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 경주 한양 웅진 부여의 유물은 뭔가요?

개경 경주 한양 웅진 부여의 유물은 뭔가요?

작성일 2007.10.02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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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시험을 보려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시험에 나올까 걱정되서

 

글을 올렸습니다 제발 빨리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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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1.만월대:

 ● 개성의 송악산 기슭에 있는 고려 시대의 왕궁터로 지금은 건물

이 모두 없어지고 받침돌만 남아 있다.

 ● 만월대의 가장 큰 풍수적 특징은 건물을 배치할 때 인위적으로

균형을 잡으려 하지 않고 자연 지형의 흐름을 따르려 했다는

것이다.

 

2.선죽교:

 ● 개성 선죽동에 있는 돌로 만든 다리이다.

 ●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이방원의 부하들에게 죽음을 당한 곳으로,

비가 오면 핏자국이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다.

 

3.개성 남대문:

 ● 조선 시대 태조 때 세운 성문이다.

 ● 단층 누각으로 날아갈 듯 쳐든 추녀가 목조 건축의 아름다움

을 잘 보여 준다,

 

경주.

김유신묘 / 사적   21호 / 통일신라 문무왕

경주시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

 

불국사 / 명승 및 사적 제1호 / 통일인라 경덕왕 10년(751)

경북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기슭에 있는 절.

불국사는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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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다보탑 / 국보 20호 / 통일신라시대    불국사삼층석탑 / 국보   21호 / 통일신라시대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 badtag filtered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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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연화교칠보교 / 국보   22호 / 통일신라시대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 badtag filtered -->대웅전<!-- badtag filtered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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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첨성대 / 국보   31호 / 신라시대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내물왕릉과 가깝게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는 9.17m이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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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석굴 / 국보   24호 / 통일신라시대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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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삼층석탑 / 보물   911호 / 통일신라시대 후기

석굴암에서 동북쪽으로 약 150m 지점 언덕에 서 있는 탑


천마총 /

경주 고분 제155호 무덤으로 불리던 것을 1973년 발굴을 통해 금관, 팔찌 등 많은 유물과 함께 천마도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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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금관 / 국보   188호 / 신라시대

천마총에서 발견된 신라 때 금관으로 묻힌 사람이 쓴 채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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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제과대및요패 / 국보   190호 / 신라시대

천마총에서 발견된 신라 때 허리띠로 이 허리띠는 널 안에서 허리에 착용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감은사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당시 틈만 나면 동해로 쳐들어 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세운 절로, 문무왕은 생전에 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인 682년에 완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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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삼층석탑 / 국보   112호 / 통일신라시대 초기

감은사터 넓은 앞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이다.

경주에 있는 3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실로 한국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분황사 석탑(국보 제30호)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돌을 벽돌같은 크기로 다듬어 쌓은 탑)'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음.

 


- 문무대왕릉(사적158호)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

 

 한양. 

 

한양의 특징: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농사를 짓는데 아주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강이 흐르고 넓은 평야도 있다.

1.숭례문(남대문)
종 목 국보 제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있는 곳)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서울 도성을 둘써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 남쪽에 있다하여 남대문이라고 불
림.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에 지어 세종 29년에
 고쳐지은 것.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뒀다.

2.경복궁 
종목사적제11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있는 곳)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

3.창경궁

종 목 사적 제123호
지 정 일 1963.01.18
소 재 지(있는 곳)  서울 종로구 와룡동 2-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궁궐로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건물.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다.

4.종묘

종 목 사적 제125호
지 정 일 1963.01.18
소 재 지(있는 곳)  서울 종로구 훈정동 1-2
시 대 조선시대
종묘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
는 사당.
종묘는 본래의 건물인 정전과 별도의 사당인 영녕전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건물이 있다.

5.창덕궁(비원 포함)
종 목 사적 제122호
지 정 일 1963.01.18
소 재 지(있는 곳)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
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
를 입는 경우도 많았다.

6.덕수궁
종 목 사적 제124호
지 정 일 1963.01.18
소 재 지(있는 곳)  서울 중구 정동 5-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
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7.경희궁지
종 목 사적 제271호
지 정 일 1980.09.16
소 재 지(있는 곳)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1-126
시 대 조선시대
원종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 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
부속건물로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학문, 황학정이 있었다.
융복전과 집경당은 없어졌다.
나머지 건물은 1910년 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
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학교 안으로, 흥화문은 박
문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각각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웅진.

계유명삼존천불비상

국보 제108호

문화재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통일신라시대

 

 

금제관식(왕)

국보 제154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관식(왕비)

국보 제155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심엽형이식(왕)

국보 제156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수식부이식(왕비)

국보 제157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금제경식(왕비)

국보 제158호

문화재지정일 : 1974년 7월 9일

소재지 :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기타 : 백제시대

 

부여.

1.성흥산성

 

종 목 사적 제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산1-1

시 대 백제

 

 성흥산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石城)이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이 가림군이었으므로 가림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성의 형태는 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테뫼식으로,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 안에는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 3곳과 돌로 쌓았던 방어시설인 보루가 남아있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드리는 사당이 있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2.부소산성

 

종 목 사적 제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시 대 삼국시대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비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3.능산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1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15

시 대 백제

 

 부여 능산리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 무덤들이다. 무덤은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 전부터 왕릉으로 알려져 왔던 곳으로 일제시대에 1∼6호 무덤까지 조사되어 내부구조가 자세히 밝혀졌고, 7호 무덤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고분의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었다.

 

내부구조와 재료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호 무덤(동하총)은 네모형의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진 단실무덤으로 널길은 비교적 길고 밖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나팔형이다.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는 각각 사신도와 연꽃무늬, 그리고 구름무늬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2호 무덤(중하총)은 무령왕릉과 같이 천장이 터널식으로 되어 있으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3호 무덤(서하총)·4호 무덤(서상총)은 천장을 반쯤 뉘어 비스듬히 만든 후 판석을 덮은 평사천장이고 짧은 널길을 가졌다. 이 형식은 부여지방에 많으며 최후까지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능산리 무덤들은 일찍이 도굴되어 두개골 파편·도칠목관편·금동투조식금구·금동화형좌금구 등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다. 최근 무덤들 서쪽에서 절터가 발굴되어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인해서 능산리 무덤들이 왕실 무덤지역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4.궁남지

 

종 목 사적 제135호

지 정 일 1964.06.10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

시 대 삼국시대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였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방장선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로와 물가·연못 속의 섬이 어떤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못의 중앙부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있어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연못의 규모 또한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당시에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뿐이다.

 

고대 중국사람들은 동해바다 한가운데에 일종의 이상향인 신선이 사는 3개의 섬으로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하여, 정원의 연못 안에 삼신산을 꾸미고 불로장수를 희망했다고 한다. 궁남지는 이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선정원이라 불린다.

 

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남아 있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있고, 연못 안에는 정자와 목조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5.정림사지

 

종 목 사적 제301호

지 정 일 1983.03.26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시 대 백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조각 중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절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3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6.정암리 와요지

 

종 목 사적 제373호

지 정 일 1992.05.04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양길면 정암리 47외

시 대 백제

 

 부여 백마강 건너 야산 남쪽 비탈에 있는 백제 가마터이다.

 

백제 가마 11기와 고려시대의 가마 1기가 조사되었다. 가마는 풍화된 화강암반을 파고 들어가 만든 지하식 가마이며 천장을 제외하고는 완전하게 남아있다. 출토 유물은 연꽃무늬 수막새, 상자형 전돌, 토기, 각종 기와 등이 있다. 연꽃무늬 와당은 군수리와 동남리에서 나온 와당과 비슷해, 이곳에서 기와를 구워 부여의 주요 건물에 공급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6세기 후반∼7세기전반) 가마터로서 그 모습이 잘 남아 있어 백제가마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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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유적과 유물

1.서울 숭례문 

 

 

종 목 국보 제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2.원각사지십층석탑

 

 

종 목 국보 제2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시 대 조선시대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3.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종 목 국보 제3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신라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4.서울흥인지문

 

 

종 목 보물 제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

시 대 조선시대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5.서울보신각종

 

 

종 목 보물 제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1985년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칠 때 사용되었다.

 

조선 세조 14년(1468) 만들어 신덕왕후정릉 안에 있는 정릉사에 있었으나, 그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로 옮겨졌고 임진왜란 이후 종루에 보관했다. 고종 32년(1895)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종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서 보관 중이다.

 

총 높이 3.18m, 입 지름 2.28m, 무게 19.66톤의 큰 종이며,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종 형태를 하고 있다.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종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부분에서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중간 지점부터 입구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 있다. 몸통에는 3줄의 굵은 띠를, 종 입구 위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2줄의 띠를 두르고 있고, 종의 연대를 알 수 있는 긴 문장의 글이 있다.

 

이 종은 2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원형에 손상을 입고, 음향도 다소 변했으나 명문(銘文)이 남아있어 주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6.대원각사비

 

 

종 목 보물 제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탑골공원

시 대 조선시대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서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절로 세웠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원각경 』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3층 사리탑을 세웠다.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돌 위를 두 마리의 용이 감싸듯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둔중한 몸체로 머리는 목을 표현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다. 등무늬는 육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평행세선을 새겼으며, 등 중앙에는 연잎조각을, 꼬리와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을 조각해 놓아 조선시대 조각미의 독특한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몸돌 위로는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었으며, 조각 아래의 가운데에는 ‘대원각사지비 ’라는 비의 이름이 강희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 성임,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

 

7.서울동묘

 

 

종 목 보물 제14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숭인동 238-1

시 대 조선시대

 

 서울 흥인지문(보물 제1호) 밖에 있는 동묘는 중국 촉한의 유명한 장군인 관우에게 제사지내는 묘로서 원래 명칭은 동관왕묘이다. 동묘를 짓게 된 이유는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성스러운 관우 장군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서 인데, 명나라의 왕이 직접 액자를 써서 보내와 공사가 이루어졌다.

 

동묘는 선조 32년(1599)에 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601년에 완성되었다. 현재 건물 안에는 관우의 목조상과 그의 친족인 관평, 주창 등 4명의 상을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6칸이고 지붕은 T자형의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지붕 무게를 받치는 장식은 새의 부리처럼 뻗어 나오는 익공계 양식이다.

 

평면상의 특징은 앞뒤로 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과 옆면과 뒷면의 벽을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다. 또한 건물 안쪽에는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데, 이와 같은 특징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국의 다른 건축들과 비교해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8.경복궁

 

 

종 목 사적 제11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현재 궁궐 안에 남아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숙향당·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정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조후침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정궁의 모습을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9.서울성곽

 

 

종 목 사적 제1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누상동 산1-3외

시 대 조선시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이다.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10.광주풍납리토성

 

 

종 목 사적 제1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풍납동 72-1외

시 대 삼국시대

 

 한강변에 남아있는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부른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 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 가량 남아있다.

 

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이다. 성벽은 돌이 없는 평야지대에서 성을 쌓는 방식으로 고운 모래를 한층씩 다져 쌓았다. 성벽의 표면은 잔디와 잡초로 덮여 있는 곳이 많으며, 높이는 일정하지 않다. 동쪽에는 4곳에 출입문으로 여겨지는 흔적이 남아있다.

