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역사과학관에 대해서 좀 가르쳐주세요.

신라역사과학관에 대해서 좀 가르쳐주세요.

작성일 2006.10.11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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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역사과학관에 대해서 좀가르쳐주세요

(내일안까지)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신라역사과학관

 

 

 

경주민속공예촌에 위치한 신라역사과학관은 신라인의 위대한 문화유산과 과학정신을 되살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민족과학의 뿌리를 알리고 심어주고자 만든 교육현장이다. 과학관 내에는 석굴암 석굴의 신비를 밝히는 모형과 단면 모형을 제작, 전시하여 석굴암의 과학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경주 첨성대를 통해 관측한 천문도, 서라벌의 옛 모습을 재현하는 왕경도가 제작, 전시되어 있다.

 

위치를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경주 보문단지에서 불국사가는 보불로 중간(하동)

경주민속공예촌안에 있습니다.



신라역사과학관의 설립과 현황

과거의 역사문화 속에는 과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오늘의 문화도 있는 것이며 내일을 살아나갈 미래의 문화도
함께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오늘을 사는데만 너무나 급급해 왔습니다.
따라서 서구의 선진과학 기술만이 우리가 살길이라고 지나치게 집착한 것도 어쩔수 없는
개발도상국의 숙명으로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선조들이 이룩해 놓은 과학문화재 속에도 그 시대의 하이테크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닌데 그것을 캐내어 갈고 닦는 일에는 너무나 무관심 했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멸시하고
천대하지는 않았는가 돌이켜 보면 부끄럽고 어두운 우리들의 눈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하이테크 문화라고 여기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묵은 것이 되고 묵은 것은 또 골동품이 되어 어차피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현실에만 매달려 살아왔으니 말입니다.
오늘의 한국 과학문화라는 나무가 내일에는 더 큰 나무가 되고 세계 속에서 특수성을 가진
울창한 가지와 잎으로 뻗어나기 위해선 과거의 역사과학문화란 토양의 영양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통감한 설립자는 어느날 스스로에게 "자, 이때다. 아직도 전통과학기술사 박물관 하나 없는 황량한 이 땅에 나무를 심자. 1988년은 올림픽이 열린다. 세계인이 몰려 온다.
전통과학관을 개인이라도 만들자. 그리고 경주는 청소년들의 수학여행지가 아닌가. 청소년은 자라서 곧 어른이 되며 그들이 이 시대를 창조하는 주인공이 아닌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문헌에는 있어도 없어진 과학문화재는 얼마나 많은가. 유물의 일부만 남아 있는 과학문화재라도 복원하여 그 제작원리를 탐구하자. 바로 이것이 이 시대에 내가 할 일이다. 경주를 찾아 오는 수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민족 과학의 뿌리를 알리고 심어주는 교육현장을 만들자. 역사과학관을 만들자.
우선 저 유리창 안에 갇혀 있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석굴암을 역사의 현장으로 끌어내자.
모형으로라도 그 구조와 미의 원류를 낱낱이 분석하고 실험해 과학적 보존방법을 보여주어야 한다. 내가 지금까지 벌어들인 재산을 모조리 팔아서라도 꼭 이룩해 보리라."
하는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몇몇일의 밤잠을 설치며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결심은 쉽게 변하지 않았고 설립자의 가슴에는 사명감으로 굳어지고 있었습니다.
2년후 올림픽은 열리고 건축된 신라역사과학관의 지하 공간에는 마침내 "석굴암 무엇이 문제인가. 모형으로 재조명 한다"라는 주제를 붙여 학계의 논쟁점을 축소모형 8기(1/10 7기, 1/5 1기)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실험과 관찰이라는 실험고고학의 방법을 선택한 이 전시는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운 충격으로 감동 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 전시를 관람한 몇몇 과학사학자들은 스스로 다음 전시를 위한 주제에 동참하시어 적극적으로 도와 주셔서 오늘의 신라역사과학관이 더욱 발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복원되어야 될 과학 문화재는 너무나 많으며 전시장도 증축 확장되어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1988년 한 개인의 소유물로 출발한 신라역사과학관은 이제 우리 공동의 것이
되었으며 드디어 전국민의 관심있는 교육현장으로 자리잡은 명소가 되었습니다.

답변이 없길래 올렸어요 ^^

이용해주세요 !!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소풍이에요?????????????

우리도 2008년 4월 21소풍인데..

머 특별히 할 이야기는 없어도 이거는..

 

 

신라역사과학관  1~6전시관의 유물 및 내용

 

1전시관

 

▒ 첨성대

1. 첨성대는 무엇이며 어떤 일을 하던 곳인가
국보 (國寶) : 31호
소재 (所在) : 경주시 인왕동(慶州市 仁旺洞) 839의 1
옛날에는 경주부남(慶州府南) 월남리(月南里) 계림 북방(鷄林 北方)
약 150m, 내물왕릉(奈勿王陵) 북동방(北東方) 약 300m 근방, 俗名 비두골
연대 (年代) : 신라(新羅) 제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6)

1) 첨성대의 기능 (瞻星臺의 機能) 첨성대에 대하여서는 규표(圭表)의 일종이니, 천문사상(天文思想)과 지식을 상징(象徵) 하는 기념비적(記念碑的)건물이니, 불교(佛敎)의 영향을 받은 종교적(宗敎的)인 제단(祭壇) 이니, 도시계획(都市計劃)의 기준점적(基準點的) 축조물(築造物)이니, 실로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 구조로 보아서 또 고대 천문학(古代 天文學)이 오늘과 달랐다는 점으로 보아 서 이는 더 소박(素朴)한 천문관측대(天文觀測臺) 였을 것이 틀림없다.

즉 첨성대 외부 지상으로부터 중앙 개구부까지 사다리를 따라 올라가서 내부(內部)로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2단에 걸친 정(井)자형 장대석(長大石)을 의지한 2개의 사다리를 통하여 상부 정자형 두부(上部 井字形 頭部)에 올라간다.

그 다음에 상단의 서반부(西半部)에 걸친 개폐식판(開閉式板)을 딛고서 하부와 차단한 다음에 충분히 넓은 공간에서 국가의 길흉(吉凶)을 점치는 천문관측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첨성대의 그 뛰어난 조형미(造型美)와 그 견고(堅固)한 축조기술은 모든 사람이 찬탄(讚 嘆)하는 바이며 고대 천문대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것의 하나이다. 

선덕여왕상(善德女王像)

신라 제27대 왕. 재위 632-647년. 성은 김(金), 이름은 덕만(德曼), 호는 성조황고(聖 組皇姑), 진평왕의 맏딸,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김씨. 진평왕이 후사없이 죽자 화백 회의(和白會議)에서 그를 왕위에 추대하였다. 634년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 635년 당제(唐帝)로부터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柱國 樂浪郡公 新羅王)에 책봉되었다. 638년 칠중성(七重城)에 침입한 고구려군을 물리쳤으나 642년 백제에게 40여성을 빼앗기고, 이어서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자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했으나 실패, 이듬해 다시 당나라에 구원을 호소했다.

644년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백제에게 빼앗긴 7성을 회복했으나, 이듬해 당 태종 (太宗)의 고구려 원정을 돕다가 서편 7성을 백제에게 빼앗겼다. 647년 비담(毗曇)·염종 (廉宗)등의 모반을 진압하고 이어 죽었다. 유언에 의해 낭산(浪山)에 장사 지냈다. 생전에 김유신(金庾信)·김춘추(金春秋)·알천(閼川)등의 보필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특히 첨성대 (瞻星臺)·황룡사(皇龍寺) 9층탑 등을 건립하고, 자장법사(慈藏法사)를 당나라에 보내어 불법을 들여왔다. 그 밖에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선덕여왕 지기삼사(善德女王 知幾三事) 설화와 지귀설화(志鬼說話)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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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급보상식(四級補償式) 물시계(浮箭漏)의 복원(復元)

1.물시계의 원리
4급보상식 부전누란 4단 위에 각각 놓여진 4개의 흐르는 물통(漏壺)에서 부표(浮漂)에 꽂힌 잣대(浮箭)로 수위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얼마나 변화하는가를 잣대의 백각(百刻) 눈금을 통하여 알게하는 장치이다. 이 때 전호(箭壺=水海)의 수위가 올라가는 양 만큼 누호의 수위는 내려간다. 누호의 수위가 점점 더 내려가면 수압은 점점 더 약해진다. 따라서 출수량도 감소하고 전호의 수위도 그 양에 비례하여 늦게 올라가 시간은 늦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기게장치를 할 수 없었던 신라시대에는 사람이 직접 되박을 이용하여 물을 누호에 공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2.물시계의 역사

중국 한(漢)대에 하나(1급보상식)의 누호와 부전에서 출발한 물시계는 그후 둘(2급보상식), 셋(3급보상식), 넷(4급보상식)으로 그 재료의 종류도 도제에서 동제로 또 목칠제로 다양하게 개량되어 왔다는 기록이 있다. ( 同旭 의 「中國漏刻」참조 ) 한국의 문헌에서는 물시계에 관한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8권에 신라 성덕왕 17년(718)에 처음 나타나지만( 夏六月 始造漏刻) 동 제9권에는 경덕왕 8년(749)에 천문박사 1인, 누각박사 6인을 두었다고만(三月 置天文 博士一員 漏刻博士六員) 기록되어 있을 뿐 누각의 형태나 종류 조차도 알수 없고 누각의 제원, 기능, 구조등에 대해서도 일체 기록된 것이 없다. 아마도 이 기록은 그 이전의 물시계를 개량하여 3급보상식 누전 이상으로하고 누각박사도 보충하여 누각전에서 관리하게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전상운의 「한국과학기술사」참조) 그 이유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으리라고 믿어지는 천지(天智)10년(671)에 물시계가 제작되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물시계의 제작

국립충북대학교 천문우주학과 정장해교수는 중국 당나라 여재(呂材)의 4급보상식 부전누(627∼649)를 연구(위에서부터 夜天池→日天池→平壺→萬分壺→水海)의 근거로하여 신라의 물시계 설계도를 만들고 동과의 이용삼교수는 하루를 12등분한 십이간지(十二干支)의 시진(時辰)과 이를 100등분한 백각눈금표, 그리고 4계절 24절기에 따라 밤의 길이가 변화하는 오경(五更) 25점(点)의 눈금과 위치를 설정한 도표를 주었다. 이에 신라역사과학관 연구팀은 작업도면에 따라 4개의 목칠제 물통과 11개의 나무로 만든 잣대에 눈금을 새겨 넣을 수 있었다. 특히 잣대의 밑 부분이 동판으로 만든 거북모양의 부표 중심 등허리에 정확히 꽂혀 있을 뿐만아니라 교환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기능장치를 해 두었다. 그래야만 전호로 입수되는 수량(水量)에 비례하여 부표는 스스로 떠 오를 수 있다. 떠 오른 눈금의 표기는 부전의 뚜껑 위에 서있는 동자상(童子像)의 양손이 가르키는 횡면을 기준으로 읽을 수 있게 하였다.

4.종소리로 물시계의 시간을 알림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역사 시대로 진입하면서 물시계로 측정된 시간을 알리는 방법으로 종과 북 그리고 징 등을 이용하였다. 물시계가 사용되던 신라 당시에는 무엇으로 얼마만큼의 거리를 한계로 시간을 알렸는가에 관한 문헌기록은 물론 없다. 그러나 동시대의 일본 아스카자료관의 물시계복원도는 우리에게 종을 선택하는데 시사하는 바가 컸다. 신라역사과학관 연구팀은 우선 첨성대가 만들어졌을 즈음에는 물시계도 그 앞에 있었으리라 상정하고, 사방 2km정도의 동심원을 그려보니 궁궐이 있었던 월성의 동서 끝과 주작대로의 북쪽 끝까지가 한계점으로 잡혔다. 지상 5m정도의 높이로 종각을 세우고 종을 친다면 대략 직경90cm,높이 167cm의 상원사 동종 크기로 이 지점까지는 무난하게 종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하고 비정(比定)하게 되었다.(상원사 동종 725년 제작) 또한 물시계가 사용되던 그 시대의 양식을 갖춘 종은 현재 경주 근방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오대산에 있는 상원사 동종을 실물 크기로 복원하여 여기에 달게 하였을 뿐이니 오해 없기를 바란다. 

