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때 시대상황 좀요..

이순신 장군 때 시대상황 좀요..

작성일 2014.07.21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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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임진왜란 전


내부 상황.

 1. 왕실

 선조는 서자의 아들로 왕위정통권에 문제가 있는 왕이었습니다. 즉, 신권에 왕권이 위협받고 있었죠. 이때 붕당정치로써 이 둘의 세력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이 왕위를 유지하였습니다. 선조 초기에는 동인과 서인. 실권을 잡은 동인들이 정여립 사건을 기반 삼아 중기에는 북인과 남인(임진왜란 발발 직전)으로 나뉘어 당파싸움을 버리는 계기가 되었죠.

 2. 안보

 당시는 진관체제라고하여. 군사적 요충지에 진을 설치하여 소수의 군사를 나누어 주둔시키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는 여진족 등 잦은 국지적인(지역적인) 전투가 많았던 조선으로써는 필연적인 체제였죠. 그리고 큰 군사적 요구가 있다고 하면 그 진들이 시간을 버는 사이에 수도인 한양에서 중앙의 군사를 끌고 가 토벌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체제는 전면전(국가와 국가의 사활을 건 전투)과 전격전(번개같이 빠른 진격을 하는 전투)에는 별다른 대응책없이 모든 진이 각개격파당하는 전략적 약점이 있었습니다.

외부 상황.

 1. 명나라

 내부적으로 부패에 찌들어서 망해가고 있었습니다. 주원장과 영락제까지 일궈놓은 그 기반들을 토대로 발전없이 제자리 걸음만을 반복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죠.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조공이었습니다. 조공을 받는 다는 건 그 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인 국방력을 자랑한다는 소리겠지만, 이 조공을 받은 뒤가 문제였습니다. 한족들의 프라이드로 인해 명나라의 힘을 과시하겠다고, 그 조공 가치에 몇배에 달하는 물목을 사신에게 챙겨주게 하는 이른바 이게 조공무역을 했는데, 이 조공 무역이 나라 경제를 파탄내는데 일조를 하게됩니다. 경제가 파탄이 나도 이 관습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2. 여진

 누르하치의 건주 여진이 강세를 보입니다. 대부분의 여진 부락들을 통일시키죠. 이 부분 역시 명나라가 주목하지 않는 바는 아니였으나, 항상 저자세로 외교하여 꼬박 꼬박 조공을 받치는 누르하치에게 시선을 크게 주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조공 무역으로 건주여진을 더욱 튼실하게 만들었죠.

 3. 일본

 전국시대가 종료되었습니다. 노부가나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전국을 통일합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찾아온 오랜만의 전쟁없는 시기가 이들의 체제를 뒤흔들 것을 걱정했지요. 무력을 가지는 무사계급이 지배계층이기때문에 전쟁이 없다, 무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은 이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기가 어렵다는 이치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 통일을 되었다치더라도, 각 영주간의 상하와 동맹관계에 의한 불완전한 통일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중앙통치라기보단 자치권이 인정된 그러한 통일이었죠. 따라서 이들을 세력하에 완벽히 지배하려면 이들의 군사력의 힘을 빼야만 했습니다. 이에 도요토미는 정리된 내부가 아닌 외부로 시선을 돌립니다. 바로 조선과 명나라였습니다.


이순신의 상황

 일본과의 개전이 얼마남지 않은 1591년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습니다. 13등급을 올리는 파격적 인사였지요. 그것도 진도군수로 부임하려던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2>임진왜란 직 후

 1.왕실

 말 그대로 초토화. 선조는 백성버리고 도망간 무능한 왕으로 낙인 찍혔고, 임해군은 근왕병 모집하다가 배반자때문에 가토의 포로가 됩니다. 광해군은 근왕병 모집을 하는 등 군무를 보았죠. 이를 시기했다는 선조의 말이 있습니다. 그때문에 세자였던 광해군을 내치고 후일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고 했었죠.