 

풍납리식 민무늬토기·신라식 토기들과 그물추·물레·가락바퀴(방추차)·기와 등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출토되어, 백제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임을 알게 되었다.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도성인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와 방어성으로 보는 두가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더욱 연구·조사 되어야 한다. 그러나 초기 백제의 중요한 성으로서 당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며, 주변에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과 관련되어 역사적으로도 매우 가치있는 곳이다.

 

11.창덕궁(비원포함)

 

 

종 목 사적 제122호

지 정 일 1963.01.18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충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12.종묘

 

 

종 목 사적 제125호

지 정 일 1963.01.18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훈정동 1-2

시 대 조선시대

 

 종묘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종묘는 본래의 건물인 정전과 별도의 사당인 영녕전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건물이 있다.

 

태조 3년(1394)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태조는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추존왕을 정전에 모셨으나, 세종 때 정종이 죽자 모셔둘 정전이 없어 중국 송나라 제도를 따라 세종 3년(1421) 영녕전을 세워 4대 추존왕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

 

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8년 다시 지었고, 몇 차례의 보수를 통해 현재 19칸의 건물이 되었다. 정전에는 19분의 왕과 30분의 왕후를 모시고 있다. 영녕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08년 다시 지었다. 현재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아들 이은과 부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 앞 뜰에는 조선시대 83명의 공신이 모셔진 공신당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전해진다.

 

종묘는 동시대 단일목조건축물 중 연건평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크나, 장식적이지 않고 유교의 검소함이 깃든 건축물이다. 중국의 종묘가 9칸인데 비해 19칸의 긴 정면과 수평성이 강조된 건물 모습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며, 동양 고대문화의 성격과 특징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가 담긴 유산이다. 종묘의 정전과 영정전 및 주변 환경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종묘제례와 음악·춤의 원형이 잘 계승되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좋은 답변 되기를 빌께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개경은 지금북한지역의 개성입니다,

더많은 자료가 필요하시면 다음 북한문화재자료관 http://north.nricp.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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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4신무늬돌관(4신문양석관)
시              대 고려
유              형 유물 기타
크              기 길이 93.5cm
출     토      지 개성직할시 개풍군 묵산리
이 4신무늬돌관(석관)은 고려시대 유물로 개성시 개풍군 묵산리에서 출토된 것이
다. 개성지방에서 수집된 이 유물은 현무암으로 만든 장방형의 돌관이다. 돌관은 몸
체와 그 뚜껑으로 이루어졌는데 몸체의 네 벽면은 서로 맞물려 있다. 몸체 바깥 네
면에는 백호, 청룡, 주작, 현무 등의 사신무늬가 정교하게 돋을 새김되어 있다. 뚜
껑 돌에도 조각이 있는데 그것은 가운데에 둥근 테두리를 돌리고 그 안에 머리를 마
주한 두 선녀가 옷자락을 날리면서 가볍게 날아가는 모습을 형상한 것이다. 돌관의
안쪽에도 꽃과 새를 섬세하게 새겨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돌관은 일부 깨어진 곳이
있으나 돌 가공솜씨와 무늬 형상이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개성 나성(개성 나성(옛성))
지   정   구  분 국보 130 호
시              대 고려
유              형 유적 성곽·관방유적
크              기 외성둘레 약 16km, 내성둘레 약 8.5km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성시 송악동 송악산
개성옛성은 개성시에 있는 고려시대 성으로 도성을 둘러쌓은 성이다. 개성성 또는 나성, 외성이라고도 한다. 고려는 건국 초기 도읍 개경에 궁성과 황성(발어참성)만을 축성하였으나, 11세기 초 거란족의 침입을 계기로 도성 내 주요 시가지를 둘러싸는 나성(羅城)을 건설하였으며, 나성 영역 내의 주요 부분을 방어하는 내성은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등을 겪으면서 추가로 건설한 것이다.
나성은 고려 현종 때 거란의 3차 침입 이후 방어시설 확충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강감찬의 제의에 의해 1009년 공사가 시작되어 1029년에 완성되었다. 성의 개축에 참여한 인원은 30만 4천명이 동원되었으며, 도시 전체를 둘러쌓은 그 길이는 약 16km에 이른다. 송악산 마루에서 시작하여 남쪽의 용수산, 서쪽의 지네산, 동쪽의 부흥산 등 높은 산봉우리들을 이용하여 쌓은 평산성식 도성이다.
내성은 고려 말인 1391년에서 조선 초인 1393년까지 약 8.5km의 길이로 쌓았는데, 성의 평면모습이 마치 반달모양과 같아 반월성이라고도 불렀다. 내성은 나성의 서쪽 성벽 눌리문 부근에서 부터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와 남대문과 동대문을 거쳐 고려 성균관의 뒤 언덕을 지나 북쪽 성벽 북소문 부근까지 뻗어 있다.
성벽의 재료는 주위 조건에 따라 돌 혹은 흙을 사용하였으며, 상황에 따라 돌과 흙을 혼합하여 쌓기도 하였다. 성의 축조방법은 돌로 쌓은 성벽의 경우 외면축조방법이나 양면축조방법으로도 하였는데, 그 밑폭은 6m 정도이고, 높이는 3~4m 정도이다. 흙으로 쌓은 성벽에는 기본적으로 돌로 성심을 채웠는데, 밑 부분의 일정한 높이까지 계단처럼 돌을 쌓고 그 위에 석비레와 붉은 진흙을 번갈아 다져 올렸다. 밑면의 폭은 대체로 7~8m이고, 성벽의 높이는 3~4m로 그 이상의 높이로 남아 있는 곳도 적지 않다.
성은 총 25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대문(숭인문), 오정문(선의문), 비전문(회빈문), 북성문 등 큰 성문이 8개이며, 중간 크기의 성문이 4개, 작은 성문이 13개나 되었다. 방어시설로 큰 성문들과 기타 중요한 성문 14개소에는 옹성을 쌓아 그 방비를 강화하였다. 성벽의 위에는 성가퀴를 만들고, 활쏘는 구멍을 냈다. 또한 46개소에서 치(雉)가 확인되었다.
이로써 개성성은 둘레 약 23km에 달하는 발어참성, 내성, 외성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개성첨성대
지   정   구  분 국보 131 호
시              대 고려
유              형 구조물 과학시설류
크              기 높이는 2.8m, 한변의 길이는 2.6m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성시 송악동
개성시 송악동에 위치한 고려시대 첨성대(瞻星臺)이다. 이 첨성대는 고려 왕궁 터인 만월대(滿月臺)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천문 관측기구를 올려놓았던 축대만이 남아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이 만월대의 첨성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다만 고려는 초기부터 천문·관측 등을 담당하는 관청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태복감(太卜監)과 태사국(太史局) 등이 그것이다.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에 있었던 천문·관서가 중국 당(唐)나라의 제도를 따라 이름만 이렇게 둘로 나뉘어진 것을 짐작하게 한다. 《고려사》천문지(天文志)에는 일식·월식·혜성·태양흑점·유성 등 천문현상에 대한 관측 기록이 수 천개 남아 있는데, 이들 기록은 바로 이런 천문관서에서 주로 작성되어 후세에 남겨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고려의 천문대인 첨성대에 어떤 관측기구들이 세워졌던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첨성대의 주춧돌 위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네모지게 다듬은 댓돌로 ‘ㅁ’자형 틀을 짠 다음 틀 사이에 판돌을 깔아 만들었다. 규모는 축대의 높이가 2.8m이며, 그 한 변의 길이는 2.6m이다. 축대의 네 면은 첨성대의 중요한 방위기준이 되도록 동, 서, 남, 북 방향과 일치하게 배치되었다. 축대는 부재들을 치밀하게 다듬어 구조가 견고하며, 댓돌과 판돌이 서로 빈틈없이 맞물려 있고 남북 모서리에는 ㅁ자형으로 홈을 파고 알맞은 철편을 끼워 튼튼히 연결시켰다. 당시 석조 건축기술이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축대 위에는 모서리마다 큰 구멍이 있고 그 밖에도 여러 곳에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는데, 이는 관측 시설을 고정시켰던 자리인 것으로 추정된다.
개성 첨성대는 경주 첨성대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천문 관측을 오래 전부터 진행해 온 사실을 알려줌과 동시에 고려 천문학의 발전 모습을 실물로 밝혀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개풍신성리석불입상
시              대 고려
유              형 구조물 석불류
크              기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풍군 신성리
이 작품은 개성시 개풍군 신성리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불상조각으로 높
이 5.7m에 이르는 거불이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7릉떼(7릉군)
시              대 고려
유              형 유적 분묘유적
크              기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풍군 해선리
이 7릉떼(7릉군)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한 고려시대 왕릉급 무덤군이다. 해
선리 만수산 기슭에 동서로 나란히 인접해 있는 이 무덤들은 그 주인공이 아직 밝혀
지지는 않았으나, 왕이나 왕족으로 추정되고 있다. 축조 시기는 대체로 고려시대 말
기로 추정된다. 맨 서쪽의 것을 제1릉, 동쪽으로 가면서 제2릉, 제3릉 등으로 부른
다. 모두 7기의 능이 있지만, 각 능의 구조와 형식이 비슷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대표
적으로 제3릉에 대해서만 소개하고자 한다.
제3릉의 무덤 구역은 3개의 층단을 쌓아 만들었는데, 1단에 무덤의 봉분이 있고, 그
주위에 돌난간을 돌리고 돌로 만든 동물상을 배치하였으며, 그 앞에 망주석, 상돌 등
을 두었다. 봉분의 크기는 높이 2.4m, 직경 7.6m이다. 봉분에 돌린 병풍돌에는 12지
신상과 운문 등을 섬세하게 돋을새김하였다. 2단에는 한 쌍의 문인상이 있고, 3단에
도 문인상 한 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터가 있다. 이러한 무덤구
역 설정 및 시설물 배치는 고려시대의 특징적인 무덤 형식으로, 조선시대에도 그대
로 이어진다. 이 무덤은 규모가 작을 뿐 건축 및 장식기법에 있어서 공민왕릉과 거
의 유사하다. 서로 연관된 무덤들이 일정한 지역 안에 밀집되어 축조된 방식도 앞선
시대 무덤축조 방식과 유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3릉구역의 조각에서 무인상이 없
고 문인상 두 쌍만 둔 점은 무덤 주인공의 성격과 관련된 특징일 수도 있고, 무덤구
역 설정에 있어 어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아직까지 정확한 것
은 알 수 없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개국사 돌등(개국사 석등)
시              대 고려
유              형 구조물 탑·부도류
크              기 높이 3.72m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성시 덕암리 개국사
개국사돌등(開國寺石燈)은 고려시대 초기의 것으로 개성시 덕암리 개국사에 있던 것
을 현재 개성시 방직동으로 이전하여 보존하고 있다. 개국사는 935년에 세운 절로 조
선시대에 폐사되었다.
석등에서 대좌부, 화사부, 옥개부의 기본 요소들은 모두 4각 평면이고, 4각 기둥돌
의 중간 부분은 모를 죽였다. 받침단 옆면 각 면마다 4개씩의안상을 새기고 그 윗면
에는 12개의 복련을 새겼다. 화사석 받침 밑면에는 이와 대칭되는 앙련을 새겼는데
꽃잎수는 16개이고, 그 끝이 뾰족하고 홑잎의 꽃잎 안에 또 다른 꽃잎새김이 있어 기
둥 밑돌의 복련과는 다른 모양새이다. 화사석은 화사석 받침의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은 것이다. 이 기둥돌도 중간 부분에서 모를 죽였다. 옥
개석은 넓고 낮은 편이고 처마 끝에 반전이 있다. 옥개석 위에는 보주가 놓였다. 이
석등은 규모에 어울리게 장식이 간소하나 대범하고도 웅건한 멋이 풍긴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개성성균관(성균관)
지   정   구  분 국보 127 호
시              대 고려
유              형 유적 서원·향교유적
크              기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성시 방직동
개성 성균관은 개성시 방직동에 위치한 고려시대 992년(성종 11)에 세운 국가 최고 교육기관으로, 현재의 건물은 조선시대(1602~1610년)에 재건한 건물이다. 이곳은 원래 고려의 별궁(別宮)이 있던 곳이었으나, 유교 경전에 관한 사무를 보는 숭문전(崇文殿)으로도 사용되었다가, 1089년(선종 6)에 국자감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고려는 건국 초기 개경에 국가가 운영하는 학교를 세웠고, 992년에는 성균관의 전신인 국자감을 설립하고 여기에 국자학, 대학, 4문학과 율학, 서학, 산학 등 6개 학과를 두고 국가 관리 양성 및 유교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 국자감은 1304년(충렬왕 30)에 국학(國學)으로 개명되면서 대성전을 지었으며, 1310년(충선왕 2)에 성균관(成均館)으로 개명하였다. 이후 공민왕 때 국자감이라 다시 칭하였으나 멀지 않아 다시 성균관으로 불렀다. 조선개국과 더불어 조선 1396년(태조 5) 한양에 성균관을 세우며, 개성 성균관은 향교(鄕校)가 되었으나 그 지위는 다른 향교와 달랐다. 그 이후 1474년(성종 5)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고, 1592년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던 것을 1602년(선조 35)에 같은 위치에 복원하였다.
전체 대지는 경사져 있으며, 건물들은 엄격한 남북 중심축을 기준으로 대칭으로 배치되고, 검약과 소박을 표방하는 유교 윤리에 맞게 엄격하게 꾸며져 있다. 약 1만㎡의 넓은 부지에 영역은 크게 4개로 구분되고, 18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개성 성균관의 배치는 서울 성균관과 그 배치가 다른데, 명륜당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講學)구역이 앞쪽에 있고,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배향(配享)구역을 뒤쪽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이다. 바깥 삼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좌우에 향실(동쪽)과 존경각(서쪽)이 위치하고 있다. 명륜당 앞뜰 좌우에는 학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명륜당 뒤편 내삼문을 지나면 정면에 공자를 제사 지내던 대성전이, 그 앞뜰 좌우에 이름난 유학자들을 제사 지내던 동무와 서무가 자리하고 있다.
성균관의 외삼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민도리계 맞배집으로 홍살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구조는 2고주 5량가의 초익공계 맞배집이다. 내부에는 다수의 기문이 걸려있으며, 바닥은 우물마루로 하였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하였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정면 9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가구는 5량가의 민도리계 맞배집이다. 향실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민도리계 맞배집이다. 존경각 또한 향실과 같은 규모인데, 지붕형태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신문(神門)인 내삼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3량가의 민도리식 맞배지붕의 형태이다.
공자의 위패를 모셨던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구조는 1고주 7량가의 초익공계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전체적인 건물의 모습은 서울 대성전과 비슷하다. 내부는 우물마루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동무와 서무는 각각 정면 14칸, 측면 1칸의 규모로, 구조는 3량가의 민도리계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고려 성균관 건물은 대체적으로 좌우측벽을 전돌로 화방벽을 구성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이외에도 계성사와 10여 채의 부속건물들이 더 있다. 현재는 고려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개풍복령동석불입상
시              대 고려
유              형 구조물 석불류
크              기 높이 2.75m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풍군 해선리
이 석불입상은 고려시대 에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는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하
였은나, 현재 개성시 방직동으로 이전되어 보존되고 있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관음사대리석관음보살상
지   정   구  분 국보 154 호
시              대 고려
유              형 유물 조소류
크              기 높이 1.2m
출     토      지 개성직할시 개성시 박연리
관음사 <대리석관음보살상>은 고려시대 석조불상이다. 개성시 박연리 관음사 관음굴에 있었던 2개의 돌부처 중 하나를 1975년에 평양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이전하여 보존하고 있고, 나머지 하나는 관음굴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유백색 대리석으로 만든 이 보살상은 1.2m의 그다지 크지 않은 석조불상이지만, 균형잡힌 날씬한 몸매,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 화려한 보관, 구슬을 꿰어 양어깨로 드리운 듯한 영락장식, 얇은 비단처럼 나부끼는 천의 등 요소에서 뛰어난 기량을 자랑한다. 고려시기의 대표적인 불상으로 미술사적 의의가 있는 유물이다

