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영총 벽화
5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고분의 하나인 쌍영총의 벽화 '말탄 무사'이다. 통로에 2개의 커다란 8각 기둥이 세워져 있어 '쌍영총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평안 남도 남포시 용강군 용강읍에 있다. '말탄 무사'는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장군총
중국 지린 성(길림성) 지안 현 퉁거우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돌무지무덤(적성총)이다. 광개토 대왕이나 광개토 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광개토 대왕비
장수왕 2년(414)에 19대 임금인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광개토 대왕의 정복 활동이 적혀 있으며,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중국 지린 성 지안 현 퉁거우에 있다 아마 장군총과 같이 세워진것으로 추정 되고 있다.
무용총 벽화
(아닐 수도..)
5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고분의 하나인 무용총의 벽화이다.
사슴과 호랑이를 사냥하는 고구려인의 씩씩한 기상이 엿보이는 '수렵도' 로, 중국 지린 성 지안 현 여산 남쪽 기슭에 있다.
청룡도
지안 4호분 벽화.
긴 꼬리가 둘인 청룡이 가로질렀고 용머리위쪽에 날개깃을 단 신선이 연꽃을 타고 있다. 거침없이 유창한 선과 화려한 색채가어우러진 그림이다.
나는 용과 변화를 이룬 연화무늬들이 조화를 이루어 강한 생동감을 주고 있으며,
널방 내 벽화면의 전(全) 공간을 대담하게 구성하고 있다.
다채로운색조와 자유분방한 창조력이 비범하며, 조형기법이 고구려벽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데, 벽화의 양식화한 연속문양 또한 특이하다.
구의동유적
구의동유적는 서울시 성동구 구의동의 해발 53m 정도의 구릉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유적은 화양지구 토지 구획정리 사업으로 인해 1977년 발굴 조사된 후 파괴되어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유적은 직경 14.8m, 둘레 46m 정도의 석축을 쌓고 그 내부에 직경 7.6m 의 수혈을 파고 건조물을 세운 형태이다. 석축부에는 두 개의 치가 구축되어 있으며, 수혈 내부에는 벽체를 따라 22개의 柱孔과 배수시설 및 온돌이 확인되었다. 수혈의 중심부에는 폭1.5m 깊이 2.3m 정도의 집수시설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400여점 달하는 고구려토기와 1천여 점 이상의 철제 화살촉과 무기류가 출토되었다.
정립회관 배수장 유적
성동구 광장동 산 383번지 정립회관 남쪽 해발 104m의 구릉 정상부에 있었다. 이곳은 홍련봉1보루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200m 거리이며 구의동 유적과는 2km 정도의 거리이다. 구릉의 정상부는 평탄하게 삭토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정립회관의 배수지가 설치되어 있고 남서쪽에는 군사용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고구려 토기편은 경사진 곳에 쌓인 흙더미 속에서 여러 점이 발견되었으며, 유구는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홍련봉 1보루
성동구 광장동 아차산 유원지 입구 남쪽에 있는 해발 116m 내외의 구릉 정상부에 있다. 이 구릉은 북서-남동향으로 길쭉하고 가운데가 잘록하여 마치 표주박을 엎어놓은 것 같은데 원지명은 紅蓮峰이다. 이 구릉에는 각 봉우리마다 하나씩 고구려유적이 있다. 동남쪽의 유적은 정상부가 평탄하게 삭토되고 주위를 돌아가며 둘레 147m 정도의 타원형 토루가 형성되어 있으며, 토루 안쪽은 우묵하게 파여 있다. 남동쪽에는 문지두리석으로 보이는 홈이 파인 석재가 놓여 있다. 유물은 유적 동남쪽 토루 윗부분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토기편과 함께 아차산 일대에서는 유일하게 고구려기와가 출토되고 있다.
홍련봉 2보루
홍련봉 1보루에서 북서쪽으로 100m 거리에 있다. 삭토 되어 평탄하게 된 구릉의 정상부를 외곽을 돌아가며 쌓은 장타원형의 토루가 있다. 토루의 둘레는 169m 정도이며 흙에 덮여 있으나 부분적으로 3∼4단 정도의 석축이 노출되어 있다. 토루의 내부 높이 2m 정도의 단이 져있으며 낮은 곳에는 민묘가 조성되어 있다. 고구려토기는 북동쪽의 고대지에서 주로 발견된다.
