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와룡산 선사시대 유적지 자료 좀 보여주세요!!

안동 와룡산 선사시대 유적지 자료 좀 보여주세요!!

작성일 2006.02.19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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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와룡산 선사시대 유적지 자료 좀 보여주세요!!

궁금해서요....가능하면 빨리좀...


#안동 와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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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와룡 선사시대 고인돌 유적지

  안동와룡은 선사인들이 거주하면서 거석문화의 꽃을 피운 지역으로 다양한 형태의 산물들이 상호조화를 이루고 있어 선사시대 문화기행에 으뜸가는 명소로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군(고창, 강화, 화순)이 세계에서 뛰어난 유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지난 2000년 11월경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한국 고인돌의 예술적 우수성과 타월한 가치를 국제적으로 공인 받아 보존되고 있다.

  안동와룡산 거석유적들의 특징은 다듬어진 기념물이 예술성 면에서 독창미가 뛰어나고, 형태면에서 독창성이 가미된 독득한 형태로 발달되어 이 땅에 살던 선조들이 주술적 의미를 가미시커 생명을 불어 넣은 선돌과 고인돌이 함께 선사문화의 산물들이다.

   안동와룡산 일대 뿌리깊은 선사시대 문화기반위에 준비된 역사시대를 맞이한 안동 전통학문발전은 한국 정신문화의 꽃을 피워 수준 높은 안동 전통정신철학으로 승화되었다.

  따라서 안동와룡 선사 유적지는 다양한 고인돌과 선돌들이 함께 자리잡고 있어 한국 거석문화의 박물관이라 여겨지며, 안동 와룡산은 꿈나무들의 문화유적 탐방투어와 선사시대 역사교육장에 산실이 될 것으로 보인다.

※ 고인돌 : 와룡1호~15호, 선돌 :  선돌1호~10호

준비중....

* 안동와룡산 선사유적 고인돌의 특징

1.꼬리달린 고인돌

2.쌍두석식 고인돌과 다지석식 고인돌

3.고인돌 피장자와 관련있는 다양한 성혈

4.고인돌 채석장

5.흔들바위 독바우

6.거북형태와 배모양 고인돌 등...

 

◆ 안동와룡 선돌(立石) 유적지

[소재지] 주계리 와룡산 일대

[해석] 안동와룡산은 선조들이 돌에 생명을 심어 놓은 유적지로서 능선을 따라 다양한 형태로 세워진 선돌들이 특이하며, 옛날 이곳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곰이나 나무 혹은 돌이나 태양, 달 같은 것에 소원을 빌었다. 이처럼 모든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애니미즘이라고 하고, 이와 비슷하지만 특정한 동식물 등을 수호신으로 삼아 숭배하는 것을 토테미즘이라고 한다. 단군 신화에 나오는 곰을 숭배하는 부족의 믿음이 토테미즘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런한 풍습은 신석기 시대부터 생겨났다

  선돌은 원시인들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기능과 한 집단의 영역을 표시하는 표지석에 역할도 했으며, 선사시대 역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 주고 있다.

  이곳은 미래의 주인공이 될 우리 어린이들에게 색다른 자연환경과 고대 선사시대 체험장으로써 역사기행에 큰 무대가 되고 있다.


  선돌 1호인 곰신바위는 원시사회 당시 출산의 중요한 것을 보여주는 남근과 여근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 음기에 양기가 삽입된 행위가 섬세하게 표현된 것으로 보아서 성을 숭상한 성교모의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지금까지 알려진 삼국시대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토우의 성신상 보다 선사시대 와룡산 희귀한 선돌의 성신상(聖身像)이 역사적으로 앞서고 있어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선돌 2호인 부처바위는 능선 비탈에 남근석과 쌍으로 세워진 것으로서 둥근기둥(圓椎)모양이고 뒤에는 미륵부처 형상이며 전자는 남성을 상징하고 후자는 여성을 상징하여 성별구분이 뚜렷한 남성 상징물이 여성 상징물 보다 더 크다.

  후대에 이르러 부처바위는 성신신앙의 기능인 마을의 풍요를 빌거나 집안 자손에 번성과 풍요로운 수확을 비는 생식적인 기능을 행하고, 동양 정신적인 뿌리의 한 형태로서 고을민의 민간신앙처로 보호받고 있다.