 2. 안보

 육군의 경우 전라도 지역빼고 황해도, 충청도, 경상좌도가 일거에 점령당합니다. 이후 적은 평안도와 함경도 일부까지 진출합니다. 여진족 추장 죽이고 승승장구하던 신립은 탄금대 뻘밭에서 기병 운용하며 뻘짓하다가 조총전술에 큰 타격을 입고 5만의 군대도 거기서 궤멸당합니다. 그나마 영토를 온존하고 있던 전라도 지역은 근왕병으로 군대 10만을 모으지만 제대로된 훈련없이 어영부영한 농민들로 이끌어서 간 것일뿐이라 용인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3천 병력에 궤멸당합니다.

 수군의 경우 왜선의 규모를 보고 부산포, 경상좌수사, 경상우수사 모두 전선을 자침시킵니다. 경상도 해군은 싸움 한번 없이 자침으로 모든 세력을 잃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6군인 고바야카와 타카가게 군의 1만5천 병력이 전라도를 점령하기로 되어있었는데, 경상우도의 의병 활동이 격심하여 그 곳을 점령하기 어렵게되자, 충청도로 우회하여 돌아가게 됩니다. 이때 권율의 이치전투에 의해서 1만5천 중 1만 가까운 병력이 궤멸당하는 피해를 입게되고, 전라도 방어선을 지키게 됩니다.


외부 상황

 1. 명나라

 개전 초기 빠르게 북상하는 왜적에 대한 논란이 커집니다. 명나라 조정의 의견은 조선이 일부러 길을 열어주고 있다라고 판단을 했고, 조선이 이같은 행동을 했는지가 맞는 것인지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그렇지 않다고 판명되어 절강성의 왜군을 잡는데에 잔뼈가 굵은 정예병력을 파견하게 됩니다.

 이 부대는 등나무 방패를 사용하여 조총에 대한 대비가 있었던 부대였고, 유정, 이여송같은 장수들이 이를 지휘하게 됩니다.(이 유정같은 경우에는 진상 중의 진상이었는데, 결국 나중에 후금에 의해 전투 중에 목이 잘립니다.) 실제로 강력한 대포 성능(이게 후금로부터 북경의 방어선인 산해관을 지켜온 큰 힘이 되었습니다.)만으로 평양까지 함락시킵니다. 그러다가 고니시의 역습을 받고 승승장구하던 명나라는 주춤하게 되지요. 이 과정에서 소모한 물자와 재원의 양이 막대한 명나라는 사실상 망국 트리 제대로 밟게 됩니다.

 2. 여진

 누르하치가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주겠다고 밀사도 파견합니다. 이때 팔기군이라는 기병전술을 완전히 정립되었죠. 이 것이 후일 일본군을 잡는다는 절강성 정예병력조차도 궤멸시키는 강력한 기병이 되었고, 이미 일본군보다 더 강력한 군대였다고 비춰봐도 손색이 없습니다. 다만 화기 면에서는 부족할 뿐이었지요.

 3. 일본

 도요토미는 대부분의 휘하를 조선으로 보냅니다. 다만 그 중에 믿지 못하는 도쿠가와 같은 경우에는 가장 가까운데 놓고 전공을 세울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순신의 상황.

 선조가 피난가고 평양에서 왜군의 진격이 멈춥니다. 전라도 방어선은 무너지지 않았고, 전라도 수군 활동에 지장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정찰활동의 범위와 횟수를 증가시키고 감지되는 왜적을 기습, 함포전으로 일거에 소탕하는 전략을 수립. 이를 실천합니다.


<3>임진왜란 말

 내부 상황

 1. 왕실

 선조는 평양 수복 후 행궁에서 머뭅니다. 여전히 백성들 사이에 지지는 바닥을 치고 있었죠. 광해군의 지지는 날로 올라가고, 가토에게서 돌아온 임해군은 성질과 횡포를 백성들에게 푸는 통에 광해군 외의 왕실의 지지율은 바닥을 칩니다.