 

 

평양의 대표적인 문화재

ㅡ대동문ㅡ


- 북한의 국보 제4호
- 평양성의 여러 문 중 가장 중요하며 정문의 역할을 했던 곳임
- 대동강을 중심으로 한 주변 경치가 빼어남

보통문

 

- 북한의 국보 제3호
- 보통강 강변에 위치하며 평양성의 서북쪽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임
- 주변 경치가 아름다우며 숲 속의 꾀꼬리 소리가 아름답기로 유명함

을밀대

- 평양시 금수산에 위치하며 평양 8경의 하나임
- 평양에서 가장 아름답고 전망 좋은 누정으로 알려져 있음
- 대동강과 더불어 평양의 전체 모습을 감상하기에 좋음

연광정


- 평양 8경, 관서 8경의 하나임
- 평양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함
- 임진왜란 때 왜장을 암살한 기생 계월향의 이야기로 유명한 곳이다.

부벽루


- 평양 8경의 하나
- 대동강의 청류벽에 자리잡고 있음
- 대동강의 물줄기와 어울려 한편의 풍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평양성


- 북한의 국보 제 1호
- 웅대했던 고구려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곳
- 평양의 대표적 문화 유산인 대동문, 보통문, 을밀대, 부벽루, 연광정 등이 모여있는 곳이다

 

 

 

 

 

 

 

 

 

 

 

 

 

 

 

 

 

 

 

 

 

 

 

 

 

 

 

 

 

 

1.무령왕릉

1971년 7월 7일부터 동년 10월 28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발굴됨으로써 그 전모가 드러났다. 송산리()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를 접하고 있다. 분구()는 지름 약 20m의 원형() 플랜을 가지며 널방[]의 바닥면에서 분정()까지 7.7m이다. 널방은 연화문전()·문자전() 등으로 쌓여진 단실묘()로 평면 4.2m×2.72m의 크기인데 북으로 축선()을 둔다.
천장은 아치를 성하고 바닥면으로부터의 최고값은 2.93m이다. 벽면에는 제6호분과 똑같은 모양의 소감()과 그 아래에 연자창() 모양으로 된 것을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를 만들고 각 감내에는 등잔()이 들어간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고분으로서 전례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화려하다.

 

아래 사진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왕비금관식' 입니다.

 

 

2. 공산성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다가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475년(문주왕 1) 한산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였다가, 538년(성왕 16)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중심 산성이었다. 해발 110m인 공산()의 정상에서 서쪽의 봉우리까지 에워싼 포곡식() 산성이며 성의 둘레는 2450m이다. 평면으로는 동서 약 800m, 남북이 약 400m이며 사방에 석벽이 남아 있다. 원래 토성이었는데 조선 중기에 석성으로 개축된 것이다.

 

 

 

3.갑사
계룡사·계룡갑사\·갑사(岬寺)·갑사사(甲士寺)라고도 한다. 420년(백제 구이신왕 1) 고구려에서 온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하였다.
505년(무령왕 5) 천불전(千佛般)을 중창하고 556년(위덕왕 3) 혜명(惠明)이 천불전·보광명전\·대광명전을 중건하였다. 679년(문무왕 19) 의상(義湘)이 당우(堂宇) 1,000여 칸을 더 지어, 화엄도량(華嚴道場)으로 삼아 신라 화엄십찰(十刹)의 하나가 되었고, 옛 이름인 계룡갑사를 갑사로 개칭하였다.
아래 사진은 갑사 강당입니다.
 
 
 
 
 
 
 
 
 
 
 
 
 
 
 
 
 
 
한양문화재
 
 
 
 
 
 
 
 
 
 
 
1.서울숭례문
 
 
종 목 국보 제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2.원각사지십층석탑
 
 
종 목 국보 제2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시 대 조선시대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3.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종 목 국보 제3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신라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4.서울흥인지문
 
 
종 목 보물 제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
 
시 대 조선시대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5.서울보신각종
 
 
종 목 보물 제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1985년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칠 때 사용되었다.
 
조선 세조 14년(1468) 만들어 신덕왕후정릉 안에 있는 정릉사에 있었으나, 그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로 옮겨졌고 임진왜란 이후 종루에 보관했다. 고종 32년(1895)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종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서 보관 중이다.
 
총 높이 3.18m, 입 지름 2.28m, 무게 19.66톤의 큰 종이며,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종 형태를 하고 있다.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종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부분에서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중간 지점부터 입구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 있다. 몸통에는 3줄의 굵은 띠를, 종 입구 위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2줄의 띠를 두르고 있고, 종의 연대를 알 수 있는 긴 문장의 글이 있다.
 
이 종은 2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원형에 손상을 입고, 음향도 다소 변했으나 명문(銘文)이 남아있어 주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6.대원각사비
 
 
종 목 보물 제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탑골공원
 
시 대 조선시대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서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절로 세웠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원각경 』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3층 사리탑을 세웠다.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돌 위를 두 마리의 용이 감싸듯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둔중한 몸체로 머리는 목을 표현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다. 등무늬는 육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평행세선을 새겼으며, 등 중앙에는 연잎조각을, 꼬리와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을 조각해 놓아 조선시대 조각미의 독특한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몸돌 위로는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었으며, 조각 아래의 가운데에는 ‘대원각사지비 ’라는 비의 이름이 강희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 성임,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
 
 

 

 

경주문화재

 

 

 

 

 

 

 

 

 

경주는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산지구》

야외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신라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신라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나정, 신라왕조의 종말을 맞게했던 포석정과,
미륵곡 석불좌상, 배리 석불입상, 칠불암 마애석불 등 수많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습니다.



 


 

-보리사 마애석불(시도유형문화재 제193호)

경주시 배반동 동쪽을 향한 높이 2m의 바위벽에 새긴 마애불(자연암석에 부조 또는 선각 등으로 새겨진 불상).



 


 

-경주남산 미륵곡 석불좌상(보물 제136호)

보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 있는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석불좌상으로..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음.



 


 

-경주남산용장사곡 삼층석탑 (보물 제186호)



 


 

-경주남산용장사곡 석불좌상(보물 제187호)

경주 남산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큰 사찰이었던 용장사터를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

'삼국유사'에 나오는 유명한 승려 '대현'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유명한 불상.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

용장사지석불좌상(보물 제187호)의 뒤쪽 바위벽에 새긴 마애여래좌상.