선돌도 준비중..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주계리

높이 : 해발461m(강화도 마니산 높이)

주변 명승지 : 도산서원, 도산온천, 산림박물관, 국학원(10분 거리), 봉정사(20분거리), 하회마을(20분거리)

 

대중교통
  - 동서울터미널 : 안동행(2시간 40분 소요)
  - 자가운전 :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 남원주IC
     (오른쪽으로)→중앙고속도로→제천→단양
     →영주→서안동IC→안동시청→와룡삼거리
     →주계리(와룡산입구)→용산주차장
     (소요시간 2시간 50분)
  - 청량리역 기차 : 주앙선 안동행 무궁화,
     새마을호(소요시간 3시간 40분)

 

특징
  안동와룡산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거석문화(巨石文化)가 발달하여 구전자원(口傳資源)이 관광자원화된 곳으로서 선사시대 문화가 기반이 되어 역사시대 전통문화가 꽃필 수 있도록 저력(底力)이 된 산의 형세가 천하를 호령하고 돌아온 용이 편히 누운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음이온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소나무 침엽수림으로 형성되어 있어 등산객들은 음이온의 효능을 몸소 체험하면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산 곳곳에 각종 명소들이 산재해 있고 봄과 가을 와룡산 해돋이는 구름과 안개에 의한 구름 위 봉우리에서 일출은 신선의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봄철 백담길 일대는 각종 야생화가 온 지천을 이루고, 초여름 아카시아 꽃이 필 때면 계곡 전체가 아카시아 꽃향기가 넘치는 나무숲을 걷는 산행은 등산객들의 마음을 싱그럽게 할 것이며, 겨울철 함박눈이 내리면 등산로 주변 노송에 눈꽃이 피어난 설경의 아름다움은 등산객들의 마음을 자연의 위대함에 경건하고 숙연해지도록 감동시키고, 와룡산에서의 저녁노을 해몰이는 등산 귀가길에 장엄하고 엄숙함으로 또 한 번의 감동과 자연의 아름다운 위용을 자랑한다.
  안동와룡산은 전국에서 가장 이상적인 초.중등학교 및 가족단위 산행지로서 으뜸가는 자연환경이 현존하고 있는 곳이며,
와룡산 일대 선사시대 선돌과 고인돌에 독특하고 독창적(獨創的)인 형태의 예술미(藝術美)적 우수성은 우리나라 전통 황토문화창달에 일조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와룡산의 유래
낙동강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역사시대 청동기 및 철기문화의 꽃을 피운 지역으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다양한 거석문화가 발달 보존된 와룡산 일대는 빼어난 산세와 물과 토질이 좋으며, 학행높은 선비들이 많이 태어난 곳이다. 와룡산은 나라와 지방고을에서 어려운 일이 발생할 때마다 관리들과 고을민들이 제관이 되어 천제를 올린 곳이고, 안동부 동쪽의 진산(鎭山)으로서 민족의 소원을 발원하던 사직단과 기우단이 현존하고 있으며, 산의 형세가 천하를 평정하고 돌아온 용이 편히 누운 자세를 취하고 있어 조선조 중기 문신학자 백담 구봉령 선생에 의하여 처음으로 용산(龍山)이라 칭하고 까투리봉 일대를 와룡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와룡산에 용트림하는 황룡과 안동호에서 용트림하는 흑룡이 물을 만나 천하를 평정하니 안동의 전통 정신문화는 더욱 발전 계승될 것으로 보인다.

