게 급히 고하기를 "지금 조정에서 선생을 이단(異端)으로 지목하여 체포코자 한다는 소문이 있으니 선생은 급히 몸을 피하소서"하니 대신사 대답하기를 "도(道)가 나로부터 나왔으니 내 스스로 당하리라. 어찌 몸을 피하여 누(累)를 제군(諸君)에게 끼치리오"하면서 태연히 결심한 빛을 나타내었다. 이 해(1863) 11월 20일 명령을 받은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는 부하를 거느리고 조령(鳥嶺)을 넘어서니 경주까지 400여리에 동학에 관한 말이 들리지 않는 곳이 없고 특히 경주를 둘러싼 인근제읍(隣近諸邑)은 더욱 심하여 점사지부(店舍之婦)와 산곡지동(山谷之童)이라도 그 글을 외지않는 사람이 없으니, 왈(曰)「위천주(爲天主)」, 왈(曰)「시천주(侍天主)」라는 글이었다는 서계(書啓)를 보아도 그 당시 동학이 경상도 일대에 얼마나 성행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註5] 12월 9일 선전관(宣傳官) 정운구는 먼저 부하를 시켜 낮에 자세히 탐지(探知)하고 이날 야반(夜半)에 용담정(龍潭亭)을 포위하여 대신사와 문도(門徒) 23명을 체포하였다. 대신사를 체포한 정운구일행은 영천 대구 상주 보은 등지를 거쳐 경기도 과천까지 이르렀다가 철종의 붕어(崩御)로 조정의 명에 의하여 정월 6일 대구에 환수(還囚)되었다. 이 때 대구감사는 서헌순(徐憲淳)이라 상주목사 조영화(趙永和) 지례현감 정기화(鄭**和) 산청현감 이근재(李近在) 등의 배석하(培席下)에 여러 차례 심문하였다. 심문의 초점은 "네 이단(異端)의 도(道)로써 무리를 모아 민심을 혼란케 하니 장차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며 또 검무(劍舞)를 추며 검가(劍歌)를 부르니 이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註6] 혹독한 고형(拷刑)이 있었는데도 대신사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내 천도(天道)로써 사람을 가르쳐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리고 기울어지는 나라를 돕고자 하노라, 이 도(道)의 출세(出世)는 천명으로 나온 것이오, 나의 사의(私意)가 아니니만치 내 또한 일신(一身)으로 도(道)에 순(殉)하여 덕(德)를 후세만대(後世萬代)에 전코자 하노니 공(公)은 자위(自爲)하소서"하니 감사는 하옥(下獄)을 명하였다. 그리고 서헌순은 문초내용에 대하여 장계(狀啓)를 올렸다.[註7] 이 때 해월신사(海月神師)는 대신사가 대구에 환수(還囚)되었다는 말을 듣고 옥리(獄吏)를 매수(買收)하여 변장을 한 후 3월 3일 밤중에 식상(食床)을 들고 옥중에 들어가 최후회견(最後會見)을 하였다. 대신사가 아무말 없이 연죽(煙竹) 한개를 주므로 해월신사는 이것을 받아가지고 옥에서 나와 깨쳐보니 그 속에는 심지가 있고 심지에는 「등명수상무혐극(燈明水上無嫌隙) 주사고형력유여(柱似枯形力有餘)」라는 일구시(一句詩)와 「오순수천명(吾順受天命),여고비원주(汝高飛遠走)」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해월신사는 이 글을 보고 곧 강원도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고종 원년(1864) 3월 2일 대회군민(大會軍民)하고 효수경중(梟首警衆)하라는 조정의 명에 의하여[註8] 대신사는 갑자(甲子) 3월 10일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청수(淸水) 한 그릇을 놓고 묵도(默禱)한 후 조용히 참형(斬刑)에 나아가니 이 때 나이 41세였다. 3일 후에 문도(門徒)들이 시체를 거두어 3월 17일 밤에 구미산(龜尾山) 용담전록(龍潭前麓)에 장(葬)하였다. 대신사의 유작(遺作)으로는 『동경대전(東經大全)』 4편(포덕문(布德文) 논학문(論學文) 수덕문(修德文) 불연기연(不然其然))과 약간의 시문(詩文), 그리고 순국문가사체로 된 용담유사 8편(용담가.안심가.교훈가.몽중노소문답가.도수가.권학가.도덕가.홍비가)과 검가 등이 전해지고 있다.