 


 

-천룡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188호)

천룡사의 옛터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90년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새로이 복원한 것.



 


 

-남간사지 당간지주(보물 제909호)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사찰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매달아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의 좌우에 세워 단단히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함.

이 당간지주는 남간사의 옛터에서 약 500m 떨어진 논 가운데에 세워져 있음.



 


 

-남간사지 석정(문화재자료 제13호) = 돌우물(石井)



 


 

-경주남산리 삼층석탑(보물 제124호)

불국사석가탑다보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쌍탑이 동·서로 건립된 특이한 예의 두 탑.



 


 

-경주배리 석불입상(보물 제63호)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세운 것.

이 석불들은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임.



 


 

-경주남산 불곡 석불좌상(보물 제198호)

남산 동쪽 기슭 부처 골짜기의 한 바위에 깊이가 1m나 되는 석굴을 파고 만든 여래좌상.



 


 

-경주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 제199호)

칠불암 위에 곧바로 선 남쪽바위에 새겨져 있는 높이 1.4m의 마애보살반가상.



 


 

-경주남산 칠불암 마애석불(보물 제200호)



 


 

-경주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보물 제201호)

통일신라시대에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

하나의 바위면에 불상·비천·보살·승려·탑 등 다양한 모습들을 정성을 다하여 조각하였음은..

장인의 머리속에 불교의 세계를 그리려는 뜻이 역력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줌.



 


 

-경주 삼릉계 석불좌상(보물 제666호)

일명 '얼음골'이라고 부르는 삼릉계곡의 왼쪽 능선 위에 있는 석불좌상으로 화강암을 조각하여 만듦.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시도유형문화재 제19호)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한 것으로 연꽃무늬 '대좌'위에 서 있는 관음보살상.



 


 

-삼릉계곡 선각 육존불(시도유형문화재 제21호)



 


 

-경주남산 입곡 석불두(시도유형문화재 제94호)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에는,
작은 부처가 연꽃모양의 대좌에 앉아 합장하고 있는 모습과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음.



 


 

-경주침식곡 석불좌상(시도유형문화재 제112호)

경주시 내남면 백운암 동편의 침식골에 있는 이 불상은,현재 머리 부분이 없어졌으나 나머지 부분들은 대체로 잘 남아 있다.



 


 

-경주 열암곡 석불좌상(시도유형문화재 제113호)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의 절터에서 발견된 불상으로, 현재 머리 부분이 없는 상태.



 


 

-경주약수계곡 마애입불상(시도유형문화재 제114호)

금오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바로 쏟아져 내린 골짜기를 산호곡 또는 약수계곡이라 한다.

이 계곡의 바위면에 높이가 8.6m나 되는 거대한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현재는 머리 부분이 없어지고 어깨 아래 부분만 남아 있다.머리는 따로 만들어 붙인 듯 목부분에 머리를 고정시켰던 구멍이 뚫려 있다.



 


 

-삼릉계곡 마애 석가여래좌상(시도유형문화재 제158호)

경주시 배동의 거대한 자연 바위벽에 새긴 앉아 있는 모습의 석가여래불로 높이는 6m.



 


 

-삼릉계곡 선각 여래좌상(시도유형문화재 제159호)

높이 10m가량 되는 바위에 새겨진 앉아 있는 모습의 여래상.이곳은 신라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의 큰 무덤이 있어서 삼릉계곡이라고 불리는 곳.



 


 

-경주배리 윤을곡 마애불좌상(시도유형문화재 제195호)

남산의 여러 계곡 가운데 하나인 '윤을곡'의 ㄱ자형 바위벽에 새긴 불상.



 


 

-배리 삼릉(사적 제219호)

배리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신라일성왕릉(사적 제173호)

신라 7대 일성왕(재위 134∼154)의 무덤.

왕은 북쪽 변방에 침입하는 말갈인을 막고, 농토를 넓혀 제방을 쌓는 등 농업을 권장했으며,
백성들에게 금·은·보석의 사용을 금지하여 사치풍조를 멀리하게 했다고 함.높이 5.3m, 지름 15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



 


 

-신라정강왕릉(사적 제186호)

경문왕의 둘째 아들인 신라 제50대 정강왕(재위 886∼887)의 무덤.

정강왕은 형인 헌강왕에 이어 886년 7월에 왕위에 올랐으나 887년 7월에 병으로 죽어,왕위에 있던 기간이 만 1년밖에 되지 않음.



 


 

-신라헌강왕릉(사적 제187호)

신라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의 무덤.

헌강왕은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거리마다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왕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함.



 


 

-지마왕릉(사적 제221호)

신라 지마왕(112∼134)의 무덤으로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음.



 


 

-경애왕릉(사적 제222호)

신라 55대 왕인 경애왕(재위 924∼927)의 무덤.
포석정에서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왕.



 


 

-신라내물왕릉(사적 제188호)

신라 17대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

내물왕은 김씨 왕으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을 이루었다. 마립간이란 왕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중국 '전진'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이 침입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도움을 요청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높이 5.3m, 지름 2.2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



 


 

-경주포석정지(사적 제1호)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



 


 

-경주 남산성(사적 제22호)

남산의 북쪽에 있는 신라 산성으로 '신라 남산신성'이라고도 함.경주평야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이 산성은, 서쪽의 서형산성과 동쪽의 명활성, 그리고 북쪽의 북형산성과 함께 신라의 왕도를 호위했던 성으로서,역사적 의의가 있으며, 지금도 큰 창고 자리에서는 불에 탄 쌀이 나온다고 함.



 


 

-서출지(사적 제138호) - 남산 기슭에 위치한 삼국시대 연못.

<서출지의 전설>

신라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 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줘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공주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이라는 사람이 못가에 건물을 지어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 이 건물은 연못 서북쪽에 소박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경주나정(사적 제245호)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전설을 간직한 우물.



 


 

-경주남산동 석조감실(문화재자료 제6호)

화랑교육원 내에 자리잡고 있는 석조 감실로, 불상을 모셔두던 곳.최초의 인공석굴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님.



 


 

-백운대 마애불입상(시도유형문화재 제206호)

경주시 내남면 마석산 암벽 위에 높이 4.6m에 달하는 커다란 불상으로 미완성 조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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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지구》

신라왕궁이 자리하고 있던 월성, 신라 김씨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

신라통일기에 조영한 임해전지, 그리고 동양 최고의 천문시설인 첨성대등이 있습니다.



 


 

-경주 계림(사적 제19호)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숲.
원래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이라고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로 계림이라 부름.



<명칭 배경>

탈해왕 4년(60)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 아기라는 뜻의 '알지'라는 이름을 주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경주월성(사적 제16호)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으로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하여 반월성·신월성이라고도 하며,왕이 계신 성이라 하여 재성이라고도 함.삼국사기에 의하면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전한다.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안압지·임해전·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탈해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성의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임해전으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있다. 성 안에 많은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석빙고가 있다.




-경주임해전지(사적 제18호)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국유 연못)를 대표하는 유적.




- 경주 첨성대(국보 제31호)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높이는 9.17m.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내물왕릉, 계림, 월성지대(사적및명승 제2호)

신라 17대 왕인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은 약 15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사적 제188호로 지정되어 있다.무덤의 모습은 땅 위에 둥근 봉분만 갖춘 신라 초기의 양식이며,
근처에 있는 신라 13대왕인 미추왕의 무덤과 같은 양식이다. 계림은 고목이 무성한 숲으로, 무덤의 동쪽에 있으며, 첨성대와 가까운 곳에 있다.무덤의 남쪽으로는 모양이 반달같아 반월성이라고도 부르는 월성이 있다.이는 신라시대의 도성으로 성안이 넓고 자연경관이 좋아, 궁성으로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었으며 사적 제16호로 지정되었다.이 지대는 신라 왕궁지역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조화를 이루어,편안하고 조용하게 역사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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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능원지구》

신라 왕, 왕비, 귀족 등 높은 신분계층의 무덤들이 있고, 구획에 따라 황남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무덤의 발굴조사에서 신라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 유리잔, 각종 토기 등.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신라 미추왕릉(사적 제175호)

신라 최초의 김씨 왕으로 백제의 여러차례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한,신라 13대 왕인 미추이사금(재위 262∼284)의 무덤.




-경주황남리고분군(사적 제40호)

경주시내 평지 무덤들 가운데 서남쪽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




- 경주노동리고분군(사적 제38호)

노동동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신라시대 무덤들로, 봉황대·식리총·금령총 등이 포함되어 있다. 봉황대는 높이 22m, 지름 82m로 황남대총 다음으로 규모가 큰 무덤.




-경주노서리고분군(사적 제39호)

서북쪽 노서동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의 무덤들로 현재 10여 기의 크고 작은 무덤이 남아있음.그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제130호 무덤은 노동동 고분군의 봉황대와 대칭을 이루어 서봉황대라 불림.




-신라 오릉(사적 제172호)

경주시내 평지 서남쪽에 위치한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

'삼국사기'에선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는데,'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이 임금자리에 있은지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가,7일 후에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큰 뱀이 방해해서 몸의 다섯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 또는 사릉이라 했다고 합니다.




- 경주동부사적지대(사적 제161호)

여러 사적이 모여있는 곳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의 단위로 정한 것.동서는 안압지부터 교동까지.남북은 월성남의 남천에서 고분공원 앞 첨성로가 있는 곳까지가 동부사적지대에 해당.




-재매정(사적 제246호)

김유신 장군 집에 있던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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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지구》

황룡사지분황사가 있으며, 황룡사는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나,발굴을 통해 당시의 웅장했던 대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40,000여 점의 출토유물은 신라시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산성지구에는 A.D 400년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이 있는데,신라의 축성술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황룡사지(사적 제6호)




-분황사 석탑(국보 제30호)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돌을 벽돌같은 크기로 다듬어 쌓은 탑)'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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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지구》




-명활산성(사적제47호)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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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신라태종무열왕릉비(국보25호)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




-경주석빙고(보물66호) = 얼음창고




-망덕사지(사적7호)

경주 '낭산'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

이 절은 황룡사, 사천왕사, 황복사와 함께 경주의 중요한 사찰이었던 곳.




-사천왕사지(사적8호)

경주 낭산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음.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절.경덕왕 때 향가인 '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




-경주흥륜사지

신라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절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고구려 승려 '아도'가 지은 것이라 전해짐.




