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이황에대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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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 학교에서 퇴계이황에 대해서 조사해오라고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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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황
출생 : 1501년
사망 : 1570년
출생지 : 경상북도
본관 : 진성
호 : 퇴계·도옹·퇴도·청량산인
별칭 : 자 경호, 초자 계호, 시호 문순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이기호발설이 사상의 핵심이다. 영남학파를 이루었고, 이이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와 대립, 동서 당쟁과도 관련되었다. 일본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산서원을 설립,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다.
1. 출생 : 퇴계의 성은 이, 이름은 황(李滉 : 1501~1570),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관향은 진보(眞寶)이다.
퇴계는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植)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춘천 박씨 두 분이다. 김씨는 잠, 하, 신담부인 등 2남 1녀를 두고 별세하였고, 재취로 들어온 박씨가 서린(일찍 죽음), 의, 해, 증, 황 등 5형제를 낳았는데 퇴계는 그 막내이다.
2. 초년기 : 출생에서 33세 때까지 유교경전을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수학기
퇴계의 부친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에서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고 한다.
퇴계가 "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어머니"라 할만큼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해야 한다."는 엄한 가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다.
퇴계는 6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살 때 병으로 휴직하고 집에 와 있던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다. 13세와 15세 때에는 형과 사촌 자형을 따라 청량산에 가서 함께 독서할 만큼 성장하였고, 16세 때에는 사촌 동생과 친구를 데리고 천등산 봉정사에 들어가 독학하기도 하였다.17세 때 안동 부사로 재임 중이던 숙부가 별세하여 물을 곳도 없게 되어 스승 없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 권 '태극도설'과 마지막 권 '시·찬·함·명·부'의 두 권을 구해 읽고 나서는,"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고 하였다. 20세 때 용수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21세에 허씨 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잠시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고, 수 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3. 중년기 : 34세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49세 때 풍기 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의 임관기
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이때에도 끊임없이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다. 종3품인 성균과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 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이 후 52세 때 까지 그는 세 차례나(43, 46, 50세)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면서 관료 생활에서 벗어나 야인 생활로 접어드는 일종의 과도기를 준비한다.
퇴계는 외척의 권력 투쟁이 격심하였던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경적(經籍 : 옛날 성현(聖賢)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책)을 관장하고 글을 짓거나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는 역할을 맡은 홍문관(弘文館)의 관직에 가장 오래 재직하였다. 45세 때 을묘사화(乙卯士禍)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고, 그 자신도 한 때 파직당하였으나 복직되었다.
46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암을 짓고 호를 퇴계라 하며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힌 것으로 보이며, 외직을 구하여 단양군수(9개월)와 풍기군수(1년 2개월)로 나갔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특히 풍기 군수로 있을 때는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을 조정에 요청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최초의 사액을 받게 하였다.
그가 물러나기를 결심한 것은 당시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벼슬에 나가 한 시대를 바로 잡는 일 보다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올바른 삶의 도리를 밝혀 후세를 위해 참다운 표준을 제시하는 데 그 자신의 역할이 자각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생활에서도 불행한 일이 속출하여 27세에 허씨부인을 잃고, 30세에 권씨 부인과 재혼하였는데 46세 때 그 권씨부인마저 잃는다. 더구나 단양순수로 나가던 해(48세)에는 둘째 아들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50세 때에는 친형인 좌윤공 해를 사화의 격동 속에서 잃는다.
4. 만년기 : 50세~70세 때까지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면서 고향에서 연구, 강의, 저술에 전념한 강학기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끊임없이 사퇴하려는 퇴계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노년기의 특징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건강이 좋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망이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天命圖說 : 1553년)과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 : 1553년),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 1527~1572)과의 8년 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 錄辨 : 1559~1566),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 1556), 자성록(自省錄 : 1558), 전습록논변(傳習錄錄辨 : 1566),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 1568), 성학십도(聖學十圖 : 1568)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썼는데 그의 강학은 사망하기 전달까지 계속되었다.
5. 사망
선비의 품격은 생애를 마치는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선조 3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 초에 병환으로 강의를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 보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조목 들 몇 사람의 제자들이 찾아와 간병을 하였다.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하였다. 이 유서에는 1)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2)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1. 공직자 |
① 깨끗한 청백리로서의 모습을 보여줌 |
2. 교육자 |
① 서원건립에 힘써서 많은 서원의 기초를 마련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함 |
3. 문학자 |
① 2000편이 넘는 많은 시를 남김 |
4. 사상가 |
① 고봉 기대승과의 4단 7정에 관한 논쟁을 통하여 학문적 논쟁의 모범을 보여주고, 성리학의 심성론을 크게 발전시킴 |
5. 생활인 |
① 예안향약 곧 향약입조 28조를 정하여 향촌의 풍속을 교화함 |
연 도 |
나 이 |
내 용 |
국내외 사건 |
1501 |
1세 |
연산군 7년 예안현 온계리 (현재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사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남. 모친 박씨가 공자의 태몽을 꾸고 잉태했다하여 지금도 온혜동 노송정 생가에는 성임문과 태실이 보존되어 있음 |
동국여지승람 수정 |
1502 |
2세 |
생후 7개월만에 부친 찬성공 별세 |
|
1504 |
4세 |
|
갑자사화, 경연을 폐지함 |
1506 |
6세 |
편모 슬하에서 농사와 길쌈을 도와가면서 6세부터 이웃 노인에게서 천자문을 비롯하여 동몽선습,명심보감,소학 등을 배움 |
사간원을 폐함(4월), 대제학 폐지(8월), 연산군 폐위, 중종반정(9월), 티무르왕조 멸망 |
1509 |
9세 |
|
경국대전 간행(9월) |
1510 |
10세 |
|
삼포왜란 발생(4월) |
1511 |
1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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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등용(3월), 홍문관에서 천하여지도를 올림(8월), 삼강행실도 반포(10월) |
1512 |
12세 |
숙부인 송재공 이우에게서 논어를 배움. 이 무렵 이마가 유난히 넓다하여 광상아라는 애칭으로 불림 |
일본사신과 임신조약 체결 |
1514 |
14세 |
|
사찰의 재건을 금함(3월) |
1515 |
15세 |
게를 보고 부석 천사자유가(負石穿沙自由家) 등의 시를 지음 |
조광조가 물러남(11월) |
1516 |
16세 |
|
주자도감 설치(1월), 김안국의 오륜행실과 언해여씨향약 간행(6월) |
1517 |
17세 |
|
소학을 한글로 번역 간행 |
1518 |
18세 |
露草夭夭繞水涯 라는 시를 지음 |
이륜행실도 간행(11월) |
1519 |
19세 |
獨愛林萬卷書 등의 대시인을 방불케하는 철학적인 시를 지음 |
선량과 설치, 인재등용(4월), 조광조 대사헌이 됨(5월), 조광조 유배, 사약을 받음. 을묘사화 |
1520 |
20세 |
주역을 탐독, 침식을 잊어버리다시피 함. 이 때 병을 얻어 평생 동안 고생함 |
비변사 다시 설치(5월) |
1521 |
21세 |
김해 허씨와 결혼 |
마젤란 필리핀에서 살해됨 |
1523 |
23세 |
6월에 장자 준 출생. 이해에 처음으로 상경하여 태학 (성균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연구함 |
소학언해 편찬(10월) |
1527 |
27세 |
경상도 향시에 응시하여 2위로 합격, 10월에 차자 채 출생. 동년 허씨 부인 사망 |
최세진 훈몽자회를 지어올림(4월) |
1528 |
28세 |
진사회시에 2등 합격 |
명나라 왕수인(왕양명) 사망 |
1530 |
30세 |
권전의 질녀인 안동 권씨와 재혼 |
개성에 정몽주의 유허비 건립 |
1532 |
32세 |
문과 별시 합격 |
최세진 여훈을 한글 번역 |
1533 |
33세 |
반궁에 유학. 경상도 향시 합격 |
복성군 사약을 받아 죽음 |
1534 |
34세 |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예문관 검열이 되고, 춘추관 기사관, 경연시독관 등의 요직을 겸임함. 34세에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까지 순탄한 관료 생활을 함 |
|
1535 |
35세 |
호송관이 되어 왜노를 동래까지 호송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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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 |
36세 |
선무랑과 성균관 전적을 거쳐 9월 호조좌랑에 임명됨 |
자격루 완성, 최세진의 운회옥편 간행, 칼뱅의 종교개혁 |
1537 |
37세 |
모친 박씨 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남 |
윤원로, 원형 형제 귀양, 김안로 사약을 받음 |
1539 |
39세 |
3년상을 마치고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수찬 지제교로 승진되고 경연검토관을 겸함 |
인도 시크교 교주 나나크 사망 |
1543 |
43세 |
신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함 그후 종친부 전섬, 조봉대부, 세자시강원 필선, 조산대부, 사간원 사간, 성균관 사성 등에 차례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귀향함, 11월 다시 예빈사 부정으로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세움, 포르투갈인이 일본 다네가섬에서 신무기(총)을 전함 |
1544 |
44세 |
10월 상경한 후 중종이 승하하자 부고와 시장을 집필하여 명나라 예부관원을 크게 감탄케 함 |
사량진왜란 |
1545 |
45세 |
7월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왜인들이 강화하고자 비는 것을 허락하자는 소를 올림 |
을사사화, 조광조 복관 |
1546 |
46세 |
교서관 교리와 승문원 교리,예빈사정 등의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귀향하여 양진암이라는 초당을 짓고 학문 연구에 정진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침. 7월에 권씨부인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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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7 |
47세 |
7월 안동부사로 제수되었으나 사임, 다시 홍문관 응교로 제수되어 마지 못해 상경하여 사퇴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
정미사화, 대마도주와 정미약조 체결 |
1548 |
48세 |
외직을 자청하여 단양군수로 취임(9개월). 많은 치적을 남기고 10월 풍기군수로 전임(1년 2개월). 단양팔경은 퇴계가 군수로 재임시인 이 때에 선정한 것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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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9 |
49세 |
관내 백운동에 있는 서원의 기틀을 세우고자 상감께 상소하여 편액과 서적을 청했던 바 모두 윤허되어 소수서원이라 개칭하여 사액서원의 효시가 됨. 9월에 신병으로 사퇴하고 귀향함. 신병을 이유로 감사에게 세 차례나 사직원을 제출한 다음, 회답도 기다리지 않고 퇴계로 돌아와서 임소를 이탈했다는 죄목으로 직첩을 박탈당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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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 |
50세 |
예안 하명동에 한서암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여 제자를 가르침. 각지에서 많은 제자들이 모여듬 |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의 편액 하사됨(최초의 사액서원,2월), 명에서 양명학 들어옴 |
1553 |
53세 |
4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정지운의 천명도를 개정하는 등 학문에 전념함 |
경복궁이 불탐(9월), 이언적 사망 |
1554 |
54세 |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씀. 중수경복궁기를 지어 올림 |
경복궁 중창(9월), 영천에 정몽주 서원 사액(임고서원) |
1555 |
55세 |
수많은 관직을 제수받을 때마다 신병으로 사퇴하였으나 윤허가 내리지 않아 마침내 상경하여 사은하고 향리로 내려옴. 이때 상호군과 검지중추부사를 제수함 |
을묘왜변(5월) |
1556 |
56세 |
도산에서 주자서절요를 편찬 완성함. 12월 향약을 抄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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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7 |
57세 |
도산서당을 지을 터를 마련하고 계몽전의를 저술함 |
중국의 포르투갈인 마카오 거주 허가 |
1559 |
59세 |
휴가를 얻어 귀향한 후 관직을 사임하는 소장을 올리고 송계원명리학통록을 저술함 |
임꺽정의 난(3월~1562) |
1560 |
60세 |
고봉 기대승에게 답하는 편지형식으로 철학적 대명제인 4단7정론을 저술함. 이해에 도산서당이 완공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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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1 |
61세 |
3월에 절우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산수간을 주유하면서 도산기 같은 명문을 남김 |
이지함이 토정비결을 지음 |
1564 |
64세 |
2월에 무이구곡도의 발을 씀, 4월에 제자들과 청량산에서 노닐음. 정암 조선생의 행장을 지음 |
미켈란제로 사망 |
1566 |
66세 |
1566 공조판서와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성균관 등 여러 관직을 제수하며 왕으로부터 특별 소명이 내려져 부득이 상경하다가 중도에 병을 얻어 다시 사퇴하고 귀향하니, 왕은 실망과 한탄을 하며, 유신들과 화공들을 도산으로 내려보내 도산기 같은 도산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오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 애용함. 심경후론을 지음. 10월에 회재선생행장을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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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 |
67세 |
임금의 교지를 받고 상경한 후 명종이 승하하자 대행왕의 행장을 지음.역동서원을 새로 건축함 |
포르투갈 선박 일본 나가사키에 입항, 일본과 교류 시작 |
1568 |
68세 |
선조 원년 의정부 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자 6월 소명을 어기지 못해 상경하여 양관 대제학을 겸임함. 재임 중 무진육조소를 지어 왕에게 올림. 12월 성학십도라는 제왕학을 열장의 그림으로 그려 올리자 왕은 병풍을 만들어 대내에서 애용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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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0 |
70세 |
제자들에게 심경과 역학계몽을 강의하고 7월 역동서원에 가서 심경을 강의하고 8월 역동서원이 낙성되어 참석함. 기명언에게 심성정도를 논하고 11월 격물치지설을 개정하다가 신병이 심상치 않음을 예지하고 12월 봉화현감으로 재직중인 장자를 사직귀가케하여 장사준비를 갖추게 하여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는 명문과 자명까지 몸소 써놓고 이달 8일 한서암에서 앉아 있는대로 고요히 세상을 떠남. 임종직전 시생에게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분부를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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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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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예안 건지산 남쪽에 장사지냄 |
레판토 해전(지중해를 제압하고 있던 터키가 키프로스섬을 빼앗자, 서지중해 지역으로 팽창해 오는 것을 두려워한 신성동맹(神聖同盟) 함대가 터키 함대를 격파한 해전) |
15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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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초하루에 위패를 이산서원에 봉안하고 석채례를 거행함 |
이이와 성혼 사단칠정론에 관한 서신 왕래(~1578) |
15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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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사림의 공론으로 봄에 서원을 도산 남쪽에 세우기로하여 여름에 서원이 세워지고 현판이 하사됨 |
일본 무로마치 막부 멸망 |
15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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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위패를 도산서원에 봉안하고 석채례를 올림.여강서원에서도 위패를 받들어 모시고 제사를 지냄.12월 문순이라는 시호가 내려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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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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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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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
15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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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에 지석(죽은 사람의 이름, 나고 죽은 날, 행적 등을 적어서 무덤 앞에 묻는 돌)을 묻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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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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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문집이 이루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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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료와 공직자로서의 모습
퇴계는 32세 때 문과의 초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34세 봄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다.이 때 고향 선배인 농암 이현보는 그의 급제 소식을 듣고, "지금 인망있는 사람 중에 이 사람을 뛰어넘을 사람이 없으니 나라의 복이고 우리 고을의 경사이다."라 하여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후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에 올랐는데, 당시에 권력의 실세인 김안로가 만나고자 하였으나 선비로서의 지조를 지켜 권력자를 찾아가 만나지 않았다. 이에 김안로는 앙심을 품고 그의 승진을 가로막아 첫 출발에서 시련을 맞아야 했다.