2.은도시대
은도시대(隱道時代)란 동학(東學)을 세상에 공공연히 내놓고 믿지를 못하고 숨어서 믿었던 때로서 실로 고난이 많았던 시대였다.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최제우(崔濟愚))가 순도(殉道)한 후 해월신사(海月神師,최시형(崔時亨))는 태백산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경상.강원.충청.전라.경기 등 각지를 30여년 동안 숨어 다니면서 순강(巡講)과 포덕(布德) 등 동학(東學)의 유지발전에 많은 힘을 썼다. 고종 8년(1871)에 이필제(李弼濟)가 영해(寧海)를 습격한 신미사변(辛未事變)이 일어났다. 이필제는 일찌기 대신사 재세시(在世時) 입도(入道)하였다가 대신사가 참형을 당한 후 그 원한을 풀기 위하여 거사할 것을 해월신사에게 수차 요구하였으나 신사가 때가 아니라고 이를 만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필제는 3월에 도인들을 동원하여 영해를 습격하였으며 8월에 또 문경을 습격하려다가 실패하여 서울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고 도인들의 피해 또한 막심하였다. 관(官)에서는 동학의 여당(餘黨)을 없애고자 각 도에 수사망을 펴고 엄탐하므로 해월신사는 항상 쫓기는 몸이라 때로는 산중암굴(山中岩窟)에서 범을 만난 적도 있었으며 때로는 며칠을 굶으면서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하는 등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도인을 수습하는 등 꾸준히 노력한 결과 도운(道運)이 점차 부흥하게 되었다. 해월신사는『동경대전(東經大全)』과『용담유사(龍潭遺詞)』 등 경전을 간행하여 이를 반포하며, 육임제(六任制)(교장(敎長)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를 정하여 조직을 강화하였다. 중요한 법설(法說)로는 적서(嫡庶)의 차별 철폐와 「양천주설(養天主說)」을 강조하였으며 우상을 전폐(全廢)하는 동시에 일체 의식(儀式)에 청수일기(淸水一器)로 표준물을 정하였고 용시용활(用時用活)을 말하면서 본명(本名) 경상(慶翔)를 시형(時亨)으로 고치는 동시에 제자들의 이름도 「시(時)」자를 넣어 고쳐주었다. 특히 부인수도(婦人修道)를 중요시하여 「내수도문(內修道文)」을 지어 반포하였고 대인접물(對人接物)에 있어서는 「어린애를 때림은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라, 집에 손님이 오시거든 한울님이 강림(降臨)하셨다 하라」는 등 사인여천(事人如天)을 몸소 실천함은 물론이오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 등 삼경사상(三敬思想)을 고취하였다. 이와 함께 「사람이 그저 놀고 있으면 한울님이 싫어하시나니라」하면서 어디를 가나 주문(呪文)공부를 하는 외에 새끼와 노끈을 꼬며 짚신을 삼고 멍석을 내고 나무를 심는 등 잠시도 놀지 않았으며 성격이 근검주밀(勤儉周密)하며 인자관후(仁慈寬厚)하여 누구나 신사를 대하면 스스로 감화를 받게 되었다. 해월신사의 노력으로 교세가 크게 발전함에 따라 세상의 지목과 관리의 박해는 더욱 심하여갔다. 고종 29년 1월에 해월신사의 지시에 의하여 도인 수천명이 전라도 삼례역(參禮驛)에 모여 충청, 전라도관찰사에게 글을 보내는 등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별반 효과가 없었으므로 다음해 계사(癸巳) 2월에 천폐(天陛)에 직소(直訴)코자 소수(疏首)에 박광호(朴光浩)를 정한 후 손천민(孫天民)으로 소문(疏文)을 짓게 하고 남홍원(南弘源)으로 서사(書寫)를 하게 하고 서병학(徐丙鶴)으로 먼저 상경하여 도소(都所)를 한성 남서 남소동(漢城 南署 南小洞) 최창한(崔昌漢)의 집에 정하게 하고 총지휘자로 손병희(孫秉熙) 김연국(金演局) 손천민(孫天民)을 정하였는데, 이 때 도인 수천명이 춘기과거(春期科擧)에 응시하는 유생(儒生)으로 가장하여 서울에 모여들었다. 소문(疏文)의 내용은 주로 교조의 참형과 문도들의 처벌이 억울하니만치 이것을 풀어달라는 것이었는데,[註9] 2월 11일부터 밤낮 3일에 걸쳐 도인 수천명이 광화문 앞에 업드려 일어나지 아니하고 일제히 통곡하면서 상소하였다. 13일에 칙교(勅敎)가 있어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 각각 직업에 힘쓰면 소원에 의하여 시행하리라」 하였으므로 일제히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 때 서울 시내의 미국공관과 기독교회당 및 외인주택에 빨리 행장을 차려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벽보가 나붙기도 하였다. 관리들의 동학군에 대한 탐학(貪虐)과 행패가 날로 심하므로 3월에 다시 해월신사의 지시로 충청.전라.경상.강원.경기 등 각지에서 도인 수만명이 접주(接主)들의 인솔 하에 보은장내(報恩帳內)에 모여 질서정연하게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하였는데 보은삼문(報恩三門) 밖에는 「척왜양(斥倭洋)」의 괘서(掛書)가 나붙기도 하였다. 이 때 「동학군들이 모여 난(亂)을 일으킨다」는 풍문이 있어 조정에서는 군대를 보내는 한편 어윤중(魚允中)으로 선무사(宣撫使)를 삼아 효유 해산케 하였는데, 도인들은 해월신사의 명에 의하여 4월 2,3일에 각각 집으로 돌아갔다. 수만명 도인이 동원된 이러한 신원운동(伸寃運動)은 우리나라 초유의 조직적인 평화적 대시위운동이었을 뿐 아니라 이것이 다음 해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의 전주곡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고종 31년(1894) 정월에 해월신사는 청산군(靑山郡) 문암리(文岩里)에서 강석(講席)을 열고 있었는데 호남에서 온 도인으로부터 「고부도인(古阜道人) 전봉준(全琫準)이 도중(道衆)을 이끌고 고부군(古阜郡)을 거파(擧破)한 후 장차 대거(大擧) 북상(北上)하리라」는 급고(急告)가 있었다. 이에 앞서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은 탐학무도(貪虐無道)하여 백성들을 크게 괴롭히고 있었다. 그 예를 들면

「① 황무지를 세금없이 그저 경작하여 가지라고 한 후 추수기에 가서는 세금을 강징(强徵)하였으며
② 불효 불목(不睦) 음행(淫行) 잡기(雜技) 등 허구(虛構)의 죄명을 붙여 재산을 강탈한 돈이 2만여냥에 달하였으며
③ 자기의 아버지 전태인군수(前泰仁郡守)의 기념비를 세운다고 천여냥을 강제로 징수하였으며
④ 대동미(大同米)를 정미(正米)로 수납한 후에 불량미(不良米)로 환치(換置)하여 그 차액을 횡령하였으며
⑤ 만석보(萬石洑)가 고장이 없는데도 노임(勞賃)도 주지않고, 백성을 동원하여 그 밑에 신보(新洑)를 구축하고 수세(水稅) 칠백여석을 강제로 징수하여 착복하였다.」

이러하므로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全彰赫)은 농민을 이끌고 수세감면운동(水稅減免運動)을 하다가 그에게 장사(杖死)된 일이 있었다. 전봉준은 체소(體小)하나 담력이 있어 녹두장군(綠豆將軍)이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30세에 동학에 입도(入道)하여 수도(修道)를 극진히 하는 한편 큰 뜻을 품고 사방을 주유(周遊)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여 시국(時局)을 개혁코저 하였다. 대원군과도 어떤 묵계(默契)가 있었다는 설도 있으나 전봉준공초기(全琫準供草記)에서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고부군수(古阜郡守)의 탐학(貪虐)에 격분하는 동시에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동학정신에 불타있는 전봉준은 선두에 나서 거사(擧事)하기로 결심하였다. 먼저 마항시(馬項市)에서 천여명의 민중을 이끌고 정월 10일 고부(古阜)를 습격하였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도주하고 조정에서는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安**使)로 삼아 사건을 조사케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이 난폭하여 불평에 들떠있는 민중의 심리를 더욱 자극하였다. 전봉준은 손화중(孫和中) 김개남(金開男) 등을 위시하여 동학군 만여명을 백산(白山)에 집결케 하였다. 3월 21일 전봉준은 동도대장(東徒大將)이 되고 손화중(孫和中) 김개남(金開男)은 총관령(總管領)이 되어 제포구민(除暴救民)의 격문으로 기포(起包)의 대의(大義)을 밝히고[註12] 이어 다음과 같은 행동강령 4개조를 발표하였다.

① 불살인(不殺人) 불살물(不殺物)
② 충효쌍전(忠孝雙全) 제세안민(濟世安民)
③ 축멸왜이(逐滅倭夷) 징청성도(澄淸聖道)
④ 구병입경(驅兵入京) 진멸권귀(盡滅權貴)

한편 전주감영에서는 이광양(李光陽) 등의 관군과 보부상군(褓負商軍) 수천명으로 동학군을 토멸(討滅)코저 하였으나 4월 6,7일 황토현(黃土峴)에서 동학군의 야습(夜襲)으로 여지없이 격파되고 말았다. 금구(金溝) 부안(扶安) 등은 이미 점령되었고 동학군은 계속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태인 흥덕 고창 등지를 차례로 함락시키고 4월 9일에는 무장(茂長)에 돌입하여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을 발표하였으며 다시 계속하여 영광 함평 등지로 항하였다.