 2. 안보

 육군은 소강상태를 맞이합니다. 다만 명군과 연합하여 한양을 수복하기 위해 행주산성을 점령하여 한양에 대한 교두보를 확보하였다는 점이 중요해졌습니다. 그 밖에 진주성 전투로 전라도 방어선을 다시 한번 지킵니다. 그 뒤로 명군과 왜군 간의 외교전이 펼쳐집니다.

 수군의 경우 이순신 장군이 견내량에 포진한 와키자카의 수군을 한산도로 꿰어 포위 궤멸시키며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그 덕에 적 수군은 육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지역으로는 나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도요토미가 이순신과는 붙지말라는 특명도 내릴 정도였지요.

 이와 같은 수군의 상황 덕에 수륙병진책이 완전히 봉쇄된 일본군으로써는 의병이 들끓는 육지에서 온전히 보급로를 확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휴전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철수를 시작합니다.


외부 상황

 1. 명나라

 똑같은 막장테크 진행 중입니다. 다만 명은 고니시를 통해 나름의 중재책을 제안하는 정도입니다.

 2. 여진

 달라진 바 없습니다.

 3. 일본

 고니시가 중간에 내용을 바꾸어, 도요토미에게 전달하고 그덕에 도요토미는 조선 절반을 자신이 가질 줄 알았고, 명에서는 또 심유경이 내용을 조작하여, 왕에 봉해지는 정도로 하고 이 전쟁을 마무리하는 줄 압니다.


 이순신의 상황.

 한산도 대첩 이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됩니다. 삼도수군통제사라 함은 경상, 충청, 전라 이 3개도의 수군을 모두 권장할 뿐만 아니라 70여개나 되는 고을의 지배권을 가지는 직책입니다.


<4>정유재란

 1. 왕실과 이순신

 선조에게 이순신은 눈엣가시입니다. 자기보다 더한 권력을 누리며, 무과조차도 자신이 치르겠다고 하는 오만방자함에 죽이고 싶어합니다. 그때 가토가 상륙한다는 첩보가 들어오고, 이 정보에 의해 이순신에게 이르러 부산포에서 이를 치라고 합니다. 허나 이순신은 첩보가 틀렸을 경우 부산포에 주둔한 적선 400척에 대항해 만든 150척의 함대를 잃을 것을 걱정합니다. 즉, 병력이 상륙되는 것보다, 수군이 제해권을 잃었을때의 상황을 크게 걱정합니다. 따라서 이를 항명합니다. 그런데 진짜로 가토가 상륙합니다. 그 덕에 이순신은 고문당하고 백의종군하게 됩니다.

 2. 초기 안보 상황

 왜군은 임진왜란때 있던 오점을 극복하려 노력합니다. 자신의 배후를 노리던 전라도 방어선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출진하려 합니다. 실제로 그게 성공하고 진주성같은 경우 격전 이후 관민 모두가 전사할때까지 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령과 직산에서 패배함으로써 그들 군대를 겨울을 피하기 위해 다시금 남하하여 해안가를 둘러 왜성을 쌓고 주둔을 시작합니다. 이를 권율과 사명정이 지속적으로 공격하나 별다른 소득이 없이 소모전만 펼칩니다.

 왜수군은 크게 보강되었고, 이순신이 없는 틈을 타, 부산포로 진군하는 원균의 수군 1만명을 부산 앞 칠천량에서 기습공격합니다. 이때 당시에 가덕도에 상륙 중이어서 판옥선은 크게 망실되었으나, 1만 병사가 수장되지는 않습니다. 그냥 추격당하면서 차례차례 왜 수군에 의해 칼맞고 도륙당했습니다. 이 와중에서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가 분전하다가 죽었으며, 이때 다행히 경상좌수사 배설이 자신의 모든 휘하에 12척의 배를 이끌고 도주합니다.

