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조상들의 종교생활좀 알려주세요..ㅠ.ㅠ

우리조상들의 종교생활좀 알려주세요..ㅠ.ㅠ

작성일 2005.12.01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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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숙제인데요..

검색창에다 써도 좋은 자료가 없네요..

 

 

  저기,,우리조상들의 종교생활좀 알려주세요..

 

 자세하고,A4용지 한쪽정도 요..

 

  내일까지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조상들의 종교 생활

1. 각 종교의 특징

(1) 원시 신앙
    ① 우리 나라 역사와 함께 생겨난 신앙으로,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큰 문제에 부딪
       혔을 때, 자연의 힘에 의존하고 도움을 구한 데에서 시작된 신앙입니다.
    ② 자연의 힘에 대해 두려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자연을 숭배하는 사상입니다.
    ③ 대상 : 자연물(바위, 돌), 산, 바다, 땅에 살고 있는 신 등
(2) 불교
    ① 기원전 500년 경에 인도의 석가모니에 의해 시작된 종교입니다.
    ② 전파 : 중국으로부터 고구려에 처음 전해진 후, 백제와 신라로 전파 되었습니다.
    ③ 지혜와 자비심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④ 역할 : 나라가 어려울 때 백성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고,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의 침입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는 등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습니다.

▲ 불교의 연등 행사

(3) 유교
    ① 공자의 가르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② ‘인’을 모든 도덕의 최고 이념으로 여겼으며,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실현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③ 효와 충을 중시하였고, 예를 갖추는 생활을 강조하였습니다.
    ④ 조선 시대에는 국교로 정해져 사회의 모든 통치와 질서 유지에 사용되었습니다.
    ⑤ 우리 나라의 정치 제도나 사회 관습, 규범, 가치관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4) 크리스트교
    ①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로, 성경이 경전입니다.
    ② 천주교와 개신교로 나뉘며, 사랑의 실천과 평등을 중시합니다.
    ③ 처음에 선교사들은 개신교를 보급하기 위해 학교, 병원, 사회 사업을 펼치기도 하였
       습니다.
(5) 천도교
    ① 조선 시대 때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입니다.
    ② 외국의 침략과 사회적인 불안으로 흔들리는 우리 나라를 지켜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천도교를 일으켰습니다.
    ③ 인내천 사상 :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이며,‘하늘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 이라는 뜻으로
       모든 사람은 귀하고 평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6) 대종교
    ① 나철이 일으킨 종교로, 단군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②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민족 부흥의 밑바탕이 되는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대종교를 일으켰습니다.
    ③ 역할 :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이룩하려는 민족 정신과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 주었습니다.
(7) 원불교
    ① 1916년 박중빈이 세운 민족 종교입니다.
    ② 감사와 보은하는 생활과 근면, 저축하는 생활 등의 자립 정신을 강조 합니다.
    ③ 간척 사업, 저축 권장 등 경제적 자립 운동을 통해 나라의 독립을 찾으려고 노력하였
       습니다.

2. 종교가 우리 생활에 끼친 영향

(1) 원시 신앙 : 자연 숭배, 점, 굿, 기우제, 서낭당, 고사 등
(2) 불교 : 훌륭한 문화 유산(석굴암, 불국사, 팔만대장경판, 종), 호국 정신


▲ 고사 지내는 모습

(3) 유교 : 충효 예절 사상, 학문의 발달, 가문 풍습 잇기, 성균관 대성전, 사군자 등
(4) 크리스트교 :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행사, 인간 평등 사상, 교육·의료· 문화 발전 등
(5) 민족 종교 : 경제적 독립 사상, 민족 자주 정신 등


▲ 서낭당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천상의 호천금궐(昊天金闕)에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동방의 땅에 살아온 조선의 백성들은
 아득한 예로부터 삼신상제(三神上帝),
 삼신하느님, 상제님이라 불러 왔나니,
 상제는 온 우주의 주재자요 통치자 하느님이니라.
 동방의 조선은 본래  신교 (神敎)의 종주국으로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함께 받들어 온,
 인류 제사 문화의 본고향이니라. (道典1:1:4∼6)

 
 

 

 하느님의 공식호칭, 상제님!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상제(上帝)라는 말조차 낯설기만 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과연 선조들은 상제님을 어떻게 받들어 왔을까요? 행촌 이암의『단군세기』를 보면, 옛날 고조선 시대에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에서 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MBC는 지난 1990년 개천절 특집 프로그램으로 한민족 고유의 상제님 신앙과 제천의례(祭天儀禮), 그리고 백두산에서 봉행된 천제를 방영했습니다. 본지에서 전반부의 주요 내용을 발췌하여, 우리 민족의 천제문화의 발자취를 소개합니다. (이하 방송내용 발췌 정리)
 
 
 백산(白山)에서 천제를 올려온 한민족
 하늘에 대해 우리 민족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문명의 동이 틀 무렵, 우리 민족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하늘님, 즉 천신(天神) 개념을 터득했으며, 스스로를‘하늘님의 백성’으로 여기고 있었다. 『삼국유사』는 그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인간 세상에 뜻을 품어온 하늘님의 아들 환웅은 아버지 환인의 허락을 얻어 천부인 세 개와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 신시(神市)를 열었다. 비, 구름, 바람의 도움을 받아 인간을 널리 이롭게 다스리던 중 웅녀에게서 아들을 얻었으니, 그가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이라.”
 
 우리 민족의 발원지로『삼국유사』에 기록된 태백산은 백두산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그런데 우리 지명에는 백두산 외에도‘밝다’는 뜻의‘흰 백’자가 들어간 지명이 곳곳에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백산(白山)을 섬긴다 하여‘배달민족’으로 일컬어왔다. 배달의 어원은‘밝다’, 그 뜻은‘밝고 신성한 땅 혹은 산’이다.
 
 왜 우리 민족은 곳곳에 백산을 두고 백산을 섬기며 살아왔는가? 원래 신시가 열렸던 태백산, 즉 백산 중의 백산은 백두산이다. 그러나 왕조가 바뀌고 국경이 달라지면서 백산도 여럿이 됐다. 남한 제일의 백산인 태백산. 이곳이 백산인 징표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천단에 있다. 그리고 산의 정기를 받은 천지(天池)로서의 역할을 해온 황지(黃池, 태백시 소재)에 있다.
 
 결국 신시의 백성과 우리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에 제사를 올림으로써 분명히 깨닫는 자기자신이‘하늘의 자손’이라는 자각이다. 그리고 국호가 달라지고 시대가 변해도 결코 변할 수 없는 배달민족의 이름이다.
 
 
 한국인 정신사의 중요한 물줄기, 제천의식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일대에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단군 유적과 유습이 많이 남아있다.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강화도 마리산. 이 마리산 정상에는 단군이 몸소 쌓았다는 참성단이 있다. 이곳에 몸소 단(壇)을 쌓고 하늘을 우러른 단군왕검. 숙종때 참성단을 중수했던 강화유수 최석항의 중수비(1716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 후손들은 수 천년 동안 끊임없이 단군을 섬겨왔다. 그런데 어찌 무너진 단을 중수치 않겠는가!”
 “참성단에서는 전통적으로 우리민족이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조선조 이후 왕조에서는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많은 여러 종교단체라던가 지방토호들이 여기서 각각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있어 왔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민족이 유불선 3교가 들어오기 이전, 아주 아득한 옛날부터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있어왔는데, 유불선 3교로 대표되는 체제종교나 체제왕조 또는 체제정권 차원에서가 아니라 우리민족 고유의 신앙전통, 즉 참성단에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얼과 민족문화 주체성을 그리는 예배전통이 이어져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윤이흠 / 서울대 종교학과)
 
 단군왕검으로 비롯된 제천의식(祭天儀式)과 천신사상(天神思想)1)은 고조선 사회에서부터 한말 근대사회에 이르기까지 한국인 정신사의 밑바탕을 흐르는 중요한 물줄기요, 민족문화를 구성하는 주춧돌이었다.
 
 중국의『후한서』나 우리의『삼국유사』에 기록된 상고시대 우리의 제천의례는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예맥의 무천2) 등이 있는데, 주로 추수가 끝난 10월이나 12월에 드렸으며, 크게 모여 며칠씩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었다고 한다.
 
 
 융성과 쇠퇴의 굴곡을 겪은 천제문화
 이러한 우리 민족 고유의 제천의례는 시대적 역사적 조건에 따라 융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는 굴절을 겪어야만 했다. 삼국시대 전반기에는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유교사상의 결합으로 세련된 제의(祭儀)를 발전시킬 수도 있었으나, 고려와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는 우리민족이 제천의례를 거행할 수 있는 정당성마저 억제되어야 했던 것이다.
 
 “조선사회를 중국과의 관계에서 제후국가로 한정시키면서 제천의례의 정당성 문제가 아주 크게 논의되었습니다. 조선초기에는 제천의례가 정기적인 게 아니라 재난에 대한 기원으로서 부정기적으로 거행됐죠. 세조때 정기의례로 회복이 됐긴 했지만 대체로 조선시대를 통해서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제천의례의 역할을 했던 것은 도교적인 의례들이었고, 그러다가 고종 때인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고종의 황제등극의례로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단인 원구단이 건축되고, 그 원구단에서 등극의례가 거행되었습니다.”(금장태 / 서울대 종교학과)
 
 고종황제가 중국으로부터 독립된 황제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원구단(園丘壇)을 짓고 제천의례를 올린것은 세조 3년 이후 440년만의 일이다. 중국의 천자만이 하늘의 제사를 올릴 수 있다는 사대주의를 물리치고 우리가 바로 하늘의 자손이며, 진정한 독립국의 백성임을 내외에 알린 것이다.
 
 그 원구단 자리가 바로 서울 소공동의 조선호텔 자리다. 일제에 의해 헐린 원구단은 철도호텔이 되었다가 지금의 조선호텔이 되었고, 제기와 위패를 보관했던 황궁우(皇穹宇)만이 남아있다. 그야말로 국운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것이다.
 

 “일청전쟁 이후 조선에서 청나라 세력이 제거되면서 그것을 계기로 천자의 나라, 황제의 나라로 독립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칭제건원(稱帝建元),즉 황제를 일컫고 연호를 세운다라고 합니다. 1897년(광무원년)에 고종황제께서‘주상전하’라는 칭호 대신에‘황제폐하’가 되신 겁니다. 황제로 등극을 하려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 필수요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다 그것을 아뢰어야 하는 겁니다. 고종황제께서 백관을 다 거느리시고 원구단에 나오셔서 황제의즉위식을 거행하신 겁니다(10월 12일). 그리고 광무2년(1898년) 동짓날에 다시 거동하셔서 황궁우에서 제천행사를 올리게 됩니다.”(최근덕 / 성균관대 유교학과)
 
 사대주의의 그늘에 가려 천제조차 맘대로 올리지 못했던 조선의 왕들. 때로는 왕조를 지탱해주는 수단으로, 때로는 민족자존을 알리는 깃발로 나부꼈던 제천의례. 무너진 단을 다시 세우고 끊어진 하늘숭배의 숨을 다시 불어 우리가 신시의 백성으로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그날은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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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신앙이란 우리의 조상들이 하늘 및 자연에 대한 숭배사상으로

정령숭배(영혼숭배사상에 근거)와 인간과 신의 매개자인 무당에게 의지

하는 것을 원시신앙이라 합니다.

우리나라는 고대 원시시대부터 삼국시대 초기에 이르러서도 종교는 샤머니즘과 점술이

널리 퍼져 있어, 원시 신앙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민간에서는 천신·일월신·산신·해신 등의 여러 신들을 섬기고 있었고, 왕실이나 지

배 계급은 족장들은 조상의 영혼이 현세의 후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어 시조신을 섬겨 제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회가 단순한 씨족 사회의 범위를 벗어나, 영토의 확장과 중앙 집권제의

확립 등으로 인해 복잡한 사회로 바뀌어 있었으므로, 부족 사회 당시에 성립 되었

던 원시 종교를 가지고서는 확대된 사회를 이끌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나라의 체

제를 재정비해야 할 필요를 느낀 왕실에서는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나라의 정신적 통

일을 꾀하게 되었습니다.


1.자연신 숭배 (애니미즘)

해, 달, 별, 하늘, 산, 바다 등 모든 자연 환경에는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여, 신으로 섬기며 받드는 신앙.

2.귀신숭배 (샤머니즘)

귀신을 믿고 무당의 존재를 인정하는 신앙. *현대 무속인 들이라고 보시면 되요.

3.동식물 숭배(토테미즘)