이듬해 호송관으로 왜인을 동래까지 보내주었으며, 36세 때 성균관 전적을 거쳐 호조좌랑에 올랐다. 39세부터 44세까지 순탄하게 승진하였다. 이 무렵 경연에 나가 가뭄이 심할 때는 임금에게 식사 때 반찬가지수를 줄일 것과 죄인을 사면하는 일을 삼갈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임금의 덕을 닦도록 정성껏 간언하였다.또 왕명을 받아 어사로 나가 충청도 지역을 돌아보고 흉년으로 인한 백성들의 기근을 구제하고 탐관오리를 적발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다시 어사로 강원도 지역의 재해를 시찰하였다.
44세 때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등을 지냈으나 이 시기에 병으로 못 나가는 일이 잦았으며, 중종이 승하하자 중국에 부고를 전하고 시호를 청하였는데 두 표문을 지어 중국 예부관원이 표문의 문장과 필법을 칭찬하였다 한다. 그 당시 왜구의 사량진 침입 이후 정부는 대마도와 교류를 단절하였는데, 왜인이 다시 사신을 보내와 교류를 요청하자 그는 왜인의 사신을 물리치지 말고 일본과 강화를 허가하도록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때 그는 대마도주에 보내는 답서와 일본군 장군에게 보내는 답서 등을 지었으며, 외교문제를 원칙과 현실의 조화로서 해결하려는 탁월한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이 무렵 을사사화가 일어나 권력을 잡고 있던 간신 이기의 상소로 한 때 관직이 삭탈되었으나 죄없는 사람을 벌 줄 수 없다는 여론이 일어나 곧 복직되었다.
48세, 49세 사이의 2년은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로 외직에 나가 있었다.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다스리는 일이 말고 간결하였으며 아전이나 백성들을 모두 편안하게 해주었다. 형이 충청감사로 부임하자 그는 풍기군수로 전임되었다. 이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의 편액과 서적을 청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서원이 융성하게 되었다. 그후 감사에게 세 번 사표를 내었으나 회답이 없자 해임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관직에서 파직 삭탈당하였다.
52세 때 다시 조정에 나와 홍문관 교리로 경연시독관을 겸하여 경연에서 임금을 모시고 강의를 하였으며,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사학의 선생과 학생들에게 통문을 돌려 학풍이 퇴락함을 지적하고 예의를 바로잡도록 타일렀는데 무너진 학풍을 회복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당시 명종이 21세가 되자 수렴청정하고 있는 대왕대비에게 임금이 친정하도록 정권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교서를 지어 올렸다. 또한 여러 제문을 지었으며 새로 중수한 경복궁의 전각과 편액을 쓰는 등 당시 국가의 중요문서와 궁중의 기록이나 글씨가 모두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55세 때 병으로 거듭 사퇴를 청하여 허락받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58세 때 임금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다시 조정에 대사성으로 나갔다. 59세 때 휴가를 받아 귀향한 후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임금의 재촉으로 67세 때 서울에 다시 올라왔다. 며칠 뒤 명종이 승하하여 명종의 행장을 지었다. 예조판서에 임명되자 거듭 사표를 올려 두 달 만에 다시 병으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68세 여름 또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이때 임금은 퇴계를 깊이 신임하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의 중책을 겸임시켰지만 병으로 거듭 사퇴를 청하였으며, 임금은 휴가를 내리고 내의원을 보내어 문병하며 음식물을 하사함으로써 세심하게 공경하였다. 이 때 새로 등극한 17세의 선조임금에게 무진육조소를 지어 올렸다. 이것은 정치의 기본원리와 당면과제를 제시한 것이다. 경연에서 임금의 도리를 진언하고, 선조를 위하여 자신의 평생 학문을 응축하여 성인이 되기위한 수양의 원리와 방법을 집약한 성학십도를 올렸으며, 선조는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항상 음미할 수 있게 하였다.
69세 때 판중추부사로서 재상들과 문소전의례와 법도를 고증한 일이 조정에서 활동한 마지막 사업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임금은 남길 말을 요구하였고, 이에 그는"태평한 세상을 걱정하고 밝은 임금을 위태로이 여긴다."는 옛말을 인용하여, 나라는 항상 위난에 방비함이 있어야 하고, 임금은 겸허하여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성학십도에 관한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고, 임금의 요청에 따라 이응경과 기대승을 천거하고 돌아갔다.
69세 때 이조판서, 의정부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사퇴하고 판중추부사로 옮겼다. 귀향한 이후로도 모든 벼슬을 벗고 은퇴하기를 거듭 상소하였으나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강직한 퇴계는 실제로 부임하지 않는 벼슬을 사양하였고, 퇴계를 아끼고 공경하는 임금은 그의 벼슬을 거둘 수가 없었다.
70세 겨울 그의 병이 위중하자 임금은 내의를 보내 약을 가지고 가게 하였지만 도착하기 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부고가 조정에 올라가자 임금은 애통해하며 영의정으로 증직을 명하였고, 승지를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드리게 하는 특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퇴계는 34세에 벼슬을 시작하여 70세에 사망할 때까지 140여 직종에 임명되었으나 79번을 사퇴하였다. 30회는 수리되었지만 49회는 뜻에 없는 근무를 하였다. 질병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 벼슬보다 학문과 교육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물러나기만 한 것은 아니고 일단 직책을 얻으면 책임을 다하고 소신껏 일을 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행한 일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문무를 겸비한 국방책, 침범한 왜적을 용서하고 수교를 해야 한다는 외교정책인 걸물절왜사소(乞勿絶倭使疏), 왕도를 깨우친 무진육조소, 파면을 당하면서도 궁중의 기강을 바로 세운 진언, 성학십도를 올려 나라의 교학을 개혁한 일, 군수로 나가서는 수리시설을 하여 농업을 진흥시켰고, 단양에서는 팔경을 지정하여 자연을 가꾸었으며, 우리나라 처음으로 산수를 기록하여 치산과 등산하는 법도 등을 남겼다. 충청, 경기, 강원에 어사로 나가서는 탐관오리를 잡아내고, 흉년으로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였다. 중국 사신을 맞아서는 행패를 막았고, 문장과 글씨로 중국 예부 관원들을 감탄시켰다. 궁궐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문서 작성 등 많은 글과 글씨를 남겼다.
참고도서 : 1) '퇴계의 삶과 철학' / 금장태 저 / 서울대학교 출판부 2) '이퇴계의 실행유학' / 권오봉 저 / 학지원
2. 학자 및 사상가로서의 모습
1) 뛰어난 재질
연보에 따르면 어릴 때 논어 등을 그에게 가르쳐준 그의 숙부 송재공 우는 그의 이해력이 뛰어남에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논어를 읽던 중에 퇴계는 이(理)자를 가리키며 그 뜻을 '무릇 일의 옳음'이라고 스스로 깨달아 말하였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의 숙부는 그를 가리켜 "가문을 유지할 사람은 이 아이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다고 한다. 자라서 향시를 비롯한 대과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험에 수석 아니면 차석의 성적을 올린 것만 보더라도 그의 재질이 우수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학(성균관)에서 함께 생활한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 1510~1560)가 그를 가리켜 "영남의 수재"라 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닌 듯하다.
2) 열성적인 학구열
퇴계는 14세 때부터 "비록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일지라도 반드시 벽을 향하여 조용히 생각할 정도"로 학문을 좋아하였고, 그것이 20세 경에는 "침식을 거의 잊어 가며 독서와 사색"에 잠길 정도여서 마침내 일생 동안 그를 괴롭히던 몸이 야위는 일종의 소화불량증을 일으키게 되었다. 심지어 안질로 오랫동안 고생할 경우에도 독서하기를 쉬지 않았다는 제자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 군수직을 버리고 귀향할 때에도 그의 짐꾸러미는 오직 몇 상자의 책뿐이었다고 한다. 59세 때에도 산림에 들어가 30여년의 연구에 매진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 고봉 기대승과의 편지를 통한 토론은 죽기 얼마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보면 초년에서 말년에 이르도록 그의 학구열은 변함이 없었다. 학구열에 불타는 진지한 학자의 모습, 이것이 퇴계를 논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모습이다.