「 무장동학포고문(茂長東學布告文)
인지어세(人之於世) 최귀자(最貴者) 이기인륜야(以其人倫也) 군신부자(君臣父子) 인륜지대자(人倫之大者) 군인신직(君仁臣直) 부자자효연후(父慈子孝然後) 내성가국(乃成家國) 능체무강지복(能逮無彊之福), 금아성상(今我聖上), 인효자애(仁孝慈愛), 신명성예(神明聖睿), 현량정직지신(賢良正直之臣), 익찬좌명(翼贊佐明), 즉요순지화(則堯舜之化) 문경지치(文景之治), 가지일이희의(可指日而希矣), 금지위신(今之爲臣), 불사보국(不思報國), 도절녹위(徒**祿位), 엄폐총명(掩蔽聰明), 아의도용(阿意**容), 충간지사(忠諫之士), 위지요언(謂之妖言), 정직지인(正直之人), 위지비도(謂之匪徒), 내무보국지재(內無輔國之才), 외다학민지관(外多虐民之官), 인민지심(人民之心), 일익투변(日益**變), 입무낙생지업(入無樂生之業), 출무보구지책(出無保軀之策), 학정일사(虐政日肆) , 원성상속(怨聲相屬), 군신지의(君臣之義), 부자지륜(父子之倫), 상하지분(上下之分), 수괴이무유의(隨壞而無遺矣), 관자왈사유불장(管子曰四維不張), 국내멸망(國乃滅亡), 방금지세(方今之勢), 유심어고자의(有甚於古者矣), 자공경이하(自公卿以下),이지방백수령(以至方伯守令), 불념국가지위태(不念國家之危殆), 도절비기윤가지계(徒**肥己潤家之計), 전선지문(銓選之門), 시작생화지로(視作生貨之路), 응시지장(應試之場), 거작교역지시(擧作交易之市), 허다화뢰(許多貨賂), 불납왕고(不納王庫), 반충사장(反充私藏), 국유누적지채(國有累積之債), 불념도보(不念圖報), 교사음일(驕奢淫佚), 무소외기(無所畏忌), 팔로어육(八路魚肉), 만민도탄(萬民塗炭), 수재지탐학(守宰之貪虐), 양유이야(良有以也), 내지하(奈之何), 민불궁차곤야(民不窮且困也), 민위국본(民爲國本), 본삭즉국잔(本削則國殘), 불념보국안민지책(不念輔國安民之策), 외설향제(外設鄕第), 유모독전지방(惟謀獨全之方), 도절녹위(徒**祿位), 기기리재(豈其理哉), 오도수초야유민(吾徒雖草野遺民), 식군지토(食君之土), 복군지의(服君之衣), 불가좌시국가지위망(不可坐視國家之危亡), 팔로동심(八路同心), 억조순의(億兆詢議), 금거의기(今擧義旗), 이보공보국안민(以報公輔國安民), 위사생지서(爲死生之誓), 금일지광경(今日之光景), 수속경해(雖屬驚駭), 절물공동(切勿恐動), 각안기업(各安其業), 공축승평일월(共祝昇平日月), 감목성화(感沐聖化), 천만행심(千萬幸甚)

한편 정부에서는 홍철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삼아 장위영병(壯衛營兵)과 강화군(江華軍)을 이끌고 인천을 출발하여 군산에 상륙한 후 동학군의 뒤를 쫓다가 4월 23일 장성군 월평리 황룡촌전투에서 동학군에게 대패하여 포(砲) 2문을 빼앗기고 말았다. 동학군은 다시 정읍 태인을 거쳐 4월 28일에는 호남 제일도시인 전주에 입성(入城)하였다. 이 때 다음과 같은 12조의 군령(軍令)을 발표하는 동시에 효제충신(孝悌忠信)이 사는 동리(洞里) 10리 이내에는 주둔하지 않는다는 명령을 내리니 군기(軍紀)도 자못 엄숙하였거니와 사기도 충천하였다.

① 강자애대(降者愛待) ② 곤자구제(困者救濟) ③ 탐자축지(貪者逐之) ④ 순자경복(順者敬服) ⑤ 주자물추(走者勿追) ⑥ 기자궤지(飢者饋之) ⑦ 간활식지(奸滑息之) ⑧ 빈자진휼(貧者賑恤) ⑨ 불충제지(不忠除之) ⑩ 역자효유(逆者曉諭) ⑪ 병자급약(病者給藥) ⑫ 불효살지(不孝殺之)

이 때 호남각지에서 동학군들이 일제히 기포(起包)하여 혁명운동에 나섰으니 예를 들면 고부(古阜), 정읍(井邑), 태인(泰仁), 만경(萬頃), 금구(金溝), 고창(高敞), 김제(金堤), 무안(務安), 무장(茂長), 임실(任實), 남원(南原), 순창(淳昌), 진안(鎭安), 무주(茂朱), 부안(扶安), 장흥(長興), 담양(潭陽), 창평(昌平), 익산(益山), 함열(咸悅), 장성(長城), 능주(綾州), 광주(光州), 보성(寶城), 나주(羅州), 영암(靈岩), 강진(康津), 해남(海南), 임피(臨陂), 장수(長水), 영광(靈光), 옥구(沃溝), 순천(順天), 흥양(興陽), 광양(光陽), 여산(礪山), 고산(高山), 진산(珍山), 금산(錦山), 곡성(谷城), 전주(全州), 구례(求禮) 등지로서 거의 전라도 전역에 달하였다. 한편 홍계훈(洪啓薰)은 전주 완산정(完山頂)에 포진(布陣)하여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격전을 벌이고 있었으며, 조정에서는 또한 자력으로 이를 물리칠 방법이 없어 4월 30일 서울에 주재(駐在)하는 청국(淸國) 원세개(袁世凱)에게 구원을 청하게 되었다. 원세개는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에게 연락하여 청장(淸將) 섭지초(葉志超)와 섭토성(**土成)이 1,500의 군대를 거느리고 아산만(牙山灣)에 도착하게 되었으며, 일본은 천진조약(天津條約)과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대조공사(大鳥公使)가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내주(來駐)하여 이것이 그 후 청일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전주에서는 동학군과 관군과의 사이에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다가 필경 화약(和約)이 성립되어 5월 8일 동학군은 전주에 철수하게 되었다. 이 때 전주화약(全州和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도인(道人)과 정부와의 사이에는 숙혐(宿嫌)을 탕척(蕩滌)하고 서정(庶政)을 협력할 사(事) ②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사득(査得)하여 일일엄징(一一嚴懲)할 사(事) ③ 횡폭(橫暴)한 부호배(富豪輩)는 엄징(嚴懲)할 사(事) ④ 불량한 유림(儒林)과 양반배(兩班輩)는 징습(懲習)할 사(事) ⑤ 노비문서는 소각(燒却)할 사(事) ⑥ 칠반천역(七班賤役)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두상(白丁頭上)의 평괴립(平壞笠)은 탈거(脫去)할 사(事) ⑦ 청춘과부의 개가(改嫁)를 허락할 사(事) ⑧ 무명잡세(無名雜稅)는 병물시(**勿施)할 사(事) ⑨ 관리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사(事) ⑩ 왜(倭)와 간통(奸通)하는 자는 엄징할 사(事) ⑪ 공사채(公私債)는 물론(勿論)하고 이왕(已往)의 것은 병물시(**勿施)할 사(事) ⑫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分作)할 사(事)」