특정한 동물과 식물 등을 자기 씨족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 떠받드는 신앙. *단군신화에서 나오는 웅녀가 곰 출신이란 것이 대표적인 토테미즘이라고 합니다. 단군신화는 곰을 숭배하는 부족과 하늘을 수배하는 부족의 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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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에 공자(孔子)가 시작하였고,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하나였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인 BC 136년에 국교(國敎)가 된 이래 청(淸)나라가 망할 때까지 역대 조정의 지지를 얻으며 정교일치(政敎一致)의 학문으로 중국의 사회·문화 전반을 지배해 왔다. 설명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에 공자(孔子)가 시작하였고,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하나였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인 BC 136년에 국교(國敎)가 된 이래 청(淸)나라가 망할 때까지 역대 조정의 지지를 얻으며 정교일치(政敎一致)의 학문으로 중국의 사회·문화 전반을 지배해 왔다. 또한 한자문화권인 한국·일본 및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도 전해져서 큰 영향을 주었다. 유학(儒學)과 유교는 서로 비슷한 말이지만, 중국에서는 유교라는 말은 별로 사용하지 않고 학파를 의미하는 유가(儒家)나 학문을 의미하는 유학이라는 말로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교라는 말은 외래의 불교에 대비시켜 300년 무렵부터 쓰기 시작한 듯하며 후세에 이르기까지 주로 유(儒)·불(佛)·도(道) 3교를 병칭할 경우에 사용되었다. 유가·유학에 대해서 유교라는 말은 교화적(敎化的)인 면을 중시하여 어느 정도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한 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유교는 본래가 사대부(통치자 계급·)의 학(學)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가·유학이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다. 특색유교는 한마디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다. 수기(修己)는 자기 자신의 도덕적 수양을 쌓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교는 윤리의 학이다. 그러나 그 수기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치인(治人)을 목적으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국민을 다스리기 위한 정치의 학이다. 그런데 유교에서 말하는 정치는 법률이나 형벌로 백성을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교리와 언행을 통해 백성을 선도하는 것이며, 따라서 먼저 자기 자신을 닦는 것이 필수가 된 것이다. 지덕(知德)이 뛰어난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는데, 군자는 치자(治者)를 뜻하기도 하였다. 그 반대는 <소인(小人)>인데, 피치자(被治者)인 소인에게는 스스로 수양하는 능력이 없고, 치자(군자)의 교화를 받아야 비로소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최고의 지덕을 갖춘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하는데, 성인은 제왕(帝王)으로서 천하에 군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어 성인이 곧 왕자(王者)라고 하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왕(聖王)>이라는 개념이 성립된다. 최고의 성인인 제왕(성왕)을 정점으로, 사대부는 각기 쌓아올린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제왕을 보익(輔翼)하고, 제왕이 도덕정치[德治]에 만전을 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여기서 윤리와 정치의 일체화를 찾아볼 수 있다. 주요 윤리설(倫理說)근본사상은 <인(仁)>이다. 인은 사람을 대할 때의 마음가짐을 말하며 넓은 뜻을 내포하고 있으나, 사랑에 가깝고 그 실천에는 특히 <충서(忠恕;진심과 배려)>가 중시되었다. 그러나 인은 먼저 부모·형제 등에서부터 점차 다른 사람에게로 미쳐야 하며 <효(孝)>를 다하는 것이 인의 첫째이고, 형제에 대한 <제(悌)>가 그 다음이라고 한다. 그런 뜻에서 유교의 인은 이른바 인류애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편, 인이 확대되어 서민대중에게 미치면 그것은 <인정(仁政)>이 되고, 다시 그 인이 천하를 다스리게 되면 그 사람은 성왕이라 칭하게 된다. 이렇듯, 개인적인 심성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이 치정의 원리도 되는 것이다. 인은 원래 사람의 마음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정(情)으로 흘러서 발로(發露)를 그르칠 우려가 있다. 그것을 억제하여 적절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의(義)>이다. <인의(仁義)>를 병칭하는 것은 맹자(孟子)에게서 시작되었으며, 그 뒤 유교의 덕목(德目)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에 예(禮)·지(智)를 추가해서 <사덕(四德)>이라 부르며 여기에 신(信)을 추가해서 <오상(五常)>이라고 한다. <예>는 원래 예의범절의 형식이고 사회적인 질서를 유지하며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한 규범·관습이다. 따라서 예의 형식을 배우는 것은 유가에게는 중요한 교과이지만, 내면적으로 예를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실행하는 겸허한 심성을 기르는 일이 필요하다. <지>는 일반적으로 <덕>과 대조되는 개념이지만, 유교에서는 이것을 단순한 지식으로 보지 않고 사물의 시비선악(是非善惡)을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파악하는 덕목의 하나로 꼽는다. <신>은 <충신(忠信)>이라고 할 경우 진심을 뜻하는 <충(忠)>이 말로 표현된 것을 뜻하지만, 오상에서 말하는 신은 양자를 합하여 거짓이 없는 마음의 상태와 태도를 말한다. 한편, 신은 사람뿐만 아니라 천지신명(天地神明)에 서약하는 측면도 있는데, 신과 비슷한 뜻인 <성(誠)>은 이러한 관점에서 하늘의 길이며, 또한 천지간에 가득찬 정기(正氣)로서 형이상적(形而上的)인 원리가 되기도 한다. 유교에는 또한 <오륜(五倫)>이 있다. 오륜은 기본적인 대인관계를 5가지로 정리한 것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 등이 그것이다. 역사적 변천유교의 역사는 한나라 무제 때 국교화된 것을 중심으로 그 이전인 원시유교와 그 이후로 크게 나누어지고, 다시 국교화 이후의 유교는 한나라 무제 때부터 당(唐)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 송(宋)나라 초기에서 명(明)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宋明性理學), 청나라 때(淸朝考證學)로 3분해서 고찰하는 것이 통례이다. 원시유교춘추시대 말기의 난세에 노(魯)나라에서 태어난 공자는 밖으로는 예를 실행하여 잃어버린 질서를 회복하고, 안으로는 인으로써 사람을 섬겨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고대적·미신적인 하늘의 중압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고, 합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폈다. 이러한 그의 사상에 공명한 인사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들었고, 여기서 유교교단(儒敎敎團)이 발생하였다. 공자가 죽은 뒤 문인(門人)들은 각지로 분산되어 교세를 넓혀 나갔는데, 이에 자극을 받아 묵가(墨家)·도가(道家) 등의 제자백가가 등장하였다. 유가는 가장 유력한 학파로서 백가에 대항하면서, 또는 그 영향을 받으면서 차츰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동안에 나타난 사람이 맹자와 순자(荀子)이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통하여 공자의 윤리설을 내면적으로 심화시켰고,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창하여 공자가 말하는 덕치에 대한 구체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순자는 사람은 태어난 그대로는 선(善)해질 수 없다고 하여 예(사회적 규범)를 통한 검속(檢束)을 중시했고, 아울러 객관적인 교학의 정비에 노력하였다. 《서경(書經)》 《시경(詩經)》을 비롯한 오경(五經)은 순자를 전후한 무렵에 모두 갖추어졌는데, 경서의 학습을 필수로 교학의 지침으로 삼은 것은 순자에게서 시작되었다. 한당훈고학(전통적 유교)유교의 국교화는 BC 136년 오경박사제도(五經博士制度)가 설치되었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유교는 이미 오경의 학습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원래 유교는 늘 선왕(先王)의 도(道)를 찬양하고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왕(武王)을 성왕으로 앙모하고, 공자의 가르침의 연원(淵源)은 이들 성왕에게 있다고 보았으며, 오경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선왕의 도를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論語)》보다도 오경을 더 중시하였다. 그리고 이후의 유교는 난해한 오경을 앞세우고 훈고학[註釋學], 즉 유교 경서의 뜻을 해석하거나 천술(闡述)하는 <경학(經學)>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국교화한 당초 전한에는 <금문경학(今文經學)>이 성행하였는데 이것은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에 입각하여 경문을 신비적으로 해석해서 한왕조의 출현을 정당화한, 정치색이 짙은 경학이다. 후한에 들어서자 이것과 병행하여 문자가 가진 의미에 유의하는 <고문경학(古文經學)>이 생겨서 훈고학으로서의 경학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전한·후한 400년간은 왕조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경학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 들어서 노장사상(老莊思想)과 외래의 불교가 성행하자 유교는 쇠퇴하였고, 경전의 주석에도 노장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당나라에 들어서자 남북조로 양분되어 있던 경학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오경정의(五經正義)》가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대비하여 경의(經義)를 국가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경정의》의 출현으로 경학이 고정되어 유교가 활력을 잃었으며 이록(利祿)을 위한 학으로 전락해갔다. 당시 사상계의 주류를 이룬 것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철학이었다. 송명성리학(신유교)송나라 때에 들어서면서 유교의 현상에 대한 반성과 함께 혁신적인 기운이 움텄다. 북송에서 시작되어 남송의 주희(朱熹;朱子)에 의하여 완성된 송학(宋學;朱子學)이 그것인데, 오경을 대신하여 사서(四書)를 존중하고, 윤리학으로서의 본래성을 되찾는 한편 그것을 우주론적인 체계 속에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 천지만물의 근원은 <이(理)>이다. 이는 순수지선(純粹至善)이고, 사람은 본성으로서 그 이를 가지지만(性卽理), 동시에 육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는 물질적인 기(氣)를 섞게 된다. 사람은 기에 의해서 가지게 되는 자기의 욕망(欲望;人慾)을 억제하고 본성(本性;天理)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 방법으로는 거경(居敬;마음을 純粹專一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과 궁리(窮理;사물에 대하여 理를 추구한다. 구체적으로는 讀書問學)의 양면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주자학은 처음에 이단시되었으나 뒤에 사대부의 지지를 얻어 융성하게 되었으며, 원(元)나라 때에는 전통적 유교를 대신하여 국교가 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졌다. 명나라에 이르자 왕양명(王陽明;王守仁)의 심학(心學)이 관학화(官學化)하여 주자학보다 활기를 띠었다. 심즉리(心卽理)를 밝혀 이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우리 마음이 이(理)라고 하는 철저한 유심주의론(唯心主義論)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 말류(末流)에는 극단으로 치달아서 독서를 멀리하고 경서의 권위를 부정하는 풍조까지 생겨났다. 청조고증학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에는 양명학의 말류를 비판하고 송·명 나라의 신유교를 공소(空疎)하다 하여 배척하고 훈고학으로 복귀하려는 기운이 고조되었다. 송학(宋學)은 여전히 관학 위치를 유지하였으나 학술의 주류는 한학(漢學)으로 옮겨갔다. 그것은 후한 때의 고문경학을 기초로 해서 문자학(文字學)·음운학(音韻學)·역사학·지리학 등 여러 학문을 구사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을 통하여 진리를 구하는 것)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고증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청학의 관심은 점차 전한 때의 금문경학으로 옮겨갔다. 정치색이 강했던 금문경학은 청나라 말기의 동란기를 맞아 여러 종류의 개혁운동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다. 캉유웨이[康有爲] 등에 의해 제창된 공양학(公羊學)이 바로 그것이다. 현대중국과 유교청나라가 멸망하고 1912년 중화민국이 출현함으로써 성왕[天子]을 정점으로 하는 유교의 정치학은 존재의의를 상실하였고, 그 윤리설 또한 자유평등을 부르짖는 시대사조 앞에서 비판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권력자측에서는 여전히 유교를 온존(溫存)시키려는 동향이 있었고, 또한 효윤리(孝倫理)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도덕은 민중들 사이에 뿌리깊게 남아 있었다. 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유교비판 풍조는 한층 강해졌다. 특히 문화혁명 이후 전개된 74년의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이 가장 격렬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이름이 이러한 정치운동에 이용된다는 것은 아직도 그 영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며, 비공운동이 지나간 뒤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孔子廟)가 수복(修複)되었고 일부에서는 유교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거의 문화유산으로 평가되는 선에서 머무르는가, 아니면 그 가운데서 얼마만큼이라도 현대적 의의를 찾으려 하는가 하는 것은 이후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유교한국에 유교사상이 전래된 시기는 문헌자료의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BC 3세기 무렵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부터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되었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유교가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는 대체로 고래(古來)의 모습을 유지하였으나, 점차 유교가 생활 속에 자리를 잡고 그 영향이 깊어질수록 다양한 변화를 보이면서 가치관·생활양식·법률제도 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삼국 가운데 고구려는 중국과 인접해 있어 가장 먼저 중국문화와 접촉하여 수용, 발전시켰으며, 백제가 해상을 통해 중국과 교류함으로써 유교 및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그러나 신라는 지정학적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어려웠기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문화를 받아들였다. 삼국시대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고수하면서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래되어 건국 초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었으며, 노장의 자연사상도 역시 혼입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었고 후기에는 종교로서의 도교를 수입함으로써 유·불·도교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을 세워 상류계급의 자제를 교육하기 시작했는데 교과내용은 오경과 삼사(三史), 《문선(文選)》 등이 중심이었다. 이것은 국가체제와 문물의 정비, 유학의 정치원리에 입각한 통치, 유교경전 학습을 통한 인재의 배출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건국 초부터 역사 기록을 중시하여 《유기(留記)》 《신집(新集)》 등을 편찬하였으며, 경전을 통해 왕도정치(王道政治)·덕치주의(德治主義)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였다. 이 밖에 예제(禮制)나 생활습속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효에 대한 관념은 조상숭배에 더욱 집착하게 하였으며, 유교의 예법에 따라 국사(國事)와 종묘를 새로이 세우고 중시하게 되었다. 백제는 중국의 군현제도를 모방하여 국가질서를 수립하고 중국문화 수용도 고구려보다 빨랐다. 특히 중국에서 수입한 경학·의학 등을 일본에 전파하는 데 앞장서서 일본문화의 개창자적 역할을 하였다. 유교의 법식은 백제인의 의례와 윤리의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제사나 묘제 등에도 유교적인 의식을 적용하기 시작하여 전통적인 신관(神觀)·사생관·윤리의식이 점차 유교화되었다. 한편, 일찍부터 한문(漢文)을 사용하여 《백제본기(百濟本紀)》 《백제신찬(百濟新撰)》 《서기(書記)》 등의 역사서를 편찬하였으며, 4세기 후반부터는 유학이 본격적으로 성행하여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을 들 수 있는데, 근초고왕 때 아직기는 일본에 유학을 전하고 일본 왕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근구수왕 때의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하고 그곳에서 왕실의 스승이 되었다. 이 밖에 무녕왕 때의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고안무(高安茂) 등도 일본에 유학을 전하는 등, 백제는 일본에 학술과 문화를 전파하여 일본 고대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라는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유교의 전래가 가장 늦었다. 그러나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사회질서와 정치이념에 유효 적절하게 토착화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지증왕 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유교의 뜻에 따라 순장(殉葬)을 금지하고,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의 뜻을 취해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상복법을 제정·공포하고 율령의 반포, 공복을 제정하는 일 등은 모두 넓은 뜻에서 유교사상이 국가현실에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유교사상과 화랑도(花郞道)와의 관계도 주목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화랑도는 본디 사람들을 모아 선비를 선발할 목적 아래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교육하였으니, 이는 치국의 대요(大要)였다>고 기록하였으며, 《삼국사기》에서는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紀)》를 인용하여 <현좌충신(賢佐忠臣)과 양장용졸(良將勇卒)이 화랑도에서 배출되었다>고 하였다. 이밖에 임신서기석(壬申書記石)에 화랑들이 《시경》 《상서》 《예기》 등을 배울 것을 하늘에 맹세한 내용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아도 화랑도와 유교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문무왕의 뒤를 이어 위민(爲民)·보민(保民)·안민(安民)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당시의 유학은 당나라로부터 문화를 도입하여 교육사상을 확립함과 동시에 유학자라고 할 만한 인재를 배출하는 데 특색이 있었다. 682년(신문왕 2)에 국학을 세워 교육제도를 완비하였는데, 그 편제나 교과 내용이 모두 유학에 입각한 것이었다. 또한 788년(원성왕 4)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이는 골품제에 대한 비판·견제로 이루어진 개혁으로서, 과거제의 선구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강수(强首)·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 등이 있다. 고려시대고려 초기에는 태조 왕건(王建)이 불교를 숭상한 영향을 받아 유교적 정치사상과 이념의 현실적용이란 특성 아래 유교적인 교양이 사이에 일반화된 상태였지만 주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치중하였기 때문에 유학사상이 아직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지는 못하였다. 태조 때는 학교를 창설하여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광종 때는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관료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성종 때에는 숭불(崇佛)의 폐단을 고려, 팔관회 등의 불교행사를 금하고 유교주의를 답변확정하여 정치의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여기에는 최승로(崔承老)와 같은 유신(儒臣)의 활약이 컸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는 사장(詞章)에 치중하던 초기 단계와는 달리 점차 통경명사(通經明史)에 힘써 경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심화되었다. 또 정치에 실제적인 적용이 증대한 것 이외에도 한당유학(漢唐儒學)의 내용이 다른 학문이나 사회적인 측면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문종 때 유학자로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불리던 최충(崔沖)은 사학인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열고 구경(九經)과 삼사로써 후진을 가르쳤는데, 뒷날 이를 본받아 유신들이 다투어 사학을 열어 십이공도(十二公徒)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뒤이어 예종·인종 때 발달한 강경제도(講經制度)는 군주에게는 유학적 교양 배양과 통치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었고, 문신들에게는 부화(浮華) 방지와 국가경륜 연마 및 군주에게 직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예종은 문무칠재(文武七齋)와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는 등 국자감 부흥에 힘써 유학 기풍이 날로 높아졌다. 