와룡산 역사 속으로
  [소재지] 안동시 와룡면 주계리 와룡산
  [구   전] 안동 와룡산은 우리민족의 애환을 함께한 명산으로 주변 민중들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어 안동의 진산(鎭山)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던 이곳에 고승들은 불국세계를 지상에 구현해 내려는 취지에서 수다사와 웅대한 현사사(玄沙寺)를 지어 중생구제와 학문도장의 기능을 겸한 원대한 포부를 품었던 고사찰이 자리잡고 있었다.  와룡산 전면 남서쪽 기슭에 자리 잡았던 수다사는 신라시대 건축했던 고사찰로서 전면에는 1만평 규모의 전답(田畓)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규모가 거대하고 많은 승려들이 거주한 것으로 보이며, 고려말 몽고 침략전쟁으로 전소 폐사된 것으로 전해진 절터에는 돌담과 돌로 만들어진 복개된 수로와 주춧돌 및 우물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현사사는 현존하지 않지만 고려시대 건축된 고사찰로 고려의 시대정신에 따라 종교의 기능과 고승들의 비방(秘方)을 바탕으로 빈민구휼을 위한 혜음원(의방)의 기능도 겸하며, 건축, 석공 등 각 분야의 장인 및 노동력을 갖고 있어 지역 민중들의 사회복지에 현사사는 중심이 되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때는 누각을 비롯하여 많은 부속채를 세워 인근에서 보기 드물게 99의 절칸 안에는 거대하고 웅장한 학문의 도장인 강당이 있어 인근에 학식이 풍부한 젊은 선비들이 모여 덕망(德望) 높으신 아홉 신선이라 칭하는 귀인들을 모셔와 강논을 듣고, 경전과 논어 등을 공부하며 거처했던 곳이다.
 월천(月川) 조목(趙穆)선생은 조선중기 문신 학자로서 이황선생을 모신 팔고제(八高苦第)의 한 사람으로서 1580년 이후 공조참의?공조참판 등을 제수받았으나 명덕(明德)을 중시해 모두 재덕과 노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내고 사퇴한 후 현사사에 들어와 후진 양성과 독서를 즐기고 심신을 수양 하였다.
 1592년 도요도미히데도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중국을 치러간다는 구실을 삼아 20만 대군을 이끌고 동래현(부산)으로 침입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에서는 나라를 구하고자 이순신 장군 등이 이끄는 관군 및 의병과 사명대사를 비롯하여 승병들이 힘을 합세(合勢)하여 싸우는 한편 당시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이여송이 이끄는 4만의 원군이 조선에서 8 개월간 참여한 적이 있는데, 이때 명나라 이름있는 장수들이 많이 들어와 당시 조선과 명나라에서는 풍수지리라 하여 산세와 물줄기의 조화로 여러가지 길흉(吉凶)을 예견하는 안목이 있었던 때였다.
 당시 시기심이 많은 명나라 장수들은 앞으로 조선에 훌륭한 인재가 많이 태어나면 결국 명나라에까지도 폐를 끼칠 것이니 이를 미리 방지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이여송은 이곳을 지나던중 와룡산 산세와 물줄기가 잘 조화되어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배출될 것이라는 구전과산세를 보고 부하를 시켜 와룡산 가랠목재를 끊고, 젊은 학도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학문에 도장인 웅장한 현사사를 보고 비상히여겨 현사사 동쪽 우백호의 산세 줄기인 재궁목재를 끓어 쇠말뚝을 박으니 붉은 피가 용솟음쳐 흙을 적시고, 와룡산이 사흘 동안이나 울었다는 말이 전설로 구전되고 있다.
 이것은 명나라 이여송 원군의 행태와 만행에 맞서 저항한 현사사 승려들의 항쟁으로 물드린 피와 절규의 소리였던 것으로 보이며, 현사사는 임진왜란시 의병들과 승병들의 항거하는 근거지라 하여 외침에 의하여 전소되어 폐사(弊寺) 되고, 시련을 당한 승려들은 평소 갈고 닭은 무술로 나라를 구하고자 승병을 결성하여 국난극복(國難克服)에 큰 힘이 되었다고 구전되고 있다.
 결국 임진왜란은 안동이 낳은 문신학자 류성룡 대감의 선견지명(先見之明)과 신의(信義)와 애국심(愛國心) 및 충효사상이 바탕이 된 이순신 장군의 민족애(民族愛)와 뛰어난 전락전술에 의하여 종식되면서 조선(朝鮮)은 국난을 극복하고, 민심을 수습한 후 비로서 태평성대에 기틀을 마련하였다.
 임진왜란 후 신축년(辛丑年)에 천감(天監)이라는 고승이 들어와 현사사를 중창하여 번창하였으나 6.25동란이 일어나면서 또다시 와룡산 현사사는 전쟁중의 전소되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으며, 1980년대까지 현사사지 절터에 있던 높이 약 1.7m, 지름 약 4.2m의 석련대좌 (복련좌, 안상, 양련좌) 2기와 탑비(塔碑) 중 비신(碑身)은 어디론가 반출되었고, 현재는 약수탕과 탑비(塔碑) 밑에 구부(龜趺)와 주춧돌 그리고 무성한 대나무 숲이 옛 현사사의 명성을 지키고 있다.
 현사사와 수다사를 품고 있었던 와룡산은 자연조건이며 풍광이 빼어날뿐더러 예로부터 선사문명의 유적이 많고, 많은 승려들이 상주하는 불교수행의 성지로서 민중들이 신성시하는 명산터로 사랑을 받아왔다.