이로써 각 군(郡)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집강(執綱)과 서기(書記) 성찰(省察) 집사(執事) 동몽(童蒙) 등의 직임(職任)을 두어 서정개혁(庶政改革)에 힘을 썼다. 한편 전주를 철수한 전봉준은 수천의 병력으로 금구원평(金溝院坪)에 주둔하고 김개남(金開男)은 수만의 병력으로 남원에 주둔하고 김덕명(金德明), 손화중(孫和中), 최경선(崔景善)도 각각 일방(一方)에 주둔하여 하회(下回)를 지켜 보았다. 이에 정부는 동학군과의 약속을 무시하고 탄압과 학살을 자행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군은 6월 21일 왕궁을 점령하고 국왕과 왕비를 감금상태에 두는 동시에 척족(戚族)을 타도하고 대원군을 맞아들이는 등 국정을 마음대로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격분한 전봉준은 9월 추수기를 이용하여 지금까지의 제포구민(濟暴救民)에서 척왜구국(斥倭救國)으로 방향을 바꾸어 다시 기포(起包)하게 되었다. 이 때 전봉준은 삼례(參禮)에 집결하여 10만대군을 이끌고 북상(北上)하여 공주공략에 주력하였다. 한편 해월신사(海月神師)는 승락없이 한 전봉준의 처사를 시기가 아니라고 반대하였으나 일이 이에 미치매, 9월 18일 각포두령(各包頭領)을 청산(靑山)에 소집하고 '인심이 곧 천심이라 이는 천운소치(天運所致)이니 군등(君等)은 도중(道衆)을 동원하여 사원(師寃)을 신(伸)하며 오도(吾道)의 대원(大願)을 실현하라'한 후 손병희(孫秉熙)에게 통령기(統領旗)를 주어 일제히 전선(戰線)에 나서게 하였다. 이 때 충주, 수원, 음죽, 안성, 양지, 여주, 이천, 양근, 지평, 광주, 원주, 횡성, 홍천 등 경기, 충청, 강원도 일대에서 기포(起包)한 동학군들은 먼저 괴산, 보은을 습격하고 일대(一隊)는 영동, 옥천으로부터 논산에 이르러 전봉준포(全琫準包)와 합세하고 또 다른 일대는 회덕지명시(懷德芝明市)에서 청주관군과 싸워 이기고 논산에 이르러 두 부대가 합세하여 공주전투(公州戰鬪)에 참가키로 하였다. 이 때 목천 세성산전투(細城山戰鬪)에서 동학군의 용장(勇壯) 김복용(金福用)이 관군의 선봉장 이규태(李圭泰)와 일본군에게 패하여 김복용이 참형되는 동시에 북상의 길이 막히게 되었으며 관군과 일본군은 공주전투에 증원군을 보내게 되었다. 공주전투는 동학군에 있어서 남군과 북군을 합한 총 20만명을 투입한 실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결전이었다.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한 문자 그대로의 시산혈하(屍山血河)의 전투였다. 그러나 최신무장을 한 일본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11월 11일 공주 우금치(牛金峙)전투에서 천추의 한을 머금고 패퇴한 동학군은 금구(金溝)에서 잔여부대를 수습하고 신병을 모집하여 만여명으로 대항코자 하였으나 이미 전의(戰意)를 상실하였으므로 계속 퇴각하게 되었다. 이 때 호서(湖西)에서는 박인호(朴寅浩)를 중심으로 신창, 덕산, 당진, 서산, 태안, 홍주, 은천, 안면도, 남포 등지에서 기포(起包)한 동학군들이 덕산, 예산, 신리원에서 대승하였으나 홍주의 전투에서 일본군과 초토사(招討使) 이승우(李勝宇)가 이끄는 관군에게 대패하여 사자(死者) 수만에 달하였으며 영남에서는 진주, 곤양, 하동, 남해, 단성, 사천 등지에서 기포(起包)하였다가 진주고승당산상(晋州高僧堂山上)에서 대패하여 사자(死者) 수만이었고 기타 함안, 상주, 의령, 성주, 안동 등지에서 기포(起包)한 도인들도 많은 전사자를 내었다. 해서지방에서는 은률, 풍천, 신천, 장연, 송화, 재령, 봉산, 평산, 강령, 해주 등 여러 고을을 동학군이 습격하여 군기(軍器)와 군수품을 탈취하는 동시에 탐관오리와 양반부호(兩班富豪)를 소탕하고 이듬해 2월에 다시 대거 기포(起包)하였다가 강화병(江華兵) 수천에게 강령(康翎)에서 대패(大敗)하니 이 때 황해도에서도 사자(死者) 수만에 달하였다. 한편 전봉준은 12월 2일 순창군(淳昌郡) 피노리(避老里) 흥복산중(興福山中)에서 손화중(孫和中)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이듬해 3월 29일 서울에서 「애국단침수유식(愛國丹**誰有識)」이라는 시를 남기고 41세를 일기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김개남(金開男)은 12월 3일 태인지방에서 체포되어 전주에서 효수(梟首)되었다. 또 한편 손병희(孫秉熙)는 장성노령(長城蘆嶺)까지 퇴각하였다가 다시 북상하여 임실오항리(任實烏項里)에서 해월신사를 만나 무주, 영동, 용산 등지에서 전투하면서 충주외서촌(忠州外西村)에 이르렀는데 12월 24일 혁명군은 사산(四散)되었으며 손병희는 해월신사와 함께 강원도로 몸을 피하였다.
이로써 동학농민운동은 종말을 고하였지만 당시 삼정(三政)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학정(虐政) 등은 실로 말할 수 없는 정도인데다가 동학군들은 밑층에 깔려있는 서민들로서 갖은 압박을 받아 왔으며 또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지상천국 건설이라는 동학의 기본정신에 투철하여 일거에 정부를 개혁하고 인내천(人乃天)의 자유평등의 이상을 실현코자 하다가 때가 이롭지 못하여 외세의 간섭으로 수십만의 희생을 내고 일이 실패로 돌아갔다.그러나 이 정신은 다시 갑진혁신운동(甲辰革新運動)과 기미삼일운동(己未三一運動)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해월신사와 함께 강원도로 피신한 손병희(孫秉熙), 손천민(孫天民), 김연국(金演局) 등은 홍천을 거쳐 인제에 잠시 머물렀으며 손병희는 다시 해월신사의 생계를 위하여 상업 차로 원산, 강계를 경유하여 청국변경에까지 다녀온 후 신사(神師)를 다시 원주지방에 이거(移居)케 하였다. 고종 33년 1월 5일에 신사는 손병희에게 「의암(義菴)」이라는 도호(道號)를 주고, 1월 11일에 손천민에게 「송암(松菴)」, 김연국(金演局)에게「구암(龜菴)」이라는 도호(道號)를 준 후 의(義),구(龜),송(松) 삼암(三菴)을 불러 앉히고 「하몽훈도전발은(荷蒙薰陶傳鉢恩) 수심훈도전발은(守心薰陶傳鉢恩)」이라는 법문을 쓰게 하고 '너희들 세사람이 뜻을 합하면 천하가 우리 도(道)를 흔들고자 할지라도 어찌하지 못하리라'하니 이로써 삼암(三菴)이 사문(師門)의 명교(命敎)를 받아 경통(敬通)을 발(發)하는 예가 되었다. 고종 34년 4월 5일 기념식에 신사는 「향아설위식(向我設位式)」을 행하고 이 해 12월 24일에 다시 삼암(三菴)을 불러 앉히고 '너희 3인 중에 주장(主張)이 없지 못할지니 의암(義菴)으로써 주장(主張)을 삼노라'하시고 도통(道通)을 전하시니 이로써 의암성사(義菴聖師)(천도교에서 부르는 존칭)가 제3세 교조(敎祖)가 되었으며 이 날을 「인일기념일(人日紀念日)」이라고 한다. 의암성사(義菴聖師) 손병희(孫秉熙)는 철종 12년(1861) 4월 8일 청주군(淸州郡) 대주리(大周里)(현재의 청원군(淸原郡) 북이면(北二面) 금암리(琴岩里))에서 태어났는데 기우영매(氣宇英邁)하고 의기(義氣)가 강하였다. 22세에 입도(入道)한 후로는 주문(呪文)을 1일 3만독(三萬讀)씩 하였으며 동학농민운동 때에는 동학군대통령(東學軍大統領)으로 탈투(奪鬪)하였다는 것은 이미 앞에 말한 바와 같거니와 이번에 제3세 교조(敎祖)로서 도통(道通)을 이어받게된 것이다.