이와 함께 고려 초기 수사사업(修史事業)의 흐름 속에서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가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사실 기록을 넘어서는 유학적 역사의식과 역사서술 체계를 갖춘 역사서로 평가된다. 한편 관학이 부흥하고 강경제도가 발달한 반면 예종 때부터 문사(文士) 우대 경향이 극심해져 문벌귀족의 전횡이 노골화되었다. 그리하여 의종 때에는 이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무단정치를 함으로써 유학은 침체기에 접어들고 현실도피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고려 말엽에 이르러 침체된 유학을 부흥시키기 위한 반성적 기풍이 조성되었고, 중국의 송학, 즉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이 도입되었다. 안향이 원나라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들여옴으로써 전래된 주자학은 백이정·우탁(禹倬)·권부(權溥) 등 신진학자들의 수용단계를 지나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길재(吉再) 등에 이르러 학문적으로 심화, 정착되었다. 주자학자들은 송대 성리학 벽불론(闢佛論)과 도통론(道統論)에 근거,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국가정책과 이념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고려 초기 이래 경세론적 특성을 가졌던 유학은 철학적 논리와 체계를 갖춘 성리학 수용으로 학풍이 일변하고, 시대를 이끌어가는 이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조선의 유교입국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유교는 조선시대에 와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유교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세종 때 유교문화가 꽃을 피운 이래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문물제도가 정비되었다. 그러나 15세기 말엽부터 영남의 사림파(士林派)가 정계에 진출한 이래 훈구파와 대립하여 사대사화(四大士禍)가 일어났다. 특히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향촌자치제와 왕도정치를 주장하다가 훈구파에게 몰려 몰락하였는데,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로는 사림들이 정계 진출을 단념하고 향촌으로 내려가 학문에 주력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학문 경향도 사색과 이론 탐구에 치중하면서 발전하였는데, 서경덕(徐敬德)과 이언적(李彦迪)은 조선 성리학의 선구였다. 그 뒤를 이어 명종·선조 때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어 성리학은 일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이황(李滉)과 이이(李珥)가 대표적인 학자로, 그 학풍이 후세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이이와 성혼(成渾)간의 사단칠정이기론변(四端七情理氣論辨)을 거쳐 학문적 정점을 이루었는데, 이후 이황 계열의 영남학파에서는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이이 계열의 기호학파에서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는 등 학파에 따라 학설이 양분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황·이이 등 여러 학자들이 성리학을 연찬한 뒤 유교철학은 고도로 발달하여 국내적으로 전성시대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영향을 미친 바가 크다. 특히 이황의 학설은 야마사키 안사이[山崎闇齋]를 비롯한 일본 주자학파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일본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에는 국가체제와 사회질서 확립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예학이 성립되어 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裂) 등이 17세기 한 시대를 풍미하였고, 이어 17세기 후반부터는 알맹이 없이 서로 헐뜯는 학설로 전락한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과 예론(禮論)의 대립을 지양하고 원시유교의 근본정신에 입각, 경세치용(經世致用)·이용후생(利用厚生)·실사구시 등을 부르짖는 실학사상이 대두하여 박제가(朴齋家)·정약용(丁若鏞) 등이 영·정조시대를 전후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실학파의 활동이 부진해지자 다시 성리학이 세력을 만회하였다. 그 뒤 서학(西學) 세력이 날로 심각해지면서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이 대두하여 외국사상과 외국문물에 대한 배격운동이 전개되었으나, 그 수구운동(守舊運動)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오히려 근세 개화혁신에 장애가 되는 측면이 많았다. 그 원인은 조선 말엽의 유교계가 대부분 국제정세에 어둡고 유교의 유신정신(維新精神)을 망각한 채 수구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국권피탈 이후 일제는 문화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친일 유학자류(儒學者流)를 이용, 성균관을 경학원(經學院)으로 격하시켜 한국 유교의 맥을 단절시키고자 하였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부설하여 황도유교(皇道儒敎)를 선전하는 등 기형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전국 유림(儒林)의 총의로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시키고 46년 전국 유림의 결합체인 유도회(儒道會)를 결성함과 동시에 성균관대학교를 창설하여 유학정신에 바탕을 둔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용어?br>연표BC 1500 경 은(殷) 은(殷)왕조 성립(~1120) 1120 주(周) 주(周)왕조 성립(~256). 이 무렵 기기가 조선으로 가 백성을 교화함 770 주(周) 주나라 동천(東遷), 춘추시대 시작됨(~226) 551 공자 공자 노(魯)나라에서 태어남(~479) 481 공자 공자, 《춘추》 완성함 479 공자 공자 죽음. 이즈음부터 유가사상이 일어남 372 맹자 맹자, 노나라에서 태어남(~289) 300 경 한반도 한반도에 한문자 전래 213 진 진시황제 시서 및 백가서 불태움 212 진 진시황제 유생을 생매장함 136 한(漢)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로 오경박사를 두고 유교를 국교로 정함 104 한(漢) 동중서 죽음 BC 91 한(漢) 사마천 《사기》 완성함 AD 29 후한 태학을 세움 83 후한 훈고학자 정중(鄭衆) 죽음 166 후한 훈고학자 마융(馬融) 죽음 200 후한 훈고학자 정현(鄭玄) 죽음(127~) 249 위(魏) 경학자 하안(何晏)죽음 320 경 진(晉) 청담(淸談)이 유행함 372 고구려 태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함 405 백제 왕인이 일본에 한문과 유학을 전함 607 수(隋) 구품중정제를 대신하여 과거제도 시작됨 624 당(唐) 균전법 실시 648 당(唐) 공영달(孔穎達) 죽음(574~) 653 당(唐) 오경정의 반포 682 신라 국학을 세움 717 신라 김수충(金守忠)이 당에서 돌아와 공문십철과 72제자의 화상을 대학에 둠 720 신라 백성에게 정전을 나누어 줌 788 신라 독서삼품과 실시 824 당(唐) 고문운동의 선구인 한유 죽음(768~) 841 당(唐) 《복성서(復性書)》를 지은 이고 죽음(772~) 857 신라 최치원 태어남 858 고려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 처음 실시 982 고려 최승로 시무이십팔조의 봉사 올림 992 고려 국자감 설치 1008 북송 공자를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으로 가시(加諡) 1020 고려 최치원을 처음으로 성묘에 배향 1050 고려 이 무렵부터 사학십이도가 생기기 시작 1068 고려 해동공자 최충 죽음(984~ ) 1069 북송 왕안석의 신법 실시 1073 북송 송학(宋學)의 비조 주돈이 죽음(1017~) 1076 북송 장재 《정몽(正蒙)》 지음 1085 북송 정호(程顥;明道) 죽음(1032~) 1091 북송 고려사신 이자의(李資義)를 통하여 고려의 서적을 구함 1099 북송 정이 《역전(易傳)》 지음 1101 고려 국자감에 서적포 설치 1107 고려 국자감에 구인재 등 7재 설치. 북송, 정이 죽음(1033~) 1116 고려 궁중에 청연각·보문각 설치 1119 고려 국자감에 양현고 설치 1131 고려 노장의 학문을 금함 1138 남송 호안국(胡安國) 《춘추전》 이룩함 1145 고려 김부식 《삼국사기》 편찬 1170 고려 무신의 난이 일어나 문교의 암흑기가 시작됨 1175 남송 여조겸(呂祖謙)의 중개로 주희와 육구연(陸九淵) 형제가 만나 학문을 토론함(鵝湖之會) 1177 남송 주희 《논어집주》 《맹자집주》 이룩함 1189 남송 주희 《대학장구》 《중용장구》 이룩함 1192 남송 육구연 죽음(1139~) 1197 남송 <경원(慶元) 이학(異學)의 금(禁)>이 일어나 주자학이 위학(僞學)으로 몰림 1200 남송 주희 죽음(1130~) 1234 고려 이무렵 최윤의(崔允儀) 《고금상정예문》 50권 간행 1241 남송 주돈이·장재·정호·정이·주희를 공자묘에 종사함으로써 도학이 공인화함 1270 남송 여정덕(黎靖德) 편찬 《주자어류》 간행 1271 몽고 국호를 원(元)으로 정하고 허형(許衡)을 국자좨주에 임명함 1275 고려 국자감을 국학으로 개칭 1289 고려 안향 원나라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됨. 이 무렵 원나라에서 주자학 들어옴 1296 고려 경사교수도감 설치 1304 고려 안향의 건의로 국학에 섬학전을 둠. 국학에 대성전 이룩됨 1306 고려 안향 죽음(1243~) 1313 원 과거가 실시되고 주자학의 주석이 채용됨 1320 고려 공자의 소상 만듦 1325 원 주자학을 관학으로 공인. 고려, 평양에 기자사(箕子祠) 세움 1348 고려 이색(李穡) 원에서 성리학 연구 1357 고려 《주자가례》에 따라 3년상을 행하게 함 1367 고려 이색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성리학을 보급함 1371 고려 정도전 《심문천답》 지음 1375 명(明) 전국에 사학 세움 1389 고려 5부학당과 지방향교에 교수를 둠 1392 고려 정몽주 죽음(1337~). 고려 멸망 1394 조선 정도전 《조선경국전》 《불씨잡변》 편찬 1398 조선 성균관의 문묘와 명륜당을 건립 1405 조선 권근의 《예기천견록》 간행됨 1415 명(明) 호광(胡廣) 등 봉칙찬(奉勅撰) 《사서대전》 《오경대전》 《성리대전》 이루어짐 1420 조선 궁중에 집현전을 설치 1432 조선 설순 등 《삼강행실도》 편찬 1443 조선 유교(특히 성리학)의 정신과 원리를 바탕으로 훈민정음 창제 1453 조선 문묘의 액(額) 대성전(大聖殿)을 대성전(大成殿)으로 고침 1464 명(明) 설선(薛瑄)의 《독서록》 이루어짐 1493 조선 김시습 죽음(1435~) 1498 조선 무오사화 일어나 김종직의 문도를 비롯한 다수의 사류들이 죽거나 귀양감 1517 조선 조광조 등 성리학의 장려를 청함 1518 명(明) 왕수인(王守仁)의 《전습록》 간행됨 1519 조선 기묘사화 일어남. 조광조 사사됨(1482~). 현량과 폐지 1520 명(明) 왕수인 치양지설(致良知說) 제창 1528 명(明) 나흠순(羅欽順) 《곤지기》 이룩함. 왕수인 죽음(1472~) 1543 조선 주세붕 백운동서원 세움(서원의 시초) 1544 명(明) 왕정상(王廷相) 죽음(1474~) 1546 조선 기불멸론자(氣不滅論者) 서경덕의 죽음(1489~) 1553 조선 영남학파의 선구자 이언적 죽음(1491~) 1559 조선 이황·기대승 간에 사단칠정논쟁 시작됨(~1566) 1564 명(明) 나홍선(羅洪先;念庵) 죽음(1504~) 1568 조선 이황 선조에게 《성학십도》 올림 1570 조선 이황 죽음(1501~) 1572 조선 이이·성혼 간에 사단칠정논쟁 시작됨(~1578) 1574 조선 도산서원 세워짐 1575 조선 이이 선조에게 《성학집요》 올림 1579 명(明)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고 강학을 금지시킴. 하심은(何心隱) 옥사(1517~) 1582 명(明) 마테오리치[利瑪寶] 마카오에 상륙하여 가톨릭 포교를 개시 1584 명(明) 왕기(王畿;龍溪) 죽음(1498~). 조선, 이이 죽음(1536~) 1588 명(明) 나여방(羅汝芳;近溪) 죽음(1515~) 1590 명(明) 이지(李贄) 《분서(焚書)》 간행 1592 조선 임진왜란 일어남. (~1598). 조선성리학 일본에 전해짐 1602 명(明) 좌파양명학자 이지 <인심·풍속의 혹란과 성인에 대한 모독>의 죄로 투옥, 옥중에서 자살(1527~) 1603 명(明) 마테오리치 《천주실의》 지음 1620 명(明) 초횡 죽음(1540~) 1625 명(明) 동림파 사대부에게 대탄압 가해짐(~1626) 1631 조선 김장생 죽음(1548~) 1636 조선 병자호란 일어남(~1637). 척화삼학사(斥和三學士) 청에 잡혀가 죽음을 당함 1644 명(明) 명나라 멸망(1368~) 1645 명(明) 명나라 유신 유종주(劉宗周;念臺) 순국(1578~) 1659 조선 김장쟁의 《가례집람》 간행됨 1660 조선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예송(禮訟) 시작됨(~1674) 1663 청 황종희(黃宗羲) 《명이대방록》 이룩함 1670 청 고염무 《일지록》 간행됨 1673 조선 유형원 죽음(1622~) 1676 청 황종희 《명유학안》 이룩함 1683 청 염약거 《고문상서소증》 제1권 지음 1689 조선 송시열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지음 1692 청 왕부지(王夫之) 죽음(1619~) 1703 조선 대명의리의 본산인 만동묘(萬東廟) 세워짐 1709 조선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 사이에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 시작됨(~1715) 1712 청 이광지(李光地) 등 봉칙찬(奉勅撰) 《어찬주자전서》 지음 1716 청 《고문상서원사》 지은 모기령 죽음(1623~) 1717 청 그리스도교 포교금지 1725 청 《고금도서집성》 지음 1736 조선 정제두(鄭齊斗) 죽음(1649~) 1758 청 청조한학의 제창자 혜동(惠棟;松崖) 죽음(1697~) 1763 조선 이익(李瀷) 죽음(1682~) 1777 청 대진(戴震) 《맹자자의소증》 지음 1782 청 기윤 등 《사고전서》 지음 1783 조선 홍대용 죽음(1731~) 1784 조선 이승훈 가톨릭 전래 1788 청 청대 공양학의 비조 장존여(莊存與) 죽음(1719~). 조선, 임성주(責聖周) 죽음(1711~) 1798 청 완원(阮元) 《경적찬고》 지음 1801 조선 신유사옥 일어남. 청, 장학성 죽음(1738~) 1804 청 전대흔(錢大昕) 죽음(1728~) 1805 조선 박지원 죽음(1737~) 1824 청 방동수(方東樹) 《한학상태(漢學商兌)》 지음 1836 조선 정약용 죽음(1762~). 최한기 《기측체의(氣測體義)》 지음 1844 청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 간행 1849 청 완원 죽음(1764~) 1856 조선 김정희 죽음(1786~) 1862 청 양무운동 일어남 1866 조선 병인사옥 일어남 1868 조선 흥선대원군 서원 철폐 단행(~1871) 1877 조선 최한기 죽음(1803~) 1881 조선 위정척사운동 일어남 1885 청 캉유웨이[康有爲] 《대동서(大同書)》 지음 1886 조선 이진상(李震相) 죽음(1818~) 1891 청 캉유웨이 《신학경위고(新學經緯考)》 간행 1894 조선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 폐지 1895 조선 성균관 관제 공포, 경학과 설치 1896 청 담사동(譚嗣同) 《인학》 지음 1897 청 캉유웨이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간행 1898 청 캉유웨이 등 변법자강운동을 일으켰으나 무술정변으로 실패 1902 청 과거제도 폐지 1906 청 쑨원[孫文] 일본 도쿄에서 <삼민주의와 중국의 전도(前途)>라는 연설을 함. 조선, 최익현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투쟁하다가 쓰시마섬에 유폐 도중 단식으로 순국 1910 조선 한일합방으로 멸망 1911 청 신해혁명 일어남. 한국, 일제에 의해 성균관이 경학원으로 격하됨 1913 중국 캉유웨이 등 유교의 국교화를 추구하여 존공운동(尊孔運動) 일으킴. 후스[胡適] 유교를 배척함 1919 중국 5·4운동과 함께 유교비판운동 가속화함. 한국, 유림단의 파리장서사건 일어남 1921 중국 중국공산당 결성 1922 한국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 간행됨 1927 중국 캉유웨이 죽음(1858~) 1934 한국 신조선사에서 《여유당전서》 간행됨 1937 중국 국공합작 이루어짐 1939 한국 명륜학원을 명륜전문학원으로 승격 1944 중국 펑여우란[馮友蘭] 《신원도(新原道)》 지음 1945 한국 광복에 따라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하고 유도회 결성 1946 한국 성균관대학 창설 1949 한국 현상윤 《조선유학사》 간행 1965 중국 문화대혁명의 시작으로 전통 사상·문화·풍속·습관 등이 파괴됨 1973 한국 성균관·유도회총본부 <윤리선언문> 발표. 1974 중국 《린뱌오[林彪]와 공맹의 도》 배포를 계기로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 시작됨 1976 중국 마오쩌둥 사망, 장칭[江靑] 등 4인방 체포 ----------------------------------------------------------------------------도교 (道敎 Taoism) 요약 중국의 3대종교(유교·불교·도교)의 하나. 도학이라고도 한다. 도교는 중국민족의 고유한 생활문화 속에서 생활신조, 종교적 신앙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중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이다. 설명 중국의 3대종교(유교·불교·도교)의 하나. 도학이라고도 한다. 도교는 중국민족의 고유한 생활문화 속에서 생활신조, 종교적 신앙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중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이다. 이는 한(漢)시대 이전의 무속신앙과 신선사상, 민중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한대에 황로신앙(黃老信仰)이 가미되어 대체적으로 후한 말부터 육조시대(六朝時代)에 걸쳐서 형성되었고, 현재까지도 타이완이나 홍콩 등지에서 신앙되고 있다. 초기의 도교적 신앙은 불로불사의 신선(神仙)을 희구(希求)한다든지 무술이나 도술에 의한 치병(治病)·재해 퇴치 등 현세의 행복추구에 그 중점을 두었으나, 유교나 불교와 경합(競合)하고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 내적 수양과 민중적 도덕의식의 견지(堅持)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도 중요시하게끔 발전했다. 도교의 개념도교란 사상·교리·기술(技術)·사회·교단(敎團)·신앙대상 및 신앙의례 등 모든 요소를 함유하는 문화복합체이다. 그것은 중국의 역사와 풍토, 지역적 조건 안에서 정치와 사회·문화 등과 관련되면서 전개된 생활문화를 기초로 하여 발생한 것이다. 말하자면, 중국민족 고유의 종교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비슷한 유형으로 발전한 것에 유교가 있다. 그러나 양자의 차이는, 유교가 중국의 사회·국가의 질서, 그리고 학문·기술을 통치자의 입장에서 구명(究明)하고자 한 것과는 달리, 도교는 종교적 요소를 중심으로 하여 사회의 질서 및 학문·기술을 민중의 입장에서 밝히고자 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도교에서는, 유교에서 배격한 미신이나 온갖 도깨비·변괴귀물(變怪鬼物) 등 무축적 귀신신앙(巫祝的鬼神信仰)도 포함한다. 이 도교의 개념은 <민중도교>와 <교회도교>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민중도교는 농민이나 민중 일반의 신앙과 생활신조, 그리고 그것에 의해 조직된 집단이나 결사를 말한다. 이는 후한 말에 태동하고 있었는데, 특히 송대 이후의 서민사회의 발전에 대응하여 유교나 불교 등과의 합일(合一)하에서 전개된 것이다. 한편, 교회도교는 국가나 왕조에 의하여 공인된 도교의 교단·교파이며, 5세기의 구겸지(寇謙之)의 <신천사도(新天師道)>가 그 최초이다. 천사도는 원래 <삼장>인 장릉(張陵)·장형(張衡)·장노(張魯)의 <오두미도(五斗米道)>라 불리었으며, 후한 말에 일어난 농민을 주체로 하는 초기의 민중도교였지만, 위(魏)·진(晉)의 정권밑에서 발전한 신오두미도(新五斗米道) 즉 신천사도는 북위(北魏)왕조의 공인(公認)에 의해서 교회도교가 되었다. 각종 도교의 용어도교의 원뜻은 <도를 설명하는 가르침>이다. <도(道)>란, 유가(儒家)나 도가(道家)를 비롯하여 중국의 모든 사상과 철학을 설명하는 학설의 중심으로, 중국인의 의식의 기초에 존재하는 것이다. <도교>라는 말은 선진(先秦)시대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처음에는 <성인(聖人)의 도의 가르침>이란 의미를 가지고 유교를 지칭(指稱)하고 있었다. 또, 불교 전래 뒤로는 불교를 의미했던 시대도 있었다. 즉, 이것들은 <선왕(先王)이나 성인의 도를 설명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인 것으로, 오늘날 일컬어지는 중국의 민족종교로서의 도교를 가리킨 것은 아니다. 이 <성인의 도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과 술(術)을 <도술(道術)>이라고 하였다. <도술>이란, 원래 <성인의 도의 술>, 치세치민(治世治民)을 위한 정치의 술이었다. 한편, 선인(仙人)이 되기 위한 방법, 또는 선인과 교감(交感)하기 위한 방법으로 <신선방술(神仙方術)>, 의료기술로서의 <의방술(醫方術)>, 그 밖에 과학적 기술과 주술 등 여러 가지의 방술이 존재해 있었다. 이 도술을 행하는 자가 도사(道士)이고, 방술을 행하는 자가 방사(方士)이다. 도술과 방술의 차이를 굳이 말한다면, 전자가 국가·정치에 관한 경세(經世)·치민(治民)의 술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개인적·종교적 성격을 가지는 일이다. 그렇지만 후한대로 들어서자 이 양자는 혼동되었다. 따라서 후한대에는 도술의 범위가 매우 넓어져, 정치술이나 과학적 기술에서 주술과 예언·복점(卜占) 등의 종교적 영력(靈力)을 포함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들을 행하는 자는 도술의 사(士), 즉 <도사>라고 불리었다. 이 경우의 도사는, 원래의 <성인의 도의 도술>의 사로서의 <도사>라기보다는 종교적 요소를 지닌 <도사>였다. 무의(巫醫)의 주술과 부적을 사용하는 종교집단은 <귀도>라고 불렸다. <태평도>나 삼장의 <오두미도> 등도 귀도를 중요한 요소로 삼은 초기의 도교적 집단이다. 또 귀도에 대하여 <신도>라는 성어(成語)가 다루어졌다. <귀신(鬼神)>의 <귀(鬼)>에 연관되어서 <귀도>가 생겨났고, <신(神)>에 연관되어서 <신도>가 생겨났다. <신도>는 우선 신을 제사지내는 <단(壇)>과 통하는 도를 의미했으나, 점차로 신앙의 객체인 신 그 자체, 또는 신신앙(神信仰)에 기초하는 종교집단과 가르침도 뜻하게 되었다. <도가>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하나이지만, 전국시대에는 유가·법가(法家)·묵가(墨家) 및 방기(方技)·신선(神仙) 등과의 교류가 있었고, 진(秦)·전한대를 거쳐서, 후한대에는 <도가>의 개념 안에는 종교적 요소도 섞여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즉, 도가라는 개념은, 오늘날 말하는 노자(老子)·장자(莊子)의 사상·철학을 중심으로 한 철학적 도가뿐만 아니라, <도술> <방술>까지를 포함한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되었다. 도교의 원류(源流)이상과 같은 도가와 도교의 개념의 변천은 그대로 도교 성립의 전사(前史)와 관계된다. BC 3세기 무렵의 전국시대에 연(燕)·제(齊;河北省·山東省) 지방에는 <방선도(方僊道)>라 불리는 신선방술(神仙方術)을 위주로 하는 종교집단이 존재했다. 일찍이 제나라에는 민간의 무축(주술사)에 의거하는 농작(農作)을 위한 산천제(山川祭)와, 그것을 토대로 하여 왕후(王侯)들이 풍작을 기원하는 팔신(天主·地主·陰主·陽主·月主·日主 등)에게 지내는 팔신제가 있었다. 이 팔신제에 그 당시 이미 발달되어 있었던 경락의경(鍼灸醫療學)이나 본초경방(漢方醫藥學)의 학문과 보인(步引)·안마·복이(服餌)·황야(黃冶;體操·食物·鍊金養生) 등의 신선술(神僊術)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 방선도이다. 