-김유신묘(사적21호)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




- 경주부산성(사적25호)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쌓은 신라 산성으로 주사산성이라고도 함.주사산·오봉산·오로봉산·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부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




- 문무대왕릉(사적158호)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




-이견대(사적159호)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어,31대 왕인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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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은 지금북한지역의 개성입니다,

더많은 자료가 필요하시면 다음 북한문화재자료관 http://north.nricp.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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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4신무늬돌관(4신문양석관)
시              대 고려
유              형 유물 기타
크              기 길이 93.5cm
출     토      지 개성직할시 개풍군 묵산리
이 4신무늬돌관(석관)은 고려시대 유물로 개성시 개풍군 묵산리에서 출토된 것이
다. 개성지방에서 수집된 이 유물은 현무암으로 만든 장방형의 돌관이다. 돌관은 몸
체와 그 뚜껑으로 이루어졌는데 몸체의 네 벽면은 서로 맞물려 있다. 몸체 바깥 네
면에는 백호, 청룡, 주작, 현무 등의 사신무늬가 정교하게 돋을 새김되어 있다. 뚜
껑 돌에도 조각이 있는데 그것은 가운데에 둥근 테두리를 돌리고 그 안에 머리를 마
주한 두 선녀가 옷자락을 날리면서 가볍게 날아가는 모습을 형상한 것이다. 돌관의
안쪽에도 꽃과 새를 섬세하게 새겨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돌관은 일부 깨어진 곳이
있으나 돌 가공솜씨와 무늬 형상이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개성 나성(개성 나성(옛성))
지   정   구  분 국보 130 호
시              대 고려
유              형 유적 성곽·관방유적
크              기 외성둘레 약 16km, 내성둘레 약 8.5km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성시 송악동 송악산
개성옛성은 개성시에 있는 고려시대 성으로 도성을 둘러쌓은 성이다. 개성성 또는 나성, 외성이라고도 한다. 고려는 건국 초기 도읍 개경에 궁성과 황성(발어참성)만을 축성하였으나, 11세기 초 거란족의 침입을 계기로 도성 내 주요 시가지를 둘러싸는 나성(羅城)을 건설하였으며, 나성 영역 내의 주요 부분을 방어하는 내성은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등을 겪으면서 추가로 건설한 것이다.
나성은 고려 현종 때 거란의 3차 침입 이후 방어시설 확충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강감찬의 제의에 의해 1009년 공사가 시작되어 1029년에 완성되었다. 성의 개축에 참여한 인원은 30만 4천명이 동원되었으며, 도시 전체를 둘러쌓은 그 길이는 약 16km에 이른다. 송악산 마루에서 시작하여 남쪽의 용수산, 서쪽의 지네산, 동쪽의 부흥산 등 높은 산봉우리들을 이용하여 쌓은 평산성식 도성이다.
내성은 고려 말인 1391년에서 조선 초인 1393년까지 약 8.5km의 길이로 쌓았는데, 성의 평면모습이 마치 반달모양과 같아 반월성이라고도 불렀다. 내성은 나성의 서쪽 성벽 눌리문 부근에서 부터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와 남대문과 동대문을 거쳐 고려 성균관의 뒤 언덕을 지나 북쪽 성벽 북소문 부근까지 뻗어 있다.
성벽의 재료는 주위 조건에 따라 돌 혹은 흙을 사용하였으며, 상황에 따라 돌과 흙을 혼합하여 쌓기도 하였다. 성의 축조방법은 돌로 쌓은 성벽의 경우 외면축조방법이나 양면축조방법으로도 하였는데, 그 밑폭은 6m 정도이고, 높이는 3~4m 정도이다. 흙으로 쌓은 성벽에는 기본적으로 돌로 성심을 채웠는데, 밑 부분의 일정한 높이까지 계단처럼 돌을 쌓고 그 위에 석비레와 붉은 진흙을 번갈아 다져 올렸다. 밑면의 폭은 대체로 7~8m이고, 성벽의 높이는 3~4m로 그 이상의 높이로 남아 있는 곳도 적지 않다.
성은 총 25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대문(숭인문), 오정문(선의문), 비전문(회빈문), 북성문 등 큰 성문이 8개이며, 중간 크기의 성문이 4개, 작은 성문이 13개나 되었다. 방어시설로 큰 성문들과 기타 중요한 성문 14개소에는 옹성을 쌓아 그 방비를 강화하였다. 성벽의 위에는 성가퀴를 만들고, 활쏘는 구멍을 냈다. 또한 46개소에서 치(雉)가 확인되었다.
이로써 개성성은 둘레 약 23km에 달하는 발어참성, 내성, 외성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개성첨성대
지   정   구  분 국보 131 호
시              대 고려
유              형 구조물 과학시설류
크              기 높이는 2.8m, 한변의 길이는 2.6m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성시 송악동
개성시 송악동에 위치한 고려시대 첨성대(瞻星臺)이다. 이 첨성대는 고려 왕궁 터인 만월대(滿月臺)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천문 관측기구를 올려놓았던 축대만이 남아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이 만월대의 첨성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다만 고려는 초기부터 천문·관측 등을 담당하는 관청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태복감(太卜監)과 태사국(太史局) 등이 그것이다.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에 있었던 천문·관서가 중국 당(唐)나라의 제도를 따라 이름만 이렇게 둘로 나뉘어진 것을 짐작하게 한다. 《고려사》천문지(天文志)에는 일식·월식·혜성·태양흑점·유성 등 천문현상에 대한 관측 기록이 수 천개 남아 있는데, 이들 기록은 바로 이런 천문관서에서 주로 작성되어 후세에 남겨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고려의 천문대인 첨성대에 어떤 관측기구들이 세워졌던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첨성대의 주춧돌 위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네모지게 다듬은 댓돌로 ‘ㅁ’자형 틀을 짠 다음 틀 사이에 판돌을 깔아 만들었다. 규모는 축대의 높이가 2.8m이며, 그 한 변의 길이는 2.6m이다. 축대의 네 면은 첨성대의 중요한 방위기준이 되도록 동, 서, 남, 북 방향과 일치하게 배치되었다. 축대는 부재들을 치밀하게 다듬어 구조가 견고하며, 댓돌과 판돌이 서로 빈틈없이 맞물려 있고 남북 모서리에는 ㅁ자형으로 홈을 파고 알맞은 철편을 끼워 튼튼히 연결시켰다. 당시 석조 건축기술이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축대 위에는 모서리마다 큰 구멍이 있고 그 밖에도 여러 곳에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는데, 이는 관측 시설을 고정시켰던 자리인 것으로 추정된다.
개성 첨성대는 경주 첨성대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천문 관측을 오래 전부터 진행해 온 사실을 알려줌과 동시에 고려 천문학의 발전 모습을 실물로 밝혀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개풍신성리석불입상
시              대 고려
유              형 구조물 석불류
크              기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풍군 신성리
이 작품은 개성시 개풍군 신성리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불상조각으로 높
이 5.7m에 이르는 거불이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7릉떼(7릉군)
시              대 고려
유              형 유적 분묘유적
크              기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풍군 해선리
이 7릉떼(7릉군)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한 고려시대 왕릉급 무덤군이다. 해
선리 만수산 기슭에 동서로 나란히 인접해 있는 이 무덤들은 그 주인공이 아직 밝혀
지지는 않았으나, 왕이나 왕족으로 추정되고 있다. 축조 시기는 대체로 고려시대 말
기로 추정된다. 맨 서쪽의 것을 제1릉, 동쪽으로 가면서 제2릉, 제3릉 등으로 부른
다. 모두 7기의 능이 있지만, 각 능의 구조와 형식이 비슷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대표
적으로 제3릉에 대해서만 소개하고자 한다.
제3릉의 무덤 구역은 3개의 층단을 쌓아 만들었는데, 1단에 무덤의 봉분이 있고, 그
주위에 돌난간을 돌리고 돌로 만든 동물상을 배치하였으며, 그 앞에 망주석, 상돌 등
을 두었다. 봉분의 크기는 높이 2.4m, 직경 7.6m이다. 봉분에 돌린 병풍돌에는 12지
신상과 운문 등을 섬세하게 돋을새김하였다. 2단에는 한 쌍의 문인상이 있고, 3단에
도 문인상 한 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터가 있다. 이러한 무덤구
역 설정 및 시설물 배치는 고려시대의 특징적인 무덤 형식으로, 조선시대에도 그대
로 이어진다. 이 무덤은 규모가 작을 뿐 건축 및 장식기법에 있어서 공민왕릉과 거
의 유사하다. 서로 연관된 무덤들이 일정한 지역 안에 밀집되어 축조된 방식도 앞선
시대 무덤축조 방식과 유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3릉구역의 조각에서 무인상이 없
고 문인상 두 쌍만 둔 점은 무덤 주인공의 성격과 관련된 특징일 수도 있고, 무덤구
역 설정에 있어 어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아직까지 정확한 것
은 알 수 없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개국사 돌등(개국사 석등)
시              대 고려
유              형 구조물 탑·부도류
크              기 높이 3.72m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성시 덕암리 개국사
개국사돌등(開國寺石燈)은 고려시대 초기의 것으로 개성시 덕암리 개국사에 있던 것
을 현재 개성시 방직동으로 이전하여 보존하고 있다. 개국사는 935년에 세운 절로 조
선시대에 폐사되었다.
석등에서 대좌부, 화사부, 옥개부의 기본 요소들은 모두 4각 평면이고, 4각 기둥돌
의 중간 부분은 모를 죽였다. 받침단 옆면 각 면마다 4개씩의안상을 새기고 그 윗면
에는 12개의 복련을 새겼다. 화사석 받침 밑면에는 이와 대칭되는 앙련을 새겼는데
꽃잎수는 16개이고, 그 끝이 뾰족하고 홑잎의 꽃잎 안에 또 다른 꽃잎새김이 있어 기
둥 밑돌의 복련과는 다른 모양새이다. 화사석은 화사석 받침의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은 것이다. 이 기둥돌도 중간 부분에서 모를 죽였다. 옥
개석은 넓고 낮은 편이고 처마 끝에 반전이 있다. 옥개석 위에는 보주가 놓였다. 이
석등은 규모에 어울리게 장식이 간소하나 대범하고도 웅건한 멋이 풍긴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개성성균관(성균관)
지   정   구  분 국보 127 호
시              대 고려
유              형 유적 서원·향교유적
크              기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성시 방직동
개성 성균관은 개성시 방직동에 위치한 고려시대 992년(성종 11)에 세운 국가 최고 교육기관으로, 현재의 건물은 조선시대(1602~1610년)에 재건한 건물이다. 이곳은 원래 고려의 별궁(別宮)이 있던 곳이었으나, 유교 경전에 관한 사무를 보는 숭문전(崇文殿)으로도 사용되었다가, 1089년(선종 6)에 국자감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고려는 건국 초기 개경에 국가가 운영하는 학교를 세웠고, 992년에는 성균관의 전신인 국자감을 설립하고 여기에 국자학, 대학, 4문학과 율학, 서학, 산학 등 6개 학과를 두고 국가 관리 양성 및 유교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 국자감은 1304년(충렬왕 30)에 국학(國學)으로 개명되면서 대성전을 지었으며, 1310년(충선왕 2)에 성균관(成均館)으로 개명하였다. 이후 공민왕 때 국자감이라 다시 칭하였으나 멀지 않아 다시 성균관으로 불렀다. 조선개국과 더불어 조선 1396년(태조 5) 한양에 성균관을 세우며, 개성 성균관은 향교(鄕校)가 되었으나 그 지위는 다른 향교와 달랐다. 그 이후 1474년(성종 5)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고, 1592년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던 것을 1602년(선조 35)에 같은 위치에 복원하였다.
전체 대지는 경사져 있으며, 건물들은 엄격한 남북 중심축을 기준으로 대칭으로 배치되고, 검약과 소박을 표방하는 유교 윤리에 맞게 엄격하게 꾸며져 있다. 약 1만㎡의 넓은 부지에 영역은 크게 4개로 구분되고, 18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개성 성균관의 배치는 서울 성균관과 그 배치가 다른데, 명륜당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講學)구역이 앞쪽에 있고,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배향(配享)구역을 뒤쪽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이다. 바깥 삼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좌우에 향실(동쪽)과 존경각(서쪽)이 위치하고 있다. 명륜당 앞뜰 좌우에는 학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명륜당 뒤편 내삼문을 지나면 정면에 공자를 제사 지내던 대성전이, 그 앞뜰 좌우에 이름난 유학자들을 제사 지내던 동무와 서무가 자리하고 있다.
성균관의 외삼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민도리계 맞배집으로 홍살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구조는 2고주 5량가의 초익공계 맞배집이다. 내부에는 다수의 기문이 걸려있으며, 바닥은 우물마루로 하였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하였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정면 9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가구는 5량가의 민도리계 맞배집이다. 향실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민도리계 맞배집이다. 존경각 또한 향실과 같은 규모인데, 지붕형태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신문(神門)인 내삼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3량가의 민도리식 맞배지붕의 형태이다.
공자의 위패를 모셨던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구조는 1고주 7량가의 초익공계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전체적인 건물의 모습은 서울 대성전과 비슷하다. 내부는 우물마루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동무와 서무는 각각 정면 14칸, 측면 1칸의 규모로, 구조는 3량가의 민도리계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고려 성균관 건물은 대체적으로 좌우측벽을 전돌로 화방벽을 구성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이외에도 계성사와 10여 채의 부속건물들이 더 있다. 현재는 고려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개풍복령동석불입상
시              대 고려
유              형 구조물 석불류
크              기 높이 2.75m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풍군 해선리
이 석불입상은 고려시대 에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는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하
였은나, 현재 개성시 방직동으로 이전되어 보존되고 있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관음사대리석관음보살상
지   정   구  분 국보 154 호
시              대 고려
유              형 유물 조소류
크              기 높이 1.2m
출     토      지 개성직할시 개성시 박연리
관음사 <대리석관음보살상>은 고려시대 석조불상이다. 개성시 박연리 관음사 관음굴에 있었던 2개의 돌부처 중 하나를 1975년에 평양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이전하여 보존하고 있고, 나머지 하나는 관음굴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유백색 대리석으로 만든 이 보살상은 1.2m의 그다지 크지 않은 석조불상이지만, 균형잡힌 날씬한 몸매,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 화려한 보관, 구슬을 꿰어 양어깨로 드리운 듯한 영락장식, 얇은 비단처럼 나부끼는 천의 등 요소에서 뛰어난 기량을 자랑한다. 고려시기의 대표적인 불상으로 미술사적 의의가 있는 유물이다