와룡산 참솔의 예찬론(禮讚論)
 
〔樹種〕안동와룡산 조선소나무
 〔내용〕안동와룡산은 특이한 한냉기후로 인하여 건강한 조선솔 낙락장송(落落長松)이 숲을 이루고 있어 자연인들은 솔림욕으로 송화향기를 맡으면서 일상에서 지친 피로를 풀고, 본 사진자료는 선사시대 과학이 가미된 산물로서 우리나라에서 색다른 형태의 자연환경과 뛰어난 행정력으로 깨어난 와룡산 선사시대 역사 산물들에 관한 아름다운 구전자원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참솔은 십장생중 하나로서 조선소나무 참솔잎은 예로부터 수행하는 스님들의 선식으로 전해져 왔으며 솔잎에서 발산되는 테르핀유계의“피톤치드”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병균에 대한 면역력을 증진시키며 천연방부제의 효과가 있고 강력한 음이온 삼림욕의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음이온이란 소나무 숲이나 폭포, 온천 등 자연환경이 우리 몸에 상쾌함을 느끼게 하는 마이너스(-)전화를 띤 공기의 원자를 말하며, 음이온을 마시면 세포의 신진대사를 촉진하고 활력을 증진시키며 신경안전과 피로회복, 식욕증진의 효과가 있어 음이온은 공해로 병들어 가는 우리몸을 되살리고 공기 비타민으로까지 불린다.
  안동와룡산천에 용트림하며 뻗은 참솔은 맑고 아름다운 우리 안동의 마음이요, 빼어난 우리 와룡산천의 혼(魂)이다. 따라서 전통정신문화가 꽃피워진 안동은 길이 태평성대(太平聖代)하리라.


 


 

산행코스

  (산행코스)
◎산행코스: 와룡산주차장, 龍花亭→당집골등→선비길→황룡도강지→산지당길→산지당→용천약수탕→사자바위→칠성바위→병풍바위→카투리바위→견우암→직녀암→용산기우단→부처바위,두꺼비바위→개구리바위→옥좌바위→곰남근바위→미륵바위→용두봉(하늘공원)→신선길→신선바위→용산사직단→금이온약수→용산길→주차장 (산행 소요시간: 3시간)


  (산행내용)
와룡산 안내도 자료 아래 참조

  (일출코스)
와룡산주차장→용산길→일출길→부처바위,두꺼비바위→개구리바위→옥좌바위→곰남근바위→미륵바위→일출봉(하늘공원)

安東와룡산 관광등반 편의시설
ㅇ 주차장은 중.소형 주차차량 최대 100대 수용, 주차료, 입산료 무료, 화장실, 대형 쉼터하우스(겨울철) 1동
ㅇ 입산입구에 연꽃 연못과 용화정이 있고, 주변에는 오래된 노송들이 많아 등산객들의 쉼터로서 최적지
ㅇ 산행시 전망좋은 곳곳마다 벤치와 각 소재마다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고, 등산로에는 길 안내 표시판이 설치되어 있음.
ㅇ 주차장 주변일대 및 계곡에는 캠프나 야영(전기사용)이 가능하며, 배구, 농구, 미니축구, 족구장(다목적 소운동장)이 있음.
ㅇ 安東와룡산 거석문화 관광등반객
 전국 초.중등학교 수학여행(안동호 물안개 일출, 거석문화 탐방), 일반 산악회, 가족단위 산행, 수도권 불교, 교회, 성당 등 학생부 여름 캠프, 대학생 MT 및 야유회, 직장 단합대회, 보이스 카우트 야영, 체험 자연관찰학습 등

 


 와룡산 일출

 

[위치] 안동시청에서 요촌방향으로 30리 동쪽 와룡산 정상
[유래]
와룡산 일출은 특히 가을에는 안동호 물안개와 운해로 인하여 일출봉 8부 능선까지 천지가 잔잔한 수평으로 자욱한 안개와 운해위에 드러난 봉우리에서 일출시 기분은 마치 신선이된 기분을 자아내게 할뿐더러 강원도의 정동진 일출과 견줄 만한 전경을 볼 수 잇는 장관을 연출한다.