방선도는 신선방사에 의한 종교집단으로, 그들 방사의 말을 믿고서 제나라나 연(燕)나라의 왕후귀족, 또는 진나라의 시황제(始皇帝) 등이 불로불사의 신선약을 얻기 위하여 신선이 산다는 발해만 위의 삼신산(三神山), 즉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에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방사에게 신선의 약, 특히 황금을 만들게 하여 그것을 먹음으로써 불사의 몸이 되려고 하였다. 연금술에 의해 만들어진 황금은 불사의 약 중에서 가장 효과가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진시황제는 이들 방사가 설명하는 봉선설(封禪說)에 의해서 팔신 가운데의 지주(地主)라 여겨지는 태산(泰山)과 그 지봉(支峰)인 양부(梁父)에서 천지의 신을 제사지내고, 천신과 교감하여 죽지 않는 몸이 되고자 했다. 전국시대의 제나라는 위왕(威王)·선왕(宣王) 때가 최성기였으며, 그 도읍인 임치(臨淄)에는 중국 각지에서 여러 학자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중국문화와 학술의 일대 중심지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제나라의 학자인 추연(鄒衍)은 음양오행설을 제창하여 당시 최고의 학자로 칭송되었다. 방사들은 이 음양오행설을 도입하여 신선설이나 봉선설에 교묘히 이용하였다. 방선도의 발흥은 연·제나라의 해류(海流)에 의한 해상교역과, 명산에서 약초나 황금을 구하는 방기(方技)의 무리들의 활약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며 한반도에서의 신선설의 형성이나 기타의 전설도 이러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신화 속에서 중국의 조물주라 여겨지는 황제(黃帝)는 전국시대부터 방선도나 의방술과 연결되어 신선의 조상으로 여겨졌다. 신선이 된 황제와 도가의 노자가 결합되어서 <황로의 말씀>이 세상에 퍼져나갔다. 전국 말기부터 진대(秦代)·한초에 걸쳐서 <도가><법가> 일체의 정치가 행해졌는데, 도가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황로의 말씀>에 기초한 <황로의 술(術)>에 의한 정치였다. 황제와 더불어 노자의 신선화(神仙化), <황로>의 신선적 객체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후한대에 와서는 《하도낙서(河圖洛書)》의 예언서를 기초로 하여, 전한 말에는 이미 일어나 있었던 참위설(讖緯說)이 도교적 사상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참위설은 유가의 경(經)의 설을 음양오행설이나 <수술(數術)>계의 다른 학설에 의해서 보완하고, 주로 사회적·정치적 현상에 대한 예언을 그 내용으로 삼는 학설이다. 이 참위설에 불교의 영향도 덧붙여져 <황로도(黃老道)>가 일어났다. 불교와 중국문화의 상호 영향의 결과, <황로>는 부도(浮屠;佛陀의 옛 漢譯)와 같은 종류로 생각되어 노자의 신격화(神格化)가 횡행했고 신앙의 객체로서의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성립되었다. 후한 중기로부터 말기에 걸쳐 황로도나 주술을 위주로 하는 무축도(巫祝道;鬼道)가 모태가 되어서 농민·민중의 종교결사인 태평도(太平道)·오두미도가 생겨났다. 도교 각파의 성립태평도는 후한 중기의 간길(干吉)이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부터 《태평청령서(大平淸領書)》, 즉 태평경을 전수받은 일에서 시작된다. 이 경전을 종교운동의 지주로 삼아 허베이[河北]의 장각(張角)이 태평도를 조직했다. 그러나 장각이 후에 반란을 일으켜서, 태평도는 멸망하고, 민간에 남은 잔당이 오두미도와 합류했다. 그 오두미도는 장릉(張陵)이 쓰촨[四川]의 청두[成都]지역에서 시작한 종교집단이다. 도가의 사상을 중심으로 주술적인 치병(治病)을 하고, 그 사례로 쌀 5두(한국의 약 5升)를 헌납케 했으므로, 이런 이름이 생겨났다. 병자를 조용한 방에 앉혀 놓고 과거의 죄를 반성케 하되 천(天)·지(地)·수(水)의 신, 즉 천관(天官)·지관(地官)·수관(水官)의 삼관에게 자기의 이름과 과거의 죄과를 써 넣은 서장(書狀) 3통을 바치고 속죄를 위한 공양물이나 노동력을 제공하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이와 같이 과거의 죄과로 인해서 질병이 일어난다는 사고방식은 태평도에도 있었다. 오두미도가 종교 교단으로서의 조직을 확립한 것은 장릉의 아들인 장형(張衡)과 손자인 장로(張魯)의 시절에 이르러서부터였다. 특히 장로 때에는 처음에 익주(益州)의 장관의 보호를 받아 흥왕했으나, 후에 압박을 받게 되자 쓰촨 동부에서 산시[陝西]의 한중(漢中)에 걸친 땅으로 옮기고, 조조(曹操)에게 투항하여 그 제후가 되고 나서 관동(關柬)의 호족·귀족과 농민들 사이에서 그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 관동의 오두미도는 원시적인 주술을 중심으로 하는 교단에서 호족·귀족과 관계를 맺고 신선방술과 다른 도술을 위주로 하는 교단으로 변해 갔다. 이 계통의 오두미도는 강남(양쯔강 이남)에까지 퍼져 갔는데, 귀족형의 오두미도 신앙과 동진(東晉) 말기의 손은(孫恩)에게 인솔된 농민·민중형의 종교반란을 야기시켰다. 한편, 화북지방에 유포된 오두미도는 불교와 경합하기도 하고 유교적 질서를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구겸지(寇謙之)의 <신천사도(新天師道)>로 발전했다. 또 장쑤[江蘇]·강남의 호족층을 기반으로 하여 후한 말로부터 육조시대에 걸쳐, 신선도(神仙道)에다 제자(諸子)·황로의 사상과 여러 가지의 도술 및 참위사상 등을 복합화한 도술적 종교가 생겨났다. 한말의 전란을 피하여 강남으로 갔던 도사 좌자(左慈)에 의하여 정리되어서, 그의 가르침을 받은 갈현(葛玄) 일족에게 계승되었던 이 계통의 도술적인 종교는 <갈씨도>라고도 불리었다. 갈현의 종손인 갈홍(葛洪)은 《포박자(抱朴子)》를 저술하고, 이 계통에서 전해지는 연금술에 의한 신선방술을 집성했다. 또 갈씨 일족에 의하여 뒷날의 《영보경(靈寶經)》의 기본부분이 만들어졌다. 이 경전은 그 뒤 이 계통의 도교 경전류가 되어서 계승되었다. 오(吳)나라 재상의 자손으로 알려진 육수정(陸修靜)은 본래 천사도 계통의 도사였는데, 제국(諸國)을 순례하는 동안 《상청경(上淸經)》을 입수하여 그것을 정리했다. 그는 또 <갈씨도>에도 통하고 있었으므로 초기의 《영보경》도 정리하고, 뒤의 도교 경전의 집대성인 <도장(道藏)>의 분류체계 <삼동설(三洞說)>을 확립했다. 육수정의 뒤를 이어 경전을 정비한 사람이 도홍경(陶弘景)인데, 그는 모산(茅山)을 거점으로 《상청경》을 대성하여 이른바 <상청파>를 확립했다. 그의 사상은 과학적인 의경(醫經)·경방(經方)·신선의 학(學)을 기초로 한 것으로, 거기에 다시 불교와의 교류도 있었는데, 그는 처음으로 이론적인 도교 교학을 수립했다고 할 수 있다. 육조말에서 수대(隋代)까지 화베이[華北]에 신천사도, 강남지역에는 천사도와 상청파가 각각 전개되어 갔다. 당(唐)대로 들어오자, 상청파의 본거지인 모산을 중심으로 해서 남북 도교의 통합과 교류를 목표로 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도홍경의 교학을 받은 당(唐) 초의 상청파 도사 왕원지(王遠知)는 처음에 신천사도에서 수행했으며, 제자인 반사정(潘師正)은 모산에서 신천사도의 거점인 쑹산[嵩山]으로 옮겨 살았다. 이같은 상청파의 활약으로, 모산은 당대 도교의 중심적인 고장으로 되었고, 상청파는 천사도와 함께 도교의 2대 유파로 육성되었다. 도교와 불교의 교류북위의 태무제(太武帝)는 재상 최호(崔浩)의 권유에 따라서 구겸지의 신천사도를 국교로 삼았으며, 연호도 태평진군(太平眞君)이라고 하였다. 도교를 믿는 한인 호족인 최호는 오랑캐의 가르침인 불교가 왕조의 재정을 좀먹자, 불교를 배제시키고자 태무제에게 권고해서 446년에 불교 탄압을 감행케 했다. 태무제 뒤에 불교는 다시 부흥하였으나,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때에는 다시 탄압당했다. 북주의 무제는 유교적 왕조체제에다가 불(佛)·도(道) 양교를 순응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572년의 법론에서 무제는, 삼교의 순위를 유·도·불로 하였지만, 574년의 도·불의 법론에서는 도사 장빈(張賓)이 불교측에 의해서 논파되었으므로 마침내 불(佛)·도(道) 양교를 함께 폐하고 승과 도사를 환속시켰다. 이어서 <현도관(玄都觀)>을 <통도관(通道觀)>으로 개칭하여 국립종교연구소로 만들었고, 3교의 스승 중 우수한 자를 통도관학사로 삼아 거기에서 불·도 2교의 유교화(儒敎化) 연구를 하게 했다. 송대의 진종(眞宗)은 도교 존중정책을 강화하고, 1015년에는 용호산 천사도(天師道)의 제24대 천사 장정수(張正隨)를 불러들여 왕조와 천사도의 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이 무렵부터 도관(도교의 사원)을 고급관료가 관리하는 제도가 생겨났다. 진종은 재상 왕흠약(王欽若)을 총재로 삼고, 도사들을 동원하여 도장(道藏)을 편찬시켜 《보문통록(寶文統錄)》을 편집하였다. 이어서 1013년에는 도사 장군방(張君房)에게 정비케한 도장 《대송천궁보장(大宋天宮寶藏)》을 완성하게 했다. 장군방은 그 정요(精要)를 뽑아 《운급칠첨》을 저술했다. 송은 국난(國難)을 당하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행할 뿐만 아니라, 도교의 힘까지 빌리려고 했다. 불교의 중국 전래에 의하여 그때까지의 중국문화 안에서의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대립과 융합에 더하여서 유가·도가 대(對) 불가의 문화마찰이 격심하게 일어났다. 그 결과, 삼가(三家) 상호간의 경합이나 불가의 유가화(儒家化)로 인해서 유두도불양각형(儒頭道佛兩脚型)의 3교 관계가 생겨나게 되어 유가·도사·사문(沙門)의 삼교겸수(三敎兼修)가 확산되었다. 민중도교의 전개와 신도교당실(唐室)의 도교신봉책 때문에 교회도교의 교역(敎域)은 확실하게 중국 전토로 퍼져갔다. 당말 이래 각지로 전파된 도교는 그 지역의 습속과 결합하여 삼교합일의 민간신앙(민중적 도교신앙)을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송대에 이르러서는, 서민사회의 발전을 배경으로 해서 삼교합일의 새로운 민중도교가 전개되었다. 송대의 민중도교의 특색은 유불도 3교의 합일·혼합적 형태를 취하고, 사서(士庶) 모두에게 통용되는 선(도덕)을 실천하였으며, 타인에게도 권장함으로써 생활문화 안에서 민중적 도교신앙을 깊게 하는 경향이 강했다. 민중도교에서는 민중의 주체성이 강한 민중적 도덕 실천을 강조하는 《공과격(功過格)》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민중사회에 밀착된 신도교 교단이 생기기도 하였다. 산둥[山東]의 유덕인(劉德仁)은 <진대도교(眞大道敎)>를 창시하였는데, 교단의 교법에서는 하늘에 대한 기념(祈念)을 통해서 훈주사음을 금했으며, 충효 등 일상윤리의 견지가 설파되었다. 뒤에 가장 유력한 도교 교단이 된 <전진교(全眞敎)>는 왕중양(王重陽)에 의해서 창시되었는데, 기본적으로는 유불도 삼교동원(儒佛道三敎同源)의 입장을 취하고, 《반야심경(般若心經)》 《효경(孝經)》 《도덕경》 《청정경(淸淨經)》 등을 경전으로 삼아 읽었으며, 부주(符呪) 등의 술을 물리치고,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신선설에 의하지 않는, 오직 내외 양면의 수행(自利利他의 眞功과 眞行의 실천)을 주장했다. 또 서민의 도덕의식의 고양(高揚)에 의해서, 일상 윤리의 실천이 종교화된 것으로 선서(善書)가 있다. 이는 권선(勸善)의 서(선행을 권고하는 책)이며, 서민적 도덕의 기초 위에 도교신앙과 불교사상에 의거해서 서민의 생활윤리를 설파하는 민중도덕서이다. 대표적인 선서인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이 강남의 하층 독서인에 의하여 만들어졌던 것도 이 무렵이다. 송대 이후의 신도교 교단은 용호산의 정일교(天師道가 正一敎로 불리게 된 것은 元代부터이다) 등 구(舊)도교 교단과 함께 명조 이후, 왕조에 따라서 보다 강하게 관리되었다. 원의 세조(世祖)는, 강남의 도교는 정일교에, 화베이의 도교는 전진교에 그 관리권을 주었으며, 도첩(度牒)의 발급과 지방의 도관(道官)의 임명권도 부여했다. 명조에서는 예부(禮部)에 도록사(道錄司)를 두고, 정일(正一)·전진(全眞)으로 나누어서 관리했다. 다시 용호산에다 정일진인 이하의 도관을 두었고, 모산·태화산(太和山) 등에도 도관을 두었다. 원말(元末)부터 정일교와 왕조의 결합이 강화되었고, 특히 명초에는 정일교의 부참(符讖)이 명조와 정일교의 연결을 밀접하게 했다. 이리하여 명조는 정일교 교단을 중심으로 도교계를 관리했다. 또 명의 영종(英宗)은 1445년 《정통도장(正統道藏)》을, 신종(神宗)은 1601년에 《만력속도장(萬曆續道藏)》을 편집케 했다. 이것이 현재 널리 행해지고 있는 도장(道藏)이다. 왕조의 관리하에서 불·도 교단은 그 활력을 잃었고, 그 위에 15세기 후반부터 재정 보전(補塡)을 위하여 승(僧)·도(道)의 매첩(賣牒)을 단행했으므로 승·도의 사회적 지위가 저하되었고, 민간의 종교 결사가 많이 생겨났다. 청조는 명조의 정책을 답습해서 불·도 양교 및 민간의 종교결사의 관리·단속을 엄중히 했으며, 정일천사(正一天師)의 관품(官品)을 낮추었다. 현황청말로부터 5·4문화운동 시기에 걸쳐서 미신과 구종교의 배제운동이 높아졌다. 중국국민당은 1928년에 <신사존폐표준(神祠存廢標準)>을 발표하고 미신적 신사(神祠)를 배제했다. 이 정책은 현대의 타이완에도 계승되고 있다. 한편, 중국공산당은 종교를 아편시하는 입장에서 도교·유교·불교를 배척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모든 종교가 배제되었고, 문화대혁명에 의해서 많은 문헌 및 사적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백운관(白雲觀) 등 각지의 대표적 도관이 부활되고 있다. 경전본래 도교의 경전류에는, 옛날에는 후한의 태평도의 《태평경(太平經)》, 오두미도의 《노자》 또는 육조 초기의 《상청경(上淸經)》과 《영보경》이 있었지만 이것들과는 별도로 각 교단이나 결사에 전해진 신으로부터 전해졌다고 하는 경전과, 부적·신도(神圖) 등 다종다양한 것이 있었다. 갈홍의 《포박자》 안에는 4세기 초기의 경전류의 목록이 있고, 초기 경전류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이러한 다양한 도교 경전에 하나의 분류 기준을 만든 것이 육수정이며, 그 삼동설(三洞說)에 따라서 《상청경》은 <동진부(洞眞部)>에, 《영보경》은 <동현부(洞玄部)>로, 《삼황경(三皇經)》은 <동신부(洞神部)>로 나누어졌다. 그 뒤 6세기 전반에 <사보(四輔)>의 사고방식이 성립되고, 동현(洞玄)을 보좌하는 경전으로서 <태현부(太玄部)>, 동진(洞眞)을 보좌하는 <태평부>, 동신(洞神)을 보좌하는 <태청부(太淸部)>, 삼동 모두를 보좌하는 <정일부(正一部)>의 각 부가 부가되어, <삼동사보(三洞四輔)> 현재의 도장 분류가 확립되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태현부는 《노자》를 중심으로 하는 것, 태평부는 《태평경》, 태청부는 연금술 관계, 정일부는 오두미도(천사도)의 계통에 속하는 경전이다. 한국의 도교중국에서 성립된 도교가 한국에 전래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624년(영류왕 7) 오두미교가 고구려에 도입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전해져 주로 왕가에서 신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1110년(예종 5) 송나라의 도사 2명이 들어와 복원궁(福源宮)을 세우고 제자를 택하여 서도(書道)를 가르친 것이 그 시초이다. 복원궁은 나라에서 마련한 도관으로 재초(齋醮)의 장소였고 우류(羽流;道敎徒)들이 머물렀다. 조선시대에는 소격서(昭格署)가 설치되어 고려 때의 재초소가 합쳐졌고, 여기서 병이나 재난을 막고 국가안태를 기원하는 초제를 지냈다. 이와 같은 도교는 국가의 제례를 위한 조정기구(朝廷機構)의 하나였고 한 왕조에서도 국왕의 신봉 여부에 따라 흥쇠를 반복하였다. 민간도교는 일찍이 고대사회에 전파되어 민중 사이에 유행한 성상(星相)·복서(卜筮)·점험(占驗)·수선(修仙) 등의 신앙과 그 맥을 같이 하며, 세시적(歲時的)도교로서 수성(壽星)·선녀(仙女)·직일신장(直日神將)의 그림, 갈(葛)·주(周) 두 장군의 문배(門排), 단정파의 장생불사에서 유래한 민간장생법 등의 신앙적 행위를 들 수 있다. 이론적 도교사상은 선파(仙派)·칠현(七賢)·청담가(淸談家)·단학파(丹學派)라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연구되었는데 대표적 인물은 신라의 최승우(崔承祐)·김가기 (金可紀)·최치원(崔致遠), 고려의 강감찬(姜邯贊)·한유한(韓惟漢)·이약곽(李若郭), 조선의 조여적(趙汝籍)·남추·김시습(金時習) 등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에는 불교·유교의 교지를 융합하고 대중을 교도로 삼은 결사적 민중도교가 속출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중국의 민중도교인 일관도(一貫道)가 전해져 그 분파인 보제불교(普濟佛敎)와 함께 포교되어 왔다. 오늘날의 도교는 사회 표면에 뚜렷이 부각되지 않고 있으나 민간신앙 속에 뿌리가 이어져 하나의 토속종교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도법과 도교의례도법(道法)도법은 도술(道術)의 사(士 ; 道士)의 <행법(行法)>, 즉 수행법(修行法)과 교단(敎團)의 <경참(經懺)> <부록> 및 <재초(齋醮)>, 즉 제사의 법을 포함한다. 도법의 <과범위의(科範威儀)>, 즉 규칙·의례를 <과의(科儀)>라고 부른다. 과의 중에서도 주요한 것은 <재초과의>이다. 각종 도법은 <무술(巫術)> 및 <방기(方技)> <수술(數術)> 계(系)의 도술에서 성장하고 있다. 도술적 행법의 대표적인 것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① 부해(符劾 ; 부적에 의한 주술)·금주(禁呪 ; 주술)·역사귀신(役使鬼神 ; 귀신을 구사한다)·금가요병(禁架療病 ; 邪惡을 統制하는 治病)·삼충(三蟲 ; 三尸, 뱃속의 도깨비 같은 존재) 등. ② 천문(天文)·별점[星占]·풍각점후(風角占候 ; 風占)·은둔(隱遁)·변형(變形)·상요(祥妖 ; 吉凶)·재이(災異)의 참위(讖緯 ; 예언) 등. ③ 벽곡(·穀 ; 穀物을 안 먹음)·복이(服餌 ; 仙藥을 복용)·황야(黃冶 ; 鍊金術)·금단(金丹 ; 最上의 약)·안마(按摩)·도인(道引 ; 柔軟체조)·우보(禹步 ; 步行法)·복기(服氣)·조식(調息)·태식(胎息 ; 以上은 호흡법)·좌망(坐芒 ; 無我의 경지에서 道와 一體가 된다)·존사(存思 ; 정신통일)·수일(守一 ; 우주의 根源과 一體가 되는 법)·음도방중(陰道房中 ; 養生術로서의 房中法) 등. ①②는 무술(巫術)·수술계(數術系)의 도술이고, 그 도술 터득을 위한 행법이다. ③은 방기(方技) 가운데 <신선> <방중(房中)> 계(系)의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하는 행법인데, 여기에다 의경(醫經)·경방계(經方系)의 기술(技術)을 부차적으로 합쳐 여러 행법이 종합되어서 <양생법>이 생겨났다. 금단(金丹)에는, 단사(丹砂)로부터 황금을 화성(化成)해서 복이하는 법(外科)과, 금단 화성의 과정을 수행(修行)의 내용으로 삼고 의경 이론 등을 하나로 합하여 신체를 내정(內鼎 ; 부뚜막)에 견줌으로써 정(精)·신(神)·기(氣)를 안에서부터 연단(鍊丹)하는 법(內丹) 등이 있다. 도교의례(道敎儀禮)도교 교파의 성장과 함께 경법·참법(懺法)·부록·재초 등의 도법이 성립했다. 경법(經法)·참법(懺法) 경(經)·참(懺)의 송습(誦習)을 위한 수련.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따르면, 수행의 단계에 따라서 오천문록(五千文·)·동현록(洞玄·)·상청록(上淸·) 등이 있으며,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 이하의 각 경전의 송습종료(誦習終了)의 자격 증서인 <경록(經·)>이 스승에게서부터 제자에게 주어진다. 경록은 후세에 정일파(正一派)의 경록·첩록(牒·), 전진교(全眞敎)의 계첩(戒牒) 등이 되었다. 참법은 참회의 법이란 뜻이다. 참문을 신 앞에서 꿇어앉아 외는 법, 즉 <궤참(·懺)>과, 천존(天尊)·성호(聖號)를 예배하고 참회멸죄(懺悔滅罪)를 간구하는 <예참(禮懺)>이 있다. <재초과의>에서는 경문·참문(懺文)을 소리내어서 읽게 된다. 부록(符·) <부(符)>와 <녹(·)>은 글자의 뜻은 같으며, 모두 신의 이름으로 내려주게 되는 문서이다. 부에는 <호부(護符)>와 <진택부(鎭宅符)>처럼 부해(符劾)·주부(呪符)의 효험(效驗)을 지니는 천(天 ; 星辰)과 귀(鬼)·신(神)의 문자·도문(圖文)이 기록된 부적이 많다. 수법(修法)의 수준을 표시하는 증서 <녹(·)>과 <부명(符命)> <참언(讖言)>이 기록된 문서를 모두 부록이라고 일컫는 경우도 있다. 또 부가 섞인 녹도 부록이라 한다. 하늘이나 신이 내려주는 <부명>을 기록한 특별문서를 <천서(天書)>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재초(齋醮) <재(齋)>란 재계를 이르는 말이다. <초>는 제(祭)와 같은 뜻이다. 공희(供犧)만을 초(醮)라고 일컫는 경우도 있다. 제초(祭醮)의 의례(儀禮)에서는, 우선 재의(齋儀)하고 나서 초의(醮儀)가 행해지므로 <재초(齋醮)>라고 병칭되는 일이 많다. 재초를 지낼 때, 태을(太乙)·오성(五星)·북두(北斗) 등 하늘의 별과 천지산천(天地山川) 등의 신을 제사지낼 때, 희생을 바치고 상장(上章)·축문(祝文)을 아뢴다. 축문·상장은 유교의 제례규칙 속에 정해져 있는데, 도교의 제초의례 속에도 규정되어 있다. 상장·축문·참문은 도장경전(道藏經典) 가운데에 거둬들여져 있는데, 청대 《가례대성(家禮大成)》에는 서민적 유교의 축문이 집록(集錄)되어 있고, 민간에 유통된 《만법귀종(萬法歸宗)》에는 도사가 재초를 할 때에 외우는 상장·축문이 집록되어 있다. 제초행사는 교파나 교회도교가 행하는 경우와, 촌진(村鎭 ; 취락)과 방회(會結 ; 社集團)가 행하는 경우가 있는데, 후자에서는 초주(醮主)·노주(爐主)가 도사에 대해 베푸는 것 또는 공희(供犧) 기타의 경비를 부담하며, 희대(臺)를 마련하여 희극(劇)을 구경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오늘날 타이완 등지에서 벌이고 있는 재초의례의 대표적인 것은 일천초(一天醮 ; 하루로 끝내는 祭醮)·삼천초(三天醮)·오천초 등인데, 이천초·칠천초도 있다. 도교의 신들유교의 제상례(祭喪禮)에 나오는 신들에 대응하는 민간생활문화의 신들과, 불교 등 외래종교의 영향에서 오는 여러 신들이 도교의 신들이다. 민간의 신들 중에는 도가(道家) 및 신선성조(神仙聖祖)로부터 온 신들, 생활문화 본래의 신들, 즉 농촌생활·양생의료(養生醫療)관계·길드적 생활의 신들, 푸젠[福建] 등 특수지역문화(뒤에 타이완·동남아시아로 넓혀짐) 등의 신들이 있다. 민간신들이라 하나, 종사(宗祠)관계만은 유교적 모습을 유지하며 존재하고 있다. 민간생활문화의 신들의 대부분은 세시(歲時) 연중행사의 신들이 되고, 또한 《왕갑기(王匣記 ; 道藏本과 民間本 등에 있음)》나 민간의 <제신성탄일표(諸神聖誕日表)> 속에 표시되어 있다. 그 신들의 도상(圖像)은 <연화(年畵 ; 新年에 가옥안팎에 붙이는 吉祥을 빌기 위한 木刻版畵)> 속에서 발견된다. 관제(關帝) 촉한(蜀漢)의 무장 관우(關羽)가 신격화된 것. 무신(武神)이 된 것은 8세기 말 무렵부터였다. 9세기 초에는 가람신(伽藍神)이 되기도 했는데, 송대에는 도교신앙의 무신(武神)으로서의 지위가 높아졌고, 왕조의 제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 민간신앙에서는 재신(財神)으로서 제사지냈다. 명말에는 관성제군(關聖帝君)의 호(號)가 주어졌고, 민중도교의 신으로서 중국은 물론 동남아시아·한국·일본 등 각 지방 중국인의 관제묘(關帝廟) 등 사묘(寺廟)에서 제사지내고 있다. 낭낭(娘娘) 도교의 여신. 벽하원군(碧霞元君)을 비롯하여 다수의 여신이 있다. 그 공덕과 은혜를 믿고 신앙된다. 송자낭낭(送子娘娘 ; 자식을 줌)·자손낭낭(자손번영)·두진낭낭(痘疹娘娘 ; 천연두를 고쳐줌)·최생낭낭(催生娘娘 ; 출산을 촉진)·안광낭낭(眼光娘娘 ; 눈병을 고쳐줌) 등이 있다. 동악대제(東岳大帝) 유교의 예(禮)에서는 오악(五岳)은 제사의 대상이고, 오악의 제1인 태산은 한(漢)나라 때에 와서 민간에서 태산부군(泰山府君 ; 太山府 君)이라 불리었다. 당나라 때에는 천제왕(天齊王)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태산부군은 천제의 손자이며, 사람의 혼백(마음과 육체)을 가져오게 하여 생명의 장단(長短)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신앙되었다. 마조(·祖) 푸젠의 퓨텐현(田縣) 임씨(林氏)의 딸. 태어날 때부터 신령(神靈)을 나타냈으며, 사람의 화복을 예언했다. 관음(觀音)신앙이 배를 타고 다니는 장사치들 사이에서 임씨의 딸 신앙과 합체(合體)됨으로써, 해난구조(海難救助)의 신이 되었다. 오대민국(五代國) 때 시작되어, 송·원시대의 해상무역의 번성과 함께 항해신으로 정착했다. 문신(門神) 만귀(萬鬼)가 드나드는 귀문(鬼門)에는 신도(神·)·울루(鬱壘)의 문지기가 있어서 중귀(衆鬼)를 감찰·제어한다고 믿었다. 이것이 일반 민간의 문신이 되었다. 문재신(文財神) 은(殷)의 주왕(紂王)의 충신인 비간(比干)이 신격화된 것. 민중도교신앙에서 관제의 무재신(武財神)과는 대조적으로 문재신으로서 제사지낸다. 문창제군(文昌帝君) 북두칠성의 제1성 이외의 6성을 문창부(府)라 한다. 사람의 운명을 관장한다. 과거(科擧)를 보는 사인(士人)의 수호신으로 여겨진다. 또, 서점·붓가게 등의 길드신이 되기도 한다. 북두진군(北斗眞君) 북두칠성이 신격화된 것. 7성에다 2성을 합쳐서 북두구궁(北斗九宮)의 성군(星君)을 9성이라고 일컬으면서 신앙하는 일이 화난[華南]에서 동남아시아지역에 걸쳐 특히 성행되고 있다. 북두에 대비(對比)하여 남두육성(南斗六星 ; 司命·司祿 등)도 신앙되고 있다. 삼관대제(三官大帝) 오두미도의 <삼관수서(三官手書 ; 3官, 즉 天地水의 3神에게 上奏하는 참회문)>의 삼관에서 시작된다. 천지에다 물을 더하는 것은, 인도·티베트 등 서쪽으로부터의 영향이 있기 때문인 듯하며, 육조시대에 상·중·하 삼원(三元) 및 불교신앙과 결부되어 상원천관(上元天官)·중원지관(中元地官)·하원수관(下元水官)이 되었는데, 각각 상원(1월 15일)·중원(7월 15일)·하원(10월 15일)에 생겨났다고 하여 그 날이 제삿날이 되었다. 