8C 중엽 (통일 신라 초기) 경주의 모습

新羅王京圖를그리면서

1 경주는 신라 千年의 歷史 도시다   

한 나라가 천년동안 한 번도 수도를 옮기지 않고 국가를 통치해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은 도읍의 입지 조건에 적합한 자연조건과 도시를 수도적 기능에 맞도록 오랜 세월을 두고 합리적으로 구축해 왔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보고있는 천년전 王都는 고분, 몇기의 탑, 절터, 그리고 산야에 흩어져 있는 불상 그것이 마치 신라문화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걸어다니고 있는 이 길이 천년전 신라 王城의 그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득한 고대 도읍의 찬란했던 모습을 그려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행히 경주는 천년동안 지켜왔던 왕도의 遺址와 문화유산이 지금까지 비교적 잘 전해지고 있어 그 규모나 도시의 패턴을 짐작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능묘의 분포, 사찰과 탑, 불상 등의 석조물 그리고 “井”자 형의 도로 구조는 그 좋은 예가 되며, 더우기 근래 발견된 왕경지역의 建物遺址 조사는 당시의 도시계획을 연구 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필자는 역사가도 고고학자도 아니다. 다만 40년 넘게 이곳에 살면서 어릴 때 뛰어 놀던 산천과 洞里, 그 속에서 느껴온 역사의 향기와 여러 사학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신라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감명깊게 가슴속에 지녀 온 작은 화가일 뿐이다. 필자의 이런능력을 잘 알면서 어느날 신라역사과학관 석우일兄께서 나를 불쑥 찾아왔다. 그 때가 1991년 11월이었고 건강도 별로 좋지 않을 때였다. 김 동현박사(문화재연구소장)의 설계로 그렸다는 신라왕경조감도의 흐릿한 사진 한 장과 왕경에 관한 자료 몇 권을 가지고 왔다. 兄은 무조건 동양화 기법으로 연구하여 사명감을 가지고 그려보라는 말과 함께 그 크기는 가로 6m, 높이 2m 50㎝정도로 하자고만 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무척 당황했으며 그날 이후 무거운 짐을 지고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곧이어 12월, 겨울이 오는 바람 센 어느 날 남산의 해목령 바위에 올라 그 옛날 경주를 생각하며 몇 년이 걸려도 한번 그려 보리라고 결심하였다.

  · ‘寺寺星張 塔塔雁行’《三國遺事》 第三卷, 興法第三

· ‘第四十九 憲康大王之代 自京師至於海內 北屋連牆 無一草屋 笙歌不絶道路’《三國遺事》 弟二卷 處容郞 望海寺

·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覆屋以瓦 不以茅 吹飯以炭不以薪 有是耶’《三國史記》卷十一, 憲康王 六年

절과 절이 별처럼 벌여있고 탑들은 기러기떼인 양 줄지어 있으며 서울에서 지방(海內·京畿지역)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은 연이어졌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으며 거리에는 음악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성중의 공해를 염려하여 숯을 연료로 사용토록 할 정도로 대궐과 사찰, 관아, 민옥들이 즐비한 거대하고 화려했던 불교도시였음을 古典은 잘 전해주고 있다.

우리는 세계적인 역사 문화도시에 살고 있다. 중국의 長安城, 일본에는 平城京이 있어 자기네 나라가 고대 문명국이었음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에겐 경주가 있다. 일본의 고대 문화가 우리에게서 전해진 것이 분명히 밝혀진 지금, 경주는 그들보다 훨씬 앞선 문화의 王京을 구축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것을 긍지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에겐 오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역사의 유산을 지하에 간직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제 조금씩 그 베일을 벗으면서 어렴풋이나마 당시의 王都를 좀더 가까이 상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신라왕도의 시가지는 당나라 장안(長安)의 제도를 채용해서 완성되었으며, 당시의 도시계획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주평야를 종횡으로 달리는 도로망에 그여운을 남기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도의 시가지는 자비왕(慈悲王) 22년(469)에 비로서 방리명(坊里名)이 정해졌으며, 소지왕(昭知王) 12년(490)에는 처음으로 왕경(王京)내에 시장이 개설되었고 그로부터 20년 후인 지증왕(智證王) 10년(509)에 동시(東市)가 설치됨으로써 양시(兩市)의 제도가 완비되었다. 즉 6세기 초인 지증왕대에는 이미 왕도의 도시계획이 상당히 구체화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국력의 비약적인 발전에 따라 실시를 보게된 이러한 왕도의 도시정비작업은 그 대상 지역내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돼 온 고분군의 무제한적인 팽창을 그 이상 방임할 수는  없었다고 짐작된다.  신라왕도의 도시계획이 진전을 보게된 지증왕대를 거쳐서 다음에 왕위를 계승한 법흥왕(法興王, 514∼540)이 승하한 이후로는, 왕의 능묘는 평야를 떠나 산지에 조영(造營)된 사실을 우리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여 밝힐 수 있는 것이다. 신라 평지 고분군, 적석목곽분들의 종말기는 종래 생각해 온 바와는 달리 좀 더 일찌기 맞이하게 되었던 것 같다. (윤무병《역사도시경주》)   

경주는 지리적으로 동쪽이 높은 선상지로서 서남쪽은 물이 풍부하여 농경생활에 적합한 주거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한석기, 경주전문대) 실제로 작년 말까지 발굴 조사된 재매정지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수습되었다는 사실로서도 월성의 서편지역 일대는 이미 삼한시대 이전부터의 중요한 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시조 박혁거세의 陵址가 月城의 서남쪽 蘿井이라는 점과 인근의 창림사 부근을 초기 금성의 영역으로 보는 설이 있어 이 일대를 六村의 하나인 돌산 고허촌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따라서 불교유입의 초기 興法時代의 사원이 대략 월성 서편에서 서천을 따라 건립된 점은 도시의 발전이 월성 서쪽에서 월성 동쪽내지 북쪽 그리고 현 시가지 중심지역으로 확장계획이 이루어졌으리라는 설에 맞추어 왕도의 남북축을 설정, 그 규모를 상정하였다. (圖 1 참조)  이미 일제시대에 일부 발굴이 되었고 작년 말까지 어느 정도 건물지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는 속칭 성동동 전랑지의 遺址와 첨성대 남편 지역에서의 건물지의 구조, 배치양식이 남북 長廊의 특징적 패턴임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예를 김 병모씨는 신라의 왕경구도가 남북대로를 중심축으로하여 계획된 址割의 증거라고 보았으며, 건물은 궁궐, 신전, 관아 등 규모가 큰 것일수록 방향과 배치 양식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  신라왕도의 도성계획이 월성을 중심으로 한 남북대로의 축을 설정하게 되는 중요한 자연조건은 동쪽의 낭산과 명활산, 서쪽의 능묘지대와 서천 및 선도산의 위치가 될 것이다.  이것은 도로와 사찰의 분포에서도 잘 반영되고 있다.   

신라의 왕경은 대체로 하나의 소국인 사로국 영역을 토대로하여 편제된 신라의 수도이다.  그런데 이같은 왕경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그 하나는 사로국 형성시에 생겨났던 왕실세력의 거주지들을 포함한 정치 중심구역이 점차 확대되어 하나의 도시로 발전하였던 왕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왕도는 長이 3,075步이고 廣이 3,018步 였다고 한다.  한편 왕경지역에서의 왕도를 제외한 지역은 대체로 王畿라고 불렀다고 여겨지며, 이 지역은 사로 육촌을 모체로 하여 6部가 편제 되었다고 본다.  이는 곧 통일이후의 백제, 고구려에서 투항해 온 일부 귀족계급의 주거 지역이 되기도 하였다.    

이미 설명한 지역구분에서와 같이 왕도에는 3궁을 비롯한 궁성들, 행정관청, 동시전, 서시전과 같은시장, 사찰과 능묘 그 속에서 왕도인들은 같이 살면서, 왕을 배출하던 성골집단은 왕궁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왕도는 古典의 기록에서와 같이 인구가 밀집되고 가가호호가 연이어진 복잡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 “屋舍條의 禁令”에서와 같이 眞骨은 24尺을 넘을 수 없고 六頭品은 21척, 五頭品은 18尺, 四頭品에서 평인까지는 15尺 이상 집의 길이를 넘을 수 없도록 규제한 조항에서도 잘 반영되고 있다.    

왕기지역의 범위에 대하여는 대체로 왕경변방의 城을 기준으로 상정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毛火郡에 關門을 세웠다(772년)는 기록이 있는데 모화촌은 경주 東南境에 있으며 관문성의 주위는 6,792보 였다고 한다. 〈박 방용 논문〉 관문성은 동의 신대리성과 이어져 신라왕경의 동남방을 지키는 중요한 성이었다고 보여지며, 감포의 팔조산성, 포항입구의 북형산성, 서쪽의 부산성은 왕경을 수호하는 지역의 경계라고 보아야 하겠다. (圖 1 참조)  이는 곧 중국의 장안성, 일본의 평성경이 羅城인데 비하여 신라왕경은 주위의 여러곳을 城郭城으로 구축하게 되는 특수성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아직도 1,300여년 전에 만들어진 그 길 위를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상 도로가 새로 넓혀지고 택지가 조성되면서 예날의 자취가 훼손된 것은 근래 몇 십년 동안에 이뤄진 것일뿐 일제때 만들어진 지도에서 보듯 경주는 천년이 넘게 잘 보존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선조들이 지혜롭게 이루어 놓은 이 땅에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고도의 문화유산을 파엎어 놓아 위대했던 문명도시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경주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 연연해서는 안된다.  보이는 유산은 잘 보호되어야 하지만 보이지 않는 더 큰 것은 지금부터라도 정확히 규명되도록 철저히 연구되어야 한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더욱 큰 상상의 즐거움과 역사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고도 볼 수 있다.    

경주는 우리 민족의 문화가 시작되어 그 원형을 이루어 놓은 곳이다.  이 곳을 찾는 이들은 아득한 우리 역사 문화의 향수를 만끽하면서 쉬러 오는 곳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지니고 있는 역사의 古都, 문화유산의 실체를 감명깊게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하여 먼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 가게 할 수 있는 감동이어야말로 진정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양식이 될 것이다.  “경주는 개발하지 않는 개발이 가장 현명한 개발이다” 라고 말한 어느 고고학자의 말을 되새긴다.  역사에 대해선 별로 지식도 없는 필자가 감히 여러 사료를 들먹이면서 나름대로의 추정을 한데 대해선 무척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王京圖는 일종의 illustration(예증을 위한 그림)으로서 자료를 평면도형으로 제시하는 성격의 그림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다.  더 많은 발굴 자료와 역사가의 논문이 나와서 제 2, 3의 정확성을 기하는 왕경도가 나와 주기를 바라며, 혹 자료의 이용이나 추정이 어긋난 점은 꾸짖고 바로 잡아주기 바란다.   

 

2전시관

 

※석굴암의 개요:

석굴암은 우리나라 국보 제 24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해발565m 소재

창건 연대는 8세기 중엽인 경덕왕10년(A.D751)에 당시신라의 시중(재상)이던 김대성에 의해 창건이 되어진다. 이러한 석굴암의 창건배경은 여러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으나 삼국유사(일연)의 기록을 보게 되면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창건을 하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는 기록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석굴암이 근세에 들어 처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된 것은 1907년 일본인 우체부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세계적 문화유산인 석굴암의 수난이 시작이 되기 시작한다.당시 석굴암이 많이 회손되어 있던 관계로 19013년부터 1962년에 이르는 오랜 시간동안 석굴암의 중수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석굴암이 지금의 많은 문제점들을 가져 오게 된다.