아차산 1보루
아차산성에서 능선을 따라 북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700m 정도 거리의 해발 250m의 봉우리에 위치한다. 이곳은 기원정사 뒤편에서 시작된 석축 구조물이 산 복부를 타고 올라와 아차산의 주능선과 만나는 지점이다. 유적은 능선의 방향을 따라 장축이 북동-남서향인 장타원형의 토루 형태이다. 토루는 둘레가 91m, 안쪽에서의 높이는 1.5m, 하단부의 폭은 6m 정도이다. 마치 작은 평지토성을 연상하게 하는 이 구조물은 토루의 외곽 일부에 3∼4단 정도의 석축이 노출되어 있어 토루처럼 보이는 속에 석축 시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유물은 대부분 토기편으로 흑색마연의 동이류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황갈색이나 홍갈색의 연질토기들도 많이 발견된다.
아차산 2보루
구리시 교문동의 대성암 뒤편 해발 276m 지점의 소봉 정상부에 있다. 이곳에서는 미사리 암사동 등 한강 일대를 조망하기 매우 용이하고 유적의 동쪽 하단부에는 암벽이 형성되어 있어 방어에 매우 용이한 곳이다. 보루는 소봉의 정상부를 돌아가며 쌓인 석축부와 그 안쪽의 소토부로 구분이 된다. 직경 15m 정도인 원형의 석축부는 현재 3단 정도가 노출되어 있다. 석축 시설의 남쪽 부분에는 길이 1.6m, 폭 1.2m 의 방형 돌출부가 있으며 그 윗분에는 후대에 조성된 돌무더기가 쌓여있다. 또한 석축부의 안쪽에는 적갈색의 소토층이 노출되어 있다. 소토층 속과 주변에서는 고구려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아차산 3보루
아차산 2보루에서 서북쪽으로 약 200m 정도 거리에 있다. 이곳은 아차산의 주능선 상으로 능선이 한차례 낮아졌다가 높아지며 해발 296.9m를 정상부로 하며 길쭉하고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 소봉의 정상부를 돌아가며 보루가 형성되어 있다. 이 유적은 몇 년 전에 들어선 국민체육시설이 들어서면서 상당 부분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그네와 의자 등이 설치되어 있다. 유구는 평탄한 구릉 정상부를 돌아가면서 석축 시설을 한 것으로 보이며 북쪽 경계지점을 정확하게 확인하기가 어렵지만 둘레는 대략 110m 정도이다. 석축 시설은 유구의 남쪽 부분에 일부 노출되어 있으나 대부분은 흙에 덮여 있다. 유구의 남쪽부분에서 고구려 토기편들이 발견된다.
아차산 3보루에서 북쪽으로 400m 정도 거리에 있다. 이곳은 아차산의 주능선으로 용마봉으로 건너가기 직전 마지막 봉우리로서 해발 285m지점으로서 길쭉한 소봉의 정상부 북쪽에는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 보루는 1997년과 1998년에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전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유적은 외곽의 석축성벽과 내부의 건물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타원형을 이루는 성벽은 둘레 210m, 높이 4m 정도이며 동쪽과 서쪽에 각 1개소의 치가 조사되었다. 성벽 안쪽의 평탄면에는 모두 7기의 건물이 축조되어 있으며, 건물 내부에는 1기 이상의 온돌이 설치되었다. 그중 규모가 가장 큰 3호 건물지의 경우 3칸의 온돌방과 2기의 집수시설 및 배수시설이 설치되어있으며, 그밖에 3호건물지 북서쪽 모서리 외곽에 간이대장간 시설도 1기가 설치되었다. 저수시설은 2기가 확인되었는데 풍화암반토를 파내고 바닥과 벽에 뻘을 발라 방수처리를 한 후 통나무를 직각으로 연결하여 뻘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 온돌은 모두 13기가 조사되었으며 2호 온돌을 제외하면 모두 건물 내부에서 확인되고 있어 취사와 난방을 주요목적으로 한 시설임을 알 수 있다.