삼시(三尸) 한(漢)나라 때 의방(醫方)에서는 뱃속의 벌레[蟯蟲]를 없애는 얘기가 설명되었다. 한대의 위서가(緯書家)는 요(蟯)를 인간의 뱃속의 도깨비와 두억시니(사나운 귀신의 하나)의 일종이라고 하여 그것을 삼충·삼시라고 불렀고, 천문(天文)·역보(曆譜)·잡점(雜占)의 사상을 혼합해서 경신(庚申)의 날에 삼충삼시는 하늘로 올라가서 인간의 잘못을 신에게 고한다는 설을 주장했다. 이 위서가의 설은 갈홍에 의하여 도교신앙 속에 도입되었다. 서왕모(西王母) 곤륜산(崑崙山)의 왕모(王母)인데, 전국시대의 곤륜산 신선설 중에서 신선화(神仙化)되었다. 전한 말에는 여선(女仙)으로서 신앙의 객체가 되고, 후한시대에는 태산신앙(泰山信仰)인 동태산(東太山)에 배우(配偶)하는 서왕모가 되어, 도교의 신이 되었다. 성황(城隍) 성곽이 있는 도시의 수호신. 토지신의 으뜸이 되고, 현(縣)성황의 총괄신은 도성황(都城隍)으로서 신앙되었다. 육조시대에 시작되어 송나라 때에는 전국적으로 민중신앙으로서 확산되었다. 시왕(十王) 명계(冥界)의 십전(十殿)의 명왕. 불교의 명계와 중국 전통사상의 것이 모아져서 당나라 말 5대 무렵에 시왕(閻羅王·轉輪王·五官王·泰山王 등)이 되었다. 여조(呂祖) 당나라 때의 신선(神仙)으로 전해졌으나, 사실은 송초(宋初) 무렵의 도사였다. 자(字)는 동빈(洞賓), 호는 순양(純陽). 전진교(全眞敎) 교단에 의해서 종조(宗祖)의 한 사람이 되었고, 원대(元代)에는 부우제군(孚佑帝君)이라는 호가 주어졌다. 오현재신(五顯財神) 은(殷)의 주왕(紂王)의 신하 조현단(趙玄壇)을 중심으로 4신을 합쳐서 오현재신이라 한다. 사방오로(四方五路)의 재물을 모으는 신으로서 오로재신이라고도 한다. 송대 무렵부터 이 신앙이 굳어졌고, <오성(五聖)> <오통(五通)>이라는 신명도 쓰였다. 옥황상제(玉皇上帝) 천(天)·상제(上帝)·천제(天帝)가 도교신화한 것. 옥황이라는 이름은 당(唐)나라 때 시작되었는데, 가장 높은 신인 원시천존(元始天尊)의 아칭(雅稱)인 <옥제(玉帝)>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육조시대의 상청파(上淸派)의 신통보(神統譜) 《진령위업도(眞靈位業圖)》 가운데의 최고신이 원시천존인 데 비하여, 삼교합일(三敎合一)의 민중적 신앙으로 성장하다가 송나라 때 와서는 최고신으로 확정되고, 교회도교(敎會道敎)에서도 받아들여졌다. 용왕(龍王) 한나라 때에는 천둥과 번개[雷電]·구름비[雲雨]와 관련되어서 용의 설화가 전해졌다. 거기에 불교의 팔대(八大 ; 十大) 용왕설이 들어가, 당(唐)나라 이래 지금까지 내려오는 중국 설화와 결부되어서 민간신앙의 신이 되었다. 송나라 때는 천하의 오룡(五龍 ; 靑·赤·黃·白·黑)신에게 봉호(封號)가 주어져, 각 지역에 있어서의 한발기우(旱魃祈雨)나 수해(水害)막이신으로 정착했다. 저장강[浙江]의 금룡사대왕(金龍四大王)이 그 한 예이다. 원시천존(原始天尊) 유교에서 말하는 천신(天神)·지기(地祇)의 천신이 도교신화한 것으로, 도교에서 가장 높은 신이다. 육조시대의 상청파 사이에서 이 신의 이름이 쓰여졌고, 그것이 당나라 때부터 도교 각파를 통해서 불리워지게 되었다. 그 뒤 옥청원시천존(玉淸元始天尊)·상청영보천존(上淸靈寶天尊)·태청도덕천존(太淸道德天尊)의 3신을 합쳐서 <삼청(三淸)>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유맹장(劉猛將) 메뚜기의 피해로부터 농작물을 지키는 신. 송나라 무렵부터 일어났는데, 화중지역에서의 이 신의 축제가 유명하다. 자고(紫姑)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의 자사(刺史)의 처가 첩인 하미(何媚 ; 紫姑)를 질투한 나머지, 측간(厠間) 안에서 그녀를 암살하자, 천제는 이를 가엾게 여겨 측신(厠神)으로 삼았다고 전해지며, 세상에선 <삼고(三姑)>라고 부른다. 삼고는 점복을 잘한다. 태상노군(太上老君) 황제노자신선사상(皇帝老子神仙思想)에서 노자의 신격화가 진행되어, 후한대에 태상노군이 되었다. 구겸지의 신천사도에서 가장 높은 신이다. 토지신(土地神) 원래 유교의 사직(社稷 ; 토지와 五穀의 神)의 예(禮)에 대응하는 민간, 특히 농촌의 토지[農作地] 및 농민(생활)을 수호하는 신이었다. 한나라 때에 이미 사공(社公)이라는 이름이 쓰여졌다. 그러나 중국 촌락의 토지신에서는 다른 나라 민간신앙의 씨신진수적(氏神鎭守的) 성격은 볼 수가 없다. 중국에서는 사적(社的) 신앙과 종사적(宗祠的) 신앙이 민간신앙 가운데서도 엄중하게 구별되어 있다. 사공토지신(社公土地神)에는 한나라 때부터 이사(里社)·촌락수호신의 면(面 ; 後世, 福德正神의 이름이 됨)과 이사민(里社民)의 관리·감찰신의 면이 병존했다. 후자는 그 토지민의 명계(冥界)를 관장하는 신이 되기도 하고, 명계신 태산(太山)의 하료(下僚)가 되었다. 풍도신(·都神) 육조시대 상청파(上淸派) 사이에서 만들어진 도교의 지옥신이다. 현천상제(玄天上帝) 북방 하늘의 상제. 하늘의 중심인 북극성을 신격화한 것. 북극성신앙은 주(周)나라에서 보였지만, 도교의 신으로서 정착하게 된 것은 당(唐)나라 말 이후일 것이다. ----------------------------------------------------------------------------불교 (佛敎) 요약 석가모니 즉 고타마 붓다(Gotama Buddha)를 교조로 삼고 그가 가르친 교법을 신봉하는 종교. 붓다는 동사어근 Budh(자각하다, 깨닫다)에서 유래한 말이며 <자각한 사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이 중국에 전하여져 불타(佛陀)·불(佛)·부도(浮屠) 등과 같이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표기하게 되었다. 설명 석가모니 즉 고타마 붓다(Gotama Buddha)를 교조로 삼고 그가 가르친 교법을 신봉하는 종교. 붓다는 동사어근 Budh(자각하다, 깨닫다)에서 유래한 말이며 <자각한 사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이 중국에 전하여져 불타(佛陀)·불(佛)·부도(浮屠) 등과 같이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표기하게 되었다. 불교의 역사상 붓다란,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형상으로 표현되어졌기 때문에 실제로 많은 붓다가 신앙의 대상으로 되어 왔다. 그러므로 역사적 존재인 불교의 개조(開祖)를 다른 모든 부처로부터 구별하기 위하여 <고타마 붓다>라고 이름하였다. 고타마란 석가모니의 성(姓)을 말한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석가라고 하는 부족출신의 성자(聖者, muni)를 의미하며, 석가세존(釋迦世尊)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줄여서 석존 또는 세존이라고 한다. 불교는 석가모니의 입멸 후 제자들에 의한 불설(佛說) 편찬인 불전결집(佛典結集)과 교단의 조직화를 통해 비로소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불설 중 교리와 사건에 관한 부분을 법(法)이라 하고, 출가자들의 행위에 관한 규정과 승가의 운영 및 규율에 관한 부분을 율(律)이라 하는데, 여기서 경(經)·율(律;vinaya) 이장(二藏)이 성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단은 외면상으로는 평온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보수파와 진보파간의 갈등이 심각하여 보수적 상좌부(上座部)와 진보적 대중부(大衆部)로 분열되었고, 훗날 진보파들과 재가신도(在家信徒)들을 중심으로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났다. 역사적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었던 고대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왕에 의해 불교는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카니슈카왕대에 이르러 서역제국과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는 다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또 다른 경로는 동남아시아 방면으로 전파되었다. 전자는 대승불교, 후자는 소승불교라고 한다. 불교의 전파는 문화의 전파를 수반하여, 당시 선진문명이었던 인도와 중국의 문화가 불교와 합치되어 세계 각국으로 유입되었으며, 각국의 개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불교미술에 있어서는 지역적 특성에 따른 다양한 변화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유품으로 남아 있고, 불전문학(佛傳文學)의 내용은 오래전부터 사원이나 탑에 조각과 벽화로서 장식되어 미술적인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 현재 불교는 한국·자유중국·일본 등 동아시아와 불교왕국인 타이 등 동남아시아 및 티베트·유럽 일부, 심지어 미국 등지에까지 널리 보급되어, 그리스도교·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하고 있다.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 불교가 지니는 특징을 보면, ①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아함경전(阿含經典) 외에 수많은 대승제경전(大乘諸經典)이 고타마 사후 수백년을 지나면서 출현한 대승제불(大乘諸佛)에 의해 창작되어, 성전의 수가 방대해졌다. ② 붓다와 대승제불 등에 대한 경모·숭배는, 심정에 있어서는 동일하면서도 형식과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 ③ <신(神)>을 내세우지 않기에, 깨달음과 구제의 대상으로서 붓다를 무한히 이상화하면서도 창조자·정복자의 성격은 갖지 않는다. 아울러 대승의 불과 그 후보자라고 하는 보살(菩薩)은 수적으로 크게 증대하여 범신론적인 경향을 지닌다. ④ <깨달음>으로서의 지혜가 강조되고, 불교도의 구제기원(救濟祈願)이 반영되면서 자비가 강조되었다. ⑤ 관용유화(寬容宥和)가 넘쳐, 일반적으로 광신적 태도는 지니지 않는다. ⑥ 스스로 행하는 것이 중시되는데, 이때 욕망과 집착을 멀리하는 쪽이 <무아(無我)>로서 강조된다. ⑦ 일체를 시간적으로 절단한 <무상(無常)>과 공간적으로 이어놓은 <연기(緣起)> 등이 축이 되어, 얼마 뒤 실체적 사고를 버린 <무아>설과 함께 <공(空)>의 사상을 완성한다. ⑧ 평안이 있고 어지러움이 없는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해탈이 달성되며, 적정(寂靜) 그 자체의 열반(涅槃;nirvna)을 이상으로 한다. 불교의 교리나 이론은 자연히 <인간적 삶>의 문제해결이라는 실제적 목적이 우선되기 때문에, 이론을 위한 이론이나 형이상학적 이론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인도불교인도불교사를 초기·중기·후기로 나누면, 초기는 고타마 붓다가 불교를 창시한 때부터 그가 입멸(入滅)한 뒤 100여 년(또는 200여 년)까지의 교단분열기이다. 중기는 부파불교(部派佛敎)가 번영하고, 조금 뒤에 대승불교가 일어나서, 초기대승의 시대를 더한 불교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4세기 초에 힌두적 색채가 매우 짙은 굽타왕조가 등장하여 불교도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그 이후를 후기로 보면, 이 시기에는 부파와 중기·후기의 대승이 병행한다. 그러나 7세기 후반을 지나면 밀교(密敎)가 두드러지게 늘어난다. 곧이어 이슬람교의 침입이 시작되고, 1203년 비크라마실라 대사원이 이슬람 군대에 의해 철저하게 소각되었으며, 그 뒤 교단의 쇠퇴와 함께 1600여 년의 전통을 지닌 인도불교는 막을 내렸다. 초기불교원시불교라고도 한다. BC 13세기 무렵, 북서쪽에서 인도에 침입한 아리아인에 의해서 인도문명은 열린다. 신들을 찬양하는 베다에 이어 그 주석문헌(註釋文獻)이 만들어지고, 다시 BC 7세기 이후는 갠지스강 일대에 진출하여 우파니샤드문헌이 나타났다. 초기의 옛 우파니샤드에 처음으로 신화를 뺀 철학이 탄생되었는데, 여기서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추구하고 개인의 내재적 원리를 탐구한 다음, 양자의 합일을 주장하였다(이 철학은 2∼3세기 이후에 부흥해서 정통 인도철학을 형성하였다). BC 7∼BC 6세기 무렵에는 농촌의 성장과 함께 상업과 공업이 발달하고 군소국가가 성립하여 그들의 합병에 의한 16대국이 발전하고 도시도 건설되어 인도사회는 일대 전기(轉機)를 맞았다. 그 중에서 자유롭고 청신한 사상가들이 잇따라 등장하였다. 그들은 오로지 새로운 사상에 몰두하여, 출가해서 모든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나 사문(沙門;팔리어는 사마나, 산스크리트는 슈라마나, <노력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활동하여, 세상의 환영과 존경을 받았다. 베다를 신봉하는 브라만교의 권위를 오히려 부정했던 이 새로운 사상 중에는 상당히 과격한 것도 적지 않다. 새로운 사상에 대해, 초기 불전(佛典)은 62종, 자이나교는 363종을 들어 설명하였다. 그 중에도 불전이 전하는 6종이 잘 알려졌으며, 흔히 육사외도(六師外道)라 한다. 그것은 도덕부정(道德否定)-쾌락주의·유물론·허무주의·결정론·회의론·금욕-고행주의로 개괄될 수 있다. 고타마 붓다는 그와 같은 새로운 자유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등장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은 뒤, 45년 동안 거의 갠지스강 중류 일대를 끊임없이 돌아다녀 80세에 입멸하기까지 그 가르침을 계속하였다. 불멸(佛滅) 후 불제자들이 더욱 광범위하게 흩어져서 그 가르침을 퍼뜨렸는데 수백년 동안은 모두 구송(口誦)의 형식으로 전승되었다. 아가마(Agama)는 전승(傳承)을 뜻하는데, 처음에는 마가다어로, 이어서 그것이 표준어인 산스크리트로, 중서부 일대의 속어인 팔리어로 옮겨졌고, 현재는 산스크리트로부터 한역(漢譯)된 것과 팔리어 문헌이 전해져 있다. 다만 현재의 형태로 고정된 것은 다음 대인 부파불교의 초기, 즉 불멸 후 약 200년 이상이나 후대이며, 이 여러 문헌에서 붓다의 직접적 가르침을 끌어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적어도 여러 자료에 관한 문헌학이 없어서는 안된다. 한역에는 사아함(四阿含;長·中·雜·增-의 각 아함)과 이들 일부분의 이역(異譯)이 있으며, 팔리어로는 장·중·상응(相應)·증지(增支)·소(小)의 5니카야[五部]가 있다. 위의 최초의 사부(四部)와 한역의 사아함은 각기 다수의 불경으로 되어 있으며, 공통된 것이 많지만,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없다. 팔리어의 소부(小部)는 15개의 텍스트를 포함하고, 그 중에서 《수타니파타(經集)》 《담마파다(法句經)》와 그 밖에 몇 종류 중 시(詩;韻文) 형식의 불경이 초기의 불교를 잘 전하고 있다. 이상의 전체를 <경장(經藏)>이라 하고, 그 밖에 교단의 규율을 기록한 <율장(律藏)>, 좀 늦게 성립된 주석문헌인 <논장(論藏)>이 있고, 합해서 삼장(三藏)이라 하며, 이것이 후대에 더욱 발전, 증가하여 일체경(一切經) 또는 대장경(大藏經)이 되었다. 붓다는 <현실은 고(苦)다>라는 탐구에서 출발하여, 그 해결을 찾아서 수행하고, 고로부터의 해탈을 깨달아 불교를 수립했다. 고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고 그것을 깊이 탐구해 가면 자기의 밖의 것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기보다는 차라리 자기의 안에 있는 것이 자기를 배반함을 뜻한다. 예컨대, 생(生)·노(老)·병(病)·사(死)로부터의 해방과 같이 자기의 뜻대로 안되는 것을 자기가 바란다는 것에 고의 본질이 있으며 이것은 자기 모순이나 자기 부정이 된다. 이 고(苦)의 탐구를 둘러싼 설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삼법인(三法印):법인은 불교의 상징이며, 일체개고(一切皆苦)·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의 셋을 말하는데, 뒤에 일체개고 대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게 되었다. 현실은 모두 고에서 출발하고, 특히 죽음을 포함한 인생의 여러 상(相)이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생멸·변화하고 유동한다. 그에 대한 일종의 영탄(詠嘆)이 <무상>으로서 파악된다. 물론 자기는 실천의 중심이며 깨달음의 주체이나, 한편 많은 욕망과 번뇌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것들의 밑바닥에 있는 집착(특히 我執)을 버리는 것이 <무아(無我)>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실의 양상을 밝혀서 깨달음이 열리고, 해탈이 완성되었을 때 아무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열반의 적정(寂靜)이 실현된다. ② 사제(四諦):제(諦)는 진리라는 뜻이며, 고제(苦諦)·집제(集諦)·멸제(滅諦)·도제(道諦)의 4가지를 말한다. 일체는 고라는 진리, 고는 무엇에 의해 생기느냐는 진리, 고의 원인을 알고 그것을 없애는 진리, 고를 없애는 실천에 관한 진리이다. 도제의 내용은 팔정도(八正道), 즉 8가지 바른사상·사고·말·행위·생활·노력·의식집중·정신통일로 이루어진다. ③ 중도(中道):고와 낙, 상(常)과 단(斷), 유와 무, 허무주의와 쾌락주의 같은, 한쪽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느 쪽의 극단도 적극적으로 버리는 양상을 말하며 이것은 거의 팔정도의 실천으로 이루어진다. ④ 무기(無記):세계의 시작과 종말 등의 이른바 형이상학적인 물음은 다만 논쟁을 일으킬 뿐으로 실천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우선 비근한 실천을 할 것을 가르친다. ⑤ 법(法):산스크리트의 다르마(dharma) 또는 팔리어의 담마(dhamma)의 역어이며, 일체의 현실존재를 성립시키고 있는 결정·형(形)·가르침·규범 및 그 존재를 말하며, 이 법으로 일체의 존재를 설명하고, 그 밖의 유일절대의 신이나 원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법에서는 색(色;감각적·물질적인 것)·수(受;意識의 感受작용)·상(想;의식의 表象작용)·행(行;잠재적·능동적 작용)·식(識;인식작용)의 오온(五蘊;5가지 積聚)을 설명하고, 또는 눈·코·귀·혀·몸·마음의 육입(六入;감각기관)과, 그에 대응하는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對象)을 설명한다. ⑥ 십이연기(十二緣起, 十二因緣):원인과 조건을 분석하면서 종합한다는 일종의 논리적 반성 위에 연기설이 세워져 항상 인생의 현실에 관해서 설명한다. 즉 고는 노사(老死)에 의해, 노사는 생(生)에 의한다고 그 생기(生起)의 양상이 탐구되며, 그것이 어디에서 오느냐 하는 계열을 더듬어가서 애착에 이르며, 나아가서는 근원적인 무지에 상당하는 무명(無明)에 이른다. 이 현실탐구에 의하여 여러 가지 연기설이 있고, 그 완성태(完成態)는 열 두 부분(支)을 헤아리는 십이연기인데, 그 밖에 여러 가지 연기설이 있다. ⑦ 심(心):종교의 중심은 각자의 마음에 있다. 또 마음에 있는 것은 반드시 밖으로 나타난다. 마음에서 바른 것과 청정(淸淨)을 찾고, 생명의 존중과 평등을 알며, 정진을 서약하고, 원한·분노·집착·탐욕·우둔을 버린다.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받은 1000명이 넘는 제자들은 불(佛寶)을 중심으로, 그 법(法寶)을 실천하는 교단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삼가(僧伽로 음사하고 僧이라고 약칭한다. 僧寶)가 되었다. 교단은 크게 나누어 출가한 남성(比丘)과 여성(比丘尼), 재가신자(在家信者)의 남성(優婆塞)과 여성(優婆夷)으로 이루어졌으며, 재가신자는 출가자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출가자는 전심하여 법을 배우고 실천하며 설도했다. 교단은 항상 열려 있어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고, 또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져 있었다. 부파불교붓다의 입멸 후, 교단은 차츰 확대·발전하고, 특히 BC 3세기 전반에 인도에 처음으로 출현한 통일국가인 마우리아왕조, 그리고 그 황금시대를 쌓은 아소카왕의 불교 신앙은 불교의 세력을 전인도에 비약적으로 늘렸다. 교단의 확대와 함께 아소카왕 때보다 조금 앞서서 교단은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립으로 인해 분열되어, 각기 상좌부와 대중부라고 했다. 그로부터 100여 년 사이에 대중부가 다시 분열되어 전부 약 20개의 부파가 성립되었다. 뒤에 일어난 대승불교도(大乘佛敎徒)는 이것을 소승이십부라고도 했다. 각 부파는 저마다 구전의 가르침(阿含)을 불경으로 고정시킨 뒤에, 각자의 해석에 따라 그 교리·교의를 조직화, 체계화했다. 이 정밀(精密)한 교의대계(敎義大系)는 아비다르마(abhidharma;阿毘達磨, 또는 阿毘曇)라고 하며, 서양의 신학 특히 스콜라철학과 대등하다. 현재 아비다르마는 남방불교가 전하는 상좌부의 칠론(七論)과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有部)의 한역인 칠론이 전해지며, 그 밖에 소속불명의 한역이 2∼3개 있다. 부파불교는 거의 출가자의 독점에 맡겨져서 그들은 오직 자기의 수행에 정진하고, 교단에 속하는 장원(莊園)에 의존하였다. 대승불교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데가 많다. 마우리아왕조 붕괴(BC 180년 무렵) 이후, 북인도는 200년 이상이나 외래 민족들의 침입으로 사회적 대혼란이 계속되었고, 불교 내부에서는 출가자에게 치우쳤던 부파불교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재가신자를 중심으로 혁신운동이 진행되었다. 거기에는, 이미 초기불교 당시부터 세워졌던 불탑(stpa) 숭배가 한층 성해지고, 붓다를 찬양하는 문학작품 등도 관계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중국·티베트·일본 등의 북방불교는 모두 대승불교가 주류이다. 그것은 모든 집착의 철저한 포기를 요구하고, 공(空)의 사상을 내세우는 《반야경(般若經)》, 광대한 부처(毘盧遮那佛)의 세계 속에 10가지의 수행단계를 가르치고, 유심(唯心)을 주장하는 《화엄경(華嚴經)》, 재가의 세속생활 속에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 《유마경(維摩經)》, 피안의 극락세계를 찬미하고 아미타불(阿彌陀佛)에게 구제를 바라는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일승사상(一乘思想) 으로써 관용과 방편을 제시하고 구원(久遠)의 본불(本佛)을 수립하는 《법화경(法華經)》, 선정(禪定)에 몰입하여 부처를 눈앞에 보려고 하는 각종 <삼매경전(三昧經典)>, 주문을 외워서 사람들에게 종교적 신비성을 호소하는 <다라니성전(陀羅尼聖典)> 등이 잇따라 등장한다. 그것은 기원전후로부터 3세기 무렵까지의 약 200∼300년 동안의 일이며, 마침내는 이러한 경전들을 논리적으로 표현한 나가르주나(Ngrjuna, 龍樹)가 등장한다. ⑴ 불·보살의 확대:부처가 종래의 고타마 붓다 한 부처에서 과거불(7불)·미래불(彌勒佛), 그리고 현재의 다방불(多方佛)로 확대되며, 그중에서도 구제불로서 아미타불·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등이 경모(敬慕)된 외에 절대자의 성격을 강화한 비로자나불·대일여래불(大日如來佛) 등이 확립되었다. 보살은 원래 불타가 되기 이전의 단계를 나타냈는데, 많은 부처의 등장과 함께 보살도 확대되어서, 관세음(觀世音;觀音, 觀自在)·문수(文殊)·보현(普賢)·세지(勢至)·지장(地藏) 등의 여러 보살이 세워지고, 최후에는 불도에 힘쓰고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중생 전반으로 넓혀졌다. 이들 대승의 불·보살들은 아함의 고타마 붓다와는 직접 관련이 없고, 이름없는 새로운 제불에 의해서 앞에 열거한 대승의 방대한 여러 경전이 새로이 만들어졌다. ⑵ 이타(利他):부파교단의 폐쇄적·이기적·독선적인 양상을 냉엄하게 비판하고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다 서로 남과 깊이 관계한다고 보아 보시(布施)하는 등 자비를 으뜸으로 한다. ⑶ 공(空)의 사상:공은 부파불교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서 제창되었고 일체의 존재를 상관(相關)·상의(相依)·상대(相待)의 이상적인 상태에서 이해하고 그 연관을 어디까지나 확대시킴으로써, 존재는 물론 법 그 자체의 실체(自性)를 빼앗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자유롭고 장애가 없는 세계를 전개한다. ⑷ 바라밀(波羅蜜):본래는 완성을 뜻하나, 이것을 <피안(彼岸)으로 건너간다>고도 해석한다. 보살의 실천을 명확하게 한 것이며, 보시·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선정·지혜의 육바라밀설이 중심이 되고, 여기서도 특히 집착을 배제하는 것이 강조된다. 3세기 이후에도 경전은 잇따라 만들어져, 《승만경》 《열반경(涅槃經)》 《해심밀경(解深密經)》 《능가경(楞伽經)》 등이 있으며, 한편 마이트레야(Maitreya;彌勒), 아상가(Asanga;無着), 바수반두(Vasubandhu;世親)와 같은 논사(論師)가 나타난다. 여기서는 유식설(唯識說)과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이 중심이 된다. 유식설은 일체를 우리들의 경험상에서 파악하고, 그것을 순수한 정신작용, 즉 식(識)으로 환원한다. 반대로 말하면 식의 분별작용에 의해 모든 현상과 존재가 나타난다고 한다. 먼저 눈·귀·코·혀·몸·뜻의 6가지 식이 일상적인 식이나, 그 안에는 말나식(末那識)이 있어서 여러 식을 통일하여 자아의 축(軸)이 된다. 