지금부터 그러한 석굴암의 문제점들을 하나씩 살펴 보기로 한다.

1. 1913년경의 일본인들에 의한 수리공사: 당시 수리공사를 하던 일본인들은 석굴암을 이루고 있던 석재들을 완전해체를 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많은 오류들을 남기게 된다. 이중 가장 큰 오류로 여겨지는 것이 돔외부를 보강하고 있는 콘크리트에 있다. 이로써 궁륭 내부의 고온다습한 공기의 흐름을 차단하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지금의 이슬맺힘 현상(결로현상)을 유발시켰다.

2. 1917년,1924년경의 수리공사 : 이같은 결로현상으로 인해 내부벽면에 많은 청태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를 제거할 목적으로 증기세척을 가하게 된다. 이는 내부 석재의 수명에 치명타를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3. 1962년경의 우리나라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수리공사 : 문화재관리국은 먼저 석굴암 전실에 목조로 된 가옥을 만들게 된다. 또한 1913년에 설치한 콘크리트 돔위에 또다시 콘크리트 돔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1966년경에는 내부 결로현상을 막기위해 기계장치들을 설치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계당치로 인해 내부의 습기란 문제는 다소간 해결을 하였으나  많은 기계장치의 소음과 진동으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1970년대 중반경에는 결국 석굴암의 과학적 보존을 위해 전실 앞부분에 유리로 차단막을 설치함으로서 일반 관람객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다음에서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하나씩 분석해 보기로 한다.
 
1. 석굴암의 구조

- 석굴암의 구조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본존불이 계시는 주실과 ,통로인 비도,참배자가 참배를 드리는 전실로 나뉜다. 그런데 이들의 형태를 보면 주실은 원형이며 전실은 방형으로 이것은 당시 신라인들의 사상인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형이다)의 사상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2. 연화문 천개석 (蓮花門 天蓋石)

석굴암 천장은 둥근 궁륭(穹弑) 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곡선을 지닌 네모꼴의 판석과 그 사이에 주먹돌을 넣어서 견고하게 짜 올라갔다. 정상에 이르러서는 이 천장 돔 구조의 마감 돌로서 크고 둥근 돌 한 장을 얹어 석굴을 완성함과 동시에, 본존불상의 천개석(天蓋石)으로 삼았다.

그 둘레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한 송이의 큰 연꽃 같은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 천개석은 현재 세쪽으로 깨어져 있다. 마지막 석굴공사의 비상한 어려움과 그 해결을 위하여 김대성이 천신(天神)에게 간곡한 기도를 올렸다는 설화가 다음과 같이 『三國遺事』에 전해지고 있다.

장차 석불을 조각하려 함에 있어 큰 돌 한 장을 다듬어 감실의 뚜껑을 삼고자 하였다. 갑자기 이 돌이 셋으로 갈라지는지라 대성이 분히 여겨 잠시 잠에 들었다. 밤중에 천신 이 하늘에서 내려와 마무리하고 돌아가니, 대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남령(南嶺)으로 뛰어 올라 향을 피워서 천신에게 공양하였다. 이같은 일이 있으므로 그 땅을 향령(香嶺)이라고 하였다.


3. 석굴암의 감로수 (甘露水)

석굴암으로 향한 종착지에 닿으면 생명수처럼 맑고 깨끗한 샘 하나가 우리를 반긴다. 우리는 이름하여 감로수라 부른다. 1913년도에 일본인들은 석굴암을 해체하고 다시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 그 때에 굴의 후실 중심부에 자리잡은 11면관음보살 바로 뒷편의 암반으 로부터 용출하는 샘을 두 곳에서 발견했다. 이 샘이 경덕왕대의 김대성이 석굴암을 창건 할 때부터 있어 왔다면 이들은 물이 용출하는 이 암반수 위에 석굴을 세우고도 석굴 동서로 돌 아나가는 배수구를 만들지 않은 이유는 물이 용출하는 5척(尺) 지하에 배수구를 만들지 않 았다면 필연적으로 물은 굴원 밑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물은 암반을 타고 흘러 현재의 감로수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신라인의 지혜를 엿볼수 있는 곳이다. 즉 이고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은 여름철이 되면 항상 동해의 해풍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렇게되면 여름철이면 동해의 고온 다습한 공기가 석굴 내부로 들어오게 되므로 내부의 차가운 벽면과 만나게 되면 물방울을 맺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내부의 많은 조상들은 심한 풍화작용을 이르키게 된다. 그래서 당시 신라인들은 이 곳 석굴암 바닥으로 항상 영상 9도에서 13도가 되는 차가운 샘물이 흐르게 하였다. 그렇게 되면 내부로 들어온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더 차가운 바닥에 습기를 빼앗겨 버리고 내부 벽면은 항상 건조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장치로서 당시 신라인들은 약 1200년 동안을 습기로부터 무사히 석굴암을 보존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4. 석굴암의 연화대좌(蓮花臺座)와 굴의 밑 바닥

연(蓮)은 물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하여 연은 물을 먹고 자라 꽃을 피운다. 연화(蓮花)는 마침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형체를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가 이듬해 때가 오면 다시 살아나 꽃을 피운다.

석굴암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8각 연화대좌석은 마치 물 속에서 피어오른 연의 꽃처럼 복련(伏蓮)과 앙련(仰蓮)으로 조각되어 있다. 불경에는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연화대좌는 우주의 중심산인 수미산(須彌山)을 상징하는 수미대좌라고도 설하고 있다.


석굴암의 문제점 및 논쟁

1.광창에 대한 존재 여부에 대한 논쟁

현재의 석굴암 동편에 남아 있는 구석재중 이른바 광창에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의 논증을 참고로 하여 우리 신라역사과학관 연구팀이 실측한 대로 복원하였다.

실험1.창살을 나무로 역삼각형 모양으로 5개 끼우고 200W의 전등을 광창으로 비춰보면서 광창과의 거리를 점점 가깝게, 또는 멀리하면서 내부를 관찰하여 보았으나 본존여래의 상호에 심한 창살의 그림자가 생겼다.

실험2.창살을 투명한 아크릴로 역삼각형 모양으로 끼우고 전과 동일한 방법으로 실험힌 결과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결론:광창의 존재여부에 성급한 결론을 내릴 것이 아니라, 좀 더 다각적인 연구와 실험적인 시도가 있어야겠다.


연구되어야 할 과제:

광창이 존재했을 경우-광창위의 쇄기돌들의 결속형태와 창살 그림자에 대한 유기적인 설명

광창이 존재하지 않았을 경우: 구석재(광창틀)에 대한 용도설명과 위치에 대한 연구


 2.감실소속의 공기구멍

석굴암이 창건 당시 주실벽에 본존불의 상호 높이로 10개의 작은 사각형 방들이 배치가 되었고 또 이곳 감실 보살들 뒷편으로 작은 구멍들이 나있었다. 이는 주실 냅부의 더운 공기를 밖으로 배출하므로 내부의 공기의 온도와 외부의 공기의 온도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해 주는 환기창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지하 감로수와 더불어 석굴암 내부의 자연공기정화기능을 수행함으로서 석굴암을 약1200년동안 무사히 보존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1913년 일제의 잘못된 수리공사로 석굴암 외벽에 2m 두께의 concreat로 보강을 함으로서 이러한 감실의 환기 구멍 역시 마비 시키게 되었다.


3.CONCREAT 벽은 언제 처리 할 것인가?

견고하고 내구성 있는 concreat도 열을 받으면 확장하고 냉각되면 수축한다.또한 습해지면 부피가 팽창하고 건조하면 수축되어 일정한 하중에 의해 늘어나거나 형태가 변하게 된다. 따라서 con'c의 강도, 경도, 침식에 대한 저항과 수명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규명되어야 한다.

 

3전시관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 범종(梵鐘)

소 재 지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연 대 : 725년 (신라 성덕왕 24년)
지정번호 : 국보 제 36호
크 기 : 높이 167cm, 지름 90.3cm
중 량 : 1350kg 
 오대산 상원사 범종은 성덕대왕 신종(에밀레 종) 보다도 45년이나 먼저 만들어진 한국 유기명 범종(有記銘梵鍾)가운데 가장 오랜 금속문 기록을 지닌 한국 범종의 조형(祖型)입니다.

  처음에 어떤 목적으로 주조(鑄造)되어 어느 절에 보관되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안동의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안동 읍성의 누문(樓門)에 걸려 있던 것을 1469년(조선조 예종 1) 국명에 의하여 죽령을 넘겨 현 상원사 위치로 옮겼다고 합니다.  현재는 종구(鍾口) 일부에 작은 균열이 생겨 타종하지 못하고 모작품(模作品)을 만들어 상원사 종각에 안치하였습니다.

  이제 상원사 범종의 원음은 애석하게도 들을 수 없지만 신라역사과학관에서는 그동안 관람료를 지불하시고 입장하신 후원가족 여러분의 정성에 힘입어 여기 이 장소에 실물크기의 복원제작을 성공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타종 후 1초 이내에 사라지는 타음(打音)과 10초 전후까지 이어지는 진동(몸체 떨림)에 이어 3분까지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는 은은한 맥놀이(beat)현상을 되 살릴 수 있어서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면 신라인들의 하이테크 문화재로 주조된 상원사 범종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무엇일까요?

  조형상의 특징

  종신(種身)의 최정상에 외국종에서는 볼수 없는 한 마리의 용(龍)이 커다란 원통(圓筒)을 짊어지고 뒷 다리를 힘차게 밀며 앞으로 전진하려는 활기찬 모습의 조형은 어떤 상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이 대나무 형상의 음통(음관)을 하늘로 향하는 소리의 확대 통로로, 또는 음향 필터 작용으로, 종 걸이의 지주역할 등으로 해석하는 연구가들도 있지만 미술사학자 황수영 박사께서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만파식적(萬波息笛=대나무 피리)과 문무대왕의 수증능에 얽힌 설화를 주목하여 신라종의 특색과 그 창조적 조형 의지를 삼국통일 초기의 풍토적 문화배경으로 연관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음향을 생각한 디자인 상의 특징

  A·D 725년 종이 만들어 질 무렵의 신라 주종(鑄鍾) 기술자들은 오랫동안의 축적된 기술의 비법에 의하여 구리+주석+아연(82% : 16% : 2%)의 합금이야 말로 가장 이상적인 소리의 주체적 요소이며 그 보조적 요건으로 음관(音管)의 크기, 당좌(撞座)의 위치, 유두(乳頭=돌기)의 크기, 명동(鳴洞=움림통)의 깊이와 종과의 떨어짐(거리)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들 보조적 요건들은 종 전체 두께와 크기에 따른 비례 관계의 유기적 수치로 은밀히 파악되고 있었으리라고 믿습니다.  이제 상원사 종신을 좀 더 구체적으로 관찰해 보면 상대(윗띠)와 하대(아래띠)는 반달형 연주문 분할이 서로 비대칭일 뿐만아니라 종신의 둘레와도 비대칭 분할 구도로 두껍게 동여 매듯이 조여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시각적으로 매우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종의 설계자는 주악비천(奏樂飛天)의 부드러운 표현양식을 선택하여 긴장감의 완화를 시도한 듯 합니다.  특히 이들 각 문양들의 비대칭적 분할 구도야말로 맥놀이현상의 결정적 작용원인이 된다고 음향 연구가인 진용옥 교수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비대칭 없이 맥놀이 없다″는 표현은 한국 쇠북(범종) 분석의 한차원 높은 과학적 해석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습니다.

  주조상의 특징

  주형틀(거푸집)은 어떤 방법으로 만들어야 용두(龍頭) 및 음관(音管) 뿐만아니라 주악비천 및 당좌, 그리고 상·하대의 섬세한 문양들까지도 완벽하게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그들은 무척 고민하고 연구를 거듭하여 마침내 종 전체를 밀랍형(蜜蠟形) 주조 공법으로 제작할 것을 결심하고 내외형 구조의 주형작업을 착수한 것으로 봅니다.