3) 겸허한 학문 태도
퇴계의 학문 태도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고봉 기대승과 나누던 "사단 칠정에 관한 논변"이다. 그 당시는 장유유서의 수직적인 인간관계가 지배하던 때였으므로 사대부들은 학문을 하는데도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일방적인 전수만을 강조하던 형편이었다. 따라서 선배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을 가하는 자유로운 토론이 어려운 풍토였다. 이러한 풍토를 깬 것이 사단 칠정 논변이다. 선배의 이론에 반기를 든 고봉도 비범하지만, 그것을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인 퇴계의 태도에 더욱 감탄하게 된다. 8년 동안의 논변이 진행되는 동안에 퇴계는 고봉의 이론을 신중하게 검토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할 때마다 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논변이 시작될 무렵 퇴계는 대사성까지 지낸 59세의 대가였던 데 비하여 고봉은 갓 과거에 급제한 33세의 소장학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장장 8년 동안의 논변이 가능하였고 그것이 드디어 당시의 정체된 학문 풍토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켜 우리 나라 성리학의 발전을 가져왔는데 이것은 퇴계의 겸허한 학문태도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그의 제자는 "선생은 겸허로써 덕을 삼아 털끝만큼도 교만하여 잘난 체 하는 마음이 없었다."라고 평하였다.
참고도서 : '퇴계 선집' / 윤사순 역주 / 현암사
3. 교육자로서의 모습
1) 교육관
오늘날의 국립대학총장에 비견되는 성균관 대사성의 책무를 맡으면서 퇴계는 그의 교육관을 밝힌 적이 있다. "선비란 예의의 원천이며 원기의 본거이다......지금부터 제군들은 모든 일상생활이 예의 가운데서 행하여지도록 하라. 서로 채찍질하여 구습을 벗도록 힘쓰고, 집에서 부형 모시는 마음을 미루어 밖에서 어른과 웃사람을 섬기는 예를 삼을 것이다. 안으로 충신(忠信)에 주력하고 밖으로 손제(遜悌)를 행함으로써 국가가 문예를 장려하고 학교를 세워 선비를 기르는 뜻에 부응하라." 요컨대 올바른 선비를 길러 국가의 교육 목적에 부응하는 것이 퇴계가 지향했던 교육자상이었다.
2) 학문의 방법
학문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 "다만 부지런하고 수고스럽게 하며 독실하게 하는데 있으니, 이렇게 하여 중단됨이 없으면 입지가 날로 강해지고 학업이 날로 넓어질 것이다."라고 타일러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독서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 "그저 익숙하게 읽는 것 뿐이다. 글을 읽는 사람이 비록 글의 뜻은 알았으나 만약 익숙하지 못하면 읽자마자 곧 잊어 버리게 되어 마음에 간직할 수 없을 것은 틀림없다. 이미 읽고 난 뒤에 또 거기에 자세하고 익숙해질 공부를 더한 뒤라야 비로소 마음에 간직할 수 있으며 또 흐믓한 맛도 있을 것이다."라 하여 겉만 핥고 지나치는 것을 경계하며, 익숙하게 하여 깊이 체득하는 공부를 강조하였다.
3) 교육의 방법
퇴계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맨 먼저 '소학'으로부터 시작하여 '대학', '심경', '논어', '맹자' 및 '주자서'를 가르친 다음 모든 경서를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처음 배움에 나아가는 제자가 읽어야할 고전으로서 특히 '심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소학'은 체와 용을 함께 갖추었고, '근사록'은 의리의 정밀한 것은 비록 상세하나 학자들을 깨우치고 감동시켜 분발하게 하는 것이 부족한 듯하다. 초학자가 처음 시작하는 데는 '심경'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고 하여'소학'을 넘어서 처음 읽을 책으로 '심경'을 제시하고 '근사록'을 한 단계 더 높은 단계의 연구서로 제시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주자전서'를 통해 학문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학문이 심화되면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을 소개하였다. "'주자전서'를 읽을 수 있으면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요, 이미 그 방법을 알 게 되면 반드시 느끼게 되어 떨치고 일어날 것이다. 여기서 공부를 시작하여 오랫동안 익숙한 뒤에 사서를 다시 보면 성현의 말씀이 마디마디 맛이 있어서 비로소 자기에게 쓰이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주의 학문을 한결같이 표준으로 삼아서 지행병진함을 가르쳤다.
4) 다산 정약용이 퇴계의 교육을 평한 글
"일일이 실행을 통해서 많은 인재를 길렀으며 누구든 어떤 부문이든 가르쳐 모두 대도에 이르게 하였다.중도에 폐하는 사람이 없이 끝까지 가르쳤으며 학문을 닦아 선생의 뒤를 잇게 했다. 퇴계선생의 가르침을 읽으면 손뼉치고 춤추고 싶으며 감격해서 눈물이 나온다. 도가 천지간에 가득차 있으니 선생의 덕은 높고 크기만 하다."
4. 문학자 및 서예가로서의 모습
1) 퇴계는 당시까지 가장 많은 저술을 한 분이다. 전문적 저서는 별도로 하더라도 일기는 손수 쓴 것 4년분 외에 이름이 전하는 것만도 9종이 된다. 시는 제목을 아는 것이 3560수(퇴계의 시는 '도산전서' 중에 실린 것이 2천여편을 넘칠만큼 풍성하여 종전의 학자 문집 중에서 보기 어려웠을 뿐아니라, 전문작가의 시집 중에서도 보기 드믄 존재였다.), 편지는 3천 수 백편이 문집에 전하고, 그밖에 여러 종류의 긴 글이 문집에 298편 실려 있다.
퇴계학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열심히 연구하고 있지만 퇴계의 저술을 다 읽은 이는 없을 것이다. 워낙 방대하여 읽기도 힘들지만 아직 다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일기와 한글 편지는 거의 행방을 알 수 없고 그의 수학에 관한 글과 '계몽전의'는 어려워서 잘 해득하지 못한다.
2) 퇴계는 早年부터 終年까지 사이에 중국문단의 명시인들의 시의 영향을 받았다. 곧 도연명·두보·한유·유종지·백락천·유우석·구양수·소동파·소옹·주희 등의 시를 읽고, 次韻·用韻·和韻했다는 것은 문집 도처에 보인다.그 중에도 陶·杜·歐·蘇·朱의 시를 가장 사랑하였다. 초년엔 陶·杜詩를 중년엔 蘇詩를 만년엔 朱·邵詩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陶杜朱詩를 즐겨 읽고 인간서정을 승화시켰다. 퇴계의 제자 문봉 정유일은 "선생이 시를 좋아하되 도연명과 두보의 시를 즐겨 보았으나, 만년엔 주자의 시를 더욱 즐겨 읽었다"고 하였다.
3) 퇴계는 문장과 글씨로 중국 예부 관원들을 감탄하게 하였으며, 경복궁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여 명성을 떨쳤다.
참고도서 : '이퇴계의 실행유학' / 권오봉 저 / 학지원
5. 생활인으로서의 모습
1) 합리성의 존중
성호 이익은 퇴계의 예는 예의 지침이며 상례에 있어서는 가장 합리적인 제일인자라 받들고 정리해서 예설유편을 엮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어느 시대든지 통용될 수 있는 법이라야 예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제도에 얽매이기 보다는 인간 위주여야 하고, 때와 재물과 분수와 처지에 맞아야 하고, 검소하고 원칙에 맞게 시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중국 예법이 여자를 낮추어 죽은 아내를 망실(亡室)이라 한 것을 고실(故室)로 바로 잡았고, 계모를 홀대한 예법을 버리고 아들에게 적모(嫡母-서자가 아버지의 정실을 일컫는 말)상을 치른 후 산소 아래서 시묘도 살게 했다. 죽은 남편을 따라 죽으려는 질부(조카의 아내)를 말려서 열녀가 되기보다는 살아 어버이에게 효도하도록 했고, 상중에 병든 아들과 조카를 종권(일시적으로 상주하는 일을 중지시켜 건강을 회복하는 것)시켜 고기를 먹게 했다. 생일 제사를 지내면 힘에 벅차 기제사도 못 지내게 된다고 당시의 풍속을 바꾸었다. 제물을 많이 담으면 비용이 많이 든다고 쌓지 못하게 하였으며, 부모 합설 제사는 가례에 어긋난다며 단설(제삿날 그 분 제물만 차림)하게 하였다. 초상에는 문상객에게 술 대신 차를 내놓게 하였으며, 제사 음식의 음복은 남과 나누어 먹지 않고 제관만 먹게 하였다. 아무리 죽은 부모가 좋아한 음식이라도 살아있을 때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아들이 따르기 어려우므로 일정한 제물만을 쓰게 하였으며, 진설도에 있더라도 철이 아니면 다 구해 쓰지 못하므로 세 가지 철에 맞는 과일로써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2) 뛰어난 인격자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은 '학봉집'의 '퇴계선생 언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쉽고 명백한 것은 선생의 학문이요, 정대하여 빛나는 것은 선생의 도(道)요, 따스하고 봄 바람 같고 상서로운 구름 같은 것은 선생의 덕(德)이요, 무명이나 명주처럼 질박하고 콩이나 조처럼 담담한 것은 선생의 글이었다. 가슴 속은 맑게 트이어 가을 달과 얼음을 담은 옥병처럼 밝고 결백하며, 기상은 온화하고 순수해서 순수한 금과 아름다운 옥 같았다. 무겁기는 산악과 같고 깊이는 깊은 샘과 같았으니, 바라보면 덕을 이룬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퇴계는 아랫사람이나 제자들에게도 항상 공손한 말씨를 사용하고 예의를 지켰으며,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퇴계가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한 까닭은 사화로 어지럽던 시대적 상황과 학문에 대한 열정도 있었지만 한 고을을 다스릴 만한 벼슬에 머무르라는 어머니의 뜻을 지키고자 한 것이기도 하다.
퇴계의 일상생활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말과 행동을 진지하고 신중하게 하여 우아하고 경건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한평생 경(敬)을 실천한 그의 모습과 태도는 한결같이 단아하고 차분하여, 수양에 의해 절제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보여 주었다.
3) 멋과 풍류를 즐기는 생활
퇴계는 자연을 지극히 사랑하여 자연 풍경과 철따라 피는 꽃나무에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 많은 시를 남겼다. 퇴계가 살던 집에는 항상 솔·대나무·매화·국화 등을 심어 벗삼고 즐겼다.
50세 때 한서암을 짓고 뜰에다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오이를 심어 지조의 표상으로 삼았다.
이듬해는 계상서당으로 옮겨서도 방당을 만들고 연을 심고, 솔·대·매화·국화·연(송·죽·매·국·연)을 다섯 벗으로 삼아, 자신을 포함하여 여섯 벗이 한 뜰에 모인 육우원(六友園)을 이루어 어울리는 흥취를 즐겼다.
61세 봄에는 도산서당 동쪽에 절우사의 단을 쌓고, 솔·대·매화·국화를 심어 즐겼다. 특히 매화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 서울에 두고 온 매화분을 손자 안도편에 부쳐 배에 싣고 왔을 때 이를 기뻐하여 시를 읊기도 하는 등 매화는 그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매화분 하나를 마주하고 주고 받으며 화답하는 시를 읊조리는 모습은 매화와 퇴계가 하나가 되어가는 경지를 느끼게 한다.
또한 퇴계는 산림에 묻혀 사는 선비로서 산사를 찾아 독서하거나 산을 찾아 노닐기를 즐겨 했다. 그는 독서하는 것과 산에서 노니는 것이 서로 같은 점을 들어 독서와 산놀이를 일치시키기도 했다. 가장 즐겨 찾아 노닐었던 산은 청량산으로 도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그는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그 이름이 경관과 어울리지 않으면 이름을 새로 짓기도 하고, 그 자신 소백산을 돌아보고 유산록(遊山錄)을 지었지만 다른 사람의 유산록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서문이나 발문을 지어 주면서, 산수의 유람이 갖는 의미를 깊이 음미하고 있다.(퇴계는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소백산을 유람하고 봉우리와 대의 이름을 고쳐지었으며, 돌아와 '소백산유산록'을 지었으며, 홍응길의 '금강산유산록'에 서문을 지었고, 남명 조식의'두류산유산록'에 후식을 지었다. 단양군수로 있으면서 단양팔경을 정했으며 죽계구곡도 정했다고 전해진다.