그리고 그 근거에 잠재하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세워, 여기에 과거가 집적되고 미래의 가능성이 수용되어 있다고 한다. 여래장은 여래의 곳간이며, 불성 즉 부처의 소질이라는 것과 같다. 이것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으로 태어나면서 갖추고 있으며, 평소에 방황하고 괴로워하고 번민하는 중생 누구나가 여래·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5세기 무렵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이 유식설과 여래장사상을 교묘하게 통일시켜 논한 것으로, 가장 알맞은 대승불교입문서라고 했다. 그 뒤, 인식론을 포함한 불교논리학이 확립되고 디그나가(Dignaga;陳那)·다르마키르티(Dharmakirti;法稱)가 특히 유명하며, 그들은 중국 등에서 <인명(因明)>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밀교7세기 이후의 후기대승불교는 다라니(dhran;陀羅尼)와 만트라(mantra;眞言)를 중심으로 하는 밀교(秘佛敎)가 주류가 되어, 《대일경》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이 만들어져서 그 가르침을 확립하고, 그 뒤에도 다수의 밀교경전이 만들어졌다. 여기서는 특정한 영역이 성역인 만다라(曼茶羅)를 쌓고, 특수한 범절을 행하면서 여러 가지 주문(呪文)에 빠져들 때 대일여래를 위시한 제존(諸尊)이 나타나는데, 참가자만이 도취의 극으로 그 공덕을 차지한다. 이때 현실적으로 그대로 부처에게 가까워질 뿐 아니라 부처가 된다(卽身成佛)고 주장한다. 그러나 밀교를 후기대승에서 독립시켜 다루는 설도 있다. 밀교는 불교의 민중화에 수반한 것이지만 도리어 힌두교와의 구별이 모호해져서 불교는 그 독자성을 잃고 힌두교 속으로 흡수되어 갔다. 불교는 11세기 이후, 이슬람교의 인도 진출로 인하여 차츰 사라져 13세기 이후에는 급격하게 쇠멸되었다. 중국불교전도(傳道)시대(4세기 말까지)불교 전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략 기원 전후 무렵, 서역(西域)을 경유해서 중국에 전해졌다. 물론 중국은 이 시대까지는 벌써 고도의 문화를 확립하였으며, 또 문자의 표현과 기록의 보존을 중히 여겼으므로, 이국의 문화는 반드시 한자로 옮겼다. 안세고(安世高)·지루가참(支婁迦懺)·축법호(竺法護)·불도징(佛圖澄) 등의 외국 승려 외에 주사행(朱士行)·도안(道安)·혜원(慧遠) 등의 중국인 학승들이 여러 경전을 번역해서 중국인에게 불교를 전하는 한편, 그 이해를 깊이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불교사상의 독자성은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전설상의 황제(黃帝)나 노자(老子) 수준으로 신봉되었고, 특히 반야(般若, 智慧)의 공(空)을 노자의 무(無)로서 해석하는 융합·절충이 성행하였고, 격의불교(格義佛敎)라는 일종의 혼효사상(混淆思想)이 시행되었다. 연구시대(580년까지)5세기 초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서역으로부터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이후 9년 동안 여러 대승경전을 훌륭하게 번역하였고, 또 3000여 명의 제자를 교육했다. 여기서 중국불교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번역한 한문경전만으로 충분히 불교교리를 연구, 사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밖에 불타발다라·담무참(曇無讖)·진제(眞諦)·보리유지(菩提流支) 등의 도래승에 의하여 뛰어난 한역불전이 완성되었으며, 이들 여러 경과 논(論)의 연구가 진척되고 많은 학파가 형성되었다. 한편, 이 시대에는 역경서(譯經書)가 정리되어 경록(經錄)과 전기 등 신뢰할 만한 불교사의 여러 자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혼란이 계속된 이 시대에 불교는 겨우 민중 속으로 들어가 한민족의 습속과 융합하여 우란분회(盂蘭盆會)같은 법회(法會)가 성행하게 되었다. 때로는 왕조에 의한 폐불(廢佛)이 있었으나, 불교는 즉시 부활하였다. 다퉁[大同]·윈강[雲崗]의 석불과 룽먼[龍門]의 석굴 등은 열렬했던 불교신앙을 말해주고 있다. 독립시대(8세기 중반까지)300년에 가까운 분열에서 중국은 마침내 통일되고, 수(隋)나라·당(唐)나라의 왕조가 계속되어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통일과 종합을 가져왔다. 불교의 여러 학파는 이른바 종파로서 독립하여 중국불교의 황금시대를 출현시켰으며, 수나라의 3대법사라고 하는 정영(淨影;慧遠)·천태(天台)·가상(嘉祥;吉藏)이 나타났다. 먼저 혜원은 그의 저서 《대승의장(大乘義章)》으로 유명하고, 지론종(地論宗)의 기초를 열었으며, 지의는 천태종(天台宗)의 개조로서 알려졌고, 오시팔교(五時八敎)의 교판(敎判, 敎相判釋)의 원형을 제시하여 《법화경(法華經)》을 여러 경전의 최상위에 두었으며, 또 지관(止觀;정신의 集注)에 힘써 많은 제자를 육성하였다. 길장은 용수(龍樹) 계통을 이어 받아 삼론종(三論宗)을 확립시켰다. 수나라 말기에서 당나라 초기에 걸쳐 삼계교(三階敎)가 행해졌는데, 말법사상(末法思想)의 고취가 과격하였기 때문에 즉시 탄압되었으며, 그 가르침은 정토교(淨土敎)에 흡수되었다. 담란(曇鸞)·도작(道綽)·선도(善導)와 같은 승려가 나와, 오로지 아미타불 신앙을 주창하는 정토교가 확립되었다. 645년, 17년 동안의 인도-서역 여행으로부터 귀국한 현장이 당시의 인도에서 번영했던 불교를 중국에 전했다. 그 방대한 번역경전 중 아비다르마·유식·논리학(因明) 등에 귀중한 것이 많고, 특히 유식설(唯識說)은 그 문하인 자은대사(慈恩大師)에 의해 법상종(法相宗)으로 성립되었다. 한편, 현수대사(賢首大師) 법장(法藏)은 화엄경의 번역에 참가하여, 그 이전부터 내려온 화엄종(華嚴宗)을 확립했고 오교십종(五敎十宗)의 교판을 세움과 동시에, 일체의 것이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연기설(緣起說)을 그 가르침의 중심으로 했다. 또, 이미 보리달마(菩提達磨)에 의해서 전해져 있던 선(禪)은 그 6대째라고 하는 혜능(慧能)과 그 동문인 신수(神秀)에 의해서 종풍(宗風)이 확립되고, 많은 우수한 후계자가 나와 엄격한 수행을 철저하게 하여 선종은 중국에서 안정된 지위를 쌓았다. 이 시대에 마지막으로 전래된 것이 밀교이며, 선무외(善無畏)·금강지(金剛智)·불공(不空)이 인도에서 당나라로 와서 밀교의 여러 경전을 번역하였고, 밀주(密呪)의 염송(念誦)과 가지기도(加持祈禱) 등 독자적 수법(修法)이 특히 왕실과 귀족 사이에서 유행하였으며, 곧 민간에도 널리 퍼졌다. 실천시대(12세기 초까지)이 시대 중반에 다시 폐불이 있어서 여러 경전이 소각되고 종파도 중절되었으나, 실천에 전념하는 정토교와 선종 그리고 민간신앙에 동화된 밀교가 번창하였다. 그 중에서도 선종은 충분히 중국화된 불교로 발달되고, 탁월한 승려가 배출되어 그 가르침이 계승되어감과 동시에, 그들의 어록이 편집되었다. 또 선종의 사원에서는 자급자족적인 생활규정이 생겨, 그것을 청규(淸規)라고 했다. 송(宋)나라 이후 대장경이 개판(開板)되고 경전이 간행됨으로써 널리 읽히게 되었다. 계승시대송나라가 북방민족의 압력을 받아 이동하여 남송(南宋)이 되자 특히 선이 유행하였는데, 천태·율(律)·정토 등도 부흥하여 정토교에서는 결사(結社)를 만들어 염불을 재가자사이로 넓혀 갔다. 몽골에서 일어난 원(元)나라는 티베트에서 티베트교를 도입하였기 때문에 정치와 종교가 유착되어 그것이 여러 가지 폐해를 낳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명(明)나라 때는 불교에도 국가통제가 엄격하여 중국불교사상 일찍이 없었던 불교교단의 중앙집권적 통제가 이루어져 활발한 불교활동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며, 유(儒)·불(佛)·도(道)의 3교 융화가 활발히 논의되었다. 다음의 청(淸)나라 때에는 일시적으로 티베트교가 부활하였으나 이미 국가 통제하에 안주해 온 불교에는 이제 지난날의 활력은 없었다. 재가불교의 부흥도 있었으나 원래 중국불교는 출가불교가 주류였으므로 전반적으로 불교는 쇠퇴하여 갔다. 제 2 차세계대전 후 중국대륙으로부터 불교는 그 모습이 거의 사라졌으며 최근에 조금씩 부흥되어 가고 있다. 한편, 타이완에는 불교의 여러 종파가 전해져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일본불교초기오래 전부터 대륙불교는 한반도를 거쳐 전해졌고, 처음에는 도래인(渡來人)을 중심으로 민간에 전파되었으나,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538년 이후라 한다. 그 뒤 숭불(崇佛)과 배불(排佛)의 찬반론이 있은 뒤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불교수용을 확정함으로써 일본에 불교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 쇼토쿠태자는 불교에 깊게 귀의하고 불경을 배워 《법화경》 《유마경》의 의소(義疏)를 썼다. 나라[奈良]불교중국불교의 황금시대에 대응하여 중국에 성립된 여러 종파가 잇따라 전해져 이른바 남도육종(南都六宗)이 성립했다. 즉, 삼론종(三論宗)·법상종(法相宗)·성실종(成實宗)·구사종(俱舍宗)·율종(律宗)·화엄종(華嚴宗)이 그것이다. 헤이안[平安]불교중심이 되는 사이초[最澄]와 구카이[空海]는 교토[京者]로 천도한 간무천황[桓武天皇]의 신임을 얻어 새로운 불교를 열었다. 사이초는 순수한 구도의 성격이 강하여 일찍이 천태종을 배우고 교토를 떠나 히에이산[比叡山]에 들어갔다. 뒤에 칙허를 얻어 당나라에 들어가 천태를 비롯하여 밀(密)·계(戒)·선(禪)을 합쳐 4종합일의 천태법화종(天台法華宗)을 창립했다. 이와 같은 종합적인 학풍은 일승사상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중국의 천태와는 달리 일본불교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구카이도 당나라의 장안(長安)에서 혜과(惠果)로부터 진언밀교를 배우고 귀국 후 진언종(眞言宗)을 창설하고 고야산(高野山)에 공고부사[金剛峰寺], 교토에 도사[東寺]를 세워 호국불교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다. 가마쿠라[鎌倉]불교진정한 뜻에서 불교가 민중과 깊은 연관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시대이다. 불교 전래 후 600여 년을 거쳐 비로소 일본불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탄생하였다. 민중이 불교를 찾았고, 종교적 지도자가 나타나 이에 응했다. 헤이안 중기부터 번영한 호넨[法然]의 정토종(淨土宗), 에이사이[榮西]에 의해 확립된 선종 등이 그것이었고, 가마쿠라시대 마지막에는 니치렌[日蓮]을 개조로 하는 니치렌종[日蓮宗]이 출현, 《법화경》을 근본으로 한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 등을 주장하였다. 무로마치[室町]에서 메이지[明治]까지의 불교가마쿠라 신(新)불교는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에 대응해서 단시일에 민중 속에 퍼졌다. 임제선(臨濟禪)은 아시카가바쿠후[足利幕府]의 비호를 받으면서 교토와 가마쿠라의 고산[五山]을 중심으로 번영하였다. 조동종(曹洞宗)에는 에도[江戶]시대에 만잔도하쿠[卍山道白]·멘잔즈이호[面山瑞方] 등이 나와서 가르침을 바로 잡았으며, 다이구료칸[大愚良寬]도 이 종에 속한다. 메이지유신 후 일본정부는 처음에 신불분리(神佛分離)에서 폐불정책(廢佛政策)으로까지 나아갔으나, 일본인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불교는 현대에도 일본인의 풍속습관과 사고 한 구석에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상당히 깊이 깃들어 있다. 또한 최근에는 이른바 신종교가 니치렌계통[日蓮系統;예컨대 創價學會·靈友會 등] 외에 천태·진언계통에서도 많이 나와 다수의 신자를 얻고 있다. 남방불교사서(史書)에 의하면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BC 3세기 중엽으로, 인도에서 아소카왕의 왕자 마힌다가 부파불교의 보수파에 속하는 상좌부(上座部;長老部)의 불교를 전하고, 왕조의 보호와 민중의 귀의를 얻어 온 섬에 퍼졌다. 그 경전은 팔리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팔리불교라고도 한다. 뒤에 한때는 대승불교의 일파도 전해졌으나, 장로부의 번영이 계속되었다. 5세기에는 인도에서 불음(佛音;부다고사)이 와서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 전체의 주석을 완성하였으며, 《청정도론(淸淨道論)》을 저술하여 불교는 대단한 활기를 띠었다. 6세기에 불교는 벵골만을 북상해서 미얀마에도 전해졌고, 11세기에는 파간왕조가 전 미얀마를 통일해서 불교가 번영하였고, 당시 부진하였던 스리랑카로 다시 전해졌다. 이후 스리랑카와 미얀마의 불교는 쇠퇴와 번영을 되풀이하고 있다. 현재 양지역의 불교는 18세기에 타이로부터 재전래된 것인데, 양쪽이 다 그 정치형태에는 관계없이 불교를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다. 타이민족이 독립한 것은 12세기 초인데 그 당시부터 장로부계통의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뒤에 성쇠를 되풀이하면서 현재에 이르렀고 동시에 불교 이외의 인도의 여러 문화도 받아들여서 현재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불교국이 되었다. 캄보디아는 힌두교와 불교를 섞은 종교가 번영했다. 9∼12세기의 앙코르유적이 유명하며, 톰(도성)과 와트(사원)가 늘어서 있다. 이웃나라 라오스와 함께 나중에 타이로부터 전해진 장로부불교가 성하다. 베트남만은 중국과의 관계가 깊어, 중국에서 전래된 대승불교가 신봉되었다. 인도네시아에도 한때 불교가 번성하여 자바에 8∼9세기의 보로부두르 유적이 있으나 뒤에 이슬람권으로 들어갔다. 티베트불교티베트불교도는 라마교라는 별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티베트로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통일을 완수한 스롱버트산스캄포왕(재위 581∼649)에 의해서이다. 뒤에 티스롱데찬왕(재위 742∼797)은 인도에서 후기 대승과 밀교에 정통한 샨타라크시타(寂護)·파드마산바바(蓮華生)·카말라실라(蓮華戒) 등 3명의 승려를 맞이해서 불교를 융성시켰다. 약 100년의 단절 후 11세기에 아티샤가 인도로부터 옮겨온 이후 티베트불교는 전성을 이루었다. 최대의 승려 총카파는 불교의 근본적인 개혁을 이룸과 동시에 현교(顯敎)와 밀교에 통달하였고, 특히 중관파(中觀派)의 해석을 밀교에 철저화시킨 저서를 지었다. 이후 티베트불교는 이 계보가 정통이 되어, 달라이 라마라고 하는 전 티베트의 통일군주가 종교·정치·문화를 모두 통솔하였다. 달라이 라마 5세는 다른 대사(大寺)의 고승에게 판첸 라마의 칭호를 주었으나 그 계보는 하나의 종교적인 권위에 그쳤다. 근세부터 현대에는 영국·러시아 그리고 최근에는 중국에 의해서 크나큰 탄압 등을 받았으나, 티베트불교의 뿌리깊은 힘은 여전히 남아 있다. 또 이 영향은 티베트 이외에 몽골과 러시아 일부 등지에 남아 있다. 또한 티베트대장경은 특히 대승불교·밀교를 전하는 가장 귀중한 보고로서 세계 각지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불교한국에서 불교문화를 받아들인 때는 삼국시대이다. 한국 불교문화사의 시대구분에서 삼국시대는 최초기가 된다. 이 시기에 한반도의 남쪽 낙동강 유역에 가야(伽倻)가 있었고, 그곳에도 불교문화가 들어왔다는 전설이 있다. 당시 받아들인 불교는 하나의 외래종교였음에는 틀림이 없으나, 불교는 단순한 종교로서만이 아닌, 전반적인 문화현상으로서 민족문화의 모체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멀리 인도에서 이룩된 불교는 인도의 온갖 문화를 수용·포용하면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였으며, 또 중국으로 전해진 다음에는 중국의 독특하고 우수한 문화와 접촉, 융화되어 풍부하고 다양한 중국적인 불교문화 세계를 이룩하게 되었다. 곧 이와 같은 중국의 불교문화가 한국으로 유입되어 온 것이다.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불교문화는 육로를 통해서 고구려에 전해졌고, 바다를 건너서 백제로 전해졌는데, 고구려에서 받아들인 불교문화는 주로 전진(前秦)을 비롯한 북방 중국의 불교문화였으며, 백제는 주로 동진(東晉)을 비롯한 남쪽 중국의 불교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신라의 경우는 처음 고구려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고, 그 뒤로는 백제와 중국의 남조·수나라·당나라 등지에서도 전래되었다. 그러나 가야에 전해졌다는 불교문화는 중국계통이 아닌 인도(또는 남방)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받아들여진 불교문화는 고대 신앙이나 고유습속 등 전래의 문화와 잘 융화되어 훌륭한 민족문화로 형성되어졌다. 고구려고구려는 한국에 불교라는 새로운 문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이다. 372년(소수림왕 2) 북중국의 전진에서 부견왕(符堅王)이 사신과 승려인 순도(順道)를 보내면서 불상과 경전을 보내왔다. 그 뒤 374년(소수림왕 4)에 다시 중국에서 아도(阿道)가 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최초로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웠다. 이를 한국불교의 초전(初傳)으로 삼고, 또 사원 창건의 효시로 본다. 그러나 동진 때의 고승 지순도림(支遁道林)이 고구려의 고승에게 글을 보냈다는 기록이 《양고승전(梁高僧傳)》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전래시기는 상향될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의 불교는 고국양왕을 거쳐 광개토왕 때에 이르면서 크게 융성하여, 평양에 9개의 절이 세워졌으며 지방에도 많은 절이 창건되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승려들은 해외에서의 구법(求法) 및 전교(傳敎) 활동을 활발히 하였는데,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을 이루게 한 승랑(僧郞)과 일본에서 활동한 혜편(惠便)·혜자(惠慈)·담징(曇徵)·혜관(惠灌) 등이 있다. 백제한반도의 남서쪽에 자리한 백제는 바다를 사이에 둔 중국으로부터 해로를 통해 불교문화를 받아들였다. 백제가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되어 있는 384년(침류왕 1)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백제로 들어왔다. 백제는 낯선 외국의 승려를 크게 환영하고 또 궁중에서 극진히 공경하였는데, 이 점에서 불교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자세가 엿보인다. 마라난타는 백제에 온 이듬해 절을 짓고 승려를 배출하였고, 552년(성왕 30)에는 일본에 백제불교를 전하였으며, 30대 무왕 때에는 전라북도 익산(益山)에 미륵사(彌勒寺)라는 웅대한 절을 세워 백제의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지금도 익산의 그 절터에는 한국 최고·최대의 석탑이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백제의 불교에서 특히 겸익(謙益)은 인도에까지 유학을 다녀와 경전을 스스로 번역하여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가 되었으며, 담혜(曇慧)·도심(道深)·관륵(觀勒)·도장(道藏)·법명(法明)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승려들이 일본문화 전반에 걸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신라삼국 가운데 가장 불리한 지리적 조건과 문화적 후진성으로 인해, 대륙으로부터 일어나는 국제정세 동향과 새로운 문화추세 등에 대해 어두웠던 신라는, 고구려를 통하여 들어오는 불교문화의 새 흐름을 무조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교를 전하려고 들어왔던 고구려의 고승 정방(正方)과 멸구자가 희생된 사실이 있었으며, 묵호자(墨胡子)와 아도(我道;阿道) 등의 전도승들 또한 밀실에서 숨어 살아야 했다. 그 뒤 제23대 법흥왕에 이르러 불교가 공인되었으나 이렇다 할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진흥왕대에 들어서면서 흥륜사(興輪寺)·황룡사(皇龍寺) 창건, 승니(僧尼)의 양성과 구법유학 지원, 불사리(佛舍利)와 불상의 조성 및 승통제(僧統制) 마련, 국선화랑(國仙花郞)의 단체 설치 등 불교문화를 진흥시켰다. 이후의 왕들도 진흥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불교문화의 보호와 진흥에 힘썼다. 한편 진평왕 때의 원광(圓光)과 선덕여왕 때의 자장(慈藏) 등의 승려는 교화활동에 공이 컸으며, 현태(玄泰)를 비롯한 많은 승려들이 인도 등지로 구법유학을 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에 불완전하나마 통일을 이룩한 신라는 민족적 불교문화의 완성에 주력하였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으로, 그들은 신라사회의 정신적 기둥이었으며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였다. 또한 원효는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 등의 저소(著疏)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의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아울러 경흥(憬興)은 《미륵삼부경소(彌勒三部經疏)》를 비롯한 5부 12권의 저서를 내었고, 유식학(唯識學)의 대가 태현(太賢), 참회법과 점찰간자(占察簡子)로서 참회불교인 점찰교법(占察敎法)을 새로 일으킨 진표(眞表) 및 신인비법(神印秘法)으로 당군(唐軍)의 침입을 미리 막게 한 명랑(明朗) 등은 신라불교의 번영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밖에도 중국에서 활동하며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존경을 받은 원측(圓測)과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는 귀중한 자료를 남긴 혜초(慧超) 등을 통해 대외적으로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한편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 및 한국 최대의 범종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등이 이 시대에 이루어졌고, 불교문화·음악도 성행하였다. 고려고려는 개국 초부터 태조의 적극적인 봉불정책(俸彿政策)에 따라 팔관회(八關會)를 베풀어 연례행사로 삼게 하였고, 경유(慶猷)·충담(忠湛)을 왕사(王師)로 삼고 많은 고승 대덕을 존경하여 예우하였다. 태조의 숭불호법(崇佛護法)의 국가적 정신은 역대의 왕들이 모두 계승하여 6대 성종은 송나라로부터 대장경(大藏經)을 들여왔고, 8대 현종과 23대 고종은 불법의 힘으로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대장경을 각판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대각국사(大覺國師)·보조국사(普照國師)와 같은 훌륭한 고승이 배출되었고, 불교의 여러 종파(宗派)가 이때부터 비롯되어 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남산종(南山宗)·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시흥종(始興宗)·신인종(神印宗)·총지종(摠持宗)·중도종(中道宗)·도문중(道門宗) 등이 있었다. 특히 《고려대장경》 조성은 고려 불교문화의 집대성인 것이며, 이와 함께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경천사(敬天寺)의 13층탑 및 혜허(慧虛)의 《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 등이 현존하고 있다. 또 광종 때의 균여(均如)는 불교문화를 통해 불교의 대중화에 힘쓰기도 하였다. 조선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을 표방한 조선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태조 때 무학(無學)을 왕사로 삼아 개국 초창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했으나, 이후 억불책으로 인하여 상당히 위축되었다. 세종이 즉위하면서 기존의 종단을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양종으로 하였으나,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들 수양(首陽)에게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게 하는 등 그간의 억불책에서 다소 후퇴하였다. 그러다가 세조는 불교보호정책을 펴 인경간행(印經刊行)과 불전의 번역 및 불교가무(佛敎歌舞)의 창제에 힘썼고, 불교음악인 《영산회상(靈山會相, 靈山會上)》은 조정의 정악(正樂)으로 되었으며, 또 불교 무용인 연화대무(蓮花臺舞)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조 사후 조선의 불교는 유생들에 의해 가혹한 배척을 받아 1566년(명종 21)에는 양종과 승과가 폐지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뒤 산중에 은거하던 승려들은 임진왜란 때 의승군(義僧軍)을 조직, 혁혁한 전공을 세워 휴정(休靜)과 유정(惟政)은 왜군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조선의 불교문화는 산중에서 이루어졌다는 데 특징이 있다. 