와룡산 일출은 안동에서 해돋이 전경이 가장 경이롭고 경북 북부지역에서 제일 먼저 일출을 볼 수 있으며, 기암 괴석들이 등산로를 따라 산재해 있고, 안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변 경관을 볼 수 있다. 미륵바위를 지나 용두봉에 이르면 약 150평정도의 넓은 하늘공원이 있고 정상에서 바라본 안동호는 구비구비 사방으로 펼쳐져 있어 등산객들의 마음이 시원하면서 상쾌해지고, 소나무 숲에 몸을 맡기면 일상의 피로가 한꺼번에 쓸려 나간다. 와룡산은 氣를 받는 영험이 있는 산이기 때문에 매년 정월 초 하루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해맞이 행사를 하기 위하여 찾고 있는데 최근에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등산하는 가족들이 많으며, 남녀 노소가 등산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각광받고 있어 각처 산악회에서의 등산객들이 날로 증가 추세에 있는 곳이다.

 

일출시간

■ 우리나라 동해안 해뜨는 시간

날짜

1.1

2.1

3.1

4.1

5.1

6.1

7.1

8.1

9.1

10.1

11.1

12.1

일출시간

7:38

7:28

6:56

6:11

5:30

5:05

5:06

5:27

5:53

6:18

6:47

7:19

※ 와룡산에서의 일출시간은 약4~8분간의 오차가 발생할 수 있다.

 

 두꺼비 바위 설돌

 

[위치] 용두봉 정상 부근 능선에 위치
[유래]
용두봉 능선에 위치한 바위의 모습이 한 쌍의 두꺼비가 사랑하는 모습을 하고 있어 두꺼비 바위라 부르는데 사람들은 이곳에 자식의 번창과 가정의 안녕을 축원하면서 소원성취를 빌고, 두꺼비바위는 세워진 위치나 형태로 보아 일출 및 태양숭배와 관련된 것으로서 바위 앞에 제단이 준비되어 있고 두꺼비바위 선돌은 부락민의 신앙처로 보호를 받아왔다.


 

 와룡산 물굿과 기우제 의식

 

[위치] 와룡산 기우단
[근거] 옛날 와룡산 주변고을 주민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농사짓는 순박한 백성들이었다. 고려시대때부터 가뭄이 극심하게 닥쳐 농사를 짓기 어려울 때 가뭄에 대처했던 것은 기우단 거북바위 아래 현존하지 않지만 돌배나무 고목 앞에 당집을 짓고 물굿을 하였으며 물굿하기 며칠전부터 부정을 방지하기 위하여 금줄을 쳐서 지성을 드리는 세심한 배려를 했다. 당상위에서는 풍성한 제물을 준비하여 올리고 물굿행사를 하였으며 무녀들의 발원과 주민들의 기원이 담긴 소지를 태워 하늘로 올리고 3개봉에 생솔까지를 태워서 구름을 만드는 물굿을 하였다. 지금도 지명이 물굿당이라고 불리고 있다.


 조선 후기부터는 가뭄이 극심할 때마다 물굿당 정상 기우단에서 무제를 올렸다. 고을에서 길일을 택하여 제사 음식물을 풍성하게 준비하고 저녁을 먹은 후 고을 주민들은 기우단에서 무제를 올리는데 올리기 전에 살아았는 백닭의 목을 따서 피를 제단 주변에 뿌리며, 밤중에 무제를 올리고 그 음식물을 나누어 먹으면 각자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풍습이 있어 즐겁게 먹은 후 용두봉과 기우단, 까투리봉 3개봉에 생솔까지를 수북이 쌓아 동시에 불을 피워 많은 연기를 하늘로 올리면 주민들의 청원과 지성의 감동을 받아 하늘에서 많은 비를 뿌려주어 농민들은 무사히 농사를 지을 수 있어 기근을 면하였다고 한다. 와룡산(臥龍山)은 「영가지」에 의하면 고려시대때 물이 많은 산 수다산이라고 부르다가 조선조 중기 구백담에 의하여 처음으로 와룡산 또는 용산이라 하였다. 안동부 진산인 와룡산이 영험이 있어 가뭄이 심하면 관리들과 지방고을원이 제관이되어 물굿과 무제를 하늘에 올리는 천제의식이 행해진 유서깊은 곳이다.