 

 

평양의 대표적인 문화재

ㅡ대동문ㅡ


- 북한의 국보 제4호
- 평양성의 여러 문 중 가장 중요하며 정문의 역할을 했던 곳임
- 대동강을 중심으로 한 주변 경치가 빼어남

보통문

 

- 북한의 국보 제3호
- 보통강 강변에 위치하며 평양성의 서북쪽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임
- 주변 경치가 아름다우며 숲 속의 꾀꼬리 소리가 아름답기로 유명함

을밀대

- 평양시 금수산에 위치하며 평양 8경의 하나임
- 평양에서 가장 아름답고 전망 좋은 누정으로 알려져 있음
- 대동강과 더불어 평양의 전체 모습을 감상하기에 좋음

연광정


- 평양 8경, 관서 8경의 하나임
- 평양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함
- 임진왜란 때 왜장을 암살한 기생 계월향의 이야기로 유명한 곳이다.

부벽루


- 평양 8경의 하나
- 대동강의 청류벽에 자리잡고 있음
- 대동강의 물줄기와 어울려 한편의 풍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평양성


- 북한의 국보 제 1호
- 웅대했던 고구려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곳
- 평양의 대표적 문화 유산인 대동문, 보통문, 을밀대, 부벽루, 연광정 등이 모여있는 곳이다

 

 

 

 

 

 

 

 

 

 

 

 

 

 

 

 

 

 

 

 

 

 

 

 

 

 

 

 

 

 

1.무령왕릉

1971년 7월 7일부터 동년 10월 28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발굴됨으로써 그 전모가 드러났다. 송산리()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를 접하고 있다. 분구()는 지름 약 20m의 원형() 플랜을 가지며 널방[]의 바닥면에서 분정()까지 7.7m이다. 널방은 연화문전()·문자전() 등으로 쌓여진 단실묘()로 평면 4.2m×2.72m의 크기인데 북으로 축선()을 둔다.
천장은 아치를 성하고 바닥면으로부터의 최고값은 2.93m이다. 벽면에는 제6호분과 똑같은 모양의 소감()과 그 아래에 연자창() 모양으로 된 것을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를 만들고 각 감내에는 등잔()이 들어간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고분으로서 전례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화려하다.

 

아래 사진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왕비금관식' 입니다.

 

 

2. 공산성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다가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475년(문주왕 1) 한산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였다가, 538년(성왕 16)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중심 산성이었다. 해발 110m인 공산()의 정상에서 서쪽의 봉우리까지 에워싼 포곡식() 산성이며 성의 둘레는 2450m이다. 평면으로는 동서 약 800m, 남북이 약 400m이며 사방에 석벽이 남아 있다. 원래 토성이었는데 조선 중기에 석성으로 개축된 것이다.

 

 

 

3.갑사
계룡사·계룡갑사\·갑사(岬寺)·갑사사(甲士寺)라고도 한다. 420년(백제 구이신왕 1) 고구려에서 온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하였다.
505년(무령왕 5) 천불전(千佛般)을 중창하고 556년(위덕왕 3) 혜명(惠明)이 천불전·보광명전\·대광명전을 중건하였다. 679년(문무왕 19) 의상(義湘)이 당우(堂宇) 1,000여 칸을 더 지어, 화엄도량(華嚴道場)으로 삼아 신라 화엄십찰(十刹)의 하나가 되었고, 옛 이름인 계룡갑사를 갑사로 개칭하였다.
아래 사진은 갑사 강당입니다.
 
 
 
 
 
 
 
 
 
 
 
 
 
 
 
 
 
 
한양문화재
 
 
 
 
 
 
 
 
 
 
 
1.서울숭례문
 
 
종 목 국보 제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2.원각사지십층석탑
 
 
종 목 국보 제2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시 대 조선시대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3.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종 목 국보 제3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신라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비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4.서울흥인지문
 
 
종 목 보물 제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
 
시 대 조선시대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5.서울보신각종
 
 
종 목 보물 제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1985년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칠 때 사용되었다.
 
조선 세조 14년(1468) 만들어 신덕왕후정릉 안에 있는 정릉사에 있었으나, 그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로 옮겨졌고 임진왜란 이후 종루에 보관했다. 고종 32년(1895)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종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서 보관 중이다.
 
총 높이 3.18m, 입 지름 2.28m, 무게 19.66톤의 큰 종이며,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종 형태를 하고 있다.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종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부분에서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중간 지점부터 입구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 있다. 몸통에는 3줄의 굵은 띠를, 종 입구 위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2줄의 띠를 두르고 있고, 종의 연대를 알 수 있는 긴 문장의 글이 있다.
 
이 종은 2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원형에 손상을 입고, 음향도 다소 변했으나 명문(銘文)이 남아있어 주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6.대원각사비
 
 
종 목 보물 제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탑골공원
 
시 대 조선시대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서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절로 세웠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원각경 』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3층 사리탑을 세웠다.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돌 위를 두 마리의 용이 감싸듯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둔중한 몸체로 머리는 목을 표현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다. 등무늬는 육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평행세선을 새겼으며, 등 중앙에는 연잎조각을, 꼬리와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을 조각해 놓아 조선시대 조각미의 독특한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몸돌 위로는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었으며, 조각 아래의 가운데에는 ‘대원각사지비 ’라는 비의 이름이 강희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 성임,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
 
 

 

 

경주문화재

 

 

 

 

 

 

 

 

 

경주는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산지구》

야외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신라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신라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나정, 신라왕조의 종말을 맞게했던 포석정과,
미륵곡 석불좌상, 배리 석불입상, 칠불암 마애석불 등 수많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습니다.



 


 

-보리사 마애석불(시도유형문화재 제193호)

경주시 배반동 동쪽을 향한 높이 2m의 바위벽에 새긴 마애불(자연암석에 부조 또는 선각 등으로 새겨진 불상).



 


 

-경주남산 미륵곡 석불좌상(보물 제136호)

보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 있는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석불좌상으로..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음.



 


 

-경주남산용장사곡 삼층석탑 (보물 제186호)



 


 

-경주남산용장사곡 석불좌상(보물 제187호)

경주 남산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큰 사찰이었던 용장사터를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

'삼국유사'에 나오는 유명한 승려 '대현'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유명한 불상.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

용장사지석불좌상(보물 제187호)의 뒤쪽 바위벽에 새긴 마애여래좌상.



 


 

-천룡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188호)

천룡사의 옛터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90년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새로이 복원한 것.



 


 

-남간사지 당간지주(보물 제909호)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사찰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매달아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의 좌우에 세워 단단히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함.

이 당간지주는 남간사의 옛터에서 약 500m 떨어진 논 가운데에 세워져 있음.



 


 

-남간사지 석정(문화재자료 제13호) = 돌우물(石井)



 


 

-경주남산리 삼층석탑(보물 제124호)

불국사석가탑다보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쌍탑이 동·서로 건립된 특이한 예의 두 탑.



 


 

-경주배리 석불입상(보물 제63호)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세운 것.

이 석불들은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임.



 


 

-경주남산 불곡 석불좌상(보물 제198호)

남산 동쪽 기슭 부처 골짜기의 한 바위에 깊이가 1m나 되는 석굴을 파고 만든 여래좌상.



 


 

-경주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 제199호)

칠불암 위에 곧바로 선 남쪽바위에 새겨져 있는 높이 1.4m의 마애보살반가상.



 


 

-경주남산 칠불암 마애석불(보물 제200호)



 


 

-경주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보물 제201호)

통일신라시대에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

하나의 바위면에 불상·비천·보살·승려·탑 등 다양한 모습들을 정성을 다하여 조각하였음은..

장인의 머리속에 불교의 세계를 그리려는 뜻이 역력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줌.



 


 

-경주 삼릉계 석불좌상(보물 제666호)

일명 '얼음골'이라고 부르는 삼릉계곡의 왼쪽 능선 위에 있는 석불좌상으로 화강암을 조각하여 만듦.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시도유형문화재 제19호)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한 것으로 연꽃무늬 '대좌'위에 서 있는 관음보살상.



 


 

-삼릉계곡 선각 육존불(시도유형문화재 제21호)



 


 

-경주남산 입곡 석불두(시도유형문화재 제94호)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에는,
작은 부처가 연꽃모양의 대좌에 앉아 합장하고 있는 모습과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음.



 


 

-경주침식곡 석불좌상(시도유형문화재 제112호)

경주시 내남면 백운암 동편의 침식골에 있는 이 불상은,현재 머리 부분이 없어졌으나 나머지 부분들은 대체로 잘 남아 있다.



 


 

-경주 열암곡 석불좌상(시도유형문화재 제113호)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의 절터에서 발견된 불상으로, 현재 머리 부분이 없는 상태.



 


 

-경주약수계곡 마애입불상(시도유형문화재 제114호)

금오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바로 쏟아져 내린 골짜기를 산호곡 또는 약수계곡이라 한다.