산놀이뿐만 아니라 물놀이도 그의 운치있는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고향 선배인 농암 이현보을 모시고 분천에 가서 뱃놀이를 하였고, 단양군수로 있으면서 제자 황준량과 함께 귀담에서 뱃놀이하였다. 퇴계가 가장 즐겨 뱃놀이하던 곳은 도산서원 앞에 있는 탁영담이다. 62세 때에는소동파가 적벽에서 뱃놀이를 한 해로부터 8갑주(480년) 되는 날이기에 퇴계도 여러 제자들과 풍월담에서 뱃놀이를 하려고 준비하였으나 전날 큰 비가 내려 이루지 못하여 못내 아쉬워했다.
47세 무렵에는 7대(臺)와 하동(霞洞)에서부터 청량산까지 낙동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11승경을 명명하고 시를 짓는 풍류를 즐겼다.
퇴계는 16세기 중반에 주리적 이기이원론의 토대 위에서 기대승과의 4단7정론을 통하여 한국 성리학의 특징인 심성론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정밀하게 규명함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기본 틀을 정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 이기론
퇴계의 사상은 정자, 주자의 입장을 바탕에 둔 정주학의 토대 위에서 세워졌다. 그리하여 정주 계통의 성리학설을 기본 입장으로 하여 퇴계는 이와 다른 이론이나 학설을 배척한다. 불교나 도교와 같은 다른 사상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성리학이라 하더라도 심학이라 불려지는 양명학이라든지, 서화담 계통의 기일원론, 나정암(나순흠이라고도 함, 명의 성리학자)의 주기설 및 오초려(오징이라고도 함, 원의 학자)의 주륙 절충적 견해 등을 배척한다. 그 중에서도 양명학과 화담계의 기일원론에 대한 배척이 가장 강력하다.
퇴계는 양명학의 심즉리설과 지행합일설을 거경궁리론과 지행병진설로 조목 조목 반박하고, 화담의 기일원론을 이기이원론으로 반박한다. 결국 퇴계는 정주의 이기이원론만을 인정한다.
2. 심성론(인성론)
이처럼 퇴계는 정주의 입장을 자신의 학문적 토대로 하여 출발하였지만 깊이를 더하여 감에 따라 독자성을 띠게 되었고, 마침내 정주의 차원을 넘어서게 되었는데 그 좋은 예가 심성론 특히 사단칠정론이다. 퇴계는 기대승과의 4단7정론을 통하여 이기론의 이론을 심성 개념의 분석과 해명에 적용하여 한국 유학의 중요한 특징인 심성론(인성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은 퇴계의 사상으로 인하여 한국 성리학은 강한 독자성을 지니고 발전하게 된다.
3. 수양론
퇴계의 학문정신은 이론적 정밀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심성을 살아 움직이는 현실 속에서 이해한다는데 중요한 특징이 있다. 퇴계의 수양론은 심(心)과 경(敬)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은 수양이 이루어지는 바탕이요, 경은 수양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퇴계의 학문적 관심은 항상 인간의 도덕적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귀결되고 있으므로 이 '경'이야말로 퇴계 사상의 핵심이며, 퇴계가 존경받는 이유도 이러한 경의 태도를 한 평생 몸소 실천한 인격자이기 때문이다.
문인 정유일은 퇴계의 이러한 학문과 사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오로지 정주를 표준으로 한다. 경과 의가 같이 지탱하고(경의협지, 敬義夾持), 지와 행이 함께 나아가며(지행병진, 知行幷進), 밖과 안이 한결 같고(표리여일, 表裏如一), 본과 말을 함께 하며(본말병거, 本末幷擧), 대원을 뚫어보고 대본을 심어 세운다(식립대본 植立大本), 그 이른 경지를 논한다면 우리 동방에는 오직 그 한 분 뿐이다.
성리학의 이기론은 인간과 사물의 존재를 그 구조와 근원에서 이(理)와 기(氣)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특히 인간의 심성정(心性精)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적용됨으로서 심성론으로 발전하였다. 퇴계는 '천명도설'에서 마음(心)을 이(理)와 기(氣)가 결합한 것이라는 기본 인식 위에서 성(性 : 성품)과 정(精 : 감정)을 통섭하는 주체로 파악하였다. 곧 성과 정은 인간의 마음에 내포된 두 차원의 존재양상이며, 성은 이로서 마음의 본체요, 정은 이와 기가 동시에 드러나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인식하였다. |
사단(四端)과 칠정(七精)은 마음에서 정(精)의 두 가지 발동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맹자는 사단의 마음을 인간의 성품이 선한 증거로서 제시한 것이며, 칠정은 '예기'에서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인정으로 제시한 것이다. |
퇴계 학문의 기본적 성격은 주자를 표준으로 하여 도학의 철학적 근거를 밝히고 인격적 실현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의 사상에는 성리설의 개념적 분석체계와 더불어 수양론의 실천방법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도학의 학문적 기본방법을 거경(경의 생활화)과 궁리(진리탐구)라는 두 축으로 파악한다면, 이 둘은 도학을 이루는 양면으로서 유기적 관계를 지니는 것이다. |
양명학이 심학으로 불리는 이유는 왕양명이 "심즉리"를 전제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이 전제는 "모든 이가 다 내 마음에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주자와 같이 "격물"을 "내 마음이 사물에 이르러(格=知) 그 이를 궁구"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객관적인 방법으로 "일일일격"하는 "궁리"의 태도를 양명은 지리한 공부라 하면서 반대한다. 모든 이가 마음 속에 있으므로, 필요한 일은 마음이 그 이를 잘 드러내도록 하는 것뿐이다. 이런 점에서 격물은 마음을 바로잡는 것(格=正)에 지나지 않는다. 양명은 이러한 공부, 즉 심학이야말로 간결한 공부라 주장하면서 그 필요성을 역설한다. 왕양명은 모든 이가 마음에 있다는 전제로부터 지식 역시 마음에 본래 양지로서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서 충효의 이가 마음 속에서 나온다는 것은 결국 행위가 양지의 표출이라는 뜻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지와 행은 합일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호호색이라는 구절을 예로 들어, 호색을 아는 것과 그 호색을 좋아하는 행은 일치한다는 것이다. 만일 지와 행이 일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다만 사욕의 폐 때문이라 한다. 그리하여 지행합일은 심즉리설과 함께 양명학을 대표하는 주요 이론이 된다. 퇴계의 양명학 배척론의 근저에는 의리의 행을 뒷받침하려는 강력한 가치지향의 정신이 깔려있다고 하겠다. 이 정신이 퇴계로 하여금 이기이원론의 입장에 서게 하였으며, 나아가 가치에 무관한 기보다는 가치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이를 더 중요시하는 주리적 이기이원론의 입장에 서도록 한다. |
이익은 '이자수어(李子粹語)'를 찬술하여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丁若鏞)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써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중국의 북경(北京) 상덕여자대학 (尙德女子大學)에서 대학의 증축, 확장기금에 충당하기 위하여 '성학십도'를 목판으로 복각(復刻)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널리 반포(頒布)하였을 때, 중국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량치차오 (梁啓超)는 찬시(贊詩)를 써 그 제1연에서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 님이시여”라고 그를 거리낌 없이 성인이라 호칭하였다. 일본유학에의 영향을 제외하면 다음과 같은 조호익의 말은 이황의 학적 지위를 간결히 표현한 매우 적절한 평가라 볼 수 있다. 즉, “주자가 작고한 뒤 도(道)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버렸다. 퇴계는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비교할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1609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그뒤 그를 주사(主祀) 하거나 종사하는 서원은 전국 40여개처에 이르렀으며, 그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8.15광복 후 제5공화국 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국비보조로 크게 보수, 증축되어 우리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되었다. |
1) 양명학을 배척하고 정주학의 입장을 취함 2) 정주학 중에서도 주리적 이기 이원론을 견지함 3) 특히 사칠설과 같은 심성론의 이론적 탐구를 병행하는 주지주의적 경향이 강함 4)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정밀하게 규명하여 조선시대 도학의 기본틀을 정립함 7. 경의 의미 퇴계선생의 학문의 핵심이 바로 이 '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의 위대한 점은 성리학에서 말하는 인간과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신 데에 있는데, 그 실천의 핵심이 바로 이 '경'이라고 생각합니다. |
인터넷자료참고해서올립니다.
이황은 부드럽고, 바다같이 넓은 성격입니다.
그리고, 일을 시원하게 해결하조.
이상 허접한 답변이었습니다.
이름 : 이황
출생 : 1501년
사망 : 1570년
출생지 : 경상북도
본관 : 진성
호 : 퇴계·도옹·퇴도·청량산인
별칭 : 자 경호, 초자 계호, 시호 문순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이기호발설이 사상의 핵심이다. 영남학파를 이루었고, 이이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와 대립, 동서 당쟁과도 관련되었다. 일본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산서원을 설립,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다.
1. 출생 : 퇴계의 성은 이, 이름은 황(李滉 : 1501~1570),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관향은 진보(眞寶)이다.
퇴계는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植)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춘천 박씨 두 분이다. 김씨는 잠, 하, 신담부인 등 2남 1녀를 두고 별세하였고, 재취로 들어온 박씨가 서린(일찍 죽음), 의, 해, 증, 황 등 5형제를 낳았는데 퇴계는 그 막내이다.
2. 초년기 : 출생에서 33세 때까지 유교경전을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수학기
퇴계의 부친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에서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고 한다.
퇴계가 "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어머니"라 할만큼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해야 한다."는 엄한 가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다.
퇴계는 6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살 때 병으로 휴직하고 집에 와 있던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다. 13세와 15세 때에는 형과 사촌 자형을 따라 청량산에 가서 함께 독서할 만큼 성장하였고, 16세 때에는 사촌 동생과 친구를 데리고 천등산 봉정사에 들어가 독학하기도 하였다.17세 때 안동 부사로 재임 중이던 숙부가 별세하여 물을 곳도 없게 되어 스승 없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 권 '태극도설'과 마지막 권 '시·찬·함·명·부'의 두 권을 구해 읽고 나서는,"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고 하였다. 20세 때 용수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21세에 허씨 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잠시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고, 수 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3. 중년기 : 34세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49세 때 풍기 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의 임관기
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이때에도 끊임없이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다. 종3품인 성균과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 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이 후 52세 때 까지 그는 세 차례나(43, 46, 50세)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면서 관료 생활에서 벗어나 야인 생활로 접어드는 일종의 과도기를 준비한다.
퇴계는 외척의 권력 투쟁이 격심하였던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경적(經籍 : 옛날 성현(聖賢)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책)을 관장하고 글을 짓거나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는 역할을 맡은 홍문관(弘文館)의 관직에 가장 오래 재직하였다. 45세 때 을묘사화(乙卯士禍)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고, 그 자신도 한 때 파직당하였으나 복직되었다.
46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암을 짓고 호를 퇴계라 하며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힌 것으로 보이며, 외직을 구하여 단양군수(9개월)와 풍기군수(1년 2개월)로 나갔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특히 풍기 군수로 있을 때는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을 조정에 요청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최초의 사액을 받게 하였다.
그가 물러나기를 결심한 것은 당시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벼슬에 나가 한 시대를 바로 잡는 일 보다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올바른 삶의 도리를 밝혀 후세를 위해 참다운 표준을 제시하는 데 그 자신의 역할이 자각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생활에서도 불행한 일이 속출하여 27세에 허씨부인을 잃고, 30세에 권씨 부인과 재혼하였는데 46세 때 그 권씨부인마저 잃는다. 더구나 단양순수로 나가던 해(48세)에는 둘째 아들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50세 때에는 친형인 좌윤공 해를 사화의 격동 속에서 잃는다.