 거북 바위

 

[위치] 일출봉 정상 부근에 위치
[유래] 예로부터 거북은 집안이나 고을에 액운을 막아주는 영물(靈物) 또는 신물(神物)로 간주되어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동시에 인간의 미래를 알려주는 예시적 동물로 인정받아 왔다. 이 바위 모양이 거북 모양이고, 머리는 마을를 향하고 있으며, 근래에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목과 머리가 훼손되었다. 주민들은 거북바위가 마을에 풍요와 안녕을 빌어준다고 믿고 있다.


 

 까투리 바위 선돌

 

[위치] 까투리봉 정상 부근에 위치
[유래] 이곳에 서식하는 보라매들이 까투리를 사냥하게 되면 반드시 이 바위로 가져 간다고 하여 까투리바위라고 부른다.
이 바위 상단 측면부분에 구멍이 있는데 1년 12개월 계속 물이 차 있는 것이 신비하며, 그것은 아득한 옛날 고을에 예쁜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처녀가 뒷산으로 나물을 캐러 올라갔다가 까투리바위에서 발을 헛디뎌 그만 떨어져 꽃다운 나이에 그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그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정화수가 만들어 졌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까투리봉 테일러스

[위치] 와룡산 북동쪽 까투리봉 전면 선비길에 위치

[유래] 까투리봉 전면 일대에는 화강암이 풍화작용과 기온의 영향을 받아 자연적으로 50Cm ~ 200Cm 정도의 돌 조각들로 얼기설기 산기슭에 쌓여 만들어진 테일러스가 발달한 지형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매우 이채롭게 보이며, 안동와룡산은 중생대 백악기 지층을 이루고 있어 광산업이 성행했으며,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어 초.중등학생들의 지구과학에 대한 연구와 지질 자연학습장으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부처 바위

 

[위치] 용두봉 능선 두꺼비바위 옆에 위치
[전설]
마주보는 학가산에 있는 부처바위께서 보살바위에게 와룡산의 부처바위를 모셔 오라는 명을 주어 명을 받은 학가산 보살바위는 와룡산의 부처바위를 모시로 왔으나 부처바위는 이곳 신령님을 모셔야하는 막중한 사명감과 일대 많은 중생들을 보살펴야 하기 때문에 따라가기를 거절했다. 보살바위는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함께 가기를 설득하다가 날이 밝아 그만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 부처바위 앞에 바위가 됐다고 하는 전설이 유래되는 바위다.
 


 

 사자 바위

 

[위치] 와룡산 동쪽 까투리봉 올라가는 입구 칠성바위 뒤에 위치
[유래] 와룡산 견우ㆍ직녀암 올라가는 기슭에 사자형태의 바위가 기암괴석 사이에서 용력(用力)을 쓰고 있는 형상이 이채롭고, 바위 전체는 상여모양을 하고 있어 옛 선인들은 상여바위락고도 불렀다.

 사자바위와 붙어 있는 우뚝 솟은 커다란 칠성바위 윗면이 편편하여 옛 선비들은 이곳에 앉아 사자바위 호위를 받고 장기바둑 유희(遊戱)를 즐기고 호연지기(浩然之期)를 기르던 장소로서 한여름에는 계곡에서 불어오는 높새바람에 취하고, 조망이 아름다운 곳이다.


 병풍 바위

 

[위치] 까투리봉 사자바위 옆에 위치

[유래] 귀암괴석들 모양이 흡사 사람들이 세운 듯한 병풍앞에서 의미있는 의식을 행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병풍바위라 하는데 이 바위 일대는 상여바위와 칠성바위가 함께 있어 옛 선인들은 조화롭고 의미있는 곳이라 하였다.

 기자(基子) 바위 선돌

 

[위치] 구선대 병풍바위를 지나 한 굽이 더 가면 길가에 위치
[유래] 마을 어귀에 마치 갓을 쓰고 있는 형상의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바위다. 
바위의 전면이 거의 수직을 이루다가 중간에서 턱이 지면서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 있는데 돌을 던져서 이곳에 돌이 얹히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전한다. 왼손으로 던지면 더 좋다고 하는데 바위 부근에는 기자를 바라는 사람들이 던져놓은 작은 돌이 수북히 쌓여 있으며, 이 기자바위 선돌은 부락민들의 신앙대상으로 보호받고 있다.