4보루에서는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토기류는 모두 26개 기종 538개체분이 출토되었다. 기능상 저장용기, 운반용기, 조리용기, 배식용기로 구분된다. 철기류는 총319점이 출토되었는데 무기류, 마구류, 농공구류, 용기류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백제 문화제 입니다.
1.정림사지 오층석탑
종 목 국보 제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379
시 대 백제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2.익산 미륵사지 석탑
종 목 국보 제1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
시 대 백제
백제 최대의 절이었던 익산 미륵사터에 있는 탑으로,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하여 아쉽게도 반쪽탑의 형태만 남아 있다. 현재는 6층까지만 남아 있으며, 정확한 층수는 알 수 없다.
기단은 목탑과 같이 낮은 1단을 이루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각 면마다 3칸씩을 나누고 가운데칸에 문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내부가 통하게 만들었으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웠다. 1층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세웠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목조건축의 배흘림기법을 따르고 있다. 기둥 위에도 목조건축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재료인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본떠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살짝 치켜 올려져 있다. 2층부터는 탑신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화되며, 지붕돌도 1층보다 너비가 줄어들 뿐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백제 말 무왕(재위 600∼641)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반쯤 무너진 곳을 시멘트로 발라놓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으나,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탑으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3.서산 마애삼존불상
종 목 국보 제84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2-10
시 대 백제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앞쪽에 나무로 집을 달아 만든 마애석굴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불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4.익산 연동리 석불좌상
종 목 보물 제4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산220-2
시 대 백제
이 불상은 머리만 없어졌을 뿐 불신, 대좌, 광배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백제의 작품이다. 지금의 머리는 요즘 새로 만든 것이며, 불상의 현 신체 높이는 156㎝이다.
당당한 어깨, 균형잡힌 몸매, 넓은 하체 등에서 서툰 듯 하면서도 탄력적이고 우아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자락은 길게 내려져서 사각형의 대좌를 덮고 있는데, 앞자락은 U자형, 좌우로는 Ω형의 주름이 대칭으로 2단씩 표현되어 있다. 왼손은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세번째와 네번째 손가락을 구부려 다리에 올려놓은 특이한 손모양을 하고 있다.
광배의 중앙에는 둥근 머리광배가 볼록 나와있고 그 안에 16개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바깥에는 방사선으로 퍼진 특징이 있다. 몸광배도 볼록하게 나와있고 바깥부분에는 불꽃무늬를 배경으로 7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이 석불상은 대좌의 모습과 광배에 새겨진 무늬를 볼 때 장중하면서도 세련된 특징을 보여주는 600년경의 희귀한 백제시대 불상으로 그 의의가 높다.
5.부여 성흥산성
종 목 사적 제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산1-1
시 대 백제
성흥산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이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이 가림군이었으므로 가림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성의 형태는 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테뫼식으로,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 안에는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 3곳과 돌로 쌓았던 방어시설인 보루가 남아있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드리는 사당이 있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6.공주 송산리고분군
종 목 사적 제1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5-1
시 대 백제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웅진 백제시대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이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이 일대의 고분들은 모두 7기가 전해지는데, 송산을 주산으로 뻗은 구릉 중턱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 ·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6호분은 일제시대에 조사되어 고분의 구조와 형식이 밝혀졌고, 무령왕릉은 1971년 5 ·6호분의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먼저 1∼5호분은 모두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무덤 입구에서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널방(현실)에 이르는 널길이 널방 동쪽벽에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4호분은 바닥에 냇자갈을 깔아 널받침(관대)을 만들었는데, 5호분은 벽돌을 이용하였다. 이처럼 같은 양식의 무덤이면서 구조와 규모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시기 차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5호분은 원형으로 남아 있으나, 1∼4호분은 조사되기 전에 이미 도굴되었다. 이외에 벽돌무덤(전축분)으로 송산리벽화고분이라고도 불리는 6호분과 무령왕릉이 있다.