 

4전시관


1. 신라의 목판인쇄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은 1966년 불굴사 석가탑 2층 탑신에서 발견되었다. 신라경덕왕 10년(751)에 석가탑을 세울 때 탑속에 넣은 것이다. 인쇄시기는 750년 경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 보다 20여년 앞선 것이다.

2.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은 무엇인가.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은 경문 전부를 완전하게 새겨 글자면을 위쪽으로 하여 먹칠을 한 다음, 한지(신라종이)를 놓고 말총과 같은 인체로 문질러서 찍어내어 두루마리 형식으로 장정한 책(목판권자본)이다.

경의 내용은 죄를 멸하고 목숨을 연장하는 법을 구하기 위하여 옛탑을 수리하거나 소탑을 77기, 또는 99기 만들어 탑에 봉안하고 다라니(神呪)를 염송하면 그 주력공능(呪力功能)에 의하여 수복과 성불을 얻을 수 있다는 밀교적 법식이다. 신라에서는 낭산 황복사지 석탑 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 명문(706년)으로 보아 이 경이 처음으로 봉안되었을 것으로 짐작 하나, 사리함이 발견될 당시 경은 산화 부식되었는지 없었다.

그러나 8세기 중엽(751년) 조성된 석가탑에서 발견된 이후, 여러 다른 탑에서 봉안되었던 것으로 보아 조탑경(造塔經)으로 정착된 것을 알 수 있다.


3. 고려의 목판 인쇄

고려시대에는 주로 사찰에서 많은 불경을 찍었다. 1007년에 개성 총 지사 에서는 『보협인다라니경』을 찍어냈다. 고려시대의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다. 고려에서는 부처님의 힘으로 외침을 막고자 대장경을 새겼다. 1087년 초조대장경, 1101년에는 의천이 속장경을 새겼다. 이 경판은 13세기 몽고란 때 불타 버렸다.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재조대장경은 1236년부터 16년 동안에 걸쳐서 다시 새긴 것이다. 경판이 무려 팔만개나 되어 '팔만대장경' 또는 '고려대장경'이라고 한다. 오랜기간 원래의 모양이 잘 보존되고 글씨와 새김이 한사람 솜씨 같다. 이는 우리 민족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문화재이다.


4.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

고려말 청주 흥덕사에서 찍어낸 『직지심체요절』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로 찍은 책으로서, 1972년 UNESCO에서 공인을 받은 것이다.

이책의 마지막 장에는 인쇄시기(1377), 인쇄장소(청주목 흥덕사), 인쇄방법(활자인쇄)이 기록되어 있다.

독일의 구텐베르크 활자보다도 70여년이나 빠르다. 우리 선조들이 인류 문화사상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것이 세계인에게 인정 되었다.

중국은 15세기 말경인 명나라 때부터 동활자를 만들기 시작했고, 일본은 16세기 말 우리 나라에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배워갔다.


5. 고려대장경

① 고려 대장경(국보 32호)의 완성연대
- 고려 고종 23년(1236)에 시작 → 고종 38년(1251)에 완성

② 경판의 크기와 무게
- 가로길이 약 70cm, 세로 약 24cm, 두께 3cm
1매 무게 평균 3.4kg, 총무게 약 280ton

③ 경판의 총 매수와 종류
- 1511종, 6802권, 81258매 (양면에 해서(楷書)로 양각)

④ 경판의 1매당 글자수 (字數)
- 23(행수) × 14(1행당 자수) × 2(양면) ≒ 644자(字)

⑤ 경판에 사용된 나무의 종류
- 산벗나무(64%), 돌베나무(14%), 자작나무(9%), 기타나무(13%)


6. 해인사 장경각의 과학적 구조

팔만 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각은 수다라장, 법보전, 동사간고, 서사간고 모두 4동으로 된 경판전이다. 가야산 자연조건을 최대한 활용한 과학적 건축구조(科學的 建築構造)로 수백년간(조선 성종 19년 1488년 건립, 국보 제52호) 경판을 온전히 전하고 있다.

① 모든 방향에서 직·간접의 햇볕이 들어온다. 4계절의 황도(태양의 길이)와 고도 (태양의 각도)의 변화를 예측하여 건물의 좌향(坐向)을 정했다.

② 모든 방향으로 바람이 순환한다. 유입된 실점수기가 위·아래로 골고루 통풍작용을 할수 있도록 되어 있다.

③ 실내 온도의 차를 최소화 시켰다. 바닥과 천장의 온도차이를 1.5도 이내로 하고 가장 더울 때와 추울 때의 온도차이도 10∼15도를 넘지 않게 하였다.


7. 고려 대장경 중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密多心經)

해인사 경판 중 불교의 핵심 진리를 가장 깊이 뚫어 담았다는 반야바라밀다심경은 우리 나라 경판 중 가장 많이 인출되어 마모가 심해졌다.

따라서 현재는 인출이 불가능할뿐더러 글자의 변형이 심하여 손잡이 부분도 철태로 보강하여 보관되고 있다.

일본(日本)에서는 고려 말기부터 조선건국과 세조4년(1459)까지 해인사 경판을 30여회 걸쳐 인출해 줄 것을 요청해 왔고, 많은 장경들이 건너갔다.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인출 본을 입수, 그 필체를 참작하여 본 경판을 제작 복원하였다.

 
 8.백제 금동 대 향로
-Incense Burner, Gilt-bronze, paekche-
   
                                           국보 제287호
                           National Treasure. No287

 1993년 10월 하순 부여 능산리 집터유적 발굴 조사에서는 백제 금동 대 향로(百濟金銅大香爐)와 여러 가지 금동장식 공예품이 출토되었다.

  제 3건물터 바닥 구덩이에서 1300년이나 진흙 속에 묻힌 채 거의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이 향로는 높이가 64cm나 되는 대작이다. 아울러 이 향로는 꼭지, 뚜껑, 몸체, 받침등이 각 부분마다 빼어난 조형적 구성과 봉래산 전경을 이상적으로 결합하여,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하면 연화화생(蓮花化生)이란 불교관과 신선사상(神仙思想)의 냉용을 3차원적 세계관으로 표출시킨 것이라 말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향로는 지금까지 동아시아에서 발견된 같은 양식의 향로 중에서 시대와 국가를 불문하고 가장 우수한 걸작으로 평가되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뿐만아니라 그 제작 기법 또한 대단히 탁월한 밀납형 주조 방법을 선택했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여기 있는 유물은 예술세계사의 양홍섭이 제작한 모작품이다.

5전시관

 

1.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地圖)
조선 태조 4년(1395)에 제작한 돌에 새긴 고대 천문도

돌은 흑요석(黑曜石)이며, 높이 211cm, 너비 123cm, 두께 12cm로 당시로는 구하기 어려운 단단한 검은 돌이다. 이 돌에는 양면에 천문도가 새겨져 있는데, 천문도 이름의 위치가 서로 다르며 또한 아래·위가 서로 반대다. 따라서, 어느 면을 바로 세워서 사용했는지 단정하기 어렵게 되어 있어서 학자들의 연구거리가 되고 있다. 둥근 원으로 된 천문도는 돌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전부 290개의 별자리에 1,469개나 되는 별이 그 속에 새겨져 있다. 천문도의 둘레는 360도가 아니라 365도 1/4로 도수를 표시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일년의 날수인 365일 1/4로 원주를 표시하였기 때문이다. 하늘의 방향을 가리키기 위해서 12방위인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를 표시하고, 그 양 옆에 12열차와 12분야를 함께 새겨 놓았다.

현재 이 석각 천문도는 국보 제 228호로 지정되어 덕수궁 궁중유물 전시관에 있으나, 오랜 세월로 풍상에 심하게 훼손되어 자세한 모습은 애석하게도 알아 볼 수가 없다. 여기에 전시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태조 4년인 1395년으로부터 꼭 600년이 되는 1995년에 그 600주년을 기념하여 복원한 것이다. 돌은 충남 보령군에서 채굴한 오석(烏石)으로서, 높이 220cm, 너비 123cm, 두께 20cm이다. 두 면에 새겨 있는 천문도는 관람하는 사람들이 보기 쉽도록 둘 다 바로 세웠다.


2. 앙부일구(仰釜日晷)
조선시대에 사용하였던 대표적인 해시계

해시계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보는 방법 즉 사용할 줄 알아야 했고, 또 가질만한 신분이어야 했다. 따라서, 해시계는 귀한 물건으로 취급되었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을 위해 해시계를 서기 1434년 세종 16년에 앙부일구라는 해시계를 제작하게 되었다.

여기에 전시된 앙부일구는 보물 제845호로 지정 받아 현재 서울에 있는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 전시관에 전시되어있는 것을 선명문화재 연구소가 복원 제작한 것이다.

이 앙부일구의 지름은 35.4cm이며, 구리를 부어서 만들고 검게 표면 처리하였다. 둥근 그릇은 4개의 기둥으로 받혀져 있고, 이 기둥들은 십자로 된 받침대 위에 박혀 있는데 이 십자로 되어 있는 받침대에는 홈이 패여 있다. 이 홈은 그 속에 물을 담게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앙부일구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서이다.


3. 측우기(測雨器)와 측우대(測雨臺)

세계 최초로 발명되어 빗물을 측정한 기계
이 측우기는 높이가 2척, 지름이 8촌 되는 크기의 그릇을 쇠로 만들어서 대 위에 설치하여, 비가오면 서운관 관원으로 하여금 그 깊이를 재도록 한 것이다. 세종 23년 8월 18일 (1441년 8월 29일)에 제작하여 약 9개월 뒤인 세종 24년 5월 8일(1442년)에는 그릇의 크기를 높이 1척5촌, 지름 7촌으로 약간 줄이고, 그 이름을 측우기(測雨器)라고 정하였다.

세조대왕이 승하한 후에도 이 측우기는 계속사용이 되었지만 어느 시대에 와서인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길이 없지만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버려두게 되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세종대왕의 측우기가 다시 세상에 태어난 것은 조선시대의 두 번째 과학시대를 개척한 영조대왕의 노력 덕분이었다. 영조대왕은 영조46년 5월 1일 세종실록을 읽는중 측우기의 기사를 발견하고, 즉각 측우기를 만들 것을 명하여 6일만인 5월 6일 측우기를 7일째는 빗물의 깊이를 재는 자를 완성시켰다.

여기에 전시된 측우기는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를 본 따서 만든 것이다. 금영측우기는 본래 충남 공주에 있었던 것인데, 일본 사람들이 가지고 가서 일본 기상청에 보관하던 것이 1971년에 반환되어 지금은 서울의 기상청에 소장되어있다. 조선 제 24대 헌종 4년(1837)에 제작된 것으로서, 보물 제 561호로 지정받았다. 이 측우기는 구리로 되어있고, 높이가 315mm, 내경이 139mm이고, 무게는 약 7kg이다.

측우기를 받치는 대를 측우대(測雨臺)라고 한다. 여기에 전시한 것은 현재 기상청에 소장 되어 있는 소위 대구 선화당 측우대 라고 불리우는 것을 본 따서 만든 것이다. 이 대는 화강석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 46cm, 넓이는 37×37평방cm이다.


4. 세종대왕시대의 규표

태양이 정오에 가장 높게 떠 있을 때, 수직하게 세운 막대가 만드는 그림자의 길이를 재는 관측 기기를 규표(圭表)라고 하는데, 땅위에 높여 놓은 자 막대인 규(圭)와 그림자를 만드는 수직하게 세운 막대인 표(表)를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규표는 인간이 만든 천문 기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기기이다.