4. 만년기 : 50세~70세 때까지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면서 고향에서 연구, 강의, 저술에 전념한 강학기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끊임없이 사퇴하려는 퇴계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노년기의 특징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건강이 좋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망이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天命圖說 : 1553년)과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 : 1553년),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 1527~1572)과의 8년 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 錄辨 : 1559~1566),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 1556), 자성록(自省錄 : 1558), 전습록논변(傳習錄錄辨 : 1566),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 1568), 성학십도(聖學十圖 : 1568)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썼는데 그의 강학은 사망하기 전달까지 계속되었다.
5. 사망
선비의 품격은 생애를 마치는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선조 3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 초에 병환으로 강의를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 보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조목 들 몇 사람의 제자들이 찾아와 간병을 하였다.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하였다. 이 유서에는 1)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2)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1. 공직자 |
① 깨끗한 청백리로서의 모습을 보여줌 |
2. 교육자 |
① 서원건립에 힘써서 많은 서원의 기초를 마련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함 |
3. 문학자 |
① 2000편이 넘는 많은 시를 남김 |
4. 사상가 |
① 고봉 기대승과의 4단 7정에 관한 논쟁을 통하여 학문적 논쟁의 모범을 보여주고, 성리학의 심성론을 크게 발전시킴 |
5. 생활인 |
① 예안향약 곧 향약입조 28조를 정하여 향촌의 풍속을 교화함 |
연 도 |
나 이 |
내 용 |
국내외 사건 |
1501 |
1세 |
연산군 7년 예안현 온계리 (현재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사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남. 모친 박씨가 공자의 태몽을 꾸고 잉태했다하여 지금도 온혜동 노송정 생가에는 성임문과 태실이 보존되어 있음 |
동국여지승람 수정 |
1502 |
2세 |
생후 7개월만에 부친 찬성공 별세 |
|
1504 |
4세 |
|
갑자사화, 경연을 폐지함 |
1506 |
6세 |
편모 슬하에서 농사와 길쌈을 도와가면서 6세부터 이웃 노인에게서 천자문을 비롯하여 동몽선습,명심보감,소학 등을 배움 |
사간원을 폐함(4월), 대제학 폐지(8월), 연산군 폐위, 중종반정(9월), 티무르왕조 멸망 |
1509 |
9세 |
|
경국대전 간행(9월) |
1510 |
10세 |
|
삼포왜란 발생(4월) |
1511 |
11세 |
|
조광조 등용(3월), 홍문관에서 천하여지도를 올림(8월), 삼강행실도 반포(10월) |
1512 |
12세 |
숙부인 송재공 이우에게서 논어를 배움. 이 무렵 이마가 유난히 넓다하여 광상아라는 애칭으로 불림 |
일본사신과 임신조약 체결 |
1514 |
14세 |
|
사찰의 재건을 금함(3월) |
1515 |
15세 |
게를 보고 부석 천사자유가(負石穿沙自由家) 등의 시를 지음 |
조광조가 물러남(11월) |
1516 |
16세 |
|
주자도감 설치(1월), 김안국의 오륜행실과 언해여씨향약 간행(6월) |
1517 |
17세 |
|
소학을 한글로 번역 간행 |
1518 |
18세 |
露草夭夭繞水涯 라는 시를 지음 |
이륜행실도 간행(11월) |
1519 |
19세 |
獨愛林萬卷書 등의 대시인을 방불케하는 철학적인 시를 지음 |
선량과 설치, 인재등용(4월), 조광조 대사헌이 됨(5월), 조광조 유배, 사약을 받음. 을묘사화 |
1520 |
20세 |
주역을 탐독, 침식을 잊어버리다시피 함. 이 때 병을 얻어 평생 동안 고생함 |
비변사 다시 설치(5월) |
1521 |
21세 |
김해 허씨와 결혼 |
마젤란 필리핀에서 살해됨 |
1523 |
23세 |
6월에 장자 준 출생. 이해에 처음으로 상경하여 태학 (성균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연구함 |
소학언해 편찬(10월) |
1527 |
27세 |
경상도 향시에 응시하여 2위로 합격, 10월에 차자 채 출생. 동년 허씨 부인 사망 |
최세진 훈몽자회를 지어올림(4월) |
1528 |
28세 |
진사회시에 2등 합격 |
명나라 왕수인(왕양명) 사망 |
1530 |
30세 |
권전의 질녀인 안동 권씨와 재혼 |
개성에 정몽주의 유허비 건립 |
1532 |
32세 |
문과 별시 합격 |
최세진 여훈을 한글 번역 |
1533 |
33세 |
반궁에 유학. 경상도 향시 합격 |
복성군 사약을 받아 죽음 |
1534 |
34세 |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예문관 검열이 되고, 춘추관 기사관, 경연시독관 등의 요직을 겸임함. 34세에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까지 순탄한 관료 생활을 함 |
|
1535 |
35세 |
호송관이 되어 왜노를 동래까지 호송함 |
|
1536 |
36세 |
선무랑과 성균관 전적을 거쳐 9월 호조좌랑에 임명됨 |
자격루 완성, 최세진의 운회옥편 간행, 칼뱅의 종교개혁 |
1537 |
37세 |
모친 박씨 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남 |
윤원로, 원형 형제 귀양, 김안로 사약을 받음 |
1539 |
39세 |
3년상을 마치고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수찬 지제교로 승진되고 경연검토관을 겸함 |
인도 시크교 교주 나나크 사망 |
1543 |
43세 |
신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함 그후 종친부 전섬, 조봉대부, 세자시강원 필선, 조산대부, 사간원 사간, 성균관 사성 등에 차례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귀향함, 11월 다시 예빈사 부정으로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세움, 포르투갈인이 일본 다네가섬에서 신무기(총)을 전함 |
1544 |
44세 |
10월 상경한 후 중종이 승하하자 부고와 시장을 집필하여 명나라 예부관원을 크게 감탄케 함 |
사량진왜란 |
1545 |
45세 |
7월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왜인들이 강화하고자 비는 것을 허락하자는 소를 올림 |
을사사화, 조광조 복관 |
1546 |
46세 |
교서관 교리와 승문원 교리,예빈사정 등의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귀향하여 양진암이라는 초당을 짓고 학문 연구에 정진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침. 7월에 권씨부인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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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7 |
47세 |
7월 안동부사로 제수되었으나 사임, 다시 홍문관 응교로 제수되어 마지 못해 상경하여 사퇴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
정미사화, 대마도주와 정미약조 체결 |
1548 |
48세 |
외직을 자청하여 단양군수로 취임(9개월). 많은 치적을 남기고 10월 풍기군수로 전임(1년 2개월). 단양팔경은 퇴계가 군수로 재임시인 이 때에 선정한 것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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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9 |
49세 |
관내 백운동에 있는 서원의 기틀을 세우고자 상감께 상소하여 편액과 서적을 청했던 바 모두 윤허되어 소수서원이라 개칭하여 사액서원의 효시가 됨. 9월에 신병으로 사퇴하고 귀향함. 신병을 이유로 감사에게 세 차례나 사직원을 제출한 다음, 회답도 기다리지 않고 퇴계로 돌아와서 임소를 이탈했다는 죄목으로 직첩을 박탈당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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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 |
50세 |
예안 하명동에 한서암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여 제자를 가르침. 각지에서 많은 제자들이 모여듬 |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의 편액 하사됨(최초의 사액서원,2월), 명에서 양명학 들어옴 |
1553 |
53세 |
4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정지운의 천명도를 개정하는 등 학문에 전념함 |
경복궁이 불탐(9월), 이언적 사망 |
1554 |
54세 |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씀. 중수경복궁기를 지어 올림 |
경복궁 중창(9월), 영천에 정몽주 서원 사액(임고서원) |
1555 |
55세 |
수많은 관직을 제수받을 때마다 신병으로 사퇴하였으나 윤허가 내리지 않아 마침내 상경하여 사은하고 향리로 내려옴. 이때 상호군과 검지중추부사를 제수함 |
을묘왜변(5월) |
1556 |
56세 |
도산에서 주자서절요를 편찬 완성함. 12월 향약을 抄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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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7 |
57세 |
도산서당을 지을 터를 마련하고 계몽전의를 저술함 |
중국의 포르투갈인 마카오 거주 허가 |
1559 |
59세 |
휴가를 얻어 귀향한 후 관직을 사임하는 소장을 올리고 송계원명리학통록을 저술함 |
임꺽정의 난(3월~1562) |
1560 |
60세 |
고봉 기대승에게 답하는 편지형식으로 철학적 대명제인 4단7정론을 저술함. 이해에 도산서당이 완공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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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1 |
61세 |
3월에 절우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산수간을 주유하면서 도산기 같은 명문을 남김 |
이지함이 토정비결을 지음 |
1564 |
64세 |
2월에 무이구곡도의 발을 씀, 4월에 제자들과 청량산에서 노닐음. 정암 조선생의 행장을 지음 |
미켈란제로 사망 |
1566 |
66세 |
1566 공조판서와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성균관 등 여러 관직을 제수하며 왕으로부터 특별 소명이 내려져 부득이 상경하다가 중도에 병을 얻어 다시 사퇴하고 귀향하니, 왕은 실망과 한탄을 하며, 유신들과 화공들을 도산으로 내려보내 도산기 같은 도산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오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 애용함. 심경후론을 지음. 10월에 회재선생행장을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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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 |
67세 |
임금의 교지를 받고 상경한 후 명종이 승하하자 대행왕의 행장을 지음.역동서원을 새로 건축함 |
포르투갈 선박 일본 나가사키에 입항, 일본과 교류 시작 |
1568 |
68세 |
선조 원년 의정부 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자 6월 소명을 어기지 못해 상경하여 양관 대제학을 겸임함. 재임 중 무진육조소를 지어 왕에게 올림. 12월 성학십도라는 제왕학을 열장의 그림으로 그려 올리자 왕은 병풍을 만들어 대내에서 애용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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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0 |
70세 |
제자들에게 심경과 역학계몽을 강의하고 7월 역동서원에 가서 심경을 강의하고 8월 역동서원이 낙성되어 참석함. 기명언에게 심성정도를 논하고 11월 격물치지설을 개정하다가 신병이 심상치 않음을 예지하고 12월 봉화현감으로 재직중인 장자를 사직귀가케하여 장사준비를 갖추게 하여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는 명문과 자명까지 몸소 써놓고 이달 8일 한서암에서 앉아 있는대로 고요히 세상을 떠남. 임종직전 시생에게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분부를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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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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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예안 건지산 남쪽에 장사지냄 |
레판토 해전(지중해를 제압하고 있던 터키가 키프로스섬을 빼앗자, 서지중해 지역으로 팽창해 오는 것을 두려워한 신성동맹(神聖同盟) 함대가 터키 함대를 격파한 해전) |
15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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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초하루에 위패를 이산서원에 봉안하고 석채례를 거행함 |
이이와 성혼 사단칠정론에 관한 서신 왕래(~1578) |
15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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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사림의 공론으로 봄에 서원을 도산 남쪽에 세우기로하여 여름에 서원이 세워지고 현판이 하사됨 |
일본 무로마치 막부 멸망 |
15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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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위패를 도산서원에 봉안하고 석채례를 올림.여강서원에서도 위패를 받들어 모시고 제사를 지냄.12월 문순이라는 시호가 내려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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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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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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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
15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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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에 지석(죽은 사람의 이름, 나고 죽은 날, 행적 등을 적어서 무덤 앞에 묻는 돌)을 묻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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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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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문집이 이루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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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료와 공직자로서의 모습
퇴계는 32세 때 문과의 초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34세 봄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다.이 때 고향 선배인 농암 이현보는 그의 급제 소식을 듣고, "지금 인망있는 사람 중에 이 사람을 뛰어넘을 사람이 없으니 나라의 복이고 우리 고을의 경사이다."라 하여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후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에 올랐는데, 당시에 권력의 실세인 김안로가 만나고자 하였으나 선비로서의 지조를 지켜 권력자를 찾아가 만나지 않았다. 이에 김안로는 앙심을 품고 그의 승진을 가로막아 첫 출발에서 시련을 맞아야 했다.