6호분은 활모양 천장으로 된 이중 널길과 긴 네모형의 널방으로 되어 있는데, 오수전이 새겨진 벽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널방 벽에는 7개의 등자리와 사신도 · 일월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무령왕릉도 6호분과 같이 연꽃무늬 벽돌로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반복하여 벽을 쌓았다. 벽에는 5개의 등자리가 있고, 무덤주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지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현재 남아있는 백제의 벽돌무덤으로, 모두 터널형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가지고 있으며 긴 배수로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벽돌무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벽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령왕릉의 경우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어, 백제사회의 사회 ·문화상을 연구하는데 절대자료로 평가된다.
7.익산쌍릉
종 목 사적 제8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익산시 석왕동 산55, 산56
시 대 백제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무덤으로, 남북으로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 쌍릉이라고 부른다.
무덤 안의 구조는 백제 후기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이며, 무덤의 봉분과 돌방의 크기가 큰 북쪽의 것을 대왕묘라 하고, 남쪽의 작은 것을 소왕묘라고 부른다. 크기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2기 모두 원형의 봉토무덤으로 흙을 높이 쌓아 만든 봉분 이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다.
1916년 조사할 당시 무덤은 이미 도굴이 되어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대왕묘 안에서 나무로 만든 관이 일부 발견되어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나무관은 바닥면보다 위쪽 면이 약간 넓고, 뚜껑의 윗면이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관고리에는 8쪽의 꽃잎을 가진 연꽃무늬가 있었던 것도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없지만 무덤 안의 구조로 보아 백제 후기의 것이 틀림없으며, 근처에 미륵사가 있어서 미륵사를 처음 만든 백제의 무왕과 그 왕비인 선화공주의 무덤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으나, 뚜렷한 증거는 없다.
8.증산성
종 목 사적 제156호
지 정 일 1967.03.25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성리 산86
시 대 백제
흰 돌을 사용하여 쌓은 성이 마치 시루를 올려놓고 시루테를 바른 듯 하다고 하여 시루메산성이라고도 부르는 백제 산성이다.
성왕 16년(538)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나서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둘레는 약 600m이고 높이는 2∼3m 정도로 거의 무너진 상태이지만, 성의 남쪽부분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서쪽·남쪽·북쪽에 각각 문이 있던 흔적이 남아있다. 성벽은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쌓았지만 다른 성에 비하면 정교하지 못한 편이다. 성 안에는 백제토기와 기와조각이 많이 남아 있으며 동쪽에는 우물터가 있다. 은산면에 있는 이중산성·서쪽의 옥녀봉산성과 서로 바라 보면서 연결 되어있다.
증산성은 신라 문무왕 12년(672) 정월에 백제 고성성을 쳐서 이겼다는 기록에서 나타나는 고성성으로도 여겨지이며, 백제 부흥운동군의 한 거점으로도 여겨지는 중요한 산성이다.
9.파사성
종 목 사적 제251호
지 정 일 1977.07.21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 산8-10
시 대 백제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약 1800m이며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신라 파사왕(재위 80∼112) 때 만든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승려 의암이 승군을 모아 성을 늘려 쌓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남한산성에 대한 비중이 증가하여 파사성에 대한 중요성이 감소하였다. 현재는 동문이 있던 자리와 남문이 있던 터가 남아있다.
이 성은 성의 일부가 한강변에 나와있어 강 줄기를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상대를 제압하기 매우 좋은 요새이다.
10.몽촌토성
종 목 사적 제297호
지 정 일 1982.07.22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오륜동 88-3
시 대 백제
한강의 지류인 성내천 남쪽에 있으며, 둘레가 약 2.7㎞ 되는 백제 전기의 토성이다.
자연 지형을 이용해 진흙으로 성벽을 쌓고, 나무 울타리로 목책을 세웠던 흔적도 확인되었다. 자연 암반층을 급경사로 깎아 만들기도 하였으며, 성을 둘러싼 물길인 해자도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문터와 집자리, 저장용 구덩이가 확인되었고, 출토유물로는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과 여러 종류의 토기류, 철제 무기류 등이 나왔다. 특히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은 중국 서진(265∼316)대의 유물이어서 시대 확인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백제의 도성인 위례성이라는 견해와 방어용 성이라는 견해가 있다. 위치·규모·출토유물로 볼 때 백제 초기 군사적·문화적 성격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유적이며, 주변에 풍납토성과 백제 석촌동 무덤들을 비롯한 백제 전기의 유적이 있어 역사적으로도 가치있는 곳이다.