근대근대에 들어서면서 불교는 그 핍박의 굴레를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승려에 대한 입성금지령(入城禁止令)의 해제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서울에서 활동하던 일본의 니치렌종[日蓮宗] 승려의 건의에 따라 당시의 친일내각 총리대신인 김홍집(金弘集)의 결단에 기인한 것이었다. 1899년(고종 36) 동대문 밖(지금의 창신초등학교 자리)에 원흥사(元興寺)가 세워져, 한국 불교의 총종무소(總宗務所)가 되면서 전국의 사원을 통할하였다. 정부에서도 이때부터 국가행정의 범위 안에서 불교를 보호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오랫동안 관심 밖으로 방치되었던 전국의 사찰 및 승려의 위치는 차츰 개선되었다. 한편 1906년에는 최초의 근대적 불교교육기관인 명진학교(明進學校)가 원흥사를 교사로 하여 세워졌는데, 이는 오늘날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의 모체이며 한용운(韓龍雪) 등이 수학한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국권이 상실되면서 한국의 불교교단은 일본 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산으로 나뉘어 각각 30군데의 교구로 성립되기에 이르렀으나,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통제하는 기구는 마련되지 않았다.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설립되어 중앙통제기구로서의 체제를 갖추었으나, 곧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시 총본산(總本山) 운동이 전개되었다. 1941년 봄 태고사(太古寺;지금의 조계사)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이라고 불리던 종단의 이름을 조계종(曹溪宗)으로 결정하였다. 그 뒤 45년 8·15와 더불어 조선불교조계종은 한국불교조계종(초대교정 鼎鎬)으로 재정비,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현대불교의 과제한국 불교문화는 민족문화의 근간을 형성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억불로 인해 산중에 은거하면서도 그 문화의 맥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 일제강점기 아래에서도 선교양종 또는 조계종의 정통성을 끝까지 지켜왔다. 8·15는 불교계에도 무한한 비약을 기약하는 자유를 누리게는 하였으나, 그에 따른 많은 과제와 문제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오늘의 한국불교는 그러한 과제와 문제성을 극복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인류가 화합하여 참된 인간을 완성하려는 불교의 목적과 승가(僧伽)의 참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 곧 한국불교의 과제이며 바람이다. 그 동안 한국불교는 호국불교에 치우쳐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이상을 소홀히 하였고 다른 종교와의 갈등에 원만히 대처하지 못한 점도 있었으나, 많은 불자(佛子)들의 대승적 노력과 특히 불교방송(佛敎放送;BBS)의 개국 등으로 인해 오해반목을 극복해 나가고 있다. 불교의 현황인도불교는 20세기 중반에 주로 천민계급에서 신불교운동의 움직임이 나타났지만 영향력은 작다. 중국 불교는 거의 폐색상태에 있다. 한편, 전통적인 보수계의 장로부불교는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성하고, 대승불교는 한국·일본·타이완에서 번영하고 있다. 티베트불교는 일시적으로 약화되어 있지만 세력은 뿌리가 깊어 튼튼하다. 또 대승불교의 여러 종파, 특히 선(禪)은 미국 등 세계 각지에 진출하였고, 일부에서는 포교에 성공하고 있다. 대승불교는 그 교의나 범절 외에 사상·예술·문화 및 기타 습속까지도 포함해서 이른바 대승문화로 발전하였고, 특히 한자문화권에 대한 영향은 매우 크다. 다만 그 최대의 특색인 관용이 지나쳐 세속에 영합하여 유행에 빠지기 일쑤이며, 특히 일본에서는 사자공양(死者供養)-장제의례(葬祭儀禮)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불교에 일관되는 엄격한 부정-초월의 논리는 과격한 절대화에 등을 돌린 채 다양성의 승인을 진척시켜, 마음의 평정과 평안을 추구하는 불교의 이상과 함께 오늘날 가장 중요한 평화에 대한 정신적 거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현재 세계의 불교계 인구는 약 5억이라고 한다. 불교연구는 불교가 전해진 각지·각국에서 예로부터 왕성하게 이루어져 왔는데, 진정한 의미의 문헌학에 기초한 불교학은 19세기 중엽 이후 유럽에서 시작되어, 곧 전세계로 확대되었다. 중요한 선각자로는 덴마크의 M. 파우스뵐·V. 트렝크너, 프랑스의 E. 뷔르누프·P. 펠리오·S. 레비·J. 바코·P. 드미에빌, 독일의 H. 올덴베르크·W. 가이거·H. 뤼더스·발레저·H. 글라저나프·발트슈미트, 오스트리아의 M. 빈터니츠·프라우발너, 영국의 M. 뮐러·T.W. &C.A.F. 리스 데이비즈, 이탈리아의 G. 투치, 헝가리의 K. 초마, 네덜란드의 J. 케른, 벨기에의 L.V. 푸생·E. 라모트, 러시아의 P. 스체르바츠키, 미국의 F.E. 에저턴 등이 있다. 용어가지성불 加持成佛 중생과 부처, 미(迷)와 오(悟)를 상대하여 아직 이루지 못한 범부가 부처님을 흠앙하는 신심(信心)과, 이미 이룬 부처님이 베푸는 대비력(大悲力)이 서로 어울려서 범부에게 본래 갖추어진 실덕(實德)이 잠깐 동안에 나타난다는, 종교적인 수양에 따른 실제상의 성불. 갈마 [범] Karmra ①업(業). ②수계(受戒)나 참회할 때의 작법. 이에서 멸죄생선(滅罪生善)의 힘을 얻음. 견성 見性 모든 망혹(妄惑)을 버리고 본연의 천성을 깨달아 정각(正覺)을 이루는 것. 선가(禪家)에서는 견성성불(見性成佛). 공 空 실체가 없고 자성(自性)이 없는 것. 불교에서 말하는 공의 종류를 크게 나누면, 실답지 않은 자아에 실재(實在)라고 인정하는 미집(迷執)을 부정하도록 가르치는 아공(我空)과,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에 대하여 항상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미집을 부정하도록 가르치는 법공(法空)의 2가지가 있다. 과 果 원인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법. 온갖 법은 모두 원인으로 말미암아 일어나지만, 열반(涅槃)과 같은 무위법(無爲法)은 원인에서 생긴 결과가 아니고 오랜 수행 끝에 증득(證得)되는 것이므로 열반의 묘과(妙果)라 한다. 관정 灌頂 여러 부처가 대자비의 물로써 보살의 정수리에 붓는 것. 전법(傳法)·수계(受戒)할 때 또는 수도자가 일정한 지위에 오를 때 받는 자의 정수리에 향수를 붓는 밀교(密敎)의 의식. 금강계 金剛界 마하비로자나(大日如來)의 내증(內證)한 지덕(智德)을 열어 보인 부문. 불(佛)·금강·보(寶)·연화(蓮華)·갈마의 5부로 되어 있다. 금강지 金剛智 극히 견고한 지혜. 곧 여래(如來)의 지혜. 능인 能仁 석가모니의 한문번역. 능히 인을 행하는 자의 뜻. 다라니 陀羅尼[범] Dharani 선법(善法)을 갖추어 악법을 막는다는 뜻. 구체적으로는 범문(梵文)으로 된 긴 구(句)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독송하는 일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짧은 것은 진언(眞言)이라 한다. 대방광 大方廣 부처가 깨달은 진리를 이르는 말. 이 진리는 온갖 것을 포함하여 한량없이 큰 것이므로 대(大), 만법의 모범이 되어 변치 않는 체성(體性)이므로 방(方), 그 덕이 널리 우주에 관통하므로 광(廣)이라 한다. 도솔천 [범] Tusita-deva 욕계육천(慾界六天)의 넷째 하늘. 내·외의 2원(院)이 있는데, 내원은 미륵보살이 설법하고, 외원은 천중(天衆)의 환락처(歡樂處)라고 한다. 두타 頭陀[범] Dhuta 번뇌와 의식주에 대한 탐욕을 떨쳐 없애고 청정(淸淨)하게 불도를 수행하는 것. 마니 摩尼[범] Mani 악을 제거하고 탁수(濁水)를 맑게 하고 염화(炎禍)를 없애는 공덕이 있다는 보주(寶珠). 마니보주 또는 여의(如意) 보주라 한다. 만 卍 예로부터 인도(印度)에서 전래하는 길상(吉祥)의 표상(標相). 불교에서는 만덕원만(萬德圓滿)한 모양으로서 부처의 가슴에 그리거나, 혹은 불심인(佛心印)이라고 한다. 만다라 曼茶羅 법계(法界)의 온갖 덕을 갖춘 것이라는 <윤원구족(輪成具足)>의 뜻으로, 주로 밀교에서 불·보살을 줄지어 모시고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이르는 말. 무간지옥 無間地獄 팔열지옥(八熱地獄)의 하나. 사바세계(裟婆世界)의 아래로, 이곳에 떨어지면 일겁(一劫) 동안에 걸쳐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다는 뜻에서 일컫는 말이다.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한다. 무명 無明 불교의 진리에 통달하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 곧 사견(邪見)·망집(妄執)으로 법의 진리에 어두운 일을 말하며, 모든 번뇌의 근원이 된다. 무상 無相 제한된 차별상이 없이 무한 절대함. 공(空)·진여(眞如)·제법실상(諸法實相) 등을 형용하는 말. 무상 無常 모든 현상은 한 찰나에도 생멸변화(生滅變化)하여 상주(常柱)함이 없음. 무아 無我 상주불변(常柱不變)한 주체(主體)가 없으므로 <나>라는 존재도 없다는 불교의 근본사상. 바라밀다 波羅蜜多[범] paramita 현실의 생사(生死)의 차안(此岸)으로부터 열반의 피안으로 건넌다는 뜻으로, 보살의 수행을 이르는 말. 도피안(逃彼岸)이라 번역한다. 반야 般若[범] prajna 대승불교에 있어서 모든 법의 진실상(眞實相)을 아는 지혜. 방편 方便 불·보살이 근기(根機)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편의적 수단방법. 또는 중생을 진실한 교법(敎法)으로 이끌기 위해 가설(假說)한 법문. 보리 菩提[범] Bodhi 불교에서 최상의 이상(理想)인 불타정각(佛陀正覺)의 지혜. 또는 불타정각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수행해야 할 길. 불이법문 不二法門 상대차별을 없애고 절대차별이 없는 이치를 나타내는 법문. 사무량심 四無量心 한없는 중생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의 4가지. 곧 자(慈)·비(悲)·희(喜)·사(捨)의 무량심을 말한다. 사성제 四聖諦 4가지의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 고(苦)·집(集)·멸(滅)·도(道)의 4제. 사홍서원 四弘誓願 모든 부처와 보살의 4가지 큰 서원. 곧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진서원단(煩腦無盡誓願單),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의 4가지. 삼귀의 三歸依 불(佛)·법(法)·승(僧) 3보(三寶)에 돌아가 의지함을 이르는 말. 삼법인 三法印 불교의 근본 교의를 셋으로 표시한 것. 곧 제행무상인, 제법무아인,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을 말한다. 삼업 三業 몸·입·뜻의 3가지 욕심으로 인하여 짓는 죄업. 또는 신체활동·언어표현, 심적(心的)인 행위를 일컬음. 삼장 三藏 불교 전적의 총칭으로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을 일컫거나, 경·율·논에 통달한 고승(高僧)을 일컫는 말. 심인 心印 선가(禪家)에서 문자·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불타 자내증(自內證)의 심지(心地)를 이르는 말. 십이연기 十二緣起 과거에 지은 업에 따라 현재의 과보(果報)를 받으며 현재의 업을 따라 미래의 고(苦)를 받는 12가지 인연.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절대지자(絶對智者)의 뜻으로, 부처의 최상의 지혜를 이르는 말. 업 業 몸·입·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所行), 또는 전세(前世)에 지은 선악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서 받는 응보. 연각 緣覺 12인연의 이법을 인식하여 혹(惑)을 끊고 불생불멸의 진리를 깨달은 성자. 열반 涅槃[범] Nirvana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 생사를 초월한 불생불멸의 법을 체득한 경지를 이르는 말. 오식 五識 오근(五根)에 의하여 일어나는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의 5가지 심식(心識). 오온 五蘊 모든 생멸변화하는 것을 모아서 5종으로 구별한 것. 곧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5가지 적취(積聚) 원광 成光 불·보살상의 목이나 등 뒤에 원륜(成輪)으로 방광(放光)을 표현하는 것. 원융 成融 일체법의 사리(事理)가 구별없이 널리 융통하여 하나가 됨. 유심 唯心 우주의 종극적 실재는 오직 마음뿐으로서 외계의 사물은 마음의 변현(變現). 육근 六根 육식(六識)을 낳게 하는 6가지 근원. 곧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를 말함. 육념 六念 6가지 염법(念法). 곧 염불(念佛)·염법(念法)·염승(念僧)·염계(念戒)·염시(念施)·염천(念天)을 말함. 인 印 불타 자내증(自內證)의 덕을 표시하기 위하여 열손가락으로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드는 표상. 인과 因果 일체의 현상의 원인과 결과에 관한 법칙. 원인 중에는 인(因)·연(緣)이 있다. 일심삼관 一心三觀 일심을 대상으로 하여 자기 마음 속에 공(空)·가(假)·중(中)의 3제가 있음을 알고 생사·번뇌의 경지에서 벗어나 열반·보리(菩提)에 들어가는 도를 닦는 관법. 전법륜인 轉法輪印 설법 교화 내용을 두 손으로 나타내는 표치(標幟). 설법인(設法印). 조사선 祖師禪 문자의해(文字義解)에 구애됨이 없이 이심전심(以心傳心)하는 선법. 중도 中道 정립(定立)·반정립의 양변(兩邊)에 치우친 것을 종합한 중정(中正)한 도. 지 智 모든 사상(事象)과 도리에 대하여 그 시비(是非)·사정(邪正)을 분별·판단하는 마음의 작용. 지관 止觀 정(定)·혜(慧)를 닦는 불교의 중요한 수도 방법. 산란한 망념(妄念)을 그치고 정적(靜寂)한 명지(明智)로써 만법을 관조(觀照)하는 일. 지장 地藏 석가불의 부탁을 받고 그 입멸(入滅) 후 미륵불(彌勒佛)이 세상에 출현할 때까지, 부처 없는 세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육도(六道)의 중생을 화도(化導)한다는 보살. 진여 眞如 우주 만유(萬有)의 실체로서 현실적이며 평등·무차별한 절대의 진리. 탁발 托鉢 수도하는 중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먹을 것을 얻는 것. 걸식(乞食). 해탈 解脫 모든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경계에 이르는 것. 열반. 회향 廻向 자기가 닦은 선근공덕(善根功德)을 다른 중생이나 또는 자기의 불과(佛果)에 돌려 향하는 것. 연표BC 563경 석가탄생(~BC 483 무렵), 불교를 엶. 일설로는 BC 463년 무렵 탄생(~BC 383 무렵)했다고도 함 280경 불교교단이 확대·고정되어 가는 과정에서 상좌부와 대중부가 분열 268경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왕 즉위(~BC 233). 불교, 전인도에 확산. 불교, 스리랑카로 전파 200경 부파의 분열이 진행, 부파불교로 들어감. 경장·율장이 거의 확정되고, 논장도 성립. 재가신자를 중심으로 불탑숭배가 확산 160경 박트리아왕 밀린다(메난드로스), 불교를 보호, 《밀린다왕의 물음(那先比丘徑)》 이루어짐 150경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확립 120경 산치의 대탑 건립 BC 기원전후 대승불교 시작. 대승불교경전 《반야경》 《법화경》 《화업경》 등의 원형 성립. 중국에 불교가 전해짐 AD 67 중국 최초의 절 백마사 건립 100경 마명(馬鳴, 아슈바고샤) 출생. 찬불문학(讚佛文學) 번영 130경 유부(有部)의 교리를 집대성한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이루어짐 132경 쿠샨왕조의 카나슈카왕 즉위(~152 무렵), 불교 보호 150경 용수(龍樹, 나가르주나) 출생(~250 무렵). 대승불교의 기초 확립 250경 중기대승경전 《승만경》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해심밀경(解深密經)》 등이 만들어짐 320 굽타왕조 성립, 힌두색이 짙어짐 350경 미륵(彌勒, 마이트레야) 탄생(~430 무렵) 372 고구려, 불교 전래 384 마라난타, 백제에 불교 전래 390경 무착(無着, 아상가) 출생(~470 무렵) 399 법현(法顯), 인도 여행(~412) 400경 세친(世親, 바수반두) 출생(~480 무렵). 날란다사 건립 401 구마라습(鳩摩羅什), 장안에 와서 대승경론(大乘經論) 번역 415경 불음(佛音, 부다고사), 스리랑카로 와서 활동, 스리랑카에서 불교 성행 444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의 폐불 465경 윈강[雲崗] 석굴사원 건립 시작 476 담란(曇鸞) 출생(~542), 중국 정토교의 기초 확립 480경 진나(陳那, 디그나가) 출생(~540 무렵). 불교 논리학 성립 499 진제(眞諦, 파라마르타) 출생(~569) 500경 달마(達摩, 보디다르마) 중국에 옴 504 양(梁)나라 무제(武帝), 불교 진흥 522 혜원(慧遠) 출생(~592). 중국불교 확립 527 신라,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 공인 530경 호법(護法, 다르마팔라) 출생(~561 무렵) 538 지의 출생(~597), 천태종 확립 540 신행(信行) 출생(~594), 삼계교(三階敎) 발생 544 신라, 흥덕사 창건. 국법으로 승려입문 승인 546 전제, 중국에 옴 549 길장(吉藏) 출생(~623), 삼론종 확립. 신라, 처음으로 불사리 안치 551 신라, 백좌강회·팔관재회법을 설치 553 신라, 법주사 창건 566 신라, 황룡사 완성 574 북주(北周) 무제(武帝)의 폐불 581 수(隋)나라 문제(文帝), 관사(官寺)를 전국에 건립. 티베트 스롱버트산스캄포 즉위, 불교 전래 588 백제, 불사리·승려·화공·와장 등을 일본에 보냄 599 백제, 수덕사·금산사 창건 601 백제의 고승 관륵, 일본에 건너가 불교문화 신흥에 힘씀 602 현장(玄裝) 출생(~664) 608 고구려의 고승 담징·법정, 일본에 건너가 제지술 가르침 617 선도(善道) 출생(~681), 정토교 확립. 원효(元曉) 출생(~686), 해동종(海東宗)의 시조 625 의상(義湘) 출생(~702), 한국 화엄종 창시 629 현장, 인도여행(~645) 634 신라, 분황사·왕흥사 창건 637 선무외(善無畏) 출생(~735) 638 혜능(慧能) 출생(~713), 선의 기초 확립 643 법장(法藏) 출생(~712), 화엄교학(華嚴敎學) 대성 650경 인도, 후기불교 번영. 밀교의 《대일경(大日經)》 《금강정경(金剛頂經)》 성립. 찬드라키르티·다르마키르티·샨티네바(7세기)·샨타라크시타·카말라실라·파드마산바바(8세기) 등이 활동 671 의정(義淨), 인도 여행(~695). 금강지(金剛智) 출생(~741) 676 의상, 부석사 창건 690 당(唐)나라 측천무후, 전국에 관사 대운사(大雲寺) 건립 704 혜초(慧超) 출생(~787),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저술 705 불공(不空) 출생(~774). 중국에 밀교가 확립 738 당나라 현종(玄宗), 전국에 개원사(開元寺)를 건립 750경 자바에 보로부두르 건립(~850 무렵). 이슬람교, 인도에 전래 751 신라, 불국사·석굴암 건축 760 월명, 《도솔가》 지음 765 충담사, 《안민가》 지음 802 해인사 창건 806 신라 애장왕, 불사의 신창(新創)을 금함 845 당나라 무종(武宗)의 폐불 885 진성여왕, 위흥에게 명하여 대구화상과 더불어 《삼대목》 짓게 함 898 궁예, 처음으로 팔관회 실시 943 고려 태조, <훈요 10조>를 통해 불법신봉과 불사 흥륭을 강조 946 고려 정종, 광학보(廣學寶) 설치 955 후주(後周) 세종의 폐불 958 고려 광종, <승과>를 포함하는 과거제 답변확정 960 송(宋)나라 태조, 불교 부흥 971 고려, 원화전에서 《대장경》 개독(開讀) 980 아티샤 출생(~1052) 981 고려 성종, 팔관회의 잡기 폐지 983 송나라 태종, 청[成都]에서 《대장경》을 개판(開板) 1000경 베트남, 불교 번영. 중국, 선 번영 1050경 미얀마, 불교 번영 1055 의천(義天) 출생(~1101), 한국에 천태종 설립 1086 고려 문종, 교장도감에서 불경 간행 1089 《천태사교의》, 해인사에서 간행 1100경 타이, 불교 번영.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건립 1104 숙종, 승도를 뽑아 항마군 설치 1158 지눌 출생(~1210), 구산선문을 조계종으로 통합 1203 이슬람군에 의해 비크라마실라사 파괴 1206 일연 출생(~l289), 《삼국유사》 저술 1222 니치렌[日蓮] 출생(~1289), 니치렌종[日蓮宗] 개조 1232 《초조대장경》,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1236<대장경> 재조에 착수(~51) 1238 몽골군, 황룡사탑 불태움 1250 티베트 불교, 몽골에 진출 1253 니치렌[日蓮], 입종선언(立宗宣言) 1270 원(元)나라, 티베트불교 보호 1352 이색(李檣), 공민왕에게 불교비판 상소 1357 총카파 출생(~1419), 티베트불교 완성 1389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사경(寫經) 완성 1405 조선 태종, 억불정책 실시, 사원에 소속된 토지와 노비 몰수 1406 태종, 도첩제 엄하게 실시 1422 세종, 도성 안에서의 경행(經行)을 금함 1423 세종, 불사 창설을 금함 1424 세종, 종단폐합, 선·교 양종 36사로 통합하고 승록사(僧錄司)를 폐함 1427 세종, 사찰의 시지(柴地) 및 폐사(廢寺)의 땅을 군자(軍資)에 속하게 함 1448 성균관 생도, 세종의 내불당 건립에 반대하여 동맹휴학 1449 세종, 《석보상절》 간행 1450 《대장경》 1부를 일본 왕에게 보냄 1458 세조, 《해인사대장경》 50부 필인 1459 《월인석보》 완성 1461 세조, 간경도감 설치, 불경을 한글로 번역. 《능엄경 언해》 완성 1462 세조, 《수능엄경》 번역 1463 세조, 《법화경》 《반야심경》 등을 국역, 간행 1464 김수온 《금강경》 언해 1465 세조, 원각사 건립 1471 성종, 척불정책, 염불소·간경도감 폐지 1495 연산군, 홍유역불을 명함 1507 중종, 승과 폐지 1520 휴정(休靜) 출생(~1604), 유·불·도(道) 삼교통합설의 기원을 이룸. 교종을 선종에 포섭 1544 유정(惟政) 출생(~1610),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승병으로 활약 1550 문정왕후 윤씨, 선·교 양종 부활, 불교 중흥에 힘씀 1566 명종, 선·교 양종 폐지 1593 의승군, 임진왜란 일어나자 명나라군과 합세하여 왜적 무찌름 1800경 유럽에 인도학·불교학 발생 1864 고종, 적상산사고의 수호사찰 안국사(安國寺) 중수 1879 한용운 출생(~1944),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 사상 고취 1899 원흥사 설립, 전국 사찰 통합 1906 최초의 근대적 불교교육기관인 명진학교 설립 1941 태고사(太古寺) 창건, 종단을 조계종으로 결정 1946 명진학교. 동국대학교로 개칭 1950 세계불교도연맹(WFB) 설립 1953 중국불교협회 결성 1956 제1회 붓다자얀티 개최 1959 달라이 라마 14세, 인도 망명 1965 중국 문화대혁명 시작 1980 10·27 법난 1990 불교방송(BBS) 개국 1994 무비 완역 《우리말 화엄경》(총 12권) 발간. 《현대불교신문》 창간 1995 조계종 송월주 총무원장·조선불교도연맹 박태호 위원장, 중국 베이징에서 남북회합. 불국사 석굴암·해인사 고려대장경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1996 중국, 11대 판첸 라마 불교승으로 입문. 제 2 차 한·중·일 불교우호교류대회 서울에서 개최. 조계종, 《불교판례집》 출간 1997 조계종 등 26개 종단, 범불교연합기구 <북녘동포돕기 불교추진위원회> 출범. 불교 등 6대 종교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창립. 1998 조계종, 총무원장선거 분규로 무력충돌. 법타, 북한 사리원에 금강국수공장 준공. 1999 조계종, 정화개혁회의측과 분규로 유혈충돌. 진각종 성초 통리원장, 북한 방문. 조계종 지선·명진, 북한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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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와 기독교문화가 이 땅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에 우리 조상님들의 역사와 함께한 종교문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일컬어 신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민족의 혼과 정신이 뿌리 뽑히면서 신교의 맥 또한 끊어지는 불행을 겪게 됩니다.