이듬해 호송관으로 왜인을 동래까지 보내주었으며, 36세 때 성균관 전적을 거쳐 호조좌랑에 올랐다. 39세부터 44세까지 순탄하게 승진하였다. 이 무렵 경연에 나가 가뭄이 심할 때는 임금에게 식사 때 반찬가지수를 줄일 것과 죄인을 사면하는 일을 삼갈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임금의 덕을 닦도록 정성껏 간언하였다.또 왕명을 받아 어사로 나가 충청도 지역을 돌아보고 흉년으로 인한 백성들의 기근을 구제하고 탐관오리를 적발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다시 어사로 강원도 지역의 재해를 시찰하였다.
44세 때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등을 지냈으나 이 시기에 병으로 못 나가는 일이 잦았으며, 중종이 승하하자 중국에 부고를 전하고 시호를 청하였는데 두 표문을 지어 중국 예부관원이 표문의 문장과 필법을 칭찬하였다 한다. 그 당시 왜구의 사량진 침입 이후 정부는 대마도와 교류를 단절하였는데, 왜인이 다시 사신을 보내와 교류를 요청하자 그는 왜인의 사신을 물리치지 말고 일본과 강화를 허가하도록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때 그는 대마도주에 보내는 답서와 일본군 장군에게 보내는 답서 등을 지었으며, 외교문제를 원칙과 현실의 조화로서 해결하려는 탁월한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이 무렵 을사사화가 일어나 권력을 잡고 있던 간신 이기의 상소로 한 때 관직이 삭탈되었으나 죄없는 사람을 벌 줄 수 없다는 여론이 일어나 곧 복직되었다.
48세, 49세 사이의 2년은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로 외직에 나가 있었다.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다스리는 일이 말고 간결하였으며 아전이나 백성들을 모두 편안하게 해주었다. 형이 충청감사로 부임하자 그는 풍기군수로 전임되었다. 이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의 편액과 서적을 청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서원이 융성하게 되었다. 그후 감사에게 세 번 사표를 내었으나 회답이 없자 해임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관직에서 파직 삭탈당하였다.
52세 때 다시 조정에 나와 홍문관 교리로 경연시독관을 겸하여 경연에서 임금을 모시고 강의를 하였으며,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사학의 선생과 학생들에게 통문을 돌려 학풍이 퇴락함을 지적하고 예의를 바로잡도록 타일렀는데 무너진 학풍을 회복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당시 명종이 21세가 되자 수렴청정하고 있는 대왕대비에게 임금이 친정하도록 정권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교서를 지어 올렸다. 또한 여러 제문을 지었으며 새로 중수한 경복궁의 전각과 편액을 쓰는 등 당시 국가의 중요문서와 궁중의 기록이나 글씨가 모두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55세 때 병으로 거듭 사퇴를 청하여 허락받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58세 때 임금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다시 조정에 대사성으로 나갔다. 59세 때 휴가를 받아 귀향한 후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임금의 재촉으로 67세 때 서울에 다시 올라왔다. 며칠 뒤 명종이 승하하여 명종의 행장을 지었다. 예조판서에 임명되자 거듭 사표를 올려 두 달 만에 다시 병으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68세 여름 또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이때 임금은 퇴계를 깊이 신임하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의 중책을 겸임시켰지만 병으로 거듭 사퇴를 청하였으며, 임금은 휴가를 내리고 내의원을 보내어 문병하며 음식물을 하사함으로써 세심하게 공경하였다. 이 때 새로 등극한 17세의 선조임금에게 무진육조소를 지어 올렸다. 이것은 정치의 기본원리와 당면과제를 제시한 것이다. 경연에서 임금의 도리를 진언하고, 선조를 위하여 자신의 평생 학문을 응축하여 성인이 되기위한 수양의 원리와 방법을 집약한 성학십도를 올렸으며, 선조는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항상 음미할 수 있게 하였다.
69세 때 판중추부사로서 재상들과 문소전의례와 법도를 고증한 일이 조정에서 활동한 마지막 사업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임금은 남길 말을 요구하였고, 이에 그는"태평한 세상을 걱정하고 밝은 임금을 위태로이 여긴다."는 옛말을 인용하여, 나라는 항상 위난에 방비함이 있어야 하고, 임금은 겸허하여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성학십도에 관한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고, 임금의 요청에 따라 이응경과 기대승을 천거하고 돌아갔다.
69세 때 이조판서, 의정부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사퇴하고 판중추부사로 옮겼다. 귀향한 이후로도 모든 벼슬을 벗고 은퇴하기를 거듭 상소하였으나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강직한 퇴계는 실제로 부임하지 않는 벼슬을 사양하였고, 퇴계를 아끼고 공경하는 임금은 그의 벼슬을 거둘 수가 없었다.
70세 겨울 그의 병이 위중하자 임금은 내의를 보내 약을 가지고 가게 하였지만 도착하기 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부고가 조정에 올라가자 임금은 애통해하며 영의정으로 증직을 명하였고, 승지를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드리게 하는 특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퇴계는 34세에 벼슬을 시작하여 70세에 사망할 때까지 140여 직종에 임명되었으나 79번을 사퇴하였다. 30회는 수리되었지만 49회는 뜻에 없는 근무를 하였다. 질병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 벼슬보다 학문과 교육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물러나기만 한 것은 아니고 일단 직책을 얻으면 책임을 다하고 소신껏 일을 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행한 일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문무를 겸비한 국방책, 침범한 왜적을 용서하고 수교를 해야 한다는 외교정책인 걸물절왜사소(乞勿絶倭使疏), 왕도를 깨우친 무진육조소, 파면을 당하면서도 궁중의 기강을 바로 세운 진언, 성학십도를 올려 나라의 교학을 개혁한 일, 군수로 나가서는 수리시설을 하여 농업을 진흥시켰고, 단양에서는 팔경을 지정하여 자연을 가꾸었으며, 우리나라 처음으로 산수를 기록하여 치산과 등산하는 법도 등을 남겼다. 충청, 경기, 강원에 어사로 나가서는 탐관오리를 잡아내고, 흉년으로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였다. 중국 사신을 맞아서는 행패를 막았고, 문장과 글씨로 중국 예부 관원들을 감탄시켰다. 궁궐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문서 작성 등 많은 글과 글씨를 남겼다.
참고도서 : 1) '퇴계의 삶과 철학' / 금장태 저 / 서울대학교 출판부 2) '이퇴계의 실행유학' / 권오봉 저 / 학지원
2. 학자 및 사상가로서의 모습
1) 뛰어난 재질
연보에 따르면 어릴 때 논어 등을 그에게 가르쳐준 그의 숙부 송재공 우는 그의 이해력이 뛰어남에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논어를 읽던 중에 퇴계는 이(理)자를 가리키며 그 뜻을 '무릇 일의 옳음'이라고 스스로 깨달아 말하였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의 숙부는 그를 가리켜 "가문을 유지할 사람은 이 아이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다고 한다. 자라서 향시를 비롯한 대과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험에 수석 아니면 차석의 성적을 올린 것만 보더라도 그의 재질이 우수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학(성균관)에서 함께 생활한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 1510~1560)가 그를 가리켜 "영남의 수재"라 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닌 듯하다.
2) 열성적인 학구열
퇴계는 14세 때부터 "비록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일지라도 반드시 벽을 향하여 조용히 생각할 정도"로 학문을 좋아하였고, 그것이 20세 경에는 "침식을 거의 잊어 가며 독서와 사색"에 잠길 정도여서 마침내 일생 동안 그를 괴롭히던 몸이 야위는 일종의 소화불량증을 일으키게 되었다. 심지어 안질로 오랫동안 고생할 경우에도 독서하기를 쉬지 않았다는 제자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 군수직을 버리고 귀향할 때에도 그의 짐꾸러미는 오직 몇 상자의 책뿐이었다고 한다. 59세 때에도 산림에 들어가 30여년의 연구에 매진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 고봉 기대승과의 편지를 통한 토론은 죽기 얼마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보면 초년에서 말년에 이르도록 그의 학구열은 변함이 없었다. 학구열에 불타는 진지한 학자의 모습, 이것이 퇴계를 논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모습이다.
3) 겸허한 학문 태도
퇴계의 학문 태도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고봉 기대승과 나누던 "사단 칠정에 관한 논변"이다. 그 당시는 장유유서의 수직적인 인간관계가 지배하던 때였으므로 사대부들은 학문을 하는데도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일방적인 전수만을 강조하던 형편이었다. 따라서 선배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을 가하는 자유로운 토론이 어려운 풍토였다. 이러한 풍토를 깬 것이 사단 칠정 논변이다. 선배의 이론에 반기를 든 고봉도 비범하지만, 그것을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인 퇴계의 태도에 더욱 감탄하게 된다. 8년 동안의 논변이 진행되는 동안에 퇴계는 고봉의 이론을 신중하게 검토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할 때마다 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논변이 시작될 무렵 퇴계는 대사성까지 지낸 59세의 대가였던 데 비하여 고봉은 갓 과거에 급제한 33세의 소장학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장장 8년 동안의 논변이 가능하였고 그것이 드디어 당시의 정체된 학문 풍토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켜 우리 나라 성리학의 발전을 가져왔는데 이것은 퇴계의 겸허한 학문태도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그의 제자는 "선생은 겸허로써 덕을 삼아 털끝만큼도 교만하여 잘난 체 하는 마음이 없었다."라고 평하였다.
참고도서 : '퇴계 선집' / 윤사순 역주 / 현암사
3. 교육자로서의 모습
1) 교육관
오늘날의 국립대학총장에 비견되는 성균관 대사성의 책무를 맡으면서 퇴계는 그의 교육관을 밝힌 적이 있다. "선비란 예의의 원천이며 원기의 본거이다......지금부터 제군들은 모든 일상생활이 예의 가운데서 행하여지도록 하라. 서로 채찍질하여 구습을 벗도록 힘쓰고, 집에서 부형 모시는 마음을 미루어 밖에서 어른과 웃사람을 섬기는 예를 삼을 것이다. 안으로 충신(忠信)에 주력하고 밖으로 손제(遜悌)를 행함으로써 국가가 문예를 장려하고 학교를 세워 선비를 기르는 뜻에 부응하라." 요컨대 올바른 선비를 길러 국가의 교육 목적에 부응하는 것이 퇴계가 지향했던 교육자상이었다.
2) 학문의 방법
학문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 "다만 부지런하고 수고스럽게 하며 독실하게 하는데 있으니, 이렇게 하여 중단됨이 없으면 입지가 날로 강해지고 학업이 날로 넓어질 것이다."라고 타일러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독서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 "그저 익숙하게 읽는 것 뿐이다. 글을 읽는 사람이 비록 글의 뜻은 알았으나 만약 익숙하지 못하면 읽자마자 곧 잊어 버리게 되어 마음에 간직할 수 없을 것은 틀림없다. 이미 읽고 난 뒤에 또 거기에 자세하고 익숙해질 공부를 더한 뒤라야 비로소 마음에 간직할 수 있으며 또 흐믓한 맛도 있을 것이다."라 하여 겉만 핥고 지나치는 것을 경계하며, 익숙하게 하여 깊이 체득하는 공부를 강조하였다.
3) 교육의 방법
퇴계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맨 먼저 '소학'으로부터 시작하여 '대학', '심경', '논어', '맹자' 및 '주자서'를 가르친 다음 모든 경서를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처음 배움에 나아가는 제자가 읽어야할 고전으로서 특히 '심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소학'은 체와 용을 함께 갖추었고, '근사록'은 의리의 정밀한 것은 비록 상세하나 학자들을 깨우치고 감동시켜 분발하게 하는 것이 부족한 듯하다. 초학자가 처음 시작하는 데는 '심경'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고 하여'소학'을 넘어서 처음 읽을 책으로 '심경'을 제시하고 '근사록'을 한 단계 더 높은 단계의 연구서로 제시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주자전서'를 통해 학문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학문이 심화되면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을 소개하였다. "'주자전서'를 읽을 수 있으면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요, 이미 그 방법을 알 게 되면 반드시 느끼게 되어 떨치고 일어날 것이다. 여기서 공부를 시작하여 오랫동안 익숙한 뒤에 사서를 다시 보면 성현의 말씀이 마디마디 맛이 있어서 비로소 자기에게 쓰이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주의 학문을 한결같이 표준으로 삼아서 지행병진함을 가르쳤다.