조선의 4대 국왕인 세종대왕(1397-1450)은 그의 재위 19년에 규표를 구리와 돌로 만들게 하고, 그해 4월 15일에 경북궁 경회루 북쪽에 있는 대간의 대(큰 천문대라는 뜻) 옆에 설치 하였다. 이때 세종의 천문학자들이 만든 규의 길이는 126척(26m 8cm)였고, 표의 높이는 40척(8m 28cm)이었다. 그러나, 이 규표도 그후 거듭된 외국의 침략군에 의해 파괴되고, 급기야 일제 36년간의 통치기간에 그 흔적 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여기에 전시된 규표는 세종대왕의 규표를 1/10로 축소하여 복원한 것으로써 규의 자재는

흑요석, 받침대의 자재는 화강석, 표의 자재는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한 구리, 들보(횡량)의 자재는 구리, 추는 3개이며 자재는 구리이다.


5. 천문유초(天文類抄)와 성경(星鏡)

① 천문유초(天文類抄) - 조선 초기의 천문학서. 2권 1책으로 목판본이다.

세종 때 이순지(李純之)가 지어 간행한 것으로 상·하권으로 되어 있다.

상권은 53장으로 되어있는데, 《보천가 步天歌》 나 《성경 星鏡》과 비슷한 형식으로 별자리(星宿)를 이십팔수(二十八宿)의 순서에 따라 하나씩 제시하고, 그다음에 그 수(宿) 의 별들을 설명하고 있다.

하권은 24장으로 되어 있는데, 천체·천문·기상현상을 국가의 안위와 만생의 재변과 연관시키는 점성술을 기술하고 있다. 현재, 여기 있는 천문유초는 필사본 2권 1책이다.

② 성경(星鏡) - 1861년(철종12)에 남병길(南秉吉 1820∼1869)이 편저한 천문서 2권 2책.

상·하권으로 고활자본이다. 《신법보천가 新法步天歌》에 실려 있는 각 별의 위치를 적어놓은 것으로, 편저자의 긴 서문이 들어있다.

이어서 자미원(紫微垣)·태미원(太微垣)·천시원(天市垣)의 3원과 각항저방(角亢?房)등 28수(宿)의 별 등에 관한 성도(星圖)와 신법보천가 그리고 각 별의 적경과 적위 (至微度) 가 들어 있는데, 3원 28수의 별의 수는 모두 277좌(座)에 1,369별이다.

현재, 여기에 있는 성경은 2권2책중 인쇄본 下권이다.


6. 별시계(星晷)

조선시대 후기에 밤에 별의 위치를 관측하여 시간을 알아 보는데 사용한 별시계이다.

나무로 만든 받침대 위에 반원 모양으로 된 구리로 된 고리가 얹혀 있다. 이 고리의 양쪽에 회전축이 있고 이 축에 바깥 지름 34.0cm, 안지름 28.6cm 되는 엷은 판으로된 환이 걸려 있다. 이 환의 바깥 쪽에서부터 각각 2mm, 3.5mm, 3mm, 5mm 간격으로 네 개의 동심원이 안쪽으로 그어져 있다. 가장 바깥 쪽에 있는 원의 위에는 자·축·인·묘·진· 사·오·미·신·유·술·해 12자가 기입되어 있어서 24시를 표시하고 있다. 이원과 그 안쪽에 있는 둘째 원은 24개의 선으로 등분되어 있어서 24시를 가리킨다. 이 24시의 한칸은 지금의 1시간에 해당한다. 둘째와 셋째원 사이는 이 1시간이 다시 네칸으로 작게 나뉘어 진다. 이렇게 된 이 작은 한 칸은 옛 시간으로 1각(刻)인 동시에 각도로는 3도¾에 해당하며, 현대시간으로는 15qnselk. 셋째와 넷째원 사이는 36칸으로 나뉘어져 있다. 따라서 이 한 칸은 10도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넷째원과 환의 안쪽 사이는 360개의 선이 그어 있어서 1도의 각을 측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로서, 이 환의 눈금으로는 옛 방식의 12시간 96각 제도, 24시간 48각 제도, 그리고 10도 단위와 1도 단위의 각도 측정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이 별시계의 원본은 현재 덕수궁 궁중유물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7. 적도의(赤道儀)

조선 시대 말에 별의 위치를 측정하는데 사용한 천문 관측 기기이다.

적도의는 전부 세 개의 환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이름은 자오환, 적도환, 사유환이다.

자오환은 관측자의 남북방향(자오선)을 가르키도록 고정된 환이다. 적도환은 하늘의 적도를 가르키며 자오환과 직각으로 고정되어 있는 환이다. 사유환은 자오환과 적도환의 안쪽에 있고, 자오환의 북극과 남극을 회전축으로 하여 적도환을 따라 180도 좌우(동서)로 회전하는 환이다. 이 사유환에는 별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막대가 붙어 있다.

여기에 전시한 적도의는 관상감 제조를 지낸바 있는 천문학자 남병길(南秉吉, 宜寧 南氏) 이 1861년에 저술한 성표인 성경(星鏡)에 있는 그림을 참조하여 제작한 것이다.


8.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한글 창제 반포 후 1년(1447) 한글 활자를 갑인 소자와 병행, 인출한 것으로 동시 간행 된 석보상절은 한자 밑에 한글소자로 하고 있으나 유독 월인천강지곡은 한글을 크게 부각 시켰다는 것은 민족의 주체성과 자긍심을 심어주고 있다. 혹자들은 한글자는 목활자 운운 하고 있으나, 검증결과 주물사 주조법에 의해 동활자로 찍은 것이 확인되었다.

한글 창제와 동시에 금속활자라는 것은 우리민족의 문화유산 중 백미로 91년 U.N가입시 대표 기념물로 선정되어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독일 구텐베르그 활자보다 빠르다.


9.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세종 19년(1437)에 세종의 명(命)에 의해 완성된 주야측시기(晝夜側時器)로 태양시(太陽時) 와 항성시(恒星時)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당시 모두 4벌이 제작되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여기에 전시된 일성정시의는 높이 약 1m, 환의 지름 41.4cm, 청동으로 된 것으로 건국대학교 남문현 교수의 연구설계도면을 견본으로 하여 한국과학사물 연구소가 제작하였다.



6전시관

 

첨성대의 상부 정자석(井字石) 모형 실물 크기-


첨성대 상부 25,26,27단의 실제 크기 모형과 상단부 정자석의 실물 크기의 모형을
전시함으로서 실제 첨성대의 규모를 실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첨성대 상부에서 별을 관측하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해맞이 탑,문무대왕 수중릉,감은사지,이견대-


석굴암 본존불이 바라 보는 방향이 동동남30도로서 이는 일년중 하루해가 가장 짧은 동지날  일출(동동남29.7도)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방향은 문무대왕 수중릉과 감은사지의 가운데 지점이 된다.

그래서 문무대왕 수중릉과 감은사지의 1/30축소 모형을 제작하고  동지날 떠오르는 태양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일출탑을 볼 수 있다.

 

일출탑(日出塔)


 태양은 감은사와 문무수중왕릉 사이에서 떠 오른다. 어디서 보는 시점에서인가? 바로 토함산의 정상밑에 좌정한 석굴암의 본존여래 시선에서부터다. 언제 그럴까? 동지다. 동지를 즈음한 15일간은 역법상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절기이다. 새해의 새아침 7시 27분에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동해의 햇살이 여래의 이마에 박힌 백호에 와 닿는다. 이 순간 캄캄한 어둠으로 짙게 깔린 토함산천이 그 정상으로부터 아래로 점점 더 밝게  빛나는 것처럼 40개의  석조로 가득찬 미명의 석굴은 서서히 광명의 석굴로 극미를 연출한다. 따라서 석굴암 내부 공간은 태양을 상징하는 원의 광배로, 태양 그 자체인 연화 천장석으로, 태양 그 스스로의 빛인 동틀돌로 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김대성은 인도땅 보드가야의 성도상(항마촉지인)을 신라땅 토함산에 광명의 부처인 비로자나의 분신으로 응현케 해야만 했다. 석가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제 석굴암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전 인류의 영원한 빛이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위해 동지 일출선(동동남30˚)이 통과하는 석굴암의 뒷편 토함산 자락 신라역사과학관 옥상에 탑을 세우고 그 이름을 일출탑이라 정했다. 

 

 

 

 

 

너무 긴가????

부담갖지 마시길..

점수 냠냠냠 쩝쩝..

점수 마시써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질문자인사 와,, 정말 원하는 답변을 찾았네요.. 정말감사드려요 !!

1전시실 :신라시대 경주의 별자리인 천장 천문도와 신라왕경도, 첨성대의 축소모형

1. 신라왕경도

한 나라가 천년동안 한 번도 수도를 옮기지 않고 국가를 통치해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은 도읍의 입지 조건에 적합한 자연조건과 도시를 수도적 기능에 맞도록 오랜 세월을 두고 합리적으로 구축해 왔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보고있는 천년전 王都는 고분, 몇기의 탑, 절터, 그리고 산야에 흩어져 있는 불상 그것이 마치 신라문화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걸어다니고 있는 이 길이 천년전 신라 王城의 그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득한 고대 도읍의 찬란했던 모습을 그려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행히 경주는 천년동안 지켜왔던 왕도의 遺址와 문화유산이 지금까지 비교적 잘 전해지고 있어 그 규모나 도시의 패턴을 짐작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능묘의 분포, 사찰과 탑, 불상 등의 석조물 그리고 “井”자 형의 도로 구조는 그 좋은 예가 되며, 더우기 근래 발견된 왕경지역의 建物遺址 조사는 당시의 도시계획을 연구 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필자는 역사가도 고고학자도 아니다. 다만 40년 넘게 이곳에 살면서 어릴 때 뛰어 놀던 산천과 洞里, 그 속에서 느껴온 역사의 향기와 여러 사학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신라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감명깊게 가슴속에 지녀 온 작은 화가일 뿐이다. 필자의 이런능력을 잘 알면서 어느날 신라역사과학관 석우일兄께서 나를 불쑥 찾아왔다. 그 때가 1991년 11월이었고 건강도 별로 좋지 않을 때였다.
김동현박사(문화재연구소장)의 설계로 그렸다는 신라왕경조감도의 흐릿한 사진 한 장과 왕경에 관한 자료 몇 권을 가지고 왔다. 兄은 무조건 동양화 기법으로 연구하여 사명감을 가지고 그려보라는 말과 함께 그 크기는 가로 6m, 높이 2m 50㎝정도로 하자고만 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무척 당황했으며 그날 이후 무거운 짐을 지고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곧이어 12월, 겨울이 오는 바람 센 어느 날 남산의 해목령 바위에 올라 그 옛날 경주를 생각하며 몇 년이 걸려도 한번 그려 보리라고 결심하였다.
寺寺星張 塔塔雁行’《三國遺事》 第三卷, 興法第三
第四十九 憲康大王之代 自京師至於海內 北屋連牆 無一草屋 笙歌不絶道路’《三國遺事》 弟二卷 處容郞 望海寺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覆屋以瓦 不以茅 吹飯以炭不以薪 有是耶’《三國史記》卷十一, 憲康王 六年
절과 절이 별처럼 벌여있고 탑들은 기러기떼인 양 줄지어 있으며 서울에서 지방(海內·京畿지역)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은 연이어졌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으며 거리에는 음악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성중의 공해를 염려하여 숯을 연료로 사용토록 할 정도로 대궐과 사찰, 관아, 민옥들이 즐비한 거대하고 화려했던 불교도시였음을 古典은 잘 전해주고 있다.