 

 구선대

 

[위치] 게실마을 아래 기자바위 옆에 위치

[전설] 전설에 따르면 아홉 선녀들이 구선대 맑은 계루에서 목욕을 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하여 구선대라 불렀는데 지금도 가을이면 만산홍엽(滿山紅葉)의 풍광이 매우 아름답고 구선대는 마치 병풍을 펼쳐 놓은 현상의 병풍바위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크고 작은 괴암들이 모여 있으며, 그 앞에는 맑은 계루가 흐르는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이곳은 백담 구봉령, 유일재 김언기, 회곡 권춘란, 송암 권호문, 지산 김필원 등 아홉분의 학행 높은 선비들이 산사(山寺)에서 모임을 맺고, 이곳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다고 한다. 최근 안동호 강변 순환도로 공사로 인하여 훼손되었다.


 신선대 범의 굴

 

[위치] 용두봉 남쪽 아래 7부 능선 기슭에 위치

[전설] 암석이 깍은 듯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바위산을 신선대라 부르며, 신령님들이 범의 호위를 받으면서 잔치를 벌였다는 전설이 있다.

 사람들은 이곳에 소원성취를 위해서 불공을 드리고, 무녀들은 산신기도를 올리는 장소로서 깊은 동굴 안에는 용신암(龍神岩)이 자리잡고 있어 관광객들으 신비하고 흥미롭게 보며, 옛날 용두고을 민초들이 신선대 범의 굴에서 불을 피우면 새터 앞산 황룡도강지 전면 마루에 연기가 나온다는 말이 전해지면서 와룡산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아주 긴 동굴이 형성되어 있다고 믿어온터라 호기심에 이 땅에 살던 선조들이 불을 피운 흔적이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1870년경 신선대 아래 구 기와집 농가 한 가구가 거주하고 있었으나 신선대 범의 굴에서 서식한 호랑이들의 잦은 출현으로 결국 마을로 이주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안동와룡산

해발 460.8m 안동시 와룡면 주계리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안녕하세욧~~저두 6학뇬 이에용~ㅎㅎㅎ

수고~^^
(시작!!)

암사동선사주거지유적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0여년전에 우리의 조상인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유적으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밝혀진 신석기시대의 최대 집단취락지이다.
이 유적은 동남쪽의 구릉에 신석기시대 다음시대인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유적(無文土器遺蹟)과 인접되어 있어 두시대의 문화가 접촉하는 양상을 알려주며, 또 농경문화 개시를 입증하여 주는 고고학적자료도 발견되어 한국선사문화의 추이를 밝히는데 있어서 유일하고도 귀중한 유적이다.
이 유적은 1925년 을축년 홍수에 한강변 모래언덕 지대가 심하게 패어져 수많은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노출되면서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 임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1967년에는 대학연합발굴단, 1968년에는 서울사대 조사팀, 1971∼1974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 그리고 1983년에는 서울대 암사동 유적발굴단에 의한 대규모 조사로 수혈주거지군(樹穴住居地群)과 그 부속시설이 확인되었고, 이후 계속된 발굴조사에 의해 많은 빗살무늬 토기와 석기는 물론 청동기시대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이 암사동선사주거지유적은 1979년 7월 26일 사적 제 267호로 지정되었고 1981∼1988년까지 유적지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총면적 78,133㎡의 문화재 보호구역을 확대하여 9차에 걸친 복원공사로 신석기 시대 움집이 복원되었고 선사유적전시관을 건립하였으며, 이용시민들의 불편이 없도록 주차장, 산책로 등 편의 시설을 완비하여 '88년8월 준공되어 개방되고 있다.