이 계곡의 바위면에 높이가 8.6m나 되는 거대한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현재는 머리 부분이 없어지고 어깨 아래 부분만 남아 있다.머리는 따로 만들어 붙인 듯 목부분에 머리를 고정시켰던 구멍이 뚫려 있다.



 


 

-삼릉계곡 마애 석가여래좌상(시도유형문화재 제158호)

경주시 배동의 거대한 자연 바위벽에 새긴 앉아 있는 모습의 석가여래불로 높이는 6m.



 


 

-삼릉계곡 선각 여래좌상(시도유형문화재 제159호)

높이 10m가량 되는 바위에 새겨진 앉아 있는 모습의 여래상.이곳은 신라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의 큰 무덤이 있어서 삼릉계곡이라고 불리는 곳.



 


 

-경주배리 윤을곡 마애불좌상(시도유형문화재 제195호)

남산의 여러 계곡 가운데 하나인 '윤을곡'의 ㄱ자형 바위벽에 새긴 불상.



 


 

-배리 삼릉(사적 제219호)

배리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신라일성왕릉(사적 제173호)

신라 7대 일성왕(재위 134∼154)의 무덤.

왕은 북쪽 변방에 침입하는 말갈인을 막고, 농토를 넓혀 제방을 쌓는 등 농업을 권장했으며,
백성들에게 금·은·보석의 사용을 금지하여 사치풍조를 멀리하게 했다고 함.높이 5.3m, 지름 15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



 


 

-신라정강왕릉(사적 제186호)

경문왕의 둘째 아들인 신라 제50대 정강왕(재위 886∼887)의 무덤.

정강왕은 형인 헌강왕에 이어 886년 7월에 왕위에 올랐으나 887년 7월에 병으로 죽어,왕위에 있던 기간이 만 1년밖에 되지 않음.



 


 

-신라헌강왕릉(사적 제187호)

신라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의 무덤.

헌강왕은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거리마다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왕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함.



 


 

-지마왕릉(사적 제221호)

신라 지마왕(112∼134)의 무덤으로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음.



 


 

-경애왕릉(사적 제222호)

신라 55대 왕인 경애왕(재위 924∼927)의 무덤.
포석정에서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왕.



 


 

-신라내물왕릉(사적 제188호)

신라 17대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

내물왕은 김씨 왕으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을 이루었다. 마립간이란 왕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중국 '전진'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이 침입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도움을 요청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높이 5.3m, 지름 2.2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



 


 

-경주포석정지(사적 제1호)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



 


 

-경주 남산성(사적 제22호)

남산의 북쪽에 있는 신라 산성으로 '신라 남산신성'이라고도 함.경주평야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이 산성은, 서쪽의 서형산성과 동쪽의 명활성, 그리고 북쪽의 북형산성과 함께 신라의 왕도를 호위했던 성으로서,역사적 의의가 있으며, 지금도 큰 창고 자리에서는 불에 탄 쌀이 나온다고 함.



 


 

-서출지(사적 제138호) - 남산 기슭에 위치한 삼국시대 연못.

<서출지의 전설>

신라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 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줘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공주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이라는 사람이 못가에 건물을 지어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 이 건물은 연못 서북쪽에 소박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경주나정(사적 제245호)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전설을 간직한 우물.



 


 

-경주남산동 석조감실(문화재자료 제6호)

화랑교육원 내에 자리잡고 있는 석조 감실로, 불상을 모셔두던 곳.최초의 인공석굴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님.



 


 

-백운대 마애불입상(시도유형문화재 제206호)

경주시 내남면 마석산 암벽 위에 높이 4.6m에 달하는 커다란 불상으로 미완성 조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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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지구》

신라왕궁이 자리하고 있던 월성, 신라 김씨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

신라통일기에 조영한 임해전지, 그리고 동양 최고의 천문시설인 첨성대등이 있습니다.



 


 

-경주 계림(사적 제19호)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숲.
원래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이라고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로 계림이라 부름.



<명칭 배경>

탈해왕 4년(60)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 아기라는 뜻의 '알지'라는 이름을 주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경주월성(사적 제16호)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으로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하여 반월성·신월성이라고도 하며,왕이 계신 성이라 하여 재성이라고도 함.삼국사기에 의하면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전한다.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안압지·임해전·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탈해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성의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임해전으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있다. 성 안에 많은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석빙고가 있다.




-경주임해전지(사적 제18호)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국유 연못)를 대표하는 유적.




- 경주 첨성대(국보 제31호)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높이는 9.17m.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내물왕릉, 계림, 월성지대(사적및명승 제2호)

신라 17대 왕인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은 약 15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사적 제188호로 지정되어 있다.무덤의 모습은 땅 위에 둥근 봉분만 갖춘 신라 초기의 양식이며,
근처에 있는 신라 13대왕인 미추왕의 무덤과 같은 양식이다. 계림은 고목이 무성한 숲으로, 무덤의 동쪽에 있으며, 첨성대와 가까운 곳에 있다.무덤의 남쪽으로는 모양이 반달같아 반월성이라고도 부르는 월성이 있다.이는 신라시대의 도성으로 성안이 넓고 자연경관이 좋아, 궁성으로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었으며 사적 제16호로 지정되었다.이 지대는 신라 왕궁지역의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이 조화를 이루어,편안하고 조용하게 역사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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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능원지구》

신라 왕, 왕비, 귀족 등 높은 신분계층의 무덤들이 있고, 구획에 따라 황남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무덤의 발굴조사에서 신라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 유리잔, 각종 토기 등.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신라 미추왕릉(사적 제175호)

신라 최초의 김씨 왕으로 백제의 여러차례 공격을 막아내고 농업을 장려한,신라 13대 왕인 미추이사금(재위 262∼284)의 무덤.




-경주황남리고분군(사적 제40호)

경주시내 평지 무덤들 가운데 서남쪽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




- 경주노동리고분군(사적 제38호)

노동동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신라시대 무덤들로, 봉황대·식리총·금령총 등이 포함되어 있다. 봉황대는 높이 22m, 지름 82m로 황남대총 다음으로 규모가 큰 무덤.




-경주노서리고분군(사적 제39호)

서북쪽 노서동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의 무덤들로 현재 10여 기의 크고 작은 무덤이 남아있음.그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제130호 무덤은 노동동 고분군의 봉황대와 대칭을 이루어 서봉황대라 불림.




-신라 오릉(사적 제172호)

경주시내 평지 서남쪽에 위치한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

'삼국사기'에선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는데,'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이 임금자리에 있은지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가,7일 후에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큰 뱀이 방해해서 몸의 다섯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 또는 사릉이라 했다고 합니다.




- 경주동부사적지대(사적 제161호)

여러 사적이 모여있는 곳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의 단위로 정한 것.동서는 안압지부터 교동까지.남북은 월성남의 남천에서 고분공원 앞 첨성로가 있는 곳까지가 동부사적지대에 해당.




-재매정(사적 제246호)

김유신 장군 집에 있던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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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지구》

황룡사지분황사가 있으며, 황룡사는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나,발굴을 통해 당시의 웅장했던 대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40,000여 점의 출토유물은 신라시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산성지구에는 A.D 400년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이 있는데,신라의 축성술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황룡사지(사적 제6호)




-분황사 석탑(국보 제30호)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돌을 벽돌같은 크기로 다듬어 쌓은 탑)'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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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지구》




-명활산성(사적제47호)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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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신라태종무열왕릉비(국보25호)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




-경주석빙고(보물66호) = 얼음창고




-망덕사지(사적7호)

경주 '낭산'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

이 절은 황룡사, 사천왕사, 황복사와 함께 경주의 중요한 사찰이었던 곳.




-사천왕사지(사적8호)

경주 낭산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음.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절.경덕왕 때 향가인 '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




-경주흥륜사지

신라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절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고구려 승려 '아도'가 지은 것이라 전해짐.




-김유신묘(사적21호)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




- 경주부산성(사적25호)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쌓은 신라 산성으로 주사산성이라고도 함.주사산·오봉산·오로봉산·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부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