11.이천 설봉산성
종 목 사적 제423호
지 정 일 2000.09.16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사음동 산 24번지외
시 대 백제
설봉산은 이천의 진산으로, 이 산의 7∼8부 능선, 속칭 칼바위를 중심으로 한 약 3만여 평에 달하는 고원지대가 바로 옛 산성터이다.
계곡을 감싸안고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은 대부분 흙으로 쌓았으나 돌로 쌓은 석축도 군데군데 있다. 석축은 대부분 무너져 내렸거나 매몰되고 있는데, 아직도 정상 아래 부분에는 3∼10m의 석축의 흔적이 뚜렷한 형태로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이 일대에서는 석축·석편·토기편은 물론, 건물터 임을 알리는 정면 9m, 측면 6.30m의 인공 주춧돌 9개가 정연히 배치되어 있어, 이 곳이 웅장한 규모의 삼국시대 산성터 임을 알려 준다. 정상 밑 서쪽 능선 평평한 부분에는 주춧돌이 원형대로 남아 있어 장대지로 추정되며, 군기를 꽂았던 홈을 판 바위와 돌싸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돌무더기도 3곳 남아 있다. 또 산성의 필수요건인 우물터 2곳, 수구와 인접한 북문의 흔적도 남아 있다.
축성연대는 대략 고구려가 백제를 쳐서 한강 이남을 점유하고 이 곳에 처음으로 남천현을 설치한 고구려 장수왕 63년(475)에서 신라·백제세력이 이 곳을 다시 수복하던 신라 진흥왕 12년(551)사이에 고구려군이 쌓은 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산의 정상에 서면 주변 지역이 한눈에 들어와, 삼국시대부터 치열한 세력 다툼이 있었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대의 역할을 하였던 성으로 여겨진다.
12.논산 노성산성
종 목 사적 제393호
지 정 일 1995.08.02
소 재 지 충남 논산시 노성면 송당리 산1-1외 13필지
시 대 백제
백제 때 산 정상부분을 돌로 둘러쌓아 만든 테뫼식 산성이다.
산 지형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거의 완벽하게 쌓았고 동쪽면, 북쪽면, 서쪽면은 돌을 네모 모양으로 다듬어 쌓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성 둘레는 590m, 높이 2.4m이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는 장수의 지휘대로 보이는 터(장대지)가 있으며 동쪽벽으로 조금 내려오면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로 보이는 곳이 있다. 성 안에는 4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도 사용하고 있고 토기, 기와같은 여러 유물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연산에 있는 황산성과 함께 백제와 신라가 서로 마주했던 마지막 방어지에 해당하는 산성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사용한 주요 방어지역이었던 곳이다.
신라의 내력
신라는 경주지방의 사로국에서 발전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는 박혁거세에 의해
건국되었다. 신라는 4세기 후반에 이르러 나라의 기틀이 완전히 잡혔다.
그리고 6세기 초부터 많은 발전이 거듭되었다. 신라는 진흥왕 때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영토가 넓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통일의 분위기로 이어졌다.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루어냈고 통일 신라 시대를 맞아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다가 935년 말기의 어지러운 사회를 맞아 고려에 합병되었다.
신라의 문화재
성덕대왕 신종
국보 29호 : 시대 : 771년 :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 최대의 종으로, 에밀레종 또는 봉덕사(奉德寺)에 달았기 때문에 봉덕사종이라고도 한다.
경주임해전지(사적 제18호)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국유 연못)를 대표하는 유적.
경주 첨성대(국보 제31호)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높이는 9.17m.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경주포석정지(사적 제1호)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
신라태종무열왕릉비(국보25호)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
김유신묘(사적21호)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
문무대왕릉(사적158호)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
불국사 다보탑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0.4m, 기단 폭 4.4m이다. 불국사 대웅전 앞 서쪽의 석가탑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탑으로, 전형적인 쌍탑가람의 배치이다
불국사 3층석탑
국보 21호: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진 두 탑 중 서쪽에 있는 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며 흔히 줄여서 '석가탑'이라고도 한다.