4) 다산 정약용이 퇴계의 교육을 평한 글
"일일이 실행을 통해서 많은 인재를 길렀으며 누구든 어떤 부문이든 가르쳐 모두 대도에 이르게 하였다.중도에 폐하는 사람이 없이 끝까지 가르쳤으며 학문을 닦아 선생의 뒤를 잇게 했다. 퇴계선생의 가르침을 읽으면 손뼉치고 춤추고 싶으며 감격해서 눈물이 나온다. 도가 천지간에 가득차 있으니 선생의 덕은 높고 크기만 하다."
4. 문학자 및 서예가로서의 모습
1) 퇴계는 당시까지 가장 많은 저술을 한 분이다. 전문적 저서는 별도로 하더라도 일기는 손수 쓴 것 4년분 외에 이름이 전하는 것만도 9종이 된다. 시는 제목을 아는 것이 3560수(퇴계의 시는 '도산전서' 중에 실린 것이 2천여편을 넘칠만큼 풍성하여 종전의 학자 문집 중에서 보기 어려웠을 뿐아니라, 전문작가의 시집 중에서도 보기 드믄 존재였다.), 편지는 3천 수 백편이 문집에 전하고, 그밖에 여러 종류의 긴 글이 문집에 298편 실려 있다.
퇴계학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열심히 연구하고 있지만 퇴계의 저술을 다 읽은 이는 없을 것이다. 워낙 방대하여 읽기도 힘들지만 아직 다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일기와 한글 편지는 거의 행방을 알 수 없고 그의 수학에 관한 글과 '계몽전의'는 어려워서 잘 해득하지 못한다.
2) 퇴계는 早年부터 終年까지 사이에 중국문단의 명시인들의 시의 영향을 받았다. 곧 도연명·두보·한유·유종지·백락천·유우석·구양수·소동파·소옹·주희 등의 시를 읽고, 次韻·用韻·和韻했다는 것은 문집 도처에 보인다.그 중에도 陶·杜·歐·蘇·朱의 시를 가장 사랑하였다. 초년엔 陶·杜詩를 중년엔 蘇詩를 만년엔 朱·邵詩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陶杜朱詩를 즐겨 읽고 인간서정을 승화시켰다. 퇴계의 제자 문봉 정유일은 "선생이 시를 좋아하되 도연명과 두보의 시를 즐겨 보았으나, 만년엔 주자의 시를 더욱 즐겨 읽었다"고 하였다.
3) 퇴계는 문장과 글씨로 중국 예부 관원들을 감탄하게 하였으며, 경복궁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여 명성을 떨쳤다.
참고도서 : '이퇴계의 실행유학' / 권오봉 저 / 학지원
5. 생활인으로서의 모습
1) 합리성의 존중
성호 이익은 퇴계의 예는 예의 지침이며 상례에 있어서는 가장 합리적인 제일인자라 받들고 정리해서 예설유편을 엮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어느 시대든지 통용될 수 있는 법이라야 예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제도에 얽매이기 보다는 인간 위주여야 하고, 때와 재물과 분수와 처지에 맞아야 하고, 검소하고 원칙에 맞게 시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중국 예법이 여자를 낮추어 죽은 아내를 망실(亡室)이라 한 것을 고실(故室)로 바로 잡았고, 계모를 홀대한 예법을 버리고 아들에게 적모(嫡母-서자가 아버지의 정실을 일컫는 말)상을 치른 후 산소 아래서 시묘도 살게 했다. 죽은 남편을 따라 죽으려는 질부(조카의 아내)를 말려서 열녀가 되기보다는 살아 어버이에게 효도하도록 했고, 상중에 병든 아들과 조카를 종권(일시적으로 상주하는 일을 중지시켜 건강을 회복하는 것)시켜 고기를 먹게 했다. 생일 제사를 지내면 힘에 벅차 기제사도 못 지내게 된다고 당시의 풍속을 바꾸었다. 제물을 많이 담으면 비용이 많이 든다고 쌓지 못하게 하였으며, 부모 합설 제사는 가례에 어긋난다며 단설(제삿날 그 분 제물만 차림)하게 하였다. 초상에는 문상객에게 술 대신 차를 내놓게 하였으며, 제사 음식의 음복은 남과 나누어 먹지 않고 제관만 먹게 하였다. 아무리 죽은 부모가 좋아한 음식이라도 살아있을 때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아들이 따르기 어려우므로 일정한 제물만을 쓰게 하였으며, 진설도에 있더라도 철이 아니면 다 구해 쓰지 못하므로 세 가지 철에 맞는 과일로써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2) 뛰어난 인격자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은 '학봉집'의 '퇴계선생 언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쉽고 명백한 것은 선생의 학문이요, 정대하여 빛나는 것은 선생의 도(道)요, 따스하고 봄 바람 같고 상서로운 구름 같은 것은 선생의 덕(德)이요, 무명이나 명주처럼 질박하고 콩이나 조처럼 담담한 것은 선생의 글이었다. 가슴 속은 맑게 트이어 가을 달과 얼음을 담은 옥병처럼 밝고 결백하며, 기상은 온화하고 순수해서 순수한 금과 아름다운 옥 같았다. 무겁기는 산악과 같고 깊이는 깊은 샘과 같았으니, 바라보면 덕을 이룬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퇴계는 아랫사람이나 제자들에게도 항상 공손한 말씨를 사용하고 예의를 지켰으며,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퇴계가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한 까닭은 사화로 어지럽던 시대적 상황과 학문에 대한 열정도 있었지만 한 고을을 다스릴 만한 벼슬에 머무르라는 어머니의 뜻을 지키고자 한 것이기도 하다.
퇴계의 일상생활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말과 행동을 진지하고 신중하게 하여 우아하고 경건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한평생 경(敬)을 실천한 그의 모습과 태도는 한결같이 단아하고 차분하여, 수양에 의해 절제된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보여 주었다.
3) 멋과 풍류를 즐기는 생활
퇴계는 자연을 지극히 사랑하여 자연 풍경과 철따라 피는 꽃나무에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 많은 시를 남겼다. 퇴계가 살던 집에는 항상 솔·대나무·매화·국화 등을 심어 벗삼고 즐겼다.
50세 때 한서암을 짓고 뜰에다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오이를 심어 지조의 표상으로 삼았다.
이듬해는 계상서당으로 옮겨서도 방당을 만들고 연을 심고, 솔·대·매화·국화·연(송·죽·매·국·연)을 다섯 벗으로 삼아, 자신을 포함하여 여섯 벗이 한 뜰에 모인 육우원(六友園)을 이루어 어울리는 흥취를 즐겼다.
61세 봄에는 도산서당 동쪽에 절우사의 단을 쌓고, 솔·대·매화·국화를 심어 즐겼다. 특히 매화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 서울에 두고 온 매화분을 손자 안도편에 부쳐 배에 싣고 왔을 때 이를 기뻐하여 시를 읊기도 하는 등 매화는 그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매화분 하나를 마주하고 주고 받으며 화답하는 시를 읊조리는 모습은 매화와 퇴계가 하나가 되어가는 경지를 느끼게 한다.
또한 퇴계는 산림에 묻혀 사는 선비로서 산사를 찾아 독서하거나 산을 찾아 노닐기를 즐겨 했다. 그는 독서하는 것과 산에서 노니는 것이 서로 같은 점을 들어 독서와 산놀이를 일치시키기도 했다. 가장 즐겨 찾아 노닐었던 산은 청량산으로 도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그는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그 이름이 경관과 어울리지 않으면 이름을 새로 짓기도 하고, 그 자신 소백산을 돌아보고 유산록(遊山錄)을 지었지만 다른 사람의 유산록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서문이나 발문을 지어 주면서, 산수의 유람이 갖는 의미를 깊이 음미하고 있다.(퇴계는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소백산을 유람하고 봉우리와 대의 이름을 고쳐지었으며, 돌아와 '소백산유산록'을 지었으며, 홍응길의 '금강산유산록'에 서문을 지었고, 남명 조식의'두류산유산록'에 후식을 지었다. 단양군수로 있으면서 단양팔경을 정했으며 죽계구곡도 정했다고 전해진다.
산놀이뿐만 아니라 물놀이도 그의 운치있는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고향 선배인 농암 이현보을 모시고 분천에 가서 뱃놀이를 하였고, 단양군수로 있으면서 제자 황준량과 함께 귀담에서 뱃놀이하였다. 퇴계가 가장 즐겨 뱃놀이하던 곳은 도산서원 앞에 있는 탁영담이다. 62세 때에는소동파가 적벽에서 뱃놀이를 한 해로부터 8갑주(480년) 되는 날이기에 퇴계도 여러 제자들과 풍월담에서 뱃놀이를 하려고 준비하였으나 전날 큰 비가 내려 이루지 못하여 못내 아쉬워했다.
47세 무렵에는 7대(臺)와 하동(霞洞)에서부터 청량산까지 낙동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11승경을 명명하고 시를 짓는 풍류를 즐겼다.
퇴계는 16세기 중반에 주리적 이기이원론의 토대 위에서 기대승과의 4단7정론을 통하여 한국 성리학의 특징인 심성론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정밀하게 규명함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기본 틀을 정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 이기론
퇴계의 사상은 정자, 주자의 입장을 바탕에 둔 정주학의 토대 위에서 세워졌다. 그리하여 정주 계통의 성리학설을 기본 입장으로 하여 퇴계는 이와 다른 이론이나 학설을 배척한다. 불교나 도교와 같은 다른 사상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성리학이라 하더라도 심학이라 불려지는 양명학이라든지, 서화담 계통의 기일원론, 나정암(나순흠이라고도 함, 명의 성리학자)의 주기설 및 오초려(오징이라고도 함, 원의 학자)의 주륙 절충적 견해 등을 배척한다. 그 중에서도 양명학과 화담계의 기일원론에 대한 배척이 가장 강력하다.
퇴계는 양명학의 심즉리설과 지행합일설을 거경궁리론과 지행병진설로 조목 조목 반박하고, 화담의 기일원론을 이기이원론으로 반박한다. 결국 퇴계는 정주의 이기이원론만을 인정한다.
2. 심성론(인성론)
이처럼 퇴계는 정주의 입장을 자신의 학문적 토대로 하여 출발하였지만 깊이를 더하여 감에 따라 독자성을 띠게 되었고, 마침내 정주의 차원을 넘어서게 되었는데 그 좋은 예가 심성론 특히 사단칠정론이다. 퇴계는 기대승과의 4단7정론을 통하여 이기론의 이론을 심성 개념의 분석과 해명에 적용하여 한국 유학의 중요한 특징인 심성론(인성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은 퇴계의 사상으로 인하여 한국 성리학은 강한 독자성을 지니고 발전하게 된다.
3. 수양론
퇴계의 학문정신은 이론적 정밀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심성을 살아 움직이는 현실 속에서 이해한다는데 중요한 특징이 있다. 퇴계의 수양론은 심(心)과 경(敬)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은 수양이 이루어지는 바탕이요, 경은 수양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퇴계의 학문적 관심은 항상 인간의 도덕적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귀결되고 있으므로 이 '경'이야말로 퇴계 사상의 핵심이며, 퇴계가 존경받는 이유도 이러한 경의 태도를 한 평생 몸소 실천한 인격자이기 때문이다.