2. 첨성대 축소모형

1) 첨성대 외부 1/5 축소모형

2) 첨성대 내무 1/10 축소모형

첨성대의 기능(瞻星臺의 機能)
첨성대에 대하여서는 규표(圭表)의 일종이니, 천문사상(天文思想)과 지식을 상징(象徵) 하는 기념비적(記念碑的)건물이니, 불교(佛敎)의 영향을 받은 종교적(宗敎的)인 제단(祭壇) 이니, 도시계획(都市計劃)의 기준점적(基準點的) 축조물(築造物)이니, 실로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 구조로 보아서 또 고대 천문학(古代 天文學)이 오늘과 달랐다는 점으로 보아서 이는 더 소박(素朴)한 천문관측대(天文觀測臺) 였을 것이 틀림없다.
즉 첨성대 외부 지상으로부터 중앙 개구부까지 사다리를 따라 올라가서 내부(內部)로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2단에 걸친 정(井)자형 장대석(長大石)을 의지한 2개의 사다리를 통하여 상부 정자형 두부(上部 井字形 頭部)에 올라간다. 그 다음에 상단의 서반부(西半部)에 걸친 개폐식판(開閉式板)을 딛고서 하부와 차단한 다음에 충분히 넓은 공간에서 국가의 길흉(吉凶)을 점치는 천문관측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첨성대의 그 뛰어난 조형미(造型美)와 그 견고(堅固)한 축조기술은 모든 사람이 찬탄(讚 嘆)하는 바이며 고대 천문대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것의 하나이다.
첨성대의 옛 문헌 (瞻星臺의 古文獻)
《삼국유사》 기이(紀異) 권 2의 별기(別記)
- 이 왕대(王代)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
《삼국유사》 왕력(王歷) 제 1에 신라 제 17대 내물마립간(奈勿痲立干) 이야기 끝
- 능은 점성대(占星臺) 서남에 있다.
《고려사》 권12 지리지(地理志)
- 또 첨성대가 있다. 신라 선덕여주(善德女主)가 쌓은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권 150 경주부
- 첨성대는 부(경주부)의 월남리에 있다. 633년에 선덕여주가 쌓은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조, 《동경잡기 東京雜記》 권 2 고적(古蹟)
- 첨성대가 부의 동남 3리 되는 곳에 있다. 선덕여주때에 돌을 다듬어 대를 쌓 은 것인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다. 높이는 19척으로 속이 통해 있어서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관측을 한다.
《증보문헌비고》 상위고(象緯考) 2, 의상(儀象) 1
- 신라 선덕왕 16년(647)에 첨성대를 만들었다. 돌을 다듬어서 대를 쌓은 것인 데 위는 네모나고 아래는 둥글고 높이는 19척 이다. 그 속이 통해 있어 사람 이 그 속으로 오르내리며 천문을 관측한다. 경주부 동남 3리에 있다.
첨성대의 구조 (瞻星臺의 構造)
전체가 기단부(基壇部), 원주부(圓柱部), 정자형두부(井字形頭部)의 3부분으로 되어있다. 첨성대 전체의 석재는 화강석(花崗石)으로 총 석재수는 365개 내외이며 기단부, 원주부의 외벽 정자형 두부는 모두 다듬어져있다. 원주부의 내벽은 다듬어져 있지 않으나 마찰(摩 擦)로 약간 마모(磨耗)된 흔적이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1. 기단부는 4각형 상하(上下) 2단
① 상단(上段) - 1변이 5.18m, 높이 39.5cm, 석재수(石材數) 12개
② 하단(下段) - 1변이 5.36m, 높이 39.5cm, 석재수 8개
③ 방향 - 남변(南邊)이 정남(正南)에서 동쪽으로 19°
2. 원주부는 총 27단으로 높이는 8.05m의 술병형
① 최하단의 둘레 16.0m, 제14단의 둘레 11.7m, 최상단의 둘레 9.2m
② 13단에서 27단까지의 속이 비어서 사다리 2개를 중간의 장대석에 걸쳐서 상하로 오 르내릴수 있게 되어있다. 27단을 지나서 정자형 두부로 올라가면 목판으로 서반부 개구를 덮어서 하부와 차단할 수 있는 구조이다.
3. 정자형 두부는 상하 2단의 정(井)자형 구조
① 각단이 각각 306×32×32cm의 크기의 장대석 4개씩으로 정자형으로 이뤄졌다.
② 정자석 내부는 220×220×64cm의 공간을 이루고 하부는 목판을 깔았던 것으로 생 각되며 그 서반부는 개폐가 가능했을 것이다.

 

3. 천상열차분야지도(=신라시대 경주의 별자리인 천장 천문도)

조선 제21대 영조대왕(재위 1725 - 1776) 시대에 만든 목판으로 인쇄한 천문도.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오늘날의 들처럼 별을 열심히 관찰하였다. 그러나, 천문도 없이는 별을 찾아 볼 수 없으므로 그들은 한야의 경복궁 궁궐앞에 있었던 태조 4년에 만든 석각 천문도나 그 후 숙종 13년(1687년)에 만든 석각 천문도를 보고 베께서 제나름대로 천문도를 만들어 쓸 수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한양에 가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많은 별들을 길가에 앉아서 정확하게 종이에 붓으로 옮긴다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천문도를 잘 그렸겠지만, 그렇지 못한 천문도도 있어서 지금까지 전해 오는 천문도는 각양 각색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천문도는 한양까지 가서 석각 천문도를 보고 그린 천문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을 보고 그것을 다시 베낀것들이다. 어쨌거나 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기 능력껏 만든 천문도를 민간 필사본이라고 부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조대왕은 관상감으로 하여금 숙종 13년의 석각 천문도의 탁본을 떠서 목판을 만들어 인쇄하여 나눠 주도록 한다.
이렇게 목판으로 인쇄한 천문도라하여 지금은 천상열차분야지도 목판 인쇄본이라고 부르고 있다. 영조대왕이 태조 4년으로부터 거의 300년이나 지난 후에 만든 숙종때의 것을 탁본하게 한 이유는 그때 벌써 태조때의 석각본은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관상감이 1차로 인쇄한 천문도는 120장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현재 보존되어 있는 7~8장의 천문도를 보면 필체가 약간 다르다고 보는 사람이 있으므로 그 이후에도 인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규장각을 비롯하여 몇 곳에 목판 인쇄본이 남아 있기는 하나, 모두 약간씩 훼손되어 있는데, 여기에 전시되어 있는 이 천문도는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전시실:석굴암의 내부구조,다양한 모양제작 ,각종문헌, 사진자료,설계 등을 갖춰 석굴암의 신비를 나타낸다

1. 석굴암 1/5모형

창건 연대는 8세기 중엽인 경덕왕10년(A.D751)에 당시신라의 시중(재상)이던 김대성에 의해 창건이 되어진다. 이러한 석굴암의 창건배경은 여러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으나 삼국유사(일연)의 기록을 보게 되면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창건을 하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는 기록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석굴암이 근세에 들어 처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된 것은 1907년 일본인 우체부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세계적 문화유산인 석굴암의 수난이 시작이 되기 시작한다.당시 석굴암이 많이 회손되어 있던 관계로 19013년부터 1962년에 이르는 오랜 시간동안 석굴암의 중수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석굴암이 지금의 많은 문제점들을 가져 오게 된다.

문제점 1) 1913년경의 일본인들에 의한 수리공사 당시 수리공사를 하던 일본인들은 석굴암을 이루고 있던 석재들을 완전해체를 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많은 오류들을 남기게 된다. 이중 가장 큰 오류로 여겨지는 것이 돔외부를 보강하고 있는 콘크리트에 있다. 이로써 궁륭 내부의 고온다습한 공기의 흐름을 차단하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지금의 이슬맺힘 현상(결로현상)을 유발시켰다.
문제점 2) 1917년,1924년경의 수리공사 이같은 결로현상으로 인해 내부벽면에 많은 청태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를 제거할 목적으로 증기세척을 가하게 된다. 이는 내부 석재의 수명에 치명타를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점 3) 1962년경의 우리나라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수리공사 문화재관리국은 먼저 석굴암 전실에 목조로 된 가옥을 만들게 된다. 또한 1913년에 설치한 콘크리트 돔위에 또다시 콘크리트 돔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1966년경에는 내부 결로현상을 막기위해 기계장치들을 설치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계당치로 인해 내부의 습기란 문제는 다소간 해결을 하였으나 많은 기계장치의 소음과 진동으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1970년대 중반경에는 결국 석굴암의 과학적 보존을 위해 전실 앞부분에 유리로 차단막을 설치함으로서 일반 관람객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석굴암의 구조
석굴암의 구조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본존불이 계시는 주실과, 통로인 비도, 참배자가 참배를 드리는 전실로 나뉜다. 그런데 이들의 형태를 보면 주실은 원형이며 전실은 방형으로 이것은 당시 신라인들의 사상인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형이다) 의 사상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내부구조 실측지
전실의 길이 478cm
전실의 폭 645cm
비도의 길이 277cm
비도의 폭 340cm
본존의 좌대 높이 165cm
본존의 높이 346cm
본존 ~ 천정석 363cm
굴높이 874cm
본존의 손 길이 64cm
본존의 팔 길이 196cm
본존의 발 길이 87cm
내부의 석재량
전실 49개(조상포함)
비도 10개(조상포함)
굴원 72개(조상포함)
천장 108개
감실불 8개
본존 1개
좌대 24개
합계 272개

내부 조상수
본존불 1구, 인왕상 2구, 천부상 2구(제석천, 대범천), 나한상 10구, 팔부신장 8구, 사천왕상 4구, 보살상 3구, 감실보살 10구중 2구 도난

연화문 천개석 (蓮花門 天蓋石)
석굴암 천장은 둥근 궁륭(穹弑) 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곡선을 지닌 네모꼴의 판석과 그 사이에 주먹돌을 넣어서 견고하게 짜 올라갔다. 정상에 이르러서는 이 천장 돔 구조의 마감 돌로서 크고 둥근 돌 한 장을 얹어 석굴을 완성함과 동시에, 본존불상의 천개석(天蓋石)으로 삼았다.
그 둘레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한 송이의 큰 연꽃 같은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 천개석은 현재 세쪽으로 깨어져 있다. 마지막 석굴공사의 비상한 어려움과 그 해결을 위하여 김대성이 천신(天神)에게 간곡한 기도를 올렸다는 설화가 다음과 같이 『三國遺事』 에 전해지고 있다.
장차 석불을 조각하려 함에 있어 큰 돌 한 장을 다듬어 감실의 뚜껑을 삼고자 하였다. 갑자기 이 돌이 셋으로 갈라지는지라 대성이 분히 여겨 잠시 잠에 들었다. 밤중에 천신 이 하늘에서 내려와 마무리하고 돌아가니, 대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남령(南嶺)으로 뛰어 올라 향을 피워서 천신에게 공양하였다. 이같은 일이 있으므로 그 땅을 향령(香嶺)이라고 하였다.
석굴암의 감로수 (甘露水)
석굴암으로 향한 종착지에 닿으면 생명수처럼 맑고 깨끗한 샘 하나가 우리를 반긴다. 우리는 이름하여 감로수라 부른다. 1913년도에 일본인들은 석굴암을 해체하고 다시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 그 때에 굴의 후실 중심부에 자리잡은 11면관음보살 바로 뒷편의 암반으로 부터 용출하는 샘을 두 곳에서 발견했다. 이 샘이 경덕왕대의 김대성이 석굴암을 창건 할 때부터 있어 왔다면 이들은 물이 용출하는 이 암반수 위에 석굴을 세우고도 석굴 동서로 돌 아나가는 배수구를 만들지 않은 이유는 물이 용출하는 5척(尺) 지하에 배수구를 만들지 않았다면 필연적으로 물은 굴원 밑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물은 암반을 타고 흘러 현재의 감로수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신라인의 지혜를 엿볼수 있는 곳이다. 즉 이고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은 여름철이 되면 항상 동해의 해풍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렇게되면 여름철이면 동해의 고온 다습한 공기가 석굴 내부로 들어오게 되므로 내부의 차가운 벽면과 만나게 되면 물방울을 맺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내부의 많은 조상들은 심한 풍화작용을 이르키게 된다. 그래서 당시 신라인들은 이 곳 석굴암 바닥으로 항상 영상 9도에서 13도가 되는 차가운 샘물이 흐르게 하였다. 그렇게 되면 내부로 들어온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더 차가운 바닥에 습기를 빼앗겨 버리고 내부 벽면은 항상 건조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장치로서 당시 신라인들은 약 1200년 동안을 습기로부터 무사히 석굴암을 보존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2. 석굴암 외부 구조 및 광창 모형

현재의 석굴암 동편에 남아 있는 구석재중 이른바 광창에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의 논증을 참고로 하여 우리 신라역사과학관 연구팀이 실측한 대로 복원하였다.
실험1
창살을 나무로 역삼각형 모양으로 5개 끼우고 200W의 전등을 광창으로 비춰보면서 광창과의 거리를 점점 가깝게, 또는 멀리하면서 내부를 관찰하여 보았으나 본존여래의 상호에 심한 창살의 그림자가 생겼다.
실험2
창살을 투명한 아크릴로 역삼각형 모양으로 끼우고 전과 동일한 방법으로 실험힌 결과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결론
광창의 존재여부에 성급한 결론을 내릴 것이 아니라, 좀 더 다각적인 연구와 실험적인 시도가 있어야겠다.