- 문무대왕릉(사적158호)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




-이견대(사적159호)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어,31대 왕인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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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4신무늬돌관(4신문양석관)
시              대 고려
유              형 유물 기타
크              기 길이 93.5cm
출     토      지 개성직할시 개풍군 묵산리
이 4신무늬돌관(석관)은 고려시대 유물로 개성시 개풍군 묵산리에서 출토된 것이
다. 개성지방에서 수집된 이 유물은 현무암으로 만든 장방형의 돌관이다. 돌관은 몸
체와 그 뚜껑으로 이루어졌는데 몸체의 네 벽면은 서로 맞물려 있다. 몸체 바깥 네
면에는 백호, 청룡, 주작, 현무 등의 사신무늬가 정교하게 돋을 새김되어 있다. 뚜
껑 돌에도 조각이 있는데 그것은 가운데에 둥근 테두리를 돌리고 그 안에 머리를 마
주한 두 선녀가 옷자락을 날리면서 가볍게 날아가는 모습을 형상한 것이다. 돌관의
안쪽에도 꽃과 새를 섬세하게 새겨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돌관은 일부 깨어진 곳이
있으나 돌 가공솜씨와 무늬 형상이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개성 나성(개성 나성(옛성))
지   정   구  분 국보 130 호
시              대 고려
유              형 유적 성곽·관방유적
크              기 외성둘레 약 16km, 내성둘레 약 8.5km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성시 송악동 송악산
개성옛성은 개성시에 있는 고려시대 성으로 도성을 둘러쌓은 성이다. 개성성 또는 나성, 외성이라고도 한다. 고려는 건국 초기 도읍 개경에 궁성과 황성(발어참성)만을 축성하였으나, 11세기 초 거란족의 침입을 계기로 도성 내 주요 시가지를 둘러싸는 나성(羅城)을 건설하였으며, 나성 영역 내의 주요 부분을 방어하는 내성은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등을 겪으면서 추가로 건설한 것이다.
나성은 고려 현종 때 거란의 3차 침입 이후 방어시설 확충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강감찬의 제의에 의해 1009년 공사가 시작되어 1029년에 완성되었다. 성의 개축에 참여한 인원은 30만 4천명이 동원되었으며, 도시 전체를 둘러쌓은 그 길이는 약 16km에 이른다. 송악산 마루에서 시작하여 남쪽의 용수산, 서쪽의 지네산, 동쪽의 부흥산 등 높은 산봉우리들을 이용하여 쌓은 평산성식 도성이다.
내성은 고려 말인 1391년에서 조선 초인 1393년까지 약 8.5km의 길이로 쌓았는데, 성의 평면모습이 마치 반달모양과 같아 반월성이라고도 불렀다. 내성은 나성의 서쪽 성벽 눌리문 부근에서 부터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와 남대문과 동대문을 거쳐 고려 성균관의 뒤 언덕을 지나 북쪽 성벽 북소문 부근까지 뻗어 있다.
성벽의 재료는 주위 조건에 따라 돌 혹은 흙을 사용하였으며, 상황에 따라 돌과 흙을 혼합하여 쌓기도 하였다. 성의 축조방법은 돌로 쌓은 성벽의 경우 외면축조방법이나 양면축조방법으로도 하였는데, 그 밑폭은 6m 정도이고, 높이는 3~4m 정도이다. 흙으로 쌓은 성벽에는 기본적으로 돌로 성심을 채웠는데, 밑 부분의 일정한 높이까지 계단처럼 돌을 쌓고 그 위에 석비레와 붉은 진흙을 번갈아 다져 올렸다. 밑면의 폭은 대체로 7~8m이고, 성벽의 높이는 3~4m로 그 이상의 높이로 남아 있는 곳도 적지 않다.
성은 총 25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대문(숭인문), 오정문(선의문), 비전문(회빈문), 북성문 등 큰 성문이 8개이며, 중간 크기의 성문이 4개, 작은 성문이 13개나 되었다. 방어시설로 큰 성문들과 기타 중요한 성문 14개소에는 옹성을 쌓아 그 방비를 강화하였다. 성벽의 위에는 성가퀴를 만들고, 활쏘는 구멍을 냈다. 또한 46개소에서 치(雉)가 확인되었다.
이로써 개성성은 둘레 약 23km에 달하는 발어참성, 내성, 외성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개성첨성대
지   정   구  분 국보 131 호
시              대 고려
유              형 구조물 과학시설류
크              기 높이는 2.8m, 한변의 길이는 2.6m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성시 송악동
개성시 송악동에 위치한 고려시대 첨성대(瞻星臺)이다. 이 첨성대는 고려 왕궁 터인 만월대(滿月臺)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천문 관측기구를 올려놓았던 축대만이 남아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이 만월대의 첨성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다만 고려는 초기부터 천문·관측 등을 담당하는 관청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태복감(太卜監)과 태사국(太史局) 등이 그것이다.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에 있었던 천문·관서가 중국 당(唐)나라의 제도를 따라 이름만 이렇게 둘로 나뉘어진 것을 짐작하게 한다. 《고려사》천문지(天文志)에는 일식·월식·혜성·태양흑점·유성 등 천문현상에 대한 관측 기록이 수 천개 남아 있는데, 이들 기록은 바로 이런 천문관서에서 주로 작성되어 후세에 남겨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고려의 천문대인 첨성대에 어떤 관측기구들이 세워졌던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첨성대의 주춧돌 위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네모지게 다듬은 댓돌로 ‘ㅁ’자형 틀을 짠 다음 틀 사이에 판돌을 깔아 만들었다. 규모는 축대의 높이가 2.8m이며, 그 한 변의 길이는 2.6m이다. 축대의 네 면은 첨성대의 중요한 방위기준이 되도록 동, 서, 남, 북 방향과 일치하게 배치되었다. 축대는 부재들을 치밀하게 다듬어 구조가 견고하며, 댓돌과 판돌이 서로 빈틈없이 맞물려 있고 남북 모서리에는 ㅁ자형으로 홈을 파고 알맞은 철편을 끼워 튼튼히 연결시켰다. 당시 석조 건축기술이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축대 위에는 모서리마다 큰 구멍이 있고 그 밖에도 여러 곳에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는데, 이는 관측 시설을 고정시켰던 자리인 것으로 추정된다.
개성 첨성대는 경주 첨성대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천문 관측을 오래 전부터 진행해 온 사실을 알려줌과 동시에 고려 천문학의 발전 모습을 실물로 밝혀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개풍신성리석불입상
시              대 고려
유              형 구조물 석불류
크              기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풍군 신성리
이 작품은 개성시 개풍군 신성리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불상조각으로 높
이 5.7m에 이르는 거불이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7릉떼(7릉군)
시              대 고려
유              형 유적 분묘유적
크              기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풍군 해선리
이 7릉떼(7릉군)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한 고려시대 왕릉급 무덤군이다. 해
선리 만수산 기슭에 동서로 나란히 인접해 있는 이 무덤들은 그 주인공이 아직 밝혀
지지는 않았으나, 왕이나 왕족으로 추정되고 있다. 축조 시기는 대체로 고려시대 말
기로 추정된다. 맨 서쪽의 것을 제1릉, 동쪽으로 가면서 제2릉, 제3릉 등으로 부른
다. 모두 7기의 능이 있지만, 각 능의 구조와 형식이 비슷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대표
적으로 제3릉에 대해서만 소개하고자 한다.
제3릉의 무덤 구역은 3개의 층단을 쌓아 만들었는데, 1단에 무덤의 봉분이 있고, 그
주위에 돌난간을 돌리고 돌로 만든 동물상을 배치하였으며, 그 앞에 망주석, 상돌 등
을 두었다. 봉분의 크기는 높이 2.4m, 직경 7.6m이다. 봉분에 돌린 병풍돌에는 12지
신상과 운문 등을 섬세하게 돋을새김하였다. 2단에는 한 쌍의 문인상이 있고, 3단에
도 문인상 한 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터가 있다. 이러한 무덤구
역 설정 및 시설물 배치는 고려시대의 특징적인 무덤 형식으로, 조선시대에도 그대
로 이어진다. 이 무덤은 규모가 작을 뿐 건축 및 장식기법에 있어서 공민왕릉과 거
의 유사하다. 서로 연관된 무덤들이 일정한 지역 안에 밀집되어 축조된 방식도 앞선
시대 무덤축조 방식과 유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3릉구역의 조각에서 무인상이 없
고 문인상 두 쌍만 둔 점은 무덤 주인공의 성격과 관련된 특징일 수도 있고, 무덤구
역 설정에 있어 어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아직까지 정확한 것
은 알 수 없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개국사 돌등(개국사 석등)
시              대 고려
유              형 구조물 탑·부도류
크              기 높이 3.72m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성시 덕암리 개국사
개국사돌등(開國寺石燈)은 고려시대 초기의 것으로 개성시 덕암리 개국사에 있던 것
을 현재 개성시 방직동으로 이전하여 보존하고 있다. 개국사는 935년에 세운 절로 조
선시대에 폐사되었다.
석등에서 대좌부, 화사부, 옥개부의 기본 요소들은 모두 4각 평면이고, 4각 기둥돌
의 중간 부분은 모를 죽였다. 받침단 옆면 각 면마다 4개씩의안상을 새기고 그 윗면
에는 12개의 복련을 새겼다. 화사석 받침 밑면에는 이와 대칭되는 앙련을 새겼는데
꽃잎수는 16개이고, 그 끝이 뾰족하고 홑잎의 꽃잎 안에 또 다른 꽃잎새김이 있어 기
둥 밑돌의 복련과는 다른 모양새이다. 화사석은 화사석 받침의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은 것이다. 이 기둥돌도 중간 부분에서 모를 죽였다. 옥
개석은 넓고 낮은 편이고 처마 끝에 반전이 있다. 옥개석 위에는 보주가 놓였다. 이
석등은 규모에 어울리게 장식이 간소하나 대범하고도 웅건한 멋이 풍긴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개성성균관(성균관)
지   정   구  분 국보 127 호
시              대 고려
유              형 유적 서원·향교유적
크              기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성시 방직동
개성 성균관은 개성시 방직동에 위치한 고려시대 992년(성종 11)에 세운 국가 최고 교육기관으로, 현재의 건물은 조선시대(1602~1610년)에 재건한 건물이다. 이곳은 원래 고려의 별궁(別宮)이 있던 곳이었으나, 유교 경전에 관한 사무를 보는 숭문전(崇文殿)으로도 사용되었다가, 1089년(선종 6)에 국자감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고려는 건국 초기 개경에 국가가 운영하는 학교를 세웠고, 992년에는 성균관의 전신인 국자감을 설립하고 여기에 국자학, 대학, 4문학과 율학, 서학, 산학 등 6개 학과를 두고 국가 관리 양성 및 유교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 국자감은 1304년(충렬왕 30)에 국학(國學)으로 개명되면서 대성전을 지었으며, 1310년(충선왕 2)에 성균관(成均館)으로 개명하였다. 이후 공민왕 때 국자감이라 다시 칭하였으나 멀지 않아 다시 성균관으로 불렀다. 조선개국과 더불어 조선 1396년(태조 5) 한양에 성균관을 세우며, 개성 성균관은 향교(鄕校)가 되었으나 그 지위는 다른 향교와 달랐다. 그 이후 1474년(성종 5)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고, 1592년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던 것을 1602년(선조 35)에 같은 위치에 복원하였다.
전체 대지는 경사져 있으며, 건물들은 엄격한 남북 중심축을 기준으로 대칭으로 배치되고, 검약과 소박을 표방하는 유교 윤리에 맞게 엄격하게 꾸며져 있다. 약 1만㎡의 넓은 부지에 영역은 크게 4개로 구분되고, 18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개성 성균관의 배치는 서울 성균관과 그 배치가 다른데, 명륜당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講學)구역이 앞쪽에 있고,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배향(配享)구역을 뒤쪽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이다. 바깥 삼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좌우에 향실(동쪽)과 존경각(서쪽)이 위치하고 있다. 명륜당 앞뜰 좌우에는 학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명륜당 뒤편 내삼문을 지나면 정면에 공자를 제사 지내던 대성전이, 그 앞뜰 좌우에 이름난 유학자들을 제사 지내던 동무와 서무가 자리하고 있다.
성균관의 외삼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민도리계 맞배집으로 홍살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구조는 2고주 5량가의 초익공계 맞배집이다. 내부에는 다수의 기문이 걸려있으며, 바닥은 우물마루로 하였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하였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정면 9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가구는 5량가의 민도리계 맞배집이다. 향실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민도리계 맞배집이다. 존경각 또한 향실과 같은 규모인데, 지붕형태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신문(神門)인 내삼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3량가의 민도리식 맞배지붕의 형태이다.
공자의 위패를 모셨던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구조는 1고주 7량가의 초익공계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전체적인 건물의 모습은 서울 대성전과 비슷하다. 내부는 우물마루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동무와 서무는 각각 정면 14칸, 측면 1칸의 규모로, 구조는 3량가의 민도리계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고려 성균관 건물은 대체적으로 좌우측벽을 전돌로 화방벽을 구성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이외에도 계성사와 10여 채의 부속건물들이 더 있다. 현재는 고려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개풍복령동석불입상
시              대 고려
유              형 구조물 석불류
크              기 높이 2.75m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풍군 해선리
이 석불입상은 고려시대 에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는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에 위치하
였은나, 현재 개성시 방직동으로 이전되어 보존되고 있다.

 



 추가사진
문   화   재  명 관음사대리석관음보살상
지   정   구  분 국보 154 호
시              대 고려
유              형 유물 조소류
크              기 높이 1.2m
출     토      지 개성직할시 개성시 박연리
관음사 <대리석관음보살상>은 고려시대 석조불상이다. 개성시 박연리 관음사 관음굴에 있었던 2개의 돌부처 중 하나를 1975년에 평양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이전하여 보존하고 있고, 나머지 하나는 관음굴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유백색 대리석으로 만든 이 보살상은 1.2m의 그다지 크지 않은 석조불상이지만, 균형잡힌 날씬한 몸매,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 화려한 보관, 구슬을 꿰어 양어깨로 드리운 듯한 영락장식, 얇은 비단처럼 나부끼는 천의 등 요소에서 뛰어난 기량을 자랑한다. 고려시기의 대표적인 불상으로 미술사적 의의가 있는 유물이다

출처 : 북한문화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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