문인 정유일은 퇴계의 이러한 학문과 사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오로지 정주를 표준으로 한다. 경과 의가 같이 지탱하고(경의협지, 敬義夾持), 지와 행이 함께 나아가며(지행병진, 知行幷進), 밖과 안이 한결 같고(표리여일, 表裏如一), 본과 말을 함께 하며(본말병거, 本末幷擧), 대원을 뚫어보고 대본을 심어 세운다(식립대본 植立大本), 그 이른 경지를 논한다면 우리 동방에는 오직 그 한 분 뿐이다.
성리학의 이기론은 인간과 사물의 존재를 그 구조와 근원에서 이(理)와 기(氣)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특히 인간의 심성정(心性精)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적용됨으로서 심성론으로 발전하였다. 퇴계는 '천명도설'에서 마음(心)을 이(理)와 기(氣)가 결합한 것이라는 기본 인식 위에서 성(性 : 성품)과 정(精 : 감정)을 통섭하는 주체로 파악하였다. 곧 성과 정은 인간의 마음에 내포된 두 차원의 존재양상이며, 성은 이로서 마음의 본체요, 정은 이와 기가 동시에 드러나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인식하였다. |
사단(四端)과 칠정(七精)은 마음에서 정(精)의 두 가지 발동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맹자는 사단의 마음을 인간의 성품이 선한 증거로서 제시한 것이며, 칠정은 '예기'에서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인정으로 제시한 것이다. |
퇴계 학문의 기본적 성격은 주자를 표준으로 하여 도학의 철학적 근거를 밝히고 인격적 실현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의 사상에는 성리설의 개념적 분석체계와 더불어 수양론의 실천방법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도학의 학문적 기본방법을 거경(경의 생활화)과 궁리(진리탐구)라는 두 축으로 파악한다면, 이 둘은 도학을 이루는 양면으로서 유기적 관계를 지니는 것이다. |
양명학이 심학으로 불리는 이유는 왕양명이 "심즉리"를 전제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이 전제는 "모든 이가 다 내 마음에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주자와 같이 "격물"을 "내 마음이 사물에 이르러(格=知) 그 이를 궁구"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객관적인 방법으로 "일일일격"하는 "궁리"의 태도를 양명은 지리한 공부라 하면서 반대한다. 모든 이가 마음 속에 있으므로, 필요한 일은 마음이 그 이를 잘 드러내도록 하는 것뿐이다. 이런 점에서 격물은 마음을 바로잡는 것(格=正)에 지나지 않는다. 양명은 이러한 공부, 즉 심학이야말로 간결한 공부라 주장하면서 그 필요성을 역설한다. 왕양명은 모든 이가 마음에 있다는 전제로부터 지식 역시 마음에 본래 양지로서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서 충효의 이가 마음 속에서 나온다는 것은 결국 행위가 양지의 표출이라는 뜻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지와 행은 합일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호호색이라는 구절을 예로 들어, 호색을 아는 것과 그 호색을 좋아하는 행은 일치한다는 것이다. 만일 지와 행이 일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다만 사욕의 폐 때문이라 한다. 그리하여 지행합일은 심즉리설과 함께 양명학을 대표하는 주요 이론이 된다. 퇴계의 양명학 배척론의 근저에는 의리의 행을 뒷받침하려는 강력한 가치지향의 정신이 깔려있다고 하겠다. 이 정신이 퇴계로 하여금 이기이원론의 입장에 서게 하였으며, 나아가 가치에 무관한 기보다는 가치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이를 더 중요시하는 주리적 이기이원론의 입장에 서도록 한다. |
이익은 '이자수어(李子粹語)'를 찬술하여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丁若鏞)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써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중국의 북경(北京) 상덕여자대학 (尙德女子大學)에서 대학의 증축, 확장기금에 충당하기 위하여 '성학십도'를 목판으로 복각(復刻)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널리 반포(頒布)하였을 때, 중국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량치차오 (梁啓超)는 찬시(贊詩)를 써 그 제1연에서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 님이시여”라고 그를 거리낌 없이 성인이라 호칭하였다. 일본유학에의 영향을 제외하면 다음과 같은 조호익의 말은 이황의 학적 지위를 간결히 표현한 매우 적절한 평가라 볼 수 있다. 즉, “주자가 작고한 뒤 도(道)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버렸다. 퇴계는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비교할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1609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그뒤 그를 주사(主祀) 하거나 종사하는 서원은 전국 40여개처에 이르렀으며, 그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8.15광복 후 제5공화국 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국비보조로 크게 보수, 증축되어 우리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되었다. |
1) 양명학을 배척하고 정주학의 입장을 취함 2) 정주학 중에서도 주리적 이기 이원론을 견지함 3) 특히 사칠설과 같은 심성론의 이론적 탐구를 병행하는 주지주의적 경향이 강함 4)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정밀하게 규명하여 조선시대 도학의 기본틀을 정립함 7. 경의 의미 퇴계선생의 학문의 핵심이 바로 이 '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의 위대한 점은 성리학에서 말하는 인간과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신 데에 있는데, 그 실천의 핵심이 바로 이 '경'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황 조선 명종 때 사상가
성리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조선 최고의 사상가로 동방의 주자 로 불렸다. 이황은 사립학교를 세워 제자를 기르는 데도 힘썼으며, 그의 학설을 일본에까지 커다란 영황을 끼쳤다. 지은 책으로는 (퇴계 전서)등이 있고, 시조로 도산십이곡 이 있다. 어릴때 이름은 서홍 자는 경호 호는 퇴께 도옹 퇴도 청량산인 시호는 문순이다.
이황은 일찍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자식들을 글방에 보내고, 늘 몸가짐과 말을 삼가도록 가르쳤다. 이황은 혼자 책을 읽고 싶이 사색하기를 즐겼는데, 먹고 자는 것도 잊고 공부하다 건강을 해쳐 평생 잔병치레가 심했다고 한다. 비교적 늦게 벼슬을 시작하였으나 당파 싸움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맡은 일에 성실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높은 벼슬자리보다는 낮으면서도 자연과 어불어 학문할 수 있는 자리를 원하였다.
도산서원을 세워 올바른 교육에 힘쓰다
이황은 풍기 군수로 있을때 나라에 건의하여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에 소수서원이라는 이름과 전답과 많은 책이 내려지게 하였다. 소수 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이었고, 그 뒤로 각지에 서원이 세워져 유학과 교육이 크게 발전했다. 이황 자신도 50세에 가까워지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한서암과 계상 서당 및 도산 서당을 세우고, 성리학 연구와 책 쓰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래서 <주자전서> 를 간추려 <주사서절요>를 짓고 <계몽전의> 라는 책을 엮였다. 이밖에 <성학십도>라는 글을 통해 유학의 근본이 되는 사상과 실천방법을 옥창적으로 정리하였더, 또한 이황은 전국에서 몰려드는 제자들에게 단순히 지식을 전해 주시보다는 인격을 높이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았고, 아무리 어린 제자라도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언제나 공손하게 예절을 지켰다.
조선 성리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키다.
이황은 이언적의 학문을 이어받아 주자의 철학을 독창적인 조선의 성리학으로 발전시켰다. 무엇보다 글을 배우는 것은 마음을 바르게 하기 위한것이며,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치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학문을 하고 인생을 사는 기본태도로서 공경하는 마음을 지닐 것을 강조하였다. 한편 그는 노학자로서 젊은 선비인 기대승과 8년에 걸쳐 학문에 대한 농쟁을 벌이며 토론하는 모범을 보였다. 이황의 학풍은 유성룡 김성일 등에게 이어져 조선 주리 철학의한 산맥을 형성하였고, 일본에까지 건너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501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나다
1512년 작은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우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다
1542년 백운동 서원을 사액 서원이 되게 하다
1555년 예안 향약을 실시하다
1567년 선조에게 뮤진 육조서를 올리다
1570년 세상을 떠나다
● 이황
✰ 일생
- 1501 -1570, 유학자, 호는 퇴계, 자는 경호, 성학십도, 주자서절요, 도산십이곡 등 저술- 연산군 7년 이식의 막내로 안동 도산 태어나,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 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람- 6,7세에 글 읽기를 시작하여 12세에 숙부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움- 19세에 송나라 유학을 집대성한 '성리대전'을 읽고 진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였으며, 20세에 동양 철학의 이치가 담긴 '주역'을 공부함(이 무렵 건강을 해칠 정도로 학문을 향한 열정은 뛰어났다.) - 뒤늦게 벼슬에 올랐지만, 학문에 더 뜻을 두어 고향에 돌아와 도산서당 을 짓고 학문에 정진함- 학문을 배우려는 제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가르침을 받았고, '도산십이곡'의 뛰어난 시조를 남김(도산서당 : 지금은 도산서원이라고 부르는데, 1574년 이황선생의 학식과 덕망을 추모하는 문인들과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경북 안동 도산면 토계리 에 창건한 서원. 원래는 이황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가르치며 학덕을 쌓던 곳으로 1575년에 한석봉의 글씨로 된 사액(賜額)을 받음으로써 영남학파의 본산이 되었다. 서원 안에는 약 400여종에 달하는 4,000권이 넘는 장서와 장판 및 이황선생의 유품이 남아 있다. 대원군의 사원 철폐 때에도 소수 서원, 숭양 서원 등과 더불어 정리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1969년 문공부에서 해체, 복원하여 면목이 일신되었다고 한다. )
✰ 생활 자세
- 경솔함이 없이 신중하였으며, 결코 오만하지 않고 항상 겸허한 자세로 학문을 닦음- 어머니께 효도하고 학문을 닦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여겼다. "집안에 들어가면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고, 밖에 나가면 공경을 다한다."라는 '논 어'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실천하며 삶을 살아갔다.
✰ 학문
- 학문의 출발점을 철저한 사색으로 삼았고, 단순히 이론에서 진리를 찾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진리가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학문의 근본 입장이다. - 알고 있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달라서는 안 된다는 知行一致를 주장하였으며, 그 기본은 매사에 정성을 다하는 誠이요, 그에 대한 실천은 敬 이라고 하였다. 이 경을 평생을 통하여 실천하였다. - 류성룡, 김성일, 정 구 등에 의해 학문이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이루어, 이이의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기호학파와 함께 우리나라 유학의 커다란 줄기가 되었다. - 우리나라 성리학이 체계 확립에 공헌하였고,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 되어 일본 유학계 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동방의 주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 교훈 및 본받을 점
- 지극한 효성 : 홀어머니의 뜻에 순종하여 털끝만큼도 어김이 없었다. - 올바른 생활 : 벼슬에 있을 때에 관리들이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을 막았으며, 나이 어린선조에게 왕으로서 지켜야 할 올바른 도리를 적어 올리기도 하였다. - 지행합일의 자세 : 성품이 맑고, 학문과 인격을 닦는 일에 정진하였고, 아는 것을 실천하려고 평생을 노력- 겸허함과 의지 : 겸허한 가운데에서도 끝내 이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손수 썻습니다.. 답변확정 부탁이요 ..
ㅠㅠ 학교에서 퇴계이황에 대해서 조사해오라고해서요 사진과 자료 빨리부탁드립니다!! ㅠㅠ 도와주세요~~ 급해요!! 빨리 답변부탁합니다! 이름 : 이황 출생 : 1501년 사망...
접는방법 유튜브 링크나 어떻게 접는지 알려주세요 안녕! 율곡이이(퇴계이황) 강아지 접는법에 대해 알려줄게. 유튜브 링크는 없지만, 간단한 방법을 알려줄게. 먼저, 강아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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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받을점 ,명언 알려주세요! 완전 자세하게 적어주세요... 그의 도덕적 가치와 사상, 본 받을 점, 명언에 대해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도덕적 가치: 퇴계 이황은 도덕적인...
학교 숙제로 나왔는데 퇴계이황에 대해 좀 알려주세요... 1.어느 시대 인물인가? 2.퇴계 이황의 업적은 무엇인가? 3.우리가 본받을 점은 무엇인가? 빨리 알려주세요 ㅠㅠ...
... 퇴계이황에 대해 자세히 좀 알려 주세요!!! 태계이황은요 1, 백운동서원을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만들었음 2, 79번이나 벼슬을 사퇴하여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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