석굴암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석불사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신라의 인물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원효
이 무늬 벽돌은 보상화문전으로 발해 상경 용천부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 꽃무늬 벽돌은 장방형의 부전돌로 중심에 중판양식의 연꽃무늬를 배치하고 그 둘레에 연화당초무늬를 새겼다. 단순하면서도 굵은 선묘를 살린 강건하고 소박한 무늬형태를 표현하고 있다. 이 무늬 벽돌은 발해에서 가장 성행한 무늬전돌로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보다 부드러워졌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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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무늬벽돌
드라마 '대조영'을 통해 잘 알려지게 된 발해사는 한국사에서 잊혀져 왔던 역사였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은 잘 알아도 발해사를 아는 이는 적었다. 발해가 고구려 앞인지 뒤인지 묻는 이도 적지 않다. 발해국은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30년만에 고구려인들이 살던 곳에 세워진 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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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가 꽃을 피웠음을 보여주는 6m 높이의 발해 대형 석등(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시 발해진 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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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228년간 유지되었던 왕조로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한국사에서 신라가 992년(B.C.57~935)이나 왕조를 지켰고,고구려도 705년(B.C.37~668),백제가 681년(B.C.18~663),가야는 490년(42~532),고려가 474년(918~1392),조선이 518년(1392~1910) 동안 국가로서 존재했다. 그에 비하면 발해는 단명한 왕조였다.
하지만 중국과 만주지역 왕조에 비해서는 결코 단명한 왕조가 아니었다. 중국을 통일한 진(秦)은 겨우 14년(B.C.221∼B.C.207)동안 존재했을 뿐이다. 수(隋)나라도 37년(581∼618)만에 망했고,유럽인들에게 '황화(黃禍)' 즉 '황인종의 공포(Yellow Terror)'로 천하를 떨게 한 원(元)나라도 고작 97년(1271∼1368)을 버티지 못했다. 발해보다 장수했던 왕조로는 한,당,명,청 뿐이었다. 그마저 한(漢)이 230년(B.C.206~24),당(唐)이 289년(618~907),명(明)과 청(淸)이 각각 294년(1368~1662)과 295년(1616~1911)을 지속했을 뿐이다. 발해는 결코 단명했다고 할 수 없다. 많은 역사와 문화를 남긴 명실상부한 '해동성국'이었다.
영토에 있어서도 발해는 고구려에 비해 1.5배 그리고 (통일)신라에 비해서는 4배 정도에 해당하는 광대한 영역을 갖고 있었다. 영역을 고구려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된 것은 5경 15부 62주라는 지방행정제도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기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발해사를 보는 시각은 남북한과 중국,러시아가 각각 상당한 차이를 갖고 있다. 쟁점은 발해가 과연 자주적인 왕조였는가 그렇지 않고 중국의 주장처럼 '당나라 지방정권'이었는가 하는 점이 첫째이고,다음으로는 발해의 역사적 계승관계와 종족의 뿌리에 관한 것이다.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모두 발해국의 자주성을 인정한다. '당나라 지방정권'설의 핵심은 '책봉'을 당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고구려와 발해를 비롯하여 신라와 백제,왜 등이 모두 당 중심의 국제질서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책봉'이란 외교적 승인행위 이외의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이 상식이다. '당나라 지방정권'이라는 말은 '중국사'라는 말과도 통한다. 그렇다면 고구려,백제,신라의 옛 땅에서 현대사가 이어오는 남북한과 왜의 일본까지도 중국사의 범주가 된다.