그런데 고종 35년(1898) 4월 5일 해월신사는 원주송동(原州松洞)에서 송경인(宋敬仁)에게 체포되어 서울에 오게 되었다. 처음 광화문경무청(光化門警務廳)에 있다가 서소문감옥으로 옮겼다. 의암성사(義菴聖師)는 해월신사의 체포된 소식을 지체없이 각포(各包)에 전달하는 동시에 선후책을 강구하였다. 먼저 두목(頭目) 이종훈(李鍾勳)을 서울에 잠입시켜 교졸(校卒) 김준식(金俊植)과 형제의 의(誼)를 맺게한 후 약품과 금전 등을 차입케 하였다. 5월 11일에 법부대신겸평리원재판장(法部大臣兼平理院裁判長) 조병직(趙秉稷)과 수반검사(首班檢事) 윤성보(尹性普)와 법부협판겸수반판사(法部協判兼首班判事) 송석면(宋錫冕) 등의 참석으로 심문을 진행하였는데 신사(神師)의 병세 위중하므로 많이 대답하지 않고 다만 '나죽은 십년후에는 주문(呪文)소리가 장안에 진동하리라'하였다. 결국 좌도난정율(左道亂正律)로 상주(上奏)되어 6월 2일 육군법원(현 종로3가 단성사 뒤)에서 교형(絞刑)이 집행되었다. 이 때 형년(亨年)이 72세였다. 이종훈(李鍾勳)과 김준식(金俊植)은 밤중에 비를 무릅쓰고 광희문 밖 공동묘지에서 시체를 거두어 광주송파(廣州松坡) 이상하(李相夏)의 산에 장례를 지냈다가 고종 37년 문도들이 여주군(驪州郡) 금사면(金沙面) 주녹리(走鹿里) 천덕산(天德山) 중턱에 이장하여 현재 묘소는 이곳에 있다. 해월신사가 순도(殉道)한 후 손천민(孫天民)은 항상 개연(慨然)한 빛을 나타내며 '자기도 도(道)에 순(殉)하여 선사(先師)를 따르리라'하더니 고종37년에 경병(京兵)에게 체포되어 종용(從容)히 형(刑)에 나아갔으며, 또 이 해에 각지도인(各地道人)이 많이 체포되어 혹은 복역(服役)하고 혹은 피살된 자 수천에 달하였다.
고종 38년 3월에 의암성사(義菴聖師)는 세계의 정세를 살피고자 손병흠(孫秉欽), 이용구(李容九)를 데리고 원산으로부터 부산과 일본 장기(長崎)를 거쳐 대판(大阪)에 이르니 수중에 소지금(所持金)이 60원에 불과한지라 두 사람을 본국에 보내어 여비를 마련케 하였다. 이 때 폐신(嬖臣) 이창구(李昌九)가 칙령(勅令)으로 성사(聖師)를 부르려고 하므로 성사(聖師)는 일시 청국 상해에 몸을 피하였다가 다시 일본에 돌아와 이상헌(李祥憲)이라 변성명(變姓名)한 후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박영효(朴泳孝) 등 국사범(國事犯)들과 시국(時局)을 의논하였다. 이 해에 성사는 일본으로부터 일시 귀국하였다가 다음 해 3월에 학생 24명을 거느리고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교육에 힘썼으며, 국내는 서북지방에 포덕(布德)이 늘어 관리의 지목(指目)은 날로 더하여 갔다. 고종 40년 계묘(癸卯)에 성사(聖師)는 조직을 강화하기 위하여 대두령제(大頭領制)을 설립하고 십만지장(十萬之長)에 수청대령(水淸大領) 오만지장(五萬之長)에 해명대령(海明大領), 만원지장(萬員之長)에 의창대령(義昌大領)을 두게 하고 1,000명 이상에 대접주(大接主), 500명 이상에 수접주(首接主), 100명 이상에 해접주(該接主)를 두게 하여 출범하였다. 한편 러일풍운(露日風雲)이 급해짐과 아울러 한국내정(韓國內政)이 날로 혼돈함을 보고 성사(聖師) 이인숙(李仁淑)으로 하여금 의정대신(議政大臣) 윤용선(尹容善)과 법부대신(法部大臣)에게 글을 올려 시국(時局)에 선처할 일과 비정(秕政)을 혁신할 것을 통론(痛論)하였다. 1904년 2월에는 학생 40여명을 다시 동경에 불러오게 하고 또 이 때에 성사(聖師) 도중두목(道中頭目) 40여인을 급히 동경에 불러 말씀하시기를'이제 보국안민지책(輔國安民之策)이 상중하가 있으니 첫째 대거혁명(大擧革命) 폐혼입명(廢昏立明)이 그 상책(上策)이오, 둘째 악정부(惡政府)를 통소(痛掃)하고 신정부를 조직함이 그 중책(中策)이오, 세째는 일로전쟁(日露戰爭)에 간예(干預)하여 그 우승(優勝)을 점득(**得)함이 하책(下策)이니라'하였다. 본국에 돌아온 두목들은 대동회(大同會)를 조직하려다가 회명(會名)을 중립회(中立會)로 고치고 다시 성사(聖師)의 명에 의하여 회명(會名)을 진보회(進步會)라 하고 진보회의 강령을 「일왈(一曰) 황실을 존중하고 독립기초를 공고(鞏固)히 할 사(事) 이왈(二曰) 정부를 개선할 사(事) 삼왈(三曰) 군정재정(軍政財政)을 정리할 사(事) 사왈(四曰)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할 사(事)」로 된 4대 표면강령(表面綱領) 밑에 갑진(甲辰) 음력 8월 29일 백만도중(百萬道衆)을 일조(一朝)에 동원하여 경향각지(京鄕各地)에 일제 개회(開會)하고 20만이 단발흑의(斷髮黑衣)로써 정부개혁과 국정편성을 절규하는 동시에 관리의 민재탈취(民財奪取)한 자를 조사하여 반환케 하고 무명잡세를 혁파하여 총대(總代)를 정하여 비정(秕政)을 탄핵하는 등 민권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진보회의 내용이 곧 동학당임을 알게된 정부에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코저 하였다. 이 때 진보회장(進步會長) 이용구(李容九)는 독립협회의 여당(餘黨)인 윤시병(尹始炳), 윤길병(尹吉炳), 윤갑병(尹甲炳) 등이 주재하던 일진회(一進會)와 합하여 윤시병은 일진회의 본회장이 되고 이용구는 총회장이 되었다. 이 때 이용구와 송병준(宋秉畯)이 회무(會務)를 전횡(專橫)하여 도인(道人)으로 하여금 일본군사철도와 군수품 수송에 노력케 하는 등 성사(聖師)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다. 그 사이에 러일전쟁(露日戰爭)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 동양의 대세는 일본이 좌우하게 되었다. 이용구 등은 고종 42년(1905) 11월 17일에 일진회(一進會)의 이름으로 일본의 보호를 받는 일에 찬성하는 선언을 발표하였으므로 성사(聖師)는 이용구를 불러 '보호를 받고자 하면 독립을 버려야 하고 독립을 하고자 하면 보호를 버려야 하나니 어찌 보호라는 이름 아래 독립을 하고자 하느냐'하고 다시 말하지 않고 동학혼수습(東學魂收拾)과 교도의 재조직에 착수하였다. 성사(聖師)는 이 해(1905) 12월 1일에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천하에 광포(廣布)하니 [註15] 이는 경전에 「도수천도(道雖天道)나 학즉동학(學則東學)」이라는 문구에 연유된 것이다.