 3. 일본 상황.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건강이 많이 안좋아집니다. 그 외에 명나라가 자신이 이행한 조건을 무시한대에 대해서 분노하여 강화가 깨지는 바람에 가토와 고니시가 상륙하여 정유재란을 일으킵니다.

 4. 후기 안보와 이순신의 상황

 이순신은 다시 통제사가 됩니다. 배설이 가지고 돌아온 12척의 배로 싸울 방법을 모색하던 중, 명량을 발견하고 적을 유인 이를 섬멸한 전략을 세웁니다. 이 것이 성공하고 적 수군의 서진을 막습니다. 다만 제해권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서 대첩이라고 하진 않습니다. 이 후 이순신 장군은 좁은 견내량을 틀어막고 외해에 척후를 자주 띄워 지키기만 할뿐 나아가진 않으며, 수군의 세력 균형을 맞추고 수륙병진을 틀어막는 것에 최선을 다하기만을 하지요.

 그 뒤 얼마지나지 않아 도요토미가 사망합니다. 일본군은 일제히 철수를 시작하지만, 이때 고니시는 이순신의 해군때문에 순천에서 고립됩니다. 이 고니시를 미끼로 견내량을 비우고 노량에서 매복하는 전략을 수립하고 적을 유인하여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줍니다. 그러나 이때 이순신 장군은 전사합니다.


간략하게 적어봤습니다. 밑에는 참고할 사항입니다. 조금은 다르게 알만한 국사책 이외의 내용들이니까 참고하셔서 보세요.


1. 이순신 장군은 인자한 장군이 아니다. -> 왜적에게 총탄과 칼맞고 죽은 병사보다 이순신이 세운 군법과 군기강을 어겨 참수당한 병사가 더 많습니다.(탈주병이 어마어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왜군은 캐낼 정보를 캐내면 깔끔하게 참수시켰습니다. 불멸의 이순신처럼  왜군 살려주고 미래를 위해 협조한다고 설득하며, 노량에서 왜군 궤멸시키는 이중인격자처럼 표현하는 건 틀린 겁니다.

2. 원균은 쓰레기 장수가 맞다. -> 칠전량 직전에 술마시고 만취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덕에 각 수사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퇴각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상륙당한 곳에서 추격당해 도륙당했을 뿐이지요. 그리고 난중일기에 보면 원균때문에 못해먹겠다는 대목도 나올 정도로 항명을 밥먹듯했고, 전공에 눈이 멀어 아군 병사까지 벨 정도였습니다. 그 덕에 전사상자가 없던 전투에서 부상자 한 분 만드셨습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비운의 명장으로 나온 건 소설이기에 나올 수 있는 포장입니다. 더 재밌는 건 이런 사람이 일등공신입니다.

3. 명군의 진상 장수 유정은 실제 명장이었다. -> 조선에서는 목숨걸기 싫어 진상부렸지만 명장입니다. 그러나 은퇴하고 노년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누르하치를 토벌하기 위해 절강병을 지휘하지만 도륙당하고 전장에서 목이 잘립니다.

4. 와키자카는 일본인들도 잘 모른다. -> 일본 네티즌 대다수가 불멸의 이순신때문에 라이벌로 나온 와키자카라는 장수 있는 걸 알았더랍니다. 실존하는 것도 그때 알았답니다. 그리고 이 장수 자체가 육군 장수입니다. 앞서 말했지만 용인전투에서 기병 3천끌고 10만 궤멸시켰습니다.

5, 도도 다카도라는 수군 명장이다. -> 일본이 자랑하는 수군 장수입니다. 다만 이순신과 판옥선의 함포사격 능력에 완전 바보되셨지요. 그러나 칠천량에서 기습하는 시기 등을 봤을때 이를 주도한 도도의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6. 조선 수군에는 이순신빼고는 정말 인물이 많이 없었다. ->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의 기함이 앞으로 나아가 적의 전선을 다 부시고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들어낼때까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사 후 통제사 자리를 넘겨받은 입부 이순신조차도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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