▣ 신석기인의 생활상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집터로써 암사동 유적은 제일 먼저 알려진 곳으로 이 유적의 연대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에 의해 기원전 4∼3천년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석기시대에는 거의 대부분 땅을 깊이 파고 움집을 견고하게 지어서 살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석기시대는 완전한 생산경제의 단계가 아니고 일부 수렵, 채집, 어로에 의존하는 경제단계였기 때문에 대형 저장 시설 보다는 대부분 간단한 제작시설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암사동 움집은 한강을 끼고 널직한 평지에 자리잡고 있어 당시 사람들의 생활기반이 고기잡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나타내준다고 하겠다. 이것은 어망추, 작살 등 어로도구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뒷받침되며, 화살촉들의 발견으로 인근야산에서 수렵을 했으리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또 도토리, 갈판, 갈돌의 발견은 신석기인들의 주식량이 도토리였으며 보습, 돌낫같은 농기구의 출토는 밭농사가 일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 움 집
신석기시대 살림집은 동굴을 이용한 경우도 있으나 움집이 일반적이다. 움집이란 일정한 넓이와 형태를 가진 구덩이를 파 집바닥을 땅밑에 두고 구덩이안은 별도의 벽체 시설없이 서까래가 바로 땅에 닿게 된 집을 말한다.
신석기시대의 움집은 해안가 구릉이나 큰 강변의 대지에 지어졌는데, 직경 4∼6m 크기의 원형이나 모를 죽인 방형의 구덩이를 깊이 50∼100㎝정도 판 다음 화덕자리등의 내부시설을 마련하고 지붕을 덮었다.

화덕자리는 돌이나 진흙으로 원형이나 타원형, 장방형의 테두리를 돌려 집 중앙에 설치하였는데 보온과 취사에 이용되었다. 바닥은 아무런 시설이 없거나 또는 진흙을 깔아 다진 것이 있는데 그 위에 풀이나 짐승가죽 등을 깔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붕은 움구덩이 주위에 서까래를 걸치고 한 쪽 끝을 움 중앙에 모이게 묶어 골격을 형성하였는데 서까래 아래 사이에 잔나무 가지나 갈대, 억새 등의 풀을 이어 덮었다.
움집의 규모로 작은 움집은 2∼3명, 큰 움집은 5∼6명이 기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저장공(貯藏孔)
주거지 외곽에 자리잡은 저장공이 모두 4개 확인되었는데 모두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직경 2.3m에 깊이 0.34m, 직경 0.9m 에 깊이 0.35m, 직경 0.95m에 깊이 0.43m, 직경 0.85m에 깊이 0.28m의 4개가 보이고 있다.
규모가 비교적 크기 때문에 저장공(貯藏孔)라 할 수 있는 이 시설물은 원형의 수혈로써 외곽의 한쪽에 2단의 계단을 만든 출입시설이 있다. 직경은 3.4m, 깊이는 1.74m인데 바닥은 어깨면으로부터 1.4m깊이에서 평탄해지다가 중앙부에 이르러 장방형에 가깝게 좁아지면서 깊게 파였다.
저장공에는 집바닥을 파고 바닥이 없는 토기를 거꾸로 묻어 만든것과 벽쪽을 파서 별도의 독립저장 시설을 마련한 것이 있다.

▣ 출토유물
집터에서 드러난 유물중 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빗살무늬 토기이다. 이 토기는 바탕흙이 사질토에 운모가루 도는 석면과 활석이 섞여 있으며, 흙테를 하나씩 따로 빚어 차례로 쌓아올린 수법으로 만들어졌다.
그릇 모양은 곧은 입술모양에 뾰족밑 또는 둥근밑이고 반 달걀모양을 하고 있다. 빛깔은 부드러운 갈색이나,문살무늬, 생선뼈무늬 등 여러 유형이 있으며 무늬가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지역별로 크게 동북, 서북, 중서부, 남부지방의 4개 문화영역으로 나눌 수 있으며 중서부 지방은 뾰족밑

토기가, 동북지방은 납작밑 토기가, 남부지방은 둥근밑 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뾰족밑 토기는 계란의 윗부분을 옆을 잘라 버린 것 같은 모양을 보인다.
암사동 집터유적지에는 여러 가지 석기가 드러났는데 대표적인것으로는 돌촉·돌도끼·공이·긁개·갈판과 갈돌등이며 이러한 유물은 돌짐승의 사냥과 가죽을 벗기는 데 쓰였다고 보여지며, 공이는 들짐승의 뼈나 열매같은 것을 부수는데 쓰였을 것이다. 그리고 갈판과 갈돌은 도토리알과 같은 열매를 갈아서 가루를 내는데 쓰였을 것이다.

도움 되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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