 

3. 석굴암 감로수 모형

석굴암으로 향한 종착지에 닿으면 생명수처럼 맑고 깨끗한 샘 하나가 우리를 반긴다. 우리는 이름하여 감로수라 부른다. 1913년도에 일본인들은 석굴암을 해체하고 다시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 그 때에 굴의 후실 중심부에 자리잡은 11면관음보살 바로 뒷편의 암반으로 부터 용출하는 샘을 두 곳에서 발견했다. 이 샘이 경덕왕대의 김대성이 석굴암을 창건 할 때부터 있어 왔다면 이들은 물이 용출하는 이 암반수 위에 석굴을 세우고도 석굴 동서로 돌 아나가는 배수구를 만들지 않은 이유는 물이 용출하는 5척(尺) 지하에 배수구를 만들지 않았다면 필연적으로 물은 굴원 밑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물은 암반을 타고 흘러 현재의 감로수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신라인의 지혜를 엿볼수 있는 곳이다. 즉 이고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은 여름철이 되면 항상 동해의 해풍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렇게되면 여름철이면 동해의 고온 다습한 공기가 석굴 내부로 들어오게 되므로 내부의 차가운 벽면과 만나게 되면 물방울을 맺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내부의 많은 조상들은 심한 풍화작용을 이르키게 된다. 그래서 당시 신라인들은 이 곳 석굴암 바닥으로 항상 영상 9도에서 13도가 되는 차가운 샘물이 흐르게 하였다. 그렇게 되면 내부로 들어온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더 차가운 바닥에 습기를 빼앗겨 버리고 내부 벽면은 항상 건조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장치로서 당시 신라인들은 약 1200년 동안을 습기로부터 무사히 석굴암을 보존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4. 석굴암 관련 서적 및 자료

산중중일기
뒷쪽 봉우리에 오르니 자못 험하고 가파르메 힘을 다해 십여리를 가서 고개를 넘어 1리쯤 내려가니 석굴암에 이르렀다. 명해스님이 맞아들여 자리에 잠깐 앉았다. 석굴에 올라 보니 모두 사람이 공들여 만든 것이다. 돌문밖 양변은 네다섯 개의 큰 바위에 불상을 남김없이 조각하였는데 그 기이하고 교묘함은 하늘이 이룬 듯 하다.
둘 문은 무지개 모양으로 돌을 다듬었다. 그 안에 거대한 돌부처님이 있으니 살아 있는 듯 엄연하다. 좌대석은 반듯하게 서 있어 하나도 기울어지거나 어긋난 것이 없다. 줄지어 서 있는 불상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 하지만, 기괴한 모습들은 그 모습을 표현 할 수 없다. 이러한 기이한 모습은 보기 드문 것이다. 완상을 하며 오랫동안 머물다가 내려와 암자에서 잤다.
무진년(1688) 5월 15일

 

5. 요네다 도면 및 석굴암 수리적 원리

당시 총독부박물관의 측량기사(일보대학 건축과 졸)로 일하면서 불국사와 석굴암의 건축에 사용된 신라인의 수치가 당나라 척이라고 처음으로 밝혔다. 그의 저서 "조선 상대 건축의 연구" 에서 석굴암은 정3각형, 4각형, 6각형, 8각형 등의 기하학적 수리원리가 불교와 예술에 응용 융합된 고도의 치밀한 조형건축 이라고 지적하였다.
후실 궁륭천정은 당시 신라의 천문도가 응용된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고 추측하였다. 후실 입구는 당 12척으로(본존 대좌의 지름도 12척) 석굴암 구조의 기본 모둘(Module)이며, 이는 하루 12시를 나타내며 원의 둘레 360도는 태음력의 1년을, 원의 지름 24척은 하루의 시간을 나타내는 우주공간의 축소 구조라고 밝혔다.
특히 종교적으로 석굴암은 조형건축은 아름다운 비례의 극치가 내재하는 법계정토라 보았다. 원의 중심과 전실 중심으로 이어지는 직선 방향(동남 30도)은 동짓날 해뜨는 방향과 일치한다 하였다.

 

3전시실:오대산 상원사 범종

1. 오대산 상원사 범종

오대산 상원사 범종은 성덕대왕 신종(에밀레 종) 보다도 45년이나 먼저 만들어진 한국 유기명 범종(有記銘梵鍾)가운데 가장 오랜 금속문 기록을 지닌 한국 범종의 조형(祖型)입니다. 처음에 어떤 목적으로 주조(鑄造)되어 어느 절에 보관되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안동의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안동 읍성의 누문(樓門)에 걸려 있던 것을 1469년(조선조 예종1) 국명에 의하여 죽령을 넘겨 현 상원사 위치로 옮겼다고 합니다.
현재는 종구(鍾口) 일부에 작은 균열이 생겨 타종하지 못하고 모작품(模作品)을 만들어 상원사 종각에 안치하였습니다. 이제 상원사 범종의 원음은 애석하게도 들을 수 없지만 신라역사과학관에서는 그동안 관람료를 지불하시고 입장하신 후원가족 여러분의 정성에 힘입어 여기 이 장소에 실물크기의 복원제작을 성공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타종 후 1초 이내에 사라지는 타음(打音)과 10초 전후까지 이어지는 진동(몸체 떨림)에 이어 3분까지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는 은은한 맥놀이(beat)현상을 되 살릴 수 있어서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면 신라인들의 하이테크 문화재로 주조된 상원사 범종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무엇일까요?
조형상의 특징
종신(種身)의 최정상에 외국종에서는 볼수 없는 한 마리의 용(龍)이 커다란 원통(圓筒)을 짊어지고 뒷 다리를 힘차게 밀며 앞으로 전진하려는 활기찬 모습의 조형은 어떤 상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이 대나무 형상의 음통(음관)을 하늘로 향하는 소리의 확대 통로로, 또는 음향 필터 작용으로, 종 걸이의 지주역할 등으로 해석하는 연구가들도 있지만 미술사학자 황수영 박사께서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만파식적(萬波息笛=대나무 피리)과 문무대왕의 수증능에 얽힌 설화를 주목하여 신라종의 특색과 그 창조적 조형 의지를 삼국통일 초기의 풍토적 문화배경으로 연관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음향을 생각한 디자인 상의 특징
A·D 725년 종이 만들어 질 무렵의 신라 주종(鑄鍾) 기술자들은 오랫동안의 축적된 기술의 비법에 의하여 구리+주석+아연 (82% : 16% : 2%)의 합금이야 말로 가장 이상적인 소리의 주체적 요소이며 그 보조적 요건으로 음관(音管)의 크기, 당좌(撞座)의 위치, 유두(乳頭=돌기)의 크기, 명동(鳴洞=움림통)의 깊이와 종과의 떨어짐(거리)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들 보조적 요건들은 종 전체 두께와 크기에 따른 비례 관계의 유기적 수치로 은밀히 파악되고 있었으리라고 믿습니다. 이제 상원사 종신을 좀 더 구체적으로 관찰해 보면 상대(윗띠)와 하대(아래띠)는 반달형 연주문 분할이 서로 비대칭일 뿐만아니라 종신의 둘레와도 비대칭 분할 구도로 두껍게 동여 매듯이 조여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시각적으로 매우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종의 설계자는 주악비천(奏樂飛天)의 부드러운 표현양식을 선택하여 긴장감의 완화를 시도한 듯 합니다. 특히 이들 각 문양들의 비대칭적 분할 구도야말로 맥놀이현상의 결정적 작용원인이 된다고 음향 연구가인 진용옥 교수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비대칭 없이 맥놀이 없다″는 표현은 한국 쇠북(범종) 분석의 한차원 높은 과학적 해석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습니다.
주조상의 특징
주형틀(거푸집)은 어떤 방법으로 만들어야 용두(龍頭) 및 음관(音管) 뿐만아니라 주악비천 및 당좌, 그리고 상·하대의 섬세한 문양들까지도 완벽하게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그들은 무척 고민하고 연구를 거듭하여 마침내 종 전체를 밀랍형(蜜蠟形) 주조 공법으로 제작할 것을 결심하고 내외형 구조의 주형작업을 착수한 것으로 봅니다.

 

4전시실 :인쇄기술사

1. 해인사장경판

고려시대에는 주로 사찰에서 많은 불경을 찍었다. 1007년에 개성 총 지사 에서는 『보협인다라니경』을 찍어냈다. 고려시대의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다. 고려에서는 부처님의 힘으로 외침을 막고자 대장경을 새겼다. 1087년 초조대장경, 1101년에는 의천이 속장경을 새겼다. 이 경판은 13세기 몽고란 때 불타 버렸다.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재조대장경은 1236년부터 16년 동안에 걸쳐서 다시 새긴 것이다. 경판이 무려 팔만개나 되어 '팔만대장경' 또는 '고려대장경'이라고 한다. 오랜기간 원래의 모양이 잘 보존되고 글씨와 새김이 한사람 솜씨 같다. 이는 우리 민족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문화재이다.
① 고려 대장경(국보 32호)의 완성연대
- 고려 고종 23년(1236)에 시작 → 고종 38년(1251)에 완성
② 경판의 크기와 무게
- 가로길이 약 70cm, 세로 약 24cm, 두께 3cm, 1매 무게 평균 3.4kg, 총무게 약 280ton
③ 경판의 총 매수와 종류
- 1511종, 6802권, 81258매 (양면에 해서(楷書)로 양각)
④ 경판의 1매당 글자수 (字數)
- 23(행수) × 14(1행당 자수) × 2(양면) ≒ 644자(字)
⑤ 경판에 사용된 나무의 종류
- 산벗나무(64%), 돌베나무(14%), 자작나무(9%), 기타나무(13%)
해인사 장경각의 과학적 구조
팔만 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각은 수다라장, 법보전, 동사간고, 서사간고 모두 4동으로 된 경판전이다. 가야산 자연조건을 최대한 활용한 과학적 건축구조(科學的 建築構造)로 수백년간(조선 성종 19년 1488년 건립, 국보 제52호) 경판을 온전히 전하고 있다.
① 모든 방향에서 직·간접의 햇볕이 들어온다. 4계절의 황도(태양의 길이)와 고도 (태양의 각도)의 변화를 예측하여 건물의 좌향(坐向)을 정했다.
② 모든 방향으로 바람이 순환한다. 유입된 공기가 위·아래로 골고루 통풍작용을 할수있도록 되어있다.
③ 실내 온도의 차를 최소화 시켰다. 바닥과 천장의 온도차이를 1.5도 이내로 하고 가장 더울 때와 추울 때의 온도차이도 10∼15도를 넘지 않게 하였다. 
 