3.현도시대(顯道時代)
고종 42년(1905) 12월 1일에 의암성사(義菴聖師)가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선포한 후부터 여태껏 숨어서 믿던 은도시대(隱道時代)를 지나 이제는 세상에 공공연히 내놓고 믿는 현도시대(顯道時代)로 접어들면서 근대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창도(創道)된지 실로 46년만의 일이었다. 의암성사(義菴聖師)는 교명(敎名)을 선포한 후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양한묵(梁漢默)으로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편찬케 하고 교빙백만매(敎憑百萬枚)를 인쇄하여 본국에 보내고 권도문(勸道文)을 지어 각지에 배포케 하였다. 고종 43년(1906) 1월에 성사(聖師)가 일본으로부터 본국에 돌아오니 부산으로부터 서울까지 환영하는 도인(道人)이 4만여인에 달하였다. 성사(聖師)는 천도교중앙총부(天道敎中央總部)를 서울 상다동(上茶洞)에 설치하고 교기(敎旗)인 궁을기(弓乙旗)를 처음으로 게양하였다. 성사(聖師)는 대도주(大道主)의 직을 친히 행하였는데, 독립관에서 도인 5천여를 모아 「국지유교(國之有敎)가 여인지유심(如人之有心)」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다. 2월에 성미제(誠米制)와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공포하시고 도사(道師)와 육임(六任)의 원직(原職) 및 주직(住職) 등을 선정 공표하는 동시에 교서편찬원(敎書編纂員)과 보문관설치규칙(普文館設置規則)을 발표하였다. 3월에는 지방에 72대교구를 조직하고 각기교령(各其敎領)으로 교구장대리(敎區長代理)를 임명하는 한편 시일식(侍日式)에 치성(致誠)하며 식고(食告)할 때에 축원하는 격식 등을 반포하였다. 4월에는 천일기념(天日紀念)에 관한 의식절차와 보문관(普文館)에서 「만세보(萬歲報)」라는 신문을 발행키로 하고 6월 17일 제1호를 내니 사장은 오세창(吳世昌)이었다. 이 때 성사(聖師)는 이용구, 송병준에 대하여 '일진회원(一進會員) 중 세도(勢道)에 따라 수도연성(修道煉性)에 힘쓰지 않고 권력을 남용(濫用)하는 자 많으니 지방지부(地方支部)를 폐하고 서울본부만 두도록 하라'고 권하였으나 두사람은 듣지 않았다. 한편 글을 법부대신(法部大臣)에게 보내어 감옥 설교의 예를 정하게 하는 동시에 직원을 보내어 재수자(在囚者)에게 자휼금(慈恤金)을 전달케 하기도 하였다. 9월에 성사(聖師)는 천도교와 일진회를 혼잡(混雜)할 수 없어 회(會)에 관계되는 중요인물의 교직(敎職)을 해임(解任)하는 동시에 이용구, 송병준 등을 불러 '후에 일진회(一進會)를 지목하여 매국노(賣國奴)라 할 날이 있으리니 빨리 퇴회(退會)하여 수도(修道)에 힘쓰는 동시에 다시 새 기회를 얻어 따로 보국안민의 길을 강구함이 가(可)하다'하였으나 권세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두사람은 이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9월 23일 이용구 이하 두목 60여인을 출교(黜敎)하여 교(敎)와 회(會)의 분석(分析)을 단행하였다.[註16] 출교(黜敎)를 당한 이용구, 송병준 등은 따로 시천교(侍天敎)를 창립하여 일진회의 세력을 등에 업고 비방과 시기를 일삼을 뿐 아니라 동학 이래 모든 재정을 엄주동(嚴柱東)에게 맡겼던 바 엄주동이 또한 성사(聖師)를 배반하고 시천교(侍天敎)로 가니 모든 동산과 부동산이 이용구, 송병준의 수중에 들어가 성사(聖師)는 한동안 재정의 곤란을 받게 되었다. 1907년 2월에 성사(聖師)는 천도교중앙총부(天道敎中央總部)를 상다동(上茶洞)에서 대사동(大寺洞)으로 이전하였으며, 7월 11일에는 대신사(大神士)와 해월신사(海月神師)의 죄안(罪案)이 정부로부터 해제되었다.[註17] 8월 26일에 성사(聖師)는 대도주(大道主)의 직을 김연국(金演局)에게 선수(宣授)하고 이 해 11월에 중앙총부(中央總部)를 대사동(大寺洞)에서 세동(細洞)으로 이전하였으며 12월 10일에는 박인호(朴寅浩)로 차도주(次道主)를 삼았다. 1908년 1월에 대도주(大道主) 김연국(金演局)이 반(反)하여 시천교(侍天敎)에 감으로 이 달 18일에 성사(聖師) 차도주(次道主) 박인호(朴寅浩)로 대도주(大道主)의 직에 승임(陞任)케 하고 선수문(宣授文)을 발포하니 이로써 춘암상사(春菴上師)(천도교에서 부르는 존칭)박인호(朴寅浩)가 천도교(天道敎)의 제4세 대도주(大道主)가 되었으며 또 이 날을 「도일기념일(道日紀念日)」이라고 한다. 춘암상사(春菴上師)(박인호(朴寅浩))는 철종 6년(1855) 2월 1일 충청도 덕산군(德山郡) 장촌면(場村面) 막동(幕洞)에서 탄생하였는데 자는 도일(道一)이오 호는 춘암(春菴)이었다. 29세에 입도(入道)한 후로는 10년을 하루같이 의관을 풀지않고 수도(修道)에 전념하였고 계사신원운동(癸巳伸寃運動)과 동학농민운동 때에는 덕의대접주(德義大接主)로 기포(起包)하여 분투하였으며 성사(聖師)가 일본에 있을 때에는 수차 일본에 왕래하면서 성사의 지시를 받아 갑진혁신운동(甲辰革新運動) 등을 실천에 옮겼는데, 이번에 차도주(次道主)를 거쳐 제4세 대도주(大道主)가 된 것이다. 1908년 2월에 천도교중앙총부(天道敎中央總部)를 세동(細洞)에서 홍문동(弘文洞)으로 이전하였다. 3월에 성사(聖師)는 직원을 대동(帶同)하고 지방교황(地方敎況)을 시찰키 위하여 서흥, 평양, 안주, 영변, 박천, 가산, 정주, 곽산, 선천 등지에서 설교한 후 철산, 신의주를 경유하여 귀경(歸京)하였으며, 4월에 또 직원을 거느리고 전라도교세를 시찰키 위하여 인천으로부터 군산에 이르니 출영(出迎)한 자 만여인에 달하였으며 익산, 전주 등지에서 설교하니 제목은 「국지유교(國之有敎)가 여인지유심(如人之有心)」이었다. 6월에 교리강습소(敎理講習所)를 서울에 설치하고 교중자제(敎中子弟)를 모집하여 교(敎)의 진리를 가르치니 이로부터 지방 각군에 교리강습소가 일어나 전국에 8백여개소나 되었다. 10월에 서울 남대문밖 영수산(靈壽山)에서 갑자(甲子) 이래 순도교인(殉道敎人)의 위령식을 거행하니 순도자(殉道者) 수십만에 달하였다. 11월에 성사(聖師)는 교회의 면목을 쇄신하기 위하여 총부(總部)와 교구(敎區)의 총회의결을 거쳐 천주연비(薦主聯臂)라는 구시제도(舊時制度)를 폐하고 사사상수(師師相授)하는 길을 열어 각각 지의상합(志義相合)하는 사람으로 일단(一團)을 이루되 구시종유(舊時從遊)를 물론하고 다만 자심자유(自心自由)로 연원(淵源)을 정하게 하였다. 