'신당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발해는 '사사로이' 연호와 시호를 사용하였는가 하면,그들의 왕이 황제를 자칭했고 당나라를 군사적으로 공격할 정도로 자주적이었다. 고구려도 천손의식을 갖고 있던 왕조였으며 수나라를 멸망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도대체 705년 동안 '지방정권'이 변함이 없음에도 '중앙 왕조'가 35회나 바뀌었겠는가 하는 점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발해국의 역사적 주민구성과 역사적 계승관계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남북한학자들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로서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시각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고구려가 아닌 '말갈(靺鞨)'인들로 구성된 발해이자 말갈인들에 의해 건국된 왕조로 보고 있다. 대조영도 '신당서'에 의거해서 고구려 장수가 아닌 '속말말갈(粟末靺鞨)'장수였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중국학자들 일부는 발해 건국 직후의 국호를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이 되었다거나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불렀다'는 '구당서'와 '신당서' 기록을 무시하고 발해는 처음부터 국호를 '말갈(靺鞨)'이라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말갈이란 고구려 변두리 사람들을 깔보아 부르던 비칭(卑稱)이자 당나라 동북방 주민들을 통털어 부르던 종족명이었다.
일본에서는 발해를 '말갈국'으로 보기도 하고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그들과 다른 말갈'이라는 두 견해가 있지만 후자가 우세하며,한국에도 영향을 미쳐 교과서에까지 채용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의 '조선사개설' 등에서 발해를 '통일신라와 발해' 편목에 정식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은 중국과 다르며 한국과 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도 발해국의 자주성은 인정한다. 다만 발해국이 말갈인들이 세운 중세국가였다는 점이 중국과 통한다. 발해는 중국사도 한국사도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한·러 간에 공동으로 발해유적이 발굴되면서 고구려적 요소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기본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어떻든 발해사의 진실파악이 학문외적 문제에 얽혀 있다는 것은 앞으로의 숙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준다.
중국이 이른바 '동북공정'을 실시한 것은 북한 소재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문화유산 신청에 자극받아 급작스럽게 수립된 것이었다.
그러나 고구려·발해 지역에 대한 '역사침탈' 작전은 이미 1980년부터 이미 진행되어 오던 것이었다. 이보다 우선적으로 티베트에 대한 '서남공정'과 신장지역에 대한 '서북공정' 등이 진행되었지만 중국사회과학원 민족연구소와 변강사지연구중심 등에서 소수민족 조선족의 고대사도 중국사화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었다. 그 첫 대상은 기록이 엉성한 발해였다.
80년대부터 소수민족사의 중국사화 정책이 강화되면서 발해사는 그들의 교과서에 이미 '당나라 지방정권' 즉 중국사가 되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고구려본기를 갖고 있는 고구려사 만큼은 보류되어 오다가 '동북공정'에 이르러 이것이 공식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가 빠지게 되었고 중국 내 주요 고구려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해 중국사의 일부로 선전하게 됐다.
고구려나 발해사의 자주성을 근거로 생각할 때 중국의 터무니없는 '당나라 지방정권'설은 '역사왜곡'이 아닌 '역사침탈'로 규정할 수 있다. 동북공정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연구 주제들은 인접국과의 국경문제와 인접국의 정세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정치적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우려하는 것 중의 하나는 북한정권의 변화에 따라 북한점령의 역사적 명분을 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이다. 평양수도의 고구려사도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주장은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과 동아시아인들의 상식을 무너뜨리는 논리이다.
2007년 1월을 기해 '동북공정' 프로젝트는 끝이 났다. 그러나 중국의 이러한 주장과 정책은 변함이 없다. 오히려 더욱 자신감을 갖고 지린성과 헤이룽장성,랴오닝성 정부는 고구려와 발해사의 중국사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역사가들은 학자가 아닌 역사전략가가 되어가고 있다.
동아시아 각국이 '국사' 책을 버리고 '동아시아사' 교과서에 고구려,백제,신라,발해 나아가 수·당과 요·금사를 비롯해서 왜와 일본사를 언급하는 것이 더 학문적이라는 국사해체론은 그런 의미에서 신선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중국사나 일본사가 전보다 패권적이고 우경화되고 있는 입장에서 이러한 주장은 너무 낭만적이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평화나 미래학의 입장에 있는 이러한 주장들은 사실에 바탕하고 있다기보다 정치적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은 그것이 비록 현대 국가사에 있어서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할지라도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동아시아의 평화는 역사를 조작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변천과정을 이해하면서 지혜와 화합을 모아갈 때에 얻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