2. 직지심체요절

고려말 청주 흥덕사에서 찍어낸 『직지심체요절』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로 찍은 책으로서, 1972년 UNESCO에서 공인을 받은 것이다. 이책의 마지막 장에는 인쇄시기(1377), 인쇄장소(청주목 흥덕사), 인쇄방법(활자인쇄)이 기록되어 있다.
독일의 구텐베르크 활자보다도 70여년이나 빠르다. 우리 선조들이 인류 문화사상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것이 세계인에게 인정 되었다. 중국은 15세기 말경인 명나라 때부터 동활자를 만들기 시작했고, 일본은 16세기 말 우리 나라에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배워갔다.

 

3.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은 1966년 불굴사 석가탑 2층 탑신에서 발견되었다. 신라경덕왕 10년(751)에 석가탑을 세울 때 탑속에 넣은 것이다. 인쇄시기는 750년 경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 보다 20여년 앞선 것이다

 

5전시실:세종대왕 시대의 과학문화재

1. 월인천강지곡

한글 창제 반포 후 1년(1447) 한글 활자를 갑인 소자와 병행, 인출한 것으로 동시 간행 된 석보상절은 한자 밑에 한글소자로 하고 있으나 유독 월인천강지곡은 한글을 크게 부각 시켰다는 것은 민족의 주체성과 자긍심을 심어주고 있다. 혹자들은 한글자는 목활자 운운 하고 있으나, 검증결과 주물사 주조법에 의해 동활자로 찍은 것이 확인되었다.
한글 창제와 동시에 금속활자라는 것은 우리민족의 문화유산 중 백미로 91년 U.N가입시 대표 기념물로 선정되어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독일 구텐베르그 활자보다 빠르다.

 

2. 일성정시의

세종 19년(1437)에 세종의 명(命)에 의해 완성된 주야측시기(晝夜側時器)로 태양시(太陽時) 와 항성시(恒星時)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용으로 된 기둥에 적도에 평행한 원반을 지닌 자루가 물려 있으며 이 자루속의 구멍을 북극성에 맞추어 시간을 알아내는 주야 겸용시계다.
원반 위에는 주천도분환, 성구백각환, 일구백각환이 각각있어 돌게 되어 있으며 이들 환에는 백각눈금이 새겨져 있다. 백각법에 따라 만들어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당시 모두 4벌이 제작되어 국중에 하나를 설치하고, 하나는 서운관에, 나머지 둘은 평안과 함경의 양계 원수영에 하사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여기에 전시된 일성정시의는 높이 약 1m, 환의 지름 41.4cm, 청동으로 된 것으로 건국대학교 남문현 교수의 연구설계도면을 견본으로 하여 한국과학사물 연구소가 제작하였다.

 

3. 앙부일구(해시계)

조선시대에 사용하였던 대표적인 해시계이다.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명을 가진 민족이라면 시간을 측정하는 수단으로서 해시계를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문헌이나 유물을 보면 여러가지로 그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형태도 다양하다.
그러나 해시계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보는 방법 즉 사용할 줄 알아야 했고, 또 가질만한 신분이어야 했다. 따라서 해시계는 귀한 물건으로서 취급되었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의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가지 생각끝에 백성들을 위해 해시계를 만들게 되었다. 서기 1434년인 세종 16년 10월 초 2일의 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모든 시설에 시각보다 큰 것이 없는데, 밤에는 물시계가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로 만들었으니 그 모양이 가마솥 같고....
(서울 장안의 혜정교와 종묘 앞) 길가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백성들이 만들 줄을 알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앙부일구라는 해시계가 제작된 것이다. 그 후, 세종 19년에는 다른 종류의 해시계도 만들었지만, 이 앙부일구만큼 백성들의 사랑을 받고 널리 애용되지는 못했다. 앙부일구는 궁궐안의 곳곳은 말할 필요도 없고, 거리에도, 13도에 있는 관가에, 그리고 지방 군영에 널리 설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도 돌, 나무, 자기, 심지어는 상아로 만들어서 집에서나 여행중에 가지고 다니면서 널이 사용하게 되었다.
여기에 전시된 앙부일구는 보물 제845호로 지정받아 현재 서울에 있는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선명문화재 연구소가 복원 제작한 것이다. 이 앙부일구의 지름은 35.4cm이며, 구리를 부어서 만들고 검게 표면 처리하였다. 둥근 그릇은 4개의 기둥으로 받혀져 있고, 이 기둥들은 심자로 된 받침대 위에 박혀 있느데, 이 십자로 되어 있는 받침대에는 홈이 패여 있다.
이 홈은 그 속에 물을 담게 되어 있느데, 그 이유는 아부일구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서이다. 반구의 모양을 한 그릇의 안쪽에 해의 그림자를 만드는 영침이 하늘의 북극을 향해 꽃혀 있고, 그림자의 위치로 일년의 절기와 하루의 시각을 재 수 있는 흰 눈금이 그어져 있어서 계절은 1내지 2일 정도로 그리고 시각은 1분 정도로 정확하게 측정된다.
앙부일구의 둘레에는 24방위와 24절기가 적혀 있고, 한양에서의 북극의 높이가 37도 20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앙부일구에 새겨져 있는 불과 글씨는 모두 은으로 상감한 것이다.

 

4. 측우기

세계 최초로 발명되어 빗물을 측정한 기계이다. 조신시대는 농업을 천하지대본이라 하여 국가의 큰 정책으로 삼았다. 지금처럼 공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였으므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관개시설이 지금처럼 잘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비가 적게 와서 가뭄이 들어도 걱정,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가 되어도 조절할 방법이 없었다.
비가 왔어도 부족한지, 지나치게 너무 왔는지, 이 모두가 조정의 큰 관심거리였다. 한양에 있었던 서운관을 비롯해서, 지방 관청은 온 다음 땅을 파서 빗물이 얼마나 깊이 스며 들었는지 깊이를 재서 승정원에 보고하였었다. 농작물에 필요한 양인지의 여부를 알아 보기 위한 좋은 방법이었으나, 빗물이 땅 속에 스며 들어 가는 깊이는 흙의 상태 여하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흙이 얼마나 굳어 있는지 또는 모래가 얼마나 섞여 있는 흙인지에 따라 빗물이 스며드는 깊이는 같은 양의 비가 내렸다 하더라도 서로 다를 것이므로 정확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비가 올 때마다 흙을 파 본다는 일도 여간 번잡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종대왕은 좋은 방법을 골똘히 찾고 있었다.
이 일은 세종대왕만의 숙제는 아니었다. 서운관 관원은 말할 것도 없고, 궁궐 안에 출입하던 많은 사람들도 다 함께 걱정한 일이었다. 그런데, 좋은 방법이 호조에서 제안되었다. 높이 2척, 지름 8촌 되는 크기의 그릇을 쇠로 만들어서 대 위에 설치하여 비가 오면 서운관 관원으로 하여금 그 깊이를 재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세종대왕은 참 좋은 생각이라고 받아 들이고 즉각 제작하도록 명하였다.
이때가 세종 23년 8월 18일로서 1441년 8월 28일에 해당한다. 그로부터 약 9개월 뒤인 세종 24년 5월 8일(1442년) 에는 그릇의 크기를 높이 1척 5촌, 지름 7촌으로 약간 줄이고, 그릇의 이름을 측우기라고 정하였다. 세종대왕이 승하한 후에도 이 측우기는 계속해서 사용되었지만 어느 시대에 와서 인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길이 없지만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수백년이 지나는 동안 측우기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대단히 애석한 일이다.

5. 세종대왕 규표

태양이 정오에 가장 높게 떠 있을 때, 수직하게 세운 막대가 만드는 그림자의 길이를 재는 관측 기기를 규표(圭表)라고 하는데, 땅위에 높여 놓은 자 막대인 규(圭)와 그림자를 만드는 수직하게 세운 막대인 표(表)를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규표는 인간이 만든 천문 기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기기이다.
조선의 4대 국왕인 세종대왕(1397-1450)은 그의 재위 19년에 규표를 구리와 돌로 만들게 하고, 그해 4월 15일에 경북궁 경회루 북쪽에 있는 대간의 대(큰 천문대라는 뜻) 옆에 설치 하였다. 이때 세종의 천문학자들이 만든 규의 길이는 126척(26m 8cm)였고, 표의 높이는 40척(8m 28cm)이었다. 그러나, 이 규표도 그후 거듭된 외국의 침략군에 의해 파괴되고, 급기야 일제 36년간의 통치기간에 그 흔적 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여기에 전시된 규표는 세종대왕의 규표를 1/10로 축소하여 복원한 것으로써 규의 자재는 흑요석, 받침대의 자재는 화강석, 표의 자재는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한 구리, 들보(횡량)의 자재는 구리, 추는 3개이며 자재는 구리이다.

 

6. 별시계

조선시대 후기에 밤에 별의 위치를 관측하여 시간을 알아 보는 데 사용한 별시계이다. 나무로 만든 받침대 위에 반원 모양으로 된 구리로 만든 고리가 얹혀 있다. 이 고리의 양쪽에 회전축이 있고 이 축에 바깥 지름 34.0cm 안 지름 28.6cm 되는 엷은 판으로 된 환이 걸려 있다.
이 환의 바깥 쪽에서부터 각각 2mm, 3.5mm, 3mm, 5mm 간격으로 네개의 동심원이 안쪽으로 그어져 있다. 가장 바깥 쪽에 있는 원의 위에는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12자가 기입되어 있어서 24시를 표시하고 있다. 이 원과 그 안족에 있는 둘째 원은 24개의 선으로 등분되어 있어서 24시를 가리킨다. 이 24시의 한 칸은 지금의 1시간에 해당한다.
둘째와 셋째 원 사이는 이 1시간이 다시 네칸으로 작게 나위어 진다. 이렇게 된 이 작은 한 칸은 옛 시간으로는 1각인 동시에 각도로는 3도 3/4에 해당하며, 현대 시간으로는 15분이다. 세째와 네째 원 사이는 36칸으로 나위어져 있다. 따라서 이 한 칸은 10도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네재원과 환의 안쪽 사이는 360개의 선이 그어 있어서 1도의 각을 측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로서, 이 환의 눈금으로는 옛 방식의 12시간 96각 제도, 24시간 48각 제도, 그리고 10도 단위와 1도 단위의 각도 측정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이 환에는 혼을 돌릴 수 있도록 끼우 놓은 원반이 있다. 이 원반에는 10도 간격으로 36개의 방사선이 하늘의 경도(또는 적경)를 표시하고 있다. 또한 중심에서부터 9개의 동심원이 북그(원반의 중심)에서 10도 간격으로 적도(원반의 가장자리)까지 등간격으로 그어져 있어서 하늘의 위도(또는 적도)를 표시한다.
원반의 한 면에는 북반구의 별을, 뒷면에는 남반구의 별을 분리하여 표시하였기 때문에, 별의 위치에 따라 원반을 180도 회전시키면서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원반에 표시된 별들이 속하고 있는 별자리 이름은 천상열차분야지도와 같은 형식이나, 글자는 서로 다른 것이 더러있다. 원반에는 황도도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 황도 근처에 24절기의 이름이 시계바늘과 반대 방향으로 적혀있다.
사용 방법은 먼저 받침대 위에 붙어 있는 반원으로된 고리의 양 끝의 동서 방향이 되게 한 다음 하늘의 별들이 보이는 방향으로 원반을 조심스럽게 돌려서 맞춘다. 그리고 원반의 중심을 축으로 하여 회전하는 막대를 돌려서 막대의 양쪽 끝에 붙어 있는 귀에 눈을 대고 원하는 별을 찾아 맞춰 놓은 환의 눈금을 읽어 둔다.
얼마 후에 다시 그 별이 서쪽으로 얼마나 자리를 옮겼는지 귀(이표)로 별을 확인하고 눈금을 다시 읽는다. 이 때 눈금이 가리키는 각도의 차이 또는 시간선의 간격이 바로 두 시각 사이에 경과된 시간임을 알아낸다. 이 별시계의 원본은 덕수궁 궁중유물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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