이 해에 의병의 출몰로 교인들이 일진회원(一進會員)으로 오인되어 피해가 많았는데 특히 서북지방이 더욱 심하였다. 1909년 1월에 중앙총부에서는 연원직(淵源職)을 1,500호(戶)에 도훈(道訓), 300호(戶)에 교훈(敎訓), 30호(戶)에 봉훈(奉訓)으로 정하고 서울에 사범강습소(師範講習所)를 설치하는 한편 부인전교사(婦人傳敎師)와 부인순회교사(婦人巡回敎師)를 지방마다 두어 여성의 포덕교화(布德敎化)에 힘썼다. 10월에는 종문사과(宗門四科)인 성경신법(誠敬信法)의 실행방법을 반포하고 11월에는 천도교명선포일(天道敎名宣布日)인 12월 1일을 「교일기념일(敎日紀念日)」(지금은 현도기념일(顯道紀念日))이라 하여 다른 기념일과 함께 의식을 성대히 거행키로 하였으며, 또 이 해에 재정난에 빠져있는 동덕여학교(同德女學校)에 매달 보조금을 지급하여 여자교육을 보급케 하였다. 이 해 12월 4일에 일진회에서 「한일양국은 합병(合倂)되어야 한다.」는 매국적(賣國的)인 청원서(請願書)를 제출하였으므로 성사(聖師)는 12월 9일과 10일 대한매일신보에「광제창생(廣濟蒼生)」이라는 제하(題下)의 기사를 발표하여 이를 통렬히 배격하였다. 12월 하순에 성사(聖師)는 직원을 대동하고 양산통도사 내원암(梁山通度寺 內院菴)에 가니 이곳은 일찌기 대신사(大神師)가 2회나 49일 기도를 하던 곳이라 성사(聖師) 또한 49일 기도를 마치고 다음 해 2월에 대신사가 직접 우거(寓居)하면서 공부하던 적멸굴(寂滅窟) 앞에 서니 문득 정신이 황홀하여 무아(無我)의 경(境)에 우유(優遊)하더니 「석시차지견(昔時此地見) 금일우간간(今日又看看)」이라는 항시(降詩) 있는지라 이는 성사(聖師)로서 적멸굴(寂滅窟)을 보는 것이 아니오 대신사(大神師)로서 다시 적멸굴(寂滅窟)을 본다는 뜻이니 이는 곧 대신사의 심법(心法)이 법신(法身)으로 화하여 의암성사(義菴聖師)에게 출현되었음을 의미한 것이다. 성사(聖師)는 이어 「성령출세설(性靈出世說)」을 발표하고 또 이곳에서 「무체법경(無體法經)」을 지었다. 융희 4년(1910) 이 해는 일본의 강압으로 경술합병(庚戌合倂)이 이루어지는 해였다. 성사(聖師)는 교인들에게 49일 기도를 지시하여 신앙심을 굳건히 하는 한편 보서관(普書**)을 천도교중앙총부에서 관할키로 하고 시일성화회(侍日聖化會) 후에는 국한문(國漢文)을 교수케 하며 교정쌍행(敎政雙行)에 관한 부제(部制)를 개정 공포하는 동시에 총부직원(總部職員)과 강습생들에게 신념을 강조하며 성령질병(性靈疾病)과 육신질병(肉身疾病)을 아울러 퇴치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또 문도(門徒)에게 '국가와 교회를 위하여 비상한 결심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천도교로 천부(天賦)의 성품을 삼고 천도교(天道敎)로 천권행사(天權行使)의 목적을 삼으라. 또 모든 일은 나라가 있은 후에라야 필요한 것이니 아무쪼록 자손에게 바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좋은 말을 많이 들려주도록 하라'는 등 애국심과 애교심(愛敎心)을 강조하였다. 7월에는 현기사(玄機司) 내에 월보과(月報課)를 두어 월간잡지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를 간행키로 하고 8월 15일에 창간호를 내었는데 이것이 통권(通券) 제299호에 이르도록 교회기관지로서 큰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잡지계에 있어 상당히 장기간 간행된 출판물의 일종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큰 것이었다. 8월 29일 성사(聖師)는 한일합병의 소식을 듣고 식사를 마다한 후 「석조재명(昔鳥再鳴) 대신사출세지시(大神師出世之時)」라는 항시(降詩)를 부르고 '내 10년 안에 반드시 우리나라 독립의 기초를 완성하리라'고 마음속 깊이 다짐하였다. 12월에 경영난에 빠져있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와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 및 보성소학교(普成小學校) 등을 천도교회에서 인수 경영케 되었으니 이는 성사(聖師)가 일본에 있을 때 유학생 60여명을 양성한 것이라든지 또 귀국 후에 사범강습소(師範講習所)와 교리강습소(敎理講習所)의 설치 및 동덕여학교(同德女學校)의 관계 등 후진 양성에 적극 힘을 쏟았던 것이다. 이 때 보성사인쇄소(普成社印刷所)를 설치하여 출판사업을 교회에서 경영하였으며, 중부(中部) 대사동(大寺洞)에 있는 사범강습소는 보성중학에 합병하고 그곳에 동덕여학교를 이전하는 한편 관훈동 소재 대지 205평과 건물 32칸(間)을 동덕여학교에 기부하고 매월 보조금을 많이 증액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 때 천도교에서 관계하던 학교가 적지 않았으니 예를 들면 용산의 양영학교(養英學校)와 양덕여학교(養德女學校), 마포의 보창학교(普昌學校), 청파동의 문창학교(文昌學校), 전주의 창동학교(昌東學校), 대구의 교남학교(嶠南學校)와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청주의 종학학교(宗學學校) 등을 직접 관리운영하며 보조금을 주는 등 교육사업에 크게 힘썼다. 이 해에 신포덕(新布德)이 2만 7천여호에 달하였으며 포덕공로자 표창이 2천 2백여명, 교도총수(敎徒總數)가 3백만여에 달하고 신설된 교구(敎區)도 적지않아 집집마다 주문소리가 들리고 마을마다 궁을기(弓乙旗)가 나부낀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느 때보다도 교세가 크게 발전하였던 것이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동학농민운동은 반외세, 반봉건의 성격을 가지고 있구요.
지방 수령들의 수탈이 너무 심해서 고부민란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12개조 폐정개혁안이 있는데요.
1.동학도는 정부와 원한을 씻어 버리고 모든 행정에 협력할 것
2.탐고나 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엄징할 것.
3.횡포한 부호들을 엄징할 것.
4.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못된 버릇을 징벌할 것.
5.노비 문서는 불태워 버릴 것.
6.칠반 천인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은 벗겨 버릴 것.
7.청춘 과부의 재가를 허락할 것.
8.무명잡세는 일체 거두어들이지 말 것.
9.관리의 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왜적과 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돌릴 것.
12.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