일제시대에 이러한 신교정신을 가진 민족종교로서 당시 600만명이 증산상제님을 신앙했다고 하는 보천교가 있었습니다. 이또한 일제의 철저한 민족탄압 속에서 완전히 뿌리 뽑히게 됩니다.

증산도는 일제시대에 단절되고 왜곡되어진 신교문화를 복원하고 이를 통하여 잃어버린 우리 민족의 역사정신과 정체성을 회복시켜왔습니다.

 

그러므로 증산도를 알게 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하나를 알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민족으로서 잃어버린 역사정신과 혼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증산도를 한 번쯤은 알아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증산도는 또한 한민족의 정신과 혼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수용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우주원리, 대자연의 섭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종교문화로서 증산도는 우주의 가을종교이며 초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대자연의 질서, 즉 우주변화의 원리를 가르쳐 주는 곳은 증산도 뿐입니다.

그래서 증산도는 천지를 담는 그릇이요 우주의 결실이요 천지의 열매입니다.

 

증산도의 신앙문화는 도장과 치성을 중심으로 하며, 생활 속에서 청수모시기와 태을주 수행, 기도를 함께 합니다.

증산도의 주요기구로는 증산도 본부를 중심으로 증산도인재양성기관, 증산도사상연구소, 증산도교수신도회가 있으며, 전국증산도학생회 대학동아리연합 중고등학교 클럽활동(CA), 증산도 어린이포교부가 있습니다.

 

증산도는 최근에 불교와 기독교문화권의 종교방송과 함께 민족종교문화로는 최초로 방송국을 개국하여 전국의 방송송출 확정지역을 중심으로 24시간 증산도 진리방송을 송출하고 있습니다.

증산도의 진리를 TV 방송을 통하여 만날 수 있으며, 아직 송출이 안되는 곳은 인터넷 방송으로 증산도의 진리를 쉽게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증산도에서 발행하는 매월 발행하는 월간지 신앙문화를 통해서 더욱 자세하게 증산도 신앙문화를 밝히겠습니다.

이로써 새 희망의 빛, 증산도의 개벽문화를 바르게 아시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증산도 신앙예법]

나이드신 분은 어린시절 할머니, 어머니가 장독대에 맑은 물을 떠놓고 누군가를 향해 두손을 모아 빌며 정성 드리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수천 년을 내려온 우리 민족 고유의 신교神敎 신앙의 전통입니다.
 
신교의 맥을 잇는 증산도의 대표적인 신앙문화는 청수淸水를 모시고 태을주太乙呪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산도 신앙의 표상입니다.
증산도 신앙인은 천지부모이신 상제님 태모님을 비롯하여, 조화정부의 대성신 그리고 가깝게는 자신의 조상 선영신께 청수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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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들의 슬기가 담긴 생활도구 알려주세요ㅠ 사진도 같이 올려주시고요..자세하게 해주세요! 흔한거 말고 우리가 잘 모르는 그런거..를 알려주세요 ㅎㅎ 내공!!100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여가생활에 대한한것좀...

우리 조상들의 여가생활에 대한것 뭐예요?좀 알려 주세요. 제가..지금 급하거든요?;; 최대한 빨리 답변 주세요..네? 내공 겁니다.. ※조상들의 여가 생활의 종류※ ①그네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