대충 보면 여성의 지위를 높이려는 개혁안이 있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길 원하고 농민들이 가장 바랬던 토지분배가 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으로 근대화가 촉진되고 반외세정신은 항일의병운동을 계승했습니다.
늦었더라도 한 번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하네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이건가..?

일본 등 외세에 의해 나라가 혼란스러워 지자 사회, 경제적인 목적으로 외세의 배척과
사회 개혁을 주장하였다.

동학 농민군은 12개조의 개혁안을 주장하고,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치안을 바로잡고 개혁안을 추진하였다.
그후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여 전봉준이 순창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자,
동학 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대충 이정도,,/

지성

농민 운동이 개혁 하고자한 내용(내공20)

동학 농민 운동이 개혁 하고자한 내용 내공20있습니다 5월27일 목요일 11시 까지 입니다... (戰死) 위국충신(爲國忠臣)이었으며, 부친 최옥(崔**)은 호를 근암(近菴)이라 하였는데...

동학농민운동개혁내용

동학농민운동개혁내용 좀 빨리 써 주세요 20분 안으로 빨리좀 ... ㅜㅜㅜ 내공 겁니다!!! 빨리 해 주세요 동학농민운동 원인 탐관오리의 횡포 : 전라도 고부 군수의 횡포 때문에...

요구한 개혁내용,운동의 결과와 의의좀.

... 요구한 개혁 내용, 동학농민 운동의 결과와 의의를... 중심으로 북접세력을 설득하여 연합전선을 펴게 하는... 실현하고자 했음 경제적- 조세 수취제도의 개선 등을 통해...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 내공 쏩니다!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의 원윈 과정 결과 의의 이해가쉽게 자세히 갈켜주세요. ppt만들어야해서.. 내공100 동학운동... 내용 동학 농민 운동은 1894년 3월 전봉준을 중심으로 ...

동학농민운동개혁내용!!!!!!! (빨리)

동학 농민 운동개혁내용 쫌 가르쳐주세요... 최대한 간추려서 한3~4.5줄 정도?? 참고 6학년이요~~ 내공 팍팍 드릴께요!!!! 부탁입니다 제발요 동학농민운동 원인 · 탐관오리의...

갑신정변,동학농민운동,갑오개혁 내용...

... 이런식으로 써주시면 좋겠네요.내공 20걸어요. 1.병인양요... 일본은 동학농민운동때 침략의 발판을 만든셈이다. 갑신정변이 막을 내린이유는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민중이...

갑오개혁&동학농민운동에 대하여...

... 제가 1~2주 뒤에 사회 발표를 하는데요,, 제가 해야 될... 갑오개혁의 주요내용 내공 걸겠습니다.^^ 제발 부탁드려요 갑오개혁동학농민운동을 자세하면서도 간추려서...

갑오개혁,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동학농민운동 ,강화도조약에 대한 의미 , 그 내용 , 결과좀 적어주세요 ㅜㅜ......급해요!! 가르쳐주시는분꼐 내공 드릴게요 ......... 급해요 .. <임진왜란과 이순신...

조약,갑신정변,동학농민운동,갑오개혁)

... 인물과 개혁안의 내용을 정리하기.. 3.동학농민운동이... 개혁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기 내공 30겁니다 간추려주세여~ 1.강화도 조약이 맺어지기까지의 과정과 불평등 ...

(발생원인, 개혁 하고자 하는 내용...

... 바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결국, 동학농민전쟁은... 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는 성과를 가져왔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겠습니다. 휴~ 저도 얼마 후면 동학농민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